요택(遙澤)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가들(학자포함)에게 수수께끼 같은 지명이 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는 도중에 만나는 요택이다.

 

이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있어 왔으나

아무도 시원스레 바로 여기다 하고 제시한 적이 없다.

 

이렇게 누구도 요택을 쉽게 찾지 못하는 것은

옛날에 있던 요택이 기후가 바뀌어 없어진 탓이 아니다.

 

다만 엉뚱한 데서 찾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古요수는 지금의 조백하(潮白河)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今요하의 서쪽에 찾으려고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今요하는 古요수가 아니므로

당연히 古요수인 지금의 조백하 하류 가까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요택 관련 기사들을 일부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보장기 4년(645) 3월조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報子弟之讎 高句麗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

 

帝가 정주(定州)로 갔다.

시신(侍臣)에게 일러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이다...(중략)..."

 

帝가 정주(定州)를 출발할 때 친히 활과 화살을 메고 비옷을 안장 뒤에 손수 묶었다.

 

이세적의 군사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장해

마치 회원진(懷遠鎭)을 나서는 것처럼 하고

몰래 군사를 북의 용도(甬道)로 나아가게 해 아군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당 태종은 정주(定州)에 태자를 머무르게 하고 군을 지휘하여 고구려로 갔다고 한다.

 

요동은 본래 중국땅이라 하는데 이것은 허언이다.

 

고구려 원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말일 뿐이다.

 

[사기] 소진전에서 진개 동정전 燕地 설명에 「燕 東有朝鮮遼東」이라 하였고,

[구당서] 이밀전에서도 「遼水之東 朝鮮之地」라고 하였다.

 

요동은 본래 조선지였다.

 

회원진은 여수전쟁에서 수군 집결지 탁군(涿郡)에서 집결하여 출진할 때

양식을 개인지급으로 했다던 곳으로 [통전] 주군전에 의하면

수 양제가 설치한 요서군 속현이 요서와 회원, 노하 세 곳이라 한다. 

 

 

 

 

 

<定州>

 

 

 

 

왼쪽 아래 정주가 보인다. 

 

고대 낙랑의 중심지였던 보정시의 서남이다.

 

 同  4월조

 

『世勣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 攻盖牟城 拔之 獲一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

 

 

<이세적李世勣>이 통정진(通定鎭)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道宗>이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데리고 전봉이 되어 나아가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 아군을 깨뜨려 수천 명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포로 만 인과 군량 10만 석을 노획하였다.

 

그 땅을 개주(盖州)로 하였다.

 

<장량張亮>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쳤다.

 

성은 4면이 절벽이고 오직 서문만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은 군을 이끌고 밤에 이르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올랐다

 

 

 

 

북경시내 동쪽의 通州(통주)가

여수전쟁시 수의 양제가 설치했던 통정진(通定鎭)으로 비정된다.

 

신성(新城)은 연산도 입구에 위치한 고구려의 목봉쇄용 성이었다.

그래서 신성(新城)을 고구려의 서변 요해처라 한 것이다.

 

 

<통정진과 신성>

 

북경시내 동쪽의 통주가 통정진으로 비정되고,

그 동남에 요동 안평이 보이며, 가운데 위쪽에 고구려 신성이 보인다.

 

가운데 오른쪽에 흥륭(興隆)이 있는데 현도군 고구려현의 중심지로 보며,

밀운을 끼고 흐르는 강이 潮河와 白河이고

이 두 강이 하류에서 합쳐서 조백하가 되고 이 조백하가 요수이다.

 

흥륭 서쪽을 흐르는 강이 小水이며

현도군 고구려현은 소수에 의지해 거한다던 소수맥(小水貊)으로 본다.

 

또 이곳은 전한 무제가 BC108년에 고구려와 조선을 멸하고

각각 현도군과 낙랑군을 두었다고 한 바로 그 고구려이자 '고리국'이었던 것이다.

 

 

동 5월조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淖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 布土作橋 軍不留行 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 將四千騎逆之...(후략)』 

 

(비사)성이 함락되자 남녀 8천 구가 죽었다.

 

이세적이 요동성 아래로 나아갔다.

 

帝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뻘밭 2백 리에 인마가 불통이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깔고 다리를 놓아

군사들이 지체하지 않고 늪의 동으로 건넜다.

 

왕이 신성(新城)국내성(國內城)의 보기 4만을 내 요동을 구했다.

 

강하왕 <도종>이 4천 기를 이끌고 역습하였다

   

 

<이세적>은 이미 요동성으로 먼저 갔고 당 태종이 뻘밭 2백여 리 요택에 이르러

장작대장(현대의 공병감) <염입덕>을 시켜 공사를 하여 통과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으로 건넜다는 것은 트릭이다.

남에서 북으로 건넌 것인데 今요하를 상정하고 방향을 바꾼 것이다. 

 

 

[구당서] 염입덕전에

 

「十八年 從征高麗 及師旅至遼澤 東西二百餘裡泥淖 人馬不通.

立德填道造橋 兵無留礙 太宗甚悅」

 

이라 하여 요택 크기가 동서 2백여 리나 되었다 한다.

 

남에서 북으로 진행하면서 앞에 가로 펼쳐진 요택을 동서로 말한 것 같다. 

 

 

同  5월조

 

『帝度遼水 撤橋以堅上卒之心 軍於馬首山...(후략) 』

 

당 태종이 요수를 건너고는 다리를 걷어버렸다.

 

군사를 마수산(馬首山)에 주둔시켰다  

 

   

 

마수산은 古요수인 지금의 조백하 하류 북안에 있을 것이다.

 

마두라는 지명이 이 근방에 두 곳이 보인다.

 

당 태종이 군사를 주둔시킨 마수산(마두산)은 통정진과 안평 사이에 있었다.

 

 

 

 同  5월조

 

『李世勣進攻白巖城西南 帝臨其西北...(중략)...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이세적>과 당 태종이 백암성을 치자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항복하고,

당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하고 <손대음孫代音>을 자사로 삼았다.

 

 

 

 

 

백암성은 [구당서]에서는 白崖城(백애성)이라 하였다.

 

 

역시 현대지도에도 보인다. 

 

 

 

 

<백암성>

 

오른쪽 위에 분명히 東白崖(동백애)가 보이고 가운데 密雲(밀운)이 보인다. 

 

 

<백애와 대성자>

 

오른쪽 위에 보면 백애가 보이는데 '백'자가 글자가 다른 것 같다(木변?).

 

분명히 밀운의 약간 동북쪽에 있다.

 

그리고 백애의 약간 서남에 대성자가 보이는데

바로 이 大城이라는 것이 백암성일 것이다.

 

 

<백암성과 신성>

 

아래 가운데 오른쪽에 대성자가 보이고 그 서남에 밀운이 보인다(까만점).

오른쪽 위 신성자는 고구려 서변요해처라 하던 신성이다.   

 

 同  5월조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耨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중략)...

建安兵弱而糧小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 ‘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 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중략) 』

 

帝가 안시성(安市城)으로 갔다.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아군과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중략)...”...

건안(建安)의 군사는 약하고 군량도 적어 만약 불의에 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대가 먼저 건안을 치는 것이 좋겠다.

건안이 함락되면 이는 곧 안시가 내 복중에 있는 것이니 이는 병법에 소위

 ‘성 중에는 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그것이다“.

 

(이세적이) 답하기를

 

”건안은 남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으며 아군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어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약 고구려가 아군의 양도를 끊으면 이를 어찌 하시렵니까?“ 하였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자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아군과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성은 안시성과 건안성뿐이다.

 

「建安在南 安市在北 〉 건안은 남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다」고 하는데

「今踰安市 而攻建安 〉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공격하다가」라고 하는 것을 보면

건안성은 안시성의 동쪽에 있어 건안성을 공격하다 군량이 있는 서쪽의 요동과의

군량 수송로[糧道]가 끊기면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안시성과 건안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최후의 보루이다. 

 

안시성과 건안성이 무너지면 바로 도성인 평양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勑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縑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至遼東度遼水. 遼澤泥潦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翦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鞘 以助役』

 

(시일이 흘러) 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군량이 소진되려 해 칙하여 군사를 거두게 하였다.

 

먼저 요주(遼州)와 개주(盖州)의 주민을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군대를 시위하고 회군하는데 성 안에서는 모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성주가 성에 올라 절을 하며 예를 표하자 당 태종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겹실직조 비단 백 필을 주어 그 주군을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기 4만을 거느리고 후위가 되게 하고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넜다.

 

요택에는 진흙과 물로 수레와 말이 다닐 수 없어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만 명을 데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았다.

 

제도 몸소 말채찍으로 섶을 묶어 일을 거들었다. 

 

『冬十月 帝至蒲溝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勑燃火於道以待之. 凡捗玄菟橫山盖牟磨米遼東白岩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 徙遼盖岩三州戶口 入中國者七萬人...(후략) 』

 

겨울 10월에 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 폭풍과 눈으로

사졸들이 물에 젖어 죽은 경우가 많아 길에 불을 피워 추위를 막게 하였다.

 

현도(玄菟), 횡산(橫山), 개모(盖牟), 마미(磨米), 요동(遼東), 백암(白岩),

비사(卑沙), 협곡(夾谷), 은산(銀山), 후황(後黃) 등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 개주, 암주 등 세 주의 주민 7만을 당으로 옮겼다...(후략)

 

 

포구에서도 비슷하게 고생을 한 듯하다.

회군하는 길이므로 포구는 당연히 요택보다 남쪽이다.

은산(銀山)도 현대지도에 보인다. 북경시내 북이다.

여당전쟁의 전장이 대체로 북경의 동북부터 천진 북까지였기 때문이다.  

 

 

<은산>

 

 

왼쪽 위에 은산이 보이고, 북경시내 동쪽에 통주가 있으며, 아래에 서마두가 보인다.

오른쪽 위의 계는 요동성으로 보며, 그 동쪽의 평안성이 건안성으로 보이고,

아래 봉황산이 안시성이 있는 산이라는 설이 있다[열하일기].

이 봉황산을 지금의 압록강 하류의 의주를 지나 책문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안시성은 朝代記에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지금의 탕지보이다.'

라고 하였는데 지금 하북성 개평부 동북쪽으로 70리쯤 가면

天山이라 불리는 언저리에 탕지보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안시성이다. 

 

 

가운데 위의 동그라미는 평곡을 감싸고 흐르는

구하(소수)와 그 동쪽 지류(남소수)를 보여주고 있다.

밀운의 아래로 흐르는 조백하가 요수이다.

 

 

 

<요택과 당 태종 이동로>

 

전한 요서군 신성(新城)의 동남 40리에 있는 雄縣(웅현;雄州)과 文安(문안),

覇州(패주) 등지와 子牙河(자아하;타원 내 오른쪽 굵은 선)로 둘러싸인 소택지를

「延若澱方數百裏」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당 태종의 「遼澤泥淖二百餘里」

에 정확히 해당하고 동서 또는 남북 폭 ‘二百餘里’가 면적으로는 ‘方數百里’인 것이다.

 

이것은 지도에서 보다시피 현대지도에도 소택지로 바로 표시(타원 내의 점)되어 있다.

 

이 소택지의 서남에는 白洋淀(백양전)이라는 호수와

그 주변에도 소택지가 발달해 있다.

 

淀(전,정)이란 깊지 않은 물이라 한다.

 

요택에는 이 백양전 주변지역까지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 태종은 정주에서 출발하여 鄚州(막주)와 文安 인근을 지나 

永淸(영청), 廊坊(낭방;安次) 방향으로 갔다가 그 역의 경로로 후퇴한 것 같다. 

이 요택의 크기는 대략 동서폭 200리 정도 될 것 같다. 

 

 

 

<요택과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및 고구려 수도 평양> 

 

 

참고 <義慈(593-660) 一代記>

 

-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의 아들로 태어 남(593)

 

- 왜의 舒明천황으로 즉위(629)하여 641년까지 일본열도를 다스림

 

 

- 40대 후반의 나이에 백제 왕이 되는 의자 (641)

 

 

- 정변이 발생한 백제; 기존 권력 세력을 몰아내는 의자왕 (642)

 

 일본서기 황극 원년 1월 (642)
(봄 정월 丁巳 초하루) 乙酉

백제에 사신으로 갔던 大仁 <阿曇連比羅夫>가 筑紫로부터 驛馬를 타고 달려와

“백제국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弔問使를 받들어 보냈는데,

저는 조문사를 따라 함께 筑紫國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례식에 奉仕하고자 하여 혼자서 먼저 왔습니다.

런데 그 나라는 지금 매우 어지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황극 원년 2월 (643)

2월 丁亥 초하루 戊子 아담산배련비라부(阿曇山背連比羅夫),

초벽실사반금(草壁吉士磐金), 왜한서직현(倭漢書直縣)을

백제 조문사의 처소(處所)에 보내어 그 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가 대답하기를

 

“백제국왕이 저희들에게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日本 조정에서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제 조문사의 從者 등이

“지난 해 11월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자왕은 기존의 귀족세력을 몰아내고 왕족 중심으로 권력을 구성한다.

 

 

- 옛 가야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하는 백제 (642.7)

 

의자왕 2년(서기 642)
가을 7월,

임금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백제는 의자왕 2년 7월에 옛 가야지역을 공략하여 40여개의 성을 함락시킨다.

 

 

-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백제; 

   당항성을 공격하는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 외교로 대응하는 신라 (642.8)

 

신라 선덕왕 11년(서기 642)
8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黨項城, 경기 화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임금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고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함께 당항성을 공략한다. 신라는 외교전으로 대응한다.

 

이 공격으로 신라 한산주의 군사가 발이 묶이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무너지는 대야주;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백제 (642.8)

 

의자왕 2년(서기 642)

 

8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성주인 품석(品釋)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도에 보냈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와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신라 선덕왕 11년(서기 642)

이달(8월)에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이 병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都督)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 죽죽(竹竹)ㆍ용석(龍石) 등이 그곳에서 죽었다. 

 

 

 옛 가야 40여개 성을 무너뜨린 백제는 대야성 마저 무너뜨린다.

 

<대야성>

 

 

-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을 추진하려는 당태종

 

당태종의 재위기간 고구려와의 전쟁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은

대체로 3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640년을 고비로 고창국과 돌궐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어

여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둘째, 때마침 642년 영류왕이 연개소문에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벌의 명분이 생겼으며

셋째, 643년 신라의 요구가 절실하여 대외적인 명분이 분명해졌다.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는 관료들과의 의견수렴과정도 필요했다.

 

태종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언급하였을 때 대다수의 관료들은 전쟁을 반대하였다.

 

특히 수대에 고구려와의 전쟁을 경험하였던 구 관료들의 반대는 거세었다.

 

구 관료들의 반대를 이기고 전쟁을 결정하기 위해서

태종은 태종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관료들을 정책결정과정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재상부를 확대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태종을 지지하였던 관료들은 "참지정사(參知政事)" "참예조정(參預朝政)"의 이름으로

정사당의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이들의 지지는 결국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7세기 중엽 唐 太宗의 對高句麗戰 전략 수립과정", 방향숙, 2008)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의 의지가 강했다.

 

반면 수나라 시기에 고구려 정벌의 실패를 경험한 당나라의 관료들은

고구려 정벌을 반대한다.

 

관료들의 반대에 부딛힌 당태종은 "참지정사", "참예조정" 같은 이름으로

당태종을 지지하는 관료들을 정사당회의에 참여시켜 고구려 정벌을 추진하려고 한다.

 

 

- 진대덕을 고구려로 보내

  고구려 정벌에 대한 반대여론을 역전시켜 보려는 당태종(641) 

 

고구려 영류왕 24년(서기 641)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왔다.

<대덕>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여,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임금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고구려 영류왕 24년(서기 641)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수만 명의 병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은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東萊)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山東)의 여러 고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

 

 

<진대덕>에 대해서는 정탐이라는 목적만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진대덕>은 당나라가 고구려의 사정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며 고구려도 당에게

고구려는 당이 정벌할 필요성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상이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에게 많은 정보를 오픈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진대덕의 보고 내용은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이에 태종 역시 전쟁이 긴급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있다.

 

 

- 연개소문의 쿠테타;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를 장악하는 연개소문 (642)

 

<개소문 열전>

 

개소문(蓋蘇文)[혹은 개금(蓋金)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泉)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였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東部)[혹은 서부(西部)라고 한다.] 대인(大人)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뭇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그 직을 임시로 맡을 것을 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쫓겨나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잇게 되자 흉포하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논의하여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누설되고 말았다.

 

 

고구려 영류왕 25년(서기 642)

 

임금이 동부대인(東部大人) 개소문(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다.

11월, 당 태종은 임금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의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대대로가 죽자 아들인 연개소문이 장성책임자가 되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다.

 

 

-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자 고구려 정벌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된 당태종 (642)

 

<개소문 열전>

 

당 태종이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멋대로 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니,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지킬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짓을 더욱 방자하게 하고 난 뒤에 나라를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자

관료들이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을 만류할 수 없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결정한다.

 

 

-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자 위기에 빠진 신라;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하는 신라 (642)


신라 선덕왕 11년(서기 642)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였다.

 

앞서 대야성이 패배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얼마가 지난 후에야 말하였다.

“슬프구나!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손에 넣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곧장 임금을 찾아뵙고 말하였다.

“제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병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복수하고자 합니다.”

임금이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高臧, 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기에,

병사들로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한 뱀과 돼지처럼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병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었다.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병사를 내보낼 수 있으리라.”

 

춘추가 대답하였다.

“저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고자 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좋게 지내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저는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고장>이 그 말의 공손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춘추>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임금은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진군하게 하였다.

 

유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한강(漢江)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에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주어 돌려보냈다.

 

 

고구려 보장왕 2년(서기 643년)

가을 9월,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백제가 40여 개의 우리 성을 점령하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하여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하니,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주기를 바랍니다.”

 

 

백제가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자 신라는 위기에 빠졌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을 만나 고구려와의 동맹을 추진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무리한 요구로 동맹은 이뤄지지 않는다.

 

신라는 다음해에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동맹을 요청하고

당나라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 대야주를 폐기하고 압량주를 세우는 신라; 압량군주가 된 김유신 (642)

 

신라 선덕왕 11년(서기 642)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경북 경산) 군주로 삼았다.

 

대야주가 무너지자 신라는 압량주를 세운다. 그리고 김유신은 압량군주가 된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백제 (643)

 

의자왕 3년(서기 643)

3년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신라의 동맹요청을 받아들이는 당태종 (643.9)

 

신라 선덕왕 12년(서기 643)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수십 개의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군대를 연합하여 기필코 우리나라를 빼앗고자

이번 9월에 크게 병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리 되면 우리나라의 사직(社稷)은 보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보려 하오니,

약간의 병사라도 빌려주어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 신라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당하는 것을 참으로 애닯게 여겼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돌아서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너희 나라를 집어삼켜 땅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는구나.

 

너희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써 나라의 멸망을 면하려고 하는가?”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일의 사정이 궁하고 계책도 다하여,

오로지 대국(大國)에게 위급함을 알려 나라가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변방의 군대를 조금 일으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곧장 쳐들어가면 너희 나라의 위급함은 해결이 될 것이니,

1년 정도는 포위가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후 군을 계속해서 보내지 않을 것을 저들이 알게 되면

도리어 멋대로 침략을 할 것이다.

 

그러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스러워지고, 너희 나라도 편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나는 또한 너에게 수천 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다.

 

두 나라의 병사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세우고 벌여 놓으면 그

들이 보고서 우리나라의 군사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망갈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난잡하게 섞여 서로 즐기기만 하고 있으니,

나는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병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기습하겠다.

 

그런데 그대의 나라는 여인을 임금으로 삼았기에 이웃나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주인이 없어지면 도둑이 들끓는 것처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내가 왕족 중의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그가 혼자서는 왕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마땅히 병사들을 보내 보호하면서,

너희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잘 생각해 보게나.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가?”

 

사신은 다만 “예.” 라고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황제는 그의 됨됨이가 어리석고 못나서,

병사를 청하고 위급한 사정을 고할 만한 인재가 아님을 탄식하였다.

 

 

고구려와의 동맹교섭이 실패한 후 신라는 당나라로 동맹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낸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신라의 동맹요청을 받아들인다.

 

이 사신 접견에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인 임금(선덕여왕)을 폐하고 왕을 직접 임명하여 파견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당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앞서 도독부로

고구려, 신라, 백제를 통치하는 방침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항성을 공격하는 백제 (643.11)


의자왕 3년(서기 643)

겨울 11월, 임금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는데,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마침내 병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德曼,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철수하였다.

 

 

백제는 신라가 문제만 생기면 당나라로 달려가는 것을 막기위해

당항성을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이미 사신이 떠났다. 백제는 군대를 철수한다.

 

 

 

-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조서를 보내는 당태종;

   따르지 않는 연개소문 (644)

 

신라 선덕왕 13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들려 보내어 고구려에게 말하였다.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조공을 빠뜨리지 않으니,

너희들과 백제는 즉시 병사를 거두어야만 한다.

만약 또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내년에 반드시 병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그러자 개소문(蓋蘇文)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원한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이 이미 오래 되었다.

예전에 수나라가 잇달아 침범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오백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들이 땅을 돌려주고 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이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하였다.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 이제 와서 따지는 것입니까?”

개소문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당태종은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조서를 보내고 

연개소문이 조서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 적고 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 걱정없이 백제를 공격한다.

 

 

- 백제 사신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조서를 보내는 당태종;

  사죄하는 의자왕 (644.1)

 

의자왕 4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을 양국에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임금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당태종은 백제에게도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조서를 보낸다.

 

의자왕은 당나라에게 사죄한다.

 

 

 

- 태자가 된 부여융 (644)

 

의자왕 4년(서기 644)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부여융은 615년생으로 태자 즉위시 나이는 30세이다.

 

부여융은 미후성을 비롯한 40여개 성을 함락시킨 전투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공로로 태자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 백제의 일곱 성을 빼앗는 김유신 (644.9)

 

의자왕 4년(서기 644)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일곱 성을 빼앗아갔다.

 

 

<김유신 열전>

 

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있다가 선덕왕 13년(서기 644)에 소판(蘇判)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ㆍ성열성(省熱城)ㆍ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개의 성을 치게 하니, 유신이 크게 이겼다.

 

이로 인하여 가혜(加兮)의 나루를 개설하였다.

 

 

압량군주가 된 후 2년만에 김유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상태로 

당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는 고구려에 대한 부담없이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유신은 낙동강변의 일곱 을 빼앗는다.

 

 

 

- 매리포성에서 승리하는 김유신 (645.1)

 

<김유신 열전>

 

을사년(서기 645) 정월에 돌아와 미처 왕을 뵈옵지도 못하였을 때,

봉인(封人, 국경을 지키는 관리)이 백제의 대군사가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전하였다.

 

왕은 다시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듣자 즉시 말을 몰았다.

 

처자도 만나지 않고 백제군을 맞받아쳐서 쫓아버리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군이 국경선에 주둔하여 크게 군사를 내어

우리를 침략할 것 같다는 급보가 있었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하였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오기 전에 방비하길 바라오.”

유신은 또다시 집에 들르지 못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김유신이 낙동강변의 일곱 성을 빼앗고 서라벌로 돌아오자

백제는 매리포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매리포성을 빼앗기면 서라벌이 백제의 공격 사정권에 들어서기 때문에

김유신은 쉬지 못하고 매리포성으로 진군한다.

 

김유신은 매리포성에서 승리한다.

 

* 매리포성 :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추정.

일반적으로 매리포성은 경남 거창이나 밀양시 삼랑진읍으로 비정된다. 

645년에 신라는 낙동강 주변의 성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신라가 거창까지 진출하였을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 당나라의 일원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내리는 당태종;

   조서를 거부하는 의자왕 (645.2)

 

전에 신라의 표에 이르기를 왕과 고려가 매번 군사를 일으켜

내가 말한 바를 지키지 않고 함께 신라를 침공하였다. 

 

짐이 반드시 왕과 고려가 협계(協契)를 맺었다고 의심하였다. 

 

지금 왕의 표를 보고 강신에게 물어

왕과 고려가 아당을 맺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바라는 바와 잘 부합된다.

 

강신이 또 왕의 뜻을 말하기를

군대를 동원하여 관군과 함께 흉악을 정벌하기를 원한다.

 (주보돈, <<文館詞林>>에 보이는 한국고대사 관련 외교문서,

경북사학 15, 1992, 9쪽)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백제가 참여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의자왕은 당태종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

 

 

- 1차 고당전쟁;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킨 후 안시성으로 진군하는 당나라

 

고구려 보장왕 4년(서기 645)

 

봄 정월,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황제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여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국토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시해 당한 왕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 구석구석까지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남은 힘을 가지고 이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신의 손으로 매달았다.

 

이세적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드디어 당나라의 1차 고구려 정벌이 시작되었다.

 

당나라는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킨 후 안시성으로 진군한다.

 

 

 

- 1차 고당전쟁;

  15만의 병력을 안시성으로 보내는 연개소문, 주필산 전투에서 패하는 고구려

 

고구려 보장왕 4년(서기 645)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자,

북부욕살(北部?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南部?薩) 고혜진(高惠眞)이

우리의 군대와 말갈군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안시성으로 당나라군이 진군하자 연개소문은 15만의 병력을 모아 안시성으로 보낸다.

 

하지만 15만의 고구려군은 주필산 회전에서 당나라에게 참패한다.

 

 

 

- 1차 고당전쟁;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고 철군하는 당나라

 

고구려 보장왕 4년(서기 645)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차츰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성 높이를 더 올려서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예닐곱 차례씩 싸움을 벌였다.

 

당나라 군사의 돌격 수레와 포석이 누대와 성 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나라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허물어지며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바로 이때 <부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우리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고,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

 

황제는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므로,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와 개주의 주민을 선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고,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내려주어 임금을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황제는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는데,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에게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에 섶을 묶어 이 일을 도와주었다.

 

 

 

당나라는 안시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하고 날씨가 추워지자 군대를 철수한다.

 

 

 

- 김유신의 활약으로 일곱 성 공략에 실패하는 백제 (645.5)

 

의자왕 5년(서기 645)

 

여름 5월, 임금이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병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범하였다.

 

<김유신 열전>

 

(선덕왕 14년, 서기 645년)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군이 국경선에 주둔하여 크게 군사를 내어

우리를 침략할 것 같다는 급보가 있었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하였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오기 전에 방비하길 바라오.”

유신은 또다시 집에 들르지 못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이때에 그 집안 사람들이 다 문 밖에 나와 기다렸는데,

유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오십 보쯤 지나 말을 세우고 집의 장(漿)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시고는 말하였다.

“우리 집의 물맛이 예전 그대로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국경선에 이르니 백제인들이 우리의 진영을 보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이내 물러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벼슬과 상을 더해 주었다.

 

 

 

백제의 대군이 신라 서쪽 변경의 일곱성을 공격하여 빼앗는다.

 

김유신이 서쪽 국경으로 가서 진영을 설치하자 백제군이 물러난다.

 

 

 

- 신라의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을 공격하는 의직;

백제군을 물리치는 김유신 (647.10)

 

의자왕 7년(서기 647)

 

겨울 10월,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에 주둔하고,

병사를 나누어 감물(甘勿)과 동잠(桐岑)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장수와 병졸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깨뜨리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신라 진덕왕 원년 (서기 647)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무산(茂山)ㆍ감물(甘勿)ㆍ동잠(桐岑)의 세 성을 포위했으므로,

임금이 유신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막도록 하였다.

 

그들은 힘겹게 싸우다가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거칠게 싸우다가 죽으니,

여러 병사들이 모두 힘을 내어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의직>이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을 공격한다.

 

의직은 무산성을 3천명의 병력으로 공략하는데

유신의 부대는 백제군 3천명을 전멸시킨다.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 및 압량주>

 

 

 

 

- 요거성 등 10개성을 함락시키는 백제; 백제군을 몰살시키는 김유신 (648.3)

 

신라 진덕왕 2년(서기 648)

3월,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임금이 이를 염려하여 압량주 도독 유신에게 명하여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유신은 장수와 병졸들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진군하였다.

 

의직이 막아서자 유신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夾擊)하였다.

 

 백제 병사가 패하여 달아나므로, 유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을 주되 공적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의자왕 8년(서기 648)

 

봄 3월, <의직>이 신라 서쪽 변경의 요거(腰車)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의직>의 백제군이 요거성을 비롯한 10개성을 빼앗는다.

 

백제군은 요거성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이는데

분위기상 김유신이 백제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요거성으로 유인한 것 같다.

 

김유신은 <의직>의 부대를 전멸시키고 대야성으로 진격한다.

 

 

<요거성, 독산성, 옥문곡 및 대야성>

 

 

 

- 대야성으로 진격하는 김유신,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하여 승리하는 김유신

  (648.4)

 

의자왕 8년(서기 648)

여름 4월, 옥문곡(玉門谷)으로 진군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막아서 두 번 싸워 크게 패하였다.

 

 

<김유신 열전>

 

대야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반격하여 대항하였다.

 

거짓으로 패하여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달아나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렀다.

 

백제는 이를 얕잡아보고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왔다.

 

그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요거성에서 승리한 김유신은 대야성으로 진격하는데

이때 신라는 독산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독산성을 함락시킨 김유신은 옥문곡을 거쳐 대야성으로 진군한다.

 

옥문곡에 군사들을 매복시킨 김유신은 대야성을 공격하다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한다.

 

신라군은 옥문곡에서 백제장수 8명을 사로잡고 백제군 1천명을 죽인다.

 

 

 

악성까지 남부 가야지역을 회복하고 진례를 장악하는 김유신

 

<김유신 열전>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었는데

군무에는 뜻이 없는 듯이 음주와 풍악으로 수개월을 보냈다.

 

주민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로 여기고 비방하기를

 

“백성들이 편안하게 있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번 싸워 볼 만한데

장군이 게으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을 부릴 때가 되었다 여기고 대왕께 고하였다.

“지금 민심을 살펴보니 일을 할 만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싸움을 보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왕이 말하였다.

“작은 힘으로 큰 세력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할 것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덕이 떠나버려

주(周)의 열 명의 신하가 한 마음 한 생각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유신은 드디어 고을의 병사를 뽑아 조련하여 적진으로 갔다.

 

대야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반격하여 대항하였다.

 

거짓으로 패하여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달아나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렀다.

 

백제는 이를 얕잡아보고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왔다.

 

그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

 

그리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공을 논하여 유신에게 이찬으로 벼슬을 높여주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유신은 다시 적의 경내에 들어가서 진례(進禮) 등의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백 명을 생포하였다.

 

춘추가 당에 들어가 병력 20만을 얻기로 하고 돌아와 유신을 만나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천명에 달려서인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소.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의 위엄을 빌어,

두 번을 백제와 크게 싸워서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유골을 향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행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신라는 악성(경남 하동군 악양면) 등 12개성을 빼앗으며 남부 가야 지역을 회복한다.

 

또한 독산성을 차지한 김유신은 무산성을 거쳐 적암성(무주?)을 함락시키고

진례(금산)까지 진출한다. 

 

<악성, 적암성 및 진례>

 

 

- 당태종으로 부터 백제정벌의 확약을 받는 김춘추 (648 겨울)

 

의자왕 8년(서기 648)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사신으로 보내어 당에 조공하게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御史)를 시켜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라고 물었다.

 

<질허>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천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 책력, 달력)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法興王) 이래로 우리 나름의 연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습니까?”라 하자,

 

태종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교외까지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궐에 당도하자 춘추의 용모가 영준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 공자를 비롯한 유가(儒家)의 현인들에게

지내는 제사)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주었다.

 

어느 날 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을 해보겠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며,

더욱이 지난 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켜 대국에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서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병사의 파견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옷을 꺼내게 하여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내려 주었으며,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춘추 등이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3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송별연을 열었으니,

춘추를 우대하는 예절의 극진함이 이와 같았다.

 

춘추가 아뢰었다.

“제게는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문왕에게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 밤낮으로 곁을 지킴)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원문에 글자가 2자 빠져 있음]에게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황제가

 

“참으로 군자의 나라다.”라고 하고,

 

조서를 내려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게 하였다.

 

 

당태종의 1차 고구려 정벌에서

백제에게 당나라의 일원으로 참여하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백제는 당나라를 선택하지 않았다.

 

1차 정벌의 실패로 맘이 상해있는 당태종에게 김춘추는 백제 정벌을 건의한다.

 

당태종은 신라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는 백제 (649.08)

 

의자왕 9년(서기 649)

 

가을 8월, 임금이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병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공격해서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陳春),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받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병졸을 모아 도살성(道薩城) 아래 진을 치고 다시 싸웠다.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

 

 

백제는 석토성 등 일곱 성을 공략한다. 하지만 백제는 신라군에게 패한다.

 

* 석토성(石吐城) : 일반적으로 진천의 문안산성(文案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문안산.

 

 

<석토성>

 

 

- 당태종의 죽음 (649)

 

고구려 보장왕 8년(649)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조서를 남겨 요동 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청산하는 백제; 당나라로 가는 마지막 사신 (652.1)

 

의자왕 12년(서기 65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한 후

의자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의 분위기를 살핀다. 

 

당태종의 죽음이 고구려 정벌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제에 대한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것이며 

당나라의 백제 침공 결정 사실도 확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청산한다.

 

 

 

- 왜국에 기대를 거는 백제;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는 백제 (653.8)

 

의자왕 13년(서기 653)
가을 8월, 임금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왜국과의 통교는 일찍이 부터 있어 왔다.

 

義慈王 13년의 통교는 변화되는 동아시아 정세속에서

재차 우의를 다짐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640년 이래의 양국간의 불편한 관계가 해소되고,

보다 돈독한 우의를 다졌던 계기로 파악된다.

(노중국, 7세기 백제와 왜와의 관계, 국사관논총 52, 1994, 178~180쪽)

 

 

 

의자왕은 당나라에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왜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한다.

 

 

 

- 신라 북쪽의 33개성을 빼앗는 고구려와 백제 (655.1)

 

신라 태종무열왕 2년(서기 655)

 

봄 정월, (...)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더불어 병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에 침략하여 33성을 빼앗았기에,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보장왕 14년(서기 655)

 

봄 정월, 이보다 앞서서 우리가 백제 및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의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의자왕 15년(서기 655)

 

8월, 임금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표문을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에 침범하여

30여 곳의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2년(서기 655)

겨울 10월,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은 신라 북쪽 변경의 33개의 성을 빼앗는다.

 

 

 

- 조천성(도비천성)을 함락시키는 백제 (서기 655)

 

<취도 열전>

 

<취도(驟徒)>는 사량(沙梁) 사람으로 나마 <취복(聚福)>의 아들이다.

 

그의 성씨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인데 맏이는 부과(夫果)요, 가운데는 취도(驟徒)요, 막내는 핍실(逼實)이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법명을 도옥(道玉)이라 하고 실제사(實際寺)에 기거했다.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가 와서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자

왕이 군대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때 도옥이 자기 무리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승려된 자로서 윗길은 술업(術業, 음양, 복서 따위의 술법에 종사하는 일)

에 정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道)의 효용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외형만 중과 같을 뿐이지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선행이 없으니,

차라리 종군하여 몸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나으리라.”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고쳐 취도라 하니,

이 이름의 뜻은 빨리 가서 병졸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윽고 병부로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전장으로 갔다.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부딪치게 되자 창칼을 집어들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 여러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태종무열왕 시기에 백제는 조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 사치스럽고 화려한 태자의 궁 (655.2)

 

의자왕 15년(서기 655)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였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궁궐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여름 5월, 붉은 색의 말이 북악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불당을 울면서 돌아다니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태자의 궁을 화려하게 수리한다.

 

이를 통해 태자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의 북방을 공격하는 당나라 (655)

 

고구려 보장왕 14년(서기 655)

3월, 당나라 고종(高宗)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오자,

우리는 상대방 병사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가 맞받아 싸웠다.

 

정명진 등은 우리를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1천여 명의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곽 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신라가 북변 33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자

당나라는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 당나라의 상륙에 대비하는 백제 (655.7)

 

의자왕 15년(서기 655)

가을 7월, 마천성(馬川城)을 수리하였다.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청산한 백제는 당나라의 상륙에 대비한다.

 

 

 

- 도비천성(조천성)을 함락시키는 김유신 (655.9) 

 

 

<김유신 열전>

 

영휘 6년(서기 655) 을묘 가을 9월,

 

유신은 백제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이때 백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은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앙과 변괴가 여러 번 나타났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였다.

 

 

<김흠운 열전>

 

영휘(永徽) 6년(서기 655)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겨 정벌을 계획했는데,

군대를 내보낼 때 흠운을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았다.

 

이때에 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어두운 틈을 타 빠르게 달려와서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우리 군대가 깜짝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군이 혼란한 틈을 타서 급히 공격해오니 떨어지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쥐고 적을 기다리는데,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이며 대왕의 사위입니다.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크나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매한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느냐?”

 

그가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자, 종자가 말고삐를 쥐고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때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도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는 혈통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아끼는 처지인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득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날 것 없지 않은가!”

그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김유신은 백제에게 백제에게 빼앗긴 조천성을 되찾는다.

 

 

 

- 신라의 첩자가 되는 좌평 임자 (655)

 

<김유신 열전>

 

(655년 9월 도비천전투) 앞서 급찬 조미압(租未押)이 부산(夫山)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에 잡혀가서 좌평 임자(任子)의 종이 되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일을 보살펴 태만한 적이 없었다.

 

<임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도망하여 신라로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보고하였다.

 

<유신>은 <조미압>이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쓸만한 인물임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임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들었다.

내가 그와 의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아직 못하고 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임자>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라.”

<조미압>이 대답하였다.

“공이 저를 못나고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고 일을 맡기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조미압>이 마침내 다시 백제로 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저의 생각에 기왕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겠기에 수십일 동안 구경 다니며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개와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처럼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그 말을 믿고 책망하지 않았다.

 

<조미압>이 틈을 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대로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신라에 갔다 왔습니다.

유신이 주인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며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나라에 의탁하고,

우리나라가 망하면 내가 그대의 나라에 의탁하기로 하자.’고 말하였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압>은 두려워하며 물러나왔다.

 

대죄(待罪)한 지 수개월이 지나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전에 이야기한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지난번에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알려라.”

 

<조미압>이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 임자의 말을 전하고

더불어 백제의 안팎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유신은 백제를 병탄(幷呑)할 계획을 더욱 더 급히 하였다.

 

 

 

<임자>는 당나라의 상륙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임자>는 신라의 첩자가 되어 훗날에 대비한다.

 

 

 

- 기벌포와 탄현을 막으라는 조언하는 성충 (656.3)


의자왕 16년(서기 656)

 

봄 3월,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 한다.]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어졌다.

 

성충은 옥에서 야위어 죽게 되었는데, 죽을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을 살피지 않았다.

 

 

 

의자왕은 기쁨조와의 음란과 향락에 빠져 술마시기를 그치지 않는다.

 

또한 태자는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있다.

 

성충은 전쟁이 반드시 발생할 것이므로 

당나라의 상륙에 대비하여 기벌포와 탄현을 막을 것을 건의한다.

 

의자왕은 잔소리를 하는 성충을 옥에 가두고

귀족세력에게 왕에게 잔소리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준다.

 

 

-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는 의자왕; 권력에서 밀려나는 백제귀족 (657.1)

 

의자왕 17년(서기 657)

 

봄 정월, 임금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 크게 가뭄이 들어 논밭이 붉은 땅이 되었다.

 

 

 

의자왕은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식읍을 준다.

백제 귀족들은 권력에서 밀려난다.

 

 

 

- 서돌궐을 토벌하는 당나라 (658)

 

구당서 돌궐전 영휘 6년 (서기 655)

여름 5월 계미일,좌둔위대장군、노국공 정지절 등 다섯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총산도를 출발하여 <하로>를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구당서 돌궐전 현경 2년 (서기 657)

봄 정월 경인일,낙양에 행차하였다.

우둔위장군 소정방 등 네명의 장군을 이려도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하로>를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구당서 돌궐전 현경 3년 (서기 658)

2월 임오일,

소정방이 서돌궐 사발라 가한 <하로>와 <질운>、<궐철>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하로>가 석국으로 달아나자,부장(副將) 소사업이 추격하여 사로잡고,

그 사람과 가축을 전후로 40여만을 거두었다.

 

갑인일,서역이 평정되니,그 땅에 몽지、곤릉 두 도호부를 설치하고

다시 구자국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며,고창의 옛 땅을 서주(西州)로 삼았다.

 

 

당나라는 서돌궐을 토벌한다. 백제를 토벌할 차례가 돌아왔다.

 

 

 

- 당나라의 침공이 임박하자 불안한 백제의 정국 (659)

 

의자왕 19년(서기 659)

 

봄 2월, 여우떼가 궁궐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

 

5월, 왕도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다.

가을 8월,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으며,

밤에는 궁궐 남쪽 길에서 귀신이 곡을 하였다.

 

 

백제의 정국이 불안해 보인다.

 

 

 

- 독산성과 동잠성을 공격하는 백제 (659.4)


의자왕 19년(서기 659)

 

여름 4월 (...)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과 동잠(桐岑) 두 성을 침범하였다.

 

 

백제는 독산성을 함락시킨 후 동잠성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된다.

 

 

 

- 당나라의 상륙을 거듭요청하는 신라 (659.4)

 

신라 태종무열왕 6년(서기 659)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임금이 장차 그들을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였다.

 

 

신라는 청병사신을 보내 당나라의 상륙을 거듭 요청한다.

 

 

 

- 백제 정벌 조서를 내리는 당고종 (660)

 

의자왕 20년(서기 660)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과 함께

병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자기 나라 병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당고종은 백제 정벌 교서를 내린다.

 

 

 

- '백제가 망한다'는 소문이 퍼지는 백제 (660.6)


의자왕 20년(서기 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쪽 바닷가에서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비하(泗?河)의 물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들었다.

 

왕도의 시장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에 넘어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두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동쪽과 서쪽 공중에서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으로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왕도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에 들어와서 큰소리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 자쯤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게 되는 것이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660년 6월이면 당나라 정벌군이 덕적도를 향해 가고 있을 때이다. 

 

백제에서는 '백제가 망한다.'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 래주에서 출발한 당나라의 백제 정벌군.

  당나라와 덕물도에서 조우하기 위해 남천정으로 가는 신라군 (660.5.26~660.6.18)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여름 5월 26일, 임금이 유신, 진주, 천존(天存) 등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래주(萊州)에서 출발하여

천리에 이어질 정도로 많은 병선{1900척}을 이끌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당나라의 수군은 병선 1척에 약 70명을 승선하여 래주에서 출발하여 덕적도로 향한다.

 

태종무열왕은 유신, 진주, 천존과 함께 5월 26일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경기이천)에 머무른다.

 

 

 

- 덕물도에 도착한 13만의 당나라 군대. 덕물도로 출발하는 태자 법민 (660.6.21)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6월) 21일, 임금이 태자 법민을 시켜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왕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드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소정방 군대의 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응원하도록 하고,

임금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김법민과 김유신은 6월 21일 남천정에서 덕물도로 출발한다.

 

덕물도에서 소정방은 김법민에게 7월 10일 소부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 장병들을 이끌고 남천에서 사라정(금돌성)으로 간 무열왕,

  남천에서 덕물도로 간 김법민과 김유신

 

<김유신 열전>

 

태종대왕 7년(서기 660) 경신 여름 6월,

대왕은 태자 법민(法敏)을 데리고 백제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남천(南川)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때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던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의 대장군 소정방(蘇定方)ㆍ유백영(劉伯英)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 덕적도)에 도착하여

먼저 종자 <문천(文泉)>을 보내 왕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ㆍ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병사들을 태우고 가서 회합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자, 정방이 태자에게 말했다.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泗?城, 충남 부여)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태자가 돌아와서 왕께 고하니, 왕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사라정(沙羅停)에 이르렀다.

 

 

<김유신 열전>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응원하도록 하고,

임금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김법민과 김유신을 덕물도로 보낸 태종무열왕은

군대를 이끌고 금돌성으로 가서 머무른다.

 

 

 

- 기벌포 상륙이 임박하자 난리가 난 백제; 귀양간 흥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의자왕

 

의자왕 20년(서기 660)

 

임금이 이 소식(당나라군의 덕물도 도착)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마땅한 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이 배를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미처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원조를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약 당나라 병사가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서 감히 날쌔게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의 병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달솔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대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병사의 기세를 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병사들의 길목을 막아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대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합세해서 싸운다면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머뭇거리며 어느 쪽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임금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숫자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더불어 우리의 앞뒤에서 작전을 함께 하고 있으니,

만약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싸운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이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곳이니,

마땅히 용감한 병사를 뽑아서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병사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병사가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이 지칠 때를 기다린 후에

힘을 떨쳐 공격한다면 반드시 저들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대신들이 이를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당나라 병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해서

강물을 따라 배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없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면,

그것은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의자왕은 백제 최고의 군사전문가로 생각되는 흥수에게 군사적 조언을 구한다.

 

흥수는 기벌포에서 상륙을 막고 신라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자왕의 측근은 흥수의 의견에 반대한다.

 

전문가의 말보다는 측근의 정치적 반대 의견이 통하는 것이 백제의 실정이다.

 

신라의 사비성 보급로는 탄현을 넘어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가 탄현을 막으면 신라에서 백제로가는 보급로가 막히며

당나라군 13만명과 신라군 5만명은 바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백제부흥군은 웅진도를 막아

웅진성의 나당연합군을 아사의 위기로 빠지게 하였다.

 

또한 신라는 설인귀가 백제로 상륙하려 할 때

기벌포를 방어하여 당나라군의 상륙을 막아냈다.

 

백제는 기벌포와 탄현을 방어하지 않고

웅진강 어귀와 황산벌 입구에서 당나라군과 신라군을 상대한다.

 

 

 

- 덕물도에서 기벌포로 가는 당나라군, 탄현으로 향하는 신라군

 

의자왕 20년(서기 660)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의 서쪽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김유신 열전>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자, 정방이 태자에게 말했다.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泗?城, 충남 부여)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7월 10일 소부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당나라군은 바닷길로,

신라군은 육로를 통해 소부리로 향한다.

 

 

 

- 탄현을 넘은 5만의 신라군;

  황산벌에서 전사하는 계백의 5천 결사대 (660.7.9~660.7.10)

 

의자왕 20년(서기 660)

임금은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 병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병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배하였다.

계백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黃山) 들판으로 진군하였다.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관창>이 본진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맹렬히 싸웠다.

 

계백이 다시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

삼군이 이를 보고 분기가 복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었다.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신라군이 탄현을 넘는다. 

 

백제는 탄현을 막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탄현을 넘은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벌에 도착한다.

 

계백은 황산벌의 입구에서 세 군데에 진을 지고 신라군을 기다리고 있다.

 

신라군은 계백군을 물리치느라 하루를 지체하게 된다.

 

 

 

- 기벌포에 상륙하는 13만의 당나라군

 

<김유신 열전>

 

장군 소정방, 김인문 등은 연해를 따라 기벌포에 이르렀으나

해안이 진창이어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버들로 자리를 만들어 깔아놓고 군대를 내리게 하였다

 

13만명의 당나라군이 기벌포에 상륙한다. 

 

백제는 기벌포를 막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덕물도, 기벌포, 탄현, 황산벌 및 조천성>

 

 

 

- 웅진강 어귀에서 승리하는 소정방

 

의자왕 20년(서기 660)

 

이에 임금은 병사를 합해서 웅진 어귀를 막고 강을 따라 주둔시켰다.

 

소정방은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들과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의자왕 20년(서기 660)

 

당나라 병사들이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며 떠들어댔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전사자가 1만여 명이었다.

 

 

 

기벌포를 막지 않은 백제군은 웅진강 어귀에 진을 치고 있다.

 

소정방은 산위에 진을 치고 백제군을 물리친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 1만명이 전사한다.

 

 

 

- 정변이 발생한 백제; 권력을 상실하는 태자 부여융, 새롭게 태자가 된 부여효

 

의자왕 20년(서기 660)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일본서기 제명 6년 7월조(서기 660)

고려(高麗)의 사문(沙門) 도현(道顯)의 『日本世紀』에

“7월에 云云,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손을 빌려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백제가 스스로 망하였다.

군대부인(君大夫人)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일본서기 제명 6년 10월조(서기 660)

백제왕 의자(義慈), 그 처(妻) 은고(恩古), 그 아들 융(隆) 등,

그 신하 좌평(佐平) 천복(千福), 국변성(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정방(蘇將軍)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정변과정속에서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요사스럽고 간사한 군대부인(君大夫人)이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정변의 핵심이 부여효의 외가인 군대부인인 것을 알 수 있다.

 

 

- 당나라군이 소부리에 도착하자 웅진성으로 달아나는 의자왕과 태자 효 (660.7.10)

 

의자왕 20년(서기 660)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당나라 병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임금이 사태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7월 10일 약속한 날짜에 당나라군이 소부리에 도착했다.

 

당나라군이 소부리에 들어오자 의자왕과 태자효는 웅진성으로 도망간다.

 

대신 둘째 아들 태가 사비성을 지킨다.

 

의자왕은 웅진으로 도망가면서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 소부리에 도착한 신라; 하루 늦었다고 난리치는 소정방 (660.7.11)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이날(가을 7월 9일)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병사들과 마주쳐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

[혹은 영(永)이라고 한다.]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 가지고 죄를 삼으려 하는구나.

나는 죄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당나라 병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곧 커다란 도끼를 집어 들고 군문에 서자

그의 성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구르며 말하였다.

“신라 병사들의 마음이 변하려고 합니다.”

 

정방이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물릴 것을 애걸하였다.

 

 

 

황산벌에서 시간을 지체한 신라군은 약속 기일인 7월 10일 보다 하루 늦은

7월 11일에 소부리에 도착한다.

 

소정방은 김유신의 부장인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한다.

 

김유신은 물러서지 않고 당나라와 일전을 치루겠다고 소정방을 협박한다.

 

 

 

- 사비성을 향해 진군하는 나당연합군, 

  소정방을 회유하려고 하는 부여태와 부여궁 (660.7.12)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필자주 11일,)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물릴 것을 애걸하였다.

12일, 당나라와 신라군이[원문에 3글자 빠져있음]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所夫里, 충남 부여) 들판으로 나아갈 즈음에,

정방이 마음에 꺼리는 바가 있어 진군하지 않고 있었다.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병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되었다.

 

백제의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躬)이 여섯 사람의 좌평들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은 그것도 물리쳤다.

 

 

 

백제는 소정방을 회유하려고 시도한다. 소정방은 백제의 회유를 거부한다.

 

 

 

- 사비성을 탈출하는 부여융, 부여융을 따라 사비성을 빠져나오는 백성들 (660.7.13)

 

의자왕 20년(서기 660)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임금은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나라 병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니

백성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태는 이를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부여융이 사비성을 탈출하자 성안에 있는 백성들도 뒤를 따라서 성을 탈출한다.

 

 

 

- 사비성 공략 명령을 내리는 소정방, 황급히 성문을 여는 부여태 (660.7.13)

 

의자왕 20년(서기 660)

 

(부여융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니

백성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태는 이를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곽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다급해지자 성문을 열고 살려주기를 청하였다.

 

 

 

백성들이 탈출하여 성이 비게 되자 소정방은 사비성 공략 명령을 내린다.

 

당나라군이 사비성을 공략하려 하자 부여태는 다급히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 부여융 얼굴에 침을 밷는 김법민 (660.7.13)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13일,  의자왕의 아들 융(隆)이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였더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법민은 부여융 얼굴에 침을 뱉는다.

 

의자왕 초기에 태자였던 부여융은 대야성 함락때 백제군의 지휘자이다.

 

 

 

- 웅진성에서 항복하는 의자왕과 부여효 (660.7.18)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熊津方)의 병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임금이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당도하여,

제감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하였다.

의자왕 20년(서기 660)

 

이때 임금 및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 태자효와 웅진방(예식진)이 항복한다.

 

 

 

- 항복의식을 치루는 무열왕 (660.8.2)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였다.

 

임금과 정방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 앉도록 하고는 가끔씩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 중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잡아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쳐서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모의하여

신라의 성이 함락되도록 한 일이 있었기에 목을 벤 것이다.

 

또한 검일을 잡아 죄목을 따져가며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병사를 끌어들여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다.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다.

백제와 함께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리고는 그의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 당나라로 압송되는 의자왕 (660.9.3)

 

의자왕 20년(서기 660)

소정방이 임금 및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 서울로 압송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 7년(서기 660)

 

9월 3일,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이 병사 1만 명을 데리고

사비성(泗?城, 충남 부여)에 남아 진을 쳤고,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병사 7천 명을 데리고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만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 중지(中知) 등이 함께 갔다.

 

 

 

의자왕은 장안으로 압송된다.

 

 

 

-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를 침공할 것을 계획했던 당나라

 

<김유신 열전>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사비땅에 진영을 치고 신라를 침공할 것을 은밀히 꾀하였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나와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을 의복을 입혀 백제인으로 가장하여 역적 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싸움을 벌이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 말하였다.

“이 의견이 취할 만하니 따르시길 바라나이다.”

왕이 말했다.

“당군이 우리를 위하여 적을 없애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소서.”

 

당나라가 우리가 대비하고 있음을 염탐하여 알고,

백제왕과 신하 93명,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9월 3일에 사비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며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정방이 귀국하여 천자에게 포로를 바쳤다.

 

천자가 정방을 위로하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정방이 말했다.

“신라는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부형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작지만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를 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당나라의 의도를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

 

 

 

- 장안에서 죽는 의자왕 (660)

 

의자왕 20년

 

소정방이 포로들을 황제에게 보이니, 황제가 그들을 꾸짖고는 용서하여 주었다.

 

임금이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1)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司稼卿)에 제수하였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와 죽자 유인궤(劉仁軌)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은 병으로 죽는다.

 

 

 

낙양과 가장 인연이 깊은 한국인은 의자왕(義慈王)이다.

 

한때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의자왕은 재위 16년째부터

사치와 방종에 빠져 충신을 박해하고 국정을 게을리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해 당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그는 태자 효, 왕자 융,

그리고 백성 1만 2000여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된 뒤 곧 병사했다.

 

그가 묻힌 곳은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있다는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 무덤 옆으로 알려져왔다.

 

손호는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吳)의 마지막 왕이고,

진숙보는 남조 진(陳)의 마지막 왕으로,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었다.

 

당(唐)이 의자왕을 이들 옆에 묻은 것은 백제왕을 격하하면서

동시에 후세에 경계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망산, 즉 북망산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하는

 '성주풀이'의 노랫가사가 가리키는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망산진(邙山鎭)이며,

시 중심에서 4㎞쯤 떨어져 있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산'이라고 하지만 실제 가보면 얕은 구릉에 채소밭이나 과수원이 대부분이다.

 

이곳에 한(漢)대 이후 여러 왕조의 무수한 제후와 귀족들이 묻혔다.

 

그래서 '북망산천 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정작 의자왕이 묻힌 곳은 이곳이 아니다.

 

중국측에 의해 진숙보 등이 묻힌 곳은 망산에서 동북쪽으로 15㎞쯤 떨어진

맹진현(孟津縣) 송장진(送莊鎭) 봉황대촌(鳳凰臺村)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90년대 중반 이후 한중 조사팀은

봉황대촌에서 여러 차례 조사작업을 벌였다.

 

중국측은 항공촬영을 통해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조사했으나,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만 발견했을 뿐 의자왕의 무덤은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부여시는 지난 2000년 현지에서 채취한 정갈한 토양을 한국으로 가져와

능산리 고분군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묘지를 조성할 때 넣고 제사를 올렸다.

 

수천년간 이국땅을 떠돌던 백제의 마지막 국왕 부자의 원혼을 달랜 것이다.

<밭이 된 의자왕의 묘… 한민족 비운의 古代史 묻힌 땅, 낙양(洛陽) /

고유민 / 조선일보>

 

 

 

※ 참고 <寶藏 一代記>

 

- 보장왕의 즉위, 연개소문이 장악한 고구려 (642) 

 

보장왕 원년 (642)

보장왕(寶臧王)은 이름이 장(臧)<혹은 보장(寶臧)이라고도 하였다.>이고,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이 재위 25년에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臧)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연개소문>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았다.

 

이에 원근에 호령하여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매우 위엄이 있었다.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다녔으며, 좌우에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매양 말을 타거나 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의 장수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디뎠으며,

나가 다닐 때에는 반드시 군대를 풀어서 앞에 인도하는 자가 긴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도망쳐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신라가 위기에 빠져있을 때 고구려에는 쿠테타가 발생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하였고 보장은 왕이 되었다. 

 

 

 

- 위기에 빠진 신라, 고구려에게 군사를 요청하는 김춘추 (642) 

 

- 신라가 당나라에 가지 못하게 당항성을 공격하는 고구려와 백제, 

  당나라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신라 (643년 9월) 

 

 

고구려의 군사 지원을 받는 데 실패한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지원을 하여야 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고

당항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데 실패한 고구려와 백제는 군대를 철수한다.

 

 

-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당나라 (644년 1월) 

 

- 연개소문이 계속 신라를 공격할 것을 밝히자 고구려 토벌을 선언하는 당나라

  (644년 1월)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신에게 신라공격을 계속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한다.  

 

연개소문의 태도가 완강하자 당나라는 고구려 토벌을 선언한다.

 

 

 

-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당태종의 조칙을 받들지 않고 

   당나라 사신 장엄을 굴 안에 가두는 연개소문 (644년 2월)

 

 

장엄(蔣儼)은 중국 常州 義興人.

明經科에 급제하여 右屯衛兵曹參軍에 임용되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하려 사신을 보내고자 하니 누구도 나서지 않자

자천하여 사신으로 왔다가 연개소문에 의하여 감금되어

병기로 위협당하였으나 굽히지 않았다.

장엄은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에 환국하였다.

 

 

- 군량을 이동시키며 고구려를 압박하는 당나라 (644년 7월) 

 

보장왕 3년(644)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려고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중략) [또]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輸使)로 삼았는데,

하북에서부터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여,

[위정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의 양식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뜻을 굽히지 않자

당태종은 군량을 이동시키며 고구려를 압박한다. 

 

 

- 거란, 해, 말갈을 이용한 요동 공격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는 당나라 (644년 7월) 

 

보장왕 3년(644)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영주(營州)도독의 병사와

거란· 해(奚)·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당나라는 거란, 해, 말갈 등 요동 주위의 친 당나라 종족을 이용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한다. 

 

 

 

- 전쟁을 멈추기 위해 당태종에게 백금을 바치는 연개소문 (644년 9월) 

 

보장왕 3년(644) 

 

9월에 막리지는 백금을 당나라에 바쳤다. <저수량>이 말하였다.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구이(九夷)가 용납할 수 없어

이제 그를 치려고 하는데, [그가] 금을 바치니 이것은 <곡정>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사신이 또 말하였다.

 

"막리지는 관인 50명을 들여 보내 숙위하게 할 것입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하였다.

"너희 무리는 모두 고무(高武)[영류왕]를 섬겨 관작을 얻었는데,

막리지가 [왕을] 죽였는데도 너희들은 복수를 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며 대국을 속이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느냐?

[황제는 그들을] 모두 처벌하게 하였다. 

 

 

연개소문 이전의 고구려는 외교에 능숙하여 국제정세를 잘 활용하고

국가 위기 상황을 외교로 잘 혜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연개소문 시대의 고구려는 과거와 달리 외교력이 매우 약해져

모든 동맹국이 고구려로 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말을 듣지 않자

당나라는 군량과 거란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압박한다.

 

그러자 막리지(연개소문)는 당태종에게 백금을 바치며 전쟁을 멈추게 하려 한다.

 

이렇게 연개소문이 어이없는 외교를 벌이자

고구려를 압박하던 당나라는 당장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고구려는 당나라 사신인 <광주사마>가 경관을 부순 631년 부터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 왔다.

 

연개소문은 영류왕때 부터 준비된 고-당 전쟁 전략을 그대로 사용했을 뿐이다. 

 

천리장성은 영류왕때 준비되고 있었으며 당나라를 막은 안시성은

연개소문이 통제할 수 없는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성이었다.

 

그가 권력을 잡고 독자적으로 수행한 일은

신라를 당나라의 편으로 만들게 한 후 당나라를 자극하여 전쟁을 부축인 것이었다.

 

 

- 영주(營州)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저장하는 당나라 (644년 10월) 

 

보장왕 3년(644) 

 

겨울 10월에 평양에 내린 눈 빛이 붉은색이었다.

 

황제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려고,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였다.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할 것 없다.

(중략) 이리하여 북쪽으로 영주(營州)로 곡식을 나르고,

동쪽으로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당태종은 다음해의 전쟁을 위해 육군의 군량을 영주(營州), 

수군의 군량을 고대인성(古大人城)에 저장한다. 

 

- 낙양에 도착하여 고구려 정벌 경험이 있는 <정천숙>을 참모로 불러들이는 당태종

   (644년 11월) 

 

보장왕 3년(644) 

 

11월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宜州)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이미 벼슬을 그만 두었으나,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행재소로 불러서 물으니,

“그가 요동도는 멀어서 군량을 옮기는 것이 어렵고,

동이(東夷)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지금은 수나라 때에 비할 것이 아니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장안에서 낙양으로 온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 경험이 있는 <정천숙>을 참모로 불러들인다. 

 

-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하는 당태종 (644년 11월) 

 

보장왕 3년(644)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서,

강회(江淮)와 영협(嶺?)의 군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과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래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좌위솔(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하주(河州)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여, 양군이 합세하여 유주(幽州)에서 다 모이게 하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

먼저 중공(衆工)을 독려하여

안라산(安羅山)에서 사다리와 충차(衝車)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응모한 원근의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황제가 모든 것을 친히 가감하여 편이한 것을 취하였다. 

 

 

 

당태종은 장량과 태자 이세적을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한다.

 

이제 전쟁준비는 끝났고 다음 해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한다. 

 

 

- 고구려 주위의 나라들과 이민족들에 대한 외교적 역량을 강화하는 당나라

   (644년 11월)

 

보장왕 3년(644)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당나라를 외교적 역량을 강화하여

고구려 주위의 신라, 백제, 해, 거란이 당나라를 지원하게 한다. 

 

 

- 유주(幽州)에 도착한 이세적 (645년 1월)

 

- 정주(定州)에 도착한 당태종 (645년 3월) 

 

- 유성(柳城)에서 요동(遼東)으로 가는 척 하면서

  몰래 현도(玄兎)로 향하는 이세적 (645년 3월)

 

 

- 통정(通定)을 거쳐 현도(玄兎)에 도착한 후 현도성(玄兎城)을 무너뜨리고

  신성(新城)으로 향하는 이세적(645년 4월)

 

 

현도성을 무너뜨린 이세적은 신성에 다다른다. 신성은 수성으로 맞선다.

 

 

 

-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는 영주도독 장검 (645년 4월)

 

 

- 개모성(盖牟城)을 함락시키는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 (645년 4월)

 

이세적은 현도에서 남하하여 개모성을 함락시킨다.

 

 

- 비사성(卑沙城)을 무너뜨리는 당나라 수군 (645년 5월)

 

보장왕 4년(645)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 요동성(遼東城)에 도착한 이세적, 요택(遼澤)에 도착한 당태종 (645년 5월)

 

 

 

- 요동성에 4만의 구원병을 보내는 고구려

 

 

 

- 황제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요동성 공격을 시작하는 당나라

 

보장왕 4년(645)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맞이했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였다.

 

“적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멀리 와서 피곤할 터이니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치우고 황제를 맞이할 일인데 적을 임금께 남겨두려고 하느냐?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으므로,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당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도종(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군진이 어지러우므로, 날랜 기병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고,

이세적도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왔으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과거 수나라 장수들이 황제를 기다리면서

요동성을 공략하지 않았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당나라 장수들은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요동성 공략을 시도한다. 

 

 

 

- 요수를 건너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치는 당태종 

 

보장왕 4년(645)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 포차와 충차로 요동성을 부수는 당나라

 

보장왕 4년(645)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황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중략) [이]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 넘게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충차(衝車)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당나라는 최첨단 무기로 평지성인 요동성의 높은 성곽을 부수기 시작한다.

 

 

- 요동성에 있는 당나라 군대에게 쇠갑옷을 바치는 백제

 

보장왕 4년(645)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중략) 이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바치니,

[당나라] 군사들이 이것을 입고 따랐다.

황제가 [이]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빛났다.

 

 

백제는 당나라 편이 되어 요동성에 있는 당나라 군대에게 쇠갑옷을 바친다.

 

 

 

- 불타는 요동성, 요동성을 함락시키는 당나라

 

보장왕 4년(645)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쪽 다락에 불을 지르게 하고,

불이 성 안으로 번지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포로된 자는 무적의 군사[勝兵]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었으며, 양곡은 50만 섬을 빼앗겼다.

[황제가]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 요동성이 무너지자 당나라에 항복하는 백암성주(白巖城主) 손대음

 

보장왕 4년(645)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신은]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중략) [황제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요동성이 무너지자 백암성주 손대음이 항복한다.

 

 

- 안시성(安市城)에 도착한 당태종, 안시성에 15만명의 구원군을 파견하는 고구려 

  (645년 6월 20일)

 

보장왕 4년(645)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요동성이 무너지고 당나라가 안시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국운을 걸고 정예병 15만을 안시성으로 보낸다.

 

연개소문은 15만 군대와 함께 오지 않는다. 그는 평양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세적과 당 태종 이동로> 

 

 

- 정면대결을 피하고 보급을 끊으라는 <고정의>의 의견을 묵살하고 

   당나라 주력과의 정면대결을 선택하는 <고연수>

 

 

보장왕 4년(645)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고]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그가]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고]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교전에 거짓으로 달아났다.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고구려의 <고연수>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면서

기습병으로 군량을 끊어야 한다는 <고정의>의 의견을 묵살하고

15만의 고구려 정예병으로 성밖에서의 정면대결을 선택한다.

 

 

 

- 주필산에서 진을 친 고구려와 당나라의 주력부대 (645년 6월 22일)

 

보장왕 4년(645)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하였다.

“신은 듣건대

‘적과 대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가다가,

사졸들이 고구려[군사]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어 달면서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그것은] 모두 위로 황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황제가 웃으며 여러분이 이와 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장손]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형세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우리 군대는 말갈과 군사를 합해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주력부대가 주필산에서 진을 쳤다.

 

 

 

-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주필산에 있으니

   직접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를 항복시킬 것을 주장하는 <도종>

 

 

보장왕 4년(645)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군사 5천 명을 주십시요.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는 듣지않고...

 

 

보장왕 5년(646)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내가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정>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도종>을 돌아다 보며 물으니,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 틈을 타서 평양을 빼앗자고 한 말을 소상히 아뢰었다.

황제가 원망하며 "당시의 일은 매우 바빴으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모두 안시성에 와 있으므로 평양성은 비어있다.

강하왕 도종은 정예 5천으로 평양을 공략하려 한다.

당태종은 도종의 의견을 묵살한다.

이때 당태종이 도종의 의견을 묵살한 것은 당태종의 결정적 실수였다. 

 

 

* 이정(李靖, 571년~649년) : 중국 당나라의 명장.

이정은 수나라 말기 군웅들이 할거할 때,

군사를 일으킨 당 고조와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에게 협력하였다.

당고조가 당나라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세민이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군웅들을 평정할 때 활약하였다.

이어 행군총관(行軍摠管)이 되어 돌궐을 공격하여

길리가한(吉利可汗)을 포로로 잡았고,

토욕혼(吐谷渾)의 침입을 막는 큰 공을 세워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이정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병서

위공병법(衛公兵法),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저술하였다.

 

 

 

- 당태종의 말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는 주필산의 고구려 주력군  

 

보장왕 4년(645)

(5천의 정예병으로 평양을 공격하겠다는 도종의 의견을)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하여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서 몇 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믿은 고연수는 당나라에 대한 방비를 솔홀히 한다.

 

 

- 주필산에 있는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하는 당태종

 

보장왕 4년(645)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정예군 1만 1천 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진법을 이용한 성밖에서의 전투에서 고구려는 당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당나라는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을 기습하여 고구려에게 손쉬운 승리를 거둔다.

 

 

 

- 주필산에서 당나라에게 패하는 고구려 주력부대, 항복하는 고연수와 고혜진

 

보장왕 4년(645)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山)이라 하였다.

 

 

연개소문이 보낸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태종에게 항복하고 당나라의 일원이 된다.

 

 

- 안시성(安市城)을 무너뜨린 후 건안성(建安城)을 공격하기로 결정하는 당나라

 

보장왕 4년(645)

 

황제가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불시에 나가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황제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말하였다.

 

 

당태종은 건안성을 함락한 후 안시성을 공략하자고 하였으나

이세적은 안시성을 먼저 공략한 후 건안성을 공격할 것을 주장한다.

당태종은 이세적의 의견을 따른다.

 

 

- 함락되지 않는 안시성(安市城)

 

보장왕 4년(645)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은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질렀다.

 

황제가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에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오랫동안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당나라가 안시성을 계속 공략하지만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는다.

 

 

 

- 안시성이 함락되지 않자 오골성과 평양성을 우선 함락시킬 것을 주장하는

  <고연수>와 <고혜진>

 

보장왕 4년(645)

 

<고연수>·<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고는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니,

[저희]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이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다다라서 저녁에는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비사성}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오골성과 평양성이 비어있는 것을 안다.

따라서 안시성을 무시하고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을 무너뜨릴 것을 주장한다. 

 

 

- 고연수와 고혜진에 반대하며 안시성을 먼저 무너뜨릴 것을 주장하여 장손무기

 

보장왕 4년(645)

 

황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이 홀로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서

위험한 형세를 타고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신성적의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이에 멈추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오골성을 공략하자고 하자

장손무기는 요행을 바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오골성이 비었다지만 오골성이 수성되고 신성과 건안성의 고구려군이

당나라의 뒤를 밟는다면 전쟁에 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기습공격에 실패하는 안시성의 고구려군

 

보장왕 4년(645)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서 달아났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밤에 성밖에 나와 당나라를 기습 공격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당나라군에게 패한다.

 

 

- 60일 동안 흙산을 쌓는 당나라,

  흙산이 무너지자 흙산을 빼앗고 해자를 파서 지키는 안시성의 고구려

 

보장왕 4년(645)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番)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상하자 황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 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베어 두루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흙성을 쌓아 안시성을 공략하려 한다.

60일에 걸쳐 산이 쌓아지자 도종이 흙산 꼭대기에 진을 치도록 했다.

그런데 진을 치는 도중 산이 무너지면서 함께 안시성벽이 함께 무너졌다.

이때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킨다. 

 

 

 

- 날씨가 추워지는 요동, 철군하는 당나라 (645년 9월 18일)  

 

 

- 급하게 철군하는 당나라,

  스스로 섶을 묶으며 군대와 함께 진창이 된 요택을 건너는 당태종

 

 

- 요택을 건너는 동안 죽는 자가 속출한 당나라,

  발착수(渤錯水)를 건너 유성에 도착한 당태종 (665년 10월 11일)

 

 

 

- 고구려 정벌을 후회하는 당태종

 

보장왕 4년(645)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당나라는 이번 원정을 통해 고구려 요동방어선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깊이 후회한다.

 

 

 

- 당태종에게 사죄하고 미녀를 바치는 연개소문 (646년 5월)

 

보장왕 5년(646)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는 것이 딱해 나는 취하지 않는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 2차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는 당태종 (646)

 

 

 

-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어

   고구려 영토에 사람이 살기 어렵게 만드는 전략을 선택하는 당나라 (647년 2월)

 

보장왕 6년(647)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이긴 성에서도 실로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서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갈 것이며,

수 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의 산성을 갑자기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고구려를 공격하는 방안으로 압록수 북쪽 지역에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에 고구려의 영토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끔 논밭을 망가뜨리거나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방법으로 강토를 어지럽히는 방안을 제시한다.

 

 

 

- 물에 익숙한 군사 3천명을 선발하여

  요수를 넘어 신성도(新城道)로 가게 하는 당나라 (647년 2월)

 

보장왕 6년(647)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 자들을 골라 배치하였다.

 

 

- 신성에서 남소성까지 성을 훑으며 나성(羅城)을 불지르는 당나라 (647년 5월)

 

보장왕 6년(647)

[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요수를 넘은 3천명의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산성을 지나가면서 나성을 불지르고 돌아간다.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를 막기위해 성밖에 나와서 싸웠으나

수성전(守城戰)에 달인인 고구려는 성밖의 전투에서는 당나라를 당해내지 못한다. 

 

 

 

- 래주에서 바다를 넘어 압록강으로 가는 새로운 정벌 루트를 만들기 위해

  동래에서 만명의 군사를 보내는 당나라 (647년 2월)

 

보장왕 6년(647)

 

황제가 이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래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였다.

 

당나라는 만명의 군사를 누선에 태워 요동으로 보낸다.

 

 

 

- 석성과 적리성을 차지하는 당나라 (647년 7월)

 

보장왕 6년(647)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 내주에서 바다를 넘기 위해 큰 배 수백척을 만드는 당태종 (647년 8월)

 

보장왕 6년(647)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 하였다.

 

 

- 보장왕의 둘째 아들을 막리지로 세워 당태종에게 사죄하는 연개소문 (647년 12월)

 

보장왕 6년(647)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 래주에서 바다를 넘어 압록강으로 진격하는 3만의 당나라 부대 (648년 1월)

 

보장왕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 역산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는 당나라 장수 <고신감> (648년 4월)

 

보장왕 7년(648)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고]신감의 복병이 나와 [우리가] 패하였다.

 

 

3만의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으로 가는 동안 역산에서 고구려 군대와 만났다.

고구려 군대는 당나라에게 패한다.

 

 

 

- 30만으로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검남지방에게 군대와 식량을 운반할 배를 준비하게 하는 당태종 (648년 6월)

 

 

압록강으로 가는 길이 완성되어 가자

당태종은 30만으로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 배를 준비하게 한다.

 

 

- 당태종의 명령으로 고구려를 무너뜨릴 때 사용할 배를 만드는 당나라 (648년 7월)

 

보장왕 7년(648)

가을 7월에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으로부터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로 가게 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사용할 배를 만들기 시작한다.

 

 

 

- 압록강에 진출하여 박작성을 공략하는 당나라,

  안시성과 오골성의 3만 구원군을 박작성으로 보내는 고구려 (648년 9월)

 

보장왕 7년(648)

 

9월에 (중략)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당나라군이 박작성을 포위하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3만명의 구원군을 보내준다.

하지만 고구려 구원군은 설만철에게 패한다. 

 

당나라군은 압록강까지 진출하였고 내주에서 압록강으로 가는 길을 완성시킨다. 

 

 

 

- 내주에서 압록강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리자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당태종 (648년 9월)

 

 

바닷길이 완성되었으므로 당태종은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한다.

 

당태종이 바닷길을 완성하고 배를 만드는 동안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을 보강하고 있었다.

 

 

 

<고구려 천리장성>

 

 

 

 

- 당태종의 죽음으로 잠시 중단되는 고-당 전쟁 (649)

 

 

당태종이 고구려를 무너뜨리려고 한 해에 당태종이 사망하였다.

 

당태종은 조서를 내려 고구려 정벌을 취소시켰다.

 

비록 전쟁이 중단되었지만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로를 완성시켰으며

평양을 사정권으로 두게 되었다. 

 

고구려는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다. 

 

 
 
- 불교를 탄압하는 연개소문, 고구려를 떠나는 보덕화상 (650)

 

보장왕 2년(643)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고하였다.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십시오.”

대왕(大王)은 매우 지당하다고 여겨서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청하니,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보장왕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았으므로,

남쪽으로 옮겨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갔다.

 

 

 

- 거란을 공격하는 고구려,

  신성에서 고구려를 물리치고 퇴각하는 거란의 이굴가 (654년 10월)

 

 

보장왕 13년(654)

 

겨울 10월에 왕은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고구려] 군대와 말갈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거란을 쳤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막아서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

 

 

당나라는 거란족을 포섭하는 일에 매달렸다.

 

내몽고 시라무렌강 상류에 거주한 거란족은

고구려가 유목제국들과 통하는 입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안보를 위해 반드시 포획해야만 하는 부족이었다.

 

거란족이 점차 물량 지원을 앞세운 당나라의 세력권에 편입되어가자,

마침내 고구려는 654년 당나라에 세력권에 포섭된 거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후 660년까지 고구려군은 당에 반기를 든 거란의 일부 부족과 함께

당나라군과 치열한 전쟁을 했다.

 

하지만 거란족에 대한 고구려의 통제력은 점점 약화되고 말았다.

 

 

 

- 당나라와 적이 된 백제, 백제와 함께 신라의 북쪽 33개성을 함락시키는 고구려(655)

 

 

-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자 요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655.5)

 

 

 

- 중단되는 전쟁,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고구려 (656)

 

 

- 적리성을 되찾는 고구려 (658년 6월)

 

보장왕 17년(658)

 

여름 6월에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에게] 이기지 못하였다.

 

 

당나라가 적리성을 차지하고 있는 한 평양은 당나라의 공격에 늘 노출되어 있다.

 

고구려가 적리성을 차지하자 당나라는 설인귀를 보내 적리성을 공격한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낸다.

 

 

 

- 석성을 공격하는 고구려 (659년 11월)

 

보장왕 18년(659)

 

겨울 11월에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

 

 

구당서 현경2년(657)

이듬해 (658) 또 양건방, 계필하력과 더불어

요동에서 고려 대장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웠다.

 

인귀는 단기로 먼저 들어갔는데 활시위 소리에 피하려고 엎드렸다.

 

고려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어 석성 아래에서 십여 명을 사살하였다.

 

인귀는 단기로 곧바로 가서 들이받았는데

그 적은 활과 화살을 함께 잃고 손을 들 수가 없어 마침내 사로잡았다.

 

적리성을 장악한 고구려가 석성을 공격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낸다.

 

 

 

- 압록강을 장악하기 위해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는 공격하는 당나라

  (660년 11월) 

 

보장왕 19년(660)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당나라는

압록강{지금의 난하}을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의 여러성을 길을 나누어 공격한다. 

 

 

 

- 압록강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보내는 당나라 (661년 1월) 

 

 

보장왕 20년(661)

 

봄 정월에 당나라가 하남·하북·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鴻?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당나라는 압록강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보낸다. 

 

 

- 35軍(30만) 규모의 병력을 고구려 정벌군으로 편성하는 당고종 (661년 4월) 

 

보장왕 20년(661)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평양을 정벌하기 위하여 30만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고

 평양으로 진출하게 한다.  

 

고구려-당의 2차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 주류성에서 봉기한 후 서북부가 응하자  사비성을 포위하는 복신,

   백제부흥운동의 시작 (661년 3월)

 

 

백제부흥운동 1 년 (AD 661)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응하자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인원(仁願)을 도성(都城: 사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 (檢校帶方州刺史)로 기용(起用)하고,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便道]로 신라 군사를 일으켜 인원(仁願)을 구하게 하였다.

(중략) 복신 등은 이에 사비성[都城]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와

임존성(任存城)을 보전하였고,

신라 사람도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용삭(龍朔) 원년(661) 3월이었다. 

 

 

<주류성과 임존성>

 

 

 

- 백제부흥군이 백제 전역을 장악하자 직접 평양 정벌군을 거느릴 수 없게 된 당고종

  (661년 4월) 

 

보장왕 20년(661)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蔚州) 자사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일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터인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터이니,

이것은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백제 부흥군의 위세가 백제에 주둔한 나-당 연합군을 몰아낼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당고종은 평양 정벌에 직접 참여할 수 없게 된다. 

 

 

 

- 북한산성을 포위하는 고구려 (661년 5월) 

 

보장왕 20년(661) 

 

여름 5월에 왕은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으므로,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한다.

하지만 북한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난다. 

 

 

- 웅진성의 동쪽 길을 뚫는 신라 (661년 7월) 

 

신라 문무왕 11년  

 

"[현경 6년(661) 7월] (중략)

유총관이 마침내 저와 함께 동행하여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쳐서

곧 옹산을 함락시키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의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신라는 옹산성(대전 계족산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을 동쪽길을 뚫는다. 

 

 

 

- 평양성으로 가는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661년 8월) 

 

보장왕 20년(661)

가을 8월에 소정방이 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 압록강을 넘는 글필하력의 당나라군 (661년 9월) 

 

보장왕 20년(661) 

 

9월에 [연]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군 수만 명으로써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글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글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소정방이 평양으로 가는 동안 당나라 육군은 동진하여 압록강가에 도착한 후,

남생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압록강을 넘는다. 

 

 

 

- 대규모 봉기가 발생한 철륵 (661년 10월) 

 

열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투르크계 종족인 철륵은 646년 당이 설연타를 멸할 때

당측에 서서 도운 이래 당에 복종하며 여러 정벌에 참가했고

계필하력 자신도 철력 사람으로 고려를 치는 당의 정벌사업을 도았다.

 

하지만 660년을 기점으로 과도한 물자 차출과 장정징집이

철륵 부족들에게 반발을 샀고 그해에 거락족과 해족의 뒤를

이어 8월에는 철륵 사결부와 발야고부, 복골부, 동나부 등이 일어나

당에 대규모 항전 사태를 벌인다.

 

계필하력이 고구려에 있던 661년 10월에는 회홀부 추장 비속독이라는 자가

철륵 부족을 이끌고 대규모로 봉기해 당에 저항했는데,

이 철륵을 진압하기 위해 당 조정은 철륵 별부 추장 출신이었던 계필하력을 비롯한

고구려 원정군 일부를 빼서 철륵으로 투입했다.

 

같은 철륵족인 계필하력에게 철륵안무대사로서 철륵을 달래게 했던 것이다.

(출처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이야기<61> 제28대(마지막) 보장왕(7), http://cafe.naver.com/6qhuciga/54)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을 넘은 후 철륵에서 대규모 봉기가 발생한다. 

 

- 압록강에서 철수하는 부여도행군과 요동도행군,

글필하력을 철륵으로 보내는 당고종 (661년 10월) 

 

보장왕 20년(661) 

 

9월에 (중략)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철륵 문제로 부여도행군(扶餘道行軍)과 요동도행군(遼東道行軍)이 퇴각함에 따라,

고구려는 요동과 현도지역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되었다.

 

따라서 요동과 현도에 배치된 부대의 일부를 평양 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당군은 정명진(程明眞)의 루방도행군(樓訪道行軍),

임아상(林娥相)의 패강도행군(浿江道行軍),

방효태(龐孝泰)의 옥저도행군(沃沮道行軍)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정방(蘇定方)의 평양도행군(平壤道行軍)은 평양 인근에 머물러 있다. 

 

철륵에서 봉기가 발생하자 글필하력과 부여도행군과 요동도행군을 철수시킨다. 

 

- 백제부흥군과 철륵으로 인해 한겨울인 12월에 평양성에 도착하게 된 당나라

  (661년 12월) 

 

일본서기 덴지 (天智天皇) 원년 (661)

12월 고려가 "이 12월 고려국은 몹시 추워 패강이 얼었습니다.

당군은 운차, 충팽이 있어 북과 징을 울려 진격하였습니다.

고려의 병졸은 용감하고 웅장하였습니다.

다시 당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다만 두 진터만이 남아있었습니다.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당의 군사가 무릎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하여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다. 

 

10월에 압록강을 넘은 당나라의 루방도행군,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은

12월이 되어 평양에 도착한다. 

 

 

- 운차, 충팽으로 평양내성과 평양북성을 공격하는 옥저도 행군 

 

일본서기 덴지 (天智天皇) 원년 (661)

12월 고려국은 몹시 추워 패강이 얼었습니다.

 

당군은 운차, 충팽이 있어 북과 징을 울려 진격하였습니다. 

 

 

 

당나라는 사수벌판에서 운차, 팽칭으로 평양내성을 공격한다. 

 

 

* 충팽(衝?) : 성문을 부딪쳐 깨는 수레  

* 운거(雲車) : 구름처럼 높은 수레 

 

  

- 사수(蛇水) 가에서 전멸하는 <방효태>의 옥저도행군, 행방불명된 <임아상>

  (662년 1월) 

 

<삼국사절요> 

 

당 나라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영남의 수군을 이끌고

사수에 진영을 쳤는데 고구려 연개소문이 이를 맞아 싸워 방효태가 대패하였다.

 

혹자가 포위망을 뚫고 유백영이나 조계숙의 진영에 가기를 권했으나

 

방효태가 말하길

 

'내가 양대를 섬겨 지나치게 은총을 입었으니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반드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유백영 등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겠는가?

또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천여 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나 한 몸만 살아 남기를 바라겠는가?' 라고 하였다.

 

연개소문이 육박하여 공격하니 죽은 자가 수만명에 달하였고

방효태는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집중되어

그 아들 13인과 더불어 모두 전사하였다. 

 

 

보장왕 21년(662)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연개소문은 한밤중에 기습하여 사수(蛇水) 가에서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전멸시킨다.

 

또한 패강도행군총관 임아상이 행방불명 된다.

 

사수에서 참패를 당한 당나라 육군은 평양성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 

 

 

-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662년 1월) 

 

보장왕 21년(662)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평양성을 포위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 

 

 

 

- 압록강으로 퇴각하는 루방도행군, 패강도행군 (662년 1월) 

 

보장왕 21년(662)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패강도행군과 루방도행군은 압록강으로 돌아간다. 

 

 

 

- 군량을 싣고 평양으로 출발하는 김유신 (662년 1월) 

 

문무왕 2년(662)  

 

봄 정월에 (중략) 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인문(仁問)과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함께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얼음이 얼어 미끄럽고 또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의 등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군을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김유신은 군량을 싣고

풍수촌 -> 칠중하 -> 산양 -> 이현 -> 장새 -> 양오을 거쳐 평양으로 간다. 

 

 

 

- 평양에서 신라의 군량을 받고 당나라로 돌아가는 소정방 (662년 2월) 

 

문무왕 2년(662)

2월 1일에 유신 등은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평양으로부터 3만 6천 보(步) 떨어진 곳이다.

 

먼저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 등 15인을 당나라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 날 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워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分],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頭髮) 30량(兩)과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을 건넜다. 

 

식량을 전달받은 소정방은 당나라로 돌아간다. 

 

 

- 백제와 왜(倭)가 패배한 소식을 듣고 사망하는 연개소문 (663년 10월) 

 

일본서기 덴지(天智天王) 3년 10월 (663)

이 달에 고구려 대신 연개소문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여러 자식들에 유언해 말하기를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 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서기 덴지(天智天王) 6년 10월 (666)

'고구려의 대형(大兄) 남생(男生)이 성을 나가 나라 안을 돌보았다.

이때 성 안의 두 아우가 측근 사대부의 나쁜 말을 듣고서,

남생을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때문에 남생은 당에 가서 그 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모략했다.'

 

 

 

- 막리지가 된 남생 (666) 

 

보장왕 25년(666)  

 

왕은 태자 복남(福男)<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고 하였다.>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태산(泰山)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어

처음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성으로 순행하면서,

그 아우인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자 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맡는다. 

 

 

 

- 연남생이 순행하는 동안 반란을 일으키는 남건과 남산 (666년 6월) 

 

보장왕 25년(666)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고 하였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그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고 하였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그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막리지가 된 남생이 고구려 전역을 순행하는 동안 동생이 남건과 남산이 반란을 일으킨다. 

 

 

 

- 반란에 성공하고 막리지가 된 남건 (666년 8월) 

 

보장왕 25년(666)  

 

가을 8월에 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남건은 막리지가 되어 공식적인 고구려의 권력자가 된다. 

 

 

 

- 국내성에서 있는 남생을 토벌하는 남건,

  당나라에 망명을 요청하는 남생 (666년 8월)   

 

보장왕 25년(666)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그를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애걸하였다. 

 

남건이 국내성에 고립된 남생을 토벌하자 남생은 당나라에 망명을 요청한다.  

 

 

 

- 남생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하는 당고종 (666년 9월)

 

보장왕 25년(666)

 

9월에 황제가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망명요청을 받아들인 당나라는 국내성에 있는 남생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한다.  

 

 

- 신라로 망명하는 연정토 (666) 

 

신라 문무왕(666) 

 

고구려의 지위 높은 신하 연정토(淵淨土)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와 그의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집을 주고

서울 및 주·부(州府)에 안주시키고,

그 여덟 성은 온전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연정토는 신라로 망명한다. 

 

 

 

- 남생을 구출하기 위해 이적(李勣)을 중심으로 요동도행군을 편성하고

   고구려 정벌을 시작하는 당나라 (666년 12월) 

 

보장왕 25년(666)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司列) 소상백(少常伯) 안륙(安陸)의 학처준(?處俊)을 그 부장으로 삼았으며,

방동선(龐同善)과 글필하력을 함께 요동도 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수륙제군총관(水陸諸軍摠管) 병 전량사(轉糧使) 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

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또] 하북 여러 주의 조부(租賦)를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용으로 공급하게 하였다. 

 

 

 

당고종은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하여 요동으로 진격하게 한다.  

당나라가 고구려 정벌을 시작하자 고구려는 국내성을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 안시성을 공격하는 학처준 (667년 6월) 

 

보장왕 26년(667)  

 

학처준이 안시성 밑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사 3만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호상(胡床) 위에 걸터 앉아서 막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뽑아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학처준은 안시성을 공격한다. 

 

 

 

- 평양으로 가는 곽대봉의 당나라수군, 평양의 보급을 담당하게 된 <풍사본>

  (667년 6월) 

 

보장왕 26년(667) 

 

곽대봉(郭待封)은 수군(水軍)으로서 다른 길로 평양에 나아갔는데,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憑師本)을 보내어 군량과 군기를 실어다 보급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평양성의 고구려군이 이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곽대봉의 수군을 평양으로 보내고 풍사본에게 보급을 담당하게 한다. 

 

 

 

- <풍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보급을 받지 못하는 평양성의 <곽대봉> 

 

보장왕 26년(667)  

 

곽대봉(郭待封)은 수군(水軍)으로서 다른 길로 평양에 나아갔는데,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憑師本)을 보내어 군량과 군기를 실어다 보급하게 하였다.

 

풍사본의 배가 파손되어 기일을 어기자,

곽대봉의 군중(軍中)은 굶주리고 군색하였다. 

 

 

 

풍사본의 배가 부셔져 보급선이 끊기자

평양에 있는 곽대봉의 수군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전령을 통해 이적에게 보급을 요청하는 평양성의 곽대봉 (667년 7월) 

 

보장왕 26년(667)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싣고 가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곽]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핍하였다.

 

[곽대봉이] 글을 지어서 [이]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적이 빼앗아 보고 그 허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노하여

 

“군의 사정이 급한데 무슨 시냐? 꼭 목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어주니

[이]적이 그제야 다시 군량과 병장기를 보내 주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연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보냈다. 

 

 

 

곽대봉은 이적에게 암호로 적힌 편지를 보내 군량을 요청한다.

 

고구려가 점령한 지역을 통과해 어렵게 이적에게 편지를 전달한 곽대봉의 전령은

하마타면 이적에게 목이 배일 뻔 했다. 

 

 

 

- 압록강을 넘기 위해 연남건과 대치하는 당나라 (667년 7월) 

 

보장왕 26년(667)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연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당나라는 평양에 있는 곽대봉에게 보급을 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으려 한다. 

 

 

 

- 이적의 식량보급을 지원하기 위해 

  신라군의 평양진군을 지시하는 칙명을 보내는 당고종 (667년 7월) 

 

신라 문무왕 년(667)  

 

가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당나라 황제가 칙명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삼고

요동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 황제가 대아찬 일원(日原)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는데,

왕은 [일원에게] 명하여 칙명을 왕궁의 뜰에서 받도록 하였다.

 

대나마 즙항세(汁恒世)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따라,

또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에 모이도록 하였다. 

 

당고종은 이적을 지원하기 위해 신라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 평양으로 출발하는 신라의 문무왕 (667년 8월) 

 

신라 문무왕 년(667) 

가을 8월에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신라군은 8월에 서울(경주)을 출발한다. 

 

 

 

- 한성정에 도착한 신라군 (667년 9월) 

 

신라 문무왕 년(667)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신라군은 한성정에 도착한 후 대기한다. 

 

 

 

- 신성을 공격하는 당나라, 신성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고구려 (667년 9월) 

 

보장왕 26년(667)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평양과 안시성을 공격하던 당나라는 이제 신성을 공격한다.

이는 연남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신성이 공격당하자 고구려는 구원군을 보낸다.

설인귀는 고구려 구원군을 물리친다. 

 

 

- 신성,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을 함락시키고

  국내성에 있는 남생을 구출하는 당나라 (667년 9월) 

 

보장왕 26년(667)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고간>이 나와 금산(金山)에 이르러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패하자,

우리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패주시켰으나,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에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 여 명을 죽이고,

남소[성]·목저[성]·창암[성]의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 군사와 합하였다. 

 

 

당나라는 신성으로 간 고구려 구원군을 물리치고 신성을 장악한다.

이후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을 무너뜨리고 국내성에 있는 연남생을 구원한다. 

 

 

- 남생을 구출하고 신성에 주둔하는 당나라의 글필하력 (667년 9월) 

 

보장왕 26년(667)

가을 9월에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글필하력을 시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 요하를 건널 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의 요해지이니

먼저 그곳을 빼앗지 않고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마침내 공격하니 성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연생을 구원한 당나라는 글필하력을 신성에 주둔시킨다. 

 

 

 

- 평양북쪽 200리(80Km)까지 진군한 이적,

   한성정에서 시간을 때우는 신라 (667년 10월) 

 

신라 문무왕 7년(667) 

 

겨울 10월 2일에 영공(英公)이 평양성 북쪽 200리 되는 곳에 도착하여

이동혜(?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었는데,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에 이르러 서신을 전하고 군사 동원 기일을 독려하니 왕이 그에 따랐다. 

 

 

 

신라는 한성정에서 한달 넘게 대기타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다. 

 

 

* 영공(英公) : 이적(李勣)

 

 

 

- 장새에서 군량을 전하고 돌아가는 이적 (667년 11월 11일) 

 

신라 문무왕 7년(667)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러 영공(英公)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 또한 돌아왔다. 

 

신라 문무왕 11년  

 

건봉(乾封) 2년(서기 667), 대총관 영국공(英國公)이 요동(遼東)을 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그곳에서 병사를 보내 국경에 모이도록 하였다.

 

신라의 군대가 홀로 쳐들어갈 수는 없어서 우선 세 차례 첩보병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띄워서 중국 군대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첩보병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말하기를

 

‘중국 군대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열어 통하게 해놓고,

중국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칠중성이 거의 깨질 무렵에,

영공의 사자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명령을 받았는데, 신라의 군대가 꼭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빨리 평양으로 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명령대로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는데,

중국 군대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어 신라 군대도 즉시 빠져 나왔다

 

 

11월11일이 되어 문무왕이 수곡성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적은 이미 식량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문무왕은 경주로 돌아간다.

 

 

 

- 신라가 군대동원 기일을 어겨서 열받은 이적 

 

신라 문무왕 11년

 

그러나 영공이 슬그머니 말하기를

‘신라가 이전에 군대의 동원 기일을 어겼으니, 반드시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에 들어갔는데,

당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적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이적은 667년에 신라가 늦게 도착하여 열받았다.

 

668년 당나라가 평양을 무너뜨렸을 때

이적은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적이 없다.' 라며 뒷끝을 작열한다.

 

 

 

- 이미 붕괴된 상태에 접어든 고구려

 
연남생의 구출작전으로 고구려의 국경은 당나라에게 무너진 상태에 접어 들었다.
이제 당나라의 마지막 한방 공격만을 남겨두고 있다.

 

 

 

- 평양성 정벌을 시작하는 당나라 (668년 1월)

 

신라 문무왕 7년(667)

 

12월에 중시 문훈이 죽었다.

 

당나라의 주둔하고 있는 장군(將軍) 유인원이 천자의 칙명을 전하여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 하고, 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

 

 

보장왕 27년(668)

 

봄 정월에 [당나라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김인문(金仁問)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당나라가 평양성 정벌을 준비한다.

신라는 평양성 정벌에 당나라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 비열홀주를 설치하는 신라 (668년 봄) 

 

신라 문무왕 8년(668)  

봄에 (중략)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

 

신라는 비열홀주{안변}을 설치한다.

 

 

 

- 부여성을 함락하는 설인귀, 무너지는 부여주 (668년 2월)

 

보장왕 27년(668)

 

2월에 이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3천 명을 거느리고

장차 부여성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은 것을 이유로 말렸다.

 

[설]인귀가

 

“군사는 꼭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고,

마침내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우리 군사와 싸워 이겨서

우리 군사들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주(扶餘州)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신성에서 남소성, 목저성까지 진군한 설인귀는 기세를 타고 부여성을 함락시킨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부여주의 40여성이 모두 항복한다.

부여성은 천리장성의 최북단에있는 성으로 지금의 적봉시 파림좌기 인근이다.

천리장성은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有里 <舊唐書199>라 하였다 

 

 

 

- 이적을 공격하는 5만의 고구려군, 설하수에서 패하는 고구려 (668년 2월) 

 

보장왕 27년(668)  

 

연남건이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어울려서 싸우다가 패하니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고구려는 이적을 공격하기 위해 설하수로 5만의 고구려군을 보낸다.

 

 

 

- 설하수에서 승리하고 대행성으로 진격하는 이적

 

보장왕 27년(668)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

 

이적은 설하수에서 승리하고 대행성으로 진격한다.

 

 

 

- 대행성에서 승리하고 압록책으로 모이는 당나라의 여러 군대

 

보장왕 27년(668)

 

[이]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綠柵)에 다달았다.

 

대행성이 무너지자 당나라의 여러 부대가 압록강으로 집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압록강에는 모인 부대는 글필하력, 학처준, 이적의 부대로 생각된다.

 

 

 

- 압록책애서 승리하고 욕이성을 함락시키는 당나라

 

보장왕 27년(668)

 

[이]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綠柵)에 다달았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 당항진에 도착한 유인궤 (668년 6월 12일)

 

신라 문무왕 8년 (668)

 

(6월) 12일에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

(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黨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에 우상(右相)은 [군사 동원기일] 약속을 마치고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유인궤가 당항성에 도착한다.

신라는 성대한 예식으로 유인궤를 환영한다.

당나라는 667년에 이적이 평양으로 진군하라고 신라에게 명령할 때

문무왕이 말을 안듣고 한성정에서 시간을 때운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유인궤가 직접 신라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오도록 하였다.

 

 

- 김유신을 중심으로 평양 정벌군을 편성하는 신라 (668년 6월 21일)

 

신라 문무왕 8년 (668)

 

(6월) 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 대곡성, 한성을 함락시키는 유인궤와 신라군 (668년 6월 22일)

 

신라 문무왕 8년 (668)

 

(6월) 22일에 웅진부성의 유인원이 귀간(貴干) <미힐>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다.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 및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 평양의 영류산에 도착하여 이적과 합류하는 신라군 (668년 6월 27일)

 

신라 문무왕 8년 (668)

 

27일에 왕이 서울을 출발하여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9일에 여러 도(道)의 총관들이 출발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질(風疾)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 영류산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신라는 평양에 도착하여 이적과 합류한다. 

 

 

 

- 최전방에 배치된 신라군, 사수벌판에서 평양성을 공격하는 신라 (668년 7월 16일)

 

신라 문무왕 8년(668)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에 이르러 여러 총관들에게 명하여,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싸워 크게 무찔렀다.

 

신라군은 최전방인 사천벌판에 배치되어 평양성을 공격한다.

 

 

 

- 한달동안 포위되어 고립된 평양성

 

보장왕 27년(668)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평양성은 한달동안 완전히 포위된 채 고립된다.

 

 

 

- 평양성이 한달동안 포위되자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보장왕

 

보장왕 27년(668)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보장왕은 백기를 들고 이적에게 항복한다.

 

 

 

- 평양성에 남아 항거하는 연남건

 

보장왕 27년(668)

 

연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연남건은 계속 항거한다.

 

 

 

- 연남건을 배신하고 평양성문을 여는 <신성信誠)>

   평양성울 불지르고 연남건을 사로잡는 당나라 (668년 9월)

 

보장왕 27년(668)

 

[연]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연]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보장왕 27년(668)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신성이 성문을 열자 당나라는 성에 올라가 성을 불지른다.

 

 

평양성이 난공불락이라 당나라가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라고 하는 의견이 있는데

당시 당나라는 힘들게 평양성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 당나라로 돌아가는 이적 (668년 10월)

 

보장왕 27년(668)

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고,

[다시]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치게 하였다.

 

 

신라 문무왕 8년 (668)

 

이에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적은 당나라로 돌아간다. 

 

 

 

- 무죄 처리되는 보장왕, 검주로 귀향가는 연남건

 

보장왕 27년(668)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왕을]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삼고,

중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으며,

이적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을 내리고,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귀양보냈다.

 

보장왕은 무죄. 연남건은 귀양형이다.


 

 

-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당나라, 

  2만의 병력으로 평양에 주둔하는 안동도호 설인귀

 

보장왕 27년(668)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668)이었다.

 

 

당나라는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지배한다.  

이로써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무너진다.

(하지만 안시성,요동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흥운동이 이어진다.) 

 

 

 

-  당에 항복하지 않았던 11성(城)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는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였다.
 절성(節城)은 본래 무자홀(蕪子忽)이었다.
 풍부성(豊夫城)은 본래 초파홀(肖巴忽)이었다.
 신성주(新城州)는 본래 구차홀(仇次忽)<혹은 돈성(敦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다.
 도성(桃城)은 본래 파시홀(波尸忽)이었다.
 대두산성(大豆山城)은 본래 비달홀(非達忽)이었다.
 요동성주(遼東城州)는 본래 오열홀(烏列忽)이었다.
 옥성주(屋城州)
 백석성(白石城)
 다벌악주(多伐嶽州)
 안시성(安市城)은 예전의 안촌홀(安寸忽)

<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하였다.>이었다.

 

 

 

 - 당에 항복한 11성(城)


 양암성(??城).
 목저성(木底城).
 수구성(藪口城).
 남소성(南蘇城).
 감물주성(甘勿主城)은 본래 감물이홀(甘勿伊忽)이었다.
 능전곡성(?田谷城).
 심악성(心岳城)은 본래 거시압(居尸押)이었다.
 국내주(國內州)<또는 불내(不耐) 혹은 위나암성(尉那?城)이라고도 하였다.>
 설부루성(屑夫婁城)은 본래 초리파리홀(肖利巴利忽)이었다.
 후악성(朽岳城)은 본래 골시압(骨尸押)이었다.
 자목성(?木城).

 

 

 

- 당에 항복하였으나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한 7성(城)

 

 연성(?城)은 본래 내물홀(乃勿忽)이었다.
 면악성(面岳城).
 아악성(牙岳城)은 본래 개시압홀(皆尸押忽)이었다.
 취악성(鷲岳城)은 본래 감미홀(甘?忽)이었다.
 적리성(積利城)은 본래 적리홀(赤里忽)이었다.
 목은성(木銀城)은 본래 소시홀(召尸忽)이었다.
 여산성(犁山城)은 본래 가시달홀(加尸達忽)이었다.

 

 

 

-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얻은 3성(城)

 

 혈성(穴城)은 본래 갑홀(甲忽)이었다.
 은성(銀城)은 본래 절홀(折忽)이었다.
 사성(似城)은 본래 사홀(史忽)이었다.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인지,

지금 화북성 노룡현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의자왕과 보장왕 일대기를 검토해 보았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중국 대륙의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중국의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마저도 믿을 수 없어 기록하지 않았다.

 

 

신라는 법흘왕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산국사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지어 쓸수는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니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대에 찌든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과연 어느정도 믿어야 할지..

 

 

당나라에 끌려간 남생의 묘지명에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이고 자는 원덕으로서, 요동군 평양성사람이다.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라고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의 평양성이 요동군이란 말인가?

 

 

중국인들은 산서성 대(代)인근에 있던 유주(幽州)를

 

지도에 한반도 북부까지 구무줄 늘이듯이 그려놓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아직도 일제의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