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충실하며 정체성이 약했던 조선왕조는

100년전 결국 일제에 의하여 나라가 망했다.

 

우리민족 5천년 역사상에서 이민족에게 주권을 빼앗긴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기초한 단절, 축소, 왜곡의 식민사학이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주류 행세를 하고 있다. 

 

중국의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에 있던 많은 지명들이

요나라의 건국이후 요령성인근으로 이치되면서

중국 대륙에 있던 우리 선조들의 흔적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통하여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 한것만은 아니다.

 

중국의 정사와 삼국사기, 남당유고, 한단고기 및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해 보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의 왜곡이

외적의 침입으로 사서를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왜곡이 되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고조선을 한낱 신화로 생각하고,

장수대제가 천도한 평양이 북한의 평양이고, 대동강 낙랑설을 굳게 믿고 있는

이병도의 후학인 강단사학자들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650년 신라 진덕여왕이 당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시작된

종중모화(從中慕華)사상에 찌든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철저하게 중국인의 입장에서 기록하였다.

 

김부식이 얼마나 중국의 입장에서 쓰고 있는지 살펴보자.

 

 

639년에 위징(魏徵)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가 교오불공(轎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 수양제가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적대국이니까 중국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쓸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어떻게 적혀있나하면,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

 

아(我) 교오불공(轎傲不恭)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아(我)가 교오불공(轎傲不恭)해서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이것은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쓴 것이지 우리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다.

 

 

삼국사기는 이런 정도로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 다음에 진덕여왕 4년에 영휘 연호를 썼는데 거기다 김부식이 주석을 달아났다.

 

"엣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야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까 허물을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종중모화(從中慕華)도 극에 달 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김부식이 대진(大震)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을

 

"동.북 양 부여사를 빼 버려 조선문화의 근원을 진흙속에 묻어버리고

발해를 버려서 삼국이래 결정(結晶)된 문명을 짚더미에 내던져 버렸다."

라고 통탄하였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사는 민족!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의식과 인식의 저변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자의 노예로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이유도 없이 일상에서 내뱉는 영어단어들를 보라!

 

우리말을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외국어로 지껄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라!

 

자신의 역사를 몰라도

세계사, 서양사를 줄줄 꿰야 지식인인 양 여기는 우리의 뇌구조를 보라!

 

한민족의 위대한 유산으로 여기는 한글을 팽개치고

각종 도안에 알파벳을 더 즐겨 사용하는 우리의 모습을 직시해보라!

 

한글을 사랑하자, 우리말을 사랑하자 하면서도

외국어로라도 써야 직성이 풀리는 방송자막의 제목을 한번 보라!

 

멀리 갈 것도 없이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적나라한 이중성이며, 자아상실의 현장이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 인식이란

지난 2천 년간 중국의 사필(史筆)에 의해 세뇌되었거나

일제에 의해서 일제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역사가 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고,

현재는 설상가상으로 서구의 인식과 가치기준이 더해져

본래의 우리는 변형, 왜곡되어 자기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이러한 자아상실을 청산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의식 있는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진행 중에 있기는 하나

이병도의 후학인 강단사학의 벽에 부딪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불리한 고대 사서의 사료들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실증사학에 기초한 고조선과 낙랑의 유물과 유적을 제시하라고한다.

 

고조선의 유물은 중국의 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만,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을 내세워 고조선의 기록들과 유물, 유적을 

자기들의 역사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역사는 남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발견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정체성의 원형을 발견하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역사관이란 실체가 없는 유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간 공자를 필두로 시작된 중화주의에 중독 되어

마치 남의 일처럼 중국인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았고,

일제시대에는 수천 년간의 폐해를 합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의식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한 식민사관이라는 일본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과거를 되찾아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를 바라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사실을 바탕으로 사관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우리의 비극은

사실을 모르면서 추측과 주장만이 난무하는데서 비롯된다.

(역사의 DNA에서 인용)

 

 

지금까지 흩어진 유리파편을 다시 주워 모아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고대사의 역사를 복원하였다.

 

추후에도 계속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고대사 복원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뇌리에 한 번 틀어박힌 고정관념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 나이가 들고 우리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否之匪人 盈虛消息 天行也(비지비인 영허소식 천행야)라

 

주역은 天地否 괘에서 고집과 편견, 고정관념에 빠진 사람은

內柔外剛小人으로 不通이며

가득차면 비우고 소멸하면 생기는 것이 하늘의 운행이라 하였다.

 

우물안의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하고,

여름벌레에게 겨울의 얼음을 이야기하면 마치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어떤 분이 나의 블로그에 댓글을 달면서 태클을 걸어, 사료를 들어 답변하였으나

도저히 그 사람의 고정관념을 바꿀 수 없어 삭제해 버렸다.

 

 

 

<우봉이씨 이완용 가계도>

 

왼쪽부터 매국노 이완용, 질손자인 민족반역자 이병도,

이병도의 두 손자인 이장무 서울대총장, 이건무 문화재청장.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손들이 아직도 정부 요직에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정신나간 정부가 역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으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의 질손인 이병도는 조상의 역사를 팔아먹었다.

매국노 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이병도가 팔아먹은 이 나라의 역사는 해방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병도는 매국노 이완용보다 더 나쁜 민족반역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명단. 2010.4.15 현재>

 

 

이건무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박물관 개관당시

대한민국의 뿌리역사인 단군 고조선의 역사를 뺀 장본인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직할기구였던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인의 혼, 즉 국혼의 상징인 단군 이전의 고대사를 왜곡,말살하였다.

 

그 조선사편수회의 말단 수사관으로 일했던 사람이 이병도였고 신석호였다.

 

식민사학의 대부였던 신석호는

해방 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했다.

 

마찬가지로 이병도 또한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교부장관을 역임하면서 

1955년부터 1982년까지 30여년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국사를 일본이 왜곡하고 말살한 식민사학으로 물들여 왔다.

 

그 이병도의 제자가 이기백 교수, 김철중 교수, 변태섭 박사 등이 있었고

이기백 교수의 제자 중 이기동 동국대학교 교수가 있다.

 

그가 식민사학, 반도사관에 충실한 이병도파의 선두주자로서

현 학계에 제일 많이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기동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의 현실이자 대한민국 역사의 현실이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지금도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5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①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입증한 13세 흘달단군 50년(BC 1733)의 오성취루 현상

 

② 발해 3대문왕 대흠무시 "대흥"이라는 연호의 환단고기 기록이

    정효공주묘비에서 입증된 점

 

③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를 세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 바,

    이것이 김병호씨의 저서 "고구려를 위하여"와 KBS역사스페셜(2001.5.16)에서

    입증한 점

④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단군 51년에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을 쌓은 바,

    지금까지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음

⑤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는데,

    환단고기에 구을단군이 전국 순행 중 붕어하여 평양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

 

 

규원사화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최소한 위의 5가지 사항을

논리와 역사적 정황에 맞는 반증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새로운 국사 교과서 개편에는

특히 고대사 분야는 강단사학 주장 일변도의 서술을 경계하고

새로운 견해들이 반영되어야 한다.

 

민족사학, 재야사학자들이 고대사 집필진에 함께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 고대사 분야 대표집필자엔 신형식 교수가 확정되었고

이기동 교수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병도의 후학들이다.

 

박성수, 윤내현, 이덕일, 심백강 같은 민족사학 계열의 학자는 줄곧 배제되었다.

좌우를 넘은 현대사의 공정한 서술과 함께

고대사에서도 민족, 강단의 관점을 아우를 수 있는 공정한 집필진 구성 여부에

이번 국사교과서 개편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이병도가 죽기 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한사군은 하북에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그의 후학들은 그들이 받은 박사학위 논문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그들의 밥줄이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선생이 죽기 전 노망이 들었다고 항변한다.

 

한 번 틀어박힌 그들의 고정관념을 바꿀 수 없으니

민족사학자들이 집필진에 참여하지 않는 한

새로운 국사 교과서의 내용은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 한 것이다.

 

 

 

-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이병도의 후학인 윤용구가 자랑스럽게 대동강 낙랑설로 박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동강 낙랑설로 박사가 된것을 자랑하는 윤용구는 최소한 아래 다섯가지애 대하여

논리적인 답을 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황하 하류에 있는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어느 산을 말하는지?

 

둘째 자치통감에서 건무 25년(49년) 요동요외의 맥인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노략질하여 요동태수 제융이 투항을 권유하였다 하는데

고구려가 지금의 환인지역에 있었다면 태원까지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는지?

 

셋째 612년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고구려가 발해(勃海)와 갈석(碣石)의

사이에 가득 차게 모여 요(遼)와 예(濊)의 땅을 거듭 침식하였다 하는데

고구려가 침식한 발해와 갈석은 어디를 말하는지?

 

넷째 남생의 묘비명에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북한의 평양이 당나라의 요동군에 속하는지?

 

다섯째 금나라의 아골타가 요를 공격할 때

연경으로 도망간 요주(遙主)를 붙잡기 위하여

산서성의 유주로 가서 유주 주민을 회유했다는데

유주자사가 산서성, 하북성, 요령성의 3성을 다스렸는지?

 

 

 

- 식민사관은 해방 후 어떻게 주류사학이 되었나

 

 

 

 

 

- 삼국사기 최치원전의 비밀

 

 

<전성기 때 고구려. 백제가 백만군사를 보유했다는 기록>

최치원과 관련하여 그 궤적과 사료를 찾다보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끄는 대목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 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과 제(齊), 노(魯)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

라고 되어 있어

기존의 한반도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할 고구려가
또한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어야 할 백제가
지금의 중국의 북경 유역에서부터 양자강 유역까지 중국 동해안 대부분의 지역을
강한 군사 백만을 보유하고 흔들고 있어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된다니
말이 될 법한 이야기인가?

유주와 연 지역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제나라와 노나라의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며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여

현 강소성과 현 절강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신라 최대의 석학이고 사상가이며 명문장가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불과 200년이 지난 뒤에 살았던 최치원의 말이다 보니
충격은 더 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기존에 배워왔었던 우리 역사가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5~7세기 중반 약 250년은 고구려.백제의 전성기>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기는 언제였었을까?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등극과 함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백제는 동성대왕 시절에 북위의 수십만의 기병을 일거에 몰살시키고
일곱 명의 태수를 하북, 산동, 강소성에 임명을 하였다는 내용을 상기한다면
이들 국가의 전성 시기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당시의 중국은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진(晉)나라가 망하고

여러 나라로 갈린 남북조 시대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의 전성기는 진나라가 망한 5세기 무렵부터

고구려 백제가 멸망을 하기 전의 7세기 중반까지의 약 250여 년이다.

위의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기술된 내용이 한반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과거에 배웠었던 역사의 인식하고 다르다 해서 위의 내용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최치원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강소성 양주인근 유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우리의 역사 유적지가 많이 있다.

양주의 8대 고찰중의 하나인 고민사(高旻寺)라는 절이 있는데

국가 중점 보호 사찰이다.

이 절의 창건과정을 기술한 것을 보면 수나라 때에 처음 건축이 되었었는데
원래 이곳에 의술(醫術)에 정통한 승려의 사당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왕이 금과 은 등 재물을 기증해 사원을 확장하여 세웠다하며
절을 건립할 때에는 고구려의 높을 고(高)자을 취하여

고민사(高旻寺)라 이름을 지었었다고 한다.

수나라 때에 건립이 된 것이었다면
고구려는 영양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해당이 되었을 것이고
이때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국운을 건 전쟁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하고 있었을 시기인데
기존의 역사인식대로라면 아무리 고구려 태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적국의 깊숙한 곳에 절을 세워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또한 양주에서 가까운 곳에 단양(丹陽)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곡아미주(曲阿美酒)라 불리는 봉항주(封缸酒)와 노황주(老黃酒)가 있는데
이 술들은 고구려 미인 아희와 수양제와 얽힌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강소성 금호(金湖)라는 지역에는 고려왕성(高黎王城)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강소성 지역에는 연개소문에 쫓겨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당태종이 세웠다는 몽롱탑 등
연개소문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지가 널려 있다고 함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위대한 문장가 최치원이 전하는 우리 역사의 진실>


최치원 열전 같은 기록은 삼국사기외에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신.구당서에는 고구려의 후예인 이정기(李正己) 장군이
평.로.치.청(지금의 하북성 일부와 산동성 그리고 하남성 일부) 지역에
저들은 절도사라 하고 있지만 제(齊)나라를 세워
이납(李納), 이사고(李師古), 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쳐 50여 년간 통치한 사실은

남북조 시대에 한족(漢族)의 나라들이 불과 3, 4십년 정도 밖에 존속하지 않았음에도
사서에서 자기들이 중원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우리를 한낱 보잘 것 없는
변방으로 기술하고 있는 행태와 비교를 하면

우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었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의 진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당서에 최치원이 열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를
고려 말의 학자인 이규보 선생은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중국인들이 최치원 선생의 글재주와 학식을 시기한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역사인식이 사물을 보는 관점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보잘 것 없는 변방의 역사로만 여겼던 우리의 역사인식이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을 통하여 얼마나 안위하고 좁았던가를 반성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만큼이나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철학 그리고 삶의 가치관을 잃어버린 것인 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이야말로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천하를 호령하고 살았었던 시대에 대한

속죄의 시작이 될 것이다.

최치원을 위대한 문장가 사상가로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도 우리가 밝히고 알려서
위대한 우리의 역사로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  大震國 略史

 

 

668년 9월   보장대제 개화(開化) 27년(668) 평양성 함락.  

                

                 振國 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今 란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000명 이었다.

                 함께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정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평양성은 장수대제가 천도한 지금의 노룡 인근이다.

대중상은 백산말갈추장으로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고구려가 망하자

그의 근거지인 개원(開原)에서 병력을 모아 동모산에서 후고구려국을 세운다.

 

 

699년 5월  중광 32년(699) 5월에 붕어하시니 묘호는 세조요

                시호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이다.

                태자 조영(祚榮)이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 계성(薊城)에서 무리를 이끌고 와 제위에 오름.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10만명의 군병을 모아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쳤다.

                말갈장수 걸사비우, 거란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군대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天門嶺)에서 대파하였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通)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6천리 땅을 개척하였다.

 

 

대조영은 속말말갈추장으로 영주(營州) 계성(薊城)에서

동모산으로 가서 대중상을 이어 대진국을 세운다.

 

 

715년       돌궐 보투르 칸의 딸 아시나씨와 혼인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던

               고려왕 막리지 고문간(高文簡)이 약 2000여 호를 데리고 당으로 돌아오자

               요서군왕으로 임명함<책부원구>

 

719년       천통 21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성무고황제라 하였다.
                태자 무예(武藝) {3대 광종(光宗)}가 즉위하였다.

                개원하여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오주목(烏珠牧)으로 정하니

                그 곳에서 동쪽 십리에서 황수(潢水)가 흐른다.

 

황수(潢水)는 란하 상류의 지류이다.

 

 

720년     당 현종이 대무예의 태자 도리행을 계루군왕으로 책봉함

 

722년    흑수부추장 니솔리게이를 당 현종이 발리주(勃利州)자사로 명함

 

725년     안동도호 설태(薛泰)가 청하여 당나라는 그 땅에 흑수부(黑水部)를 두고

             또 이땅 통치자의 동태 파악을 위해 직접 파견된 장사(長史)를 보내 감독함

 

당이 설치한 흑수부는 요서(今 조백신하 서쪽)지역이다

 

 

726년    대문예가 흑수부 공격의 불가함을 고하고 당으로 망명함

            대무예가 흑수부를 공격함

 

728년    당은 흑수말갈 추장에게 이헌성(李獻誠)이라는 당나라식 이름을 하사하고

            흑수경략사 직위를 제수함.

            4월 계미일 당에서 숙위 중이던 발해 왕자 도리행이 갑자기 죽음.

 

732년    인안 14년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당나라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登州)래주(萊州)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9월 등주자사 위준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에게 발해군에 대한 반격을 명함.

 

 

개마(蓋馬) 구다(句茶) 흑수(黑水)는 요서(今 조백신하 서쪽)지역을 말한다.

 

갈복순은 사서에 따라 개복순(蓋福順) 또는 개복신(蓋福愼)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대대로 개소문(蓋蘇文)의 아들 남생의 손자 현정(玄靜)이다. 

 

732년에 일어난 발해와 당과의 전쟁은 몽골계와 트루크계의 민족전쟁이다.

즉, 발해와 나당연합과의 전쟁이다.

 

발해의 서경인 압록부를 출발하여 산동반도의 등주와 래주를 공격한다.

 

발해의 서경인 압록부가 북한의 압록이라면

요동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의 공격을 피하여 공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동반도는 말갈→고구려→백제(무왕)→통일신라→대진국→요→금→원→청

이 차례로 차지하였으며 수,당은 지금의 란하유역까지도 진출한 적이 없었다.

 

발해 서경 압록부는 지금의 란하 유역에 있었고 란하가 서압록임을 알 수 있다.

 

 

 

733년      인안 15년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帶山)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郡)에 이르렀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케 하였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河西)의 니하(泥河)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 북쪽 이천(泥川)이 그곳이다.

             

              해주(海州) 암연현(岩淵縣)은 동쪽으로 신라(新羅)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瓮津)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정월 정사(丁巳)날 이번에는 당나라 군대가 발해로 진공함.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왕 대무예를 치게함.

              며칠 뒤 경신(庚申)일에 당나라 태복원외경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함.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병사가 얼어 죽은 사람이 반이 넘어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감.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 在縣西南 東北至海州 一百二十里<요사지리지 암연현>

 

암연현 동쪽은 신라와 경계를 이루고 옛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해주는 암연현의 북동쪽 120리에 있다.

 

 

요서의 

대산(帶山) 동남쪽이 대방(帶方)이다.

 

요사지리지 암연현(巖淵縣)조는 우리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암연현은 淸의 발흥지인 흥경(興京)인근이며 그 동쪽이 신라의 길림과 경계를 이루고

서남쪽에 옛 평양성{요양, 관구검의 난으로 천도한 평양}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는 10만의 대군으로 발해의 남경{해성}지역을 공격한다.

 

대진국본기는 신라 병사가 얼어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공을 이루지못하고 돌아간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중국 사서의 기록에 당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今 압록강}이남의 땅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발해는 그 영토의 많은 지역을 신라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요서(今 조백신하 서쪽)지역은 당과 발해의 격전지이고

암연(巖淵){今 신빈만주자치현}지역은 신라와 발해의 격전지 였음을 알 수 있다.

 

 

 

 

735년    인안 17년 송막(松漠)에 12성을 쌓고 또 요서에 6성을 쌓았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강역이 9,000리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가 모두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 사람 셋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송막 12성은 거란의 침략에 요서 6성은 당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736년    인안 18년 3월 안민현(安民縣)에 감로가 내렸다.

             예관이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 할 것을 청하므로 그에 따랐다.

             이 달 16일 서압록하 상류에서 삼신일체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

             서압록하는 옛 고리국(高離國)의 땅이다.

 

 

안민현(安民縣)은 서압록{今 란하}의 동쪽이다.

 

 

737년    인안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欽茂){4대 세종(世宗)}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동경의 용원부는 거란지리지도의 신상경(新上京)이다

 

738년    대흥 2년 태학(太學)을 세우고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론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1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弘益)하는 교화(敎化)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758년   대흥 22년 병사들이 군의 통수자 <이희일>을 쫒아내고

           <정기(正己)>를 세웠다

 

781년   대흥 45년 치청(淄靑)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으로, 평로(平盧){범양(范陽)}에서 태어났다.

           <이정기>가 죽자 아들 <납(納)>이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솔하였다.

 

792년   대흥 56년(792) 납이 죽자 아들 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793년   대흥 57년(793)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세종(世宗) 시호(諡號)를 광성문황제라했다.

           나라 사람들이 그 친족 아우 원의(元義)를 옹립하였으나

           원의는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원의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흥(華興){6대 인종(仁宗)}을

           맞이하여 옹립하였다. 연호를 고쳐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794년  정력 원년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인종(仁宗)

           시호(諡號)를 성(成)황제라 하였다.

 

806년   정력 13년 사고가 죽자 그 집 사람들이 발상을 하지않고

           몰래 사람을 보내 밀(密) 땅에서 (이복동생) 사도(師道)를 맞아 들였다. 

 

818년   건흥원년 성종 선황제가 즉위하였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의 7주를 두고

           북으로는 염해(鹽海), 나산(羅珊), 갈사(曷思), 조나(藻那), 석혁(錫赫) 

           및 남북 우루(虞婁)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安遠)이라하고

           목단의 동쪽을 철리(鐵利)라 하고 흑수 위를 회원(懷遠)이라하고

           난하의 동쪽을 장령(長嶺), 장령의 동쪽을 동평(東平)이라 하였다.

           우루는 북대개마{대흥안령산맥} 남북에 자리잡고 있다.

 

           땅의 넓이 9,000리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로는 국도로부터 밑으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봄가을에 관리의 공적을 조사하고 뭇 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천거하였다

 

           오대의 흥망시기 야율은 빈번하게 몇 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인 청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신라는 이때 만주지역을 발해에게 넘겨주고 강역이 압록강 이남이 된다. 

 

 

예종 정유 12년(1117)

 

포주를 의주(義州) 방어사(防禦使)로 고치고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갑오일에 백관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그 표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압록강 일대는 신라의 옛지역으로서

조상 때부터 우리 나라의 관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엽의 쇠퇴로 인하여 요나라에 침략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만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귀신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쳐 부술 때

금나라에서는 고려가 요나라에 빼앗긴 보주(保州)를 고려에 돌려준다.

 

이 보주를 포주 또는 파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고려는 이 보주를 회복하여 다시 의주로 이름을 바꾼다.

 

이 의주를 찾고난 후 백관이 올린 표문에 의주 지방인 압록강 일대가

고구려의 옛지역이라고 하지 않고 신라의 옛지역이라고 하였다.

 

바로 신라의 영토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니하(泥河)까지라는

요사(遼史)의 기록과 일치한다.

 

 

 

 

※ 참고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기 7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기 818년에 4대 58년간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唐楸)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연개소문과 대조영은 고구려왕족의 서자(庶子)이다

 

 

군(君)의 휘(諱)는 헌성(獻誠)이며 자(子)도  헌성(獻誠)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인이다.

 

무릇 길게 물결치고 넓게 퍼져 나가서...해의 자식처럼 되었으니,

가지와 잎이 성하고 울창해져서 세세토록 번상(蕃相)이 되었다.

 

증조인 태조(太祚)는 본국 고구려에서 막리지에 임용되었으며,

병권을 장악하여 기세가 삼한(三韓)을 제압하고

명성은 오부(五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중략)

바닷가 동쪽이여, 옛날에 주몽(朱蒙)이 있었도다.

강을 건너 나라를 세우니 세업(世業)이 드높도다.

드높은 세업이여, 부목(扶木)의 가지와 이파리(枝葉)이라.

그 가지와 이파리는 대저 누구인가, 진실로 천씨(泉氏)로다

<泉獻誠墓誌銘>

 

천헌성(泉獻誠){연개소문의 손자, 남생의 아들(659-701)}의 가계가

주몽의 가지와 이파리에서 나온 후손이라는 말이다.

그 할아버지 개금(蓋金), 달리 개소문(蓋蘇文)은 주몽의 후손으로

명치대제 문자왕의 현손이었던 것이다.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이 기(氣)를 느끼고 체천(遞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뜨는 곳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비록 성진(星辰)과 바다와 산악이 변방지역에 걸려 있지 않았어도

예절과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하여,

가(家)를 잇고 세(氏)를 받았으니 군(君)은 그 후예이다.

<男産墓誌銘>

 

천남산(男産){연개소문의 3子,(639-701)}의 큰형 천남생(泉男生)(634-679)의

묘지명은 남생이 요동군 평양성인(遙東郡 平壤城人)이라고 하였는데 비해,

아우 천남산의 묘비명은 그기 요동조선인(遙東朝鮮人)이라고 쓰면서 동시에

그가 주몽의 후손임을 말하고 있다.

 

 

 

총장 원년(總章 元年)에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깨어 부시고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儀鳳) 3년에 그 왕족을 하남과 농우에 옮기니

고구려 왕족의 남은 서자들(고구려殘孼){대조영}이 무리로 모여

북의 태백산 아래에서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

<최치원열전>

 

고구려 잔얼(殘孼)이라는 말은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족의 서자라는 것이다.

 

 

연개소문과 대조영이 고구려 왕족의 곁가지 즉, 고구려 왕족의 서자라는 것이다.

 

 

 

 

※ 연개소문의 가계도

 

 

羅雲(462-519) <명치대제 태종 효제 재위 492-518>

     |

文藏(알론자 칸)(495?- )

     |

淵子遊(타타르 칸)(520?- )

     |

太祚(부코 칸)(553?- )

     |

淵(泉)蓋金 淵(泉)蓋蘇文(알무잔나 칸)(603-657)

     |

泉男生(안실 칸)(634-679)-泉男建(에트시즈 칸)(636?- )-男産(오두 칸)(639-701)

     |

獻誠(보이두 칸)(659-701)

     |

玄隱(689?- )-玄逸(691?- )-玄靜(蓋福順)(수윤지 칸)(693?- )

    |

 

 

 

 

대조영의 가계도

 

 

平成(陽原大帝)(알론자 칸)(518-559 ) 재위 545-558

    |

모골 칸(548?- )

    |

오이 칸(578?-)

    |

율두즈 칸(608?- )

    |

乞乞仲象(맹글리 칸)(625?-699)

    |

大祚榮(645?-719)-大野勃(탱기즈 칸)(660?-742)

    |                          |

大武藝(680?-737)  大壹夏(엘 칸)(700?-733)

    |                          |

大都利行(700?-728) 大潤(키얀)(720?- )

    |                          |

네쿠즈(716?- )          ?

                               |

                             金行(황금항아리)(800?- )

 

 

 

 

 

 

 

- 발해의 멸망과 遙의 건국 略史

 

 

872년        야율아보기가 질라부(迭剌部)에서 태어남

 

901년        야율아보기 질라부 대인이 됨

 

902년         31세인 902년에 거란군 40만을 동원하여

                 산서성 북부를 정벌 포로 9만 5천명을 끌어다가

                 용화주(龍化州)를 설치하고 건국의 기초를 세움.

                 용화주는 서요하와 적봉시 노로아호가 합쳐지는 곳이다.

                 아래 거란지리지도의 王府이다.

 

903년 3월  요서로 진출한 여진을 정벌하고 3백호를 사로잡음

          9월  하동과 회원군 공격

        10월  계(薊)의 북쪽을 공격

                 우월, 총지군국사에 배수 됨

 

904년       용화주와  요서에 진출한 실위를 공격 

 

905년       실위를 공격 

                하동절도사{산서성} <이극용>과 동맹하여 하북절도사 <유인공>을 공격

 

 

 

* 참고

 

이극용(856~906) : 당말(唐末)의 군웅(群雄), 후당(後唐)의 태조,

돌궐족으로 황소의난 평정에 공이 있어서 883년에 하동절도사로 임명됨,

황소의 부하로 항복한 주전충과 세력다툼을 벌이는 군벌로 성장하였으나

태원에서 주전충에게 패함.

 

주전충 (852~912) :오대(五代) 후량(後梁)의 태조(재위 907~912)

안휘성 출신으로 본명은 주온,

황소의 부하로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관군에 항복하여

당나라 희종에게 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황소의 잔당과 군벌을 평정,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나
당나라 소왕을 죽이고 애왕을 세워 그에게서 황위를 선위 받아(당나라 멸망 907년)
개봉을 수도로 양나라를 건국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자기 아들에게 살해당함.

 

 

906년 2월  <유인공>을 공격하고, 산북(山北)의 해(奚)를 공격 함

 

       

907년         팔부대인{칸}으로 추대됨

907년 2월   黑車子지역의 실위(室韋)를 정벌

                 실위는 거란지리지도의 北海에서 적봉유역까지 진출한 부족이다 

907년 7월   산해관 동쪽의 평로성에 투항한 당나라 장수를 안치 함.

 

 

908년 5월  오환 흑차자 실위를 공격

 

 

909년 10월 흑차자 실위를 다시 공격하여 대릉하 동쪽으로 진출함

 

 

911년          해(奚)를 정벌하여 해(奚)의 다섯 부족을 거란에 복속시키고

                  대릉하구까지 진출함

911년  3월   난하 하류로 내려가서 계주(薊州)를 차지함,

 

 

912년  3월   幽州를 공격

912년  7월   平州를 공격

912년10월   平州를 차지함.

 

 

913년 1월    幽州를 함락시키고 차지함.

                  야율아보기 동생 <라갈>이 도읍에서 반란하여 큰 타격을 받고 평정함.

 

 

915년 10월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신라, 고려등에서 사자를 보냄.

                  이 압록강은 지금의 서요하이다.

 

 

916년          거란의 황제로 즉위. 연호를 신책으로 함.

916년  7월   친정하여 서쪽의 돌궐등을 평정함.

916년 10월  진나라(石晉)의 삭주, 울주, 신주, 무주, 위주등을 차지함.

                  즉 산서성의 대북(代北)에서 음산까지 차지함.

 

<야율아보기가 칭제하며 건국한 수도 파림좌기의 박물관 광장에 있는 그의 동상>  

 

 

917년          新州에서 儒州연합군을 무찌르지만 儒州城을 공략하는대 실패함,

 

918년   3월  임황부에 황성을 짓는데 발해등이 사자를 보냄.

918년 12월  요양고성{동경}으로 행차함

 

919년   4월  요양고성에 漢인들과 발해인들로서 요양성을 고치고

                  그곳에 동평군(東平郡)을 세움.

                  요양은 관구검의 난으로 천대제가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임

 

921년  12월 檀州 백성과 順州 백성을 각각 요양시 동평군과 심양시 심주로 이주시킴

 

923년         란하의 노룡현에 있던 평주를 차지하여 요나라의 평주를 설치함.

 

924년         발해가 대릉하의 요주(遙州)을 약탈함.

                 요양, 심양을 빼앗겼던 발해가 대규모 반격을 해온 것이다.

                 발해가 요나라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백성들을 끌어갔으므로

                 (薊) 주민을 옮겨서 요주를 채우도록 함.

 

925년  9월   란하에 가서 각석기공하고 돌아옴.

      윤12월   임진에 목엽산에 제사하고 10일후인 임인에 오산(烏山)에서 제사하고

                   8일후인 기유에 살갈산(撒葛山)에 이르고

                   8일후인 정사에 상령(商嶺 今장령현)에 이르고

                  그날밤 부여부{임황 발해 상경용천부}를 포위한다.

                  이틀후 춘정월 기미일에 백기가 태양을 통과하더니

                  다음달 경신일에 부여성을 함락하여 그 장수를 죽인다.

 

 

926년 1월   발해 애제 21년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태양을 관통하였다.

                 경신일에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했다.

                 또 동평부가 함락되었다.

                 병인일에 늙은 재상이 이끄는 군대가 패하였다.

                 이 날 밤에 홀한성이 포위되었다. 기사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신미일에 왕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을 끌고서

                 신하 3백여 명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요나라 임금이 이들을 예우한 뒤에 돌려보냈다.

                 병자일에 요나라 임금이 측근 신하인 강말달 등 13명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 병기를 수색하도록 했는데,

                 발해 순라군이 이들을 살해하였다.

                 정축일에 왕이 다시 성을 수비하자

                 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함락되어 요나라 임금이 성에 들어왔다.

                 왕이 그의 말 앞에서 죄를 청했고,

                 요나라 임금은 왕과 왕족들을 병사로 호위시켜서 성을 나왔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0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일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천복성으로 바꾸었다.

                 또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임명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요나라 임금은 임황 서쪽에 성을 쌓고 왕을 그곳에 거주시키고,

                 왕에게는 오로고라는 이름을, 왕후에게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내렸다.

                 오로고와 아리지는 요나라 태조와 그의 부인이

                 발해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 이름이다.  

 

 

요사지리지 동경도 황룡부를 보면 요나라 용주(龍州)는 원래 발해 부여부였고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죽었다.

 

황룡을 보아서 황룡부라고 했는데,

보령7년(975)에 발해인 <연파>가 반란하여 폐지했다가

개태9년(1020)에 성을 동북방으로 옮기고

종주(宗州)단주(檀州) 백성으로 채웠다고 하였다.

 

한편 통주의 설명을 보면 본래 통주는 부여국왕성이었고 발해 부여성이었으나

태조가 용주로 고쳤다가 성종때 통주로 고쳤는데

보령7년(975)에 반란으로 인하여 연파를 따르던 천여명을 옮겨서 만든 것이다.

 

즉 통주는 부여성 사람들.

즉 용주 사람들이지만 장소는 반란으로 인하여 옮겨진 것이고

본래 부여국 왕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요의 황룡부가 발해의 상경 용천부이고,

해부루가 건국한 동부여의 왕성인 가섭원이 있던 곳이다.

 

 

 

<발해의 부여부 및 동부여의 가섭원>

 

 

 

<金, 淸 발흥지>

 

 

 

<허투아라(赫圖阿拉)(신빈(新宾)만주족 자치현)에 있는 누루하치의 동상>

 

 

 

 

 

-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東牟山)은 어디인가?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을 일반적으로 현 길림성 돈화현의 오동성(敖東城)일대나

심양 동쪽 천주산(天株山)으로 보고있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그 위치를 현 내몽골로 기록하고 있다.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은 과연 어디일까?

 

 

만세통천{696-697년} 연간에

거란 이진충이 영주(營州)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리(舍利) 걸걸중상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그리고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났다.

 

요수(遙水)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을 차지하였다.

 

오루하(奧婁河)를 의지하고 수림(樹林)을 벽으로 삼아 굳게 지켰다.

 

무후(武后)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다.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 죽였다.

 

이때에 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패잔병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해고는 이를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이끌고

해고에게 맞서 싸우니 해고는 패전하고 돌아왔다.

 

거란이 돌궐에 붙어서 왕사(王師)의 길이 끊겨서 그들을 치지 못하였다.

<신당서 발해전>

 

 

11년{700년} 하동(河東)의 군사를 이끌고 거란을 토벌할 때에

해(奚)에게 통고하기를

'저들이 맹세를 저버렸으므로 내가 장차 이를 토벌하려하는데 

너희는 나를 도와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해(奚)에서 군사 2천을 내어서 향도(鄕道)를 하였다.

 

토호진하(土護眞河)에 이르러 안록산이 계책을 내어 말하길

'길이 비록 멀지만 내가 질풍같이 달려 적을 추적하면

적이 대비를 갖추지 못한 것을 틈타서 이를 쳐부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모두 밧줄을 하나씩 가지도록하여 거란을 포박하고자 하였다. 

 

밤낮으로 3백리를 행군하여 가서 천문령(天門嶺)에 이르렀을 때

큰 비를 만나는 바람에 활이 이완되어 화살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신당서 발해전>

 

天門嶺在土護眞河北三百里(胡三省注)

천문령은 토호진하 북쪽 3백리에 있다.

 

토호진하(土護眞河) 적봉(赤峰)의 동쪽에 있는 노합하(老哈河)이다.

 

그리고 대조영은 오루하를 의지하고

수림을 벽으로 삼아 굳게 지켰다(樹壁自固)고 하였다.

 

이 문장은 발해 초기 대조영의 근거지 지형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즉, 삼림이 울창한 곳을 의지한 것을 가리킨다. 

 

내몽골에서 삼림이 우거진 곳은

곧 '천리에 걸쳐 소나무숲이 이어져 있다'는 천리송림(千里松林)일 것이다.

 

위의 글들을 요약해 보면 대조영은 현 하북성 일대에 있다가

거란의 이진충과 당의 핍박을 받자,

요수(今 조백신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오루하를 의지하고 수림을 벽으로 삼아 지켰다.

 

거란의 이해고가 이를 치자 대조영은 천문령을 넘어 달아났다.

 

천문령은 현 내몽골자치주 노합하의 북쪽 3백리에 있다.

 

결론적으로 발해 초기의 근거지는 내몽골 천리송림이 펼쳐진

송막(松漠){今 파림우기 서쪽 임서진(林西鎭)}으로 추정된다 

 

 

영주(營州)는 지금의 조양이 아닌 북경 서남쪽 보정시 북단이고

요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닌 조백신하이고

태백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닌 하북성과 내몽골 경계의 산임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 발해의 영주도(營州道)

 

 

발해는 수도 상경용천부를중심으로

주변국과 연결되는 5개의 주요한 교통로가 있었는데,

일본도,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라고 하였다.

 

이중 발해의 사신이 당으로 입국하기 위해 이용한 교통로는

당의 동북 변경 요충지인 영주(營州)를 통과하는 영주도(營州道)와

서압록{今 란하}을 건너 등주(登州)에 이르는 조공도이다.

 

발해와 당을 연결하는 영주도를

신당서 지리지 기미주(羈靡州) 말미에 언급된 도리기(道理記)를 통하여 알아보면

영주도는 육로로 상경용천부에서 홀한하(忽汗河)를 건너 장령부(長嶺府)를 거쳐

고개모(古蓋牟),신성(新城)을 지나 다시 서남쪽으로 안동도호부{今 노룡}에 이르고

안동도호부 서쪽으로 요수{今 조백신하}를 건너 여나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연군성(燕郡城)을 지나 영주(營州)에 이른다고 하였다.

 

 

 

<발해의 營州道 및 上京 용천부>

 

 

 

 

 

- 金 始祖 함보(函普)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가, 대야발의 후손인가?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나이 이미 60세였다.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해 뒤를 따르지 않으며 고려에 잔류하면서 말하길"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서로 모여 만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하여 <함보>는 <보활리>와 함께 갔다.(중략)후에 아들을 낳아 <오로> <알로>라 하였고 딸 하나를 낳아 <주사판>이라 하였는데이로써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후략)<金史>

 

 

金 태조 아골타는 함보의 8세손이다.

 

함보의 6세손 오고내는 1021년생이다.

 

함보가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면 경순왕이 897년생이므로 아무리 빨라도 마의태자는 915년생, 함보는 935년생으로 추정 해 볼 수 있다. 

 

함보의 장남 오로는 함보가 60세를 지나 완안부에서 낳은 아들이다.

 

오로는 서기 995년 이후 출생하게 된다.

 

오로의 5세손 오고내가 1021년생이므로 함보는 경순왕의 손자가 될 수가 없다.

 

 

함보를 1세기전인 840년생으로 추정하면 오로가 902년경 출생하게 된다.

 

그러면 아골타의 가계도에서 보듯이 오고내까지의 가계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함보는 경순왕의 손자가 아니고, 대야발의 6세손인 것이다.

 

 

금사에서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궁예(881-918)가 900년에 세운

후고구려를 말하고

함보는 60살인 900년경에 후고구려에서 여진 완안부로 간 것이다.

 

 

<함보, 보활리, 아고내 후손의 이동로>

 

 

 

金 태조 아골타의 가계도

    

 

                  大野勃(팅기즈 칸)(670?- )

                      |

                  大壹夏(엘콘)(700?- )

                        |         

                     大閏(키얀)(720?- )

                        |

                        ? (760?- )         

                        | 

                     幸(800?- )

                   황금항아리

                      |

        阿古迺 - 函普(840?- )> - 保活里(842?- )                      

                    900년경 완안부로 건너감

                      |

                     烏魯(902?- ) - 斡魯 - 注思板

                     德帝

                      |

                     跋海(930?- )                                

                     安帝

                      |

                     綏可(960?- ) - 謝里忽                                 

                     獻祖

                      |

                     石魯(990?- )                                              

                     昭祖

                      |

                     烏古乃(1021- 1074)(活羅) - 拔黑      

                     景祖

                      |

                     劾里鉢(1039-1092) - 頗刺淑(1042-1094) - 盈歌(1053- )

                     世祖                         肅宗                         穆宗

                      |

                     烏雅束(1061-1113) - 아골타(1068-1123)    

                     康宗                         金 太祖 재위 1115-1123

 

 

 

 

※ 칭기스 칸의 가계도

 

 

                  大野勃(팅기즈 칸)(670?- )

                      |

                  大壹夏(엘콘)(700?- )

                      |         

                    大閏(키얀)(720?- )

                      |

                      ? (760?- )         

                      | 

                   幸(800?- )

                   황금항아리

                      |

        阿古迺 - 函普(840?- )> - 保活里(842?- )                      

                                                |

                                            콩글리우트

                                                |

                                            미사르 울륵 

                                                |

                                            코리 메르겐

                                                |

                                            알란 고와

                                                |

                                            보잔 자르

                                                |

                                              보카

                                                |

                                            도톰 메넨  

                                                |

                                             카이도

                                                | 

                                            바이싱 코르

                                                |

                                            툼비나이

                                                |

                                              카불

                                                |

                                            바르탄

                                                |

                                            예수게이(1135-1171)

                                                |

                                      칭기스칸(1162-1227)  

 

 

 

 

 

- 조선이 몽골의 뿌리

 

주채혁[Kimdonggill 의 Freedom Watch 2015/11/23 월요칼럼]         

 

 

 

1990년 북방사회주의권-순록양 유목태반권 개방후

사반세기 시베리아몽골만주라는 북방유라시아 답사는,

농경권의 내가 유목권의 돌아버린 널 보고 좀 미친 사람이라 치부해오다가

결국 답사가 심층단계에 들어가면서는

나도 돌아버리는 과정이었다고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정보화시대의 유목성이나 바이킹 성을 갖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연구에는 관계정보의

폭주로 그 나름의 그 역사 인식 격변 요구를 감내할 수밖엔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보수나 진보 차원의 역사인식 발전 천착으론 풀 수 없는

좀 더 근원적인 심층차원의 문제가 게서 제기되고 있음을 감지케 되는 까닭이었지요.

 

아득한 옛 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지내어온 저 유목민 생활의 동경과 희구가

아직도 우리의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되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월간중앙3~7; 1936년 폐간).

 

3.1독립운동 직후니까 좌우대립보다는 망국의 한에 사무쳐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반파시스트 투쟁이 시급했던 시절인 1921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참여를 위해 모스크바로 갈 적에,

당시의 그 험악한 몽골초원(Steppe)을 굳이 몸소 직접 횡단하며

몽양선생님이 술회한 글의 일단입니다.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여기에 가져오는 건 우리민족의 기층혈관(DNA)

유목민의 혈맥이 뛰고 있다는 말씀 때문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통일 분위기 조성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당시 그 분의 겨레대중에 끼치는 영향력의 심대함 때문에

우리가 몽골에서 왔다는 고정관념이 이 땅에 깊이 젖어 자라온 터에,

그런 필자의 몽한겨레사 인식 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간 필자가 만나온 관계 몽골전문연구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이와는 정반대여서이지요.

 

몽골이 도리어 조선부여고구려(Boka: 늑대=渤海는 이에 내포)에서 왔다는 게

통설이었습니다.

 

그럼 이 상반되는 몽한관계사 인식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애초부터 착오이거나 조선부여고구려사 인식이 서로 판이하게 다른 측면이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필자는 당연히 후자에 방점을 찍습니다.

 

유목태반사적 인식이 거세된,

동해 물과 백두산으로 상징되는 비유목지대 T자형 백두대간 생태권 진입 이래

우리 한국사가들의 한민족 유목태반 기원사(起源史) 왜곡에서

기인(起因)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건 현재의 어떤 대내외 한국사 인식사례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본질적인 한민족 주류 유목태반 기원사(起源史) 왜곡인식이라고 감히 지적해봅니다.

 

비유목지대 지금의 한반도 한국인으로 보면

유목지대 몽골에서 한국으로 온 게 사실이지만,

한민족 고대제국 탄생과 회임(懷妊-주류집단 DNA 選定)이란

한민족의 시원역사 차원에서 보면 칭기스칸 몽골은

유목태반 기원(起源) Chaatang조선부여고구려발해(Boka-늑대: 유목의 상징 국명)

에서 왔다는 게 맞을 수 있다는 겁니다.

 

기마 양유목민이 창업한 몽골제국이 철기 수용 후 순록치기(Chaatang)에서

혁명적 황금빛 기마 양유목생산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토대 위에 비로소 이루어진 건, 유목생산혁명사상 엄연한 사실이어서이지요.

 

그 기축역사는, 몽골의 기원지 에르구네(多勿都)가 있고

몽골-선족(鮮族)의 조상제사 성지 가셴(嘎仙) 화강암 동굴(洞窟)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고구려 창업기지 흘승골(紇升骨)로 보이는 부이르호반의 할힌골성과

거대한 고올리 논벼 농장터가 있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숑크() 타반() 톨로고이() 스텝에

고올리칸(東明: Tumen) 석인상이 엄존하고 있는

호눈선원(呼嫩鮮原: HoNun Sopka & Steppe) 순록치기의

황금빛 기마 양유목생산혁명기지유적이 상기 실존함에 근거를 둡니다.

 

 

 

<지구 생명체 유전자지도[Science2013 所收]>

 

 

산업혁명 이후 영국인의 신대륙진출-미국 창업은 있을 수 있고,

철기를 수용한 스키타이(鮮族: 순록치기들) 황금빛 기마 양유목 혁명 이후

소욘(: Sugan)족의 몽골만주동해물과 T자형 백두대간지대 진출 창업은

허구일 뿐이란 억설이 이 디지털 노마드시대-유전체학 시대에도

아직 마냥 계속 남아만 있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실크로드 경주 2015 유라시아 문화 특급’[821~1018]이라는

제법 큰 규모의 행사가 경주에서 열렸습니다.

 

실크로드의 문화핵심은 스키타이 유목황금문화이고 그 꽃 중의 꽃은 금관인데

그게 만개한 건 중국의 서안도 물론 일본열도도 아닌 한국의 경주인만큼

메소포타미아의 용접(鎔接)기술이 적용된

신라 금관의 금루세공예품(金縷細工藝品; Granulation)

페르시아 대상을 통해 직접 경주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

[정명호 한국 고대 금속용접공예기술에 대한 고찰」『실학사상연구

12 무악실학회 1999],

 

경주가 강조된 건 천백번 잘 한 일이지요.

 

더욱 적극적인 국가차원의 연구지원이 절실한 터입니다.

 

 

다만 흑해연안 우크라이나 언저리 스텝 일대의 황금문화가

중원대륙의 서안이나 일본열도 어느 곳도 아닌 태평양으로 활짝 열려있다고는 하지만

왜 하필 한반도 남동쪽 한국 경주에서 그렇게 만개했는지

그 역사적 엔진은 진정 무언지를 밝히는 문제의 핵심 천착과제는,

문제 제기조차 안 된 게 매우 유감스러웠습니다.

 

 

북방 유라시아 유목 오랑캐에게 무슨 문화가 있겠느냐는 단견(短見)

여전히 견지하는 시대착오적인 편협한 연구자도 없진 않지만,

스키타이 황금문화야말로 엄연한 오랑캐유목민의 인류사상

매우 찬연한 일대의 유목문화입니다.

 

그래서 디지털 노마드시대엔 한민족 주류 유목태반 기원(起源) DNA’

실마리를 잡지 않으면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으라라 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유전체학 시대에는, 녹색의 중(Sino-Japanese)과 확연히 구분되는

연청색의 광대한 Paleartic ecozone(舊北亞區 生態帶)에 속하는

한국(Korea)을 그려낸 B·G Holt et al지구 생명체 유전자지도

[Science2013 所收; 이홍규 교수님 檢索]는 최소한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동북아시아 고대제국 창업의 기본 틀을 주로 유목 주도 농경 통합형 유목제국

(Pastoral nomadic empire) 기원(起源) 시각에서 접근해야 된다는 핵심문제를

이 미증유의 유목사 정보 쓰나미시대에 예서 적시해 제기하려는 겁니다.

 

이 시대엔 망국 직전의 구한말 어느 집권층 주류 일부처럼,

자국사 인식에서 대책 없이 무한 쇄국하는 비극은 더는 없어야겠지요.

 

당연히 몽골고원이나 바이칼 호 일대가 아니고

순록치기 Chaatang태반인 레나 강이나 예니세이 강 수림툰드라~툰드라에서

그 심원한 한겨레 유목 DNA를 찾아내가야 할 겁니다.

 

대체로 치우(蚩尤)의 조족(朝族)은 레나 강 언저리에서,

Scythia-선족(鮮族)은 예니세이 강 언저리에서요.

 

그리고 양자가 통합~화합된 유목제국의 자체 내 원형으로

단군 조선(朝鮮)DNA뿌리를 과감히 천착해 내봐야겠지요.

 

탄생일이 아니라 회임일(懷妊日)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래야 비과학적인 단일민족 운운이 아닌 정보화시대유전체학시대

드넓은 한겨레 생업 중심 태반의 총체적 유목 기원(起源) 본향

불함(不咸: Burqan)이 보이겠어서입니다.

 

적어도 한()족의 장성 이북마저도 중국하는 엉뚱한 비약은 너머서야

우주로 열리는 한()겨레 천손족의 공활한,

나의 주류 유목태반 정체성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참 시야가 트이지 않을까요?

 

라시드 앗 딘집사(Jāmi‘ al-Tavārīkh)라는 대몽골 중심 세계사가 처음 쓰인

팍스 몽골리카시대에 一然 대선사의 고조선이 문득 잠깐 대두되었다면,

정보화유전체학시대인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엔

이제 고조선의 깊고도 공활한 뿌리실체인 차탕朝鮮

조금은 언급될 만도 할 텐데도...!

 

 

                                             

 

- 칭기즈 칸의 혈통은 발해의 말갈족

 

 

오늘은 몽골에서 5번째 맞이하는 '설날'이다.

 

아침에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새배를 올린 다음

산소에 다녀오고 친척들과 이웃을 방문하며 서로 새 해의 다복과 건강을 빌어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던 한국생활과 몽골의 설날인 '차강사르'의 풍습이

별로 다를게 없는 것은 한국과 몽골이 그 만큼 정서적으로 가깝기 때문일게다.

 

다만 한국에서는 떡국을 먹지만 이곳에서는 '보쯔'라고 하는 고기만두를 많이 먹는다.

 

특히 보쯔를 많이 먹으면 그 만큼 복을 받는다 하여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양고기와 보쯔와 수태차,

그리고 보드카와 아이락으로 채워지는 차강사르의 음식상 차림...

 

마을의 가장 높은 '어워'에 올라가

새 해 일출을 바라보며 한 해의 복을 기원하며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른께

새배와 새뱃돈을 드리고 (몽골에서는 새뱃 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린다.)

가까운 친척과 이웃을 방문하는 차강사르의 하루...

 

아침부터 독한 보드카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으며

경제사정이 어려운데도 이 날 만큼은 풍족하게 보내려는 이들은

한국의 7~80년대의 모습과 어찌도 닮아 있는지...

 

잃어버린 한국의 옛 정서를 이곳 몽골에서 찾았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이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 할 준비를 해야한다.

 

몽골의 봄은 차강사르와 같이 오기 때문이다.

 

올 해는 농사일과 이곳의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일로 많이 바쁠 것 같다.

 

몽골은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물론 지리적으로나 생김새로 보면 아시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들의 사고방식에는 유럽방식이 상당히 많다.

 

남녀의 사랑표현이나 사업을 할 때 비즈니스의 마인드도 그렇고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도 그런 성향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동양적인 마인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전통 관습은 우리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이다.

 

어른을 섬기고 예의를 중시하며 남녀 구분도 엄할 때가 많다.

 

 

 

우리는 몽골에 오며 몽골을 바라 볼 때

이들의 역사에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과거 칭기스칸의 영광의 역사가 아니라

고난과 피탈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알아야 지금의 이들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청나라에 의한 220년, 러시아에 70년...

그 동안 이들의 정체성은 심각한 훼손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현재 몽골이며 혼란과 피곤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아시아이면서 유럽의 마인드를 동시에 갖고 사는 몽골사람들...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많이 잃어버린 비극적인 역사를 안고 사는 이들이

그래도 희망적인 건

늘 생각의 유연성과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몽골에는 늑대가 많다.

 

북부지역의 숲속은 말 할 것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과 척박한 땅 고비에도

늑대는 존재하며 가축과 유목민을 위협한다.

 

몽골사람들은 늑대를 좋아한다.

 

몽골사람들의 탄생설화에 푸른늑대가 등장하며

초원길을 가다가 늑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이다.

 

이런 사람들이 늑대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냥을 나가서 늑대를 잡으면 그 개인과 주변사람들에게는 이만저만한 경사가 아니다.

 

사냥갔던 차량에 늑대를 싣고 시가행진을 할 정도이니...

또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한 번이라도 만저 보고 싶어한다.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기에...

유목민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경애의 대상인 몽골의 늑대.

 

늑대를 경애하면서도 사냥을 즐기는 몽골사람들.

 

이 두가지 모순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몽골을 보다 많이 알 수 있지 않을까?

 

 

푸른 군대, 푸른 늑대의 후손...

 

몽골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표현한다.

 

옛날 바이칼 호수의 북쪽에서 푸른 늑대가 호수를 건너와

호수의 남쪽에 살던 하얀사슴을 만나 자식을 낳고 부족을 이루니....

몽골의 탄생설화이다.

 

그래서 그럴까

과거 징기스칸 시절의 남자들은 용맹하였고 여자들은 순종하며 가정을 꾸렸다.

 

푸른 늑대의 용맹함은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패하는 힘을 과시하였고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주변 나라의 사람들은 그 용맹함이 많이 두려웠었나 보다.

 

청나라는 푸른 늑대의 야수성을 순치시키기 위해 라마불교를 이용하였고

러시아는 철저한 우민화 교육과 혈통정책을 통해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살아 남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징기스칸을 통해 푸른 늑대는 부활하려고 하고 있다.

 

몽골은 지금 온통 징기스칸으로 가득하다.

 

오직 한가지 키워드, 징기스칸이다.

 

징기스칸의 몽골 건국 800주년을 맞이한 올 해(1996년)를 기해

가히 징기스칸의 폭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7월 21일 오후 4시께 에벵키 민족박물관에서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나로서는 17년 여를 애타게 찾던 ‘솔론’이라는 족제비과 짐승의 박제된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라 단연 특종감이었다.

 

역시 오랫동안 이를 찾아 헤매온 현지인 성빈(成斌·70) 선생의 수고 덕분이었다.

 

그간 서울대 이항 동물유전자은행장과

흑룡강성 동물자원연구소 박인주 교수(62)의 탐문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한갓 박제된 동물 하나에 이렇게 매달린 것은

‘조선’이 아침의 나라라는 전거도 전혀 없는 허황된 해석과 맞먹는,

‘솔롱고스’가 무지개의 나라라는

한국인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을 아주 긴요한 실물 자료이기 때문이다.

 

몽골학의 거장 펠리오가 맨 먼저이를 문제로 제기했다.

 

‘솔롱고스’는 ‘솔롱고’의 복수로,

솔론을 잡아 모피(Fur) 시장에 팔아서 먹고사는 부족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몽골비사’에도 이런 식으로 부족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솔론은 누렁 족제비다.

 

Baraga(바라가)가 Bar(호랑이)라는 명사에

‘aga’가 붙어 ‘호랑이를 가진’이 되듯이, Solongo (솔롱고) 또한 Solon(솔롱)이라는 명사에 ‘go’가 붙어 ‘누런 족제비를 가진’

이 된다.

 

Solongo에 ‘s’가 붙어 복수가 되면 부족 이름도 된다.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 원주민들은

애호(艾虎)나 황서랑(黃鼠狼)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정도로 가늘고 긴 족제비과 동물로 서식권역이 매우 넓어서

각종 생태 환경에 모두 적응 능력이 있다.

 

삼림, 초원(스텝), 하곡(河谷), 소택(沼澤)이나 농작물 생산지와

백성들이 사는 지대에서도 혈거(穴居)한다.

 

새벽이나 황혼녘에 먹이를 찾아 활동한다.

 

주된 먹이는 설치류 동물, 개구리류나 새의 알과 병아리 등이다.

 

내몽골 중동부 및 동북의 대부분 지역, 한국, 몽골과 시베리아 일대에 분포돼 있다.

 

 

 

몽골에서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연원은

칭기즈칸의 ‘출생의 비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바이칼 호로 흘러드는 셀렝게 강 일대에 자리 잡은 메르키드족 가운데

우두이드 메르키드 톡토아베키의 아우인 예케 칠레두가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난다.

 

약탈자는 칭기즈칸의 호적상의 아버지 예수게이이고,

약탈당한 여인은 칭기즈칸-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이다.

 

 

그는 물이 대흥안령 북서부 부이르 호수로 흘러드는

황하 강 지역의 처가에서 데릴사위로 있다가

그들의 관행에 따라 임신한 아내 후엘룬의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함께 귀가하던 길에 오논 강변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이다.

 

이 때문에 테무진의 생부는 예수게이가 아니라

예케 칠레두라는 것이 비공식적으로는 거의 공인된다.

 

칭기즈칸이 몽골 혈통이 아니고 메르키드 핏줄이라는 얘기다.

 

다구르족 몽골학자 아르다잡 교수는

메르키드는 발해의 말갈(靺鞨)이라고 고증한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혈통적 소속은 발해 유민국, 곧 당시의 솔롱고스가 된다.

 

그런데 당시의 몽골 고원에서는

아내를 빼앗기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서 20여 년 후에 예수게이의 호적상 아들 테무진도 20대에

예케 칠레두의 아우 칠게르 부쿠에게 아내 보르테를 뺏긴다.

 

당시에 약체였던 칭기즈칸은 맹렬하고도 노회한 외교로

부족들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자신의 친아버지가 되는

예케 칠레두의 혈족 메르키드를 섬멸시키고 뺏긴 아내를 되찾는다.

 

그렇게 되돌아와서 낳은 아들이 장자 주치다.

 

 

 

 

몽골 역사상 전설적 미인 훌란 공주

 

 
 

 

 

 

 

‘주치’란 손님이란 뜻으로 아내 자궁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치는 칭기즈칸의 장자로 관행상 칸 위의 승계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메르키드의 사생아’라는 치명적인 저주를 퍼붓는 가운데 소외되고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계승자로 선택된다.

 

칭기즈칸 생전의 일이다.

 

칭기즈칸과 그는 호적상으로는 부자 간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종형제 사이다.

 

 

 

‘몽골비사’의 관계 내용들을 간추려본 것이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반렵반목의 메르키드 혈통과 단절하기 위해

그 피가 흐르는 주치와 훌란 카툰의 아들마저도 철저히 소외시켰다.

 

애초부터 아예 멸족을 감행하며 제 혈통의 완벽한 부정을 통해

스텝의 온전한 순수 몽골 혈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일생을 오로지 끝없는 정복으로만 일관해야 했다.

 

이런 시각에서 예리하게 칭기즈칸의 일생을 천착(穿鑿)해낸 몽골 영웅 일대기가

일본의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이(井上靖)의 불후의 창작품 ‘푸른 이리’다.

 

메르키드를 섬멸한 후 칭기즈칸도 메르키드족의 아내와 딸들을 차지했다.

 

더러는 딸은 자기가 갖고 어미는 아들에게 주기도 했다.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딸인 훌란 공주도 헌납됐다.

 

훌란 공주는 몽골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알려지고 있어

원말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솔롱고스, 즉 고려 여인이다.

 

당시의 솔롱고스는 발해 유민국이었고

발해는 외교문서 상에 고려로도 자칭했다.

 

알려진 대로 훌란 공주는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에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솔롱고스가 발해이고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로 기록됐다면,

메르키드는 말갈일 수 있고 메르키드의 공주 훌란은 솔롱고스 공주가 된다.

 

‘알탄톱치’는 놀랍게도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다.

 

보카이(Booqai)의 보카란

‘늑대’의 존칭어로 몽골에서 발해를 일컫는다.

 

차간은 ‘하얀’의 뜻으로 젖색을 상징하는 귀족 색깔이다.

 

즉 발해(渤海) 백왕(白王)이 되는 것이다.

 

결국 훌란 공주는 발해(유민국) 공주이고,

그래서 솔롱고스(한국) 공주라고 썼음이 자명하다.

 

몽골인에게 메르키드-말갈은 타이가에서 활을 쏘아 사냥하고

전투하며 사는 숲속의 사람들이다.

 

메르겐(麻立干: Mergen)이라는 명궁수의 복수형에서 유래된

부족명으로 이족(夷族)이랄 수도 있다.

 

따라서 메르키드는 흥안령 북부나 스텝과 타이가가 혼재하는

셀렝게 강 일대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발해와 역사적으로 밀착 관계를 맺어왔을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발해의 고급 문명을 체득하고 철의 주산지인

셀렝게 강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강력한 무력을 과시했다.

 

더군다나 이 지대는 솔롱고스 부족의 원주지로 알려진 곳이 아닌가.

 

솔론족은 바이칼 호 동쪽에서 헨티 산맥에 걸치는 지역을 원주지로 하면서

초원의 주변으로 동진하기도 하고

초기에는 주로 셀렝게 강을 타고 서진한 것으로 보인다.

 

훌란은 셀렝게 강과 오르홍 강의 합류지점에 살던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공주다.

 

‘알탄톱치’에서는 칭기즈칸의 본거지인 헨티 산맥 일대에서 이들을 공격하면서

‘해뜨는 쪽’의 메르키드를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쪽인데 동쪽을 쳤다고 해서 이를 오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 뜨는 쪽’이라는 관용구는,

코리족 시조 탄생 전설이 얽힌 바이칼호 알혼 섬이

이 지역 몽골로이드들의 주신을 모시는 중심지여서 그냥 따라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솔롱고스의 메르키드 부족이 헨티 산맥의 서쪽 셀렝게 강 일대에 있든

동쪽인 훌룬부이르 초원 근하(根河) 일대에 있든

그대로 ‘해뜨는’, 즉 ‘동명(東明)’이라는 형용구가 따라붙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솔론-솔롱고스의 본거지는 애초에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바이칼 호-셀렝게 강 일대에 주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21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교과서에 솔롱고스라고 찍어내기 전에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훌룬부이르 호 대만주권에서는

한국을 ‘고올리’라고만 불렀지 솔롱고스라는 호칭은 전혀 몰랐다.

 

7월 23일에 탐사단원들은 근하에 들어섰다.

 

영하 40~50℃까지도 내려가 호랑이가 못 사는, 대흥안령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근하는 ‘껀허‘로 발음되는데, ‘껀’은 물이 ‘깊다’는 군(gu:n)이 아니라

빛이 ‘밝아오다’나 물이 ‘맑아지다’라는 뜻의 게겐(gegen)이라고,

구몽문(舊蒙文)인 내려 쓴 꼬부랑 글씨로 적힌 위구르친

비칙 현지 팻말을 보고 에르덴 바타르 교수가 지적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르 가라크’-‘해 뜨는’이라고 하여, 솔롱고스라는 국명이나

종족명 앞에 으레 따라붙는 수식구와 동일한 내용의 이름이어서다.

 

나는 이미 이 지역을 동명왕이 말치기 노릇을 하다가 도망 나와

동남하해서 북부여를 세운 고리(槁離: Qori=순록)국 터로 추정해본 터여서

더욱 그랬다.

 

껀허의 ‘껀(根)’이 ‘동명(東明)’의 뜻을 가지리라고

이전에는 미처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바이칼 동남쪽이 원주지였던

솔롱고스 부족에 붙어내린 관용구에서 비롯된 이름일 터다.

 

 

수미야 바아타르 교수가

1990년 5월에 몽골 문화사절단 통역으로 따라와 내게 건네준 첫마디가

부이르호 남쪽 호반에 선 고올리 칸 석인상이

바로 ‘솔롱고스’ 임금인 ‘동명’ 성왕이라는 것이다.

 

이는 필자를 경악케 했다.

 

몽골 스텝엔 발도 들여놓아본 적이 없는 농경권 붙박이인 당시의 내게는

기마 양 유목민의 거리 개념이 있을 턱이 없어서다.

 

실로 이때까지 필자는 바이칼 동남부 셀렝게 강변의 메르키드 공주 훌란이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하일라르 강변에서 칭기즈칸에게 헌상되고

헤름투라는 곳에서 초야를 보냈다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먼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농경적 거리 관념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임을

유목 현지 답사 경력을 쌓아가며 점차로 깨달았다.

 

 

훌란 공주가 나이도 다른 아내들보다 어려 앳되고 아름다웠겠지만,

필시 고국 또는 고향의 동족이어서 칭기즈칸이 그토록 그녀를

사랑해 전장에까지 늘 함께 간 것 같다.

 

1990년 초에 몽골에 살면서 나는 몽골 소녀들을 많이 만났다.

 

그녀들은 저마다 자기가 한국 여자를 닮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너는 많이 닮고

너는 조금 닮고 넌 아주 안 닮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몇 번인가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그녀들의 표정이 저마다 서로 달라지는 것을 알았다.

 

 

한국 여인을 닮았다는 게 아름답다는 말이 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훌란 공주의 전설적인 미모를 떠올렸음이리라.

 

많아 닮았다는 말을 들은 소녀는 나를 대하는 눈빛이 금방 달라지며 반색했다.

 

지금 우리가 만나온 이곳의 바르쿠족 몽골 처녀들도 그랬다.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

 


 

 

 

 

 

칭기즈 칸은 발해 왕가의 후손이다!

 

 

<칭기즈 칸>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파주, 2005, 252~256쪽)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는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존자>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는 ‘클(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걸’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클’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대(大)’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대’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걸’이나 ‘대’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澗)’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의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튀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唐 전쟁>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리’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의 失地 회복>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
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월간조선] 6월호에는 북방민족사학자 주몽예씨의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도발적인' 기고문이 한편 실렸다.

 

주몽예씨는 칭기스 칸 연구를 위해 29개국 언어로 된 사서를 읽고

이를 전부 비교대조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주몽예씨의 본명은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을 펴낸 전원철 박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pub]은 그가 칭기스 칸 연구에 뛰어든 계기와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직접 만나 보았다.

 

인터뷰 분량이 길어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칭기스 칸은 발해 왕가의 후손>

 

 

2015년 6월호 <월간조선>에는 아주 흥미 있는 기고문 하나가 실렸다.

 

주몽예라는 북방민족사학자가 쓴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渤海) 왕가(王家)의 후손이다!>

이라는 장문의 기고문이 그것이다.

 
이 기고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그 동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12세기에 아시아-중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영웅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 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곧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월간조선> 기고문을 <조선pub> 사이트를 통해 소개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가 칭기스 칸을 연구하게 된 배경과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몽예씨를 직접 만났다.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제국(諸國)-청나라가 한 가계>

 

 

사실 ‘주몽예’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전원철이며, 주몽예는 ‘주몽의 후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 (비봉출판사)을 펴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다.

 
2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월간조선> 기고문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를 추적한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단지 ‘세계정복자’로 알려진 몽골의 위대한 인물 칭기스 칸의 선조가

우리의 고구려-발해 왕가임을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왔던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몽골비사》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칭기스 칸에서 3~4대를 제외하고는

허구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또 학자들은 그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시대나 그들이 살던 장소,

그들이 행한 일들의 실체도 전혀 이해하거나 규명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전 박사는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실존인물이며,

그들이 살던 시기, 심지어 연도까지 규명해내고,

그들이 살던 곳이 막연히 ‘몽골의 그 어디쯤’이라는 식이 아니라,

우리 땅 어디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지명까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살면서 이룬 일들을 입증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보면,

그는 ‘고구려는 우리, 말갈(발해)은 퉁구스족’이라는 주류학설을 뒤엎고

발해를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인 대(大)씨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서자(庶子) 집안이며,

고구려와 발해는 한 가계에서 나온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또 발해가 망하는 시점 직전에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신라의 개성호족’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발해 왕가의 외손임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금(金)나라 시조 함보(函普)의 아버지 금행(今幸)의 외증손이라고 밝힌다.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자,

격노하면서 예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면서,

거란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했다.

 

이 때 그는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종적(宗籍, 족보)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한 집안 종씨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이 몸소 보인 그 미스터리한 선언(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과

 행동(발해 세자를 자신의 족보에 올린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926년 발해가 무너진 우리 북한 땅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서기 948년 고려 정종 3년(定宗 三年)때부터 이미 여진(女眞)이 들어섰는데,

이는 발해의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금 시조 함보는 이때에서 약 3세대 전에

장차 ‘여진’으로 불리게 될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갔는데,

 

발해가 망한 뒤 4세대 후에

함보의 4대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이와 관련, 최근 수년간 몇몇 학자들이 신문, 방송 인터넷, 논문 등에서 주장하여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가계가

신라 왕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전원철 박사는 책에서 이 견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의 7대조 함보(函普)와

그 아버지 금행(今幸)은 남국 신라가 망할 때 936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북국 발해가 엄연히 존재할 때인 840~50년대의 발해 왕족들로

각각 대야발의 5대와 4대손이라고 밝힌다.

 

 

 

<몽골의 세계정복 지도. /출처=/www.dailycotcodac.ro>

 

 

 

<칭기스 칸의 세계제국이 다른 세계제국과 다른 이유>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습니다.

이제 고려의 경우를 떠나, 앞서 말씀하신 세계정복부분을 계속에서 말씀 해주시죠.

조금 전에 칭기스 칸과 그 일가 3대의 세계정복대장정

단순한 침공을 통한 세계정복전(征服戰)’이라기 보다

오히려 세계적 규모의 징벌전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세계제국을 지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

어떤 인물이 위대하다고만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세계제국은 그것을 누가 지었던 간에

막대한 인명의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주 대륙을 보세요.

스페인인들이 그 땅을 발견하고 들어오고,

영국과 유럽의 종교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피신해 간 유럽 이주민들은

지금부터 600년 전에

이미 남북미의 6000만을 몰살시켰다고 남미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인디언 학자들과 미국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만일 당시 인디언들이 몰살당하지 않았다면

그 인디언(아메리카 토착민, 현재 북미 인구의 1% 정도) 인구가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의 전 인구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북미인구는 당시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한 이후

지속적으로 개척전쟁, 고의적 페스트 유포, 인디안 사냥 등으로 몰살당했고,

원주민 인구대신 유럽인들이 그 자리와 수를 채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대동아 공영권 등 다른 예는 더 들 필요가 있나요?

 

가능하면 이런 일이 없어야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이고

이런 일은 이미 인류역사상 여러 번 벌어졌습니다.

 

어차피 그 사건들은 불가피했기에 벌어진 것이죠.”

 

 

전 박사는

그렇다면 이제 와서 이 제국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되물었다.

 
모든 제국전쟁은 나쁘다라든가,

제국을 지었다는 자체가 위대하다라는 이분법적인 평가가 아니라,

우리의 물음은 제국을 지으려던 그들이 도대체 무슨 원인, 무슨 계기, 무슨이유로

그 제국을 지으려 했거나, 지었느냐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지을 때 어느 정도의 피해를 통해 지었느냐도 살펴봐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참살과 파괴를 동반해 이루어진 그 제국이

역설적으로 혹은 결과적으로 인류와 세계 역사에

도대체 어떤 공헌을 했느냐 하는 것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려 이웃 나라를 정복했던 역대 세계 정복자들>
 

 

-인류 역사에서 세계제국을 세우려 한 경우를 들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간단히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의 무솔리니, 일본천황 등등

여러 제국주의자들이 나름대로 그들 시대에 제국을 건설하여

자신들만의 세계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패한 제국은 영국과 프로이센 및

유럽 여러 나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조금 예외이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자기에게 해도 가한 적이 없는 이웃 나라들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침략하여

거대한 제국을 세우려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시대에 망했다는 겁니다.”

 
전 박사는

이들은 모두 다른 권력자, 다른 부족과 다른 나라를 자신의 정복전으로 희생시키고,

단지 자신의 권력과 자기 나라의 확장에만 관심을 가진

전형적 독제적, 침략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이었다며

대표적으로 위대한 독일’,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평화적이던 이웃나라를 침략한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경우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물들과 같은 인간의 공통적 권력욕구가

칭기스 칸에게도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칭기스 칸에 관한 사서의 기술에 나타난 그는

제가 아는 한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분명히 정당한 이유와 명분이 없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 해를 가한 원한관계가 없는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외교 사신들을 보내 평화적 교류와 협력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아들과 손자 대에 와서의 일이긴 하지만,

 

유럽군주들에 대한 외교사절단들이 그런 것들이지요.

 

또 설사 상대가 자신 또는 몽골인에게 해를 가했더라도 사죄하거나 항복했을 경우에는

결코 더 이상 징벌하지 않았다는 특이한 점이 보입니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것이죠.”

 

 

 

 

<칭기스 칸 가계가 벌인 세계 정복전의 일정한 패턴>

 

 

-칭기스 칸의 정복전쟁이 다른 인물들의 정복전쟁과 특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흥미롭게도 칭기스 칸이 이끈 전쟁에는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는 칭기스 칸 측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선제공격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기는 것입니다.

 

메르키드족에게서 부르테 우진을 되찾아오기 위한 탈환전만 제외하고

몽골 여러 부족들의 통일 과정이 그런 것입니다.

 

칭기스 칸 자신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침공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겨 통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히틀러나 천황 같은 다른 제국주의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정복자가 되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복을 기도하는 부족과 소왕국의 침략을 방어한 것이죠.
 
둘째는 자신의 선조, 몽골부족 또는 자신이나 자신의 외교대표단에 대해

다른 쪽이 가한 해에 대한 징벌전입니다.

 

그가 먼저 도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발을 받은 결과 징벌을 결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칭기스 칸 징벌전을 보여주는 가장 현저한 예는

유럽세계와 아시아 사이의 가장 거대했던 이슬람제국 호라즘 제국 징벌 및

정복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징벌전도중에 적군 또는 상대방과 연합하여 대항하거나

그 징벌전을 방해한 측에 대한 전쟁입니다.

 

킵차크인, 헝가리, 러시아 공국들 등과의 다른 전쟁들이 그러한 유형입니다.

 

동방에서는 송나라 정벌이 그에 포함됩니다.”

 
전 박사는 이 세 가지 유형의 전쟁의 결과가

이른 바 칭기스 칸 일가 3세대의 세계정복전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넷째는 좀 더 순수제국주의에 가까운 제 4형태입니다.

이는 칭기스 칸 때가 아니라, 손자 때에 와서 그것도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월남, 참파, 버마 등 인도지나와 자바 등 동남아 정복전입니다.

 

다른 역사상 제국주의자들이 주로 이 네 번째 전쟁 형태를 위주로 했는데,

칭기스 칸 가계 3대의 경우

이와는 다른 유형의 전쟁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칭기스 칸의 경우 정복전이 아니라,

중세기적 정전(正戰: 바른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러한 정복전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단지 그를 단순히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세계정복을 이룩했다는 한 가지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면,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도 마찬가지로 칭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단지 막대한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부른 전쟁을 쳤다는 것만 보고

그가 살인마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평가는 거꾸로 금나라나 호라즘 샤와 같은 야만적 행동으로

열국간의 세계평화를 위협한 폭군들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었다고 찬양하는

역설적인 결과가 되지요.

 

칭기스 칸을 무턱대고 야만적 살인마, ‘전쟁광이니 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대를 이어 번영한 칭기스 칸의 제국>
 

 

-, 공감이 가는군요.

오랫동안 서양 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의 영향으로

칭기스 칸을 히틀러 같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정복자나

야만적인 살인마라고 생각해 왔다는 의미군요.

 
, 칭기스 칸을 단순히 인류최대의 대제국을 지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인성과 인격,

그의 시대의 참담한 세계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웅은 한 시대가 낳은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 상당부분이 자기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기보다는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전쟁을 통해 살육과 문명의 파괴만을 일삼고

자기 자신의 권력만 확장하려 한 제국의 건설가라고 보는 관점은

더더욱 당시 세계의 실정을 모르고 내린 잘못된 관점입니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족, 국가, 국제, 문명 간에서 끊임없는 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당시 세계의 진면목과 역사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편협한 관점입니다.

 

그의 징벌전이 나쁘다고 한다면,

거꾸로 그의 징벌전을 유발한 그 제국들의 폭행과 전제, 횡포는

정당했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제가 방금 조금씩의 예를 들어 설명 드린 바처럼

칭기스 칸이 정복의 길로 나선 원인, 이유, 동기, 그 과정의 적법성을 보아야 하고,

또 그 결과 그가 지은 세계제국이 과연 다른 제국과 달리

후세에 무슨 공헌을 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 또는 로마의 시저처럼 또는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전쟁과는,

정당한 전쟁의 계기나 명분도 없이 출발하여

당대에 무너진 다른 제국들과 다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칭기스 칸 연구가인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의 말을 빌리면,

그의 제국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30억 인구를 포괄하는 나라의 영토에 지어진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 이상 번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의 대제국이 조각 조각 나뉘어 붕괴된 후에도

러시아, 터키, 인도, 지나와 페르시아 등에서 그의 후손들은

, 황제, 술탄, , ,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의 다양한 칭호를 쓰면서

작은 제국과 나라로 700년 이상 존속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외에도 인도에서는 모굴 왕조로 1857년까지 존속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20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제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른 점입니다.”

 

 

 

 

<칭기스 칸은 현대세계의 창출자’>
 

 

또 잭 웨더포드는 그의 공로를 말합니다.

당시에 세상은 서로 갈리어져 서로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독교 사회의 유럽세계와 이슬람 세계, 아시아의 샤마니즘과 불교, 유교 세계 등으로 갈려져 있었다고요.

이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 것이 칭기스 칸의 제국입니다.

잭 웨더포드는 그래서 그를 현대세계의 창출자라고 부르죠.”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잭 웨더포드는는 칭기스 칸이 외교특권을 수립하고, 고문을 철폐했고,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와 역을 만들고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해 뜨는 극동에서 해 지는 서구까지 과학과 예술과 문화와 상품이 교류되도록

평화적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보고 극찬합니다.

 
인류사회에 대한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공헌을 한 그와 그 가문의 이 이야기는

또 다시 몇 권 분량의 긴 책이 필요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줄이도록 하죠.

 

다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오늘날 프랑스의 역사학자의 글을 하나 인용할까 합니다.”

 
아래는 전 박사가 소개한 프랑스 역사학자의 글 인용문이다.
 
<학살은 잊혀졌고, 대신 칭기스 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칭기스 칸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그는 죽었으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앵빌(Jean de Joinville: 유럽 십자군전쟁 시대의 사가)

그는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평가는 외면상으로는 역설적이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 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 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을 당하지 않은 채

[나이 먹은 여인이]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삭(칸의 칙령, 법률: 전박사 설명)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다.>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유목 제국사 및

 윌리암 마일스(William Miles) 중령 번역의 투르크의 계보중>

 

 

 

-지금까지 칭기스칸이 위대한 정복자’, 또는 그 반대의 나쁜 사람

이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분석을 해주셨는데요.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박사님의 노력으로 인해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룬 칭기스 칸의 선조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실제적 진실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만약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그 동안 천추에 맺힌 한이 풀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서야 그의 혼령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그 조상들과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비록 고구려- 발해가 오래전에 망해서 사라진 나라이지만

그 후손인 칭기스 칸은 선조들이 겪은 아픈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칭기스 칸과 함께 또 다른 고구려 -발해의 후손인 우리도

현재 남북분단과 강대국 사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결코 좌절하지 말고 역경을 이겨낸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주몽의 후손인 칭기스 칸이 주는 교훈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로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 

 

 

 

 

<금행이 신라인이라는 독자들의 오해에 대한 답변>
 
글 전원철
 
지난 3회에 걸친 제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과분하게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결국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 아니냐”,

혹은 모든 인류는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등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어떤 분은 저보고 우리 고대어를 제대로 공부해라

금시조 대함보가 아니라 김함보이다등 비판의 소리를 보낸 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연구가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우리가 아니, 전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것과

민족사의 인식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이곳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다시 우리를 집어삼키거나,

외적이 우리를 점령해도 우리는 다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자식이므로

상관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이죠.

 

또한 제 고대어 풀이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소략하게 나오지만,

제 책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제가 꼭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금행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책에서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발해 왕족이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금 시조의 아버지 금행이 바로 고려 왕건, 금태조 아골타,

그리고 칭기스 칸 세 가문의 직계선조로 이들 사이의 잃어버린 핵심 고리이며,

그는 또 청나라 누르하치의 선조임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독자분 중에서 금행을 왕건과 같은 시기의 신라인 김행’,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라고 확고하게 믿으며,

저의 연구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독자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6년 이후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이 저서나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고,

댓글을 단 독자분도 그런 잘못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그 동안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쉽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라인 김행(金幸)’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 혹은 金幸)’

동시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은 왕건의 외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은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합니다.

 

경순왕은 왕건보다 30여 년 더 나이가 적은 항렬인데

그 아들이면 왕건보다도 거의 두 세대 차이로

아래 도표가 보여주듯이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나이입니다.

 

또한 어느 기록에도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고 기록된 사서나 족보가 없는데도,

일부 학자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설(마의태자가 금행의 아들인 함보라던가,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는 등)을 퍼뜨려 온 겁니다.

 
그들은 금 희종 완안 단 시대에 송나라 사람 홍호(洪皓)1155년경 지은

송막기문(松漠記聞)과 남송 때 1234년경 우문무소(宇文懋昭)가 편찬한

대금국지(大金國志)여진추장은 신라인이라고 적어둔 것을

문자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함보가 신라인이고

그렇다면 그 아버지가 고려사에 금행으로 되어 있으니,

함보는 신라김씨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같은 사람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대금국지권수 금초흥본말1777~1778년에 쓰인 흠정만주원류고둘인데,

이 사서들은 대개 신라 땅(新羅之地)이 고려에 병합되어 들어갔으므로(并入髙麗),

이 때문에 어떤 이는 고려라 하고 어떤 이는 신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다 한 가지 말이다(故或云髙麗或云新羅其實一也)”고 합니다.

 
함보가 원래 살았던 땅이 원래 발해(-고려) 땅이었다가

-발해-신라 전쟁으로 빼았겨 신라의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발해 선왕 때 금행이 빼앗았다가 함보 시절에 또 다시 신라 땅이 될뻔했다가

그 손자 시절에는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얼마 안 가 나중에는 송나라에서는

신라사람으로 이해된 왕건의 땅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함보의 지적(地籍)”이 아니라, 그의 족적(族籍)”을 보아야 하는데,

우리 일부 학자들이 금행과 김행이 한자로 그 이름 하나가 같다는 것과

여러 사서 중에서 두 사서가 신라인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깊은 연구도 없이 책을 쓰고 인터넷에 올리고

KBS방송의 역사스페셜 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 유일한 이유가 단 하나 이름이 같고

한 두 사서가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는 정도로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하지만,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그 이름을 원래 금행(今幸)으로 쓰고 다른 하나로 금행(金幸)으로 써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이름은 당연히 금행이고 뒤의 이름도 “()금행(金幸)”입니다.

 
발음은 신라의 성이 아니고,

발해의 성의 우리 말인 /을 이두식 한자를 써서 적은 (, )”성이죠.

 

다시 말해 ()-()(今幸)”은 그 성씨를 한자로 바꾸면

-(-)”이라는 말이고 이는 후대에 대칸(大汗)”으로 쓰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고려사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글자 ()’ 자로 쓴 겁니다.

 

안동 권씨 시조 김행과는 구분하라고 하는 뜻에서요.

 

그러니까 금행과 신라인 김행(권행)은 동명이인이지 절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우선 두 분이 산 연도가 다릅니다.

 

금행은 아래 도표에서 보다시피 김행(권행)보다 대략 120년 전의 사람입니다.

 

신라인 김행안동권씨 시조 권행이 된 이유는

김행이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를 안동에서 물리치고

그 지방을 들고 왕건에게 귀부해 왔을 때,

왕권이 그에게 공을 세운 상으로

김행에게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의미에서 이라는 성을 하사합니다.

 
권행과 그보다 4세대전의 금행을 혼동하는 그 오류를 바르기 위해

저는 제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송() 광종(光宗)소희5(紹熙五年, 1194)

쓰인 삼조북맹회편이 함보,

여진[추장]은 주몽(朱蒙)의 후손이고 말갈(靺鞨) 라고 하고

또 앞서 말한 대로 학자들이 권행이 여진추장이라고 오인할 수도 있도록

또 다시 여진추장은 곧 신라인이라고 말한 그 대금국지조차도

그가 발해에서 갈라진 별족(別族)”이라고 한 것도 제 책에서 인용해 두었습니다.

 
흠정만주원류고

발해왕(渤海王)이 금나라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을 다시 인용해두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함보의 7세손 아골타가

금사에서 양박을 시켜 발해유민들에게 말한 대로 자신이 속한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同一家)”이라고 한 것도 인용해두었습니다.

 
또 그 외, 그들이 살던 시대가 918년 후의 여진시대가 아니라,

810년대의 발해시대이고, 그들이 살던 곳도 황해도 평산과 함경북도 길주이며,

그들의 직업 또는 직책은 서해(발해)군왕 및 반안군왕이었고,

아들의 수자도 신라인 김행(권행)의 아들 1명과는 달리 금행의 아들 수는 3명이었고, 금행이 살던 시대는 신라인 김행보다는 적어도 4세대 빠르고,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시대보다는 5세대 전의 훨씬 이른 때라는 등등

8가지 이유를 들어 기존학자의 설이 잘못임을 증명해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사하나만 보더라도 금사에는

금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고 하고 있을 뿐 -함보라고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우리 학자들, 예컨데 김운회 교수 등이

그 정사 금사에 그를 김함보라고 적었다고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금사세기에는 김함보는 절대 없습니다.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기록했을 분,

함보에 관한 언급을 한 적도 없습니다.

 

 

 
<金史>
<大金國志, 卷一>
<고려사>
<고려사>
비고
금행(今幸, 金幸, <고려사>)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금행=서해용왕
함보=큰바=큰가(函普)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작제건 (발해시대, ?~*849?)
용녀(작제건 아내)
아들(1) 세대
오로(烏魯)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5)-후삼국시대
*궁예 세대
손자(2) 세대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왕건
 
(고려 태조, 877~943, 재위: 918~943)
궁예 아들 세대
증손(3) 세대
수가(綏可)
 
경순왕(909?~979) 세대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4대왕 광종(光宗) [925(태조 8)975(광종 26)/ 재위 949975/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
 
4대 후손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현종 외10)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
-안종(安宗, ? ~996) 아들 세대
 
5대 후손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
호래(胡來)
(문종 외12)
문종(文宗, 1019~1083,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
 
6대 후손
핵리발(劾里鉢, 1039~1092,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양할(楊割)
(숙종 외14)
*,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숙종(肅宗, 1054~1105,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
 
7대 후손
아골타(阿骨打) 1068~1123,
 
핵리발 둘째 아들)
(예종 외16)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예종(睿宗, 1079~1122.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
 
8대 후손
  *는 추정을 나타냄
   

 

위 도표는 그들이 살던 시기를 알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바로 그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 왕우 때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말 하노니 형제나라가 되자

는 국서를 보내옵니다.

 

그러므로 아골타는 예종과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인데,

바로 그 예종의 8대 선조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아버지인데,

그는 왕건의 외증조부(3대 조부) 금행과 같은 세대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다시 말해 아골타의 8대 선조 금행은

예종 왕우의 선조 때 외가쪽 8대 선조 금행입니다. 이 분은 왕건의 3대 선조입니다.

 

그런데, 신라인 김행은 왕건과 동시대인이고,

김행과 왕건은 또 아골타의 5대 선조인 발해(跋海)와 같은 세대인물입니다.

 

그런 김행이 왕건의 3대 외조 금행일 수가 있습니까.

 
또 왕건에게 신라를 들고 귀부해온 경순왕은 왕건의 아들 세대이고,

그 아들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세대입니다.

 

마의태자는 아골타의 3대조인 석로(石魯)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그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8대조인 금행이나, 7대조인 함보가 될 수 있나요?

 
금행은 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대야발의 계보속에 있습니다.

 

제 책에는 자세한 설명과 왕건과 아골타 가계도표까지 첨부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학자들의 설의 진위도 파악하지 않은 독자분들이

이미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같은 내용의 댓글을 반복해서 다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잘못된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고정관념이 될 때

그 파급효과는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 비치된 제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 식민사관 극복사 만필(漫筆)-

 

주채혁 [Kimdonggill Freedom Watch 2015/11/16 月曜칼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요.

 

요즈음 이런 주제를 두고 담소를 하는 기분으로 여유롭게 만필을 적어본다면

금방이라도 모진 회초리 몰매를 호되게 맞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좀 느긋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것도

때론 다소 당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가 있겠지요.

 

객관적인 상황판단이 좀 더 가능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의 식민사관 극복사를 대충 훑어볼 참이지요.

 

여기서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라선지 가장 그 다급성이 절감되는 건,

내겐 한국의 경우입니다.

 

아무리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런데 그게 유구한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보는 사안(史眼)으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것이기만 할가요?

 

좀 긴 사안으로 들여다보면 미국은 신대륙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해서,

자체혁명과 남북통일의 진통을 거쳐 미국을 창업해 G1에 오른 사례라 하겠지요.

 

그리고 김석형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분국)’론이 나오고

일본 천왕이 유목제국( Pastoral nomadic empire)형 한국계라는 사실이 거론될 만큼

일본 또한 길게 보면 한국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장기적으로 끈질기게 해오다가

일본열도-섬나라 사람들이 해양제국시대

제철을 만나 역시 섬나라 선진 대영해양제국과 연계되어서,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을 거쳐가며 팍스 아메리카나 주류에 합류하면서

제대로 독립해 나라를 제 나름으로 매섭게 경영해 G2에 오른 경우일 수도 있겠지요.

 

상고사는 젖혀놓더라도 중국 한()족이야

오호십육국수당청의 북방유목세력에게 식민화되기를 수시로 밥 먹듯 하며,

편사(編史)나 현실적인 생존투쟁에서 무장 해제된,

맨몸으로는 광역소수의 강자 맹호 앞에서

이소사대(以小事大)는 얼마든지 많이 해오며

슬기롭게 식민사관을 제 나름으로 극복해오는 과정에서

오똑이처럼 되살아 굴기(崛起)해나온

식민사관 극복의 마술사(魔術史)를 써낸 롤모델격이겠습니다.

 

유목몽골 오랑캐들에겐 중원 침공전에서

대체로 만리장성은

대수롭지 않은 통과의례식 상징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온통 산성해도(山城海島)로 짜여 있는 한반도 전투요새와는 아주 딴판이지요.

 

그러니 한족 중국은 재론할 여지가 아주 없는

굴지의 글로벌 식민사관 극복 극품 국가라 하겠지요.

 

 

그럼 한()족 한국은요?

 

아무리 근현대 식민 살이 몇 십 년이 발등에 떨어진 불덩어리라지만

유구한 민족사 서술 문제를 모두 젖혀놓고 거기에만 고착된 듯이

엄살이 하늘에 사무치는 건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가령 당장 상처가 자심하다 한들 몇 십 년 식민지 살이도 안 해본

수천 년 민족사 경영 사례가 과연 인류사상 몇이나 될는지요?

 

그때마다 자국사 편찬이 얼마나 혹심하게 망가져왔을가는

가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겠지요.

 

흥망이 유수(有數)해 사안(史眼)으로 느긋하게 서로 견주며 바라보노라면

다들 그렇게 살아오는 게 저절로 떠오르는 터이지요.

 

이런 판에 좀 진득하게 실속 차리는,

조금 더 지극히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이며 체계적인

식민사관 극복-분단조국 통일-G1 등극 지향 처절한 꿈꾸기는

진정 우리에겐 지금 얼빠진 사치이기만 할가요.

 

식민잔재 청산만 해도 그렇지요.

 

중국 북방유적을 좀 돌아다녀봤지만

중앙집권화에 걸림돌이 되는 대수롭지 않은 유목제국 유산들만

계급사관의 깃발을 들고 들부쉈을 뿐

정작 자금성 같은 거대한 식민잔재는 그대로 이어받아 쓰고 있지요.

 

일본도 삼한 삼국 일본열도 분국의 식민잔재를

상당히 감추든지 없애거나 왜곡해 이용하면서도

근래 패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까지도

정작 그 상징 중의 상징인 일련의 한 인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되레 대내외의 힘을 빌려

여전히 대를 이어 불가침의 신성존재로 떠받들어오고 있지요.

 

그런대로 그렇게 G1이나 G2에 도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 정보는 공유하는 것이다.

 

 

 

- 반만년 역사를 통해 찾아보는 한민족 통일의 바람직한 모델(동영상)

 

 

 

 

- 참고한 사이트

 

 

1. 경향신문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f061&page=3

 

 

2. 주채혁의 블로그

http://blog.daum.net/chuchaehyok/

 

 

3. 김동길의 Freedom Watch (주채혁 역사이야기)

http://www.kimdonggill.com/

 

 

4. 유라시아대륙에서 피어난 야망의 바람(박원길)

http://bbs.chosun.com/bbs.message.view.screen?bbs_id=2018119&message_id=356102&current_sequence=zzzzz~&start_sequence=zzzzz~&start_page=1&current_page=1&direction=1&list_ui_type=0&search_field=1&search_word=&search_limit=all&sort_field=0&classified_value=&totSelCnt=1&classifiedId=0

 

 

5.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김운회)

http://blog.naver.com/2008jsl?Redirect=Log&logNo=220009949137

 

 

6. BC 8937

http://www.bc8937.pe.ne.kr/

 

 

7. 마고의 노래(사람이 하늘이다)

http://cafe.daum.net/mago-net

 

 

8. 우리역사의 비밀

http://www.coo21.rgro.net/

 

 

9. 우리역사의 진실

http://www.coo2.net/

 

 

10. 향고도

http://blog.daum.net/sabul358

 

 

11. 북방아시아 공동역사 연구소

http://cafe.naver.com/altaitengrilab

 

 

12. 통선생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태백일사 번역)

http://blog.naver.com/kytong3202?Redirect=Log&logNo=20177409025

 

 

13. 실증환인환웅단군역사

http://daangoon.pe.kr/

 

 

14.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상고사연재물 초원에서 한반도까지-강인욱)

http://cafe.daum.net/dobulwonin/

 

 

15. 한사(桓史)

http://blog.daum.net/coreehistory/

 

 

16. 桓文化事業總團

http://blog.daum.net/cheonjiinmunhwa/

 

 

17. 만주원류고를 사랑하는 모임

http://cafe.naver.com/manchuria/

 

 

18. 조선상고사

http://sky_drum.blog.me/

 

 

19. 列國演義

http://www.yeolkook.net/

 

 

20. 산책의 한국고대사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history&logNo=110145597291

 

 

21. 가야산지기(화랑세기)

http://blog.daum.net/hoonbeen/

 

 

22. 김지형의 국어마당(화랑세기 특집)

http://kugmun.com/index.php?mid=bbs4

 

 

23. NAVER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24. 上善若水(중국사)

http://bangtong36.blog.me/

 

 

25. 역사, 경제 글방

http://blog.daum.net/cdh571/

 

 

26. 역사퍼즐

http://blog.naver.com/khtsnv

 

 

27. 역사자료(남당사료, 지리지) 

http://history-backup.tistory.com/

 

 

28. 역사의 블랙박스를 찾아서

http://cafe.daum.net/sijeong7101

 

 

29. 고대사 원문자료 모음

http://blog.naver.com/sohoja

 

 

30.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31. PARNAS(백제왕조 실록)

http://blog.chosun.com/blog.screen?userId=aone1one

 

 

32.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

http://cafe.daum.net/alhc/51qD/1427

 

 

33. 한국고전번역원

http://www.minchu.or.kr/itkc/Index.jsp

 

 

34. 史랑방(흉노 오환선비전)

http://krighty21.blog.me/

 

 

35. 푸른매화(중국사)

http://blog.naver.com/battlcar?Redirect=Log&logNo=50179643354

 

 

36. 눈을 들어 북방을 보라 - 북방기행

http://blog.naver.com/kimyto?Redirect=Log&logNo=50104714659

 

 

37. 오두방정의 꿈꾸는 풍경(코리안들이 신대륙 발견)

http://cafe.chosun.com/clubmain.do?p_club_id=dreamview

 

 

38. 오두막위에 서린 무지개(코리안 신대륙 발견)

http://blog.daum.net/odu1893/

 

 

39. 역사와 신화의 경계

http://www.gudaragouri.blogspot.kr/

 

 

40. 망가와 라디오

http://blog.daum.net/hl2dus/

 

 

41. 라디오가 전하는 고대사의 비밀

http://hl2dus.egloos.com/

 

 

42.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은(역사탐정)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see4in4&from=postList&categoryNo=20

 

 

43. 부흥, 네이버 대표 역사카페

http://cafe.naver.com/booheong/

 

 

44. 소오강호

http://blog.daum.net/manjumongol/

 

 

45. HISTORIA

http://historia.tistory.com/

 

 

46. 四庫全書등 원문

http://sou-yun.com/index.aspx

 

 

47. 치우의 꿈(부도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iu6279&logNo=50031021859&parentCategoryNo=&categoryNo=10&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48. 문무의 조선사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

 

 

49. 홍익인간 7만년 역사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39102

 

 

50. 역사의 DNA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paxzim&categoryNo=0&from=postList

 

 

51.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김정민)

http://tengriinstitute.com

 

 

 

52. 지구인

https://earthlin9.tistory.com/

 

 

 

 

- 참고 도서

 

 

1.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2.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3.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 역사

 

4. 흠정만주원류고

 

5. 한단고기

 

6.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틴

 

7. 고구려 발해인 칭기스칸

 

8. 고구려 역사의 부활

 

9. 백제 역사의 통곡

 

10. 신라 역사의 명암

 

11. 百濟花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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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