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도호부의 이동>

 

 

1. 평양성 시대(668-673) 5년

   

    총장 원년 668년 최초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으로 今노룡 지역이다.

   

    安東都護府는 고구려가 망한후 당에서 설치한 고구려 관리부로 설치는 했지만

    십여년이 넘도록 제대로 관리를 못했다는 정황이 있는데

    고구려 정벌에 일등공신인 유인궤와 설인귀가 안동도호부에 직책을 맏으면서도

    유인궤는 사직하고 신성에 머물러있고.. ..하는 내용 이외에

    674년 요동군 고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 668년 대종상이 후고구려를 세워  

    5년만에 평양의 안동도호부는 요동군 고성으로 이동하게된다.

 

 

2. 요동 고성 시대(674-676) 3년

   

    상원 원년 674년 요동군고성으로 이치했다는데

    전한 요동군 치소가 있던 양평(요동성)으로 보면 천진시 북단 계현에 해당된다.

 

    요동 고성으로 이동한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들의 거센 저항으로 3년도 버티지 못하고 신성으로 이동한다. 

 

 

3. 신성 시대(677-713) 37년 

 

   의봉 2년 677년 신성으로 이치했다는데

   요수(조백신하) 남쪽에 지금도 신성진(新城鎭)이 남아 있다.

  

   요동에서 못 견디고 3년 만에 허겁지겁 물러났으므로 당연히 요서로 갔을 것이다.

   네모 안에 新城鎭이 보인다.

 

 

4. 평주 시대(714-742) 29년

 

   714년 다시 평주로 옮겼다는데 평주는 전한 요서 비여와 임유라 한다.

   

   전국시대 연의 수도 계성(薊城)을 두고 「勃碣之間一都會」라 하였는데

   계성은 발해와 갈석산사이에 있으므로 지금의 대현 부근이며

   이곳을 중심으로 지금의 보정시 인근 갈석산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주(비여,임유)는 산서성 영구의 동쪽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5. 요서 고성 시대(743) 1년

 

   743년 평주에서 다시 요서고군성으로 옮겼다 하는데

   요서군에서 유서깊은 중심지로 보아

   유성(柳城)으로 짐작되고 영주(營州)에 해당된다.

   유성(柳城)은 보정시 북단에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최초 고구려의 평양성(今노룡)에 설치하였으나 고구려인의 저항으로

8년만에 요동에서 요서로 옮긴 후

대부분 기간(66년) 요서지역인 신성과 평주에 있었다. 

 

 

위 지도의 포구(鮑丘)는 부여의 별칭인 포오(蒲吾), 포여(蒲與)의 또다른 표현으로

북부여가 있던 곳을 말한다.

 

부여의 발상지는 예하(濊河)하류인 산동성 추현(鄒縣)이다.

 

예하를 일명 포오거라 하였다.

 

부여는 부여고지인 산동성 추현에서

지금 북경의 북쪽인 비리로 이동하여 북부여를 세우고,

지금의 파림좌기 인근에서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운 것이다.

 

 

 

-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말하는 사료들

 

 

平盧軍節度使治,在營州,管兵萬七千五百人,馬五千五百疋.

平盧軍,在營州城內,管兵萬六千人,馬四千二百疋.

盧龍軍,在平州城內,管兵萬人,馬三百疋.

榆關守捉,在營州城西四百八十里,管兵三百人,馬百疋.

安東都護府,在營州東二百七十里,管兵八千五百人,馬七百疋.

<舊唐書/志/卷三十八 志第十八/地理一>

 

 

평로군절도사가다스린다.영주에있다.병사가 17,500명이고 말이 5,500필이있다.

 

평로군은 영주성내에있고 병사는 16,000명 말은 4,200필.

 

노룡군은 평주성내에있다.병사10,000명 말은 300필이다.

..(중략)..

안동도호부는 영주에서 동으로 270리에있으며

영내병사는 8,500명 말은 700필이있다.

 

구당서가 말하는 평로군절도사가 다스리는 영주는 최후의 안동도호부 요서 고성이다.

 

노룡군은 요서 평주에 있다가 금나라때 지금의 난하유역인 노룡으로 이치 되었다.

 

 

 

안동대도호부

 

순임금이 청주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었고 牧을 배치하였으니

마땅히 요수의 동쪽이 이곳이다.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연나라에 소속되었고

秦나라와 전한.후한시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晉나라 시기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겸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大唐 總章(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668년)에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개 성을 얻어 그 지역을 都督府 9, 州 42, 縣 100개를 분할했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고

그 지역 토박이 지도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通典」권180 州郡 古靑州 安東府> 

 

 

 

「通典」의 저자 <杜佑>

 

「통전」은 당나라 때 <두우>가 편찬한 책이다.

 

모두 2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우>는 唐 玄宗 開元 23년(735년)에 태어나 唐 憲宗 元和 7년(812년)에 서거했다.

 

<두우>는 풍부한 정치적 경험과 고결한 문화적 수양을 갖추었다.

 

따라서 그는 역사가의 안목으로 현실의 정치. 경제 문제를 처리했고

정치가의 식견으로 역사서를 저술했다.

 

「통전」은 <두우>가 唐나라 代宗 大歷 원년(766년) 무렵에 편찬을 시작하여

德宗 貞元 17년(801년)까지 35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소요하여 편찬 한 책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한 것은 668년인데

두우가 통전의 편찬을 시작한 것은 766년이다.

 

그러니까 요서고구려가 멸망한 지 100년 뒤에 「통전」을 편찬 한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일이고

위안부문제는 이때를 전후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겪은 사람들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증언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두우>는 요서고구려가 멸망한 지 67년 뒤인 735년에 태어나서

766년 요서고구려가 멸망한 지 100년후에 「통전」의 저술에 착수했다.

 

<두우>도 고구려 문제를 직접 체험한 사람과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소상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평양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인지

潮河 유역 요서지역의 平州 평양인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요서고구려가 멸망한 지 67년 뒤에 태어나

현장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을 통해 증언을 들었을 <두우>는

당나라에서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있었는지

아니면 요서의 평주에 있었는지 환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우>는 안동도호부가 요서의 평주,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과연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할 자료가 있겠는가.

 

 

 

興中府, 營州地. 漢末烏桓鮮卑所居. 唐平盧軍節度使治所. 今號興中府.

東至遼河三百里, 西至中京三百里, 西南至建州六十里, 北至湟水四百里(舊契丹界).

西北至松徑嶺百里(舊奚界). 東南至安東都護府二百七十里, 號平壤城.

東北至白川州七十里.

<武經總要前集 卷十六下 宋曽公亮等撰 邊防 北番地>

 

 

흥중부(興中府)는 영주 땅이다. 한말에 오환과 선비가 거주하였다.

당의 평로군절도사(平盧軍節度使)의 치소였다.

지금은 흥중부(興中府)라 한다.

동쪽으로 요하까지 3백리이다. 서쪽으로 중경까지 3백리이며,

서남으로 건주까지 60리이며, 북으로 황수(湟水)까지 4백리이며,

서북으로 송경령(松徑嶺)까지 1백리이며, 동남으로 안동도호부까지 270리인데,

평양성이라 한다. 동북으로 백천주(白川州)까지 70리이다.

 

무경총요에서 말하는 평양은

관구검의 침략으로 343년 고국원제가 천도한 평양{今 요양}을 말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의 흥중부는 지금의 조양지역에 있었는데

요나라때 동압록이 지금의 요하가 되고 요서지역(조백신하 서쪽)에 있던

영주의 백성들을 지금의 요하 서쪽인 조양으로 옮기니 조양이 영주(유성)가 된 것이다.

 

 

 

 

高宗總章元年,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 上元元年, 徙遼東郡故城.

儀鳯二年, 又徙新城. 開元二年, 徙平州.

天寶二年, 徙遼西故郡城. 疑此時已徙平州.

宋白曰, 營州東南二百七十里有保定軍舊安東都護府.

<資治通鑑卷二百五 唐紀二十一 胡三省注>

 

고종 총장원년.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상원원년 요동군고성으로 옮겼다.

의봉2년 다시 신성으로 옮기고 개원2년 평주로 옮기고

천보2년 요서의 고군성으로 옮겼는데 아마도 平州일것이다.

송백이 말하길 영주 동남 270리에 옛 안동도호부인 보정군이 있다.

 

 

자치통감에서 송백이 주를 달아 안동도호부가

 동남 270리에 있는 보정군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柳城 四至八到 : ... 東至遼河(闕), 南至海三百四十里, 西至平州七百里,

北至秦長城二百七十里, 至契丹界濕水四百里,

東南至保定軍, 舊安東都護二百七十里, 西南至平州七百里.

<太平寰宇記卷七十一 河北道二十>

 

유성은 동으로 요하, 남으로 340리에 바다가 있고,서로 평주 700리,

북으로 진장성 270리,거란의 경계 습수가 400리,

동남으로 보정군 구 안동도호부가 270리,서남으로 평주 700리이다.

 

 

태평환우기에서도 안동도호부가

유성 동남 270리에 있는 보정군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의 보정시 서북 270리에 영주(유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사지리지에서 중경의 유성을 보면  

바로 요나라의 興中府{조양}가 바로 營州이고 柳城이다.

 

요나라때 영주의 백성을 지금의 조양으로 이주시켜

지금의 조양이 영주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나라 추리도에 중경 동남에 興中府, 安德府가 보인다.

 

安德府는 훗날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요나라가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의 핵심 강역을 모두 차지했다.

 

요나라는 옛 환도성(今 조양}이 있던 지역에 부를 설치했는데,

그 명칭이 안덕부(安德府)이다.

 

요나라에서 설치한 안덕부는 말할 것도 없이

고조선으로 부터 내려오던 안덕향이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