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 나당전쟁

고대사 2014. 12. 9. 12:07

 

 

 

1. 석성(石城) 전투

 

 

문무기 11년(671)

 

『十一年春正月 拜伊湌禮元爲中侍. 發兵侵百濟 戰於熊津南 幢主夫果死之.

靺鞨兵來圍舌口城 不克將退 出兵擊之 斬殺三百餘人.

(王)聞唐兵欲來 救百濟 遣大阿湌眞功阿湌 □□□□兵守甕浦.

白魚躍入□□□□□□□□□□一寸. 夏四月 震興輪寺南門.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斬首五千三百級 獲百濟將軍二人唐果毅六人』

 

11년 봄 정월 이찬 <예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熊津) 남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부과>가 전사하였다.

 

말갈군이 와서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므로

군사를 내보내 쳐서 300여 인을 참살하였다.

 

왕이 당군이 백제를 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흰 물고기가 뛰어들었는데 □□□□□□□□□□ 한 치였다.

 

여름 4월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 장군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 벼를 밟게 했는데

마침내 당군과 더불어 석성(石城)에서 싸워 참수가 5,300급이었고

백제장군 2인과 당의 과의(果毅) 6인을 사로잡았다.

 

 

 

문무왕 11년(671)에 신라가 다시 백제구지를 침공하는데

당과 말갈이 백제를 도우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지명들은 웅진과 설구성, 옹포, 가림성, 석성 등인데

반도와 대륙의 지명들이 혼재한 것 같고

고려인들이 기록들을 짜깁기한 것처럼 보인다.

 

가림성 벼를 밟게 하는 것은 적의 군량을 미리 없애는 작전이다. 

 

석성에서 당군과 싸워 참수가 5,300급에 장수급 포로가 8인이라면 큰 싸움이다.

 

여기 석성은 여당전쟁의 기록에도 나오는 유명한 성인데

舊낙랑군지에 해당되며 광의의 요동지역에 속한다. 

 

[삼국사기] 보장왕 18年(659) 11월조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당의 우영군중랑장 <설인귀> 등이

고구려군 장수 <온사문>과 횡산(橫山)에서 싸워 깨뜨렸다」고 하는데

이 건이 [구당서]에는 현경2년(657)의 이듬해(658)라고 나와 있어 연도가 다르다.

 

「明年 又與梁建方 契苾何力於遼東共高麗大將溫沙門戰於橫山.

仁貴匹馬先入 莫不應弦而倒. 高麗有善射者 於石城下射殺十餘人

仁貴單騎直往衝之 其賊弓矢俱失 手不能舉 便生擒之

 

이듬해 또 <양건방>, <계필하력>과 더불어 요동에서 같이

고려 대장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웠다.

 

<인귀>는 단기로 먼저 들어갔는데 활시위 소리에 피하려고 엎드렸다.

 

고려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어 석성 아래에서 십여 명을 사살하였다.

 

<인귀>는 단기로 곧바로 가서 들이받았는데 그 적은 활과 화살을 함께 잃고

손을 들 수가 없어 마침내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橫山은 제1차 당 태종의 친정 때

당이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주 열 곳을 설치한 지역 중의 하나인데

요동지역이며 舊낙랑군지에 해당되고 위의 기사를 보면

645년 겨울 당 태종이 물러간 후 다시 고구려가 접수한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를 보면 횡산에 있는 성이 石城(석성)인 것 같다.                           

 

[요사] 지리지 남경도 난주조에도 석성이 나오는데

그 위치가 난하 하류 서편에 해당된다. 

 

 

<대청광여도의 석성과 마성>

 

지도 오른쪽 (까만점) 위의 것이 石城이고 아래 것이 마성인데

바로 이곳 석성에서 신라가 당군을 대대적으로 격파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신라가 고구려구지를 접수하기 위해

당과의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왼쪽에 보이는 주마대(駐馬臺)가 유명한 당 태종의 주필산(駐蹕山)으로 추정된다.

 

석성과 마성은 위에 인용한 [요사] 지리지 남경도 난주에 속하는 지명이다. 

 

마성의 오른쪽에 네모표시 난주(灤州)가 보인다.

 

 

2. 대방(帶方) 전투

 

문무왕 11년기

 

『置所夫里州 以阿湌眞王爲都督. 九月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侵帶方.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艘 捉郞將鉗耳大侯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湌當千功第一 授位沙湌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 당의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이끌고 평양에 당도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누대를 높이고는 대방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6일 당의 조선 70여 척을 치고 낭장 겸이대후(鉗耳大侯)와

사졸 100여 인을 사로잡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급찬 <당천>의 공이 제일이므로 사찬의 위를 주었다

 

등장하는 지명으로  소부리주  평양, 대방  등이 있는데

 

소부리주는 태종무열왕 7년기(660)에

(七月)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당군과 신라군은 의자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의 들로 나아갔다

고 하여 백제의 수도 일대로 판단된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은 난하 하류 동쪽에 있는 남옥저의 노룡이다.

 

대방은 지금 천진-난하 에 있었던 낙랑군의 남부이며  

그런 대방을 당이 장악하려고 침공하였다 한 것은

그 전에 대방을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삼국사기] 김유신전下에 기술된 원술랑이야기에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 營於帶方之野」

 

왕이 장군 <의복>과 <춘장> 등을 보내 막게 하였는데 대방의 들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고 한 내용에 바로 해당하는 것이다.

 

 

3. 백수성(白水城) 전투와 석문(石門) 전투 

 

문무왕 12년기

 

『十二年春正月 王遣將攻百濟古省城 克之. 二月 攻百濟加林城 不克.

秋七月 唐將高侃率兵一萬 李謹行率兵三萬 一時至平壤 作八營留屯.

八月 攻韓始城馬邑城 克之 進兵 距白水城五百許步作營

我兵與高句麗兵逆戰 斬首數千級. 高侃等退 追至石門戰之

我兵敗績 大阿白水城湌曉川 沙湌義文山世 阿湌能申豆善

一吉湌安那含良臣等 死之. 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12 년 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 백제 가림성(加林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 하였다.

 

가을 7월 당장 <고간>이 군사 1만을, <이근행>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으로 가서 여덟 군데 진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8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군사를 진격시켜

백수성(白水城)에서 500보 남짓한 곳에 진영을 설치하므로

아군은 고구려군과 함께 맞받아 싸워 참수가 수천 급이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므로 추격하여 석문(石門)까지 가서 싸웠으나 아군이 패배하고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과 <산세>, 아찬 <능신>과 <두선>,

일길찬 <안나함>과 <양신> 등이 전사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공격하여 이겼다」고도 하고

「2월 백제 가림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 하였다」고도 하여

계속해서 백제구지를 공략하고 있는데 이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7월 당장 <고간>이 군사 1만을, <이근행>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으로 가서 여덟 군데 진영을 짓고 주둔하였다」

당의 두 장수가 군사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진을 치고 주둔하고 있다.

 

평양 以西는 당토(唐土)로 확보하겠다는 뜻이다.

 

 

 

1 평양(노룡), 2 대방의 들(천진), 3 한시성(今한성), 4 마읍성(마성;今난현 근방),

5 천성/백수성(천주), 6 석문의 들(今 任丘 또는 大城),

7 석성(今천서 근방으로 추정)

 

평양에 당군이 진영을 여럿 구축하고 있고

신라군은 전한 낙랑군지를 거의 전부 점령하고 있으면서

대방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인데

당군이 신라의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이기고

여세를 몰아 백수성까지 공격해왔으나

(신라군의 석성과 대방 사이를 단절시키는 작전으로 볼 수 있음)

신라군이 이겨서 당군이 후퇴하여 석문의 들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격해 간 신라군이 대패하여 장수가 일곱이나 전사하였다.

 

유성은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석성은 문무왕 11년 6월에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후한서] 공손찬전 석문(石門)의 주에 「石門 山名 在今營州柳城縣西南」이라 하였다.

지도에서 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6일대)의 서남에 석문교(石門橋)가 보이는데

석문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추정된다.

 

 

4. 매소성(城) 전투

 

문무왕 15년기

 

『十五年春正月 以銅鑄百司及州郡印 頒之. 二月 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以經略之.

王乃遣使 入貢且謝罪 帝赦之 復王官爵. 金仁問中路而還 改封臨海郡公.

 然多取百濟地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 聞唐兵與契丹靺鞨兵來侵 出九軍 待之.

秋九月 薛仁貴以宿衛學生風訓之父金眞珠 伏誅於本國 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白水城). 我將軍文訓等 逆戰勝之 斬首一千四百級 取兵船四十艘. 仁貴解圍退走 得戰馬一千匹.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 稱是. 遣使入唐貢方物. 緣安北河設關․城 又築鐵關城. 靺鞨入阿達城劫掠

城主素那逆戰死之. 唐兵與契丹靺鞨兵來 圍七重城 不克. 小守儒冬死之.

靺鞨又圍赤木城滅之 縣令脫起率百姓 拒之 力竭俱死.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 力戰死之.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匹』

 

문무왕 15년기(675)

 

15년 봄 정월 동으로 백사 및 주군의 도장을 주조하여 배포하였다.

 

 

2 월 유인궤가 아군을 칠중성에서 깨뜨린 후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당제가) 조하여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하도록 했다.

 

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사죄하자 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은 도중에 돌아가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해졌다.

 

그러나 백제땅을 많이 취하고

마침내 고구려의 남쪽 지경까지 이르러 주군으로 삼아 지켰다.

 

당군이 거란·말갈군과 함께 내침한다고 듣고 9군을 출동시켜 기다렸다.

 

 

가을 9월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부 <김진주>가 본국에서 복주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끌어들여 향도로 삼아 천성(백수성)으로 쳐들어왔다.

 

아군 장수 <문훈> 등이 맞받아 싸워 이기고 참수가 1,400급에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인귀>는 포위를 풀고 물러나 도주하여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므로

아군이 공격해 패주시켰는데 전마 30,380필을 획득하고

기타 병장기의 노획도 이와 같았다.

 

<사인>을 당에 들여보내 방물을 바쳤다.

 

안북하에 연하여 관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으로 들어와 겁략하므로 성주 <소나>가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당군과 거란·말갈군이 와서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니 이기지 못했다.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하여 멸하니

현령 <탈기>가 백성을 이끌고 막다가 힘이 다하여 함께 전사하였다.

 

당군이 또 석현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 아군이 당군과 더불어 대소 18전을 붙어 모두 이기고

참수 6,047급에 전마 200필을 획득하였다

 

 

여기 등장한 지명 매소성(買肖城)은 어디일까?

 

                    

 ‘肖’자는 음이 ‘소’와 ‘초’ 두 가지인데 [삼국사기] 김유신전下의 원술랑이야기에는

 

「元述嘆曰 “爲淡凌所誤 至於此極.” 乃入太伯山. 至乙亥年 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 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 憤恨不仕 以終其身 >

 

 

원술은 탄식하기를

 

”담릉 때문에 잘못된 일이 결국 이 지경이 되었구나“ 하고는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을해년에 당군이 와서 매소천성을 공격하였는데 원술이 듣고 죽기를 각오하고

이전의 치욕을 씻으려고 마침내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상이 있었지만

父母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벼슬하지 않고 생을 마쳤다」

 

고 하여 매소천성(買蘇川城)으로 기술했다.

 

‘買肖’가 ‘매소(買蘇)’와 대응되므로 ‘매소(買肖)’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을해년은 서기 675년으로 문무왕 15년이다.

 

이 때는 신라가  웅진에 주둔하던 당군을 몰아내고(671.6)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때이다.

 

당이 고구려의 요동을 차지하고자

이근행이 평양에 진영을 설치한 것이 672년 7월이다.

 

 

675년 9월에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이끌고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다.

 

당이 백제를 정별할 때 동원된 군사가 13만으로 1900척의 배로 이동하여 왔다.

 

 

이근행은 계속 평양에 주둔하였지

20만의 군사를 한반도의 매소성으로 이동한 사실이 없다.

 

 

그러므로 매소성은 중국대륙의 지금 노룡  인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백강구 전투

 

 

 

 

 

 

※  참고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운동> 

 

- 삼한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의도를 알고 있는 신라 (660)

 

 

신라는 당나라가 기벌포에 상륙하던 660년에

이미 당나라가 삼한을 모두 차지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백제의 멸망(660.7)

 

 

 

- 토욕혼을 정벌하는 토번의 재상 가르통첸 (663) 

 

 

650년 토번의 국왕 송첸캄포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손자 망송첸포가 즉위했다.

 

망송첸포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사안은 재상인 가르통첸이 처리하게 되었다.

 

가르통첸은 송첸캄포가 세웠던 정책을 이어받아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법률을 만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토욕혼(吐谷渾)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토욕혼은 모용복윤(慕容允伏)이 칸으로 있을 때

당나라 장군 이정(李靖)에게 패배해 당나라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660년 가르통첸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둘째아들 가르친링에게 군사를 주어

토욕혼을 공격하게 했으며,

663년에는 토욕혼에서 도망쳐 나온 토욕혼의 신하 소화귀(素和貴)를 거느리고

직접 토욕혼을 공격하여 토욕혼을 멸망시켰다.

 

토욕혼의 칸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은 그의 아내 홍화공주(弘化公主: 이세민의 딸)와

잔존 세력을 이끌고 당나라 양주(凉州)로 피신했다.

(출처 : 위키백과, 가르통첸)

 

 

* 토욕혼 : 토욕혼의 창시자는 모용 토욕혼(慕容吐谷渾)이며,

그의 이복동생은 전연(前燕)의 시조인 모용외(慕容?)이다.

기록에 따르면 토욕혼은 모용외와 다투다가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토욕혼은 285년 모용 토욕혼이 창시하였으며,

중국에서 하남국(河南國)으로 알려지게 된다.

수도는 칭하이 호(靑海湖)의 서쪽에 있었으며, 부사(伏俟)라고 불렸다. 

 

 

 

 

-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의 당나라 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맹약을 맺는

  <유인원>, <부여융>, <문무왕> (665년 8월)

 

 

문무왕 5년(665)

가을 8월, 임금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

 

"(중략) 두 나라는 혼인으로 약속을 맺고 맹세로 거듭했으며,

희생을 잡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서, 언제까지나 함께 화목하여 재난을 서로 나누고,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도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한 뒤에는 모두 함께 지조를 지켜야 하리라.

만약 맹세를 어기고 뜻을 달리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살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리셔서,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지고 남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후략)"

 

취리산에서 유인원, 부여융, 문무왕은 맹약을 맺는다.

이 맹약은 웅진도둑부의 영원한 존속을 위한 맹약이다. 

 

 

 

 

- 고구려의 12성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는 안승의 아버지 연정토 (666)  

 

신라 문무왕(666)

 

고구려의 지위 높은 신하 연정토(淵淨土)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와 그의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집을 주고

서울 및 주·부(州府)에 안주시키고,

그 여덟 성은 온전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안승의 아버지인 연정토는 12성을 이끌고 신라로 들어간다.

신라는 군사를 지원하여 연정토의 8성을 지키게 한다.

 

 

 

- 군대동원 기일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문무왕 (667년 10월)

 

신라 문무왕 11년

 

건봉(乾封) 2년(서기 667), 대총관 영국공(英國公)이 요동(遼東)을 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그곳에서 병사를 보내 국경에 모이도록 하였다.

 

신라의 군대가 홀로 쳐들어갈 수는 없어서 우선 세 차례 첩보병을 보내고,

배를 잇달아 띄워서 중국 군대의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첩보병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말하기를

 

‘중국 군대가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우리는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열어 통하게 해놓고,

중국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칠중성이 거의 깨질 무렵에,

영공의 사자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명령을 받았는데,

신라의 군대가 꼭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으니,

빨리 평양으로 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명령대로 군대를 모아 행군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는데,

중국 군대가 이미 회군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어 신라 군대도 즉시 빠져 나왔다.

 

 

신라 문무왕 11년

그러나 영공이 슬그머니 말하기를

‘신라가 이전에 군대의 동원 기일을 어겼으니, 반드시 살펴보겠다.’고 하였다.

 

신라 군사들이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에 들어갔는데,

당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지금 신라에는 아무런 공적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문무왕은 의도적으로 이적이 요청한 군대동원기일을 어긴다.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고 있다.

 

 

 

 

- 토번의 명재상 가르통첸이 죽자 토번의 군권(軍權)을 이어받는 가르친링 (667)  

 

 

가르친링은 토번의 전성기를 이끈 명재상 가르통첸(喝爾東贊)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가르통첸이 667년에 사망한 후에 아버지의 군권을 이어받았다.

 

그 후 형인 가르친네(喝爾贊悉若)가 죽자 재상직까지 겸하게 되었다.

 

 

 

- 고구려의 멸망(668년 9훨)

 

 

 

- 신라에 투항하는 안승 (669년 2월)

 

 

고구려 부흥운동 1년 (669)
2월에 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안승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라로 투항한다.

 

 

 

- 평양의 백성을 중국의 빈땅으로 옮기는 당나라 (669년 4월)

 

고구려 부흥운동 1년 (669)

여름 4월에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경서(京西) 여러 주의 빈 땅으로 옮겼다.

 

 

당나라는 평양을 폐허로 만들고

평양성의 백성을 지금의 남경근처의 빈땅으로 이전시킨다.

 

 

 

 

- 천산남로(新疆 위구르 남부 사막지대)를 급습하는 토번,

  칭하이(淸海)로 이동하는 이근행, 유인궤, 글필하력 (669년 9월)

 

 

唐-토번 전쟁은 669년 9월 토번이 天山南路를 급습함으로써 개시되었다.

 

天山南路는 실크로드 중 唐이 관할하던 타림 분지

(지금의 新疆 위구르自治區 남부 사막지대) 주위의 오아시스 北道와 南道이다.

 

세계제국 唐에게 실크로드는 死活的 교통로였다.

 

이로부터 羅-唐 전쟁과 토번-唐 전쟁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唐朝(당조)는 薛仁貴, 李謹行(말갈 출신)·劉仁軌·契苾何力(돌궐系 突騎施 출신) 등의

한반도에 투입된 장수들을 戰況에 따라 靑海에 이동 배치했다.

(출처 :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鄭淳台 작가 st-jung@hotmail.com )

 

 

 

- 1천보가 나가는 쇠뇌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당나라 (669년 겨울)

 

 

문무왕 9년(669)

겨울,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사찬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돌아갔다.

 

당에서 그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를 나갔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천보나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구나. 어찌된 일이냐?”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목재가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목재를 달라고 하였다.

 

곧바로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고쳐 만들게 하여 쏘아보니, 60보를 나갔다.

 

황제가 그 까닭을 물으니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저 역시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황제는 그가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였으나

<구진천>은 끝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당나라는 신라 쇠뇌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신라의 기술자는 당나라에게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

 

 

 

- 신라의 사신을 억류하는 당나라, 감옥에서 죽는 신라 사신 (670년 1월)

 

 

문무왕 10년(670)

봄 정월, 당 고종이 <흠순>은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끝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우리 임금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질책하고 성을 내어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당나라와 신라의 사이가 벌어지자 당나라는 신라 사신을 감옥에 가둔다. 

 

 

 

 

- 평양에서 출발하여 칭하이(淸海)에 도착하는 설인귀 (670년 4월)

 

 

664년 이후 唐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측천무후(則天武后)였다.

 

그녀의 남편 高宗 李治는 간질병을 앓아 政事를 감당할 수 없었다.

 

통수권(統帥權)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측천무후는 韓半島 전선에 투입된 薛仁貴를

1만5000리 떨어진 靑海 지역으로 급히 이동시켰다.

 

그가 청해 전선에 도착한 것은 670년 4월의 일이었다.

 

물론 무리한 병력 이동이었다.

(출처 :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鄭淳台 작가 st-jung@hotmail.com )

 

 

 

 

- 대비천(大非川)에서 토번에게 전멸당하는 설인귀 (670년 7월)

 

서기 670년 7월, 唐의 장수 薛仁貴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바로 靑海의 大非川에서

논흠릉(論欽陵)이 거느린 吐藩(티베트)軍에게 전멸당했다.

(출처 :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鄭淳台 작가 st-jung@hotmail.com )

 

 

당은 토번과의 전면전에 10만 대군을 투입하였다.

 

당 고종은 설인귀(薛仁貴)를 라파도행군대총관(羅婆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고

돌궐 출신의 무장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과 한인 장수 곽대봉(郭待封)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양군이 격돌한 대비천은 지금의 청해호 남쪽의 절길(切吉) 평원이란 곳이다.

 

이 평원은 북쪽과 남쪽에 산을 끼고 있고 그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분지 평원이다.

 

따라서 토번의 기병전력을 십분 활용하기도 좋고

산지를 이용한 기습 공격에도 유리한 곳이다.

 

게다가 이 곳은 토번이 장안으로 나가거나 서역지방으로 진출하는데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고 당 역시 토번을 공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었기 때문에 그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다.

 

토번과 당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음에도

전투는 싱겁게도 토번의 일반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설인귀는 대비천에 이르러서 곽대봉에게 군사 2만을 주고,

후방의 수송부대를 맡도록 하였다.

 

더불어 대비령의 두 곳에 목책을 쌓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후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대비천 하류에 있던 적들과 교전하여 격파하고,

소와 양 만 여 두를 노획하여 자신의 오해성(烏海城)으로 나아갔고,

곽대봉에게는 계속 후방에서 원조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곽대봉은 목책을 세우고 후방을 지키라는 설인귀에 명령을 어기고

수송부대를 이끌고 오해성으로 나아갔다.

 

결국 곽대봉이 저지른 실책은 겉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토번군 20만이 곽대봉의 수송부대 행렬을 급습한 것이었다.

 

사실 설인귀가 대비천 하류에서 패퇴시킨 토번군은

가르친링이 설인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수송부대를 모두 잃은 곽대봉은 험준한 계곡에 몸을 숨겼고,

오해성까지 나아갔던 설인귀는 다시 군대를 대비천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가르친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40만 대군으로 설인귀를 몰아붙였다.

 

결국 설인귀는 가르친링과 굴욕적인 화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귀국해서 서인이 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 출처 : 첫걸음의 역사생각, 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4)

-가르 가문의 시대와 대비천 전투, http://songij21.egloos.com/1374086)

 

 

 

 

-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장악하고 실크로드를 지배하게 된 토번

 

대비천전쟁의 승리로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안서사진(安西四鎭),

카라샤르(焉耆)ㆍ구차(龜玆)ㆍ호탄(于?)ㆍ카슈가르(疏勒)가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이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 반란을 일으켜 궁모성에서 신라의 지원을 요청하는 검모장 (670)           

 

 

신라 문무왕 10년 (670) 3월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

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검모잠은]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 고구려부흥군에게 1만의 군사를 지원하는 신라 (670년 3월)

 

신라 문무왕 10년 (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 압록강을 넘어 개돈양에서 말갈을 물리치는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 

  (670년 4월 4일)    

 

 

신라 문무왕 10년 (670)

 

여름 4월 4일에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3월에 출발한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연합군은

4월에 압록강을 넘어 개돈양에 도착한다.

 

말갈 군사들은 개돈양에서 옥골을 공격하고 있다. 

 

2만의 연합군은 압록강을 넘어 개돈양에 있는 말갈군을 물리친다.

 

이로써 고구려 부흥군은 오골성, 요동을 차지하여

고구려의 주요한 21개의 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옥골을 지원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은 2만의 구원군은

부흥군  소속 고연무의 1만과 신라 사찬 설오유의 1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부흥군이 신라의 비밀스런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마도 신라군은 고구려 군복을 입고 압록강을 넘었을 것이다.

 

 

궁모성에서 반란을 성공시킨 검모잠은 신라에게 왕과 군사지원을 요청한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신라는 설오유의 1만의 병사를 3월에 지원하였고

4월에는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보내준다.

 

 

 

 

- 영토가 회복되어 부활한 고구려, 안승을 왕으로 세우는 검모잠 (670년 4월)

 

 

고구려 부흥운동 2년 (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劍牟岑)이 나라를 부흥하려고 당나라에 배반하여,

왕의 외손 안순(安舜)<[순(舜)을] 신라기(新羅紀)에는 승(勝)이라고 썼다.>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 오골성을 제압하는 고간, 백성(白城)으로 후퇴하는 부흥군과 신라군  

 

 

신라 문무왕 10년 (670)

 

여름 4월 4일에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켰다.

 

고간은 오골성의 부흥군을 무너뜨린다.

 

오골성의 부흥군은 백성(백암성 추정)으로 후퇴한다.

 

 

 

 

 

 

-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반란 정보를 당나라에게 감추고

   토벌군의 출동을 늦추려고 하는 신라 (670년 6월)

 

 

신라 문무왕 11년

 

함형(咸亨) 원년(서기 670) 6월,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켜 당의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였다.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와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함께 흉적을 토벌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함께 의논해야 할 문제이므로

관인을 이곳에 파견하여 함께 계획하기를 요청한다.’고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의 반란 사실은 6월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처럼 당나라를 속이고

군대의 출동을 당과 함께 논의하자고 하면서 반란 토벌군의 출동을 늦추려 한다.

 

 

 

 

- 고간을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임명하는 당나라 (670년 6월) 

 

고구려가 고구려의 모든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되자

당나라는 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간>을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임명한다. 

 

 

 

 

 

 -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하는 안승 (670년 6월)

 

 

고구려 부흥운동 2년 (670)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그를]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당나라가 고간을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자

안승과 검모잠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난다. 

 

 

 

 

 

 

 - 당나라의 경계 지도를 보고 백제땅을 신라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김흠순

   (670년 7월)

 

신라 문무왕 11년

 

함형(咸亨) 원년(서기 670) (중략)

7월에 당에 입조하였던 사신 김흠순(金欽純) 등이 돌아와

장차 경계를 확정하려 했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백제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삼사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세를 보면 스스로 따로 한 나라를 세운 셈이다.

 

백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삼켜져 멸망하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당의 한 주가 되었으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오래도록 후환이 없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김훈순은 당에 입조하여 당나라의 지도를 확인하던 중

백제의 영토가 신라의 영토로 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

 

 

 

 

 

- 남아있는 백제부흥군이 백제를 세울까 걱정하는 신라,

   신라와 화친하지 않고 동태를 파악하려는 웅진도독부 (670년 7월)

 

 

신라 문무왕 10년 (670)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신라는 백제의 여러 성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웅진도둑부와 화친을 청한다.

 

웅진도둑부는 예군을 보내 신라의 움직임을 감시하려 한다.

 

신라는 예군을 붙잡아 둔 후 

남아있는 백제부흥군이 장악한 백제성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웅진도독부가 신라와 화친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라가 남은 백제부흥세력을 토벌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제내의 남은 부흥세력이 독자적인 힘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하고

이들이 웅진도독인 부여융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면

당나라가 원하는 지배체제가 완성되는 것이다. 

 

 

 

 

- 남아있는 백제부흥군이 차지한 백제성을 제압하는 신라 (670년 7월)

 

신라 문무왕 10년 (670)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義官), 천관(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을 목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베었으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은 △△△사(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용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일(一)에게 각각 급찬의 관등을 주고

조(租)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신라는 신라의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백제성에 대한 정보를

웅진도둑부에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 예군을 붙잡아 둔다.

 

신라는 백제의 성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며 백제를 신라의 체제로 편입하기 시작한다.

 

반면, 부여융은 백제를 웅진도독부로 편입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임명하는 신라 (670년 7월)

 

신라 문무왕 10년 (670)

가을 7월에 (중략)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신라는 금마저에 있는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임명하고 백제의 영토를 관리하게 한다.

 

* 금마저 : 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 상주(上州), 하주(下州)의 군대를 동원해 백제 남부의 63개 성을 빼앗고 

   백성을 내지로 옮기는 신라(670년 7월)

 

신라 문무왕 10년 (670)  

 

가을 7월에 (...) 품일, 문충, 중신, 의관(義官), 천관(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신라는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 남부를 공략한다.  

 

신라는 주력군을 남부에 집중하여 백제의 63개 성을 빼앗고

성의 백성들을 내지로 옮긴다. 

 

 

 

 

- 반란을 일으키고 웅진도둑부로 가려는 한성주 총관 <수세>,

   <수세>의 반란을 제압하는 신라 (670년 12월)

 

신라 문무왕 10년 (670)

12월에 (중략)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취하고

저쪽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眞珠)>를 보내 목베었다.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반란을 일으켜 웅진도둑부로 가려다 신라에게 발각된다.

신라는 대아찬 진주를 보내 진압한다.

670년에 고간은 아직 요동을 제압하지 못했다.

고간은 671년 9월이 되어서야 대방을 칩입한다.

 

 

 

 

- 남아있는 백제부흥군을 제압하며 웅진 남쪽까지 들어온 신라,

  당나라 구원군을 막기 위해 옹포(평택 청북)를 지키는 신라 (671년 1월)

 

 

신라 문무왕 11년(671)

봄 정월에 이찬 예원(禮元)을 중시로 삼았다.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죽었다.

 

말갈 군사가 쳐들어와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차 물러가려 하자, 군사를 내어 쳐서 300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眞功)·

아찬 △△△△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어느덧 신라는 웅진 남쪽까지 진출하였다.

 

신라가 백제의 성들을 제압하여 신라의 체제로 편입해 나가자

웅진도독부는 위축되기 시작한다.

 

 

 

 

- 무너지는 웅진도독부,

  석성에서의 승리로 당나라를 몰아내고 소부리주를 설치하는 신라 (671년 6월)

 

신라 문무왕 11년(671)

6월에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3백 명을 목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신라는 석성에서 승리하고 당나라를 백제에서 몰아낸다.

 

이제 거의 모든 백제성이 신라의 지배로 들어오게 되었다.

 

신라는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둑으로 삼는다.

 

 

 

 

- 웅진도독부가 무너지자 문무왕에게 서신을 보내는 설인귀 (671년 7월 26일)

 

신라 문무왕 11년(671)

 

가을 7월 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글을 보내왔다.

 

" (중략) 지금 강한 적은 이미 없어졌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들의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갖게 되었으니,

응당 마음과 몸을 다른 곳에 돌리지 말고,

안팎이 서로 의지하여 병장기를 녹이고,

허술한 곳에 마음을 써서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좋은 방책을 전하고

자손을 편안하게 한다면 역사에 칭찬받을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 "

 

대왕이 답서에서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서기 648)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다.

 

그 조칙에서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하여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니,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고 하시고는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를 낼 기일을 정하여 주셨다.

 

 

 

신라에게 웅진도둑부가 무너진 후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을 중지하고 당나라의 체제에서 평화롭게 살 것을 권고한다.

 

문무왕은 장문의 답신을 보내

평양 이남의 모든 토지를 신라에게 주기로 했다면서 설인귀를 반박한다.

 

 

 

 

 - 안시성을 무너뜨리는 고간 (671년 7월)

 

고구려 부흥운동 2년 신미년(671)

가을 7월에 <고간>이 안시성에서 남은 무리를 깨뜨렸다.

 

오골성을 장악한 당나라의 고간은 안시성에서 부흥군을 무너뜨린다.  

 

 

 

 

- 대방(帶方)을 침입하는 고간 (671년 9월) 

 

신라 문무왕 11년(671)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방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帶方)을 침입하였다. 

 

 

 

 

- 웅진성을 탈출하는 당나라의 곽무종 (671년 10월)

 

신라 문무왕 11년(671) 

 

겨울 10월 6일, 당나라 운반선 7십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 당천(當千)의 공이 제일이었기에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고간이 남하에 실패하자 곽무종은 배를 타고 웅진성을 탈출한다.

이 과정에서 병선랑장 겸이대후가 신라에 사로잡혔다.  

탈출하는 배는 모두 70여척으로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당나라 군사가 물에 빠지고 백여명은 신라에 의해 잡힌다. 

 

 

 

 

- 웅진성을 탈출한 후 남해안의 비지도에 도착해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곽무종

  (671년 11월)

 

 

일본서기 덴지천왕 10년 (671)

11월 갑오 초하루 계묘 대마국사가 사신을 축자의 대재부에 보내

“이달 2일에 사문 도구·축자군살야마·한도승사파·포사수반 4인이 당으로부터 와서

‘당의 사신 곽무종 등 600인, 송사 사택손등 등 1400인 모두 합해 2000인이

 배 47척에 타고,함께 비지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지금 우리들이 사람과 배의 수가 많아

갑자기 그 곳(일본)에 도착하면 아마도 그 곳을 지키는 방인들이 놀라

활을 쏘며 싸우려 할 것이라 여겨,

이에 사문 도구 등을 보내 미리 와서 조공하는 뜻을 아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47척, 2000여명이 웅진성 탈출에 성공하고 비지도에 머물고 있다. 

 

곽무종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일본에 머물수 있도록 간청한다. 

 

 

* 비지도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현 비진도로 추정됨.

 

 

 

 

- 백수산에서 부흥군과 신라를 물리치는 고간 (671년 12월) 

 

고구려 부흥운동 3년 (672)  

 

12월에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 평양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는 고간과 이근행 (672년 7월)

 

 

문무왕 12년(672)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

이근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1만의 고간과 3만의 이근행이 평양에 진영을 설치한다.

 

 

 

 

- 한시성과 마읍성을 차지하여 뱃길을 이용한 보급로를 확보하는 당나라 (672년 8월)

 

 

신라 문무왕 12년(672)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 석문에서 대패하는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 (672년 8월)  

 

신라 문무왕 12년(672)

 

8월에 (...)

군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아 싸워 수천 명을 목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 부록 김원술전>

당군이 말갈(靺鞨)과 함께 석문(石門) 들판에 진영을 차리자

왕은 장군 의복(義福)ㆍ춘장(春長)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여

대방(帶方) 들판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장창부대만이 따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천여 명과 맞닥뜨려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군영에서 일제히 말했다.

“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후하게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마침내 각자 부대를 갈라 분산하였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아직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효천(曉川)ㆍ의문(義文) 등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백수산에서 패배한 당나라는 석문으로 후퇴한다. 

 

신라는 유명한 석문전투에서 대패를 당하는데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신라군이 미리 전공을 다투다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겸이대후를 포항한 웅진에서 사로잡은 당나라 병사를 당에 보내며 

  사죄의 표를 올리는 문무왕 (672년 9월)

 

 

신라 문무왕 11년(672)

 

9월, 혜성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임금은 지난번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병사를 청하여 우리를 침공했을 때,

일이 급박하여 황제께 아뢰지 않고 병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였다.

 

이 때문에 당 조정에 죄를 짓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 및

붙잡아 두었던 당의 병선(兵船) 낭장(郞將) <겸이대후>,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曾山) 사마 법총(法聰)과 병사 1백7십 명을 돌려보내고,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문무왕은 웅진성 공격에 대한 사죄의 표를 올리며

웅진성에서 사로잡은 당나라 병사를 돌려 보낸다.

 

 

 

 

- 백수산을 무너뜨리는 당나라의 고간 (672년 12월)

 

 

고구려 부흥운동 3년 (672)

 

12월에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석문에서 승리한 당나라는 백수성을 무너뜨린다.  

 

 

 

 

- 일본에 도착한 후 당나라로 떠나는 곽무종 (673년 5월) 

 

일본서기 천무천황 원년(673)

 

봄 3월 임진 초하루 기유 내소칠위 아담련도부를 축자에 보내

(천지)천황의 죽음을 곽무종 등에게 알렸다.

 

이에 곽무종 등이 모두 상복을 입고 세 번 슬픔을 나타내는 예를 행하고

동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임자> <곽무종> 등이 두 번 절하고 국서가 든 함과 신물을 바쳤다.

여름 5월 신묘 초하루 임인 갑옷과 활, 화살을 곽무종 등에게 주었다.

 

이 날 곽무종 등에게 준 물건은 모두 합해 시 1673필, 포 2852단, 면 666근이었다.

 

(여름 5월 신묘 초하루) 무오 고려가 전부의 부가변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경신 곽무종 등이 마치고 돌아갔다. 

 

 

 

일본에 도착한 곽무종은 673년 5월에 일본을 떠나 당나라로 귀환한다. 

 

 

 

 

- 호로하에서 승리하는 이근행의 3만 당나라군,

  신라로 달아나는 고구려 부흥군 (673년 5월)

 

 

고구려 부흥운동 4년(673)

 

여름 윤5월에 연산도(燕山道) 총관 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瓠濾河)에서 우리나라 군사들을 깨뜨리고 수천 명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이근행은 호로하를 넘는다. 

 

호로하에서 패한 고구려 부흥군은 모두 신라로 도망온다.

 

 

 

 

- 김유신이 죽고 북한산성이 무너질 위너질 위기에 처하자

  모반을 일으키는 아찬 <대토> (673년 7월)

 

신라 문무왕 13년(673)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 하다가 일이 탄로나 목베여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은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

 

 

김유신이 죽고 신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아찬 대토가 모반을 일으킨다. 

 

 

 

 

- 호로하를 넘어 왕봉하까지 진출한 

  이근행의 당나라군을 물리치는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 (673년 9월) 

 

신라 문무왕 13년(673)

 

9월에 (...)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 우잠성과 동자성을 차지하는 당나라 (673년 겨울) 

 

신라 문무왕 13년(673)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고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는 당나라 (674년 1월)

  

신라 문무왕 14년(674)

 

봄 정월에 (...)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이

당의 서울[京師]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신라가 당나라를 속이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고

웅진도독부를 몰아내고 백제를 차지하자 

당나라는 문무왕의 관직을 없애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한다. 

 

 

 

 

- 고구려왕에서 보덕왕이 되는 안승 (674년 9월)

 

 

신라 문무왕 14년(674)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하였다.

<[문무왕] 10년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다시 봉한 것이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순[歸命]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모르겠다.>

 

 

고구려는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는지 신라는 안승의 나라를

보덕국(報德國)이라는 괴뢰국(傀儡國) 느낌이 나는 명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다.

 

 

 

 

- 칠중성을 깨뜨리는 유인궤, 당나라로 돌아가는 유인궤와 김인문 (675년 2월) 

   

 

신라 문무왕 15년(675)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침략해 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군사를 내어 그것에 대비하였다.

 

 

 

유인궤는 호로하를 건너 칠중성을 깨뜨린다. 

 

 

 

 

- 매초성에 주둔하는 이근행이 이끄는 20만명의 당나라군대,

  20만 대군의 보급은 어떻게? (675년)

 

 

신라 문무왕 15년(675)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이근행의 20만의 당군은 매소성에 주둔한다. 

 

 

 

 

- 매초성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천성 전투, 

   설인귀에게 승리하는 신라 (675년 9월)  

 

신라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鄕導]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유인궤 대신 계림도총관을 이끌게 된 설인귀는 

천성 상륙공격에 실패한다.

 

신라는 1천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여척, 전마 1천필을 얻는다. 

 

천성 전투의 패배로 20만대군이 보급물자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 천성전투의 패배로 보급로 확보에 실패하자 후퇴하는 당나라,

   매초성에서 20만 대군을 몰아내는 신라 (675년 9월 29일)

 

신라 문무왕 15년(675) 

 

(9월)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신라는 매소성을 공격하여 이근행의 20만의 당군을 몰아낸다. 

 

신라는 당나라의 불편한 심기를 고려하여 토산물을 바친다.

 

 

 

- 안북하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철관성을 쌓는 신라 (675년 9월) 

  

신라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 아달성을 함락시킨 후 남진하여 칠중성을 공략하는 당나라 (675년 9월)

  

신라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 멸하였다.

 

현령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는 아달성을 함락시킨 후 칠중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 예성강 방어선을 확립한 후 석현성까지 진출하는 신라 (675년 9월)  

 

신라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石峴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당나라는 신라가 차지한 석현성을 함락시킨다.

 

 

 

 

- 건안성으로 옮겨지는 웅진도독부 (676년 2월)

 

자치통감 의봉 원년 2월조 ((676년 2월)

웅진 도독부가 고구려의 건안성으로 옮겨지자

당나라로 잡혀와 있던 서주와 연주의 백제인을 모두 건안으로 옮겼다.

 

백제땅에서 웅진도독부가 무너지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백제의 부활을 모색한다.

 

 

 

 

- 도림성을 빼앗기는 신라 (676년 7월)

  

신라 문무왕 16년(676)

 

가을 7월에 살별[彗星]이 북하(北河)와 적수(積水) 두 별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쯤 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와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

 

당나라는 도림성을 함락시킨다.

 

 

 

 

- 기벌포에 상륙하는 설인귀, 백제땅에서 설인귀에게 승리하는 신라 (676년 11월)

 

신라 문무왕 16년(676)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재상 <진순(陳純)>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

 

 

 

설인귀는 676년에 다시 백제에 상륙한다.

하지만 설인귀는 신라에게 패하고 물러난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 요동주도독이 된 보장왕,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

   폐기되는 웅진도독부 (677년 2월)

 

고구려 부흥운동 6년 (677)

봄 2월에 [황제가]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어 나머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였는데,

동쪽나라 사람으로서 먼저 여러 주에 와 있던 자들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이제 당나라는 신라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나라는 보장왕을 요동도독으로 삼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긴다.

 

그리고 웅진도독부는 폐기된다.

 

 

 

 

- 토번을 제압하는데 집중하는 당나라,

   전쟁이 끝나고 삼한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신라 (677년 3월) 

 

신라 문무왕 17년(677)  

 

봄 3월에 강무전(講武殿) 남문(南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좌사록관(左司祿館)을 처음 두었다. 소부리주에서 횐 매를 바쳤다.

 

이제 당나라가 토번에 매달리고 웅진도독부가 폐기되자 신라는 전쟁의 종식을 즐긴다.

 

 

 

 

- 승풍령 전투에서 토번에게 패하는 당나라 (678)

 

토번이 날로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당나라는

678년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을 제군대총관(諸軍大總管)으로 삼고

공부상서(工部?書) 유심례(劉審禮)와 함께 18만 대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하기 위해 청해호로 갔다. 

천하무적의 첸릉장군이 이끄는 토번군은 당의 대군을 승풍령으로 유인한 후 대파하고

골짜기로 몰아놓고는 포위망을 좁혀간다.

 

이런 상황에서 당의 장군들이 우왕좌왕하기 급급했는데,

오직 흑지상지만이 야밤에 5백 명의 결사대를 이끌어 포위망을 뚫고

<이경현>을 구해내어 당군 일부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승풍령에서의 대승으로 인해

오늘날의 칭하이 성 지역이 완전히 토번 영토로 굳어졌다.

 

 

 

- 승풍령 전투에서 패한 후 고구려, 백제 원정을 후회하는 당고종 (678)


황제는 유약하여 원대한 전략이 없었고 여러 장수들의 패배를 보고

근신들의 의견을 널리 들어 토번을 제압하는 방책을 구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아직 갑옷을 입고 적을 공격하여 없애지 못하였다.

지난날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자 연이어 병사를 일으켜

중국을 소란시킨 것을 짐이 지금에 와서 후회하고 있는데,

이제 토번이 침입해오니, 우리의 계책으로 이를 진압할 수 없겠는가?" 

 

황제가 황문시랑 내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적이 사망한 이후로, 뛰어난 장수가 없구나."? 

 

(첫걸음의 역사생각, 吐蕃, 티베트 최초의 제국(5)

-가르 가문 시대의 종결과 금성공주, http://songij21.egloos.com/v/1389944) 

 

 

 

- 말갈과 함께 고구려를 세우려다 실패하는 보장왕 (681) 

 

고구려 부흥운동 10년 (681)  

 

왕은 요동에 이르러 배반할 것을 꾀하여 몰래 말갈과 통했으므로,

[황제가] 개요(開耀) 원년(681)에 공주로 소환하였다.

 

보장왕이 당으로 부터 독립하려다 공주(지금의 四川 공협)로 소환된다.

 

 

 

 

- 진정한 왕이 되어 보지 못한 채 타국에서 죽는 보장왕 (682)

 

고구려 부흥운동 11년 (682)  

 

[왕이] 영순(永淳) 초년(682)에 죽으니 [황제는 왕에게]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명령을 내려 [당나라] 수도로 옮겨 힐리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들은 하남(河南)·농우의 여러 주로 흩어서 나누어 옮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간혹 신라로 도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고씨 임금은 마침내 끊어졌다.

 

 

보장왕은 공주로 소환된 다음해에 죽는다.

 

 

 

- 사라지는 보덕국 (684년 11월)

 

신문왕 3년 (683)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신문왕 4년(서기 684)

11월, 안승의 조카뻘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이 베여 죽은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이 그곳에서 죽었다.

 

성을 함락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신라가 백제를 완전히 평정했는지 안승을 서라벌로 불러들인다.

 

보덕국이 사라질 시간이 된 것이다.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은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는 반란을 제압하고 보덕국 백성을 보덕국 남쪽으로 이주 시킨다.

 

이제 보덕국은 금마군이 되었다.

 

 

 

 

- 안동도독이 되는 보장왕의 아들 덕무 (686) 

 

 

고구려 부흥운동 15년 (686)

 

수공(垂拱) 2년(686)에 [황제가]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고,

 

성력(聖曆) 초년(698)에 이르러 좌응양위(左鷹揚衛) 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

 

 

 

보장왕의 아들 덕무는 안동도독이 된다. 

 

안동도독부는 후에 후고구려가 된다.

 

 

 

 

- 동북신성(돈성)에 있는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대조영 (698)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훼(趙毁)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營州)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발해(渤海)를 세우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때부터 발해를 자주국가로 인정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발해)

 

 

 

- 후고구려를 건국하는 보장왕의 아들 덕무 (699)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막기 위해 보장왕을 안동도독으로 파견했다.

 

그의 사후 686년 손자 <보원>을 고구려왕에 봉했지만

그는 고구려 부흥세력에 투항했고,

그 뒤를 이은 고덕무는 699년에 고구려 부흥을 위한 나라인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당나라에서 대중상과 대조영 세력 및 그 후신인 발해를 경계하기 위하여

고덕무를 요동군공으로 봉한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후고구려 (818)

 

고구려 부흥운동 원화(元和) 13년(818)

 

원화(元和)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악공(樂工)을 바쳤다.

 

 

 

고덕무의 안동도호부는 후고구려가 되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 고구려와 부여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는 발해의 선왕

 

선왕(宣王, ?~830년, 재위: 818년~830년)은 발해의 제10대 국왕이며

휘는 대인수(大仁秀)이다.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후고구려를 합병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와 부여 등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출처 : 위키백과 발해 선왕)
 

 

 

 

 

- 발해로 병합되는 후고구려 (820)

 

820년에 선왕이 고구려와 부여의 옛 땅을 되찾으면서, 후고구려는 발해로 합병되었다.

 

 

 

 

<발해와 통일신라의 영토>

 

 

 

- 거란에 의해 멸망하는 발해 (916)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1월 15일에 멸망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아울러 한민족은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발해)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