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왕 25년(AD150년)

 

1월, 가야세주(加耶世主){正見}가 그녀의 셋째아들 <청예靑裔>를 보내 入朝하였다.

 

12월, 음즐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은 그 지로(地老)에게 명하여 변별하도록 하였다.

 

지로(地老)가 말하기를 “加耶의 王子 <청예靑裔142-199가 지혜가 많으니

의견을 세울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허락하였다.

 

 

파사왕 26년(AD151년) 2월,

 

<청예靑裔>가 6부를 순유(巡遊)하였다.

 

부맹(部氓)들은 그가 신지(神智)하다며 모여들어 살펴보았다.

 

부주(部主)는 모두 이간(伊干)으로서 맞이하여, 후하게 대접했으나,

한기주(漢祇主) <보제保齊>는 홀로 가노(家奴)로서 접대하니, 심히 박하였다.

 

<청예靑裔>의 신하인 <탐하리耽下里>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노비를 살해하고, 도망하여 음즙벌주(音汁伐主)에게 의지하였다.

 

상은 그를 찾으라고 명하였으나, 음즙벌주(音汁伐主)는 응하지 않았다.

 

<길원吉元>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실직군(悉直君) <봉치奉治>와 압독군(押督君) <왕을王乙> 모두 그 땅을 바쳤다.

 

삼국사기는 수로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아 수로에게 물었다하나

이때 수로의 나이는 9살이었다.

 

정견의 셋째 아들 청예(수로)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나보다.

 

 

※ 왕피천

 

 

 

 

 

울진군 서면의 왕피천은 울진 성류굴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나온다. 

 

왕이 피난하여 온 곳이라는 의미에서 왕피천이라고 불리운다.

 

왕피천 곁에 서 있는 구산리 삼층석탑은 어쩌면 과객 같기도 하고 수문장 같기도 하다.

 

들판에 홀로 버려진 듯 서 있는 석탑은 왕피천을 흐르는 한()을 가슴 에 담고

먼 길을 떠도는 과객 같고, 절은 무너져 아무도 없는 빈 터인

그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서 있는 역사의 가치를 밤낮없이 지키는 수문장 같다.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1494-1 번지,

보물 제498호로 지정된 높이 3.24m의 통일신라 적에 만들었다는 석탑이다.

 

과객이든 수문장이든 삼층석탑은 왕피천을 흐르는 물소리를 온몸으로 듣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구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청암사지(靑岩寺址)에 세웠다고 한다.

 

이곳 절터에는 사찰이 없어지고 불상 등 많은 유물도 없어졌으나,

기와조각과 석축 등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찰 경내에 세워졌던 탑임을 알 수 있다.

 

이 석탑은 이중기단이 3층 탑신부를 받치고 있고,

기단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본떠 새겨져 있으며,

기단 위층의 갑석(甲石)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이고,

각층 옥신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각층 옥개석은 밑면에 5단씩 받침이 있고

낙수면이 얇고 전각도 반전되었고, 처마는 수평이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결실되었으나

3층 옥개석 위에 지름 23.5, 깊이 7㎝의 원형 찰주공(擦柱孔)이 있다.

 

 

심산유곡을 흐르는 저렇듯 해맑은 왕피천은 어디로부터 흘러오는 것일까?

 

왕피천이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발리 일대에서 발원하여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서 동해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이고 보면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일월산 동쪽 기슭,

하늘다람쥐가 놀러오는 어느 옹달샘으로부터 비롯된다 해야겠지만

아마도 구산리 삼층석탑이 온몸으로 듣고 있는 저렇듯 해맑은 물소리의 발원지는

아픈 역사의 저쪽 어디쯤일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마지막 오지로 불릴 만큼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으로 유명한 왕피천(王避川)왕이 피신해온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이곳으로 피신해 온 왕은 누구일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다.

 

935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의 뜻을 전한다.

 

마의태자는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피천으로 들어오게 된다.

 

함께 온 어머니는 끝내 운명을 달리하고,

세상사에 환멸을 느낀 마의태자는 혼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또 하나는 고려 공민왕이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받은 공민왕이 왕피천으로 피신했다는 것.

 

왕피천을 거느린 저 아름다운 산자락

또한 공민왕이 기울어진 국운을 통곡하며 넘었다고 해서

통고산(通高山, 해발 167m)으로 불린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먼 옛날 삼한시대

 

삼척과 울진지역을 지배하던 실직국의 안일왕이라는 설이.

 

구전에 의하면,

 

왕피천 윗 쪽 왕피리는 이 마을로 실직국 왕이 피신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왕피리의 병위동은 실직국 안일왕의 군사들이 머물렀던 곳이고,

포전은 군사들이 밥을 먹던 곳이고, 또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이며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이웃한 삼근리의 복두괘현(일명 박달재)은 애밀왕성이 함락되자

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하다가 이곳에서 복두를 쓰지 못하고 그냥 도망한 곳,

 

두건을 걸어 놓은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구산리 삼층석탑이 온몸으로 듣고 있는 물소리의 발원지는 마의태자의 탄식이거나,

공민왕의 통곡이거나, 실직국 안일왕의 피눈물일 것이다.

 

피난 온 왕들의 참담함을 간직한 왕피천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의 내력과 망국의 설움이 어떤 것인지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듯 저렇게 해맑게 흐르는 것이다.

 

 

 

 

실직국은 역사적으로 많은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나라이다.

 

실직국 부흥운동이 새겨진 봉평리 신라비는

잘 지어진 전시관 한 가운데 흰 수염을 기른 신선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

 

국보이므로 여느 보물과는 그 대접이 많이 달랐다.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에 소재한 이 비는

1988114일 국보 제242호로 지정된 주요 기록유산이다.

 

누천년 세월을 어느 논바닥에 묻혀 있다가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을 이장(권대선)이 정원석으로 쓰기 위해 흙을 털어내던 중

흐릿한 글씨들을 이상하게 여겨 관계기관에 알렸고 마침내 국보가 되었다.

 

사라질뻔한 역사를 되살리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논바닥에서 전시관으로, 정원석에서 국보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이 비는

 울진 봉평 신라비로 불려오다가

20101227울진 봉평리 신라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 204cm, 너비 32-55cm,

모양은 긴 사다리꼴에 가깝고 재질은 화강암이며 글자는 10행으로 모두 399자이다.

 

글씨체는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으로 대부분 판독이 가능하다.

 

신라 법흥왕대의 노인법등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입증,

 

신라 6부의 존재, 왕권의 실태, 17관등의 명칭, 울진 지역의 촌 이름, 지방관명,

칡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 등

문헌 기록에 보이지 않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이다.

 

비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당시 울진지방은 신라 왕경으로부터 노인촌으로 불렸는데,

신라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성에 불을 내고 중앙정부에 항거하였다.

 

법흥왕은 대군을 일으켜 평정한 후

13명의 고위 관리들과 함께 사후 처리를 의논해서 결정하였다.

 

이때 결정한 사항의 집행을 담당한 자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와 거벌모라(울진)도사와 실지(삼척)도사였고,

이 일을 총괄적으로 주관한 자는 실지(삼척)군주였다.

 

그들은 대노촌(거벌모라)에 경제적 부담을 지우고

중앙정부에 저항한 자들에게 처벌로 장 60대와 장 100대를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박사로 하여금 교화하고

이를 비에 새기게 하였다.

 

비문을 쓴 사람과 새긴 사람은 왕경인이고,

비를 세우는데 필요한 노동력은 거벌모라 출신이 제공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거벌모라는 당시 울진지역의 수부였던 봉평의 지명이고,

노인촌(奴人村)이란 신라에 정복당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들에 대한 탄압과 극심한 차별대우가 성을 불태우는 항쟁의 불씨가 되었을 것이다.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濊國), 그리고 춘천의 맥국(貊國)과 더불어 신라 북쪽에 있던,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일컬어지던 세 고대국가 중의 하나였다.

 

진한(辰韓) 연맹체로 울진과 영양 부근을 다스리던 실직국은

안강 북쪽을 근거지로 한 음집벌국(音汁伐國)과 국토의 경계를 두고 다툼이 잦았다.

 

 

신라본기는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파사이사금 23(AD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영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한 나머지 종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국(悉直國)과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왠 겨울에 난데없이 봄꽃들이 피었을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는 자주 이적과 신기를 통해 천심이 자신의 편임을 알려

역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애쓴다.

 

파사국의 눈으로 보면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승리와 평화의 징후이겠지만

망국의 한을 품은 실직국 눈에 비친 그것은 피눈물의 빛깔이었으리라.

 

후일 역사서에도 실직 무금왕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왕녀 고야가 꽤나 오랫동안 왕피천에서 머물렀다고 전해지며,

그 후로 수십 년간 실직국의 명맥이 이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 목숨을 걸고 사로국의 파진찬 <길원>과 병사를 유인해간

<포이>(실직국의 왕을 보필한 충직한 신하의 아들)가 <고야>와 만났다는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왕녀 <고야>와 무사가

아름다운 왕피천에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river49/1688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