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156년 청예(142-199)가 지금의 김해에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

 

正見(100?-158)의 셋째 아들 청예(수로)가 15살의 나이에

김해지역 9간(干)의 추대로 금관가야의 왕으로 즉위하고

161년에 月支國의 女  <許黃玉(146-189)>과 결혼한다.

 

이때 청예 20살, 황옥 16살이었다.

 

허씨(許氏)일가는 전한(前漢)황제의 외척으로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과  황실에서 정권의 핵심으로 지속적인 친분을 유지하다가 

전한 말기에 허씨 세력은 쇠퇴하였고 왕망의 신나라가 패망하자

<김일제>의 후손인 <알지>는 신라로, <정견>은 가야로 유입되어

가락국을 건국한 수로왕이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인 것이다.

 

 

 

-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

이 비석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음각되어 있는 글씨들의 字體(자체)가 뚜렷하여 판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김수로의 왕비 허황옥을 왜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하였을까?

 

 

後漢 光武帝(광무제) 건무 23년(서기 47년) 南郡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착민들이 봉기하여 漢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의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힘겹게 진압하였다.

 

반란군을 일으킨 토착인구 7000명을 江夏(현재 武昌 지방)로 이주시켰다.


和帝 永元 十三年, 許聖等 以郡收稅不均, 懷怨恨 遂屯聚反叛 明年夏, 遣使者

督荊諸郡 兵萬餘人 討之. (중략) 大破聖等, 聖等乞降, 復徙置江夏…

 

後漢 和帝(화제) 永元(영원)13년(서기 101년) 이 지역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

 

<허성許聖>의 무리가 세금의 차별이 있는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해 여름, 정부는 사자를 파견하여

荊州(형주) 여러 郡의 1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중략)

 

<許聖> 일당을 크게 격파하였더니 <許聖>의 무리가 항복하였다.

 

이들을 또다시 강하(江夏)로 이주시켰다.


이 두 번에 걸친 사건들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허황옥許黃玉>이 왜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단서를 추출할 수 있다.

 

南郡은 普州와 인접해 있는 땅이어서 南郡에서 수천 명이 연루된 반란사건이 있었다면

 

가까운 普州에 그 불똥이 튀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두 번째 사건에서는 반란을 주동했던 인물로 <許聖>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즉 許씨 성을 가진 사람이

普州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普州와 관련된 지역에 許씨가 지도층 인물로 살고 있었고,

정치적 사건의 결과로 수천 명의 인구가 두 번씩이나

 

양자강 하류인 무창(武昌)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01년 반란사건 때 강하로 이주시킨 <허성許聖>의 후손이 <허황옥(146-189)>이고

<허황옥>이 16세인 161년에 양자강을 타고 김해로 건너와서

156년에 금관가야를 세운 청예(142-199)와 혼인하였다.

 


한국 측의 기록인 「삼국유사」와 중국 측의 기록인 「後漢書」의 내용을 종합하면

양자강 상류의 보주(普州) 땅에 살고 있던 세력인 許氏族들이

後漢 정부의 차별 대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고,

후에 許氏族 출신 한 소녀가 황해를 건너 가락국에 도착하는 일련의 사건이

 

시간의 톱니바퀴처럼 꼭 맞아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이 신라의 건국년도를 고구려 상위에 놓기 위하여 끌어 올리다보니

금관가야의 건국년도가 156년에서 48년으로 108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 구지가 (龜旨歌)와 망산도(望山島)

 

 

龜何龜何 首其現也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놓아라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허황옥>과 <김수로> 신화에 나오는 망산도(望山島)에 있는 바위들은

목없는 거북 바위의 모습을 하고있다.

 

망산도라 한 것은 거북바위들이 바다에서 산이 그리워 몰려온 것을 望山이라 하여

망산도(望山島)라 했을 것이다.

 

망산도는 김수로왕 신하들인 아홉 구간이 횃불을 들고

<허황옥>이 타고 오는 배를 맞이했던 곳으로 <가락국기>는 쓰고 있다.

 

가야인들은 <황옥>이 돌거북을 타고 망산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망산도에서 태양의 여신이 솟아오르는 것을 환영하는 해맞이굿에

왕이 직접 나와 바다의 여신과 산신의 위치인 <김수로>왕이 교합하는 내용을

<가락국기>는 산중턱에서 <김수로>왕이 천막을 쳐놓고

<허황옥>을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허황옥>이 바지를 벗었다고 한 것은

구름이 벗겨져 해가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망산도(望山島)>

 

 

 

- 일본 건국신화의 비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