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勿理) 단제의 재위 원년은 경진(庚辰)년이다.

 

재위 36년 을묘(BC426)년에 융안(隆安)의 엽호(獵戶)<우화충于和沖>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무리 수 만 명을 모아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다.

 

제(帝)께서 군사를 보내셨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에 이 역적이 도성을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므로 제께서 좌우 궁인과 더불어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위패位牌}를 받들고 배를 타고 내려 가다가

해두(海頭)에 이으렀는데 얼마 있지 않아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勿 대부여 재위 BC425-B397>이

천명을 받들어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자

아홉 지역의 군사(軍師)가 추종하고

동서압록의 18개 성이 모두 군사를 보내 원조하였다.

<단군세기>

 

동압록은 지금의 요하이고 서압록은 지금의 난하이다.

 

 

 

BC426년 을묘년 勿理 단제 36년(燕 箱公 7년)

 

고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인 西戎國(대흥안령산맥 서부지역)의 <우화충>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수만의 군중을 모아 고조선의 서북쪽 36군을 침략하였다.

 

단제께서는 병사를 파병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종묘사직의 神主를 챙겨

배를 타고 거수국인 해두국(解頭國)으로 피신하였다.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丘勿>이 명을 받아 병사를 일으켜 장당경을 탈환하자,

고조선의 서부지역에 있던 고조선 거수국들이 동서압록 18城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BC425년 3월에 대홍수가 일어나 都城을 휩쓸어 버리니 적들이 혼란에 빠졌다.

 

<구물>이 군사 만명을 이끌고 가 그들을 토벌하여 <우화충>을 참수하고,

마침내 반란을 진압하였다.

 

해두국으로 피신한 단제 물리가 급사하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구물>이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고 도읍을 장당경으로 하였다.

 

 

BC 426년 43세 단군 <몰리>천왕때 즉, 중원이 전국시대로 접어들 때

단군 제국도 내부 분열과 대립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천왕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열후에게 내리는 통치력이 약화되어

열후에게 내리는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융안엽호(지방 장관직)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서와 하북일대의 상당수의 제후들을 포섭하여

수도 왕검성으로 대군을 몰아 진격해 왔다.

 

천왕은 상장 <모용구>로 하여금 대장군을 삼아

임지 제남 평원의 삼도병을 징발하여 반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모용구>는 위용 등등하게 고각을 울리며 삼한 제후들과 상의하였다.

 

<우화충>에게 한 모사가 헌책 하기를,

 

"지금 <모용구>의 병마가 정예하여 정면으로 대전할 수 없사오니

술수로써 대전해야 합니다.

 

병법에 군사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장군께서 일지군을 이끌고 선두에서 <모용구>와 싸우다가

서서히 후퇴하며 싸우다가 총 후퇴를 하면 <모용구>는 추격해 올 것이니,

제후군을 사방 요충지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반격하여 포위하고

장군께서 돌아서서 총공격을 가하면

적이 분열되어 능히 싸우지 못하고 달아날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섬멸하면 <구물>왕이 항거하지 못하고

장군께서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유악지중에 모둔 장수들이 찬동하여 일제히 준비하였다.

 

한편, 모용구는 대군을 몰고 전진하여 염탐군의 보고를 들으니

적의 군세는 생각하던 것 보다 어렵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양군이 함성을 지르며 대장의 공격 명령으로 접전을 벌이다가

적군이 차츰 후퇴하니 더욱 추격하여 적군이 진지를 모두 버리고 총퇴각을 함에

 

<모용구>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반적을 일거에 섬멸해 버리겠다."하였다.

 

대군을 몰아서 추격하다가 날이 이미 저물어 지는지라

혹여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돌아가려 하니,

때는 이미 늦었는지라 사방에서 고각이 울리고 깃발이 흔들며

적군이 순식간에 에워싸니 천왕군이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모용구는 亂中에서 전사하고 나라의 대군이 궤멸하였다.

 

탐정이 왕검성에 패전한 사실을 급히 고하니,

조정의 만조백관이 황황망조하여 천왕은 급히 피난 명령을 내렸다.

 

대소 관료들은 종묘사직 신주를 모시고 궁을 빠져나가

천왕은 전국 옥새와 보화를 챙기고 비빈 궁녀와 함께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청주 왕검성을 빠져 나오니 적의 추격이 급하여 육로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 해성(海城)으로 피난하였다.

 

해성은 지금의 산해관 인근이다. 

 

이 시대에 발해는 조선의 내해였으며

'발', '벌', '살', '헐' 등의 발음이 들어가는 명칭은 조선족이 호칭하는 명칭이며

이두문으로 한자를 붙여서 부른 것이다.  

 

발은 고어로 물이라는 것이다.

 

여기 청주(靑洲), 해성 모두 발해 주위에 있으며 치우천왕의 수도권 위에 있다.

 

<모용구>의 방위군이 패멸함에 삼십 육군이 함락하고

<우화충>은 왕검성을 점령하여 왕을 자칭하였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군사를 일으켜 달려왔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물리> 천왕이 피난처에서 사태 수습에 고민하다가

병을 얻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대소 신료와 <구물>을 탐전에 불렀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백성을 편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이제 짐의 대에 이르러 반적에게 나라를 잃었으니 열성조에 죄를 지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 세상에 가서 선제왕을 뵐 수 있을런가!"하며

 

<구물>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짐이 일찍이 후사가 없어 그대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으나

후사 문제를 거론할 겨를도 없이 오늘의 사태에 이르렀다.

 

그대는 선왕의 후예로써 용맹하고 품성이 인후하니

가히 제왕의 자질을 갖추었느니라."하고

 

이어 백관에게 이르되,

"경 등은 백민욕살 <구물>을 도와 왕업 회복에 전력하여 주기 바라오."

하고 붕어 하였다.

 

백관신료와 백성들이 통곡하고 국장을 치른 후 군신들이 모여 상의하였다.

 

"이제 <우화충>이 왕검성을 점령하였으니

장차 이리로 쳐들어올 곳인즉 어찌할 것인가?"하며 대책회의를 열었다.

 

백관의 침통한 공기 속에 국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군사 주력은 이미 패멸하고 재정비의 여력이 없다.

 약소한 병력으로 이 곳에서 적과 항전은 불가하니, 어찌함이 좋을까?"하였다.

 

여러 장상들의 의견은 일단 적의 공격을 피하여

멀리 퇴각할 준비를 하고 동부예맥에 의지할 것을 잠정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장당경의 구물군의 전황을 살펴 가며 결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첩자를 다수 왕검성 내위에 밀파하여 적극적으로 대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래서 <우화충>의 동정을 면밀히 살피며

九恒의 열후가 집결하는 상황을 보아 동참할 준비를 하였다.

 

<구물>이 열국에 격문을 보내어 반적을 토벌할 병마를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니

하북과 요동의 18성이 이에 호응하였다.

 

BC 425년 마침 대홍수로 <우화충>의 왕검성이 수침으로 혼란이 일어나니

<구물>은 동원령을 내려 각 부 제장에게 이르기를

 

"지금 반적은 대홍수로 왕검성이 혼란에 빠지고

삼군 병마가 흩어져 있으니 때를 얻었음이라.

 

제장은 힘을 모아 왕검성을 총공격하면 기필코 반적을 파할 것이다.

 

내 이미 18성 태수에게 격문을 보내 왕검성의 구원군을 막고

반적의 도피로를 차단하면 <우화충>을 반드시 파멸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제장이 승복하고 왕검성으로 진격하였다

 

<구물>은 선두에서 1만의 기마병을 이끌고 질풍같이 돌격하니

도성의 방위책이 파괴되고 제장이 사방으로 도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이에 <우화충>은 성곽의 험준함을 의지하고 장병을 독려하여도 중과부적이라

성 외곽에 주둔한 방어군은 구원을 해 오지 않으니

점차 수성 병사가 죽고 도망가고 성이 함락하기에 이르니

<우화충>은 일당을 거느리고 도망가려고 하니

남문을 깨트리고 돌입한 <구물>에게 주살 되었다.

 

이어 제장이 입성하여 성중 백성을 구휼하고

항복한 장병을 원지에 배치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축하연을 베풀었다.

 

해두 피난지에는 별도로 태수를 임명하고

구몰은 종묘 신주를 모시고 환도하였다.

 

이리하여 태후가 거처를 정한 후 제장을 모이게 하여 이르기를

 

"제가 붕어하신 후 피난 조정이라 능히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가

이제 왕검성을 회복하고 나라의 위상을 갖추었으니 大位를 더 이상 비울 수 없소.

 

하루 빨리 천왕을 받들어 천하 인심을 진정 시킬 것인즉

제장과 백관은 뜻을 모아 대사를 감정하기를 바라오."하였다.

 

이때 제장들은 이미 <구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공론에 붙이기를

 

"<구물>은 왕손으로 반적을 토벌하는데 대공을 세웠으니 가장 적임일 것이며

열국제후도 승복할 것입니다."하였다.

 

그후 하늘에 고하고 천왕위에 오르니 이가 44세 단군이다.

 

이미 대단군조선은 반란과 분열을 거듭하여 燕과 契丹과 幽는 모반하여

연과 제는 본국 조선의 토벌을 경계하여 상호 동맹하고 방위를 강화하니

대단군 조선은 황하 동안과 산동의 대부분 영토를 상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구물>천왕은 조서를 내려 나라의 기운이 쇠하고 수도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국호를 대부여(大扶余)라 개칭하는 의논이 나왔다.

 

이로써 대단군조선은 끝나고

다만 삼한(三汗), 삼조선(三朝鮮) 등의 명칭과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전국7웅 및 기자조선과 대부여>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