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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4.11 선덕여왕 1회 - 3회

 

 

<진평대제의 등극과 그의 여인들과 자식>

 

 

1. 진평(眞平)대제의 등극

 

<진흥(534-576) 재위 540-575>제가 죽고

금(金)태자(552?-582 재위 576-579)가 즉위하였다.

 

인하여 <미실美室(547-606?)>을 받아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美室>을 심히 총애하지도 않았다.

 

<미실美室>은 (후사를 약속한)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思道(535?- )>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폐하고

 

동(銅)태자(550? -572)의 아들 <白淨(567-631)>公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眞平)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미실>과 <진지>의 다툼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 진평이다.

 

법흥대제 모진(지소) - 진흥대제 삼모진 또는 심맥(534-576)

삼모진(사도) - 동륜(550?-572)

                     진지대제 금륜(552-582)

                     구륜(554?- )

                     태양(563?- )

                     은륜(566?- )

미진부(묘도) - 미실(547-606?)

동륜(만호) - 진평대제 백정(567-631)

비조부(문화) - 문노(538-606)

 

 

 

2. 진평왕의 여인들과 자식

 

 

1). 진평+은륜공주

 

진평은 사도태후의 손자이며, 은륜은 사도태후의 막내딸이다. 숙질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은륜은 골을 믿고 방탕하여) 왕의 총애를 잃어 (그들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사도>가 대원신통을 걱정하여

 

11세 풍월주 <하종(564- )>에게 명하여 모시도록 하였다.

 

<하종>과 사이에서 <효종>, <하희>, <월희>를 낳았다.

 

그 중 <하희>는 17세 <염장(586-648)>공에게 시집가서

<윤장>,<하장>,<춘장>(25세 풍월주)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진흥과 사도에게는 <동륜>, <금륜> 외에 <구륜>이라는 아들과

<덕명>, <아양>{15세 풍월주 유신의 조모}, <태양>, <은륜>의 4딸이 있었다.

 

 

2).진평+태양공주

 

<태양>공주는 <은륜>의 언니이다. 역시 숙질간이다.

 

<태원>과 <호원> 형제를 낳았으나 진평제를 닮지 않았고,

사신(私臣)을 좋아하여 (형제는) 統을 얻지 못했다.

 

일찍이 진흥과 숙명공주사이의 소생인 <정숙貞肅>은 태자로까지 봉해졌으나

이후 혈통을 의심받아 왕통에서 멀어진 경우가 있었다.

 

<흠돌>의 난에서 3간 중의 한명인 <흥원>은 <호원>의 아들이다.

 

 

3).진평+화명, 옥명= 자녀 있었음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은 <숙명叔明>공주와 4세 풍월주 <이화랑>의 딸로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자녀를 낳았다.

 

진평의 할아버지인 진흥과 숙명은 같이 지소태후의 자식이다.

 

그러니 이들은 종숙질 간이다.

 

하지만 적통이 아니어서인지 이들 자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의 손위 누이인 <화명>은 <하종>공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이 <하종>의 적처로 삼으려 했지만 <만호>가 들어주지 않고

모두 진골 정통을 받아 들였다.

 

 

4).진평+용명공주

 

<용명龍明>공주는 진흥과 <지도>의 딸이므로 그와도 숙질간이다.

 

공주는 13세 풍월주 <용춘(578-647)>공의 손위 누이다.

 

<용춘>공은 진지왕과 <지도>의 아들이다.

 

<용명>이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5).진평+지도태후

 

<지도>태후는 진지왕비로 <기오>공의 딸이다.

 

<기오>공은 <선혜>황후의 사자로

<사도>태후의 포매 <흥도>낭주를 아내로 맞아 <지도>를 낳았다.

 

<지도>는 태상태후 <사도>의 명으로 다시 신왕 진평을 섬겼다.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진흥왕과 월화궁주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염장>공의 3형제를 낳았다.

 

이렇게 진평의 할머니 <사도>와 <지도>의 어머니인 <흥도>가 자매간이므로

그들도 종숙질 간이다.

 

 

6).진평+마야황후=천명공주, 선덕공주 덕만

 

공식적인 첫 황후가 <마야>다.

 

<마야>의 아버지는 <복승>공이며 어머니는 <송화>공주로 <지소>태후의 딸이다.

 

<지소>를 기준으로 역시 종숙질 간이 된다.

 

자식으로 <천명>공주, <선덕>공주가 있다.

 

적자가 없어 13세 <용춘>공의 형 <용수>를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은 왕위를 이을 만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용춘>공을 염두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선덕>은 <용춘>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용춘>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다시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7).진평+승만황후=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죽음

 

그 때 후비인 <승만>황후가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가계가 불명이라 촌수를 가늠할 수 없다.

 

 

8).진평+보명=양명공주

 

<양명>의 어머니 <보명>은 지소태후와 침신 <구진>의 소생이다.

 

진평제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에게 명하여 제를 도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여 <보명>에게 상도를 양보하였다.

 

<보명>은 그 때 <석명>을 가진지 3개월이었기에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미실>이 먼저 사랑을 받았다.

 

제는 양기가 통하게 되자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도할 것을 구하였다.

 

이 해 9월에 제는 <보명>과 <미실>을 좌, 우후로 삼았다.

 

<보명>은 <석명>을 낳고 나서 3년간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양명>을 낳았다.

 

이렇게 <보명>은 진흥과 어머니가 같으므로 조모 항렬에 해당한다.

 

<보종>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자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양명>이 꾀를 내어 16세 <보종>공을 유혹하여 <보라>와 <보량>의 두 딸을 낳았다.

 

<양명>은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하종>공의 아들인데

공주와 더불어 <양도>공을 낳았다.

 

이렇게 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으로 하였다.

 

 

9). 진평+보량(605- )=보로전군

 

<보량>은 <장명>의 손위 누이로 <보로>전군을 낳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보량>은 <보명>의 손녀다.

 

그러므로 항렬 상으로 진평과 같은 재종형제간이다.

 

<승만>후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양도>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양명>공주가 이에 제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 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을 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제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이에 아들 <양효>를 낳았다.

 

<보로>전군에 관해서는 이전 법흥왕과 후궁인 <옥진> 사이에서

난 <비대>전군과 비교된다.

 

당시 비록 성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시 법흥은 <비대>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넘겨줄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진평대에는 전혀 그런 고려가 없고 황후는 오히려 <보량>을 물러나게 하고

타 종실의 신하에게 시집보내려고 까지 하고 있다.

 

<춘추(603-661)>공의 정궁부인인 <보량>궁주는 <보종>공의 딸이다.

 

아름다웠으며 춘추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를 낳아 춘추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15세 <유신(595-673)>의 동생인 <문희>가 춘추공의 정궁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량>궁주가 <양도>공과 함께 산 <보량>과는

다른 인물임이 분명하다.

 

참고로 <<화랑세기>>의 필사자 박창화는

여기서 <보량>궁주를 <보라>궁주로 수정하였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춘추공의 첫 부인은

수정안과 같이 <보라>궁주가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10).진평+난야궁주=우아공주

 

<난야>궁주는 진흥과 <미실>의 딸이다.

 

그러므로 이들도 숙질간이다.

 

그의 딸 <우야>공주는 진평제의 소생이다.

 

<보리>공의 처 <만룡>은 20세 <예원>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했다.

 

<예원>공과 <우야>의 아들은 28대 <오기>공이며 딸 <온희>는 25세 <춘장>공에게,

<성희>는 <원수>공에게, <우희>는 <마차>공에게 시집을 갔다.

 

 

11). 진평+미실궁주=보화공주

 

<예원>공의 부제 21세 <선품>공은 <미실>궁주의 딸 <보화>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보화>는 <구륜>공에게 시집가서 <선품>을 낳았다.

 

<선품>의 딸 <자의>가 문무왕후이며, 차녀 <운명>은 <오기>공의 부인이다.

 

3녀 <야명>도 문무제의 궁주가 되었다.

 

법흥왕을 기준으로 법흥→삼엽공주→미진부→미실로 연결되고

법흥→지소→진흥→동륜→진평으로 연결된다.

 

그러니 재종숙질 간이 된다.

 

 

12). 진평+석명=두 딸

 

진지왕과 <보명>의 딸인 <석명>공주는 진평과 종형제간이 된다.

 

처음에 진평제를 섬겨 두 딸을 낳고 출궁하였다.

 

<동란>공은 그 때 음성서의 장으로 향가를 잘 하였다.

 

<석명>이 <동란>공에게 가무를 배웠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 딸 <석란>을 낳았다.

 

제가 허락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동란>공은 감히 처로 대하지 못하고 군으로 섬기며

자녀를 계속 낳았다.

 

23세 풍월주 <군관>공은 그 네 번째이다.

 

이렇게 3대를 오가면서 무수히 많은 여인을 편력하며 후사를 준비한 진평도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진평의 시대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사망 전해인 재위 53년에

칠숙과 석품의 난이 있었다.

 

이에 17세 <염장>공이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선덕>이 즉위하자 관에 들어가 조부의 영이 되었다.

 

일찍이 그의 어머니 <지도>태후가 (진지왕이 죽고) 홀로 되어 진평을 섬겼는데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에게 시집가 <염장>공을 낳았다.

 

이번에는 그의 아들 <염장>공이 다시 진평의 딸 <선덕>에 붙어 발탁된 것이다.

 

 

 

<화랑세기>는 당시 대표 화랑들의 세기이므로 해당시기의 왕가의 직계 혈통에 관하여

모두를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풍월주 등 대표화랑과 관련이 있는 부문만 거론하여도

이렇게 진평의 여인들은 다양하였고 자식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성골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적통 황후 소생의 아들은

말년에야 <승만>후를 통해서 겨우 한명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도 일찍 죽어 결국 성골남진이란 말만 남기고

선덕여왕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위와같은 진평대제의 여인들과 자식들을 참조하여 드라마 선덕여왕을 다시 살펴보자



 

 

 

 

 

<1회>

 

진흥대제가 북한산에 올라 신라를 한눈에 바라보고는 호연지기 한다.

 

<미실>은 백제의 자객들이 진흥왕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낸다.

 

 

하지만 진흥은 피를 토하며 명운이 다함을 깨닫고 미실에게 유훈을 남긴다.

 

 

진흥왕은 따로 근위 화랑 <설원>랑에게도 <미실>을 죽이라 밀지를 내리지만

 

<미실>은 진흥의 죽음을 감지하고 반격을 가하는데...

 

진흥대제(이순재역)가 43세에 죽었는데 너무 나이가 많아보이고

덕만의 어린시절에 대한 작가의 지나친 상상력이 이 사극의 흠이다.

낭장결의와 신궁, 화백회의와 화랑에 관한 이야기는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도록 잘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진흥대제가 죽은 576년에 진흥대제 43세, 진지대제(금륜) 25세,

<미실> 30세, 진평대제(백정) 10세, <문노> 39세, <설원> 28세이다.

 

신라는 진흥대제때 북쪽으로 만주 길림까지 진출하였다.

 

 

 

 

 

 

<2회>

 

진평은 <미실>의 옹립을 받고 왕위에 오르지만 허울 뿐이다.

 

<문노>와 <마야>부인을 죽이려했던 <미실> 일당의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마야>부인은 여자 쌍둥이를 낳지만 <미실>의 공격을 막기위해

<소화>를 시켜 중국으로 탈출시킨다.

 

 

<미실>은 호위무사 <칠숙>을 시켜 지구끝까지라도 쫓아가

 

해결하도록 명을 내리는데...

 

진평대제 <백정>이 즉위한 해는 579년이다.


 

 

 

 

 

 

 

<3회>

 

어린 <덕만>이 중국 사막일대 여각에서 <칠숙>을 안내한다.

 

로마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덕만>의 이야기에 칠숙은 여각까지 따라온다.

 

여각에 모이는 각국 교역인들은 어린 <덕만>의 능수 능란한 화술에

다들 즐거워 하는데...

 

한편 신라에선 <마야>부인이 낳은 세명의 왕자들이 예언에 따라

낳자마자 운명하면서 성골남진의 예언이 맞아떨어진다.

 

<덕만> 일행과 지내던 <칠숙>은 <소화>와 <덕만>의 소지품을 확인하다가

결국 자신이 쫒던 대상임을 알게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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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