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BC 369?~BC 286?, 289?) / 맹자(BC372?~BC 289?)
* 장자 :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으로 총 33편
(4세기 서진西晉 곽상郭象 정리).
* 내편의 7편의 제목은 공부의 단계를 나타냄.
① 소요유逍遙遊(현상계를 초월하여 노닒)
② 제물론齊物論(만물이 균등하다는 의론)
③ 양생주養生主(생명의 주인을 배양함)
④ 인간세人間世(세속에 의혹이 없음)
⑤ 덕충부德充符(천덕天德이 충만한 징조)
⑥ 대종사大宗師(위대하고 으뜸이 될 스승, 교화敎化)
⑦ 응제왕應帝王(제왕의 자리에 마땅함, 치화治化)
* 맹자
① 선善을 바라는 것은 ‘선인善人’이고,
② 선을 자신에게 갖춘 사람이 ‘신인信人’이다.
③ 선을 갖춤이 충실하면 ‘미인美人’이고,
④ 충실하면서 광명한 빛이 나면 ‘대인大人’이며,
⑤ 위대하면서도 남을 변화시키면 ‘성인聖人’이고,
⑥ 성스러우면서도 헤아릴 수 없으면 ‘신인神人’이다.
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
(「진심盡心 하」)
1.
‘북쪽 바다’(北冥)에는 ‘물고기’가 사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화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붕새의 등 넓이는 몇 천리가 되는 지 알 수 없다.
솟구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을 구름처럼 뒤덮는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이 움직여 태풍이 일어날 때,
장차 ‘남쪽 바다’(南冥)로 옮겨가려고한다.
이 남쪽 바다는 ‘하늘 못’(天池)이다.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소요유逍遙遊」)
2.
‘제해齊諧’는 괴이한 일을 아는 사람이다.
제해가 말하여 이르기를,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갈 때는, 파도가 3천 리나 치며,
회오리바람에 날개를 치며 위로 솟구친 것이 9만 리에 이른다.
6개월을 날아가서야 멈추게 된다”고 하였다.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소요유逍遙遊」)
3.
‘아지랑이’와 ‘먼지’는 살아있는 존재들이 ‘숨결’로 서로 불어낸 것이다.
하늘의 저 푸르고 푸른 것이 과연 바른 색깔일까?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붕새가 아래를 내려다 볼 때도 이와 같을 것이다.
또한 물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배’를 실을 힘이 없다.
마루의 움푹 파인 곳에 물을 한 잔 부으면,
먼지ㆍ티끌 같은 것은 배가 되어 뜨지만, 그릇을 놓으면 바닥에 붙어 버린다.
이것은 물은 얕은데 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실을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는 올라가야 충분한 바람이 밑에 놓이게 된다.
이런 뒤에야 비로소 ‘바람’에 의지하고 푸른 하늘을 등에 져서 막는 자가 없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남쪽 바다’로 날아갈 수 있다.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背負靑天 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
(「소요유逍遙遊」)
* 맹자
나는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 말하기 어렵다.
그 기운 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똑바로 배양하여 상하게 하지 않으면, 천지간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운 됨은 ‘정의’(義, 善)와 ‘진리’(道, 眞)에 짝이되니,
이 기운이 없으면 (정의와 진리도) 굶주리게 된다.
我善養吾浩然之氣 … 曰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閒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공손추公孫丑」 상)
4.
‘매미’와 ‘비둘기’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우리는 솟구쳐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이를 뿐이며,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구만리를 올라 남쪽 바다에 가려는 것일까?”라고한다.
들판에 나가는 사람은 세끼 식사만 지니고 갔다가 와도 배가 부르지만
(果는 과일이니 과일처럼 배가 부름),
100리를 여행하는 사람은 밤을 새워 방아를 찧어서 식량을 준비해야 하며,
1000리를 가는 사람은 3개월분의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이 두 벌레가 그 사정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蜩與學鳩笑之曰 我決起而飛 搶楡枋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
奚以之九萬里而南爲 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之二蟲又何知
(「소요유逍遙遊」)
5.
탕湯임금이 ‘극棘’에게 물었던 것도 이것일 뿐이다. (그 이야기의 요약)
불모의 땅인 북쪽에 ‘명해冥海’가 있으니 ‘하늘 못’(天池)이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가 수천 리라 그 길이를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다.
그곳에 ‘새’가 있으니 그 이름이 ‘붕鵬’이다.
그 새의 등은 태산泰山과 같으며 날개는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같았다.
회오리바람에 날개를 치며 위로 솟구친 것이 9만 리이다.
구름 높이 치솟아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뒤에야 남쪽으로 날아가기를 도모하고,
바야흐로 ‘남명南冥’으로 날아간다.
연못에 사는 메추라기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저 새는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
나는 뛰어올라도 불과 몇 길도 오르지 못하고 내려와서
쑥밭에서 빙빙 돌면서 날아다니니,
이것이 낢의 극치인데 저 새는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별이다.
湯之問棘也是已 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修者 其名爲鯤 有鳥焉 其名爲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搏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絶雲氣 負靑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斥鴳笑之曰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此小大之辯也
(「소요유逍遙遊」)
6.
① 그러므로 ‘지혜’가 하나의 관직에 효과가 있고,
‘행실’이 하나의 마을에 알맞으며,
‘덕’이 한 나라의 임금의 마음에 합치될 만하고,
그 ‘징험’이 한 나라에 나타나는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도
또한 이 메추라기와 같을 뿐이다.
② 그러니 ‘송영자宋榮子’는 이러한 일에 오히려 웃어줄 뿐이다.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할지라도 애쓰지 않으며,
온 세상이 비난할지라도 꺾이지 않는다.
‘안’(본질)과 ‘밖’(말단)의 구분을 분명히 정하고
‘영예’와 ‘욕됨’의 경계를 변별함이 이러할 뿐이다.
그는 세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았다.
비록 그러나 확립되지 못한 바가 있었다. (人仙의 경지)
③ ‘열자列子’는 ‘바람’(風)을 타고 다니기를 시원하게 잘하여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는 이러한 축복을 받음에 대해 집착하지 않았다.
이는 비록 걷는 것은 면한 것이나, 여전히 의지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地仙의 경지)
④ 예컨대 저 천지의 ‘정기正氣’를 타고서 6가지 기운의 변화를 다스려,
‘무궁한 자리’에서 노니는 자(막고야 산의 신인神人),
그가 또한 어디에 의존하겠는가?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나’라는 것이 없고(無己),
신인神人은 내세울 ‘공덕’이 없고(無功),
성인聖人은 드러낼 ‘이름’이 없다(無名)”라고 말하는 것이다.
(天仙의 경지, 長生不死의 경지)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 而徵一國者 其自視也亦若此矣
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境 斯已矣 彼其於世 未數數然也
雖然猶有未樹也
夫列子御風而行 冷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故曰
至人无己 神人无功 聖人无名
(「소요유逍遙遊」)
7.
막고야藐姑射라는 산(발해渤海 가운데 섬에 있는 산)에 ‘신인神人’이 사니,
피부가 얼음⋅눈과 같고, 자태가 가냘프고 맵시가 있어서 처녀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들이쉬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하늘을 나는 용龍을 거느려 사해四海의 바깥을 노닌다.
그의 정신은 하나로 모여 있으며,
만물로 하여금 병들지 않게 하고 해마다 곡식이 잘 익게 한다.
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肌膚若氷雪 綽約若處子 不食五穀 吸風飮露
乘雲氣御飛龍 而遊乎四海之外 其神凝 使物不疵癘而年穀熟
(「소요유逍遙遊」)
* 삼신산三神⼭ : 신선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발해 가운데 섬에 있는 산,
봉래산(蓬萊山, 금강산)ㆍ방장산(方丈山, 지리산)ㆍ영주산(瀛洲山, 한리산).
* 황제내경⿈帝內經
상고시대에 ‘진인’이 있었다.
그는 하늘과 땅을 끌어당겼으며, 음양을 장악하였고,
정기精氣를 호흡하며, 홀로 서서 정신을 지켰고, 피부와 살이 한결같았다.
그래서 능히 수명이 하늘ㆍ땅과 같아서 결코 죽는 법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진리(道)와 하나가 되어 살기 때문이다.
上古有眞人者 提挈天地 把握陰陽 呼吸精氣 獨立守神 肌肉若一
故能壽敝天地 无有終時 此其道生
8.
참된 주재자(眞宰)가 있으나 그 조짐을 절대로 볼 수 없다.
작용이 있음은 참으로 진실하나 그 형체는 볼 수 없다.
실정은 있으나 형체는 없다.
若有眞宰 而特不得其朕 可行已信 而不見其形 有情而無形
(「제물론齊物論」)
사물은 저것이 아님이 없고 사물은 이것이 아님이 없다. (이원성)
그래서 저것의 입장에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것도,
이것의 입장에서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이 이것에서 나오며, 이것 또한 저것으로 말미암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설이다.
그러니 삶이 생겨나면 동시에 죽음도 생겨나고,
죽음이 생겨나면 동시에 삶도 생겨난다.
되는 것이 생겨나면 동시에 안 되는 것도 생겨나고,
안 되는 것이 생겨나면 동시에 되는 것도 생겨난다.
옳은 것으로 말미암으면 동시에 그른 것으로 말미암게 되고,
그른 것으로 말미암으면 동시에 옳은 것으로 말미암게 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성인은 여기에 말미암지 않고,
‘하늘’(天, 이원성을 초월하는 자리)에 비추어 보고 여기에 말미암는다.
이것 또한 저것이며 저것 또한 이것이니,
저것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是非)이며 이것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서로 짝이 되지 못하는 자리(이원성을 초월한 자리)를
‘도의 지도리’(道樞, 도의 중심)이라고 한다.
‘지도리’(樞)이기에 비로소 그 원의 중심이 되어 대응함에 다함이 없게 된다.
이것 또한 하나의 무궁함이며 저 것 또한 하나의 무궁함이다.
그러니 “밝음(明)을 쓰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
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是亦一無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제물론齊物論」)
* 석가모니의 연기법緣起法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잡아함경)
* 3조 승찬僧璨 신심명信⼼銘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10.
옛사람들은 그 앎에 지극한 바가 있었다. 어떤 것이 지극함인가?
본래 사물이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지극하고 극진하여 더 보탤 것이 없다.
古之人 其知有所至矣 惡乎至 有以爲未始有物者 至矣 盡矣 不可以加矣
(「제물론齊物論」)
(본래 사물이 텅 비어있으니, 알 것도 없다. 알 것이 없는 것이 지극한 앎이다.
상대를 초월한 지극한 앎)
* 육조 혜능 육조단경六祖壇經
본래 한 물건도 있지 않다.
本來無一物
11.
선을 하되 명예를 얻을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하되 형벌을 받을 정도로 하지 않으며, ‘독맥’을 경맥으로 삼으면, 몸을 보존할 수 있고, 생명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님을 잘 봉양할 수 있고, 천수를 다 누릴 수 있다.
爲善无近名 爲惡无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양생주養生主」)
12. 「양생주」의 포정庖丁(정丁이라는 요리사, 포인庖⼈) 이야기
신이 좋아하는 것은 ‘도道’이니, ‘기술’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처음 신이 소를 해체할 때는 오로지 전체적인 소가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전체적인 소를 보지 않았습니다.
요즘 신은 ‘정신’으로 대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멈추고 정신이 작용합니다.
‘천리天理’에 의거하여 큰 틈새를 밀치고 큰 빈 곳에 칼을 넣어서,
본래 그러한 바에 따라 기술이 일찍이 뼈와 살이 만나고,
힘줄이 얽인 곳을 경유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훌륭한 요리사가 칼을 해마다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이며,
평범한 요리사가 칼을 달마다 바꾸는 것은 뼈를 쪼개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의 칼은 19년이 되어 수천마리의 소를 해체했으나,
칼날이 숫돌에 막 간 것 같 습니다. …
문혜군이 이르길
“뛰어나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을 배양하는 도리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䋯之未嘗 而況大軱乎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형
…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천리天理에 순응하여 양심에 맞게 사는 것이 양생의 도리!)
* 맹자
‘호연지기’는 정의로움을 쌓아서 생겨나는 것이다.
정의란 불시에 쳐들어가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실천함에 마음에 ‘뿌듯함’(양심에 부끄러움 없음)이 없으면 이 기운이 굶주리게 된다.
…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할 뿐 바로 잡으려하지 말고,
마음으로 잊지 말되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 必有事焉而勿正 心 勿忘 勿助長也
(「공손추公孫丑」 상)
13.
기름(脂)은 땔나무에서 다하지만, 불은 전해져서 그 다함을 알 수가 없다.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양생주養生主」)
(참된 생명은 불생불멸!)
14.
안회가 말하기를
“감히 ‘마음의 재계’(心齋)에 대해 묻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니(공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뜻을 하나로 모아라!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않고 ‘기운’으로 들어라.
귀는 듣는 것에 멈추고, 마음은 부합하는데 멈춘다.
기운은 텅 비어 있으면서 사물을 대한다.
오직 ‘도道’는 텅 빈 자리에 모인다.
텅 비우는 것이 마음의 재계이다”라고 하였다.
回曰 敢問心齋 仲尼曰 若一志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 耳止於聽 心止於符 氣也者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 心齋也
(「인간세人間世」)
15.
이제 애태타(위衛나라의 추남)는 말하지 않아도 신뢰를 주고,
공을 세우지 않아도 친애하며,
남으로 하여금 자신의 나라를 주고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하였으니,
이는 ‘재능’이 온전하나(才全) ‘덕’이 드러나지 않는 자(德不形)이다.
今哀駘它未言而信 無功而親 使人授己國 唯恐其不受也
是必才全而德不形者也
(「덕충부德充符」)
16.
마음을 조화롭고 즐거우며 통하게 하여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낮과 밤에 틈이 없이 사물과 더불어 늘 봄을 이룬다.
이는 사물과 접하여 마음에 4계절의 마음을 낳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재능을 온전하게 함’(才全)이라고 이른다.
使之和預通 而不失於兌 使日夜無郤 而與物爲春 是接而生時於心者也
是之謂才全
(「덕충부德充符」)
17.
무엇을 일러 ‘덕德’이 드러나지 않음이라고 하는가?
이르노니 평평한 것은 물의 고요함이 성대한 것이니,
그것이 법法이 될 수 있는 것은 안으로 잘 보존하고 밖으로 출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덕이란 ‘조화로움’(和, 희로애락의 조화, 자연의 4계절과 통함)을 이룸을 닦는 것이니,
덕이 드러나지 않으면(덕이 속으로 꽉 참) 사물이 떠나지 않는다.
何爲德不形 曰平者 水停之盛也 其可以爲法也 內保之而外不蕩也
德者 成和之修也 德不形者 物不能離也
(「덕충부德充符」)
* 맹자
군자가 본성으로 삼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마음’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 형색을 나타냄에, 얼굴에서는 훤하게 드러나고, 등에서는 풍성하게 드러나며,
사지四肢에서는 실제로 시행된다.
사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남들이 깨닫게 된다”하였다.
君子所性仁義禮智 根於心 其生色也睟然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喻
(「진심盡心」 상)
18.
하늘이 하는 바를 알고 사람이 하는 바를 아는 것이 지극하다.
하늘이 하는 바를 아는 자는 타고난 그대로이며,
사람이 하는 바를 아는 자는 그 지혜의 아는 바를 가지고
그 지혜의 알지 못하는 바를 배양한다.
그 천수를 다하도록 중도에 멈추지 않는 자는 지혜가 성대한 것이다.
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知天之所爲者 天而生也
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
(「대종사大宗師」)
* 맹자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마음’을 극진히 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알 수 있으니,
그 본성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챙기는 자는 그 본성을 배양할 수 있으니,
그 본성을 배양하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
오래 살고 짧게 사는 것을 둘로 보지 않고 자신을 닦으면서
(오직 인간의 길을 걸을 뿐!)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참 생명’을 온전히 확립하는 길이다”라고 하셨다.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진심盡心 상」)
19.
옛날의 진인眞人은 잠을 잠도 꿈을 꾸지 않으며, 깨어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식사를 함에 맛난 것을 찾지 않으며, 그 호흡이 깊고 깊다.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나, 일반사람들은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
욕망에 굴복한 자는 그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가 토하는 것 같고,
그 욕망이 깊은 자는 하늘의 기틀이 천박하다.
古之眞人 其寢不夢 其覺無憂 其食不甘 其息深深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
屈服者 其嗌言若哇 其耆欲深者 其天機淺
(「대종사大宗師」)
20.
옛날의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모른다.
그 나옴(태어남)을 기뻐하지 않으며 그 들어감(죽음)에 저항하지 않는다.
무심히 갔다가 무심히 올 뿐이다.
그 시작점을 잊지 않고 그 끝을 추구하지 않는다.
생명을 받으면 기뻐하고 죽으면 돌아간다.
이를 일러 “마음(분별심)으로 진리를 버리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하늘을 돕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를 일러 ‘진인’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러한 자는 그 마음은 확고하며 그 용모는 고요하고 그 이마는 아름답다.
서늘하기는 가을과 같고 따뜻하기는 봄과 같다.
기쁨과 분노는 4계절과 통하고,
사물과 더불어 마땅함이 있으니 그 지극함을 알 수 없다.
古之眞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捐道 不以人助天
是之謂眞人 若然者 其心志 其容寂 其顙頯 凄然似秋 煖然似春
喜怒通四時 與物有宜而莫知其極
(「대종사大宗師」)
21.
그들은 장차 조물주와 더불어 벗이 되어, 천지의 한 기운에서 노닌다.
그들은 ‘삶’을 몸에 붙은 혹이나 사마귀로 여기며,
‘죽음’을 종기가 터진 것으로 여긴다.
대저 이러한 이들이 또한 삶ㆍ죽음에 우열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른 물건들을 빌려다가 한 몸에 의탁하게 하고,
간ㆍ담을 잊고 귀ㆍ눈을 버리고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되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한다 (생사윤회에 끝이 없음).
어떤 것에도 걸림 없이 속세의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되,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유유히 노닌다.
彼方且與造物者爲人 而遊乎天地之一氣 彼以生爲附贅縣疣 以死爲決疒+丸潰癰
夫若然者 又惡知死生先後之所在 假於異物 托於同體 忘其肝膽 遺其耳目,
反覆終始 不知端倪 芒然彷徨乎塵垢之外 逍遙乎無爲之業
(「대종사大宗師」)
22.
진인은 ‘형벌’(刑)을 몸으로 삼고, ‘예절’(禮)을 날개로 삼고,
‘지혜’(知)로 때를 삼고, ‘덕德’으로 자연에 따른다.
형벌을 몸으로 삼는다는 것은 초연하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며,
예절로 날개를 삼는다는 것은 세상에 시행하는 것이며,
지혜로 때를 삼는다는 것은 일에 있어 부득이 함을 아는 것이며,
덕으로 자연을 따른다는 것은 그 발이 있는 자들과 함께 언덕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진인을 부지런히 행위 하는 자로 여긴다.
以刑爲體 以禮爲翼 以知爲時 以德爲循 以刑爲體者 綽乎其殺也
以禮爲翼者 所以行於世也 以知爲時者 不得已於事也
以德爲循者 言其與有足者至於丘也 而人眞以爲勤行者也
(「대종사大宗師」)
23.
대저 ‘도道’는 실정이 있고 진실함이 있으나,
하는 것이 없고 형체가 없다.(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래서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는 없으며, 얻을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뿌리가 되니, 천지가 있기 전 옛날부터 진실로 존재하였으며,
귀신도 신령하게 하고 상제도 신령하게 하였다.
하늘을 낳고 땅을 낳았으며,
태극太極의 위에 있으면서도 높다고 여기지 않으며(태극보다 더 높다),
육극六極(六合)의 아래에 있으면서도 깊다고 여기지 않는다(육극보다 더 깊다).
천지보다 앞에서 생겨났으나 오래라고 여기지 않으며,
상고보다 더 오래 되었으면서도 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夫道 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上而不爲高 在六極之下而不爲深
先天地生而不爲久 長於上古而不爲老
(「대종사大宗師」)
24.
자공이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경지에 의지하십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늘의 벌을 받는 사람이다. 비록 그러하나 나는 그대와 함께 하겠다.”
자공이 물었다.
“감히 그 방법을 묻겠습니다.”
(공자)
“물고기는 물에서 서로 살아가고, 사람은 도道에서 서로 살아간다.
물에서 서로 살아가는 자는 연못을 뚫어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고,
도에서 서로 살아가는 자는 일삼는 것이 없게 하면 생명이 안정된다.
그러므로 이르길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을 수 있고,
사람은 도술에서 서로를 잊는다’라고 하였다.”
子貢曰 然則夫子何方之依 孔子曰 丘 天之戮民也 雖然 吾與汝共之
子貢曰敢問其方 魚相造乎水 人相造乎道 相造乎水者 穿池而養給
相造乎道者 無事而生定 故曰 魚相忘乎江湖 人相忘乎道術
(「대종사大宗師」)
25.
다른 날 안회가 다시 보고 말하길
“제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니가 말하길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안회가 말하길
“제가 좌망(坐忘, 앉아서 잊음)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니가 정색을 하며 말하길
“무엇을 ‘좌망’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안회가 말하길
“사지와 몸뚱이를 잊고, 총명함을 버리고, 형체를 떠나고 앎을 떠나서,
크게 통함에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중니가 말하길
“하나가 되면 좋을 것이 없고, 변화하면 고정되지 않는다.
과연 현명하구나! 나는 청컨대 그대의 뒤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他日復見曰 回益矣 曰何謂也 曰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대종사大宗師」)
26.
그대는 ‘마음’(心)을 맑음에 노닐게 해야 하며, ‘기운’(氣)을 고요함에 합해야 하며,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순응하여 사사로움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천하가 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汝遊心於淡 合氣於漠 順物自然而無容私焉 而天下治矣
(「응제왕應帝王」)
* 삼일신고三⼀神誥
철인(哲人)은 지감(止感, 생각ㆍ감정을 그침), 조식(調息, 숨을 고르게 쉼),
금촉(禁觸, 감촉을 금함)을 행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변화시키고 수행하면,
망령됨을 돌이켜 참되게 할 수 있으니, 하느님의 기틀이 크게 발동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본성을 통하고 공적을 완수함(性通功完)이다.
哲止感調息禁觸 一意化行 返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是
27.
노담이 말하기를
“밝은 왕(明王)의 정치는 그 공적이 천하를 덮으면서도
자기 때문이 아닌 것 같이 여기며,
만물에 교화를 베풀지만 백성은 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뭐라 이름을 들어 설명할 수 없으나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쁘게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자리에 서서,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노니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老聃曰 明王之治 功蓋天下而似不自己 化貸萬物而民弗恃 有莫擧名
使物自喜立乎不測 而遊於無有者也
(「응제왕應帝王」)
* 맹자
패자의 백성은 기뻐하나,
(패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패자의 백성이 된 것을 기뻐함)
왕자의 백성은 스스로 밝을 뿐이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임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양심에 따르는 밝은 삶에 만족함)
죽여도 원망하지 않으며, 이롭게 해주어도 공으로 여기지 않는다.
백성들이 날로 선善으로 옮겨가하면서도 그렇게 만드는 자를 알지 못한다.
孟子曰 霸者之民 驩虞如也 王者之民 皞皞如也 殺之而不怨 利之而不庸
民日遷善而不知爲之者
(「진심盡心 상」)
28.
황제가 적수赤水의 북쪽을 노닐며,
곤륜의 언덕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고 돌아왔는데, 그 현주를 잃어버렸다.
많이 아는 ‘앎’(知)을 시켜서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눈이 밝은 ‘이주離朱’를 시켜서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말을 잘하는 ‘끽후喫詬’를 시켜서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에 아는것이 없는 ‘상망象罔’(형상이 없음)을 시켰더니 상망이 현주를 찾았다.
황제가 말하기를 “신기한 일이다. 상망이 현주를 찾다니!”라고 하였다.
皇帝遊乎赤水之北 登乎崑崙之丘而南望 還歸遺其玄珠 使知索之而不得
使離朱索之而不得 使喫詬索之而不得也 乃使象罔 象罔得之
皇帝曰 異哉 象罔乃可以得之乎
(「천지天地」, 외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