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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26 산상대제기

 

 


제의 휘는 <연우延優> 또는 <위거位居>이며, <신대제>의 별자이다.

 

모친 <주朱>태후가 꿈에 황룡과 몸을 섞어 교합하였다기에,

그 꿈을 이상히 여기어 바로 그날 밤을 같이한 연후에 태어났고,

태어나자 바로 사람을 쳐다보았다.

 

자라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외모가 멋져서,

<우于>후가 제를 좋아하여 남몰래 상통하였었고,

<고국천제>가 죽으매 상이 났음을 숨긴 채,

몰래 제를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가짜조서로써 제위에 세우고 나서

<고국천제>가 죽었음을 밖에 알렸다.

 

<고국천제>의 동복아우 <발기發岐>는,

< 연우延優>의 적형이어서 마땅히 제위에 섰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포위하고 제위를 다퉜다.

 

국상 <을파소>는

 

“나라의 주인은 이미 정해졌소. 제위를 다투는 자는 적이오.”라 하였고,

 

나라사람들은 제를 받들고 <발기發岐>를 쳤다.

<발기>는 두눌(杜訥)로 도망하여 스스로 제위를 칭하고는,

<공손도>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말하길

 

“소국은 불행합니다. 형이 죽자, 형수가 가짜 조서로 동생을 제위에 세웠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나라를 되찾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라 하였다.

 

<공손도>가

 

“고구리에서는 증모처수(烝母妻嫂)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며,

지금 <발기>는 형수를 처로 삼지 못하고 동생에게 빼앗겼다.

예법을 따지며 제위를 다투고 있으니,

이때를 틈타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 하고 기습한다면

그 나라를 빼앗을 수 있겠다.”고 말하자,

 

<공손도>의 아들은

 

“고구리에는 <을파소>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서

깊숙이 들어가 방비가 튼튼한 것을 치는 것은 가당치 않으니,

<발기>의 무리와 함께 고구리의 서쪽 변방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공손도>가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고 하면서,

개마(盖馬)・구리(丘利)・하양(河陽)・도성(菟城)・둔유(屯有)・장령(長岺)・

서안평(西安平)・평곽(平郭)郡 등을 엄습하여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는 않았으니,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

 

제는 <공손도>가 곧 쳐들어 올 것이 걱정되어 창남산성(淌南山城)을 쌓고,

<우于>후와 함께 항상 그곳에 머물렀으며, 그곳을 밀도(密都)로 삼았다.

 

 

고구려는 3번의 형제의 난으로 나라가 망하였다.

유리와 온조의 대립으로 온조가 남하하여 고구려의 졸본세력을 잃게되고

발기와 연우의 대립으로 요동을 잃고 요녕성으로 이동하게되고

광개토태왕이 회복한 요동을

남건과 남생의 대립으로 나당연합군에게 잃게되어 결국에는 망하였다.

 

 



산상대제 원년{AD197}정축,

 

 

여름 7월, <우于>황후가 상을 금천궁(金川宮)으로 맞아들여,

대행{신대제}의 유명에 따라 빈궁에서 혼인하였다.

 

태보<마정麻靖>․좌보<목천穆天>․중외대부<상해尙薤> 등이 시립하여

예식을 거행하였다.

 

상은 황제의 면포를 착용하고서 황후가 친히 바치는 새보를 받았다.

 

황후가 네 번 절하고 말하길

 

“첩은 대행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식이 없어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대행께서 이르시길

‘당신은 마땅히 내동생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내 뒤를 이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중외대부 <상해尙薤>가 곁에 있다가 이 말씀을 듣고,

임종하여 새보를 첩에게 건네주고는 폐하{연우}께 바치라 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따라죽지 못한 가련한 저에게 조속히 훌륭한 아들을 점지하여 주시면,

그로써 대행의 영혼을 위로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답하여 절하고 새보를 받고나서, 말하길

 

“형수를 처로 맞아들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오.

조속히 태자를 낳아 형황께 바치시오.”라고 하였다.

 

태보 등 모두가 엎드려 축하하였다.

 

이윽고 상이 황후를 데리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늘이 곧 밝아올 것이었다.

 

우림과 백료들은 섶을 불 놓아 하늘에 제사하며 만세를 불렀다.


상은 모친 <주朱>씨를 태후로 올리고, 외조부 <주로朱輅>를 우보로 삼고,

후의 부친 <우소于素>는 선왕(仙王)으로, <주회朱回>는 중외대부로,

<주동朱同>은 우림우장군으로, <주설朱舌>은 우림좌장군으로,

<상해尙薤>는 호성대가로, <주곡朱曲>은 호궁대가로 삼았고,

내외의 병사를 불러들여 지키게 하였다.

 

선황의 동생인 <발기>는, 이 소식을 듣고는 대노하여,

자기의 사병 300명을 데리고 궁궐을 범하였다.

 

<발기>의 처 <호천虎川>이, 아들 <교위거驕位居>와 함께,

그러지 말라고 말렸었으나, 듣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호천虎川>은 궁으로 달려가서 고변하였었다.

 

이때 상과 <우于>황후는 동침하여 깨어나기 이전이어,

태후와 <우소于素>가 <상해尙薤>에게 엄중히 무장한 병사로 하여 지키게 명하였다.

 

<발기>가 와서 보니, 궁궐은 문이 든든히 닫혀있고,

사면에는 위병이 빽빽이 지키어 서있었다.

 

<만궁滿弓>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르길

 

“상께서는 우애 있고 어지신 마음으로 당신을 용서하시었습니다.

명령 한마디에, 더 이상 다가오시면 후회하시게 됩니다.”라 하였다.

 

<발기>는 울분을 터뜨려 소리를 질렀다.

 

상이 <주설朱舌>을 되게 호통치고 주살하려 하자,

 

<상해尙薤>가 말리면서 아뢰길

 

“황제와 황후께서는 자식을 빗는 중이시니, 살생하셔서는 아니 됩니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오라를 지어서 귀양을 보냈고,

그의 군대 모두는 우림으로 들어와서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상은 <발기>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모의한 것은 아니라 하여,

죄를 면하여 주고 배천형왕(裵川兄王)을 봉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모반하여 두눌(杜訥) 땅으로 들어가서 칭제하였으며,

<공손도>와 상통하였다.  

 

 

6월에 대행을 고국천원에 장사하였다.

 

<호천虎川>을 <을파소>에게 처로 삼아 주고는, <발기>의 재물도 내려주었다.

 

후의 부친 <우소于素>는 <주朱>태후의 사신(私臣)으로 삼아 주었다.


<주>태후가 말하길

 

“외척이 약하면 황실이 존경받지 못합니다.

마땅히 당신들 종척 및 공경들은 딸들을 <주>씨 집안으로 보내줘야 할 것이오”

라 하니,

 

좌보 <목천>이 아뢰길

 

“높으신 태후께서 하교하신 귀한 말씀은 아름답고 또한 진솔하십니다.

신은, 좌보 자리를 <주로朱輅>에게 넘겨주고,

저의 딸 <청蜻>을 <주회朱回>에게 처로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태후가 크게 기뻐하면서

 

“나는 <목천穆天>의 충성됨을 안 지 오래였었소.”라고 말하고는,

 

<주로朱輅>를 좌보로, <상해尙薤>는 우보로 삼았다.

 

<목천穆天>에게는 비류공(沸流公)을 봉하고 우양(牛壤)을 목읍으로 주었다.

 

<주회朱回>에게는 <목천穆天>의 딸 <청蜻>과 혼인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때 <목청穆蜻>의 나이 서른이었고, <주회朱回>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목청穆蜻>은 종실인 <맥>태자의 여자였는데,

마산(馬山)을 오가면서 <주회朱回>와 함께 좋아지낸 지 오래였었다.

 

<상해尙薤>는 딸 <답答>을 <주설朱舌>에게 처로 주었고,

<주동朱同>은 <상경尙庚>의 딸 <실實>에게 장가들었다.


<주朱>태후가 <상尙>씨․<목穆>씨 두 집안의 사람들에게 주연을 베풀고는,

 

“경 들은 교목세신(喬木世臣)이시오.

마땅히 새싹을 맞이하여 옛 것을 씻어내시오.”라고 하였다.

 

모두가 엎드려 하례하였다.

 

주민대가 <목등穆登>이 태후에게 설명하여 아뢰길

 

“<주朱>씨 집안과 <우于>씨 집안은 비록 새로우나 오래되지 않아서 윤이 나지 않으니,

성스러우신 태후의 운기를 넓게 펼치시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찌 <우소于素>를 사내로 삼으려 하십니까?

저와 함께 옛날의 호의를 지속하심이 어떠하십니까?”라 하였더니,

 

태후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말하길

 

“당신은 <목穆>태후의 힘을 빌려 나를 업신여기며 억지로 욕보였소.

이제 누구의 세도를 빌어 임금의 어미인 나를 감히 능멸할 것이오?”라 하고는

 

<주동朱同>에게 명하여 붙잡아 끌어내리라 하였고 죽이려 하였으나,

<목등穆登>은 강직하여 굽히지 않았다.


<주로朱輅>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살리려 하여 아뢰길

 

“태후는 몹시도 귀한 몸이시나 본시 내 딸이시고,

저도 지금 몹시도 귀한 사람이나 본시 하찮은 사람이었습니다.

태후폐하께서는 만승지존으로서 친정  집안이

<상尙>씨․<목穆>씨 집안과 혼인하는 것을

접붙이기로 비견하시어 끔찍이도 생각하시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시비를 거론하시면,

오히려 접붙이기는 이루지도 못하게 되고

도리어 그 접가지를 부러뜨리는 것이 됩니다.

<목등穆登>은 국가의 명망 있는 재상이오니, 비록 희언을 했더라도,

폐하께서는 마땅히 관용하시어 나라를 이롭게 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그의 말은 옛정을 믿고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정으로써 나에게 다가오는데

내가 노하였다하여 물리치는 것은 옥돌을 모과로 여기는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중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상尙>씨와 <목穆>씨가 화를 당하게 되면,

내일에는 <우于>씨와 <주朱>씨가 의당 화를 당할 것입니다.

척족과 척족은 서로를 도우면서 오래도록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늙은 신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소서.”라 하고는,

<목등穆登>을 지키면서 머리를 땅에 짓찧고 있었다.


태후가 대경실색하여 맨발로 뛰어 내려가 말리면서 말하길

 

“아버님이 주장하신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 딸은 응당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주로朱輅>를 <목등穆登>과 함께 전각 위로 이끌어 올려서,

 

술을 따르며 말하길

 

“아버님의 말씀이 없으셨더라면, 어진 재상 한 분을 죽게 할 뻔하였습니다.”라 하였고,

 

<목등穆登>에게도 사과하여 말하길

 

“저를 용서하세요. 잠시 노여워하였습니다.

그동안 어찌 그립지 않았겠습니까.”라 하였다.

 

<목등穆登>은 다시 살아남에 감은하여 <주로朱輅>를 아버지처럼 여겼다.

 

혹자는 태후가 <목등穆登>을 죽이려 하자,

<형夐>공주와 <최숙最熟> 등이 간하여 말렸다라고 하기도 한다.

<우술于術>을 <식부息夫>의 처가 되게 하였다.  

 

 

 

7월, <주곡朱曲>을 동해곡(東海谷)태수로 삼았다.

 

<명림어고明臨於姑>를 선궁(仙宮)으로 들였다.  

 

 

 

9월, <계수罽須>가 두눌(杜訥)을 정벌하여 뿌리 뽑으니,

 

< 발기>는 배천(裵川)으로 패주하여,

 

자기 아들 <박고駁固>에게 이르길

 

“나는 적장(嫡長)인데도, <우于>씨 딸의 거짓놀음으로 서얼에게 쫓겨났고,

나라의 서쪽 땅마저도 공손씨에게 빼앗겼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 하고는,

 

스스로 목을 칼로 그었으나, <박고>가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발기>가 말하길

 

“곧 종창이 도질 것이다. 죽지 않으면 무엇 하겠느냐?”라 하고는,

 

물속으로 기어서 물에 빠졌다.

 

잡으러 뒤쫓아 온 기마군사 들이 다다랐더니, 이미 죽어있었다.

 

상은 왕의 예법에 따라 배령(裵岺)에 장사하여 주고,

배천대왕지릉(裵川大王之陵)이라는 비석도 세워주었다.

 

<박고>는 무덤을 지키면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였고,

자신을 위수(渭水)의 어부라 하였다.

 

상이 여러 번 불렀으나 돌아오지 않았다.<형夐>공주를 처로 삼아 보내주었다.  

 

색두(索頭)에서는 <두적梪適>이 죽고, <섭인涉仁>이 섰다.

 

이때 주태후 <주진아> 43세, 산상대제 <연우> 25세, 于后 42세, <형>공주 23세,

<발기> 40세, 주통천 후녀 <괴화> 9세, <을파소> 59세이다.

 

 


 

 

산상대제 2년{AD198}무인,

 

2월, 우산(牛山)에 성을 쌓았다.  

 

 

4월, 두 부류의 죄인을 제외한 모두를 풀어주었다.  

 

태보 <마정麻靖(127-198)>이 나이 72살에 죽었다.

 

<목숭穆崇>의 아들이었고, 외성(外姓)을 따르고 <마락麻樂>의 손자가 되었었다.

 

성품이 굳고 곧아서 <차대제>가 그를 싫어했다.

 

<신대제>를 따라가 맥부(貊部)에서 쌓은 치적이 컸다.

 

<차대제>가 <신대제>를 해치려던 시절에 <신대제>를 숨겨준 공이 있고,

<좌가려左可慮>를 진압하여 외척들의 간교함을 막았다.  

 

<주로朱輅>를 태보로, <목천穆天>을 좌보로, <목등穆登>을 동해 대사자로,

<주회朱回>를 주병대가로,< 주동朱同>을 중외대부․9궁공사(供使)로. 삼았다.  

 

<상제尙齊>를 남부 패자로 삼았다.  

 

<우첨于忝>을 <주곡朱曲>의 처로 삼았는데, 이는 태후의 명이었다.

 

<우첨于忝>은 <우소于素>의 아들 <우목于目>의 딸인데,

나이 열 넷에 멀리 동해로 떠나게 되었다.

 

<주곡朱曲>의 나이는 이미 50으로 <우목于目>보다도 아홉 살이나 많았으니,

 

<우목于目>은 속이 상하여 말하길

 

“남편보다 나이가 적은 아비를 두게 되었구나.”라 하니,

 

<우첨于忝>이 말하길

 

“태후께서 <우于>씨와 <주朱>씨를 엮어주어 큰 나라의 바탕을 튼튼히 하려 함이신데,

 어찌 나이가 많고 적음을 따져서 거절하겠습니까?”라 하였다.

 

모친인 <태苔>씨는 <목등穆登>과 함께 떠나는 사람을 호종하였다.  

 

오손(烏孫) 공주를 <우목于目>의 처로 삼아주었다.  

 



산상대제 3년{AD199}기묘,

 

4월, 태후가 <주곡朱曲>을 불러들여 중외대부․9궁공사를 시키고,

<주동朱同>을 동해곡 태수로 삼았다.  

 

이 해 삼월에 가락(駕洛)의 주(主)인 <수로首露>가 죽고, <거등居登>이 섰다.  

 

 

9월에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수로首露>는 142년에 태어나 199년에 죽었다. 

 



 

 

산상대제 4년{AD200}경진,

 

정월, 개마(盖馬)와 하양(河陽)이 환부(還附)했다.  

 

7월, 태보 <주로朱輅(125-200)>가 76살에 죽어, 왕의 예로 마산(馬山)에 장사했다.  

 

<목천穆天>을 태보로,<상해尙薤>를 좌보로, <주회朱回>를 우보로,

<목등穆登>을 <서부>대사자로,< 우목于目>을 동해 대사자로 삼았다.



 

산상대제 5년{AD201}신사,

 

2월, <마정麻靖>의 처 <우于>씨에게 매년 곡식을 주도록 하였다.  

 


 

 


산상대제 6년{AD202}임오,

 

10월, 태보 <우소于素(138-202)>가 나이 65살에 죽었다.

 

<우소于素>는 용모와 거동이 아름답고,

선술{仙術}을 잘하여 어떤 질병이든지 능히 다스릴 수 있었기에,

공경들의 부인들과 딸들이 그를 신으로 여겼다.

 

집안에 머물 때는 사슴이나 학과 더불어 친구를 삼기나 하는 등 담담하여서,

집안의 일에 대하여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삼보의 지위에 올라서도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주朱>태후는 그를 연모한 나머지 정부로 삼아

오운전(五雲殿)에서 동거하며 아들과 딸을 낳았다.

 

태후에게는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매일 아침엔 반드시 일찍 일어나 목욕하였고,

향불을 피우고 지긋이 바라보고 앉아서 일만 편의 경을 암송하고

남의 살이라 생긴 것은 먹지 않았으니,

태후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감히 애틋한 정을 감추지는 아니하였다.

 

그가 죽으매, 소복 입고 죽은 이의 발을 들어 올려서

샛서방으로 각별히 지냈음을 드러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있었다.


 

산상대제 7년{AD203}계미,

 

3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빌었다.  

 

상이, 국상<을파소>와 함께 조용히 국사를 논의하다가,

 

한숨지으며 이르길

 

“앞서 간 형이 내게 형수를 맡기며 아들을 낳아달라고 하셨건만,

7년이 지나도록 낳지를 못하여 형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효의 하나요.

<발기>와 다투다가 나라의 서쪽 땅을 잃었으니 불효의 둘이요.

태후께서 자정하시어 내외의 사람들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이를 말리지 못하니 불효의 셋이오.”라 하였다.

 

이에 <을파소>가 아뢰길

 

“하늘과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왕의 일들은 운 아니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춘추 아직 젊으시니,

꼭 소후가 있으셔야 하오며, 그리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길

 

“상국께서는 과연 내 마음을 알고 계시는구려.

지난 보름날 밤 꿈에 천제를 뵈었더니 역시 소후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소.

허나 소후가 없으니 어쩐 단 말이오.”라고 말하였다.

 

<을파소>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는 아뢰길

 

“신이 밤에 천문을 보았더니 빈 하늘에 용광이 서렸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하였더니만, 주통촌(酒桶村)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우두머리는 <연백椽栢>이라 하는데,

본래 관노(灌奴)의 명족으로, 충성심과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을 아끼고,

신을 섬기며 나라에 보은할 줄도 압니다.

들어보니, 정숙한 딸이 있으며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다고 합니다.

하늘이 내리신 뜻 아니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연백椽栢>이란 자가 과연 괴왕에게 제사하고 딸을 낳았는데,

무당이 말하길 필시 왕후가 될 것이라고 하였기에

이름을 <후녀后女>라 지었다고 하였으며,

지금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상이 이윽고 미행하여 그녀를 거두었다.


8월, 국상 <을파소(139-203)>가 나이 65살에 죽었다.

 

<을파소>는 훌륭한 재상 <을두지>의 후손이고,

부친 <을어乙魚>는 서하 태수일 때

외척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었다.

 

<을파소> 역시 강직하고 굳세어 뜻을 굽히지 않고는

<채소采素>와 함께 산중에 숨어살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다.

 

<고국천제>가 불러내어 국상을 시키니 7정(七政)을 행하였다.

 

임금을 옳게 섬기고, 백성을 옳게 보살피며, 현자를 기용하고,

사람을 올바로 가르쳐 키우며, 좋은 기술과 재주를 함양하고,

농사와 수렵에 힘쓰며, 변방을 굳게 지켰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전차로 나라 안의 큰일이었던

<발기{發岐}>의 반란을 달래어 가라앉혔으며,

잃어버린 나라의 서쪽 땅에 대하여는 급하지 않게 좋은 계책으로 복구하였고,

나라의 후사가 끊길 것을 걱정하고는

상이 소후를 맞게 하여 <동천제>를 낳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크다 할 것이다.

 

<동천제>와 통후(桶后)는 상시로 <을>공을 은인으로 여겨서

초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 시절 세상 사람들은

<우소于素>와 <을파소乙巴素> 및 <연백椽栢>을 '3왕'으로 여겼는데,

<우소于素>를 신선지왕(神仙之王), <을파소乙巴素>를 정교지왕(政敎之王),

<연백椽栢>을 은일덕행지왕(隱逸德行之王)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들은 평소 서로 간에도 잘 지냈다고 한다.

 


<고우루高優婁>가 국상이 되고, <상제尙齊>가 대주부가 되었다.

 

<고우루高優婁>는 <고루高婁> 후손 <고복장高福章>의 조카이며,

<을파소>와 함께 숨어살다가, <을파소>가 세상으로 나오매,

따라 나와 패자와 대주부를 지냈고, <을파소>가 죽으니 <을파소>의 뒤를 이었다.

 

모친은 <을파소>의 여동생이다.

 

<상제尙齊>는 <상경尙庚>의 아들이고, <고우루高優婁> 처의 오빠이다.

 

처 <명림어고明臨於姑>는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딸이며,

예쁘고 지혜가 있어서, 상이 잠저에 살던 시절에 여러 번 찾아갔었고,

상이 등극하자 선궁(仙宮)으로 맞아들여 딸을 낳았으나,

<우于>후의 투기로 쫓겨나서 남부에서 살고 있다가,

<우于>후의 기세가 꺾이자, 도성으로 돌아왔다.


 

 

산상대제 8년{AD204}갑신,

 

봄 정월, 상이 <우于>후를 데리고 온수원(溫水院)에 갔다.  

 

태보 <목천穆天(128-204)>이 77살에 죽었다.

 

<목천穆天>은 <목도루穆度婁>의 아들이며,

그의 모친은 <마락麻樂>의 처 <오烏>씨이다.

 

거족의 자손으로, 멎진 수염과 호감 가는 풍채가 썩 잘 어울렸으며,

인물 그림도 잘 그렸었고, 소금(小琴)을 잘 타서 상을 즐겁게 하여 주었었다.

 

비록 태보의 자리까지 올랐었어도, 나라의 정사를 바로잡은 것은 없었다.

 

<목천穆天>의 처 <송松>씨는 나이가 여든 아홉인데도 오륙십인 것 같이 건장하였다.

 

쌀과 고기를 주어 위로 하였다.  

 

아들인 <목등穆登>을 불러들여 주형대가로 삼고,

<상해尙薤>를 태보로, <주회朱回>를 좌보로,< 우목于目>을 우보로 삼았다.  

 

이 해에 <공손도>가 죽고,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대신하였다.

 

 


산상대제 9년{AD205}을유,

 

4월, 진서장군 <주설朱舌>에게 명하여 서안평을 정벌하게 하였더니,

평호(平湖)에서 싸우다가 장군 10명이 죽었다.

 

상이 남겨진 자식들을 위무하고 처들에게는 녹봉을 주었다.

 

<주설朱舌>의 아들 <주희朱希>를 우림교위로 삼고 공주를 처로 삼아 주었더니,

<주희朱希>는 스스로 나서서 변방의 장수가 되었고 원수도 갚았다.  

 

상이 <우于>후를 데리고 <명림식부明臨息夫>의 집에 거둥하여

그의 처 <우술于術>에게 의관을 하사하였다.

 

그때, <우술于術>이 딸 <명림전明臨鱣>을 낳아서 백일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우술于術>은 <우于>후의 동생이어, <명림전明臨鱣>이 황림(皇林)에 있었을 때,

상이 꿈에 본 징조가 있어서,

여러 번 <우술于術>과 <명림전明臨鱣>을 궁중으로 불러 아껴주었다.

 

7월, <주곡朱曲>을 진서대장군을 삼아 서안평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상제尙齊>가 중외대부가 되고 <목등穆登>이 대주부가 되었다.

 

 


산상대제 10년{AD206}병술,

 

정월, 태보 <상해尙薤(136-206)>가 나이 71살에 죽어,

그의 처 <백白>씨에게 매년 양곡을 주게 했다.

 

<상해尙薤>는 의․약에 능통했고, <백白>씨는 그림과 수놓기에 능숙하였으며,

딸 <상비尙鼻>는 <목등穆登>의 처가 되었는데 역시 그림과 약에 이름을 날렸다.

 

사람들은 이들 <상해尙薤><상비尙鼻><백白>씨}을 삼벽(三璧)이라 불렀다.  

 

<우목于目>을 진서대장군으로, <주곡朱曲>을 우보로 삼았다.

 

<상진尙縉>을 태보로 삼았으나 오래지 않아 죽어서,<화백禾白>이 이를 대신하였다.


 

 

산상대제 11년{AD207}정해,

 

4월, <우목于目>이 <공손우公孫友>와 평서(平西) 남산(男山)에서 싸워 이겼다.

 

그때 <조조曹操>는 <원상袁尙>을 정벌하고 오환(烏桓)의 경계에까지 다다랐다.

 

<공손강>은,< 조조>가 자신을 습격할까 걱정하면서도,

감히 우리에게는 항복할 수도 없었기에,

<원상>을 유혹한 후에 <원상>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사람들은 <공손강>은 필히 뒷날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산상대제 12년{AD208}무자,

 

2월, 상이 <연백椽栢>의 집에 미행하였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11월, 교제를 지낼 돼지가 도망하여, 담당관리가 이를 쫓아 <주통촌>에 다다랐더니,

한 여자가 그 돼지를 가로막아 붙잡았는데, 바로 <후녀后女>였다.

 

상이 신기하게 여겨 <주통촌>으로 거둥하여 <후녀>에게 상을 내리고 거두었다.

 

괴목{느티나무}에 꽃이 필 무렵, <후녀后女>는 상의 아들을 가졌고,

상이 이러하게 한 까닭에, 환나(桓那)의 소수(小守) <상관尙寬>이 상의 밀명을 받아

<연백椽栢>을 보호하였었다고 한다.

 

이때{괴목에 꽃필 때}에 이르러,

<후녀>를 <후녀>의 동생 <괴래槐萊>와 함께 처로 맞아들였다.


 

 

산상대제 13년{AD209}기축,

 

5월, <우于>후가 사람을 시켜서 <후녀>를 죽이려고 <상관尙寬> 등과 싸웠는데,

상호간에 살상자가 있었다.

 

상이 <후녀>를 맞아 후궁으로 들였다.  

 

 

7월 <공손강>은 둔유이남의 땅을 차지하고 대방국이 되었다.  

 

 

9월, <후녀>는 아들 <교체郊彘>를 낳고 소후(小后)가 되었다.  

 

 

10월, 창남(淌南)의 우산(牛山)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의 이름을 환도(丸都)라 바꿨다.

 

이곳은 본래 <계루>의 도읍지였다.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가(大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족(胡族)도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更作新國)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삼국지 동이전>

 

 

삼국지는 280년경 서진(西晉)의 <진수(233-297)가 편찬한 사서이다.

 

고구려가 새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발기>의 난으로 하북의 요동을 공손씨에게 내어주고

209년 천도를 한 것이다.

 

고구려사초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 위하여

<발기>의 난의 결과 <발기>가 자결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발기>는 고구려의 연노부 세력과 손잡고 계속 항전하다가

결국은 209년 <공손강>에게 투항하였으며,

<발기>의 투항으로 <공손강>은 하북지역에 대방국을 세운다.

 

산상대제가 옛 <계루>의 도읍지인 창남(淌南)의 우산(牛山)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을 환도로 바꾸었다고 기록하였지만

창남(淌南)의 우산(牛山)은 지금의 하북성지역으로 공손씨가 차지하고 있어 

천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고구려는 하북지역을 상실하고 요녕성의 조양(朝陽)으로 천도하였으며

잃어버린 요동을 되찾기 위하여 200년의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산상대제 14년{AD210}경인,

 

3월, <공손강>이 서안평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양성은 물가에 있고 지키기 어려워,

남소성의 서쪽 안평성의 북쪽에 새로이 신성을 쌓아서,

<공손강>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산상대제 16년{AD212}임진,

 

정월, 궁인 <명림어고>가 딸을 낳았다.

 

상은 아들을 바랐지만 딸이었던 고로 이름을 <월주越主>라 하였다.

<명림어고>는 <상제尙濟>의 처였다.

 

비록 후궁으로 불려 들어갔지만 남편과는 계속 좋아 지냈었으니,

그 딸을 공주로 봉하여 줄 수 없었다.

 

공주로 봉하여 달라는 청을 상이 들어주지 않고는

 

“당신들은 내가 그 딸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라고는 하였으나,

 

관료를 배로 늘려주고 <명림어고>를 소후와 동등한 예절로 모시게 하였다.  

 

<주곡朱曲>이 처 <우첨于忝>을 <을대비乙大非>에게 주었다.  

 

4월, 주통궁 소후와 <교체>태자를 데리고,

서쪽을 순시하며 백성의 안위도 묻고 열병도 하였으며,

온천에서 닷새를 놀다가 돌아왔다.  

 

6월, 경인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산상대제 17년{AD213}계사,

 

봄 정월, <교체>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에 관료 30인을 딸려주고,

소후에게도 관료 20인을 딸려주었는데, 모두 <연椽>씨들로 하였다.  

 




 

산상대제 19년{AD215}을미,

 

2월, 태보 <화백禾白(131-215)>이 나이 85살에 죽었다.

 

<화백禾白>은 <화직禾直>의 아들이며 <을포乙布>의 외손자이었다.

 

공손․검소하며 사람을 공경하고, 청렴하며 근면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좋고,

용병을 잘하고 漢어에 능통하였으며, 유주(幽州)를 파하여 큰 공을 세웠다.

 

漢인들을 마음으로 아껴서 농공을 흥하게 함에 부지런하였고,

일생동안 자기를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길 하루같이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를 현명한 재상이라 칭송하였다.

 

그의  <백白>씨에게 매년 양곡을 내렸다.  

 

<주회朱回>를 태보로,<우목>을 좌보로, <목등>을 우보로 삼았다.

 

<주곡>은 마산공․진서대장군으로 삼고 황산과 마산 두 군을 목읍으로 주었다.  

 



 

 

산상대제 20년{AD216}병신,

 

정월, 태보 <주회朱回(142-216)>가 나이 75살에 죽어,

<마혁麻弈>이 이를 대신하게 하고,

<주곡>을 좌보로 <우목>을 진서대장군으로 삼았다.  

 

<주회朱回>의 처 <목청穆蜻>을 궁인으로 삼아 동궁을 보호하게 하였다.

 

애초에 상이 <주회朱回>의 집에 미행하여 여러 번 승은을 베풀어

<목청穆蜻>이 딸 둘을 낳았더니,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목청穆蜻>의 딸 <주령朱鴒>을 상의 딸로 삼고 공주로 봉하여서

<주설朱舌>의 아들 <주창朱菖>에게 처로 내어주고는,

<주창朱菖>을 마천(馬川)도위로 삼았다.

 

<주창朱菖>의 어미는 <상답尙答>으로 <상해尙薤>의 딸이며,

역시 상의 승은을 입고 딸을 낳았는데,

이때를 즈음하여 그 딸도 공주로 봉하였다.

바로 <주창朱菖>의 여동생 <주만朱萬>이다.


 



산상대제 21년{AD217}정유,

 

정월, <마혁麻弈>이 죽어, <주곡朱曲(149-217)>이 태보가 되었다.

 

<주곡>은, <우첨>의 전 남편으로, 항상 <우목>의 아랫자리에 있었는데,

이때가 되어 태보가 되니 <우목>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우목>은 이것이 불쾌하여 좌보 자리를 내어놓고 출사하지 않으면서,

 

“내 딸은 아직 <주곡>을 저버린 적이 없었는데,

<주곡>은 스스로 내 딸을 저버리더니, 감히 그 딸의 아비 위에 올라앉았다.

이는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우>황후에게도 권하여 궁을 나와 버렸다.

 

상도 어쩌지 못하여 <주곡>의 태보 직을 물리고, <우목>을 태보로 삼았다.

 

이에 <주곡>은 노여워하다가 종창이 생겨, 69살에 죽었다.

 

<주곡>은 호방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그의 여동생이 <주>태후인고로 뜻을 이루어 정권을 잡은 이래,

백성들이 고생하는 까닭과 척족들의 폐단을 바로잡은 바도 많았고,

변방의 군사를 조련하여 필요시에 대비케도 하였다.

 

그러나 성품은 재물욕심이 많고 호색하여,

많은 공경들의 처와 딸들이 몸을 더럽혔으니, 공과 허물이 반반이었다.

 

<우목>은 강직하고 올곧아서 늘 <주곡>을 나무라길

 

“내 딸이 외모가 부족하오? 재주가 부족하오?! 덕이 부족하오? 나이가 이미 늙었소?!

그대는 무슨 일로 딴 사람의 처와 놀아나오?!”라 하였었다.

 

<주곡>은 이 일로 <우목>과 어그러져 서로를 자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주>씨와 <우>씨는, 서로 통혼하였어도, 속으론 항상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씨가 싸움에서 진 것이라고 여겼다.

 

단지 태후만 정사를 어지럽혔던 것이 아니었고,

<주곡> 또한 황음하였기 때문이었다.  

 

<목등>이 좌보가 되고, <상제>가 우보가 되었다.  

 

 

8월, 평주(平州)사람 <하요夏瑤> 등 천여 집안이 투항하여 왔기에,

<책성>에서 살게 하였다

 

 

10월, 뇌성이 울리고, 땅이 흔들리고, 혜성이 동북방에서 흘렀다.
색두에선 <섭인涉仁>이 죽어, <섭진涉眞>이 섰고, 낙타 50필을 바쳐왔다.


 

 

산상대제 22년{AD218}무술,

 

2월, 소후가 <용龍>공주를 낳았다.

상은 소후가 낳은 <존尊>공주와 <통桶>공주가 모두 딸리어 모시는 관료가 없었기에, 유사에게 명하여 관리를 딸리어서 모시게 하였다.

 

상이 궁인 <상답尙答> 소생 <주만朱萬>공주를

<주회朱回>의 아들 <주원朱元>에게 처로 주었다.

 

모두 태후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3월, 서하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고, 농사에 힘쓰라는 조서를 내렸다.  

 



 

 

산상대제 23년{AD219}계해,

 

2월, 임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태후의 명에 따라 마산의 산궁(山宮)을 보수하면서,

금벽・단청・향단・․보옥 등으로 장식하길 10여년이 되어왔는데,

이때가 되어 비로소 완성되었다.

 

태후와 함께, 모든 선인과 종척 및 백료들에게 열흘간 잔치를 베풀었으며,

변방의 수자리들에겐 차등 있게 옷과 술을 나누어주었다.  

 

<태조>의 신상을 <비裶>공주{색두}에게 보냈다.

 

 


산상대제 24년{AD220}경자,

 

4월, 처음 보는 새들이 궁의 뜰에 모여들었기에 길조로 여기고,

동궁의 궁인 <명림전>을 간택하여 노비와 전장을 하사하고는,

 

동궁에게 이르길

 

“<명림전>이 태어날 때, 저와 같은 이상한 새 꿈을 꾸었다.

오늘 또 새들이 왔으니, 자못 하늘이 내려주심인 가보구나!

너는 그녀를 아끼고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아서, 위로는 조종님들께 보답하고,

아래로는 내 자손을 번성케 하여서 기쁘고 기쁘게 하라.”하니,

 

태자가 엎드려 명을 받았다.

 

<명림전>은 <우于>후의 여동생인 <우술于術>의 소생이다.

 

<우>후는 상의 총애를 확고하게 하고 싶어서, 항상 <우술于術>이 상을 모시게 하였다.

 

또한 <명림전>을 동궁비로 만들고, <우술于術>을 동궁대부로 삼아서,

동궁 내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는 <우于>씨와 <명明>씨 집안을 결속시킬 책략이었으며,

<주朱>태후와 <우于>씨・<주朱>씨 집안 사이의 결속을 깰 속셈이 있었다.

 

<주朱>태후는 이미 늙어서 이를 말릴 수 없었다.  

 

 

7월, 상이 <우于>후 및 <우술于術> 등과 함께 동궁과 <명림전>비를 데리고

산궁으로 들어가 태후를 찾아뵈었다.

 

태후가 <주희朱希>의 딸 <주남朱南>을 동궁비로 삼고 싶어 정혼하라고 명하여,

상이 꿈을 꾼 이야기를 태후에게 아뢰었더니,

 

태후가 이르길

 

“<주남朱南>을 정비로 하고,<명림전>은 첩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바로 이때 <명림식부>가 도착하여, 제에게 슬며시 아뢰길

 

“태후께서 제 딸을 용납하지 않으시니, 제 딸을 산궁에 놔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딸을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라 하였고,

 

상은 그리 하라고 하였다.

 

8일 간의 큰 제사를 치르고 나서,

동궁과 <명림전>은 같은 수레에 태우고, <주남朱南>은 내버려 두었다.

 

이에 태후가 화가 나서

 

“<주통>년을 목 베고, <교체>태자의 잘잘못을 가려라!”라고 하니,

 

<주희朱希>가 이를 말리며 아뢰길

 

“사적인 일로 국본을 흔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칭송합니다.”라 하였다.

 

 

 


산상대제 25년{AD221}신축,

 

정월, <주>태후가 춘추 67에 죽었다.

 

<주>후는 길고 힘센 팔에 욕심 많은 눈매를 가졌었고, 늙을수록 철면피가 되었었다.

 

<명림전>의 일로 <우>후를 원망하다가 병이 들었는데,

어둡고 추운 산궁에 있다가 끝내 큰일을 당한 것이다.

 

상이 이를 애통해 하며, 유명에 따라 재궁을 산궁에 두어 삼년을 가득 채운 연후에

<신대제>무덤 중으로 옮겨 합골하여 주었다.  

 

3월 18일에 동궁의 혼례를 치렀다.

 

<명림전>과 <주남>을 좌비와 우비로 삼아 주었다.

 

상이 태후의 뜻을 중히 여긴지라 <주희>의 딸도 함께 맞아들이게 한 것이었다.

 

동궁은 불쾌해 하였으나, 모두가 근례를 받았고, 4품인 봉례의 작위를 주었으며,

적의・금화자라관을 내려주었다.

<공손강>이 죽고, 그의 동생 <공손공>이 섰다.

 

이즈음에 <한{東漢}>이 망하고, <조비>・<유비>・<손권> 등이 칭제하였다.

 

 


산상대제 26년{AD222}임인,

 

3월, <우목>이 병들어 물러나니,

<목등>을 태보로,<주동>을 좌보로, <상제>를 우보로 삼았고,

<우목>은 서천공(西川公)으로 삼고

두눌(杜訥)과 주원(珠原) 땅을 식읍으로 봉하여 주었다.  

 

11월엔 경신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산상대제 28년{AD224}갑진,

 

2월, 동궁비 <명림전>이 황손 <연불然弗>을 낳았다.  

 

7월,< 연진連珍>이 백제에 쳐들어가 봉산(烽山) 아래에서 싸워

천여 급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8월에는 봉산성(烽山城)을 고쳐쌓았다.

 

10월, 백제에서는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산상대제 29년{AD225}을사,

 

정월, 동궁대부 <우술于術>이 동궁의 아들 <우불又弗>을 낳았다.

 

동궁이 <명림전>을 맞아들인 이래,

연거푸 <우술>을 가까이 하여 <연불>을 낳고, 총애를 독차지하였더니만,

이 때에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상은 이를 기쁘게 여겨 <우술>에게 땅과 집과 노비를 내렸으며,

작위도 3품인 상례(尙禮)로 하여주었다.  

 

 

2월, <명림전>씨를 동궁대비로 삼고,

황림(皇林)과 양원(陽原) 두 읍을 목읍으로 하사하였으며,

이 두 읍 사이에 압궁(鴨宮)을 지었다.  

 

 

5월, 동궁우비 <주남>이 아들 <주근>을 낳았다.

 

동궁이, 태후의 말을 중히 여겨,

<주朱>비 또한 보살피다가 낳았기에 역시 황손으로 불러주었다.

 


 

산상대제 30년{AD226}병오,

 

10월, <명림전>씨가 황자 <예물預物>을 낳았다.  

 

< 우목>이 좌보가 되었다.

 


산상대제 31년{AD227}정미,

 

여름 5월, 상이 서도(西都)의 금천궁(金川宮)에서 춘추 55세에 죽어,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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