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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8 신명선제기

 

 

왕(帝)의 휘(諱)는 <재사再思> 혹은 <녹신鹿臣>이며,

대무신제(大武神帝)의 별자(別子)이다.

 

어머니는 <갈사태후(曷思太后)(AD20-AD96)>이고,

태후의 아버지는 <해소解素(BC43-AD47>로

유화(柳花)부인이 낳은 금와(金蛙)의 아들이다.

 

갈사후(曷思后)는 2명이다.

 

<해소解素(BC43-AD47>가 낳은 갈사후(曷思后)(BC16-36)는

광명대제 <유리(BC40-18)>의 妃이고,

<해소解素(BC43-AD47>의 큰 아들 <산해解婁(BC24- )>가 낳은

갈사후(曷思后)(AD20-AD96)는 대무신제 <무휼(4-64)>의 妃이다.

 

<해루解婁(BC22?- )>는 <온조>의 반정으로 20년에 우보로 임명되고

다루왕 2년(29년)에는 태보로 임명되었다.

 

<해루解婁(BC22?- )>의 여동생인 갈사후(曷思后)(BC16-36) 는 <유리>의  妃이고

<해소解素(BC43-AD47>의 큰 아들<산해解婁(BC24- )>의 딸인

갈사후(曷思后)(AD20-AD96)는 <호동>과 <재사>의 어머니이다. 

 

<해소解素(BC43-AD47>는 갈사후(曷思后)(BC16-36)의 아버지이고

갈사후(曷思后)(AD20-AD96)의 할아버지인 것이다.

 

 

성품은 총오(聰悟)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였으며,

선서(仙書)를 읽고 의약(医藥)에 통달하였으며, 또한 용병(用兵)에 능하였다.

 

언변이 좋았으나 말이 없어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복형인 <호동好童>이 비명(非命)에 죽은 까닭이다.

 

민중제(閔中帝)가 죽어 나라사람들이 그를 세우려 하자,

 

고사(固辞)하며 말하길

 

“적자(嫡子)가 있는데 서자(庶子)가 구태여 담당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어머니를 모시고 달아났다.

 

모본(慕本) 또한 그 뜻이 의롭다 하여, 선왕(仙王)으로 봉하였다.

 

부여의 난을 평정함에 공이 있었고,

모본이 시해되자 <마락麻楽> 등이 그를 맞이하여,

동도(東都)의 신궁(神宮)에서 즉위하였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연호를 신명(神明)으로 고쳤다.


 

 

원년 계유(A.D.73)

 

겨울 12월 <마경麻勁>을 대추가(大芻加) 겸 엄표공(淹淲公)으로,

<송보松宝>를 태보, <오희烏希>를 좌보, <우진羽真>을 우보,

<마락麻楽>을 주병대가 겸 대주부, <송두지松豆智>를 중외대부,

<목탁穆卓>과 <달가達賈>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위화葦花>와 <호화芦花>를 황후로, <마씨麻氏>와 <우씨羽氏>를 부후로 삼았다.

 

<위화>는 <호동好童>의 딸이다.

 

<호화>는 <왕문王文>의 딸이고, 갈사태후(曷思太后)의 동생(弟)이다.

 

금와(유화) - 해소(BC43-32)

추모(호예) - 장화(BC42- )

해소(장화) - 해루(BC22?- )

                  산해(BC24- )(??) - 갈사후(20-96)(무휼) - 재사(48-121)

해소(??) - 갈사후(BC16-36)

               왕문(BC10?- )(고야) - 호화(49-132)(재사) - 궁(68-165)

 

 

<마경>의 딸과 <우진>의 딸은 모두 모본(慕本)의 후(后)였는데,

태보의 청으로 인하여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모본의 아들 <익翊>을 태자로 삼았다.





2년 갑술(A.D.74)

 

정월 <궁宮(68-165)>태자를 동궁으로 세우고,

호(芦)황후와 함께 정사(政事)를 배우게 하였다.

 

이 해에 나이는 일곱 살이었는데,

능히 정사의 큰 줄거리를 알았으며, (국인의) 마음을 얻었다.


10월 주나(朱那)가 반란하였다.


 

 

3년 을해(A.D.75)

 

3월 선원(仙院)을 열고, <상인尙仁>을 사(師)로 하였다.

 

<상인>은 漢의 음(音)과 자(字)에 능통하여, 그림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니,

사람들이 모두 신(神)처럼 우러렀다.

 

주나(朱那)를 평정하였다.



 

4년 병자(A.D.76)

 

10월 동옥저가 배반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5년 정축(A.D.77)

 

2월 <송보松宝>가 죽어,

<오희烏希>를 태보, <우진羽真>을 좌보, <고경高敬>을 우보로 삼았다.


10월 부여(扶余)가 삼각록(三角鹿)과 장미토(長尾兎)를 바쳐,

태후(太后)의 서(瑞)로 하였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지월(至月, 11월) 눈이 3척(尺)이나 쌓였다.


 

 

10년 임오(A.D.82)

 

정월 5부(五部)에 선원(仙院)을 두었다.

 

비록 창잡이(執戟之士, 무사)라 할지라도 또한 선도(仙道)를 가르쳤다.

 

선사(仙師) <상인尙仁>을 해산(海山) 고사(高士)로 하여

선정(仙政)을 총괄하게 하였다.

 

과욕(寡慾), 정묵(靜黙), 합천(合天)함이 선(仙)의 요체였다.

 

마후(麻后)가 딸 <운芸>을 낳았다.

 

오씨(烏氏, 모본의 어머니)가 태후(太后)로 복위되었다.



 

 

14년 을유(A.D.86)

 

5월 남소성(南蘇城)을 쌓았다.

 

마후(麻后)가 아들 <감邯>을 낳았다.


 

 

16년 정해(A.D.88)

 

정월 <상인尙仁>에게 명하여 3대경(三代鏡)을 고치도록 하였다.

 

<오희烏希>가 죽어, <우진羽真>을 태보, <고경高敬>을 좌보, <을상乙祥>을 우보,

<을경乙景>을 주병대가로 삼았다.


 

 

21년 계사(A.D.93)

 

4월 5부(五部)를 돌아보고,

백성들 중에 재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도덕과 6예(六藝)를 가르쳤다.

 

민간에서 음란함을 숭상하거나 자식과 처첩을 파는 것을 금하였다.

 

<우진羽真>이 죽어, <고경高敬>과 <을상乙祥>을 승차시켰고,

<부겸扶謙>을 우보로, <고영高英>을 주궁(대가)로 삼았다.


 

 

22년 갑오(A.D.94)

 

2월 <을상乙祥>이 죽어, <부겸扶謙>을 좌보, <을경乙景>을 우보로 삼았다.

 

오태후(烏太后)가 죽어 민중원(閔中原)에 장사하였다. 나이 팔십이었다.

 

유리(소서노) - 람(BC8-70)

오문(??) - 오이(BC65-18)(??) - 오루(람) - 오후烏后(15-94)


 

 

24년 병오(A.D.96)

 

7월 갈사태후(曷思太后)가 죽었다. 춘추 77세였다.

 

왕이 감식하며 색을 멀리했다. 대무수림릉(大武獸林陵)에 장사했다.

 

7일 선인의 모임에 만 명이 넘었다.

 

자몽주(紫蒙主) <사욱射旭>이 죽고, 그의 동생 <사만射滿>이 섰다.


 

 

25년 정유(A.D.97)

 

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어원(御園)의 장미토(長尾兎)와 삼각록(三角鹿)도

이와 같이 나이가 든 것은 사람의 마음을 능히 알아내니,

하물며 백성들 중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다.

 

나라 안팎의 늙은이 중 유식한 자에게

저마다의 장기를 주변의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고,

문자로써 기록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사욱>의 아들 <계산鷄山>이 <사만>을 죽이고 스스로 섰다.

 

<응묵應黙>이 막북(漠北)으로 도망하였다.


 

 

26년 무술(A.D.98)

 

3월 왕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책성에 이르러 백록(白鹿)을 잡아서 성에 들어가,

부로(父老)와 수리(守吏) 및 도덕을 갖춘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재물과 휴가를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공적을 큰 바위에 새겼다.

 

10월 이번 순행에서 돌아왔는데,

왕은 멀리 동해곡(東海谷) 망일령(望日岺)에 이르러 호수의 장관을 보았고,

조나(藻那), 주나(朱那), 관나(那)의 공물도 받았다.

 

여러 섬(島)의 추장들이 바친 백곰(白熊)과 물개(膃肭)도 또한 많았다.

 

<목탁穆卓>을 비류패자로 삼았다.

 

<목탁>은 동명의 공신 <묵거黙居>의 딸의 손자이다.

 

부여(扶余)의 난을 진압함에 공이 있었다.

 

난새가 서도(西都)의 왕궁 뜰에 모여들었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29년 신축(A.D.101)

 

2월 <고경高敬>이 죽어,

<부겸扶謙>을 태보, <을경乙景>을 좌보, <화현禾玄>을 우보로 삼았다.


 

 

30년 임인(A.D.102)

 

정월 <고주리高朱利>를 동해곡(東海谷) 태수로 삼아

북해 백우령(白羽令)화태(樺太)의 추장을 지키도록 하였다.

 

<고주리>는 <고루高娄>의 손자인데,

본디 (입이) 무겁고 고지식한 것처럼 보이나 안으로는 깨끗하였다.

 

왕이 동해곡을 지킬 필요가 있다하여 관리를 두려 하였는데, 멀다고 가려하지 않았다.

 

<고주리>가 가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사람들 모두는 위험하다 하였다.


8월 박(朴)이라는 사람을 책성(柵城)으로 보내서,

농지를 잃은 백성들을 구휼하고, 소와 양을 주어 목축을 권장하였다.


10월 동명대제(東明大祭)를 행하였다.

 

부여(扶余)의 희자(姬子) 여덟이 춤을 바쳤다.

 

신마 50필을 거루원(巨婁原)에서 거세(犍)했다.


 

 

32년 갑진(A.D.104)

 

정월 <부겸扶謙>이 죽어,

<을경乙景>을 태보, <화현禾玄>을 좌보, <상인尙仁>을 우보로 삼았다.


 

3월 마황후(麻皇后)가 죽었는데, 춘추 62세였다.

 

후는 <마경>의 딸이고, 충직하고 선함을 좋아했다.

 

마리(BC63-21)(??) - 마경(??) - 마후麻后(43-104) 

 

처음에 모본(慕本)의 후(后)가 되어

아들 <익翊>과 <전典>공주, <송宋>공주, <마馬>공주를 낳았는데,

직간(直諫)하다가 폐위를 당했었다. 왕의 즉위 초에 거두어 부후(副后)로 삼았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어 여러 후들이 형으로 존경하였다.

 

몸이 넉넉하여, 아이를 잘 낳으니, 왕의 자식 7남 2녀 모두 현명하였다.

 

왕은 이에 더욱 현명하다하여, 3황후로 봉하였었다.

 

<사만射滿>의 아들 <응묵應默>이 막북(漠北)에서 나라를 세웠다.

 

아들 <두공功>을 보내 낙타 다섯 필을 바쳤다.


 

 

33년 을사(A.D.105)

 

정월 부여(扶余)가 한 장(丈)이나 되는 두 마리의 황호(黃虎)와

한 장(丈)의 백곰(白熊) 한 마리를 바쳤는데 털의 색깔이 선명하나 꼬리가 없었다.

 

어원(御苑)으로 하여금 큰 수컷 호랑이를 기르게(字)하여 새끼(種)를 내게 하였다.


 

 

3월 진북장군(鎭北将軍) <마락麻樂>이 개마(盖馬)의 여러 성을 고쳐 쌓고,

맥(貊)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쳐서

백암(白岩), 장령(長岺), 도성(菟城),문성(汶城), 장무(章武), 둔유(屯有)

여섯 성을 빼앗았다.

 

마리(소노의 딸) - 의록(도都공주) - 마락(54-122) 

 

漢人들은 크게 놀라고 황망(慌忙)하였으나, <경기耿夔>가 수비하며, 불러들여 싸웠다.

 

<궁宮>태자가 사자(使者) <목도루穆度婁>와 함께 경기(輕騎)를 이끌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좌충우돌 부딪쳐 크게 깨뜨렸다.

 

이때 <마락> 52세, <궁> 태자 38세, <목도루> 32세이다. 


 

 

화제(和帝, 효상제) 원흥(元興) 원년(元年, A.D.105)

봄 다시 요동으로 들어와서 여섯 현을 도둑질하고 노략질하니,

태수 경기(耿夔)가 부딪쳐 깨뜨리고 거수(渠帥)를 베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34년 병오(A.D.106)

 

정월 백암(白岩)태수 <정원鄭元>이 <경기耿夔>와 장무(章武)에서 싸우다

손해를 보니, <궁宮>태자가 쳐서 복구하였다.

 

<송두지松豆智>를 요동태수로 삼았다.

 

좌보 <화현禾玄>이 죽어 <상인尙仁>에게 대신하게 하고,

<마락麻樂>을 우보로 삼았다.


 

 

35년 정미(A.D.107)

 

7월 <을경乙景>이 죽어 <상인尙仁>에게 대신하게 하고, <고덕高德>을 좌보로 삼았다.


9월 질양(質陽)에서 사냥하여 자색 노루 암수를 사로잡아 길렀다.


 

 

37년 을유(A.D.109)

 

3월 <마락麻樂>이 우북평(右北平)을 쳐서 생구(生口) 2천과

경■지사(經■之士) 일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7월 한(漢)이 <장길張吉>을 오게 하여,

단향(檀香)과 도덕(道德, 도덕경)을 바치고 화친을 맹세하였다.


 

 

39년 신해(A.D.111)

 

2월 <송두지松豆智>가 한(漢)과 화친을 약속하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잃은 것이 있었다.

 

왕이 노하여 <송두지>를 비류(沸流)로 귀양(配)보냈다.


3월 대약(大藥), 초문(肖門), 효경(孝經) 등의 원(院)을 두어,

백성에게 본초(本草)와 조상(造象)과 효도(孝道)를 가르쳤다.

 

<마락麻楽>에게 명하여 한(漢)을 치게 하였다.


4월 <상인尙仁>이 병으로 물러나니, <고덕高德>을 대신하게 하였고,

<마락麻楽>을 좌보, <우정羽靖>을 우보로 하였다.

 

<호만好万>을 중외대부로 하였는데, 위황후(葦皇后)의 동생이었다.


위황후(葦皇后)가 <호동>의 딸이니, <호만好万>은 <호동>의 아들이다.


 

 

40년 임자(A.D.112)

 

2월 <우정羽靖>이 죽어, <호만好萬>을 우보로 삼았다.


5월 왕이 해산(海山)으로 행차하여 <궁宮>태자에게 선위하고,

스스로 해산선황(海山仙皇)이 되어 내외선정(內外仙政)을 총괄하였다.

 

<상인尙仁>과 <고덕高德>을 좌우태사(左右太師)로, <호만好万>을 선상(仙相)으로,

위(葦)황후와 우(羽)황후는 좌우선후(左右仙后)로 삼았다.

 

호후(芦后)를 섭정태후(攝政太后)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태자에게로 돌아갔다.

 

서도(西都)의 난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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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