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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10 안장대제기(安藏大帝紀)

 

 

 


제의 휘는 <흥안興安>, 자는 <숭현崇賢>이며, 명치대제의 큰 아들이다.

 

모친은 <연淵>태후로 <황皇>태자의 딸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

 

모친이 엄하게 교육한지라 예의를 익혔으며 근검하였다.

 

그런 까닭에 <욱호勗好>태후가 여러 번 자신의 아들로 동궁자리를 바꾸려 하였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즉위하였더니, 춘추 43세이었다. 년호를 안장(安藏)으로 바꾸었다.


 

 

기해{AD519} 안장(安藏)원년,

 

춘정월, 임오일 초하루에 상의 몸이 편치 않아 내외의 축하 인사를 폐하게 하였다.

 

 

황태자 <흥안興安>이 용산(龍山)에서

친히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하여 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  

 

임진일 큰 변혁이 생겼다.

 

황태자에게 전위한다는 명이 있었다.

 

계사일, 신성(晨星){새벽별}이 밝게 빛났으며,

태자가 평양의 백웅궁(白熊宮) 신단루(神檀樓)에서 즉위하였다.

 

<연淵>황후가 무릎을 꿇고 새보를 바치며 이르길

 

“조상의 대업을 이어서 나라를 편안케 하며,

백성들이 오래도록 황극(皇極)과 정목(政目)을 거스르지 않게 하시오.”라 하니,

 

 

상은 엎드려 받으면서 하늘에 맹서하여 아뢰길

 

“삼가 마땅히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라 하였다.  

 

 

부황을 태상황으로 모후 <연淵>씨를 태상황후로 높였다.

 

동생 <보연宝延>을 황태자로 삼고, <덕양德陽>공주를 황태자비로 삼았다.


2월, 신해일 초하루 상황이 황극전(皇極殿) 서쪽 침소에서 춘추 58세에 죽었다.

 

상은 맨 살을 드러내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애통히 호곡하였으며,

물 한 모금 장국 한 술도 입에 넣지 않았더니,

 

시중 <하전賀田>이 곁을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다.

 

<진관晋冠>을 산릉대사자로 삼고 3풍의 작위를 내렸다.  

 

위(魏)의 사신 <유영劉永>이 와서 예를 올리고 부의를 바쳤다.

 

이 때, 위(魏)주 <후詡>의 나이는 10살이었고,

그의 어미 <호胡>태후는 음란하다 실정하니, 우림(羽林)들이 난리를 일으키고

벼슬 높은 관리인 <장이張彛> 부자를 죽여서 그 머리를 길거리에 버렸더니,

다른 이들은 그것을 말릴 수도 없었다.

 

북위 肅宗 孝明帝 <원후元詡(510-528)> 재위 515-527 

 

월자선인(月子仙人) <고환高歡>이 그를 보고 한탄하길

 

“정사가 이 꼴로 돌아가는데 다른 일도 알만하다.”라 하고는,

 

그의 무리인 사마 <자여子如> 및 <손등孫騰>과 <후경候景> 등이

부상관(扶桑館)에서 만나 거사하기를 공모하고는,

 

재물을 나누어 결의하여 사귀고 각자의 향리는 협객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3월, 신사일 초하루, 후궁의 28인은 선제를 곁에서 지키라 내보내고,

효등(孝登) 이하의 여인들은 종척과 공경들에게 처로 내주었다.

 

상이 <하양河陽>궁에게로 갔다.

 

<하양河陽>궁과 상이 1년이 되도록 함께 있었다.

 

상이 그리워 한 지는 오래였었으나, 이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계미일, 대행을 황산(黃山) 장릉(長陵)의 옆에 장사하였다.

 

<연淵>태후가 음식을 끊고 뒤따라 죽으려 하자 상이 말렸더니,

 

태후가 화를 내며 이르길

 

“그대는 어미의 악함을 온 세상에 퍼뜨리려 하려는 것이오?”라 하였고,

 

이에 상이 아뢰길

 

“ 따라 죽는 것을 금한 것은 조상님들이 만든 법도입니다.

모후께서 어기고 따라 죽으시면 필시 그런 풍조가 생길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태후가 이르길

 

“ 아내가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은 미풍이거늘 어찌하여 못하게 하시오?

<동명>께서 따라죽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마도 <광명>을 위한 진정책이었을 것이오.

어찌 묵묵히 따라야만 하겠소?

 

위(魏)의 <풍馮>과 <호胡>는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삿될 뿐이오.

후와 비가 된 자들은 오로지 입고 먹는 것을 아끼고 자신의 직분에 부지런해야 하며

욕망을 내뿜어 나라를 어지럽혀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 어린 아들이 제위에 올라 도적놈들이 그 자리를 빼앗게 만들지 말았어야 옳았소.”라 하였다.  

 

병신일 <연淵>태후가 죽어 대행의 구덩이에 장사하였다.

 

춘추 70세였다.

 

성품은 관후하였고 문장에 능숙하였으며, 궁중의 옛일에 밝았다.

 

큰 일이 있게 되면 언제나 여러 왕들이 받들어 행하였다.

 

태후는 애초엔 <발跋>태자비가 되어

<발원跋元>공·<발인跋仁>공주·<발흥跋興>공을 낳았으며,

대행의 보비가 되어서는 성상을 낳고는 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대행을 46년간 섬겼는데 극진하게 충성하였고, 옷매무새에서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아들을 14명을 낳았는데, 모두 현명하였다.

 

상이 친히 비문을 지어 그 덕을 기렸으며 귀감을 삼도록 하였다.


4월, 상이 황극전(皇極殿) 동쪽의 누각으로 납시어서 405인을 시험하고는

학문과 행실이 두루 아름다운 이 18명을 뽑아 전중사인(殿中舍人)으로 삼았다.

 

상을 동궁 시절에 모시던 이를 처로 삼고 전택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보군宝君>태자가 위(魏)로 가서 조문하여 주었음에 답례하였다.  

 

장수황제를 고조효무황제로, 명치황제를 태종효문황제로,

 

<조다>태자를 인종효숙황제로, <경>태자를 선종효양황제로 추존하고,

모두에게 대제를 올렸다.  

 

<루사덕婁師德>을 예부상서를 삼았다.



 

5월, 대역죄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하였다.

 

변방 장수의 품계를 한 급 올려주어서 수자리 방비를 엄히 하도록 하였다.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우림들에게는 차등을 두어서 상을 내렸다.  

 

수경원(修鏡院) 태학사를 두어서 대경(代鏡)과 유기(留記)를 찬수케 하고,

이로써 선덕과 성훈을 널리 드러내게 하였다.

 

상이 친히 추모경을 그렸더니 훌륭하였다.  

 

비였던 <초운椘雲>공주를 황후로 삼았고, 황자 <각恪>을 한(漢)왕으로 삼았다.

 

<은銀>공주를 비로 삼았으며, 상이 친히 치마에 수를 그려주었다.

 

<은銀>공주는 <욱호勗好>태후 소생 <보연宝延>의 딸이었다.  

 

좌보<호용好勇>이 주궁상서<사옥謝玉>과 함께

 

“3후 5비의 예를 갖추시어, 조종 조상님들의 광사지계에 보답하십시오.”

라고 청하였더니,

 

상은

 

“짐은 타고난 체질이 좀 취약하고 질병이 많아 여색이 반갑지 않소.

비록 후와 비가 있게 되면, 어찌 능히 감당하란 말이오.

삿된 일이오.

잠시 수년을 기다렸다가 건강하여지거든 갖추어도 늦지 않다고 보오.”라 답하였다.  

 

동궁대부 <계춘랑桂春娘>을 우시중으로 삼았다.

 

<춘랑春娘>은 문자 해독이 서툴고 능히 시문을 하지 못하였으나,

두건과 잠자리를 챙겨 주기는 잘하여, 사람들은 그를 색시중이라 하였다.


7월, <소연蕭衍>{梁,太祖}이 사신을 보내어 부의를 바쳐왔고,

의약과 복서 및 악기도 바쳐왔더니, 상이 이르길

 

“복서와 악기는 내가 알아야 할 바 아니며,

의약만은 약원으로 내려 보내서 그 효험 여부를 가려시오.”라 하였다.

 

梁 武帝 蕭衍(464-549) 재위 502-549  
  

 

 

8월, <융隆>태자와 <오문烏門>을 양(梁)에 보내서 부의하여 주었음에 답례하고

명의(名医)를 구하게 하였다.

 

<장언수張彦秀>와 <소형기蕭衡器> 등이 왔다.

 

<소연蕭衡器>이 보낸 것이었다.

 

<강법성江法盛>이 위(魏)의 수군에게 붙잡혀서 낙양으로 보내져버리자,

상이 <후詡>{北魏,肅宗}에게 풀어주어 보내라고 명하며 이르길

 

“애사와 경사는 서로 찾아주는 것이 예의이거늘,

어찌 의심하여 붙잡아 가둔단 말인가.”라 하였었다. 

 

북위 肅宗 孝明帝 <원후元詡(510-528)> 재위 515-527 

 

<주금령朱金鈴>을 내사인으로 삼았으며,

그의 지아비 <부성芙星>은 어록감(御鹿監)을 삼았다.  

 

<하양河陽>궁으로 납시었는데, 종일토록 비가 내려서 다음 날 환궁하였다.  

 

보국장군 <곡춘谷瑃>의 처 <호운瑚雲>공주가 나이 68살에 죽었다.

 

선제의 총첩이었던 까닭에 귀빈의 예로 장사하였으며,

<곡춘谷瑃>에게는 선제의 후궁이었던 옥정원(玉蜻院)妃 <선宣>씨를 처로하였다.

 

나이 19살이었다.  
  

 

 

12월, <하양河陽>궁이 상의 딸 <강음江陰>공주를 낳았다.

 

후에 <양의덕楊義德>에게 출가하였다.

이때 안장대제 <흥안> 43세, 황태자 <보연> 41세, <초운> 49세, <하양> 43세,

<루사덕> 35세, <계춘랑> 32세, <각> 23세, <덕양> 20세, <은> 20세,

<루홍원> 19세, <평성> 2세

양 무제 <소연> 56세, 북위 효명제 <원후> 10세, 호태후 <호선진> 34세,

<고환> 24세 백제 무령대왕 <사마> 59세, 신라 법흥대제 <모진(원종)> 40세이다.

 

 

 

경자{AD520} 안장(安藏)2년,

 

춘정월, 병자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몸이 심히 불편하여

<초椘>황후와 태자 <보연宝延>이 황극전(皇極殿)에서 조하를 받았다.
  

 

2월, 대행의 큰제사를 지내고, 선제 궁인들을 귀가하라고 명하였다.  

 

<원종原宗>이 공복 제도에 대한 율령을 반포하였다.
  

 

3월, <보군宝君>이 위(魏)에서 돌아와서, 말하길

 

“<후詡>의 어미 <호胡>태후가 <원역元懌(487-520>과 상통하였으며,

<호胡>의 여동생의 지아비 <원우元又>는 그 꼴이 싫어서

자신의 어미 <복福>과 함께 <원역元懌>을 죽이려 하였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복福>은 임금의 어미자리를 훔쳐 딸을 낳더니만,

또다시 나라의 임금을 희롱하려 하는가?”라 하고는,

명을 내려 <복福>을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보군宝君> 또한 <호胡>와 놀아났다는 보고도 있었다.


4월, 상이 졸본에 가서 친히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고는,

황태자에게 명을 내려 정사를 대행하라 하였다.

 

황태자는 동관궁(彤管宮)학사 <양梁>씨를 동궁사인으로 삼아서

정사를 처결하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양梁>씨는 수경원(修鏡院)학사 연학(淵學)의 처이었는데,

미모인데다가 총민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산수에도 능하였기에,

동궁이 그 재능을 아껴서 누차 불러들여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더니,

동궁이 마침내 거두어들인 것이다.

 

<양梁>씨는 동궁의 총애를 독차지 하더니만

자신의 지아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주금령朱金鈴>이 상의 아들 <령鈴>태자를 낳았기에,

<주금령朱金鈴>을 귀빈으로 봉하고 5품의 작위를 내렸다. 나이 18살이었다.

 

그의 아비 <주황朱况>은 우림위가 되었다.  

 

황태자가 3품 조정 관료의 딸 10인을 백단원(百丹院)에서 만나보고는

종실들에게 첩으로 주어서 귀한 자손들을 늘리게 하였다.

 

이들 3품 관료들은 모두 부유한 호족 출신이었으며, 씨들의 계보는 자세하지 않았다.

 

이에 훈구지신들이 내키지 않아서 말렸더니,

 

황태자가 이르길

 

“골육들 간의 혼인이 이미 심하여서 원기가 시들고 쇠잔하여졌으니,

새로운 제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라 하였다.

 

황자는 2품·1품·무품으로 차등을 두고,

황손은 3품·2품·1품으로 차등을 두고,

황증손은 4품·3품·2품·1품으로 차등을 두고,

황현손은 5품·4품·3품·2품·1품으로 차등을 두게 하였다.

 

황녀도 마찬가지로 하였다.

 

어미가 한미한 때는 골품을 등위를 낮추게 하였다.

 

황자의 정실 처는 자신의 지아비와 같게 하며,

부실 처 이하는 등위를 낮추어 없애게 하였고,

공주는 하가하여 그 품위가 지아비보다 높으면 지아비 또한 그 품계가 되게 하였다.

 

3품의 딸이 종실의 첩이 되면

지아비의 등위를 따라 강등하여 공경 처의 예로 대우하였다가

아들을 낳으면 등위를 올려 정실 처의 예에 따라 대우하게 하였다.

 

종실의 여인으로 저녁에 승은을 입은 이는 비빈의 예에 따라 대우하게 하였다.


5월, 상이 졸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와 궁들을 들렀으며,

비난하여 궁핍한 이들에게는 1인당 한 섬의 곡식을 내려주었으며,

부로(父老)들에게는 비단 및 술과 고기를 내려주었다.  

 

<진금晋錦>을 동궁귀빈으로 삼아 저녁 시중을 들게 명하였다.

 

<진금晋錦>은 부유한 상인 <진관晋冠>의 딸이었으며,

16살에 <보연宝延>의 총희가 되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 아들 <금錦>공을 낳았기에 2품 작위를 내렸다.

 

아이 낳은 뒤처리가 깔끔히 되었기에, 상이 불러들여 눕게 하고는 승은을 내렸다.

 

<진금晋錦>은 남자를 녹이는 재주가 있어서 상의 구미를 능히 즐겁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남자를 녹이는 재주는 <초운椘雲>과 할 때보다 즐겁지만

아들 낳기엔 거리낌이 있었구나.

나의 처는 응당 아들을 낳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진금晋錦>은 이 말을 생각하였고,

그 이후로 상과 동침하여도 그 재주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더니 점차로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때의 나이 27살이었다.


6월, 상이 황산(黃山)으로 가서 종실과 공경들에게 연회를 베풀고는,

울음을 삼키며 이르길

 

“나의 조상님들이 어찌 성군과 가지런하여 지셨는지를 내가 생각하여보았더니,

불초한 내가 그 뒤를 잇는 것은 마치 깊은 물가에 서있는 것 같았소.

경 들은 대대로 봉록과 혼인으로 가까워진 신하들이시오,

짐 한 사람과 함께 천하를 다스림에 잘 못됨이 없어왔었소.”라 하고는,

 

또한 황태자 이하 여러 동생들과 숙부들에게도 이르길

 

“그대들은 나와는 같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를 둔 골육지친들이오.

마땅히 모두가 효성과 우애로써 근검하고 조상님과 나라를 위해야 할 것이며,

방자하게 자신의 욕망을 따르지는 말아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이에 황태자 <보연宝延>이 아뢰길

 

“신 등은 죄가 무거워서 선황께서 높은 곳으로 가셨더니

별안간 아버지 없는 자식들이 되었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저희들을 자식으로 거두어주시고 깊게 감싸주시어

두 번 사는 은혜를 내리시었습니다.

맹세컨대 충성과 효심으로 받들겠습니다.”라 하였다.

 

종실들 모두가 부복하여 한 목소리가 되었다.

 

이에 상이 어루만져 이르길

 

“그대들의 가려운 곳 하나하나 아픈 곳 하나하나를 짐은 응당 살필 것이오.

부황께서 살아계셨던 때와 같이 마땅히 조석으로 흔쾌한 마음으로 달라고 하시오.”

라 하였더니,

 

여러 신하들과 그들의 처는 물론 공주들까지

저녁에 모시는 일을 되살려주길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저녁을 감당하는 것은 비록 조종이 이루신 오래 된 예법이나,

역시 이족의 예법이오. 응당 폐하여야 할 것이오.

하물며 나는 체질이 연약하거늘 어찌 능히 넘치도록 호색할 수 있겠소.

내가 그대들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럴 여력이 없음을 어쩌란 말이오. 어찌 하라고.”라 하였다.  


7월, 종실 중에 아들이 없는 이들에게는 명을 내려서

경림(瓊林)의 정숙한 여인들을 처로 삼게 하였으며,

또한 공경들의 현처 소생인 딸자식을 첩으로 들여서

종실이 번창하여 무성하게 자손을 두게 하였다.

 

상이 이르길

 

“성골들끼리 혼인하여 온 것은 비록 오랜 된 풍속이어

서로 사랑하여 통함이 당연할 것이나,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좋은 처를 맞아야 할 것이오.

백관들 중 3품 이상에서 현명한 행적이 있는 이들은

모두 짐에게 딸을 바칠 수 있을 것이오.”라 하였더니,

 

모든 3품 이상 관료의 딸들은 스스로 마음대로 혼인하지 아니 하고,

모두가 내한원(內翰院)으로 들어가 종실의 예법을 배우고,

여인들의 예법과 태교를 익혔다.  

 

위(魏)의 <원후元珝>가 <원역元懌>을 죽이고 <호胡>태후를 가두었다.

<원역元懌>의 아들 <원단元亶>은 장 100대를 맞고 그 때문에 죽었다.  
  

 

8월, <경鯨>공주를 제2의 황후로, <평양平陽>공주를 제3황후로,

<하양河陽>공주를 태후로 삼았다.  

 

<은銀>공주가 태손 <석奭>을 낳았다.  

 

재능이 있는 많은 이들을 천거 받았으며,

<이의신李義臣>·<양기숙楊岐叔>·공예사<원덕성元德成> 등 30인에게 직무를 주었다.


10월, 9경(九卿) 5관(五館)을 두었다. 선황의 명이었다.  

 

대부경(大府卿)은 궁궐 내의 창고와 재화를 관장하며,

경은 <이주언爾朱彦>으로, 소경 2인은 <오진吳進>과 <부성芙星>으로 하였다.  

 

소부경(小府卿)은 궁궐 내의 조달과 영선을 관장하며,

경은 <곡감谷玵>으로, 소경은 <서문徐文>과 <속질粟秩>로 하였다.  

 

비부경(秘府卿)은 새보와 옥책을 관장하며,

경은 <왕형王衡>으로, 소경은 <하장賀萇>과 <아헌태鵞憲太>로 하였다.  

 

태상경(太常卿)은 제향(祭享)과 조위(吊慰)를 관장하며,

경은 <거琚>태자로,

소경은 <거琚>태자비<진장晋嬙>과 <왕형王衡>의 처 <진화晋華>로 하였다.  

 

사재경(司宰卿)은 궁중 연회와 주방을 관장하며,

경은 <진덕晋德>으로, 소경은 <계온문桂溫門>과 <왕희인王羲人>으로 하였다.  

 

위위경(衛尉卿)은 우림과 소금 및 축성을 관장하며,

경은 <진면晋冕>으로, 소경은 <곡진谷瑨>과 <을지상乙支祥>으로 하였다.  

 

태복경(太僕卿)은 거마 즉 사냥을 관장하며,

경은 <화일華日>로,

소경은 <화일華日>의 처 <진창晋昌>과 <의義>태자비 <화진華蜃>로 하였다. 

 

홍노경(鴻矑卿)은 예빈(禮賓)과 사행(使行)을 관장하며

경은 <곤稇>태자로,

소경은 <곤稇>태자비<왕희王姬>와 첩 <정과鄭婐>로 하였다.

 

사농경(司農卿)은 권농과 백성의 구휼을 관장하며,

경은 <란격欒鬲>으로, 소경은 <연신燕信>과 <어춘魚春>으로 하였다. 

 

효현관(孝賢館)은 효자와 현인을 양성하며,

대부는 <여숭呂崇>으로, 랑중은 <산기山箕>와 <치린齒鱗>으로 하였다. 

 

한림관(翰林館)은 문장재사를 양성하며,

대부는 <하국賀國>으로, 랑중은 <이훈李勳>과 <대방호大房滬>로 하였다. 

 

국사관(國射館)은 활과 칼을 쓰는 무사를 용감하게 키워내며,

대부는 <제연齊連>으로, 랑중은 <통성通成>과 <우중牛中>으로 하였다. 

 

사역관(司譯館)은 통역과 외사(外事)를 맡으며

대부는 <양길梁吉>로, 랑중은 <원민元敏>과 <을중乙中>으로 하였다.

 

군기관(軍器館)은 병장기와 전선(戰船)을 만들며,

대부는 <정검鄭儉>으로, 랑중은 <계장桂長>과 <주월朱越>로 하였다.  

 



11월, 상은 왕후와 함께 온탕으로 가서

나란히 붙어 서서 눈을 이고 있으면서 길을 트고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이르길

 

“조황(祖皇)들께서 심어놓으신 덕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빛나고 있음이오.

나무들이 저러할진대 항차 사람들은 어떠하겠소.

나와 그대들은 응당 조황(祖皇)님들을 축복하여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이에 3명의 후들이 조용히 옷을 축복하여 나무 왕에게 바쳤으며,

상은 친히 그 옷에 그림을 그렸다.  

 

유연(柔然)왕 <아나괴阿那瓌>가 <미발未發>에게 패하여

재빠른 말을 타고 위(魏)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이에 위(魏)는 2천기를 내어 그를 보호하고

만 5천의 군병을 일으켜서 그를 그들의 국경에까지 보내주었다.

 

 

 


 

 

신축{AD521} 안장(安藏)3년,

 

춘정월, 경오일 초하루에

해(奚)왕 <사출査出>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청혼하였다.

 

<사출査出>은 본디 <우문宇文>씨 <광廣>공의 후예이다.

 

상이 경총대부 <관瓘>태자에게 명하여 종실들과 협의하라 하였더니,

<발원跋元>공의 딸 <호죽好竹>을 상의 딸로 삼아서 공주를 봉하여 보내주게 되었다.

 

<발원跋元>공은 상의 동복이부인 형이며,

<발跋>태자의 아들이고, <연淵>태후의 소생이다.  

 

유연(柔然)의 <파라문波羅門>{아나괴의 종형}이 <시발示發>을 토벌하여 파하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니, <아나괴阿羅瓌>는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소연蕭衍>의 사신 <강법성江法盛>이 몸에 지녔던 글에

상을 영주(營州), 평주(平州)도독으로 봉한다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낙양에 갇혀 풀려나질 못하였었더니,

 

 

상이 웃으며 이르길

 

 

"<소연蕭衍>은 조그마한 놈 주제에 감히 건방지기가 이러한데

오래 갈 수나 있겠소?"라 하였다.  

 

상의 딸 <녕양寕陽>공주를 <음陰>태자비로 삼았다.

 

<음陰>태자는 <욱호勗好>태후가 낳은 명치(明治)의 아들이다.

 

이때 나이 25살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배웠고, 상의 시절엔 수경원(修鏡院)학사로 있었다.

 

 

<녕양寕陽>은 <덕양德陽>의 동복 여동생으로 나이 19살이었는데,

역시 글씨·그림·거문고 및 바둑에 능하였다.

 

상이 이를 탐내어 황태자의 부비로 삼아주려 하자

<녕양寕陽>이 수긍하지 않고 <음陰>태자에게로 도망하였으며

아이가 생기자 그의 비로 삼아주게 된 것이었다.


4월, 졸본으로 가서 <보연宝延>을 동궁으로 삼았음을 고하였다.

 

이때, 동궁비 <덕양德陽>이 <평산平山>공주를 낳았고,

<계桂>시중이 상의 아들 <사량師亮>태자를 낳았다.  
  

 

5월, 백제에 큰물이 일어 집들이 떠내려갔고,

 

가을엔 황충의 피해로 백성들이 굶주렸다.

 

 

신라로 들어간 자가 천여 호가 되었다.

 

이 일로 두 나라는 화목하지 않게 되었다.  

 

 

가락의 임금 <겸지鉗知>가 죽고 그 아들 <구형仇衡>이 보위에 올랐다. 
  

 

7월, 동궁사인 <양梁>씨를 동궁대부로 삼고 이름을 <의신義臣>으로 내려주고

품계를 4품으로 올려주었다.

 

<양의신梁義臣>은 내한원(內翰院) 제교로 있다가 동궁의 총애를 받아 사인이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상의 어여삐 여겨 대부로 올려준 것이다.

 

 

상이 동궁에게 이르길

 

"이와 같은 이는 후일에 여자 시중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니,

 

너는 마땅히 크게 써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8월, 고차(高車)와 유연(柔然)이 서로 싸웠다.

 

 

<아나괴阿那瓌>는 적(磧)의 동쪽에 있었고,

 

<파라문波羅門>은 서해)西海)에 있었으며,

고차(高車)는 금산(金山)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나괴阿那瓌>의 형 <준俊>은 대(代)에 숨어 있다가

회삭진(懷朔鎭)으로 찾아가서 위(魏)의 군병을 청하고 <아니괴>를 맞아들여서

무결산(無結山)아래인 토약(吐若)과 해천(奚泉)에 자리를 잡게 해주었다.  

 

 

<홍원紅院>이 상의 아들 <흘忔>태자를 낳았다.
  

 

9월, 우보 <을지번乙支蕃>의 어미 <연장淵嬙>이 나이 75살에 죽었다.

 

<황晃>태자의 딸이었는데, 문장과 가사에 능하였었다.

 

<연淵>태후의 동복 언니이어서 상은 큰 이모로 여겼었다.

 

그런데, 음행 이외엔 하는 일이 없었으며,

부유한 상인인 <진복晋福>과 통정하여 <관화冠華>와 <면장冕嬙>을 낳았더니,

그의 남편이 그녀를 버렸다.

 

상은 동궁시절에 역시 통정하여 딸 둘을 낳았었고,

즉위한 이래엔 태후의 예로 대우하였었고,

그녀가 죽었다는 말에 조회를 파하고 친히 조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을지번>이 상을 당하였음을 들어 우보 자리를 사직하니,

 

시중인 <하유賀由>의 남편 <호국瑚國>을 우보로 삼았다.

 

둘 다 나이가 60살이었다.

 

<하유賀由>는 <수성壽星>의 딸로 <하賀>공주 소생이었다.

 

거란 말과 호(胡)의 말에 능하고 문장에도 달통하였으며, 예쁘고 교태도 있었다.

 

 

상 역시 동궁시절에 그녀 좋아하였었으며 아직도 식지 않았었다.  


 

 

 

 

임인{AD522} 안장(安藏)4년,

 

 

갑오일 초하루에 <하양河陽>태후가 상의 딸 <하빈河濱>공주를 낳았다.

 

상이 <홍원紅院>에게 명하여 그녀를 <흘忔>태자비로 삼게 하였다.
  

 

2월, 제2황후인 <경鲸>공주가 죽었다. 춘추 58이었다.

 

후는 <경鲸>태후가 낳은 <수성壽星>의 딸이었다.

 

성품이 맑고 검소하며 말 수가 적었었다.

 

 

애초엔 문자(文咨)의 궁인이었으며, 후에 상의 보비가 되었다.

 

비록 특별한 사랑을 받지는 못하였어도 두루 격을 잃지 않아 부후가 되었었으나,

평소 황태자와 상통하여 상의 자식을 낳아 기르지는 못하였다.  

 

 

<평양平陽>을 제2황후로 삼았다.

 

<홍원紅院> <루婁>씨를 제3황후로 삼았는데, <루사덕婁師德>의 딸이며,

이로 인하여 3품의 딸에서 황후가 나오기 시작되었다.
  

 

3월, <원종原宗>이 자신의 종제인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구형仇衡>에게 처로 주어 결친하였다.

 

<루사홍婁師弘>이 전중사인인 <청鯖>공주의 고군(袴君)이 되었는데,

<홍紅>황후의 남동생이었으며 나이는 14살이었다.

 

매번 그 어미 <계桂>시중과 함께 한 이불 속에 들었었는데, 상이 이를 금하지 않았다.

 

<청鯖>공주는 황태자의 딸인데,

애초엔 <창滄>태자비가 되었다가 지금에 이르러 상의 후궁이 되었고,

<경鯨>부후(副后)의 소생이다.
  

 

4월, 고차(高車)의 임금 <이복伊匐>이 유연(柔然)에게 패하자

 

그의 동생 <휼거䢕居>가 <이복伊匐>을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다.

<계桂>시중이 자신의 아들 <루사홍婁師弘>을 위해

<창滄>태자와 <청鯖>공주에게 향연을 베풀었으며,

이에 <창滄>태자는 <계桂>시중과 통정하고 다음 날을 서약하였다.


5월, 임진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녕양寧陽>궁이 상의 딸 <둔遯>공주를 낳았다.

 

 

상이 황태자에게 명하여 <녕양寧陽>을 취하게 하고는 이르길

 

 

"증(烝){손윗사람의 여자를 취하는 것}보(報){손아랫사람의 여자를 취하는 것}함이

비록 옛 풍습이라 하지만 군자들은 그를 도리에 어긋난다고 한다.

옛적엔 증례가 많았었으나 근래엔 보례가 많아졌으니, 이 또한 변한 것의 하나이다.

외부의 사람들이 알게는 하지 말라."라 하였다.
  

 

9월, 용산에서 동명대제를 행하였다.  

 

 

<사마斯摩>가 고산원(狐山原)에서 사냥하였다.

 

 

이에 상이 노하여 이르길

 

 

" 온조의 대업이 타락했음이다.

어찌 큰 제사를 올리는 날에 사냥을 한단 말인가?

 

<사마斯摩>의 무도함이 이러하여 졌으니, 능히 그놈은 죽게 되겠구나."라 하였다.
  

 

10월, 지진이 일었는데, 서남쪽이 더욱 심하였으며,

가옥도 부서지고 가축도 깔려죽었으며, 죽은 사람의 수도 적지 않았다.  

 

우보 <호용好勇>이 해장(海庄)에서 지진으로 나이 66살에 죽었다.

 

우보에 <호국好國> 좌보에 <사옥謝玉>을 들였다.

 

우보 <루사덕婁師德>은 이부상서로 삼았으며,

 

분원공(汾原公)<음훤陰萱>을 예부상서로, <선언宣彦>을 경조윤으로 삼았다.
  

 

12월, <파라문波羅門>이 위(魏)와 싸우다 패하여 잡혀서 낙양으로 왔다.  

 

 

<복福>태자비 <산양山陽>공주가

내한원(內翰院)의 제교인 <양기덕陽技德>과 상통하여 아들 <희비羲秘>를 낳았다.

 

<기숙技叔>에게 개가하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산양山陽>은 <하양河陽>태후가 낳은 상의 딸이다.

 

이일로 병이 들자 상은 <복福>태자에게 명하여,

<기숙技叔>과 함께 <산양山陽>을 처로 삼으라 하였다.

 

 

 


 

 

계묘{AD523} 안장(安藏5년,

 

춘정월, 무자일 초하루에 상이 황후 및 <계桂>시중과 함께

계방로(桂房路)의 행궁으로 가서 목에 줄을 맨 거위로 잉어를 잡았다.

 

 

<주朱>귀빈 또한 따라갔었다.  

 

상의 딸 <정양正陽>공주를 <리鯉>태자비로 삼았다.
  

 

2월, <사마斯摩>가 한성(漢城)으로 가서

좌평 <국우國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한수(漢水)이북 주와 군의 15살 이상의 백성을 동원하여

쌍성(雙城)을 쌓으라 하였으며,

 

<사오沙烏>의 처 <백苩>씨를 맞이하여 처로 삼고는 3월에 환도하였다. 
  

 

3월,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올렸다.  

 

 

<은銀>공주가 상의 딸 <천蒨>공주를 낳았다.  

 

양로연을 국로원(國老院)에서 베풀고, 활쏘기를 시험하여 출사할 이를 가렸다.


5월, 유연(柔然)에 큰 기근이 들었다.

 

 

지난해엔 위(魏)에서 좁쌀 1만석을 얻었었다.

 

금년에도 또 1만석을 얻으려,

 

사람을 시켜 숨어서 기다리다 위(魏)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원의元义>가 <호胡>태후를 유폐하여 함부로 다루었더니,

<아나괴阿那瓌>는 스스로 <원의元义>를 토벌한다고 하면서

위(魏)의 관리 <원부元孚>와 함께 30만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평성(平城)에 도착하여 백성 및 소와 양을 약탈하니 수십만이 되었다.

 

 

<이숭李崇>이 3천 리를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질 못하고 돌아갔고,

 

<우근于謹>만이 <욱대원郁對原>과 열일곱 번을 싸워서

가까스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사마斯摩>의 처 <연燕>씨가 <사오沙烏>의 처 <백苩>씨를 투기하다가

<사마斯摩>를 독살하였다.

 

<사마斯摩>의 서자 <명농明穠>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斯摩>가 제삿날에 사냥하던 것을 싫어하였었더니,

과연 <명농明穠>이 비밀리에 아비를 죽였다.

 

이에 <고노高老>와 <복정卜正>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

한수(漢水)를 건너 쌍현(雙峴)을 무너뜨리고

<지충志忠>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明穠>이 <연희燕喜>를 보내어 명마와 미녀를 바쳐왔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과하였다.

 

<명농明穠>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6월, 크게 가물어서 기우제를 올렸으며, 죄를 묻는 전쟁을 파하였다.

 

노획한 여인들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첩을 삼게 하였고,

 

남정네들은 개마(盖馬)로 옮겨서 여러 수자리에 배치하였다.
  

 

 

10월, 곡물이 여물지 않아,

관리를 내보내서 창고를 열어 가축이 없는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11월, 계미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좋은 말 10필을 위(魏)로 보냈다.

 

곧 위(魏)의 공주와 혼인하게 된 <순恂>태자를 위함이었다.  

 

동궁대부 <양의신梁義臣>을 대부경을 겸직시켜 3품으로 올려주고는 명을 내려

구리산을 파내서 동전을 주조케 하였다.

 

그 아비 <양박梁博>에게는 대장경의 직분과 4품의 작위를 주었으며,

명을 내려서 도로와 교량을 고치고 냇물과 택지에 둑을 쌓게 하였다.

 

<양박梁博>은 어릴 적엔 위(魏)로 들어가서 <고조高肇>의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오랫동안 부상관(扶桑館) 성사(省事)로 있었고,

 

<고환高歡>·<후경候景>·<목마目馬>·<자여子如> 등과 친구로 지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딸로 인하여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그의 선대는 옛적의 현상(賢相)이었던 <대방량大房良>의 후손이라고 한다.

 

<담복談福>의 아들 <담위談緯>를 상의 양녀인 <위魏>에게 장가들도록 하였다.

 

<금양金陽>공주는 <각恪>의 딸로 <호胡>가 낳았다.

 

<복福>과 <원애元义>는 권력이 있어 <위魏>와 <호胡>태후와 상통하였다.

 

 상이 <홍紅>황후와 수림의 온궁으로 가서 세모를 지냈다.

 

이때, <홍紅>황후는 총애가 최고여서 아들을 잘도 낳았으며,

많은 굵직한 정사가 <루사덕婁師德>에게서 처결되었다.

 

<계桂>시중과 <초椘>황후는 평소 황태자와 서로 통정하고 있었으나,

상은 이를 금하지 못하였다.


 

 

 

 

 

갑진{AD524} 안장(安藏)6년,

 

 

춘정월, 임자일 초하루에 상은 <홍紅>황후와 함께 수림의 온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병진일에 <홍紅>황후가 <변忭>태자를 낳았고,

<계桂>시중은 여동생 <대방청大房淸>을 <계춘경桂春卿>에게 처로 주었고,

더불어서 자신의 둘째 딸 <금란원金蘭院>이 번갈아서 상의 잠자리를 하면서,

<홍紅>황후가 아이 낳기를 기다렸더니,

<대방청大房淸>의 사람들은 심하였다고 여겼다.

 

 

보국장군 <곡춘谷瑃>은 <루婁>씨가 권력을 틀어짐을 보더니만,

경계하시길 바라면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며 이르길

 

"경의 선조는 옛 신하였었으니 저버릴 수 없소."라 하면서

 

 

<곡춘谷瑃>에게 <청하공淸河公>을 더하여 봉하고

<곡안谷安>에게도 봉작을 더하여 주었다.   
  

 

2월, <순恂>태자가 위(魏)로 가서

<원각元恪>의 딸 <화양華陽>공주와 혼인하여 돌아왔다.

 

역시 <호胡>의 소생이다.

 

<순恂>은 <호胡>씨가 유폐되어있는 궁을 찾았다.

 

<호胡>는 우리의 말로 소통하기는 불가능하였으나 말투는 정성스러웠으며,

 

가슴속에서 글을 끄집어내어 <순恂>태자의 옷소매 속에 던져 넣었다.

 

 

십만 병을 보내서 <원의义>를 쳐 죽이고 자신을 다시 세워달라는 것이었었으며,

그 열 글자는 추호같이 작았었다.

 

이를 들은 상은 위(魏)를 치려고 하였으나 <루사덕師德>이 간하여 그만두었다.  

 

진휼곡 창고들을 고치고 그 담당 관리들을 다스리라 명하였다.  

 

<명농明穠>이 <소연蕭衍>과 상통하였는데,

그의 사신이 탄 배가 물을 지키며 돌보는 관리에게 나포되었다.

 

그 배에 실려 있던 경적과 의약품은 조정의 관리에게 관리하게 하였으며

채단과 미녀는 물을 지키며 돌보는 관리에게 주었으며

나포한 장수에게는 상을 내렸다.  

 

<계桂>시중이 <창滄>태자의 아들<사평師平>공을 낳아서 상의 아들로 하였다.

 

상은 그를 믿고 <루사덕師德>에게 이르길

 

"경의 처가 연달아 짐의 아들을 낳아주니 황후로 봉하고 싶은데,

경이 처를 아주 잃을까 걱정스러워 그리하지 못하고 있소."라 하였더니,

 

 

<루사덕師德>이 아뢰길

 

"신의 처가 비록 황후의 덕목이 있다 하여도,

본래 지난 세 황실의 여인이었고 신에 의해 더렵혀졌으며

게다가 나이가 40이나 되었으니, 후로 봉함은 불가할 것입니다.

바깥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상께서는 이를 살피시길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3월, 3품들의 딸 다섯을 뽑았다.

 

 

<연학淵學>의 딸을 궁인으로 삼고 지위를 비로 하였더니

군신들이 간하며 그녀를 내치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나이는 14살이었으며 <양의신梁義臣>의 소생이었다.

 

화풍(華凬)이 일어 내한(內翰)에 유학하다가

문장(文藏)태자 <화덕和得>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졌었다.

 

상은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여인다움에 빠진 것이었었다.

 

식자들은 그녀를 비천하게 여겼으며 요녀라 하였으나,

<화득和得>은 그녀를 훌륭하다고 힘써 도왔다.

 

내한원(內翰院)에도 두 부류의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풍(華凬)을 따르는 자들을 활도(滑徒)라 하고,

화풍(華凬)을 꾸짖는 자들을 섭도(涉徒)라 하였다.  

 

 

황태자비 <덕양德陽>이 수림의 온궁에서 상의 딸 <탕산湯山>을 낳았다.

 

상과 <초椘>황후가 옷을 내리고 축하를 받았다.

 

상은 평소에 황태자와 우애를 나누고 있어

께 같은 여인과 즐기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부끄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위(魏)가 <호胡>를 유폐한 이래로 도적이 봉기하였다.

 

<육한六韓>·<발릉拔陵>·<고평高平>·<호침胡琛> 등이 각자 임금을 참칭하더니

적도들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졌다.

 

<후詡>는 나이가 어려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고환高歡>은 설득하기에 빼어나 추장 <이주영爾朱榮>을 끌어안고는

그의 기르던 가축과 재물을 나누어서 날래고 용감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

호걸들과 결탁하였더니

<후경候景>·<사마자여司馬子如>·<가현賈顯>·<도가영度叚榮>·<헌태憲泰> 등이

<고환高歡>에게 의탁하였다.

 

 

<영신榮神>이 기회를 확실히 잡아서 무리들을 엄정히 통제하고는

<고환高歡>을 보내서 호초피·수정·옥석 등을 바쳐오고 번신이 되겠다고 청을 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명을 내려 책력과 율법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9월, <담위談緯>가 찾아와 말하길

 

 

"<담복談福>이 <호胡>씨와 밀통하여 <원의义>를 증오하고 몰래 그를 제거하여

 

방위를 누그러뜨리고는 <후詡>와 왕래한다."고 하였다.

 

<호胡>는 <후詡>를 상대하여 군신들에게 이르길

 

 

 "어미와 자식이 갈라져 있으니,

 

나는 응당 비구니가 되어 숭산의 한적한 절에서 살고 싶소."라 하였더니,

 

<후詡>가 극력하여 말렸다.  

 

상이 황산으로 가서 국화를 즐기고는 교구전(交龜殿)에서 선비 120인을 시험하여

뛰어난 이를 선별하였다.

 

 

<왕서王胥>·<루군필婁君弼>·<주희일朱喜一>·<목언睦彦>·<이우李禹>·<연상燕祥>·

<궉대만鴌台巒>·<호운好雲> 등 여덟 사람에게

화주(花酒) 및 금은용규(金銀佣圭)를 내렸다.

 

<안양安陽>·<덕양德陽>·<녕양寧陽>·<은銀>공주 등에게 명하여

술을 권하고 노래하며 춤추게 하여 이들을 기쁘게 하였다.

 

<왕서王胥>라는 이는 현상 <왕문王文>의 증손이고,

그의 아비는 비부경 <왕형王衡>이었으며,

그의 어미는 <진관晋冠>의 딸인 <진화晋華>이었다.

 

외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문장과 가사를 잘 하였다.

 

상은 그의 재능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관晋冠>과는 방외우(方外友)로 지내고 있어,

공주를 <왕서王胥>에게 처로 삼아주고자 하였다.

 

이때 <리鯉>태자비 <정양正陽>공주가 시아비와 불목하여 돌아왔더니,

상은 <왕서王胥>에게 주고 싶었고,

<왕서王胥>는 이미 <선언宣彦>의 딸 <선완宣婉>과 혼인하였던지라

 

또다시 공주와 혼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상은 화를 내며 <왕서王胥>를 태백산으로 내쫓았다가 도중에 불러들였다.  

 

 

영주(營州) 사람 <유안정劉安定>이 <덕흥德興> 등에게 들러붙어

그곳의 자사 <이중준李仲遵>을 죽이고 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하니,

<왕안王安>이 그놈을 미워하더니 <안정安定>을 죽이고 자신이 자리에 올랐다.

 

 

이에 <덕흥德興>은 자신의 무리 2천여를 이끌고 월해(月海)를 향하여 떠나서

 

모용씨의 옛 땅에 이르고자 하였으며,

 

연왕(燕王)을 자칭하고는 사신을 보내서 칭신하였다.

 

이에 상은 그를 무도하다고 질책하고 토벌하려 하였더니,

그의 무리 중에 찾아와 항복한 이들이 천여 인이었다.

 

농·공·상·약에 능한 이들을 남구(南口)와 서하(西河) 땅 사이에 살게 하였고,

 

부랑하며 거짓됨이 많은 이들은 월해(月海)의 바깥으로 내쳐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덕흥德興>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여

 

적(磧)의 동쪽인 적극원(赤極原)을 지켰다.


10월, 상이 <왕서王胥>의 처 <선완宣婉>을 한(漢)왕 <각>의 침비로 삼고,

 

<정양正陽>공주를 <왕서王胥>의 처로 하고 땅과 집 및 노비를 딸려주었다.

 

 

당초에 <은銀>공주가 <석奭>을 낳았다.

 

상이 공주를 사랑함이 지나쳐서 무릎위에 올려놓고 껴안고 귀여워 하다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끝내는 통정하게 되어 <천蒨>을 낳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궁중으로 불려 들어갔었고,

여러 번 <각恪>에게 가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고 나가지 않았다.

 

<은銀>공주는 일찍이

<각恪>이 <선완宣婉>과 내한(內翰)에서 즐기고 노는 것을 보았던지라,

상에게 <각>에게 침비로 주어버리라고 권하였었다.

 

상은 겉으론 비록 크고 힘 있게 생겼지만,

안으로는 실상 허약하여 색을 탐할 수 없을만큼 몸이 상하여 있었기에

<은銀>공주에게 시달리다 일어서지 못한 적도 많았었다.

 

그런데도 간간이 추한 욕망이 일어

급기야 <덕양德陽>의 몸을 더럽히기까지 하였는데도,

군신들은 감히 간하지 못하였었다.

 

당시의 석유(碩儒) 및 대현(大賢)이라 일컬어지는 이들도

규방 예절에 대한 지식이 이러하였었다.  

 

해(奚)왕 <두출梪出>의 처 <호죽好竹>이 아들 <호두귀好豆皈>를 낳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길

 

 

" 회(懷)와 삭(朔)의 북쪽 땅이 크게 어지럽습니다.

 

<두출梪出>의 종질인 <우문굉宇文肱> 또한 군사를 일으켜

<하발賀拔> 등과 함께 <위가고衛可孤>를 습격하여 죽였습니다."라 하였다.

 

<우문굉宇文肱>은 <일두귀逸豆皈>의 현손인 <우문태宇文泰>의 아비였다.

 

 

 

 

 

 


을사{AD525} 안장(安藏)7년,

 

춘정월, 병오일 초하루, 상이 <초椘>황후와 함께 황극전(皇極殿)에서 조하를 받았다. 
  

 

 

2월, 황산에서 크게 사열을 하고, 돌아와서는 친히 땅을 갈았으며,

세 명의 후에게 명하길 친히 누에를 치고 삼베와 양털로 실을 삼으라 하였다.  

 

 

거란이 찾아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오환(烏桓)의 별종으로 월해(月海)의 서쪽에 살았었는데,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점점 세력이 커지더니 회(懷)와 삭(朔) 지역을 어지럽히고

 

우마와 생구(生口)도 얻게 되었다.

 

 

추도간(推都干)이 임금이 되더니, 청하기를 신하가 되어 변방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원종原宗>이 대아찬 <거등居登>을 사벌군주로 삼았으며,

 

<명농明穠>은 <원종原宗>에게 딸을 보내주었다.

 

3월, 위(魏) <원의元义>의 당류인 법승이 모반하여 <소연蕭衍>에게로 투항하자,

<원의元义>는 령군을 혐오하여 해체하였다.

 

<호胡>태후가, <후詡>와 화해하고 사면하더니,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쳐왔다.  

 

무오일에 상은 궁인 <연화淵華>를 <화득和得>의 처로 삼아 출가하였다.

 

상이 그들이 사통하고 있음을 알아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4월, <순恂>태자비 <화양華陽>공주가 상의 딸 <단양丹陽>공주를 낳았다.

 

이때의 나이는 15살이었으며, 뒤이어서 후궁으로 들어왔다.

 

<화양華陽(511-544)>공주는 북위 肅宗 孝明帝 <원후元珝(510-528>재위 515-527>의 어머니인 호태후 <호선진胡仙眞(486?- >과 <원각元恪(483-515)>이 낳은 공주로

524년에 <순恂>태자와 결혼한 <원후元珝>의 누이인 <원계염元季艶>이다.

 

사가(私家)가 있어서 궁궐을 나가서 남정네를 둔 사람들은 성 도착이 심했었다.  

 

<소덕玿德>의 처 <방魴>공주가 <소덕玿德>에게 예쁜 첩이 많음을 투기하여

다른 곳으로 출가하겠다고 청하였다.

 

상이 <엄弇>공주의 궁으로 가서 그녀의 아들 <사응謝應>에게 명하여

<방魴>공주와 혼인하게 하였다.

 

<사응謝應>의 나이 15살이었다.  

 

유연(柔然)의 왕 <아나괴阿那壞>가 위(魏)를 위하여

<육한六韓>과 <발릉拔陵>을 토벌하였다.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무천(武川)의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름진 벌판을 향하며

여러 차례 <발릉拔陵>을 파하였다.

 

<후詡>는 사람을 보내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배불리 먹였다.

 

이때부터 <아나괴阿那壞>의 부락은 재물을 약탈하며 강성하여지더니

두병가한(頭兵可汗)을 스스로 칭하였다.

 

모두를 틀어질 뜻이 있었음이었다.  

 

위(魏)의 <호胡>태후가 <원의元义>룰 죽이고

<정엄鄭儼> 및 <이신궤李神軌> 등과 간통하였다.

 

<이신궤>는 528년 호태후의 명으로 대도독이 되어

<이주영>의 낙양 침공을 막았으나 패하여

<이주영>이 낙양에서 <원자유>를 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예쁘게 꾸미고 유람을 나갔더니 간하는 신하가 아뢰길

 

“남편이 죽은 이를 아직 죽지 못 한이라 하여

귀한 구슬도 떼어버리고 문양도 색이 없게 합니다.

무슨 연유로 나이 마흔에 치장 고치길 이리도 과하게 하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호胡>가 이르길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 내가 삿되다 욕하면서

천하가 비웃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무엇이 부끄럽단 말이오?

신하의 말 한마디가 오로지 지금 간언하는 신하와 같다면,

나이든 여우는 어느 시절에나 마음껏 즐길 수 있겠소?”라 하였다.  

 

고평(高平)의 적도 <호제胡璨>가 위(魏)의 경주(涇州)를 노략질하였다.

 

위(魏)군은 크게 패하여 변명거리를 찾으며, <호제胡璨>에게는 패한 사실을 숨겼으니, 월(越)의 <고高>가 두 임금을 속인 것과 같았다.
  

6월, <두병頭頭>{아나괴}이 <육한六韓>과 <발릉拔陵>을 크게 깨뜨렸으며

그들의 장수 <공작孔雀> 등을 참하였더니, <발릉拔陵>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마침내 <두頭兵병>은 해(奚)와 습(霫) 및 유거진(柔去鎭)의 반장(叛将)인

<두락주杜洛周>와 통할 수 있었다.  

 

<소연蕭衍>은 애초에 <동혼東昏>의 첩인 <오吳>숙원과 놀아나다

아들 <종綜>을 낳게 되었다.

 

<종綜>이 어미에게서 들어서 자신이 <동혼東昏>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동혼東昏>의 뼈를 파내고 <소연>의 아들을 죽여서 피를 묻혀 증거로 삼고는

팽성(彭城)을 나가서 위(魏)에 항복하였고,

낙양에 이르러서는 <동혼東昏>의 상복을 입고 매우 여위어 3년을 지냈더니,

<후詡>와 <호胡>가 <종綜>을 예우하여 고평공(高平公)으로 봉하고

이름을 <찬贊>으로 바꿔주었다.  


8월, <두락주杜洛周>가 무리를 모아

상곡(上谷)에서 <고환高歓>을 맞아들여 모주(謀主)로 삼았더니,

<채준蔡儁>·<위경尉景>·<단영段榮>·<팽락彭楽> 등이 그를 따라서

연주(燕州)자사 <최병崔秉>을 포위하였고,

<후詡>는 유주(幽州)자사 <상경常景>을 행대(行臺)로 삼아서

유주(幽州)도독 <원담元譚>과 함께 <두락주杜洛周>를 토벌하였다.

 

<원담元譚>은 둔우관(屯庽関)에 머물면서

노룡새(盧龍塞)에서부터 군도관(軍都関)에 이르기까지

모두 병사를 깔아서 험한 곳을 지켰다.  

 

<청鯖>공주가 <루사홍婁師弘>의 아들 <문文>을 낳자,

상이 그 아이를 자신의 가자(假子)로 삼았다.

 

<루사덕婁師德>이 비단 70필을 공주에게 바쳤고,

<홍紅>황후가 황금 100냥을 공주에게 내렸다.

 

공주는 동궁의 딸이었다.  

 

<루사덕婁師德>이 병이 들어, <대방청大房淸>을 이부상서로 삼았다.

 

<청淸>이 <우난于暖>을 사농경으로, <단목檀牧>경(卿)을 경조윤으로,

<란격欒鬲>을 동도윤으로 천거하였다.


10월, 상이 용산의 온천으로 가서 <루사덕婁師德>의 병을 살피고,

작위를 더해주어 대승상 위원공(渭原公)으로 삼았더니,

<루사덕婁師德>이 눈물흘리며 아뢰길

 

“신이 몸이 성치 못하여 폐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사오나,

우러러 보답할 수 없는 이런 꼴이 되었습니다.

죽더라도 응당 결초보은 할 것입니다.”라 하니,

 

상이 이르길

 

“경은 탐욕 없이 덕행을 하였으니 마땅히 오래도록 수명을 누릴 것이며,

응당 짐과 함께 천하를 다스려야 할 것인데,

어찌 은혜라는 말을 하는 것이오?”라 하였다.

 

12일 갑인일에 나이 마흔 둘에 죽었으니,

상이 이를 애통해 하며,

태보 위국공(渭國公)으로 추봉하고 주산원(珠山原)에 장사하였다.

 

<루사홍婁師弘>에게 명하여 그의 작위를 세습케 하였으며

우림위의 직분과 땅 및 집과 노비를 내려주었다.  

 

<리鯉>태자가 개과하더니 <정양正陽>공주와 다시금 살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상은 <왕서王胥>에게 명하여 공주를 공동의 처로 하라고 하였다.
  

 

11월, 임인일 초하루에 상의 딸 <인양寅陽>공주가 <진晋>태자비가 되었다.  

 

<두락주杜洛周>가 <곡율금斛律金>을 깼다.

 

<곡율금斛律金>은 칙륵(勅勒)의 추장으로

병력을 움직임에는 호(胡)의 방식을 따랐으며,

먼지가 이는 것을 조망하여 기병과 보병의 많고 적음을 알아내고,

흙냄새를 맡아 멀고 가까움을 알아내는 자이었는데,

<이주영爾朱榮>에게 귀의하여 별장이 되었다.  

 

산호(山胡)인 <유려승劉蠡升> 역시 칭제하고 백관을 두었으며,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병인{AD526} 안장(安藏) 8년,

 

춘정월, 습(霫) 왕 <거민巨敏>이 유연(柔然)의 사신 <두병頭兵>과<오리吳利>를

데리고 동쪽으로 와서 배알하고 세폐를 바쳤다.  

 

 

<두락주杜洛周>가 혈산(穴山)과 석현(石峴)을 쳐서 빼앗고는

송형(松陘)에서 2만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와서 거용관(居庸関)을 쳤다.

 

<원담元譚>은 패주하다가 행대(行臺) 별장인 <최충철崔忠哲>의 목을 치고

군도관(軍都関)에 의거하였다.

 

 

<상경常景>은 별장 <이거李琚>를 도독으로 삼았다.  

 

북도대도독 <심당深瓽>이 <휘지徽之>의 처와 놀아났더니,

<휘지徽之>가 <호胡>태후의 세력을 불러들였고,

<심당深瓽>은 <양진楊津>으로 <휘지徽之>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선우수례鮮于修禮>·<곡률斛律>·<낙양목자洛陽牧子> 등이 군병을 일으켰더니,

<이주영爾朱榮>이 <낙양목자洛陽牧子>를 깨뜨렸다.


4월, <완琓>태자가 위(魏)에서 돌아와 말하길

 

 

“<정엄鄭儼>과 <서흘徐紇>이 <호胡>태후의 간교한 도적이 되었으며

황충이 일었으니 그들은 필히 망할 것으로 보이며,

 

<두락주杜洛周>·<이주영爾朱榮>·<역영>의 무리가 점차 흥성하고 있습니다.”

라 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고환高歓>은 어떠하오?”라 물으니,

 

답하길

 

 

“<고환高歓>은 묻기만 할뿐 아직 세력을 펼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재력이 미치지 못합니다.”라 하였다.

 

상이 명을 내려 황금 천근을 <고환高歓>에게 보내주었더니,

<고환高歓>은 크게 기뻐하며 입조하였다.

 

이때, <진관晋冠>은 서도(西都)에서 부유하기로는 으뜸이었고,

엄청 예쁜 딸이 있었는데 칠보로 단장하여 높은 봉우리에 데려다 놓고는,

 

8층으로 사왕(査王)구곡강정을 짓고

흰 모래와 푸른 솔 그리고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로 정상까지를 꾸며놓았으며,

사람을 시켜 이 예쁜 딸을 틀림없어 보이는 남장을 시켰으며,

어떠한 남자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는 중에 천신이 하강하여 총애를 내려주길 바랐었다.

 

상이 한밤에 쳐다보니 등촉이 찬란한지라 알아차렸다.

 

미행하여 찾아갔더니 정말로 우아하고 소박하며 여유롭고 고요하였기에,

거문고를 타고 학춤을 추었으니 그야말로 신선의 취향이었다.

 

 

승은을 베풀고는 그녀를 <봉희峰姬>라 이름 하였다.

 

그 시절에 부호들은 딸을 바치고는 싶었어도 어찌 할지를 몰랐었는데,

 

<진관晋冠>은 상의 취향을 알고 있어서 이러한 수를 써서 상의 승은을 입게 하였고,

종척들에게도 후하게 실어 보내어 친밀하여 지기도 하였으며,

아울러서 <두락주杜洛周> 및 <고환高歓> 등과도 상통하여

오가기를 끊이지 않게 하였던 것이었다.

 

<원의元义>의 처가 <담복談福>과 상통하다가 들통 났다.

 

이에 <담복談福>이 우리에게로 도망하여 와서 말하길

 

 

“<노희盧僖>의 딸 이 곧 혼인하는 저녁을 맞이할 지경에

<이신궤李神軌>가 <호胡>태후로 하여금 그 혼인을 다음으로 미루게 하더니만

그녀를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신궤李神軌>와는 편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서 돌아왔다.”

고 하였다.

 

상은 이 말을 믿을 수 없어, <담복談福>을 림부(琳府)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원굉元肱>이 전사하였다.

 

10월, <명농明穠>이 웅진성(熊津城>의 지붕을 고치고 사정책을 세우고는

 

가야에 침입하여 경성(京城)을 약탈하였더니, 신라와는 크게 사이가 벌어졌다.  

 

 

<원홍업元洪業>이 <선우수례鮮于修禮>를 죽이고 위(魏)에 투항하였더니,

 

<우문태宇文泰>가 <역양>을 따라가서 <원홍업元洪業>을 참하였다.
  

11월, <덕양德陽>이 상의 아들 <평국平國>을 낳았기에,

동궁{보연}에게 명을 내려 <평국平國>을 데려다가 아들로 삼게 하였으며,

옷과 술을 내려주어 동궁을 위안하며 이르길

 

“너의 아들이 곧 나의 아들이다.”라 하였다.

 

 

 

 

 

 

 



정미{AD527} 안장(安藏) 9년,

 

춘정월, 을축일 초하루, 서도(西都)>의 란대(鸞坮) 온전(溫殿)에서 조하를 받았다.

 

 

습(霫)·해(奚)·유연(柔然)·산호(山胡)·<두락주杜洛周>·<이주영爾朱榮>·<고환高歓> 등

모두가 비단과 말을 공물로 바치고, 책력을 받아갔다.

 

 

보척보록(宝戚宝籙)이 완성되었다.

 

수첩된 자는 215인이며 왕으로 봉받은 자가 30인이었다.

 

종친과 척족들의 땅을 별도로 두고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황자의 비첩 <선완宣婉>이 <각恪>의 아들 <목穆>을 낳았더니,

상이 크게 기뻐하며 즉각 <각恪>부인으로 봉하고 5품인 상례의 직분을 주었다.


3월, <홍紅>황후가 <계양桂陽>공주를 낳았다.

 

<계桂>시중이 상의 아들 <사공師孔>태자를 낳으니,

상은 <계桂>시중을 황후로 봉하려 하였고, <대방청大房淸>이 간하여 말렸더니,

<계桂>시중이 마음이 내키지 않아 이르길

 

“살아서는 비록 동침하여 아들을 낳아준들 죽으면 한데 묻히지 못하는 것을

제사를 받아먹는다하여도 어찌 부부였다 할 수 있겠소?”라 하였다.

 

그러자 상은 명을 내리길

 

<계桂>시중이 죽거든 유골을 상의 구덩이이로 가져오게 하였다.  

 

 

사농경{우난}의 아들 <우준于晙>에게 명을 내려

공전과 목야지를 측정하여 새로이 세금을 거두라 하면서 이르길

 

 

“지난날에는 백에 하나를 거두어도 여유가 있었는데,

요사이는 그의 두 배를 거두어도 부족하니,

그대는 내외에 명을 내려 절약하게 하시오.”라 하였다.  

 

 

우보 <사옥謝玉>이 나이 67살에 죽었다.

 

청렴하고 검소하였고 능히 현명하여지려 애썼으며, 현명한 재상이었다 일컬어졌다.

 

청하공(淸河公)<곡춘谷瑃>을 우보로 하고,

그의 처 <선宣>씨는 상의 괴임을 받아 시중이 되었다.

 

<계桂>시중은 여승상이 되었다. 
  

 

11월, <소연蕭衍>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청혼하였으나,

상이 들은 바 <소연蕭衍>은 불법은 좋아하나 변덕이 죽 끓는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무신{AD528} 안장(安藏) 10년,

 

춘정월, 을미일 초하루,

상의 용태가 심히 어렵자 <홍紅>황후가 넓적다리의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위(魏)에서는 <보인宝寅>이 <력도원酈道元>을 죽이고 관중에서 칭제하였는데,

 

그의 장수 <후종덕候終德>이 창을 거꾸로 들어 패하였으며

그 의 처 <남양南陽>공주와 어린 아들까지 붙잡혔더니,

후문을 나서서 <만사추노万俟醜奴>에게로 도망하였다.

 

<추노醜奴>는 <보인宝寅>을 태전으로 삼아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런데, <남양南陽>이 몸을 지킬 수 없었더니, <작운雀雲>이 한탄하였다.

 

<력도원(469-527)>은 약 100년전 쓰여진 수경주를 주석한 북위 사람이다. 
  

 

2월 하순, 농사에 부지런하라 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제방을 고치고 물건 운송하는 도랑에 물이 마르지 않게 하였다.

 

군학{郡學}에 명을 내려 선비들을 시험하고 우수한 이들을 올려 보내게 하였으며,

 

이부로 하여금 살펴서 직분을 주게 하였다.  

 

 

<원종原宗>이 <아도我道>를 맞이하여 큰 스승으로 삼았다.  

 

 

<고환高歓>이 <이주영爾朱榮>에게 군병을 이끌고 남하하라고 권유하였더니,

<호胡>태후는 화를 당할까 걱정스러워서 <엄儼> 및 <흘紇>과 밀모하여

<후詡>를 죽이고 <후詡>의 딸을 세웠고,

이에 <이주영爾朱榮>은 <원천목元天穆>에게 말하길

 

 

" 19살짜리 임금으로 안전하겠는가.

 

상서롭지 못한 아이에게 천하를 맡기다니, 삿된 일이오."라 하고는

<자유子攸>를 임금으로 세우고 <호胡>태후와 어린 임금을 하(河)에 빠뜨렸다.

 

<원협元勰(473-508)><文穆皇后 李氏(483-524)> - <원자유元子攸(507-530)

북위 敬宗 孝莊帝 재위 528-529>


  

 

 

4월, <붕萠>공주를 <목陸>태자비로 삼았다.

 

제의 딸 <온溫>공주를 <루사홍婁師弘>의 처로 삼았다.

 

공주의 나이는 16살이었으며, <화득和得>의 동복 여동생이었다. 
  

 

5월, 상이 <진晋>태자궁으로 갔다.

 

그때, 상의 딸 <인양寅陽>공주가 <진晋>태자와 <인성仁成>공주를 낳았더니,

옷을 내려주어 위로하였다.

 

 

 



기유{AD529} 안장(安藏)11년,

 

춘정월, 계축일 초하루, 상이 <홍紅>황후 및 <주朱>귀빈과 함께

수림의 온궁에 머물다가, <이주영爾朱榮>이 <고환高歓>을 죽엿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사흉저謝洶渚>의 잘못이었다.

 

 

대선인 <백상白翔>과 <미전米錢>을 시켜서

<고환高歓>을 추도하는 도장을 열라고 하였다가

잘못 전하여 진 것임을 알고는 파하였다.
  

 

3월, 황산의 동쪽에서 사냥하였다.

 

 

<고환高歓>이 자신의 처제를 보내 찾아와 고하길 아무 일 없이 화를 면하였으며,

<원호元顥>가 쳐들어와 노략하더니만 스스로 임금을 자칭하였으며,

모든 것이 <소연蕭衍>이 부추긴 것이었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동궁과 <홍紅>황후에게 명을 내려서 5부를 순행하게 하였더니,

백성들을 돌아보며 민심을 살피고 부지런히 하여서 아이를 잘 낳은 이들을 포상하고는

윤6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환궁하였다.

 

상은 <홍紅>황후가 아이를 가졌음을 알고는 크게 기뻐하여

종척과 <계桂>·<루婁>씨 두 집안에게 홍원궁(紅院宮)의 모란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대략 상이 <홍紅>황후를 아끼기에 그녀의 훗날의 입장을 위함이었다.

8월, 7일 병진일에 오색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향기가 땅위에 그득하였다.

 

 

이때, <연화淵華>가 <화득和得>의 딸 <선병善屛>을 낳았고,

상은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이를 닦아주었더니,

<연화淵華>는 상의 딸로 삼아서 작위를 봉하여 주길 바랐었고,

상은 가까이에서 섬겼음이 고마워서 모녀를 모두 공주로 봉하였다.

 

<연화淵華>는 예쁘기도 하거니와 단정하였었기에 늘 제의 승은은 입었었다.

 

그런데도 <화득和得>과도 눈이 맞았었기에,

사람들은 누구의 자식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원호元顥>가 임영현(臨頴縣)의 군졸에게 패하여 목이 잘렸더니,

 

<소종蕭綜> 또한 돌아가길 바랐었으나 그러하지 못하였다.  
  

 

9월, 상이 몸소 정예 기병 2만을 이끌어 황산(黃山)의 수곡성(水谷城)을 나가고,

<복福>태자에게도 1만의 군병을 이끌라 명을 하여, 혈성(穴城)을 쳐서 빼앗았다.

 

 

이에 <명농明穠>은 <연모燕謨>와 3만군을 끌고 와서 오곡(五谷)에서 맞싸웠다.

 

패퇴시키고 남녀 2천여 명을 산채로 잡아 돌아왔다.

 

 

<명농明穠>은 금천(金川)에서 패한 이후에

밤낮으로 군병을 훈련하여 보복을 도모하였다.

 

 

<백苩>씨와의 일로 인하여 <사오謝烏>가 찾아와 항복하였다.

 

<연燕>씨와 <백苩>씨가 서로 다투기에, 상이 이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온溫>공주가 <루사홍婁師弘>의 아들 <온홍溫弘>을 낳으니, 상이 옷을 하사했다.

 

 

 

 

 

 

 

경술{AD530} 안장(安藏) 12년,

 

춘정월, 무인일 초하루,

상이 <초椘>후와 황태자 및 <홍紅>황후와 함께 황극전(皇極殿)에서 조례를 받았다. 
  

 

 

2월, <홍紅>황후가 동궁의 아들 <침忱>태자를 낳았다.  

 

<만사추노万俟醜奴>가 관중에 들어가 의지하자,

 

<하발악賀拔岳>이 계속 싸워서 이겨서 <추노醜奴>를 신채로 사로잡고

<소보인蕭宝寅>을 사로잡아서 낙양에 이르렀다.

 

 

<추노醜奴>를 참하고는 <소보인蕭宝寅>은 용서하고 싶었으나,

<왕도습王道習>이 그럴 수는 없다하여 타우서(駝牛署)에서 사사하였다.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상이 이르길

 

 

“<소보인蕭宝寅>은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처의 몸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할 것이다.

<하발악賀拔岳>의 전술은 기록하여서 우리의 군대를 가르치라.”고 하였다.


3월, 위(魏)의 오수전(五銖錢) 사용을 금하였다.

 

 

상이 안장원보(安藏元宝)를 주조하였으나

그 돈이 너무 커서 사용하기가 불편하였더니,

백성들 모두가 <오수전>으로 바꾸어서 사용하였으니, 그 손해가 적지 않았다.  

 

 

동궁의 아들 <평성平成>이 <초椘>황후와 통정하여 딸 <고화苽花>공주를 낳았다.

 

이때 황후의 나이는 60이었다.

 

상이 이르길

 

 

“<희창姬昌>은 13살에 아들 <희발姬發>을 낳았고,

내 아들 또한 그러하니 거의 하늘의 은덕이로다. 얄궂구나.”라 하였다.  

 

상이 동궁에게 명하길 <홍紅>황후와 함께 국정을 살피라 하였다.  

 

상이 우보 <곡춘谷瑃>의 집으로 가서 <곡춘谷瑃>의 아들 <경瓊>을 씻어주었다.

 

 

이전에 <곡춘谷瑃>의 처 옥정원(玉蜻院)비 <선宣>씨가 승은을 입었었는데,

지금 <경瓊>을 낳아서 상의 아들이라 하였다.

 

상은 그 아이의 모습을 살피더니 <곡춘谷瑃>의 모습을 닮은지라,

명을 내려 <곡춘谷瑃>의 아들로 하게 하였다.


9월, <이주영爾朱榮>이 낙양으로 와서 그의 딸이 낳은 아들을 보고자 하였다.

 

 

<자유子攸>가 거짓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며 <이주영爾朱榮>에게 들어오라 하였고,

25일에는 <명광전明光殿>에 복병을 깔아두고는,

<이주영爾朱榮(493-530)>을 안내하여 들어와서 <자유子攸>를 만나게 하였더니,

손에 칼을 든 종자들이 <이주영爾朱榮>을 어지러이 찔러서 죽였고,

<이주영爾朱榮>의 처는 <고환高歓>에게로 도주하였다.

 

사인(使人)이 <자유子攸>에게 그리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10월, 계묘일 초하루, <이주영爾朱榮>의 종제 <이주세융爾朱世隆>이

<불률佛律>을 시켜 <이주영爾朱榮>의 시신을 찾으라 하였으며 복수하겠다고 하였다.

 

<자유子攸>가 <이숙인李叔仁>을 시켜서 <이주세융爾朱世隆>을 토벌하였더니,

<이묘李苗>가 싸우다 패하여 죽었고,

<이주세융爾朱世隆>은 큰 아들에게로 숨어들어가더니

<이주조爾朱兆> 등과 함께 <원엽元曄>을 제위에 세우고는

<원자유元子攸>를 토벌하였다.


12월, 임인일 초하루에

<이주영爾朱榮>의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단곡(丹谷)을 빼앗았으며,

갑진일에는 하(河)를 건너 도읍으로 들어가서 <원자유元子攸>를 붙잡아

영녕사(永寧寺)의 루의 꼭대기에 가두었다.

 

 

<원자유元子攸>의 아들을 죽였더니,

<이주영>의 외손이 비빈들을 더럽히고 능욕하였다.

 

갑인일엔 <원자유元子攸>를 진양(晋陽)으로 옮겼다.

 

 

깁자일에 <원자유元子攸>를 죽였다. 나이 24살이었다.

 

<고환高歓>은 <이주조爾朱兆>와 함께 석고산(石皷山)에서 보병 초병을 죽이고는

형제가 되기로 하고 여섯 진을 통합하였으나

 

<이주조爾朱兆>가 변심할까 겁내어 군병을 나누어 산의 동쪽을 나와서

따라다니며 얻어먹길 청하였더니 <이주조爾朱兆>가 들어주었다.

 

 

 

 

 

 

 


신해{AD531} 안장(安藏) 13년,

 

춘정월, 임신일 초하루, 우두전(牛頭殿)에서 조하를 받았다.

 

황태자에게 명하여 10만병을 이끌고 나가서 개마(盖馬)에 진을 치고

요동(遼東)에서 멀리 있는 <고환高歓>을 도울 대비를 하게 하였다.  

 

<평성平成>이 <덕양德昜>을 데리고 용궁(龍宮)으로 가서 증(烝)하였다.
  

 

2월, 29일에 <이주세융爾朱世隆>이 <원엽元曄>을 폐위시키고 <원공元恭>을 세웠다.

 

이가 절민(節閔)제이다.

 

<이주조爾朱兆>도 자신의 앞날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주세융爾朱世隆>을 치려하였다가 두 사람은 아주 멀어진 사이가 되었다.  

 

<원공元恭>이 파사국(波斯國) 사자(獅子)사신을 풀어주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협객이 그 길을 뒤쫓아 멀리 따라간 뒤에 중도에서 그를 죽였다.

 

이 일로 <추노醜奴>는 년호를 고쳐 신수(神獸)인 사자{獅子}로 하였으니,

<추노醜奴>에게는 이득이 되고 <원공元恭>에게는 손해가 되었다.


3월, 상이 황산으로 가서 복병 상황을 사열하였다.  

 

<고환高歓>이 상주(相州)의 군량을 약탈하여 신도(信都)로 들어가

<융隆>의 등한문(等閒門)이라 이름을 짓고 거두어들였다.

 

<원공元恭>이 <고환高歓>을 발해왕으로 봉하고 입조하라고 명하였다.  

 

<계桂>승상 <춘랑春娘>이 상의 아들을 낳았다.

 

사맹공(師孟公) <계춘랑>이 보령 44살에 죽었더니,

상이 그를 애통히 여기고 황후의 예로 장사하였다.

 

무덤의 겉을 거적으로 하고 있다가

상이 죽거든 그 유골을 상에게 합칠 수 있게 하였다.  


4월, 상이 <강음江陰>공주의 궁으로 찾아갔다가 과로하였더니,

꿈속에서 <계桂>승상을 만나고 몸의 건강이 심히 나빠졌다.

 

명을 내려 산천에 빌었어도 차도가 없었다.  

 

<원종原宗>이 <철부原宗>를 재상으로 삼고, 작위를 올려주어 상대등으로 하였다.  

 

<소연蕭衍>의 아들 <소통蕭統>이

자신의 어미 무덤에 거위를 묻은 일이 걱정이 되어 자살하였다.

 

대략 <소연蕭衍>이 아들을 구박하였음이다.
  

 

5월, 상이 황산의 행궁에서 춘추 55세에 죽었다.

 

우산(牛山)에 장사하였는데 장례한 릉의 이름은 안장릉(安藏陵)이며,

안종화황제(安宗和皇帝)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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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