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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0.08 장수대제기

 


전해오길 제의 휘는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 하고, 영락제의 둘째 아들이다.

 

<평양平陽>후가 꿈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보고나서 낳았다.

 

걸출한 우두머리 같아보였으며 모든 이에게 인자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백성을 아꼈고, 경적과 사서에 통달하였으며 예절을 익혔고,

장수와 병사를 아주 적절하게 통솔하였으며 기이한 지략도 있었다.

 

때가 되어 즉위하니 스물 한 살이었다.


 

장수대제 원년{AD414}{갑인}

 

8월, <토吐>후를 태후로, <천강天罡>을 상태후로,

< 천룡天龍>妃와 <삼산三山>妃를 좌・우후로 삼았고,

태보 <붕련朋連>을 연왕(燕王)으로 삼아 남소(南蘇)를 지키게 하였으며,

<연도 淵鞱>를 태보로, <해성觧猩>을 좌보로, <춘春>태자를 우보로,

<연비淵鞴>를 중외대부로, <서구胥狗>를 주병대가로,

<용덕勇德>을 좌장군으로 삼았다.  

 

 

9월, 대행을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춘春>태자가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상이 <천강天罡>후 및 <토吐>후와 더불어 란궁(鸞宮)에 들어가서

란새{방울새}들에게 먹이를 주어 길렀다.

 

8월 이래로 노란 란새들이 란궁(鸞宮)에 모여들더니 날아가지 않았다.

 

이에 다시금 서도(西都)에 거처하게 되었다.

 

<천강天罡>과 <천룡天龍>은 좌궁에 기거하게 하고,

<토산吐山>과 <삼산三山>은 우궁에 기거하게 하였다.

 

상은, 또한 모후가 생각나면, <마馬>・<호胡> 두 누나를 궁중으로 불러서

아득한 복을 무시로 내렸다.

 

10월, 두 태후와 함께 대행의 릉을 배알하고,

사천(虵川) 벌판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아서 <천룡天龍>후에게 주었다.

 

이날 저녁에 <천룡天龍>후는 승은을 입고 아이가 생겼다.  

 

 

12월, 눈이 다섯 자나 되게 내리자,

상이 <천강天罡>을 좌궁 유황전(乳凰殿)으로 찾아뵙고,

<호태瑚太>공주를 업어주어서, 위로하였다.

 

<천강天罡>이

 

“산골짜기에 눈이 가득한데, 어찌 무덤을 찾으셨습니까?”라 하니,

 

상은

 

“마을에 눈이 가득한데, 어찌 백성을 구휼하고 계십니까?”라 하였고,

 

이에 <천강天罡>은, 고맙다 하면서,

 

“60먹은 늙은 여자는 폐하를 당할 수 없겠소.”라 하였다.

 

 

이때 상태후 <천강> 60세, 태후 <토산> 42세, 장수대제 <거련> 21세,

<천룡> 23세, <삼산> 20세, <춘> 55세, <천을> 44세,

북위 <탁발사> 24세, 동진 <사마덕종> 43세, 백제 <전지> 24세, 신라 <보금> 56세

왜 <인덕> 60세 이다.



 

 


 

장수대제 2년{AD415}을묘,

 

 

정월, <보금宝金>・<전지腆支>・<풍발馮跋> 등이 사신을 보내와서 공물을 바쳤다.

 

상이 진남루(鎮南楼)에서 접견하고,

<춘春>태자에게 명하여 즐겁게 해주고 동명력(東明曆)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상이 <삼산三山>후를 데리고 온탕에 가서 아들 낳기를 빌고 돌아왔다.

 

한빈(汗濱)에서 크게 군사를 검열하였다.  

 

<춘>태자에게 명하여 권농조서를 내리고

적잠사(籍蚕司)를 두어 백성들에게 시범을 보이게 하였다.  

 

 

 

2월, 네 명의 후들과 함께 묘당을 찾아 즉위하였음을 고하고,

나라 안과 맥(㹮)・부여・신라・백제・왜(倭)・가야 등의 나라에까지 크게 사면하였다.  

 

 

 

3월, 북위(魏)의 <탁발사>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보금>이 왜와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7월, 상이, 주유궁(朱留宮) 도장(道場)으로 가서

<춘春>태자와 당면한 정사를 논의하며 이르기를

 

“모(慕){後燕} ・ 초(超) {南燕} ・ 량(凉) {後涼} ・단(檀) {南涼} 모두

음란하고 방종하다가 망하였습니다.”라 하였더니,

 

<춘春>태자가 아뢰길

 

“음란하면 방종하게 되고, 방종하면 빈틈이 있게 되며,

빈틈이 있으면 적의 기습을 불러들입니다.”라 하였다.

 

이 말에 상은 기뻐하며

<춘春>태자비 <천을天乙>에게 채단 50필과 황금 100량을 하사하고는,

 

“짐이 동궁시절부터 지켜본바

경은 정결하시기가 선왕{仙王}의 왕비로서 합당하시었습니다.

나라의 흥망은 종실의 여인들의 마음이 정결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있습니다.”

라 일렀더니,

 

<천을天乙>이 말하기를

 

“첩은 젊을 적부터 남편이신 왕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삿된 마음은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토吐>황후께서도 또한 그러 하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토吐>후를 시험해보세요.”라 하였다.

 

이에 상은

 

“알고 있습니다.”라 답하고는,

 

<토吐>후에게 걸교(乞巧)를 해보이라 명하였더니,

 

<토吐>후는

 

“첩은 재주도 둔하고 본디 천박한데, 걸교(乞巧)해 본들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라 하였다.

 

이에 상은 웃으면서

 

“그대는 실 바느질을 주관하는 아낙임에도 걸교(乞巧)를 해보이지 않으니,

어찌 요염하다 하겠소? <천을天乙>께서 잘 못 본 것이오.”라 하였다.

 

<토吐>후가 승복하자, 상은 <토吐>후를 품에 안고 온탕으로 들어갔다.  

 

<천룡天龍>후가 아들 <장獐>을 낳았다.

 

※ 걸교(乞巧 ); 칠석날 저녁에 부녀자들이 견우와 직녀 두 별에게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하여 달라고 비는 일

 

 

 

10월, 진(秦){後秦}의 <요흥姚興>이

딸 <서평西平>을 위(魏){北魏}의 <탁발사>에게 보냈더니,

위(魏)의 <탁발사>는 후에 예(禮)를 치르기로 하고 맞아들였다.

 

금인(金人)을 만들다가 이루지 못하더니, <서평西平>을 부인으로 삼아서 심히 아꼈다.

 




 

장수대제 3년{AD416}병진,

 

 

4월, <토吐>후가 딸 <직織>을 낳았다.

 

<화덕華德>의 처 <호산好山>을 <장獐>태자 유모로

<화덕華德>을 <장獐>태자 육성대부(育成大夫)로 삼았다.  

 

<보금>이 수레 가득 차 넘치게 물고기를 얻었다 하고 바쳐왔다.

 

그 뿔은 옥 같았으며, 맛은 좋아서 새우 같았다.

 

토함산(吐含山)이 무너지더니, 물이 3장 2척(三丈二尺)이나 솟구쳤다.  

 

<담희談喜>와 <담명談明>을 태후궁의 궁인으로 삼았다.

 

 

 

실성왕 15년(416) 화룡(火龍) 병진

 

3월, 동해(東海) 사람이 큰 물고기(大魚)를 잡았는데 쌍으로 난 뿔이 있었다.

두 대의 큰 수레로 실어서 제(帝)에게 헌상했다.

군신(群臣)들이 상서라 하며 남도(南道)에서 크게 향연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은 상서롭지 않다고 하면서 그를 피하였다.

 

5월, 큰 빗물에 토함산(吐含山)이 무너지고

<대서지大西知>의 능소(陵所)에서 샘물이 세길(三丈)이나 솟구쳤다.

 

제(帝)가 영묘(靈廟)와 성사(聖祠)에 기도하였다.

<남당유고 실성이사금기>

 

 




장수대제 4년{AD417}정사,

 

5월, <눌지訥祇>가 <보금宝金>을 죽이고 자신이 보위에 섰다.

 

정월에, <보금宝金>이 <눌지訥祇>와 <효진曉辰>을 입조하라 해 놓고

변방 장수를 시켜서 이들을 해치우라고 시켰는데,

그 변방 장수가 감히 그들을 해치지 못하니 조정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그 일이 드러나게 되었다.

 

상은 평부(評部)와 빈부(賓部)에 명하여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었다.

 

<눌지訥祇>는 입 다물고 돌아가서 <천성天星>과 공모하여

<보금宝金>을 짐독으로 해치운 것이었다.

 

그 시절 <보금宝金>은 아끼는 여자가 있었고 아들을 낳은 때문이었다.

 

이에 상이 <눌지訥祇>를 다스리려 하였었으나, <춘>태자가 간하여서 그만두었다.

 

<눌지訥祇>는 이미 <천성天星>의 딸 셋을 들여 앉히고서도

<천성天星>과 사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지腆支>가 동북지방의 15세 이상의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는데, 병관좌평 <해구觧丘>가 그 일을 감독하였다.  

 

 

 

8월, <삼산三山>후가 아들 <린獜>을 낳았다.

 

<담윤談允>의 처 <춘풍春風>을 유모로,

<담윤談允>을 <린獜>을 육성대부로 삼았다.  

 

 

윤12월, 하(夏) 왕 <혁연발발>이 장안(長安)을 쳤다.

 

 

 


장수대제 5년{AD418}무오,

 

정월, <눌지訥祇>가 <보해宝海>를 보내 달라 청하여 허락하였다.

 

<마련馬連>이 <보해宝海>와 2녀 1남을 낳고도 <보해宝海>를 따라가지 않았다.

 

상은 부득이 <각언角彦>의 처로 명하였다.  

 

 

2월, 관등(官等)을 고쳤다.

 

삼보(三輔)는 2품으로 금화관을 쓰게 하였고,

외(畏)・형・병・민・곡을 주관하는 2품 하(下)는 은화관을 쓰게 하였고,

신(神)・빈(賓)・약・농・축을 관장하는 3품은 은화관을 쓰게 하였고,

위(衛)・시(施)・공(供)・평(評)・훈(訓)을 관장하는 3품 하(下)는 치화관을 쓰게 하였고, 적(籍)・주(廚)・선(船)・야(冶)・장(匠)・직(織)・주(酒) 7원(七院)을

주관하는 4품은 치화관을 쓰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종전과 같게 하였다.

상이 <춘>태자에게 이르길

 

“선제께서 저에게 이르시길 평생 동안 후를 둘만 두고 살라 하셨는데,

저는 이미 그 것을 지킬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과연 천자의 궁중도리는 어떠한 것입니까?”라 하니,

 

<춘>태자가 아뢰길

 

“천자는, 신하나 백성과 달라서, 널리 후사를 두고 기운을 돋우며,

만민을 신하나 첩으로 둘 수 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이 시중드는 이들을 뽑아서 씀을, 헤아려보니 3천 비접이나 되었는데, 저녁 일에 있어서는 짧게 냄새만 맡았습니다.

주상이 과로하면 조종이 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궁궐의 예법엔 정도가 하나만은 아니어서, 후 이하로는 많으면 칠팔십 명이었고

적어도 삼십 명은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이르길

 

“하나도 두지 않으면 큰 잘못이 되나요?”라 하니,

 

<춘>태자가 아뢰길

 

“특정한 여인에게만 가는 것은 지나친 것이어,

보조하는 이들을 두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라 답하였다.

 

이에 상이

 

“<동명>께서는 세 명의 후를 두셨고, <광명>께서는 일곱 후를 두셨으며,

<대무>께서는 다섯 후를 두셨었습니다.

짐도 이 들 숫자 중에서 택하려 하는데, 어찌함이 좋겠습니까?”라 물었더니,

 

<춘>태자가 답하길

“훌륭한 생각이십니다.”라 하였다.

 

상이 묻기를

 

“보조하는 이는 얼마까지 둘 수 있는 것인가요?”라 하니,

 

<춘>이 아뢰길

 

“ 5후와 7비·16빈으로 하시어서 28궁을 두시면 하늘의 성수에 맞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상은

 

“좋아 보입니다.”라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조종의 법도에 용골은 용골과 교접해야 하며 잡색은 취하지 않는다 하나,

근자엔 다른 의견들도 파다한데, 경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라 하니,

 

<춘>이 답하길

 

“<복희>는 자신의 딸 <화禍>를 후로 삼아서 자식을 스물이나 두었으며,

제(齊)<환桓>공과 진(晉)<문文>공 모두 자매 또는 고모및 조카와 혼인하였으며,

이미 성인들의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옳거니! 짐 또한 골육을 귀하게 할 것입니다.

다섯 후는 용골로 하고, 일곱 비는 네 명의 용골과 세 명의 선골로 하며,

열여섯 빈을 잡색으로 하였으면 합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라 하니,

 

<춘>은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라 하였다.

 

상이 또한 묻기를

 

“조종의 법도가 순사하지 못하게 하고

나이가 젊은  이는 다시금 이어서 총애를 받게 하였는바,

인정으로선 그러할지라도 법도로서는 흠결이 있어 보이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라 하니,

 

<춘>태자가 아뢰길

 

“지존이신 주상님들은 살리시길 즐겨하시며,

천자는 어미도 따지지 않는 것인데, 항차 그 나머지야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라 하였다.

 

상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는 “결정하였습니다.”라 하고는,

5후·7비를 제도로 정하였다.

 

중외대부 <연비淵鞴>에게 그 절차를 정하라 명하였으며,

경총대부 <용경龍莖>은 후비로 합당한 종실의 여인들을 선발하고

림총대부 <강岡>은 외척들 중에서 비빈으로 합당한 여인들을 천거하라 명하였다.  

 

<천룡天龍>후가 딸 <빈牝>을 낳았다.


4월, 상이 손수 후궁 30인을

경총대부와 림총대부가 천거한 여인들 중에서 선택하여 후궁으로 들이고,

궁전과 방을 정하여 주고 각자에 딸리는 관원도 정하여주었다.

 

상이 친히 골랐는데,

착하고 후덕하며 훤칠하고 고상해 보이는 빈들이 많았고, 교태 있고 예쁜이는 적었다.

상이 <춘>태자에게 이르길

 

“사람들에게 있어서 해내기 어려운 것이 극기(克己)라 합니다.

짐은, 나이가 이제 막 장년(壮年)이 되었으니 기운만 믿기 쉬운지라,

나라의 큰일들을 스스로 다스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로지 숙부 세 분만을 믿을 것입니다.

짐이 잘못을 범하거든 기탄없이 직간하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숙부의 처 <천을天乙>과 <서구胥狗>의 처 <천룡天龍> 모두

천거된 이들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그들 스스로가 감당하길 원한 것이지, 감히 내가 뽑아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접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면, 진인들이야 방도를 구하여 떨어내겠지만,

애써보아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욕정도 있는 것 아닌가요?”라 하였다.

 

이에 <춘>태자가 아뢰길

 

“신과 <서구胥狗>는 폐하의 고굉지신입니다. 감히 이바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실 그리하여야 솔선수범하는 것이 되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그 말이 가상하여, 이윽고 두 비를 후로 삼았다.

태후가 아들 <담태談太>를 낳았다.

 

<용덕龍德>의 처 <호련胡連>을 유모, <용덕龍德>을 육성대부로 삼았다.

 

 

10월, <눌지>가 <보해>를 보내어 들어와 공물을 바치면서 말하길,

<미해> 또한 왜에서 돌아왔으며, 신라 또한 대풍이 들었다고 하였다.

 

 


장수대제 6년{AD419}기미,

 

정월, <서구>의 처 <천룡>이 아들 <호태好太>를 낳았기에,

<연긍淵兢>의 처 <부운芙雲>을 전례와 같이 유모로 삼아주었다.

 

후를 선발하던 날, 상은 <천룡天龍>이 나이가 가장 높아서 맨 먼저 맞이하였었다.

 

상이 이르길

 

“조카가 나이가 어린데도 감히 대고모를 이렇듯 수고하시게 하였습니다.”

라 말하였더니,

 

<천룡>이 아뢰길

 

“첩에겐 광영이 지극한 일이었습니다.

좋고 큰 일이 생겼으면 싶었기에 이름을 <호태好太>라고 지었습니다.”라 하였다.  

 

무술일에 살별이 태미좌로 흘렀다.

 

 

4월, <눌지>는 물이 솟아나오기에 우곡성(牛谷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왜가 아들을 학문하러 보내왔기에 이불란사(伊弗蘭寺)에 머물게 하였다.  

 

상이 원전(元殿)으로 가서 태후를 찾아뵙고는 <담태談太>를 안아주고 위로하였더니,

 

태후가 아뢰길

 

“첩이 듣기엔, 선도와 불도 모두 정도가 아닌 듯합니다.

유도(儒道)가 충{忠}・효{孝}・정{貞}・신{信}을 가르침으로 하고 있다는데,

과연 그런 가요?”라 하였더니,

 

상은

 

“유도(儒道)는 행하여 지키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태후가 아뢰길

 

“첩은, 어릴 적부터 선도에 젖어 있으면서도,

다섯 조정을 섬기길 충성으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늘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는지, 오래도록 질병도 없었으며,

자식 많이 낳는 경사도 감당하였었으니, 기뻐서 감읍함이 그치지 않았었습니다.

바로 된 도리가 있다면, 바라건대 함께 살폈으면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5부에 명하여 유도가 높은 자를 천거하게 하였더니,

여덟 사람이 들어왔고, 그들 모두는 높은 모자를 쓰고 넓은 허리띠를 하고 있었으며

위엄 있는 모습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상이 태후와 함께 술을 따르고 마시라 권하였다.

 

그들의 훌륭한 말을 듣자, 태후가 즐거워하더니,

 

“이런 훌륭한 도리가 있었음을 지금 처음 듣습니다.

원컨대 스승이 되어 도리를 전하여 준다면, 작위와 봉록을 얹어주겠소.”라 하였다.

 

그들 모두는 받지 않고 가버렸다.

 

황산(黃山) 사람 <왕문王文>의 행실이 고매하다고 들었기에, 불렀더니, 오지 않았다.


9월, 상이, <강岡>태자비 <가련加連>과 함께 황산에서 7일간 도장을 열었으며,

<평양平陽>후 제사를 올렸다.

 

선가와 석가에 행실이 높은 이를 청하였으나,<왕문王文>은 또 오지 않았다.

 

이윽고 상이, 태후와 함께, 친히 그를 찾았다.

 

<왕문王文>은, 자신의 처 <주侏>에게 술을 올리게 하고, 축수하며 말하길

 

“흠이 있는 것은 오래 가고, 좋은 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산에서 나와 주길 청하였으나,

<왕문王文>은 허공에 뜬 구름을 가리키며 소리 없이 웃기만 하였다.

 

태후가 극기하는 도리를 물었더니,

 

<왕문>은

 

“자연과 어우러져서 넉넉하면 될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남까지 떨쳐버릴 필요는 없습니다.”라 답하였다.

 

이에 상은 유별나게도 즐거워하더니만,

 

“국화인가 사람인가, 사람인가 국화인가.

뜰에 가득한 노란 국화 속에 사람이 함께 있으니, 모두에서 향내가 나는구나.”

라 하였다.

 

상은 즐거움에 취하여 아연한 채로 돌아왔다.

 

11월, 초하루 정해 일에 일식이 있었다.

 

<춘>태자의 처 <천을>이 아들 <갑鉀>태자를 낳았다.

 

<용경龍莖>의 처 <화환華丸>을 전례에 따라 유모로 삼았다.

 

빈으로 뽑힌 <담희談喜>・<담명談明>・<두련斗蓮>・<초련楚連>이

순차로 원전(元殿)에서 저녁을 감당하고,

<연화椽花>・<면완免完>・<해황觧凰>・<백경白莖> 등은

선전(善殿)에서 저녁을 감당하였다.  

 

<토산吐山>후가 아들 <원元>을 낳았다.

 

<해蟹>의 처 <춘란春鸞>을 전례에 따라 유모로 삼았다.

 

 



장수대제 7년{AD420}갑인,

 

2월, 상이 친히 땅을 갈고, 태후가 <토吐>후와 함께 친히 누에치기를 하였다.  

 

3월, 태후가 사흘간 신선이 되는 방도를 구하는 도장을 열었더니,

 

상이 태후께 이르길

 

“진(秦) 시황(始皇)과 한(漢) 무제(武帝)> 모두가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음식 먹기를 줄이고 약을 복용하면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태후가 웃으며 말하길

 

“첩은 춘기가 왕성하고 마음도 상긋하며 병도 없는데,

무슨 소용으로 약을 먹겠습니까? 구하고자 하는 것은 진기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진기 또한 있을 곳이 자기의 몸 아니든가요?”라 하였다.  

 

 

 

3월, <전지腆支>가 죽고 <구이신久爾辛>이 섰다.

 

<연식淵息>을 보내서 조문하였다.  

 

<화덕華德>의 처 <호산好山>이 딸 <람藍>을 낳았다. 보비(補妃)였다.  

 

 

 

4월, 5부(五部)에 4학(四學)을 세웠다.

 

교학(敎學)에서는 선(仙)・불(佛)・유(儒)를 가르치고,

군학(軍學)에서는 기사(騎射)와 용병(用兵)을 가르치고,

예학(藝學)에서는 역(曆)・성(星)・수(数)・의(医)를 가르치고,

정학(政學)에서는 사(史)・변(辯)・농(農)・공(工)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기원(技院)을 세워서,

백성들 모두가 기술 한 가지씩을 배워서 가내에서 물려지도록 하였다.

상이 다섯 후와 비빈들과 함께 온갖 꽃이 붉게 핀 동산에서 연회를 열었다.

 

가무에 능하거나 예쁜 공경들의 처와 딸들 역시 많이 모였다.

 

상 또한 태후와 함께 친히 장구 쳐서 비・빈인 여인들의 흥을 돋우었더니,

아직 밤을 함께 하지 못한 비・빈들은 재주를 뽐내고 교태를 겨루었다.

 

날이 저물어 파하자, 여러 빈들이 명을 기다렸는데,

상은 <마련馬連>을 품에 안고 침소에 들었다.

 

이에, <마련馬連>은

 

“어찌 예쁜이들을 마다하시고 첩을 취하셨는지요?”라 물었다.

 

상은 웃으면서

 

“누님이 모후를 닮은지라 아끼지 않을 수 없었소.”라 하고는,

 

몸을 끌어안고 얘기하다가 새벽이 되었고, 끝내 합환하기 전에 날이 밝았다.

 

상이 갑자기 일어나니,

 

<마연馬連>이 갈구하여 아뢰길

 

“아직 씨를 받지 못하였사온데, 어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사옵니까?”라 하였고,

 

이에 상이

 

“누님은 무얼 그리 급하게 생각하시오. 내일은 끝없이 많잖소!”라 하였더니,

 

<마련馬連>은 눈물 흘리며 나갔다.

 

상이 돌아보며 삼가고 욕정을 다스림이 이러하였더니,

궁인들은 왕왕 모두가 그래야 하듯이 스스로 상심하였으며,

궁 안에서는

“ 무량수불이 물보다도 더 덤덤하니,

아리따운 꾀꼬리와 요염한 제비들은 스스로를 업신여기어 눈물만 흘린다네.”

라는 노래가 돌았다.


5월, <풍발馮跋>이 인삼 100근, 호피 20장, 면포 50필을 바쳐왔다.

 

은 목화씨가 필요하다고 명하였다.

 

 

7월, 위(魏)의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는

연(燕)을 토벌하여 그 땅을 나누어 갖자고 의논하였다.

 

이에 상은

 

“ 연(燕)과 위(魏) 모두 선비(鮮卑)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함인데,

 어찌 서로를 토벌하려 하는가?

<하란賀蘭>이 평성(平城)에서 벗게 하여준다면, 그 일도 함께 해볼 만하겠소.”

라 하였다.

 

사신은, 입 다문 채 한참을 있더니만,

 

“나이 드신 후께서는 몸이 쇠하시어 폐하를 만나 뵐 수 없으시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상은 웃으며 이르길

 

“그대는 농담 한 마디에 무얼 그리 긴장하시오?”라 하였다.  

 

상이, <유유劉裕>가 진(晋)을 찬탈하였음을 듣고는,

 

<춘>태자에게 이르길

 

“<우금牛金>은 음흉하고 더러운 인간이지만,

100여년 된 진(晋)을 훔친 것을 보면, <마의원馬懿遠>보다는 현명해보입니다.”

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아뢰길

 

“<여불위呂不韋>・<이원李園>・<동현董賢>・<왕망王莽> 등은

모두 음흉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공(功)을 상주(上奏)하여

하늘을 가리고 화{禍}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사한 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인군(人君) 된 자는 마땅히 그것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정 중에서도 그러한 예가 있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었습니다.”라 하였다.  

 

신라는 가뭄이 들어 굶주리더니만 많은 백성들이 자식을 팔았다.

 

 

 



장수대제 8년{AD421}신유,

 

정월, 상이 원전(元殿)으로 태후를 찾아뵈었다.  

 

 

2월, <춘>태자가 서하(西河)로 가서 병사를 훈련하였다.  

 

가락(加洛)의 <취희吹希>가 사자를 보내와 즉위하였음을 고하였다.  

 

 

4월, 위(魏)의 <탁발사拓跋嗣>가 <하란賀蘭>의 딸 <탁발拓跋>씨를 바쳐왔다.

 

<경鯨>태자를 시켜 선사(仙師) <절우折雨>와 <봉의封蟻>를 데리고 가서

<하란賀蘭>을 답방하도록 하였다.

 

<하란賀蘭>은 해대(觧帶)할 의향이 있는 것 같았으며,

해막(海漠)에서 제와 만나기를 바랐다.

 

이에 상이 허락하고자 하였다.

 

<춘>태자가 말렸더니,

 

상은

 

“ 주(周) <목穆>왕도 단기로 가서 곤륜(崑崙)에서 <왕모王母>를 만났소.

이것에 비하면 해막(海漠)>은 바로 문 앞인 것입니다.

8월에 만나자고 약속하시오.”라 하였다.

 

군신들은 위험하다 하였고, 상 혼자서만 느긋하였다.  

 

 

5월, <서구>가 3만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천서(川西)에서 크게 사열하고는,

거란 12부락과 해(奚) 5부락에게 요구하여 그들의 우마와 군정을 징발하였다.

 

<서구>를 양왕(梁王) ・진북대장군으로 봉하고, <화덕>을 호위장군으로 봉하였다.


8월, 상이 <화덕>과 함께 개마에서 구려(勾麗)로 들어가

<하란賀蘭>을 월해(月海)에서 만나고 돌아왔다.

 

<춘>태자에게 이르길

 

“<탁발사>가 마음에 병이 있어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오.

<하란>과 표리를 이룬다면 정벌할 수 있을 것 같았소.”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아뢰길

 

“그렇지 않습니다. <탁발사>는 비록 쾌차하지 못하여도,

그의 아들 <탁발초>가 치욕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색두(索頭)는 족속 아끼기를 명확히 하는지라 멸망하지 않아왔으니,

섣불리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빼앗았다 하여도

밖으로부터 많은 적을 마주해야 할 것이니 지키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신라와 백제 그리고 <풍발>도 면전에서는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따르지 않으니,

어느 날에 변고가 생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밖으로 골칫거리를 만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며,

안에서도 그런 틈을 주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정경도 말하지 않습니까?

멀리 있는 자와는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자는 쳐야 하며,

붙어있는 이들은 떼어놓고 떨어진 자들과는 가까이 지내야 하며,

잘 지키고 나서 정벌하고 잘 타일러서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동명>께서 정벌하여 얻으신 것을 <광명>께서는 지켜내신 것입니다.

폐하 역시 응당 선제께서 이루신 땅을 지켜내시고,

남방을 소화하신 후에, 서쪽으로 가심이 옳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숙부의 말씀이 옳으십니다.”라 하고는

 

일어나 <천을>전으로 가서 <춘양春羊>을 품에 안고 수랏상을 대하며,

 

이르기를

 

“나는 여동생 하나를 그대의 지아비에게 주고 싶은데, 누가 좋겠소?”라 물었더니,

 

<천을>이 아뢰길

 

“그이는 곡식도 멀리하는데, 무얼 더 주시려 하십니까?”라 답하였다.

 

이에 상은 화를 내며 이르길

 

“당신은 내 처가 되었는데도 옛 남편을 받들며 투기하는 것이오?”라 하고는

 

<두련斗蓮>을 <춘>태자에게 비로 주었으며, 즉시 명하여 합근하게 하였다.  

 

 

9월, 원전(元殿)으로 가서, 국화꽃을 감상하고 퉁소와 거문고 소리를 들었으며,

<왕문王文>・<주희朱羲>・<정몽鄭蒙> 등에게

대부의 작위와 년곡과 채단을 하사하였다.

 

이들 모두는 유사{儒士}들이었다.

 

10월, 상이, <춘>태자와 함께, 란궁의 남당에 앉아 국사를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길

 

“지키는 방도로는 응당 부국강병을 위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계책은 장차 어찌 내놓으시겠습니까?”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상께서는 근면하시니 부국을 이루실 것이며, 용감하시니 강국도 될 것이고,

아직 검소하지 않으셨다면 모으면 되실 것이고, 의로우시니 충성이 있을 것입니다.”

라 답하였다.

 

상은 얼굴이 싱글벙글하여져서, 이르길

 

“숙부의 말씀이 맞습니다.”라 하였다.

 

이런 전차로 <천을>에게 명하여 술을 권하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 딸들이 모두 어려서 누이동생을 경에게 처로 드렸습니다.

<천을>보다는 못할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아뢰길

 

“<천을>후는 예쁘긴 하나 약간 밝히는 정도였으며,

<두련>은 부인의 도리는 잘 지키지만 전혀 밝히질 않습니다.”라 답하였다.

 

이에 <천을>이 <춘>태자에게 말하길

 

“내가 당신의 젊은 시절의 처였을 땐 당신에게 교태를 부렸었지요.

지금 당신은 이미 늙으셨는데도,

<두련>이 힘들여 확실히 당신을 섬기는 것은 상의 명이 무서워서 이지,

어찌 당신에게 교태를 부릴 마음이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 소리에 상과 <춘>태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를 파하였다.

<마련>이 딸을 낳았다.

 

상이 찾아가서 물로 닦아주며

 

“너의 어미는 울기를 잘 하였으니, 이름을 <읍泣>이라 하면 되겠다.”라 하였더니,

 

<마>비가 상을 툭 치면서 말하길

 

“당신이 어찌 저를 가지고 농을 하십니까?

저는 운수가 기구하여 남편과 어긋나서 이런 저런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당신의 딸을 낳았으니, 가련하지 않습니까?

이 딸아이는 복을 받지 못하여서는 아니 되옵니다.”라 하고는 눈물 흘렸다.

 

상은 비를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주며 위안하여 이르길

 

“모후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어찌 그대를 버릴 수 있겠소.

천하가 그대를 섬길 것이며, 모두가 그리하게 할 것이오.”라 하였더니,

 

<마>비는 비로소 즐거워하면서, 자기의 딸 <보양宝昜>을 시켜 잠자리를 펴게 하였다.

 

이때 나이 열다섯이었고, <하夏>태자의 딸이었다.

 

<마련>은 나이 열넷에 <하夏>태자의 비가 되어서

아들 <하양夏陽>과 딸 <보양宝昜>을 낳았는데,

<하夏>태자가 해산(海山)을 유랑하며 돌아오지 않았기에

<보해>의 처가 되어 신라로 따라갔었다.

 

<보금>이 억지로 상통하고 후궁으로 들이려 하매 <천성>과 서로 다투었고,

다시금 <보해>에게 돌아갔었다가,

신라에서 돌아와서는 <각언角彦>의 처가 되어 아들 <호언胡彦>을 낳았었다.

 

상이 궁내의 제도를 정하자,

<마련>은 자원하여 승은을 입고자 하였으나,

상 역시 그녀가 너무나도 <평양>을 닮아서 총애하기는 보통과는 남달랐었으나

동침해주지는 않았더니,

<마련>은 자신이 예쁘지 않아서 승은을 입지 못한다고 여기에

매일 눈물짓고 살았었고, 승은을 입고 나서도 또한 흡족함에 울었다.

 

그리하여 읍(泣)공주라 부르게 되었었다.  

 

 

12월, 상이, 태후와 함께, 란궁에서 종실들과 외척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춘>태자를 제왕(齊王)으로 봉하였고,

<두련>을 제왕(齊王)>의 비로 삼아서 적복을 하사하였다.  

 

<왕문>을 주빈대부로 삼았다.

 

 

 

 


장수대제 9년{AD422}임술,

 

 

정월, 연왕(燕王) <붕련朋連>이 입조하였다.

 

상이 술을 내리고 위로하며 이르길

 

“할아버지 왕께서는 노고가 많으셨습니다.”라 하였더니,

 

<붕련>이 아뢰길

 

“신은 나이가 일흔 둘이오나 지저분한 것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살기를 바라왔고,

자못 오로지 바라기는 심신이 지칠 만큼 열심히 일하다가 죽기를 원합니다.”라 하였다.

 

상이 <담희>에게 명하여 잠자리를 깔아드리라 하였더니,

 

< 붕련>은 물리치면서 아뢰길

 

“신은 색을 좀 즐겼더니, 지금은 좀 몸이 이지러졌습니다.

감히 명을 받들 수 없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나이 70에 아들을 만들 수 없음은 우리의 가풍이 아닙니다.”라 하면서

 

<하모霞帽>에게 시중들라 명하였더니,

 

<하모>가 <붕련>에게 말하길

 

“늙은 적은 음흉하여 이 쇠한 여인도 해치고 있으니,

어찌 당신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붕련>은 빙긋이 웃으면서

 

“천자의 명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무슨 말이 많소?”라 하고는

 

<담희> 및 <하모>와 함께 연 7일을 묵더니만, 두 빈 모두는 아이가 생겼다.

 

이에 상은, 크게 기뻐하여 <담희>와 <하모>에게 채단을 하사하며,

 

이르길

 

“연왕께서 이리도 건장하시니 나는 걱정이 없음입니다.”라 하고는,

 

<담희>와 <하모>에게 <붕련>을 따라서 남소로 가라 명하였다.  

 

<초련楚連>이 아들 <초椘>를 낳았고,< 해황觧凰>이 아들 <해구觧狗>를 낳았다.

 

이에 상은 <연악淵岳>을 <초椘>대부로,< 해경 觧庚>을 <해구觧狗>대부로 삼고,

각각의 처는 유모가 되게 하였다.

<하란>이 사신을 보내 불사약을 바쳐왔기에,

 

상이 웃으며 말하길

 

“내 처의 정성이 가득함이다.”라 하였더니,

 

<천룡>후가 화를 내며 말하길

 

“당신이 개 같은 <하란>이를 그리도 좋아하시니,

우리들은 치욕스럽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 또한 노하여 이르길

 

“나는 그대를 가장 아껴왔고 또한 자주 방으로도 찾아갔었는데,

그대는 오히려 나를 거스르고 있음이오.”라 하였다.

 

태후가 사과하며 아뢰길

 

“내 <천룡> 이것이 나이가 젊어서 총애만 믿고 이러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용서하여 주세요.”라 하였다.

 

상이 마침내 <천룡>을 끌어안고 사과하였더니,

 

태후가 장막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오며 아뢰길

 

“<천룡> 이것이 지난밤 꿈속에서 똬리 튼 용을 보았다 합니다.

폐하께서는 이 아이의 거소를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에 <천룡>후와 하루 종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기침하지 않았다.

 

다음날엔 태후 및 <천룡>과 온탕으로 가더니 닷새가 지나서 돌아왔고,

또 다시 리택(鯉宅)의 아장(鵞場)에 갔다.

 

 

2월, 상이, <천룡>후와 함께, 친히 땅을 일구고,

나라 안의 나이 든 농부 50인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4학도 순시하였다.  

 

평양성을 고쳐쌓고 궁실도 수리하였다.  

 

보후(補后) <천룡>이 <양태梁太>를 낳았다.


4월, 위(魏)가 <경鲸>태자를 천사(天師)로 삼고 도장을 열었으며,

사신을 보내서 자기들의 선대에 대하여 물었다.

 

<탁발십익건>과 <탁발규>시절 동안엔 대략 꾸려가진 바 있었으나,

난리로 인하여 또다시 잃은 것이었다.

 

애초에, <섭신涉臣>은 딸 <고두臯頭>를 <을두지乙豆智>에게 처로 주었으며,

나중에 <고두臯頭>가 낳은 딸 <을>을 증하여 <섭득涉得>을 낳았다.

 

<섭득涉得>이 <사만射滿>을 낳았고, <사만射滿>이 <응묵應默>을 낳았다.

 

<응묵應默>은 <두건梪健>을 낳았으며,

신명제의 딸 <적荻>공주를 취하여 <적인荻仁>을 낳았다.

 

<적인荻仁>은 <두산梪山>을 낳았고,

<두산梪山>은 태조의 딸 <비裶>공주를 취하여 <두진梪真>을 낳았으며,

<두진梪真>은 <섭인涉仁>을 낳았다.

 

<섭인涉仁>은 <섭진涉真>을 낳았고,< 섭진涉真>은 <응록應鹿>을 낳았으며,

<응록應鹿>은 <이록伊鹿肥비>를 낳았다.

 

<이록비伊鹿肥>는 <노율奴律>을 낳았고,

<노율奴律>은 <의이倚夷>와 <의로倚盧>를 낳았다.

 

<이록비伊鹿肥>는 또 중천의 딸 <운雲>공주를 취하여 <실록관悉祿官>을 낳았고,

<노율奴律>의 처와의 사이에서는 <불弗>을 낳았다.

 

<불弗>은 <울률鬱律>을 낳았고,<울률鬱律>은 <건犍>을 낳았으며,

<건犍>은 <식寔>을 낳았고, <식寔>이 <규珪>를 낳았던 것이다.

 

<섭신>이 귀화한 이래 조정의 은혜를 받아왔는데,

한 자리에서 만나면 서열로는 백제의 다음이었고 신라와는 동등하였다.

 

세세토록 장인과 사위의 사이로 있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섭득>시절부터 이미 선사를 받들어오더니,

지금에 와서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 참고 <탁발사拓跋嗣의 가계도>

 

섭신(BC50?-40?)(??) - 고두(을두지BC34-40) - 을(BC14?- )(섭신) - 섭득(?-71) - 

사만(98년 자몽왕) - 응묵(?-112) - 두건(?-154)(적) -  적인 - 두산(?-165)(비) -

두진(?-180) - 섭인(?-217) - 섭진(?-236) - 응록(?-257) - 이록비(275년 색두왕) -

탁발노율 - 탁발의이, 탁발의로, 탁발실록관, 탁발불 - 탁발을률(?-321) -

탁발십익건(? -376) - 탁발식(?- 371) - 탁발규(371-408)<북위 재위 386-408> -

탁발사(391-423)<북위 재위 409- 423> - 탁발도(408-452)<북위 재위 424-451>

 

 

 

5월, <유유劉裕>{宋 高祖}가 죽자,

남쪽 사람들이 찾아와서 항복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명을 내려서 모두에게 집을 주고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

 

<탁발사>는 아들 <탁발도>를 시켜 감국하게 하였다.

 

 

 


장수대제 10년{AD423}계해,

 

4월, <눌지>는 남당에 노인들을 모시어 그의 처 <효진>과 함께 술을 따라 권하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는 크게 즐거워하였다.  

 

 

7월, 나라 안팎의 유학하는 이들을 초치하여 <효경>과 천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11월, <해蟹>태자를 위(魏)로 보내서 도장을 참관케 하였다.

 

 


 

장수대제 11년{AD424}갑자,

 

정월, 온탕에 갔다.

 

이 시절 온천은 아홉 곳이 있었다.

 

북도(北都)에는 동쪽 온천과 서쪽 온천이,

중천(中川)의 수림(獣林)에는 수림(獣林) 온천이,

동도(東都)에는 온천과 냉천이,

한남(汗南)에도 두 곳의 온천이, 구다(勾茶)에도 두 곳의 온천이 있었다.  

 

위(魏)에서는 <탁발도>가 보위에 섰다.  

 

 

2월, <눌지>가 래조하여 7일간 연회를 열었다. 

 

 

 

눌지왕 8년(424) 수서(水鼠) 갑자

 

2월. <진사進思>와 <총덕寵德>을 고구려에 보내어

미녀 <달개達開>와 <보민宝珉>을 바쳤다.

두 여자는 모두 사벌(沙伐)에서 뽑은 채녀(采女)였다.

려주(麗主) 거련(巨連)이 호색하여 영락(永樂)의 희첩들을 남김없이 취하고는

교오(驕傲)하게도 우리에게 종녀(宗女)를 요구하므로

왕이 비사(卑辭)로써 왕의 누이(妹)라 한 것이다.

거련(巨連)은 크게 기뻐하며 좋은 말과 보검(宝劔)으로 그에 보답하였다.

이에 양국이 다시 서로 화친하였다.

<남당유고 눌지천왕기> 


   

 

9월, 대풍이 들어서 서하(西河)에서 부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위(魏)와 유연(柔然)이 서로 싸웠다.  

 

이해에 패엽전(貝葉錢)을 주조하여 유통되게 하였다.

 

 

 

 


장수대제 12년{AD425}을축,

 

정월, 위(魏)가 <을필乙苾>과 <최원崔元>을 시켜서 입조하고 토물을 헌상하였다.  

 

 

3월, 서하(西河)로 가서 크게 사열하였다.

 

상이 서하를 지키는 수비 장수 <목언穆彦>에게

 

“그대가 서하를 지켜온 이래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눌러 살기를 원하는 이가 세 배로 되었는데, 어찌 다스린 것이오.”라 물으니,

 

<목언>은

 

“신은 본래 학문과 기술을 배운 것이 없어 남들 같이 총명하지도 못하옵니다.

따라서 재간도 없고 단지 정성으로 다스리면서 분발하여 먹는 것을 잊었더니

그리 되었습니다.”라 답하였다.

 

이에 상은 머리를 끄덕이며 감탄하여 이르길

 

“정성이라! 옛적의 <동명>성인조차 <마려>에게 짐승 기르기를 물으셨더니,

<마려>가 대답하기를

‘정성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고, 정성을 다하고 나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었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소.

병법가는 병법을 속임수라 하지만,

짐은 군병 움직이길 역시 정성으로 하였더니 이리 되었소.

어찌 속임수라고 말할 수 있겠소.”라 하였다.

 

이에 <춘>태자는

 

“성스러운 말씀이십니다.”라 하고는 홀(笏)에다가 그 말을 기록하였다.  

 

길을 따라 늘어선 아름드리 되는 나무는

저절로 죽어서 썩어질 때까지 뽑거나 자르지 말라고 명하였다.

 

<동명>시절엔 나무가 죽어서 썩어야 진을 새로이 하였었다.

 

인구가 점차로 번성하면 나무들이 아름드리가 되어지길 기대할 수 없게 되겠기에,

이런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5월, 하(夏) 주 <혁연발발>이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는데 얼마 후에 죽었다.  

 

보후 <천룡>이 딸 <공笻>을 낳았다. <숙태叔太>라고도 하였다.

 

 

 


장수대제 14년{AD427}정묘,

 

2월, 평양의 새 궁으로 이거하였다.

 

궁전과 관사의 규모의 웅장하기가 나라가 있어 온 이래로 처음 있는 것이었다.

 

상이 돌아 본 후에 좌우들에게 이르길

 

“옛날 우리 <동명>께서는 띠 풀 지붕에 사시면서도 대업을 잘도 이루셨소.

짐은 이렇게 금으로 지은 궁전에 머물기가 마음이 개운하지 않소.

장차 <동명>께 어떻게 보답한단 말이오.

그대 백료들은 각자가 가진 재주와 성심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어서

<동명>의 나라를 빛내주어야 할 것이오.”라 하였더니,

군신들이 엎드려 절하였다.  

 

 

12월, <구이신久爾辛>이 죽어서 그의 장자 <비유毗有>가 섰는데,

미모인데다 구변도 있었다.

 

 

 


장수대제 15년{AD428}무진,

 

3월, 태후와 함께 수림으로 가서는 온탕으로 거둥하여,

<천원天原>공의 자녀들 및 <해발觧發>의 자녀들과

<소수림> 및 <국양>의 자녀인 왕들과 공주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시일로는 태후와 <소수림>이 혼인한 날이었다.  

 

<비유>가, 나라를 순시하며 백성을 진휼하고,

왜의 사신 50명과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는 왜의 딸을 맞아들였다 한다.  

 

위(魏)가 <혁연발발>의 아들 <창昌>을 사로잡았다.  

 

오(吳) 땅 사람 <사만의謝萬義>가 찾아와 입조하였기에,

주빈대부 <왕문王文>을 시켜 접대하게 하였다.  

 

 

7월,< 서구胥狗>궁으로 가서 <서구胥狗>의 자녀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서구>의 비 <천룡>은 나이가 들더니 1년이 지나도록 아들 낳을 가망이 없자

청하여 보후자리를 물러났기에, 그를 위로함이었다.

 

<천룡>은 태후와는 동복 자매간인데, 몸가짐을 정숙하고 무겁게 하였기에,

황마년{418년} 개궁(改宮)시절에 보황후로 뽑히어서 태자 둘을 낳았으나,

경도가 쇠하여 물러나 돌아왔었고, <각언>의 처 <마련>이 보황후가 되었었다.  

 

<해蟹>태자를 중외대부로 삼았다.

 

 

 


장수대제 16년{AD429}기사,

 

정월, 상이 졸본으로 가서,

동명성황(東明聖皇)을 추모대제(芻牟大帝)로,

유리명황(琉璃明皇)을 광명대제(光明大帝)로,

주류신황(朱留神皇)을 대무신제(大武神帝)로,

국조선황(國祖仙皇)을 신명선제(神明仙帝)로,

태조상황(太祖上皇)을 태조황제(太祖皇帝)로 존호를 높였다.  

 

 

3월, 상이 <우신于慎>의 무덤에 갔다가,

<우신于慎>의 처 <음陰>씨를 맞아들여 궁인으로 삼았다.  

 

 

4월, 위(魏)가 <최호崔浩>로 하여금 유연(柔然)을 치게하였다.  

 

<눌지>는 유실된 제방을 쌓았는데, 호안의 길이가 2,710보였다.  

 

송(宋)의 사신이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는 백제로 갔다.  

 

 

10월, <비유>가 <해수觧須>를 상좌평으로 삼았다. <여신餘信>이 죽었다.

 

 

 


장수대제 17년{AD430}경오,

 

9월, <풍발馮跋>이 죽었다.

 

동생인 <풍홍馮弘>이 보위에 오르고,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10월, 연왕 <붕련朋連>이 나이 80에 죽었다.

 

<붕련>의 아들 <다련多連>을 연왕에 세습하여 봉하고 남소를 지키게 하였다.

 

<다련多連>의 처 <춘란春鸞>은, <춘>태자의 딸인데,

그 어미인 <천을>을 따라 궁중을 출입하더니만 상의 총애를 자못 받았다.

 

<다련>은, 용력이 있고 기사에도 능하였으며,

자신의 부친을 따라 남소를 18년이나 지켰고, 지키는 방략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보임된 것이었다.  

 

<우근于勤>의 처 <음陰>씨가 <음陰>공주를 낳아서 바쳤다.

 

 

 


장수대제 18년{AD431}신미,

 

2월, <담명談明>이 딸 <명진明真>을 낳았다.  

 

 

 

4월, 산궁(山宮)에 갔다.  

 

왜가 신라의 동쪽을 칩입하여 명활성을 포위하였었으나, 아무런 공도 없이 물러갔다.  

 

 

 

8월, 바야흐로 월가회를 열었다.  

 

박사 <호견胡筧> 등을 불러서 춘추와 사기를 강설하도록 하였더니 상례화 되었다.  

 

 

10월, 고국원에서 대제를 지냈다.

 

 

 


장수대제 19년{AD432}임신,

 

3월, 신라에서는 백성들이 곡물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먹기에,

조{좁쌀} 2천 곡(斛){10斗,섬}을 하사했다.  

 

 

4월, <왕문王文>을 주형대가로, <호견胡筧>을 대평자로,

<음시陰時>를 채공사로 삼았다.

 

<음시陰時>는 <우근于勤>의 처의 아버지였다.

 

<우근于勤>의 처는 승은을 입고 딸을 낳았으며,

<음시陰時> 또한 맑고 깔끔한 시를 짓고 사념 없는 얘기에 능한 유자(儒者)였다.

 

상은, 한문자로 쓰인 글귀와 가사를 즐겨 들었으며, 멋진 풍류를 하였고,

혹은 이 무리들과 함께 바둑을 두거나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천룡>과 <삼산> 두 후를 시켜서 이들을 대접하였으며, 세속 밖의 친구로 여겼다.  

 

국화와 모란 및 흰 연꽃을 어원과 궁전 뜰에 심고 감상하였다.

 

 

 

 

 


장수 원년{AD433}계유,

 

정월, <춘>태자에게 <왕문王文>·<주희朱羲>·<정몽鄭蒙>·<사만의謝萬義>·

<호견胡筧>·<음시陰時> 등과 함께 진(晉)의 율령을 참조하여

새로운 법령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날씨가 가물어, 상이 두 후와 함께 서하로 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큰 비가 내렸고 백성들 모두가 흡족해 하였다.  

 

 

5월, <보해>의 동생 <미해>가 죽었다.

 

<눌지>는 <비유>와 다시 화친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랬다저랬다 하기 무상하다가, 스스로 재앙을 만든 것이었다.  

 

<서구胥狗>의 아들 <발發>의 전장{田庄} 사람의 처 <제齊>씨를

보궁(補宮)으로 삼았더니, 경부(瓊府)가 들어주지 않았다.

 

상이 보후에서 물러난 <천룡>의 청이 있어 허락하였다.

 

<발發>은 상의 혼외 자식이라는 말도 있었다.

 

상이 <해>태자에게 이르길

 

“보후에서 물러난 <천룡>은 비록 요즈음 저녁을 감당하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짐이 내 몸의 잔털같이 여기는 여인이오.

받들고 섬기길 보후시절과 같이하여 일생동안 하나도 덜함이 없도록 하시오.”

라 하였더니,

 

<해>태자가 아뢰길

 

“퇴후(退后)의 호칭이 곤궁(坤宮)과 똑같아서

신하들이 왕왕 퇴후궁과 착오를 일으킵니다.

청하건대 구룡궁(狗竜宮)으로 불렀으면 하는데, 어떠하신지요?”

라 물었고, 이를 허락하였다.

7월, 제왕(齊王) <춘>태자가 나이 74살에 죽었다.

 

왕은 학문하기를 좋아하고 현인을 존경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림엔 도리를 따랐더니, 천하가 그에 힘입어 편안하였고,

종실 사람들의 표상이 되어 세세토록 모범이 되어 왔으니 현명하였음이다.

 

상은, 좌우를 모두 잃은 듯이 아연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태왕의 예를 따라 국내(國內)에 장사하였다.

 

선・불・유자들이 멀리에서도 찾아왔으며, 흰 옷 입은 이가 10만이나 되었었다.

 

왕의 아들 <춘록春鹿>을 경총대부로 삼고,

사위 <담윤談胤>으로 하여금 제왕(齊王)의 자리를 잇게 하였다.  

 

 

8월, 상이 산궁(山宮)으로 가서 꿈속에서 뵈었던 무량수불을 배알하였다.

 

즉, 괴왕(槐王)을 찾아뵌 것이었다.

 

<사만의謝萬義>가 년호를 장수(長壽)로 고치자 청하여 허락하였다.

 

 

 

 

장수 2년{AD434}갑술,

 

2월, 양왕(梁王) <서구>가 입조하여

자신의 처 <천룡>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청하여 허락하였다.  

 

이에, 보후 <천을>도 경도는 쇠하지 않았어도

나이가 많아서 아이 낳기가 어렵다며 물러나길 청하여 허락하였다.

 

<담윤>의 처 <춘풍>이 대신하게 하였다.

 

상이 <담윤>에게 이르길

 

“그대는 글을 좋아하고 아랫사람들과 잘 지내시기는 하나, 정벌하여 쌓은 공이 없소.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그대를 어미와 처의 공으로 산다고들 합니다.

마땅히 틈을 내어 무예에 힘써서, 무인들이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라 하였다.  

 

<비유>가 <눌지>에게 좋은 말을 보내 주었다.

 

송(宋)에서 얻어서 씨를 받은 것이라 하였다.

 

상은 사축경 <해대觧大>에게 이르길

 

“요사이 신마(神馬)가 옛날과 같지 못하오. 아무래도 역시 쇠잔한 것 아니겠소?

<혁연발발>이 보내 온 것으로 종마를 삼는 것이 좋겠소.”라 하였더니,

 

<해대>가 아뢰길

 

“신이 들은 바로는 위(魏)에 완전한 종자가 많다고 합니다.

사다가 새끼를 냈으면 합니다.”라 하여 허락하였다.

상이 <서구궁>으로 가서 <서구>와 <천룡>이 개마 땅으로 돌아가게 됨에

연회를 베풀어주었더니, <서구>가 아뢰길

 

“ 위(魏)가 우리에게 왔다 갔다 한 이래로, 변민들을 위로하고 쟁기질하더니,

진휼함이 정도를 넘어서서, 풍(馮)의 서쪽 땅을 잠식하고 있으니,

<풍홍>이 곧 망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위(魏)는 <비유>와 사통하고 멀리는 <눌지>에게 까지 찾아갔으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조정은, 평화로운 날이 오래 된지라, 마치 문(文)을 중시하는 듯하고 있으니,

무(武)가 점점 쓰러져가면 낭패가 올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짐도 그것을 알고 있었소.

경도 마땅히 잘 방비하여 짐의 마음이 편안토록 하여주시오.

조정 또한 응당 경을 본보기로 삼을 것이오.”라 하였다.

 

이에 선·불·유자들에게도 하명하여 무예를 익혀서

기사를 하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였더니,

이후로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널리 이행되었다.  

 

 

 

4월, 상이 남소로 가서 무예를 사열하였다.

 

<풍홍>이 사자를 보내어 칭신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상은

 

“ 위(魏)의 <탁발도>가 내게는 그대의 땅을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뒷구멍으로는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니,

그렇다면 쥐새끼나 고양이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소.

요수(遼隧)의 서쪽은 짐이 알아야 할 바 아니겠으나,

만약 용성(龍城)을 침입하면 짐이 맡아서 토벌할 것이오.”라 일렀다.


7월, 선선(鐥善)의 사신이 래조하여 말과 낙타 및 공작을 바쳤고,

후하게 위안하여 돌려보냈다.

 

위(魏)가 침입할 뜻이 있음에, 우리가 위(魏)에게 형이 되는 나라임을 알고,

찾아와 구원하여주기를 청하였던 것이었다.  

 

 

 

8월, 위(魏)가 찾아와서 불로주를 바쳤다.

 

서역의 포도즙을 천 년 동안이나 익힌 것이라 하였다.

 

상이 <최호崔浩>의 율령을 보더니만

 

“가혹하다. <최호崔浩>도 오래가긴 어렵겠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송(宋)이 <사령운謝霊運>과 <도잠陶潛>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탄하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르길

 

“<도잠>은 탐내지도 않았는데 주살됨을 면치 못하였단 말인가?

필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야.”라 하였다.

 

후에 잘못된 보고였음이 밝혀졌다.  

 

 

 

9월, <풍홍>이 여인 둘을 바쳐오면서 아뢰길

 

“이 여인들은 고(高)씨의 후예이어서 마땅히 상국에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를 물리치려 하자, 주빈대부 <사만의謝萬義>가 아뢰길

 

“두 나라는 화친하는 사이인데 혼인하기를 물리친다면 예의가 아닙니다.

청컨대 떨어진 궁에 두고 찾아보시지요.”라 하였고,

 

상은

 

"위(魏) 또한 딸을 바치고 찾아와서 의논하려 할 것이오.

<풍홍>의 청을 받아주면 위(魏)의 청도 받아주어야 할 것이고,

위(魏)의 청을 받아줌도 당연할 것이니,

이 여인들을 돌려보내 답하는 것이 양쪽에게 곤란하지 않게 함일 것이오.”

라 이르고는,

 

삼보들과 열 대가들에게 어찌해야 할지를 의론하라 명하였더니,

여러 날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고, 여인은 끝내 안으로 들어왔다.  

 

 

 

10월, 위(魏)가 찾아와서 여인을 바치겠다고 청해왔다.

 

상은 신마 50필과 양 천 마리를 주어서 돌려보냈다.  

 

<눌지>가 황금과 밝은 구슬을 보내주고 <비유>의 딸을 맞았더니,

<비유>는 흰 매를 보내주었다.  

 

이해에 선선(鄯善)과 북량(北凉) 또한 여인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혼인하여 화친하는 풍속이 차츰 잦아졌다.

 

 

 

 


장수 3년{AD435}을해,

 

정월, 위(魏)가 자기들 선대의 역사를 꾸미고자

그들이 우리 조정에 래조하였던 사실을 물어왔고, 휘명(諱名)에 대하여도 물었다.

 

답하기를, 나라의 조정이 임금의 이름을 피하지 않은 것은 그대 나라의 일이니,

우리가 알 바 아니라 하였다.

 

그랬더니, 위(魏)가 자기들 선대의 이름을 피하긴 하였으나,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고치거나 바꾼 것이 많았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옛적에 어떤 사람이 부유해져서 어미를 수레 안에 모셨더니,

그 불편함이 빈한하였던 때 보다 더 심하였다 한다.

색두(索頭)의 <사건査犍> 등도 필시 어미를 수레 안에 모시는 것이

금륵지치(金勒之雉)임을 알았을 것이다.”라 하였다.  

 

 

금륵지치(金勒之雉) ; 금으로 만든 새장 안의 꿩.

호화로운 곳에 가두어 모시어서 오히려 불편한 것

 

 

6월, 위(魏)가 산기시랑 <이오李敖> 등을 시켜서

<탁발사>의 딸 <가란嘉蘭>을 보내왔다.

 

<하란賀蘭>의 딸이라 하였다.

 

상이 <담윤>을 영접대사자로 삼아 서하를 나가서 맞이하게 하고,

창수궁(淌水宮)으로 들여서 근례를 행하였다.

 

<이오> 등에게는 수림의 온궁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이오>는 부마대왕 금인과 대선우의 옥새 등을 바쳤다.

 

상이 웃으며 <이오> 등에게 이르길

 

“그대의 나라는 여러 차례 불사약과 불로주를 보내어 짐의 장수하기를 축원하였으며,

<청평淸平>공주를 시켜 나를 섬기게 하였소.

평생을 같이 할 양국 간의 우의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오.”라 하였더니,

 

<이오>는

 

“소국은 폐하를 성심으로 섬기고 있음에 흠결 하나 없어 왔사옵니다.

근자에 들으니, 풍(馮)적이 상국과 밀통하고 사신을 보내어

신 등이 어찌 하였는지를 염탐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심히 놀랐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상은

 

“이간하려는 말일 것이오.

<풍홍>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와서 구원을 청하긴 하였으나,

짐은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마음을 놓으시오.”라 하였다.

 

이에 <이오>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떠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풍홍>이 과연 상서 <양이陽伊>를 보내 와서 오해 할 짓을 하고 있었다.

 

찾아와서 정탐할 뿐만 아니라 만일의 경우에 대한 구원을 청하기도 하였는바,

심히 간절하였다.  

 

이해에 <눌지>는 선대의 무덤을 손질하였다.  

 

<춘풍>후가 아들 <풍옥凮玉>을 낳았다.

 

 

 

 


장수 4년{AD436}병자,

 

4월, 위(魏)가 <풍홍>의 백랑성(白狼城)을 쳐서 빼앗았다.

 

이에 용성(龍城)은 큰 혼란에 빠졌고,

짐을 꾸려 지고서 동쪽으로 내빼는 이가 수십 리를 연이었으며,

<양이陽伊>가 또 찾아와 구원해달라고 애걸하였다.

 

<양이陽伊>는 선대가 우리나라의 사람이었다.

 

상은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이 2만병을 이끌고 가서 용성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서 낡은 털옷을 벗고 그곳의 무고에 있는 좋은 병장을 취하여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성 중을 대대적으로 초략하게 하였다.

 

 

 

5월, <풍홍>이 위(魏)가 점점 압박하여 옴을 듣더니만,

궁전에 불을 지르고 영을 내려서 부인들은 갑옷을 입혀 가운데에 있게 하고,

<양이陽伊>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 밖에 있게 하였다.

 

이에 <갈로>와 <맹광>이 기병을 후방에다 펼쳐서, 길을 따라 나아갔더니,

그 전후가 80여 리가 되었다.

 

<풍홍>을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

 

위(魏)의 사자인 산기상시 <봉발封撥>이 찾아왔다.

 

<봉발封撥>은 <봉시封時>의 아들이었는데 <풍홍>을 내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풍홍>이 비록 위(魏)에게는 죄를 지었다하여도, 나의 신민이 되어 있으니,

그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위(魏)가 이윽고 화평을 깨고서라도,

롱우(隴右)의 기졸을 발병하여 침입하려 하였는데,

낙평왕(楽平王) <비丕>가 간하여 그만두었다 한다.

 

<유혈劉絜>은 롱(隴) 땅의 백성들은 새로이 찾아온 이들이어서

졸지에 싸움터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하였고,

<비丕>는 고구려는 조상의 나라여서 설사 속마음이 다르다 하여도

힘들여서 싸움은 불가하며 싸우더라도 농경과 잠사를 진작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여 풍족해지길 기다린 연후에 다시 도모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겨울에 <풍홍>을 북풍(北豊)으로 옮아가게 하였다.

 

 

 


장수 5년{AD437}정축,

 

정월, <봉발封撥>이 다시 찾아왔다.  

 

<풍정風丁>妃가 아들 <봉덕鳳德>을 낳았다.  

 

 

 

3월, 상이 미행하여 호천(狐川)에 이르러 나물 캐는 여인을 보았는데,

예쁘기도 하여 말을 물었더니, 옛날 태보였던 <호만好万> 집안의 종실 여인이었다.

 

그 집을 가보았더니 빈궁하게 살고 있었기에,

<춘록春鹿>에게 명을 내려 살붙이들에게 후하게 하여주라고 하였으며,

<호好>씨는 맞아들여 궁인으로 삼았다.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5월, 위(魏)의 사자 <을송乙松>이 왔다.

 

역시 우리나라의 사람이었고,

와서는 <가란嘉蘭>비에게 깃털 옷과 노리개 및 진미를 전해주었다.

 

이때 <가란>비가 <하賀>공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7월, 상이 <삼산>후와 함께, 서하의 온탕으로 가다가 한 농부를 보게 되었다.

 

부부는 밭고랑에서 점심을 먹고 나더니 돌 위에서 글을 읽었다.

 

상은 수레를 멎게 하고는, 물으며 이르길

 

“옛날에 대무제(大武帝)께서는 사물(沙勿)의 바위 위에서 <위공位公>을 얻었었고,

주(周) <문공文公>은 위수 곁 자갈밭에서 <여상呂尙>을 얻었었소.

옛적부터 바위 위엔 군자가 많았으며, <부암傅岩>과 <황석黃石> 모두 그랬었소.

경도 또한 그런 사람인 것이오?”라 하였더니,

 

농부는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오이 심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라 아뢰었는데,

 

상은 그 오이의 맛을 보더니만 맛이 좋았더니, 명을 내려 과사(瓜師)로 삼았다.

 

이 사람이 과사(瓜師) <진과모真瓜母>이다.

<의륭義隆>이 비단과 채단으로 말과 바꾸자고 청을 하여

평곽 앞에서 잡은 물개 500필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유의륭劉義隆(407-453)>은 남조 송(宋) 文帝이다.



 

 

 

 


장수 6년{AD438}무인,

 

3월, <풍홍>과 <의륭>이 상통하였다.

 

<의륭>이 <백구白駒>·<차흥次興>·<구의具義> 등을 보내어 무리 수천을 이끌고

평곽 앞의 바다에 큰 배를 정박하였다.

 

<용기龍杞>와 <손인수孫人漱> 등에게 명하여 그들을 격살하고

그들의 배 78 척을 빼앗았다.  

 

 

 

5월, 상이 위(魏)와 함께 <의륭>을 정벌하려 하자 <서구>가 말려서 멎었다.  

 

<눌지>가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지난달에 큰 바람과 비로 보리가 상하였고,

우두군(牛頭郡)에서는 산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와

50여 가옥이 물에 뜨거나 쓸려나갔다 한다.

 

 

 


장수 7년{AD439}기묘,

 

정월, 궁인 <호好>씨가 아들 <욱다勖多>를 낳아 비로 승차되었다.  

 

송(宋) 사람 <도연陶堧>과 <손개만孫介万>이 찾아와 투항하였다.  

 

<눌지>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마 사람 <포득布得>이 3층으로 만들어진 황금 잔 세 개를 바쳐왔다.

 

<원상袁尙>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년 전부터 계속하여 참새가 많은 곡식을 먹어치우기에

전포(田圃)에 새그물을 치라고 명하였다.

 

 

 

 


장수 8년{AD440}경진,

 

4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왜가 신라의 남쪽에서 사람들을 잡아갔고, 6월에는 그 동쪽을 약탈하였다.

 

토란, 밤, 상수리, 마가 식량으로 하기에 콩과 조보다 못하지 않아서

밤 . 도토리 숲과 토란, 참마 밭을 만들게 하고,

잘 하는 이들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하라 명하였다.  

 

 

8월, <의륭>이 찾아와 약재와 의원을 바치고 화의를 청하고서 백제로 향하였다.

 

백제 또한 <의륭>에게 사신을 보냈다.

 

상이 <연황淵晃>·<신지申旨>·<왕문王文>·<사만의謝万義>·<도연陶堧> 등에게

 

 “ 위(魏)에서는 사람들이 부자간에 서로 죽이는 일이 많고,

송(宋)에서는 군신 간에 서로 죽이는 일이 많은데, 무슨 까닭이오?”라 물었다.

 

<신지>는

 

“ 위(魏)의 주인은 자식을 아끼기는 하나 가르치질 않습니다.”라 아뢰었고,

 

<도연>은

 

“ 송(宋)의 주인은 백성을 간사하게 가르칩니다.”라 아뢰었으며,

 

<왕문>은

 

“성인이 갖추어야 할 법도로는 담담하고 표정이 없어야 하며,

참되며 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마음을 넉넉히 가지십시오.”라 아뢰었더니,

 

상이 이르길

 

“옳거니! 백성 속이길 잘하는 이는 신하에게 속임을 당하고,

아들을 함부로 대하는 이는 아들에게 함부로 당하는 법이오.

임금 된 자의 동정 하나하나는 그래서 어려운 것 아니겠소?

짐은 경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임금 하기가 어려움을 점차로 알게 되었소.”라 하였다.

 

이에 <왕문>은

 

“폐하께서는 하늘의 자태로 높고 밝으시어 멀리 백 대를 내다보시지만

혈기는 지나치십니다.”라 아뢰었더니,

 

상은

 

“짐 역시 알고는 있지만 고치기가 어렵소.”라 하였다.

 

<연황>이

 

“궁중의 도리가 바르지 않은데, 다른 것들을 어찌 말 할 수 있습니까?

도리의 요체는 그 근원을 맑게 함에 있음입니다.”라 하자,

 

상은 아무런 말없이 있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상은 동궁시절에 <연긍淵兢>의 처와 통정하여 <연황>을 낳았는데,

<연황>을 상의 아들로 하지 않았었기에, 이 같은 원망어린 말을 하게 된 것이었다.  

 

 

 

9월, 황산(黃山)으로 가서 국화를 감상하면서,

명을 내려 <연황>을 서장자(庶長子)로 봉하였으며

그의 어미 <부운芙雲>을 보비로 삼았다.

 

이로써 <연황>을 위로 하며 이르길

 

“아비를 원망하는 마음이 아비를 죽이기에 이르도록,

위(魏) 주는 제 아들이 원망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더구나.”라 하였더니,

 

<연황>은

 

“신의 부도한 죄를 사하여 주시고, 도리어 어둠에서 깨어나게 하는 광영을 주셨으니,

신은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효도하지 못하고 감히 식식거리며 지낼까봐 두려웠었습니다.”라 하였고,

 

“ 영롱한 이슬 빛깔이 은은한 향기보다 못함을 너도 알 것이다.”라 이르고는

 

<읍泣>공주를 <연황>에게 처로 주었다.  

 

<가란>비가 <척拓>공주를 낳더니, 황후로 승차하였다.

 

 

 


장수 9년{AD441}신사,

 

2월, <눌지>가 사물현(史勿縣)의 꼬리가 긴 꿩을 바쳐왔다.  

 

 

 

3월, 좌원(坐原)의 도사를 불렀더니, <박駁>이 조심스레 하면서 도착하였다.

 

상이 <박거위駁居位>에게 묻기를

 

"어떤 대{왕조}의 10세이고, 오래된 물건이 있는가?"

 

"식기(食器)만 있습니다."

 

"그대 고향엔 아름되는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가?"

 

" 많습니다."

 

" 한 자 넘는 물고기는 많은가?"

 

" 많습니다."

 

"활 쏘는 이는 많은가?"

 

" 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 잘 쏘는 이는 있는가?"

 

" 간간이 있습니다."

 

" 술 마시는 이는 있으며, 많은가?"

 

" 많지 않습니다."

 

" 노름하거나 바둑 두는 이는 있으며, 많은가?"

 

" 금하고 있습니다."

 

" 글 잘하는 이가 있는가?"

 

" 간간이 있습니다."

 

" 그대는 무슨 도리로 향리를 다스리는가?"

 

" 무위(無爲)입니다."

 

" 그대는 어떤 도리로 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 무위(無爲)입니다."

 

이에 상은 크게 웃으며, 술을 내려주어 돌려보내라 명하였다.  

 

 

 

6월, 양왕(梁王) <서구>가 나이 73살에 죽어,

그의 아들 <화덕華德>이 대신하게 하였다.  

 

 

 

10월, 상이 한빈에서 크게 사열하고는 주병대가 <용경龍莖>에게 이르길

 

“ 위(魏)는 매년 정벌하여서 군세가 날카로운데,

우리는 싸워 본 지가 오래되어 군세가 곧 노쇠하여 질 것이고,

이는 강병책이랄 수 없소.

<비유>를 쳐서 사기를 진작시킴이 어떻겠소?”라 하였더니,

 

<용경>이

 

“신도 그리 하였으면 합니다.”라 답하자,

 

<용덕勇德>이 나서서 간하길

 

“싸움을 걸어 멸하지 못하면 화를 초래합니다.

강한 이가 약한 이를 이길 수는 있으나

멸하기 어려운 까닭은 바로 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비록 약하긴 하나 무도한 주인은 아닌즉 멸하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벌의 도리를 살펴보면,

책략을 준비하고 그 책략이 무르익어 거사하는 것이고,

그리하여도 패할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방도를 모색하지 않은 이는 어떻겠습니까?”라 하였더니,

 

상은 “합당한 말이요.”라고 하고는 그만두었다.

 

 

 


장수 10년{AD442}임오,

 

2월, <경鲸>태자의 딸 <탁발拓跋>씨가 제5황후가 되어서

위(魏)의 도성으로 맞아 들여졌다.  

 

 

4월, 선선(鄯善)의 사신이 낙타와 공작 및 타조 등을 바쳐왔기에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남(袴男)을 금하였다.

 

종실의 처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에 대개 예쁜 사내아이를 부렸고,

고남(袴男)이라 불렀는데, 난쟁이들이 간통하는 일이 잦아서 금한 것이었다.

 

 

 

 


장수 11년{AD443}계미, 정월,

 

<경鯨>태자가 사람을 보내 은밀히 알려오길

 

“ 위(魏)가 저를 왕으로 내세우고 침입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사오니,

국경을 튼튼히 방비하심이 마땅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박거위>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란嘉蘭>에게도 잘 대하여 주십시오.

<탁발拓跋>이 <거배渠輩>를 시켜서 선처하게 말하였더니,

위(魏)주가 그러겠다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형님은 참 나의 고지식한 신선이시오.

어찌 형님이 동생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처가 지아비를 아끼지 않고,

임금이 나라를 아끼지 않겠소?

<탁발도>가 비록 허황된 수고를 하더라도 자신이나 죽지 않으면 즉 다행일 것이오.

어느 겨를에 우리를 도모하겠소?”라 하였다.

 

개략 <탁발도>가 처자식들의 뜻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지칭함이었다.

 

상의 형제 모두가 우애 있고 충성을 다하며,

후와 비 모두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따르고 있고,

황상의 자식 중에는 효도하지 않는 이가 하나도 없었으니,

상은 이리도 자신만만하였었다.

 

<탁발도托跋燾(408-452)>는 북위의 世祖 太武帝이다.




 

3월, <탁발>후가 <발跋>태자를 낳자, 사람을 보내서 위(魏)에 알려주었다.

 

이에 <경鲸>태자는 위(魏)주에게 말하길

 

“제가 왕을 하지 않더라도, <발跋>은 응당 왕을 할 것이고,

그 세상은 폐하와는 장인과 사위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계(仙界)에서는 이미 천상(天上)께서 정하였으니,

인간들이 어찌 할 수는 없음입니다.”라 하였더니,

 

<탁발도>는 그렇겠다고 여기고 쳐들어갈 계획을 잠재웠다.

 

상은 <탁발>후를 위무하여

 

 “그대가 낳은 아들은 실로 나라의 보배요.”라 이르고는,

 

보궁(宝宮)태자로 부르라 명하였다.  

 

 

 

7월, 위(魏)의 사신이 와서, <탁발>후에게 적복을 전해주고,

상에게는 불로주 및 낙타와 소금을 전하였는데,

상에게 명하길 <가란>과 <탁발> 두 후와 함께 입조하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가란>후가 지금 임신 중인데 어찌 먼 길을 갈 수 있겠소.

아들 낳기를 기다렸다가, 짐이 서쪽 집안을 웃게 해 줄 계획이오.”라 하였더니,

 

사신은 몹시 즐거워하며 떠나갔다.  

 

 

 

9월, 황산에 가서 국화를 즐기고 <도연명陶淵明>의 삼소도(三笑圖)를 감상하였다.  

 

<해蟹>태자・<황晃>태자・<왕문王文> 등이 유기(留記) 70권을 수찬하였다.

 

상이 이르길

 

“우리의 사서 모두가 이처럼 보경(宝鏡)이거늘,

하필이면 춘추(春秋)와 사기(史記)를 읽는 것이오!”라 하였다.

 

 

 


장수 12년{AD444}갑신,

 

2월, 후와 비 및 여러 왕자를 데리고

졸본의 서성산(西城山)으로 가서 동명대제를 지냈다.

 

상이 여러 왕자들에게

 

“너희들 모두는 동명께서는 검소하셨으며

먼 곳을 바쁘게 돌며 고생하셨음과 우애 있게 지내고 조상에 효도하는 것과

나라의 근원이 오래 되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라 일렀다.  

 

<용덕勇德>을 월왕(越王)으로 봉하였다.  

 

 

 

4월, 동명(東明) 신상(神像)을 위(魏)와 신라 및 백제에 나누어 보냈다.  

 

왜가 들어와서 금성을 열흘 동안을 포위하고 있다가 먹을 것이 떨어져서 물러나자,

<눌지>가 추격하였다.

 

좌우가 궁한 개는 쫓아가지 않는 것이 병법의 도리라고 말하였었는데도,

<눌지>는 듣지 않고 친히 수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독산(獨山)의 동쪽에 이르렀다가 적에게 패하였다.

 

장수와 군사들을 절반을 넘게 잃더니,

<눌지>는 정신이 아득해져서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고,

왜인들은 몰려와서 여러 겹으로 둘러쌌다.

 

목숨이 경각이었는데, 홀연 어지러운 안개가 산을 덮어 지척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왜인들은 <눌지>를 잡을 수 없게 되었고, 신이 돕고 있다고 여기어 물러갔다.


상이

 

“<눌지>의 처사는 가벼이 조처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군왕 된 자들이 따를 바 되지 못하였었소.”라 하였더니,

 

<용덕>이 아뢰길

 

“<눌지>는 과감하기는 하나 장인을 죽였으니 바탕은 어지럽습니다.

허나, 조심성은 있어 큰 나라를 섬기고, 교린하기에도 민첩하여,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엔 능란하니, 간교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간사함으로도 역시 사람의 목숨을 능히 구할 수 있으며,

병법에 사술을 꺼려하지 않음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 일렀더니,

 

<왕문>이

 

“성인들은 간교함에는 간교함으로 정도에는 정도로써 다스렸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안팎을 두루 살폈으며,

다스림에는 한 가지만을 쓰지는 않았습니다.”라 아뢰었다.

 

상은

 

“옳거니!”라 하고 더 듣기를 청하였더니,

 

<왕문>은

 

“작은이는 작은이의 분수가 있고, 큰 이는 큰 이의 분수가 있으니,

분수를 지키면서 여유 있게 행하면, 간교한 자가 쳐들어올 수는 없지만,

정도만을 지키면 밖으로 쳐나갈 수도 없음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여 이르길

 

“맞소! 맞아!”라 하였다.

 

상은 <왕문>에게

 

“경은 나이가 50밖에 아니 되었는데 현처를 여의고는 홀로 지내고 있으니,

가당키나 한 일이요!”라 이르고는,

 

명을 내려 <용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이때 <왕문> 58세, <용덕> 68세, 장수대제 <거연> 51세이다.

 

<가란>후가 아들 <조다助多>를 낳았다.

 

상은 <가란>후가 쾌차하지 못하였기에 위(魏)로 가지는 않았다.

 

 

 


장수 13년{AD445}을유,

 

정월, 왜의 사신이 찾아와서 진주와 어피 및 산호 등을 바치면서 청혼하였다.

 

이에 상은

 

“당신네 나라의 왕자는 찾아와서 공부하고 돌아가더니만 영영 소식도 없었고,

게다가 백제 또는 신라와는 싸우고 화친하길 무상케도 되풀이 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소?

짐은 한 무리의 군대를 보내서 누란 밟듯이 하고 싶었으나,

허물없는 백성들에게 잔인하게 할 수는 없었소.

돌아가거든 당신 주인이 알아듣게 하시오.”라 하였다. 

 

이때 왜는 <윤공允恭> 7년이다. 

 

 

 

3월, 선선(鄯善)의 사신이 돌아가더니,

다시금 찾아와서 낙타와 좋은 말 50필을 바치면서 청혼하였다.

 

<해달觧橽>의 딸을 딸려 보내라 명하면서 이르길

 

“그대의 왕은 성심으로 사대하며 멀리에서 찾아와 조공하니,

짐이 어찌 한 여인만을 아낄 수 있겠소?”라 하였다.  

 

 

6월, <왕문>을 림총대부・부마도위를 삼고 태학사를 겸하게 하였다.

 

상의 마음이 문을 장려하기로 쏠리더니,

<왕문>・<호견>・<사만의>・<도연> 등을 중용하였다.  

 

위(魏)가 선선(鄯善)>을 병합하였다.

 

 

 


장수 14년{AD446}병술,

 

2월, <황晃>태자가 위(魏)로 가서 <탁발도>의 아들 <황晃>과 함께 유람하였다.

 

<탇발도>의 아들은 이름은 같았으나

본바탕은 그렇지 못하여 암담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개략 <탁발도>가 폐신의 아첨에 빠져서 자신의 아들을 반기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상이 이르길

 

“<탁발도>는 결단력은 좋으나 폐신을 등용하고 있으니,

어찌 능히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3월, <해달觧橽>의 딸이 선선(鄯善)에서 돌아왔다.

 

상이 <탁발도>가 보복으로 승려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문>에게 이르길

 

“불법이란 것이 서쪽에서 온 이래로 과장함이 심하긴 하였지만,

보복으로 죽인 것 또한 심한 처사였소.”라 하였더니,

 

<왕문>이 아뢰길

 

“선도와 불도 모두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을 방편으로 삼으니,

그 또한 죄가 아니겠습니까?

유도 또한 실행하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만 탄식하며 이르길

 

“행한다는 것이 실은 어렵긴 하오.

짐은 보비를 폐하려 하면서도 능히 그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일이야 어떻겠소!”

 

<왕문>이 아뢰길

 

“천천히 하여 이루어도 역시 도의 경지에 들어가는 방편입니다.

폐하께서는 천자고명하시니, 비록 혈기가 넘치시는 과오가 있으셔도,

차차로 뜻하시는 바와 같아질 것이옵니다.

지나치게 걱정이 많으시면 도리어 용단 있게 나아가심에 해로울 것입니다.”

라 하였다.  

 

 

 

4월,< 천강>태후가 춘추 92세에 죽었다.

 

농사철이어서 궁 밖 거둥을 아니 하겠다고 명하였다.

 

 

 

 


장수 15년{AD447}정해,

 

정월, 두눌원(杜訥原)으로 가서 거위 목에 줄을 둘러매서 잉어를 낚았다.  

 

 

2월, 몸소 적전을 일구었으며, 공자(孔子)에게 제사하였다.  

 

 

 

4월, 황산으로 가서 <천강>태후에게 제사를 올렸다.

 

상이 <천을>과 <담명>에게 이르길

 

“인생 100년은 대저 펄럭이는 깃발과 같아서 살아가는 뜻을 삼음에 있어,

귀하게 되고자 살거나 살기 위하여 죽이는 것은 삶이 뜻하는 바는 아닐 것이오.

나이 30에 폐출 당할까 두려워 남편을 죽인 이로는 <장張>귀인이 그랬고,

아들을 위해서 조카를 죽인 이로는 <의이倚夷>의 처 <불가지芾加知>가 그랬소.

<탁발건>과 <탁발규>는 모두 애첩에게 죽임을 당했던바,

<고지庫知>와 <하란>이 그랬으며, 필경에는 아들을 세우게 되었으나,

어미 죽이는 것이 의논되었으니, 이도 삶이 뜻하던 바는 아니었을 것이오.

그대들은 일찍 곤위의 법도를 배웠고

모두가 능히 지아비를 올바로 섬기고 아들과 딸을 낳았으니

궁중의 법도는 꽃과 같으며, 짐의 보배이신 태후께서 92년을 사셨으니

그 또한 짧지는 않았소!”라 하였다.

 

<천을>과 <담명>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키었다.  

 

 

 

5월, 황산에서 서도로 환궁하였다.

 

<비유>가 물가에 기거하였는데, 수레바퀴 모양의 귀신불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가뭄이 들었고, 굶주리던 많은 백성들은 신라로 들어갔다.  

 

 

 

10월, 사천(蛇川)에서 사냥하였다.  

 

<황晃>태자를 중외대부로 삼고, <경주京朱>와 <온달溫達>을 대평자로 삼았다.

 

<경주京朱>와 <온달溫達>은 학식과 품행이 훌륭한 <왕문王文>의 제자이었는데,

오랫동안 바위굴에 살았던지라 능히 백성들의 고초를 살필 수 있었다.

 

 

 

 

 


장수 16년{AD448}무자,

 

정월, <토산吐山>황후가 춘추 76세에 죽었다.

 

천원공(天原公) <림琳>의 딸이었다.

 

온화하고 어질었으며 도탑고 고왔으며, 두 명의 제를 섬겼다.

 

<삼산三山>과 <해蟹>태자 및 <섬원繊元>태자를 낳았는데,

모두들 현명하였고 무리를 잘 이끌었으며 학식도 있었다.

 

후는 란새를 길러서 란(鸞)태후라고도 불리었다. 

 

 

 

4월, 황산에 갔다.  

 

명을 내리길 금전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금과 구리를 캐지 말고,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을 함부로 쓰지 말라 하였다.  

 

훌륭한 인재를 천거 받아서 <연길淵吉>과 <선합宣合> 등 일곱 사람을 얻었다.

 

이때 <연길淵吉>의 나이는 20살이었다.

 

<崔浩>上書<賀蘭>月海事而要巾.  

 

<최호崔浩>가 <하란賀蘭>의 월해(月海)일을 글로 올렸다.

 

上曰 “復自露其■而已於我, 何哉.”
 

 


 

 


장수 17년{AD449}기축,

 

5월, 상은 남구와 개마로 달려 들어가 군대를 검열하고 수자리를 시찰하였으며,

하복을 내려주고 마(麻)로 실잣기를 권장하였다.  

 

 

 

9월, 위(魏)가 <유연柔然>을 대파하고 기세가 오르더니 점점 기고만장하여졌다.

 

이에 상은 여러 태자들에게 이르길

 

“용맹한 이는 상하기 쉽고, 약한 이는 몸을 아끼며,

무력을 더럽다 할 수도 없고, 글을 한다하여 맑다 할 수도 없다.

너희들은 탐하지도 말고 남을 해치지도 말 것이며,

효성과 우애로 서로 도와서 사직을 지켜야 할 것이다.

저들은 물거품과 꽃잎 같은즉,

우리는 만년을 내어다 보며 유유히 옹골차게 나아가면

하늘이 크게 이루어 줄 것이다.”라 하고 나서,

 

명을 내려 활쏘기를 겨루고 학문을 논하라 하였다.

 

 

 


장수 18년{AD450}경인,

 

정월, 적전으로 가서 분재하여 기르는 어린 싹을 돌아보았다.  

 

 

5월, 위(魏)의 사신이 와서 낙타・포도・불로주・선인초 등을 바쳤다.

 

상은 <최호崔浩>가 역사를 더럽힌 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이르길

 

“역사에 재앙이 잉태되더니만 <최호崔浩>에게 화가 떨어졌구나.

인군들은 이를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오래지 않아 6월이 되자 위(魏)가 종당엔 <최호>를 죽였다.

 

<최호>는 한(漢)인이었는데 재주만을 믿고 함부로 처신하다가

위(魏)나라 사람들의 믿음을 크게 잃더니만 참화를 당한 것이었다.  

 

 

7월, <눌지>가 글을 올려서

 

“상국의 사냥 말 여럿이 신의 경내에 들어와서 기르고 있는 사슴을 함부로 죽이기에,

아슬라 성주 <삼직三直>이 그를 말리다가 실직(悉直) 벌판에서 맞붙게 되었고

실수하여 한 사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변경의 장수들이 호상 간에 교전하여 싸워서 불충・불경함에 이르렀기에,

<삼직三直>을 함거에 실어 보냅니다. 응당 주살감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한 집안 애들끼리 벌인 일을 가지고 어찌 주살할 수 있겠소.

<삼직>은 자기 주인을 위하여 성심껏 경계를 지킨 것이니, 옷과 술을 내릴 일이오.”

라 하고는 <삼직>을 돌려보냈다.

 

이에 신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길

 

“하늘에 성스런 황상이 계시더니, 인간세상에서는 근심이 저절로 사라졌고,

근심거리를 만들어도 옻칠 할 일을 사라지게 하셨다!”라 하였다.

 

 

 

눌지왕 34년(450) 백호(白虎) 庚寅)

 

7월, 고구려 군이 사냥하여 실직(悉直)으로 밀고 들어오니

아슬라(阿瑟羅)성주 <삼직三直>이 불시에 그들을 죽였다.

<거련巨連>이 노하여 서쪽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겸허이 사과하자 물러났다. 

<남당유고 눌지천왕기>

 

 

이때에 <의융>이 <탁발도>를 치고 하남 땅을 취하였다.

 

상은

 

“<탁발도>가 필히 되갚을 터인데.”라 하였다.

 

겨울이 되자 결국 <탁발도>가 남쪽으로 내려왔더니,

지나는 곳엔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핏자국과 시신이 온 땅에 널려있었으며,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에 상은

 

“남을 함부로 하면 자신도 함부로 되어지는 것인데,

<탁발도> 또한 오래도록 순진하기만 하겠는가?”라 하였다.  

 

<읍>공주가 <황>태자의 딸 <연흡淵洽>을 낳았다.

 

혹은 상의 딸이라 하였다.

 

 

 


장수 19년{AD451}신묘,

 

2월, 서하로 가서 적전을 일구었다.  

 

 

3월, 황산에 갔더니, 송(宋)의 사람인 <동등董騰> 등 100여 호가 투항하여 왔다.

 

상이 송(宋)에 사는 사람들의 참상을 듣더니,

 

좌우들에게 이르길

 

“그대들은 위(魏)의 강성함만을 얘기하고 그들의 취약함은 보지 못하고 있소.

어찌 아이를 꿰뚫은 창이 춤을 춘단 말이오.

연(燕)이 오갈 곳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장차 어디로 가야한단 말이오?”라 하였다.  

 

이 해에 비로소 봄 부추를 먹을 수 있었다.

 

겨울철 눈 속에서 키운 것이었다.

 

상이 이르길

 

“사물 역시 이러할진대, 사람들은 본보기를 해보지 않고 불가하다고 하는가?

스스로 포기하는 자는 자못 하늘의 벌이 있을 것이오.”라 하였다.  

 

가락(加洛)의 <취희>가 죽고, 아들 <질지>가 섰다.

 

그의 후(后) <인덕>이 덕이 있다고 하였다.

 

 

 

 


장수 20년{AD452}임진,

 

3월, 위(魏)의 중상시 <종애宗爱>가 <탁발도>를 죽이니,

<탁발황>의 아들 <탁발준>이 보위에 올라 <종애>를 토벌하여 죽였다.

 

<탁발황>과 <종애>는 서로를 싫어하였었고,

<종애>가 <탁발황>의 관속들을 모함하고 죄를 덮어씌워 여럿을 죽였더니,

<탁발황>은 걱정하다 죽었고,

<탁발도>는 비로소 속을 것을 알았으면서도 곧바로 바로잡지 않았었으며,

<종애>는 후환이 두려워서 <탁발도>를 죽이고 자신도 피살된 것이었다.

 

<탁발도>는, 용맹한 것만을 좋아하고 자애롭지는 않았기에,

필경에는 스스로 피살된 셈이었다.

 

이를 일러서 강하면서도 허약한 점이 많으면 다른 이들에게 잡혀 죽는다는 것이고,

<모용황>・<부견>・<모용희>・<탁발도>가 바로 이런 부류이었음이었다.  

 

 

 

7월,<눌지>가 태산군(太山郡)의 볍씨를 보내왔다.

 

벼는 오(吳)에서 가야와 신라로는 전해 들어갔는데 우리나라엔 들어오지 않았었다.

 

토질에 맞지 않은 탓이었었다.  

 

<질지>가 왕후사(王后寺)와 파사탑(婆娑塔)을 세웠다.

 

후에 호계사(虎溪寺)라 불렀다 한다.

 

 

 

 

 


장수 21년{AD453}계사,

 

정월, 송강(松江) 패자 <수산守山>의 처인 <가架>씨를 거두어서 궁인으로 삼았다.  

 

 

2월, <의융>의 아들 <소劭>가, 잘못하여 질책을 듣더니,

아비를 저주하여 일을 벌였다.

 

폐위될까 겁이 나서 아비를 시해하고 자신이 선 것이었다.

 

상이 이르길

 

“<의융>은 의롭기가 융성하지 못하여 도리어 <의부義符>만 하지도 못하였소.

개략하여 말한다면, 아들에게 죽었으니, 오히려 신하들에게 죽었음만 같지 못하였소.

<유유劉裕>는 자신의 주군을 죽이고 나라를 다스리더니만,

그의 신하 <종사徖謝> 또한 그 주군을 죽였소.

이것이 <유유劉裕> 사건에서의 가르침이었소.

<의융>은 좋은 명망을 바라면서 <의부義符>를 대신하였지만,

이는 형제간의 보위쟁탈에 따른 죽임이었고,

그의 아들 <소劭>도 자리에 오르고자 <의융>을 죽였으니,

형제간의 죽임이 부자간의 죽임을 낳은 것이었소.

이것이 <의융>의 사건에서의 교훈인 것이오.

<유유劉裕>는 신하들에게 군주를 시해하라 가르쳤으며,

<의융>은 아들에게 아비를 죽이라 가르친 것이었었소.

<유유劉裕>는, 단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만을 좋아하였지,

장차 자신이 죽게 될 위태로움은 깨닫지를 못한 것이었소.

모용(慕容)도 그러하였기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도륙하여 서로를 죽였었고,

풍(馮) 역시 그러하였기에 용감하기는 하였으나 의롭지 아니하여,

신하가 군주를 죽였고, 어지럽고 질서가 없어 처가 지아비를 죽였으며, .....하여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자리에 올랐소. 두려워할 일 아니겠소!

송(宋)나라의 화는 <염장炎将>이 어느 지경에 처할지를 몰랐다는 것이오.”라 하였다.

 

과연 5월이 되자 <유준劉駿>이 <소劭>를 죽이고 보위에 올랐다.

 

부자간의 죽임이 형제간의 죽임을 낳은 것이었다.

신라는 크게 가물었고,

7월에는 이리떼가 그들의 시림(始林)에 들어와 사람들과 가축들이 해를 입었다 한다.

 

상이 <황>태자에게 이르길

 

“권세란 것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바이나,

그것 때문에 서로를 죽인다면 가지지 않음만 못한 것이 된다.

<동명>께서는 나라를 물려주고 어짊으로 가르쳤더니,

<광명>은 <온조>를 끌어안아 달래게 되었었고,

그리하여 부자간에 그리고 형제간에 서로를 꺼리지 않게 되었으며,

오직 <수성>과 <상부>만이 쫓겨났을 뿐이었다.

너는 경부를 맡아서 마땅히 송(宋)・위(魏)・연(燕) 등을 거울삼아

종척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눌지>가 <보금>을 죽인 것 역시 아들이 아비를 죽인 것이다.

처의 아비는 자신의 아비가 아니란 말이냐? 하물며 그 군주를 죽이다니!

그 화는 저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니, 무리들을 깨우치게 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황>이 아뢰길

 

“욕망을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아름다운 도를 따르게 하며,

고명한 선인{仙人}과 훌륭한 유사{儒士}를 존숭케 하고,

세속적인 영화로움을 중히 여기지 않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나 역시 그래야 함을 깨닫고 있음이다.

그러하니 궁실과 거마를 수리하지 말고,

후궁의 잡녀들은 내보내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하라.”라고 하였다.

 

 

 

 


장수 22년{AD454}갑오,

 

2월, 상은 황산으로 가서 <평양平昜>릉을 찾아뵙고는

<평양>릉의 그림을 그려가지고 돌아왔더니,

 

<왕문>이 간하여 아뢰길

 

“어미를 중히 여기고 아비를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야만스런 풍속입니다.

그런데도 그림을 취하고 예를 저버리시겠습니까?”라 하였더니,

 

그림을 가까이 두기를 그만두었다.

 

이때 <왕문>은 늙어서 정사에서는 물러나 있었으나 쉬지 않고 논밭을 갈아서,

거친 음식으로 스스로 즐기고 있었더니,

 

상이 이르길

 

“짐은 경이 부럽소. 그리하고 싶다하여 그리 할 수 있겠소?

천자가 서인이 될 수 없는 것이 서인이 천자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우니,

기호지세(騎虎之勢)입니다.”라 하였다.  

 

 

 

7월, 아슬라의 수졸이 또다시 경계를 범하였다.

 

<눌지>는 <천성>과 <효진>이 죽은 후에 <비유>와 서로 통혼하고서

속으론 불측한 마음을 키우더니만 이때에 이르러 그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다.

 

관노(灌奴) 소형 <주건朱虔>이 장령(長嶺)을 쳐서 목책 세 개를 빼앗았다.

 

<눌지>가 사신을 보내 애걸하여 그만하고 멎었다.

 

이때 신라에는 우박이 내렸고, 백제에는 황충 재앙이 일었으며,

별자리가 움직이고 모두들 배곯고 궁색하여 졌더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저들은 부도하더니만 우박 내리고 황충과 재앙이 일고 있음이고,

우리는 도리 지켜 섬겼더니 하늘이 양식이 모자랄까

온 집집 가득 채워주고 풍족한 풀로 천만의 양들을 살지게 하는구나.”

라 노래하였다.

 

9월, 황산으로 가서 <왕문>을 불러내 국화를 즐겼다.

 

<천룡>후가 온탕에서 죽었고, 역시 황산에 장사하였더니 춘추 63세였다.

 

상이 <삼산>후에게 이르길

 

“<천룡>은 그대와 함께 나를 섬기길 45년을 하루같이 하면서 흐트러짐이 적었었소.

어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나 있었겠나?!”라 하였더니,

 

<삼산>이 아뢰길

 

“첩은, 약한 체질이나, 먹기를 삼갔더니 병이 없습니다.

<천룡>은 튼튼하기가 첩의 배는 되었으나,

하루에 돼지고기를 일곱 근씩이나 먹어대어 살이 찐 채 총애를 바랐었습니다.

설사 말로는 성의를 다하여 지아비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몸을 가다듬는 도리를 다하지 않아서, 몸이 살아남지 못하였으니,

어찌 능히 지아비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 모두는 <천룡>의 잘못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자네는 어찌 윗사람의 잘못을 입에 담고 있소.

나도 죽으면 응당 <천룡>의 릉혈에 따라 묻힐 것이오.

자네도 죽거든 마땅히 <천룡>의 릉혈로 오시오.

<천룡>의 잘못은 즉 자네의 잘못이고, 자네의 잘못은 곧 내 잘못이었네.”라 하였다.

 

이에 <삼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천룡>이 오랫동안 궁 안을 장악하고 분별함에 있어서

<삼산>의 뜻을 거슬렀었기에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삼산>이 궁 안의 주인이 되었고, <담명>이 보좌하였다.

 

 

 

 


장수 23년{AD455}을미,

 

2월, 송(宋)의 <유준劉駿>이 찾아와서 상이 났음을 알리고 방물을 바쳤기에,

장사 <동등董騰>을 보내어 가서 조문하게 하였다.

 

<통등>은 찾아와서 투항하여 살고 있는 송(宋)의 사람이었다.

 

<유준>은 상이 났어도 숨기고 있다가

이제 겨우 부음을 고하고 서둘러서 해(海)를 건넜다.

 

그들의 어둡고 혼미함이 이러하였음에도,

망령되이 스스로를 높이고 크게 여기고 있었으니 가소로운 자이었다.

 

연이나 찾아오는 것은 막지 않았고, 그렇기에 답례할 뿐이었다.  

 

 

 

3월, 미천릉에 갔다가 <비유>가 한산에서 사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군 <풍돈風豚>이 기습하여 사로잡자고 청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불의에 나가는 것이 비록 좋은 계책 같긴 하나,

그들도 대비함이 없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잖소?

대저 일을 함에 는 항상 먼저 계획을 세운 연후에 행하여야만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손실이 크지 않은 것이거늘,

철저함 없이 임의로 일을 벌여서는 설혹 성사하여도 이롭지 않게 될 것이오.

더구나 <비유>는 사람됨이 말 많고 사람들을 가벼이 여기며

도리에 어긋나고 놀기를 좋아하니, 능히 오래가기나 하겠소?

기다리기만 하여도 나라와 자신을 좀먹을 것이고,

그대로 놔두어도 저절로 상할 것인데,

무엇하러 쓸데없이 힘들인단 말이요?”라 하였다.

 

과연 이해 9월에 <비유>가 갑자기 죽었고, 그 아들 <경사>가 섰다.

 

<비유>는 <전지>가 제 며느리와 내리붙어 낳은 녀석이었고,

<경사>는 <비유>가 <해수觧須>의 처와 붙어서 낳은 녀석이었는데,

<비유>의 처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경사>를 길렀었다.

 

<비유>는 또 <여채餘蠆>의 처와 붙어서 아들 <여은餘殷>을 낳았고,

<연길燕吉>의 처와 붙어서는 아들 <여기餘杞>를 보았는데,

모두가 귀여움을 받더니 후사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에 <비유>의 처가 <비유>를 해치우고 <경사>를 세운 것이라 한다.

 

 

 

 


장수 24년{AD456}병신,

 

2월, 우보이며 태사인 <왕문>이 나이 70에 죽었다.

 

<왕문>은 황산에서 농사짓는 필부의 아들이었으며,

학문하기를 좋아하고 행위가 도탑더니 나라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귀하게 되어 공주와 살면서도 논밭 매던 시절을 잊지 않았고,

근검하고 자신의 직분을 지켰으며,

자식들에게도 참람하지 않고 분수를 넘지 않게 가르쳤다.

 

사람들은 그를 선인 중의 선인이라 칭송하였다.  

 

 

 

9월,<삼산>후가 춘추 61세에 죽어 <천룡>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장수 25년{AD457}정유,

 

2월, 큰 바람으로 나무가 뽑혔다.  

 

 

 

4월, 신라에서는 서리가 내려 보리가 죽었다.  

 

<욱다勖多>의 딸 <제운齊雲>이 태어났다.  

 

월왕(越王) <용덕>이 나이 81살에 죽어,

그의 처 <호련胡連>에게 매년 곡식을 내려주게 하였다.  

 

 

 

8월, <해蟹>태자를 우보로 <엽언葉彦>을 경총대부로 삼았다.  

 

 

 

9월, <삼산>릉에 갔었다.  

 

<연길淵吉>이 형(荊) 땅의 왕상(王相)이 되었다.

 

 

 

 


장수 26년{AD458}무술,

 

3월, 황산에서 크게 사열을 하였다.  

 

환도(丸都)대가 <청언靑彦>에게 명하여 선기(仙記) 120권을 수찬하게 하였다.  

 

 

 

4월, 백성을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

 

호족(豪族)・토족(圡族)・우족(寓族)・천족(賤族)으로 한 것이다.

 

천족의 아들도 재주가 좋으면 국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으며,

재능이 인정되어 출사하게 되면 천족을 면하고 토족으로 되게 하였다.

 

종실과 외척이 호족과 혼인하면 반드시 경림부를 거쳐서 허락을 받고 난 연후에,

호족으로 내려가서 호적에 들어가게 하였다.  

 

 

 

7월, 장하(長夏) 도장을 세워 의논할 것을 모아 올려 매월 평가함을 규범으로 하였다.  

 

 

 

8월, <눌지>가 죽었다.

그의 아들 <자비>가 섰는데 <효진>이 낳았다.

 

<눌지>는 골육에 반감이 있어 <보금>을 죽였으며,

종당에는 또한 조정{고구려}을 배반하였고, <비유>와 사통하였다.

 

재해와 이변이 끊이질 않았으니, 필경 자멸한 것이었다.

 

봄엔 지진이 일어 금성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었고,

이것이 나쁜 조짐이었는데도 살피지 않았었다고 한다.

 

 



장수 27년{AD459}기해,

 

2월, 친히 서하에서 땅을 일구고는 부로들을 대접하면서 이르길

 

“얼마 전 이후로는 숲과 나무가 울밀하여졌고 아름들이가 되었으며,

돼지와 양도 널리 가득하고 오곡도 풍성하게 잘 여물어서 양곡창고도 크게 지었으며,

오래도록 구휼하지 않아왔소.

이것은 모두 그대들 각자가 지켜서 이룬 것이오.

자녀들을 잘 가르쳐서 이룬 것이니, 짐은 매우 흐뭇하오.”라 하고는,

 

착실하게 농사하였거나 특별한 작물을 기르거나

약재 기르기 등을 한 112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4월, 월왕(越王)의 궁으로 가서 <호련胡連>후를 위로하는 일로 <해>태자에게 이르길

 

“ 송(宋)의 <유준>은 시기하다가 골육을 주살하거나 서로 반목하였는데,

그것은 생각 하나의 차이였던 것이오.

골육지간에는 마땅히 서로 간에 어려움을 나누고

서로 간에 이바지해 주어야 함이거늘,

어찌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탐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을 위해 애쓰면서 자신을 위해 애쓰지 않으면 저절로 성사하게 되고,

자신을 돌보면서 남을 돌보지 않으면 저절로 망하는 법이야.

하물며, 골육 간에는 어떠하겠나?

경은 이를 모든 경림들이 깨닫게 하겠는가?”라 하였더니,

 

<해>가 아뢰길

 

“받잡겠습니다.

더욱 부지런히 하여 성상의 뜻하심을 이루도록 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왜 선 100여척이 신라를 습격하여 월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런 공도 없이 물러났다.

신라 군병이 이들을 북두(北豆) 해구에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죽였다.

 

 

 

 

장수 28년{AD460}경자,

 

정월, 정력(政曆)을 써서 정사를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2월, 단림신궁(檀林神宮)과 조환묘(祖環廟) 및 달가사(達賈祠)를 고쳐짓게 하였다.  

 

 

3월, 나라 안의 효자와 순손(順孫) 320인을 포상하였다.  

 

 

8월, <초련椘連>후와 함께 평양릉에 갔다가,

<왕문>의 옛집에 들러서 벼슬이 없는 아우와 자식들에게 음직(蔭職)을 내렸다.  

 

 

9월, 유연(柔然)이 사신을 보내 낙타를 바쳐왔다.  

 

<호好>비가 <호현好賢>공주를 낳았다.

 

 

 



장수 29년{AD461}신축,

 

3월, 황후 <담명>과 함께 <천강>의 무덤을 찾았다가 <평양>의 무덤에도 갔었다.

 

황후는 입궁한 지 46년을 우아하고 정숙하였으며 따사롭고 어질었고,

정성으로 제를 섬기고 8남 7녀를 낳았음에도

오히려 몸이 야물고 건장하여 아이를 더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이 총애하여 궁중의 일을 맡겼더니,

역시 큰 정사에 간섭하기는 하였으며 꽤나 잘 처결하였기에,

사람들은 보기 드문 훌륭한 황후라 칭송하였다.

 

대략 자태가 출중하고 영명하며 성품 또한 좋았으니,

용 가운데의 용이고 봉새 가운데의 봉새라 할 만하였다.

 

상이 후에게 이르길

 

“세월이 유수와 같더니 그대의 나이 역시 환갑을 이리도 지났소.

이제 몇 년 있으면 그대와 나 모두 돌아갈 때가 되었구려.

살아생전에 몸이나 돌보고 선행을 쌓아서 자손들을 위함이 어떻겠소?”라 하였더니,

 

후는 답하길

 

“첩은 성총을 두터이 받은 것 같지 않은데도, 많은 아들과 딸을 낳았으며,

아직 애 낳는 어려움은 모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큰 자비로움을 베풀어 주셨음입니다.

첩은 사람들이 선행을 닦음에 있어

필히 높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일로 하여서 의당 이전과 같기만 하고 나빠지지만 않으면 되옵니다.

높이려 하여도 헛될 뿐이고, 새로이 일을 이루기는 필시 어려울 것입니다.”

라 하였고,

 

이에 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거련> 68세, <담명> 61세이다.  

 

 

<자비>가 <미해>의 딸을 처로 삼았다.

 

<효진>은 공주를 얻어서 자신의 며느리를 삼고자 하였었다.

 

지금에 이르러 <눌기>가 죄를 얻자 신분이 낮은 이에게 출가함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 서로 간에 혼인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신라가 나라{고구려}를 등짐이 더욱 심하여졌다.

 

 

 


장수 30년{AD462}임인,

 

3월, 위(魏)의 사신 <돈익敦益>이 와서 낙타를 바치며 말하길

 

“<경鲸>태자가 선선(鄯善)땅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상은 조정을 폐하고 거애하였다.

 

태자는 옥엽의 친족으로서, 길을 열기 위하여 멀리 나가서 외딴 곳에서 죽었으며,

평생토록 고기반찬을 입에 대거나 비단옷을 입지도 않았다.

 

나라 안에서 있거나 위(魏)의 땅에 머물 때에

공주와의 사이에서 그리고 시첩들과의 사이에서 열다섯의 자녀를 두었다.

 

위(魏)에서 살고 있는 자녀가 일곱이고, 선선(鄯善) 땅에 살고 있는 자녀는 둘이 있다.

 

조정은 비용과 물자를 멀리 보내주어서 폐백물자가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상은 <경>태자가 나라를 양보한 큰 의로움이 있었기에

숭덕선제(崇德仙帝)로 추존하였으며,

그의 사당을 세우고 그 장자 <회일懷衵>이 맡아서 돌보게 하였다.  

 

 

5월, 왜가 신라의 활개성(活開城)을 깨뜨리고 천 명을 잡아갔다.  

 

<조다助多>의 아들 <라운羅雲>이 태어났다. 혹은 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9월, 용산에 가서 동명대제를 지내고 <추모대제>란 시호를 올렸다.

 

천사(天師) <황晃>태자를 동맹주(東盟主)로 삼았으며,

쌀 다섯 말로 폐백하게 하였더니 오두미(五斗米)라는 말이 생겼고,

가르침 또한 미도(米道)라 불렀다.

 

 

 


장수 31년{AD463}계묘,

 

정월, 월왕(越王)궁에 있던 <호련胡連>후가 춘추 73세에 죽었다.

 

상의 동복 누님이었다.

 

무오년{AD418}에 후궁으로 들어와서 보비가 되었으며,

후에 <창昶>태자를 낳고는 황후로 승차하였었다.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매우 삼가는 성품으로서 자식들을 잘 가르쳤기에,

오랫동안 경부의 육원을 관장하였으며 치적도 많았다.

 

상이 애통히 여겼으며 명령하여서 권도로 <평양릉> 곁에 장사하도록 하였고,

<창昶>태자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용덕勇德>의 아들 <호경胡景>도 별도로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2월, 왜가 신라의 삽량성(揷良城)을 침입하였다가 크게 패하여 물러갔다.

 

이에 신라는 해변에 성 두 개를 쌓아서 왜에 대비하였다.  

 

 

4월, 송(宋)이 <번운藩雲>을 시켜 찾아와서 옥기와 약재 70 가지를 바쳤다.  

 

숭덕사(崇德祠)로 가서 <회일懷衵>의 딸을 거두어서 비로 삼았다.

 

이 이가 <경鲸>황후이다.

 

모친은 <경鲸>의 딸 <병련丙連>이었다.  

 

 

9월, 서하로 가서 풍년 축하 연회를 베풀고,

봉천대(奉天臺)와 인제원(人濟院)을 설치하였다.

 

 

 


장수 32년{AD464}갑진,

 

3월, 유엽전(楡葉錢)을 주조하고 패전(貝錢)과 잡은(雜銀) 사용을 금하였다.  

 

새로 들인 비인 <경鲸>씨의 신궁이 완성되어

<회일懷衵>의 형제자매와 <병련丙連>에게 연회를 베풀고는,

친히 채단과 마필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회일懷衵>의 모친인 <용언龍彦>은 나이가 80줄로 높았기에,

수랏상 차리는 부엌이 음식을 이바지하게 하고, 서열로는 후의 예를 따르게 하였다.

 

<동사董泗>와 <허인許引> 등을 송(宋)에 보냈더니, 채단을 무역하여 돌아왔다.

 

 

5월, 송(宋)의 <유준>이 죽었다 한다.

 

<유준>은 형제를 죽이고 그들의 처와 딸을 빼앗았으나,

오히려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 꺼려하였고, 매일 수많은 악몽에 시달렸다.

 

이즈음에 종묘에 들어갔다가 들보가 부러져 내려서 머리가 부서졌다.

 

의술로 살릴 수 없었다.

 

<증証>의 처가 불알을 물어뜯어 죽였다는 말도 있고,

또한 <소劭>의 처는 정숙하여 그랬을 리 없다는 얘기도 있다.  

 

상이 <용덕>의 사당에 갔다가 처연하여 말없이 있더니만,

명을 내려 <용덕>의 무덤을 고치게 하고 <호경胡景>을 월왕(越王)으로 삼았다.

 

상은 점차 늙어가면서 용모와 목소리는 점점 <용덕>을 닮아갔고,

너그럽고 부지런하며 후하고 꽉 찬 성품 또한 <용덕>과 비슷하였으며,

식성 또한 꽤나 <용언>과 서로 비슷하였다.

 

계사년{AD393} 5월에 <용덕>은 내리는 비를 피하여

종종 <평양>후의 궁으로 뛰어들었었으며,

그리하여 궁에서 낮잠도 자게 되었었고, 몰래 증하였다가 제를 낳았는데,

<평양>은 <영락>의 노여움을 겁내어 이를 숨겼으며,

<마련>과 <호련>도 또한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상은 늘 이의 진실여부를 의심하여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결국 <용덕>을 존숭하려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4월, <경鲸>비가 <경鲸>공주를 낳았다.  

 

5월,<황晃>태자에게 <용덕勇德>을 제{帝}로 올리라 명하였더니,

<황晃>은 숨겨진 일이었고 드러냄은 불가하다고 여기어서 이를 말렸다.  

 

<도림道琳>을 백제로 보내서 그들의 허와 실을 염탐하게 하였다.

 

 

 

 


장수 33년{AD465}을사,

 

2월, <청언靑彦>이 위(魏)에서 돌아와 아뢰길

 

“<탁발준>이 꿈에 악귀를 보고나서 빌었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태복<희원羲元>에게 점을 쳐보라 하였더니 불길하였고,

송(宋) 또한 점괘가 그와 같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탁발준>이 죽었으며, 송(宋)도 신하에게 피살되었고,

돼지새끼 <욱彧>이 보위에 올랐다는 말이 들렸다.

 

<유욱劉彧(439-472)> 송(宋) 明帝

 

이에 상은 좌우에게 이르길

 

“내가 즉위한 이래 동쪽과 서쪽 사람들의 주인이 적잖게 시해되었소.

이것은 그 주인들이 어질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고,

그 신하들 역시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경들의 자녀 교육은 과연 어떠하시오?”라 하였더니,

 

신하 무리들이 아뢰길

 

“신들은 세상에 던져진 이래 하늘의 높으심을 알고 있사오며,

신들의 아들딸들 역시 그러합니다.

우매한 여인네나 우매한 필부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하옵니다.

이는 <동명>성덕의 돌보심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유유>・<모용황>・<탁발규> 들의 나라와

같은 햇빛이라고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옳은 말이오. 더한층 힘쓰고 정성을 배가하며,

반드시 동맹(東盟)에 들어가서 조석으로 의론하고 배우게 되면

가히 황은을 알게 될 것이오.

그대들 부처가 반드시 먼저 실행하고 나서,

그대들 자손들도 세세토록 짐을 위한 충복이 되라고 이끌어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군신들 모두가 부복하여 치사하였다.

 

상이 이르길

 

“그릇은 대소가 있어야 합해지고, 하늘은 높아진 다음에야 땅을 덮을 수 있소.

만물만사 모두가 그러한 것이오. 신하들과 백성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나라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이오.”라 하였다.  

 

 

5월, <탁발준>이 죽었다.

 

그 아들 <탁발홍>이 섰으며,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북위 顯祖 獻文帝 <탁발홍托跋弘(454-476)> 재위 466-470  

 

이 시절 신라에서는 불이 나고 물난리가 났으며, 산이 열일곱 군데나 무너졌으며,

게다가 황충 재앙도 있었다.  

 

 

7월, 상이 <경鲸>비를 데리고 온탕엘 갔다.

 

비가 임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회일懷衵>을 초왕(椘王)으로 작위를 올려주고,

초왕(椘王)비 <병련>에게는 적복을 하사했다.

 

 

 


장수 34년{AD466}병오,

 

정월, <재증걸루再曾桀婁>가 백제에서 항복하여 왔다.  

 

<탁발준>의 처 <풍馮>씨가

자신의 아들 <홍弘>을 위해 청혼하여 6궁을 갖추려 하면서,

이미 혼인하였던 이는 정후가 될 수 없음에 사양하겠다고 알려왔다.  

 

 

2월,<경鯨>비가 <관瓘>태자를 낳았다.  

 

 

7월, <풍馮>씨가 또 <정준程駿>에게 령을 내려 종실의 딸을 달라고 청하기에,

<고련皐連>의 딸 <원元>씨를 보내주었다.  

 

<탁발拓跋>씨가 <발跋>공주를 낳았다.

 

 

 


장수 35년{AD467}정미,

 

2월(윤정월), <정준程駿>이 찾아와서 채단 100필을 바쳤고,

<고련皐連>의 처 <보인宝仁>이 이를 받았다.  

 

 

4월, <고이만년古爾萬年>이 찾아와 배알하였다.  

 

<자비>가 전함을 수리하여 왜에 대비하였다.  

 

 

7월,<원元>씨가 아이가 생기자 <보인宝仁>과 <고련皐連>이 위(魏)로 갔으며,

딸 <마보马宝>를 낳았다.  

 

 

9월, 위(魏)의 <이李>후가 아들 <굉宏>을 낳자,

<풍馮>태후는 <굉宏>에 정신을 쏟고, 위(魏)에서는 <홍弘>이 친정을 하였다.

 

高祖 孝文帝 <탁발굉拓跋宏 원굉元宏(467-499)> 재위 471-499 

 

위(魏)의 천궁사(天宮寺)가 불상을 주조하였는데,

높이가 43척이었고 구리 십만 근과 금 육백 근이 들었다.

 

 

 


장수 36년{AD468}무신,

 

2월, 말갈 병 1만으로 실직성을 쳐서 빼앗았다.  

 

 

4월, 위(魏)가 또 다른 딸을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풍馮>녀 자신이 출가하고 싶다면, 짐은 응당 맞아들이겠소.”라 하고,

 

또한 이르길

 

“<여치呂雉>가 속곳을 벗었던 평성(平城)의 일과

<하란賀蘭>이 달려와서 월해(月海)에서 합환한 일은,

천년에 한 번 있을 훌륭했던 일이었소.

<풍馮>씨 집안 찌꺼기가 어찌 이들과 견줄 수나 있겠소.”라 하였다. 

 

 

9월, 황산으로 가서 국화를 즐겼다.  

 

 

10월 계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위(魏)가 또 청혼을 해왔다.  

 

<보인宝仁>이 또 <홍弘>의 딸을 낳았다,

 

<보만宝萬>공주이다.

 

 

 


장수 37년{AD469}기유,

 

2월, 위(魏)가 또 청혼을 하였다.

 

안락왕(安楽王) <진真>과 상서 <이돈李敦> 등이 찾아와 채단을 바치면서,

나이가 어리면 사양하겠다고 하였다.  

 

 

8월,<경사>가 대방에 쳐들어왔다가 패하여 물러갔다.  

 

 

10월, <경사>가 쌍현성(﨎峴城)을 고쳤으며,

또한 청목령(靑木嶺)에 큰 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의 수졸의 나누어다 지키게 하였다.

 

상은 내버려두고 그 동정을 살피라고 명하였다.

<경사>는 백제 <개로蓋鹵(429-475)>왕 재위 455-474 이다.

 

 

 


장수 38년{AD470},

 

2월, 위(魏)가 혼인하더니 또 찾아와서 혼인을 재촉하며,

예물을 바치고 황금 천 냥 및 백마 50필도 바쳤다.  

 

상은, <황晃>태자 등의 유신(儒臣)들은 물론 선신(仙臣)들과도 함께,

군학(郡學)을 세우는 것과 사대부들의 혼례 제도를 반포하는 것을 의론하였으나,

선신과 유신들 사이의 이견으로 여러 달이 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즈음 <자비>는 삼모성(三牟城)을 쌓았다.

 

<황晃>은 공손하며 부지런하고 학문하길 좋아하며 청렴하고 검소하여

천박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니, 많은 개사(介士)들이 그에게 찾아들었다.

 

 

 

 


장수 39년{AD471}신해,

 

정월, 재능 있는 인재를 천거 받아서 <오린烏鳞> 등 여덟 사람을 뽑아 들였다.  

 

 

2월, 서하로 가서 농단(農壇)에 제사하고 친히 땅을 일구었다.  

 

장군 <연길淵吉>과 <호해胡海> 등을 보내서

3만 장병과 숙신(肅愼)군 3천을 함께 거느리고

실위(室韋)를 쳐서 북해(北海)에 이르렀다.

 

2천여 리의 땅을 넓히고 금인(金人) 열두 개를 노획하여 돌아왔다.  

 

2월,<자비>가 모로성(芼老城을) 쌓았다.  

 

역질이 대방에서 흘러들었다.

 

경계하여 병이 퍼짐을 막고 치료하라 명하였다.  

 

신라의 도읍에서는 땅이 두 길이나 되게 갈라졌다.  

 

 

9월, <노구奴久>등이 위(魏)로 들어가서 경작지를 얻었다.  

 

상이 신라의 랑산(狼山) 아래 동쪽 마을에

금(琴)을 잘 타는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세가 빈한하여 헤어진 옷을 걸치고도 도를 즐기며 태연자약하고,

절구 찧는 소릴 듣고는 <최요磪楽>를 지었다.

 

이를 듣고는 모시어 들이고 싶어 하자 <황>태자가 간하여 아뢰길

 

“나라 안의 현자들도 아직 다 쓰지 못하고 있사온데 나라바깥 사람을 찾으십니까?”

라 하였다.

 

이에 상이

 

“짐은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어찌 안과 밖을 따지겠소.”라 답하자,

 

<황>은

 

“ 황룡(黃竜)과 가야(加耶)는 풍류를 좋아하다 망하였습니다.

성인은 성색에 힘쓰지 않는다 합니다.”라 아뢰었고,

 

그러자 그만두었다.  

 

위(魏)의 <탁발홍>이 아들 <원굉元宏>에게 보위를 물려주었다.

 

<탁발홍>은 세상일을 잊으려는 뜻이었으나,

아들은 어리고 어미는 재주가 없었으니 불행한 일이었다 할 만하다.

 

 

 

 


장수 40년{AD472}임자,

 

정월, 유연(柔然)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쳐왔다.  

 

 

4월, 황산에 갔다가,

송(宋)의 <욱彧>이 죽고

그가 아끼던 신하인 <이도아李道兒>의 아들 <욱{昱}>이 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蒼梧王 <유욱劉昱(463-477)> 재위 473-476  

 

위(魏)의 사신이 찾아와서 약재를 바치며 <경사>가 사신을 무고하여 죽이고

물에 버린 일을 얘기하여서 이간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상은 웃으며 이르길

 

“그 놈은 곧 저절로 지칠 것이다.”라 하였다.

 

과연,<경사>는 위(魏)가 그의 참언을 들어주지 않음에 노하여 위(魏)와 절연하였다.

 

이즈음 <도림>은 이미 <경사>와 서로 친하여져서 함께 화기애애하였다.

 

이에 제{帝}는 안일함을 반기고 정벌을 수긍하지 않았더니,

천하는 점차 편안하여 졌다.

 

궁실과 성곽 및 릉묘를 널리 고치게 하였으며,

그간 모아놓은 재물을 쓰도록 하였다.

 

 

 


장수 41년{AD473}계축,

 

2월, <황晃>태자비 <호태瑚太>공주가 환갑을 맞이하여

상과 다섯 후들에게 향연을 베풀어 올렸다.

 

상은 <황晃>이 문(文)에 공을 많이 세웠음에 오왕(吳王)으로 봉하면서 이르길

 

“너는 이제 오(吳)에서는 최고의 우두머리야.”라 하고는,

 

<호태瑚太>비와 <읍泣>비에게는 적복을 내려주었다.  

 

<자비>가 <벌지>・<덕지>를 좌・우 장군으로 삼아서 명활성(明活城)을 고치더니,

천도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일모(一牟)・사시(沙尸)・광석(廣石) 등등의 성을 쌓았다.

 

<벌지>와 <덕지>는 일찍이 서도로 와서 머물며 공부한 자들이어서

많은 서도사람들과 그리고 한(漢)인들과도 자주 교통하여

백제가 필경 망할 것이라는 흘러나온 소문을 들었기에,

자신들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위(魏)의 사신이 와서 입조하였다가 떠나가자,

이어서 유연(柔然)의 사람들이 찾아와 옥배와 옥마를 바치고 청혼하였다.  

 

 

8월, 위(魏)와 유연(柔然)에 사신을 보냈다.  

 

이해에 통곤당(統坤堂)이 완성되었다.

 

 

 


 

장수 42년{AD474}갑인,

 

2월, 황산에서 크게 사열하고는, 양왕(梁王) <화덕華德>을 정남대장군으로 삼고,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등을 향도로 삼아 선봉에 세웠다.  

 

 

 

7월, 상이 주류궁(朱留宮)으로 갔다가 황산으로 돌아와서는,

<영락>대제를 지내고서 종실과 삼보들에게 이르길

 

“선제{영락대제}께서는 국강{국강상왕=고국원제}의 치욕을 씻고자 하셨으나,

하늘이 목숨에 짬을 주시지 않았었소.

짐은 병력을 키워서 그 기회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소.

지금 때가 이미 무르익었소.

아이들 모두가 백제 해골들은 남쪽으로 물을 건너 도망가고,

신라 사람들은 몸 사리고 경계를 지킨다는 말을 하고들 있소.

인심은 암암리에 천심을 살피는 것이니,

이제는 <경> 그놈이 기필코 망할 때가 되었소.”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도 이구동성으로 찬동하였다.

 

상은, <화덕>에게 명하여 3만병을 이끌고 먼저 떠나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일모(一牟)・사시(沙尸)・광석(廣石)・답달(沓達)・구례(仇禮)・좌라(坐羅) 등

의 성을 쌓아서 백제를 대비하고 있었다.

 

백제 백성들은 북쪽의 군병이 크게 몰려 온 줄로 알고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놀라서는 집을 버리고 토굴거처로 달려갔다.

 

양 편을 잘 알아 미리 감을 잡았던 것이었다.  

 

송(宋) 땅의 사람 <계충稽冲>이 와서 알리길

 

“<휴범休範>이 거병하여 건강(建康)으로 가서 <이욱李昱>{劉昱}을 토벌하려다가,

<소도성蕭道成>에게 피살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욱彧>은, <도아道兒>와는 남색하면서,<진陳>비와 붙어서는 <욱昱>을 낳았고,

자신의 동생 열다섯을 죽였는데, <휴범>이만은 홀로 어리석은 체하면서

<욱彧>의 처자를 받들어 모시면서 죽음을 면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조금을 더 참지 못하였다가 피살된 것이었다.

 

<도성道成>이는 무부(武夫)로서 황제를 자칭하였다.

 

황금 보기를 흙같이 하며 겉치레를 꺼려하는 자였으나,

속으로는 외로운 임금을 속였었으니,

역시 <마의馬懿>나 <유유劉裕>와 같은 부류이었다 할 것이다.

상이 이르길

 

“<마의馬懿>가 <유유劉裕> 같은 이를 생기게 하고,

<유유劉裕>가 <도성道成>이 같은 자가 생기게 한 것을 제대로 된 일이라면,

<여령餘令>이 <제䨖>를 낳고 말을 바꾸어 탄 것과

<도성道成>이가 <욱昱>을 낳고 <유劉>씨로 칭한 것 역시 제대로 된 일이잖소?”

라 하였다.

 

<욱昱>은 나이가 열둘로 경솔하고 방자하였으며,

<진陳>비는 음란하고 추접한 짓을 일삼았으니 임금을 기만할 호기를 준 것이었고,

<도성道成>이 보위를 찬탈한 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 시절 위(魏)의 <풍馮>녀 또한 폐신 <이혁李奕>과 음란하고 추접하게 놀아났었고,

송(宋)과 위(魏)는 스스로는 문(文)을 세우고 도(道)를 좇는다고는 하였지만,

그들의 더러운 행실이 이와 같았더니,

 

상이 이르길

 

“짐의 후궁들은 설사 100날을 홀로 두어도 원망함이 없소.

<진陳>후와 <풍馮>녀 무리들은 추접스런 짐승 중에서도 추접스런 짐승이오.”

라 하였다.

 

이에 <황晃>태자는

 

“상전이 예의를 따르면 아랫사람들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고 하니,

곧 폐하를 두고 하는 말입지요.

<풍>녀와 <진>녀가 설사 음란하지 않았다 하여도, 낳아놓기만 하면 그리 되었으니,

<준濬>과 <욱彧>이 그리 되도록 키워냈던 것입니다.”라 아뢰었고,

 

상은

 

“두려운 일이로고!

너는 짐이 감히 삼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구나.

살펴야 할 모든 것들을 글로 써서 후세의 황제들이 조심하게 하여라.”라고 일렀다.  

 

장사(長史) <어진箊真>을 송(宋)으로, <을장乙荘>을 위(魏)로 보냈다.

 

상은 <경慶>이 놈에게 곧 베풀 생각이 있어서, 이 두 나라를 살핀 것이었다.


8월, <화덕>이 연전연승하여 백제의 도성을 포위하였고,

<경>이 놈은 오래도록 지켜낼 수 없음을 알았던지라,

먼저 처자들에게는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는데,

장군 <풍옥風玉>이 이들을 잡아서 바쳤다.

 

<경>이 놈의 처인 <아오지阿吾知>와 <가마지加馬只>, <문주>의 처 <오로지吾魯知>,

<곤지>의 처 <자마紫麻> 등은 곱게 차리고 술을 따랐는데,

슬프고 애통한 기색이 없었다.

 

상이 <아오지阿吾知>에게 이르길

 

“<초고>와 <구수> 등이 앞 사람들의 본을 따랐던들 너희들이 이리 되었겠느냐?”

라 하였더니,

 

<아오지阿吾知>가 아뢰길

 

“첩 등은 오래도록 상국의 기풍을 따르고자 하여왔었고,

지금에 와서야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동명>성조의 높으심은 하늘의 해가 땅에 내려와 계심과 같습니다.

모시게 되어 그 기쁨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중외대부에게 이르길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기름진 고기를 내어 주시오.”라 하고는,

 

깨끗이 하고서 성총받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더니,

모두가 춤사위를 밟고 노래를 불러 바쳤으며, 이윽고 모두가 승은을 입었다.

 

<가마加馬>와 <자마紫麻>가 더욱 귀여움을 받았다.


9월, 상은 북쪽의 성을 차지하였다는 얘길 들었기에,

<가마>와 <자마>를 데리고 그 성중으로 들어가려고,

먼저 길을 깔끔히 정리하라 명하였다.

 

백제의 백성들이 밤늦도록 쓸고 물을 뿌렸는데,

흉측한 놈인 <곤득困得>이 대취하여 오다가 그 길바닥에 똥을 쌌더니,

순군 <거말巨末>이 이를 발견하고 목을 베었고, 그 머리가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에 순라 기병이 <거말巨末>을 잡아서 의법처리하려 하였다.

 

법에 따르면 거둥길을 더럽힌 자는 주살 감이었고,

<곤득困得>과 <거말巨末>은 같은 죄를 지은 것이었다.

 

상이, 명을 내려 <거말巨末>의 죄를 면하여 주고,

 

이르길

 

“<거말巨末>은 충정에 못 이겨 격분한 것이었고,

스스로 말하여 변명하지도 않았다. 실수를 한 것이지,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곤득困得>의 처자와 재산을 <거말巨末>에게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곤득困得>은 알아보니 호족이었는데,

분함 마음에 취하였음을 빙자하여 거둥길을 더럽힌 것이기에,

그 가족 모두를 연좌시켰다.

 

<거말巨末>은 지체 낮은 병졸이었는데,

졸지에 부호가 되고 예쁜 처첩까지 얻게 되어 즐거웠고,

사람들 모두는 그를 부러워하였다.

 

법을 어겼어도 용서를 받았으며 전화위복이었다.

 

이에 <거말巨末>은

 

“성상의 밝으심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미 흙먼지가 되었을 것이다.”라 하고는,

 

단을 쌓고 황상을 위하여 빌었다.

 

군신들은 거둥길이 더렵혀졌다 하여 상께 북쪽 성으로 들어가도록 간하였다.

 

아단성(阿旦城)으로 들어가서 포로들을 접수하였다.  

 

<자비>는 군병을 이끌고 국경으로 나와서 관망할 뿐 가까이 오지를 못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아팠을 것이고, <문주> 등은 목줄매인 강아지 꼴이었다.  

 

9월 5일에 <재증걸루>가 <경사>를 함거에 싣고 도착하였고,

상은 <경사>를 살려주고 싶었으나,

군신들은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국강릉에 바치길 청하였다.

 

사로잡은 8천 명은 5부에 나누어 주어 노비로 삼았으며,

<경사>의 처첩과 궁인들은

공경들과 공을 세운 모든 장수들에게 비첩으로 삼게 하사하였다.  

 

<발跋>태자비 <연흡淵洽>을 황손 <라운羅雲>의 궁인으로 삼았다.

 

 

 

 


장수 43년{AD475}을묘,

 

 

정월, <자비>가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이미 명활성(明活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화덕華德> 부처에게 온수궁(溫水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화덕華德>의 나이 86살이었고 <호산好山>의 나이는 90살이었는데,

둘 다 건장하여 능히 일을 맡아볼 수 있었다.

 

<호산>은 상의 동복 누나로 일찍이 보비가 되어 <람산藍山>공주를 낳았었다.

 

<람산>공주 역시 <화덕>의 처가 되었다.

 

<화덕>의 아들 <호덕好德> 또한 나이가 67살인데도

뛰어나게 용맹하여 군진의 머리에 능히 설 수 있었으며, 역시 상의 딸을 취하였다.

 

<직織>공주가 <호덕好德>의 아들 <양덕陽德>을 낳았는데,

그 또한 도량이 큰 아비의 기풍이 있었다.

 

한 집안 3대 모두가 남쪽을 정벌하는 일에 참여하였었다.

 

상이 <호현好贤>공주를 또 <양덕陽德>에게 처로 주고

대대로 부마가 되라고 명하였다.

 

 

3월, <초楚>태자가 위(魏)에서 돌아와 고하길

 

“<이혁李奕>이 <풍馮>태후와 함부로 놀아남이 날로 심하여지더니,

<탁발홍>이에게 질시당하고 있다.”고 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탁발홍>이는 꾀가 없어서 필시 <풍馮>태후에게 잡힐 것이다.”라 하였다.


5월, <호덕好德>이 백제의 50여 성을 점령하였더니,

<문주文周>는 <자비>에게로 도망쳤다.

 

이에 상이 <자비>가 하늘을 거역함에 노하여 정벌하려 하다가,

 

<황>태자가

 

“멈출 줄 아는 것도 귀중한 것입니다.

두 마리의 사슴을 쫓아서는 아니 됩니다.”라 간하였더니, 그만두었다.

 

 

6월, <풍옥風玉>태자를 <자비>에게 보내서,

백제 땅을 나누는 문제를 의논케 하였다.

 

<자비>는 자신의 딸 둘을 태자에게 바쳐서 시침 들게 하였다.

 

태자는 <자비>가 조서를 봉행하지 않기에 책망하였고,

<자비>는 오락가락하면서 단안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때 <풍옥> 태자 41세, 신라 <자비>왕 61세, 백제 <문주>왕 34세이다. 

 

 

10월, <자비>가 웅진 땅을 <문주>에게 빌려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유비>가 형주를 빌리더니 오(吳)와 서로 다투었소.

<자비>는 필시 <문주>에게 잠식당할 것이오.”라 하였다.

 

 

 

 

 


장수 44년{AD476}병진,

 

2월, 무위(無為) 거사(居士) <양초梁貂>를 불렀더니 와서 말하길

 

“6월에 <풍馮>녀는 <풍홍>이 <이혁>을 죽인 것이 한이 되어,

짐독으로 <탁발홍>을 죽이고 나서 조정에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풍馮>녀는 위(魏)를 망하게 할 악귀요.

어찌 음란함을 즐기다가 자식을 죽였단 말인가!

소나 말도 오히려 죽여서는 아니 되거늘, 자식을 죽였다고!”라 하였다.

왜가 신라의 동쪽을 치자 <덕지>가 맞싸워서 2백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풍>馮녀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서 <탁발홍>이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이에 상은 병의 원인이 무엇이었느냐 물었고, 더위로 기가 막혔었다고 하였다.

 

상이 웃으며 이르길

 

“음기가 성하면 양기가 막히는 법이오.

그대의 나라엔 음기가 크게 번창하고 있는 것 아니오?”라 하였다.

<조다助多>태자에게 명하여 위(魏)로 가서 <탁발홍>을 문상하여서 이르길

 

“연단(鍊丹)과 황로(黃老)에서는 만법이 모두 진(真)으로 귀일하여,

우마(牛馬)를 살생하는 것 같은 티끌만큼의 어질지 못함도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고 있소.”라 하였더니,

 

누군가가 <풍馮>녀에게 고하길

 

“우마(牛馬)라 함은 <풍馮>씨 집안의 여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풍馮>녀는 감히 그게 누구냐고 묻지도 못하고,

 

<조다助多>를 후하게 대접하면서

 

“숙부이신 황상께서는 춘추가 높아지시더니

글로 써서 하시는 말씀도 이렇게도 멋지십니다.”라 하였고,

 

<조다助多>는

 

“부황께서는 누님이신 후와 월해에서 만나시길 바라셨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풍馮>녀는 몸이 늙어 이미 속옷을 풀어헤칠 욕정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하란>같은 근력도 없었을 것인데,

어찌 능히 광한전(廣寒殿)으로 날아갈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늙은이가 오히려 달아올라서 <조다助多>와 상통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조다助多>는 바야흐로 나이가 서른셋으로,

<가란嘉蘭>의 소생이어서 <풍馮>녀와는 정이 깊었었다.

 

<풍馮>녀는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정식 후사로 삼아주길 청하더니,

결국 동궁부(東宮府)를 설치하고 관료들도 딸려주었고,

<조다助多>는 <풍馮>녀가 붙잡는 바람에 위(魏)에 눌러앉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동궁의 인장과 책봉서를 위(魏)로 보내주었더니,

위(魏)도 별도로 책봉의식을 행하여 주었다 한다.

<문주>가 <해구觧仇>를 병관좌평으로 삼아서 대두산성(大豆山城)을 고쳐쌓고,

한수(漢水) 북쪽의 백성들을 옮겼다.

 

탐라의 사신이 래조하는 도중에

<문주>에게 가로막혀 위로받고 설득당하더니 상통하여,

탐라의 주인을 좌평으로 봉함을 받게 하였다.

 

사신 자신은 은솔이 되었다.

 

탐라는 선제의 시절에 찾아와 항복하고 매년 공물을 바쳐왔었는데,

다시금 지금에 이르러 두절되었다.

 

이즈음에 <호덕>이 송(宋)나라를 왕래하는 <문주>의 사신을 해{海}에서 사로잡아

그 사신이 송(宋)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더니,

<문주> 또한 탐라의 사신을 가로막았던 것이었다.  

 

 

 

10월, <타성沱城>이 자신의 처 <연도淵濤>를 한(漢)인 <진복晋福>에게 주고,

<진복晋福>의 처 <단장段丈>을 자신의 처로 삼았다.

 

이 시절 처를 서로 바꾸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타성沱城>은 처를 바꾸고 나서 갑자기 부유해졌다.

 

 

 

 


장수 45년{AD477}정사,

 

정월, <연흡淵洽>이 황증손 <흥안興安>을 낳았다.

 

애초 <연흡淵洽>이 태어날 적에,

상은 꿈속에서 흰 곰을 보았던지라 <연흡淵洽>을 상의 딸과 같이 사랑하였다.

 

황손{라운羅雲}은 이미 원복(元服)을 입었기에,

명을 내려 <연흡淵洽>을 궁으로 삼게 하였다.

 

산상(山上) 시절에 <우술于術>이 동궁대부가 되어 동천(東川)을 보좌한 이래로,

1기 이상 경림으로 있던 이를 보비로 삼는 풍조가 관습으로 되었었다.

 

<연흡>은 황손의 벼리가 되어 오래도록 황손에게 총애를 받더니만,

이윽고 황증손을 낳기에 이르렀고, 황손의 정비로 봉함을 받은 것이었다.

 

전각은 백웅전(白熊殿)으로 하였다.

 

보비를 정비로 삼는 풍조는 <연淵>씨로부터 비롯되었다.

 

<발跋>태자는 이때 위(魏)에 머물고 있으면서

<풍馮>녀의 사위가 되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문주>는 궁실을 중수하였고,

그의 처 <해>씨는 병관좌평 <해구>와 상통하면서 정사를 함부로 주물렀다.

 

<문주>는 자신의 세력이 외톨임을 알고는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삼근>을 적윤으로 삼아서 <해>씨를 위안하였으며,

<해>씨가 <해구>와 상통한 것은 혼인하기 이전부터였던지라

졸지에 막을 수도 없었다.

 

<해구>가 자신의 종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혹은 이복형라고도 한다.

 

 

 

7월, <곤지>가 갑자기 죽었다. <해>씨가 짐독으로 죽였다고 한다.

<이욱李昱>이 나이 열다섯에 음란하기로 빼어나고 교만 방자하여,

<도성道成>의 배에 대고 사정{射精}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성道成>의 처와 딸과도 놀아났더니 <도성道成>이 노하여 <이욱李昱>을 죽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도아道兒>도, 인간이 더럽고 추하더니만, 나라를 세우자마자 망해가고 있다.

누구든 폐신을 두려거든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왜가 다섯 길로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상이 왜에게 조서를 내려 신라를 평정하면 작위를 내리겠다고 하였더니

그들의 성의가 이러하였던 것이었다.  

 

 

 

9월, <문주>가 서원(西原)으로 사냥을 나가자,

<해구>가 자신의 심복 신하를 시켜서 몰래 엿보아 죽였으나,

자신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삼근>을 세웠다.

 

삼근은 나이는 겨우 열 셋이었으나,

남을 으르는 힘이 있고 능히 복속시킬 수도 있어서 <해구>의 딸을 처로 삼았다.

 

<해구>의 처 <진真>씨는, <해구>가 <해>씨와 서로 놀아나는 것이 싫어서,

 

<삼근>에게 고하길

 

“모후가 첩의 지아비와 상통하여 폐하를 위해하려 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첩의 오빠인 <진남真男>과 함께 계획을 세우셔서

그들을 쳐버려야 하실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삼근>은 그래야 하겠다고 여기어

<진남真男>을 위사좌평으로 삼고 위졸 2천여 명을 늘려 모아서 훈련시켰다.

 

<해구>는 <해>씨에게 명하여 <삼근>을 죽이라 하였으나,

자신이 그를 낳은지라 죽일 수 없었고,

<진真>씨 모녀 또한 등용되어 출사하고 있는지라 보호하기에 만전을 기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황손에게 가르쳐 이르길

 

“<문주>는 얌전하고 유약하여 끝내 자신을 죽게 하였고,

<해구>가 임금을 죽이는 것 또한 필경 호랑이가 노루 잡듯 쉬울 것이다.

사람을 등용하여 권한을 주고 세력을 옮기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훗날 너는 임금이 되거든, 꼭 이 말을 세 번씩 떠올려라.”라고 하였다.

 

상은 아끼는 딸 <경鯨>공주를 황손에게 비로 삼아주고

나라를 물려 줄 뜻을 가지고 있었음이고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11월, 송(宋)의 <원찬袁粲>이 <도성道成>을 죽이려다 일이 틀어져서 죽었다.

 

아비와 아들들이 석두성(石頭城)으로 끌려가서 찢겨져 죽었다.

 

이 일에 앞서 <도성道成>의 처와 딸 그리고 <원찬袁粲>의 처와 딸 모두가

<유욱劉昱>에게 간음을 당하였던지라,

<유욱劉昱>을 죽이고 <유준劉準>을 세우게 되었었고,

<도성道成>의 딸은 <유준劉準>의 처가 되었으나

<원찬袁粲>의 딸은 그러하지 못하였었다.

 

이리하여 <원찬袁粲>은 <저연楮淵>과 함께 모의하여

<도성道成>을 죽이고 송(宋)을 나누어 갖고자 하였었다.

 

그때 마침 <저연楮淵>은 은밀하게 그런 모의가 있었음을 듣게 되었고,

이에 <저연楮淵>은 모의한 것이 새어나갔음이 두려워서 먼저 찾아가 고하였다.

 

이에 <도성道成>은 <원찬袁粲>을 주살하고

<원찬袁粲>의 처와 딸은 <저연楮淵>에게 주었으며,

자신은 <저연楮淵> 아들의 처를 첩으로 삼았으며,

<원袁>씨의 재물과 여자들을 모조리 빼앗아 한꺼번에 쓸어내었다.

 

진(晋)의 사람들은 <원찬袁粲>을 충효한 자라고 하고

<저연楮淵>을 간악한 자라 하였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소蕭>・<원袁>・<저楮>씨들 모두는 모리배가 분명한데,

어찌 그들에게 충과 효가 있단 말이냐!

그럼, 왜 석두성(石頭城)으로 보내어 <저연>을 살리라고 시키지 않았단 말이냐?”

라 하였더니,

 

황손이 아뢰길

 

“<유욱>을 죽인 일은 폐신 종자들을 없앤 것이지 반역한 것이 아니고,

<유준>을 겁박하기에 다다랐던 것은 신하이길 뿌리친 것이니,

<원찬>이를 옳다 하고 <소도성>이를 비난하면 사리에 맞을듯합니다.”

라 하였더니,

 

상은

 

“옳다”라고 하고는

 

“내 아이가 나이 열여섯에 사리를 분별함이 이러하니 나보다 낫겠구나.”라 하였다.

 

황손에게 명을 내려 <경鲸>후의 궁으로 가서 술을 마시라 하였더니,

<경鲸>후는 상의 뜻을 알아챘다.

 

머물게 하여서 잠자리를 함께 하였던 것이다.

 

이때 <경鲸>황후는 춘추가 서른하나이어서 색도가 펄펄 끓고 있었다.

 

상은 팔십 줄의 노령이어서 그런 도엔 힘이 부치자, 황손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장수 46년{AD478}무오,

 

2월, 기해일에 <경鲸>공주를 황손 <라운羅雲>의 비로 삼고,

그 전각의 이름은 청룡전(靑龍殿)이라 하였다.  

 

 

3월, 기유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해구觧仇>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大豆城)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에 <진남真南>이 위졸 2천 5백을 이끌고 이를 쳤다.

 

<진남真男>의 조카 <진로真老>가 날쌘 자 다섯을 추려서,

수로로 성을 깨고 돌입하여 <해구>를 사로잡아 베어버렸더니,

<연신>은 도주하여 고구려로 들어와 상에게 하소연 하였더니,

상이 이를 받아주라 명하였다.

 

<삼근>은 <연신>의 처자식을 웅진의 저자에서 찢어 죽였다.

 

<해구>의 처는 내응해서 공을 세웠다 하여 국대부인이 되었고,

<삼근>이 상통하여 아이가 생겼다는 말이 있다.  

 

<풍옥>태자의 딸 <하풍賀風>을 <관瓘>태자의 궁인으로 삼았다.

보비(補妃)를 삼은 것이었다.

 

<하풍賀風>은 초(椘) 태자 <회녕懷寧>의 비였는데,

<관瓘>태자와 기갑의 연을 맺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애초에 <관瓘>태자가 태어났을 때 <하賀>공주가 젖을 먹였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또 <하풍賀風>이 <관瓘>태자의 총애를 받아서

상을 받음이 심히 많았다.

 

<회녕懷寧>은 <경鲸>후의 동복 남동생인 <관瓘>태자의 외삼촌이었다.

송(宋)의 사신 <저옥猪玉>이 찾아와서 향물・견지・법주를 바쳤다.  

 

 

 

10월, <자비>의 도성에 큰 지진이 있었다.

 

<자비>도 그 곳에서 흙에 깔렸으며, 압사한 이가 수백 인이나 되었다.

 

황상을 배반한 벌을 받은 것이었다.

 

 

  

장수 47년{AD479}기미,

 

2월 초하루, <경鲸>황후가 아들 <보연宝延>을 낳았더니,

황손에게 명하여 씻어주게 하였다.  

 

<자비>가 지난해 지진으로 무너진 흙에 깔렸던 이래로 극심하게 앓다가

이달 3일에 죽었고 아들 <비처>가 섰다.

 

<비처>의 어미는 <미해>의 딸이었다.

 

혹간엔 <미해>의 애첩인 왜녀가 <자비>와 통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비처>의 처 <선혜>는 이찬 <내숙>의 딸인데 아리땁고 간사하며 음란하였다.

 

그러나 <비처>는 효성도 있었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양하고 공손하였더니,

<선혜>가 정사를 주물렀다고 한다.


4월, <소도성蕭道成>이 <유준>을 죽이고 보위에 올라 제(齊)의 왕을 칭하였다.

송(宋)이 망한 것이었다.

 

齊 高帝 <소도성蕭道成(427-482)> 재위 479-482 

 

<소도성>이 <유준>을 죽인 것을 보면,

자신의 심복 신하인 <왕경王敬>에게 명을 내리자 즉각 <유준>을 사로잡았고,

<유준>은 훌쩍이며 목숨을 구걸한즉,

 

<왕경>이 이르길

 

“불쌍하게 된 것은 불쌍하나,

그대의 할아비도 <사마司馬>씨에게서 빼앗았던 것이며,

이와 같았었으니 훌쩍이지 좀 마시오.”라 하였다.

 

이에 <유준>은 소리 내어 곡하면서,

죽은 후엔 다시는 왕을 하는 집안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얘기를 들은 이들은 코끝이 시큰하였다.

 

<소도성>은 송(宋)의 족당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여인네들만은 살려서 뿔뿔이 흩어지게 하여서 공경들의 비첩이 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제왕이 된 이들은 좋아만 할 것이 아니고,

덕을 닦아서 자손들이 이어지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 하였더니,

 

<관瓘>이

 

“덕을 닦는다는 것은 어찌 하는 것입니까?”라 물었고,

 

상은 답하길

 

“형제간에 다투지 말아야 한다.

너는 <라운羅雲>을 형으로 받들고 말 잘 듣고 따르며 다투지 말거라.”라 하였다.

 

<관瓘>은

 

“예!”라 하였다.

 

이때 <관> 14세, <라운> 18세이다.  

 

위(魏)가 거란과 상통하였다.

 

거란은 매년 조공을 하면서 여색을 바쳐왔었는데,

요사이에 이르러서는 위(魏)에게 딸을 바치고는 신하의 도리를 게을리 하고 있어,

장사(長史) <하세賀世>를 보내어 꾸짖었다.


9월, <삼근>은 대두산성을 두곡(斗谷)으로 옮기고 피하여 갔고,

조정은 <연신>에게 <해구>의 남은 무리들을 모으게 하였다.

 

<삼근>을 토벌하려 함이었다.

 

<삼근>은 열다섯으로 어린 나이에,

<해구>의 처 <진>씨와 그 딸을 처로 삼았으며,

또한 <곤지>의 처 <진선真鲜>을 첩으로 삼고는 나날을 음란하기로 지새웠고,

<곤지>의 아들 <모대>를 아들로 삼았다.

 

겨우 한 살 아래인 <모대>는 잘도 <삼근>을 아비로 받들었고,

게다가 담력도 있고 활도 잘 쏘았으며 몸가짐과 범절이 매우 고왔더니,

<삼근>은 그를 곁에 가까이 두고 정사를 맡겼다.

 

이때 <삼근三斤(465-479)> 15세, <모대牟大(466-501)> 14세이다. 

 

<모대>의 어미 <진선>은 총애를 받음이 최고였으나

슬그머니 자리에 눕더니만 병으로 죽었다.

혹간엔 <모대>를 위하여 스스로 짐독을 먹었다고도 하였는데,

이는 <해구>의 처가 유포한 것이었다.  

 

 

 

11월, <모대>가 즉위하고 <삼근>이 죽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해구>의 처와 딸 모두는 <삼근>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죽었는지를 몰랐다.

 

<모대>는 <해구> 처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삼근>을 섬겼던 <해구>의 딸을 처로 삼고,

자신의 외삼촌 <진로>를 위사좌평으로 삼았다.  

 

상은 황손과 <경鲸>후를 데리고 온천엘 갔다.

 

<풍馮>녀가 <조다助多>태자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리(卑離)의 <첩실疉實>이 거란과 모반한 일이 발각되어,

명을 내려 해산(海山)으로 유배 보내고, <대산帶山>을 시켜 다스리게 하였다.

 

 

 

 


장수 48년{AD480}경신,

 

2월, <조다助多>태자의 시신이 위(魏)에서 도착하였다.

 

<이혁李奕>이 <풍馮>태후와 좋아지냈던 이후에,

태자{조다助多}가 <풍馮>후와 좋아지내면서 애를 낳음에,

시새움이 적지 않더니만 자객을 시켜서 여러 번을 엿보았었고,

이때에 이르러 괴이한 도적의 화살을 맞아 독으로 죽은 것이었다.

 

이에 상이 소리 내어 울면서 이르길

 

“아비는 동쪽의 황제이고, 너는 서쪽의 황제여서 복이 이미 넘쳤었거늘,

너는 왜 조심하지 않았다가 이런 꼴이 되었느냐?”라 하였다.

 

<조다助多>비가 울면서 아뢰길

 

“황상이신 아버님이 설욕해 주시길 원합니다.

<풍홍馮弘>과 <풍馮>년이 죽인 것입니다.

어찌 알고서도 복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 하니,

 

상이 이르길

 

“네가 오래도록 지아비 없는 홀몸이 되더니 아비를 원망하는구나.

내가 어찌 내 잘못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다만 너는 아들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개가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황손에게 명하여 어미와 함께 가서 황산에 묻어주라 하였다.  

 

 

 

4월,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소도성>이 사신을 보내와서 능라금수 및 공작 등의 물건을 바쳤다.

 

장사 <왕진王晉>에게 명하여 답방 사신을 보내 만나보게 하였더니,

 

위(魏)의 수군이 붙잡아 억류하였다.

 

위(魏)주가 말하길

 

“<도성>이는 임금을 죽인 도적놈인데, 숙황께서는 어찌 오가게 하십니까?”

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찾아오는 자는 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11월, 말갈에 명을 내려서 신라의 비열홀을 쳤다.

 

 

 

 

 

장수 49년{AD481}신유,

 

정월, 상과 <욱호勗好>가 용산의 온탕으로 거둥하였다.

 

지난해 봄부터 상과 <욱호勗好>는 좋아지내길 계속하더니만

지금에 이르러 아이가 생기자 젊은 여인을 사랑함이 날이 갈수록 더하였다.  

 

 

2월, <비처>가 비열홀로 가서 군사들에게 안부를 묻고 군포도 내려주었다.  

 

<양덕>이 말갈 병 2천을 이끌고 <창昶>태자와 함께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쳐서 취하고 미질부(彌秩夫)로 진군하였더니,

신라・백제・가야 등의 군대가 와서 니하(泥河)를 막아섰다.

 

니하(泥河)의 서쪽에서 싸워 천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더니,

<덕지>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물리쳤다.  

 

<소도성>의 사자가 또 찾아왔다.  

 

 

 

5월, <연정淵淨>의 처 <제운齊雲>을 <완琓>태자의 보비로 삼아주고,

상이 <제운齊雲>에게 석류꽃과 보배로운 비녀를 주었다.  

 

 

 

6월, <욱호勗好>가 <담曇>을 낳았다.

 

 

 

 


장수 50년{AD482}임술,

 

정월, <경鲸>후가 아들 <보기宝器>를 낳았다. 역시 황손의 자식이었다.  

 

 

2월, 신라에서는 큰바람에 나무가 뽑혔고, 금성의 남문에 불이 났다.  

 

<모대>가 <진로真老>를 병관좌평으로 삼아서 병마의 일을 맡기고,

그의 딸을 둘째 처로 삼았다.  

 

 

9월, <양덕>이 말갈 병을 이끌고 한산성을 쳐서 깨뜨리고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10월, 큰 눈이 내려 한 길 정도 쌓였다.  

 

<연흡淵洽>이 황손의 딸 <합合>을 낳았다.

 

상이 백웅궁(白熊宮)에서 청룡전(靑龍殿)으로 가서 <경鲸>공주를 위무하고,

<하풍賀風>도 불러서 모두에게 승은을 내렸다.  

 

이해 초 봄에 <소도성>이 죽고, 그 아들 <소색蕭賾>이 섰다.

 

齊 武帝 <소색蕭賾(440-493)> 재위 483-493



 

 

 

 


장수 51년{AD483}계해,

 

정월, 상이 루대에 올라서 백성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천하가 태평한지 오래인지라,

백성들은 무위(無為)를 생각하고 법치를 반가워하지 않게 되었다.

 

정월과 8월엔 백성들이 밤새 쏘아 다닐 수 있게 하고,

남녀가 서로 마음껏 희롱하며 후미진 곳으로 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더니,

뽕밭 얘기와 웃통을 벗고 화합함이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상은 <하풍>과 함께 웃으며 말하길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나같구먼! 도리는 어찌 되어 나아갈까나?”라 하였다.  

 

 

2월, <모대>가 한산으로 가서

군사들과 백성들을 10여일이나 위무한다는 소식이 들렸더니,

‘찾아가 죽이겠다.’고 자원한 장사들 일곱 사람이 있었다.

 

이에 상이 이르길

 

“성인이라면 일을 함에는 응당 확실히 드러내어 해야 할 것이오.

어찌 자객을 풀어 해치운단 말이오?”라 하였다.  

 

 

4월, 신라에서는 큰물로 가옥들이 쓸려나갔는데,

<모대>는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여 신록을 잡았다.

 

이에 상이 이르길

 

“<모대>는, <비처>에게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비처>가 화를 당하였음에 찾아보지도 않고 자신은 행락하고 있으니,

둘은 오래지 않아 서로 갈라 설 것이다.”라 하였다.  

 

 

7월, 또 큰물이 나자 <비처>는 일선(一善)으로 나가서 백성을 구휼하였고,

<모대>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8월, 상이 <욱호勗好>와 함께 황산으로 가서 여러 무덤을 돌아보고,

유사를 불러서 효경과 논어를 강설하게 한 다음, 용산의 온탕으로 들어갔다.

 

이때 <욱호>가 또 상의 자식 가지게 된 때문이었다.  

 

 

9월, <주근朱根>태자의 사당을 늘려짓고,

그 집안의 종실녀 <주훤朱萱>씨를 맞아들였다. 나이 14 살이었다.  

 

 

11월, 우레가 일었고,

큰 돌림병이 신라의 도성에서부터 만연하여 백제에 이르더니만

급기야는 나라의 남쪽에까지 다다랐다.

 

백성들을 조심시키고 약을 비치하고 멀리 나다니지 말라 일렀다.  

 

 

12월, <욱호>가 <균稛>태자를 낳았다.

 

상이, <호好>후와 함께 씻어주고,

 

이르길

 

“<욱호>가 나 때문에 수고가 많으니 후로 봉해야 하겠다.”라 하였다.

 

그 령에 따라 관리가 절차를 정하니,<황>태자가 나서서 말렸으나 물리쳤다.

 

<욱호>는 어린 시절부터 상의 총애를 받았으며,

요사이에 와서는 그 정도가 더욱 깊어지더니, 또 셋째 아들을 낳았다.

 

그리하여 총애가 후궁으로 기울었다.

 

그녀의 어미 <호好>후 또한 <욱호>로 인하여 총애를 회복하였다.  

 

<을지번乙支蕃>이 위(魏)로 가서 <보국宝囯>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종실록을 만들었으며, 이름이 오른 자는 52인이었다.

 

 

 


장수 52년{AD484}갑자,

 

정월, 상이 위(魏)가 동성 간의 혼인을 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며 이르길

 

“손아래나 손위로 치붙기를 가리지 않은 놈이 다른 사람을 훈계하겠다고?”라 하였다.

 

이에 <풍옥>이 아뢰길

 

“명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욕정과 사람들 마음의 차이일 것입니다.

실상으론 위아래를 가리지 않을지라도,

명분이 동성혼을 금한다면, 오랜 세월이 흐르면 필시 풍속으로 될 것이어서,

실상이 명분을 가벼이 하기는 불가할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없다가는

 

“지난겨울에 짐이 <욱호>를 후로 세웠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색두(索頭) 만도 못하였었소. 지난 처사가 부끄럽소.”

라 하였다.

 

이를 듣자 <욱호>는 화가 치밀어서 상의 뺨을 때리고 훌쩍이며 말하길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비익조(比翼鳥)가 되자던 큰 약속의 짐을 가벼이 여기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은 능히 제압할 도리가 없어서 엎드려 사과하고,

명을 내려 <욱>후 궁의 보전을 금과 옥으로 치장하게 하여서 <욱>의 마음을 달랬다.  

 

<양덕>이 들어와서 상주하기를

 

“ 신라가 <오함>이벌찬을 시켜서 백제를 대비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두 적들은 곧 저절로 어지러워 질 것입니다.

청컨대 기회를 잡아서 그들을 토벌하소서.”라 하였다.

 

이에 상은 <풍옥風玉>과 <호용>에게 명을 내려

<양덕陽德>과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3월, 토성이 달을 범하였더니, 우박이 내렸다.

 

상이 <라운>에게 이르길

 

“내가 네 나이 땐 여러 비 들과 어울리고서도 멀쩡하였었는데,

나이가 90을 지나니 먹고 즐기는 것이 전과 같지 않구나.

인생이란 참말로 한바탕의 꿈이거늘,

내가 어찌 이리 구구하게 정사에 매달려야 하겠느냐?

네가 <황晃> 등과 더불어서 몸소 정사 돌보길 즐겨하니,

나는 장차 네 어미와 함께 행락이나 하면서 남은 세월을 보내야 하겠다.”라 하고는,

 

황손에게 명하여 감국 하라고 하였다.

 

<욱호>와 더불어 의론하여 그리 결정하였으며, <황晃>태자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상은, <경鯨>후의 궁으로 가서 <경鯨>씨 및 <추운秋雲> 등에게 승은을 내리고,

나날이 노래하고 춤추기를 낙으로 삼았다.  

 

 

4월에는 <호현好賢>궁과 <제운齊雲>궁으로 들었다.


7월, <양덕>이 관산성(毌山城)을 빼앗았더니,

신라와 백제가 병력을 합쳐서 쳐들어오기에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10월, <회녕懷寧>이 위(魏)에서 돌아와 얘기하길

 

“ 위(魏)가 우리의 사신을 맨 앞자리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강하고 숙부의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웃으며 이르길

 

“할애비를 숙부로 여기는 놈을 어찌 능히 예의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라 하였다.  

 

수사(水師)가 <부신芙信>을 지휘하여

<모대>가 제(濟)로 보낸 사신 <사약사沙若思>를 붙잡아 왔다.

 

상이 <모대>의 나라 다스림이 어떠하였었느냐고 물었더니,

 

<사약사>가 아뢰길

 

“똑똑해 보이긴 하나 위세가 없어 권신들이 그를 업신여깁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삼근>의 처를 처로 들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과연 그리하였는가?”라 하였더니,

 

계속하여 아뢰길

 

“즉위 초에는 그리하였었으나,

나라사람들이 <해구>의 딸임을 들어서 그녀를 폐하라 청하였습니다.

지금은 <진로>의 딸이 상비이고, <연돌燕突>의 딸이 부비로 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연신>이 아뢰길

 

“<연돌>의 딸은 신이 일찍이 첩을 삼았던 적이 있고,

<진로>의 딸은 역시 <삼근>의 여자였었습니다.”라 하였고,

 

상이 이르길

 

“<모대>는 어찌 이리도 숫처녀를 피하였는가?”라 하였더니,

 

<사약사>가 아뢰길

 

“무당의 얘기 때문이었습니다.”라 하였고,

 

이에 상은

 

 “<모대>는 자신하지 못하니 위세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잡히겠구나.”라 하였다.  

 

<양덕>의 처 <호현好賢>을 <공玜>태자의 보비로 삼았다.  

 

<호운湖雲>이 황손의 집사 <곡춘谷瑃>의 아들 <주珠>를 낳았다.

 

 

 


장수 53년{AD485}기축,

 

2월, 신라가 구벌성(仇伐城)을 쌓았다.  

 

 

3월, <주훤朱萱>씨가 상의 아들 <훤萱>공을 낳았다.

혹은 황손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 천사(天師) <담태談太>를 위(魏)로 보내었더니,

위(魏)가 <정신正信>공주를 그에게 처로 주었다.

 

<담태談太>는 <천강天罡>후가 낳은 상의 아들로 나이는 68살이었으며,

<정신正信>은 <풍홍>의 딸로 나이 열일곱이었다.  

 

<모대>는 <백가>를 <비처>에게 보내서 북쪽의 계책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장수 54년{AD486}병인,

 

정월, <비처>가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서 일선(一善)의 장정 3천을 징발하여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두 성을 고쳐 쌓았으며,

<선혜>의 아비 <내숙>을 이벌찬・참국정(叅國政)으로 삼았다.

 

이에 상이

 

“<선혜>가 여우같이 음탕한 계집으로 정권을 틀어쥐었으니,

비록 성을 쌓았다고는 하나 무슨 소용 있겠는가?”라 일렀더니,

 

황손이

 

“계집이 비록 여우같이 음탕하여도 군왕이 곧게 서있다면야,

어찌 감히 나라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부황께서도 조금만 흔들리셨더라면 궁중은 <선혜>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상은, 크게 웃으며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연흡>이 주청하길

 

"자신의 아비인 <황晃>이 황손이 감국 한다는 말에 마음 내키지 않아 합니다.

장차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대비하시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길

 

“<황晃>은 효심이 있으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기필코 그런 움직임은 없을 것이고,

설사 내가 죽더라도, 저 또한 이미 나이가 들었는데, 어찌 모반할 수 있겠느냐?

다만 <황晃>이 오래도록 국정을 틀어잡고 있었으니,

천하에 두루 퍼져있는 그의 수하나 심복들이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세력을 한꺼번에 모조리 잃을까봐 걱정하기는 할 것이다.

네가 <연흡>을 정비로 삼고 <황晃>을 아비처럼 생각하여,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한다면, 그도 안심할 것이다.”라 하였다.  

 

황손이 <황晃>태자를 아비로 여기고 주국상노(柱國上老)로 높였더니,

<황晃>은 점차 안심하는 안색이었다.


4월, 위(魏)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왜가 신라를 침범하였다.

 

<모대>는 <백가>를 위사좌평으로 삼아서 <소색蕭賾>과 연통하였다.  

 

 

7월, 상이 <욱호>와 온탕으로 갔으며,

<풍옥>의 딸인 <호국瑚國>의 처 <하전賀田>을 <장萇>태자의 보비로 삼았다.  

 

<모대>는 궁실을 고치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쌓았다.  

 

 

9월, 상이 황산에서 크게 사열하고,

< 욱호>・<하>공주・<하풍>・<제운>・<경>씨 등과 함께 국화를 즐기는 연회를 벌였다.  

 

<모대>와 <비처> 등도 역시 모두 군병을 조련하였다 한다.  

 

황손의 집사 <곡춘谷瑃>이 <호운瑚雲>공주와 혼인하였다.

 

 

 


장수 55년{AD487}정묘,

 

2월, 상이 <경鲸>후와 <鲸경>씨를 데리고 온탕으로 갔다.  

 

<비처>가 나을신궁(奈乙神宮)을 세웠다.  

 

 

3월, 관도(官道)와 우역(郵驛) 및 숙장(宿場)을 수리하였다.  

 

 

5월,<경鲸>후가 아들 <거琚>태자를 낳았다.

 

황손을 감국소황으로, <경후>를 감국황후로,<욱호>를 집정황후로 삼고,

기거하고 출입하는 것을 모두 상의 지위에 준하게 하였다.  

 

<연정淵淨>을 위(魏)로 보내서 예물을 냈다.

 

<장萇>태자가 곧 위(魏)의 공주와 혼인하기 때문이었다.  

 

 

7월, <신라>가 월성의 지붕을 수리하였다.

 

10월, 우레가 쳤다.  

 

비리왕(卑離王) <첩실疊實>을 평양(平壤)에 머물게 하였다

 

 

 


장수 56년{AD488}무진,

 

정월, 상이 우림위두 <해달觧達>을 주살하였다.

 

<해달>은 <경鯨>씨의 궁으로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 침비인 <단산葮山>과 놀아났다.

 

이즈음에 <선혜> 또한 푸닥거리하는 선인인 <묘심>과 상통하다 주살되었으니,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운기 탓이라 여겼다.  

 

 

2월, 감국황제가 백웅궁에서 숭노연을 베풀었다.

 

90살 넘는 이가 12명, 105살 넘는 이가 10명, 120살 넘는 이는 7명이 참석하였다.

 

관노부(灌奴部)에서 온 여자가 102살에 딸을 낳았기에,

소와 양 20마리를 하사하고는,

 

이르길

 

“나는 불로초와 불사주를 먹었는데도

근래에 들어서는 좀처럼 색을 즐길 수 없게 되었고,

열흘 또는 한 달이 지나도록 후비를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데,

그대는 무슨 묘술이 있어 이리 될 수 있었는고?”라고 물었더니,

 

답하여 아뢰길

 

“5년에 한 번 출산하였으며,

애 낳을 때가 아니면 남정네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 때문이라면 단지 물속에 사는 생선과 산에서 나는 조 뿐이었으며,

마시는 것 때문이라면 산양 젖이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윽고 상이 산양 젖을 맛을 보더니,

이렇게 맛이 좋은 것을 이제야 맛을 보다니, 의원들은 무엇 했단 말인가!”라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그녀의 이름을 양유(羊乳)라 하였다.

계루부(桂婁部)의 <온달溫達>은 128살인데 좀 힘살이 돋은 남자는 아뢰길

 

“신의 소견으로는 평생을 극기할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였고,

 식색 또한 단지 자연에 맡겼을 뿐이었습니다.”라 아뢰었고,

 

개마에서 온 112살 먹은 <수천壽千>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으며, 몸이 춥거나 덥지 않게 하였습니다.

거칠게 먹고 색은 덜 밝혔더니,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라 아뢰었다.

 

황산에서 온 107살 먹은 <오득五得>은

 

“ 모두 타고난 것이었지, 달리 애쓴 것은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모두들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며,

얼굴조차 닦지 않는 이도 많았으나,

모두들 능히 효성으로 봉양하는 자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이 말하길

 

“사람 수명의 길고 짧음도 역시 효양에 달렸으니,

효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라 하였다.

 

명을 내려 효원(孝院)을 세우고,

천하의 효성스런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와 손녀를 살펴 찾아서,

관직을 주고 곡식을 하사하였다.

 

<방곡坊曲>촌장 같은 이들은 모두 효자만 임용하였다.

 

상은 또 감국황제에게 이르길

 

“너는 실상은 내 아들이다. 네 어미가 그것을 알고 있다.

내 나이가 이 만큼 된 것도 역시 너희들의 효양 덕분이다.

나도 오늘 이후부터는 스스로를 속박하여

천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너 또한 과로를 자제해라.”라고 하니,

 

감국이 아뢰길

 

“신은 위로는 부황과 모후를 받들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보살펴야 하는데,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마음속에서 스스로 그 일을 기뻐하면, 수고로운 줄 모를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크게 기뻐하며 끌어안아 위무하며 이르길

 

“진정 내 아들이로고구나.”라 하였다.

 

<욱호>에게 명하길

 

“어린애에게 하듯이 젖을 물리고 애정을 쏟아 붇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보게나.

날마다 그리하여 일상이 되면,

바로 그것을 아이 돌보는 즐거움이라 한다네.”라 하였다.

<비처>는, 거처를 월성으로 옮기고 나서, 사궁(四窮)들을 진휼하고,

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었더니 눈이 여섯인 거북을 얻게 되었는데

복부에 해득하기 어려운 문양이 있어 그것을 풀어줄 사람을 찾는다 하였다.  

 

<모대>는 위(魏)와 단교하고, 위(魏)의 악행을 남제(南齊)에 까발렸다.

 

그랬더니 등주(登州)를 지키던 장수 <이연李延>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섬 중에 있다가 <모대>가 사냥하러 왔음을 듣게 되어,

그를 사로잡고자 하였다.

 

<모대>는 이를 알아차리고 군병을 보내서 맞싸웠더니,

<이연李延>은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되돌렸고,

<모대>는 점차로 땅을 되찾으며 북진하였다.

 

감국황제는 상이 노심할까를 걱정하여, 불문에 부쳤다.  

 

<모대>가 글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길

 

“신의 조상 <온조>는 <동명>의 친아들이고 <유리>의 의붓아들이어서,

한남 땅과 구다국에 봉함을 받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사이가 벌어지더니,

두 분 황제께서 뜻하신 바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뉘어져서 땅과 경계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패하 참사는 실로 황구할 따름이며,

이전의 신하 <개로>가 머리를 바쳐 더러움을 씻었음인즉,

형제의 나라들이 오래도록 서로의 직분에 흠결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감국 황제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지시며 올바름을 널리 펴고 계시니,

위로는 조종님들이 베푸신 은덕을 한번 생각하여 주시고,

아래로는 큰 나라가 자식을 기르는 은택을 베풀어

한남(汗南) 땅을 돌려주시어서 이 골육이 그 땅에 발붙이고

근본께 보답할 수 있게 하여주신다면,

신은 우익(羽翼)이 되어서 <동명>의 큰 꿈을 좇아 서쪽 중원으로 들어가

버릇없는 싹수들을 주살하고 참할 것입니다.

이리 할 수 있다면 천손의 후예는 무지무지한 행운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감국이 웃으며 이르길

 

“<비처>가 삼모성을 고쳤으며 월성으로 이사하였으니,

놈은 편안히 웅진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오.

기회를 살피다가 꼬여내어서 그놈들을 사로잡아도 늦지 않으니,

잠시 그놈들이 하는 대로 두고 봅시다”라 하였다.  

 

 

 

7월, <비처>가 도나성(刀那城)을 쌓았다.  

 

이해에 감국황제는 상의 마음을 위안하려고,

안팎의 악공들을 불러들여서 매일 연회를 열고 연주하기에 진력하더니만,

거의 정사를 살피지 못하였다.

 

 

 


장수 57년{AD489}기사,

 

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근래에 유리걸식하는 백성이 자꾸 많아지고 있소.

궁핍하게 되면 산속으로 들어가 도적이 될 것이니,

성상의 시절에 이런 모습은 있을 수 없소.

유민들을 살펴서 농사짓고 살게 하고,

농토와 농기구가 없는 이에게는 관에서 나누어 주고,

관리의 일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겐 직무를 주시오.

떠도는 여인들은 유랑을 매듭짓게 않으면,

자식이 없으면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니, 관가에서 살펴주게 하시오.

차후로 떠도는 여인들은 각자 남정네를 정하게 하고,

남정네를 정하지 못하는 이는 모조리 관가로 불러들여서,

관노들에게 명하여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게 하시오.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은 모두 의술로 고쳐 주고,

남정네가 마땅하지 못한 이는 개가시켜서 자식을 낳게 하여,

나라를 위한 백성을 만들게 하시오. 집안과 신분은 살피지 마시오."라 하였다.

 

<비처>가 이를 듣더니 역시 따라 하였다.  

 

 

3월, <모대>가 자신의 여동생 <진화真花>를 감국황제에게 바쳐왔더니,

감국은 상황에게 바쳐서 침비로 삼게 하였다.  

 

<장萇>태자가 위(魏)의 <장萇>공주와 혼인하여 돌아왔다.

 

상은 위(魏)의 공주를 아껴서 무릎 위에 앉혀서 음식을 먹였다.

 

공주 또한 부황과 모후 및 감국에게 효성을 다하였으며

얼굴에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서로들 좋은 사람을 얻었다고 축하였다.


7월, <호용好勇>이 칠중성(七重城)을 빼앗았다.

 

 

9월, <양덕陽德>이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키고는

<실죽>의 군대와 서로 대치하였다.

 

<비처>가 사신을 보내어 보옥을 바치고

옛날과 같이 공물을 바치고 영원토록 사위나 아들로 돌아가게 하여주길 청하였다.

 

이에 감국은 상에게 주청하여 아뢰길

 

“<비처>가 비로소 알아들었으니, 잠시 그 청을 들어주어서,

나라를 안일하게 하고 부황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렸으면 합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라 하였더니,

 

상이 답하길

 

“세상사 모두를 일찍이 너에게 맡겼거늘, 하필이면 내게 묻느냐?

나는 네 어미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죽고만 싶구나.”라 하였고,

 

감국은

 

“아우들을 무수히 낳아주시면서 천년만년 누리시길 원하옵니다.

어찌 죽겠다는 말씀을 하시옵니까?”라 아뢰었다.

 

이에 상은

 

“네 아비의 나이가 100살이 넘었더니,

이제는 죽는 것이 편안하고 사는 것이 고역임을 알게 되었다.

눈만 뜨면 온갖 대나무 상자들{음식}이 들어와서 늘어서 있는데,

눈을 감으면 한꺼번에 사라지니 편안한 듯하구나.”라 하였다.

 

감국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물러나와 눈물을 비 내리듯 흘리면서 이르길

 

“부황께서 오래 사시지 못하겠으니, 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꼬?”라 하고는,

 

세상천지 어디에서든 신의(神醫)와 불사초를 구해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해에 대풍이 들어 벼이삭이 마당에 가득하였다.

 

감국이 순방하며 농민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

 

비인 <연흡>과 함께 <황>태자에게 병을 물으며 말하길

 

“부황께서는 병으로 고생하시면서 늘상 죽는 것이 편하다는 말씀을 하시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는데, 장인께서도 또한 그러하시니,

이 자식들은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 하였더니,

 

<황>이 말하길

 

“살아 있는 이는 죽기 마련이고, 젊은이는 늙기 마련인 것입니다.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늙어서 죽어가는 것에 마음을 쓰시다가,

나라를 다스림에 소홀함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한평생 이룬 공을 다듬을 수 있는 도리를 아침에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감국이 이르길

 

“장인의 말씀을 소자는 종신토록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라 하였다.

 

며칠 후에 <황>이 죽어 대왕의 예에 맞추어 장사하였다. 나이 79살이었다.

 

<황>은, 학문하기를 즐겼으며, 정사에 게으르지 않았고,

어짊으로써 상을 보좌하기 30여년에 천하가 태평하여 졌다.

 

비인 <춘돈春豚>과 <읍泣>공주 모두는 현명하여서

가지런히 자식들을 가르쳤음에 종실의 표상이 되었다 한다.

 

감국은, 상께서 경악할까 겁내어 <황>의 죽음을 불문에 부쳤더니,

상은 그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한 채 <초운椘雲>과 춤사위를 익혔다.

 

달무(獺舞){수달춤}> 차례가 되자 <연흡>을 불렀다.

 

<연흡>은 이제껏 시신 곁에 있었으나 눈물을 거두어 그의 아비가 죽었음을 숨겼더니,

상은 그의 아비가 죽은 줄을 몰랐다.

 

춤사위가 끝나자 품에 안고 침상으로 들었다가, 눈물 자국을 알아보고는 이르길

 

“너는 내가 늙는 것이 싫은가보구나?”라 하자,

 

<연흡>은 아뢰길

 

“까마귀는 기쁠 때면 저절로 눈물이 솟아난다 합니다.”라 하였다.

 

상은 음경이 수그러져 일어나지 않아 종일토록 품에 안고 누워 있으면서,

연거푸 귀한 것을 마시더니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통하였다.

 

이리하여 <연흡>은 다시는 부친의 시신 곁으로 갈 수 없었다.  

 

 

 

11월, <모대>가 또 사신으로 <연희燕喜>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그 나라 역시 대풍이 들어서 <모대>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으며,

남당에서 잔치를 벌여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거리낌이 없었다.  

 

<경鲸>씨를 <흥안興安>의 보비로 삼아주었다

 

 

 


장수 58년{AD490}경오,

 

2월, 또다시 숭로연을 열었다.

 

해산(海山)의 노인 세 사람이 늘었으며, 닷새를 계속하다 파하였다.  

 

<발跋>씨를 <융隆>태자의 보비로 삼아주었다.  

 

상은 <연흡>과 함께 주류궁으로 가서 태백산을 돌아보며 즐겼다.

 

<초운>도 이들을 따라다녔다.  

 

<비처>는 도라성(都羅城)을 중수하였는데 도나(刀那)이었으며,

월성에서는 저자를 열어 제(齊)와 위(魏)의 화폐를 받았다.  

 

 

7월,<장萇>태자가 <장萇>공주와 함께 위(魏)로 갔다.  

 

<모대>는 북부의 15살 이상 백성을 징발하여

사현(沙峴)과 이산(耳山)의 두 성을 쌓았다.  

 

 

 

9월, 감국이 <욱호> 및 <경>후와 함께 북도로 가서 상을 모시고 돌아왔다.  

 

<모대>가 딸을 감국에게 바쳤다. 12살이었다.

 

<모대>가 <연돌燕突>을 달솔로 삼고 군병 훈련하는 일을 맡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연돌>은 우리 군의 병술을 살펴보았었기에 이에 대비코자 함이었다.

 

이달에 <모대>가 사차원(泗泚原)에서 사냥하였다.  

 

 

8월, 감국이 위(魏)로 가서 <하양河陽>공주와 혼인하였다. <풍馮>태후의 딸이었다.  

 

 

9월, <풍馮>태후가 죽어서, 감국과 <하양>공주는 발상하고서 돌아왔다.  

 

 

10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꽃을 피웠다.

 

겨울이 따듯하여 물이 얼거나 눈이 내리지 않았다.  

 

상이 <하양>공주와 <장>공주를 상의 전각에 머물게 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애정을 쏟았다.  

 

동궁이 <오린烏鳞>의 집으로 가서 <오린烏鳞>의 처 <음陰>씨에게 은혜를 입혔다.

 

 

 


장수 59년{AD491}신미,

 

정월, 평양(平壤) 대궁(大宮) 정전의 큰 돌기둥이 저절로 부러지더니,

그 속에 큰 지네 세 마리가 죽어있었다.

 

두 마리는 암컷이었고 한 마리는 수컷이었으며,

암컷의 머리는 누렇고 수컷은 록색이었다.

 

상이 명을 내려 그것을 갈아서 닭으로 하여 먹고 나서 정력이 점점 좋아졌더니,

나날을 <하양河陽>・<장萇>・<초운椘雲>・<모대牟大>의 여동생 등과

함께 거문고를 마음껏 타면서 술 하사하길 즐거움으로 삼았다.

 

위(魏)帝가 이 소식을 듣고는 불로주 네 항아리를 보내며 말하길

 

“신산의 영약을 캐다가 넣고, 푸른 자라의 긴 발을 담갔으며,

아름다운 연못의 선도를 따다가 넣어서, 왕모의 높은 솜씨로 빚었더니,

한 잔을 마시면 만사가 구름 같아 보이고,

두 잔을 마시면 천년이 하루아침 같아집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웃으며 <하양>에게 이르길

 

“너의 아비가 나에 대한 효성이 이와 같으니, 비록 허언인 줄은 알지만,

아니 마실 수 없구나.”라 하고는,

 

<하양>을 품고 누워서 입에 따라 넣게 하였더니, 맛도 좋고 향은 청렬하였다.

 

<하양>은 자신은 많이 마시고 상에게는 조금만을 주었다.

 

감국은 <하양> 자신이 취하는 것을 보더니만 꾸짖어 이르길

 

“그대는 나이도 젊은데 무엇 하려 불로주를 마시는가?”라 하였더니,

 

공주가 감국에게 교태지어 아뢰길

 

“저는 당신과 함께 오래 살았으면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웃으면서 <하양>의 아랫볼을 매만지며,

 

이르길

 

“이 볼이 이렇게 예쁘니, 필시 내게 잘생긴 손자를 낳아 줄 것이다.

설사 불로주를 다 마셔버렸어도, 조금도 서운해 할 것 없다.”라 하였다.

 

감국도 따라 웃었다.

 

이윽고 상은 <하양>에게 명하여 감국과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가라 하였으며,

상은 <욱호>와 함께 그들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나눴다.  

 

상이 내외의 선인과 유자들의 독경을 잘하는 딸들을 욕탕 밖으로 불러서

경을 외고 해 춤을 추게 하고는 불로주와 하선탕을 마시고 취하여 누워있었다.

 

감국 또한 곁에 있었더니, 사령들은 정사를 살필 수 없었다.

 

<경>후와 <욱호> 및 <연흡> 등이 갈마들며 대신하여 정사를 살폈는데,

막히는 것이 많았다.


여름 6월, 큰비로 물이 넘쳤다.

 

상이 <하양>과 <장> 및 <모대>의 여동생과

용산 온탕으로 들어갔다가 비에 갇혀있었고,

감국은 <욱호>와 함께 비를 무릅쓰고 온탕으로 오는 길에

잠시 시골 관사로 들어가서 머물렀더니,

큰 두꺼비가 작은 개구리를 업고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작은 개구리의 소리는 크고, 큰 두꺼비의 소리는 작았다.

 

이윽고 온탕 관사에 다다랐더니만, 큰 이무기가 작은 규룡들과 포개져 있었다.

 

규룡들은 이무기를 거의 다 먹어 치우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감국이 <욱호>에게 이르길

 

“아까는 큰 놈의 울음소리가 작더니만, 지금은 큰 놈이 작은 놈들에게 먹히고 있소.

그러한즉 큰 것이 작은 것 만 못합니다.”라 하였더니,

 

<욱호>가 말하길

 

“아까의 큰 놈과 지금의 작은 놈들은 모두 암컷이네요.

수컷이 몸을 바쳐서 암컷들을 먹이는 것은,

여러 개가 겹쳐지면 비록 작은 소리일지라도 능히 수컷을 즐겁게 할 수 있고,

개략 음란한 소리이기 때문인가 봅니다.”라 하였다.

 

감국이 입궁하여 상에게 이 얘길 해 드렸더니,

 

상은

 

“내가 곧 일어날 수 없을 것 같구나.”라 일렀고,

 

감국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개략하면 상이 <하양>과 상통하여 짙은 사랑을 나누다가 정기가 손상되었음이었고,

그리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모대>의 사신이 도착하여 아뢰길

 

“ 웅천(熊川)이 크게 넘쳐서 2백여 가{家}가 떠내려갔으며,

농사지은 곡식이 여물지 않아서

<모대>의 백성으로 월성(月城)으로 흘러 들어간 자들이 6백여 가나 되며,

<모대>는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9월, 상은 <하양>과 <욱호>를 데리고 황산으로 가서,

평양릉 앞에서 곡을 하고 이르길

 

“내가 죽거든 여기에다 장사하여 어머니와 합골하여 주게나.”라 하였다.

 

이해엔 국화도 색을 잃고 피었는데도,

상은 황산 행궁에 머물면서 나날을 <하양>과 함께 즐거움을 탐하기에,

<욱호>가 말려도 듣지 않더니, 12월 7일에 <하양>의 침소에서 죽었다.

 

이때 큰 눈이 닷새나 내리더니 길을 모두 끊어놓았고,

<하양>은 상이 돌아가신 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욱호>가 일찍 일어나 가보았다가 처음으로 발견하고는 감국을 불러서 발상하였다.

 

재궁{시신}은 <평양平陽>릉의 광혈로 들여서 육탈을 기다렸다가 합골되었다.

 

감국은 황산 행궁에서 즉위하였으니, 12월 15일이었다.

 

공경들은 큰 눈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한 이가 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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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