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고구려'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16.08.12 가달(賈達)

 

 

<가달賈達(BC100-BC61)>황후는 호(胡)왕 <저제후且鞮侯>의 딸이다.

 

그의 오빠 <호록고狐鹿姑(BC116?-BC84)>가 죽음에 앞서서

자기 아들 <호연제壺衍鞮(BC100?-BC68)>에게 이르길

한(漢)인들은 속임수가 많으니 동쪽의 부여와 결연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더니,

<가달>을 <수제>에게 바쳤다.

 

때는 법황 28년 정유년(BC84)이었다.

 

<호록고>는 BC89년에 한(漢)의 <이광리>를 도살하였다.

 

<화상禾相(BC120-BC66)>에게 명하여 가서 맞아오라 하였더니,

<화상>이 <가달>과 함께 적동(磧東) 3호(三湖)에 다다라서 비를 만나 체류하더니,

<화상>이 춘심이 발동하여 <가달>과 상통하였고 돌아와서 이실직고하였다.

 

이에 <화상>에게 처로 삼아 하사하였더니,

<호록고>가 사자를 보내와서 힐문하면서 <수제>에게 명하여

<가달>을 취하여 비를 삼으라하였어도, 도리어 <화상>과 계속하여 좋아지냈다.

 

이때, <법황>은 <구龜(BC110?- )>공주를 아껴서

정사의 많은 것이 그녀의 손에서 나왔다.

 

<가달>이 <구>공주에게 아부하며 달라붙어서 <화상>을 등용하여 정사를 보았다.

 

<법황> 또한 <가달>에게 승은을 내려 딸 <화수禾穗>를 낳고,

이어서 <화영禾潁>을 낳으니 <수제>의 딸이었고,

이어서 <화악禾萼>을 낳으니 <화상>의 딸이었다.

 

가달(법황) - 화수禾穗(BC83- )

가달(모수제) - 화영禾潁(BC80- )

가달(화상) - 화악禾萼(BC77- ) 

 

을사년(BC76)에 법제(法帝)가 죽고 수제(漱帝)가 즉위하여

<양성羊聖>・<양방羊芳>・<호릉好陵>을 3후로

<가달賈達>・<호인好人>・<환숙桓淑>・<우희牛姬>・<추영秋英>을 5비로 삼았다가,

<호릉>은 제의 딸이어서 <호릉>의 어미 <옥인屋因>으로 <호릉>을 대신하는

셋째 천후로 삼고 <호릉>은 단지 공주로 봉하였어도

총애하기는 <양성>과 <양방>보다 더하였다.

 

오산(옥인) - 오천奧川(BC100?- )

                  호인好人(BC94-BC24)

모수제(옥인) - 옥춘屋春(BC96-BC26)

                     호릉好陵(BC92?- )

                     신蜃(BC85- )

                     칠柒(BC75-BC38) 

 

수제는 <구龜(BC110?- )>공주가 법제(法帝)가 총애함을 믿고

성지를 거스름이 많으니 폐하여서 외딴 방에 가두었다.

 

이때, 오환왕 <정위丁威>가 처를 잃고 배필을 구하기에,

 

<가달>이 제를 설득하여 말하길

 

“형제는 손과 발인데 비록 작은 결함이 있어도 어찌 폐하여 가두십니까?

오환은 서방의 강국이고, <정위丁威>는 제 어미의 남동생이니

결연하여 형제로 되면 한(漢)을 제압하기에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그렇겠다고 여겨서 마침내 <구龜>공주를 <정위丁威>에게 처로 주었다.

 

이때 <구龜>의 나이 서른다섯에,

아직 아들을 하나도 낳지 낳았던지라 스무 살 같았다.

 

<정위丁威>가 그녀를 사랑하여 아들 <정오丁烏>를 낳았으며

그의 딸을 <각角>공에게 처로 주었다.

 

<각>공은 <구>의 남동생이다. 

 

딸 <화영禾英(BC74-BC20)>과 아들 <화만禾滿(BC70- )>은 <화상禾相>의 자식이고,

아들 <보簠(BC67- )>는 <수제>의 자식이다.

 

을묘년(BC66) 봄에 <양성羊聖>이 죽고 <옥인屋因>이 물러나니,

<양화羊花(BC80- )>와 <가달賈達>이 3후들에 끼어들었다.

 

제에게 권하여 <타리佗利(BC85-BC61)>를 불이천왕으로 세우게 하고 

이어서 <타리>의 처가 되어 불이국의 정사를 멋대로 주물렀으니,

개략 <화상>시절 이래로 주물렀음이다.

 

<저제후且鞮侯>의 동생 <괴리槐里>가 선비의 딸 <왕부흥王夫興>의 지아비가 되어서

<타리>를 낳았더니, <타리>는 <가달>의 4촌이고,

그 어미 <부오夫奧>는 <화상>의 4촌 동생이며,

<부오夫奧>의 어미는 <화>태후의 여동생인 까닭에,

역시 <수제>의 4촌 여동생이다.

 

이런 까닭에 <타리>가 <화상>의 아들이 되어서

<화수禾穗(BC83-)>를 취하여 처로 삼았다.

 

이때 <화수>는 나이가 아직 적어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고

<가달>이 이어서 2세비의 일을 행하니,

천제의 3후로 그 나라의 정사를 봄은 <옥인屋因>때로부터 비롯되었다.

 

<타리>가 천후를 처로 삼고 때를 저울질하며 천하를 뒤엎으려하였다.

 

그리고 제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성지를 거역함이 많으니,

<가달>이 문득 의를 깨닫고서 비록 <타리>를 사랑하나

부제(夫帝){漱帝}에게 충성하여 저녁에는 필히 잠자리를 시중하고

낮에는 <타리>와 더불어 놀아주었다.

 

<타리>는 이에 족하지 아니하여 끝내 <가달>의 잠자리시중을 빼앗으니

천제께서는 말리지 못하였다.

 

3후들이 유명무실하였던 까닭에 <가달>이 번번이 대낮에 상께 즐거움을 드렸다.

 

<타리>가 노하여 <가달>을 때리면서 말하길

 

“복이 다한 천제를 그대는 왜 사랑하는 것이오. 내 몸을 더럽히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가달>이

 

“천제는 천신이지 사람이 아니오.

그대가 만약 천제를 업신여기면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타리>가 <왕인旺仁>을 죽이고 <추영秋英>을 빼앗아

<왕불旺弗(BC78- )>을 아들로 삼았다.

 

<가달>이 애서 말려도 듣지 아니하고 천제를 돼지나 기르는 벌판에다가 옮겨놓으니,

울부짖으며 싸우듯이 말렸다.

 

<타리>가 대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되 스스로는 할 수 없어서

<왕불>에게 명하여 참하게 하였다.

 

<왕불>이 <가달>의 미모에 혹하여 죽이지 못하고서 끌고 가서 통정하니,

<가달>이 처음엔 반항하다가 종당엔 순응하며 <왕불>에게 이르길

 

“그대가 만약에 천제를 돕고 도적놈을 토벌하면,

나는 응당 그대의 처가 되어서 평생토록 즐거움을 함께 하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왕불>이 크게 기뻐하며 <타리>를 멸하겠다고 서약하였다.

 

<타리>가 <가달>을 고쳐 생각하고 다시금 <가달>을 빼앗아서 총애하였다.

 

이에 <왕불>이 더욱 노하여서 이윽고 불이를 함락하니,

<가달>의 신하 <고섭皐葉>이 몸에 수많은 부상을 당하면서

<가달>을 보호하여 <타리>에게 다다랐다.

 

<타리>가 <고섭>을 세워 둔 채로 참하고서

 

“성을 빼앗기고 물러났으면서, 안전하게 돌보았다고 명분을 삼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가달>이 가슴을 치고 울면서 이르길

 

“이 화는 그대가 천제를 공경하지 않아서 당한 것이오! <고섭>이 무슨 죄요?

<고섭>은 어릴 적부터 내 신하가 되어서 내게 충성하여 오다가

그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화상>에게 권하여서 그대를 보위에 세우고 아들로 삼게 하였더니,

그대가 지금 도적이 되어서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죽어서 <화상>을 어찌 뵐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타리>가 대노하여 <고섭>을 벤 칼로 <가달>을 후려쳤더니,

팔이 떨어지고 피가 솟았으며 입에서 욕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죽어 갔다.

 

<왕불>이 와서 보고 끌어안고 통곡하며 말하길

 

“내가 그대를 위해서 이리하였는데, 그대는 왜 죽었단 말이오?!"라 하고는

 

<가달>의 살갗으로 잠자리를 삼고

유골은 황후의 예로 <화상>의 곁에 후히 묻어주었다.

 

동명11년(BC27) 8월에

상께서 <화영>후와 더불어 <가달>후의 릉에 친히 제사하며 이르길

 

“선우의 딸이오, 천제의 처라. 만고의 영웅이오, 절대가인이셨다."라고 하더니,

 

“지금은 편안하신지 내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화수>가 <가달>이 애용하던 옥 반지와 금팔찌를 바치니,

상께서 사랑스레 만져보시며 <화수>를 돌아다보고 이르길

 

“그대 어미가 살아계셨으면 내가 응당 후로 삼았을 것이오."라 하고는

 

“내 처들 중엔 그대의 어미와 방불할 이가 없다."라고 하며

 

한숨짓고 한탄하더니 을묘년(BC66)의 3후들을 평하면서

 

“<가달>후는 영웅이니 첫째요,

<양방>후는 열녀이니 둘째요,

내 처들은 흐물흐물한 여인들이니 나와 같아서 평범한 이의 처로는 최적이오."

라고 하며 <양화>를 놀렸다.

 

<가달>후의 다섯째 딸인 <타선佗仙(BC65?- )>은 <타리>의 딸이고

셋째 아들 <왕산旺山(BC63?- )>은 <왕불>의 아들이다.

 

신사년(BC100)에 태어나서 경신년(BC61)에 죽었으니 춘추 사십이었다.

 

호(胡)인들이 오가다가 릉 곁을 지나게 되면 필히 절하고 사직릉이라 하였다.

 

아마도 후가 혼인하여 올 적에 자매들이 무슨 일로 먼 곳으로 시집가느냐 하니,

후가 사직을 위한 계책이라 하였음에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나,

후세 사람들은 릉이 있는 촌락을 사직촌이라 하면서도 그 연유는 몰랐다.

'남당유고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모대제기(2)  (0) 2016.08.12
추모대제기(1)  (0) 2016.08.12
양방(羊芳)  (0) 2016.08.12
화태후(禾太后), 양성(羊聖)  (0) 2016.08.12
모수제기(慕漱帝紀)  (0) 2016.08.11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