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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1 미천대제기

 

 

미천대제의 첫 호칭은 <을불>대왕인데 서천제의 손자이고 <돌고>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을>태후인데 태공 <을보乙寶>의 딸이다.

 

성품이 너그러우므로 아래사람에게 후하게 대하였다.

 

지략이 있어 무리들을 잘 이끌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봉상이 <돌고>를 죽일 때에 <을불>은 <상루>의 집에 있었는데 

<상루>는 집안사람인 <재생再生>과 <담하談河>로 하여금

<을불>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후에 수실촌(水室村)으로 달아나서 <음모陰牟>의 집에 숨어있었다. 

 

<음모>를 위해 일하며 겪은 고초가 심하였다.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라고 시켜서 한밤까지 돌멩이를 던져서 울지 못하게 하였고,

밤낮으로 땔나무를 하라고 시켜서 잠시도 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동촌 사람 <염모冉牟>와 도망하여 소금을 팔며,

압록{今 란하}의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의탁하였다.

 

그 집의 노파가 소금을 좀 달라고 하기에 한 말 정도를 주었다.

 

더 달라고 하기에 부득이 주지 않았더니,

노파가 원망하고 화가 나서 신발을 소금 속에 감추었다.

 

그것을 모른 채 소금을 팔러 길을 나서자,

노파가 쫓아와 뒤져서 신발을 찾아내고는 신발을 훔쳤다고 고변하였다.

 

압록의 우두머리는 소금으로 신발을 보상하게 하였으며 볼기를 치고 풀어주었다.

 

이 시절, 얼굴 꼬락서니는 삐쩍 말랐고 의상은 남루하여,

사람들은 쳐다보면서도 그가 왕손임을 몰라보았다.

 

이때, <창조리>는 곧 임금을 폐하고 새로운 임금을 세우려던 참이었다.

 

왕손이면서도 검약하고 인자하여, 조부의 뒤를 잇게 하면 좋겠다고 여기고,

신하 등을 보내서 맞아들이게 하였더니,

<을불>은 “저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소우萧友> 등이 <선결仙潔>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군신의 예를 행하고,

<오맥남烏陌南>의 집에서 맞아들였다.

 

9월, 후산(候山)의 북녘에서 사냥을 하면서,

 

<창조리>가 무리들에게 말하길

 

“나와 뜻이 같은 이들은 나를 따라 하시오.”라 하고는

 

부들 잎을 모자에 꽂았더니 모두가 부들 잎을 모자에 꽂았다.

 

이윽고 <창조리>가 말하길

 

“지금 주상은 무도합니다.

<을불>대왕께서 덕이 있으시니, 그분을 추대하려 합니다.”라 말하였더니,

무리들은 크게 기뻐하며 손뼉 치고 발을 굴렀다.

 

그리하여, <을불>을 맞아들이고 새수(璽綬)를 바쳤으며,

봉상제는 행궁에 가두어 지켰다.


 

미천대제 원년{AD300}경신,

 

추9월, <창조리倉助利>・<조불祖弗>・<소우萧友>・<오맥남烏陌南>・<자柘>・

<선방仙方>・<방부方夫>・<재생再生>・<담하談河>・<송거松巨>・<장막사長莫思>・

<휴도休都> 등 공신 12 사람에게 각자의 고향 땅을 봉하고,

노비를 차등하여 하사하였다.

 

부친인 <돌고>대왕을 평맥(平貊)대제로 올리고,

모친 <을>후는 단림(檀林)태후로, 조모이신 <高>씨는 태황태후로,

<을>태후의 부친 <을보>는 국태공으로 올렸다. 

 

 

동10월, 누런 안개가 네 변방을 닷새나 덮었었다.

 

조언을 구하였더니, 태사인 <우선于先>이

 

“조짐이 后와 妃에 있다.”고 하였다.

 

<재생>이 봉상제의 <연椽>후를 겁박하고 취하여 처로 삼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재생>의 안개라고 여겼다. 

 

<창조리>를 태보로, <우탁于卓>을 좌보로, <을로乙盧>를 우보로 삼았다.

 

<을로>는 <을>태후의 오빠이다. 

 

 

11월, 서북풍이 크게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구르길 엿새나 계속되어,

상이 감식하고 지나쳤던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더니,

 

<창조리>가 아뢰길

 

“우선하여 반듯한 后를 세우시고,

<재생>과 <담하>가 공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시지요.”라 하였다.

 

이에, 상은 그리하겠다고 답하였다. 

 

<진晋>이 <양羊>씨를 后로 세웠다. 

 

 

12월, 살별이 동방에서 나타났다.

 

<우선>이 “군신상쟁의 조짐이다.”라 하여,

 

<상보> 부자와 <부협芙莢> 형제를 풀어주었다.

 

<상보>는 <초草>씨의 부친이고, <부협>은 <부>씨의 오빠이다. 

 

그믐날에 <상보>를 좌보로, <우탁>을 서부 대사자로 삼았다.

 

상이 <초草>씨를 황후로 삼고 싶어 하자,

 

<창조리>가

 

“<초草>씨는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교태를 부리며 폐제를 섬겼었습니다.

절개를 져버린 이를 후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라 간하였다.

 

이때 于后 <于五斗> 58세, 高后 59세, 乙태후 40세, <乙寶> 70세,

미천대제 <을불> 23세, 봉상제 <치갈> 42세, <草>后 21세, <周>后 10세,

<周>后의 아버지 <仙方> 44세이다.

 

<을불>은 서천대제 서자 <돌고>의 아들이다.

 

 

 



미천대제 2년{AD301}신유,

 

춘정월, <을>태후궁에서 조회를 받았다.

 

굵직한 정사들 여럿이 태후에게서 결정되어 나오자 사람들은 실망함이 많았다. 

 

 

 

2월, 태공 <을보>가 나이 71살에 죽었다.

 

애초에, <을파소>의 서자 <을소개乙素介>가 <주통>태후의 알자를 하다가

<주통>과 치붙어서 낳은 자식이었다.

 

키는 크고 체격은 우람하였으며,

기쁨과 노여움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은 이로울 것이 없었다.

 

<봉상>시에는 근신하며 자신을 지켰고,

금상이 즉위한 후 <을>태후가 국정을 주무르자,

<을보>는 이를 경계하더니 일절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왕의 예에 따라 <주통>태후릉에 장사하였다.

 

아들인 <을로乙盧>・<을원乙源>・<을향乙向>・<을량乙良>・<을민乙閔>・<을칠乙七>・

<을패乙沛> 등은 <을>씨 집안의 일곱 시조가 되었다. 

 

 

 

3월, 친히 안국군 무덤에 제사하고, 왕{돌고대왕}의 아들 <자柘>에게 명하여

창고를 열어서 백성을 진휼케 하였다. 

 

 

여름 4월, <초草>씨와 <창倉>씨 등이 총애를 다투면서

없는 말을 만들어 밖으로 퍼뜨리기에, 이들의 하녀들을 해빈으로 유배하였다. 

 

 

5월, 폐제(봉상제}가 후산(候山)의 별궁에서 죽었다.

 

<재생>이 핍박하여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상이 태후를 모시고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과 <돌고제>릉을 배알하였다. 

 

 

6월, <조문祖文>・<창멱倉覓>・<뉴벽紐碧>을 船장군으로 삼아서 수군을 조련하고,

<명림섭明臨涉>을 행군주부로 삼았다.

 

<선방仙方>이 대부(大府)의 우두머리 <대발大發>을 상선(上船)장군으로 삼아서

3군{<조문>・<창멱>・<뉴벽>의 수군}을 감독하자고 청을 하였더니 허락하였다. 

 

 

추9월 두눌원에서 사냥하며 군사를 훈련하였고,

<선방>의 처 <면免>씨의 고향에서 잔치를 열었다.

 

 



미천대제 3년{AD302}임술,

 

춘정월, 새로 지은 궁으로 이어하였다.

 

폐제시절부터 이 궁을 세우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추9월 3일에 상이 친히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나아가 현도를 공격하고,

15일엔 남소(南蘇)를 쳐서 빼앗았다.

 

남소는 본시 우리의 신성한 땅이었는데, 관적{관구검}에게 빼앗겼었다.

 

이후로는 우리가 차지했다가 저쪽이 차지하기를,

아침에 빼앗았다가 저녁에 잃듯이 한 지 오래되었다.

 

상이 유랑하던 시절에 일찍이 이곳을 지나면서

지리 및 인심과 성곽 및 해자 등의 허실을 상세히 살폈었다.

 

그리하여, <선방>을 대주부로 삼아

몰래 그 지역 토착민 우두머리들과 상통케 하고나서,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진공케 하였다.

 

태수 <경창耿蒼> 등 다섯의 목을 베고,

8천인을 사로잡아 평양{平壤}{금 요양)으로 옮겼다.


 

미천대제 4년{AD303}계해,

 

춘정월, 태후궁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얼큰하여지자, 상이 공경들에게

 

“나라의 흥체(興替)는 현자를 기르고 인재를 뽑아 씀에 달렸소.

경들은 각기 자제를 천거해보시오.”라 일렀더니,

 

용산공(龍山公) <자柘>가 아뢰길

 

“인재는 간혹 하늘이 완성하여 내리기도 하나,

다수는 평소에 길러지는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학원을 여시어 가르치게 하시옵소서.”라고 아뢰었었다.

 

이에 백룡원(白龍院)・대신원(大神院)・초문원(肖門院)이 학원으로 되었으며,

<우선于先>・<을향乙向>・<대발大發>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하였다. 

 

 

2월, <창倉>씨가 태자 <충忠>을 낳았다.

 

<창>씨는 <창조리>의 딸인데, 당초에는 <오맥남>의 처였었는데,

상이 <오맥남>의 집에서 만났을 때부터 승은을 입고 후궁으로 들어왔다.

 

상이 <창>씨의 모친 <오>씨에게 상부인의 작위를 추증하고

묘지기 열 명과 산장 및 포구를 하사하였으며,

<창조리>에게는 식호 100가를 더해주었더니,

 

<창조리>가 간하여 아뢰길

 

“신이 들은 바, 여색에 관대한 자는 아랫사람들이 음란하게 되고,

무력에 관대한 자는 아랫사람들이 죽이기를 즐기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여인을 끼고 놀면 왕통이 어지러워진다고 합니다.

신의 딸에게 내리신 부인의 작위와

신의 손자 <충>에게 내리신 태자의 호를 거두어주시길 청하옵니다.

옛 사람 <진陳><영공靈公>이, 자신의 신하인 <녕의寧儀>와 함께,

<하희夏姬>를 통음하여 사내아이 <징서徵舒>가 생겼는데,

<녕의>는 <징서>를 <영공>의 아들이라 하고,

<영공>은 <징서>를 <녕의>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징서>는 화가 나서 <영공>을 죽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스개 소리가 되었으나,

이에 비추어보면, 신의 딸은 죄가 무겁고, 신 역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에게 내리신 식호와 산장 및 포구도 거두어 주시길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충>을 내 아들로 삼아서 <오맥남>의 아들이 되게 하지 않겠소.

어찌 <영공>의 일에 비견하시오. 경은 지나치게 심려하지 마시오.”라 답하였다.


여름 4월, 신성으로 거둥하여 사졸들을 위무하고,

무예가 특출한 20인을 선발하여 직책을 주고 장정들을 훈련시키게 하였다.

 

<모용외>가 사람을 썼던 예를 따랐더니,

재간이 있는 이라면 비록 漢인이거나 越인이어도 역시 올 수 있었다.

 

<재생>의 고향에 들러서 <재생>의 족당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5월, <우于>태후가 <릉원>에서 춘추 61세에 죽었다.

 

중천체 9년에 태자비가 되었는데,

명랑하고 예뻤으며, 노래를 잘하고 효성으로 부황을 모시었기에,

궁중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곤위에 오르자 <치갈>을 돕고 비호하여 임금으로 만들었다.

 

<서천>의 총명함을 가리고 <봉상>의 어리석은 욕망을 부추기더니,

<서천>이 갑자기 죽는 변고가 생기자 <안국군>을 죽게 하는 화가 있게 하였다.

 

<서천>이 죽자, 꼭꼭 숨겨 발상하지 않은 채로

먼저 <안국군>의 병권을 자기의 형제들에게 옮겨놓고는,

거짓조서로써 <치갈>을 세웠으니, 대략적으로 역시 태후의 음모였었다.

 

급기야는 국정을 전횡하고 황음하였으며, 사치하기를 즐겼더니,

궁실은 간사한 무리들로 흘러넘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태후가 나라를 상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좀먹은 죄상이었다.

 

후산(候山)의 의거{후산에서 모여 을불을 옹립한 일}를 용납하려 들지 않기에

군사들이 태후를 죽이려 하였으나,

상은 <서천>의 애후라 하여 보호하여 막아주고 좋게 대접하여

릉원에서 거처케 하였고, 받들어 모시는 범절에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재생>이 여러 번 발걸음 하여 태후를 치붙더니만,

그의 아들 <상해相亥>와 음모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상이 <탐耽>씨를 시켜 알아보게 하였더니,

태후는 걱정하고 두려워하다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이었다.

 

상이 그녀를 가련히 여겨 태후의 예로 <봉상>의 곁에 묻어주었다.

 

상이 애초엔 서천에 묻으려 하였었으나 질책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그리하지 못하였다고도 한다.



추7월, 태공 <창조리>가 용산의 온탕에서 죽었다.

 

상이 그 시신을 교외에서 맞이하여 태공의 예로 장사하려 하였더니,

처 <음陰>씨가 <창조리>가 남긴 뜻이 아니라 하여,

<판령板岺> 대형의 예로 장사하였다.

 

<창조리>는, 사직을 위하여 임금을 폐하고 새로이 세웠으나,

늘 자신은 <봉상>에게는 죄인이라 하였다.

 

또한 <재생>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도 막을 수 없었기에,

 

여러 번 꿈속에서도 <원항>을 보더니만

 

“아! 나도 쉬어야 하겠구나! 만사가 뜬구름인 것을,

<소보巢父>의 처신을 거듭 생각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라 말하였다.


 

미천대제 5년{AD304}갑자,

 

춘정월, <을>태후의 궁에서 조회를 받고는, 공신들에게 옷과 말을 하사하였다. 

 

 

2월, <분서>가 낙랑국의 서도를 습격하여 파하여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그 땅은 본래 <분서>의 모친인 <보과> 나라{대방}의 도읍이었고,

<분서>가 모친을 위하여 탈취한 것이다.

 

낙랑왕 <자술>은 <장막사>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상은 <장막사>에게 <분서>와 상통하고 모의하여 낙랑을 쪼개라고 명하였다.

 

<자술>은 이에 화가 치밀어 척화하였고,

<분서>가 서도를 습취한 것에 분을 참지 못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이해 10월, 계림 사람으로 예쁘게 생기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자술>의 신하

<황창랑黃倡郞>이 미녀처럼 꾸미고 <분서>를 찾아갔더니,

<분서>가 그 미모에 빠져 수레 안으로 불러들였고,

<황창랑>은 <분서>를 칼로 죽였다.

 

<분서>가 습격한 낙랑국의 서도는 대방의 도읍지이니

대방은 낙랑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다.

 

<보과>가 자신의 정부{情夫}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

 

<비류>는 <고이>의 서자였는데,

<고이>시절에 민간으로 피하여 숨어들어가 민심을 숙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힘도 있고 활을 잘 쏘기도 하였다. 

 

상이 <장막사>에게 <비류>를 회유하여 <자술>과 반목하게 만들라고 명하고,

5部・9鎭・37國{마을}에 명하여

보병과 기병의 훈련을 감독케 하고는 그 공적을 살폈으며,

<을유乙兪>・<면기免箕>・<고희高喜> 등에게는

재주 있는 장정들을 가려 뽑아서 좌・우위군에 배속시킨 다음에

군병을 이끌고 용병하는 기술을 가르쳐 숙련시키게 하였다.

 

 

분서7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끼며, 또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비록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는 <고이>의 서자가 아니라

<구수>와 <여음>의 아들로 260년에 태어난 <구수>의 서자이다

 

 

미천대제 6년{AD305}을축,

 

춘정월, 좌보 <을로>가 죽어 <자>가 이를 대신하고, <방회>가 우보를 맡았다.

 

<을로>는 <을>태후의 오빠로서,

모나게 처신하지 않아 자신이 오를 벼슬자리가 없음에도

오로지 조상을 섬김에 착실하였고,

주색에도 신중할 수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꺼려하지 않았다.

 

폐제시절에는 오로지 구차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지냈었다.

 

금상 즉위 초에는 부친 <을보>가 맡았던 우보의 일을 대신하여 상부에 있었고,

종일토록 수염을 쓰다듬을 뿐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수염 쓰다듬는 재상이라 하였다.

 

<자>는 안국군 <달가>의 아들이고,

그의 어미는 <해解>씨로 평산사(平山祠>에 모셔진 <해숙解熟>의 딸이다.

 

바탕이 재주가 있어, 모친과 더불어, 큰 모의에 힘을 합쳐 공을 세웠다.

 

금상 즉위 초에 천거되어 대주부를 4년간 지내다가

우보에 올라서는 신령12조를 만들어 시무에 적용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국상의 자리를 폐하였다. 

 

 

3월, <선방>의 딸 <거지居知>를 소후로 삼고, <주周>씨의 성을 내렸다.

 

 

<선방>은 吳나라 <주유>의 후손이다. 

 

 

 

6월, <탁발의이>가 西晉을 구하려 漢을 치다가 죽자, 아들 <탁발보근>이 섰다,

 

<양羊>씨는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다. 

 

 

추9월, 고산원(高山原)에서 사냥하다가 신록을 얻었더니,

나라 안에 대사령을 내렸다.


 

미천대제 7년{AD306}병인,

 

춘2월, 백룡원의 <高>태후가 춘추 65세에 죽어 서천릉에 장사하고,

<을향>을 능대부로 삼았다.

 

태후는 <돌고>대왕의 생모이며, 부친은 현상(賢相)이었던 <고복장>의 현손이다.

 

<중천>시에 후는 동궁 조의의 처였었는데,

<서천>의 침녀로 천거되어 <돌고>대왕을 낳았고, 후에 소후로 올려졌었다.

 

<서천>이 죽자, <원항>에게 욕을 당하고 여러 차례 위해도 겪었다.

 

제가 즉위하매 태후로 올려져서 백룡원에 기거하게 되었었다.

 

매우 아름답고 처신은 무거워서 말 수는 적었지만 큰일들을 겪어 깨우치고 있었다.

 

제를 위하여 욕보임을 참아냈었고,

중흥의 공을 세워 마침내 <서천제>에게 배장된 것이었다. 

 

<자>를 태보로, <방회>를 좌보로 삼았다.

 

<선방>은 우보로 삼았으며 대주부와 태사마를 겸하게 하였는데,

결국 국상의 책임이었다. 

 

 

추9월, <초草>씨가 황자 <인仁>을 낳았다. 

 

 

11월, 西晉 주 <사마충>{혜제}이 짐새 독으로 나이 48살에 죽어,

그의 동생 <사마치>{회제}가 섰다.

 

 

 

미천대제 8년{AD307}정묘,

 

추9월, 수군・육군 30만을 압록 언덕에서 크게 사열하고는,

그들에게 신세진 것을 참작하여 넉넉하게 보상하여 주었다.

 

상은 <초>후・<주>후・<탐>후를 데리고 3일간 순시하고 돌아왔다. 

 

동10월, 남부 대사 <대발>이 죽었다.

 

<대발>은 고금의 일에 통달하였고, 용병을 잘하였다.

 

상은 어릴 적에 그에게서 기사・창검・진법을 배웠고,

장차 크게 쓰려하였는데 입신출세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

 

상이 이를 애통해 하였으며, 우보의 예로 장사하여 주었다. 

 

<모용외>가 선비 대선우를 자칭하였다.

 

극성 선비의 <록관祿官>이 죽자,

동생 <탁발의로>가 3부 모두를 다스리면서 <모용외>와는 우호 상통하였다.

 

 

 

 

미천대제 9년{308}무진,

 

춘정월, 평산(平山)대공(大公) <선결>이 나이 72살에 죽자,

그의 처 <선우仙牛>씨도 따라 죽었다.

 

<선결>의 부친 <주선>은, <공근公瑾>의 서손으로,

18살에 <호위胡衛>를 따라서 찾아와 입조하였는데,

죽이거나 유배 보내던 시절엔 법령을 맡았었다.

 

<주통朱通>이 그{周仙}의 용모를 아껴서 그를 家臣을 삼아서}집안에 감춰 놓았더니,

<주통朱通>의 처 <우{于}>씨가 <주선>과 은밀히 상통하여서 <선결仙潔>을 낳았다.

 

<선결>이 명민하고 학문하기를 좋아하였더니,

안국군{安國君}<달가{達賈}>가 그를 불러 가신으로 삼았었다.

 

안국군이 무너지자 마산으로 돌아와서,

소와 양을 치며 금과 은을 캐서 재화를 수만금이나 쌓았다.

 

큰 모의에 남모르게 참여하였다.

 

반옥령에서 남거가 깨진 이후 제를 집에 숨겨주어서 끝내 중흥대업이 성사되었다.

 

그는 공이 제일이었으나 한 결 같이 은거하며,

오로지 자제를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아들을 항상 경계하였었고,

<선방仙方>의 지위가 높고 손녀인 <주周>소후가 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였어도,

교활하고 오만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당세의 괴이한 인걸이라 칭송하였다.

 

이에 그의 후예들은 번창하였다. 

 

 

5월, <조문>・<뉴벽>・<부협>・<고식> 등에게 명하여 낙랑을 쳐서 그 군을 빼앗고,

남녀 300인을 사로잡았다.

 

낙랑왕 <자술>이, 아들 <룡龍>을 보내와,

칭신하고 말과 토산물 12가지를 바치며 화친을 청해왔다.

 

<선방>이 동생 <담淡>을 <자술>의 딸과 혼인시켜서 두 군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 

 

 

추8월, 산궁을 고쳐짓게 하였다.

 

산궁은 <산상제>의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황산(黃山)의 큰 물줄기 위쪽에 있었다.

 

폭포와 온탕이 있고 꽃과 새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상이 <을>태후를 위하여 고쳐지어, 그 귀하신 분이 놀이하거나 쉬게 한 것이었다.

 

12월, 좌보 <방회>가 나이 57살에 죽었다.

 

<방회{回}>는 활을 잘 쏘아서, 상의 태자시절에 불려 들어가서 좌사{左師}가 되더니,

우사{右師}였던 <대발{大發}>과 함께 성궁(聖躬){上}의 곁을 지켰었다.

 

상이 어릴 적부터 그에게 예의를 차렸더니,

상이 도성을 빠져나가 유랑하게 되자,

그는 <선방> 등과 더불어 큰 모의에 은밀히 참여하였고,

빠르게 재상의 지위에도 올랐다.

 

평소엔, 무인인지라 정치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여,

단지 입 다문 채 “예! 예!”라고만 하여,

시위(尸位)라는 평을 면치 못했고,

건백(建白)하는 것 하나 없이 비위맞추고 아부만 하다가, 임종을 앞두게 되었다.

 

상이 친히 임종하여 바라는 바를 말하라 하였더니,

 

입을 열어 답하길

 

“신의 아들 <방부>는 제 분수를 지키기 어려우니,

원컨대 상께서는 등용하지 마십시오.

신이 말씀드리는 것은, 신을 위함이 아니고, 상을 위함이옵니다.

원컨대, 색사를 주의하고 즐기기를 줄이시어

여인들이 빈번히 찾아오게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에 상이 얼굴빛을 고치고 감사하면서

 

“금석에 새겨둘 말씀이시십니다. 어찌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경을 무미상(嫵媚相)이라고들 하였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리하였던 것이 감초대신의 일을 하신 것임을 알겠습니다.”라 하였다.

 

<방회>의 조부인 <방축方丑>은, <마리摩離>의 후예로서,

<산상제>의 어금니 같은 신하로 <발기>를 쳐서 사직을 굳건히 하였으며,

<산상>의 딸과 혼인하여 <방기方箕>를 낳았다.

 

<방기方箕>가 <동천>의 딸 <방을方乙>과 혼인하여 <방회>를 낳았는데,

어렸을 때엔 숙(菽)과 맥(麥)을 분별할 줄 모를 정도로 어리석고 둔하여

학문할 정도가 못되자, <방기方箕>는 그것이 걱정되었었다.

 

<방회>는 오로지 궁술만을 좋아하고 그 묘미를 터득하더니만,

오래도록 궁전에서 시위로 있으면서,

자리를 옮겨주지 않아도 아무 말 없이 지냈는데, 종당에는 크고 귀하게 되었고,

그 문중도 번창하게 되었고, <방方>씨의 시조가 되었다. 

 

<선방>이 좌보로, <조불>이 우보가 되었다.

 

<방부>는 대주부가 되었으며 행직 좌위장군과 대사마를 겸하게 되었다. 

 

<휴도>를 신성 태수로, <선방>의 동생 <선술>을 좌기장군으로,

<재생>을 북부 우태로, <고희>를 부고령(府庫令)으로 삼았다.

 

 



 

미천대제 10년{AD309}기사,

 

춘정월, 태공 <상보>가 나이 52살에 죽었다.

 

<상보>는 <상루>의 아들이며, <초>씨를 낳았는데, 상이 태자시절에 그녀를 아꼈었다.

 

<상보>가 <재생> 등을 시켜서 피해나가서 유랑하던 제를 보호하게 하였고

사직도 다시 세웠지만, 공신 등에게서 따돌림을 당하였다.

 

제의 즉위 초에, 폐제의 간신으로 지목되어 쫓겨났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상이 <초>후의 연인이었던 까닭에,

<상보>를 다시 등용하여 좌보・국구태공으로 삼았다.

 

<상보>의 처 <부芙>씨도 역시 상이 아꼈던지라

태후로 봉함을 받고 금인을 하사받았다.

 

궁중에 있는 동안 자못 큰 정사에도 간예하여 여론이 상큼하지는 않았다. 

 

 

겨울 10월, 두눌원에서 사냥하였다.

 

<주>후와 <면>후가 따라가 관나궁에 유숙하였고,

태보 <자柘>가 <면免>후에게 피살되었다.

 

<면>후는 본래는 삼보의 자리에 있던 <선방>의 처였으며 <주>후의 모친이었다. 

 

<선방>을 태보로, <을원乙源>을 좌보로,

<선옥仙玉>을 좌위장군으로, <선술仙述>을 우위장군으로,

<면성免城>을 좌기장군으로, <선방>의 아들 <선곽仙槨>을 우룡장군으로 삼았다.

 

지난 추7월에 <주>후가 상에게

 

“제 부친은 신하될 뜻이 없으니 큰 권한을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었고,

 

상은

 

“당신의 부친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는 믿을 수 있겠소.”라 답하였었지만,

 

<주>후는 상의 얘기를 들은 체도 아니 하고

<선방>에게 명을 내려 마산으로 돌아가게 하였고,

<선방>이 배치한 5부의 내사자 10인을 모두 파하였다.

 

이에, <선방>이 한탄하기를

 

“내가 어린 딸로 인하여 곤궁하여지니, 천명인가 보구나.”라 하였었다.

 

 


 

미천대제 11년{AD310}경오,

 

춘정월, <초>후가 난산으로 죽었다.

 

<초>씨는, 상과 댕기머리 시절에 맺어진 짝이었으나,

<봉상>에게 정조를 잃었고, 다시금 총애를 받게 되더니 오히려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총애가 빛을 잃더니만, <주>후가 총애를 독차지 하게 되었고,

이를 슬퍼하여 근심하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궁인들은 그 운명이 기구함을 가련케 여겼다. 

 

 

추9월, 현도 사람 <삼성參星>이 그의 무리 5십인을 데리고 남소(南蘇)에 투항하였다.

 

현도가 그들을 돌려보내주길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겨울 10월, <면>후와 함께 마산으로 가서 <을>태후와 <선방>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을>씨와 <선>씨 족당 남녀들에게 옷과 비단을 차등하여 하사하였다.

 

이때 <주>씨가 회임하였기에 <선결>의 무덤을 찾아 이를 고하려던 까닭이 있었다.

 

애초에, <구우九牛>씨의 조상은 마산에서 살았고,

아홉마리의 소를 기르고 나면서부터 재화를 쌓을 수 있었기에

<구우九牛>를 신으로 모셨다.

 

이후에 <구우九牛>씨를 낳았더니, 지극히 예뻐서 패자에게 빼앗겼고,

사자에 의해 분별되어 다시금 <주면朱面>의 첩으로 되었다가는,

또다시 <선결>에게로 와서는 <선방>을 낳았다.

 

태몽에선 신기한 조짐이 있었고, <우牛>옹이 그 꿈을 이상히 여겼다.

 

그 집안이 <선결>에게까지 전하여지자,

이윽고 <선결>이 재산을 얻고 마산도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그 무리들의 여럿이 부두밀찬공신(扶杜密贊功臣)이 된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선결>이 늘상 <구우九牛>가 나라를 구하였다라고 말하여왔더니,

지금 <구우>제를 지내게 된 것이었고,

<주>씨가 <구우>제의 제주가 되었기에 상께서 친히 거둥한 것이었다.

 

<구우>씨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었는데, 서로의 아버지가 달랐더니,

지금에 이르러서 <선仙>씨 혹은 <우牛>씨와 <주周>씨들이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당산(棠山)의 치사(雉祠)와 평산(平山)의 달사(獺祠)를

마산(馬山)의 우사(牛祠)와 함께 삼소(三蘇)라 불렀다. 

 

<탁발의로>가 代 公이 되었다. 

 

 

12월, 漢{前趙}의 태후 <선單>씨가

자기 아들인 <유예劉乂>의 말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다가 죽었다.

 

<유총劉聰>{前趙,烈宗}의 처 <호연呼延>은 <유총>에게 <유예>를 없애라 설득하였다.

 

이해 7월에 漢{前趙}>주 <유연劉淵>{高祖}>이 죽자,

여러 아들들이 서로를 죽이게 되었었다.

 

<유총>이 이겨서 임금 자리에 올랐고,

<선>씨를 처로 삼았으며, <선>씨의 아들을 황태제로 삼았다.

 

이윽고, <선>씨가 임신하였더니, <유예>가 이를 부끄러워하였었고,

이리하여 <선>씨가 지금 죽은 것이었다.

 

 

 

미천대제 12년{AD311}신미,

 

춘정월, <주>후가 태자<사유斯由>를 낳았는데, 백우(白牛)의 운세를 타고 났으며,

용모는 우두머리의 위용이었고, 목소리는 크고 맑았더니,

 

상이 매우 기뻐하며

 

“이 애가 진짜 용종이로구나.”라 이르더니, 삼보와 군신들에게 술잔치를 하사하였다. 

 

 
3월, <고노자>가 아들 <고경高卿>을 들여보내

요동이 정벌하기 좋은 상황임을 주청하였더니,

<방부>와 <선옥>에게 명하여 보기 5만을 이끌고

신성 태수와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발하게 하였다.

 

현도 사람 <삼성>과 안평 사람 <가회>를 선봉으로 세웠고,

또한 <봉우封雨>와 <온숙溫叔> 등에게는

돌아가서 그들의 선무지중(仙巫之衆)을 달래라 하였다. 

 

 

5월, 상이 <주>후와 갓 태어난 태자까지 데리고 용산의 온탕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주周>후를 황후로 세우고 옥책과 금인을 내렸다. 

 

 

8월, <방부> 등이 진공하여 서안평을 빼앗고,

그 곳의 남녀 2천명을 붙잡아 평양(平壤){今 요양}으로 옮겨왔다.

 

왕은 포로들을 받고 나서는,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선옥>을 안평 태수로, <선술>을 좌위로, <면강免江>을 우위로,

<선곽仙槨>을 좌기로, <석棤>을 우기로 삼았다. 

 

이 해 6월에 <유요劉曜>{前趙 末帝}가 낙양의 무고(武庫)에서

혜제{西晉2世 司馬衷}의 <양羊>황후를 거두고는

옥새 여섯을 평양(平陽){산서성 평양}으로 옮겼다. 

 

 

10월, 상이 <주>황후와 순행하여 안평으로 가서 사졸들을 위로하고,

<고경高卿>을 안평 소수로 삼아서 서안평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 <을원乙源>이 병으로 물러나니, <조불祖弗>로 대신하게 하였고,

<소우萧友>를 우보로, <소우萧友>의 동생 <밀만密万>을 동부 우태로 삼았다. 

 

 

12월, <을원乙源>이 죽었다.

 

 

 


 

미천대제 13년{AD312}임신,

 

춘2월, 남소 태수 <고노자>가 죽어, <송거松巨>로 대신하게 하였다.

 

<고노자>는 몸소 다른 이들보다 앞서 나섰기에 사졸들의 마음을 얻어,

성을 잘 지켜내었더니, 남소와 신성 사람들이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비류>는 사자를 보내서 백성들의 괴로운 사정을 물었고,

4궁{四窮}들에게는 곡식을 석 섬씩 나누어 주었다.

 

이해 2월에 <유총劉聰>은 자신의 처인 작은 <유劉>씨를

회제(懷帝){西晉3세 司馬熾}에게 처로 주었다. 

 

 

4월, <비류>가 <동명>사당을 배알하였고, <해구觧仇>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해구>의 조상은 평산(平山)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다. 

 

 

5월, 상이 오민전(吾民殿)에 납시어 상을 내렸다.

 

국산대부(國産大夫) <효경孝卿>에게는 백마와 표범피를,

대의경(大医卿)인 <언산彦山>에게는 저택 한 채를 내렸다.

 

아들 딸 합하여 넷을 낳은 사람 70인, 딸만 넷을 낳은 사람 5인,

아들만 셋을 낳은 500인, 딸만 셋을 낳은 83인,

남녀 각각 둘씩 낳은 사람 291인에게 포와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상이 즉위한 이래에,

백성들 중에 남편이나 처를 잃은 이들이 없어져서 인구가 4~5배로 늘어났다.

 

남부의 황룡촌(黃龍村)과 서부의 가래촌(加來村)은

매우 많이 늘어서 둘 다 10배가 되었다.

 

<효경>은 일찍이 호족들과 백성들의 찬밥신세인 처들을 변술(邊戌)로 내보내

처가 없는 이들에게 빌려주어 여자들의 산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하였었으며,

또한 니의(尼醫)를 파견하여 출산을 돕고, 투기하는 이들을 다스렸더니,

민속이 도타와 졌고, 이에 남녀들은 사랑하고 즐거워서 태평한 세상이 되었더니

제의 힘쓰셨음을 칭송하게 되었다. 

 

<석륵石勒>{後趙 高祖}>이 양국(襄國)에서 거(據)하였다.

 

 

 


미천대제 14년{AD313}계유,

 

춘정월, <을>태후궁에서 조회를 받고는, 연회가 무르익어 술이 얼큰해지자,

 

상이 태보 <선방>에게

 

“안평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낙랑을 깨야 하겠는데,

계책을 장차 어찌 낼 것이오?”라 하였더니,

 

<선방>이 아뢰길

 

“<자술>은 용맹하나 지모가 없으니 지략으로 취함이 좋고

정벌함은 마땅치 않을 것인즉,

신은 계략으로 기습하여 취하시길 청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상이 그러자고 하였고,

 

<선방>이 정남대장군이 되어서, <조문>・<뉴벽>・<장막사>・<창멱> 등을 이끌고,

형편을 살펴서 일을 도모하였다. 

 

<비류>가 스스로 희생물을 칼질하여 남교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하였다.

2월, 좌보 <조불祖弗>이 나이 66살에 죽었는데, 그는 <목평穆平>의 외손자였다.

 

<소우萧友>가 <조불祖弗>을 대신하게 하였고, <청견靑見>을 우보로 삼았다.

 

<청견靑見>은 <동천제>의 외손자이고, <봉상제>시절엔 사평{司評}을 지내다가

물러나와 동천릉을 지키며 높은 자리를 피하였었다.

 

지금에 이르러 <사유>태자가 잘 되길 빌었더니 <주周>황후가 불러들였다.

 

상은

 

“삼보의 자리에는 공신이 아니면 아니 되오.”라 하였지만,

 

황후가

 

“공신들은 덕망이 높은 이들만 못합니다. 당신은 여러 말씀 마세요.”라 하였더니,

 

<청견靑見>에게 자리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해 2월 <유총>이 晉의 신하 <민珉> 등과 나이 20인 회제(懷帝)를 죽였다.

 

작은 <유劉>씨를 다시금 자기의 처로 삼았다.

 

자신의 모친을 찾아보았더니 죽었고, 본래의 처 <장張>씨도 역시 죽었던지라,

작은 <유아劉娥>를 비로 삼았던 것이었다.

 

 

4월, <탁발의로>가 <탁발육수>를 시켜 <단질륙권>을 정벌하려다가 패하였다.

 

<모용외>는 <단段>씨의 도하(徒河) 땅을 취하여 돌아갔다.

 

<장통張統>이 <외>에게 투항하였다.

 

<모용외>는, <장통>을 낙랑 태수로 삼고, <왕준王遵>을 참군사로 삼았다.

 

이곳이 소위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군이다. 

 

 

10월, <선방>이 낙랑왕 <자술>과 살천원(薩川原)에서 만나 사냥하기로 하였는데,

<자술>이 <선방>의 정예기병이 심히 많음을 보더니만 내빼려 하는지라,

<선방>이 따라가서 사로잡았고,

또한 <조문祖文>과 <뉴벽紐碧>을 시켜 해빈(海濱)바닷가의 모든 읍을 평정하였다.

 

<창멱倉覓>은 교위부를 깨고 교위 속국 등의 일곱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고,

<장막사長莫思>는 낙랑성을 습격하여 깨고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서 바쳤다.

 

<선방>을 낙랑왕으로 삼고 작위를 태공으로 올려주어서

낙랑의 무리들을 지키게 하였다.

 

 

<자술>의 낙랑국은 옛 청해군 지역으로 맥이 세운 나라이다.

 

일제는 313년에 미천대제가 낙랑국을 멸한 것을 낙랑군으로 주해하여

고구려가 400여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 처럼 해석햐였다.

 

낙랑군은 313년에 晉의 낙랑태수 <장통>과 참군사 <왕준>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하여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

 

 

이해 10월, 代公 <탁발의로>가,

자기 아들인 <탁발육수>와 형의 아들인 <탁발보근>을 시켜

수만 병을 이끌고 전봉을 서게 하고, 자신은 20만병을 이끌고 뒤따르며,

<유곤劉琨>{東晉을 세운 사마예의 신하}을 위하여 진양(晉陽)을 공격하였다.

 

漢{前趙}의 <유요劉曜>{末帝}는 대패하고 몸에 창을 일곱 군데나 맞았다. 

 

<석륵石勒>{後趙 高祖}은 <왕준王遵>을 속였다. 

 

<탁발의로>는 성락(盛楽)에 성을 쌓아 북도로 삼고, 옛 평성(平城)을 남도로 삼았다.

 

또한 새로운 평성(平城)을 폭수(瀑水) 북쪽에 쌓고, <탁발육수>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미천대제 15년{AD314}갑술,

 

춘정월, <주周>황후가 황자 <무武>를 낳자,

태자 <사유斯由>를 황자로 봉하고 옥책과 금인을 주었으며,

단림신궁을 <주>황후의 궁으로 하였고,

군신과 종척들에게는 초문원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추9월, <방부>가 <선옥>・<휴도>・<부협> 등과 함께 진격하여

평곽(平郭)을 포위하여 떨어뜨렸고,

그 곳의 백성들을 신성의 동북으로 옮겨 땅을 개간하며 농사짓고 살게 하였다. 

 

<선방>이 <조문> 등을 보내 대방을 쳐서 잠성(岑城)・제해(提奚) 두 성을 빼앗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바쳤다.

 

남부 대사자 <대현大玄>이 낙랑 정벌을 따라갔다가 나이 35살에 죽었다.

 

 

 

 

미천대제 16년{AD315}을해,

 

춘2월, <방부>・<송거>・<고식> 등이 현도성을 쳐서 빼앗고,

수장인 <왕애王皚> 등 30인의 목을 베고, 보화도 모조리 빼앗았다.

 

<방부>를 진서대장군・현도 태수・평해공(平海公)으로 삼고,

최체(最彘)・양화(陽化)・갈부(鞨部)・장령(長嶺)의 땅도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5월, <모용외>가 종제인 <모용구慕容苟>를 보내 입조하여

토산물과 인삼・감초・단서피 등 50종을 바쳤다.

 

상이 <모용구>에게

 

“네 형이 천명을 알고 있다면, 곧 하서(河西)의 땅을 바치고서

서로 간의 경계를 지켜야 할 것이다.”라 일렀더니,

 

<모용구>가

 

“저희 작은 나라는 큰 晉의 신하입니다. 어찌 저희 맘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라 아뢰었다.

 

이에 상이 웃으면서

 

“우리가 취하려는 것이 그 큰 晉이다.

돌아가거든 네 형에게 조속히 찾아와 항복하라고 전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왕애王皚>와 <경회耿薈[>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일렀다.

 

이에 <모용구>가

 

“최체(最彘)와 양화(陽化)는 역시 하북의 땅이고, 저희 할아버님이 일어서신 곳입니다.

폐하께서는 무슨 연고로 그곳을 가지려 하십니까?”라 여쭈니,

 

상이

 

“우리의 세조이신 유리명황 11년에 <부분노>가

그 땅을 평정하여 속령이 된지 오래이다.

너희 할아버지 역시 내 신하가 아니더냐?”라 일렀고,

 

<모용구>가

 

“신의 할아버님의 할아버님께서 자몽천에서 처음 일어나시고 나서

<우문>의 집안과는 원수가 되어, 잠시 옮겼다가,

다시금 파동(巴東)・오림(烏林)・대극(大棘)의 땅으로 내려왔던 즉

최체(最彘) 이남이며, 이들 모두는 저희들의 땅입니다.”라 답하니,

 

상은

 

“하남(河南)땅도 모두가 짐에게 속하지만,

최체(最彘)의 작은 땅은 너희에게 내어줄 수 있다.”라 하였다.

 

<모용구>는 무엇을 얻어 돌아가서 <모용외>에게 고해야 할지를 몰랐다.

 

<모용외>는 단단히 화가 나서 화친하기를 그만두었다.  

 

 

미천대제와 <모용구>의 대화에서 개마와 낙랑군의 인근에 있는 최체(最彘)

분명히 하북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추7월에 상이 <주>황후를 데리고 순시하여

현도성에 이르러서 장수와 장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8월에는 남소에 들렀더니 태사가 별자리 변동에 대하여 상주하였다.

 

 

9월에는 서천원에서 사냥하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11월, <을>태후가 양수(陽隧)에서 백룡대제를 지냈다.  

 

혜성이 동북에서 나타났다.


 

 


미천대제 17년{AD316}병자,

 

춘정월, <소우萧友>를 남부 대사자로, <유장구劉長句>를 점선(粘蟬) 태수로,

<부승芙昇>을 마천(馬川) 태수로, <주담周淡>을 낙랑(楽浪) 태수로,

<청견靑見>을 좌보로, <우풍于豊>을 우보로, <오맥남烏陌南>을 중부 우대로 삼았다.

 

<오맥남>은 <오이烏伊>의 종손인데,

<선방仙方> 암살을 밀모하였다가 일이 틀어진 후, 이제서 다시 기용된 것이었다.

 

백제에서는 큰 별이 서쪽 변방에 떨어지고 큰 가뭄이 있었다.  

 

 

3월,代왕 <탁발의로>는 어린 아들 <탁발비연>을 아껴서

<탁발비연>으로 후계를 세우려고,

큰 아들 <탁발육수>를 신 평성(平城)으로 나가살게 하고

<탁발육수>의 모친도 내쳤으며,

<탁발육수>에게는 하루에 5백리를 가는 좋은 말이 있었는데,

<탁발의로>가 이것을 빼앗아 <탁발비연>에게 주어버렸다.

 

이에 <탁발육수>가  조정으로 찾아갔더니,

<탁발의로>가 <탁발비연>에게 절하라고 시켰고, <탁발육수>는 따르지 않았다.

 

<탁발의로>가 이윽고 <탁발비연>을 보련(步輦)에 앉혀서

사람들을 앞세우고 뒤따르게 하여 나다니게 하였다.

 

<탁발육수>는 멀리서 바라보다가

그것이 <탁발의로>인 줄로 알고 길 좌측에 엎드려서 보았더니,

다다른 것은 <탁발비연>이었다.

 

<탁발육수>는 이에 참담하고 화가 치밀어 곁을 떠났다.

 

<탁발의로>가 돌아오라 불렀으나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탁발의로>가 무리를 이끌고 <탁발육수>를 토벌하였으나,

오히려 <탁발육수>에게 패하였다.

 

<탁발의로>는 미복으로 민간으로 숨어들었으나,

비천한 아낙에게 들켜서 <탁발육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탁발보근>은 외부 경계를 서다가, 나라의 꼴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턱발육수>를 찾아가 쳐서 멸하였다.

 

<탁발보근>이 대신 서니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4월에 <탁발보근>이 죽으니,

<탁발보근>의 아들 <탁발시생>을 <탁발보근>의 어미 <유惟>씨가 세웠다.

 

백제에서는 4월에 도성의 큰 우물이 흘러넘쳤고, 흑룡이 그 우물에서 나왔다.

 

이에 사람들은 북쪽의 나라가 쳐들어 와서 나라를 빼앗을 징조라 여겼다고 한다.

 

 

<고이>계의 대방세력가 <구수>계의 한성(漢城) 토착세력간의 권력투쟁이 있었다 

 

 

5월,낙랑왕 <선방>이 입조하여,

<유요劉曜>가 난리를 치는 통에 찾아와 투항하는

晉의 사람들이 심히 많음을 고하였더니, 그들 모두를 후하게 대하라는 명이 있었다.  

 

 

11월, 당산공(棠山公) <고박아高朴兒>가 나이 69살에 죽었다.

 

<고박아>는 치사(雉祠)의 주인으로,

부두공신(扶杜功臣)이 되어 품계가 1품에까지 올랐는데도,

조정에서는 공을 다투지 않았더니 사람들이 어려워들 하였다.  

 

<탁발보근>의 아들이 죽어 <탁발보근>의 종부인 <탁발울률>이 섰다.

 

 


미천대제 18년{AD317}정축,

 

춘3월, <주周>황후가 아들 <민玟>을 낳았다.  

  

 

5월, 상이, <주周>황후를 데리고 졸본에 가서 동명묘를 배알하고,

순행하여 책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식高植>・<석棤>・<우경于京> 등에게 명하여 동해 땅을 쳐서 빼앗았다.

 

<고식高植>을 태수로 삼았다.  

 

 

7월, 초문원(肖門院)을 상원(象院)으로 바꾸어 <면免>후가 주관하게 하고,

<부芙>씨는 릉원(菱院)을,<을>태후는 백룡원(白竜院)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 해에 <사마예>가 <모용외>를 창려공(昌黎公)을 삼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모용외>는 <왕제王濟>를 배를 태워 건강으로 보내 북쪽으로 진격하라고 권하였다.

 

漢{前趙}>주 <유총劉聦>은 참소를 믿고 자기 동생 <유예劉乂>를 죽였다.

 

<모용외>의 이복형 <토곡혼吐谷渾>이 죽자 그의 아들 <토연吐延>이 뒤를 이었는데,

몸집이 장대하고 용력이 있어, 강(羌)족과 호(胡)족 모두가 범접하지 못하였다.

 

 

 


미천대제 19년{AD318}무인,

 

춘3월, 좌보 <청견靑見>이 병으로 물러나니, <우풍于豊>이 대신하고,

<연방椽方>이 우보가 되었다.  

 

지난해 <유총劉聦>이 18살인 민제(愍帝){西晉,司馬鄴}를 죽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그 흉한 소문이 건강(建康)에 다다랐고,

<사마예{東晉,司馬睿}>가 황제위에 올랐다.  

 

요서공(遼西公) <단질육권>이 죽자,

아들이 어려서, 숙부인 <섭복진涉復辰>이 스스로 보위에 올랐다.

 

<단필제段匹磾>가 계(薊)로부터 허둥지둥 조상하려 우북평(右北平)으로 달려오니,

<섭복진涉復辰>이 병사를 일으켜 이를 막아섰다.

 

이에 <단말배段末柸>는 허술한 틈을 타서 <섭복진>을 습격하고

스스로 선우를 칭하고 <단필제>를 맞아 깨뜨렸다.

 

<단필제>는 달아나 계(薊) 땅으로 돌아갔다.  

 

 

여름 5월, 현도 태수 <고경高卿>을 보내서 하성(河城)을 쳐서 빼앗았다.

 

평주(平州) 자사 <최비崔毖>가,

이 소릴 듣고는 사신을 보내와서 신하를 칭하면서,

우문(宇文)과 함께 연합하여 모용을 쳐서 그 땅을 나누어 가지자고 청을 하였다.

 

이에 <담하談河>를 우문씨와 단씨에게 보내어 <모용외>를 치자 공모하였다.  

 

<단필제>가 <유곤劉琨>을 죽였다.


가을 7월, <을>태후가 죽어 <돌고>대왕릉에 장사하였다. 춘추 58세였다.

 

<을>태후는 성품이 총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으며,

안색은 예쁘고 고왔고 키는 7척이나 되었다.

 

노래하며 춤추고 놀기를 잘하였고,

망령된 명을 내리는 바람에 사람들을 희노비구(喜怒悲懼)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두루 녹이는 재주가 있어 권력 있거나 귀한 자들을 진흙을 주무르듯 하였다.

 

대업을 숨어서 도왔다가, 상이 즉위한 뒤에 태후의 자리로 올려졌다.

 

정사에 끼어들어 일을 그르친 것이 많았는데, 이를 말릴 수도 없었다.

 

사신(私臣){情夫}이 많았고, 금인을 주조하여 놓고는 황음하기로 일을 삼았으니,

나라사람들이 <을>태후를 천하다 여겼다.  

 

이달에 <탁발울률>이 <유호劉虎>를 쳐서 깨뜨리고, 그 부락을 취하였다.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의 땅을, 동쪽으로는 물길 이서의 땅도 취하였다.  

 

漢{前趙}>주 <유총劉聦>이 죽었다.

 

아들 <유찬劉粲>{前趙,隱帝}>이 섰는데 어미를 증(烝)하였다.

 

<근번靳樊>・<무왕武王> 등은 모두가 나이 20 살이었다.

 

 

8월에 <근준靳準>이 漢주 <유찬劉粲>을 죽이고,

 

새보를 晉으로 돌려주면서

 

“옛날부터 호(胡)인들이 천자가 된 적은 없었다.”고 하였다.

 

<유요劉曜>{前趙,末帝}와 <석륵石勒>{後趙,明帝}>이 함께 <근준靳準>을 쳤고,

<근준靳準>은 자기 수하들에게 피살되었다.  

 

 

12월, <석륵石勒>이 평양(平陽){산서성 평양}을 공격하니,

<근명靳明>은 <유요劉曜>에게로 도망하였으나,

<유요劉曜>가 <근靳>씨들을 모조리 척살하였다.

 

 

 


미천대제 20년{AD319}기묘,

 

춘정월, <담하談河>가 요동에서 돌아와 상주하길

 

“<단段>씨는 내란 중이며, <우문宇文>은 가장 강성하여 있고,

<모용慕容>은 새로이 번성하여 그 위세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이 둘{우문과 모용}의 동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변방을 조용히 수습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 하니,

 

상이 흡족히 여겼다.  

 

 

2월, <석륵>이 좌장사 <왕수王脩>를 漢에 보내 승첩을 바쳤다.

 

漢주 <유요>가 사도(司徒)직을 겸하게 하여 <곽사郭汜>를 보내,

<석륵>에게 태재령(太宰領) 태장군(太将軍)을 제수하고,

趙{後趙}의 왕으로 작위도 올려주고 수례도 얹어주었다.

 

나갈 때는 길거리 행인을 없애고 들어올 때는 길을 깨끗이 치우게 하여서

曺公{曹操}>이 東漢을 섬기던 옛 얘기같이 하였다.

 

<왕수王脩>와 <왕수王脩>의 차석인 <유무劉茂> 모두는 장군으로 삼고,

열후에 봉하였다.

 

<왕수王脩>의 사인 <조평락曹平樂>이 <왕수王脩>를 좇아 속읍으로 갔다가,

눌러앉아서 漢을 섬기게 되자,

 

<유요>에게 언질하기를

 

“대사마{석륵}가 <왕수王脩> 등을 보냈는데,

겉으로는 지성을 다하고 속으로는 큰 가마{유요의 나라}의 강하고 약함을 살피다가,

재차 명령이 있기를 기다려서, 장차 타고계신 가마를 엄습하려 합니다.”고 하였다.

 

이때, 漢은 병력의 실상이 피폐하였기에,

<유요>는 이 말을 믿었으며 <곽사郭汜>가 돌아가는 것을 추격하여

<왕수王脩>를 저잣거리에서 참하였다.  

 

<석륵>은 양국(襄國){後趙의 都邑}>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유무劉茂>가 도망하여 들어가 <왕수王脩>가 죽은 상황을 보고하였다.

 

<석륵>은 대노하여

 

“내가 <유劉>씨를 섬김에는 신하된 직분을 넘어섰었다.

<유요>의 기업은 모두 내가 이루어 준 것이었다.

지금 이미 뜻을 이루었다 하여 도리어 서로를 도모하겠다면,

趙의 왕 자리이든 황제 자리이든 나 스스로가 이룰 것이다.

어찌 저놈에게 기대하겠나?”라 하고는<조평락曹平樂>의 3족을 주살하였다.


3월, 상은, 순수하여 신성과 안평에 이르러서,

<부협芙莢>과 <고경> 등에게 각자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국경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4월, 漢주 <유요>가 장안으로 환도하여, 비로 있던 <양羊>씨를 황후로 세우고,

<양羊>씨의 아들 <유희劉熙>를 황태자로 삼았다.

 

<양羊>씨는 죽은 혜제(惠帝){西晉,司馬衷}>의 후였는데,

<유요>가 그녀를 지극히 아꼈더니, 국정에 끼어들어 잘못됨이 많았다.

 

代왕 <탁발울률>이 <단필제>를 치니,

<단필제>는 처자식을 버리고 락릉(樂陵)으로 도망하여 <소속邵續>에게 의지하였다.  

 

 

10월, <선옥仙玉>에게 명하여 <휴도休都>와 <우경于京>의 군대를 끌고나가

<모용외>를 쳤더니 <모용외>는 딸을 바칠 것이니 화친하자고 하였다.

 

이에 상이 <담하>에게 물으니,

 

<담하>는

 

“<모용외>는 <단>씨의 집에 장가를 들고 그 도하(徒河) 땅을 취하였으며,

겉은 어질지만 속은 험합니다. 화친은 아니 됩니다.”라 하였다.

 

이리하여, 우문국 및 단국과 함께 진공하였더니,

<모용외>는 크게 두려운 나머지 나오지는 못하고,

몰래 술과 음식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선옥>은 이를 거절하였고, <우문>만이 이를 수락하였다.

 

이때, 날씨는 춥고 군사들은 지쳐 있었더니 <선옥>도 걱정스런 낯빛이었다.

 

사마 <현슬玄膝>이 <선옥>을 설득하길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깊숙이 들어는 왔지만, 싸우지 마시오.

지금 <우문>은 갑자기 변심하였고, <단>국은 본래 <모용외>와 한 족속이오.

물러나서 변화를 살피는 것만 못할 것 같소.

서서히 도모하여 만전을 기합시다.”라 하였다.

 

<선옥>도 그것이 좋겠다고 여겨 물러났다. <단>국 또한 물러났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한慕容翰>과 함께,

<우문>을 습파하고는 요동으로 진공하니,

<최비崔毖>{晉 平州>刺史}가 홀몸으로 아군으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선옥>이 나가서 싸우다 <모용외>에게 패하여 죽었다.

 

왕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는, <휴도>에게 <선옥>의 군사를 이끌게 하였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慕容仁>을 요동 태수를 삼아놓고<휴도>를 쳤다.

 

우리는 연패하여 평곽(平郭)을 잃었다.

 

이에 <소우>가 안평 태수가 되어 2만군을 이끌고 가서 <휴도>의 군대를 구하였다.

 

<청견>을 남부 대사자로 삼아서,< 선옥>을 우보의 예로 장사하여 주었고,

<선옥>의 처 <불弗>씨에게는 매년 곡식을 주게 하였다.

 

<선옥>은 <선방>의 동생으로 상대를 겁주는 힘이 있었고 활을 잘 쏘았다.

 

형인 <선방>을 도와 후산(候山)의 공을 세웠고, <상보尙宝>의 처 <불>씨를 빼앗았다.

 

<선옥>은 용감하여 싸움은 잘하였으나 적을 얕잡는 기질이 있었고,

평소에 번번이 휘하를 욕하였기에,

혼자만이 말을 몰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끝내는 패하여 죽은 것이었다.

 

그의 휘하들은 힘들여 싸워서 그를 구하려 하지는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자치통감>에 쓰여 있기는

'12월, 평주 자사 <최비>는 스스로 중주에서 인망이 있다고 여기고,

요동에 진을 쳤는데,

많은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용외>에게 귀의하니 마음이 편안치 않았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서 돌아오라고 불렀으나 모두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모용외>가 이들을 붙잡아두었다고 생각하고는,

몰래 <고구리>・<단>씨・<우문>씨를 설득하여, 함께 공격하게 만들고,

<모용외>를 멸하여 그 땅을 나누어 가지자 약속하였었다.

 

<최비>와 친한 발해(渤海) 땅의 <고첨高瞻>이 힘들여 간언했어도,

<최비>는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3국이 군대를 합쳐서 <모용외>를 토벌하기에 나섰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고구리>・<단>씨・<우문>씨를} 치자고 청하였더니,

 

< 모용외>가 말하길

 

“저쪽은 <최비>의 꼬임에 빠졌으며, 한데뭉친 이점을 노리고 있다.

저쪽의 군세는 초기엔 합쳐졌으니 심히 날카로울 것이다.

맞싸워서는 아니 되고, 응당 단단히 지켜서 그 예봉을 꺾어야 한다.

저들은 형편없는 군대들이 합쳐져서 왔으며,

아직 한 사람의 지휘 하에 있지 않으니,

서로가 한 사람 아래로 들어가기는 불가할 것이고,

시일이 지나면 필시 사이가 나빠질 것이다.

그리되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최비>와 함께 속여서

자기들을 이길 것이라 걱정하기도 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끼리도 시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둘로 갈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저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국이 극성(棘城)으로 진공하자,<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지키면서,

사람을 보내서 소와 술로 <우문>의 군대만을 먹였다.

 

이에 다른 두 나라는, <우문>이 <모용외>와 모의한 것으로 의심하여,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 대인 <우문실독관>은 비록 두 나라가 돌아갔어도,

당당하게 나 혼자서 <모용>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다.

<우문>씨의 사졸 수십만은 40 리에 걸쳐 연이어서 병영을 세웠다.

 

<모용외>가 도하(徒河)에 있는 아들 <모용한慕容翰>을 불러들이라 시켰더니,

 

<모용한>이 아뢰길

 

“<우문실독관>이 거국적으로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저쪽은 수가 많고 저희는 수가 적으니, 계책을 써서 파하기는 쉬워도,

힘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성안의 사람들만 가지고도 적을 막기에 충분하십니다.

<모용한>은 밖에서 기습병력이 되어 때를 노리다가 공격하게 해주시길 청합니다.

안팎에서 함께 치면, 저들은 놀라움에 소란스러워져서 대비할 바를 모르게 되니,

저들을 깨는 것은 필연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병력을 한데 모으면,

저들은 성을 공격하기에만 몰두하며 다른 것은 걱정하지도 않게 될 것이니,

우리에겐 좋은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군사의 많음을 시위하게 되면 우리가 겁나고 두려워하는 것이 되어,

사기가 싸워보기도 전에 먼저 꺾일까 걱정됩니다.”라 하였다.


<모용외>가 그래도 이를 믿지 않으니,

 

요동의 <한수韓壽>가 <모용외>에게 말하길

 

“<우문실독관>은 큰 것을 믿고 기댈 생각이겠으나,

장차 우쭐한 병졸들이 처연해지면 군대는 엉성하여 질 것입니다.

그때 느닷없는 군병들이 내달으면, 대비가 없었기에 우왕좌왕 할 것이니,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계책인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모용외>가 <모용한>을 도하에 머물러 있으라고 허락하였다.

 

<실독관>은, 이 소식을 듣고서, 말하길

 

“<모용한>은 평소에 날래기로 이름이 있더니만,

과연 지금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골칫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응당 먼저 쳐서 잡아야 할 것이다.

성을 빼앗는 것은 걱정꺼리도 되지 못한다.”라 하고는,

수천 기를 나누어 보내 <모용한>을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한>은, 이리 될 것을 알고는,

가짜 <단{段}>씨 사자를 만들어서 귀로 길에 <실독관>에게 얘기하길

 

“<모용한>은 오래도록 우리에겐 골칫거리였습니다.

소식을 듣는 대로 그를 치십시오.

우리 <단>씨는 이미 엄중한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속히 진격하여야 할 것입니다.”라 하게 하였었다.

 

그리고는, 사자가 이윽고 떠나자 곧바로

<모용한>은 성 밖으로 나가서 매복을 두어 <우문>씨의 군대를 기다리게 하였다.

 

<우문>씨의 기병들은 사자를 만나보더니,

크게 기뻐하면서 내달려서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은 채 복병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이에, <모용한>은 두들겨 짓이고 사로잡으며, 승승하여 빠르게 진격하였고,

몰래 사자를 <모용외>에게 보내서 출병하여 큰 싸움을 벌이자고 알렸다.


<모용외>는 자기의 아들 <모용황慕容皝>과 장사 <배억裵嶷>를 시켜

정예병을 끌고 전봉을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따랐다.

 

<우문실독관>은 애당초 대비가 없었기에,

<모용외>가 다가오고 있음을 듣자 놀라면서 모든 병사를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전봉이 서로 부닥치자,

<모용한>이 1,000기를 거느리고 측면에서 곧바로 영내로 달려들어

모조리 불을 질러 태우니 <실독관>의 무리들 모두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패하였고, <실독관>은 가까스로 몸을 피하였다.

 

<모용외>는 그 무리들을 모조리 사로잡고, 황제 옥새 세 개를 노획하였다.

 

<최비>는, 이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하며,

자기 형의 아들인 <최도崔燾>를 시켜 극성으로 가서 거짓 축하 모임을 하게 하였더니,

세 나라의 사신들 역시 도착하여 화친을 청하며 말하길

 

“우리들 본시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최> 평주가 우리에게 그리 하라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곁에 세워놓고 병사를 시켜 지켜서있게 하였더니,

<최도>는 두려움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어 <최비>에게 이르길

 

“항복하면 상책이고, 도망하면 하책이다.”라 하고는,

병사를 이끌고 사자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수십 기만을 데리고 가속은 버린 채< 고구리>로 도망하였고,

그의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투항하였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을 정노장군으로 삼아 요동에 진을 치니,

관부와 저자 모두는 옛날과 같아졌다.

 

<고노자> 같은 <고구리> 장수가 하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모용외>는 <장통張統>을 보내 공격하여 그 장수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 천여 가도 사로잡았다.

 

<최도崔燾>・<고첨高瞻>・<한긍韓恆>・<석종石琮>도

극성으로 귀부하기에 객례로 대하였다'

라고 한다.


12월, <고경高卿>이 하성에서 <장통>과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상이 <방부方夫>에게 현도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하성을 구하라 하였더니,

<방부>는 하성으로 가지 않고 요동으로 곧바로 달려갔고,

<모용외>는 아들 <모용한>을 시켜 <모용인>을 구하게 하였으며,

<모용한>은 잘도 싸워냈다.

 

상은 이 소식을 듣고 <방부>에게 피아간의 경계를 지키라 하였다.

 

이는 오래 버티기를 하는 계략이었다.

 

<장통>은 하성에 있던 천여 가를 이끌고 돌아갔다.  

 

북해(北海)의 <정림鄭林>이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수레・소(牛)・조(粟)・비단을 하나도 거두어가지 않았고,

스스로는 들판에서 경작하였다.

 

<모용외>가 옥새 3개를 건강에 바쳤다.  

 

<고구리>가 여러 번 요동을 쳤으나,

<모용외>가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 막아냈다.  

 

이 해에 <포홍蒲洪>은 趙{前趙}주 <유요劉曜>에게 투항하였다.

 

 

 


미천대제 21년{AD320}경진,

 

정월, 낙랑왕 <선방>이 죽으니, 상이 곡하여 슬퍼하며 말하길

 

“작년엔 <선옥>이 전사하더니, 이 번 봄에는 세 아버지(三父)가 나를 버렸다.

어찌하여 짐은 고굉지신을 앗김이 이리 심한고.”라 하고는,

 

<선곽仙槨>{선방의 아들}에게 돌아오라 명하였고 마산에 묻어주었다.

 

상과 <주>황후가 친히 왕림하여 사당을 세웠다.

 

<선방>은 풍채가 멋졌으며, 권모와 술수도 좋았고,

타인과 아랫사람들을 잘 돌보아주었다.

 

제를 세우던 중에 찬탈을 획책하기도 하였으나 <주>황후에 의해 저지되었고,

끝내는 천명의 소재를 알았으며,

직무에 임하여서는 남서쪽의 땅을 넓히려 애썼으나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나이 64살에 죽었다.

 

<선방>은 정력이 좋음을 자랑하다가,

낙랑의 젊은 여인에 미혹되어 병이 깊어지더니 갑자기 심하여졌었다.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선방>은 큰일을 잘도 헤쳐 나아갔으나,

예절을 알지 못하여 <을>태후를 자기의 처에게 하듯이 치붙었다.

 

태후가 죽음에 임박하여 <선방>에게 따라죽으라고 명하자,

상은 그가 중신임을 들어 작은 예절을 따라 죽을 필요는 없다고 하여

그의 순사를 막아주었다.

 

꿈에 태후가 나타나 약조를 어긴 것을 책망하니, 마음이 항상 찜찜하였었는데,

근자에는 꿈에 태후가 노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의 뿌리를 뽑아버렸더니

병이 심하여졌었다.

 

낙랑 여인 또한 갑자기 죽었으니, 사람들은 태후의 영령이 그리 한 것으로 여겼다.  

 

<우풍于豊>을 태보로, <연방椽方>을 좌보로, <담하談河>를 우보로 삼았다.

 

<우풍>과 <연방>은 모두 외척 대가 집의 사람이었으나,

<담하>는 한미한 출신의 공신이어,

사람들이 그를 구미초(狗尾貂)로 여겼다.  

 

<주>황후가 아들 <득得>을 낳았다.  

 

<유요劉曜>가 <진창陣倉>을 공격하였다.

 

<초벽草壁>을 빼앗았고 또한 <음밀陰密>도 빼앗고는 장안으로 돌아갔다.

 

<단말배>가 <단필제>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단필제>가 <소속邵續>에게

 

“나는, 본시 이적(夷狄)이어서, 의를 귀히 여겼다가 집안을 잃었소.

군께서는 서로 힘을 합쳐서 <단말배>를 치자고

오랫동안 요청하셨던 것을 잊지 않으셨겠지요?”라 하자,

 

<소속邵續>이 들어주었다.

 

이윽고 함께 <단말배>를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단필제>는 아우인 <단문앙段文鴦>과 함께 계(薊)를 공격하였다.

 

<석륵>은 <소속邵續>의 군세가 외톨이임을 알고는,

<석호石虎>을 보내서 염차(厭次)를 에워쌌고,

<공장 孔萇>을 보내어 <소속邵續>의 별영 11곳을 쳐서 떨어뜨렸다.

 

<소속邵續>은 스스로 성에서 나와 <석호石虎>를 치다가 <석호石虎>에게 붙잡혔다.

 

<석호石虎>가 성을 항복하게 하라고 시켰으나, <소속邵續>은 듣지 않았다.


3월, 신성으로 거둥하여 군대를 살폈다.  

 

 

6월, <유요劉曜>가 풍명관(酆明観)과 서궁(西宫) 및 릉소대(陵霄臺)를 만들었다.

 

또한 수릉(壽陵)도 쌓았는데, 둘레는 4 리가 되고, 깊이는 35 길이나 되었으며,

동(銅)으로 곽을 만들고 황금으로 치장하니,

소요되는 비용은 합치니 수억만 금이나 되었다.

 

이에 간하는 자가 있어, 그 돈으로 군대를 꾸리면 평주(平州)・량주(涼州)와

吳 ・蜀의 땅은 물론 <석륵石勒>・<조의曹薿> 땅의 군대까지 아우를 수 있겠다 하니,

<유요劉曜>가 그 공역을 파하였다.  

 

<조적祖逖>이 <석륵>을 치니,

<석륵>은 그것이 골치 아파서 <조적祖逖>의 할아버지 무덤을 고쳐 쌓아주고는

투항하였던 자들도 돌려주었다.

 

<조적祖逖>은 <석륵>을 덕이 잇다고 여기어, 침입하여 난폭하게 함이 적어졌다.

 

<석륵>이 간계로써 <조적>을 누그러뜨리려고 함이 이러 하였었다.  

 

 

8월, <비류>가 궁의 서쪽에 사대(射臺)를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좌평 이하 모든 이들에게

활쏘기 훈련과 시험에 참여케 하였다.  

 

<서감徐龕>이 <석호>때문에 곤혹스러워서, 투항하겠다고 청하였더니,

<석륵>이 들어주었다.  

 

 

9월, <모용인>이 재차 <휴도休都>를 습격하여 왔다.

 

아군이 패하여 잃은 것이 심히 많았고, <휴도休都>와 <우경于京>이 거기서 죽었다.

 

 

12월에 <방부方夫>와 <송거松巨>가 <모용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미천대제 22년{AD321}신사,

 

춘2월, 내리(內裏)대형 <해현觧玄>이 <주>황후의 총애를 받아

전(殿) 주부(注簿)로 발탁되더니 후와 함께 정사를 처결하였다.

 

태보 <우풍于豊>이 간하길

 

“<모용외>는 심복들의 우환을 다스렸으며

그의 모든 아들들은 비할 데 없이 영특하고 용맹합니다만,

폐하께서는 태자들 모두가 어리고, 폐신(嬖臣)이 집정하고 있습니다.

<모용외>가 이를 알아차릴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이 크게 뉘우치고는 <해현觧玄>에게 밖으로 나가서 거처하라고 명하였다.  

 

<비류比流>가 서제인 <우복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는데,

이 자가 폐신(嬖臣)이어서 국인들이 흔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과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그 나라의 남쪽에서는 황충이 일었다.


3월, <석륵>이 유주(幽州) 자사 <단필제>를 염차(厭次)에서 공격하고,

<공장孔萇>이 <단필제>의 통치 안에 있던 모든 성을 쳐서 빼앗았다.

 

<단문앙段文鴦>은 힘써 싸우다 죽었고, <단필제>는 <석륵>에게 죽었으며,

유주(幽州)>・기주(冀州) ・병주(幷州)의 세 주는 모두 후조(後趙)의 차지가 되었다.  

 

 

12월,  <모용외>가 아들 <모용황>을 세자로 삼았고, 궁의 동쪽에 학당을 만들고,

<평원平原><유찬劉讚>을 제주로 삼았으며,

<모용황>은 모든 소생들과 함께 수업하게 하였고,

<모용외>도 짬을 내어 친히 참석하여 들었다.

 

<모용황>은 뜻이 크고 굳세었으며, 권략도 풍부하고 경술 배우기를 좋아하였기에,

나라사람들이 <모용황>을 칭송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을 요동으로 옮겨서 진을 치게 하고,

<모용인>은 평곽에 진을 치게 하였다.

 

<모용한>은 민간과 이(夷)인들을 다독이고 편안케 함에 있어

위엄과 사랑이 심히 그득하였다.

 

<모용인>은 그 다음이었다.


<탁발의이>의 처 <유惟>씨는 代왕 <탁발울률>이 강성함을 싫어하였으며,

자기의 아들에게 불리 할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탁발울률>을 죽이고는,

자기 아들을 세웠더니, 이때 죽은 대인들이 수십 인이었다.

 

<탁발울률>의 아들 <탁발십익건>은 어려서 강보에 싸여 있었는데,

 

그의 어미 <왕王>씨가 치마 속에 숨기고는 기원하길

 

“천명이 구차하나마 너에게 있으니, 오래도록 울지 말거라.”라고 하였는데,

 

울지 않아서 결국 죽음을 면하였다.

 

<유씨가 국정을 움켜쥐고 後趙에 사신을 보내서 예의를 차리니,

後趙 사람들은 여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사신이라 하였다.  

 

<우탁于卓>의 딸 <우전于腆>을 동궁비로 삼았다.

 

<을>태후 소생이었다. 유명을 따른 것이었다.

 

 

 


미천대제 23년{AD322}임오,

 

춘정월, 태보 <우풍>이 죽어, <연방>이 대신하고,

<담하>가 좌보를, <방부>가 우보를 맡고, <방상方象>이 현도 태수가 되었다.  

 

 

2월, 後趙 왕 <석륵>이 아들 <석홍石弘>을 세자로 삼았다.

 

<석호石虎>에게 정예병졸 4만을 주어서 <서감徐龕>을 치게 하였다.

 

<서감徐龕>은 굳게 지키고 싸우려들지 않으니,<석호>는 길게 진을 둘러치고 지켰다.  

 

 

4월, <유요>의 처 <양羊>후가 죽었다. 시호를 <헌문献文>으로 하였다.  

 

 

7월, <석호>가 태산(泰山)을 빼앗고 <서감徐龕>을 붙잡아 양국(襄國)으로 보내니,

<석륵>은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자루에 처넣어 백 척 루상으로 올려 두들겨 죽이고,

<왕복도王伏都> 등의 처자식에게 살점을 도려내어 먹게 하였으며,

항복한 병졸 3천은 땅에 묻어버렸다.  

 

 

12월,< 유요>가 자신의 부모를 속읍(粟邑)에 장사하고, 널리 사면하였다.

 

무덤은 아래 둘레가 2 리에 높이는 100척이나 되었고,

비용을 합산하면 장정 6만 명을 써서 100일 걸려서 완성하였다.

 

역부들은 밤이 되면 짐승기름으로 불을 밝히며 계속하였다.

 

민초들이 심히 고통스럽다고, <유遊>의 아들 <원遠>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모용황>이 영지(令支)에서 <단말배>를 토벌하고 1,000호를 약탈하여 돌아갔다.

 

 


미천대제 24년{AD323}계미,

 

3월, <고희高喜>의 딸이 <해현觧玄>의 딸을 낳았다.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해觧>태후가 된다.  

 

<석륵>이 <모용외>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모용외>는 이 사신을 잡아서 건강으로 보냈다.  

 

 

4월, 봉산(烽山)후가 황자 <희羲>를 낳았다.  

 

 

6월, <주>황후가 황자 <석{錫}>을 낳았다.  

 

 

7월, 태보 <연방>이 죽어, <소우>가 이를 대신하고, <석棤>이 안평 태수가 되었다.  

 

趙{前趙}주 <유요>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롱성(隴城)을 포위하고,

따로 군병을 보내 상규(上邽)를 포위하여 진을 치니,

<진안陳安>이 빈번히 나와서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우군장군 <유간劉幹>이 평양(平襄){산서겅 평양}을 쳐서 이겼다.

 

롱(隴)上의 모든 현들이 항복하였다.

 

<진안陳安>은 장수 <양백지楊伯支>와 <강충아姜冲兒>를 남겨서 롱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정예기병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도망하여 섬중(陝中)으로 숨어들었다.

 

<유요>가 장군 <평선平先> 등을 보내 추적하였다.

 

<진안陳安>은 왼손으로는 7척 대도를 휘두르고

오른손으로는 한 길 길이 팔사모를 썼으니,

가까운 적은 한꺼번에 칼과 창으로 대여섯을 베었고,

멀리 있는 적은 좌우로 활을 쏘아대며 치달렸다.

 

<평선平先> 또한 용맹하고 빠르기가 나르는 것 같았는데,

<진안陳安>과 맞붙어 3합을 싸워서, 그의 창을 탈취하였다.

 

저녁이 되고 비가 심하게 내리자,

<진안陳安>은 말을 버리고 측근과 함께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趙병들은 수색하였으나 숨은 곳을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진안陳安>이 장수 <석용石容>을 시켜 趙의 군병을 살피게 하였더니,

趙병의 보위장군 <호연청인呼延靑人>이 <석용石容>을 사로잡았고,

<진안陳安>의 소재를 고문하였으나 <석용石容>이 죽어도 말하려 하지 않으니

<호연청인>이 그를 죽였다.

 

비가 멎자 <호연청인>이 흔적을 더듬어

간곡(澗曲)에서 <진안陳安安>을 붙잡아서 죽였다.

 

<진안陳安安>은 장수와 병사들을 잘 다독거렸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다 함께 죽었으니,

롱(隴)上의 사람들은 그를 사모하여 장사지가(壮士之歌)를 지었다.

 

<석호>가 광고(廣固)에서 <조억曹嶷>을 포위하였더니,

<조억>이 나와서 항복하기에 양국(襄國)으로 보내서 죽였다.


9월, 두눌원에서 사냥하였다.  

 

좌보 <담하>가 죽어, <방부>가 이를 대신하고,< 재생>이 우보가 되었다.

 

이에 <재생>의 사위 <연억椽檍>이 <재생>을 대신하여 북부를 다스렸는데,

이로써 사위로 하여 대신 다스리는 풍조가 시작되었다.  

 

<우전于腆>이 <완完>{사유의 아들}을 낳았다.

 

 


미천대제 25년{AD324}갑신,

 

2월, 태보 <소우>가 죽어, <방부>가 이를 대신하고,

<재생>이 좌보, <오맥남>이 우보가 되었다.

 

<오맥남>의 사위 <추棰>가 <오맥남>을 대신하여 중부를 다스렸다.  

 

이 해에, 代에서는 왕인 <탁발하녹>이 직접 국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모든 부 중에 여럿이 아직 복속하지 않고 있어서,

동목근산(東木根山)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  

 

 

 

 

미천대데 26년{AD325}을유,

 

여름 4월, <방부>를 낙랑왕으로, <재생>을 태보로,

<오맥남>을 좌보로, <명림섭明臨涉>을 우보로, <우린于璘>을 남소 태수로 삼았다.  

 

 

2월, <석륵>이 <우문걸득귀>에게 관작을 올려주고는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모용외>는 세자인 <모용황>・<색두>・<단국>을 함께 보내어

<석륵>의 <우문걸득귀>를 치게 하였고 

요동 재상 <배억>을 우익으로 <모용인>을 좌익으로 삼았다.

 

<우문걸득귀>는 연수(渷水)를 거점으로 하여 <모용황>에게 대적하면서,

형의 아들인 <실발웅悉拔雄>을 보내어 <모용인>에게 대적하게 하였다.

 

<모용인>은 <우문실발웅>을 쳐서 목을 베고 승승하였으며,

<모용황>과 합쳐 <우문걸득귀>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우문걸득귀>는 군대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였다.

 

<모용황>과 <모용인>은, <우문>의 국성으로 들어가서는,

가볍게 무장한 군병으로 하여금 <우문걸득귀>를 쫓게 하였더니,

그 나라 땅을 3백여 리나 지났다가 돌아왔다.

 

중기(重器)와 가두어 기르던 짐승을 모조리 노획하였더니 100만이나 되었으며,

투항하여 온 백성도 수만이나 되었다.

 

 

3월, <단말배>가 죽어, 동생 <단아>가 섰다.  

 

 

5월, <유요>가 <석호>와 팔특판(八特阪)에서 싸웠다.

 

<유요>는 군졸들이 까닭 없이 놀래어 달아나고 무너져서,

장안으로 돌아갔으며, 이에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어 병이 생겼다.  

 

 

10월, 백제의 하늘에서는 풍랑이 서로 부딪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11월,< 비류>가 구원(狗原)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손수 사슴을 쏘았다.  

 

계사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모용외>가 <단>씨 및 <방목方睦>과 더불어 <단아段牙>를 위한 모의를 하고는

그에게 도읍을 옮기라 하였더니,

<단아段牙>는 즉각 그 결정을 따라 영지(令支)로 갔더니,

나라사람 들은 반갑지 않아 하였다.

 

<단질육권>의 손자인 <단요段遼>는 <단아段牙>의 지위를 빼앗고 자,

도읍을 옮긴 것을 <단아段牙>의 죄로 삼고는,

12월에 나라사람들을 동원하여 <단아段牙>를 죽이고, 스스로 위에 올랐다.

 

<단>씨는 <무물진務勿塵> 이래로 날이 갈수록 강성하여져서,

그들의 땅은 서쪽으로는 어양(漁陽)에 접하고

동쪽 경계는 요수(遼水){今 조백하}이었다.

 

호(胡)인과 진(晉)인을 합쳐 3만 호를 통솔하였기에

공현(控弦){騎射兵}이 4, 5만이나 되었다.  

 

代의 왕 <탁발하녹>이 죽고 동생인 <탁발흘나>가 섰다.

 

 

※ 요서선비 단부의 수장

 

        수장명    

      재위

 단무물진(段務勿塵)

   303-310

 단질육권(段疾陸眷)

   310-318

 단섭복진(段涉復辰)

   318

 단말배(段末柸)

   318-325

 단아(段牙)

   325

 단요(段遼)

   325-338

 단란(段蘭)

   343

 단근(段勤)

   350-352

 단감(段龕)

   ? -356

 



 

 


미천대제 27년{AD326}병술,

 

춘정월, <주>황후가 딸 <휘양輝陽>을 낳았다.  

 

3월, 황후가 황태자 <사유斯由>를 데리고 용산(龍山)의 온탕에 갔다.  

 

<석륵>은 야간에 모든 영을 미행하여 검찰하였다.  

 

 

5월, <선발仙發>을 중부 패자로 삼았다.  

 

 

10월, <석륵>은 < 정하程遐>의 책략을 따라, 업(鄴) 궁(宮>을 짓고,

세자 <석홍>을 시켜 업(鄴)에 진을 두게 하였다.

 

<석호>는 자신은 공적이 많아서 업(鄴)으로 갈 생각이 없었기에,

<정하程遐>를 원망하였다.

 

 


미천대제 28년{AD327}정해,

 

여름 5월, 상이 태자와 황후를 데리고 서천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농사짓기를 권장하고, 민간의 부로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7월, 백제에서는 붉은 까마귀처럼 생긴 구름이 해를 감쌌다.  

 

 

9월,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北漢城)에서 반란하여,

<비류>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이 시절에, <석호>가 代의 왕 <탁발흘나>를 공격하니,

구주(句注), 형북(陘北) 땅에서 맞아 싸웠다.

 

<탁발흘나>는 군병이 패하자 도읍을 대녕(大寗)으로 옮기어 피하였다.

 

代의 왕이었던 <탁발울률>의 아들 <탁발예괴>는

장인(舅)의 하란부(賀蘭部)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탁발흘나>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내어달라 하였더니,

하란(賀蘭) 대인 <애두藹頭>가 감싸고 보호하여 보내주지 않았다.

 

<탁발흘나>가, <우문>부와 함께 <애두藹頭>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미천대제 29년{AD328}무자,

 

춘정월, <각角>씨가 태자의 딸 <두豆>씨를 낳았다.

 

태자가 <주>황후를 모시고 온탕에 갔다.  

 

 

2월, 태보 <재생>이 죽었다.

 

<오맥남>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봉상제>의 황후였던 <연緣>후를 첩으로 두게 되었다.

 

<송거>를 좌보로,< 선술>을 우보로, <조문>을 안평 태수로,

<석棤>을 신성 태수로,< 부협>을 대주부로 삼았다.

 

한미한 출신의 공신들이 연이어 3보의 자리에 올라 세 발 솥처럼 정사를 담당하니,

사람들은 미꾸라지가 용과 한 구멍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5월, <부芙>태후가 죽었다.

 

<상보尙宝>의 처로, <초草>후를 낳아서 총애를 받더니, 태후로 봉함을 받았었다.

 

바퀴 달린 가마로 출입하며 <을>태후를 의지하였었으나,

<을>태후가 죽자 혼자서 태후로 있어왔다.

 

상이 <부芙>씨들이 융성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돌보아 준 것이었는데,

올해로 나이가 66살이었다.

 

부친 <부포芙布>는 비류(沸流)에서 유별난 호걸이었으며,

<부분노>의 후손이라고 한다.


7월, <석호>가 무리 4만을 이끌고 지관(軹關) 서쪽으로 들어와서

趙의 하동(河東)을 쳤다.

 

50여 현이 호응하여서 포판(蒲阪)으로 진공하였다.

 

趙{前趙}>주 <유요>는 하간(河間) 왕 <술述>을 보내서

<저氐>・<강羌>의 무리를 이끌고 진주(秦州)에 주둔하여

<장준張駿>과 <양난적楊難敵>에 대비케 하였으며,

자신은 중외의 정예 수・륙군 들을 이끌고 포판(蒲阪)을 구원하려

위관(衛關)에서 북쪽으로 하{河}를 건넜다.

 

이에 <석호>는 두려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물러났고, <유요>는 그들을 추격하였다.

 

 

8월엔 고후(高候)의 땅에 이르러 <석호>와 싸워 크게 이기고 <석첨石瞻>의 목을 쳤다.

 

널려있는 시체가 200여리에 달하였고, 수거한 물자와 병장기의 숫자가 억에 다다랐다.

 

<석호>는 허둥지둥 조가(趙歌)로 도망하였다.

 

<유요>는 대양(大陽)에서 하(河)를 건너 금용(金墉)에 있는 <석생石生>을 공격하으며,

천금제(千金堨)를 터뜨려서 금용(金墉)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서 급군(汲郡)과 하내(河內)를 쳤더니

後趙의 영양(榮陽) 태수 <윤구尹矩>와 야왕(野王) 태수 <장진張進> 등은

모두 항복하였고, 양국(襄國){後趙의 都邑}이 크게 흔들렸다.

 

後趙의 <장준張駿>이 군병을 추슬러서 허술함을 틈타 장안을 공격하려 하였더니,

이조낭중(理曹郞中) <색순索詢>이 간하길

 

“<유요>가 비록 동쪽 정벌에 나섰으나,

그의 아들 <유윤劉胤>이 장안을 지키고 있으니, 가벼이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가령 얻는 것이 조금 있다고 하여도,

동방 정벌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우리를 교정하려 든다면,

그 화를 겪는 어려움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장준張駿>은 장안 탈취를 그만두었다.


11월, 後趙 왕 <석륵>이 친히 군병을 이끌고 낙양을 구하려 하자,

신하인 <정하程遐> 등이 굳게 막아 간하길

 

“<유요>의 군병은 천리를 떠나와 있으니, 그 군세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몸소 움직이시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움직이는 것은 만전을 기함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이에 <석륵>이 대노하여 칼을 잡고 <정하程遐> 등을 질책하여 밖으로 내쫒았다.

 

그러고 나서 <서광徐光>을 풀어주고는 불러서 이르길

 

“<유요>는 한 번 싸워 이긴 것으로 낙양을 둘러싸서 지키고 있소.

용렬한 인간들의 정리로는 <유요>의 사기가 예리함을 들어

당적하기가 불가하다 하고 있소.

<유요>는 십만 갑병을 펼쳐서 성 하나를 100일이 되도록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으니,

장수들도 지쳤을 것이고 병졸들도 나태하여졌을 것이오.

우리가 초기의 예리함으로 그들을 친다면 한 번 싸움으로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낙양이 떨어지면 <유요>는 필시 죽기를 무릅쓰고 기주(冀州)로 물러날 것이오.

그가 하(河)에서부터 북쪽으로 석권하여 온다면, 내 일은 끝장이오.

<정하程遐> 등은 내가 일을 내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길

 

“<유요>는 고후(高候) 땅에서의 승세를 가지고도

양국(襄國)으로 진격하여 차지하지 못하고,

다만 금용(金墉)을 지키는 신세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로 <유요>가 무능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왕의 위협적인 책략으로 맞붙으시면,

<유요>의 군대는 필시 대왕의 깃발을 보기가 무섭게 도망하고 패할 것입니다.

천하를 평정함이 이번 한 번의 거동에 달렸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석륵>은 웃으면서

 

“<서광徐光>의 말이 옳다.”라 말하였고,

 

내외에는 엄하게 일러서, 말리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석감石堪>・<석총石聰> 및 예주(豫州) 자사 <도표挑豹> 등에게 명하여,

각자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무리들을 통솔하여 영양(滎陽)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석호>는 진격하여 석문(石門)에 거점을 잡았고,

<석륵>은 자신이 보병과 기병 4만을 통솔하여 금용(金墉)으로 방향을 잡고

대제(大堨)에서 물을 건넜다.

 

<석륵>은 웃으면서 <서광>에게 이르길

 

“<유요>는 병력을 성고관(成皐關)으로 집결시키는 것이 상책이고,

낙수(洛水)를 막는 것이 차선책인데,

낙양에서 눌러앉아 지킨다면 사로잡힐 것이야.”라 하였다.


12월, 을해일, 後趙의 모든 군대가 성고(成皐)에 집결하였다.

 

보졸이 6만에 기병이 2만 7천이었다.

 

<석륵>은, 趙{前趙}의 군대에 망을 보는 병사가 없는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상금(賞金)을 다시 올리면서

 

“하늘이 돕는다.”라 말하고는,

 

갑옷을 벗어 말아놓고 말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위험한 길을 재촉하여 공(鞏)・자(訾)의 사이로 나갔다.

 

趙왕 <유요>는 오로지 폐신과 함께 술 마시고

노름에만 정신을 팔고 장수와 병졸들을 위무하지는 않았으며,

좌우 신하가 혹여 간하기라도 하면

<유요>는 화를 내며 요망스런 말이라 하며 목이나 쳤었다.

 

<석륵>이 이미 河를 건넜다는 소릴 듣자

영양(滎陽)의 수비군을 늘리고 황마관(黃馬關)을 막을 논의를 하였다.

 

잠시 후, 락수(洛水)의 후(侯)>라는 자가

後趙의 전봉과 교전하여 <갈羯>을 사로잡아 보냈다.

 

<유요>가 묻기를

 

“대호(大胡){석륵} 자신이 왔는가? 무리는 얼마나 되는가?”라 하였더니,

 

<갈羯>이 답하기를

 

“왕이 친히 왔으며, 군세는 아주 성하다.”고 하였다.

 

이에 <유요>는 낯빛이 변하였으며,

금용(金墉)을 둘러싸서 지키던 군대를 끌어와서 낙수의 서쪽에 진을 치게 하였다.

 

10만여 兵卒을 남북으로 10여리에 깔아놓았다.

 

<석륵>이, 건너다보고는 더욱 즐거워하며 좌우에게 이르길

 

“나를 축하함이 가할 것이다.”라 하였다.

 

<석륵>은 보병과 기병 도합 4만을 이끌고 낙양성으로 들어갔다.

 

기묘일에 중산공(中山公) <석호>가

보졸 3만으로 성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趙{前趙}>의 중군을 공격하고,

<석감>・<석총> 등이 각기 정예 기병 8천씩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趙{前趙}>의 전봉을 공격하였더니,

서양문(西陽門)에서 크게 싸움이 벌어졌다.


<석륵>도 친히 갑옷을 걸치고 창합문(閶闔門)을 나서서 협격하였다.

 

<유요>는 어릴 적부터 술을 좋아하였는데, 말년엔 더욱 심하였다.

 

곧 싸움이 벌어질 판인데도 여러 말의 술을 들이 켰다.

 

늘 붉은 말을 탔었는데 오늘엔 까닭 없이 오그라져 넘어져 있었다.

 

이에 작은 말을 올라타고는 싸우러 나갈듯 하더니만,

다시금 한 말 여의 술을 더 마시고서,

서양문(西陽門)에 다다르더니 진을 지휘하여 평지로 나아갔다.

 

<석감>은 이를 기회로 잡았고,趙병은 와르르 무너졌다.

 

<유요>는 정신이 오락가락 취하여 뒤로 내달리다가,

말이 돌로 만든 수로에 빠져들자, 빙판으로 나뒹굴었다.

 

열 군데나 상처를 입었는데, 세 군데가 심하여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윽고 <석륵>은 趙병을 크게 쳐부수고 5만 여의 목을 베었고,

 

하명하여 이르길

 

“사로잡고 싶은 자는 하나였고, 지금 이미 그 자를 붙잡았소.”라 하고는,

 

장수와 병사들을 타일러서 예봉을 거두게 하여,

적들이 명령에 귀복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유요>가 <석륵>을 쳐다보고 말하길

 

“<석>왕은 중문지맹重門之盟{때늦게 남몰래 한 맹서}을 꽤나 생각하고 있음이오.

아니오?”라 하였다.

 

<석륵>이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을 전하길

 

“오늘 일은 하늘이 그리 한 것이니, 다시 말해 무엇 하겠소?”라 하였다.

 

을유일에 <석륵>은 군대를 돌렸고,

정동장군 <석수石邃>에게 명하여,

병사들로 하여 <유요>를 에워싸서 호송하게 하였다.

 

<석수>는 <석호>의 아들이었다.


<유요>는 창상이 심하여 마차에 실렸고, 의원 <이영李永>을 함께 태웠다.

 

기해일, 양국(襄國){後趙의 都城}에 도착하여서는

<유요>를 영풍(永豐)의 작은 성에 가두어 놓고,

그의 기녀와 첩을 넣어주고는 군병으로 엄히 지키게 하였다.

 

<유악劉岳>・<유진劉震> 등

따르던 남녀를 성장을 시켜서 보내어 <유요>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유요>가 말하길

 

“나는 경들이 회토(灰土)가 된 지 오래인 줄 생각하였는데,

<석>왕이 어질고 후덕하여서, 온전하게 용서하여 주어 금일에 이른 것 이구만!

내가 <석타石佗>를 죽이고서 매우 부끄러웠었소.

오늘날 당하고 있는 화는 그 때문이었소.”라 하였다.

 

머물면서 종일토록 먹고 마신 연후에 돌아갔다.

 

<석륵>이 <유요>에게 시키길

<유희劉熙>에게 속히 투항하라고 글로 써서 명하여 타이르게 하였더니,

 

<유요>는 단지 <유희>와 모든 대신들에게 이르길

 

“사직을 새로이 닦으라. 나 때문에 뜻을 바꾸지 말라.”하는 조서를 썼다.

 

<석륵>이 그것을 보고나서 <유요>를 오래도록 미워하더니 끝내는 <유요>를 죽였다.

 

<유요>의 아들 <유희>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움이 큰 나머지,

장안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형 <유윤劉胤>과 함께 상규(上邽)로 도망하였다.

 

정벌하여 얻었던 모든 진들도 지키기를 포기하고 <유희>를 따라나서니,

관중(關中) 땅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장군 <장영蔣英>과 <신서辛恕>가 무리 수십만을 끌어안고 장안에 머무르며,

사람을 보내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석륵>은 <석생石生>에게 명하여 장안의 무리들을 데려 오게 하였다.

 

 

 


미천대제 30년{AD329}기축,

 

2월, <우于>소후가 <림琳>태자를 낳았는데, <우탁>의 아들 <우달于達>의 딸이었다.

 

<우달于達>은 <을>태후의 소생이어서,

상은 그를 총애하였고 그의 딸 <우잠于潛>을 궁인으로 거두었고,

이때가 되어 <림琳>을 낳으니 후로 봉하였다.

 

동궁비 <우전于腆>이 아들 <윤允>을 낳았다.

 

<우전于腆>이 옛 남편 <재봉再逢>과 밀통하다가 낳았는데, 용모도 <재봉>을 닮았다.

 

<주周>후가 <우전于腆>을 폐하려 하자,

상은 <을>태후의 명이라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동궁 역시 <우전于腆>의 잘못을 덮어주며, 자기의 모후인 <주周>후에게

 

“<윤允>은 저를 닮았습니다. 모친께서는 어찌 그리 의심하십니까?”

라고 간하였었다.  

 

 

3월, 좌보 <송거>가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을량乙良>이 대신하게 하였다.

 

<을량>은 태후의 남동생으로 북부를 20여 년 동안 다스렸는데,

덕이 실현되었다 하였다.

 

들어와 상(相){좌보}의 자리에 100일 있다가 나이 63살에 죽었다.

 

그의 처는 <우풍于豊>의 여동생이었는데, 정숙하여 깔끔하게 자신을 지켰고,

<을량乙良>의 죽음을 보더니만 정절을 잃을까를 걱정하여 따라죽었다.

 

그 시절 풍속으론,

3보들의 처는 상의 명에 따라 계속하여 3보의 내실이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을량>의 선정이 이 부인에게서 비롯됨이 많았다 하였다.

 

단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남겼다.

 

딸은 <면가免柯>의 처가 되었다.

 

아들 <을공乙恭>은 재능이 없다하고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며,

조상신에게 제사나 올리며 소와 말과 양을 쳤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든 공손하게 대하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가 현자임을 몰라보았다.  

 

<청견靑見>이 좌보가 되었다.


晉의 <온교溫嶠>가 죽자, <왕도王導>가 정사를 위하여

강릉(江陵)에서 건강(建康)으로 3천리를 거쳐서 왔는데,

떠도는 백성이 만 명에 이르고 인심이 흉흉하여,

밖으로는 변란을 안으로는 우환을 일으킬 조짐이 있는 것 같았다.  

 

 

8월, <유요>의 아들 <유윤>이 장안이 곧 빼앗길 것을 알게 되자,

<호훈胡勳>의 목을 벤 것을 후회하며,

수만 명을 이끌고 상규(上邽)를 떠나 장안을 향하니

롱동(隴東)>{武都}・안정(安定)・신평(新平)・북지(北地)・부풍(扶風)및 시평(始平)

제郡의 융(戎)인들과 하(夏)인들도 군병을 일으켜 뜻을 같이하였다.

 

<유윤>이 중교(仲橋)에 군진을 쳤더니, <석생>은 성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었고,

<석호>가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석생>을 구원하였다.  

 

 

9월, <석호>가 <유윤>을 의거(義渠)에서 깨뜨리니,

<유윤>은 상규(上邽)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석호>가 승승하여 추격하니, 누운 시체가 천리에 널렸다.

 

상규(上邽)를 궤멸하고, <유희>와 <유윤>은 물론

장수들과 왕 그리고 공경들과 교위들을 잡아들이니 3천이나 되었다.

 

모조리 죽이고 진(秦)과 롱(隴)의 땅까지 진격하여 모두를 평정하였다.

 

저(氐)의 왕 <포홍蒲洪>과 강(羌)의 추장 <요익중姚弋仲>도

모두 <석호>에게 투항하였다.

 

<석호>가 <유요>의 어린 딸을 거두었다.

 

애초에 롱서(隴西)의 선비(鮮卑)는 <걸복술연乞伏述延>이 원천(苑川)에서 살면서

인근의 부락들을 쳐서 병합하여 군세가 강성하였었는데,

<유요>가 망하게 되자,

<걸복술연>은 두려운 나머지 맥전(麥田)으로 옮겨가 살다 죽었다.

 

이에 아들 <걸복녹대한乞伏傉大寒>과 손자 <걸복사번乞伏司繁>이 서로 대를 이었다.

 

하란부(賀蘭部)와 여러 대인들이 합심하여 <탁발예괴翳槐>를 왕으로 세우자,

代 왕 <탁발흘나>는 <우문>부로 달아났고,

<탁발예괴>는 동생 <탁발십익건>을 <석륵>에게 인질로 잡혔다.

 

<토연吐延>은 포부는 크고 용맹하였으나, 남을 시기하기를 잘하여,

강(姜)족 추장 <강총姜聦>이 칼질하여 죽였다.

 

<토연吐延>은 칼을 뽑지 않고 그의 장수 <흘골이紇扢埿>를 불러,

자기의 아들 <섭연葉延>을 보좌하면서 백란(白蘭)에서 지키라 하였더니,

<흘골이紇扢埿>가 칼을 뽑아 죽인 것이었다.

 

<섭연葉延>은 효성이 있었고 열심히 학문하였기에,

왕이었던 부친 <토연吐延>의 이름{字}를 씨{氏}로 삼는 것이 예의라 여겨,

나라의 이름을 토곡혼(吐谷渾)으로 하였다.

 

 


미천대제 31년{AD330}경인,

 

정월, 황후・동궁・<발양發陽>공주가 온탕에 갔다.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온궁에서 정사를 보라고 하였다.

 

동궁이 <장막사長莫思>를 우보로 삼았고, <청견靑見>에게는 태보의 자리를 주고

<연緣>후를 처로 딸려주었다.  

 

 

9월, <석륵>이 칭제하고는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모용>집안을 함께 정벌하자고 청하였다.

 

주옥 세 개와 비단 필 및 약물 100종을 하사하였다.  

 

 

11월,< 상능尙能>과 <용발龍發>을 <석륵>에게 보내 맥궁 열 자루를 건네주고

선비 토벌을 협의하게 하였다.

 

<석륵>은, 크게 기뻐하며, 보마 한 쌍과 청색 비단 일곱 필로 답하면서,

 

“동방의 일은 왕께서 도맡으시오. 서방의 일은 짐이 도맡겠소.”라 하였다.  

 


 

 


미천대제 32년{AD331}신묘,

 

정월, <석륵>이, 우리의 사신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어주고,

황금과 비단을 <주>후에게 보내왔더니,

 

상이 웃으며 이르길

 

“놈{석륵}은 집안에서 범을 기르고 있으니, 그는 머지않아서 망할 것이다.

그러니 감히 남의 집들을 였보고 있음이다.”라 하였다.  

 

 

2월, 상은 병이 위독하여지니 태자를 불러서 눈앞에 다다르게 하더니

 

신검을 주고는,

 

“<봉상>이 무도하여, 차자인 내가 보위에 올랐다.

 

네가 비록 나의 뒤를 잇게 되었으나,

무도하면 나라를 잃을 뿐만 아니라 네 몸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척들의 기대도 저버리지 말고, 군대와 백성들의 노여움도 키우지 마라.

 

네 어미와 함께 정치할 것인데,

여인네들은 사사로움에 치우침이 많아 실수하기 쉬우니,

너는 필히 중심을 잡아 바르게 되도록 하라.

 

<모용>집안과는 서로 간에 이익을 다투지 말고,

성을 든든히 하고 경계를 지켜라.

 

토목 노역으로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말고,

부렴{세금}을 적게 하고, 백성을 근검과 충효로써 가르치고,

노인을 봉양하고 현자를 공경하고, 재주 있는 이를 임용하여 일을 감당하게 해라.

 

설사 호색할지라도 조신하여 지나치지는 말 것이다.

 

네 아비가 일찍 죽게 된 것을 거울로 삼아도 될 것이다.

 

장사는 검소하고 실속 있게 치를 것이며,

옥으로 만든 관과 금으로 치장한 곽을 쓰지 말 것이다.

 

귀한 물건을 함께 묻으면 도둑들이 파헤치게 된다.

 

네 어미 고향동네의 산수가 아주 좋으니, 의당 나를 미천의 석굴에 장사하고,

네 어미가 나를 따라 오게 되거든, 함께 묻어다오.”라고 하여,

타이르기를 마치고는 숨을 거두었다. 춘추 54세였다.


<주>황후가 동궁을 안아 일으켜 시신 앞에서 즉위하여 3보들의 조례를 받게 하였다.

 

백관들이 빈궁의 뜰에서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동궁이 슬피 울부짖어 목이 가라앉으니,

<주>황후가 그만 그치라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주>후가 태보인 <청견>에게 간하라 하였더니,

 

<청견>이 상주하길

 

“천자의 상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폐하께는 지금 만민의 부모가 되셨으니

사사로이 용체를 훼손하여 천하를 저버리시면 아니 됩니다.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몸을 야위게 하는 것은 작은 예절이며,

선비들의 행실인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당연히 술과 고기도 드시고, 성색도 취하시어서, 호기를 함양하시고,

그런 연후에 큰 정사에 임하시고 어려운 일을 처결하셔야 할 것입니다.”라 하니,

 

상은 평소에 <청견>을 중히 여긴지라,

슬픔을 억누르고 술도 마시면서, 그의 청을 좇으려 애를 썼다.

 

<주>황후가 악기들을 들이라 하여,

스스로 록안(綠眼)의 무희들과 함께 라무를 추어 즐겁게 하여보려고 하였고,

여러 비빈들이 이를 이어서 그와 같이 하였더니,

상이 그리하지 못하게 물리고는, 방성통곡하다가 구토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이에 <주>황후가 기겁하여 상을 자기의 방안으로 들였는데,

밤새도록 기척이 없었다.

 

<전腆>비 역시도 그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모용외>와 <석륵>이 대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사신을 보내와서 조문하고 부의도 후하게 보내왔다.

 

상이 이 사신들을 친히 맞이하여 삼가하며 빈례를 다하였더니,

사신들은 돌아가 자기의 주인에게

 

“새로 선 임금이 먼저 번의 임금을 능가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석륵>은

 

“<을불>은 사직을 오래도록 할 아들이 있소.

나도 아무 일이 없어 보이지만, 어찌 할꼬?”라 한탄하였다.

 

개략 그의 아들 <석홍>은 나약하여 안심할 수 없었음이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좌우들에게

 

“놈들은 곁가지에 삐져나온 주제에 감히 큰 가지 출신인양 스스로를 높이면서,

몸을 팔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그 비천 것들이

감히 우리 동명성국에 견주려 하고 있소. 죽여서 없애지 않아도 되겠소?

우리나라는 대위를 한 번 세우면, 다시는 두 말 한 적이 없는데,

갈(羯)과 호(胡)는, 서로를 죽이며 멸하고, 인간의 도리를 돌이키지 못하고 있소.

이것들은 정말로 금수들이오.”라 일렀다.

 

찬자가 살피길;

<미천>은 어린 나이로 피해나가 매섭게 고생하다,
8년 만에 돌아와서 임금 자리 오르더니,밖에서 쌓은 배움을 안에서 어질게 베풀었고,
덕이 크게 행하여져 관민이 즐겼더라.

 

창고는 가득하고 양 돼지도 풍성하며, 군병을 조련하여 땅을 넓혔더니,

옛 것은 되찾았고 새로이 넓혔도다.

 

연(燕)과 조(趙)는 두려워서 굴복하고, 백제와 신라는 자식들이 찾아왔으며,
진(晉)과 월(越)은 찾아와 조공하고, 색두(索頭)가 정성을 다하였으니,
태평하고 무사하여, 앉아서 부귀를 누렸더라.

누런 금덩어리 온 누리에 가득하고, 미녀들이 방방에 넘쳐나니,
집집마다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마다 고량진미 즐겼더라.

 

누에치고 비단 짜기 권장하여 만금 비단 쌓여있어,
황후의 너른 옷이 천만금의 값이 되도, 직녀들이 비단을 다투어 바쳐오니,
비단 옷엔 돈 한 푼도 들어갈 일 없었다네.

소와 말도 온 산에 가득하며 절로 낳고 길렀으니,

아무리 먹고 써도 다함없이 많았으며,
속・맥・두・량 살진 고기 먹기에 충분하고, 어・별・장・압 또한 끊이지 않았다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사방에서 귀부하고,
벌판에다 마을 이뤄 즐거이 살아가며 이 낙원을 사랑하니,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 구름처럼 피어났네.

임금은 좋은 사람 잘도 부려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아내어 잘도 살펴주고,
병든 이는 고쳐주고 우매한 이는 가르쳐 주었다.

 

짐 실은 배와 짐마차가 만 리를 서로 잇고,
천리에서 모인 손님 한데모여 술잔을 돌리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간에 바꾸었더니 불편함도 없었으며,
공물은 조금씩을 거두어도 큰 관청 차고도 넘쳐났다.

임금은 비록
소백(小白)이 꾸짖을 일은 있었어도 민간 부녀 빼앗지 않았었고,
후비들도 많지 않아 후궁은 맨 날 비었었지만, 사랑함이 지나쳐서 섭생을 잃었었고,
남색을 즐겼으니 <우금牛金>과 <도아道兒>의 폐단이 없지는 않았었다.

 

옥중의 티끌이고 성덕의 허물이었다.

개략, 스승의 가르침이 온전치 않거나, 시속에 물들거나,

행락지성과 호협지기가 있거나 하여 왕왕 제왕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또한 애석한 일 아니겠는가?

 

<미천>이 성인 도리를 깨닫게 하고, 학문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가孟軻>도 유학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여 천하게 살았더라면,

무리지어 말 타고 활쏘기나 일삼았을 것이고,

오로지 식과 색을 삶의 모두로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자라나서, 능히 <미천>과 같았었다면,
그 역시 현군이란 일컬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공적과 과오를,

과연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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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