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帝)의 휘(諱)는 <해읍주解邑朱>이며, 광명제(光明帝)의 막내아들이고,
어머니는 송태후(松太后)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현명한 이를 좋아했다.
대무신제가 부여(扶余)를 정벌할 때 도읍을 지켜내었으며
그 능력이 신임되었음이 마땅하다.
(대무신제의) 죽음에 임하여 큰 일을 맡았다.
군신들이 모본(慕本)이 불초하다 하여 (민중을) 세웠다.
난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해우解憂>를 태자로 세워, 선(善)으로 그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원년 갑자(A.D.64)
11월 크게 사면하였다.
군신들이 연호를 바꾸자 청하였으나, 덕이 없다하여 사양하였다.
오후(烏后)를 황후로 삼고, <해우解憂>를 후계자로 하였다.
이때 모본제 <해읍주> 58세, <오후烏后> 50세, 태자 <해우> 24세,
갈사후 45세, <재사> 17세, <호화>16세이다.
2년 을측(A.D.65)
3월 서도(西都)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5월 동부(東部)에서 큰물이 나서,
왕이 황후와 함께 백성들의 안부를 살피고 굶주리는 이에게 구휼하였다.
9월 오황후(烏皇后)가 학공주(鶴公主)를 낳았다.
오후(烏后)의 오빠 <오불烏芾>을 우보로 삼았다.
3년 병인(A.D.66)
7월 오황후(烏皇后)와 함께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흰 노루(白獐)를 사로잡아 기르게 하였다.
동도(東都)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오)후의 동생 <오희烏希>를 중외대부로,
<마경麻勁>을 태보로, <송보松宝>를 좌보로 삼았다.
4년 정묘(A.D.67)
4월 오후(烏后)와 함께 민중원(閔中原)으로 가서 사냥하고,
오이사(烏伊祠)에 제사하였다.
7월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석굴(石窟)을 발견하고,
오후(烏后)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마땅히 이곳에 장사를 지내주시오.”라고 하였다.
오후(烏后)가 답하길
“크게 허물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동명(東明)의 모자(茅茨)는 다듬지도 않으셨고,
<송양松讓>은 썩은 나무로 궁(宮)을 지었소.
내가 어찌 감히 내 죽은 몸을 호사하게 할 수 있으리오.
당신도 나를 따라 이곳으로 와야 가당하오.”라고 하였다.
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필종부(女必從夫)이니, 비록 폐하의 말씀이 없더라도,
첩은 마땅히 스스로 따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해우解憂>태자가 삼현(三賢, 재사, 무골, 묵거)고택(古宅)을 노닐다가,
웅심산(熊心山) 성모(聖母, 유화부인)고택을 찾아보고는
그곳을 모본원(慕本原)이라 이름 하였다.
9월 동해(東海) 사인(使人) <고주리高朱利>가
오후(烏后)에게 고래의 눈알을 바쳤는데, 밤이 되면 빛이 나서 촛불을 켠 것 같았다.
당시 오후(烏后)가 또 열공주(悅公主)를 낳자,
왕이 후에게 말하기를
“<해우解憂>가 개과(改過)하여 우리 부부에게 효도하므로 전위(傳位)함이 옳소.
당신과 선(仙)이나 했으면 하는데 어떠하오?”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해우>는 비록 내가 낳았으나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내가 남자아이 하나를 낳을 때를 기다렸다가 전위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당신 역시 나이가 많은데, 어찌 오랫동안 출산이 가능하리오.”라고 하자,
후가 기뻐하지 않았다.
부여에서 내란이 일어나, <재사再思>와 <마락麻藥> 등에게
<달가達賈>, <목탁穆卓>, <두로杜魯>를 데리고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5년 무진(A,D.68)
정월 부여(扶余)의 내란이 평정되었다.
<재사再思>가 <왕문王文>의 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5월 왕이 동도(東都)에서 춘추 62세에 죽었다.
유명(遺命)으로 <해우解憂>태자를 세우라고 하였다.
태자는 동도(東都) 신궁(神宮)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모본(慕本)으로 고쳤으며,
왕(帝)을 석굴(石窟)에 장사 지냈다.
군신들이 능(陵)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오후(烏后)가 말하기를
“나는 선위(禪位)하겠다는 것을 말려 지아비의 뜻을 어긴 바 있소.
새로이 능을 만들면 또다시 지아비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되오.
나 역시 죽으면 마땅히 이곳으로 돌아갈 것이오.
후세 사람들에게 (선)왕의 검소한 행실을 알게 하고,
황후가 되는 이들도 지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게 함이 가당하오.”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엎드려 복종하였다.
찬자는
“민중(閔中)이 고명(顧命)을 받아,
이주지사(伊周之事)를 행하여 모본(慕本)에게 전위(傳位)함은 현명하였다.
(그러나) 속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음은 애석하였다.
선(善)으로 경계하게 함은 좋았으나,
스승을 골라 가르치지 않고 관리를 두어 견제하지 않았으니 흠이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