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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8 모본제기

 

 

왕(帝)의 휘(諱)는 <해우解憂>이고, 대무신제(大武神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오태후(烏太后)로 <오이烏伊>의 아들 <오루烏婁>의 딸이다.

 

용모가 미려(美麗)하고 기사(騎射)에 능하고,

농담하기 좋아하고 ‘예예’하며 비위를 맞추니,

그런 연유로 대무신제가 모본을 사랑하여 정윤(正胤)으로 삼았다.

 

이윽고 뜻 하던 바를 얻게 되자,

후궁(後宮)들과 어지러이 놀아남이 많았으며, 성품이 자못 잔인하였다.

 

대무신제가 죽음에 임하여, 민중에게 태갑(太甲)의 고사(故事)를 행하여,

<해우>가 개과(改過)하기를 기다렸다가 전위(傳位)하도록 명하였고,

또 오후(烏后)에게 민중을 섬기면서 태갑의 고사를 이루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과(改過)의 흔적이 보이자, 양위하려고 하였다.

 

오후(烏后)가 힘써 말리기에 보위를 얻지 못하였다.

 

항상 좌우(左右)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후(后) 때문에 형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유명(遺命)으로 왕(帝, 해우)을 새웠다.

 

오후(烏后)가 왕에게 이르기를

 

“네 아버지{민중제}께서 너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힘써 말린 것은 다만 내가 너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유명으로 너를 세우니,

너는 너의 두 아버지{대무신제와 민중제}의 뜻의 줄거리를 깨달아서,

천자(天子)의 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帝)은 본디 효행함이 있었으므로 ‘예예’라고 대답하며 즉위하였다.


 

 

원년 무진(A.D.68)

 

6월 선제(先帝)를 석굴(石窟)에 장사지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숙부{민중제}는 내가 장성하여 현명해지자 전위(傳位)하려 하셨는데,

두 세 명의 간신들이 모후(母后)의 명을 핑계 삼아 전위를 막았다.

 

모후께서 어찌 나를 미워하겠느냐. 이는 곧 태보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마경麻勁>을 파직하여 서인(庶人)으로, <송보松宝>와 <을상乙祥>은 면직하였다.

 

<오희烏希>를 좌보로, <우진羽真>을 우보로 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맡겼다.

 

어머니 오씨(烏氏)를 태후로 존중하고, <우진>의 딸을 거두어 황후로 삼았다.

 

원비(元妃) 마씨(麻氏)를 폐하며 말하기를

 

“<마경>은 딸을 짐에게 시집보내더니, 나를 괴롭힌 지 오래다.

 

지금 이를 폐하니, 속이 시원하다.”라고 하였다.

 

오태후가 말하기를

 

“네가 개과(改過)하였다더니, 또 다시 이와 같으니,

너의 아버지의 혼령이 있다면 반드시 민중을 다시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선제(先帝, 대무신제)가 항상 왕{모본제}을 민중에 견주었으니,

그런 연유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7월 다시 오희(烏希)의 딸을 거두어 부후(副后)로 삼았다.


 

8월 20여 군데의 산이 무너지자, 왕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으며,

여자들 뽑아 들이기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10월 원자(元子) <익翊>을 정윤으로 삼았다.

<익>의 나이 11살이었는데,

어머니 마씨(麻氏)가 출궁한 이후로 울며 먹기를 거부하니,

 

태후가 제(帝)을 꾸짖어 말하길

 

“너는 자식을 죽이려느냐?”라고 하였다.

 

왕은 이에 마씨를 불러 동침하며 말하기를

 

“너로 하여금 출궁하게 한 이유는

당신의 아버지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려함이었소.”라고 하였다.

 

이에 <익>을 위안하고 후계자로 삼았다.

 

먼저 왕이 신수(神隧)에서 천제(天祭)를 지낼 때,

<우진羽真>이 익을 (후계자로) 세우길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짐은 경(卿)의 딸이 낳은 아들로 후계자를 삼으려 한다.”라고 하였다.

 

<우진>이 말하기를

 

“신의 딸은 아직 어린데, 어찌 기다림이 가(可)하겠습니까.

 

또한 <익>은 효행함이 폐하와 같아서, 나라사람들이 공경하고 있습니다.

 

폐하가 만약 <익>을 신의 딸의 아들로 삼으시면,

그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감동하여 <익>을 (후계자로) 세웠다.

 

우황후(羽皇后) 또한 마씨의 현명함을 누차 간하였더니,

마씨를 후(后)로 복위시켰으며, 그런 연유로 <익翊>을 우후(羽后)의 아들로 하였다.

 

부여(扶余)에 다시 난이 일어나,

<재사再思>와 <호화芦花>가 <목탁穆卓>과 함께 가서 진압하였다.

 

갈사궁(曷思宮)에 갔다. 좌보 <오불烏芾>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2년 기사(A.D.69)

 

 

정월 종실(宗室)과 공경(公卿)의 딸 일곱을 골라서 후궁으로 거두었다.

 

또 백성의 딸 70명을 골라 7궁에 나누어, 음황(淫荒)하기를 일삼았다.


 

3월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하늘이 끝내 나를 미워하니, 나 역시 하늘을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좌우(左右)에 명하여 하늘에 활을 쏘게 하였다.


 

8월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하였다.

 

<호동好童>의 딸 <위화葦花>를 거두었는데, <재사再思>의 일가였다.

 

갈사궁(曷思宮)이 딸을 낳고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아이를 낳았으니 어찌하나.”라고 하였다.

 

이에 <니怩>라 이름 지었다.


 

 

3년 경오(A.D.70)

 

3월 창수(淌水)에 새 궁전을 지었는데, 사치가 극에 달했다.

 

날마다 종척(宗戚)들과 명부(命婦)들을 불러 모아놓고,

술 마시며 음란하기로 세월을 보냈다.


6월 람공주(藍公主)가 78살에 죽었다.


 

 

4년 신미(A.D.71)

 

2월 내사자(內使者) <승인勝人>을 죽였다.

 

<승인>은 얼굴이 예뻐서 왕의 밤일(勝人은 해우의 용양군)을 받았으며,

왕이 앉으면 누워 깔개가 되었다.

 

<승인>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움직이다가 엉덩이에서 벗어났다.

 

왕이 노하여 그를 때려죽였다.

 

<승인>의 어머니 <척尺> 역시 <승인>으로 인하여 성은을 입었는데,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원망하다가 쫓겨났다.

 

이때부터 궁인과 내사(內使)들 중에

석인(席人)이 되었던 사람 중에 많은 이가 죽거나 다쳤다.

 

왕은 부후(副后)인 오씨(烏氏)도 죽였다.

 

오씨가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석인(席人) <두로杜魯>로 하여금 통음하게 하여, 병이 나자 왕을 원망하였는데,

왕이 주먹질하여 토혈(吐血)하고 죽었다.

 

태후가 통곡(痛哭)하니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 늙은 여우가 나를 죽으라고 재촉하는구나.”라고 하며,

 

좌우(左右)에게 명하여 끌고 밖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우후(羽后)도 말리다가 역시 폐함을 당하였다.

 

<오희烏希>와 <우진羽真> 모두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으며, 인심이 흉흉해졌다.

 

<두로> 등이 발호(跋扈)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다.

 

<섭득涉得>이 죽고, 아들 <사욱射旭>이 섰다.


 

 

5년 임신(A.D.72)

 

4월 질산(質山)에서 사냥하였다.


5월 동부여(東扶余)의 속국(屬國) 조나(藻那)가 배반하여,

<목탁穆卓>과 <달가達賈> 등에게 가서 평정하라 명하였다.

 

<목탁>이 조나왕의 딸 <창琩>을 처로 삼았다.


7월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했다.


9월 나라 안의 미소년을 골라 뽑아 입궁시켜 침신(枕臣)이나 석인(席人)으로 썼다.

 

뜻에 맞지 않으면 문득 (활로) 쏴버리니 혹은 죽거나 혹은 상하였다.

 

<승인勝人>의 동생 <최인崔裀>도 죽임을 당했다.

 

<오준烏俊>이 간하여 말하기를

 

“사람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음이 가당하리오.”라고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역시 활로 쏘았다.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없었다.


 

 

6년 계유(A.D.73)

 

2월 모본(慕本) 신궁(新宮)이 완성되었다.

 

동도(東都)의 유행(遊幸) 장소로 삼았다.

 

<두로杜魯>를 침신(枕臣)으로 삼았다.

 

<두로>는 모본사람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여자처럼 아첨하기를 잘하여,

왕이 태자시절에 그를 아꼈다.

 

즉위함에 이르자 장군을 봉하였고,

부여에서의 공로가 있어 대형의 작위를 받고 중외대부의 벼슬에 제수되었다.

 

황후인 우씨(羽氏), 오씨(烏氏), 마씨(麻氏) 모두 더럽힘을 당하였고,

마씨는 <두로>의 딸을 낳았다.

 

오태후 또한 <두로>와 통정하였으며,

궁중에서는 <두로>를 소제(小帝)라고 불렀다.


 

5월 무오(戊午)일 그믐(晦)에 일식이 있었다.

 

<두로杜魯>가 <최인崔裀>의 어머니 <니만尼滿>과 서로 좋아하여 지냈는데,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목숨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니만>이 말하기를

 

“소제(小帝)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두로>가 말하기를

 

“왕은 내가 움직이면 화를 내며 나를 죽이려 하니 어찌하오리까?”라고 하였다.

 

<니만>이 말하길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나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니,

저 인간은 무도(無道)하여 사람 죽이기가 초개(草芥)와 같으니,

어찌하여 그를 죽이고 자립(自立)하려 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두로>는 그와 같은 연유로 드디어 시해하여 반역할 마음을 먹었다.

 

왕이 누차로 움직이는 죄를 화를 내며 조심하게 하였더니,

11월이 되어 또 움직이자, 왕이 <두로>를 쏘려고 하였다.

 

<두로>는 숨겨둔 보도(宝刀)로 왕(帝)을 찔렀고,

피가 용솟음치자 <두로>가 그 모습을 보고 후회하였다.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으나,

죽지 못하고 이에 마후(麻后)의 침전에 가서 그 일을 고하였다.

 

마후는 <두로>와 사통함이 있어 왕의 초상을 비밀리에 하고,

<두로>를 세워 왕으로 삼으려고,

 

<마락麻樂>을 불러 상의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부도(不道)하여 시해되었으나, 마땅히 종실(宗室)사람을 세워야지,

<두로>를 어찌 감히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두로>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에 <마경麻勁>, <송보松宝>, <오희烏希>, <우진羽真> 등을 불러들여 의논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대무(大武)의 아들들 중에 오직 재사대왕(再思大王)이 가장 현명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마락>을 갈사궁(曷思宮)으로 보내어 맞이하려 하니,

 

재사가 말하길

 

“과인은 나이가 적고{26세} 아는 것이 없어, <익翊>{16세}을 세우는 못하다.”

라고 하였다.

 

고사(固辭)하며 나오지 않았다.

 

마후 역시 <익翊>을 세우고 싶어 <마경>에게 부탁하니,

 

<마경>이 말하기를

 

“현명한 이를 황제에 세워야 하는 것이지,

어찌 감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송보<와 함께 갈사궁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리며 (보위에 오르기를) 청하니,

<재사>가 부득이 동도(東都)의 신궁(神宮)에서 즉위하였다.

 

<마경>이 병(病)으로 <송보>에게 태보자리를 고사하니, <송보> 또한 고사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두 노신이 나를 이와 같이 나를 (보좌하기를) 피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보위에 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송보>가 태보 자리를 수락하며 말하기를

 

“신에게 감히 여쭐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송보>가 아뢰기를

 

“<마경>은 주춧돌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으나,

마후는 폐하여 모옥으로 쫓겨났으니, 부녀의 정이 찢어졌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안아서 용서하시고 후(后)로 삼아주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라고 하였다.

 

왕이 그것을 옳다하여

이에 서인(庻人) 오씨(烏氏)와 마씨(麻氏)를 모산(茅山)으로 불러들였고,

 

마씨(麻氏)와 우씨(羽氏)를 궁인(宮人)으로 불러들였다.

 

모본원(慕本原)에 크게 장사지냈으며,

<두로杜魯>와 <니만尼滿>도 그 곁에 묻어주었다.

 

<니만>은 보도(宝刀)의 주인으로, <최리崔理>의 딸이었다.

 

 

<두로杜魯>와 <니만尼滿>은 모두 <재사再思>의 사람이다.

 

<두로杜魯>와는 민중제 4년(A.D.67)에 부여의 난을 함께 진압한 기록이 있으며,

<니만尼滿>은 <최리>의 딸로 <호동好童>과 낙랑공주의 딸 <위화葦花>를

<재사>가 거둔 기록이 있다.

 

<재사再思>가 <마경>과 <송보>와 모의하여 반을 꾀 것이다.

 

모본(慕本)의 경우 외가, 처가, 재상, 환관들의 발호가 보이지 않음에도

오직 모본의 폭정기사만이 보인다.

 

<재사>의 반정으로 <해우>를 시해하고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해우>를 폭군으로 만든 것이다.

 

고구려는 졸본계 <온조>의 반정과 동부여계 <재사>의 반정을 은폐하기 위하여

<온조> 집정 9년과 <재사> 집정 39년을 고구려사에서 제외시킴으로서

고구려의 초기 기년이 뒤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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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