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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7 대무신제기

 

 

원년 무자(A.D.28)

 

11월 연호를 대무(大武)로 고쳤다.

다물후 <송의松義>를 태보 겸 주민(대가)로,
어머니 <송후松后>를 태후로, 비(妃)인 진공주(珍公主)를 황후로 하였다.

용산(龍山)에 가서 즉위하였음을 고하였다. 이해 나이 25세였다.

 

이때 <송>태후 60세, 대무신제 <무휼> 25세, <진>황후 46세이다.

 

 

 

 

2년 기축(A.D.29)

 

정월 황후가 아들 <대해大解>를 낳았으므로, 천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한남(汗南)이 가물고 황충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게 되자, 찾아와 투항하는 자들이 1,000여 호가 되었다.

 

이들을 구휼하고 서하(西河)에서 살도록 하였다.


 

12월 한빈(汗濱)에서 병마를 크게 사열하였다.

 

<오루烏婁>를 우보 겸 주병(대가)로,

<송옥구松屋勾>는 비류패자 겸 주형(대가)로 하였다.

 

온조가 나라이름을 백제(伯濟)로 고쳤으며, <해루解婁>를 태보로 삼았다.

<해루>는 <해소解素>의 둘째 아들이다.

 

<대불帶弗>이 <대소帶素>의 딸 <고야高耶>를 후(后)로 삼았다.



 

3년 경인(A.D.30)

 

3월 <오루烏娄>의 딸을 거두어 제3황후로 삼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람공주(藍公主)다.


11월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병사를 훈련하며,

저절로 끓는 큰 솥을 얻게 되어 모든 군사가 배불리 먹었으며,

또 솥을 지고 다닐 사람도 얻었다.


이때 <오루>의 딸 오후(烏后) 16세이다.

오문烏文(??) - 오이烏伊(BC65-18)(??) - 오루烏婁(??) - 오후(烏后)(15-94)

 

 

4년 신묘(A.D.31)

 

12월 우보 <을두지乙豆智>를 행군대주부(行軍大注簿)로 삼아,

동부여(東扶餘)를 친정(親征)하였다.

 

추모(화영) - 을두지(BC34-40)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밤을 지내는데,

쇠붙이 소리가 들리기에 사람을 시켜 찾게 하여,

금인장(金璽)과 보인(宝釼) 등 병물(兵物)을 얻게 되었다.

 

<고루高婁>가 말하기를

 

“하늘이 내려 준 것입니다.”라고 하여, 왕이 엎드려서 받았다.

 

추모(계루) - 고루(BC35- 32)

 

다음날 북명(北溟)사람 <괴유怪由>를 얻어 선봉으로 삼고,

적곡(赤谷)사람 <마로麻盧>를 얻어 유격(遊擊)으로 삼아

원괄가(援括街)와 송강(松江)으로 진격하였다.

 

이 해에 왕은 <추각소芻殼素>의 처를 받아들여 대실(大室)부인으로 삼았다.


 

5년 임진(A.D.32)

 

2월, 책성(柵城)의 남쪽까지 진군하여 고구(高丘, 높은 언덕)에 진영을 차렸는데,

사면이 진창(泥濘)이어서 인마(人馬)가 모두 진흙탕에 빠졌다.

 

<고루高婁>태자의 군대가 진흙탕 속에서 <대불帶弗>의 군대와 싸웠다.

 

태자가 군대의 앞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병사들이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구하지 못하였다.

 

왕이 <괴유怪由>를 불러 태자를 구하라 명하자,

<괴유>가 칼을 빼어들고 크게 고함지르며 진흙탕을 넘어 진격하니

온 군사들이 힘을 얻어 <대불>의 본진과 직접 부딪혀서

<대불>을 잡아서 목을 베고 나왔으며,

살아남은 (대불 본진의) 군사들은 놀라서 무너졌다.

 

<대만帶万>의 군대 역시 쓰러지고 넘어지고 물러날 뿐이었으나,

자기의 형이 죽은 것을 알고는, 울부짖으며 죽기를 맹세하였다.

 

모든 군사를 진격시켜 고구(高丘)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온조溫祚>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을두지乙豆智>가 말하기를

 

“성모(聖母, 유화)의 신령께서 반드시 음으로 도우실 것이니,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7일동안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큰 안개가 끼어,

<대만帶万>도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조금 물러나기에,

이에 많은 허수아비 가짜 병사를 진영에 세워놓고 몰래 빠져나왔다.

 

하늘이 또 진흙탕을 얼어붙게 하여 포위망에서 탈출로를 얻었다.

 

캄캄한 밤중의 창황(倉皇)중에 신마(神馬)와 큰솥을 함께 잃어버리고

이물(利勿)에 다다르니,

병사들이 굶주림에 힘을 낼 수 없어 들짐승을 잡아서 군사를 먹였다.

 

이윽고 북도(北都)로 돌아오자 전쟁에 임했던 장졸들에게 여러 날 잔치를 열어 주고,

죽은 이를 조문하고 병든 이를 살폈으며,

 

그 부모들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부여(扶余)를 가벼이 치려하다가,

비록 <대불帶弗>은 죽였으나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았으며

우리 군사는 많이 잃었으니 짐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은 왕의 덕의(德義)에 감복하여,

모두가 나랏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칭송하여 주류(朱留, 대무신제) 백성들이 지향하는 바라 하였으며,

나라를 위하는 자들의 본분이라 하였다.

 

<고루高娄>태자를 계후릉(桂后陵)에 장사를 지냈다.

 

왕이 진황후(珍皇后)에게 말하기를

 

“계후 모자는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아들을 낳는다면 마땅히 계후와 같아야 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진후가 말하기를

 

“처자(妻子)의 사람됨으로 모두 지아비를 위해 죽고자 할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첩을 버려두고 멀리 정벌을 가셨으니,

첩이 어찌 죽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다시 사는 사람이니, 또한 사랑스럽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진>후는 소후(召后, 소서노)의 소생인데,

용모가 지극히 아름답고 애교가 있는 성품이어서 총애가 있었을 뿐이었다.

 

처음엔 <해명>의 처였었는데, (따라) 죽지 않고 과부로 수절하지도 않았다.

 

왕이 10살 때 엄명으로 그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녀가 낳은 자녀들은 비록 겉모습은 화려했으나 모두 근친과 닮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왕이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었다.

 

유리(소서노) - 진(BC18- ) 


3월 잃었던 말 거루(巨婁)가 부여(扶余)의 말 백 필을 이끌고

학반령(鶴盤岺) 거회곡(車回谷)에 이르렀다.

 

왕이 교외로 나가 마중하여 갈기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말하기를

 

“말이 돌아왔으나, 솥은 돌아오지 않는구나?”라고 하였다.


 

여름 4월 갈사왕(曷思王) <산해山解>는 <해소解素>의 아들인데,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러

해두(海頭)왕〈말갈추장〉이 사냥 나가는 것을 보고 함께 사냥하자 청하였다.

 

금와(유화) - 해소(BC43-32)(장화) - 산해(BC24- ) - 갈사후(20-96)

                                                   해루(BC22?- ) 

 

<해두>가 오만무례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백성들을 빼앗았다.

 

갈빈(曷濱)에 도읍하여 하북(河北)의 포륜(布倫)을 다스리고자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해소>는 성모가 낳은 금와왕의 아들인데,

항상 <대소帶素>의 무도(無道)함을 간하면서 우리를 비호하였다.

 

<해소>가 죽음에 이르자

둘째 아들 <해루解婁>가 우리에게 귀의하여 <온조溫祚>를 돕게 하였고,

<산해> 또한 이때에 귀의하여, 딸을 후궁으로 바쳤다.

 

그 딸은 요염하나 덕(德)이 있어 황후로 삼았다.

 

후의 몸에는 향기가 있고 살결도 물고기 같이 희고 깨끗하여,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7월 갈사왕(曷思王)의 종제(從弟) <락문絡文>

〈해소의 동생 해만 또한 성모의 소생이다. 락문은 해만의 아들이다.〉

또한 만여 명을 이끌고 찾아와 항복하며 말하기를

 

“성인의 나라 백성으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왕이 교외로 나가 맞이하여 손님으로 대접하고,

안서대왕(安西大王)으로 봉하여 쓰고,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당시 동부여(東扶余)에서는 큰 난리가 일어나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다.


 

10월 정여장군(征余将軍) <괴유怪由>가 죽었다.

(괴)유는 힘이 센 사람이어서,

책성 남쪽에서 전쟁할 때 몸에 여러 개의 상처를 입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1품 대가(大加)의 예로 북명산(北溟山)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냈다.


 

 

6년 계사(A.D.33)

 

정월 갈사후(曷思后)가 아들 <호동好童>을 낳았다.

 

무휼(갈사후) - 호동(33-60) 


 

 

7년 갑오(A.D.34)

 

5월 송태후(松太后)가 춘추 67세로 죽었다.

 

후는 <송양松讓>의 딸이며, 광명제(光明帝)가 부여(扶余)에서 왔을 때

(송)후의 집에 의탁한 적이 있었다.

 

<송의>가 그녀를 광명에게 천거하였고,

 (광명이) 즉위하자 거두어 <도조都助>, <해명解明>, 제(帝, 무휼), <해읍주解邑朱>와

여러 공주를 낳았다.

 

단려(端麗)하고 덕이 있으며 신선을 좋아하였으며,

그림 솜씨가 좋고 음악에도 능하였으며, 담담하고 소박하게 가르쳤다.

 

 

 

9년 병신(A.D.36)

 

10월 개마주(盖馬主) <소쾌小噲>의 처 <반을半乙>이 (소)쾌를 죽이고

아들 <숙을叔乙>을 세웠다.

 

(소)쾌의 아들인 <후만厚滿>과 <구문狗文> 등이 서로 다투어,

<후만>이 먼저 입성하여 <숙을>을 죽이니,

<반을>은 <구문>과 잠통(潛通)하여 거두어들였다.

 

<후만>이 도망해 오자,

왕이 친정하여 <구문>을 베고 개마국을 개주군(盖州郡)으로 삼았다.


12월 구다왕(勾茶王) <후린厚燐>이 개마(盖馬)가 멸망했음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후린>은 <섬니閃尼>의 아들이다.

 

연나부(掾那部)를 <락문絡文>에게 넘겼으나, 음으로는 반대하는 뜻이 있어,

<소쾌>가 죽자 <구문狗文>을 도와 서하(西河)와 남구(南口)를 치기로 약속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나라가 없어지게 되었고,

그 도읍은 남소(南蘇)라 하였으며, (이로써) 서쪽의 길이 모두 열리게 되었다.

 

태보 <송의松義>가 죽었다.

 

송태후의 같은 어머니 오빠이다.

 

<송의>의 어머니 <관패>씨(貫貝氏, 소서노의 언니)는

<송양松讓>에게 나라를 바치라고 권하였고, <송의>에겐 타일러서 충성하라고 하였다.

 

<송의>는 모친의 훈계를 지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며,

자신은 검약함을 지켜 3대에 벼슬을 하였다.

 

덕망(德望)이 번성하여 아버지를 능가하였다.

 

그의 동생 (송)<옥구屋句>는 좌보로, <을두지乙豆智>는 태보로,

<마경麻勁>은 우보로 하였다.

 

(마)경은 <마리摩離>의 아들이다.

 

개마(盖馬)의 배반한 무리들이 한인(漢人)들과 함께 구려성(句麗城)에 쳐들어 왔다.

 

현도(玄菟)태수 <구추勾鄒>가 가서 구하였으나 병이 나서 죽었고,

<송옥구>가 대신하여 평정하였다.

 

 

 

10년 정유(A.D.37)

 

7월, 한(漢)의 병사들이 또 구리성(丘利城)에 갑자기 몰려와서,

왕이 친히 남구(南口)로 나아가 독전하였다.

 

<옥구屋句>가 말하기를

 

“저들은 지금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어찌 한가로이 명분 없는 싸움을 걸어오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변방장수가 이익을 엿보며 제멋대로 침입한 것이니,

군사들의 사기가 쇠하여지기를 기다렸다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나가야 깨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울암(蔚岩)으로 들어가 그들이 침입로를 끊었다.

 

적은 개마(盖馬)를 깨뜨리고 달려와서 울암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사가 늘어나니,

대개 성 안에 물이 없음으로 인하여 공격함이 점점 급해졌다.

 

이에 <을두지>의 계략을 써서, 적에게 물고기와 술을 먹였더니,

적들은 성 안에 물이 있는 줄 알고 물러났다.

 

이때, 왕이 남구로부터 구원하러 왔기에, 협격하여 (적들을) 크게 쳐부쉈다.

 

이 싸움을 울암대전(蔚岩大戰)이라 한다.

 

적들은 침입로가 끊김을 걱정하여 남구로 곧장 쳐들어오지 못하고,

작은 성에서 헛고생만하다가 패하게 된 것이다.

 

개마의 여러 성들 모두가 편안하게 되었다.

 

겨울 <온조溫祚>가 <다루多婁>에게 왕위를 전(傳)하였다.

 

 

온조46년(AD 28) 봄 2월에 왕이 돌아갔다. 

원년 다루왕 (多婁王)은 온조왕 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는 BC 44년에 태어나 AD 28년 73세에 죽었다.

 

<온조>의 정변으로 <온조>가 고구려를 9년간 통치하여 오다가

서기 28년 <온조>가 죽은 해에 대무신제 <무휼>이 즉위한 것이다.

 

<다루>의 즉위년도가 고구려사초와 9년의 차이가 난다.

 

<온조>가 <금와>의 서자 <우태>의 아들임과 <온조>의 반정을 은폐하기 위하여

<유리>가 <온조>반정때(서기 18년)에 죽은 것을 서기 28년에 죽어

대무신제 <무휼>이 즉위하고 

<온조>가 서기 28년에 죽은 것을 37년에 죽어 <다루>가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13년 경자(A.D.40)

 

4월 <을두지乙豆智>가 죽었다.

 

<송옥구松屋勾>를 태보로, <마경麻勁>을 좌보로, <오루烏娄>를 우보로 삼았다.


7월 매구곡(買溝谷)사람 <상수尙須>가

친동생인 <위수尉須>와 당제인 <우도于刀>등이 1,0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소와 말 만여 마리를 끌고 와서 알현하였다.

 

<상수>를 대축대가(大畜大加)로 삼았다.

 

매구곡은 곧 수곡성(水谷城)이다.


 

 

14년 신축(A.D.41)

 

겨울 11월 천둥은 쳤으나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해에 엄표(淹淲)에 큰 물난리가 나서,

미추홀(彌鄒忽)모두 수해를 입어, 백성들을 서하로 이주시켰다.

 

엄표왕(淹淲王) <호력虎力>을 용산공(龍山公)으로 하였다.

 

처음 추모제(芻牟帝)가 비류를 엄표패자(淹淲沛者)로 하여 식읍으로 주었는데,

광명(光明)초엔 봉왕되었다가, 만공주(曼公主)에게 장가들어 <양인昜人>을 낳았고,

<양인>은 진공주(真公主)에게 장가들어 <호력虎力>을 낳았다.

 

3대 67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게 되었졌다.

 

<섭득涉得>을 자몽왕(紫蒙王)으로 하였다.

 

<섭득>은 <섭신>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 <을증乙蒸>은 현명하여 <섭득>에게 예의를 가르쳐,

사람됨이 충직하고 순후하였으며,

왕이 자몽이 배반하였다가 돌아오기에 변함이 있음으로,

<섭득>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오황후(烏皇后)가 아들 <해우解憂>를 낳았다.

 

유리(송후松后BC32-34) - 무휼(4-64)

오루(람藍BC8-) - 오후烏后(15-94)

무휼(오후烏后15-94) - 해우(41-73) 


 

 

15년 임인(A.D.42)

 

3월 대가(大加) <구도仇都>, <일구逸苟>, <분영焚永> 등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쫓아내었다.

 

세 사람 모두 소황후(召皇后, 소서노)의 옛 신하이었는데,

사람들의 처첩(妻妾), 재화(財貨)를 빼앗아 마음대로 하니,

사람들 모두 분하여 죽으매 홍수가 난 것이며, 비류국(沸流國)을 없애게 한 것이니,

법으로는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하나,

동명(東明)의 옛 신하여서 차마 죽이지 않고 내쫓아서 서인으로 만든 것이었다.

 

남부사자(南部使者) <추각소鄒殼素>를 비류부장(沸流部長)〈순노패자〉로 삼아서

그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9월 용산(龍山)에서 동명대제(東明大祭)를 지냈다.

 

<다루多婁>가 한남(汗南)의 옛 땅을 바치고 남하(南下)하였다.

 

군사를 보내 신라(新羅)를 쳐서, <다루>를 도왔다.



 

17년 갑진(A.D.44)

 

7월 작은 <송>태후가 죽었다.

 

<송>태후의 여동생이며 왕의 유모였다.

 

왕은 후의 품에서 자랐으며, 작은 <송>태후의 딸 다섯 모두 비(妃)로 삼았다.

 

춘추 68세였다.


 

20년 정미(A.D.47)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왕이 그 도읍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남옥저(南沃沮)로 도망하였다.

 

잠지락(蚕支落) 위장부(圍場部)의 <대승戴升>이 배반하여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盖馬)의 신하였으며 간사하고 음흉함이 비할 데 없었는데,

적성(赤城)잠지락하(蠶支落河) 사이를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21년 무신(A.D.48)

 

4월 갈사후(曷思后)가 <재사再思>태자를 낳았다.

 

<송옥구松屋句>가 죽어,

<마경麻勁>을 태보로, <오루烏婁>를 좌보로, <송보松宝>를 우보로 삼았다.



 

22년 을묘(A.D.49)

 

정월 장군 <우도于刀>와 <오의烏義> 등을 잠지락하 목책으로 보내어

<대승戴升>을 쳐부수고 목책의 남쪽에서 목을 베었다.

 

진격하여 적성과 잠지를 빼앗고,

자몽왕 <만리사고滿離斯古>와 <섭득涉得> 등을 거느리고 네 길로 나누어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공격하여

보물노리개(宝玩), 미색(美色), 비단(絹織), 진미(珍味) 등 여러 가지를 빼앗았다.

 

년 중 항상 이러하였더니,

<채동蔡彤>은 크게 두려워하여 매년 조공하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모본왕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 어양(漁陽)· 상곡(上谷) · 태원(太原)을

습격하였으나 요동 태수 채동 (蔡彤)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해하고 친하게 지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 모본왕 2년의 기사는 대무신제 22년의 기사이다.

고구려가 건국한 졸본이 지금의 북경 인근임을 알 수 있는 기사이다. 

우북평, 어양, 상곡은 BC 281년 연 진개의 고조선 침입 후 신설한 군(郡)으로

고구려의 남단인 개마, 안평, 남소와 이웃하여 서로 뺏고 뺏기는

한과 고구려의 격전장이다.

 

 

이 해에 책성(柵城)에서 <호화芦花>태후가 출생하였다.

 

<왕문王文>의 딸이고, 어머니 <고야高耶>는 <대소帶素>의 딸이다.


 

 

 

24년 신해(A.D.51)

 

3월 동부에 우박이 내렸다.

 

부여태사(扶余太師) <왕문王文>이 죽었다.

 

<가순加順>과 <부담富覃> 등이 난을 일으켜,

왕이 <송보松宝>와 <낙기絡寄>를 보내어 난을 평정하고,

여주(女主) <고야高耶>를 잡아와 후(后)로 삼았다.

 

동부여(東扶余) 47국 모두 나라의 땅이 되었다.

 

<해부루解夫婁>로부터 <금와金蛙>, <대소帶素>, <고야高耶>

4대 110년을 지내오다가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중간에 <대불帶弗>이 19년간 보위를 훔친 적이 있었다.

 

동부여 47국은 군 단위의 부족국가이다. 


 

 

27년 갑인(AD54)

 

4월 <호동好童>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崔理>의 새 도읍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사이좋게 사귀었다.

 

그녀는 <호동>을 위해 북과 나발을 망가뜨려 맞이하였다.

 

왕이 거느린 대군은 옥저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가서 그 도읍을 빼앗고

<최리>의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그 땅은 죽령군(竹岺郡)으로 삼았다.

 

낙랑(樂浪)은 <시길柴吉>로부터 4대 80여년 만에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7월 <대해大解>태자가 죽었다.


 

 

28년 을묘(A.D.55)

 

2월 개마, 하성, 구리, 고현, 남구, 자몽, 구려, 거란, 하양, 서안평

10성을 쌓아 한(漢)과 선비(鮮卑)에 대비하였다.

 

<마경麻勁>이 병으로 물러나니,

<오루烏娄>를 태보로, <송보松宝>를 좌보로, <을상乙祥>을 우보로 삼았다.


 

 

29년 병진(A.D.56)

 

7월 낙랑(楽浪)의 남은 무리들이 동옥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장군 <어비신菸卑神>을 보내서 동옥저를 쳐서 빼앗아 해서군(海西郡)으로 만들었다.

 

낙랑의 남은 무리들은 환아(桓阿)에서 살게 하였다.


 

 

32년 기미(A.D.59)

 

4월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를 관상하고,

붉은 지느러미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서 사당에 올렸다.


7월 서도(西都)에 큰물이 져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잠겼다.


 

 

33년 경신(A.D.60)

 

11월 <호동好童>이 칼에 엎드려 죽었다.

 

<호동>의 안색은 아름답고 호감이 있었으며,

<오>황후가 사랑하여 희롱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왕에게 반대로 참언하여 말하기를

 

“<호동>이 무례하다.”라고 하였다.

 

왕은 벌을 주는 것을 옳게여지지 않자, 후(后)가 이에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였다.

 

<호동>은 스스로 오해를 풀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밝히게 되면 어머니(烏皇后)의 잘못이 드러나게 되고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게 된다.”라고 하며 스스로 죽어버렸다.



 

34년 신유(A.D.61)

 

4월 <송보松宝>의 처 <을포乙蒲>가 아들 <두지豆智>를 낳았다.

 

(을)포는 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왕이) 받지 않았다.

 

선제(先帝) 때부터 공경들의 처가 성은을 입으면,

많은 이가 아들을 왕에게 바쳐왔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폐단이 점점 심하였기에,

그런 연유로 그 풍속을 폐한 것이었다.


 

 

37년 갑자(A.D.64)

 

<섭득涉得>이 아들 <사욱射旭>을 보내 입조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서도(西都)에서 죽었다.

 

황태제(皇太弟) <해읍주解邑朱>에게 보위를 전하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다.

 

춘추 61세였으며, 대수림원(大獸林原)에 장사를 지냈다.


 

찬자는

 

“대무(大武)는 굳세고 용감하며 심히 사나웠으며, 능히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광명(光明)이 수성(守成)한 뒤를 이어 부여(扶余)를 정벌하고,

개마(盖馬)를 토벌하였으며, 멀리는 상곡(上谷)과 태원(太原)까지 미치어

한인(漢人)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또한 효심과 우애가 있어, 자신 아들이 불초함을 보고 동생에게 전위하였다.

 

가히 대체(大體)를 알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오후(烏后)에게 빠져서 <호동好童>을 죽이고,

(백)제와 신(라)를 오그라들게 하여 후세에 화(禍)를 남겼다.

 

아마도 영웅들은 업신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우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인(聖人)이 형제 사이의 화(禍)를 키웠음이 이와 같았다.”라고 생각한다.


 

동명(東明), 광명(光明), 대무(大武) 3대의 다스림을 설명하여

삼대경(三代鏡)이라 한다.

 

(고구)려인들은 삼대경을 정경(政經)으로 삼아서, 능히 7백년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광명과 대무는 동명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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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