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諱)는 <고이古爾>이며, <초고肖古>왕의 같은 어머니 아들이다.

 

<초고>는 <전씨>와 <백고>의 아들이고, <고이>는 <전씨>와 <초고>의 아들이다.

<전씨>가 그녀의 아들 <초고>와 치붙어 <고이>를 낳은 것이다.

<전씨>는 <고이>의 어머니인 동시에 할머니인 것이다.


 

 

고이왕 원년 갑신(A.D.264) 9월

 

<소내素嬭>후를 세워 후로 하고, <구내仇嬭>를 부후로 하였다.

 

이때 태후 <전씨> 68세, <초고> 51세, <고이>왕 30세, <소내> 33세, <구내> 28세,

<구수>의 아들 <사반> 15세, <비류> 5세, <고이>의 아들 태자 <책계> 1세,

대방왕 <沼> 45세, <보과>1세이다.  


 

 

 

고이왕 3년 갑술(A.D.266)

 

2월 사반(沙伴)왕이 죽었다.


<사반>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고이>가 반정을 일으켜 조카인 17살인 <구수>의 아들 <사반>을 죽인 것이다.

<사반>은 그의 이름처럼 그렇게 모래반쪽 인생을 살다간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는 토착세력과 손잡은 <구수>계와

대방세력과 손잡은 <고이>계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40년간 지속된다.

304년 토착세력과 손잡은 ,구수>계의 <비류>가

<고이>계의 <분서>를 살해하여 왕위를 되찾게되고

<비류>의 죽음 후 잠시 <고이>계의 <계>왕이 왕권을 되찾았으나

일본열도의 정복을 마치고 돌아온 근초고왕 <여구>에게 바로 왕위를 빼앗겨

<고이>계는 이후 <계>왕을 끝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고이왕 5년 무자(A.D.268)

 

5월 전태후(田太后)가 춘추 72세로 죽어, 구지왕릉(仇知王陵)에 장사 지냈다.

 

이해의 가을에 가물고 메뚜기가 들어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을 하였다.

 

왕이 군현을 순행(巡行)하며 백성을 안심시키고 어루만졌다.


 

 

 

고이왕 7년 경술(A.D.270)

 

2월 적현(赤峴)사도(沙道) 두개의 성을 쌓고,

동부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명하였다.

 

10월 말갈(末曷)이 침입하여 사도(沙道) 성문을 불사르고 도망쳤다.


 

 

 

고이왕 8년 신묘(A.D.271)

 

2월 태왕(太王){초고왕}이 질병이 있어 죄인들을 사면했다.

 

가을, 나라의 남부에 메뚜기가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이 자책하여 말하기를

 

“과인(寡人)의 치세에 재난이 이와 같이 심한가.”라고 하였다.


 

 

 

고이왕 10년 계사(A.D.273)

 

7월 서부사람 <색회嗇會>가 백록(白鹿)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왕이 특출한 재앙이 누차로 보였으나 상서로운 일을 보지 못하여 근심하였는데,

백록을 봄에 이르자 크게 기뻐하며 곡식 100석을 <색회>에게 내렸다.


 

 

 

고이왕 11년 갑오(A.D.274)

 

7월 신라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의 성주를 죽였다.

 

신라의 병사가 사현성(沙峴城)을 침입하였으나 물러났다.

 

 

9월 북부의 <진과眞菓>에게 명하여 말갈을 공격하여 석문(石門)을 취하였다.

 

 

10월 말갈이 술천(述川)에 침입하여 격퇴(擊退)하였다.

 

태왕(太王){초고}이 산궁(山宮)에서 춘추 61세로 죽었다.

 

태왕은 체격이 크고 뛰어난 힘이 있어 활쏘기를 잘하고,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성덕(盛德)의 이름이 있었다.

 

뒤늦게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성색(聲色)보다 토목(土木)에 빠져들었다.

 

나라사람들이 태왕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말갈과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는 것은 고구려와 신라가 공조하였다는 것이다.

이 당시 백제는 가야와 공조하였는데,

대가야가 신라의 위협에 굴복하였고,

가야의 연방인 포상8국이 배반한 대가야를 공격하니,

이것이 270년에 신라와 포상8국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고이왕 13년 병신(A.D.276)

 

8월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하여, 성주가 단단히 막았다.

 

왕이 경기(勁騎) 800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대파하였다.


 

 

 

고이왕 14년 정유(A.D.277)

 

2월 사도성 옆 동서에 두개의 목책을 세웠는데, 서로 10 리의 거리에 있다.

 

적현성(赤峴城) 수졸(守卒)을 나누어 목책을 지키게 하였다.


 

 

 

고이왕 15년 무술(A.D.278)

 

7월 신라 장산성(獐山城)을 공격하였다.


 

 

 

 

고이왕 17년 경자(A.D.280)

 

10월 왕성(王城) 서문(西門)이 불탔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 했다.


 

 

 

 

고이왕 18년 신축(A.D.281)

 

5월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산 40여개가 무너졌다.

 

8월 한수(漢水)의 서쪽에서 크게 사열했다.


 

 

 

 

고이왕 19년 임인(A.D.282)

 

2월 제방(堤坊)을 수리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6월 왕도(王都)에 물고기 비가 내렸다.

 

태자 책계(責稽)가 대방(帶方)왕녀 보과(宝果){沼의 딸}를 거두었다.

 

 

10월 신라 우두진(牛頭鎭)을 공격하여 민호(民戶)를 초략(抄掠)하였다.

 

신라 장수 <충헌忠萱>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와서,

웅곡(熊谷)에서 역전(逆戰)하였다.

 

상호간에 승부(勝負)가 있었다.


 


 

 

고이왕 20년 계묘(A.D.283)

 

2월 대방왕 <소沼>가 죽어 아들 <건虔>이 섰다.

 

왕에게 혼인을 청하여, 다섯째 딸 <오우리烏右里>를 시집보냈다.


 

 

 

고이왕 21년 갑진(A.D.284)

 

7월 신라가 침입하여 봉산(烽山)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책계(責稽)태자에게 명하여 내외군사(內外軍事)를 살피도록 하였다.


 

 

 

고이왕 23년 병오(A.D.286)

 

2월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구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대방을 구하도록 명하였다.

 

고구려가 우리를 원망하여, 장차 변경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과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선하고 지붕을 이어 대비하였다.

 

 

11월 왕이 죽어 태자 <책계責稽>가 섰다.

 

왕은 태왕(太王){초고}의 총애를 받은 아들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였다.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을 자고,

말단 관료까지 근검(勤儉)함을 국가의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항상 바깥의 도적들을 근심하여, 언제나 편안히 살지 못하고 춘추 52세에 죽었다.

 

나라사람들이 애통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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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