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왕 원년(458) 황구(黃狗)戊戌

 

八月二十日 太王崩 于豆乙宮

舒弗邯實相等 引百僚 請立太子 行祥 于上宮

上宮攝凰詔 曰 太子賢明 可紹大統卽於眞宮 受位

太子膝行叩頭 讓以無德 上宮扶起授宝 曰 愼之好生

乃導宝祚踐之 山呼萬歲

王詔 曰 朕以不德 叨蒙上宮之恩 猥居此位 上下其宜敎我導我

白官俯伏 受詔

尊上宮爲太王上宮 下宮以下皆付散宮

二十二日 王與太王上宮 受桃宮大朝

天大雨 百官皆立 於泥中 命賜馬 着雨衣

以伊飡靑淵爲舒弗邯 實相公爲太公

金官君銍知生 子嘉知 乃河喜生也

以元妃巴胡爲下宮 以太王暖宮美梁爲暖宮

 

8월20일 태왕(太王)이 두을궁(豆乙宮)에서 붕(崩)하였다.

 

서불감 <실상實相>등이 백료를 인솔하여 상궁에서 행상(行祥)하고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상궁 <섭황攝凰>이 조칙으로 말하기를

 

"태자가 현명하니 대통을 이음이 옳다"라고 하며

 

즉시 진궁(眞宮)에서 보위를 이어 받게 하엿다.

 

태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덕이 없음을 말하며 사양하니

 

상궁이 부축하여 일으키며 신보(神寶)를 건네며 말하기를

 

" 참으로 어지십니다"라고 하며

 

즉위하니 산호만세를 불렀다.

 

왕이 조칙을 내리기를

 

" 짐은 부덕하나 외람되게 상궁의 은혜를 입어 제위에 올랐다.

상하 백관은 마땅히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인도하도록 하라" 하니

 

백관은 엎드려 부복하여 조서를 받들었다.

 

상궁을 태왕상궁으로 올리고 하궁이하의 모든 궁은 산궁(散宮)으로 하였다.

 

22일 왕과 태왕상궁이 도궁(桃宮)에서 대조(大朝)를 받았다.

 

큰비가 내려 백관들이 진흙에 젖은채로 서 있어 말과 우의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찬 <청연靑淵(404-467)>을 서불감으로

<실상實相(395-461)>공을 태공太公으로 삼았다.

 

<하희河喜>가 금관군(金官君) <질지銍知>의 아들 <가지嘉知>를 낳았다.

 

원비(元妃) <파호巴胡(420-482)>를 하궁으로

태왕난궁 <미량美梁(436- )>을 난궁(暖宮)으로 삼았다.

 

 

 

九月 王女寸己生 女富斗理

王與太王上宮 謁始祖靈廟

以豆乙宮皇我爲太王祭主

以寵德爲兵官伊飡 進思爲骨門伊飡 山近爲神官伊飡 期宝爲護城伊飡 馬美爲伊飡

 

9월, 왕의 딸 <촌기寸己>가 딸 <부두리富斗理>를 낳았다.

 

왕과 태왕상궁이 시조 영묘(靈廟)를 알현하였다.

 

두을궁(豆乙宮) <황아皇我>를 태왕의 제주(祭主)로 삼았다.

 

<총덕寵德(398-464)>을 병관이찬으로  <진사進思(385-459)>를 골문이찬으로

<산근山近(405-475)>을 신관이찬으로 <기보期宝(407-479)>를 호성이찬으로

<마미馬美(408-476)>를 이찬으로 삼았다.

 

 

 

十月 葬太王 于陵門 乃阿老太后陵也

以王妹鳥生爲祭主 以上仙好淵爲國公

燦凰生 太王女燧凰

王如寶味宮 比太爲骨門匝判 習宝爲護城匝判

塞京生 突知子鳥石 賜米

王如皇我宮 以太王宮人畏凰 妻山近

陵門大宮神殿成 王與太王上宮及王姊烏士只 詣之

以太王宮人惠密 妻太公寵子塞文 惠密乃加耶舍訶王孫也 善文章

故王命 與塞文 掌骨門文事

牟梁生 子石欣 王如宝美宮 賜米

 

10월, 태왕을 릉문(陵門)에 장례하니 <아로阿老(391-455)> 태후 릉이다.

 

왕의 여동생 <조생鳥生(418-487)>을 제주로

상선(上仙) <호연好淵(397-466)>을 국공(國公)으로 삼았다.

 

<찬황燦凰(440?-474)>이 태왕의 딸 <수황燧凰>을 낳았다.

 

왕이 보미궁에서 <비태比太(416-481)>를 골문잡판으로

<습보習宝(420-485)>를 호성잡판으로 하였다.

 

<새경塞京>이 <돌지突知>의 아들 <조석鳥石>을 낳으니 쌀을 내렸다.

 

왕이 황아궁에서 태왕궁인 <외황畏凰(429- )>을 <산근山近>의 처로 하였다.

 

릉문(陵門) 대궁(大宮) 신전(神殿)이 완성되었다.

 

왕과 태왕상궁 및 왕의 누나 <오사지烏士只(410-)>가 그곳에 이르렀다.

 

태왕 궁인 <혜밀惠密>을 태공의 총애하는 아들 <새문塞文(431- )>의 처로 하니

<혜밀惠密>은 가야 <사가舍訶(369-428) 금관가야 14대왕 재위 414-427>왕의

손녀이다.

 

문장을 잘하여 <새문塞文>과 함께 골문의 문사(文事)를 관장하도록 명하였다.

 

<모량>이 아들 <석흔>을 낳으니 왕과 <보미>궁이 쌀을 하사하였다.

 

 

 

十一月 以太王上宮爲上宮 行吉 于鮑石祠

翌明 受大朝 于南桃之桃宮

覃氏生 國信子國兒

首里生 王子能牟 于紅我宮

以太王宮人五壽 賜寵臣習宝

 

11월, 태왕상궁을 상궁으로 삼아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다음날 남도(南桃)의 도궁(桃宮)에서 대조(大朝)를 받았다.

 

<담씨覃氏>가 <국신國信>의 아들 <국아國兒>를 낳았다.

 

<수리首里>가 왕의 아들 <능모能牟>를 홍아궁(紅我宮)에서 낳았다.

 

태왕 궁인 <오수五樹>를 총신 <습보習寶>에게 하사하였다.

 

 

 

十二月 以多甘爲兵官匝判 以乃宿爲王宮舍人

加耶女主蟾神 囚靑夫 于神山 乃其嬖臣也

先是蟾神與道光 遊神山 蟾神得仙徒 靑夫而歸寵幸漸高 時蟾神娠 靑夫子 約以爲嗣

太子阿利聞之 乃密通靑夫 以保其位 事發 蟾神怒囚 靑夫于神山道場 阿利于宮中

 

12월, <다감多甘(403-470)>을 병관잡판으로

<내숙乃宿(436-501)>을 왕궁 사인으로 삼았다.

 

가야 여왕 <섬신蟾神>이 <청부靑夫>를 신산(神山)에 가두니 그녀의 폐신(嬖臣)이다.

 

이에 앞서 <섬신蟾神>이 <도광道光>과 신산(神山)에 유람하여

<섬신蟾神>이 선도(仙徒) <청부靑夫>를 데려와

총애하여 잠자리 시중을 받들도록 하였다.

 

<섬신蟾神>이 <청부靑夫>의 아들을 임신하여 후사로 삼기를 약조하엿다.

 

태자 <아리阿利>가 이를 듣고 마침내 <청부靑夫>와 밀통하여

그 왕위를 차지하려다 발각되어 <섬신蟾神>이 노하여

<청부靑夫>는 신산(神山) 도장(道場)에 <아리阿利>는 궁중에 가둔 것이다.

 

<아리>는 <섬신>의 딸이며 이때 27세이고, <섬신>은 45세이다.

 

 

이때 <자비>왕 45세, <섭황> 35세, <파호> 39세, <미량> 23세, <비처>{소지] 23세,

<조생> 41세, <습보> 39세, <지도로>{지증} 22세,

<보미> 55세, <등흔> 43세, <부리> 39세, <모량> 25세이다.

 

 

 

 

 


자비왕 2년(459) 토시(土豕) 己亥)

 

 

正月 阿利與孝國 逃歸于我 命賜第 于境上 而禮遇之

 

 

정월 <아리阿利>와 <효국孝國>이 우리에게 도망 와서 귀속하였다.

 

국경에 저택을 내리도록 명하고 예우하도록 하였다.

 

 

 

二月 王謁始祖廟

 

2월, 왕이 시조묘를 알현하엿다.

 

 

三月 野人以兵船百余艘 襲東邊來 圍月城 矢石如雨

命習宝烏含等 固守關防 以應矢戰

助里生 比智子好助 于白欣家

 

3월, 야인이 병선 백여쳑으로 동쪽 변경을 래습하여 월성(月城)을 에워싸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았다.

 

<습보習宝> <오함烏含> 등에게 관방(關防)의 수비를 단단히 하고

화살로 응전하라고 명 하였다

 

<조리助里>가 <비지比智>의 아들 <호조好助>를 <백흔白欣>의 집에서 낳았다.  

 

 

 

四月二日 比太引沙伐軍八百 入城 大破野人

習宝等 自內應之賊夜遁 追北 至海口 及登船

水路將軍白欣 亦引兵船而至 賊溺死者過半

盡奪賊船 及兵機 斬反賊蘇豆 及賊酋安彘 示衆

賞比太等十人 罰敗軍者五人 白欣特以功績罪

鳥生生 乃宿女善兮 詐稱王女 王許之

 

4월 2일 <비태比太>가 사벌군 8백명을 이끌고 입성하여 야인을 대파하였다. 

 

<습보習宝> 등이 내응하여 공격하니 적들이 야간에 달아났다.

 

북족으로 추격하여 해구까지 이르러 선박에 올라탔다.

 

수로장군 <백흔白欣> 역시 병선을 이끌고 도착하니 적은 익사자가 과반수였다. 

 

적선과 병기를 빼앗고 반적 <소두蘇豆> 및

적의 추장 <안체安彘>를 참하여 그 목을 내다 걸었다.

 

<비태比太> 등 10명에게 상을 내리고 패한 장수 5명을 벌하였다.

 

<백흔白欣>은 특별히 공과 죄를 물었다.

 

<조생鳥生>이 <내숙乃宿>의 딸 <선혜善兮(459-518)>를 낳고

왕의 딸이라고 거짓으로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五月 河宮生俊登 乃智度路子也

先是智度路爲太王宮舍人 宮亦入侍宮中 慕其鴻壯 而通以生之

王不知之 毗處知之

 

5월, 하궁(河宮){파호}이 <준등俊登>을 낳았는데 <지도로智度路>의 아들이다.

 

이에 앞서 <지도로智度路>를 태왕궁 사인으로 삼았는데 하궁도 역시 궁중 으로 들어와

<지도로智度路>의 큰 체구를 사모하여 사통하여 <준등俊登>을 낳았다.

 

왕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비처毗處>는 알았다.

 

 

 

六月 以進思爲角干 山近爲骨門伊飡 期宝爲神官伊飡 馬美爲護城伊飡

多甘爲伊飡 比太爲兵官匝判 習宝爲骨門匝判 白欣爲護城匝判 烏含爲護城將軍

 

6월, <진사進思>를 각간으로 <산근山近>을 골문이찬으로

<기보期宝>를 신관이찬으로 <마미馬美>를 호성이찬으로

<다감多甘>을 이찬으로 <비태比太>를 병관잡판으로

<습보習宝>를 골문잡판으로 <백흔白欣>을 호성잡판으로

<오함烏含>을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七月 以太王宮人齒君 妻毗處 行吉 于鮑祠

命好淵 設仙徒道場 于州郡

以太王宮人燦凰 爲上宮宮人

 

7월, 태왕 궁인 <치군齒君>을 <비처毗處>의 처로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핼하였다.

 

<호연好淵>에게 주군(州郡)에 선도(仙徒) 도장(道場)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태왕 궁인 <찬황燦凰>을 상궁 궁인으로 하였다

 

 

 

八月 副妃沙梁生 王女 洗王詣視兒 賜米

沙梁蹴米 而泣 曰 妹爲暖宮 而我何面育此女乎 恨 不入太王宮 而爲汝欺也

王乃以沙梁爲暖宮 而美梁爲小暖宮 以慰之

 

8월, 부비(副妃) <사량沙梁>이 왕의 딸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고 쌀을 내렸다.

 

<사량沙梁>이 쌀을 발로 차며 말하기를

 

"동생은 난궁(暖宮)이 되었는데 나는 이 딸을 어찌 키우란 말인가?

태왕궁(太王宮)에 들어가서 너를 키우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라고 하였다.

 

왕이 <사량沙梁>을 난궁(暖宮)으로

<미량美梁>을 소난궁(小暖宮)으로 삼아 위로하였다.

 

<사량>과 <미량>은 <보미>의 딸로 이때 <사량>은 28세, <미량>은 24세이다.

 

 

 

九月 王巡之押梁 賜父老酒

上宮生 王女四嬃 賜酺骨門

古自與阿羅 爭地 而敗 請救 命富理 往鎭之

 

9월, 왕이 압량(押梁)주를 순행하고 부노(父老)에게 술을 내렸다.

 

상궁{섭황}이 왕의 딸 <사수四嬃>를 낳아 골문에 술을 내렸다.

 

고자(古自)와 아라(阿羅)가 땅을 다투어 싸워서 패해 구원을 요청하니

<부리富理>를 그 진(鎭)에 주둔하라고 명 하였다.

 

 

 

十月 好梁生 烏含女烏梁

阿羅以野人小裊人爲將軍

畏凰生 山近子畏山

阿利生 孝國子孝德 于境上館

 

10월, <호량好梁>이 <오함烏含>의 딸 <오량烏梁>을 낳았다.

 

아라(阿羅)가 야인 <소뇨인小裊人>을 장군으로 삼았다.

 

<외황畏凰>이 <산근山近>의 아들 <외산畏山>을 낳았다.

 

<아리阿利>가 <효국孝國>의 아들 <효덕孝德>을 국경 객사(客舍)에서 낳았다.

 

 

 

十一月 古自君發登 以巫兒耐衰爲寵姬 耐衰年十四

而色美而肥 善鬼神 所向大衆應之

發登使其臣 往斬之 使者皆爲耐衰所奸 而不能斬 歸告其神

發登大怒 自至耐衰鄕 而縛之 見其美 而不能殺 遂濡之

時古自有神歌 曰

大蛤精亡 古自耐衰父漁翁 見大蛤出海岩 上化爲人 引歸其家 以爲巫兒

 

11월, 고자군(古自君) <발등發登>이 무아(巫兒) <내쇠耐衰>를 총희(寵姬)로 삼았다.

 

나이 14살이었다.

 

 

<내쇠耐衰>는 얼굴이 아름다고 살이 통통하고 귀신(鬼神)놀이를 잘하였다.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응하였다.

 

 

<발등發登>이 그의 신하를 보내어 귀신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사자(使者)들 모두가 <내쇠耐衰>가 간사하여 목을 베지 못하고

돌아와 그 신(神)에게 고하였다.

 

 

<발등發登>이 대노하여 <내쇠耐衰>를 고향으로부터 포박하여 데려왔다

 

 

그 미모를 보더니 죽이지 못하고 개울에 빠뜨렸다.

 

 

이 당시 고자(古自)에 신가(神歌)기 있어 말하기를 

 

"대합(大蛤)귀신은 고자(古自)의 <내쇠耐衰> 아버지 어부이다.

대합(大蛤)이 바다 바위에서 나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 무아(巫兒)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十二月 進思角干 以病退居久矣 至是卒 年七十五

公奈勿王庶子也 母曰大加耶公主思氏也 仁孝善文章 爲兩國之重臣

亦爲金官之外祖 中外會喪者萬衆

 

12월, <진사進思> 각간이 병으로 물러나 이때 죽으니 나이 75세였디.

 

공은 내물왕의 서자이다.

 

어머나는 대가야 공주 <사씨思氏>이다.

 

어질고 효도하며 문장을 잘하여 양국의 중신이 되었다.

 

또한 금관(金官)의 외조(外祖)이니 나라 안팎에서 초상에 만명의 무리가 모였다.

 

 

 

 

 


자비왕 3년(460) 금서(金鼠) 庚子)

 

 

正月 發登以耐衰爲正妻

 

정월, <발등發登>이 <내쇠耐衰>를 정처로 삼았다.

 

 

二月 五壽生 習宝女宝兮

 

2월, <오수五壽>가 <습보習宝>의 딸 <보혜宝兮>를 낳았다.

 

 

四月 旱

送通兒等八人 于扶余 學醫藥陰陽事

惠密生 塞文子可文

 

4월, 가물었다.

 

<통아通兒> 등 8인을 부여에 보내어 의약과 음양을 배우도록 하였다.

 

<혜밀惠密>이 <새문塞文>의 아들 <가문可文>을 낳았다.

 

 

 

八月 以神官匝判登欣 貶爲牟梁部主君

時上宮忌 沙梁姊妹 累言于上 曰

登欣以微品之骨 私通宝美 濫承恩寵 若不貶之 將有不利

王問於靑淵 淵乃 上宮之所私也 乃爲上宮盛言 登欣之不義曰 若貶此人 可洽衆心

王不得已 乃有是命

 

8월, 신관잡판 <등흔登欣>의 지위를 낮추어 모량부(牟梁部) 주군(主君)으로 삼았다.

 

이 당시 상궁이 <사량沙梁> 자매를 기피하여 누차 왕에게 말하기를

 

"<등흔登欣>은 골품이 미미한데 <보미宝美>를 사통하여 은총이 넘쳐 골품이 올랐으니

만약 골품을 낮추지 않으면 장차 이롭지 못함이 있습니다"라고 하엿다.

 

왕이 <청연靑淵>에게 물으니 <청연靑淵>은

 

"상궁의 사사로운 소관입니다.

상궁에게 한 말은 <등흔登欣>의 불의(不義)라고 말하며

이 사람의 지위를 낮추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왕은 부득이 이에 명을 내렸다.

 

  

 

九月 以白欣爲神官匝判 富理爲護城匝判

穀不登 命賑民

 

9월, <백흔白欣>을 신관잡판으로 <부리富理>를 호성잡판으로 삼았다.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아 백성을 진휼하라고 명하였다.


 

 

 

 

 

자비왕 4년(461) 백우(白牛) 辛丑)

 

二月 以下宮巴胡爲上宮 暖宮沙梁爲下宮 以上宮攝凰爲豆乙宮

攝凰私臣奈河者 靑淵公家奴也 與攝相通 而娠 上知之 廢攝凰爲豆乙者也

以巴胡子毗處爲太子

 

2월 하궁 <파호巴胡>를 상궁으로, 난궁 <사량沙梁>을 하궁으로,

상궁 <섭황攝凰>을 두을궁으로 삼았다.

 

<섭황攝凰>의 사신(私臣) <내하奈河>)는 <청연靑淵>공)의 가노인데,

<섭황攝凰>과 상통하여 임신을 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섭황攝凰>을 폐하고 두을궁으로 삼았다.

 

<파호巴胡>의 아들 <비처毗處>를 태자로 하였다.

 

눌지(아로) - 자비(414-479) 20대왕 재위 458-478

자비(파호) - 비처(436-500) 21대 소지왕 재위 479-499 

 

<아로>는 <내류>와 <실성>의 딸이고 <파호>는 <미해>와 <자아>의 딸이다.

 

 

 

三月 美梁生 王子順力

王女寸己 生富理子富世

 

3월, <미량美梁>이 왕의 아들 <순력順力>을 낳았다.

 

왕의 딸 <촌기寸己>가 <부리富理>의 아들 <부세富世>를 낳앗다. 

 

 

四月 行大祭 于陵門

以美梁爲暖宮

 

4월, 릉문에서 대제를 행하엿다.

 

<미량美梁>을 난궁으로 삼았다.

 

 

 

六月 牟梁生伊欣

尹己生 車宿女車己

 

6월, <모량牟梁>이 <이흔伊欣>을 낳았다.

 

<윤기尹己>가 <거숙車宿>의 딸 <거기車己>를 낳았다.

 

 

 

九月 穀大登

畏凰生 山近女畏里

 

9월, 곡식이 잘 여물었다.

 

<외황畏凰>이 <산근山近>의 딸 <외리畏里>를 낳았다. 

 

 

 

十月 首里生 宝器子洪器 于紅我宮 盖私行也

實相公卒 年六十七 太王母弟也 或云保反后私臣子也

沈敦有膽勇 累戰有功 崇禮葬之以國公 好淵爲太公

 

10월, <수리首里>가 <보기宝器>의 아들 <홍기洪器>를 홍아궁(紅我宮)에서 낳아

사택(宅)으로 갔다.

 

<실상實相>공이 죽었다. 나이 67세였다.

 

태왕의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다.

 

혹은 <보반保反>后의 사신(私臣)의 아들이라고 한다.

 

차분하고 자세하며 담력과 용기가 있어 누차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국공(國公)으로 높여 장례를 치루엇다.

 

<호연好淵>을 태공(太公)으로 하엿다.

 

 

 

 

 

 

자비왕 5년(462) 수호(水虎) 壬寅

 

正月 王詔 曰 太王之世 民尙忠義 而士尙質朴

寡人之世 上下漸至奢靡 朕先自儉 以示上下 宜一心 以强吾國

 

정월, 왕이 조칙으로 말하기를

 

"태왕의 치세에 백성은 충의를 숭상하고 선비는 소박함을 숭상하였다.

과인의 치세에 상하는 점점 사치와 낭비가 심하여

짐이 솔선하여 검소함을 보이고자하니

상하가 한마음으로 우리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二月 野人請和 盖欲窺我也 留而不還

 

2월, 야인이 우리를 엿보며 머물러 돌아가지 않고 강화를 청하였다.

 

 

 

三月 五壽生 王女宝壽

助里生 太子女繡兒

成梁生 靑市子靑良

以比太女悅凰 妻王子毗己

 

3월, <오수五壽>가 왕의 딸 <보수宝壽>를 낳았다.

 

<조리助里>가 태자의 딸 <수아繡兒>를 낳았다.

 

<성량成梁>이 <청시靑市>의 아들 <청량靑良>을 낳았다.

 

<비태比太>의 딸 <열황悅凰>을 왕자 <비기毗己>의 처로 하였다.

 

 

 

四月 思君生 王女斗君 思君紫我女也 父曰期宝

自幼入 王枕婢 至是始生女 王爲之 賜宴宮中

 

4월, <사군思君>이 왕의 딸 <두군斗君>을 낳았다.

 

<사군思君>은 <자아紫我>의 딸이다.

 

아버지는 <기보期宝>이다.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왕의 침비가 되어 지금에 이르러 처음으로 딸을 낳은 것이다.

 

왕이 그녀를 위하여 궁중에 잔치를 열었다.

 

이때 <사군思君> 23세이다.

 

 

 

五月 野人襲破活開城 城主湯燕降之

賊盡率城下男女 而歸 于船上 又掠邊民之女 至千人

而去盖野人 地澗人少 故掠我民 而移之 于其土也

湯燕遂入其土 爲千家君

 

5월, 야인이 활개성(活開城)을 기습하여 깨뜨리니 성주 <탕연湯燕>이 항복하였다.

 

적이 성 아래 남여를 붙잡아 배 위로 돌아가고

또 변방 백성의 딸을 약탈하니 1천 명이었다.

 

야인이 온 땅을 뒤덮으니 산골짜기에 사람이 적어

우리 백성을 약탈하여 그 땅에 약탈한 백성을 옮기었다.

 

<탕연湯燕>이 마침내 그 땅에 들어가 1천 가(家)의 군(君)이 되었다. 

 

 

 

六月 鳥生生元兮 亦乃宿女也

耐衰生 女發惠

以田君爲暖宮 廢美梁爲宮人 因思君譖也

 

6월, <조생鳥生>이 <원혜元兮>를 낳으니 역시 <내숙乃宿>의 딸이다.

 

<내쇠耐衰>가 딸 <발혜發惠>를 낳았다.

 

<사군思君>이 참소하여 <전군田君>을 난궁(暖宮)으로 삼고

<미량美梁>을 페하여 궁인으로 삼았다.

 

 

 

 

 

 

자비왕 6년(463) 흑토(黑兎) 癸卯

 

 

正月 齒君生 太孫阿知

 

정월, <치군齒君>이 태손(太孫) <아지阿知>를 낳았다.

 

 

 

二月 野人于侵欿良 伐智與德智伏兵 於要路 以擊退之 乃築綠邊二城

加耶女主蟾神沒 以其女阿利爲君

 

2월, 야인이 삽량성를 침범하였으나 <벌지伐智>와 <덕지德智>가

요로에 복병을 두어 격퇴하고 두개의 성(城)을 변방에 연결하여 축성하였다.

 

<벌지>와 <덕지>는 <황아>의 아들로 이때 <벌지> 27세, <덕지> 24세이다.

 

 

가야 여왕 <섬신蟾神>이 죽어 그녀의 딸 <아리阿利>가 군(君)이 되었다.

 

삼광(섬신) - 아리(431-491) 대가야 16대왕 재위 463-486

 

 

 

三月 田君生 王子

太子納白欣女白氏 爲宮人

牟梁生 女蓮帝 于牟梁 有異鳥 自南天來 鳴于産室

 

3월, <전군田君>이 왕의 아들 <항>을 낳았다.

 

태자가 <백흔白欣>의 딸 <백씨白氏>를 궁인으로 거두어 들였다.

 

<모량牟梁>이 딸 <연제蓮帝(463-525)>를 모량(牟梁)에서 낳았다.

 

기이한 새가 남쪽 하늘에서 산실로 날아와 지저귐이 있었다.

 

이 <연제>가 신라 23대 법흥왕 <모진>의 어머니이다.

 

 

 

七月 大閱軍馬 于北川

悅凰生 毗己子大悅

惠密生 子翁文

 

7월, 북천(北川)에서 군마를 크게 사열하였다.

 

<열황悅凰>이 <비기毗己>의 아들 <대열大悅>을 낳았다.

 

<혜밀惠密>이 아들 <옹문翁文>을 낳았다.

 

 

 

八月 寸己生 子富民 五壽與女宝壽 入桃山

扶余使眞同 來獻雪花馬 雌二雄一 命畜御廐

 

8월, <촌기寸己>가 아들 <부민富民>을 낳았다.

 

<오수五壽>와 딸 <보수宝壽>가 <도산桃山>으로 들어갔다.

 

부여가 사신 <진동眞同>을 보내 설화마(雪花馬) 암놈 2마리와 숫놈 1마리를 보내와서

어구(御廐)에서 기르도록 명 하였다.

 

 

 

九月 上宮生 俊明公主

 

9월 상궁{파호}이 <준명俊明>공주를 낳았다.

 

 

 

十二月 以齒君爲太子妃

燦凰生翡凰 乃比太女也

 

12월, <치군齒君>을 태자비(妃)로 하였다.

 

<찬황燦凰>이 <비황翡凰>을 낳았는데 <비태比太>의 딸이다.

 

 

 

 

 

 

자비왕 7년(464) 목용(木龍) 甲辰)

 

 

正月 伊飡寵德卒 年六十七 基臨王子奈己之子也

以母微無骨 不得仕 從太王爲馬奴

入麗軍有功 太王卽位 賜骨品 以王女妻之 生德智 乃以其母爲娘主

時人榮之 公敏捷 有勇力 臨大事能決 王惜之 以角干禮葬之

以山近爲兵官伊飡 馬美爲骨門伊飡 多甘爲護城伊飡

 

정월, 이찬 <총덕寵德(398-464)>이 죽었다. 나이 67세였다.

 

<기림基臨>왕의 아들 <내기奈己>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미천하여 골품이 없어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태왕의 마노(馬奴)가 되었다.

 

고구려군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

 

태왕이 즉위하여 왕의 딸을 처로 하여 골품을 주었다.

 

<덕지德智>를 낳으니 그 어머니를 랑주(娘主)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공은 민첩하고 용감하였으며 큰일을 당하면 능히 해결하였다. 

 

왕이 공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각간의 예로서 장례하였다.

 

<산근山近>을 병관이찬으로 <마미 馬美>를 골문이찬으로

<다감多甘>을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덕지>는 <총덕>과 <황아>의 아들로 440년생이다.

 

 

 

三月 燕凰生 治水子納水

以園君爲太子小妃

山近妻畏凰生 烏含女畏含

 

3월, <연황燕凰>이 <치수治水>의 아들 <납수納水>를 낳았다.

 

<원군園君>을 태자 소비(小妃)로 삼았다.

 

<산근山近>의 처 <외황畏凰>이 <오함烏含>의 딸 <외함畏含>을 낳았다.

 

 

 

五月 王妹尹己生 車宿子尹生

 

5월, 왕의 누이 <윤기尹己>가 <거숙車宿>의 아들 <윤생尹生>을 낳았다.

 

 

 

七月 首里生 宝器女首器

以田君爲下宮 出沙梁 于外

 

7월, <수리首里>가 <보기宝器>의 딸 <수기首器>를 낳았다.

 

<전군田君>을 하궁(下宮)으로 삼고 <사량沙梁>을 궁 밖으로 내보냈다.

 

 

 

十月 美梁生 智度路子順都 于鳥生家 諱之

遣使扶余 求靈藥及眞經

好梁生 王女孝良

 

10월, <미량美梁>이 <지도로智度路>의 아들 <순도順都>를

<조생鳥生>의 집에서 낳은 것을 꺼려서 숨겼다.

 

<지도로>는 <조생>의 아들이다.

 

부여에 사신을 보내어 영약(靈藥)과 진경(眞經)을 구하였다.

 

<호량好梁>이 왕의 딸 <효량孝良>을 낳았다.

 

 

 

十二月 大雪 王滯雪 于骨火

耐衰生 子發治

 

12월, 눈이 많이 내렸다.

 

왕이 눈으로 막혀 골화(骨火)에 체류하였다.

 

<내쇠>가 아들 <발치>를 낳았다.

 

 

 

 

 

 

자비왕 8년(465) 청사(靑蛇) 乙巳

 

 

以王妹鳩凰爲暖宮

 

왕의 누이 <구황鳩凰>을 난궁(暖宮)으로 삼았다.

 

 

二月 燦凰生 比太女翠凰

2월, <찬황燦凰>이 <비태比太>의 딸 <취황翠凰>을 낳았다.

 

 

 

四月 大水 山崩十七處 人畜多傷

 

4월, 홍수가 나서 산이 붕괴되어 17곳에 사람과 가축이 많이 상하였다.

 

 

 

五月 沙伐郡蝗

加耶夫君孝國沒 以誠國爲繼夫

牟梁生 登欣女海梁

悅凰生 毗己子太悅

 

5월, 사벌군(沙伐郡)에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가야 부군(夫君) <효국孝國>이 죽어 <성국誠國>을 계부(繼夫)로 삼았다.

 

<모량牟梁>이 <등흔登欣>의 딸 <해량海梁>을 낳았다.

 

<열황悅凰>이 <비기毗己>의 아들 <태열太悅>을 낳았다.

 

 

 

六月 王巡西路 視軍

成梁生 伐智女伐梁

扶余嗣文洲妻解氏生 子壬乞 宴于解氏家

 

6월, 왕이 서로(西路)로 순행하여 군(軍)을 시찰하였다.

 

<성량成梁>이 <벌지伐智>의 딸 <벌량伐梁>을 낳았다.


부여의 후계자 <문주文洲>의 처 <해씨解氏>가 아들 <임걸壬乞>{삼근왕}을 낳아,

<해씨解氏>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문주(해씨) - 임걸(465-479) 백제 27대 삼근왕 재위 477-478

 

 

 

七月 五壽生 比太女洪壽

 

7월, <오수五壽>가 <비태比太>의 딸 <홍수洪壽>를 낳았다.

 

 

 

九月 祭穀神

沙梁生 烏含子哲夫

 

9월,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사량沙梁>이 <오함烏含>의 아들 <철부哲夫>를 낳았다.

 

 

 

 

 

 

자비왕 9년(466) 화마(火馬) 丙午

 

 

正月 田君生 王女田良

 

정월, <전군田君>이 왕의 딸 <전량田良>을 낳았다.

 

 

三月 齒君生 太子子阿亥

 

3월, <치군齒君>이 태자의 아들 <아해阿亥>를 낳았다.

 

 

 

四月 太公好淵卒 年七十 公保反后私子也 未詳其父 或曰舍人沁也

公好神仙医藥 一生不言人是非 太王以爲國宝 王亦尊事之 乃以實相公禮葬之

以王子末厚爲日仙 行明

以比太爲伊飡 習宝爲兵官匝判 白欣爲骨門匝判 富理爲神官匝判 宝信爲護城匝判

 

4월, 태공(太公) <호연好淵(397-466)>이 죽었다. 나이 70세였다.

 

공은 <보반保反>后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는 상세하지 않다. 

 

혹은 사인(舍人) <심沁>이라고 한다.

 

공은 신선과 의약을 좋아하고 일생동안 사람들과 시비가 없었다.

 

태왕이 국보(國宝)로 삼았다.

 

왕도 역시 그를 존경하고 섬겨서 <실상實相>공의 예로 장례하였다.

 

왕자 <말후末厚>를 일선(日仙)으로 삼아 행명(行明)하였다.

 

<비태比太>를 이찬으로 <습보習宝>를 병관잡판으로 <백흔白欣>을 골문잡판으로

<부리富理>를 신관잡판으로 <보신宝信>을 호성잡판으로 삼았다. 

 

 

 

六月 雪花馬産二牝 于御廐 命司廐 祭馬神

 

6월, 설화마(雪花馬)가 어구(御廐)에서 암놈 2마리를 낳았다.

 

사구(司廐)에게 명하여 마신(馬神)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九月 品稼 于南郊

以金官長門公主爲新宮夫人

以章伊爲上仙 敎骨門子女

 

9월, 남교(南郊)에서 추수를 품평하였다.

 

금관(金官)의 <장문長門>공주를 신궁(新宮) 부인으로 삼았다.

 

<장이章伊>를 상선(上仙)으로 삼고 골문의 자녀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十月 懶凰生 智度路女厚凰 懶凰者 王妹也 其母前上宮攝凰也

初爲太子宮人 至是 通于智度路 而生 有瑞氣滿室 人皆異之

 

10월, <라황懶凰>이 <지도로智度路>의 딸 <후황厚凰>을 낳았다.

 

<라황懶凰>은 왕의 여동생이다.

 

어머니는 전(前) 상궁 <섭황攝凰>이다.

 

처음에 태자 궁인이 되었다가 지금에 이르러 <지도로智度路>와 통정하여 딸을 낳으니

산실에 서기(瑞氣)가 있어 모든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 자비왕 53세, 태자 비처{소지왕} 31세, 지도로{지증왕} 30세,

라황 22세,  황 41세이다. 

 

눌지(아로) - 자비

눌지(섭황) - 라황

 

라황은 자비보다 31살 어린 이복 동생이고

섭황은 이복동생 라황의 어머니인 동시에 자비의  상궁으로 자비보다 12살 어리다.

 

이 <지도로.의 딸 <후황>이 비처{소지왕}의 상궁이 되어

21대 소지왕 <비처>를 이어 <지도로>가 왕위에 오른다.

  

 

 

十一月 以王妹寵凰 爲馬美妻

 

11월, 왕의 여동생 <총황寵凰>을 <마미馬美>의 처로 하였다.

 

이때 <마미> 59세, <총황> 35세이다.

 

 

 

 

 

자비왕 10년(467) 적양(赤羊) 丁未

 

 

二月 烏含使加耶 以其妹素衣妻之

竿凰生 子末己

 

2월, <오함烏含>을 가야에 보내어 그의 여동생 <소의素衣>를 처로 하였다.

 

도광(오사지) - 오함(428-?)

도광(섬신) - 소의(452-?)

 

<오함>은 <자비>의 동생인 <오사지>의 아들로 <소의>보다 24살 많은 복 오빠이다.

 

<간황竿凰>이 아들 <말기末己>를 낳았다.

 

 

 

三月 行大祭 于陵門 以大宮爲北吐只宮

命海干 修理戰艦三百艘

耐衰生 女發尾

 

3월, 릉문(陵門)에서 대제를 지내고 대궁(大宮)을 북토지궁(北吐只宮)으로 하였다. 

 

해간(海干)에게 전함 3백척을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내쇠耐衰>가 딸 <발미發尾>를 낳았다.

 

 

 

五月 美梁生 王女妙梁

以王女月凰 爲太子小妃

 

5월, <미량美梁>이 왕의 딸 <묘량妙梁>을 낳았다.

 

왕의 딸 <월황月凰>을 태자 소비(小妃)로 삼았다.

 

 

 

九月 天赤大星 自北流東南 王命中外仙巫 上禱

舒弗邯靑淵卒 年六十四 公實聖王子也

保反后寡 而入實聖後宮 而生 故於太王 實爲同母弟也

沈重 有大度 能盡其職 雖然好色無度 多私後宮骨女 及無品之美者

太王以爲愛弟 而不禁 王亦尊之 以叔父 艾女靑侍 至其卒 不撤于前 王以太公禮葬之

 

9월, 하늘에 붉은 빛이 돌았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으로 흘렀다.

 

왕이 나라 안팎 선무(仙巫)에게 명하여 하늘에 기도하라고 하였다. 

 

서불감 <청연靑淵>이 죽었다. 나이 64세였다.

 

공은 <실성實聖>왕의 아들이다.

 

<보반保反>后가 과부라서 <실성實聖>의 후궁으로 들어와 낳았으므로

태왕과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다.

 

침중하며 도량이 크고 능히 그 맡은 일을 다 하였으나

호색 무도하여 후궁과 골녀, 골품이 없는 미인에 이르기까지 사신이 많았다.

 

태왕이 동생을 사랑하여 금하지 아니하니 왕도 역시 그를 숙부로 존중하였다.

 

쉰살 시녀들이 죽을 때까지 앞에 있어 치우지 못하엿다.

 

왕이 태공의 예로 장사 지냈다.

 

 

 

十二月 賜穀百結先生 其人安貧樂道 常着百結衣

其妻聞 隣里舂粟 而歎之 乃鼓琴以作杵聲 而慰之 事聞乃褒

 

12월, 곡식을 백결선생에게 내렸다.

 

백결선생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항상 누더기 옷을 입고 지냈다.

 

그 처가 이웃 마을의 방아 찧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니 

거문고로 방아 소리를 내어 그 처를 위로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포상을 내렸다.

 

백결선생 <문량(414-480?)>은 <제상(363-422)>의 아들이다.

 

 

 

 

 

 

 

자비왕 11년(468) 황원(黃猿) 戊申

 

 

正月 以山近爲舒弗邯 期宝爲兵官伊飡 多甘爲神官伊飡 比太爲護城伊飡

 

정월, <산근山近>을 서불감으로 <기보期宝>를 병관이찬으로

<다감多甘>을 신관이찬으로 <비태比太>를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二月 麗巨連率末曷兵一萬 襲我悉直城 我軍寡 不能敵 皆聚海上 末曷大掠 城中婦女財貨

 

2월, 고구려 <거련>이 말갈병 1만을 이끌고 우리의 실직성(悉直城)을 래습하였다.

 

아군의 수가 모자라고 적응 대항 할 수 없어 모두 해상에 모였다.

 

말갈은 성 안에서 부녀자와 재화를 크게 약탈하였다. 

 

 

 

三月 懶凰生 智度路子厚都

王幸太子妃齒君 命入常侍

 

3월, <라황懶凰>이 <지도로智度路>의 아들 <후도厚都>를 낳았다.

 

왕이 태자비 <치군齒君>을 행(幸)하고 항상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四月 王責己 減饌

太子移御掖宮 大修東宮

 

4월, 왕이 자책하여 반찬을 줄였다.

 

태자가 액궁(掖宮)으로 이어(移御)하고 동궁(東宮)을 크게 수리하였다.

 

 

 

五月 期宝率狗尾軍三百 襲破末曷兵 習宝等引大軍 繼進之

斬末曷帥胡同 于城下 我軍乘勝追賊 大破之 獲其馬三百頭 印五顆

巨連子奕中 流矢而死

太子通 權妻竹室

 

5월, <보기期宝>가 구미군(狗尾軍) 3백을 이끌고 말갈병을 래습하여 쳐부수니

<습보習宝> 등이 대군을 인솔하여 계속하여 진격해 왔다.

 

말갈장수 <호동胡同>을 성 아래에서 목을 베고

아군이 승승하여 적을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어

말 3백마리와 인(印) 5개를 획득하였다.

 

<거련巨連>의 아들 <혁중奕中>이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태자가 권처(權妻) <죽실竹室>을 통정하였다.

 

 

 

七月 王大宴群臣 于南桃 賞期宝以下功臣十七人

悅凰生 毗己女知悅

以宮人燦凰 妻智度路

 

7월, 왕이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남도(南桃)에서 열고

<기보期宝> 이하 공이 있는 신하 17인에게 상를 주엇다.

 

<열황悅凰>이 <비기毗己>의 딸 <지열知悅>을 낳았다.

 

궁인 <찬황燦凰>을 <지도로智度路>의 처로 하였다.

 

 

 

八月 成梁生 王女小梁

王宴新宮公主 起舞 以其娠也

阿羅女君八衣 以小裊人爲繼夫 小裊人有權 奇善理衆 且以道 得寵于八衣

衣夫草海怒 以衆叛 小裊人與八衣 登城揮衆 而迎擊草海 破之 海奔月奈

八衣乃以小裊人爲夫 曰 吾夫乃保我 金柱也 國中上下 事之如我可也

小裊人乃奉事于我 稱臣納貢

朝廷有欲 不許 王曰 付者近之可也乃拜小裊人爲阿羅夫婿軍主

麗巨連奪其少婦贊加 生女多雲 爲小后

 

8월, <성량>이 왕의 딸 <소량>을 낳았다.

 

왕이 신궁(新宮) 공주기 임신을 하여 잔치를 열고 공주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아라여군(阿羅女君) <팔의八衣>가 <소뇨인小裊人>을 계부(繼夫)로  삼았다.

 

<소뇨인小裊人>은 기묘한 꾀가 있고, 대중을 다스림에 뛰어났으며

또한 아첨하는 재주로 <팔의八衣>의 총애를 얻었다.

 

<팔의八衣>의 남편 <초해草海>가 노하여 무리로 배반하니,

<소뇨인小裊人>이 <팔의>와 성으로 올라가 무리를 지휘하였다.

 

<초해草海>를 맞이하여 격파하니 <초해草海>가 월내(月奈)로 도망쳤다.

 

<팔의八衣>가 이에 <소뇨인小裊人>을 남편으로 삼으며 말하기를

 

“나의 남편이 나를 지켜냈으니, 나의 쇠기둥이다.

나라의 상하가 나를 섬기듯 하여야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소뇨인小裊人>이 이에 우리를 받들어 섬기고자 하여 칭신하여

조공을 바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자 하는 바가 있었으나,

 

왕이 말하기를

 

“붙고자 하는 자는 가까이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뇨인小裊人>을 아라(阿羅)의 지아비와 군주(軍主)로 삼았다.

 

고구려왕 <거련>이 그 작은 부인 <찬가贊加>를 빼앗아 딸 <다운多雲>을 낳고

소후(小后)로 삼았다.  

 

 

 

九月 徵阿瑟羅人 年十五以上 築城於泥河

 

9월, 아슬라(阿瑟羅)인 15세이상을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十月 園君生 太子女園兒

以伐智爲悉直軍主

 

10월, <원군園君>이 태자의 딸 <원아園兒>를 낳았다.

 

<벌지伐智>를 실직군주로 삼았다.

 

 

 

十一月 召州干五人 賜酒 褒其政

 

11월, 주칸(州干) 5인을 불러 술을 내리고, 그 정사(政事)를 포상하였다.

 

 

 

十二月 王謁北吐只宮

山近享 王及群臣

覃氏請 以其女團氏爲大藥主 許之

 

12월, 왕이 북토지궁(北吐只宮)을 알현하였다.

 

<산근山近>이 왕 및 군신과 함께 향을 피워 제를 올렸다. 

 

<담씨覃氏>가 그녀의 딸 <단씨團氏>를 대약주(大藥主)로 삼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자비왕 12년(469) 토계(土鷄) 己酉

 

 

正月 定京都坊里 名之

沙梁生 王子沙世

 

정월, 경도(京都)의 부락을 정하여 그것을 이름하였다.

 

<사량沙梁>이 왕의 아들 <사세沙世>를 낳았다.

 

 

 

二月 太子妃齒君 生王子克齒

 

2월, 태자비 <치군齒君>이 왕의 아들 <극치克齒>를 낳았다.

 

 

 

四月 國西大水 漂毁民戶

八衣生 小裊人子八人

燦凰生 智度路子宣登

長門生 王子朱蒦 以懶凰妻德智

耐衰生 發登女發胡

 

4월,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 가고 파손되었다.

 

<팔의八衣>가 <소뇨인小裊人>의 아들 <팔인八人>을 낳았다.

 

<찬황燦凰>이 <지도로智度路>의 아들 <선등宣登>을 낳았다.

 

<장문長門>이 왕자 <주호朱>을 낳았다. 

 

<라황懶凰>을 <덕지德智>의 처로 하였다.

 

<내쇠耐衰>가 <발등發登>의 딸 <발호發胡>를 낳았다.

 

 

 

六月 牟梁生 女牟泄

 

6월, <모량牟梁>이 딸 <모설牟泄>을 낳았다. 

 

 

 

七月 以王女俊朔 妻習棠

王巡撫 經水州郡

 

7월, 왕의 딸 <준삭俊朔>을 <습당習棠>의 처로 하였다.

 

왕이 주군(州郡)의 홍수를 살피고 순무(巡撫)하였다.

 

 

 

九月 命章伊 敎州郡俊才 三元眞經

 

9월, <장이章伊>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준재(俊才)들에게

삼원진경(三元眞經)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자비왕 13년(470) 금구(金狗) 庚戌

 

二月 大風 漁船多漂

以王女眉闌 妻王子毗羅

 

2월, 바람이 크게 불어 어선이 많이 떠내려갔다.

왕의 딸 <미란眉闌>을 왕자 <비라毗羅>의 처로 하였다.

 

 

四月 鳩凰生 王女赤皇

麗僧道琳誘扶余慶司 大起土木

 

4월, <구황鳩凰>이 왕의 딸 <적황赤皇>을 낳았다.

 

고구려의 승(僧) <도림道琳>이

부여 <경사慶司>를 유혹하여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五月 三年山城成

八衣以小裊人爲君 許主阿羅

 

5월, 삼년산성을 축성하였다.

 

<팔의八衣>가 <소뇨인小裊人>을 군(君)으로 삼으니 아라(阿羅)의 主로 허락하였다.

 

 

 

六月 多甘卒 年六十八 公少以美好 受太王寵愛

其母訖解王庶女塔雲公主也 父乃無骨仙徒也 公主私好 而通之也

太王乃以長女烏士只妻之 賜其骨品 公勤敏知大體 臨戰能制 勝累 立奇功 國人惜之

銍知以其女野喜 妻策色

比太爲神官伊飡 習宝爲護城伊飡 白欣兵官匝判 富理骨門匝判 宝信神官匝判

烏含護城匝判 章伊眞經匝判 思德內宮匝判 靑市爲護城將軍

懶凰生 德智女沈凰

 

6월, <다감多甘(403-470)>이 죽었다. 나이 68세였다.

 

공은 어렸을 때 얼굴이 고와서 태왕의 총애를 받았다.

 

공의 어머니는 <흘해訖解>왕의 서녀 <탑운塔雲>공주이다.

 

아버지는 골품이 없는 선도(徒也)이다.

 

공주가 사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통정하였다.

 

태왕이 장녀 <오사지烏士只>를 그의 처로 하여 골품을 내려주었다.

 

공은 근면하고 민첩하였으며 대체(大體)를 알았다.

 

전쟁을 잘 치루어 여러번 승리하여 공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애석하게 여겼다.

 

<질지銍知>가 그의 딸 <야희野喜>를 <책색策色>의 처로 하였다.

 

<비태比太>를 신관이찬으로 <습보習宝>를 호성이찬으로

<백흔白欣>을 병관잡판으로 <부리富理>를 골문잡판으로

<보신宝信>을 신관잡판으로 <오함烏含>을 호성잡판으로

<장이章伊>를 진경잡판으로 <사덕思德>을 내궁잡판으로

<청시靑市>를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라황懶凰>이 <덕지德智>의 딸 <침황沈凰>을 낳았다. 

 

 

 

十月 以王女俊宜 妻智弗路 行吉 于鮑祠

 

10월, 왕의 딸 <준의俊宜>를 <지불로智弗路>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자비왕 14년(471) 백시(白豕)辛亥

 

 

二月 芼老城告竣

 

2월, 모로성(芼老城)이 준공되었다.

 

 

 

三月 京都地裂 廣衷二十丈 濁水湧出

美梁生 乃宿子勿力

 

3월 경도(京都)에 지진이 일어나 갈라진 틈이 20丈이고 혼탁한 물이 솟아 올랐다.

 

<미량美梁>이 <내숙乃宿>의 아들 <물력勿力>을 낳았다. 

 

 

 

四月 王與俊朔 幸聖母祠

 

4월, 왕과 <준삭俊朔>이 성모사(聖母祠)에 행차하였다.

 

 

 

六月 牟良生牟沈

成梁生 靑市女靑言

 

6월, <모량牟良>이 <모침牟沈>을 낳았다.

 

<성량成梁>이 <청시靑市>의 딸 <청언靑言>을 낳았다.

 

 

 

十月 大疫

悅凰生 毗己女呑悅 其臣賓薛 通而生也

命擇奈麻以上子弟 能堪醫藥卜筮者 使屬神官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열황悅凰>이 <비기毗己>의 딸 <탄열呑悅>을 낳았는데

<비기毗己>의 신하 <빈설賓薛>과 사통하여 낳은 것이다.

 

나마(奈麻) 이상의 자제 중에 의약과 복서에 뛰어난 자를 선택하여

신관(神官)에 소속하도록 명하였다. 

 

 

 

十二月 加耶太子讚明 入朝 爲築新舘 以待之

 

12월, 가야태자 <찬명讚明>이 입조하여 신관(新舘)을 지어 그곳에 머물게하였다.

 

 

 

 

 

 

 

자비왕 15년(472)흑서(黑鼠) 壬子

 


正月 以王妹靑華 妻讚明 行吉 于鮑祠

 

정월, 왕의 누이 <청화靑華>를 <찬명讚明>의 처로하여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三月 園君生 太子女旱知

八衣生 女八海

 

3월, <원군園君>이 태자의 딸 <한지旱知>를 낳았다.

 

<팔의八衣>가 딸 <팔해八海>를 낳았다.

 

 

 

五月 金官嗣善通 以邦媛爲妻 善通者 白欣妹通里生也

爲人好田獵騎馳 不喜女色 銍知愛之

先是 善通有臣檟者 乃金相家臣也 金相者 坐知之外孫也

有女邦媛 嬌而有色 相乃囑于檟 曰 我女入宮 汝亦可貴也

檟以將雨 誘善通 以獵于金相之野 遇雨而入 金相乃以邦媛侍之 極盡其

善通一染深入 朝暮出遊 通里知之 恐有虞 而迎入宮中 至是命爲妻

 

5월, 금관(金官)의 후계자 <선통善通>이 <방원邦媛>을 처로 삼았다.

 

<선통善通>은 <백흔白欣>의 여동생 <통리通里>가 낳았다. 

 

밀을 타고 달리며 사냥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

<질지銍知>가 그를 사랑하였다.

 

이에 앞서 <선통善通>에게 신하<가檟>라는 자가 있었는데

<금상金相>의 가신이 되었다.

 

<금상金相>은 <좌지坐知>의 외손이다.

 

딸 <방원邦媛>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미색이어서

<금상金相>이 <가檟>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 나의 딸은 궁에 들어가니 너 역시 귀하게 될것 이다."라고 하였다.

 

<가檟>가 비기 올려고하니 <선통善通>을 꾀었다.

 

<금상金相>의 교외에서 사냥할 때 비를 만나 들어가 

<금상金相>이 <가檟>로 하여금 <방원邦媛>을 극진으로 모시게 하였다.

 

<선통善通>이 야밤에 들어가 한번에 더렵혔다.

 

아침 저녁으로 놀러 나가니 <통리通里>가 그것을 알았다.

 

두려움과 걱정이 있어 궁중으로 들어가기를 바라 이제와서 처로 삼도록 명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질지왕 기사

 

질지왕(銍知王) :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함.

원가(元嘉) 28년(451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10()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A.D.492) 10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478-521) 금관가야 9대왕 재위 492-520>를 낳음.

 

 

 

七月 燦凰生 智度路女宣世

長門生 王女長善

 

7월, <찬황燦凰>이 <지도로智度路>의 딸 <선세宣世>를 낳았다.

 

<장문長門>이 왕의 딸 <장선長善>을 낳았다.

 

 

 

九月 穀大登 王宴群臣 于南桃

 

9월, 곡식이 크게 여물었다.

 

왕이 남도(南桃)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十月 品馬 于北川 月奈君世萬立

 

10월, 북천(北川)에서 말을 품평하였다.

 

월내군(月奈君) <세만世萬>이 섰다.

 

 

 

十二月 末曷獻銀㺚皮及赤花馬 蒼鷹十頭

 

12월, 말갈이 은달피(銀㺚皮)와 적화마(赤花馬), 흰매 10마리를 바쳤다.

 

 

 

 

 

자비왕 16년(473) 수우(水牛) 癸丑

 

 

正月 以阿飡伐智爲左將軍 看西路 級飡德智爲右將軍 看水路

月仙竿凰卒 年四十五 以竿山爲月仙 行明

 

정월, 아찬 <벌지伐智>를 좌장군으로 삼고 서로(西路)를 살피도록 하고

급찬 <덕지德智>를 우장군으로 삼아 수로(水路)를 살피도록 하였다.

 

월선(月仙) <간황竿凰>이 죽었다. 나이 45세였다.

 

<간산竿山>을 월선(月仙)으로 삼고 행명(行明)하였다.

 

 

 

二月 懶凰生 德智女桂凰

 

2월, <라황懶凰>이 <덕지德智>의 딸 <계황桂凰>을 낳았다. 

 

 

 

三月 美梁生 乃宿女玉梁

 

3월, <미량美梁>이 <내숙乃宿>의 딸 <옥량玉梁>을 낳았다. 

 

 

 

四月 祭蠶神 月仙竿山愛舞兒妙心 勸末厚 買爲仙徒

 

4월, 잠신(蠶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월선(月仙) <간산竿山>이 무아(舞兒) <묘심妙心(450?-488)>을 사랑하여

<말후末厚>에게 선도(仙徒)로 받아주기를 권하였다.

 

<간산竿山>은 <간황竿凰(429-473)>의 딸로 445년경에 태어났다.

이 때 <간산> 29세? <묘심> 25세?이다.

 

<조생>의 딸 <선혜善兮(459-518)>는 <비처(436-500, 21대 소지왕 재위 479-499>의 상궁인데 소지왕 10년(488년)에 <묘심>과 모의하여 반역을 꾀하다

<묘심>은 처형된다.

 

 

 

 

五月 王女俊朔 生習棠子棠朔

 

5월, 왕의 딸 <준삭俊朔>이 <습당習棠>의 아들 <당삭棠朔>을 낳았다. 

 

 

 

六月 羅德生 伐智女羅市

 

6월, <라덕羅德>이 <벌지伐智>의 딸 <라시羅市>를 낳았다. 

 

 

 

七月 葺明活城

 

7월, 명활성(明活城) 지붕을 이었다. 

 

 

 

九月 牟梁生 女牟淵

 

9월, <모량牟梁>이 딸 <모연牟淵>을 낳았다. 

 

 

 

十月 許靑華讚明 歸加耶

素衣生 烏含子水甘

 

10월, <청화靑華>와 <찬명贊明>이 가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소의素衣>가 <오함烏含>의 아들 <수감水甘>을 낳았다.

 

 

 

十二月 行眞經大會

 

12월, 진경대회(眞經大會)를 열었다.

 

 

 

 

 

 

 

자비왕 17년(474) 목호(木虎) 甲寅

 

 

正月 宴群臣 于上宮 使三宮 行酒

 

정월, 상궁(上宮)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열고 삼궁(三宮)에 술을 보냈다.

 

 

 

二月 行大祭 于陵門

出忠娶慶司女沙氏 乃周氏生也

 

2월, 릉문에서 대제를 지냈다.

 

<출충出忠>이 <경사慶司>의 딸 <사씨沙氏>에게 장가 들었다.

 

<사씨沙氏>는 <주씨周氏>가 낳았다.

 

자비(임충) - 출충(457- )

경사(주씨) - 사씨(458?- )

 

 

 

三月 王巡之一善 而還

眉闌生 毗羅嬖臣興燕女眉燕

 

3월, 왕이 일선주를 순행하고 돌아왔다.

 

<미란眉闌(457- )>이 <비라毗羅(451-505)>의 폐신(嬖臣) <흥연興燕(455- )>의 딸

<미연眉燕>을 낳았다.

 

 

 

五月 命築一牟沙尸廣石沓達仇禮等 諸城

 

5월, 일모(一牟), 사시(沙尸), 광석(廣石), 답달(沓達), 구례(仇禮) 등에

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六月 王女俊宜生 智弗路子智淸

 

6월, 왕의 딸 <준의俊宜>가 <지불로智弗路>의 아들 <지청智淸>을 낳았다. 

 

 

 

七月 麗主巨連 引兵三萬南下 攻扶余甚急 扶余君慶司 使其太子文洲 請救於我 曰

脣亡齒寒 願大王察之

王下其議 于朝廷 期宝曰 巨連之狼心 不可不制也

乃命比太 引西北路軍一萬 往救之

巨連與贊加婢方藏 幷騎而行 時稱婢將軍

以宝信女宝留妻文洲 初文洲入朝 館于宝信家 與宝留悅之 乃許以妻之 約以永修姻好

 

7월, 고구려왕 <거련巨連>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부여를 급히 공격하였다.

 

부여왕 <경사慶司>가  태자 <문주文洲>를 보내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며 말하기를

 

" 순망치한(脣亡齒寒)이오니 원컨데 대왕은 이를 통찰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신하와 조정에서 의논하니 <기보期宝>가 말하기를

 

"<거련巨連>의 이리같은 마음은 막기가 불가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비태比太>에게 서북로군 1만을 이끌고 가서 구하라고 명하였다.

 

<거련巨連>과 <찬가贊加>婢 <방장方藏>이 함께 말을 타고 왔다.

 

그 당시 <찬가贊加>婢 <방장方藏>을 비장군(婢將軍)이라고 불렀다.

 

<보신宝信>의 딸 <보류宝留>는 <문주文洲>의 처인데

처음에 <문주文洲>가 입조하여 <보신宝信>의 집에 머물러 

<보류宝留>가 <문주文洲>를 좋아하여 처로 허락하니

혼인하여 좋아함을 영원히 지킬것을 약속하였다. 

 

미해(보미) - 보신(421-485)(황아) - 보류(453-500)(문주442-477)

 

 

 

八月 比太軍 于一牟路塞 不能輕進 文洲與宝留 入比太軍 行令于扶余州郡

兵官伊宗 請從文州 許之

文洲 以大豆城主解仇爲兵官佐平 使之指揮軍事

麗攻扶余北城七日 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懼 人心洶洶

侍衛之臣 各自逃生麗君 慶司歎 曰 恨 不聽 須馬之言也

乃與近臣及妃子等七人 夜出北門 而逃

 

8월, 비태군(比太軍)이 일모로(一牟路)를 봉쇄하니 쉽게 진격하지 못하여

<문주文洲>와 <보류宝留>가 부여 주군(州郡)에 령을 내리고 비태군으로 들어왔다.

 

병관 <이종伊宗(454-524)>이 <문주文州>를 따를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문주文州>가 대두성주(大豆城主)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군사를 지휘토록 하였다.

 

고구려가 부여 북성을 7일 동안 공격하여 북성을 정벌하였다.

 

남성으로 이동하여 공격하니 성안이 위태로와 두려움에 떨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시위하는 신하들이 각자 살고자 고구려왕에게 도주하니

 

<경사慶司>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 <수마須馬>의 말을 듣지 않음이 한스럽구나!" 라고 하였다.

 

이에 근신과 왕비 자녀 등 7인과 함께 야밤에 북문으로 나가 도주하였다

 

 

 

九月 再曾桀婁追王 于漢山之下 得之 使下馬 拜己而向 而三唾之 曰 汝知汝罪乎

慶司曰 知之

桀婁乃數之 曰 汝聽奸臣之言 而不恤百姓 奪我妻女 以養色慾罪 一也

奪萬年之妻 二也 惑信道琳 浪起土木 三也 不奉上朝 而自通中國 四也

與鷄林共謀 以侵邊城 五也

乃縛 送于阿且城下 弑之

妃子燕氏苩氏 及宗女三人 皆爲齊 于桀婁等 所淫

文洲聞之 痛哭 遂立南方 召扶余諸臣 而議退敵之策

邦媛生 善通女元通

末厚以妙心獻鳥生宮

 

9월, <재증걸루再曾桀婁>가 한산(漢山)아래에서 왕을 추격하여 잡았다.

 

말에서 내려 자기를 향하여 절하게 하고 3번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 너의 죄를 알겠나?"

 

<경사慶司>가 말하기를

 

"알고 있다."

 

<걸루桀婁>가 그 수를 세아리며 말하기를

 

" 너는 간신의 말을 듣고 백성을 돌보지 않았으며

내 처를 빼앗아 너의 여자로 하여 색욕을 채웠으니 첫번 째 죄이다.

 

<만년萬年>의 처를 빼앗은 것이 두번 째이다.

 

<도림道琳>을 혹신(惑信)하여 토목을 일으켜 낭비한 것이 세번 째이다.

 

고구려를 섬기지 않고 스스로 중국과 통하였으니 네번 째이다.

 

계림과 공모하여 변방의 성을 침략하였으니 다섯번 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어 처형하였다.

 

왕비와 자식 <연씨燕氏> <백씨苩氏> 및 종녀(宗女) 3인 모두를

옷자락을 가지런하게하여 <걸루桀婁>등에게 주어 음란하게 하였다. 

 

<문주文洲>가 그것을 듣고 통곡하였다.

 

남방(南方)을 세워 부여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적을 물리칠 방도를 의논하였다.

 

<방원邦媛>이 <선통善通>의 딸 <원통元通>을 낳았다.

 

<말후末厚(433-487)>가 <묘심妙心>을 조생궁(鳥生宮)에 바쳤다.

 

 

 

十月 比太伐智 大破麗軍 于甘買之原

解仇燕信 亦破麗兵 于河南

迎宗臣宗女等 而南下 乃立都 于熊津

巨連知不可取 掠男女八千口 及京中財宝 而去

 

10월, <비태比太(416-481)>와 <벌지伐智(437-504)>가

고구려군을 감매원(于甘原)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해구解仇>와 <연신燕信>도 하남(河南)에서 역시 고구려군을 쳐부수었다.

 

종신(宗臣) 종녀(宗女) 등이 남하하여 맞아들여 웅진(熊津)에 도읍을 세웠다.

 

<거련巨連>은 빼앗지 못함을 알고 남녀 8천구 및 서울의 재보(財宝)를 약탈하여 갔다.

 

 

 

十一月 遣宝信 于熊津 吊慶司 人皆感泣

 

11월, <보신宝信>을 웅진에 보내어 <경사慶司>를 조문하였다.

 

사람들 모두가 감읍(感泣)하였다. 

 


 

十二月 賞比太等

燦凰以疾卒 以其女燧凰 妻智度路

火起金城西北 命兵官郁永鎭之 郁有鎭火術 人稱火眞君

 

12월, <비태比太> 등에게 상을 내렸다.

 

<찬황燦凰>이 질병으로 죽었다.

 

그 딸 <수황燧凰>을 <지도로智度路>의 처로 하였다.

 

금성 서북 쪽에서 불이 났다.

 

병관 <욱영郁永>에게 진압하라고 명하였다.

 

<욱유郁有>가 불을 끄니 사람들이 화진군(火眞君)이라 불렀다.

 


 

 

 

 

 

자비왕 18년(475) 청토(靑兎) 乙卯

 

 

正月 王移居 明活城

發登出獵而死 耐衰以其弟都 爲繼夫

 

정월, 왕이 거처를 명활성(明活城)으로 옮겼다.

 

<발등發登(432-475)>이 사냥을 나가 죽었다.

 

<내쇠耐衰>가 <발등發登>의 동생 <도都>를 계부로 삼았다.

 

 

 

二月 八衣生子八梟

毗惠私引寸牟 生女寸惠

山近卒 年七十一 乃太王庶子也 母曰山花 卽雲花公主私女也

善釼好仙 築室 于南山 鍊砂爲藥

王哀之 曰 我兄去矣乃以太公禮葬之 以公長子春山爲匝判

以期宝爲舒弗邯 比太爲兵官伊飡 習宝爲神官伊飡 白欣爲護城伊飡 富理爲伊飡

烏含爲兵官匝判 宝信爲大等匝判 章伊爲骨門匝判 塞文爲神官匝判 世德爲護城匝判

春山爲眞經匝判

長門生 王女丹門

扶余解仇等 收復漢山 斬桀婁 于熊津市

扶余使燕信 修葺大豆城 移漢北民戶

 

2월, <팔의八衣>가 아들 <팔효八梟>를 낳았다.

 

<비혜毗惠>가 사신 <촌모寸牟>의 딸 <촌혜寸惠>를 낳았다.

 

<산근山近(405-475)>이 죽었다. 나이 71세였다.

 

태왕의 서자(庶子)이다.

 

어머니는 <산화山花(380?-439)> 즉 <운화雲花(360?-419)>공주의 사녀(私女)이다.

 

칼을 잘 쓰고 선을 좋아하여 남산에 내실을 짓고 연사(鍊砂)를 약으로 썼다.  

 

왕이 애석해 하며 말하기를

 

" 내 형이 갔구나" 라고 말하며

 

태공의 예로 장례하고 공의 장자 <춘산春山>을 잡판으로 삼았다.

 

<기보期宝>를 서불감으로 <비태比太>를 병관이찬으로

<습보習宝>를 신관이찬으로 <백흔白欣>을 호성이찬으로

<부리富理>를 이찬으로 <오함烏含>을 병관잡판으로

<보신宝信>을 대등잡판으로 <장이章伊>를 골문잡판으로

<새문塞文>을 신관잡판으로 <세덕世德>을 호성잡판으로

<춘산春山>을 진경잡판으로 삼았다.

 

<장문長門>이 왕의 딸 <단문丹門>을 낳았다.

 

부여 <해구解仇> 등이 한산(漢山)을 수복하고 웅진 저자에서 <걸루桀婁>를 참하였다.

 

부여가 <연신燕信>을 보내어 대두성(大豆城)의 지붕을 이어 수리하고

한산 북쪽에 민호(民戶)를 옮기었다.

 

 

三月 銍知與邦媛 幸晏福寺

邦媛性淫蕩好貴 自入宮以來 盡百嬌以媎銍知 乃生元通 如晏福寺 而始相通

至時頗幸以爲禱兒 金官人歌之曰

所禱者 何非宮不知  雖宮不言 豈無人知 彼浮者雲 彼搖者䃽 相對

而言莫不知之 旣子之久父之

 

3월, <질지>와 <방원>이 안복사(晏福寺)에 행차하였다. 

 

<방원>은 성품이 음탕하고 귀한 것을 좋아하여 궁에 들어 온 이래 <질지>에게

여러가지 교태를 부려 <원통元通>을 낳고 안복사에 가서 처음으로 서로 통정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지나치게 통정하며 아이를 축수하니 금관인들이 이를 노래하기를

 

" 축수하는 바 무엇때문인지 궁은 알지 못한다.

비록 궁은 말이 없으니 어찌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저 떠도는 구름과 저 흔들리는 나무가지는 서로에게 말을 하나 알지 못하니

이미 자식의 장구함은 아비의 장구함이네."

 

 

 

四月 園君生 王子園帥

王以園君 爲豆乙宮

耽羅通文洲 洲喜以其使 爲恩率

 

4월. <원군園君>이 왕의 아들 <원수園帥>를 낳았다.

왕이 <원군>을 두을궁으로 삼았다.

탐라가 <문주>와 통하니 <문주>는 기꺼히 그 사신을 은솔로 삼았다.

 

 

六月 金官太子 善通卒 以河喜子嘉知 爲太子

 

6월, 금관태자 <선통>이 죽어 <하희>의 아들 <가지嘉知(458-486)>를 태자로 삼았다.

 

 

七月 文洲弟 昆支 來朝

以烏士只 寵臣 宝周 爲奈麻

先是 王卽位時 百官皆立泥中 骨門大舍 皆 負其幼主 以朝之 以功得 奈麻

時人譏以泥奈麻 至是 人以宝周 比 泥奈麻

 

7월, 문주의 동생 <곤지昆支(444-477)>가 입조하였다. 

 

<오사지烏士只>의 총신 <보주宝周>를 나마로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즉위할 때 백관이 모두 진흙 속에 서 있었는데

골문대사 모두가 그 어린 주인을 엎고 조회를 하여 나마의 직위를 득하여

당시 사람들이 진흙나마라고 나무랐다.

 

지금에 와서 사람들은 <보주>를 진흙나마에 비교했다.

 

 

비유(412-455)(觧須의 처) - 경사(429-475) 백제 25대 개로왕 재위 455-474

 

경사(飯豊皇女 440-483) - 사마(461-523) 29대 무령왕 재위 501-522

 

비유(주씨) - 문주(442-477) 26대왕 재위 475-476(해씨) - 임걸(465-479)

                                                                              27대 삼근왕 재위 477-478

비유(?) - 곤지(444-476)(眞鲜( -479) - 모대(466-501)

                                                       28대 동성왕 재위 479-500

 

<경사>와 <문주>, <곤지>는 이복형제이다.

삼근왕 <임걸>은 <문주>의 아들이고 동성왕 <모대>는 <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 <사마>는 개로왕의 아들이다.

 

 

九月 太子順北路 賜軍士征袍

 

9월, 태자가 북로를 순찰하여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十一月 行大祭于聖母祠

 

11월, 성모사에서 대제를 지냈다.

 

 

 

 

 

 

자비왕 19년(476) 화룡(火龍) 丙辰

 

 

正月 文州遣牟大 入朝 昆支子也

王美其皃 欲以王女妻之 俊朔以其夫老 不洽 欲嫁牟大

乃享牟大 于其家 而通之

俊朔之夫習棠怒 欲害之 牟大之臣 護之 而訴王 乃放習棠 于捺己

使牟大 館于俊朔之家 朔大喜 事牟大如夫 晝必同車 而行 夜必同帳 而宿

王笑謂牟大 曰 汝愛吾女 可以與之 而有子之女 故不得也

牟大曰 臣有君與夫 歸議 而迎之也王許之

 

정월, <문주文州(442-477)>가 <모대牟大(466-501)>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모대牟大>는 <곤지昆支(444-477)>의 아들이다.

 

왕은 <모대牟大>의 얼굴이 미모여서 왕의 딸을 <모대牟大>의 처로 하고자 하였다.

 

<준삭俊朔(454- )>이 늙은 남편과 화합하지 못하여

<모대牟大>에게 출가하고자 하였다.

 

<준삭俊朔>의 집에서 <모대牟大>를 접대하여 그와 통정하였다.

 

<준삭俊朔>의 남편 <습당習棠(427-490)>이 노하여 그를 해치고자하니

<모대牟大>의 신하가 그를 보호하였다. 

 

왕에게 고하여 <습당習棠>을 날기(捺己)로 내보냈다.

 

<모대牟大>를 <준삭俊朔>의 집에 머무르게하니 <준삭俊朔>이 크게 기뻐하였다.

 

<모대牟大>를 남편과 같이 섬기며 낮에는 반드시 같은 수레를 타고

밤에는 같은 휘장에서 잠을 잤다.

 

왕이 웃으며 <모대牟大>에게 말하기를

 

"너가 내 딸을 사랑하니 너에게 줌이 옳으나 아들이 있는 딸이라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대<牟大>가 말하기를

 

" 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돌아가 의논하여 맞아 들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이때 자비왕 63세, 문주왕 35세, <모대> 11세, <준삭> 23세, <습당> 50세이다.

 

자비왕은 <준삭>이 유부녀라 11살의 모대의 마음을 물은 것이다. 

 

 

 

二月 羅德生 伐智女羅別

燧皇生 女炳皇 而薨 命厚葬之

 

2월, <라덕羅德>이 <벌지伐智>의 딸 <라별羅別>을 낳았다.

 

<수황燧皇>이 딸 <병황炳皇>을 낳다가 죽어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三月 太子 以登欣女蓮帝 配智度路 行吉 于鮑祠

靑華生 讚明女靑巤 加耶遣使 獻方物 謝恩

 

3월, 태자가 <등흔登欣>의 딸 <연제蓮帝>를 <지도로智度路>의 배우자로 하여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때 <연제> 14세 <지도로> 40세이다.

 

<청화靑華>가 <찬명讚明>의 딸 <청렵靑巤>을 낳았다.

 

가야가 사신을 보내어 은혜에 감사하며 방물을 바쳤다.

 

 

 

四月 文洲以壬乞爲太子

美梁生 王子水梁

懶凰生 德智子常德

 

4월, <문주文洲>가 <임걸壬乞>을 태자로 삼았다.

 

<미량美梁>이 왕의 아들 <수량水梁>을 낳았다.

 

<라황懶凰>이 <덕지德智>의 아들 <상덕常德>을 낳았다.

 

 

 

五月 宮人善兮通太子 于花屋

爲侍女所發 枕婢蘭陵 自以爲已事 而庇善兮 王命黜侍女及蘭陵

 

5월, 궁인 <선혜善兮>가 태자와 화실(花屋)에서 통정하였다.

 

시녀 <소발所發>은 <란릉蘭陵>의 침비인데

이미 그 일을 알았으나 <선혜善兮>를 비호하였다.

 

왕이 시녀와 <란릉蘭陵>을 내쫓도록 명하였다.

 

때 태자 <비처> 41세, <선혜> 18세이다.

 

 

 

六月 牟大歸扶余 時俊朔已娠牟大子 泣與之別 曰 腹中之兒 將奈何

牟大曰 生子當取去 生女願獻之 于上

朔曰 汝重男輕女 故不知我愁也 願早早取我去牟大曰諾

野人以我盡力于西北 謂無備於京都 而暗襲東邊

將軍德智 出其不意 大破之 殺虜 凡以百余人

 

 

6월, <모대牟大>가 부여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 때 <준삭俊朔)은 이미 <모대牟大>의 아들을 임신하여

이별을 슬퍼하며 울며 말하기를

 

"복중의 아이는 장차 어찌하란 말인가" 라 하였다.

 

<모대牟大>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취하고 딸을 낳으면 왕에게 바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준삭俊朔>이 말하기를

 

"너는 남자를 중히 여기고 여자를 가벼히 여기니 나의 시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빨리 빨리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고 말하니

 

모대가 승락하였다.

 

야인이 우리가 서북에 진력을 다하여 경도에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동쪽 변방을 습격하였다.

 

장군 <덕지德智>가 불의에 기습하여 크게 쳐부수고 백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七月 宝留生 文洲子須

扶余內臣佐平昆支卒

 

7월, <보류宝留>가 <문주文洲>의 아들 <수須>를 낳았다.

 

부여 내신좌평 <곤지昆支>가 죽었다.

 

 

 

八月 解仇命燕信 聚衆於大豆城 陰謀不軌

骨門伊飡馬美卒 年六十八 公乃進思角干子也

以母有寵 于太王 得骨品 累遷至大等匝判 王卽位 陲以伊飡

公性溫美如婦人 善于上 久在骨門 無拂一人 皆稱其宰相器

 

8월, <해구解仇>가 <연신燕信>에게 대두성에서 군중을 모아 모반토록 명하였다,

 

골문이찬 <마미馬美>가 죽었다. 나이 68세였다.

 

공은 <진사進思>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태왕에게 총애가 있어 골품을 얻어 대등잡판에까지 이르렀다.

 

왕이 즉위하여 이찬으로 변경하였다.

 

공은 성품이 부녀자처럼 따뜻하고 왕에게 아첨을 잘 하여

골문에 있으면서 1명도 떨어뜨리지 않아 모두가 재상의 그릇이라고 하였다.  

 

 

 

九月 以習宝爲骨門伊飡 白欣爲神官伊飡 富理爲護城伊飡

乃宿爲護城匝判 世德爲眞經匝判

召習棠還 因俊朔之請也

 

9월, <습보習宝>를 골문이찬으로 <백흔白欣>을 신관이찬으로

<부리富理>를 호성이찬으로 <내숙乃宿>을 호성잡판으로

<세덕世德>을 진경잡판으로 삼았다.

 

<습당習棠>을 <준삭俊朔>이 청하여 소환하였다.

 

 

 

十月 以比智爲水路將軍 德智爲南路將軍

伐智爲北路將軍 春山爲西路將軍 智登爲護城將軍

修海宮

巨連以其寵姬方藏爲小后 因其有娠也

 

10월, <비지比智>를 수로장군으로 <덕지德智>를 남로장군으로

<벌지伐智>를 북로장군으로 <춘산春山>을 서로장군으로

<지등智登>을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해궁을 수리하였다.

 

<거련巨連>이 총희(寵姬) <방장方藏>이 임신하여 소후(小后)로 삼았다.

 

 

 

十一月 命善兮爲太子小妃 因上宮之請也

太子复召蘭陵 爲善兮宮枕婢

 

11월, <선헤善兮>를 상궁의 청으로 태자 소비(小妃)로 삼도록 명하였다.

 

 태자가 다시 <란릉蘭陵>을 불러 선혜궁의 침비로 하였다.

 

 

 

十二月 俊朔生 牟大女索娥 王賜米 下賞

王與上宮及田君枕婢富斗理等 如海宮 海人相賀 于途 曰 不意今日 复見聖人也

 

12월, <준삭俊朔>이 <모대牟大>의 딸 <색아索娥>를 낳아 왕이 상으로 쌀을 내렸다.

 

왕과 상궁 및 <전군田君>침비 <부두리富斗理> 등이 해궁으로 가니 

 

해인(海人)이 도중에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 뜻밖에 오늘에야 또 성인(聖人)을 본다" 라고 하였다.

 

 

 

 

 

 

자비왕 20년(477) 적사(赤蛇) 丁巳

 

 

正月 王還自海宮 賜宴五宮

遣靑市 于阿羅 吊八衣 因娠而病 求医于我 不效

月奈欲 納草海 與古自謀伐阿羅 小裊人 乃臣服于我 願世修貢物 王許之

命靑市 往吊之 以問其所欲婚者

 

정월, 왕이 해궁으로부터 돌아와 5궁에게 잔치를 열었다.

<청시靑市>를 아라(阿羅)로 보내어 <팔의八衣>를 조문하였다.

 

임신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우리에게 의원을 요구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월내(月奈)가 초해(草海)를 거두고 고자(古自)와 더불어 아라(阿羅)를 치고자 하였다.

 

<소뇨인小裊人>이 이에 우리에게 신복(臣服)하며,

세세대로 공물(貢物)을 바치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청시靑市>에게 명하여 가서 조문하도록 하고 혼인하고자 하는 바를 묻도록 하였다.

 

 

 

 

二月 以宮人阿兮妻小裊人 乃王妹鳥生宮女也 賜王生一女 不肯往

鳥生曰 寧爲無寵之姬 不若小邦之母也

 阿兮乃往小裊人 出境迎之

以爲上娘主 以八衣妹都姬 草海女多塞爲左右娘主 位在阿兮下

 

2월, 궁인 <아혜阿兮>를 <소뇨인小裊人>의 처로 삼았다.

 

<아혜阿兮>는 왕의 누이 <조생鳥生>의 궁녀이다.

 

왕이 낳은 한 딸을 보내려고 하니 기꺼이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조생鳥生>이 말하기를

 

"총애 없이 안녕한 여인은 작은 나라의 국모보다 못하다"라고 하였다.

 

<아혜阿兮>가 <소뇨인小裊人>에게 가니 국경에서 그녀를 맞이하려 나왔다.

 

상(上) 랑주(娘主)로 삼고 <팔의八衣>의 동생 <도희都姬>와

초해(草海)女 <다새多塞>를 좌우 랑주(娘主)로 삼아 <아헤阿兮>아래에 두었다.  

 

 

 

三月 靑華與讚明靑巤 來朝 賜舘及奴

靑市歸報 阿兮和合之狀 王命鳥生 賜酒靑市

 

3월, <청화靑華>와 <천명讚明> <청렵靑巤>이 래조하여 객사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청시靑市>가 돌아와 <아혜阿兮>의 화합 상황을 보고하니

왕이 <조생鳥生>에게 명하여 <청시靑市>에게 술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四月 以王女四嬃妻畏山

 

4월, 왕의 딸 <사수四嬃>를 <외산畏山>의 처로 하였다.

 

 

 

五月 野人分五道 兵來侵 皆爲我擒

 

5월, 야인 <분오도分五道>의 사병이 래침하여  우리를 사로잡을려고 하였다.

 

 

 

六月 耐衰潛通野人舍勿魚醉 以爲內宮衛士 都知之不平

亦通于耐衰女發惠 耐衰大怒 擊都 以鏡傷面 都含之出宮夜 與黨襲耐衰

時耐衰召舍勿魚醉 宿于臥內倉 卒 賊至舍勿魚醉 乃負耐衰 而逃濱宮 召諸將 命討都

都乃與發惠立 于島中

 

6월, <내쇠耐衰>가 야인 <사물어취舍勿魚醉>와 잠통하였다.

 

내궁위사로 삼으니 <도都> 그것을 알고 불평하였다.

 

<도都> 역시 <내쇠耐衰>의 딸 <발해發惠>와 잠통하니

<내쇠耐衰>가 크게 노하여 거울을 <도都>의 얼굴에 던지니

<도都>는 야밤에 출궁하여 무리들과 함께 <내쇠耐衰>를 쳤다.

 

그 때 <내쇠耐衰>는 <사물어치舍勿魚醉>를 불러 내창(內倉)에 누워 자고있다가

 

졸지에 적이 <사물어취舍勿魚醉>에 이르러

<내쇠耐衰>를 업고 빈궁(濱宮)으로 도주하니

여러 장수를 불러 <도都>를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도都>는 섬 안에서 <발해發惠>를 세웠다.

 

 

 

七月 宝弓生 實竹子竹弓 宝弓郁永妻也

 

7월, <보궁宝弓>이 <실죽實竹>의 아들 <죽궁竹弓>을 낳았다.

 

<보궁宝弓>은 <욱영郁永>의 처다.

 

 

 

八月 扶余兵官佐平解仇特功放恣 文洲不能禁止

壬乞之母 乃解仇之從妹也

時文洲欲 立宝留子須 而媚我 解仇乃通 于壬乞之母

而欲危須 宝留乃使牟大 眞老等引兵入衛

 

8월, 부여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특별한 공(功)이 있어 방자하였으나 

<문주文洲>는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임걸壬乞>의 어머니가 <해구解仇>의 사촌 여동생이다.

 

이 때 <문주文洲>는 <보류宝留>의 아들 <수須>를

우리에게 아첨하여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해구解仇>가 <임걸壬乞>의 어머니에게 말하여 <수須>가 위험하게 되니

<보류宝留>가 <모대牟大>를 시켜 <진로眞老> 등이 사병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九月 文洲出獵 奴士只之原 解仇使其黨 作盜狀 而弑之

牟大等 乃告于我 請救 王命一牟城主孝山 引兵 入熊津

 

9월, <문주文洲>가 <노사지奴士只>의 벌판으로 사냥하러 나가자

<해구解仇>가 그의 무리를 시켜 도장(盜狀)을 작성하여 <문주文洲>를 시해하니

<모대牟大> 등이 우리에게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일모성주(一牟城主) <효산孝山>에게 군대를 이끌고

웅진(熊津)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였다.

 

 

 

十月 立壬乞爲扶余君

王女沙洗生 子忠奴 加兒所通也

古自與都 和 以發惠爲嗣 許都爲夫

 

10월, <임걸壬乞>을 부여 왕으로 세웠다.

 

왕의 딸 <사선沙洗>이 <가아加兒>와 사통하여 아들 <충노忠奴>를 낳았다.

 

고자(古自)는 <도都>와 화해하였다.

 

<발혜發惠>를 후사로 삼고 <도都>를 남편으로 허락하였다. 


 

 

 

 

 

자비왕 21년(478) 황마(黃馬) 戊午

 

 

正月 王自阿瑟羅還

月凰生須彌 乃阿珍宗子也

蘭陵生 太子女玉蘭

 

정월, 왕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돌아왔다.

 

<월황月凰>이 <수미須彌>를 낳았다. <아진종阿珍宗>의 아들이다.

 

<란릉蘭陵>이 태자의 딸 <옥란玉蘭>을 낳았다.

 

 

 

二月 靑華與讚明 歸國

烏梁生 實竹女竹梁

夜有赤光 如匹練 自地至天 問吉凶 於中外仙巫

 

2월, <청화靑華>와 <찬명讚明>이 귀국하였다.

 

<오량烏梁>이 <실죽實竹>의 딸 <죽량竹梁>을 낳았다.

 

밤에 한필의 명주같은 붉은 빛이 땅에서 하늘로 뻗쳐

나라 안팎의 선무(仙巫)에게 길흉을 물었다.

 

 

 

三月 扶余誅解仇 于大豆城 燕信出奔麗國 誅其妻子 于熊津市

長門生 女善門 先是太子强幸之 有身 懼不出 至是生

 

3월, 부여가 <해구解仇>를 대두성(大豆城)에서 주삻하였다.

 

<연신燕信>이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그 처자를 웅진(熊津) 저자거리에서 주살하였다.

 

<장문長門>이 딸 <선문善門>을 낳았다.

 

처음에 태자가 강제로 <장문長門>을 행(幸)하였는데

 

두려워 몸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나 이제와서 낳았다.

 

 

 

五月 王有疾 命太子監國

太子復幸長門 于靈廟

邦媛生 銍知子鉗知 立新宮 于雲浦

五宮通 于監國 盟好

 

5월, 왕이 질병이 있어 태자에게 감국(監國)하라고 명하였다.

 

태자가 다시 <장문長門>을 영묘(靈廟)에서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방원邦媛>이 <질지銍知>의 아들 <겸지鉗知>를 낳아

운포(雲浦)에 신궁(新宮)을 세웠다.

 

5궁(五宮)이 감국(監國)에게 맹호(盟好)하였다.

 

 

 

九月 穀大登

阿兮生 小裊衣子阿崙

 

9월, 곡식이 크게 여물었다.

 

<아혜阿兮>가 <소녀의小裊衣>의 아들 <아륜阿崙>을 낳았다.

 

 

 

十月 命中外徒衆會 于道場 禱王疾

 

10월, 나라 안팎의 많은 선도들이 도장에 모여 왕의 질병을 기도하였다.

 

 

 

十二月 以塞文爲沙伐城主 乃宿爲神官匝判 复以世德爲護城匝判 習棠爲眞經匝判

 

12월, <새문塞文>을 사벌성주로 <내숙乃宿>을 신관잡판으로

또 다시 <세덕世德>을 호성잡판으로 <습당習棠>을 진경잡판으로 삼았다.

 

 

 

 

 

자비왕 22년(479) 토양(土羊) 己未

 

 

正月 王疾大漸 詔 中外慮囚

命太子受朝百官

富斗理生 寵達子富達

 

정월, 왕의 질병이 점점 더 심하여 나라 안팎의 죄수를 조사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태자에게 백관의 조회를 받도록 명하였다.

 

<부두리富斗理>가 <총달寵達>의 아들 <부달富達>을 낳았다.

 

 

 

二月三日 王崩 于上宮 春秋六十六

王性寬仁大慈 雖一草一虫 未嘗擅殺 愛民恤軍 每以盛暑暴寒 問其疾苦 賜以衣食

後宮與宗臣有私 則皆許嫁 與不問其咎 時人以爲聖王 仰之

若父母凶聞 一播 號泣者 載于京野 隣國之人 亦皆縞素 發祥

 

2월 3일 왕이 상궁(上宮)에서 붕(崩)하였다. 춘추 66세였다.

 

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여 크게 자비로왔으며  

풀 한포기 벌레 한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를 구휼하여 무더위와 추위에는 그 질고(疾苦)를 묻고 옷과 식량을 보냈다.

 

후궁과 종신은 모두 출가를 허락하고 그 허물을 묻지 않았다.

 

이때 사람들은 성왕(聖王)으로 우르러 모셨다.

 

마치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우는자들이 상여에 모였고 

이웃 나라 사람들도 모두 흰옷을 입고 발상(發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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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