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왕 원년(479) 토양(土羊) 己未
二月三日 太王崩 于上宮
舒弗邯期宝 兵官伊飡比太 骨門伊飡習宝 神官伊飡백흔 護城伊飡富理等 奏曰
“國不可一日無君 請立 太子早正宝位”
巴胡上宮 詔曰 “太子毗處 幼有孝行 長能謙恭 自守 上下感服 可紹太王 踐祚行祥”
太子膝行叩頭 讓以無德 上宮曰
“好生愼己 可以爲君 勿忘勿怠” 白官乃 推爲王 奉于明宮 山呼萬歲
王詔曰 “朕以不德 承統大位 爾百官 祐以明德 福我天下 護我臣妾赤子” 百官俯伏受朝
尊母巴胡上宮爲太王上宮 下宮以下 皆付散宮
五日 王與太王上宮 修朝南桃
以正妃齒君爲上宮 期宝女也 以齒君子阿知爲太子
以期宝爲太公 比太爲舒弗邯 習宝爲兵官伊飡 白欣爲骨門伊飡 富理爲神官伊飡
以匝判宝信爲護城伊飡
以王姑烏士只鳥生爲國夫人
賜百官爵一級 大赦國中
古自女君耐衰 以野人舍勿魚醉爲嬖臣 不奉朝命
2월 3일 태왕이 상궁(上宮)에서 붕(崩)하엿다.
서불감 <기보期宝>, 병관이찬 <비태比太>, 골문이찬 <습보習宝>,
신관이찬 <백흔白欣>, 호성이찬 <부리富理> 등이
"나라에는 하루라도 왕이 없으면 안되니 태자를 빨리 보위에 세우기를 청하옵니다"
라고 아뢰니
이때 <기보> 73세, <비태> 64세, <습보> <백흔> <부리> 60세이다.
<파호巴胡> 상궁이 조칙을 내려 말하길
" 태자 <비처毗處>는 어려서는 효도하고 커서는 겸손하고 공손하여 스스로 잘 지켜
상하가 감복하니 태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름이 옳을 것이오"라 하니
태자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덕이 없음을 말하며 사양하니
상궁이 말하기를
"삼가하심이 지나치십니다. 군왕으로서 거스르지 말고 게을리하지 마세요"라 하며
백관이 왕으로 추대하니 명궁(明宮)에서 즉위하고 산호만세를 불렀다.
왕이 조서로 이르기를
"짐이 부덕하나 대위를 계승하니 너희 백관들은 밝은 덕으로 나를 보필하여
나의 신하와 가족을 보호하여 나의 천하를 복되게 하라." 하니
백관들이 엎드려 조서를 받들었다.
어머니 <파호巴胡>상궁을 태왕상궁으로 높이고
하궁 이하 모두는 산궁(散宮)으로 하였다.
5일 왕과 태왕상궁이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정비(正妃) <치군齒君>을 상궁으로 삼으니 <기보期宝>의 딸이다.
<치군齒君>의 아들 <아지阿知(463-483)>를 태자로 삼았다.
<기보期宝>를 태공으로 <비태比太>를 서불감으로
<습보習宝>를 병관이찬으로 <백흔白欣>을 골문이찬으로
<부리富理>를 신관이찬으로 잡판 <보신宝信>을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왕의 고모 <오사지烏士只>와 <조생鳥生>을 국부인(國夫人)으로 삼았다.
백관의 작위를 1급씩 올리고 나라에 대사면을 내렸다.
고자(古自) 여군(女君) <내쇠耐衰>가
야인 <사물어취舍勿魚醉>를 폐신(嬖臣)으로 삼고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三月 以神官匝判乃宿爲稟主 波珍飡智度路爲內宮大監
以兵官匝判烏含爲比列城主都督北路將軍
以習宝女園君爲下宮 乃宿女善兮爲暖宮
3월, 신관잡판 <내숙乃宿>을 품주로 파진찬 <지도로智度路>를 내궁대감으로
병관잡판 <오함烏含>을 비열성주 도독 북로장군으로 삼았다.
<습보習宝>의 딸 <원군園君>을 하궁(下宮)으로
<내숙乃宿>의 딸 <선혜善兮>를 난궁(暖宮)으로 삼았다.
四月 葬太王 于葛川 巴胡太上 欲殉之 王扶止之 只許老媵五人
加耶贊明 金官治水 扶余牟大 來會
以宝器女首器 妻壬乞
以長門爲大新宮
4월, 태왕을 갈천(葛川)에 장례하였다.
<파호巴胡> 태상이 따라 죽으려하자 왕이 만류하여 금지시키고
단지 늙은 몸종 5명을 따라 죽게 허락하였다.
가야의 <찬명贊明>, 금관의 <치수治水>, 부여의 <모대牟大>가 와서 만났다.
<보기宝器>의 딸 <수기首器(464-492)>를 <임걸壬乞(465-479)>의 처로 하였다.
<장문長門>을 대신궁(大新宮)으로 삼았다.
五月 王幸智度路家 初王爲殿君時 與智度路同處一宮 同心一體 事無大小義 以行之
王多賴其力 約以同國受享 至是以機密事 盡付之
以智度路妻蓮帝 爲朝霞房夫人
5월, 왕이 <지도로智度路>의 집에 행차하였다.
애초에 왕이 전군(殿君)으로 있었을 때 <지도로智度路>와 함께 같은 궁에서 살았다.
동심일체로 크고 작은 일들을 의리로 처리하였다.
왕은 <지도로智度路>의 힘에 많이 의지하여 같이 나라를 만들 것을 약조하였다.
이에 이르러 기밀(機密)의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지도로智度路>의 처 <연제蓮帝>를 조하방(朝霞房)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六月九日 以太王上宮誕日 賜酺百官
巴胡宴 烏士只鳥生皇我 于夏宅
追尊外祖美海公爲王 外祖母紫我爲美海王后
賜鳥生宮道人妙心 爵一吉飡
召登欣匝判 入朝
太公期宝卒 詔曰 “太公老王之胞弟 太子之外祖也 累赴國難 不伐大功 不用大典
無以報勳 答孝 可尊爲王” 乃以王禮葬之 盖從上宮請也
公之母保反夫人 初事奈勿老太王 生老王 後事實聖老太王 生公
性淸儉剛毅 能決大事 大有實聖之風 壽七十三
公長子靑市 堤上公女靑我夫人生也
命續公系 進爵匝判 以公女思君 下嫁德智 卽太王暖宮也
壬乞使達率苩牛 入朝 謝婚潢之恩
6월9일 태왕 상궁의 생일이어서 백관에게 술을 내렸다.
<파호巴胡>가 하택(夏宅)에서
<오사지烏士只>, <조생鳥生>, <황아皇我>에게 잔치를 열었다.
외조부 <미해美海>공을 왕으로 외조모 <자아紫我>를 <미해美海>왕후로 추존하였다.
<조생궁鳥生宮> 도인(道人) <묘심妙心>에게 일길찬의 작위를 내렸다.
<등흔登欣> 잡판을 불러 입조케 하였다.
소지왕의 어머니 <파호>의 환갑 잔치를 연 것이다.
<오사지>와 <조생>, <황아>는 <파호>의 시누이다.
<등흔>은 <연제>의 아버지로 조생의 아들인 <지도로>의 장인이다.
태공 <기보期宝>가 죽었다.
조서로 이르기를
" 태공은 노왕(老王){눌지}의 포제이고, 태자의 외조부이다.
국란을 당하여 누차 큰 공을 세워도 뽐내지 않는 모범을 보였으니
그 보훈에 효로서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왕으로 추존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의 예로 장례를 치루고 모든 상궁이 따르도록 청하였다.
공의 어머니 <보반保反>부인은
처음에 <내물奈勿> 노태왕(老太王)을 섬겨 노왕(老王)을 낳고
뒤에 <실성實聖> 노태왕(老太王)을 섬겨 공을 낳았다.
성품은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의지가 굳세었으며 큰일을 능히 처리하였다.
성인(聖人)의 풍채가 있었다. 나이 73세였다.
공의 장자 <청시靑市>는 <제상堤上>공의 딸 <청아靑我> 부인이 낳았다.
공의 가계를 잇도록 잡판의 작위를 내렸다.
공의 딸 <사군思君>을 <덕지德智>에게 하가(下嫁)하니 태왕의 난궁(暖宮)이다.
<임걸壬乞>이 달솔 <백우苩牛>를 보내어 입조하여 혼황(婚潢)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내물(보반) - 눌지
실성(보반) - 기보
기보(조생) - 치군(비처) - 아지
八月 置彩典
南路德智 以病免
以鳥生宮季女元兮 妻寵臣剡臣
賜登欣爵伊飡 因蓮帝有殊寵也
詔曰 “登欣匝判 以老王寵臣 實爲堤上公嫡孫 宜階高位
偶得讒言 久退于野 朕甚慨之 特陲其秩”
命妙心 行牟梁宮鎭祭 大修堂宇 使智度路 迎宝美牟梁
以智弗路爲南路將軍
王姑烏士只薨 年七十 以上宮禮葬之
8월, 채전(彩典)을 설치하였다.
남로장군 <덕지德智>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조생궁 막내 딸 <원혜元兮(462-498?>를
총애하는 신하 <염신剡臣(447-503)>의 처로 하였다.
<등흔登欣(416-483)>에게 이찬의 작위를 내렸다.
<연제蓮帝>가 특별한 총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서로 이르길
" <등흔登欣> 잡판은 노왕{눌지}의 총애하는 신하이며 실은 <제상堤上>공의 적손으로
마땅히 높은 자리에 올라야하나 우연히 참언(讒言)을 받아 오래도록 재야에 머물러
짐이 그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여 특별히 그 품계를 바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묘심妙心>에게 모량궁 진제(鎭祭)를 행하고 전각을 크게 수리하여
<지도로智度路>를 시켜 <보미宝美>와 <모량牟梁>을 맞이하도록 명하였다.
<지불로智弗路>를 남로장군으로 삼았다.
왕의 고모 <오사지烏士只>가 죽었다. 나이 70세였다.
상궁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九月 贊明妻靑華 生子贊失 阿利遣使 來報
壬乞移大豆城 於斗谷
阿羅君小裊人 遣其弟夫科 入質
命王妹俊明 行美海王大祭
9월, <찬명贊明>의 처 <청화靑華>가 아들 <찬실贊失>을 낳았다고
<아리阿利>가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임걸壬乞>이 대두성(大豆城)에서 두곡(斗谷)으로 옮기었다.
아라군(阿羅君)의 <소뇨인小裊人>이 그 동생 <부과夫科>를 인질로 보내었다.
왕의 여동생 <준명俊明>에게 <미해美海>왕의 대제(大祭)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十月 葛川宮成 以沙梁宮主爲大監
王幸牟梁宮 宴宝美蓮帝 薦其妹海梁
宴群臣 于智度路家 散宮竹室家 習宝 故也
10월, 갈천궁(葛川宮)이 완공되었다.
<사량沙梁>궁주를 갈천궁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사량>궁주는 보미의 딸이다.
갈천궁은 자비성왕을 모시는 종묘이다.
왕이 모량궁에 행차하여 <보미宝美>와 <연제蓮帝>에게 잔치를 열었다.
<연제蓮帝>의 여동생 <해량海梁(465-519)>을 천거하였다.
<연제>는 <보미>의 딸인 <모량>의 딸이다.
보미(눌지) - 모량(등흔) - 연제
왕이 <습보>를 위하여 <지도로>의 집과 산궁 <죽실>의 집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十一月 壬乞以疾卒 王遣阿飡阿珍宗 冊牟大爲扶余君
牟大者 文洲弟昆支子也 有膽力善射
與文洲妻宝留相通 姐事我國 至是得立 仍賜首器爲妻
牟大以盖鹵女宝玉 妻阿珍宗 宝玉母眞氏 將種也 扶余有言 不借將種 其臣有不肯
牟大曰 “舅甥之國 何用浮言”
宝玉身長 而美靜 嚴有大度 國人嘉之
善兮生 王女心道
11월, <임걸壬乞>이 질병으로 죽었다.
왕이 아찬 <아진종阿珍宗>을 보내어 <모대牟大>를 부여왕으로 책봉하였다.
<모대牟大(466-501)>는 <문주文洲>의 동생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았다.
<문주文洲>의 처 <보류宝留(453-500)>와 상통하여
교태로 우리나라를 섬겨 이제와서 왕위에 올랐다.
거듭 수기<首器(464-492)>를 처로 보냈다.
<모대牟大>는 <개로盖鹵>의 딸 <보옥宝玉(452?-521)>을
<아진종阿珍宗(451-511)>의 처로 하였다.
<보옥宝玉>의 어머나 <진씨眞氏>는 장수 집안이다.
부여에는 장수 집안이 아니면 신하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모대牟大>가 말하기를
"외숙의 나라라는 뜬 소문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하였다.
<보옥宝玉>은 키가 크고 예쁘고 정숙하며, 엄하지만 큰 도량이 있어
나라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였다.
<선혜善兮>가 왕의 딸 <심도心道>를 낳았다.
내물(보반) - 보해(성명) - 습보(보량) - 아진종(보옥) - 태종(=이사부)
내물(방단) - 방석(이공주) - 이종
이종과 태종은 모두 백제의 왕녀의 아들이다.
十二月 王與太上三宮 謁葛川宮
以登欣伊飡爲大等伊飡 靑市匝判爲護城匝判
以海梁爲朝霞房大監
以皇我宝美爲國夫人 鳥生爲國大夫人
以骨門匝判章伊爲大等匝判 以神官匝判乃宿爲骨門匝判 以匝判習棠爲神官匝判
王弟毗己爲匝判 毗羅爲海飡 俊登爲韓飡
宝留生 牟大女摩只
以智度路女厚凰爲太子妃 行吉 于鮑祠 選白馬八十匹 靑牛三十匹 駕彩車行列
思君生 德智子思明
12월, 왕과 태상, 삼궁(三宮)이 갈천궁(葛川宮)을 알현하였다.
<등흔登欣> 이찬을 대등 이찬으로 <청시靑市> 잡판을 호성잡판으로 하였다.
<해량海梁>을 조하방(朝霞房)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황아皇我>와 <보미宝美>를 국부인(國夫人)으로
<조생鳥生>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삼았다.
골문잡판 <장이判章>를 대등잡판으로 신관잡판 <내숙乃宿>을 골문잡판으로
잡판 <습당習棠>을 신관잡판으로 왕의 동생 <비기毗己>를 잡판으로
<비라毗羅>를 해찬으로 <준등俊登>을 한찬(韓飡)으로 삼았다.
<보류宝留>가 <모대牟大>의 딸 <마지摩只>를 낳았다.
<지도로智度路>의 딸 <후황厚凰>을 태자비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흰말 80필과 푸른 소 30필을 뽑아 가마와 수레를 채색하여 줄지어 행진하였다.
<사군思君>이 <덕지德智>의 아들 <사명思明>을 낳았다.
이때 태상 <파호> 60세, 소지왕 <비처> 44세, 정비 <치군> 40세, 태자 <아지> 17세,
왕의 고모 <오사지> 70세, <조생> 62세, <황아> 62세,
조생의 아들 <지도로> 43세, 조생의 딸 <선혜> 21세, 지도로의 처<연제> 17세,
지도로의 딸 새궁 <후황> 14세,
연제의 아버지 <등흔> 64세, 어머니 <모량> 46세,
백제 삼근왕 <임걸> 15세, 동성왕 <모대> 14세, <보류> 40세? <수기> 16세,
<아진종> 28세, 가야 여왕 <아리> 49세, <청화> 23세이다.
소지왕 2년(480) 금원(金猿) 庚申
正月 朔日 大雪
王與太王三宮太子及妃 受朝南桃
召上仙上老 博通古今事物者 不拘骨品 賜酒 宴群臣 於明宮
詔曰 “爲國大本 莫如崇先務後 始祖靈廟 不理久矣 宜付有司 一新其宇”
令骨門子弟 皆就上仙上老 習禮通職 無爲遊閒 太子及妃 率先視式
命伊欣好含 從太子及妃 王弟俊登 王妹俊明 王女阿氏阿亥 就學 于妙心道人
牟大遣眞方魚 獻方物 請以宝留爲別宮 許之
정월 초하루 큰 눈이 내렸다.
왕과 태왕 삼궁, 태자및 태자비가 남도(南桃)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상선(上仙)과 상노(上老) , 고금의 사물에 박통한 자에게
골품에 구애되지 않고 술을 내리고 명궁(明宮)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조서로 이르기를
" 나라의 큰 근본은 시조 영묘를 숭상하는 것이 우선이다.
옛 것을 어찌 내버려두겠는가?
마땅히 유사(有司)는 그 사당 지붕을 새롭게 하라"라고 하였다.
골문 자제 모두는 상선과 상노에게 나아가 예를 익히고 직무를 통달하여
한가롭게 놀면서 지내지 말라하니 태자와 태자비가 솔선하여 모범을 보였다.
이찬 <호함好含>에게 명하여 태자와 태자비
왕의 동생 <준등俊登>과 왕의 여동생 <준명俊明>, 왕의 딸 <아씨阿氏>와
<아해阿亥>를 <묘심妙心> 도인(道人)에게 데려가 배우도록 하였다.
<모대牟大>가 <진방어眞方魚>를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보류宝留>를 별궁(別宮)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二月 王引三宮太子及妃 沐浴神井 親祀靈廟 命阿飡以上 不拘骨品 皆令謁廟
比太公妃心凰宮主薨 年五十八
十日 蓮帝生 子慕珍 于牟梁宮 王親幸 賜米
耐衰以舍勿魚醉爲夫 傲慢無禮 加耶請伐
使南路將軍智弗路 與加耶將軍山戶 合兵 居烈進功之
2월, 왕이 삼궁, 태자 및 태자비를 이끌고 신정(神井)에서 목욕을 하였다.
친히 영묘(靈廟)에 제사하고 아찬 이상 골품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에게 영묘(靈廟)를 알현하도록 명하였다.
<비태比太>공의 비(妃) <심황心凰>궁주가 죽었다. 나이 58세였다.
10일 <연제蓮帝>가 아들 <모진慕珍>을 모량궁에서 낳았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쌀을 내렸다.
<내쇠耐衰>가 <사물어취舍勿魚醉>를 남편으로 삼고 거만 무례하여
가야를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남로장군 <지불로智弗路>와 가야장군 <산호山戶>가
군사를 합하여 거열(居烈)로 진공하였다
三月 舍勿魚醉與其徒 挾耐衰 遁入海島中 乃命立耐衰女發惠爲君 以智弗路爲監國
鮑石祠神鹿産子 人身鹿首
妙心奏 曰 “神人合矣 殆天之祥 我王也” 乃命妙心 行鹿人祭
3월, <사물어취舍勿魚醉>와 그 도당들이 <내쇠耐衰>를 끼고
바다의 섬 안으로 도망가니 <내쇠耐衰>의 딸 <발혜發惠>를 군주로 세우고
<지불로智弗路>를 감국(監國)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포석사의 신록(神鹿)이 사람의 몸에 머리가 사슴인 록인(鹿人)을 낳았다.
<묘심妙心>이
"신인합(神人合)이옵니다. 하늘이 낸 상서러운 우리의 왕입니다." 라고 아뢰니
<묘심妙心>에게 록인제(鹿人祭)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四月五日 王誕日也
始命太子及妃 置酒宮中 與三宮受壽 夜幸太上宮 與三宮太子及妃 上壽 于宮
4월 5일 왕의 탄신일이다.
처음으로 태자와 태자비가 궁중에서 주연을 베풀고
삼궁과 더불어 왕의 장수를 기원토록 하였다.
밤에 태상궁으로 행차하여 삼궁과 태자 및 태자비와 함께
태상궁의 장수를 기원하였다.
五月 以水路將軍比智爲古自監國 進攻耐衰
鹿人死 命葬苑中
上宮齒君 難産而崩 壽四十一 王悲痛減食
園君爲上宮 善兮爲下宮 海梁爲暖宮
以智度路爲稟主 以護城將軍智登爲水路將軍 以大登將軍德智爲護城將軍
以將軍車宿爲大等將軍
京都久旱 王親禱 天柱寺
5월, 수로장군 <비지比智>를 고자(古自) 감국(監國)으로 삼고
<내쇠耐衰>를 진공(進攻)토록 하였다.
록인(鹿人)이 죽었다. 포석사 동산에 장사토록 명하였다.
상궁 <치군齒君>이 난산으로 죽었다. 나이 41세였다.
왕이 비통하여 감식(減食)하였다.
<원군園君>을 상궁으로 <선혜善兮>를 하궁으로 <해량海梁>을 난궁으로 삼았다.
<지도로智度路>를 품주로 호성장군 <지등智登>을 수로장군으로
대등장군 <덕지德智>를 호성장군으로 장군 <거숙車宿>을 대등장군으로 삼았다.
경도(京都)가 오래 가물어 왕이 친히 천주사(天柱寺)에서 기도를 올렸다.
六月九日 以太上誕日 賜酺
是日 以王妹俊明 妻伊欣 行吉 太上宮中 俊明美而多才 善鄕歌
妙心姐以欲狎之 俊明鄙却之 時上以多災 旱憂之
妙心奏 曰 “陰結則旱兆 在俊明也”
上問其誰則 曰 “似在姜仙” 盖指己也 姜仙者 美而道高之稱也 宮中隱語也
上乃召俊明 密問私好 乃伊欣也 以此妙心 不得其忠
以太上宮爲太太宮
比智獻耐衰 時耐衰與舍勿魚醉 通野人 謀再擧
我軍夜半突入 耐衰與舍勿魚醉 臥帳中 體胖不能走 未及收衣 而被縛
舍勿魚醉乘船而走 王謂耐衰 曰
“聞汝好淫 而不愛子女 不敬天朝 吾臣多好人 何取賊酋乎”
耐衰曰 “得一賤卒 可以埋骨兄山 敢望好臣乎” 王憐其語 命賜宅守卒
以贊明弟孝德爲發惠夫
6월 9일 태상의 탄신일{진갑}에 잔치를 열어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이날 왕의 여동생 <준명俊明>을 이찬의 처로 하고 태상궁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준명俊明>은 예쁘고 재능이 많았으며 향가를 잘 하였다.
妙心姐以欲狎之 俊明鄙却之 時上以多災旱憂之
<묘심妙心>이 교만한 마음으로 <준명俊明>을 길들이고자하니
<준명俊明>은 <묘심妙心>을 촌스럽다고 물리쳤다.
이때 많은 재앙과 가뭄이 들어 걱정하였다.
<묘심妙心>이
"남몰래 결탁함은 가뭄의 징조이고 <준명俊明> 때문입니다."라고 아뢰니
왕이 그 말을 듣고 즉시 말하기를
"강선(姜仙)이 있는 것 같다"라고 하니 모두가 자기를 지목 하였다.
강선(姜仙)은 예쁘고 도가 높은자를 말하는 궁중 은어(隱語)이다.
왕이 이에 <준명俊明>을 불러 비밀히 좋아하는 사람을 물으니
<이흔伊欣>이라고 하였다.
이에 <묘심妙心>은 그 충심을 얻지 못하였다.
태상궁을 태태궁으로 삼았다.
<비지比智>가 <내쇠耐衰>를 바쳤다.
이때 <내쇠耐衰>는 <사물어취舍勿魚醉>와 함께 야인과 통하여 반란을 도모 하였다.
아군이 한 밤에 급히 들어가니
<내쇠耐衰>와 <사물어취舍勿魚醉>가 휘장에 누워있다가
몸이 뚱뚱하여 달아나지 못하고 미처 옷도 입지 못한 채 포박되었다.
<사물어취舍勿魚醉>는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왕이 <내쇠耐衰>에게 일러 말하기를
"듣자니 너는 음탕함을 좋아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며 천조(天朝)에 불경하였다.
나의 신하 중에 호인(好人)이 많은데 어찌 적의 추장을 취하였는가"라 하니
<내쇠耐衰>가 말하기를
"한 명의 천한 졸(卒)을 얻었으니 형산(兄山)에 골을 묻음이 옳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좋은 신하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불쌍히 여겨 집과 수졸(守卒)을 내려 주었다.
<찬명贊明>의 동생 <효덕孝德>을 <발혜發惠>의 남편으로 삼았다.
八月 穀不登 使韓飡叔欣 運沙伐穀三千石
8월,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한찬(韓飡) <숙흔叔欣>에게 사벌(沙伐)로 곡식 3천석을 운반토록 하였다.
九月 西路春山卒 以德智代之 以實竹爲護城將軍
9월, 서로장군 <춘산春山>이 죽었다.
<덕지德智>로 대신하고 <실죽實竹>을 호성장군으로 하였다.
十月 命倉穀頭監叔欣 開倉十二 賑老弱
10월, 창곡두감(倉穀頭監) <숙흔叔欣>에게 창고 12곳을 열어
노약자를 진휼하라고 명하였다.
十一月 民無食者 願赴北軍 許之
末曷乘我飢 來侵北鄙 烏含擊退之
11월, 백성들 중 먹을 것이 없는 자들이 북군에 들어가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말갈이 우리의 기근을 틈 타 북쪽 변경을 래침하니 <오함烏含>이 이를 격퇴하였다.
十二月 以烏含爲伊飡 乃宿爲兵官匝判 毗己爲骨門匝判 智度路爲匝判 叔欣爲海飡
12월, 오함<烏含>을 이찬으로 <내숙乃宿>을 병관잡판으로
<비기毗己>를 골문잡판으로 <지도로智度路>를 잡판으로
<숙흔叔欣>을 해찬으로 삼았다.
소지왕 3년(481) 금계(金鷄) 辛酉
正月 太子妃 有疾 王親自視疾 不寐
以宝兮爲朝霞房大監 太王下宮田君爲豆乙宮夫人
田君者 齒君之妹也 自下宮時通好 保王 至是生 王女小田君
命乃宿 以耐衰爲妾
王幸牟梁宮 宴宝美牟梁美梁好梁成梁
太子妃 起床 與太子朝王 謝恩
王大喜 曰 “神統在汝夫妻 宜汝從好 無貽吾憂 早点寵孫 以洽天下” 妃感泣而退
賜太醫宝器緋衣一領 廐馬一匹
王與太太三宮太子及妃 受朝 南桃
정월, 태자비가 질병이 있어 왕이 친히 질병을 살피고 잠을 자지 않았다.
<보혜宝兮>를 조하방(朝霞房) 대감(大監)으로
태왕 하궁 <전군田君>을 두을궁(豆乙宮) 부인으로 삼았다.
<전군田君>은 <치군齒君>의 동생이다.
하궁 시절부터 서로 좋아하여 왕을 보좌하여
지금에 이르러 왕의 딸 <소전군小田君>을 낳았다.
<내숙乃宿>에게 <내쇠耐衰>를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왕이 모량궁에 행차하여
<보미宝美> <모량牟梁> <미량美梁> <호량好梁> <성량成梁>에게 잔치를 열었다.
태자비가 병석에서 일어나 태자와 함께 왕을 찾아뵙고 은헤에 감사하였다.
왕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신통(神統)이 너의 부부에게 있으니 마땅히 너는 남편을 좋아하여
나의 걱정을 끼치지 말것이며
빨리 총손(寵孫)을 보아 천하에 두루 흡족케하여야 할 것이다"하니
태자비는 감읍(感泣)하며 물러났다.
태의(太醫) <보기宝器>에게 비의(緋衣) 한 벌과 구마(廐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왕과 태태궁, 삼궁, 태자 및 태자비가 남도(南桃)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이때 태자 <아지> 19세, 태자비 <후황> 16세, <전군> 39세,
<보미> 78세, <모량> 48세, <미량> 46세, <호량> 42세, <성량> 40세이다.
二月 王與太太三宮太子及妃 謁葛川宮
齒君廟成 命太子祀之
王與乃宿宝器剡臣等 幸比列城 撫問軍士 賜征袍有差
太子及妃 禱王子 靈廟
古自人欲 以發惠弟發治爲發惠夫 作亂 比智先機 制之 其徒多奔野國
牟大遣方士燕世兒 獻燕書眞經
王歸次阿瑟羅
牟大以其妹牟兮 妻宝根
2월, 왕과 태태궁, 삼궁, 태자 및 태자비가 갈천궁(葛川宮)을 알현하였다.
치군묘(齒君廟)가 완성되어 태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왕과 <내숙乃宿> <보기宝器> <염신剡臣> 등이 비열성(比列城)으로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문하고 군복을 차별있게 내렸다.
태자 및 태자비가 영묘(靈廟)에서 아들을 낳아 달라고 기도하였다.
고자(古自) 사람들이 <발혜發惠>의 동생 <발치發治>를 <발혜發惠>의 남편으로 삼아
난동을 부리고자 하여
<비지比智>가 먼저 기선을 잡아 제압하니 그 도당들이 야국(野國)으로 도망하였다.
<모대牟大>가 방사(方士) <연세아燕世兒>를 보내어
연서(燕書)와 진경(眞經)을 바쳤다.
왕이 재차 아슬라(阿瑟羅)로 돌아갔다
<모대牟大>가 그의 여동생 <모혜牟兮>를 <보근宝根>의 처로 삼았다.
이때 <보근>은 <보미>의 아들로 37세, <모혜> 14세?이다.
三月 高句麗末曷 掠孤鳴七城
以進軍彌秩父 軍主烏含 與北路將軍伐智 西路將軍德智 扶余將軍眞路 加耶將軍山戶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泥河之西 大破之 斬首千余級 捕獲人馬兵仗甚衆
長門生 王女美門
王 自阿瑟羅 還
靑華歸寧 賜宅居之 時其夫贊明 病卒 故隨吊使好助 而來者也
王女阿亥與妙心 私通 王欲嫁之 毗己諫其非品 而止之
蘭陵生 王女金蘭
3월, 고구려와 말갈이 고명(孤鳴) 일곱 성(城)을 약탈하였다.
진군(進軍) <미질부彌秩父> 군주(軍主) <오함烏含>이
북로장군 <벌지伐智>, 서로장군 <덕지德智>
부여장군 <진로眞路>, 가야장군 <산호山戶>와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고
패퇴하는 적을 니하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천여 급의 목을 베고 인마와 병장기를 무수히 포획하였다.
<장문長門>이 왕의 딸 <미문美門>을 낳았다.
왕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돌아왔다.
<청화靑華>가 편안하게 돌아와 거주할 집을 하사하였다.
이때 그 남편 <찬명贊明>이 병으로 죽어 조문 사절 <호조好助>가 수행하여 왔다.
왕의 딸 <아해阿亥>와 <묘심妙心>이 사통하여
왕이 <아해阿亥>를 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비기毗己>가 <묘심妙心>이 골품이 아님을 간하여 중지하였다.
<란릉蘭陵>이 왕의 딸 <금란金蘭>을 낳았다.
四月 元兮爲朝霞房大監
賞 烏含伐智智弗路 甲冑一領 龍馬一匹
大修海宮 時有龍見 於宮南 遣妙心 祀之 仍修宮殿也
4월, <원혜元兮>를 조하방(朝霞房) 대감(大監)으로 하였다.
<오함烏含>, <벌지伐智>, <지불로智弗路>에게
갑주 한 벌과 용마 한 필을 상으로 주었다.
해궁을 크게 수리하였다.
이때 해궁의 남쪽에 용이 출현하여
<묘심妙心>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궁전을 수리하였다.
五月 宝兮生 善牟子阿時
以蘭陵弟英陵 事太子妃 爲之不食 王憂之 曰
“英陵似宜子 故以爲媵也 妃如早胎 何用媵爲”
5월, <보혜宝兮>가 <선모善牟>의 아들 <아시阿時>를 낳았다.
<란릉蘭陵>의 동생 <영릉英陵>이 태자비를 섬겨 먹지 않으니 왕이 걱정하며 말하기를
" <영릉英陵>은 마땅히 자식과 같으니 잉첩으로 삼아야 한다.
태자비가 어린 나이에 아이를 베었으니 잉첩으로 삼아 무얼하는가?라 하였다.
六月 太太有疾 命仙巫醫等 禱于國中山川
舒弗邯比太卒 公太王私弟也 阿老夫人 夢見白龍 而生
及長善騎射 有膽勇 累征南北 有大功 年六十六
召靑華翠凰 于夏宅
賜五壽宮粲皇宮 年穀奴婢
以兵官伊飡習宝爲舒弗邯
6월, 왕의 어머니가 질병이 있어 선무와 태의 등에게
나라 안 산천에서 기도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서불감 <비태比太>가 죽었다.
공은 태왕의 사제(私弟)이다.
<아로阿老> 부인이 꿈에 백룡을 보고 낳았다.
자라서 기사(騎射)를 잘 하고 담력과 용기가 있어
여러 차례 남북을 원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나이 66세였다.
<청화靑華>와 <취황翠凰>을 하택으로 불렀다.
<오수五壽>궁과 <찬황粲皇>궁에 년곡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병관이찬 <습보>를 서불감으로 하였다.
七月 命智登 修長峰鎭
以王女阿亥 妻智度路子順都
月奈君遣子高貴 入朝 獻方物
遣阿珍宗 于古自 探南海路
7월, <지등智登>에게 장봉진(長峰鎭)을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왕의 딸 <아해阿亥>를 <지도로智度路>의 아들 <순도順都>의 처로 하였다.
이때 <순도> 18세, <아해> 16세이다.
월내군(月奈君)이 아들 <고귀高貴>를 입조시켜 방물을 바쳤다.
<아진종阿珍宗>을 고자(古自)에 보내어 남쪽 해로(海路)를 살피도록 하였다.
八月 眞經堂成 奉王弟俊登爲眞仙 王女阿氏爲太巫
召烏含還 以北路將軍伐智代之
8월, 진경당(眞經堂)이 완공되었다.
왕의 동생 <준등俊登>을 진선(眞仙)으로
왕의 딸 <아씨阿氏>를 태무(太巫)로 봉하였다.
<오함烏含>을 소환하고 북로장군 <벌지伐智>가 대신하게 하였다.
九月 以 登欣爲兵官伊湌 白欣爲大登伊湌 富理爲骨門伊湌 宝信爲神官伊湌
烏含爲護城伊湌
9월, <등흔登欣>을 병관이찬으로 <백흔白欣>을 대등이찬으로
<부리富理>를 골문이찬으로 <보신宝信>을 신관이찬으로
<오함烏含>을 호성이찬으로 하였다.
十月 元兮生 子元臣
10월, <원혜元兮>가 아들 <원신元臣>을 낳았다.
十一月 王與三宮 入海宮
11월, 왕과 삼궁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遣智世路 益古自軍
12월, <지세로智世路>를 파견하여 고자의 군대에 더하였다.
소지왕 4년(482) 수구(水狗) 壬戌
正月 王還 自海宮
太太崩 壽六十三 葬葛川宮
정월, 왕이 해궁으로부터 돌아왔다.
왕의 어머니가 붕(崩)하였다. 나이 63세였다.
갈천궁(葛川宮)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미해(자아) - 파호(420-482)
二月 大風 拔木 火發金城南門
阿利以聖明爲嗣
王妹沙洗爲朝霞房夫人 蓮帝爲月池宮夫人
2월, 태풍으로 나무가 쓰러지고 금성 남문에 불이 났다.
<아리阿利(431-491)>가 <성명聖明(461?- )>을 후사로 하였다.
왕의 여동생 <사선沙洗>을 조하방(朝霞房) 부인으로 하고
<연제蓮帝>를 월지궁(月池宮) 부인으로 하였다.
三月 聖明入朝 獻方物
牟大以眞路爲兵官佐平
3월, <성명聖明>이 입조하여 방물을 바쳤다.
<모대牟大>가 <진로眞路>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四月五日 始以王生日 賜酺
以聖明爲阿飡 聖明加耶女君阿利之第三子也 其父曰誠國
初阿利以誠國之庶兄孝國 爲夫 生贊明孝德 及三女 後以誠國爲夫 生聖明
贊明死 誠國欲立 己子聖明 阿利從之 恐國人不服 請爲靑華繼夫 以代之 故賜之骨品也
久雨淋滈 恐有下情 命中外按寃 放輕囚
4월 5일, 왕의 생일이라 주연을 열어 술을 하사하였다.
<성명聖明>을 아찬으로 삼았다.
<성명聖明>은 가야 여군(女君) <아리阿利>의 셌째 아들이다.
아버지는 <성국誠國>이다.
처음에 <아리阿利>가 <성국誠國>의 서형 <효국孝國>을 남편으로 삼고
<찬명贊明>과 <효덕孝德> 및 3딸을 낳고
그 후 <성국誠國>을 남편으로 삼아 <성명聖明>을 낳았다.
<찬명贊明>이 죽어 <성국誠國>은 자기의 아들 <성명聖明>을
<아리阿利>를 따르게하여 후사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여 <청화靑華>가 대신하여
<성명聖明>을 계부(繼夫)로 삼기를 청하니 골품을 내렸다.
이때 대가야 16대 여왕 아리 52세, 효국 48세, 성국 41세, 효덕 24세,
성명 22세?, 청화 26세이다.
장마가 오래가니 두려움이 생겨 나라 안팎을 어루만지고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五月 野人引發治 入寇 比智等 擊退之
以靑華 妻聖明 王親詣 鮑祠 行吉
善兮生 女梁斗
5월, 야인이 <발치發治>를 이끌고 들어와 노략질 하여 <비지比智> 등이 격퇴하였다.
<청화靑華(457-524>를 <성명聖明(461?- )>의 처로하여
왕이 친히 나가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선혜善兮>가 딸 <량두梁斗>를 낳았다.
六月 王與三宮太子及妃 行大祭 于葛川宮
命妙心 禱太子妃生子
王幸鳥生宮 謂鳥生 曰 “自失太太 朕心孤虛 願以姑爲母”
鳥生喜 以許之 乃以鳥生爲太太
6월, 왕과 삼궁, 태자 및 태자비가 갈천궁(葛川宮)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묘심妙心>에게 태자비가 아들을 낳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조생궁(鳥生宮)에 행차하여 <조생鳥生>에게 일러 말하기를
" 어머니를 잃고 짐이 외롭고 허전하니 원컨데 고모를 어머니로 삼고자 합니다."하니
<조생鳥生>이 기뻐하며 허락하니 <조생鳥生>을 왕의 어머니로 삼았다.
七月 大等伊飡白欣卒 公美海王嗣子也 母曰堤上公女靑我夫人也
公好文章 有風采 嘗使高句麗 服其君臣 麗人常問公安 曰
“白公在不可輕也 公之德於斯可知也”
公子剡臣 爲王寵臣 好奢侈 貪女色 叱之曰 “非吾子也 不可近”
剡臣以此不得放姿 及公之卒 醉舞行色 時人惜之 曰 “虎父而犬子也”
以妙心爲天柱寺法 因鳥生請也
毗己諫之 曰
“天柱者列聖之祠 非眞骨之人 不得以法也 妙心無骨無德 徒有賤行 何得以法乎”
王曰 “太太之臣也 汝勿言之”
以富理爲大等伊飡 宝信爲骨門伊飡 烏含爲神官伊飡 乃宿爲護城伊飡 章伊爲伊飡
以智度路爲兵官匝判 靑市爲大等匝判 以車宿爲護城匝判 伐智德智叔欣爲匝判
宝器比智智登智弗路爲海飡 毗羅爲大等將軍
7월, 대등이찬 <백흔白欣>이 죽었다.
공은 <미해美海>왕의 사자(嗣子)이다.
어머니는 <제상堤上>공의 딸 <청아靑我> 부인이다.
공은 문장을 좋아하였고 풍채가 있어
일찍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신(君臣)에게 복종하니
고구려인들이 항상 공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 백공은 가벼이 대할 수 없습니다. 공의 덕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염신剡臣>은 왕의 총신(寵臣)이 되어
사치를 좋아하고 여색를 탐하니 질책하여 말하기를
" 나의 아들이 아니다. 가까이 둠이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염신剡臣>이 여전히 방자하여 공의 죽음에도 취하여 춤을 추는 행색을 보이니
이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겨 말하기를
" 호랑이 아버지에 개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묘심妙心>을 <조생鳥生>의 청으로 천주사(天柱寺) 법(法)으로 삼았다.
<비기毗己>가 간하여 말하기를
" 천주(天柱)는 열성(列聖)의 사당입니다.
진골이 아닌 자가 법(法)이 될 수 없습니다.
<묘심妙心>은 골품과 덕이 없고 천행(賤行)을 일삼는데
어찌 법(法)으로 삼으십니까?"라고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 어머니의 신하이다. 너는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부리富理>를 대등이찬으로 <보신宝信>을 골문이찬으로 <오함烏含>을 신관이찬으로
<내숙乃宿>을 호성이찬으로 <장이章伊>를 이찬으로 삼았다.
<지도로智度路>를 병관잡판으로 <청시靑市>를 대등잡판으로
<거숙車宿>을 호성잡판으로 <벌지伐智>, <덕지德智>, <숙흔叔欣>을 잡판으로
<보기宝器>, <비지比智> <지등智登>, <지불로智弗路>를 해찬으로
<비라毗羅>를 대등장군으로 삼았다.
八月 蓮帝生 女普賢
行大祭 于鵄述祠 以洪壽爲祭主 登欣爲大監
王與剡臣 微行骨火
太子妃 織紫錦衣 獻王 王曰 “未若獻孫之好 待汝産子 而衣 此着之矣 藏之可也”
妃乃泣 謂太子 曰 “妾薄德無子 不能奉慰父皇 當自絶 以贖罪”
太子大驚 曰 “如此則 反爲罪也 不若發願 于豆乙也”
太子乃與妃 夜半沐浴 而待人靜 而禱子 王聞之 命三宮以下 悉禱一時
8월, <연제蓮帝>가 딸 <보현普賢>을 낳았다.
<홍수洪壽>를 제주(祭主)로 삼고 <등흔登欣>을 대감(大監)으로 삼아
치술사(鵄述祠)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왕과 <염신剡臣>이 골화(骨火)로 미행하였다.
태자비가 비단옷을 짜서 왕에게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 손자를 낳아 바치는 것만 못하다.
시녀가 아들을 낳아 이를 입도록 보관해 둠이 옳다."라고 하니
태자비가 울면서 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 첩이 박덕하여 아들을 낳지못하여 부황을 위로하지 못하니
마땅히 자결하여 속죄코자 합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 자결로 죄가 없으지지 않으니 두을(豆乙)에 발원(發願)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였다.
태자와 태자비가 야밤에 목욕하고 조용히 사람을 기다리며
아들을 낳아 달라 기도하니 왕이 그것을 듣고
삼궁 이하는 모두 다 일시에 기도하라고 명하엿다.
九月 末曷入寇 漢山城 牟大請救
伐智絶其粮道 出其不意 末曷大亂 我軍與扶余軍 挾擊大破之
9월, 말갈이 한산성(漢山城)으로 쳐들어 와 노략질하니
<모대牟大>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벌지伐智>가 그 양도(粮道)를 끊고 불의에 출격하니 말갈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아군과 부여군이 협공하여 말갈을 대파하였다.
十月 俊明生 子守知
王 夜詣太子宮 與太子及妃 禱子
10월, <준명俊明>이 아들 <수지守知>를 낳았다.
왕이 밤에 태자궁에 이르니 태자와 태자비가 함께 아들을 낳아 달라고 기도하였다.
十一月 燕世兒 歸扶余 命好助伊欣 亦遊扶余
王女阿氏生 俊登女彡阿只 王親幸 俊登第 賜米 視兒
11월, <연세아燕世兒>가 부여로 돌아가니
<호조好助>와 <이흔伊欣>도 부여를 유람토록 명하였다.
왕의 딸 <아씨阿氏>가 <준등俊登>의 딸 <삼아지彡阿只>를 낳으니
왕이 친히 <준등俊登> 집에 행차하여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 보았다.
十二月 太子妃有疾 命勿夜禱
賜宴王弟王妹 命各言其志 盡歡而罷
12월, 태자비가 질병이 있어 밤인데도 기도하게 명하였다.
왕의 동생과 여동생에게 주연을 내리고
각자의 말과 그 뜻이 즐거움이 다하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소지왕 5년(483) 수시(水豕) 癸亥
正月 王命太子及妃 代王 受朝 明宮
以俊明爲朝霞房夫人
以王弟朱蒦阿飡
王與太子及妃 親祀靈廟
翠皇生 女翠宣 鱗宣出也
정월, 왕이 태자 및 태자비에게 왕을 대신하여
명궁(明宮)에서 조하(朝賀)를 받으라고 명하였다.
<준명俊明>을 조하방(朝霞房) 부인으로 삼았다.
왕의 동생 <주호朱蒦>를 아찬으로 하였다.
왕과 태자 및 태자비가 친하 영묘(靈廟)에 제사하였다.
<취황翠皇>이 <린선鱗宣>의 딸 <취선翠宣>을 낳았다.
二月 兵官伊飡登欣卒 詔曰
“兵官暖宮之父 而老王寵臣也 特以太公禮葬之 公靑我夫人長子也 父曰 順實郞也
體鴻志大 淡於名利 遭讒在也 未嘗怨
尤多子孫 以蓮帝海梁之寵 皆得貴顯
時人以爲堤上公 未食之蔭也
以烏含爲兵官伊飡 章伊爲神官伊飡
牟大出獵 漢山城
聖母祠主助里薨 以王妹寸己代之
2월, 병관이찬 <등흔登欣>이 죽어 조서로 이르기를
" 병관은 난궁(暖宮){해량}의 아버지이고, 노왕의 총신(寵臣)이다.
특별히 태공의 예로 장례하라."고 하였다.
공은 <청아靑我> 부인의 장자(長子)이다.
아버지는 <순실順實>랑이다.
체구가 굳세고 뜻이 크며 명리에 담담하였으나
참소를 당하여 아직도 원망함이 있었다.
자손이 유달리 많았다.
<연제蓮帝>와 <해량海梁>의 총애로 벼슬이 높아지니
이때 사람들이 <제상堤上>공의 음덕이라고 하였다.
<오함烏含>을 병관이찬으로 <장이章伊>를 신관이찬으로 삼았다.
<모대牟大>가 한산성(漢山城)에 사냥을 나갔다.
성모사주(聖母祠主) <조리助里>가 죽어 왕의 여동생 <촌기寸己>가 대신하였다.
三月 太子告 妃有娠 王大喜 賜宴宮中 三日三夜 令王弟王妹及妃父母 皆宿宮中 視宴
賞太子妃 玉印紫金衣
王洗暖宮及妃 于御湯 暖宮海梁與妃 同年 寵高 知王希子 就妙心 聞于道
惑于妙心之美 私通而娠至是 王笑 謂海梁 曰
“妃與同年 汝獨無身乎”
海梁對曰 “夫皇愛孫 不愛子故也”
王曰 “豈其然乎 汝亦生子 當如太子”
海梁乃言 有娠 王大喜 會宗女 而親賜洗湯
宮主思君卒 于西路軍
3월, 태자가 태자비가 임신하였다고 고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궁중에 3일간 주야로 잔치를 열고 왕의 동생과 여동생 및 왕비의 부모 모두를
궁중에서 자도록 하고 잔치를 살펴보며
태자비에게 옥인(玉印)과 자금의(紫金衣)를 상으로 주었다.
왕이 어탕(御湯)에서 난궁(暖宮) 및 왕비를 씼어주었다.
난궁(暖宮) <해량海梁>과 왕비{원군園君}는 동년배이다.
왕의 총애가 크고 왕이 아들을 바라는 것을 알고는 <묘심妙心>에게 가서 도를 들었다.
<묘심妙心>의 미모에 유혹되어 사통하여 임신하게 되니
왕이 웃으며 <해량海梁>에게 일러 말하기를
" 왕비와 너는 동년배인데 너 혼자 만 임신하였느냐?" 하니
<해량海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 부황(夫皇)의 사랑하는 자손입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 어찌 그리 하겠는가? 너 역시 아들을 낳으면 당연히 태자와 같다."라고 하였다.
<해량海梁>의 말에 임신하였음을 알고
왕은 크게 기뻐하며 종녀(宗女)를 모이게 하고 친히 씻어주었다.
궁주(宮主) <사군思君>이 서로군(西路軍)에서 죽었다.
이때 소지왕 비처 48세, 왕비 원군 19세, 난궁 해량 19세, 연제 21세, 묘심 34세?이다.
四月 以王生日 賜酺宴宗室 于宮中 命太子及妃 起舞
大雨七日 金官水漲 沒戶甚多 遣善牟 問之
賜妙心 爵阿飡 妙心者 比太公枕婢那連生也 其父三高位 以公寵臣 私通而生
公以爲假子 及長 容皃絶美 鳥生宮見 而奇之 養爲嬖臣
那連又通 三高位弟執兒 生蘭陵 又生公女英陵
蘭陵以善兮枕妃 受寵于王 妙心又被上寵鳥生宮
畏人有言 命妙心受道 于順實郞之徒 自言能接天仙 問人禍福
鳥生宮以爲宮中道人 盛譽中外 三宮皆詣私之 骨女爭投其門 稱曰
“拜法賞花 有一與之私 以爲終身之榮者”
王未知之 因三宮請受骨品之爵
毗己不肯 曰 “祖宗之法 墮矣”
牟大獲神鹿 於熊津之北 自以爲統合三韓之兆 大養士馬
德智請討 其罪 王以其無反狀 不許
4월, 왕의 생일이어서 궁중에서 잔치를 열어 종실에게 술을 하사하고
태자와 태자비에게 일어나 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큰 비가 7일간 내려 금관(金官)에 홍수가 나서 많은 민가가 수몰되어
<선모善牟>를 보내어 위문하였다.
<묘심妙心>에게 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묘심妙心>은 <비태比太>공의 침비(枕婢) <나연那連>이 낳았다.
그 아버지는 <비태比太>공의 총신 <삼고위三高位>로 <나연那連>과 사통하여 낳았다.
<비태比太(416-481)>공이 가자(假子)로 삼았다.
장성함에 용모가 아주 아름다워 <조생鳥生(418-487)>宮이 보니 신기하여
폐신(嬖臣)으로 삼아 길렀다.
<나연那連>은 또 <삼고위三高位>의 동생 <집아執兒>와 사통하여 <란릉蘭陵>을 낳고
또 <비태比太>공의 딸 <영릉英陵>을 낳았다.
<란능蘭陵>이 <선헤善兮(459-518)>의 침비(枕婢)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고
<묘심妙心(450?- )>은 또 <조생鳥生(418-487)>궁의 최상의 총애를 받았다.
<묘심妙心>에게 <순실順實(396-448)>랑의 무리들에게서 도를 전수 받으라고 하니
능히 천선(天仙)에 접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안다고 스스로 말하니
사람들이 그말을 두려워 하였다.
<조생鳥生>궁이 궁중 도인(道人)으로 삼으니 위엄과 명예가 나라 안팎에 가득하여
삼궁(三宮) 모두가 사사로이 섬기고 골녀들이 그 문하에 들어가 섬기었다.
칭하기를
" 법에게 꽃놀이로 절하라.
나와 함께하는 자만이 종신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가 된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알지못하고 삼궁(三宮)이 골품의 작위를 내리기를 청하니
<비기毗己>가 수긍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법이 타락하였구나"라고 하였다.
<모대牟大>가 웅진 북쪽에서 신록을 잡아 삼한(三韓) 통합의 징조로 여겨
군사와 군마를 크게 양성하니 <덕지德智>가 그 죄를 물어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반란의 장계(狀啓)가 없어 허락하지 않았다.
五月 王閱弓馬 于北川
靑華生 聖明子靑明 賜米
皇我夫人卒 老王庶女也
夢見堤上公之叱責 而鵄述供于老王 而生也
子伐智德智宝器宝留 皆貴顯 以上宮禮葬之 壽六十六
德智朝娶田君 于鮑祠 因喪思君也
沙洗生 王子沙嵩 賜酺百官
宴王弟王妹 于月池宮
王醉歌 曰 “國泰平 兮民安樂 自上古以來 孰有如我之爲 天下者乎”
衆皆應 曰 “兄王 古今所無之聖主也”
毗己獨作色 曰
“非也 兄王太子時 孝友謙恭 爲人師表 自登祚以來 好內親侫
大違祖章 不自早省 則恐難免議” 王聞之 不悅 而罷 衆皆責毗己無禮
5월, 왕이 북천(北川)에서 궁마(弓馬)를 열병하였다.
<청화靑華>가 <성명聖明>의 아들 <청명靑明>을 낳아 쌀을 내렸다.
<황아皇我(418-483)> 부인이 죽었다.
노왕(老王){눌지}의 서녀(庶女)이다.
꿈에 <제상堤上>공의 질책을 보고 <치술鵄述>이 노왕(老王)을 받들어 모시어 낳았다.
아들 <벌지伐智>, <덕지德智>, <보기宝器>, <보류宝留> 모두가 벼슬과 신분이 높아
상궁의 예로서 장례하였다.
나이 66세였다.
<덕지德智>가 <사군思君>의 상(喪)을 당하여 포사에서 <전군田君>에게 장가들었다.
<사선沙洗>이 왕의 아들 <사숭沙嵩>을 낳아 백관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하사하였다.
월지궁(月池宮)에서 왕의 동생과 여동생에게 잔치를 열었다.
왕이 취하여 노래하여 말하기를
"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락하니
상고이래로부터 나와 같은 사람이 천하에 누가 있겠는가?"하니
모두들 응답하여 말하기를
"형왕은 고금에 없는 성주(聖主)입니다."라고 하였다.
<비기毗己>가 혼자 정색하며 말하기를
" 아닙니다.
형왕은 태자시절 효도하고 우의가 있고 겸손하고 공손하여 스승의 표본이었으나
지금 보위에 오른 이후로 내실에 친히 아첨함을 좋아하고
조상의 훈계를 크게 그리치고 스스로 일찌기 반성하지 않으니
공론을 면하기 어려움이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불쾌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기毗己>의 무례함을 책하고 파면하였다.
六月 王與三宮太子及妃 謁葛川宮
以毗己爲伊飡 毗羅爲匝判 俊登爲海飡 習棠爲骨門匝判 靑市爲水路將軍
智登爲西路將軍 德智爲北路將軍 伐智爲大等匝判 車宿爲神官匝判 叔欣爲護城匝判
是日 王謂毗己 曰
“吾以劣蕪 長于汝 而得王 多女少子 自然貪色 得罪 于汝矣
欲以少女園兒 賜汝 以鞏友愛 何如”
毗己泣謝 曰
“臣特寵 姿言罪 已多矣 何敢望花主乎” 王不聽 命園兒與毗己 行吉 于豆乙宮
以比太女洪壽 妻叔欣
先是洪壽入朝霞 至是生子伊登 以其不滿 詰之 乃叔欣所私也 乃有是命
6월, 왕과 삼궁, 태자 및 태자비가 갈천궁(葛川宮)을 알현하였다.
<비기毗己>를 이찬으로 <비라毗羅>를 잡판으로 <준등俊登>을 해찬으로
<습당習棠>을 골문잡판으로 <청시靑市>를 수로장군으로
<지등智登>을 서로장군으로 <덕지德智>를 북로장군으로
<벌지伐智>를 대등잡판으로 <거숙車宿>을 신관잡판으로
<숙흔叔欣>을 호성잡판으로 삼았다.
이날 왕이 <비기毗己>에게 일러 말하기를
" 내가 못나고 졸렬하여 장손인 너를 두고 왕이 되어
딸이 많고 아들을 적게 얻어 자연히 색을 탐하여 죄를 얻었다,
너에게 작은 딸 <원아園兒>를 하사하니 우애(友愛)를 공고히 하라."고 하니
<비기毗己>가 눈물을 흘리며 사례하여 말하기를
" 신이 특별한 총애를 입었으나 방자한 말로 죄를 지음이 이미 많은데
어찌 감히 왕의 딸을 바라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듣지 아니하고 <원아園兒>와 <비기毗己>를
두을궁에서 길례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비기> 39세, <원아> 16세이다.
<비태比太>의 딸 <홍수洪壽>를 <숙흔叔欣>의 처로 하였다.
이에 앞서 <홍수洪壽>가 조하(朝霞)에 들어가서 아들 <이등伊登>을 낳았는데
<비태比太>가 만족하지 못하여 묻자 <숙흔叔欣>의 자식이다하여
이에 명을 내린 것이다.
七月 雨不止 州郡大漲
宝兮生 王女多時
命德智同田君 赴北路
王謂毗己 曰
“智度路俊登之私父也 保我于宮中 約以共天下 不可疎 以汝女知悅 妻其子 以結之 如何”
毗己曰 “何敢違乎” 乃以毗己長女知悅 妻智度路三子厚都 行吉 于鮑祠
選善射者百人 赴北軍
7월, 비가 그치지 않아 주군(州郡)이 크게 잠기었다.
<보혜宝兮>가 왕의 딸 <다시多時>를 낳았다.
<덕지德智>와 <전군田君>이 같이 북로에 부임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비기毗己>에게 일러 말하기를
" <지도로智度路>는 <준등俊登>의 사부(私父)이다.
궁중에서 나를 보좌하여 천하를 같이 하기로 약조하여 소홀할 수 없다.
너의 딸 <지열知悅>을 그의 아들에게 처로 주어 결혼함이 어떠하냐?라 하니
<비기毗己>가 말하기를
" 어찌 감히 거절하겠습니까?"라 하니
이에 <비기毗己>의 장녀 <지열知悅>을
<지도로智度路>의 셋째 아들 <후도厚都>의 처로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때 <후도> 16세, <지도로> 47세, <지열> 16세, <비기> 39세이다.
활을 잘 쏘는 자 백명을 뽑아 북군에 부임토록 하였다.
八月 以三宮爲五宮 朝霞房爲三房
天宮園君 地宮善兮 人宮蓮帝 日宮海梁 月宮沙洗 玉房俊明 金房翠凰 銀房蘭陵
以太子宮爲竹長宮
聖明與靑華 歸加耶
王與海梁 幸竹長宮 洗妃
命太子 代行王事 于明宮政堂
8월, 삼궁(三宮)을 오궁(五宮)으로 조하방(朝霞房)을 삼방(三房)으로 하였다.
천궁은 <원군園君>, 지궁은 <선혜善兮>, 인궁은 <연제蓮帝>,
일궁은 <해량海梁>, 월궁은 <사선沙洗>
옥방은 <준명俊明>, 금방은 <취황翠凰>, 은방은 <란릉蘭陵>으로 하였다.
태자궁을 죽장궁(竹長宮)으로 하였다.
<성명聖明>과 <청화靑華>가 가야에서 돌아왔다.
왕과 <해량海梁>이 죽장궁(竹長宮)에 행차하여 왕비를 씻기었다.
태자에게 명궁(明宮) 정당(政堂)에서 왕의 일을 대신하게 명하였다.
九月 大等伊飡富理卒 公老王之庶子也 與皇我同母 性淸直廉潔 事君以誠
以宝信爲大等伊飡 乃宿爲骨門伊飡 毗己爲護城伊飡
9월, 대등이찬 <부리富理>가 죽었다.
공은 노왕(老王){눌지}의 서자(庶子)이다.
<황아皇我>와 같은 어머니로 성품은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청렴 결백하였다.
왕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보신宝信>을 대등이찬으로 <내숙乃宿>을 골문이찬으로
<비기毗己>를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十月 王幸一善界 撫問災民 賜穀 沿路緩 獄放輕囚
巫女毛禮畜僧 于窟 有司請法 王以有功于宝美 不問
10월, 왕이 일선(一善)의 경계에 행차하여 감옥에 갇힌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길가에 늘어 선 이재민을 위문하고 쌀을 내렸다.
무녀 <모례毛禮>가 굴에서 승녀와 함께 지내고 있어 유사(有司)가 법을 청하니
왕이 <보미宝美>에게 공이 있는 자는 그 죄를 묻지말라 하였다.
十一月 王幸竹長宮 洗妃賜飱
11월, 왕이 죽장궁(竹長宮)에 행차하여 왕비를 씻기고 저녁 밥을 내렸다.
十二月 大雷霆 京都 以疫死者如蠅 北川祠火煙不滅
太子阿知 以疫薨 壽二十一 王悲痛 失音
海梁生女 名曰妙紅 時骨女多取妙字命 子爭以爲風
以俊登爲太子 阿氏爲妃
12월, 경도(京都)에 큰 번개와 천둥이 치고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마치 파리 같았다.
북천 사당에 불이 나서 꺼지지 않았다.
태자 <아지阿知>가 전염병으로 죽으니 나이 21세였다.
왕이 비통하여 실음(失音)하였다.
<해량海梁>이 딸을 낳아 이름을 <묘홍妙紅>이라 하였다.
이때 골녀들이 묘(妙)자 이름을 많이 취하였다.
아들은 풍(風)으로 하여 경쟁하였다.
<준등俊登>을 태자로 삼고 <아씨阿氏>를 태자비로 하였다.
지도로(파호) - 준등(459-494)
비처(치군) - 아씨(460?- )
소지왕 6년(484) 목서(木鼠) 甲子
正月 葬阿知 于葛川陵側 立祠曰竹長
竹長宮生 女善知 王親幸 賜米 視兒
以烏含爲伊伐飡 乃宿爲兵官伊飡 智度路爲骨門伊飡 伐智爲兵官匝判
叔欣爲大等匝判 宝器爲護城匝判
정월, <아지阿知>를 갈천릉(葛川陵) 곁에 장례하고
사당을 세워 죽장(竹長)이라 하였다.
죽장궁(竹長宮)이 딸 <선지善知>를 낳아
왕이 친히 행차하여 쌀을 내리고 아이를 살펴보았다.
아지(후황) - 선지(484- )
<오함烏含>을 이벌찬으로 <내숙乃宿>을 병관이찬으로
<지도로智度路>를 골문이찬으로 <벌지伐智>를 병관잡판으로
<숙흔叔欣>을 대등잡판으로 <보기宝器>를 호성잡판으로 삼았다.
二月 王幸竹長祠
長門生 田亢女田門
王與太子及妃 受朝 南桃
王幸竹長宮 賜飱
2월, 왕이 죽장사(竹長祠)에 행차하였다.
<장문長門>이 <전항田亢>의 딸 <전문田門>을 낳았다.
왕과 태자 및 태자비가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왕이 죽장궁(竹長宮)에 행차하여 저녁 밥을 내렸다.
三月 大雨雹
以王弟田亢爲大阿飡 田君之子也
王與竹長宮善知 謁葛川宮 祀竹長祠
蓮帝生 王女厚蒂
3월, 비와 우박이 크게 내렸다.
왕의 동생 <전항田亢>을 대아찬으로 하였다. <전군田君>의 아들이다.
자비(파호) - 비처=소지명왕(436-500)
자비(전군) - 전항(463- )
왕과 죽장궁(竹長宮), <선지善知>가 갈천궁(葛川宮){보미}을 알현하고
죽장사(竹長祠)에서 제사하였다.
<연제蓮帝>가 왕의 딸 <후체厚蒂>를 낳았다.
비처(연제) - 후체(484- )
四月 王生日 賜酺
以牟凌妙梁爲左右鶴房
王幸竹長宮 賜宴懶凰
元兮生 王女越期 于剡臣第
發惠遣使 獻方物
4월, 왕의 생일이어서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모릉牟凌(468- )>과 <묘량妙梁(467- )>을 좌우 학방(鶴房)으로 삼았다.
왕이 죽장궁(竹長宮)에 행차하여 <라황懶凰(445- )>에게 잔치를 열었다.
지도로(라황) - 후황(466-499)
<라황>은 죽장궁 <후황>의 어머니이다.
<원혜元兮>가 왕의 딸 <월기越期>를 <염신剡臣>의 집에서 낳았다.
<발혜發惠>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五月 王幸竹長宮
命玉人 採南山玉 造猉獜天馬五花盤
首器生 牟大子小末支 牟大遣使 報喜 獻方物 于王及五宮
王以良馬五匹 彩緞十匹 賜牟大首器
5월, 왕이 죽장궁(竹長宮)에 행차하였다.
옥인(玉人)에게 남산에서 옥을 캐어
기린천마오화반(猉獜天馬五花盤)을 만들어라고 명하였다.
<수기首器>가 <모대牟大>의 아들 <소말지小末支>를 낳았다는 희소식을
<모대牟大(466-501)>가 사신을 보내어 전하고 왕 및 오궁(五宮)에게 방물을 바쳤다.
왕이 양마(良馬) 5필과 채색 비단 10필을 <모대牟大>와 <수기首器>에게 내렸다.
보기(수리) - 수기(464-492)
六月 行大祭 于葛川宮 王與竹長宮 祀竹長祠
王與善兮 幸乃宿第 賜宴
召智世路還 拜爲護城將軍 以實竹爲沙伐城主
6월, 갈천궁(葛川宮)에서 대제를 행하고 왕과 죽장궁이 죽장사에서 제사를 지냈다.
왕과 <선혜善兮>가 <내숙乃宿>의 집에 행차하여 잔치를 열었다.
<선혜>는 <내숙>과 <조생>의 딸이다.
<지세로智世路(452-516)>를 소환하여 호성장군의 벼슬을 내리고
<실죽實竹(449- )>을 사벌성주(沙伐城主)로 삼았다.
七月 德智與牟大軍 大破麗兵 于母山城
分遣仙徒 祀五岳 採靈芝
王與妙梁宿 竹長宮 天大雨 三日
命州郡擧 四窮 賜穀
王幸牟梁宮 賜宴宝美 尊宝美爲牟梁宮大元夫人
7월, <덕지德智>와 <모대牟大> 군이 고구려 군사를 모산성(母山城)에서 대파하였다.
선도(仙徒)를 나누어 보내어 오악(五岳)에서 제사하고 영지(靈芝)를 캐도록 하였다.
왕과 <묘량妙梁>이 죽장궁(竹長宮)에 묵었다.
큰 비가 3일간 내렸다.
주군(州郡)에 들러 사궁(四窮)에게 곡식을 내렸다.
왕이 모량궁(牟梁宮)에 행차하여 <보미宝美>에게 잔치를 열고
<보미宝美>를 모량궁(牟梁宮) 대원(大元)부인으로 높혔다.
八月 南川民 獻大蘿畐狀 如小犢 命上仙点之 曰 “犢者得也 兆在小丑” 乃立蘿畐祠 禱之
蘭陵生 女妙蘭
以竹長宮爲玉芝宮 仙徒以玉芝獻之 故王命種竹長宮 仍賜是名
牟大使沙若思 欲通中國 不得
宝玉生 子苔宗
靑市病免 智登复爲水路將軍 以實竹爲統西路將軍
王與玉芝宮 行吉 于鮑祠 賜酺宗臣
王與玉芝宮 修朝 明宮
命玉人 造玉芝宮寶冠 飾以七色寶珠
賜玉芝宮胞弟厚都 爵阿飡
8월, 남천의 백성이 작은 송아지 만한 큰 무우(蘿畐)를 바쳤다.
상선(上仙)에게 점을쳐 보라고 하니 말하기를
"작은 송아지를 얻은 것은 미천한 무리가 있다는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라부사(蘿畐祠)를 세워 기도하였다.
<란릉蘭陵>이 딸 <묘란妙蘭>을 낳았다.
죽장궁(竹長宮)을 옥지궁(玉芝宮)으로 하였다.
선도(仙徒)가 옥지(玉芝)를 바치니
왕이 죽장궁에 씨를 뿌리도록하여 이 이름을 내렸다.
<모대牟大>가 <사약사沙若思>를 보내어 중국과 통하고자 하였으나 통하지 못하였다.
<보옥宝玉>이 아들 <태종苔宗>을 낳았다.
태종(苔宗){이사부}의 아버지는 <아진종>이다
<청시靑市>가 병이 나서 면직하고
<지등智登>을 다시 수로장군으로 <실죽實竹>을 통(統)서로장군으로 삼았다.
왕과 옥지궁(玉芝宮)이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고
잔치를 열어 종신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왕과 옥지궁(玉芝宮)이 명궁(明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옥인(玉人)에게 7색 보주(寶珠)를 장식한 옥지궁 보관(寶冠)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옥지궁(玉芝宮) 포제(胞弟) <후도厚都>에게 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태자 <아지>가 죽으니 태자비 <후황>을 소지왕 <비처>가 왕비로 삼은 것이다.
지도로(라황) - 후황{옥지궁}
지도로(라황) - 후도
이때 옥지궁 <후황> 19세, 소지왕 <비처> 49세, <후도> 17세이다.
九月 命智登 築臨海鎭
王與玉芝宮 入海宮 命智度路 攝行王事
俊明生 王女俊德
好助伊欣等 通燕書眞經 而還 自扶余 王召見海宮 與玉芝宮 命講元元眞經
9월, <지등智登>에게 임해진(臨海鎭)을 축조하라고 명하였다.
왕과 옥지궁이 해궁으로 들어가 <지도로智度路>에게 왕의 일을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준명俊明>이 왕의 딸 <준덕俊德>을 낳았다.
<호조好助>, <이흔伊欣> 등이 부여로부터 돌아와 연서(燕書)와 진경(眞經)을 전하니
왕이 해궁으로 불러 옥지궁과 함께 보고 원원진경(元元眞經)을 강론하라고 명히였다.
十月 阿利獻五莖珊瑚 于玉芝宮
王與玉芝宮 駕樓舷 觀漁盛設 漁火于海上 以爲海宮夜觀
太子獻新米 于海宮 王謂玉芝宮 曰 “新米何如 宿米乎”
玉芝宮曰 “新舊皆是聖德所化 互有眞元 舊若妾父 新若妾身 寵常在玆德
愉日新米 亦自然甘旨 若縱目隨新朝變暮改 雖有好米 安能甘旨乎”
王稱善 曰 “此誠眞經言也 吾當終身服之”
乃取神龜 與宮同盟 約以七生同穴 齊歸一元 召厚都 于海宮
命寫七生一元圖 飾以金碧 藏以玉匣一收于宮 一收于上
10월, <아리阿利>가 옥지궁에 줄기가 다섯개인 산호(珊瑚)를 바쳤다.
왕과 옥지궁이 뱃전에서 고기잡이를 관람하였다.
해상에 불을 놓고 고기잡이 하는것이 해궁의 야경이 되었다.
태자가 햇쌀을 해궁에 바쳤다.
왕이 옥지궁에 일러 말하기를
"햇쌀이 어찌 묵은 쌀과 같은가?"라 하니
옥지궁이 말하기를
" 새 것과 묵은 것 모두 성덕(聖德)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로 진원(眞元)이 있으니, 묵은 것이 첩의 아비라면 새 것은 신첩입니다.
총애는 언제나 인자한 덕에 있습니다.
햇쌀을 즐기는 것 역시 자연의 달콤한 맛입니다.
새 것만 쫓아 마음 껏 보는 것을 조변모개(朝變暮改)하면
좋은 쌀일지라도 어찌 달콤한 맛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착하다고 말하며 이르기를
" 이 참된 마음이 진경(眞經)의 말이다.
나는 마땅히 종신토록 새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신령스런 거북이를 잡아 옥지궁과 함께
일곱번을 다시 태어나도 일원(一元)으로 돌아갈 것을 같이 맹약하였다.
해궁으로 <후도厚都>를 불러
금빛과 푸른 빛으로 장식한 칠생일원도(七生一元圖)를 그려
하나는 옥지궁에 하나는 왕의 옥갑(玉匣)에 보관하라고 명하였다.
十一月 置音聲署 使上骨子弟 習之
銍知正妃通里卒 以小妃河喜爲正妃 以善通妻邦媛爲小妃
初白欣公妹通里 嫁銍知 生子善通 好騎射 出獵 遇雨 入沙干金相家
相女邦媛 有色善姐 誘以通之生女 及入宮 得銍知寵 生子鉗知
時善通已沒 河喜子嘉知 多病 欲以鉗知易嗣 治水鳥石爭之 不得
河喜者白欣公女也 治水突知 皆以仁德之子
忠于我 而力排邦媛之屬 銍知不悅 其政始亂
日暖如春 桃李滿開 王與玉芝宮 騎馬入 野人家
有老軀 烹鴨而進之 爲其子請爵 王欲許之 宮曰
“以婦人騎馬入人家 已失體皃 况濫爵 以失信 於天下乎” 王嘉其言 而止之
11월, 음성서(音聲署)를 설치하여 상골(上骨)의 자제들이 배우도록 하였다.
<질지銍知>의 정비(正妃) <통리通里>가 죽었다.
소비(小妃) <하희河喜>를 정비(正妃)로
<선통善通>의 처 <방원邦媛>을 소비(小妃)로 삼았다.
처음에 <백흔白欣>공의 여동생 <통리通里>가 <질지銍知>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선통善通>을 낳았다.
<선통善通>은 기사(騎射)를 좋아하여 사냥을 나가
비를 만나서 사간(沙干) <금상金相>의 집에 들어갔다.
<금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은 얼굴이 예쁘고 착하고 교태가 있어
<선통善通>이 <방원邦媛>을 유혹하여 사통하여 딸을 낳고 <방원>을 궁에 들여보내니
<질지銍知>의 총애를 받아 아들 <겸지鉗知>를 낳았다.
이때 <선통善通>은 이미 죽었고
<하희河喜>의 아들 <가지嘉知>가 병이 많아 <겸지鉗知>로 후사를 바꾸려고
<치수治水>와 <오석鳥石>이 경쟁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하희河喜>는 <백흔白欣>공의 딸이다.
<치수治水>와 <돌지突知>는 모두 <인덕仁德>의 아들이다.
우리에게 충성하여 힘써 <방원邦媛>의 소속을 배척하니
<질지銍知>가 싫어하여 정쟁이 일어났다.
날씨가 따뜻하여 봄과 같았다.
복숭아와 오야꽃이 활짝 피니 왕과 옥지궁이 말을 타고 야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늙은 노인이 오리를 삶아 진상하며 그 아들에게 작위를 내려줄 것을 청하여
왕이 허락하고자 하니 옥지궁이 말하기를
"부인이 말을 타고 인가에 들어왔으니 이미 체모를 잃었습니다.
하물며 작위를 함부로 내려 믿음을 잃으면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그말이 가상하다고 여겨 그만 두었다.
十二月 召蓮帝海梁 于海宮 五宮獻壽布 于王及玉芝宮
鳥石入朝 命視南路軍事 初銍知弟突知 娶我實相公女 生子
鳥石英勇 有將才 至是邦媛讒之 鳥石乃歸于我
加耶以干只代山戶爲將軍
沙梁宮主病 以王妹毗惠爲葛川宮大監
建蝴蝶樓 以爲骨女演舞之所
以剡臣實竹阿珍宗智世路爲海飡 善牟馬欣白里爲韓飡 寸牟曲欣好助爲阿飡
以洪器順力好含能牟爲級飡 以妙心爲音聲大監
12월, <연제蓮帝>와 <해량海梁>을 해궁으로 불렀다.
오궁(五宮)이 왕 및 옥지궁에게 수포(壽布)를 바쳤다.
<오석鳥石>이 입조하여 남로군사를 시찰토록 명하였다.
처음에 <질지>의 동생 <돌지>가 우리 <실상>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오석鳥石>을 낳았다.
돌지(새경) - 오석(458-522)
<오석鳥石>은 영특하고 용맹하여 장수의 재능이 있었는데
이제와서 <방원邦媛>이 참소하여 <오석鳥石>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가야가 <간지干只>를 대신하여 <산호山戶>를 장군으로 삼았다.
<사량沙梁>궁주가 병이나서 왕의 여동생 <비혜毗惠>를 갈천궁 대감으로 삼았다.
호접루(蝴蝶樓)를 건축하여 골녀의 연무장(演舞場)으로 하였다.
<염신剡臣>, <실죽實竹>, <아진종阿珍宗>, <지세로智世路>를 해찬으로
<선모善牟>, <마흔馬欣>, <백리白里>를 한찬(韓飡)으로
<촌모寸牟>, <곡흔曲欣>, <호조好助>를 아찬으로
<홍기洪器>, <순력順力>, <호함好含>, <능모能牟>를 급찬으로
<묘심妙心>을 음성대감(音聲大監)으로 삼았다.
소지왕 7년(485) 목우(木牛) 乙丑
正月 王還 自海宮 受朝 明宮
以玉芝宮爲璽宮 以兵婆爲璽宮藥臣
善兮生 王女保道
大元夫人宝美薨 壽八十二 葬于美海陵 宝美者 多婆那王女也 從美海王 入我
得寵于老王 生子女十二人 及蓮帝海梁得寵以來 其兄弟 日益貴顯 世以爲大元族
老王初 上老國奇 常言 王氣在海島中 不百年 而有援骨之兆 其言驗矣
정월, 왕이 해궁에서 돌아와 명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옥지궁{후황}을 새궁(璽宮)으로 하고
<병파兵婆>를 새궁(璽宮) 약신(藥臣)으로 삼았다.
<선혜善兮>가 왕의 딸 <보도保道>를 낳았다.
이 <보도>와 법흥대제 <모진>이 낳은 <지소(515- )>는
진흥대제 삼모진의 어머니로 진골정통의 종(宗)이 된다.
대원(大元)부인 <보미宝美(404-485)>가 죽었는데 춘추 82세였다.
미해릉(美海陵)에 장사를 지냈다.
<보미宝美>는 다파나(多婆那)의 왕녀로 <미해美海>왕을 따라 우리에게 왔다.
노왕(老王){눌지}의 총애를 얻어 자녀 12명을 낳았고,
<연제蓮帝>와 <해량海梁>이 총애를 얻은 이래로
그 형제들은 날마다 존귀하고 이름이 높아졌다.
<연제>와 <해량>은 <보미>의 외손녀이다.
대대로 대원(大元)족(族)이 되었다.
<보미>는 대원신통의 조(祖)이다.
노왕의 초기에 상노국(上老國){다파나}에 뛰어남이 있어 항상 말하기를
임금이 날 조짐이 바다섬 안에 있다고 하였다.
백년이 되지 않았는데 골품을 떠받치는 조짐이 있어 그 말이 영험이 있었다.
* 보미(404-485)의 자녀(4남8녀)
보미(미해) - 나해(419- )
보신(421-485)
보량(429-485)
사량(432-493)
호량(440- )
보근(445-522)
보미(보해) - 장이(425-490)
보미(눌지) - 보심(423- )
모량(434-503)
보미(등흔) - 미량(436- )
숙흔(438-502)
二月 命智弗路 築仇伐城
以五宮爲九宮 天宮園君 地宮善兮 人宮蓮帝 日宮海梁 月宮沙洗
春宮俊明 夏宮翠凰 秋宮宝兮 冬宮蘭陵
玉房洪壽 金房宝玉 銀房翡凰 鶴房牟凌牟池 鸞房妙梁英陵
是月 宝留生 牟大女元只
末曷遣使請和 獻良馬宝玉 與句麗生欠故也
王欲不許 烏含曰 “北虜無信 來不足以喜 亦不可拂其情也 只可順勢 而應之 而已”
乃厚遇 而還之
沙氏生 出忠女淑姬
王與玉芝宮 觀射 于北川 賞壯士
2월, <지불로智弗路>에게 구벌성(仇伐城)을 축조하라고 명하엿다.
오궁(五宮)을 구궁(九宮)으로 하였다.
천궁은 <원군園君>으로 지궁은 <선혜善兮>로 인궁은 <연제蓮帝>로
일궁은 <해량海梁>으로 월궁은 <사선沙洗>으로 춘궁은 <준명俊明>으로
하궁은 <취황翠凰>으로 추궁은 <보혜宝兮>로 동궁은 <란릉蘭陵>으로
옥방은 <홍수洪壽>로 금방은 <보옥宝玉>으로 은방은 <비황翡凰>으로
학방은 <모릉牟凌>과 <모지牟池>로 란방은 <묘량妙梁>과 <영릉英陵>으로 하였다.
이달 <보류宝留>가 <모대牟大>의 딸 <원지元只>를 낳았다.
말갈이 사신을 보내어 양마와 보옥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였다.
고구려와 흠이 생겼기 때문이다.
왕이 화친을 허락하지 않으니 <오함烏含>이 아뢰기를
" 북쪽의 오랑캐는 믿지 못하나 찾아와서 웃으며 부족함을 말하니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인정이라, 단지 순하게 응대하여 물리침이 옳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후하게 접대하여 돌려보냈다.
<사씨沙氏>가 <출충出忠>의 딸 <숙희淑姬>를 낳았다.
왕과 옥지궁이 북천에서 활쏘기를 관람하고 장사(壯士)에게 상을 내렸다.
三月 以沈凰爲龍房 賜懶凰金紫衣
古自君發惠生 孝德子契德
阿氏生 女咸氏 王命智度路 賜米 視兒
3월, <침황沈凰>을 용방(龍房)으로 하고 <라황懶凰>에게 금자의(金紫衣)를 내렸다.
고자군(古自君) <발혜發惠>가 <효덕孝德>의 아들 <계덕契德>을 낳았다.
아씨阿氏가 딸 <함씨咸氏>를 낳으니 왕이 쌀을 내리고
<지도로智度路>에게 아기를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四月 以生日 賜酺 命州縣 恤四窮
行大祭 于始祖靈廟 置祭家二十
以毗己爲神官伊飡 伐智爲護城伊飡 章伊爲大等伊飡 靑市爲兵官匝判
以毗己女太悅 妻鳥石 賜爵一吉飡
4월, 왕의 생일이어서 잔치를 열어 술을 하사하고
주현(州縣)에 사궁(四窮)을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시조 영묘(靈廟)에서 대제(大祭)를 지내고 제가(祭家) 20곳을 두었다.
<비기毗己>를 신관이찬으로 <벌지伐智>를 호성이찬으로
<장이章伊>를 대등이찬으로 <청시靑市>를 병관잡판으로 삼았다.
<비기毗己>의 딸 <태열太悅>을 <오석鳥石>의 처로하고 일길찬의 작위를 내렸다.
五月 牟大遣苩加象文等 獻方物 請討末曷 不許
海梁生 女妙雪
習宝公妃宝梁宮主薨 年五十七
命剡臣 按京外獄事
大修玉淸池
知悅生 厚都女都悅 璽宮賜衣
5월, <모대牟大>가 <백가苩加>, <상문象文> 등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밀길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해량海梁>이 딸 <묘설妙雪>을 낳았다.
<습보習宝>공의 비(妃) <보량宝梁>궁주가 죽었다. 나이 57세였다.
<염신剡臣>에게 지방의 옥사(獄事)를 두루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옥청지(玉淸池)를 크게 보수하였다.
<지열知悅>이 <후도厚都>의 딸 <도열都悅>을 낳아 새궁(璽宮)이 옷을 내렸다.
六月 王與璽宮 謁葛川宮 王謂璽宮 曰 “今天宮多疾 願爲祭主 欲以代之 立汝之威”
璽宮諫 曰 “妾以竹長承寵 若爲天宮 無以法 牟大銍知 雖有內密安得 無外視乎”
王重其言 加璽宮 眞元通天之號 位在九宮之上
以竹長祠爲遠宮 王與璽宮善知 親祠之
宝兮生 王女好時
6월, 왕과 새궁(璽宮)이 갈천궁을 알현하고 왕이 새궁(璽宮)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천궁(天宮)이 질병이 많아 제주(祭主)를 원하니
너를 제주(祭主)로하여 위엄을 세우고자 한다."라고 하니
새궁(璽宮)이 간하여 말하기를
" 첩이 죽장(竹長)을 이어 총애를 입었으나
만약 천궁(天宮)이 되면 법이 없는 것입니다.
<모대牟大>, <질지銍知>가 비록 남몰래 내실을 얻었지만
바깥에서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그말을 중히 여겨 새궁(璽宮)에게 진원통천(眞元通天)이라는 이름을 더하고
직위를 구궁(九宮)의 위에 두었다.
죽장사(竹長祠)를 원궁(遠宮)으로 하고
왕과 새궁(璽宮), <선지善知>가 친히 죽장사(竹長祠)에 갔다.
<보혜宝兮>가 왕의 딸 <호시好時>를 낳았다.
七月 賜九宮 紫衣 有差
古自君孝德同發惠 入加耶
發惠旣 生契德 請以孝德爲君 乃命比智 冊孝德爲君 至是請入朝 先到加耶
王與璽宮 入凉臺 命智度路 聽政
7월, 구궁(九宮)에게 자의(紫衣)를 차등을 두어 내렸다.
고자군(古自君) <효덕孝德>이 <발혜發惠>와 동행하여 가야에 들어갔다.
<발혜發惠>는 이미 <계덕契德>을 낳아 <효덕孝德>을 군(君)으로 삼기를 청하니
<비지比智>에게 <효덕孝德>을 군(君)으로 책봉토록 명하였다.
이제와서 입조를 청하여 우선 가야에 도착하였다.
왕과 새궁(璽宮)이 량대(凉臺)에 들어가
<지도로智度路>에게 정사(政事)를 듣도록 명하였다.
八月 命彩典 品績 京外
以王妹沙洗爲智度路暖房
舒弗邯習宝公卒 壽六十六 王與璽宮 還自凉臺 爲之流涕 曰 “國不祚矣 大父去也”
盖爲璽宮之大父 故王亦冒稱也
公有脅力 善射累征北虜 有功 女園君爲天宮 子乃宿爲太王寵臣
智度路爲王寵臣 女宝兮亦爲王寵妾 故尊在王上 天下榮之 以太公禮葬之
命賜鳥生宮竹室宮等 年穀奴婢
命伊欣 問眞經 于章伊 章伊宝美子也 善鄕歌 好神仙 遊國內山川 無意於仕
置宅于城外林中 不與俗人通 王賢之 累問不見 王慮 其道之不傳 命伊欣 曰
“此老若沒 道何知乎 汝其從學之”
伊欣往 致上命 而問道 章伊偪 臥不答 又問則 笑曰
“貪色荒政 安能問道 汝其歸 語吾王”
伊欣不敢 固請一言可報 章伊昏然臨去 鼾聲若無人 王聞之 曰 “吾之過也” 乃遣善牟謝之
8월, 지방 실적을 품하라고 채전(彩典)에 명하였다.
왕의 여동생 <사선沙洗>을 <지도로智度路>의 난방(暖房)으로 하였다.
서불감 <습보習宝>공이 죽었다. 나이 66세였다.
왕과 새궁(璽宮)이 량대(凉臺)에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에 복이 없어, 대부(大父)가 갔구나”라고 하였다.
새궁(璽宮)의 대부(大父)로 하였기 때문에 왕 또한 대부(大父)로 칭하였다.
공은 위협하는 힘과 화살을 잘 쏘아 누차 북쪽 오랑캐를 정벌한 공이 있으며,
딸 <원군園君>은 천궁(天宮)이, 아들 <내숙乃宿>은 태왕의 총신이,
아들 <지도로智度路>는 왕의 총신이,
딸 <보혜宝兮> 또한 왕의 총애를 받는 첩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존경받음이 왕보다 위에 있었다.
천하가 그를 영화롭게 여겼고, 태공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조생궁(鳥生宮) 죽실궁(竹室宮) 등에게 년곡과 노비를 하사토록 명하였다.
<장이章伊>에게 진경(眞經)을 묻기를 <이흔伊欣>에게 명하였다.
<장이章伊>는 <보미宝美>의 아들이다.
향가를 잘 하고 신선을 좋아하고 나라 안 산천을 유람하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성밖 수풀 가운데 집을 두고 속인과 통하지 않으니 왕이 그를 현명하다고 하였다.
왕이 누차 그를 불렀으나 나오지 않아 그 도(道)가 전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이흔伊欣>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 이 노인이 만약 죽으면 누가 도(道)를 알겠는가?
너는 그의 학문을 따라야한다."라고 하였다.
<이흔伊欣>이 가서 왕의 명령이라며 도(道)를 물으니 다가외 누워 답하지 아니하여
또 물으니 웃으며 말하기를
" 색을 탐하여 정사를 어지럽게 하면서 도(道)를 물어 편안코자 한다고
너는 돌아가 우리 왕에게 말하라."라고 하니
<이흔伊欣>은 감히 단 한마디도 더 청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다.
<장이章伊>가 혼연히 나가려 하니 코고는 소리 뿐 사람이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며
<선모善牟>를 보내어 사과하였다.
九月 行大祭 于南桃園 廣集仙徒 釋眞經三元
王女阿亥生 順都子阿斗 王親視 賜米
王與璽宮 幸眞經堂 命太子俊登 釋經
大會骨女 于蝴蝶樓 王與璽宮 看舞 王亦與璽宮 起舞
是日 以智度路女宣世爲虎房 龍房虎房 皆璽宮枕婢也
王與璽宮 觀稼南郊 賜父老酒 璽宮親酌授首老
百姓山呼 璽宮萬歲 歡聲震野
王與璽宮 騎馬 以行百姓之中 百姓爭扶馬蹄 王大喜 謂璽宮 曰
“吾與汝共 此好民 樂無上也”
璽宮曰 “年登則民樂 民樂則吾夫妻可安 何不備倉 以救不時之飢乎”
王然之 命立璽宮倉 於南郊 時璽宮有震 王命賜米 同娠女 于沿路秉炬
而歸官道 成不衰人海 以爲太平盛事
9월, 남도(南桃) 동산에서 대제(大祭)를 지냈다.
선도(仙徒)를 널리 모집하여 진경삼원(眞經三元)을 주석토록 하였다.
왕의 딸 <아해阿亥>가 <순도順都>의 아들 <아두阿斗>를 낳아
왕이 친히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왕과 새궁(璽宮)이 진경당(眞經堂)에 행차하여
태자 <준등俊登>에게 경(經)을 주석하라고 명하였다.
골녀들을 호접루(蝴蝶樓)에 크게 모집하여 왕과 새궁(璽宮)이 골녀들의 춤을 보고
왕과 새궁(璽宮)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날 <지도로智度路>의 딸 <선세宣世>를 호방(虎房)으로 하였다.
용방(龍房), 호방(虎房)은 모두 새궁(璽宮)의 침비(枕婢)이다.
왕과 새궁(璽宮)이 남교(南郊)에서 벼를 추수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부로(父老)에게 술을 내리고 새궁(璽宮)이 친히 제일 나이 많은 부로에게 술을 따랐다.
백성과 새궁(璽宮)이 산호만세를 부르니 환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왕과 새궁(璽宮)이 말을 타고 백성의 가운데로 가니 백성이 경쟁하여 말굽을 받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새궁(璽宮)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와 너가 같이 이렇게 백성을 좋아하니 세상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라고 하니
새궁(璽宮)이 말하기를
" 해마다 곡식이 여무는 것은 백성의 즐거움이고
백성의 즐거움은 우리 부처(夫妻)의 안녕입니다.
어찌 창고를 준비하여 불시의 기근을 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남교에 새궁(璽宮)의 창고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새궁(璽宮)이 아이를 배었을 때 쌀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햇불을 잡고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 중에 임신한 여자를 동행하여 같이
관도(官道)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끝이 없어
태평한 시절이 되었다.
十月 孝德與發惠 入朝 謁王及璽宮 於明宮 命賜宴 于耐衰家 以慰之
竹室與奴碧仁通 王欲罪之 璽宮諫止之
設法歌唱宴 賜骨女上老 酒
10월, <효덕孝德>과 <발혜發惠>가 입조하여
명궁(明宮)에서 왕과 새궁(璽宮)을 알현하였다.
<내쇠耐衰> 집에서 잔치를 열어 위로 하였다.
<죽실竹室>과 노비 <벽인碧仁>이 상통하여 왕이 그 죄를 묻고자하니
<새궁璽宮>이 간하여 그만 두었다.
잔치를 열어 설법(設法)과 가창(歌唱)을 하고 골녀와 상노(上老)에게 술을 내렸다.
十一月 翡凰生 王子體黃 王恐 璽宮驚震 不敢親視 密遣剡臣 賜米 問兒
璽宮聞之 責王 王乃與璽宮 往見 曰 “此子雖好 不如汝生”
璽宮笑 曰 “生女恐傷 夫皇之心 不如不生”
王曰 “生子可爲太子 生女可配太子 何傷之有”
璽宮曰 “善知之時 上下禱之不得 况不禱乎”
王曰 “吾恐禱子 生女故也 然汝旣願之不得 不禱也” 乃命九宮上下 禱璽宮子
以鳥石爲將軍 命築仇伐城
孝德與發惠 歸古自
11월, <비황翡凰>이 왕의 아들 <체황體黃>을 낳았다.
왕이 새궁(璽宮)의 놀라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친히 살펴보지 못하고
몰래 <염신剡臣>을 보내어 아기를 묻고 쌀을 내렸다.
새궁(璽宮)이 그것을 듣고 왕을 책망하였다.
이에 왕과 새궁(璽宮)이 가서 보고 왕이 말하기를
" 이 아들을 비록 좋아하여도 너가 낳은 것만 못하다."하니
새궁(璽宮)이 웃으며 말하기를
" 딸을 낳아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부황의 마음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태자의 배필로 옳은 데
어찌 마음의 상함이 있겠는가?" 라 하니
새궁(璽宮)이 말하기를
" <선지善知>를 낳을 때 상하가 기도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아들을 얻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 나는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여 딸을 낳았다.
너는 이미 낳지 않기를 원하여 기도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이에 구궁(九宮) 상하(上下)에게 <새궁璽宮>이 아들을 낳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오석鳥石>을 장군으로 하여 구벌성(仇伐城)을 축성토록 명하였다.
<효덕孝德>과 <발혜發惠>가 고자(古自)로 돌아갔다.
十二月 伊飡宝信公卒 壽六十五 美海公次子也 母曰宝美也
公淸儉守德 事母之孝 善於医藥卜筮 久掌神官
入皇我宮 爲私臣 生宝器宝留 皆貴顯
以王弟毗羅爲古自監國 以比智爲神官匝判 以馬欣爲大等將軍
大雪 王與璽宮 行懶凰宮 賜宴
牟大遣使 入朝 吊宝信公也
王洗璽宮 于神池 賜宗女會宴
以匝判宝器爲太醫大監 善牟爲小監
以王妹俊朔 嫁馬欣 朔初爲習棠公妻 生三子 以棠老病 請改嫁
王問其所可 朔以馬告 乃命馬欣娶之
12월, 이찬 <보신宝信>공이 죽었다. 나이 65세였다.
<미해美海>공의 차자(次子)이다.
어머니는 <보미宝美>이다.
공은 청렴하고 덕을 지녔으며 어머니를 섬겨 효도하였다.
의약과 복서를 잘 하고 오래도록 신관(神官)을 관장하였다.
황아궁(皇我宮)에 들어가 사신(私臣)이 되어 <보기宝器>와 <보류宝留>를 낳으니
모두 다 신분이 귀하고 높은 벼슬을 하였다.
왕의 동생 <비라毗羅>를 고자(古自) 감국(監國)으로 <비지比智>를 신관잡판으로
<마흔馬欣>을 대등장군으로 하였다.
큰 눈이 내렸다.
왕과 새궁(璽宮)이 라황궁(懶凰宮)에 행차하여 잔치를 열었다.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여 <보신宝信>공을 조의 하였다
왕이 신지(神池)에서 <새궁璽宮>을 씻어 주고 종녀(宗女)를 모아 잔치를 열었다.
잡판 <보기宝器>를 태의대감(太醫大監)으로 <선모善牟>를 소감(小監)으로 하였다.
왕의 여동생 <준삭俊朔>을 <마흔馬欣>에게 출가시켰다.
<준삭俊朔>은 처음에 <습당習棠>공의 처가 되어 아들 셋을 낳고
<습당習棠>이 늙어 병이드니 개가를 청하였다.
왕이 누가 가능하냐고 물으니 <준삭俊朔>이 <마흔馬欣>을 고하여
<마흔馬欣>을 <준삭俊朔>에게 장가들라고 하였다.
소지왕 8년(486) 적호(赤虎) 丙寅
正月 王與璽宮 受朝 南桃
命西路將軍實竹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
靑華生 女明華
加耶复 以山戶爲將軍
정월, 왕과 새궁(璽宮)이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서로장군 <실죽實竹>에게 일선(一善) 경계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2성(城)을 개축하라고 명하였다.
<청화靑華>가 딸 <명화明華>를 낳있다.
가야가 다시 <산호山戶>를 장군으로 삼았다.
二月 以烏含爲大角干 乃宿爲伊伐飡 智度路爲兵官伊飡 毗己爲骨門伊飡
伐智爲神官伊飡 靑市爲護城伊飡
牟大以苩加爲兵官佐平
2월, <오함烏含>을 대각간으로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지도로智度路>를 병관이찬으로 <비기毗己>를 골문이찬으로
<벌지伐智>를 신관이찬으로 <청시靑市>를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모대牟大>가 <백가苩加>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三月 璽宮生 王女淨凰 賜酺
命剡臣复 出州縣按政
以叔欣爲伊飡 德知爲兵官匝判 車宿爲大等匝判
比智爲骨門匝判 宝器爲神官匝判 智登爲護城匝判
智弗路爲匝判 視北路 以阿珍宗爲南路將軍 智世路爲水路將軍
馬欣爲護城將軍 鳥石爲大等將軍 白里爲將軍
3월, 새궁(璽宮)이 왕의 딸 <정황淨凰>을 낳아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염신剡臣>을 다시 주현(州縣)에 보내어 정사(政事)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숙흔叔欣>을 이찬으로 <덕지德知>를 병관잡판으로 <거숙車宿>을 대등잡판으로
<비지比智>를 골문잡판으로 <보기宝器>를 신관잡판으로 <지등智登>을 호성잡판으로
<지불로智弗路>를 잡판으로 하여 북로를 시찰하게 하고
<아진종阿珍宗>을 남로장군으로 <지세로智世路>를 수로장군으로
<마흔馬欣>을 호성장군으로 <오석鳥石>을 대등장군으로
<백리白里>를 장군으로 하였다.
四月 野人與古自叛徒 再擧入寇 阿珍宗智世路山戶等 擊破之
虜其酋四文等 至京 四文請降 曰 “臣以巨右之謀 誤犯上國 抵罪 若得再生 願以效死”
乃許 賜宅 妻女以安之
4월, 야인과 고자(古自)의 반도(叛徒)들이 다시 들어와서 노략질하여
<아진종阿珍宗>, <지세로智世路>, <산호山戶> 등이 이들을 격파하였다.
경도(京都)에 다다른 오랑캐의 추장 <사문四文> 등을 사로잡으니
<사문四文>이 항복을 청하며 말하기를
" 신이 <거우巨右>의 모략으로 상국(上國)을 범하는 죄를 지었으나
만약 살려주신다면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집을 내려 처자식과 편안하게 살도록 허락하였다.
五月 擧宗子俊秀者 屬兵官 使之習武
王與璽宮 謁葛川宮 告生女
毗羅討南海賊 平之 移其民 于加耶
5월, 추장의 무리 중 준수한 자를 뽑아 병관에 소속시키고 무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왕과 새궁(璽宮)이 갈천궁(葛川宮)을 알현하고 딸을 낳았음을 고하였다.
<비라毗羅>가 남해의 해적을 토벌하여 그 백성을 가야에 이주시켰다.
六月 蓮帝生 女普仁
金官太子嘉知卒 以邦媛子鉗知請爲太子 朝廷多以爲不可
智度路曰 “不可强人之統” 乃許之
邦媛以此德智度路 而怨朝廷 多不用命
6월, <연제>가 딸 보인을 낳았다.
금관 태자 <가지嘉知>가 죽었다.
<방원邦媛>의 아들 <겸지鉗知>를 태자로 삼기를 청하니
조정(朝廷)의 많은 사람들이 불가하다고 하니
<지도로智度路>가 말하기를
" 강한 사람의 혈통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邦媛以此德 智度路 而怨朝廷 多不用命
<방원邦媛>이 <지도로智度路>의 이 덕으로 조정(朝廷)을 원망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음이 많았다.
七月 阿羅君小裊人遣使 獻女樂 不受
以富理嫡子富世爲骨門阿飡 以王女高惠妻之 富世乃王妹寸己之生也 聰明好學 故拔之也
改靈廟爲神宮 大營其宇 于奈乙井 命宝器 董其役
7월, 아라군(阿羅君) <소뇨인小裊人>이 사신을 보내어
악기를 연주하는 기녀를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부리富理>의 적자(嫡子) <부세富世>를 골문아찬으로 삼고
왕의 딸 <고혜高惠>를 처로 하였다.
<부세富世>는 왕의 여동생 <촌기寸己>가 낳았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이에 발탁한 것이다.
영묘(靈廟)를 신궁(神宮)으로 바꾸고 나을정(奈乙井)에 크게 지어 경영토록 하였다.
<보기宝器>에게 그 역사(役事)를 단단히 하도록 명하였다.
八月 大閱兵車 于狼山之南
績京外 彩于京都 賞沙伐女干衣等五人
俊明宮 生子好知
8월, 랑산(狼山)의 남쪽에서 사병과 전차를 크게 열병하였다.
경도(京都)의 채전(彩典)에서 지방의 실적을 조사하여
사벌 여(女) <간의干衣> 등 5인에게 상을 내렸다.
<준명俊明>궁이 아들 <호지好知>를 낳았다.
九月 設月歌會 于南桃
妙梁生 王女妙德 賜米
9월, 남도(南桃)에서 월가회(月歌會)를 열었다.
<묘량妙梁>이 왕의 딸 <묘덕妙德>을 낳아 쌀을 내렸다.
十月 孝德逃 歸加耶 請罪
先是監國毗羅 通發惠 惠上書 請立監國 朝廷不許 故惠乃囚 孝德謀亂
王命阿珍宗 召毗羅發惠 歸京 許孝德歸古自
沙洗宮生 女沙龍
以發惠妹發胡爲古自女主 妻孝德
先是胡從其母耐衰 入京 能習骨禮 至是代惠
以習棠爲古自監國
10월, <효덕孝德>이 도망하여 가야로 돌아가 죄를 청하였다.
이에 앞서 감국(監國) <비라毗羅>가 <발혜發惠>와 사통하여
<발혜發惠>가 감국(監國)을 군주로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효덕孝德>이 모반을 꾀하여 <효덕孝德>을 가두었다.
왕이 <아진종阿珍宗>에게 명하여 <비라毗羅>와 <발혜發惠>를
서울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효덕孝德>을 고자(古自)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사선沙洗>궁주가 딸 <사룡沙龍>을 낳았다.
<발혜發惠>의 동생 <발호發胡>를 고자(古自)여주(女主)로 삼고
<효덕孝德>의 처로 하였다.
이에 앞서 <발호發胡>가 어머니 <내쇠耐衰>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골예(骨禮)를 배워
이때까지 <발혜發惠>가 대신하였다.
<습당習棠>을 고자(古自) 감국(監國)으로 삼았다.
十一月 孝德自古自 入京 娶發胡 于乃宿邸 而謁王 于明宮
王與璽宮 入海宮
竹室生 碧仁女竹仁 賜碧仁沮知位
太子俊登與妃阿氏 率仙徒 入阿瑟羅 訪上仙 而歸
賜紫衣 于九宮及王妹王女
11월, <효덕孝德>이 고자(古自)로부터 서울로 들어왓다.
<내숙乃宿>의 저택에서 <발호發胡>에게 장가들고 명궁(明宮)에서 왕을 알현하엿다.
왕과 새궁(璽宮)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죽실竹室>이 <벽인碧仁>의 딸 <죽인竹仁>을 낳아
<벽인碧仁>에게 저지(沮知)의 품계를 내렸다.
태자 <준등俊登>과 태자비 <아씨阿氏>가 선도(仙徒)를 인솔하여
아슬라(阿瑟羅)에 들어 가 상선(上仙)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구궁(九宮) 및 왕의 여동생과 왕의 딸에게 자의(紫衣)를 내렸다.
十二月 野人遣使 請和 不許
以城山爲將軍 城山者春山之庶子也 有勇善射 在北路多功 智弗路力薦之 爲將軍
散骨之爲將 始于此
賜孝德發胡 京都第及奴婢
錄京外寒民 賜布穀 有差
12월, 야인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성산城山>을 장군으로 삼았다.
<성산城山>은 <춘산春山>의 서자(庶子)이다.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북로에 있었을 때 많은 공을 세웠다.
<지불로智弗路>가 그를 힘써 추천하여 장군으로 하였다.
산골(散骨)로 장군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효덕孝德>과 <발호發胡>에게 경도(京都)의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지방의 가난한 백성을 찾아내어 베와 곡식을 차별있게 내렸다.
소지왕 9년(487) 화토(火兎) 丁卯
正月 王與璽宮 受朝 于海宮
太太鳥生薨 王還自海宮 吊之 曰 “太太璽宮之祖也 不可不嚴也”
乃命伐智 營其葬 如太后禮 王與璽宮 親爲祭主
정월, 왕과 새궁(璽宮)이 해궁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태태(太太) <조생鳥生>이 죽었다.
왕이 해궁으로부터 돌아와서 조의하며 이르기를
" 태태는 새궁의 할머니이다. 삼가하지 아니함은 옳지 않다."라고 하며
<벌지伐智>에게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루라고 명하고
왕과 새궁(璽宮)이 친히 제주(祭主)가 되었다.
조생(습보) - 지도로(라황) - 후황
22대 지증대제 <지도로(437-514) 재위 500-513>는 진골정통 조생의 아들이다.
二月 奈乙神宮成 行大祭
命孝德發胡 許謁神宮
2월,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이 완성되어 대제(大祭)를 지냈다.
<효덕孝德>과 <발호發胡>에게 명하여 신궁(神宮)에서 알현토록 허락하였다.
三月 始置四方郭驛 命中外有司 大修官道
置錦典 以沙伐女干衣爲錦母 命骨門婢女習之
進習棠 爵伊飡
3월, 처음으로 사방(四方) 성곽에 역(驛)을 설치하고
나라 안팎 관리에게 관도(官道)를 크게 보수토록 명하였다.
금전(錦典)을 설치하여 사벌(沙伐) 여(女) <간의干衣>를 금모(錦母)로 삼고
골문의 비녀(婢女)들이 배우도록 명하였다.
<습당習棠>에게 이찬의 작위를 내렸다.
四月 王生日 賜酺群臣
賜孝德發胡紫衣 召入宮中 賜食 命孝德發胡 歸國
善兮生 妙心女吾道 于地宮
上自寵璽宮以來 九宮罕幸 善兮乃與妙心 私通 至是生女 宮中多諱之
4월, 왕의 생일에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효덕孝德>과 <발호發胡>에게 자의(紫衣)를 내리고 궁중으로 불러 식사를 하였다.
<효덕孝德>과 <발호發胡>를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선혜善兮>가 <묘심妙心>의 딸 <오도吾道>를 지궁(地宮)에서 낳았다.
왕이 새궁(璽宮)을 총애한 이래로 구궁(九宮)에 행차하는 것이 뜸하여
이에 <선혜善兮>와 <묘심妙心>이 사통하여 딸을 낳으니
궁중의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였다.
조생(내숙) - 선혜(459-518)(묘심 450?- ) - 오도(487-539)
五月 牟大遣其弟牟支 入朝
5월, <모대牟大>가 동생 <모지牟支>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六月 海梁生妙能
古自君孝德 獻黃鶴五花蚌 于璽宮
6월, <해량海梁>이 <묘능妙能>을 낳았다.
고자군(古自君) <효덕孝德>이 새궁(璽宮)에게
황계(黃鶴)와 오화방(五花蚌){조개}을 바쳤다.
七月 葺月城
日仙末厚上化 以妙心爲日仙 行明
智度路禁 妙心私置軍馬
加耶女王阿利病 王夫誠國 代政
7월, 월성(月城)을 보수하였다.
일선(日仙) <말후末厚>가 죽어 <묘심妙心>을 일선(日仙)으로 삼고 행명(行明)하였다.
<지도로智度路>가 <묘심妙心>이 사사로이 군마(軍馬)를 비치하는 것을 금하였다.
가야 여왕 <아리阿利>가 병이나서
여왕의 남편 <성국誠國>이 정사(政事)를 대신하였다.
八月 蘭陵生 女息蘭
太子俊登有疾 求靈藥 于子山
8월, <란릉蘭陵>이 딸 <식란息蘭>을 낳았다.
태자 <준등俊登>이 질병이 나서 자산(子山)에서 영약(靈藥)을 구하였다.
九月 阿氏生 太孫阿登 王與璽宮 視兒 賜米
聖明上書 請入朝 是誠國執政 召靑華 逼通之故也 乃遣好助 于加耶 責之
9월, <아씨阿氏>가 태손(太孫) <아등阿登>을 낳아서
왕과 새궁(璽宮)이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성국誠國>이 집정하여 <청화靑華>를 불러 강제로 통정할 것을 다그치니
<성명聖明>이 입조를 청하는 상서(上書)를 올렸다.
이에 <호조好助>를 가야에 보내어 문책하였다.
十月 雷 桃李華 王問政得失 于阿飡以上
阿羅與居陀 爭地 加耶不能決 小裊衣乃與誠國 不和
10월, 천둥이 치고 복숭아외 오야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왕이 아찬 이상에게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물었다.
아라(阿羅)와 거타(居陀)가 서로 땅을 다투니 가야가 해결하지 못하여
<소뇨의小裊衣>와 <성국誠國>이 화친하지 못하였다.
十一月 遣鳥石 問北征 軍士
王與璽宮及蓮帝 入海宮
誠國以靑華爲妾 命聖明出外視軍 朝廷責之
王召舟楫 于海宮 觀火 于海上
孤 入葛川宮 王還 自海宮
11월, <오석鳥石>을 보내어 북쪽 정벌 군사(軍士)에 대하여 물었다.
왕과 새궁(璽宮) 및 <연제蓮帝>가 해궁으로 들어갔다.
<성국誠國>이 <청화靑華>를 첩으로 삼고 <성명聖明>을 밖으로 쫓아내어
군을 시찰하라고 명하니 조정(朝廷)에서 그것을 문책하였다.
왕이 해궁에서 선박을 불러 해상에서 불을 관람하였다.
혼자 갈청궁(葛川宮)에 들어가니 왕이 해궁으로부터 돌아왔다.
十二月 狗毛國人來 獻方物 其國在沃沮之北萬餘里
夏食魚草 冬食獸肉 以雪爲家 以狗爲妻 驃猂爲賢 乃賜錦帛穀鍾 以歸之
王幸剡臣家 幸碧我 我本捺己長者波路妻也 剡臣奪之爲妾 生子魏花
至是又被上寵
發惠生 毗羅子惠路 賜米
12월, 구모국(狗毛國) 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그 나라는 옥저(沃沮)의 북쪽 만여리에 있다.
여름에는 고기와 풀을 먹고 겨울에는 짐승을 잡아 먹는다.
눈으로 집을 짓고 개를 처로 여긴다.
날래고 사나운 자를 현인(賢人)이라 한다.
비단과 곡식의 종자를 주어 돌려 보냈다.
왕이 <염신剡臣>의 집에 행차하여 <벽아碧我>를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벽아碧我>는 본래 <날기捺己>의 장자 <파로波路>의 처이다.
<염신剡臣>이 빼앗아 첩으로 삼고 아들 <위화魏花>를 낳았다.
이제와서 다시 왕의 은총을 입었다.
<발혜發惠>가 <비라毗羅>의 아들 <혜로惠路>를 낳아 쌀을 내렸다.
염신(벽아) - 위화(487- )
신라 최초의 화랑이며 1대 풍월주인 <위화魏花>는 487년생이다.
소지왕 10년(488) 황룡(黃龍) 戊辰
正月 王與璽宮蓮帝 受朝 明宮
王將幸天泉亭 有書 出池 曰射琴匣 乃射琴匣有徒 隱內而斃
索其奸狀 謀出妙心 命剡臣按之
賜妙心死 命蘭陵英陵 出宮 待罪
命廢天宮地宮 出居神宮
時妙心獄事 多連宮中 上下洶洶 智度路戒 剡臣止之
請王移宮月城 王命 卽行之
정월, 왕과 새궁(璽宮)과 <연제蓮帝>가 명궁 (明宮)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니 못에서 '금갑(琴匣)을 쏘아라'라는 글이 나왓다.
이에 금갑을 쏘니 금갑 안에 숨어있는 사람이 쓰러져 죽었다.
간사한 행위의 진상을 살피니 <묘심妙心>의 모반이 드러나
<염신剡臣>에게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묘심妙心>에게 사약을 내리고
<란릉蘭陵>과 <영릉英陵>은 출궁하여 죄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천궁(天宮)과 지궁(地宮)을 폐하고 나가서 신궁(神宮)에 거주토록 명하였다.
<묘심妙心>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궁중이 많이 연루되어 상하 인심이 흉흉하여
<지도로智度路>가 경계하고 <염신剡臣>이 막았다.
왕에게 월성(月城)으로 이궁할 것을 청하니 왕은 즉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二月 乃宿稱罪 自免 王許之
王與璽宮 如曷川宮 命智度路 攝行王事
燕公甫入朝 牟大妻弟也 請婚宗女 以俊朔女棠朔妻之 許謁神宮
命廢日月仙
王與璽宮 幸一善郡 賜穀鰥寡孤獨 有差 放州郡輕囚
2월, <내숙乃宿>이 죄를 칭하며 스스로 물러나고자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왕과 새궁(璽宮)이 갈천궁에 가서 <지도로智度路>에게 왕의 일을 대신토록 하였다.
연공(燕公) <보甫>가 입조하였디.
<모대牟大> 처의 동생이다.
종녀(宗女)와 혼인을 요청하여 <준삭俊朔>의 딸 <당삭棠朔>을 처로하고
신궁(神宮)에서 알현토록 허락하였다.
일선(日仙)과 월선(月仙)을 폐하라고 명하였다.
왕과 새궁(璽宮)이 일선군(一善郡)에 행차하여
사궁(四窮)에게 곡식을 차별있게 내리고
주군(州郡)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토록 하였다.
三月 王親政 于月城眞宮 加智度路 爵舒弗邯
璽宮有震 賜酺百官
聖明入朝 謁王及璽宮 而訴情 璽宮憐之 請王召靑華
以王女旱知 妻璽宮異母弟宣登 旱知天宮園君生也
園君廢居 聞璽宮愛宣登 使人 請嫁 而作親也
3월, 왕이 월성 진궁(眞宮)에서 친정(親政)하고
<지도로智度路>에게 서불감의 작위를 더하였다.
새궁이 임신하여 백관에게 술을 내렸다.
<성명聖明>이 입조하여 왕 및 새궁(璽宮)을 알현하고 사정을 호소하니
새궁(璽宮)이 가련히 여겨 왕에게 <청화靑華>를 불러 들이도록 청하였다.
왕의 딸 <한지旱知>를 새궁(璽宮)의 배다른 동생 <선등宣登>의 처로 하였다.
<한지旱知>는 천궁(天宮) <원군園君>이 낳았다.
천궁을 폐하니 새궁(璽宮)이 <선등宣登>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왕이 친히 <한지旱知>를 <선등宣登>에게 시집보낼 것을 작정하엿다.
이때 <선등> 20세, <한지> 17세이다.
四月 王以璽宮爲天宮 宮固辭 不得乃就之 曰 “胡人無人 竟以我爲”
王曰 “乃汝之福也” 命百官 朝賀于天宮
置玉人署 掌天宮寶玩及宮中裝飾 以厚都爲其大監
以順都爲護宮將軍 王聞 順都之妻阿亥有娠 命入侍璽宮
將乳王子 故乃授是職 于順都 始設之也
舍知木人 以石鎔作五色珠 以爲玉人署大舍
靑華自加耶 至
以兵婆爲天宮藥頭
復以九宮爲五宮 天宮厚凰 地宮蓮帝 人宮沙洗 日宮俊明 月宮宝玉
命群臣 勿荒多色
4월, 왕이 새궁(璽宮)을 천궁으로 하고자 하니 새궁(璽宮)이 고사(固辭)하였다.
부득이 나아가 아뢰기를
" 사람이 없어 하필이면 저입니까?" 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너의 복이다." 라고 하였다.
백관에게 명하여 천궁에서 조하(朝賀)를 받도록 하였다.
옥인서(玉人署)를 설치하여 천궁의 보물과 골동품 및 궁중의 장식물을 관장토록 하고
<후도厚都>를 옥인서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순도順都>를 호궁장군으로 삼았다.
<순도順都>의 처 <아해阿亥>가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새궁(璽宮)에 들어와 새궁(璽宮)의 시중을 들도록 명하였다.
장차 태어날 새궁(璽宮)의 왕자에게 젖을 먹이고자 하여
호궁장군직을 <순도順都>에게 내리니 처음으로 설치된 직이다.
사지(舍知) 목인(木人)이 돌을 녹여 오색 구슬을 만드니
옥인서(玉人署)의 대사(大舍)로 삼았다.
<청화靑華>가 가야로부터 돌아왔다.
<병파兵婆>를 천궁 약두(藥頭)로 삼았다.
다시 구궁(九宮)을 오궁(五宮)으로 하였다.
천궁은 <후황厚凰>으로 지궁은 <연제蓮帝>로 인궁은 <사선沙洗>으로
일궁은 <준명俊明>으로 월궁은 <보옥宝玉>으로 하였다.
군신들에게 황음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五月 蓮帝生 王子山宗 王大悅 賜酺百官
帝復幸靑華 命聖明歸國 誠國恐 明作亂 召之故也 聖明乃隨阿羅使 奔阿羅
以碧仁爲天宮小衛
魏侵西海 牟大擊退之
5월, <연제蓮帝>가 왕의 아들 <산종山宗>을 낳아 왕이 크게 기뻐하며
백관들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왕이 다시 <청화靑華>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성명聖明>을 귀국토록 명하였다.
<성국誠國>이 <성명聖明>을 간통하여 <성명聖明>을 부르니
<성국誠國>이 두려워 하여
<성명聖明>은 아라(阿羅)의 사신을 따라 아라(阿羅)로 도망하였다.
<벽인碧仁>을 천궁 소위(小衛)로 삼았다.
위(魏)가 서해(西海)를 침입하니 <모대牟大>가 격퇴하였다.
장수56년{AD488}무진,
<모대牟大>는 魏와 단교하고 魏의 악행을 南齊에 밝혔다.
그랬더니, 등주(登州)의 수장(守将) <이연李延>이 몰래 섬으로 들어가서
<모대牟大>가 사냥하러 왔음을 알아내고는 그를 사로잡고자 하였다.
<모대牟大>가 이를 알아채고 군병을 보내서 맞싸웠다.
<이연李延>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더니,
<모대牟大>는 점차로 땅을 되찾으며 북진하였다.
감국황제는 상이 노심할까를 걱정하여 불문에 부쳤다.
<모대牟大>가 글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길;
“신의 조상 <온조溫祖>는 <동명東明>의 친아들이고 <유리琉璃>의 의붓아들이어서,
한남(汗南)땅 구다국(勾茶國)에 봉함을 받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지더니, 두 분 황제의 뜻하신 바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뉘어져서 땅과 경계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패하(浿河) 참사는 실로 황구할 따름입니다.
이전의 신하 <개로盖鹵>는 머리를 바쳐 더러움을 씻었음인즉,
형제의 나라들이 오래도록 서로의 직분에 흠결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감국황제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널리 올바르시니,
위로는 조종님들이 베푸신 한 번의 은혜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큰 나라가 자식을 기르는 은택으로써 한남(汗南)의 땅을 돌려주시어서
이 골육이 {그 땅에서} 발붙이고 뿌리에 보답할 수 있게 하여주신다면,
신은 훨훨 날아서 <동명>의 큰 꿈을 좇아 서쪽의 중원으로 들어가
버릇없는 싹수들을 주살하고 참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 천손의 후예는 무지무지한 행운으로 여기겠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감국은 웃으며, 이르길;
“<비처毗處>가 삼모성(三牟城)을 고치고 월성(月城)으로 이사하였으니,
놈은 편안히 웅진(熊津)에 거주하지 아니하고 <비처毗處>를 살피다가 꼬여내어
머지않아 사로잡을 것이니, 잠시 <모대牟大>에게 그 일을 맡깁시다.”
라 하였다.
<남당유고 장수대제기>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년(488)
위가 군대를 보내 우리를 정벌하러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為百濟所敗
<자치통감>
위가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동이 백제국>
이 해(490년)에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서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무리를 이끌어 오랑케군을 습격하고 크게 부수었다.
남제서는 490년의 장황한 기록 중 제일 끝에
동성대왕이 북위를 물리친 것을 짤막하게 언급해 놓았다.
기병 수십만을 동원한 전투는 북위의 국운을 건 꽤 큰 전투이다.
이겼으면 상당히 장황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북위는 해전에 약해 양자강도 두려워하였는데 기마병이 서해를 건널 수 없다.
또 백제를 공격하기위해 수십만을 이동시킬 배는 수천 척이 필요하고
이동을 하더라도 안전에 보장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제를 공격해서 얻어지는 실익이 없다.
백제가 대륙에 존재해서 그들의 턱밑을 치고 올라오는 상황이라야
공격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북위는 백제에게 패해 493년 팽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한다.
그들은 자국의 찬란한 역사는 크게 기록하고
창피한 역사는 짧게 아니면 침묵으로 일관하며
남제서 백제의 기록을 고의로 삭제까지 하여 은폐를 하려고 하는데
김부식은 이렇게 큰 백제의 승리의 역사를
자치통감의 기록 중 글자만 바꾸어 기록하고 있다.
六月 東陽獻六眼龜 腹下有文字 命奈麻以上 釋之
宝器奏 曰 “光照六合 當王天下” 是乃神龜 可祠 乃立神龜祠 以畜之
起凉臺 于南山
6월, 동쪽 지방에서 6개의 눈을 가진 거북이를 바쳤다.
배 아래에 문자가 있어 나마(奈麻) 이상에게 이를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보기宝器>가 아뢰기를
" 빛이 천지 사방을 비추니 마땅히 왕의 천하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구(神龜)라 이름하고 신구사(神龜祠)를 세워 기르도록 하였다.
남산(南山)에 양대(凉臺)를 세웠다.
七月 命阿珍宗 督築刀那城
王與蓮帝山宗 謁神宮
干衣織細上綃 獻天宮
時天宮精敏明麗 好奢侈器具 皆用珠玉
命干衣 織水色細上綃薄 若不着 宮喜而賞之
7월, <아진종阿珍宗>에게 도나성(刀那城) 축조를 감독하라고 명하였다.
왕과 <연제蓮帝>, <산종山宗>이 신궁(神宮)을 알현하였다.
<간의干衣>가 명주실을 가늘게 짜서 천궁(天宮)에 바쳤다.
이때 천궁(天宮)은 정제하고 민첩하며 맑고 아름다우며
사치를 좋아하여 그릇과 도구 모두 구슬과 옥을 사용하였다.
<간의干衣>에게 명하여 물색으로 아주 가늘고 얇게 짜서 몸에 붙지 않으면
기뻐하여 상을 내렸다.
八月 王與天宮地宮山宗阿亥知悅等 入海宮
命智度路 攝行王事
以伐智爲兵官伊飡 靑市神官伊飡 叔欣護城伊飡
命太子及妃 祀玄牝廟 禱天宮子也
8월, 왕과 천궁, 지궁, <산종山宗>, <아해阿亥>, <지열知悅> 등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지도로智度路>에게 왕의 일을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벌지伐智>를 병관이찬으로 <청시靑市>를 신관이찬으로
<숙흔叔欣>을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태자와 태자비에게 현빈묘(玄牝廟)에 제사 지내고
천궁(天宮)이 아들을 낳기를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九月 阿亥生 順都女杜杜里 于海宮 賜米 視兒
誠國遣使 獻方物 于天宮
命五宮 禱天宮子
始置大道署 命掌仙巫
遣剡臣 勞父老 于南郊 品稼 賜酒
9월, <아해阿亥>가 <순도順都>의 딸 <두두리杜杜里>를 해궁에서 낳아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 보았다.
<성국誠國>이 사신을 보내어 천궁에 방물을 바쳤다.
오궁(五宮)에 명하여 천궁이 아들을 낳도록 기도하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대도서(大道署)를 설치하여 선무(仙巫)를 관장토록 명하였다.
<염신剡臣>을 남교에 보내어 부로(父老)를 위로하고 추수를 품평하고 술을 내렸다.
十月 乃宿請 遊加耶 許之
王洗天宮 于海宮 召五宮 賜宴
王與五宮 還自海宮 親政 于眞宮
10월, <내숙乃宿>이 가야에 유람하기를 청하여 허락 하였다.
왕이 해궁에서 천궁을 씻어 주고 오궁(五宮)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
왕과 오궁이 해궁으로부터 돌아와 진궁(眞宮)에서 친정(親政)하였다.
十一月 俊明宮 生俊治
王洗天宮 于神池 賜金紫衣
王謁玄牝廟 又祀神龜祠
吉士淸息 自野國 逃歸 言 可伐之狀
王問 于智度路 對曰 “聖人不怒 而威 何用兵乎” 王然之
11월, <준명俊明>궁이 <준치俊治>를 낳았다.
왕이 신지(神池)에서 천궁을 씻어 주고 금자의(金紫衣)를 내렸다.
왕이 현빈묘(玄牝廟)를 알현하고 또 신구사(神龜祠)에서 제사를 지냈다.
길사(吉士) <청식淸息>이 야국(野國)에서 도망하여 돌아 와 말하기를
야국을 칠 수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왕이 <지도로智度路>에게 물으니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성인은 성내지 아니하고, 위엄을 보입니다. 어찌하여 병사를 사용하려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겼다.
十二月 天宮生 王子芬宗 大赦 賜酺五日
王親祀 神宮及葛川宮 告生子
妙梁生 子比梁 于比智家
王枕天宮之膝 而睡 阿亥知悅 深羨之 賀宮多福 宮曰
“我亦與汝等 曾在臣位 羨上宮 至今却不知貴也 上如一幸汝等 又安知不爲天宮乎”
知悅曰 “天母自在 豈人力乎”
上聞之 是夕幸知悅 未幾爲龍房天宮 嘲以爲人力房
考州郡良吏 賜爵一級
12월, 천궁이 왕의 아들 <분종芬宗>을 낳아 크게 사면하고
5일간 잔치를 열고 술을 내렸다.
왕이 친히 신궁(神宮) 및 갈천궁(葛川宮)에 아들을 낳았음을 고하고 제사를 지냈다.
<묘량妙梁>이 <비지比智> 집에서 아들 <비량比梁>을 낳았다.
왕이 천궁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을 자려고 하는데
<아해阿亥>와 <지열知悅>이 심히 부러워하며 천궁이 복이 많다고 하례하니
천궁이 말하기를
" 나도 너희들과 같이 일찌기 신하의 지위에 있어 상궁을 부러워하였다.
이제와서 귀함을 알지 못하고 물리쳤다.
왕이 너희들에게 한번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면
또한 천궁이 될 수 있음을 어찌 알지 못 하는가?
<지열知悅>이 말하기를
" 천모(天母)는 스스로 존재하지 어찌 인력으로 되겠습니까?"라 하니
왕이 그말을 듣고 이날 밤 <지열知悅>에게 행차하여 얼마 안되어 용방(龍房)으로 하니
천궁이 인력방(人力房)이라고 조롱하였다.
주군(州郡)의 선량한 관리들에게 작위 일급(一級)을 올려 내렸다.
이때 소지왕 <비처> 53세, 천궁 <후황> 23세, <아해> 23세, <지열> 21세이다.
소지왕 11년(489) 토사(土巳) 己巳
正月 王受朝 于天宮 命地宮與智度路 行政 于眞宮
靑華生 女誠華 于月池宮 賜米
詔曰 “農者天下之本也 不可不務 逆臣妙心惑亂子弟締結 無願妄成 遊食之徒
朕甚慨之 自今一切歸農 無怠”
정월 왕이 천궁(天宮)에서 조하를 받고, 지궁(地宮)과 <지도로智度路>에게 명하여
진궁(眞宮)에서 정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청화靑華>가 딸 <성화誠華>를 월지궁(月池宮)에서 낳아 쌀을 내렸다.
조칙으로 이르기를
"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
맡은 일에 힘쓰지 않음은 옳지 않다.
반역한 신하 <묘심妙心>이 반란을 꾀하여
자제들이 망령되이 이루려 하였으나 바라는 바가 없어 걸식하는 무리가 되었다.
짐이 이를 심히 안타깝게 여기니 지금부터는 모두 농사에 복귀하여 태만하지 말라"
라 하였다.
二月 復以海梁爲暖宮
王與天宮芬宗 謁神宮 命伊欣 禱福
誠國遣使 獻方物 于天宮及芬宗 請還靑華 王無意
天宮責之 曰 “今在禁荒之時 何以一女 缺好乎” 王許之
王召智度路 于天宮 密議 曰 “俊登 君之子也 芬宗 君之孫也 誰可愛乎”
智度路乃知王意 勸俊登辭位 阿氏不肯 曰 “我夫不爲太子 而誰可居之” 上不悅
2월, 다시 <해량海梁>을 난궁(暖宮)으로 삼았다.
왕과 천궁, <분종芬宗>이 신궁(神宮)을 알현하고
<이흔伊欣>에게 복을 빌어라고 명하였다.
<성국誠國>이 사신을 보내어 천궁 및 <분종芬宗>에게 방물을 바치고
<청화靑華>가 돌아오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다.
천궁이 책망하며 말하기를
" 지금 황음을 금하는 시기에 어찌 한 여자를 좋아하여 어지럽게 하십니까?"라 하니
왕이 <청화靑華>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이 <지도로智度路>를 천궁으로 불러 비밀히 의논하여 말하기를
"<준등俊登>은 군의 아들이고 <분종芬宗>은 군의 손자인데 누구를 사랑하느냐?"하니
이에 <지도로智度路>는 왕의 뜻을 알고 준등을 태자에서 물러나도록 권하니
<아씨阿氏>가 긍정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 나의 남편이 태자가 되지 못하면 누가 있겠습니까?"라 하니
왕이 기뻐하지 않았다.
三月 小裊人以其女八海妻 聖明
王會百官 議立芬宗 曰 “立嫡 常道也”
群臣皆畏天宮 而唯唯 乃廢 俊登爲王子殿君
3월, <소뇨인小裊人>이 그 딸 <팔해八海>를 <성명聖明>의 처로 하였다.
왕이 백관을 모아 <분종芬宗>을 태자로 세울 것을 의논하여 말하기를
"적자(嫡子)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라고 하니
군신들 모두가 천궁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도록 하여 태자를 폐하였다.
<준등俊登>을 왕자 <전군殿君>으로 하였다.
四月 王生日 立芬宗爲太子 王與天宮抱太子 而受朝 賜大酺 于葛川宮 山呼之聲不絶
天宮大喜 曰 “吾兒若王 則必賢 于父皇也” 王笑 以爲然命其殿 勝殿
以宣登爲太子舍人
宮主田君卒 年四十七
4월, 왕의 생일에 <분종芬宗>을 태자로 세웠다.
왕과 천궁이 태자를 안고 조회를 받았다.
갈천궁에서 크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리니 산호만세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천궁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내 아이가 만약 왕이 되면 부황에게 반드시 어진 왕이 될 것입니다."라 하니
왕이 웃으며 그 전각을 승전(勝殿)이라고 명하도록 하였다.
<선등宣登>을 태자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궁주 <전군田君>이 죽었다. 나이 47세였다.
소지명왕 때 태자가 3번이나 바뀌었다.
비처(치군) - 아지(463-483) 태자비는 <후황>이다.
진골정통 <조생>의 딸 <치군>이 낳은 <아지>는 21살에 죽었다.
지도로(파호) - 준등(459-494) 태자비는 태자<아지>의 누나<아씨>이다
<파호>여왕의 아들 <준등>은 <분종>이 태어나자
31살의 나이에 태자에서 물러나 전군이 되었으나 36살에 죽었다.
비처(후황) - 분종(488- )
지도로의 딸인 <후황>은 태자비였다가 <비처>의 천궁이 되었다.
<분종>은 2살에 태자로 책봉된다.
五月 王欲遣靑華 歸加耶 華不肯 而願留一年 乃以病謝之 而留之
聖母祠主寸己薨 天宮請 以其母懶凰代之 王許之
5월, 왕이 <청화靑華>를 가야로 돌려보내고자 하니
<청화靑華>가 병으로 사양하며 1년 더 머무르기를 원하니 그리하도록 하였다.
성모사주(聖母祠主) <촌기寸己>가 죽었다.
천궁이 그 어머니 <라황懶凰(445- )>이 대신하기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六月 饗民九十以上 于葛川宮
6월, 90세 이상의 백성을 갈천궁에서 대접하였다.
七月 命伊欣 敎授其骨子弟及宗女
河喜卒 使德智 往問之 銍知以其女肜肜妻之
7월, <이흔伊欣>에게 그 골(骨)의 자제와 종녀(宗女)를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하희河喜>가 죽었다.
<덕지德智>를 보내어 조문토록하니
<질지銍知>는 그 딸 <융융肜肜>을 <덕지德智>의 처로 하였다.
八月 牟大遣 五經博士察印氏 獻孝經 于俊登殿君
行月歌會 于凉臺
8월, <모대牟大>가 오경박사 <찰인씨察印氏>를 보내어
<준등俊登> 전군(殿君)에게 효경(孝經)을 바쳤다.
양대(凉臺)에서 월가회를 열었다.
九月 穀大登 王與天宮勝殿 觀稼 南郊 賜酒父老
句麗將孟弗 以其軍作流民 襲我戈峴 守將山珍死之
其妻回來爲麗將所得 愛其美 而寵之來 乘其睡 而斬之 携其頭 而逃歸
天明而知 麗軍亂 我軍進擊 大破之
9월, 곡식이 크게 여물었다.
왕과 천궁, 승전(勝殿){분종}이 남교에서 추수하는 것을 보고
부로(父老)에게 술을 내렸다.
고구려 장수 <맹불孟弗>이 그 군과 유민을 이끌고 우리의 과현(戈峴)을 습격하여
수비하던 장수 <산진山珍>이 죽었다.
그 처 <회래回來>를 고구려 장수가 얻으서 그 미모를 좋아하여 총애하니
그가 자는 틈을 타서 그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가지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날이 밝아 그것을 알고는 고구려군이 혼란하니 아군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다.
十月 麗人欲 報孟弗之仇 再擧入狐山城
守將柴舌 降于敵 智弗路命 城山賈頭等 進攻 复之 麗人焚城 而走
牟大祀天地 自稱大王 王問其可否 于群臣 智度路曰 “無罪于我 稱之何妨”
10월, 고구려인이 <맹불孟弗>의 원수를 갚고자 다시 호산성(狐山城)에 쳐들어왔다.
수비하던 장수 <시설柴舌>이 적에게 항복하여
<지불로智弗路>가 <성산城山> <가두賈頭> 등에게 다시 진공토록 명하니
고구려인이 성을 불태우고 도주하였다.
<모대牟大>가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스스로 대왕이라고 칭하였다.
왕이 군신들에게 그 옳고 그름을 물으니
<지도로智度路>가 말하기를
" 우리와는 상관없으니 대왕이라고 칭함이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라 하였다.
十一月 行大祭 于神宮 賜酺百官
賞回來城山等 有差
11월, 신궁(神宮)에서 대제를 지내고 백관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회래回來>, <성산城山> 등에게 차별있게 상을 내렸다.
十二月 海梁生 王女天紅
知悅生 王女末里
京都民殷 歡聲滿城 王與天宮微行 以勞之
12월, <해량海梁>이 왕의 딸 <천홍天紅>을 낳았다.
<지열知悅>이 왕의 딸 <말리末里>를 낳았다.
경도(京都)에 백성이 넘치고 노래 소리가 성(城)에 가득하였다.
왕과 천궁이 미행하여 있는 힘을 다하였다.
소지왕 12년(490) 금마(金馬) 庚午
正月 王與天宮 受朝 于眞宮
阿氏生 子大宗 王視兒 賜米
銍知以邦媛爲正妃 以其女元通 請嫁智世路 許之
月奈君病沒 其妻通 其弟世得 立之 其子高貴等 逃至古自 請屬 許之
정월, 왕과 천궁이 진궁(眞宮)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아씨阿氏>가 아들 <대종大宗>을 낳아 왕이 친히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질지銍知>가 <방원邦媛>을 정비(正妃)로 삼고
그 딸 <원통元通>을 <지세로智世路>에게 시집보낼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월내군(月奈君)이 병으로 죽었다.
그 처가 월내군(月奈君)의 동생 <세득世得>과 상통하여 그를 세우니
그 아들 <고귀高貴> 등은 고자(古自)로 도망하여 복속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二月 重築羅城
翡凰生 女淺凰 宝周子龍周 通而生也
2월, 라성(羅城)을 중축하였다.
<비황翡凰>이 딸 <천황淺凰>을 <보주宝周>의 아들 <용주龍周>와 사통하여 낳았다.
三月 王與阿氏大宗 謁神宮
古自監國習棠卒 年六十四 習宝公同母弟也 未詳其夫 或曰聖明宮私臣棠馬也
公恭謹 自持至老不懈 時人惜之
復以毗羅爲古自監國
始開市京都 通貨於四方 以好助爲市典監
3월, 왕과 <아씨阿氏>, <대종大宗>이 신궁(神宮)을 알현하였다.
고자(古自) 감국(監國) <습당習棠>이 죽었다. 나이 64세였다.
<습보習宝>공의 같은 어머니 동생이다.
그 아버지는 자세하지 않다.
혹은 <성명聖明>궁의 사신(私臣) <당마棠馬>라고 한다.
공은 공손하고 삼가하며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않아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다시 <비라毗羅>를 고자(古自) 감국(監國) 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경도(京都)에 시장을 열고 사방에 화폐를 유통시키고
<호조好助>를 시전감(市典監)으로 하였다.
四月 大酺三日 以祝五五之壽
毗羅以高貴爲月奈君 送之境上 世得請和 乃分月奈
以海宮爲龍宮 先時有龍 見于宮南 而修之 至是 又有大魚 長七十尺者
出遊海上 能呑大豕 至宮南 與前所見之
龍相和而入 其窟不知在何處 乃命祀之 而改宮名
4월, 55세의 수명을 축하하여 3일간 크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이때 소지명왕 <비처> 55세이다.
<비라毗羅>가 <고귀毗羅>를 월내군(月奈君)으로 삼아 그를 국경으로 보내니
<세득世得>이 화친을 청하여 이에 월내(月奈)를 나누었다.
해궁을 용궁(龍宮)으로 하였다.
처음에 궁의 남쪽에 용이 나타나 내려오고
지금은 또 큰 물고기가 나타나니 길이가 70척이었다.
바다로 내 보내니 큰 돼지를 삼킬 수 있고
그 꼬리가 궁의 남쪽까지 이르니 전에 본 것과 같았다.
용과 서로 화합하여 들어오니 그 굴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여
이에 제사 지내도록 명하고 궁명을 바꾸게 하였다.
五月 命善牟 送靑華 于加耶
發胡生 孝德女胡都
王始幸肜肜 于德智家
立蘭陵廟 先是蘭陵出宮 自盡 歸咎於己
至是 王知其無罪 立廟祀之 以其女玉蘭爲祭主
5월, <선모善牟>에게 명하여 <청화靑華>를 가야로 보내도록 하였다.
<발호發胡>가 <효덕孝德>의 딸 <호도胡都>를 낳았다.
왕이 <덕지德智> 집에서 처음으로 <융융肜肜>을 잠자리 시중들게 하였다.
란릉묘(蘭陵廟)를 세웠다.
이에 앞서 <란릉蘭陵>이 출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기의 허물을 벗엇다.
이제와서 왕이 죄가 없음을 알고 묘를 세워 제사 지내고
그 딸 <옥란玉蘭>을 제주(祭主)로 삼았다.
六月 王祀葛川宮 命阿氏俊登祀齒君
复以五宮爲九宮 天宮厚凰 地宮蓮帝 人宮沙洗
暖宮海梁 山宮妙梁 日宮宣世 月宮玉梁 月池宮翠凰 豆乙宮牟凌
以比智爲稟主
王復幸善兮 于神宮寢殿 天宮怒不食
6월, 왕이 갈천궁에서 제사 지내고
<아씨阿氏>, <준등俊登>에게 <치군齒君>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다시 오궁(五宮)을 구궁(九宮)으로 하였다.
천궁은 <후황厚凰>으로, 지궁은 <연제蓮帝>로, 인궁은 <사선沙洗>으로,
난궁은 <해량海梁>으로, 산궁은 <묘량妙梁>으로, 일궁은 <선세宣世>로,
월궁은 <옥량玉梁>으로, 월지궁은 <취황翠凰>으로,
두을궁은 <모릉牟凌>으로 하였다.
<비지比智>를 품주로 삼았다.
왕이 신궁 침전에서 다시 <선혜善兮>를 잠자리 시중들게 하니
천궁이 노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다.
七月 王與天宮 入龍宮 講元元眞經
7월, 왕과 천궁이 용궁에 들어가 원원진경(元元眞經)을 강론하였다.
八月 牟大築沙峴耳山 二城
8월, <모대牟大>가 사현(沙峴)과 이산(耳山) 2성(城)을 쌓았다.
九月 王與天宮還 自龍宮
赦妙心族 屬之遁匿者
9월, 왕과 천궁이 용궁으로부터 돌아왔다.
<묘심妙心>의 가족을 사면하여 둔익자(遁匿者)에 속하게 하였다.
十月 妙梁生 王女妙信
肜肜生肜吹
命俊登講孝經 于王子骨人
王與天宮 幸而聽之 天宮曰 “今吾兩人 唯有吾父母 夫皇亦不可不孝”
王乃奉 懶凰爲國夫人 智度路爲國公 賜九錫
10월, <묘량妙梁>이 왕의 딸 <묘신妙信>을 낳았다.
<융융肜肜>이 <융취肜吹>를 낳았다.
<준등俊登>에게 왕자와 골인에게 효경을 강론하라고 명하였다.
왕과 천궁이 행차하여 강론을 듣고 천궁이 말하기를
"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오직 우리 부모가 있을 뿐이다.
부황(夫皇) 역시 불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라황懶凰>을 국부인(國夫人)으로 봉하고
<지도로智度路>를 국공(國公)으로 하여 구석(九錫)을 하사 하였다.
十一月 大雪 王遣伊欣 于北路 問軍士
11월, 눈이 크게 내렸다.
왕이 <이흔伊欣>을 북로에 보내어 군사(軍士)를 위문하였다.
十二月 國仙章伊卒 年六十六 乃寶海公庶子也
淡然有絶世之風 深通眞經 王惜之 以角干禮葬之
12월, 국선(國仙) <장이章伊>가 죽었다. 나이 66세였다.
<보해寶海>공의 서자(庶子)이다.
담백하고 세상에 보기드문 풍채를 지녔으며
진경(眞經)에 깊이 통달하여 왕이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각간(角干)의 예로 장례토록 하였다.
소지왕 13년(491) 백양(白羊) 辛未
正月 王與天宮勝殿 受朝 眞宮 天宮謂王 曰 “吾父拜 我及太子 於孝何如”
王曰 “汝與我一體 受朝之時 天王無私”
親天宮 乃作神命歌 以示 懶凰曰
“蟬脫于螬 而上枝則仙 吾亦受眞 于天王 而生太子 則天母也
神已通之 私親不可以子也”
懶凰乃 拜于宮 曰 “雲漢自高 土壤自卑 天母無私親也 豈敢以自居舊地乎” 宮曰善
以毗己爲大等 靑市骨門 叔欣神官 德智爲護城伊飡
群臣 尊王爲炤知明王 尊天宮爲炤明天宮 乃行吉 于神宮 賜酺百官
加耶女主阿利 病沒 誠國代立 請以靑華爲妃 許之
大修鮑石祠 建吉殿 正堂
정월, 왕과 천궁, 승전(勝殿)이 진궁(眞宮)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천궁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 우리 아버지에게 절하여야 합니다.
나와 태자는 효도로 그리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너와 나는 한 몸이고 조하(朝賀)를 받을 때 천왕(天王)은 사사로움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에 친히 천궁에게 신명가(神命歌)를 지어 보이니 <라황懶凰>이 말하기를
" 굼뱅이가 허물을 벗어 매미가 되는 것이 윗 가지인 즉 선(仙)입니다.
우리 역시 천왕(天王)에게서 진(眞)을 받아 태자를 낳으니 즉 천모(天母)입니다.
이미 신통(神通)하였으니 사사로이 친자(親子)가 아닌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라황懶凰>이 천궁에게 절을하며 말하기를
"은하는 스스로 높고 흙은 스스로 낮으니 천모(天母)는 사사로이 친모가 없습니다.
어찌 감히 스스로 옛 땅에 살겠습니까?"라 하니
천궁이 좋다고 하였다.
<비기毗己>를 대등으로 <청시靑市>를 골문으로 <숙흔叔欣>을 신관으로
<덕지德智>를 호성이찬으로 삼았다.
군신들이 왕을 소지명왕(炤知明王)으로 높이고 천궁을 소명천궁(炤明天宮)으로 높여
신궁에서 길례를 행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가야여주 <아리阿利(431-491)>가 병으로 죽어
<성국誠國(442-506) 대가야 17대왕 재위 491-505>이 대신 섰다.
섬신(삼광) - 아리(431-491)
섬신(도광) - 성국(442-506)
<성국>은 <아리>의 이부동모제이다.
<청화靑華>를 비(妃)로 삼기를 청하여 허락 하였다.
눌지(혜밀) - 청화(457-524)
포석사(鮑石祠)를 크게 수선하고 길전(吉殿) 정당(正堂)을 지었다.
二月 王與天宮 行阿瑟羅 大犒軍士
2월, 왕과 천궁이 아슬라(阿瑟羅)에 행차하여 군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내렸다.
三月 天宮有震 賜酺 于阿瑟羅
仙人黃兒 獻靈藥 于天宮 以爲宜子 王賜其爵奈麻
王與天宮還 自阿瑟羅 賜酺 百官 乃宗女
九宮賀天宮 震慶 山呼連天 天宮喜 而謂王 曰 “我有汝身 神人共藥也”
乃命賜九宮 衣帛 有差
以蓮帝母牟梁爲國夫人 賜蓮帝子慕珍爵奈麻 山宗大舍
3월, 천궁이 임신하여 아슬라에서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선인(仙人) <황아黃兒>가 천궁에 영약을 보내 의자(冝子)로 삼고
왕이 나마(奈麻)의 작위를 내렸다.
왕과 천궁이 아슬라에서 돌아와 백관과 종녀에게 술을 내렸다.
구궁(九宮)이 천궁의 임신을 경하(慶賀)하였다.
천궁이 기뻐하며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 내가 너의 몸에 있으니 신과 사람이 모두 약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구궁(九宮)에게 옷과 비단을 차별있게 내렸다.
<연제蓮帝>의 어머니 <모량牟梁>을 국부인(國夫人)으로 하고
<연제蓮帝>의 아들 <모진慕珍>에게 나마(奈麻)와
<산종山宗>에게 대사(大舍)의 작위를 내렸다.
<모진>은 <연제>와 <지도로>의 아들이고 <산종>은 <연제>와 <비처>의 아들로
이때 <모진>은 12살, <산종>은 5살이다.
四月 王有疾 停 賜酺 天宮命九宮 禱之夜 不解帶
天宮命國公 攝行王事
4월, 왕이 질병이 있어 술을 내리는 것을 정지하고
천궁이 구궁에게 명하여 밤새 기도하라고 하였다.
천궁이 국공(國公)에게 왕의 일을 대신하라고 하였다.
五月 以俊登爲大道監 禱疾 于山川
天宮與王 入龍宮 阿亥知悅隨之
5월, <준등俊登>을 대도감(大道監)으로 삼아
산천에서 질병이 낫도록 기도하라고 하였다.
천궁과 왕이 용궁으로 들어가니 <아해阿亥>와 <지열知悅>이 따랐다.
六月 扶余熊川州 大漲 漂戶二百
誠國通靑華女靑巤 靑華怒 囚巤 于樓下 巤作穴而逃
誠國乃 以軍士護巤 於是兩人不睦
命調用 禱山仙徒 于神宮
6월, 부여 웅천주(熊川州)에 홍수가 나서 2백 호(戶)가 떠내려갔다.
<성국誠國>이 <청화靑華>의 딸 <청렵靑巤(476-524)>과 사통하여
<청화靑華>가 노하여 <청렵靑巤>을 루(樓) 아래에 가두니
<청렵靑巤>이 굴을 파서 도망하였다.
이에 <성국誠國>이 군사들로 하여금 <청렵靑巤>을 보호하게 하니
두 사람이 화목하지 못하였다.
이때 <성국> 50세, <청렵> 16세이다.
등용한 관리에게 명하여 신궁(神宮)에서 산(山)과 선도(仙徒)를 기도하라고 하였다.
七月 王與天宮 食瓜 于龍宮之園 曰 “朕疾甚可 乃吾妻之力也”
天宮曰 “夫妻一身 自治自痛 何爲力乎” 王感泣 天宮亦泣
大造弓矢 于西庫
命叔欣 理誠國靑華
7월, 왕과 천궁이 용궁의 동산에서 오이를 따서 먹으며 말하기를
"짐의 질병이 심하니 내 처가 수고가 많다."라고 하니
천궁이 말하기를
" 부부는 한 몸이라 자기의 아픔을 자기가 치료하는데 무슨 수고입니까?"라 하니
왕이 감읍하고 천궁 역시 눈물을 흘렸다.
서고(西庫)에서 활과 화살촉을 크게 만들었다.
<숙흔叔欣>에게 <성국誠國>과 <청화靑華>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八月 王疾快 與天宮還 自龍宮
天宮代王 聽政
善兮生 王女介道 王畏天宮 不以爲子
8월, 왕의 질병이 깨끗이 나아 천궁과 함께 용궁으로부터 돌아왔다.
천궁이 왕을 대신하여 정사(政事)를 들었다.
<선혜善兮>가 왕의 딸 <개도介道>를 낳았다.
왕이 천궁을 두려워하여 자식으로 하지 못하였다.
九月 扶余飢民 流入我地者 六百餘家 命有司 分置州縣 各授其職
以聖母祠爲大廟 以懶凰爲大廟主 沈凰爲廟監
月奈君高貴 入朝 請婚 以智登女千家 妻之
天宮與王 觀稼 南郊
王洗天宮 于鮑石池 並馬而還 馬頭大舍諫 曰 “天子不馬 况有身之宮乎”
天宮謂王 曰 “此人爲我 而直諫 乃忠於汝也 可以賞之”
王曰 “何以賞之”
天宮曰 “可昇奈麻也” 王卽賜之 時人謂之 諫馬奈麻
9월, 부여에 기근이 들어 6백여 호가 우리 땅으로 들어오니
관리에게 주현에 나누어 배치하고 각자에게 그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성모사(聖母祠)를 대묘(大廟)로 하고
<라황懶凰>을 대묘주(大廟主)로 <침황沈凰>을 묘감(廟監)으로 하였다.
월내군(月奈君) <고귀高貴>가 입조하여 혼인을 청하여
<지등智登>의 딸 <천가千家>를 처로 하였다.
천궁과 왕이 남교(南郊)에서 추수히는 것을 살펴 보았다.
왕이 포석지(鮑石池)에서 천궁을 씻어 주고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려고 하니
마두대사(馬頭大舍)가 간하여 아뢰기를
" 천자(天子)는 말을 타지 않는데 하물며 천궁이 있는데 말을 타시려합니까?"하니
천궁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 이 사람이 나를 위하여 직언하니 충신이라 상을 내림이 옳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상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천궁이 말하기를
"나마(奈麻)로 승진시킴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왕이 즉시 나마(奈麻)를 내리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간마나마(諫馬奈麻)라 하였다.
十月 麗君巨連死 連獾心狼慾 熊大虎胖 一食一羊 好兵貪淫 有子百人
其少子有助多者 娶于讚加氏 甚美 生子羅雲 連以爲宜子 而奪之 爲妾 助多由此 而病死
連悔之 乃以雲爲嗣 讚加亦以寵 專內政
連年漸老 疑猜多怒 雲恐有變 囚連 于宮中 數月而死
乃盡逐連臣 而立 逃歸于我 言其可伐之狀 諸將請伐之
國公曰 “勿幸 人之不幸 而須備 人之不備”
命增倉于沙伐乃三年山
王始親政
洗天宮 于神池
10월, 고구려 왕 <거련巨連>이 죽었다.
<거련巨連>은 오소리같은 마음과 이리같은 욕심을 가지고
곰과 큰 호랑이같은 뚱뚱한 몸집으로 한 끼에 양 한마리를 먹어 치웠다.
전쟁을 좋아하고 여자를 탐하여 자식이 백 명이나 되었다.
그 막내 아들 <조다助多>가 <찬가讃加>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아들 <라운羅雲>을 낳자, <거련>이 의자(冝子)로 삼고 그녀를 뺏어 첩으로 삼았다.
<조다助多>가 이로 인하여 병들어 죽었다.
<거련>이 이를 후회하여 <라운羅雲>을 후사를 삼았고,
<찬가讃加> 또한 총애를 입어 내정을 장악하였다.
<거련>이 점차 늙어가자 의심과 시기로 자주 화를 내니,
<라운羅雲>은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거련>을 궁중에 가두었는데 몇 달후 죽었다.
이에 <거련>의 신하들을 모두 내쫒고 즉위하였다.
신하들이 우리에게 도망 와서 죽여 마땅한 상황을 말하니,
장수들이 그를 정벌하자고 청하였다.
국공(國公)이 말하기를
“남의 불행을 즐기지 말고 남의 허술함을 대비해야 합니다.”
사벌 및 삼년산에 창고를 증축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친정을 시작하였다.
신지(神池)에서 천궁을 씻어 주었다.
十一月 蓮帝生 國公子立宗 賜米
以納水爲阿飡 妻以德智女桂凰 納水者 銍知弟治水之子也 其母乃我好淵公女燕凰也
治水以納水使屬德智軍中 至是將歸 妻以桂凰 桂乃老王外孫也 乃賜上骨之爲
天宮生 王女般惠公主 于天宮 通神殿 有異香滿室卽夜
王召宗臣 于通明殿 賜酺宗女 于眞殿 賜食是夜
車馬絡繹 歡聲滿城 命城中 皆擧長燈
11월, <연제蓮帝>가 국공(國公)의 아들 <입종立宗>을 낳아 쌀을 내렸다.
<입종>은 <모진>보다 11살 어린 친동생이다.
<납수納水>를 아찬으로 삼아 <덕지德智>의 딸 <계황桂凰>을 처로 하였다.
<납수納水>는 <질지銍知>의 동생 <치수治水>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우리 <호연好淵>공의 딸 <연황燕凰>이다.
<치수治水>가 <납수納水>를 보내어 <덕지德智> 군중(軍中)에 소속되도록 하였다.
이제와서 <계황桂凰>을 처로 맞이하여 돌아 가고자 하였다.
<계황桂凰>은 노왕(老王)의 외손녀이다.
이에 상골(上骨)의 품계를 내렸다.
눌지(섭황) - 라황(덕지) - 계황
이때 <납수> 29세, <계황> 19세, <덕지> 52세, <라황> 47세, <연황> 57세이다
천궁이 왕의 딸 <반혜般惠>공주를 천궁 통신전(通神殿)에서 낳았다.
이날 밤 산실에 기이한 향이 가득하였다.
왕이 통명전(通明殿)으로 종신(宗臣)을 불러
이날 밤 진전(眞殿)에서 종녀(宗女)에게 잔치를 열고 음식을 내렸다.
성 안의 모두에게 횃불을 높이 들어라고 명하니
수레와 말이 끊이질 않고 성안에 환성(歡聲)이 가득하였다.
十二月 海梁生 國公女天雪 于國公第 賜米
王宴群臣 于剡臣第 命碧我 行酒
車宿昇爲伊飡 比智爲兵官匝判 宝器爲大等匝判 俊登爲骨門匝判
智登爲神官匝判 剡臣爲護城匝判 河大爲將軍
12월, <해량海梁>이 국공(國公)의 딸 <천설天雪>을
국공(國公)의 집에서 낳아 쌀을 내렸다.
왕이 <염신>의 집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열고 <벽아>에게 술을 올리도록 하였다.
<거숙車宿>을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비지比智>를 병관잡판으로
<보기宝器>를 대등잡판으로 <준등俊登>을 골문잡판으로
<지등智登>을 신관잡판으로 <염신剡臣>을 호성잡판으로
<하대河大>를 장군으로 하였다.
소지왕 14년(492) 수원(水猿) 壬申
正月 王與天宮般惠 謁神宮
天宮抱勝殿 王抱般惠 受朝 于眞宮
王謂烏含 曰
“天宮至聖 且仁善 生朕子 朕有天下 實有快樂也 卿以國柱 不可無悉 朕意也”
含曰 “天宮陛下 於聖上 陛下旣盡 其洽而於祖宗 列神多獻 螽斯之慶
老臣中心 感激 夜不能寐也”
天宮大喜 特賜酒食 于眞宮聖殿
群臣獻 太平萬壽 金冠大冕 袞龍仙袍 于王及天宮 以賀二聖 治國太平萬壽
又獻銅馬宝玩 于勝殿 于淨凰 于般惠 以賀螽斯 振振金枝玉葉
王乃宴群臣 于眞宮聖堂 夜深而罷
王與天宮勝殿般惠 冒雪 而謁葛川宮 曰 “天雖雪矣 太太不可不見 吾般惠也”
海梁入乳般惠 于天宮
納水桂凰 謁王及天宮 而告歸 許納水夫妻 謁神宮
정월, 왕과 천궁, <반혜般惠>가 신궁(神宮)을 알현하였다.
천궁이 <승전勝殿>을 안고 왕이 <반혜般惠>를 안고 진궁(眞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왕이 <오함烏含>에게 일러 말하기를
" 천궁은 성인(聖人)이고 또한 인자하며 착하다.
짐의 아들을 낳으니 짐은 천하를 가지고 실로 즐겁다.
경은 국가의 기둥으로서 다히지 않음은 옳지 않다는 것이 짐의 뜻이다"라고 하니
<오함烏含>이 아뢰기를
" 천궁 폐하는 성상 폐하에게 이미 정성을 다하여
화목함으로서 종사지경(螽斯之慶)을 조종(祖宗)과 열신(列神)에게 바쳤으니
노신(老臣)은 감격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 합니다."라고 하였다.
※ 종사지경(螽斯之慶) : 왕실의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
천궁이 크게 기뻐하며 특별히 진궁(眞宮) 성전(聖殿)에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신하들이 태평만수(太平萬壽), 금관대면(金冠大冕), 곤룡선포(袞龍仙袍)를
왕과 천궁에게 바쳐 이성(二聖)이 나라를 다스려 태평만수(太平萬壽)를 하례드리고
또 동마보완(銅馬宝玩)을 <승전勝殿>, <정황淨凰>, <반혜般惠>에게 바쳐
귀한 자손이 번성함을 하례드리니
이에 왕이 신하들에게 진궁(眞宮) 성당(聖堂)에서 잔치를 열어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왕과 천궁, <승전勝殿>, <반혜般惠>, <모설冒雪>이 갈천궁을 알현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눈이 내려도 태태(太太)는 알고 있다.
우리 딸 <반혜般惠>이다."라고 하였다.
※ 태태(太太) : 왕의 어머니, 여기서는 <조생烏生>을 말한다.
<해량海梁>이 천궁(天宮)에서 <반혜般惠>에게 젖를 먹였다.
<납수納水>와 <계황桂凰>이 왕과 천궁을 알현하고 돌아갈 것을 고하니
<납수納水> 부부를 천궁에서 알현토록 허락하였다.
二月 天宮賞回來 于南桃
回來能 以雌身斬敵 報國 將軍智弗路義之 而妾之 至是 從智弗路 入京 乃北方賤女也
王特命 賜謁 天宮曰 “不可不褒之 而效凡婦也” 乃有是擧
沙洗生 國公子沙輪
誠國以靑巤爲次妃 靑華怒 而批誠國
2월, 천궁이 남도(南桃)에서 <회래回來>에게 상을 내렸다.
<회래回來>는 여자의 몸으로 능히 적의 목을 베고 나라에 보답하니
장군 <지불로智弗路>가 그 의(義)를 알고 첩으로 삼아
이제와서 <지불로智弗路>를 따라 입경한 북방의 비천한 여자이다.
왕이 특별히 명을 내려 알현토록 하니 천궁이 말하기를
" 범부(凡婦)의 본보기로서 포상하지 않음은 옳지 않다." 라고 하고 이에 상을 내렸다.
<사선沙洗>이 국공(國公)의 아들 <사륜沙輪>을 낳았다.
<성국誠國>이 <청렵靑巤>을 차비(次妃)로 삼으니
<청화靑華>가 노하여 성국(誠國)을 비난하였다.
三月 王與天宮 微幸郊外 秣馬 于民家
旱甚 王减膳 以責己
誠國召聖明 于阿羅
伊欣祈雨 于神宮
牟大子須 入朝 以俊宜女智黃妻之
3월, 왕과 천궁이 교외(郊外)에 미행하여 민가에서 말을 먹였다.
가뭄이 심하여 왕이 스스로 책망하여 반찬을 줄였다.
<성국誠國>이 <성명聖明>을 아라(阿羅)에서 돌아오도록 불렀다.
<이흔伊欣>이 신궁(神宮)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모대牟大>의 아들 <수須>가 입조하여 <준의俊宜>의 딸 <지황智黃>을 처로 주었다.
<수須>는 <문주>와 <보류>가 476년에 낳았는데
<모대>가 <문주>의 처 <보류>를 처로 하였으니 <모대>의 아들인 셈이다.
四月 九宮請 行聖宴 王以旱 不許
聖明與八海八明 入加耶 未幾靑華生聖實 故聖明不复 有愛靑華之心 靑華乃請歸
4월, 구궁(九宮)이 성스러운 잔치를 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가뭄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성명聖明>과 <팔해八海>, <팔명八明>이 가야로 들어갔다.
얼마되지 않아 <청화靑華>가 <성실聖實>을 낳으니
<성명聖明>이 <청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다시 가야로 떠났다.
이에 <청화靑華>는 <성명聖明>이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성국(아리) - 성명(461- )(청화) - 성실(492- )
눌지(혜밀) - 청화(457-524)(찬명) - 청렵(476-524)
<성명聖明>은 이부동모인 <아리>와 <성국>이 낳은 아들이다.
대가야 17대왕 <성국>이 왕비인 <청화>의 딸 <청렵>과 사통하자
왕비인 <청화>가 <성국>의 아들 <성명>을 사랑하여 돌아오게 한 것이다.
五月 王子沙嵩 授孝經
大閱射士 行賞
5월, 왕자 <사숭沙嵩>에게 효경(孝經)을 가르쳤다.
활 시합을 검열하고 상을 내렸다.
六月 靑華歸寧
眉燕生 毗羅女毗燕
王與天宮 祀葛川宮 及竹長祠 以善知爲主
銍知沒 鉗知立 邦媛專政
6월, <청화靑華>가 무사히 돌아갔다.
<미연眉燕>이 <비라毗羅>의 딸 <비연毗燕>을 낳았다.
왕과 천궁이 <선지善知>를 제주로 삼아 갈천궁과 죽장사에서 제사를 지냈다.
<질지銍知(428-492)>가 죽어
<겸지鉗知(478-521) 금관가야 9대왕 재위 492-520>가 섰다.
<방원邦媛>이 정사(政事)를 전횡하였다.
七月 發胡生 毗羅子鉢兒 先是毗羅复入古自 召發胡通之 孝德不敢言 至是生子
與發惠相爭 訴于朝廷 王召毗羅還
以車宿爲古自監國
宝梁宮主卒 美海王女也 其母曰宝美也
初爲宮人 退嫁習宝 生阿珍宗阿珍乂 又事太王 生三女 至是卒 年六十四 以夫人禮葬之
天宮率九宮 大祀蠶神 于北川
7월, <발호發胡>가 <비라毗羅>의 아들 <발아鉢兒>를 낳았다.
이에 앞서 <비라毗羅>가 다시 고자(古自)로 들어가 <발호發胡>를 불러 통정하니
<효덕孝德>이 감히 말하지 못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다.
<발혜發惠>와 서로 다투어 조정에 호소하니 왕이 <비라毗羅>를 소환하였다.
<거숙車宿>을 고자(古自) 감국(監國)으로 삼았다.
<보량宝梁>궁주가 죽었다.
<미해美海>왕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보미宝美>이다.
처음에 궁인이 되어 <습보習宝>에게 시집가서
아들 <아진종阿珍宗>과 <아진예阿珍乂>를 낳고 또 태왕을 섬겨 세 딸을 낳았다.
이제와서 죽으니 나이 64세였다.
부인(夫人)의 예로 장례하였다.
천궁이 구궁을 인솔하여 북천에서 잠신(蠶神)에게 크게 제사를 지냈다.
八月 行月歌 于南桃
末曷獻 蒼鷹十頭 命鷹師馴之
以實竹爲北路將軍 智世路爲南路將軍 鳥石爲西路將軍 馬欣爲水路將軍
白里爲護城將軍 曲欣爲大等將軍 順力爲將軍
葛川宮大監毗惠 多畜私臣 宮中多諷之 命嫁阿飡寸牟 以俊朔爲大監
以智弗路爲稟主 其妻王妹俊宜爲勝殿大監
以悉直城主比成爲比烈城主 烏世爲悉直城主
8월, 남도에서 월가를 행하였다.
말갈이 흰 매 10마리를 바쳐 응사(鷹師)에게 길들이도록 하였다.
<실죽實竹>을 북로장군으로 <지세로智世路>를 남로장군으로
<오석鳥石>을 서로장군으로 <마흔馬欣>을 수로장군으로
<백리白里>를 호성장군으로 <곡흔曲欣>을 대등장군으로
<순력順力>을 장군으로 삼았다.
갈천궁 대감 <비혜毗惠>가 사신(私臣)을 많이 두어 궁중에서 많은 사람이 풍간하여
아찬 <촌모寸牟>에게 시집가도록 명하고 <준삭俊朔>을 대감으로 하였다.
<지불로智弗路>를 품주로 하고
그 처 왕의 여동생 <준의俊宜>를 승전(勝殿) 대감으로 하였다.
실직성주 <비성比成>을 비열성주로 하고 <오세烏世>를 실직성주로 하였다.
九月 牟大妃首器卒 年二十九 其二女曰 遜兒運兒 一子曰 都馬
王爲之 擧哀 牟大請 繼婚 命朝霞 采其可者
賞歌仙十二人 于宮中 王與天宮 對舞 于仙前 而習之
9월, <모대牟大>의 비(妃) <수기首器>가 죽었다. 나이 29세였다.
그 두 딸은 <손아遜兒>, <운아運兒>이고 아들은 <도마都馬>이다.
왕이 그 죽음을 애도하고 <모대牟大>가 다시 장가 들기를 청하니
<조하朝霞>에게 알맞은 자를 뽑아라고 명하였다.
가선(歌仙) 12명에게 궁중에서 상을 내리고
왕과 천궁이 가선(歌仙) 앞에서 마주보고 춤을 추며 연습하였다.
十月 置鶴房 于天宮 以王女竹凰爲都頭
行大祭 于聖母山 王與天宮 幸之 設紅帳 于道 觀者如海
先是 天宮自生般惠 玉體微虛 不喜 入雲
王憂之 求靈藥 于四方 以施之 宮謂王 曰
“自汝洗我己 有三身 我且勞矣 人生如草露 貪廛昧元 三复九齒 何時而乘仙乎”
王曰 “元元之道 莫如誦經 入眞”
乃設眞殿 于宮中 與宮沐浴 而誦經 宮漸效 王大喜
仙徒多言 天宮乃聖母之化現
王乃 重新聖母山大廟 以旱知爲大監 而與宮徜徉 于此 以慰大廟主
命大畜軍馬 于聖母山 天宮盖以火馬之年生
故好赤馬 名以天風 常至宮前 宮親自賜牧 命取其種 以畜之
與天宮獵 于聖母山之西 試末曷鷹 多獲
宮謂王 曰 “擒捕有樂 而觀其害物 有動我心 汝若嗜此 恐傷吾腹之子” 王唯唯 而罷
10월, 천궁에 학방(鶴房)을 설치하고 왕의 딸 <죽황竹凰>을 도두(都頭)로 삼았다.
성모산(聖母山)에서 대제(大祭)를 지냈다.
왕과 천궁이 그곳으로 행차하여 도로에 붉은 장막을 설치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에 앞서 천궁이 <반혜般惠>를 낳은 이래 옥체가 조금 허약하여 좋지 않았다.
왕이 걱정하여 사방에서 영약을 구하여 먹이니 천궁이 왕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 그대가 내 몸을 씻어 준 이래로 세개의 몸이 있어 내가 또 수고를 끼칩니다.
인생은 초로와 같고 탐전매원(貪廛昧元) 삼복구치(三复九齒)하니
어느 때 신선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하기를
" 원원지도(元元之道)로 경(經)을 암송하여 진원(眞元)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라고 하였다.
이에 궁중에 진전(眞殿)을 설치하여 천궁과 함께 목욕하고 경을 암송하니
천궁의 몸이 점차 좋아져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많은 선도(仙徒)들이 천궁은 성모(聖母)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성모산 대묘(大廟)를 다시 지어 <한지旱知>를 대감(大監)으로 삼고
천궁과 함께 여기서 한가로이 걸으며 대묘주(大廟主)를 위로하였다.
천궁이 화마(火馬)년에 태어나서 적마(赤馬)를 좋아하여
성모산에 군마를 크게 기르도록 명하였다.
천궁 <후황>은 <지도로>와 <라황>의 딸로 466년 丙午년에 태어났다.
말의 이름을 천풍(天風)으로 하고 항상 궁 앞에 이르면 천궁이 친히 먹이를 먹이고
그 종자를 받아 기르도록 명하였다.
천궁과 함께 성산 서쪽에서 사냥하여 말갈 매를 시험하여 많이 잡았다.
천궁이 왕에게 이르기를
"상처입은 사냥감을 사로잡아 즐기며 보는 것을 그대도 좋아하면
내 배 속의 아이가 상할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라고 하니
왕이 천궁의 말을 따라 사냥을 그만 두도록 하였다.
十一月 王與天宮 幸眞經堂 會經士 問答三眞 以伊欣爲眞經大士
士等請 奉天宮爲大元宮 笑曰 “朕何知 而爲大元乎”
伊欣奏 曰 “臣等下知 故問答 而辨之也 陛下上智 故無加知也”
天宮喜 曰 “如汝言 則朕無知 而可乎”
諸士乃起拜拜 曰 “玉體所在 皆是經也” 王乃勸 宮許之
天宮以庶弟慕珍爲殿上大奈麻 加以小經士 命解眞經 于臥內
慕珍蓮帝子也 俊秀聰明 王寵愛之
王嘗與天宮 晝寢而起 珍與善知 遊於殿下 以爲經談 王乃召 問之 “爾知三眞乎”
珍曰知之 天宮命言之 珍曰 “天王天宮勝殿是也”
天宮曰 “何謂”
珍曰 “萬民爲萬物之眞 天王爲萬民之眞 天宮與天王 合其眞勝殿 實其合眞
如天地人 三眞也”
天宮大喜 抱之 曰 “此我 何時通道乎”
王曰 “雖經士 何以加之” 乃有是命
11월, 왕과 천궁이 진경당에 향차하여 경사(經士)를 모아 삼진(三眞)을 묻고 답하였다.
<이흔伊欣>을 진경대사(眞經大士)로 삼았다.
경사(經士) 등이 천궁을 대원궁(大元宮)으로 봉하기를 청하니 웃으며 말하기를
" 짐이 어찌 대원(大元)을 알겠는가?"라고 하니
<이흔伊欣>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 신 등의 얕은 지식으로 알지 못하나 문답으로 분별할 뿐입니다.
폐하의 높은 지식에 더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천궁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말은 짐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냐?" 라고 하니
여러 경사(經士)들이 일어나 절을 하고 또 절하며 아뢰기를
" 옥체가 있는 바, 바로 이것이 경(經)입니다."라고 하니
이에 왕이 천궁에게 권하여 허락 하였다.
천궁이 서제(庶弟) <모진慕珍>을 전상대나마(殿上大奈麻)로 삼고
소경사(小經士)를 더하여 침실에서 진경(眞經)을 해석토록 명하였다.
<모진慕珍>은 <연제蓮帝>의 아들이다.
준수하고 총명하여 왕이 그를 총애하였다.
왕이 일찌기 천궁과 함께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모진慕珍>과 <선지善知>와 함께 전각 아래를 거닐다가
경(經)에 대하여 담화를 나누어 <모진慕珍>을 불러 물었다.
" 너는 삼진(三眞)을 아느냐?"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그것을 안다고 말하니 천궁이 말해 보라고하였다.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 천왕(天王) 천궁(天宮) 승전(勝殿)이 삼진(三眞)입니다."라고 하니
천궁이 말하기를
" 옳은 말이다."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 만 백성은 만물의 진(眞)이고, 천왕은 만 백성의 진(眞)입니다,
천궁과 천왕을 합한 진(眞)이 승전(勝殿)이니
실로 그 합진(合眞)은 천지인(天地人)이며 삼진(三眞)입니다."라 하였다.
천궁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안고 말하기를
"나는 언제 도가 통할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 비록 경사(經士)라도 어찌 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소지왕 <비처> 57세, 천궁 <후황> 27세, <모진> 13세, <선지> 9세이다.
十二月 車宿平月奈 虜世得高海 海乃貴母也
以高貴爲月奈郡主 以千家爲君 使屬古自
王與天宮 入龍宮
召上骨經士 設席 于臥內之外 而誦之 天宮聞經 而心快身胖 雖夜深必沈睡 於經聲之中
龍房告 天宮之睡 熟則經士 始退 以此士與龍房虎房 相通者多 而上未知之
12월, <거숙車宿>이 월내(月奈)를 평정하였다.
<세득世得>과 <고귀高貴>와 <해海>를 사로잡았다.
<해海>는 <고귀高貴>의 어머니다.
<고귀高貴>를 월내군주(月奈郡主)로 삼고 <천가千家>를 군(君)으로 삼아
고자(古自)에 속하도록 하였다.
왕과 천궁이 용궁(龍宮)으로 들어갔다.
상골경사(上骨經士)를 불러 침실 바깥에 의자를 설치하여 경(經)을 암송하게 하여
천궁이 경을 듣고 마음이 상쾌하고 몸이 좋아지니
야심한 밤에도 경(經)의 암송을 들으야 잠을 잤다.
용방(龍房)이 천궁은 경사(經士)의 경(經)이 시작과 끝날 때 깊이 잠든다고 고하였다.
이 경사(經士)와 용방(龍房) 호방(虎房)이 상통(相通)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은 알지 못하였다.
소지왕 15년(493) 흑계(黑鷄) 癸酉
正月 王與天宮勝殿 受朝 于龍宮
詔曰 “不通眞元 無以爲神 不行忠孝 無以立身”
令大舍以上子弟 皆究眞孝兩經 用其優者
命國公 宴群臣 于比智家 將以比智女 妻牟大故也
比智女瑤黃 謁王及天宮 于龍宮
沙梁宮主卒 年六十二 亦美海王女也
初事太王 生沙洗 後嫁烏含 生哲夫沙世等
至是以神宮大監卒 性淸閑 善鄕歌 以爲十二歌仙之一 王惜其才 以夫人禮葬之
정월, 왕과 천궁, <승전勝殿>이 용궁(龍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조칙으로 이르기를
" 진원(眞元)에 통하지 못하면 신(神)이 되지 못하고
충효(忠孝)를 하지 못하면 입신(立身)을 하지 못한다."
라고 하엿다.
대사(大舍) 이상의 자제들 모두에게 두 경전의 진효(眞孝)를 궁구하여
우수한 자를 등용토록 하였다.
국공(國公)에게 명하여 <비지比智>의 집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장차 <비지比智>의 딸을 <모대牟大>의 처로 하기 때문이다.
<비지比智>의 딸 <요황瑤黃>이 왕과 천궁을 용궁에서 알현하였다.
<사량沙梁>궁주가 죽었다. 나이 62세였다.
역시 <미해美海>왕의 딸이다.
처음에 태왕을 섬기어 <사선沙洗>을 낳고,
후에 <오함烏含>에게 출가하여 <철부哲夫>와 <사세沙世> 등을 낳았다.
이제와서 신관대감으로 있다가 죽으니 성품은 조용하고 한적하였다.
향가를 잘하여 12가선(歌仙) 중의 1명이였으니 왕이 그 재주를 애석해하였다.
부인(夫人)의 예로 장례토록 하였다.
二月 置眞經大士三人 以伊欣洪器富世爲之 俊登爲大元士
置孝經博士三人 以能牟順力好含爲之 好助爲大博士 以統兩經之士
妙心之徒 欲奉玉蘭公主 爲元元花主 王問於伊欣 欣不可之
剡臣欲得其徒 勸王 許之 徒乃奉臣爲上仙 臣不通眞經 徒以媚上爲主 人多非之
2월, 진경대사(眞經大士) 3인을 두고
<이흔伊欣>, <홍기洪器>, <부세富世>를 진경대사로 삼았다.
<준등俊登>을 대원사(大元士)로 하였다.
효경박사(孝經博士) 3인을 두고
<능모能牟>, <순력順力>, <호암好含>을 효경박사로 삼았다.
<호조好助>를 대박사(大博士)로 하여 두 경전을 통합토록 하였다.
<묘심妙心>의 무리들이 <옥란玉蘭>공주를 원원화주(元元花主)로 모시기를 바라니
왕이 <이흔伊欣>에게 가부를 물으니 <이흔>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나연(삼고위) - 묘심(450?-488)
나연(집아) - 란릉(452?-490)(비처) - 옥란(478-533)
<옥란>은 <묘심>의 이부동모제인 <란릉>과 <비처>의 딸이다.
<염신剡臣>이 그 무리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여 왕에게 권하여 허락하였다.
이에 무리들은 <염신剡臣>을 상선(上仙)으로 받들었으나
<염신剡臣>은 진경(眞經)에 불통하였다.
무리들이 화주(花主)를 위하여 왕에게 아첨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三月 送瑤黃 于扶余 妻牟大
命農民畜牛馬三頭 以供王事
3월, <요황瑤黃>을 부여에 보내어 <모대牟大>의 처로 하였다.
농민에게 소와 말 3마리를 길러 왕의 일에 바치라고 명하였다.
四月 天宮以王生日 大嚮仙徒 于眞經堂 俊登以大元眞冠上 天宮飾以七寶花珠
國公命 州郡擧異才 賞其薦引者
骨門伊飡靑市卒 年六十八 公性耿介愛物 不拘位階 大得於衆 善鄕歌 爲十二仙之一
4월, 천궁이 왕의 생일에 진경당에서 선도(仙徒)들에게 크게 대접하였다,
<준등俊登>은 대원진관(大元眞冠)을 쓰고 천궁은 칠보화주(七寶花珠)로 치장하였다.
국공(國公)이 명하여 주군(州郡)에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를 천거토록하고
그를 추천하고 인솔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도록 하였다.
골문이찬 <청시靑市>가 죽었다. 나이 68세였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만물을 사랑하고 직위와 관등에는 관심이 없어
무리들에게 크게 받들어졌다.
향가를 잘하여 12선(仙) 중의 하나가 되었다.
五月 仙徒請 立妙心祠 許之
命德智 修葛川宮及老王陵寢
5월, 선도(仙徒)들이 묘심사(妙心祠)를 세울 것을 청하여 허락 하였다.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갈천궁과 노왕(老王) 릉침(陵寢)을 수선토록 하였다.
六月 王與天宮 行大祭 于葛川宮 賞孝子女十人
以王弟順力護城將軍 烏含子好含 靑市子靑良 爲將軍
以洪器爲醫藥小監 好助爲大元士 俊登爲大眞士 又爲孝經師 伊欣亦爲大元士
元通生 智世路子元實 賜米
6월, 왕과 천궁이 갈천궁에서 대제를 지내고 효자, 효녀 10명에게 상을 내렸다.
왕의 동생 <순력順力>을 호성장군으로
<오함烏含>의 아들 <호암好含>과 <청시靑市>의 아들 <청량靑良>을 장군으로 하였다.
<홍기洪器>를 의약소감으로 <호조好助>를 대원사(大元士)로
<준등俊登>을 대진사(大眞士)로 하고 또 효경사(孝經師)로 하였으며
<이흔伊欣> 역시 대원사(大元士)로 하였다.
<원통元通>이 <지세로智世路>의 아들 <원실元實>을 낳아서 쌀을 내렸다.
七月 臨海長岺二鎭 告成 賞其役者十七人
立市門 行市典祭
王以是日 幸蓮帝宮 賜浴七星 于玉淸池
扶余流民札陋之 能知馬性 擧至 命付聖母山司牧
7월, 임해진(臨海鎭)과 장령진(長岺鎭)을 공고히 쌓고
그 부역에 종사한 자 17명에게 상을 내렸다.
시문(市門)을 세우고 시전제(市典祭)를 지냈다.
왕이 이날 연제궁(蓮帝宮)에 행차하여
옥청지(玉淸池)에서 목욕하고 칠성(七星)을 내렸다.
※ 칠성(七星) : 여자의 머리를 장식하는 7개의 보석
부여 유민 <찰루지札陋之>가 말의 성질을 잘 알고 있어
성모산 사목(司牧)의 직책을 주었다.
八月 天宮試州郡善射者 于苑中 擇其良者 使屬護宮二十人 兵官三十人 護城五十人
妙梁生 子比完
8월, 천궁이 동산에서 주군(州郡)에서 활을 잘 쏘는 자를 시험하여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뽑아
20명은 호궁(護宮)으로, 30명은 병관(兵官)으로, 50명은 호성(護城)으로 하였다.
<묘량妙梁>이 아들 <비완比完>을 낳았다.
九月 邦媛獻 牝馬三十頭及鞍工五人
9월, <방원邦媛>이 암말 30마리와 안공(鞍工) 5명을 바쳤다.
十月 沠阿珍宗 于州 問民疾苦
置鷹臺 于天宮 出納王命
鶴房爲靑紅 靑主天膳 紅主天衣 龍房掌御寢 虎房掌使令
天宮召 州郡力穡民戶 于宮中 賜食賜布 以還
10월, <아진종阿珍宗>을 주(州)에 보내어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문게 하였다.
천궁(天宮)에 응대(鷹臺)를 설치하여 왕명의 출납을 관장토록 하였다.
학방(鶴房)을 청(靑)과 홍(紅)으로 하였다.
청주(靑主)는 천궁의 반찬을 홍주(紅主)는 천궁의 옷을 관장토록하고
용방(龍房)은 천궁의 침소를
호방(虎房)은 천궁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관장토록 하였다.
천궁이 주군(州郡)에서 힘이 센 사람을 불러 궁중에서 음식과 옷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十一月 聖明來朝 因八海 入誠國宮中也
肜肜生德吹
以太子舍人宣登 能通章伊之學 授其璧
天宮與王及勝殿淨凰般惠善知慕珍 入龍宮
11월, <팔해八海>가 <성국誠國>의 궁중으로 들어가서 <성명聖明>이 래조하였다.
<융융肜肜>이 <덕취德吹>를 낳았다.
태자 사인(舍人) <준등宣登>이 <장이章伊>의 학문에 능통하여
그 아름다운 보물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천궁과 왕, <승전勝殿>, <정황淨凰>, <반혜般惠>, <선지善知>, <모진慕珍>이
용궁(龍宮)에 들어갔다.
十二月 天宮賜慕珍 爵級飡
時天宮問王 曰 “海水爲何不凍乎”
王不能答 珍曰 “海者水之王也 非寒 熟所可犯”
王曰 “北極有氷海三萬里 何也”
珍曰 “南極有火海三萬里 夷邦無節序者 因其無眞元之氣也
如桀紂者路人 亦可以犯之也”
天宮笑 曰 “朕與上 孰眞乎”
珍曰 “在乎 其陽則天父眞也 在乎 其陰則天母眞也 在乎 臣子者 如臣者 亦可眞也”
天宮大喜 乃賜以爵
天宮有震 命國公賜酺百官
天宮命厚都 寫金花眞言 令慕珍 敎善知淨凰
王夢見 蘿匐神 白鬚而至 言于天宮 宮曰 “必吾子也” 乃使俊登 祠之
毗己命 鳥石引軍 入京 欲謨國公 鳥石告 于天宮 備之
以阿珍宗爲理方匝判 石欣爲司牧監
12월, 천궁이 <모진慕珍>에게 급찬(級飡)의 작위를 내렸다.
이때 천궁이 왕에게 묻기를
" 바다 물은 어찌 얼지 않습니까?"라 하니
왕이 답을 못하자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 바다는 물의 왕입니다.
얼지 않는 것은 열(熟)이 범인인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 북극에는 어찌 빙해(氷海)가 3만리인가?"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남극에는 바다 3만리에 불이 있고
오랑캐 나라에는 진원(眞元)의 기(氣)가 없어 절기의 차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라의 <걸桀>왕과 은나라의 <주紂>왕이 배반자 <로인路人>과 같으니
역시 범인이라 할 만한 것입니다." 라고 하니
천궁이 웃으며 말하기를
"짐과 왕 두사람 중 누가 진(眞)인가?"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 그 양(陽)은 천부(天父)의 진(眞)에 있고.
그 음(陰)은 천모(天母)의 진(眞)에 있습니다.
신하에도 있으니 신하도 진(眞)인 것입니다."라고 하니
천궁이 크게 기뻐하며 이에 작위를 내린 것이다.
천궁이 임신하여 국공이 백관에게 술을 내리도록 하였다.
천궁이 <후도厚都>에게 명하여 금화진언(金花眞言)을 그리게 하고
<모진慕珍>이 <선지善知>와 <정황淨凰>을 기르치도록 하였다.
왕이 꿈에 라복신(蘿匐神)이 백발이 되어 천궁에게 말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천궁이 말하기를
"틀림없이 우리의 아들이다."이라고 하며
<준등俊登>을 보내어 라복사(蘿匐祠)에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비기毗己>에게 명하여 <오석鳥石>이 군을 이끌고 입경토록 하였다.
국공(國公)을 속이고자 모반을 꾀한다고 <오석鳥石>이 천궁에 고하니 방비한 것이다.
<아진종阿珍宗>을 이방잡판(理方匝判)으로
<석흔石欣>을 사목감(司牧監)으로 삼았다.
소지왕 16년(494) 목구(木狗) 甲戌
正月 天宮有疾 廢朝
정월, 천궁이 질병이 있어 조회를 폐하엿다.
二月 蓮帝生 王女山帝
命修舟楫
善兮與好助私通 生子比助夫
金官漆人十戶 來京
天宮以妹炳凰 妻鳥石 命入 吉 鮑祠
天宮快回 與王還都 命庶弟宣登爲勝殿師
2월, <연제蓮帝>가 왕의 딸 <산제山帝>를 낳았다.
선박을 수리토록 명하였다.
<선혜善兮>와 <호조好助>가 사통하여 아들 <비조부比助夫>를 낳았다.
습보(홍아) - 내숙(436-501)
눌지(아로) - 조생(418-487)
내숙(조생) - 선혜(459-518)
비태(심황) - 비지(443-515)
순실(청아) - 조리(423-483)
비지(조리) - 호조(459- )
선혜(호조) - 비조부(494- )
<비조부>의 할아버지는 <비태>의 아들 <비지>이고
할머니는 <순실>의 딸인 <조리>이다.
<비조부>의 외할아버지는 <습보>의 아들 <내숙>이고
외할머니는 <눌지>의 딸인 <조생>이다.
금관(金官)에서 칠인(漆人: 옻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10호(戶)가 서울로 왔다.
천궁이 동생 <병황炳凰>을 <오석鳥石>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도록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천궁의 질병이 쾌차하여 왕과 함께 경도(京都)로 돌아와서
서제(庶弟) <선등宣登>을 승전사(勝殿師)로 명하였다.
三月 以慕珍爲護宮隊頭 習射騎 于苑中
王與天宮 幸聖母山 謁廟 又至司牧 觀鍾牝
3월, <모진慕珍>을 호궁대두(護宮隊頭)로 하고
동산에서 기마사술을 연습토록 하였다.
왕과 천궁이 성모산에 행차하여 대묘(大廟)를 알현하고
또 사목(司牧)에게 가서 암말 종자를 살펴 보았다.
四月 大雨 京都水漲 命停聖宴 使白里治水 救民
誠國質贊失 于野人 而通好 朝廷責之
靑巤生 誠國子異腦
4월, 큰 비로 경도(京都)에 홍수가 나서 잔치를 정지하고
<백리白里>를 보내어 치수(治水)하여 백성을 구하도록 하였다.
<성국誠國>의 볼모 <찬실贊失>이 야인과 잘 지내어 조정에서 문책하였다.
<청렵靑巤>이 <성국誠國>의 아들 <이뇌異腦>를 낳았다.
성국(청렵) - 이뇌(494- ) 대가야 19대왕 재위 521-524
五月 王與天宮 幸玄牝廟 禱三眞順行五元通理
實竹獻 末曷馬三十頭 于天宮
以富民哲夫尹生 爲護城隊頭
俊登殿君以疾薨 年三十六 王哀痛之 以太子禮葬之
殿君太后之私子也 其夫實國公智度路也
性深重至孝恭儉好德 人皆惜之
5월, 왕과 천궁이 현빈묘(玄牝廟)에 행차하여
삼진(三眞) 순행(順行)과 오원(五元) 통리(通理)를 기원하였다.
<실죽實竹>이 말갈 말 30마리를 천궁에 바쳤다.
<부민富民>, <철부哲夫>, <윤생尹生>을 호성대두(護城隊頭)로 삼았다.
<준등俊登(459-494)> 전군(殿君)이 질병으로 죽었다. 나이 36세였다.
왕이 애통해 하여 태자의 예로 장례토록 하였다.
전군(殿君)은 태후(太后){파호}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는 국공(國公) <지도로智度路>이다.
성품은 심중하고 효도를 다하였으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덕을 좋아하였다.
사람들 모두가 애석해 하였다.
六月 牟大獻 玉工三人 冶工二人
葬俊登 于孝長祠 王問阿氏 曰 “誰可爲爾夫乎”
阿願歸國公 乃命國公 以阿氏爲暖房
6월, <모대牟大>가 옥공(玉工) 3명과 야공(冶工) 2명을 바쳤다.
<준등俊登>을 효장사(孝長祠)에 장사를 지냈다.
왕이 <아씨阿氏>에게 “누가 너의 남편으로 적합하겠느냐.”라고 물었다.
<아씨阿氏>가 국공(國公)에게 시집가기를 원하여,
이에 국공(國公)에게 명하여 <아씨阿氏>를 난방(暖房)으로 삼도록 하였다.
七月 實竹進攻麗軍 于薩水之原 過其伏兵 我軍腹背受賊 不利而退
先是我軍掠其末曷馬 敵示弱 而誘我 大幢藥好等 乘勝深入 而致敗也
麗軍大至 圍我犬牙城 實竹爲敵所圍 不能救
牟大兵三千 突至救解 王乃遣伊欣 賜牟大寶馬玉帶
都民聞 破麗賊 大行市祭 于市門
命七星 以彩衣 行列市中
7월, <실죽實竹>이 살수(薩水) 벌판으로 나아가 고구려군을 공격하였다.
복병을 지나쳐가 우리의 군사들이 등과 배로 적을 맞게 되니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이에 앞서 우리의 군대가 말갈의 말들을 약탈하였는데,
적들이 약점을 보이며 우리를 유인하였다.
대당(大幢) <약호藥好> 등이 승세를 타고 깊이 들어가 패함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이 크게 이르러 우리의 견아성(犬牙城)을 포위하였다.
<실죽實竹>은 적에게 둘러싸임으로 인하여 구할 수 없었다.
<모대牟大>의 병사 3천이 갑자기 도착하여 포위가 풀어져 구함을 받았다.
왕이 이에 <이흔伊欣>을 보내어, <모대牟大>에게 보마(寶馬)와 옥대(玉帶)를 주었다.
소지 마립간 16년
여름 4월,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 벌에서 고구려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견아성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가 그들을 포위했다.
백제왕 모대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그들을 구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도의 백성들이 고구려 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시문(市門)에서 시제(市祭)를 크게 지냈다.
칠성(七星)을 옷에 달고 시가를 행진하라고 명하였다.
八月 以德智總西北軍事
8월, <덕지德智>를 총서북군사(總西北軍事)로 하였다.
九月 天宮生福宗 于凉臺 賜酺三日
德智大犒北軍
命尹生 歸須及智黃 于夫余
八海生 誠國子八國 靑巤妬 而欲害海與國 逃歸其國
以肜肜爲暖宮 慕珍爲太子舍人 宣登爲內宮衛監
毗羅爲神官伊飡 比智爲護城伊飡 智弗路爲兵官匝判 智登爲骨門匝判
剡臣爲神官匝判 阿珍宗爲護城匝判
9월, 천궁이 량대(凉臺)에서 <복종福宗>을 낳아 3일간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덕지德智>가 북군(北軍)에 크게 음식을 내려 위로하였다.
<윤생尹生>에게 명하여 <수須>와 <지황智黃>을 부여에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팔해八海>가 <성국誠國>의 아들 <팔국八國>을 낳았다.
<청렵靑巤>이 질투하여 <해海>와 <팔국八國>을 해치려고 하니
도망하여 그 나라로 돌아갔다.
<융융肜肜>을 난궁(暖宮)으로 <모진慕珍>을 태자 사인(舍人)으로
<선등宣登>을 내궁위감(內宮衛監)으로 삼았다.
<비라毗羅>를 신관이찬으로 <비지比智>를 호성이찬으로
<지불로智弗路>를 병관잡판으로 <지등智登>을 골문잡판으로
<염신剡臣>을 신관잡판으로 <아진종阿珍宗>을 호성잡판으로 삼았다.
十月 王有疾 放輕囚 天宮爲之 嘗注血
10월, 왕이 질병이 있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천궁이 왕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일찌기 피를 왕에게 넣어주었다.
十一月 德智大破麗軍
王快回 與天宮 謁神宮 以告福宗
肜肜娠 慕珍子 訴于蓮帝 帝乃導上 而諱之
11월, <덕지德智>가 고구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왕이 쾌차하여 천궁과 함게 신궁을 알현하고 <복종福宗>이 태어났음을 고하였다.
<융융肜肜>이 <모진慕珍>의 아들을 임신하여 <연제蓮帝>에게 호소하니
<연제蓮帝>가 왕에게 데려갔으나 꺼려하였다.
十二月 賊夜入 國公寢殿 公與蓮帝 避入隱室 而免禍
王聞之 命阿珍宗捕賊 乃毗己私臣也
天宮怒 曰 “弟公欲危朕父 志在不利勝殿也” 王乃罷毗己兵衛 待罪天宮
12월, 도적이 밤에 국공(國公)의 침전으로 들어 와
국공(國公)과 연제(蓮帝)가 밀실로 들어가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아진종阿珍宗>에게 명하여 도적을 잡으니
<비기毗己>의 사신(私臣)이었다.
천궁이 노하여 말하기를
" 제공(弟公)이 짐의 아버지를 위태롭게 하고자 하는 것은
<승전勝殿>에게 이롭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비기毗己>의 군사를 파하고 감시케하여
천궁에서 대죄(待罪)하도록 하였다.
소지왕 17년(495) 청시(靑豕) 乙亥
正月 天宮與王 受朝 眞宮
天宮召烏含伐智 下議 曰 “勝殿年幼 以爲他日之備 欲以國公爲副君 如何”
伐智先贊之 烏含亦不能拒 乃以國公爲副君 謁神宮
詔曰 “副君與朕一體 一切政事行之 大小依服 無犯”
정월, 천궁과 왕이 진궁(眞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천궁이 <오함烏含>과 <벌지伐智>를 불러 하교하여 말하기를
"승전(勝殿)이 어려서 다른 날에 대비코자 국공(國公)을 부군(副君)으로 삼고자하니
공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 하니
<벌지伐智>가 먼저 찬성하고 <오함烏含> 역시 거부하지 못하여
국공(國公)을 부군(副君)으로 삼고 신궁(神宮)을 알현하였다.
조칙으로 이르기를
"부군(副君)과 짐은 한몸이다.
모든 정사를 맡기니 대소 신료들은 복종하고 잘못을 범하지 말라."라 하였다.
이때 소지왕 <비처> 60세, 국공 <지도로> 59세, 천궁 <후황> 30세,
태자 승전 <분종> 8세, <오함> 68세, <벌지> 59세이다.
二月 以王女心道 妻聖明
智黃生 須子須黃
副君釋毗己罪 更爲大等伊飡 如故
天宮謂王 曰 “人生行樂 何爵 爵在深宮裡乎” 王然之
乃以政事爲副君 日與天宮 遊幸州縣 爲樂
牟大以其女摩只 妻尹生 而還
2월, 왕의 딸 <심도心道>를 <성명聖明>의 처로 하였다.
<지황智黃>이 <수須>의 아들 <수황須黃>을 낳았다.
부군(副君)이 <비기毗己>의 죄를 풀어주고 다시 전과 같이 대등이찬으로 하였다.
천궁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 인생이란 즐기는 것입니다. 어찌 작위가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작위란 궁안 깊숙히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러하다고 하며 정사(政事)를 부군(副君)에게 맡기고
매일 천궁과 함께 주현(州縣)에 행차하여 유람하며 즐겼다.
<모대牟大>가 그의 딸 <마지摩只>를 <윤생尹生>의 처로 주고 돌아갔다.
三月 王與天宮 率玉蘭宣世翠凰等 遊阿瑟羅神山行宮 剡臣順都等從之
慕珍入大廟 禱福私 于老主
3월, 왕과 천궁이 <옥란玉蘭>, <선세宣世>, <취황翠凰>등을 데리고
아슬라(阿瑟羅) 신산(神山) 행궁(行宮)으로 유람하였다.
<염신剡臣>, <순도順都> 등이 따라갔다.
<모진慕珍>이 대묘(大廟)에 들어가서 노왕(老主)에게 사사로이 복을 빌었다.
四月 副君賜酺百官與蓮帝 受賀 于眞宮
慕珍與肜肜 遊聖母山 馳馬入廟 大監旱知責之
肜肜羞 欲歸 慕珍不許 乃留廟宮 而還
4월, 부군(副君)이 백관(百官)과 <연제蓮帝>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리고
진궁(眞宮)에서 하례를 받았다.
<모진慕珍>과 <융융肜肜>이 성모산으로 유람하여
말을 타고 달려 대묘(大廟)에 들어가니 대감(大監) <한지旱知>가 문책하였다.
<융융肜肜>이 부끄러워하며 돌아가고자하니 <모진慕珍>이 허락하지 않아
묘궁(廟宮)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이때 <모진> 16세, <융융> 26세?이다.
五月 副君大閱 京外軍 于北川
小裊人獻方物 請聖明 不許
慕珍與靑華 遊聖母山 通大監旱知
5월, 부군(副君)이 북천(北川)에서 경외군(京外軍)을 크게 사열하엿다.
<소뇨인小裊人>이 방물을 바치고
<성명聖明>을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모진慕珍>과 <청화靑華>가 성모산을 유람하니 대감(大監) <한지旱知>가 알았다.
六月 副君與阿氏 祀葛川宮及竹長孝長善坪
品馬于聖母山 以札陋之爲兵官舍知 司牧翁 大畜良馬
是日慕珍與靑華肜肜宝兮等 遊旱知宮中 以廢廟事
蓮帝從王 入阿瑟羅 伊欣從之
6월, 부군과 <아씨阿氏>가 갈천궁과 죽장사, 효장사, 선평사에서 제사지냈다.
성모산에서 말을 품평하고
<찰루지札陋之>를 병관(兵官) 사지(舍知)로 삼고
사목(司牧)의 늙은이에게 좋은 말을 많이 기르도록 하였다.
이날 <모진慕珍>과 <청화靑華>, <융융肜肜>, <보혜宝兮> 등이 유람하여
<한지旱知>가 궁중에 묘사(廟事)를 폐하도록 하였다.
<한지>는 <비처>와 <원군>의 딸로 이때 24살이다.
<연제蓮帝>가 왕을 따라 아슬라(阿瑟羅)에 들어가니 <이흔伊欣>이 따라갔다.
<이흔>은 <연제>보다 2살 많은 친오빠로 이때 35살이다.
七月 命選州郡劍士 至京 試之 付其良者 于兵官
7월, 주군(州郡)에서 검사(劍士)를 선발하여 경도(京都)에서 시험하여
우수한 자를 병관에 부임토록 하였다.
八月 德智大破麗軍 于雉壤城
肜肜生 慕珍女肜山 以爲王女 副君視兒 賜米
8월, <덕지德智>가 치양성(雉壤城)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융융肜肜>이 <모진慕珍>의 딸 <융산肜山>을 낳으니 왕의 딸로 삼고
부군(副君)이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九月 王與天宮蓮帝 還自神山
副君率百官 享王 于南桃
靑華生 慕珍女靑珍 天宮聞之 賜米 曰 “小經士能之乎”
珍笑 曰 “非臣也 乃神也”
9월, 왕과 천궁, <연제蓮帝>가 신산(神山)에서 돌아왔다.
부군(副君)이 백관을 인솔하여 남도(南桃)에서 왕에게 진헌드렸다.
<청화靑華>가 <모진慕珍>의 딸 <청진靑珍>을 낳으니
천궁이 이를 듣고 쌀을 내리며 말하기를
"소경사(小經士)는 능히 그리 할만 하다."하니
<모진慕珍>이 웃으며 말하기를
" 신(臣)의 짓이 아니고 신(神)의 짓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모진> 16세, <청화> 39세이다.
十月 築仙臺 于南山
慕珍通善兮 于神宮
以宝兮爲聖母廟大監 盖因慕珍請也
王遣好助 于竺山 爲天宮 求靈藥
10월, 남산(南山)에 선대(仙臺)를 쌓았다.
<모진慕珍>이 신궁(神宮)에서 <선혜善兮>와 통정하였다.
<선혜>는 <내숙>의 딸로 이때 37살이다.
<보혜宝兮>를 <모진慕珍>이 청하여 성모묘(聖母廟)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왕이 <호조好助>를 천궁을 위하여 영약을 구하러 축산(竺山)에 보냈다.
十一月 王與天宮 入龍宮 流燈 于川上
兄山人 以虎子獻之
先是 兄山有以虎爲妻者 久居山中 誤爲人捕 自言能與虎言
兄山人乃用以捕虎爲業 至是以虎子獻 于天宮
有奴小鳥者 自言能畜之 乃命畜 于龍宮之園
11월, 왕과 천궁이 용궁으로 들어가 하천 위에 유등(流燈)을 띄웠다.
형산(兄山) 사람이 호랑이 아들을 바쳤다.
이에 앞서 형산에 호랑이의 처가 된 자가 있어 오래동안 산중에서 살았는데
사람으로 오인하여 잡으니 스스로 호랑이 말과 같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에 형산 사람이 호랑이 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지금 호랑이 아들을 잡아 천궁에 바친 것이다.
노비 <소조小鳥>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이를 길러 호랑이 말을 할 수 있어
용궁의 동산에서 기르도록 명하였다.
十二月 以比智爲稟主
宝兮生 慕珍女順知
毗己爲角干 叔欣爲大等伊飡 毗羅爲骨門伊飡 比智爲神官伊飡 宝器爲護城伊飡
實竹爲大等匝判 智世路爲北路將軍 白里爲南路將軍 曲欣爲護城將軍 順力爲大等將軍
錦母干衣有疾 天宮遣醫 治之 干衣請 以其妹干兒爲錦母 許之
以甲夫奴牛皮衣爲龍宮花鳥師 年才十五
以伊欣爲大道監加大眞士 剡臣爲元元花士
王女般惠有疾 放輕囚
12월, <비지比智>를 품주로 삼았다
<보혜宝兮>가 <모진慕珍>의 딸 <순지順知>를 낳았다.
<보혜>는 <습보>의 딸로 이때 36살이다.
<비기毗己>를 각간으로 <숙흔叔欣>을 대등이찬으로 <비라毗羅>를 골문이찬으로
<비지比智>를 신관이찬으로 <보기宝器>를 호성이찬으로 <실죽實竹>을 대등잡판으로
<지세로智世路>를 북로장군으로 <백리白里>를 남로장군으로
<곡흔曲欣>을 호성장군으로 <순력順力>을 대등장군으로 삼았다.
금모(錦母) <간의干衣>가 병이 나서 천궁이 치료코자 의사를 보냈다.
<간의干衣>가 동생 <간아干兒>를 금모(錦母)로 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갑부노우(甲夫奴牛) <피의皮衣>를 용궁 화조사(花鳥師)로 삼으니
나이 15세의 준재였다.
<이흔伊欣>을 대도감(大道監)으로 삼고 대진사(大眞士)의 작위를 더하고
<염신剡臣>을 원원화사(元元花士)로 삼았다.
왕의 딸 <반혜般惠>가 병이 나서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소지왕 18년(496) 화서(火鼠) 丙子
正月 副君朝 王及天宮 于龍宮
副君與蓮帝 受朝 于南桃 閱護城軍馬
命罷州郡 天宮使 先是天宮分置州郡使 以便進供物 多爲民弊 至是副君請 罷之
정월, 부군(副君)이 용궁에서 왕과 천궁에게 조하하였다.
부군(副君)과 <연제蓮帝>가 남도에서 조하를 받고 호성(護城) 군마를 사열하였다.
주군(州郡) 천궁사(天宮使)를 파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천궁이 주군사(州郡使)를 나누어 설치하여
공물(供物)을 진상토록 하여 민폐가 많았다.
이제 와서 부군(副君)이 청하여 이를 파한 것이다.
二月 誠國獻白雉 尾長五尺
召智世路 入京 更命實竹爲北路將軍
2월, <성국誠國>이 꼬리가 5척인 흰 꿩을 바쳤다.
<지세로智世路>를 경도로 불러 들이고 다시 <실죽實竹>을 북로장군으로 명하였다.
三月 命智世路大修宮室
以智登爲古自監國 以車宿爲理方伊飡 剡臣爲大等匝判 智世路爲骨門匝判
阿珍宗爲神官匝判 比成爲護城匝判 善牟爲理方匝判 靑良爲護理將軍 籃門比烈城主
妙梁生 慕珍女妙能
3월, 지세로에게 명하여 궁실을 크게 수선토록 하였다.
<지등智登>을 고자 감국으로 <거숙車宿>을 이방이찬으로
<염신剡臣>을 대등잡판으로 <지세로智世路>를 골문잡판으로
<아진종阿珍宗>을 신관잡판으로 <비성比成>을 호성잡판으로
<선모善牟>를 이방잡판으로 <청량靑良>을 호성장군으로
<람문籃門>을 비열성주로 삼았다.
<묘량妙梁>이 <모진慕珍>의 딸 <묘능妙能>을 낳았다.
<묘량>은 <자비>의 딸로 이때 30살이다.
四月 以王大誕 宴君臣 于龍宮 賜六十以上酒 進州郡樂 以壽王 王大醉 與天宮起舞
歌不老仙曲 而倒 天宮抱 而入之 曰 “六十老仙 尙未免嬰兒也”
王笑 曰 “不老之謂嬰兒也”
群臣大笑 皆起舞 王又出 而舞之 天宮扶救之 群臣皆抱 王及天宮 而舞 夜深而罷
竹室宮主薨 年六十四 命葬於實相陵 立祠
賜王子女與副君子女 骨品爵位
命沙飡慕珍爲侍衛監天宮舍人
4월, 왕의 환갑 날에 용궁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열어 60세 이상 자에게 술을 내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주군(州郡)으로 행진하며 왕의 장수를 기원하였다.
왕이 크게 취하여 천궁과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
불노선곡(不老仙曲)을 부르며 도착하니 천궁이 들어와 왕을 포옹하며 말하기를
" 60세 노선(老仙)이 아직 어린 아이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 늙지 않는 어린 아이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크게 웃으며 모두 일어나 춤을 추니 왕이 또 나가서 춤을 추었다.
천궁이 부축하여 왕을 구하니 신하들 모두가 왕과 천궁을 안고 춤을 추어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죽실竹室>궁주가 죽었다. 나이 64세였다.
<실상實相>릉에 장사토록 명하고 사당을 세웠다.
왕의 자녀와 부군의 자녀에게 골품과 작위를 내렸다.
사찬(沙飡) <모진慕珍>을 시위감(侍衛監) 천궁 사인(舍人)으로 명하였다.
五月 大雨 閼川水漲 漂沒二百余家
蘿畐祠不沈 人皆異之 詣禱子女者如雲
王與天宮 自龍宮還 撫問災民
以阿飡沙嵩爲孝經博士
摩只生 尹生子尹只
5월, 비가 크게 내려 알천(閼川)에 홍수가 나서 2백여가(家)가 떠내려가고 매몰되었다.
라복사(蘿畐祠)가 침수되지 않으니 사람들 모두가 기이하게 생각하여
라복사(蘿畐祠)에 가서 기도하는 자녀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왕과 천궁이 용궁에서 돌아와 이재민을 방문하여 위문하였다.
아찬 <사숭沙嵩>을 효경박사로 하였다.
<마지摩只>가 <윤생尹生>의 아들 <윤지尹只>를 낳았다.
六月 行大祀 于葛川宮
命曲欣築大防 命召州郡壯丁 至京
6월, 갈천궁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곡흔曲欣>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장정을 경도로 불러
대방(大防)을 축성토록하였다.
七月 麗侵我牛山城 實竹等 出擊泥河 大破之 斬獲甚多
王與天宮 引剡臣好助等 微幸加耶界 而還
7월, 고구려가 우리의 우산성(牛山城)을 침략하여
<실죽實竹> 등이 니하(泥河)에 출격하여 크게 쳐부수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자가 심히 많았다.
왕과 천궁이 <염신剡臣>과 <호조好助> 등을 인솔하여
가야의 국경을 미행하고 돌아왔다.
八月 穀大登 王與天宮品稼 南郊
麗襲牛山城 守將只裂死之 城遂陷 命城山等 伐之 不克
8월, 곡식이 크게 여물었다.
왕과 천궁이 남교에서 추수를 품평하였다.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습격하여 수비 장수 <지열只裂>이 죽었다.
성이 마침내 함락되니 <성산城山> 등에게 정벌토록 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九月 遣好含尹生哲夫等 益北路軍 功取牛山城
以天宮小誕 集群臣 于南桃 行仙樂宴 賜宗女 同慶宴
仙徒奉天宮爲大元大眞炤明天宮 娘主上五花通天冠
9월, <호함好含>, <윤생尹生>, <철부哲夫> 등을 북로군에 보내어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취하였다.
천궁의 31살 생일날에 신하들을 남도에 모아 선악연(仙樂宴)을 열고
종녀(宗女)에게도 같은 경축 잔치를 열었다.
선도들이 천궁을 대원대진(大元大眞) 소명천궁(炤明天宮) 낭주(娘主)로 봉하고
오화통천관(五花通天冠)을 진상하였다.
十月 海梁生 慕珍女天好位
10월, <해량海梁>이 <모진慕珍>의 딸 <천호위天好位>를 낳았다.
<해량>은 <모진>의 이모로 이때 32살이다.
十一月 野人侵古自 智登擊破之
11월, 야인이 고자(古自)를 침략하여 <지등智登>이 이를 격파하였다.
十二月 王與天宮 入龍宮
檢舟楫 私通外方
善兮生 慕珍子浮君 于神宮 諱之
以智世路爲稟主
12월, 왕과 천궁이 용궁으로 들어깄다.
선박을 점검하고 사사로이 지방과 통교하였다.
<선혜善兮>가 <모진慕珍>의 아들 <부군浮君>을 신궁에서 낳으니 이를 꺼려하였다.
<선혜>는 <내숙>과 <조생>의 딸로 이때 38살이다.
<지세로智世路>를 품주로 삼았다.
소지왕 19년(497) 적우(赤牛) 丁丑
副君蓮帝朝 王及天宮 于龍宮
是日蓮帝胎動 生子厚帝 于龍宮産殿 乃慕珍所烝 而生也
1월, 부군과 <연제蓮帝>가 용궁(龍宮)에서 왕과 천궁에게 조하하였다.
이날 <연제蓮帝>가 태기가 있어 용궁 산전(産殿)에서 아들 <후제厚帝>를 낳으니
<모진慕珍>이 증(烝)하여 낳은 것이다.
이때 <모진>의 어머니 <연제> 35살, <모진> 18살이다.
二月 野王以贊失爲婿
天宮有震 賜酺宗臣宗女
2월, 야왕(野王)이 <찬실贊失>을 사위로 삼았다.
천궁이 임신하여 종신(宗臣)과 종녀(宗女)에게 잔치를 열고 술을 내렸다.
三月 實竹破麗軍 于牛山城
王及天宮蓮帝 自龍宮還
3월, <실죽實竹>이 우산성(牛山城)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렸다.
왕과 천궁, <연제蓮帝>가 용궁에서 돌아왔다.
四月 宴群臣 于南桃 用加耶女樂及扶余戲
野人來侵 智弗路預知其謀 使白里伏兵 而待之 虜其魁斬之 移其降者 于陽山
心道生 聖明女明刀
4월, 신하들에게 남도(南桃)에서 잔치를 열어, 가야와 부여 여자들을 희롱하였다.
야인이 쳐들어 오니 <지불로智弗路>가 그 모략을 미리 알고
<백리白里>에게 복병을 두어 기다리게 하여 그 추장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항복한 자들을 양산(陽山)에 이주토록 하였다.
<심도心道>가 <성명聖明>의 딸 <명도明刀>를 낳았다.
五月 納水桂凰 來朝
以藥斗爲副君暖房
扶余眞老卒 燕突爲兵官佐平
5월, <납수納水>와 <계황桂凰>이 래조하였다.
<약두藥斗>를 부군(副君) 난방(暖房)으로 삼았다.
부여의 <진로眞老>가 죽어서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하였다.
六月 下嫁玉蘭 于剡臣
命副君 祀葛川宮
以伊宗爲管山城主
6월, <옥란玉蘭>을 <염신剡臣>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옥란>은 <비처>의 딸로 이때 20살이고 <염신>은 <위화>의 아버지로 51살이다.
부군에게 명하여 갈천궁에서 제사토록 하였다.
<이종伊宗>을 관산성주(管山城主)로 삼았다.
七月 旱 多蝗 王禱蘿畐祠
命群臣 擧才堪牧民者一人
7월, 가물고 황충이 많아 왕이 라복사(蘿畐祠)에서 기도를 올렸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목민(牧民)을 감당할 재주있는 자 1명을 천거토록 하였다.
八月 麗又大擧入 侵牛山城 陷之
8월, 고구려군이 또 대거 우산성(牛山城)을 침입하여 함락시켰다.
九月 大修兵馬 于京師
仙徒奉 普賢爲元元花主 慕珍爲元元花士
9월, 경사(京師)에 병마(兵馬)를 크게 보강하였다.
선도(仙徒)들이 <보현普賢>을 원원화주(元元花主)로
<모진慕珍>을 원원화사(元元花士)로 봉하였다.
<보현>은 <모진>보다 2살 어린 친동생이다.
十月 天宮生 厚惠公主 于天宮 賜酺
城山大破麗軍 于牛山城
10월, 천궁이 천궁에서 <후혜厚惠>공주를 낳아서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성산城山>이 우산성(牛山城)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十一月 以洪器爲神官舍人
11월, <홍기洪器>를 신관사인(神官舍人)으로 삼았다.
十二月 王與天宮 謁神宮 告生女
王與天宮及太子公主等 入龍宮
12월, 왕과 천궁이 신궁(神宮)을 알현하고 딸을 낳았음을 고하였다.
왕과 천궁, 태자, 공주 등이 용궁으로 들어갔다.
소지왕 20년(498) 토호(土虎) 戊寅
正月 副君蓮帝朝 王及天宮 于龍宮
以善知公主 妻慕珍 賜爵一吉飡 行吉 于龍宮 賜酺群臣
王與天宮副君地宮 還都 受朝 于眞宮
정월, 부군과 <연제蓮帝>가 용궁에서 왕과 천궁을 조하하였다.
<선지善知>공주를 <모진慕珍>의 처로 하고 일길찬의 작위를 내려
용궁에서 길례를 치르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선지>는 <아지>가 태자로 있을 때 천궁 <후황?이 태자비가 되어 낳은 딸이다.
왕과 천궁, 부군, 지궁(地宮)이 경도(京都)로 돌아와 진궁(眞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靑華生 女華珍
以魏花郞爲太子舍人
天宮與善知慕珍 謁神宮
天宮謂慕珍 曰 “汝愛吾女乎”
珍曰 “愛之”
天宮曰 “其愛何如”
珍曰 “如天王之天宮也”
天宮笑之 曰 “朕於夫皇 嘗糞注血 汝亦能之乎”
珍曰 “臣於公主 當磨頂放踵也”
天宮乃 問於公主 主曰 “我亦然也”
天宮乃 召大道監伊欣 守盟 伊欣曰
“臣聞 至親無愛大愛 自然一忠一木無非 以元生元 元元之外 又何盟乎” 天宮曰善
瑤黃生 牟大子順己 遣使 賜衣
命慕珍與善知 祀竹長宮
2월, <청화靑華>가 딸 <화진華珍>을 낳았다.
<위화魏花>랑을 태자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천궁과 <선지善知>, <모진慕珍>이 신궁(神宮)을 알현하였다.
천궁이 <모진慕珍>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는 우리 딸을 사랑하느냐?"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사랑합니다."라고 하였다.
천궁이 말하기를
" 얼마나 사랑하느냐?"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 천왕이 천궁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니
천궁이 웃으며 말하기를
" 짐은 부황에게 일찌기 피를 넣어 주었다. 너 역시 할 수 있느냐?"라고 하니
<모진慕珍>이 말하기를
" 신은 공주에게 마땅히 머리부터 갈아서 발 뒤꿈치까지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천궁이 공주에게 물으니 공주가 말하기를
" 저 역시 그리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궁이 대도감 <이흔伊欣>을 불러 맹서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흔伊欣>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데 지극한 친함은 사랑이 없어도 큰 사랑이니
자연이 하나의 충(忠)은 하나의 나무일 뿐입니다.
바탕이 바탕을 낳으니 바탕과 바탕외에 또 무엇으로 맹서를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천궁이 좋다고 하였다.
<요황瑤黃>이 <모대牟大>의 아들 <순기順己>를 낳아 사신을 보내어 옷을 내렸다.
<모진慕珍>과 <선지善知>에게 죽장궁(竹長宮)에 제사토록 명하였다.
이때 천궁 <후황> 33세, <모진> 19세, <선지> 15세,
<위화> 12세, 태자 <분종> 11세이다.
三月 以阿氏女彡阿只爲善知媵妾
3월, <아씨阿氏>의 딸 <삼아지彡阿只>를 <선지善知>의 잉첩(媵妾)으로 하였다.
<삼아지>는 <선지>보다 2살 많다.
四月 大酺三日 王與天宮副君地宮 起舞 又命慕珍善知阿氏彡阿只 並起舞
智黃生 牟大女白水 命智淸 往賜衣
天宮特賜慕珍紫金衣 乘白花馬
4월, 3일간 크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리고 왕과 천궁, 부군, 지궁이 일어나 춤을 추고
또 <모진>, <선지>, <아씨>, <삼아지>도 같이 일어나 춤추도록 명하였다.
<지황智黃(476?- )>이 <모대牟大(466-501)>의 딸 <백수白水>를 낳아
<지청智淸(474- )>에게 가서 옷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지청>은 <지황>의 오빠로 <지불로>의 자식이다.
천궁이 특별히 <모진慕珍>에게 자금의(紫金衣)를 내리고
백화마(白花馬)를 타게 하였다.
五月 德智等 大破麗軍 獻俘 至京
王與天宮 微幸 竺山
5월, <덕지德智> 등이 고구려군을 대파하여 경도에 이르러 사로잡은 포로를 바쳤다.
왕과 천궁이 축산(竺山)에 미행하였다.
六月 命慕珍善知 祀葛川宮
阿氏生 副君子人宗
增築凉仙臺地 爲凉宮
6월, <모진慕珍>과 <선지善知>에게 갈천궁에 제사 지내도록 명하였다.
<아씨阿氏>가 부군의 아들 <인종人宗>을 낳았다.
양선대지(凉仙臺地)를 증축하여 양궁(凉宮)으로 하였다.
七月 王及天宮 入太伯神山
7월 왕과 천궁이 태백 신산(神山)에 들어갔다.
八月 懶色生懶元
牟大引兵 出武珍
蓮帝海梁與慕珍 遊龍宮
8월, <라색懶色>이 <라원懶元>을 낳았다.
<모대牟大>가 병사를 이끌고 무진(武珍)을 출발하였다.
동성왕 20년(AD 498)
8월에 왕은 탐라(耽羅)가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하자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었으므로 그만두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연제蓮帝>와 <해량海梁>과 <모진慕珍>이 용궁에 유람하였다.
九月 賞戰勝軍士
摩只生 慕珍子癸中
9월, 전쟁에 이긴 군사에게 상을 내렸다.
<마지摩只>가 <모진慕珍>의 아들 <계중癸中>을 낳았다.
十月 王與天宮還 入龍宮 是日龍宮 虎生子
先是虎無雄 不能産 章山民捉一雄虎 來配之 至是一雌二雄
禁民奉佛
以伊欣爲大元眞士 好助爲大眞士 洪器富世爲左右大元士
置眞經大士十二人 尊天宮爲大眞大元大明大神炤明天宮 玉仙郞主上 八寶玉仙冠 于龍宮眞殿 天宮命諸士 上殿設眞 至夜深 賜酒 行歌
10월, 왕과 천궁이 돌아와서 용궁으로 들어갔다.
이날 용궁의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
이에 앞서 호랑이는 암컷이 없어 새끼를 낳지 못하였는데
장산(章山) 백성이 암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교배를 시켜
이제 숫놈 한 마리와 암 놈 2마리가 되었다.
백성들에게 부처를 섬기는 것을 금하였다.
<이흔伊欣>을 대원진사(大元眞士)로 <호조好助>를 대진사(大眞士)로
<홍기洪器>와 <부세富世>를 좌우 대원사(大元士)로 삼았다.
진경대사 12명을 두고 천궁을 대진대원대명대신 소명천궁 옥선랑주로 높이고
용궁 진전(眞殿)에서 팔보옥선관(八寶玉仙冠)을 진상하였다.
천궁이 경사(經士)들에게 명하여 상전(上殿)에 진(眞)을 설치하게 하고
밤 늦도록 술을 내리고 노래를 불렀다.
十一月 野人請婚 不許
命副君亦稱王號
11월, 야인이 청혼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부군 역시 왕으로 칭하라고 명하였다.
十二月 王與天宮 浮海 宴仙徒 是日 風雪滿海上
天宮醉 倒于船上 諸士扶之 入龍宮 是夜雪 深夜宴宮中 歌舞到曉
12월, 왕과 천궁이 해상의 부표에서 선도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이날 눈바람이 해상에 심하게 불었다.
천궁이 취하여 선상(船上)에 이르니 경사(經士)들이 부축하여 용궁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 눈이 내렸으나
밤이 깊도록 궁중에서 잔치를 열어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소지왕 21년(499) 황토(黃兎) 己卯
正月 天宮未寧 罷朝 仙徒皆 以赤跣 立雪中 禱之 達夜
疾漸劇 王號泣 不自生 群臣莫知所爲 遣使求扶余 未至而崩 王爲之注血 不复
時天寒大雪 仙徒 以僵死雪中爲榮 而會于龍宮者數百人
藥頭兵婆 殉于天宮 王命爵其子兵其
王詔 曰 “寡人無德 天宮遐仙 自今一切政事 皆付副君
朕欲專心眞經 早從天宮 于帝鄕也” 遂服道衣 自稱天宮弟子
副君與蓮帝 受朝 于龍宮
命中外神官仙舞 皆赴龍宮 以營大行祥事
정월, 천궁이 안녕하지 못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선도들 모두가 맨발로 눈속에 서서 밤을 새워 기도를 올렸다.
질병이 점점 더 심하여지자 왕이 울면서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하니
신하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사신을 부여에 보내어 도착하기도 전에 붕하였다.
왕이 피를 넣을려고 하였으나 다시 넣을 없었다.
이때 날씨는 춥고 눈이 많이 내려 선도들이 눈 속에서 영광스럽게 넘어져 죽고
용궁으로 모여든 자가 수백명이었다.
약두(藥頭) <병파兵婆>가 천궁에서 순사(殉死)하여
그 아들 <병기兵其>에게 작위를 내렸다.
왕이 조칙으로 이르기를
"과인이 덕이 없어 천궁이 하늘로 갔으니 지금부터 모든 정사는 부군에게 맡기고
짐은 오직 진경(眞經)에만 매달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조속히 천궁을 따르려 한다."
라고 하며 마침내 도의(道衣)를 입고 스스로 천궁의 제자라고 칭하였다.
부군과 연제가 용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나라 안팎 신궁 선무들 모두가 용궁으로 나아가 천궁에게 제사를 지냈다.
二月 神宮大監善兮宮主 生子起鳥 骨門諱之 乃舍人洪器私通 而生也
2월, 신궁대감 <선혜善兮>궁주가 아들 <기조起鳥>를 낳았다.
사인 <홍기洪器>가 사통하여 낳아서 골문이 이를 꺼려하였다.
三月 葬天宮 于伊同 以天宮遺詔 禁殉葬 加耶扶余金官各 遣使奉賵
天宮愛民好德 才皃雙絶 性又明敏溫柔 不喜亂貞事 王至愛終始一徹 而崩 春秋三十四
臣民如喪考妃 痛聲 連野天 王與太子公主等 號絶 成病
鳴呼 德高而升天 不可以人事測也
妙梁生 慕珍女妙元
取射槍火石者百人 分暑三路及京
3월, 천궁을 이동(伊同)에 장사 지냈다.
천궁의 유조(遺詔)로 순장을 금하였다.
가야, 부여, 금관이 사신을 보내어 부의하였다.
천궁은 백성을 사랑하고 덕을 좋아하였다.
재주와 얼굴 두 가지 모두 비할 데 없이 훌륭하였다.
성품 또한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온화하고 부드러워
어지럽고 곧은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시종 한결같이 사랑하다 붕하니 춘추 34세였다.
신하와 백성이 마치 자기들 배우자가 죽은 것처럼 들에서 통곡하고
왕과 태자, 공주 등이 절규하여 부르다 병이 생겼다.
슬프다!
덕이 높아 하늘로 올라갔으니 사람의 일이란 가히 가늠할 수가 없구나!
<묘량妙梁>이 <모진慕珍>의 딸 <묘원妙元>을 낳았다.
활,창,불,돌을 잘 다루는 사람 100명을 뽑아서 삼로(三路)와 서울에 배치하였다.
四月 王與善知普賢保道等公主 自伊同宮 還都 停賜酺
蓮帝生 眞丸 王視兒 賜米
王與善知普賢 遊太伯神山
4월, 왕과 <선지善知>, <보현普賢>, <보도保道>등 공주가
이동궁(伊同宮)에서 경도(京都)로 돌아와 잔치를 열어 술을 내리는 것을 정지하였다.
<연제蓮帝>가 <진환眞丸>을 낳아서 왕이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왕과 <선지善知>, <보현普賢>이 태백 신산(神山)으로 유람하였다.
五月 彡阿只生 子有珍
5월, <삼아지彡阿只>가 아들 <유진有珍>을 낳았다.
六月 王還 自太伯 賞碧晉碧仁等 有差
王與蓮帝 謁神宮 翌日 以蓮帝爲天宮
王與善知 祀葛川宮
以海梁爲地宮 肜肜爲人宮
以札陋之爲司牧大舍 屯市爲兵官舍知
先是札告 曰 “臣之鄕 有屯市 能作鐵甲兵車” 乃命札子義 往索之 至是至
6월, 왕이 태백에서 돌아와 <벽진碧晉>, <벽인碧仁> 등에게 차별있게 상을 내렸다.
왕과 <연제蓮帝>가 신궁을 알현하고 다음날 <연제蓮帝>를 천궁으로 삼았다.
왕과 <선지善知>가 갈천궁에서 제사하였다.
<해량海梁>을 지궁으로 <융융肜肜>을 인궁으로 삼았다.
<찰루지札陋之>를 사목(司牧) 대사(大舍)로
<둔시屯市>를 병관(兵官) 사지(舍知)로 삼았다.
이에 앞서 <찰루지札陋之>가 고하기를
" 신의 고향에 <둔시屯市>라는 자가 있어 철갑과 병차를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찰자의札子義>에게 명하여 가서 그를 찾아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七月 作捺己行宮
先是王與天宮 遊捺己之 時天宮言 可作行宮 于此 事未成而崩 王劇命其功 至是成
7월, 날기(捺己)에 행궁을 지었다.
이에 앞서 왕과 천궁이 날기(捺己)에 유람하였는데
이때 천궁의 말이 '여기에 행궁을 지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행궁을 다 짓기전에 붕하니 왕이 천궁의 공을 생각하여
빨리 짓도록 명하니 이제와서 완공된 것이다.
八月 大品彩典
扶余大旱 民無食
王與善知普賢剡臣等 入捺己行宮 思天宮悲泣不食
剡臣乃使波路 獻大花蕾 于王 花開而美人由 中出
王曰 “夢見天宮 慰我勿泣 自袖中出一女與我者此也” 乃幸之
仍命其女曰 碧花 時年十五 而容皃絶美
8월, 채전(彩典)을 크게 품평하였다.
부여가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었다.
왕과 <선지善知>, <보현普賢>, <염신剡臣> 등이 날기(捺己) 행궁(行宮)으로 들어갔다.
천궁을 생각하여 슬피 울며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염신剡臣>이 <파로波路>를 보내어 왕에게 큰 꽃봉오리를 바쳐
꽃을 여니 꽃봉오리 안에서 미인이 나왔다.
왕이 말하기를
" 꿈에 천궁을 보았더니 나를 위로하며 울지말라 하더니
소매 속에서 나온 한 여인이 이 사람이구나"라 하며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이에 그 여인을 <벽화碧花>라고 명하니 이때 나이 15세로 용모가 절세의 미인이었다.
<벽화>는 <파로>와 <벽아>의 딸이다.
九月 副君品馬 于聖母山
以波路爲捺己行宮大舍
9월, 부군이 성모산에서 말을 품평하였다.
<파로波路>를 날기(捺己) 행궁(行宮) 대사(大舍)로 삼았다.
十月 以厚蒂妻 王子沙嵩
八海婿著尸馬 歸野國
索娥生 王女索明
10월, <후체厚蒂>를 왕자 <사숭沙嵩>의 처로 하였디.
<팔해八海>의 사위 <저시마著尸馬>가 야국(野國)으로 돌아갔다.
<삭아索娥>가 왕의 딸 <삭명索明>을 낳앗다.
十一月 舒弗邯烏含卒 年七十二
公脅力絶人 沈約有大度 臨戰有奇謀虛
己下士恤人 以誠 雖敵國之民 待之無異 故願歸者甚衆 麗人歌之 曰
“賢哉烏公 實我父母”
公歸京 敵我相扶 而流涕 曰 “天上人去矣”
公之父多甘公 以老王功臣 賢而有德 娶老王長女烏士只公主
夢見神鹿 而生公云 以太公禮葬之
11월, 서불감 <오함烏含>이 죽었다. 나이 72세였다.
공은 남을 위협하는 힘과 용맹이 있고 약조를 굳게 지키며 큰 도량을 지니고 있었다.
전장에 나가서는 기묘한 위장술을 사용하였다.
자기 아래 사병을 돌보고 적의 백성일지라도 정성을 다하여 똑같이 대하니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 중의 고구려인이 노래하기를
" 현명하구나. 오공이여, 실로 나의 부모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경도(京都)로 돌아가니 적과 아군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하늘 나라 사람이 갔구나!"라고 하였다.
공의 아버지는 <다감多甘>공으로 노왕(老王){눌지}의 공신(功臣)이다.
현명하고 덕이 있어 노왕(老王)의 장녀 <오사지烏士只>공주에게 장가들어
꿈에 신록을 보고 공을 낳았다.
태공(太公)의 예로 장례하였다.
十二月 以伐智爲角干 叔欣爲兵官伊飡 毗羅爲大等伊飡 比智爲骨門伊飡
宝器爲神官伊飡 智弗路爲護城伊飡 智世路爲兵官匝判 阿珍宗爲骨門匝判
比成爲神官匝判 馬欣爲護城匝判 河大爲水路將軍
12월, <벌지伐智>를 각간으로 <숙흔叔欣>을 병관이찬으로
<비라毗羅>를 대등이찬으로 <비지比智>를 골문이찬으로
<보기宝器>를 신관이찬으로 <지불로智弗路>를 호성이찬으로
<지세로智世路>를 병관잡판으로 <아진종阿珍宗>을 골문잡판으로
<비성比成>을 신관잡판으로 <마흔馬欣>을 호성잡판으로
<하대河大>를 수로장군으로 삼았다.
소지왕 22년(500) 금용(金龍) 庚辰
正月 副君與天宮 受朝 眞宮
副君使智弗路 朝王 于捺己行宮
神宮夜發瑞光 三日 王自捺己 還都 問吉匈 于中外
命封副君子女爲殿君 公主與王子一體遇之
정월, 부군과 천궁이 진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부군이 <지불로智弗路>를 보내어 날기 행궁에서 왕을 조하토록 하였다.
신궁(神宮)에 3일간 밤에 서광이 있었다.
왕이 날기에서 경도로 돌아와 나라 안팎에서 길흉을 물었다.
부군의 자녀를 전군(殿君)으로 봉하고 공주와 왕자를 똑같이 대우하였다.
二月 又幸捺己
聖明妻心道與宝元私通 生女元刀
2월, 또 다시 날기(捺己)로 행차하였다.
<성명聖明>의 처 <심도心道>가 <보원宝元>과 사통하여 딸 <원도元刀>를 낳았다.
三月 野人襲長岺鎭 守將突死之 白里與河大挾擊 大破之
以普賢 妻伊欣子守知
城山比烈城主 明谷悉直城主
3월, 야인(野人)이 장령진(長岺鎭)을 습격하여 수비하던 장수 <돌突>이 죽어
<백리白里>와 <하대河大>가 도와서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였다.
<보현普賢>을 <이흔伊欣>의 아들 <수지守知>의 처로 하였다.
<성산城山>을 비열성주로 <명곡明谷>을 실직성주로 하였다.
四月 王 自捺己還 宴群臣 于南桃
暴風拔木 黃霧四塞
以妙蘭妻元臣
4월, 왕이 날기(捺己)에서 돌아와 남도(南桃)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태풍으로 나무가 뽑히고 누런 안개가 사방에 가득하였다.
<묘란妙蘭>을 <원신元臣>의 처로 하였다.
五月 慕珍使扶余 牟大以國公禮待之
王與善知 微幸捺己
仙徒奉妙紅 爲元元花主
5월, <모진慕珍>을 부여로 보내니 <모대牟大>가 국공(國公)의 예(禮)로 대우하였다.
왕과 <선지善知>가 날기(捺己)에서 미행하였다.
선도(仙徒)가 <묘홍妙紅>을 원원화주(元元花主)로 봉하였다.
六月 副君與天宮阿氏 祀葛川宮
6월, 부군과 천궁, <아씨阿氏>가 갈천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七月 王還
孝德使其子契德 通發胡 自称老君
鮑石祠池生 三莖蓮花
美梁宮主卒 年六十五 登欣公女也
初爲太王宮主 生順力妙梁 副君通 而生順都
未幾 下嫁乃宿公 生勿力玉梁水梁 色美 氣高 爲十二歌仙之一
7월, 왕이 돌아왔다.
<효덕孝德>이 그 아들 <계덕契德>을 보내어
<발호發胡>와 통정하고 스스로 노군(老君)이라고 하였다.
포석사 연못에 줄기가 3개인 연꽃이 피었다.
<미량美梁>궁주가 죽었다. 나이 65세였다.
<등흔登欣>공의 딸이다
처음에 태왕(太王)궁주가 되어 <순력順力>과 <묘량妙梁>을 낳고
부군과 사통하여 <순도順都>를 낳았다.
얼마되지 않아 <내숙乃宿>공에게 하가(下嫁)하여
<물력勿力>과 <옥량玉梁>, <수량水梁>을 낳았다.
얼굴이 아름답고 기개가 높아 12가선(歌仙) 중의 하나가 되었다.
八月 王又幸捺己
慕珍自扶余環
元市母 諷王微幸波路家 王乃納碧花 于行宮
8월, 왕이 또 다시 날기(捺己)로 행차하였다.
<모진慕珍>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원시元市>의 어머니가 왕에게 풍간하여 <파로波路>의 집을 미행하였다.
이에 왕이 행궁에서 <벽화碧花>를 거두어 들였다.
九月 王與碧花 還都
以普仁爲太子妃 行吉 于神宮 賜大酺三日
王宴群神 于剡臣家
9월, 왕과 <벽화碧花>가 경도(京都)로 돌아왔다.
<보인普仁>을 태자비로 하고 신궁(神宮)에서 길례를 행하고
3일간 크게 잔치를 열어 술을 내렸다.
왕이 <염신剡臣>의 집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었다.
十月 以碧花爲暖宮 以其有娠 超遷之也
冬暖 桃李華
牟大報 其別宮宝留喪 卽我宝信公女也
生文洲牟大子女七人 而薨 壽四十八
以其有功 于和親 命宝器 往吊之
王夢見竹長宮 而疾作 命中外仙舞 禱疾
龍宮夜鳴
伊宗 以管山城主 有功於徒 盖命爵 賜馬
10월, <벽화碧花>가 임신을 하여 특별히 승진시켜 난궁(暖宮)으로 삼앗다.
겨울이 따뜻하여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모대牟大>가 그 별궁 <보류宝留>가 죽었다고 알려왔다.
<보류宝留>는 우리 <보신宝信>공의 딸이다.
<문주文洲>와 <모대牟大>의 자녀 일곱 명을 낳고 죽으니 나이 48세였다.
화친에 공이 있어 <보기宝器>에게 가서 조문토록 명하였다.
왕이 꿈에 죽장궁(竹長宮)을 보고 병이 나서
나라 안팎 선무(仙舞)에게 병이 낫도록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용궁에서 밤에 울음소리가 있었다.
<이종伊宗>을 관산성주로 하고 무리들에게 공이 있어 작위를 내리고 말을 하사하였다.
十一月五日 王崩于暖宮 副君以遺詔 卽位于眞宮
以大行王爲太王 太王爲老王 老王爲老太王
宝器聞喪 自扶余 忽歸
廢太王九宮 新立三宮 以蓮帝爲上宮 海梁爲下宮 阿氏爲暖宮 命太王宮妾 悉付散宮
新王與新上宮蓮帝 受賀 于眞宮 仍署百官如故
以父習宝公爲葛文王 母鳥生夫人爲葛文王后
以蓮帝母牟梁夫人爲太太夫人 尊登欣公爲舒弗邯
11월, 5일 왕이 난궁(暖宮)에서 붕(崩)하였다.
부군(副君)이 유조(遺詔)로 진궁(眞宮)에서 즉위하였다.
대행왕(大行王)을 태왕(太王)으로 태왕을 노왕(老王)으로
노왕을 노태왕(老太王)으로 하였다.
<보기宝器>가 초상을 듣고 부여에서 급히 돌아왔다.
태왕의 구궁을 폐하고 새로 삼궁을 세우니
<연제蓮帝>를 상궁으로 <해량海梁>을 하궁으로 <아씨阿氏>를 난궁으로 하였다.
태왕궁의 첩들을 모두 산궁(散宮)으로 하였다.
신왕과 신상궁 연제가 진궁에서 조하를 받고 백관의 관직을 전과같이 하였다.
아버지 <습보習宝>공을 갈문왕으로 어머니 <조생鳥生>부인을 갈문왕후로 하였다.
<연제蓮帝>의 어머니 <모량牟梁>부인을 태태(太太)부인으로 하고
<등흔登欣>공을 서불감으로 추존하였다.
十二月 行大祭 于神宮
以伊欣爲稟主 俊明祖主
以太子妃普仁爲太王祭主
新王與太子及妃 祀伊同宮
是夜大雪 上宮冒雪 而至 新王謂上宮 曰 “吾等有今日 乃吾女之力也”
上宮笑 曰 “汝知有女 而不知有妻 誰謂汝賢乎 言訖而宮樑 爲之震”
王爲之動 上宮泰然 言笑自若 是夜 普賢生 守知子英失
移葬習宝王 于鳥生陵 作善坪宮
以祖宝海公爲老葛文王 祖母聖明公主爲宝海王后 封其陵爲弘峴宮
發胡生 契德子發契 請以契德爲夫 不許
12월, 신궁(神宮)에서 대제를 지냈다.
<이흔伊欣>을 품주로 <준명俊明>을 조주(祖主)로 하였다.
태자비 <보인普仁>을 태왕제주(太王祭主)로 하였다.
신왕과 태자와 태자비가 이동궁(伊同宮)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동궁(伊同宮)은 소지명왕 <비처>와 <후황>을 모신 종묘이다.
이날 밤 눈이 많이 내렸으나 상궁이 눈을 무릅쓰고 와서
신왕이 상궁에게 일러 말하기를
" 우리들이 오늘 여기에 있으니 우리 딸을 돌보시지요."라 하니
상궁이 웃으며 말하기를
" 당신은 딸만 알고 처를 모르니 누가 당신을 현명하다고 말하겠습니까?
말이 궁 들보에 울리니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에 놀랐으나 상궁은 태연자약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날 밤 <보현普賢>이 <수지守知>의 아들 <영실英失>을 낳았다.
<습보習宝>왕을 <조생鳥生>릉에 이장(移葬)하고 선평궁(善坪宮)을 지었다.
선평궁(善坪宮)은 <습보>와 <조생>을 모신 종묘이다.
조부 <보해宝海>공을 노갈문왕(老葛文王)으로
조모 <성명聖明>공주를 <보해宝海>왕후로 하고
그 릉을 홍현궁(弘峴宮)으로 봉하였다.
홍현궁(弘峴宮)은 <보해>와 <성명>을 모신 종묘이다.
<발호發胡>가 <계덕契德>의 아들 <발계發契>를 낳아
<계덕契德>을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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