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희씨가 64괘를 그어 하늘의 뜻을 드러내었다 하니 그 하늘의 뜻을 살펴보자
<괘(卦)의 유형(類型)>
1. 본괘(本卦) : 乾에서 未濟가지의 64卦
2. 호괘(互卦) : 본괘의 初爻와 上爻를 제외하고 3,4,5爻를 上卦(用)로
2,3,4爻를 下卦(體)로 한 卦
屯(水雷)괘의 호괘는 碩果가 두터운 땅속으로 들어가
어렵게 나오는 뜻이 있으므로,
바름을 지키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 剝(山地)괘이다.
3. 지괘(之卦) : 본괘 각 爻의 음양이 교체된 괘
屯(水雷)괘의 初爻가 陰으로 바뀌면 比(水地)괘가 된다.
괘를 볼 때 본괘를 70%, 호괘와 지괘를 30% 정도로 한다.
4. 도전괘(倒轉卦) : 본괘를 뒤집어 엎어 反易한 괘
屯(水雷)괘의 도전괘는 어리고 無知한 생명을 기르는
蒙(山水)괘이다.
反易은 모체 중에서 태아가 反生하고 있는 것과
그믐달이 초생달로 倒生하는 것 等이 반역이다.
反易은 同宮한 생리적 변화로 胎生이다.
64괘중 도전괘는 56괘이다.
5. 착종괘(錯綜卦) : 본괘의 上卦와 下卦의 위치를 바꾸어 交易한 괘(雲雨-光熱)
屯(水雷)괘의 착종괘는 험한 과정을 지나 순조로이 풀리는
解(雷水)괘이다.
交易은 물리적 변화이다.
64괘중 착종괘는 56괘이다.(乾坤坎離 震巽艮兌 제외)
6. 배합괘(配合卦) : 본괘 각 爻의 음양이 變易한 괘(寒→暑)
屯(水雷)괘의 배합괘는 이미 나온 물건을 익혀 새롭게 이루는
鼎(火風)괘이다
變易은 화학적 변화로 化生이다.
64괘중 배합괘는 8괘(乾 坤 坎 離 頤 大過 中孚 小過)이다.
도전괘는 상호 연계된 내용, 호괘는 내포된 의미. 배합괘는 상반된 위치상황.
착종괘는 내외의 위치변경 등을 살필 때 본다.
주역 64괘의 차례는 도전괘로 되어 있다.
도전괘가 없는 괘는 배합계로 그 차례를 잇는다.
64괘중 배합괘(변역)만 있는 괘는 乾 坤 坎 離로
오로지 화학적 변화로 化生만 한다.
64괘중 도전괘(반역)이 없고 착종괘(교역)과 배합괘(변역)이 있는 괘는
頤 大過 中孚 小過로 생리적 변화는 하지 않고 오로지 물리적 화학적 변화만 한다.
64괘중 도전괘(반역) 착종괘(교역) 배합괘(변역)이 같은 괘는
泰 否 旣濟 未濟괘이고
도전괘(반역) 배합괘(변역)이 같은 괘는 隨 蠱 漸 歸妹괘이고
착종괘(교역) 배합괘(변역)이 같은 괘는 咸 恒, 損 益괘이다.
7. 생장괘(生長卦) : 下卦가 長하고 上卦가 少한 것은 下로부터 上하는
生長의 象이 되고 屯 蒙, 隨 蠱, 噬嗑 賁, 頤 大過, 困 井, 革 鼎의 12卦이다.
8. 수성괘(收成卦) : 上卦가 長하고 下卦가 少한 것은 上으로부터 下하는
收成의 象이 되고 家人 睽, 蹇 解, 漸 歸妹, 豊 旅, 渙 節, 中孚 小過의 下經12卦이다.
주역 上經의 生長卦는 그 序卦의 次序가 모두 分散 되어 있고
下經의 收成卦는 家人 睽, 蹇 解 四卦가 한곳에 聚合하고
漸 歸妹, 豊 旅, 渙 節, 中孚 小過 八卦가 巽, 兌를 中心으로 하여
또한 한곳에 聚合하고 있으니 이는 物의 生長하는 때는 分散하고
收成하는 때는 서로 어울려서 한곳에 聚合하고 하는 이치이다.
下經에 困 井, 革 鼎의 생장괘가 있는 것은 困 井, 革 鼎은 태아궁으로
태아가 모체에서 생장하고 있는 것이다.
第一章, 參天兩地는 땅의 변화법칙이다
昔者聖人之作易也 幽贊於神明而生蓍. 參天兩地而倚數.
觀變於陰陽而立卦 發揮於剛柔而生爻. 和順於道德而理於義 窮理盡性 以至於命.
옛 날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을 적에,
신명(神明 : 化育)을 그윽히 도와 시초(蓍草)를 내었고,
하늘은 삼(三)(---)으로 잡고, 땅은 양(兩)(- -)으로 잡아,
이것에 의거하여 수(數)를 기산(起算)하고,
음양(陰陽)이 변(變)하는 것을 보아 괘(卦)를 세우고,
강유(剛柔)를 발휘하여 효(爻)를 낳으니,
[역(易)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道德)에 화순(和順)하고 의(義)에 맞게 하며,
[하늘의]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인물(人物)]의 성(性)을 다하여 명(命 : 天道)에 이르게 한다.
(天道) 和順 於道德
(地道) 理 於義
(人道) 窮理盡性 以至於命.
參天兩地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하고 설득력이 큰 것은 三才와 陰陽이다.
天地人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수직관계를 표상한다.
陰陽은 땅에서 바라보는 우주다.
누구라도 쉽게 알수 있는 법칙은 밤낮의 변화이다.
사계절로 나타나는 수평적 변화이다.
陰陽의 2數는 4계절로 확장되며,
그 계절의 어긋남을 바로잡는 其人의 占행위가 보태어져 5行이 된다.
우주의 <3.2의 법칙>은 사람의 與參 행위가 더해지며 天地人이 태극으로 합일된다.
<3.5의 법칙>이다.
(天易) 參天兩地
(書易) 參伍以變
괘를 구성하고 있는 6효位에 1효와 6효는 하늘과 땅의 고정된 <不易>의 부분이다.
易은 변화를 분변하는 것이기때문에 2,3,4,5爻位가 四象으로 <變易>에 관여한다.
2는 地의 발현으로 3(人)의 육체를 길러내고
5는 天의 발현으로 4(人)의 정신을 길러낸다.
주역 十翼傳은 매우 섬세하고 친절하게 占筮의 구성부터 해석법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주역은 땅을 다스려 弘益人間,
즉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한 其人의 수고로움에 대한 기록이므로
어디까지나 촛점은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다.
주역의 우주관은 옛 선인들이 하늘을 바라보던 <우주의 겉보기운동>임을 명심하자.
땅에서 바라보는 우주, 우리 인간이 느끼고 체험하는 그대로의 우주다.
第二章, 參天陽地를 爻의 6位로 세우다
昔者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聖. 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兼三才而兩之.
故易六畫而成卦. 分陰分陽 迭用柔剛. 故易六位而成章.
옛날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은 것은,
장차 성명(性命)의 이치를 따르고자(順) 해서였다
이 때문에 하늘의 도(道)는 음(陰)과 양(陽)으로 세우고,
땅의 도(道)는 유(柔)와 강(剛)으로 세우고,
사람의 도(道)는 인(仁)과 의(義)로 세웠다
삼재(三才)를 합쳐서 각기 둘로 만들었기 때문에,
역(易)이 여섯 획으로 괘(卦)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괘마다 음(陰)으로 나누고 양(陽)으로 나누어,
유(柔)와 강(剛)을 차례로 쓰기 때문에,
역(易)이 여섯 자리로 한 괘의 장(章)을 이룬 것이다
天之道 陰陽 (一, - -) 5.6爻
人之道 仁義 (一, - -) 3.4爻
地之道 柔剛 (一, - -) 1.2爻
陽卦 陰卦
乾 坤 (父母)
震 巽 (長 男女)
坎 離 (中 男女)
艮 兌 (小 男女)
중요한 것은 水火는 <실체적 변화>가 아닌 관념적 기준이다. 2至다.
艮兌는 水(集)를 목표로 行하는 활동(動)이며
震巽은 火(散)을 목표로 行하는 활동(動)의 過程으로 변화의 '드러남'이다.
6爻의 位에 따라,
爻의 剛柔(一, - -)에 따라
小成卦의 取象, 義義에 따라
大成卦의 取象, 取義에 따라
인간세상(天下)의 人事는 다양한 관계망을 구성하게 된다.
第三章, 복희팔괘도는 우주의 운행원리이다
天地定位 山澤通氣. 雷風相薄 水火不相射
八卦相錯. 數往者 順 知來者 逆. 是故 易 逆數也.
천(天)과 지(地)가 자리(位)가 펼쳐지고(定=濟)
산(山)과 택(澤)이 서로 통하며(通氣) - 集
뇌(雷)와 풍(風)이 서로 흩어지고(相薄) - 散
수(水)와 화(火)가 서로 마주보고(相射) 있다. - 玄武(亥)와 龍馬(巳)
팔괘(八卦)가 서로 교착(交錯)하니,
지나간 것을 헤아리는 것은 순(順)이요 미래를 아는 것은 역(逆)이다
그러므로 역(易)은 미래를 헤아리는 것이다
水와 火는 位가 없다.
변화의 주체이지만 2至의 極點이므로 관념상의 水火는 고정되어 있어 不易하니
서로 마주볼뿐(射) 직접 손뼉을 칠수 없다.
天地는 고정된 환경이며 변화에 관여하지 않으며
水火는 변화의 주체이나 位가 없다.
山(멈추다)와 澤(모이다. 形을 이루다)는 集의 활동이고
雷(움직이다)와 風(흩어지다)는 散의 활동이다.
艮澤雷風은 드러난 현상세계의 변화인자로 四象이다.
직접적인 변화를 담당한다.
선천팔괘는 우주의 원리(理)이고 후천팔괘는 땅의 운영(氣)이다.
卦의 6爻의 位를 세움은 바탕(體)를 세우는 일이므로
선천팔괘의 乾坤의 尊卑를 본받아 세웠다.
數往者 順 지나간 시간(過去)을 헤아리는(數) 것을 順
知來者 逆 미래를 예측하는(知) 것을 逆
是故易 逆數也. 易은 시간(數=時)을 거슬러 헤아려(逆) 미래의 시간을 예측한다.
易은 時이다.
시간이란 관념적인 개념을 측정 가능한 有象의 세계로 끌어들임이다.
시간이란 數가 있고서야 헤아림이 가능하니 時는 數다.
時는 歷이고 止며 行이다.
數란 시간의 흐름(動)을 개념화시킨 체계이므로 數는 行이다.
그러므로 易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기둥을 세우는 일은
行에 대한 개념을 바로 함으로써 가능하다.
(天道) 和順 於道德 ↓順行 = 物化
(地道) 理 於義
(人道) 窮理盡性 以至於命. ↑逆行 = 與參 = 太極
順行은 자연의 시간이다.
天易이며 天下의 만물에게 부여되어지는(冒) 것이니
하늘(上)에서 땅(下)으로 向한다.
逆行은 인간의 시간이다.
書易이며 보여지고 느껴지는 세계를 인식(知)함으로써 數로써 세웠다.
하늘의 뜻을 그대로 본받아(和順) 땅의 운영법(義)을 세웠으며,
그 운영법을 體化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늘의 덕과 부합하고자 함(以至於命 = 與參)이 逆行이다.
그러므로, 易은 逆數이다.
미래를 바로 예측하여 與天地參, 하늘과의 합일을 목적으로 한다.
第四章, 兌는 기쁘다
雷以動之 風以散之. 雨以潤之 日以烜之. 艮以止之 兌以說之. 乾以君之 坤以藏之.
烜 : 빛날 훤, 밝을 훤
우레(雷)로 동하고, 바람(風)으로 흩고,
비(水)로 적시고, 해(火)로 따뜻하게 하고,
艮(山)으로 그치게 하고, 태(兌)로 기쁘게 하고,
건(乾)으로 군주(君主)노릇 하고, 곤(坤)으로 감춘다
兌는 입을 벌리고 웃는 모습이다.
兌는 추수때이니 곡식을 거두는 기쁨이고,
만물 즉 자식을 얻어 죽음을 대비했으니 기쁘다.
兌는 걷어들인 物들을 배분하고 나눔(稅)이니 기쁨이고
兌는 하늘을 향해 두팔 벌려(八) 감사의 제사(兄)를 드리는 축제의 때이니 기쁘다.
兌는 변방의 가난한 族들이 침탈을 하는 때이니 전쟁의 함성(兌-입)이며 義이다.
兌는 연못이니, 거둬들여 모아두는 때이다.
困이며 생명의 한숨(丹)이다.
(天道) 和順 於道德
(地道) 理 於義
(人道) 窮理盡性 以至於命.
그런데 이 兌의 기쁨은 義(가을의 소출)을 바탕으로 한 기쁨이다.
謙은 높은 者가 낮추는 것이며, 많은 것을 덜어내는 것이다.
兼은 손으로 禾禾(벼)를 거머쥔 모습이다.
양손으로 물건을 저울질 하고 있다.
공평한 분배를 위해서다.
謙은 공평한 분배를 뜻하며 兌는 그로 인한 기쁨이다.
높은자, 많이 가진 자가 스스로를 낮출 수 있을 때라야 아름다운 분배가 가능하다.
세금(稅)은 과부와 고아, 늙은이들을 위한 분배를 본래의 목적으로 한다.
공동체가 함께 건강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복지자금이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궈내기 위한 땅의 운영법이 정전법(井)이다.
그래서 계사전(하) 7장, 君子의 9德3陳의 서술에서는
井을 땅을 운영하는 德(井德之地也)이라 선언하고 있으며 문왕팔괘의 道(마방진)이다.
중앙 5를 기준으로 1-9, 2-8, 3-7, 4-6이 각 互根하면서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탠다.
사방팔방이 15의 값으로 均衡을 이룬다.
周易의 정신은,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복지사회, 共産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역에는 弘益人間, 濟世利和의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옛사람들의 정신이 담겨있다.
兌는 또한 和로 인한 기쁨이며 노래(樂)이다.
和의 본래글자는 화龢이다.
龠(피리 약)이 口로 간략하게 부호화 되어 표현되어있다.
약龠은 피리(籥)인데, 표준도량형의 기준이 되는 황종관(黃鍾管)이다.
그러므로 和는 공평한 의로움(義)에 기반한 稅이며, 悅이며, 說이며, 樂이다.
雷以動之 風以散之
雨以潤之 日以烜之
艮以止之 兌以說之
乾以君之 坤以藏之
4장의 이 문장은 우주의 원리(선천팔괘)가 땅의 운영원리(후천팔괘)로 전환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문장이 理(우주 원리)에 대한 서술(說)이었다면,
앞으로의 문장은 用(땅의 운영)에 대한 서술일터이므로
움직임(變)의 주체인 雷(장자)와 風(장녀)을 앞세우고
體가 되는 乾坤은 뒤로 슬며시 빠지며 伏되고 있음도 주의 깊게 살펴보자.
第五章, 문왕팔괘도는 땅의 운영원리이다
帝出乎震 齊乎巽. 相見乎離 致役乎坤.說言乎兌 戰乎乾. 勞乎坎 成言乎艮.
상제(上帝)가 진(震)에서 나와, 손(巽)에서 가지런히 하고(齊),
이(離)에서 서로 만나보고, 곤(坤)에서 맡은 바에 이르고,
태(兌)에서 기뻐하고, 건(乾)에서 싸우고, 감(坎)에서 위로받고, 간(艮)에서 이룬다
萬物出乎震 震 東方也.
진(震)은 만물(萬物)이 진(震)에서 나오니, 진(震)은 동방(東方)이다
帝는 땅을 운영하는 君主이자, 부지런한 농부이다.
齊乎巽 巽 東南也. 齊也者 言萬物之潔齊也.
손(巽)은 가지런히(定) 함이다.
손(巽)은 동남(東南)쪽이고,
제(齊)는 만물(萬物)이 깨끗하고 가지런 한 것을 말한 것이다
潔齊라 했다.
만물이 雜而著하나 혼란스럽지 않고 씻기운듯 가지런하게 펼쳐짐이다.
離也者 明也. 萬物皆相見 南方之卦也.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蓋取諸此也.
이(離)는 밝은 것[明]이니, 만물(萬物)이 모두 서로 만나보기 때문이니,
남방(南方)의 괘(卦)이다
성인(聖人)이 남면(南面)하여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것은
밝은 곳을 향해 다스리는 것이니,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坤也者 地也 萬物皆致養焉. 故曰致役乎坤.
곤(坤)은 땅이니, 만물(萬物)이 모두 이곳에서 길러지니,
‘곤(坤)에서 일을 맡긴다’고 한 것이다
地의 운영법은 井이다. 만물의 맡은 바(役)는 坤에 이르러(致) 그 소임을 이룬다.
兌正秋也 萬物之所說也. 故曰說言乎兌.
태(兌)는 바로 가을이니, 씨앗을 맺은 만물(萬物)이 기뻐하는 것이다.
올바른(義) 분배(和)가 절실한 때이니 正秋라 했다.
戰乎乾 乾 西北之卦也 言陰陽相薄也.
건(乾)은 서북(西北)의 괘(卦)이니, 음(陰)·양(陽)이 서로 부딪히며 다툼이다.
溥 : 펴다, 넓다, 광대하다
薄 : 풀이 서로 가까이 모여 무더기로 더부룩하게 나다,
가까이 모인다, 사이가 가깝다, 얇다
薄은 水土同德의 때로 陽(木)이 껍질(金-陰)로 포위되는 때이니
陰陽의 간격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뜻으로 쓰였다.
서로 다른 기운이 부딪침으로 요란스럽다.
山澤通氣. 雷風相薄
3장에서는 相薄은 여러 기운(氣)들이 흩어지며(散) 서로 부딪치는 것이니
合德의 象이며
5장에서의 相薄은 흩어졌던 기운이 子水 一點으로 모아지면서 부딪치는 것이니
同德의 象이다.
坎者 水也. 正北方之卦也 勞卦也 萬物之所歸也. 故曰勞乎坎.
감(坎)은 북방(北方)의 괘(卦)이다.
위로받는 괘(卦)이니,
만물(萬物)이 돌아가는 곳이므로 ‘감(坎)에서 위로한다’고 한 것이다
勞
갑골문자의 勞는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다.
이 행위는 겨울에 이루어지니,
바쁜 농사철이 끝나면 일년 내내 사용했던 어망을 손질하고
농사기구도 새로 짜서 만들고, 내년에 입을 옷도 짓는다.
이때는 其人도 내년에 맞이할 봄을 위해 退藏於密하여
자연시간(天易)과 易의시간(書易)을 셈하느라 바쁘다.
治閏이 어긋날 경우 백성들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어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겨울은 만물이 멈추어 쉬는 때이니 위로받는 때이기도 하지만,
속내는 기실 困하다.
陽이 集되어 갑갑하게 갖혀있으니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그러니 坎을 안락하게 위로받다로 간단하게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 때는 생명의 부활을 준비하는 수고로운(勞) 때이다.
艮 東北之卦也. 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 故曰成言乎艮.
간(艮)은 동북(東北)의 괘(卦)이니,
만물(萬物)이 종(終)을 이루고, 시(始)를 이루는 곳이므로
‘간(艮)에서 이룬다’고 한 것이다
艮은 자연의 순환주기의 끝(終)이며 새로운 시작(始)의 때이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晉의 때이니,
갖혀있던 太陽(困)이 깜깜한 어둠(坎)을 뚫고 바깥 세상으로 솟구치고 있다.
第六章, 陰陽의 飛伏관계는 서로 한몸이다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神이란 만물(萬物)을 신묘하게 여겨 말한 것이다
神이란 만물의 호흡이다. 生死이며 吉凶이며 변화이다.
神이란 旣濟(巽-巳-만물-열매)와 未濟(乾-亥-정신-씨앗)의 순환이다.
주역(하권)이 63 旣濟괘, 64 未濟괘로 끝을 맺고 있듯이,
설괘전의 땅의 운영법에 대한 논설도 똑같은 형식을 취하여 끝을 맺고 있다.
動萬物者 莫疾乎雷. 撓萬物者 莫疾乎風. 燥萬物者 莫熯乎火.(順行 - 巽 - 雜而著)
만물(萬物)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雷)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萬物)을 빠르게 하는 것은 바람(風)보다 빠른 것이 없다
만물(萬物)을 건조시키는 것은 불(火)보다 더한 것이 없고,
說萬物者 莫說乎澤. 潤萬物者 莫潤乎水. 終萬物始萬物者 莫盛乎艮.(逆行 - 乾 - 神明)
만물(萬物)을 기쁘게 하는 것은 택(澤)보다 더한 것이 없다
만물(萬物)을 적시는 것은 물(水)보다 더한 것이 없고,
만물(萬物)을 끝마치고(終)
만물(萬物)을 시작하는(始) 것은 간(艮)보다 성(盛)한 것이 없다 (艮-日+氏=晉)
故水火相逮 雷風不相悖. 山澤通氣 然後能變化 旣成萬物也.
그러므로 물과 불이 서로 뒤쫒으며, (상체相逮, 갈마들며, 飛伏하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으며, (흩어지는 가운데 질서정연하며)
산(山)과 택(澤)이 기(氣)를 통한 뒤에야, 변화하여 만물(萬物)을 이루는 것이다
☳雷 ☴風
☶山 ☱澤
우뢰와 바람의 象은 서로 음양이 뒤바뀐 象이다.
산과 연못의 象도 서로 음양이 뒤바뀌어 있다.
雷라고 하면 ☷의 陰象에서 下爻에 숨어있던(伏) 陽이
표면으로 떠오른(飛) 상태이다.
본래의 陰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드러난 陽의 뒤로 갈마든(伏) 상태이다.
飛된 ☰의 伏은 ☷이다.
서로는 하나로 합일되어 움직이므로 太極을 이루는 한몸이다.
이를 '互根한다' 라고 하고
견제와 대립을 통해 서로의 활동을 돕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雷風과 山澤은 상호 通氣하며 움직인다.
그것은 本末의 구분일 뿐이므로 이미 한몸이다.
서로는 대립되는 듯 보이나 실상 서로가 通氣하며 변화를 이룬다.
이 관계를 錯卦라 한다.
水와 火는 한 몸이다.
서로 待對하고 호근하여 상호작용을 돕는다.
神으로 상징하자면 水의 작용은 玄武이고, 火의 작용은 龍馬로 상징되어 진다.
第七章, 取義 (팔괘의 性情)
乾 健也 坤 順也. 震 動也 巽 入也. 坎 陷也 離 麗也. 艮 止也 兌 說也.
건(乾)은 굳세고, 곤(坤)은 순하고,
진(震)은 동하고, 손(巽)은 구멍(穴)에 들어가고,
감(坎)은 구덩이에 빠지고, 이(離)는 그물에 걸리고,
간(艮)은 그치고, 태(兌)는 기뻐하는 것이다
第八章, 동물
乾爲馬 坤爲牛. 震爲龍 巽爲雞. 坎爲豕 離爲雉. 艮爲狗 兌爲羊.
건(乾)은 말이 되고, 곤(坤)은 소가 되고,
진(震)은 용이 되고, 손(巽)은 닭이 되고,
감(坎)은 돼지가 되고, 이(離)는 꿩이 되고,
간(艮)은 개가 되고, 태(兌)는 양(羊)이 된다
第九章, 인체
乾爲首 坤爲腹. 震爲足 巽爲股. 坎爲耳 離爲目. 艮爲手. 兌爲口.
건(乾)은 머리가 되고, 곤(坤)은 배가 되고,
진(震)은 발이 되고, 손(巽)은 넓적다리가 되고,
감(坎)은 귀가 되고, 이(離)는 눈이 되고,
간(艮)은 손이 되고, 태(兌)는 입이 된다
第十章, 가족관계
乾 天也 故稱父. 坤 地也 故稱母. 震 一索而得男 故謂之中男.
離 再索而得女 故謂之中女. 艮 三索而得男 故謂之少男. 兌 三索而得女 故謂之少女.
건(乾)은 하늘이므로 부(父)라 칭하고, 곤(坤)은 땅이므로 모(母)라 칭한다
진(震)은 첫 번째로 구하여 남(男)을 얻었으므로 장남(長男)이라 하고,
손(巽)은 첫 번째로 구하여 여(女)를 얻었으므로 장녀(長女)라 한다
감(坎)은 두 번째로 구하여 남(男)을 얻었으므로 중남(中男)이라 하고,
이(離)는 두 번째로 구하여 여(女)를 얻었으므로 중녀(中女)라 한다
간(艮)은 세 번째로 구하여 남(男)을 얻었으므로 소남(少男)이라 하고,
태(兌)는 세 번째로 구하여 여(女)를 얻었으므로 소녀(少女)라 한다
第十一章
乾 爲天 爲圜 爲君 爲父 爲玉 爲金 爲寒 爲氷
爲大赤 爲良馬 爲老馬 爲瘠馬 爲駁馬 爲木果.
坤 爲地 爲母 爲布 爲釜 爲吝嗇 爲均 爲子母牛 爲大輿 爲文 爲衆 爲柄. 其於地也 爲黑.
震 爲雷 爲龍 爲玄黃(=蒼) 爲旉 爲大塗 爲長子 爲決躁 爲蒼莨竹 爲萑葦.
其於馬也 爲善鳴 爲馵足 爲的顙. 其於稼也 爲反生. 其究爲健 爲蕃鮮.
巽 爲木 爲風 爲長女 爲繩直 爲工 爲白 爲長 爲高 爲進退 爲不果 爲臭.
其於人也 爲寡髮爲廣顙爲多白眼爲近利市倍. 其究爲躁卦.
坎 爲水 爲溝 爲隱伏 爲矯輮 爲弓輪. 其於人也 爲加憂 爲心病 爲耳痛 爲血卦 爲赤.
其於馬也 爲美脊 爲亟心 爲下首 爲薄蹄爲曳. 其於輿也 爲多眚 爲通 爲月 爲盜.
其木也 爲堅多心.
離 爲火 爲日 爲電 爲中女 爲甲冑 爲戈兵. 其於人也 爲大腹 爲乾卦 爲鱉 爲蟹 爲蠃
爲蚌 爲龜. 其於木也 爲科上槁.
艮 爲山 爲徑路 爲小石 爲門闕 爲果蓏 爲閽寺 爲指 爲狗 爲鼠 爲黔喙之屬.
其於木也 爲堅多節.
兌 爲澤 爲少女 爲巫 爲口舌 爲毁折 爲附決. 其於地也 爲剛鹵 爲妾爲羊.
건(乾)은,
하늘이 되고, 둥근 것이 되고, 군주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옥(玉)이 되고, 금(金)이 되고, 추위가 되고, 얼음이 되고, 크고 붉은 것이 되고,
좋은 말이 되고, 늙은 말이 되고, 수척한 말이 되고, 얼룩말이 되고,
나무에 달린 과일이 된다.
곤(坤)은,
땅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삼베가 되고, 가마솥이 되고,
인색한 것이 되고, 균등한 것이 되고, 새끼를 많이 기른 어미 소가 되고,
큰 수레가 되고, 문(文)이 되고, 무리[衆]가 되고, 자루가 되며,
땅에 있어서는 흑색이 된다
진(震)은,
우레가 되고, 용(龍)이 되고, 검정색과 황색(黃色)이 되고,
꽃이 되고, 큰 길이 되고, 장자(長子)가 되고, 조급하게 결단하는 것이 되고,
푸른 대나무가 되고, 갈대가 되며,말에 있어서는 울기를 잘하는 것이 되고,
왼발이 흰 말이 되고, 발이 빠른 것이 되고, 이마가 흰 말이 되며,
곡식에 있어서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것이 되며,
궁극에는 굳센 것이 되고, 고운 것이 된다
손(巽)은,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장녀(長女)가 되고, 먹줄이 곧은 것이 되고,
공장(工匠)이 되고, 백색(白色)이 되고, 긴 것이 되고, 높은 것이 되고,
나아가려고 하다가 물러나는 것이 되고, 과단성 없는 것이 되고,
냄새가 되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머리털이 적은 것이 되고,
이마가 넓은 것이 되고, 눈에 흰자위가 많은 것이 되고,
이익을 가까이 하여 세 곱절 폭리를 남기는 것이 되며,
궁극에는 조급한 괘(卦)가 된다
감(坎)은,
물이 되고, 도랑이 되고, 숨는 것이 되고, 바로잡고 구부리는 것이 되고,
활과 바퀴가 되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근심이 더해지는 것이 되고,
마음의 병이 되고, 귀가 아픈 것이 되고, 피의 괘[血卦]가 되고, 적색이 되며,
말에 있어서는 등마루가 아름다운 것이 되고, 성질이 급한 것이 되고,
머리를 아래로 떨구는 것이 되고, 발굽이 얇은 것이 되고, 끄는 것이 되며,
수레에 있어서는 하자가 많은 것이 되고, 통하는 것이 되고, 달이 되고,
도둑이 되며, 나무에 있어서는 단단하고 속이 많은 것이 된다
이(離)는,
불이 되고, 해가 되고, 번개가 되고, 중녀(中女)가 되고,
갑주(甲冑)가 되고, 창과 병기가 되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배가 큰 사람이 되고,
마른 괘[乾卦]가 되고, 자라가 되고, 게가 되고, 소라가 되고, 조개가 되고,
거북이 되며, 나무에 있어서는 가운데가 비고 윗부분이 마른 것이 된다
간(艮)은,
산(山)이 되고, 작은 길이 되고, 작은 돌이 되고, 문궐(門闕)이 되고,
과일과 풀의 열매가 되고, 내시(內侍)가 되고, 손가락이 되고, 개가 되고, 쥐가 되고,
부리가 검은 짐승의 등속이 되며,나무에 있어서는 단단하고 마디가 많은 것이 된다
태(兌)는,
못이 되고, 소녀(少女)가 되고, 무당이 되고, 입과 혀가 되고, 훼손하는 것이 되고,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이 되며,땅에 있어서는 강로(剛鹵 : 금과 소금)가 되며,
첩이 되고, 양(羊)이 된다
- 윤홍식의 주역 강의(설괘전)
밖의 원으로 이루어진 64괘는
일정 팔회의 원칙에 따라 중천건에서 하괘는 그대로 두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상괘를 건, 태, 리, 진, 손, 감, 간, 곤으로 바뀌게 만들어
중천건(乾)->택천쾌(夬)->화천대유(大有)->뇌천대장(大壯)->풍천소축(小畜)->
수천수(需)->산천대축(大畜)->지천태(泰)등으로 변하고 되고
그 다음은 아래 하괘를 태로 두고 상괘를 건, 태, 리, 진, 손, 감, 간, 곤으로 바뀌니
천택리(履)->중택태(兌)->화택규(睽)->뇌택귀매(歸妹)->풍택중부(中孚)->
수택절(節)->산택손(損)->지택림(臨)으로 변하니
64괘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지게 된다.
안쪽의 사각형(6X6)의 64괘는 오른쪽 아래에 중천건(乾)을 두고,
왼쪽 위에 중지곤(坤)을 두어 일정팔회에 따라 64개를 배치하니,
방원도(方圓圖)에서 방이란 사각형의 땅을 말하며, 원은 둥근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그림으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의미하는 천지인을 모두다 포함하고 있다.
1. 건위천(乾爲天), 중천건(重天乾)
괘사(卦辭) : 乾(건)은 元亨利貞(원형이정)이라.
시기적으로 음력 4월로, 양기(陽氣)가 무르익는 巳월이다.
오행은 양금(陽金)이고, 서북(西北)방향이다.
중천건은 대자연의 본체이자 하늘로서, 집안에서 가장인 아버지이고,
신체에서 머리이고 동물은 용이나 말에 상응한다.
중천건은 오직 양효만 있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양(陽)으로
강건하고 건실하기 때문에 크게 형통하고 특히 남자가 좋다.
군자는 하늘의 강건한 운행을 본받기 위해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길하다.
중천건은 만물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元)으로, 만물을 형통(亨)하게 성장시키고
만물을 촉진시켜 이롭게 하고(利) 만물을 바르게(貞) 완성한다.
점에서 중천건이 나오면 크게 형통하지만
하늘의 강건하고 공정함을 본받아 올바름을 지킴이 이롭다.
대자연의 변화 중에 가장 으뜸인 4 계절의 변화를 살펴서
스스로 쉬지 않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을 배운다.
효사(爻辭)
[初九] 潛龍勿用
연못 속에 있는 잠룡이니, 쓰지 말라.
象曰 潛龍勿用 陽在下也
잠룡물용은 양이 아래에 있음이다.
용의 덕(德)을 지녔으되, 때를 기다리며 드러내지 않고 은둔한 잠룡이다.
비록 세속에 있으나 그 처신에 변함이 없고, 그 명성을 이루려 함이 없고,
세상이 싫어 숨어 있지만 근심치 않고 남이 옳다고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치 않는다.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스러우면 행하지 않음이 확고하다.
양의 기운이 잠복해 있는 상태로 시운(時運)이나 생체 리듬이 가장 저조한 순간이다.
아랫자리에 있어서 아직은 밖으로 나아갈 때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래에 머물면서, 덕을 닦으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아가게 되면 흉하다.
천풍구(天風姤)에는 야윈 암퇘지가 날뛰기 때문에
쇠말뚝에 매어놓아야 바르고 길하다고 한다.
[九二] 현룡見龍在田 利見大人
현룡이 밭에 출현했다.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
象曰 見龍在田(현룡재전) 德施普也(덕시보야)
현룡재전은 덕이 널리 베풀어짐이다.
‘잠룡’(潛龍)이 밭에 출현했다.
중용의 덕이 있어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
잠룡(潛龍)이 물속에서 나와 세상에 자신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九二는 중용의 덕이 있어 평소에도 행실을 삼가고
신용이 있어서 그 덕을 널리 베풀어 세상을 교화하지만
자신의 공(功)을 내세움이 없다.
九二는 대인 九五를 만나야 자신의 역량을 널리 펼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사적인 응(應)으로
친한 일가 종친들과만 동인하면(天火同人) 인색하다.
널리 화합해야 길하다.
[九三] 君子終日乾乾(군자종일건건) 夕惕苦(석척약) 厲无咎(려무구)
군자가 종일 노력하고 늦은 밤에도 허물은 없는지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나 허물은 없다.
象曰 終日乾乾(종일건건) 反復道也(반복도야)
종일건건은 그 도(道)를 꾸준히 반복함이다.
주역에서 3 번째 효사(爻辭)들은
하괘에서 상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위치에 있어서 보통 운이 좋지 않다.
양의 위치에 양효가 위치하면 과하게 강한 성향에 중(中)을 얻지 못해서
중용의 덕이 부족해 혹여 조급히 움직이면 위태롭게 된다.
따라서 온종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도,
저녁에 다시 자신을 돌아보고 두려워해야 비로소 허물을 면할 수 있다.
군자는 일의 기미를 잘 살펴서
비록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때에 맞게 두려운 마음으로 살필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허물을 면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분수를 모르고 애꾸눈으로 보려 하고 절름발이가 걸으려 하다가
결국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다.(천택리天澤履)
호랑이가 사람을 물게 되는 화를 입게 되어서 흉하다.
[九四] 惑躍在淵 (혹약재연)无咎(무구)
혹 뛰어 보아도 연못에 돌아오면 허물은 없다.
象曰 惑躍在淵(혹약재연) 進无咎也(진무구야)
혹약재연은 그 나아감이 허물인 것은 아니다.
4 번째의 효사들은 하괘로부터 상괘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九四는 군주인 九五의 바로 아래에서 군주를 보필하는 대신이다.
九四는 양효가 음위(陰位)에 위치했기 때문에,
九三과 같이 과강하거나 조급하지 않고 신중하다.
한번 세상에 나아가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아직은 이르다 싶으면
원래대로 연못으로 돌아오면 허물은 없다.
그것이 간사하거나 동류 무리를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시운(時運)에 맞는지 자기 덕(德)과 역량을 시험해 보는 것이기에,
그 나아감이 허물은 아니다.
九四가 효변하면 풍천소축(風天小畜)이 된다.
뛰어 보아도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머무르려고 하더라도 편하지 못하다.
그러나 믿음을 두어 정성을 다하면 험난함이 없어지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허물을 면한다.
[九五] 飛龍在天(비룡재천) 利見大人(이견대인)
비룡이 하늘에 있다. 대인을 보면 이롭다.
象曰 飛龍在天(비룡재천) 大人造也(대인조야)
비룡재천은 대인이 해야 할 일을 이룸이다.
九五는 양효가 양위(陽位)에 있어서 올바르고 중용(中庸)의 덕이 있는 군주이다.
따라서 아래의 덕이 있고 재능 있는 인재들을 두루 등용해서 천하를 돌보기에
대유(大有)를 이루고 이롭다.
대인은 아래의 중용(中庸)의 덕이 있는 현룡 九二를 의미하고
九五는 하늘에 승천해서 조화를 부리는 비룡을 의미한다.
비록 九二와 九五는 상하괘의 중(中)을 얻었고 같은 동류(同類)이지만
양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기 때문에 서로 따르게 된다.
九五는 九二를 비롯한 여러 양들과 더불어 크게 대유(火天大有)할 수가 있다.
비록 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부드러운 태도로 진심으로 사귀지만
위엄도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길하다.
[上九] 亢龍有悔(항룡유회)
지나치게 높은 항용(亢龍)은 후회가 있다.
象曰 亢龍有悔(항룡유회) 盈不可久也(영불가구야)
항룡유회는 가득 찬 것은 오래가지 못하기 마련이다.
비룡(飛龍)이 정상에 오른 뒤에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고 이제 내려와야 한다.
주역에서 6 번째 효사는 그 괘의 극(極)에 있다.
上九는 중(中)도 정(正)도 얻지 못했고, 그 덕이 다해서 이제 변하는 시운(時運)이다.
높은 자리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고 과하고 강하게 나아가려고만 한다.
귀하다고 해도 지위가 없고, 높아도 백성이 없으며,
어진 사람이 아래에 있어도 돕는 사람이 없으니 후회만 따른다.
언제까지 마냥 좋은 시절에 머물 수는 없다.
무릇 군자는 시운(時運)을 살펴서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순응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고 머무르면 마침내 결단(택천쾌澤天夬)을 당한다.
아무리 호소하고 싶어도 호소할 데가 없고 흉하다.
- 문왕팔괘도와 爻辭, 彖辭
離
大明終始. 해의 광명
九三終日(五)
亨(陰陽相搏, 流形)
噬嗑 賁
巽 坤
雲行雨施 大明終始, 해의 終과 달의 始
九四或躍(七), 群龍 九三終日(五)
臨 觀 剝 復
震 兌
大哉乾元 時乘六龍
九五飛龍(九), 望月 利(變化)
元(乾元震子, 資始)
隨 蠱
艮 乾
首出庶物 乾道變化
上九亢龍(無位) 九二見龍(三)
달의 휴결(虧缺) 달의 始形
坎 離 无妄 大畜
坎
保合太和
初九潛用(一)
貞(太和, 太極)
晦
頤 大過
爻辭는 달의 運行의 象이니,
달이 勞乎坎에서 晦하여 逆行하여 朔望의 象으로써
光明의 盈虛하는 象을 말한 것이다.
彖辭는 太陽運行의 象이니, 太陽이 帝出乎震에서 始하여 順行하여
四時의 象으로써 萬物을 生成하는 象을 말한 것이다.
2. 곤위지(坤爲地), 중지곤(重地坤)
앞서려고 하면 미혹되지만, 유순하게 따르면 얻음이 있다
괘사(卦辭) : 중지곤은 시기적으로는 초겨울인 음력 10월로 亥월이다.
오행은 음토(陰土)이고,
곤(坤)에는 어머니, 배(腹), 소(牛), 서남(西南), 유순함, 따른다는 뜻이 있다.
양인 건(乾)이 끊임없이 생동하여 낳고 그것을 곤(坤)이 품어 헌신적으로 기른다.
암말은 유순하고 지조가 있어 땅의 역할을 상징한다.
곤(坤)은 지극히 유순하게 건(乾)의 이치를 계승해 기르는
양선후음(陽先後陰)을 상도(常道)로 여긴다.
음(陰)은 양(陽)을 앞세우고 뒤를 따르는 것이 이롭다.
하지만 이때에 군자가 앞서려고 하면 미혹(迷惑)되기 쉽고
뒤따르면 결실을 이루게 되어서 이롭다.
앞서야 할 때와 뒤쫓을 때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남(西南)은 벗을 얻고 동북(東北)은 벗을 잃는다.
후천 팔괘에 서남은 음(陰)의 방위이고 동북은 양(陽)의 방위이기 때문이다.
동류(同類)인 음의 방향을 떠나서 안정을 취하여 정도를 지키면
양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경사가 있는 것이다.
효사(爻辭)
[初六] 履霜(리상) 堅氷至(견빙지)
서리를 밟게 되면, 단단한 얼음이 되는 것을 알라.
象曰 履霜堅氷至(리상견빙지) 陰始凝也(음시응야)
리상견빙지는 음이 처음 엉긴 것이다.
馴致其道(순치기도) 至堅氷也(지견빙야)
그와 같은 도를 따라서 굳은 얼음에 이르게 된다.
서리는 사소한 일이지만 얼음은 큰일이다.
음(陰)의 도(道)는 낮고 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점차 쌓여서 드러나게 된다.
소인이나 불선(不善)도 처음은 미약하지만,
점점 자라서 극성하게 되므로 처음부터 조심해서 정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기적으로 서리가 내림은 음이 자라는 가을을 뜻하고, 절기로는 상강(霜降)이다.
가을의 끝인 상강을 지나서 보름 뒤에는 곧 겨울의 시작인 입동(立冬)이 된다.
이런 자연의 이치를 잘 살펴서
서리와 같은 사소한 일을 통해서 겨울이 온다는 큰일을 깨닫는 지혜인 셈이다.
선(善)이 쌓이게 되면 경사와 복(福)으로 돌아오고
불선(不善)이 쌓이게 되면 언젠가 재앙이 이르기 마련이다.
만사가 쌓이고 쌓여 이루어지듯이,
불선이 쌓이기 전에 처음 잘못되었을 때 멀리 가지 않고 회복하면(지뢰복地雷復)
허물이 없고 크게 길하다.
군자는 일의 기미와 징조를 살펴서
서리가 내리는 것에서 겨울이 오는 것을 알고 수신하면서 미리 준비한다.
[六二] 直方大(직방대) 不習(불습) 无不利(무불리)
곧고 바르고 크면 익히지 않아도 이롭다.
象曰 六二之動(육이지동) 直以方也(직이방야)
不習无不利(불습무불리) 地道光也(지도광야)
六二의 행함이 곧고 바르다. 불습무불리는 땅(地)의 도(道)가 빛나는 것이다.
중천건에서는 九五가 주효이고, 곤위지에서는 六二가 주효이다.
六二는 바르고 유순하면서도 후덕해서
건(乾)의 씨앗을 받아 잘 품어 결실(利)을 이룬다.
六二는 곧고(直) 반듯하며(方) 커서(大) 억지로 익히거나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이롭게 되기 때문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안으로 마음이 강직하고, 밖으로 법도에 맞게 반듯하면서 덕이 크면
곤(坤)의 도를 다하여 크게 빛나기 때문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은 덕으로 군사를 부리면(지수사地水師) 왕에게 여러 번 쓰임을 받는다.
[六三] 含章可貞(함장가정) 惑從王事(혹왕종사) 无成有終(무성유종)
빛남을 머금고 있어도 드러내지 않고 바르게 소임을 다하라.
혹 왕의 일을 맡아도 이룸은 없지만 마침은 있다.
象曰 含章可貞(함장가정) 以時發也(이시발야) 惑從王事(혹종왕사) 知光大也(지광대야)
함장가정은 때를 좇아서 능력을 발휘함이고 혹종왕사는 그 지혜가 빛나고 큰 것이다.
六三은 상괘로 넘어가는 위태한 위치에 있지만
위(位)가 바르지 못해서 성품이 바르지 못하다.
음이 양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어
양선후음(陽先後陰)의 이치를 잊고 그 공을 드러내기 쉽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안으로 머금어서 감추고 바르게 소임을 다하라고 했다.
비록 왕의 일을 맡아도, 공(功)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윗사람에게 돌리면,
시기와 미움을 얻지 않고 오래 자기 직분을 유지할 수 있고 마침을 이룰 수 있다.
음(陰)인 신하가 양(陽)인 왕의 일을 좇을 때,
앞에 나서서 그 공로를 탐하지 않고 겸손히 부름에 응해서 뒤따르며 소임을 다하면
지혜가 빛나고 큰 것이다.
공로가 있음에도 겸손하면(지산겸地山謙) 마침이 있음이고 길하다.
군자는 자신의 공과 수고를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기에 마침이 있다.
[六四] 括囊(괄낭) 无咎无譽(무구무예)
주머니를 조여 매듯 삼가면 허물도 명예도 없다.
象曰 括囊无咎(괄낭무구) 愼不害也(신불해야)
괄낭무구는 신중히 하면 해가 없음이다.
六四는 위(位)가 바른 대신이다.
권세를 가진 지위에 있어서 사리사욕에 눈이 멀기 쉽고
위의 군주와도 친밀하지 못해 위태롭고 의심을 받는 처지이다.
따라서 주머니를 조여 매듯이 그 언행을 삼가고 매사에 신중해야 허물을 면할 수 있다.
六四가 효변하면 곤(坤)이 진(震)이 되니 나아가고 싶지만
언행을 신중히 삼가야 허물을 면하지만 그렇다고 명예를 얻음도 없다.
언행을 삼가서 그 의심을 떨치게 되면 크게 얻는 기쁨(뇌지예雷地豫)이 있고
나로 말미암아 벗들이 모이게 된다.
[六五] 黃裳元吉(황상원길)
황색 치마는 크게 좋다.
象曰 黃裳元吉(황상원길) 文在中也(문재중야)
황상원길은 무늬(文)가 중(中)에 있음이다.
원래 5효는 군주 자리이고 곤(坤)과 음(陰)은 신하의 도리이기 때문에
아래에 거처함이 길하다.
중도를 지켜서 스스로 낮춰 낮은 곳에 자처하면 길하다 했다.
황색은 중(中)을 상징하는 흙(土)의 색깔이고 또 치마는 아래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황색 치마는 자신을 겸손히 낮춰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화려한 윗옷으로 자랑하려고 하지 않고,
중도로 달아나는 자는 놓아주고 따르는 자는 취함으로써
그 친밀함(수지비水地比)을 드러내면 마을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는다.
[上六] 龍戰于野(용전우야) 基血玄黃(기혈현황)
용(龍)이 들판에서 다툰다. 그 피가 검고 누렇다.
象曰 龍戰于野(용전우야) 其道窮也(기도궁야)
용전우야는 그 도(道)가 궁(窮)함이다.
음(陰)의 도는 자신을 낮추고 유순히 양(陽)을 따르는 것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음(陰)이 자라서 양(陽)과 대등해지면, 반드시 서로 다투게 되고 상(傷)하게 된다.
上六은 곤(坤)의 가장 높은 자리이자 극(極)이고 마침이다.
현룡(玄龍)은 건(乾)을 상징하고 황룡(黃龍)은 곤(坤)을 상징한다.
上六이 극(極)에 도달하여 성대해져서 들판에서 양인 건(乾)과 다툰다.
부드럽고 유순하게 품어서 기르는 곤(坤)의 도가 궁(窮)해지고
음양이 서로 다투게 되니 결국 둘 다 상처를 입어서 피를 흘린다.
이것은 마치 소인의 세력이 커져서 다음 해에 종자로 쓰려고
먹지 않고 남겨둔 큰 열매를 깎는 것(산지박山地剝)과 다름없다.
큰 열매는 먹지 않음이다.
군자는 수레를 얻게 되겠지만 소인은 집을 깎는다.
- 문왕팔괘도와 爻辭, 彖辭
離
先迷失道
後順得常
家人 暌(후천 달)
牝馬地類
行地無疆
柔順利貞
君子攸行
六二 六三(用六)
晉 明夷
巽 坤
西南得朋 牝馬地類
乃與類行 行地無疆
東北喪朋(그믐) 柔順利貞
乃終有慶(초생) 君子攸行
初六 晉 明夷
蹇 解
坤厚載物
德合無疆
含弘光大
品物咸亨
六三 六四
遯 大壯
震 兌
安貞之吉 至哉坤元
應地無疆 萬物資生
乃順承天
六五
咸 恒
艮 乾
上六
坎
坤卦는 달의 象이 되고 있으므로
彖辭는 달의 光明의 象이 되어 陽이 陰中에 있어 그 길이 逆行하고
爻辭는 달의 陰精의 象이 되어 陰이 陰中에 있어 그 길이 順行하니
그러므로 彖辭는 文王八卦圖의 陰卦를 逆行하여 兌坤離巽의 序次로 되고
爻辭는 文王八卦圖의 陰卦를 順行하여
初六巽 六二離 六三離坤 六四坤 六五兌의 順으로 된 것이다.
3. 수뢰둔(水雷屯)
처음이므로 어렵다고 해도 서두르지 말고 경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라
괘사(卦辭)
둔(屯)은 양(陽)과 음(陰)이 처음 사귀어 만물을 출산하는 것을 상징한다.
감(坎)은 물, 귀, 돼지, 중남, 빠지다, 험난함, 술, 병, 법, 도적 등을 의미하고
오행은 물(水)이다.
진(震)은 우레, 장남, 용, 봄, 다리, 제후, 농사, 계승, 격분해 나아감 등을 의미하고
오행은 나무(陽木)이다.
괘상은 구름 속의 물과 우레가 서로 더불어 비를 뿌리는 것이다.
서괘전에는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겨나는데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가득찬 것을 둔(屯)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처음 생겨날 때에는 기(氣)가 막혀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수뢰둔은 주역의 4대 흉괘 중에서 하나이다.
음양이 처음 사귀어 출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무언가 실행하기엔 이르다.
그래서 혼란하고 어려운 둔(屯)은
그 어리석고 무지몽매함을 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 하기 때문에,
수뢰둔(水雷屯)을 뒤집으면 산수몽(山水蒙)이 된다.
비록 둔(屯)은 바깥으로 험하지만,
안으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진동(震動)하는 덕(德)이 있다.
마치 유약한 초목의 새싹이 얼어붙은 땅 속에서 꿈틀대며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둔(屯)은 흉한 괘임에도 괘사에 크게 형통하지만 올바름을 지켜야 이롭다 했다.
어려운 중에 올바름을 굳게 지키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어렵다 하여 올바름을 지키지 못하면 마땅한 의리(義理)를 잃음과 다름없고
나아가면 더 위험해지기 때문에 올바름을 지켜야만 이로움이 있다.
조급히 일을 진행시키지 말고
경험과 덕이 있는 일꾼(제후)을 세워서 도움을 받음이 길하다.
강유가 처음 사귀어 혼란하고 어두운 시기에는 천하가 안정되지 못하고
백성도 편안하지 못한데 함부로 일을 진행시키면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경험 많은 제후를 세워 안녕을 구하더라도
그저 안일하게 처신하지 않고 힘써서 노력해야 한다.
수뢰둔(屯)자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파자를 해보자.
둔이라는 글자는 새싹(艹)이 꽁꽁 언 땅을(丿) 뚫고 나오느라
휘어져(乙)있는 모습을 상형화한 것이다.
겨우내 꽁꽁 얼어터진 땅을 뚫고 나오는 식물이나
안간힘을 다해 좁은 산도를 통과해야하는 생명 탄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탄생의 순간은 환희인 동시에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퇴양난,
힘이 들지만 곧 싹을 틔울 맹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매우 희망적인 괘이다.
하늘의 천둥소리는 들어도 어찌 땅에서 싹이 트는 소리는 듣지 못하는가?
효사(爻辭)
[初九] 磐桓(반환) 利居貞(이거정) 利建侯(이건후)
머뭇거린다. 바르게 거함이 이롭다. 제후를 세움이 이롭다.
象曰 雖磐桓(수반환) 志行正也(지행정야) 以貴下賤(이귀하천) 大得民也(대득민야)
반환은 뜻이 바름을 행함에 있고 귀함이 천함에게 낮추니 백성을 크게 얻는다.
初九는 하괘 진(震)의 주효로서 위의 정응(正應) 六四에게 나아가고 싶지만
상괘 감(坎)은 험난함이다.
初九는 음과 양이 사귀어 태어나는 생명의 주체다.
비록 성품도 바르고 재능도 있지만 위로 정응에게 나아가기는 힘들고
바로 위의 유순하고 중정(中正)한 六二와 친비(親比)하여 머뭇거린다.
굳게 올바름을 지켜서 험난함에 처한 상괘의 정응 六四를 구하면 이롭다.
初九는 자라나는 양(陽)이기 때문에 조급히 서두르기보다
경험 있는 제후(諸侯)를 세워서 이끌도록 하는 것이 이롭다.
진(震)은 그 상이 양(陽)이 음(陰)의 아래에 있어
마치 귀한 몸으로 천한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는 것과 같다.
어려운 때에는 재능 있는 귀한 인재가 필요한데 겸손하면 백성이 따르기 마련이다.
진심으로 친밀하면(수지비水地比) 허물이 없다.
성실하고 진실한 소박함이면 마침내 생각지도 못한 운 좋은 일이 있다.
[六二] 屯如邅如(둔여전여) 乘馬班如(승마반여) 匪寇婚媾(비구혼구)
女子貞不字(여자정부자) 十年乃字(십년내자)
어려워서 머뭇거린다. 말을 탔다가 내렸다. 도적이 아니라 구혼자다.
여자가 정절을 지켜서 시집가지 않고, 십년 만에야 시집을 간다.
象曰 六二之難(육이지난) 乘剛也(승강야) 十年乃字(십년내자) 反常也(반상야)
六二의 고난은 강을 올라탔기 때문이고 십년 만에야 시집감은 상도로 돌아온 것이다.
六二는 유순하고 중정(中正)한 덕이 있고,
험난함 속에 빠져있는 군주 九五와는 정응이고 아래로 初九와 친비(親比)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정응 九五는
상괘인 감(坎)의 험난함에 빠져 있어서 어려워서 머뭇거린다.
게다가 아래에 양강한 初九를 올라타고 있기 때문에 핍박 받는다.
그러나 初九는 도적이 아니라 구혼을 하는 것인데,
六二는 九五에게 정절을 지켜서 初九의 구혼에 응하지 않는 것이 바르다.
마침내 십년 만에 정응(正應) 九五에게 시집간다.
무릇 절제(수택절水澤節)는 과하면 괴롭고 부족하면 허물이 된다.
정절을 지키지 못하거나 과하게 절제하면 그 때를 놓치게 되므로 흉하다.
정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대문 안의 정원을 나서지도 않을 만큼 과하면
나아갈 때를 놓치게 되고 흉하게 된다.
[六三] 卽鹿无虞(즉록무우) 惟入于林中(유입우임중)
君子幾(군자기) 不如舍往吝(불여사왕린)
몰이꾼도 없이 사슴사냥을 하니, 숲속으로 들어가기만 한다.
군자는 기미를 살펴서 그만 두는 것만 못한데도 나아가면 인색하다.
象曰 卽鹿无虞(즉록무우) 以從禽也(이종금야) 君子舍之(군자사지) 往吝窮也(왕린궁야)
즉록무우는 짐승을 쫓음이고 군자사지는 나아가면 궁색함이다.
주역에서 3번째 효사는 항상 위태하기 마련인데
六三은 재능도 없고 위(位)도 바르지 못하고 중(中)도 얻지 못했다.
위로 정응(正應)도 없고,
하괘 진(震)의 극(極)에 처해서 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만 지극하다.
위에서 끌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나아가면 험난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위태롭다.
상괘 감(坎)의 험난함은 마치 첩첩산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마치 숲의 지리를 잘 아는 사슴 몰이꾼처럼 경험 많은 사람의 도움과 조언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고 싶은 욕심에 나아가면 궁색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군자는 그 일의 기미(幾微)를 살펴서 아닌 것 같으면 도중에라도 그칠 줄 알아야 한다.
불가한 상황인데 나아가는 것은 욕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六三이 효변하면 수화기제(水火旣濟)이다.
소인은 사사로운 뜻에서 분노하고 재물을 탐하여
쉬이 무력을 사용하고 백성을 해쳐서 욕심을 채우기 때문에 소인은 절대 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현명한 고종도 귀방(鬼方)을 정벌하는데 무려 3년이나 걸렸다.
[六四] 乘馬班如(승마반여) 求婚媾(구혼구) 往吉(왕길) 无不利(무불리)
말을 탔다가 내린다. 구혼하러 가면 길하고 이롭다.
象曰 求而往(구이왕) 明也(명야)
구하여 나아감이 현명하다.
六四는 감(坎)의 험난함에 빠져 있지만 음효이므로
스스로 구제하기는 힘들지만 위(位)가 바른 대신이다.
위로 九五는 친비이고 아래로 初九는 정응이다.
양강한 군주인 九五는 양효이지만 감(坎)의 험난함 속에 빠져 있고
六二와 정응이기 때문에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다.
비록 六四의 정응인 初九는 멀리 떨어져있지만,
하괘의 태동하는 강명(剛明)한 현인(賢人)이자 본래 六四의 구혼자이다.
험난함에 빠져서 덕을 발휘하지 못하는 九五에게 흔들리지 말고,
정응 初九에게 구혼하러 가면 마침내 둘이 합심해 군주를 보필할 수 있어서 길하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
대신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의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구하여 나아가면 현명하다.
비록 무엇을 얻을 욕심에 따름(택뢰수澤雷隨)은 그 얻음이 있더라도 흉하다 하겠지만,
귀한 몸으로 자신을 낮추어 천한 것을 따르는 것이니
진심으로 도리에 벗어남이 없으면서 현명하고 밝게 하면 허물이 있을 수 없다.
[구오九五] 屯基膏(둔기고) 小貞吉(소정길)大貞凶(대정흉)
은혜를 널리 베풀기 어렵다. 작은 일은 길하나 큰일은 흉하다.
象曰 屯基膏(둔기고) 施未光也(시미광야)
둔기고는 그 베푸는 바가 빛나지 못함이다.
九五는 양강하고 중정(中正)한 덕이 있는 군주로, 상괘인 감(坎)의 험난함에 빠져있다.
아래의 六二는 정응(正應)이지만 위아래가 모두 음효(陰爻)이기 때문에
비록 친비해도 어려움에 빠져 있어서 자신을 도와줄 만한 힘과 재능은 부족하다.
둔(屯)에서는 자라나는 初九의 힘이 가장 크다.
소정길 대정흉(小貞吉 大貞凶)은 조금씩 바르게 하면 길하고
크게 바르게 하려 하면 흉하다고 해설하기도 하지만,
정약용은 ‘정’(貞)을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다는 ‘일’(事)의 뜻인 것으로 해설했다.
즉, 작은 일에는 길하나 큰일에는 흉하다가 된다.
九五는 군주의 지위에 있지만 어려움 속에 빠져서
자신의 덕을 널리 베풀지 못하고 정응인 六二에게만 은혜를 베풀고 있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은혜를 베풀기 어렵다 함은 베푸는 것이 널리 빛나지 못한다 했다.
비록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작은 일들부터 실천하는 것이 순리에 맞겠지만,
九五는 큰일을 하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있으므로
큰일을 도모하면 흉을 자초하게 된다.
나아가지 말고 안정을 취하면서 회복(지뢰복地雷復)하는 것이 현명하다.
중용을 지키고 덕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면,
마침내 돈독하게 회복하게 되고 후회가 없어진다.
[上六] 乘馬班如 (승마반여) 泣血漣如(읍혈연여)
말을 탔다가 내렸다. 피눈물이 흐른다.
象曰 泣血漣如(읍혈연여) 何可長也(하가장야)
읍혈연여는 어찌 그것이 오래 가리오?
上六은 둔(屯)과 감(坎)의 극(極)에 있어서 험난함이 지극하다.
게다가 아래의 육삼은 정응(正應)도 아니기 때문에
기댈만한 초구조차 너무 멀리 있고 아래에는 양강한 九五를 올라타고 있다.
九五는 정응이 있는데다가 또한 상괘 감(坎)의 험난함에 빠져서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에 말을 올라탔다가 내렸다고 하였다.
마치 피눈물이 흐르는 정도로 험난함이 심하다.
그러나 上六은 위(位)가 바르고 둔(屯)과 감(坎)의 마침에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오래 가지는 않지만 음효는 올바름을 굳게 지키기가 어렵다.
더해주는(풍뢰익風雷益) 사람이 없다고 아래에서 덜어 자신에게 더하려 하면
미움을 사게 되고 공격받게 된다.
혹여 치려하지만 마음을 세움에 항상함이 없어서 흉하다.
무릇 이익은 누구나가 바라는 바이다.
논어에도 이익을 추구함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 원망이 많아진다고 했다.
군자는 의(義)에 밝지만 소인은 이익(利)에 밝은 법이다.
수뢰둔 괘는 단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만물이 처음 시작할 때의 어려움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생명을 창조하기 위한 역동적인 꿈틀거림. 무엇이든 시작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왕이 직접 통치하지 않고 제후를 내세워 내공을 쌓듯이,
우리도 힘든 과정과 어려움을 토대로 성장해야 함을 잊지 말자.
4. 산수몽(山水蒙)
어려움 앞에서 멈춰서 배움을 가지되, 행실 나쁜 여자를 조심하라
배워야 산다.
이제 갓 태어나서 세상물정 어두운 둔을 교육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몽을 파자해보면 그 뜻이 잘 드러난다.
몽(蒙)은 어리석은 생명을(돼지 시 : 豕) 풀(艹)로 잘 덮어서(덮을 멱 : 冖)
기르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여 몽은 ‘어두울 몽’, ‘어리석을 몽’, ‘어릴 몽’, ‘기를 몽’, ‘입을 몽’ 등의 뜻을 가진다.
‘어리석다’, ‘무지몽매하다’라는 표현들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산수몽은 부정적인 괘가 아니다.
괘상을 보면 산 아래(산)에서 샘물(수)이 졸졸 흐르는 상으로
샘물은 작은 시내와 큰 강을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물이 강이나 바다로 향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벗어나
스승에게 배움을 청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만물의 시작은 어리고, 무지몽매하다.
가령 ‘남상(濫觴)’이라는 말이 있는데 양자강과 같은 큰 강도 그 근원을 따라가면
술 잔 하나를 겨우 띄울만한 세류에 불과하다는 것.
그 어린 남상이 수많은 지류와 합쳐진 뒤에야 거대한 양자강이 되는 것처럼.
인간도 지류에서 큰 강으로 가려면 교육이 필요하다.
즉, 동몽(童蒙)이 군자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괘사(卦辭)
몽(蒙)은 무지함이다.
괘상은 수뢰둔(屯)을 거꾸로 뒤집은 간상감하(艮上坎下)이다.
간(艮)은 산, 손, 소남, 귀신, 제사, 마침, 그침, 머무르다 등을 뜻하고 양토(陽土)이다.
감(坎)은 물, 강물, 비, 달, 귀, 도적, 험난함, 중남, 술, 병, 법률 등을 뜻한다.
안은 험난하고 밖은 그친다.
안은 험난한데 밖으로 그치고 있어서 무지몽매하다.
무지몽매함을 깨우치는 것이 ‘교육’(敎育)이므로
산수몽(山水蒙)은 배움의 도리를 말한다.
九二가 스승이고 六五는 제자이다.
상괘인 간(艮)에는 소남, 하괘 감(坎)에는 중남의 상이 있다.
상괘 소남이 하괘 중남에게 배운다.
상괘의 중(中)인 六五가 하괘의 중(中)인 九二에게 겸손히 낮춰 배움을 청한다.
스승이 몽매한 자를 구(求)하지 않고 몽매한 자가 스승을 구함이 바르다.
비록 현자가 낮은 지위에 있어도 경솔히 윗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다.
구차하게 구해도 신뢰보다는 의심받는다.
몽매한 자가 가르침을 처음 청하거든 알려주더라도,
두 번 세 번 묻기만 하면 더 이상 알려주지 말라. 어지럽게만 될 뿐이다.
스승은 배우려는 의지가 없고 절실치 않은 자에게는 베풀지 말라.
효사(爻辭)
[初六] 發蒙(발몽) 利用刑人(이용형인) 用說桎梏(용탈질곡) 以往吝(이왕린)
몽매함을 깨우침에 형벌을 사용하되 뒤에는 질곡을 벗겨주는 것이 이롭다.
형벌로만 하면 인색하다.
象曰 利用刑人(이용형인) 以正法也(이정법야)
이용형인은 법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初六은 몽매함을 깨우치려는 교육의 시작이다.
初六은 위(位)가 바르지 못하고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음효이기 때문에 몽(蒙)이 심하다.
위의 六四는 정응(正應)이 아니고 위의 九二는 친비(親比)이다.
初六의 몽매함을 친비인 九二가 깨우쳐준다.
비록 初六의 몽매함이 심하지만 마냥 형벌만을 사용할 수는 없다.
무릇 몽매한 사람을 가르칠 때, 형벌을 사용함이 마땅하다.
처음에는 금기와 형벌로 몽매한 욕심을 쫓지 못하게 한 뒤에
올바른 도를 가르쳐서 깨우치게 해야 한다.
형벌은 그저 법도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일 뿐인데
형벌로만 엄하게 다스리기를 고집하면 궁색하다.
형벌을 사용하면 두려움에 따르게 만들 수 있겠지만
참다운 깨우침에 이르기는 힘들다.
형벌을 사용하기를 고집하면 손해(산택손山澤損)가 된다.
처음 덜어서 더해주기 때문에 알맞게 덜어야 한다.
일을 마치거든 서둘러 가야 허물이 없다.
[九二] 包蒙吉(포몽길) 納婦吉(납부길) 子克家(자극가)
몽을 포용하면 길하다. 부인을 맞으면 길하다. 자식이 집안을 다스린다.
象曰 子克家(자극가) 剛柔接也(강유접야)
자식이 집안을 잘 다스림은 강유(剛柔)가 만남이다.
九二는 몽(蒙)의 주효이다.
上九는 위(位)가 바르지 못하고 중용의 덕도 없는데,
몽(蒙)의 극(極)에 있어서 네 음효들을 이끌 수 없다.
그러나 九二는 하괘의 중을 얻어서 양강(陽剛)하면서 중용(中庸)의 덕(德)이 있다.
九二는 험난함을 상징하는 하괘 감(坎)에서 유일한 양효이기 때문에,
몽매함을 깨우쳐 줄 책임이 있는 스승이다.
남녀관계로 보면 외괘 六五를 부인으로 볼 수 있다.
양효 九二가 다른 음효들을 포용하는 것 또한 부인을 포용함으로 맞는 것이다.
가정으로 볼 때는, 5번째 효사를 부모로 2번째 효사를 자식으로 보고
자식이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九二가 중요의 덕으로 정응 六五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포용하지 못하면 동류 소인들과 함께
상의 언저리를 깎아서(산지박山地剝) 올바른 것을 멸하여 흉하다.
[六三] 勿用取女(물용취녀) 見金夫不有躬(견금부불유궁) 无攸利(무유리)
여자를 취하지 말라.
건장한 사내를 보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하니, 이로울 것이 없다.
象曰 勿用取女(물용취녀) 行不順也(불행순야)
물용취녀는 행실이 불순하기 때문이다.
六三은 위(位)가 바르지 못하고 하괘 감(坎)의 극(極)에 있어서 위태롭다.
원래 九三과 정응이지만 아래의 덕 있는 九二를 보고 지조를 지키지 못한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이기 때문에 취하지 말라 했다.
‘금부’(金夫)는 건장한 사내나 부유한 사내를 의미한다.
六三이 효변하면 산풍고(山風蠱)가 된다.
치울 일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아비의 일을 주관하니, 다소 후회가 있겠지만 큰 허물은 없다.
[六四] 困蒙(곤몽) 吝(인) 몽매함이 심해서 곤궁하니, 궁색하다.
象曰 困蒙之吝(곤몽지린) 獨遠實也(독원실야)
곤몽인은 홀로 양실과 멀기 때문이다.
六四는 아래의 初六과는 정응(正應)이 아니고 위의 六五도 친비(親比)가 아니다.
몽(蒙)의 스승인 九二와의 사이에는 감(坎)의 극(極)에 처해 있어
지극히 험난한 六三이 가로막고 있다.
위아래 음효(陰爻)들 사이에 있지만 몽매함을 벗어나도록
가르치고 인도해줄 만한 양강(陽剛)한 스승이 없어서 궁색하다.
六四가 효변하면 화수미제(火水未濟)가 된다.
위태롭게 여기고 굳게 바름을 지키면 길하고 후회가 없다.
분연히 나아가서 귀방을 정벌하니 3년 만에 공(功)을 이루고 상을 받았다.
[ 六五] 童蒙(동몽) 吉(길) 어린 아이의 몽매함이니, 길하다.
象曰 童蒙之吉(동몽지길) 順以巽也(순이손야)
동몽지길은 유순(順)하고 공손하기 때문이다.
六五는 비록 군주의 지위에 있지만 아래의 양강한 정응 九二에게 일을 맡겨서
세상의 몽(蒙)을 깨우치는 공(功)을 이룬다.
상괘인 간(艮)에는 소남(少男)의 뜻이 있어서 어린아이(童)의 상이 있다.
六五는 공손하게 낮춰서
배움을 청하는 몽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자세로 임한다.
아래의 九二에게 겸손히 낮춰서 교육을 통해서 양육되면 몽매함을 깨우칠 수 있다.
깨우치지 못하게 되면 흩어지고 헤어지게 된다.
六五가 효변하면 풍수환(風水渙)이 된다.
흩어지는 때에 땀이 흐를 만큼 지성으로 큰 호령을 내려서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허물이 없다.
[上九] 擊蒙(격몽) 不利爲寇(불리위구) 利禦寇(이어구)
몽매함을 쳐서 깨우친다.
도적이 됨은 이롭지 않고, 도적을 막으면 이롭다.
象曰 利用禦寇(이용어구) 上下順也(상하순야)
이어구는 상하 모두 순하게 따름이다.
上九는 몽(蒙)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고 그치고 머무르는 간(艮)의 주효이다.
안으로는 유약한 음들을 엄하게 깨우쳐서 도적이 되지 않게 막고,
밖으로 도적을 막는다.
몽괘의 여섯 효사 중에서 九二와 上九는 몽을 깨우치게 만드는 스승이고
나머지 네 음효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어리석음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九二와는 달리 上九는 적극적으로 깨우치도록 만든다.
비록 적극적으로 깨우치게 만들 때 중도를 벗어나서
도적과 같이 폭력적으로 다스리면 이롭지 않다.
도적을 막듯이 부드럽게 하는 것이 이롭다.
上九가 효변하면 지수사(地水師)이다.
무릇 소인은 도적과 같아서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에
소인은 절대로 쓰지 말라.
대군의 명이 있어서 공(功)에 따라서 나라를 열고 가문을 잇게 하더라도
소인은 쓰지 말아야 한다.
소인은 평소에도 쉽게 교만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급급한데
공(功)이 있어서 벼슬을 얻게 되면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다.
5. 수천수(水天需)
믿음을 잃지 않고 경륜과 덕을 쌓으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성취한다
단비를 머금고 있는 구름! 때를 기다려라
하늘 아래 물이 있다면 비가 되어 내렸겠지만
하늘 위에 물이 있으니 구름이 되는 것이다.
구름은 곧 비가 될 운명이다.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비가 되기 직전의 기다림의 상태.
그런데 수천수의 구름은 소나기처럼 아무때나 곤란하게 내리지 않는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비구름인 것이다.
수천수는 망부석이 되도록 집나간 남편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아내의 처절한 기다림이 아니다.
그칠 때와 나아갈 때를 알고 현재의 삶을 조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천수가 말하는 기다림의 핵심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이 10년을 공부하며 기다린 그 기다림이다.
덧붙여 수천수는 기다린다는 뜻과 함께 ‘음식(곡식)’이라는 뜻도 있다.
어린 蒙이 어른이 되도록 기다리려면 음식을 먹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곡식이 여물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도
기다림과 음식은 상통한다
괘사(卦辭)
수(需)는 기다리다, 음식, 기르다,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있어서
말하자면 음식의 도(道)이다.
수(需)는 앞에 험한 대천(大川)이 가로막고 있어서 기다리는 의미와
비구름이 하늘로 올라가서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있다.
괘상(卦象)은 감상건하(坎上乾下)이다.
감(坎)은 물, 대천, 도적, 근심, 험난함, 중남, 귀, 북쪽 등을 의미하고,
건(乾)은 하늘과 강건함, 대인, 말, 머리, 노부, 수레, 둥근 것, 북서쪽 등을 의미한다.
수(需)는 아직 어려서 성장하길 기다리며 음식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수(需)는 험난하지만
마음속에 진실한 믿음(孚)을 잃지 않고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 크게 형통하다.
굳게 올바름을 지켜서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뒤에 대천을 건너면 이롭다.
건(乾)의 강건한 덕을 갖고도 경솔히 나아가지 않고 기다리되,
믿음을 잃지 않고 경륜과 덕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리면,
마침내 대천을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앞에 험난함이 가로막아도 건(乾)의 강건한 덕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그 의리가 곤궁하지 않다.
수(需)가 크게 형통하고 올바름을 지키면 길할 수 있는 이유는,
九五가 군위에서 강실(剛實)하고 중정(中正)한 도로 행하기 때문이다.
감(坎)의 덕(德)은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행함에 있다.
九五는 때를 기다린 뒤에 정성을 다해서 나아가야 공(功)을 이룰 수 있다.
군자는 비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것을 살펴서
이제 곧 비가 온다는 것을 알기에 먹고 마시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다.
효사(爻辭)
[初九] 需于郊(수우교) 利用恒(이용항) 无咎(무구)
교외에서 기다림이다.
항심을 유지함이 이롭고 허물이 없다.
象曰 需于郊(수우교) 不犯難行也(불범난행야)
利用恒无咎(이용항무구) 未失常也(미실상야)
수우교는 어려움을 범치 않음이고 이용항무구는 常道를 잃지 않음이다.
주역에서 교외(郊外)라고 함은 성 밖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을 말한다.
고대에는 도성 밖의 50 리를 근교(近郊), 100 리를 원교(遠郊)라고 했다.
初九는 기다림의 때에 상괘 감(坎)의 험난함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물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初九는 건(乾)과 수(需)의 시작하는 때에 과강(過剛)하기 쉽기 때문에
경솔히 움직여서 어려움을 범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덕을 닦으며 기다리되 항심(恒心)
즉 상도(常道)를 잃지 않고 건(乾)의 강건하고 성실한 믿음을 지켜야 허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진흙탕이라 먹지 못하는 우물(水風井)이 되어 버려진다.
구정(舊井)물은 짐승들도 찾지 않는다.
[九二] 需于沙(수우사) 小有言(소유언) 終吉(종길)
모래사장에서 기다림이다.
다소 말은 있지만 결국 길하다.
象曰 需于沙(수우사) 衍在中也(연재중야) 雖小有言(수소유언) 以吉終也(이길종야)
수우사는 너그럽게 중에 있음이고 비록 다소 구설은 있어도 결국 길하다.
九二는 初九보다 위험에 더 가까이 있어서 교외가 아닌 모래사장에서 기다린다.
험난한 물 가까이에 모래사장이 있어서, 교외보다는 모래사장이 더 걱정스럽다.
하지만 九二는 건(乾)의 중(中)을 얻어서 중용의 덕이 있기 때문에 결국 길하다.
그러나 점점 위험 속에 가까이 가기 때문에 다소 구설(口舌)은 있다.
너그럽고 여유 있게 안정하면서 기다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길하게 된다.
구이가 효변하면 수화기제(水火旣濟)이다.
부인이 수레 덮개를 잃어버렸지만 쫓지 말라.
7일이면 다시 얻게 된다.
중용을 지켜 때를 기다리면 머지않아 잃은 것을 되찾게 된다.
[ 九三 ] 需于泥(수우니) 致寇至(치구지)
진흙탕에 빠져서 기다림이다.
도적을 이르게 한다.
象曰 需于泥(수우니) 災在外也(재재외야)
自我致寇(자아치구) 敬愼 不敗也(경신 불패야)
수우니는 재앙이 밖에 있음이고 내가 도적을 자초했으니
공경하고 삼가야 패망하지 않는다.
풍산점(風山漸)은 기러기가 물에서 점점 뭍으로 나아가지만,
수천수(水天需)는 반대로 뭍에서 점점 강으로 나아간다.
진흙탕은 물에 가장 임박한 것을 뜻한다.
코 앞에 험난함이 놓인 것이다.
그러나 九三은 하괘인 건(乾)의 극(極)에 처해서 과강(過剛)하여 기다리지 못하고
나아가려다 진흙탕에 빠졌다.
진흙탕에 빠져서 도적을 자초한 것과 다름없다.
외괘(상괘)의 험난함이 임박한 것을 두고 재앙이 밖에 있다고 했다.
도적이 이르게 된 것은 자초한 것이니 도둑을 탓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공경함으로 삼가야 그나마 최악을 면할 수 있다.
절제하지(水澤節) 못하면 결국 탄식하게 되겠지만
자초한 것이니 어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수행을 견뎌내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뜻을 접고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허다하다.
구삼의 효사에서는 그럴 경우를 바닷물에 빠졌다고 하면서
도적이 나를 해치는 것에 비유했다.
갯벌의 진창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 들어가 버린 것은
마치 도적을 만난 것처럼 해로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 진흙구덩이가 끝나도록 바다에 빠지지 않고 기다리는 끈기가 필요하다.
[六四] 需于血(수우혈) 出自穴(출자혈)
피에서 기다린다.
동굴(穴)로부터 나간다.
象曰 需于血(수우혈) 順以聽也(순이청야)
수우혈은 순(順)하게 따름이다.
六四는 상괘 감(坎)의 아래에 있으니 위험에 빠져서 피를 흘리며 기다린다.
어려움에 처하면 자신이 처한 곳에서 편히 안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六四가 편안히 머무르던 동굴(陰地, 穴)로부터 나오게 된다.
밑에서 강건한 건(乾)이 나아오지만
다행히 성품이 바른 六四는 순(順)하게 따를 수 있기 때문에
아래의 정응 初九와 위의 친비인 九五의 덕을 힘입어서
약간의 피해만을 입고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래에서 세 양효들이 올라오는데
자신이 그 전진을 막으려고 하면 해를 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나야 해를 면한다고도 해설할 수 있다.
피바다와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바른 마음으로 기다려야 함을 주역은 알려준다.
六四가 효변하면 택천쾌(澤天夬)가 된다.
엉덩이에 살이 없다.
그 걸음이 머뭇거린다.
양을 이끌고 가면 후회가 없다.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
[九五] 需于酒食(수우주식) 貞吉(정길)
술과 음식을 차려두고 기다린다.
올바름을 굳게 지켜서 길하다.
象曰 酒食貞吉(주식정길) 以中正也(이중정야)
주식정길은 중정으로써 하기 때문이다.
九五는 감험(坎險) 속에서도 중용(中庸)의 덕이 있어서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마음 편히 천명(天命)의 때를 기다린다.
언제나 정길(貞吉)은 두 가지의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
올바르기 때문에 길하다는 점사로 볼 수도 있고
굳게 올바름을 지켜야 길하다는 경계하는 문구로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효변했을 때 그 효사의 길흉이 반대가 되면 경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효변해도 동일한 길흉일 때에는 점사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처한 상황을 본 뒤에 판단함이 옳다.
여기에서는 九五가 중정하기 때문에 올바르고 길하다는 점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九五가 효변하면 지천태(地天泰)이다.
황제 제을이 나라의 평안을 위해 공주를 하가(下嫁)시켜서 제후에게 시집보낸다.
복을 받고 크게 길하다.
주역에서 ‘정’(貞)의 뜻에는 ¹ 일(事), ² 올바름(正), ³ 견고함(固)의 뜻이 있다.
그래서 ‘정길’(貞吉)이나 ‘정흉’(貞凶)에 대한 해설에도 다양한 해설이 가능하다.
정흉(貞凶)은 ¹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기에는 흉하다,
² 올바르다 하더라도 흉하다 ³ 고집하면 흉하다 로 해설할 수 있다.
‘이정’(利貞), ‘가정’(可貞), ‘정려’(貞厲)와
‘소정길 대정흉’(小貞吉 大貞凶)과 같은 경우에도 일(事)로 보고 해설했을 때에는
올바름이나 굳게 지킨다는 뜻과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上六] 入于穴(입우혈) 有不速之客三人來(유불속객래경지종길삼인래)
敬之終吉(경지종길)
동굴에 들어간다. 청하지 않은 손님 세 명이 오리니, 공경하면 결국 길하다.
象曰 不速之客來敬之終吉(불속지객래경지종길) 雖不當位(수부당위)
未大失也(미대실야)
불속지객래경지종길은 비록 부당하지만 크게 잃음은 없다.
上六은 상괘 감(坎)의 험난함과 기다림(需)의 극(極)이기 때문에
조만간 변해서 험난함과 기다림의 끝이 오게 된다.
위험이 끝나고 기다림이 곧 끝나기 때문에 그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음효(陰爻)가 음위(陰位)에 있어서 편안하게 안정을 이루기 때문에
동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六四는 건(乾)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만나는 위치에 있어서 해(害)를 당하지 않으려고 동굴(穴)로부터 나와야 했지만,
上六은 어려움과 기다림이 끝나는 때에 위가 바르고 유순하므로
해(害)를 두려워 피하지 않고 동굴(穴)에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다.
上六을 효변하면 손(巽)이 되는데 공손하다는 뜻과 들어간다(入)는 상이 있다.
동굴은 음이 편안히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청하지 않은 손님 세 명은 하괘 건(乾)의 初九, 九二, 九三 세 양효들을 의미한다.
아래로 흐르는 상괘 감(坎)의 물이, 위로 상승하는 하괘 건(乾)의 하늘과 만나게 된다.
아래 정응(正應)인 九三이 동류(同類) 양효들을 이끌고 나아오지만,
유순하고 성품이 올바른 上六은 그들을 공경할 수가 있고 마침내 길하게 된다.
아래 건(乾)이 오지 않았던 것은 험난함이 다하기를 기다렸던 것이고,
험난함이 다하면 청하지 않아도 불쑥 찾아온다.
그래서 청하지 않은 손님이 온다고 했다.
상전에서도 결국 길한 것은 비록 음이 아래가 아닌 윗자리에 있어서
처한 바가 그 지위에 합당하지는 못하지만
양효를 공경하면 능멸하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잃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본래 성질상 음효는 아래가 편안하고 양효는 윗자리가 편안하다.
그래서 음효가 양강한 덕이 없이 윗자리에 있으면서 공경할 줄 모르면
능멸함을 당하게 되고 크게 잃게 된다.
上六이 효변하면 풍천소축(風天小畜)이다.
공손하고 부드러운 도로 그쳐서 머무르게 하나 잠시 그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음이 양을 길들여 저지시키는 도(道)는 적절한 선에서 그치지 않으면 흉해진다.
그래서 지어미가 고집하면 위태롭다고 했고
달이 차서 보름이 가깝다(월기망月幾望)고 했다.
달이 차서 보름이 되면 해와 대적하게 되기 때문에 군자가 나아가게 되면 흉하다.
이미 비가 오고 이미 비가 그쳤으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믿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허생이 10년 동안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비가 오려면 먼저 구름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는 그냥 오지 않는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 물방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가 될 수 있다.
허생은 천지의 이치를 꿰뚫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다.
수천수는 기다림의 괘이다.
6효에서는 다양한 기다림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바른 마음으로 꿋꿋이 기다리라는 것.
그렇게 될 때 구름은 단비가 될 수 있다.
단비가 되어 천하를 적시고 싶다면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수천수괘의 조언인 것이다.
6. 천수송(天水訟)
다툼은 오래 끌지 말고, 도중에라도 그만두면 길하다.
도주도 전략이다!
임꺽정에서 이정곤의 “주위상책, 북방길(走爲上策 北方吉)!”
연산군을 피해 북방으로 달아나는 것이 제일 나은 꾀라는 말이다.
괘사(卦辭)
천수원행(天水遠行), 구설분분(口舌粉粉),
전봉대사(前逢大蛇), 후봉소호(後逢小虎),
신전헌공(神前獻供), 전화위복(轉禍爲福),
하늘의 비(雨)가 먼 길에 오락가락 하니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앞 길에는 큰 뱀이 도사리고 뒷 길에는 작은 호랑이가 으렁거려 정신이 휘황하다
신불(神佛)에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니 나의 수호신(守護神)이
어찌 화액(禍厄)을 무찌르지 못하리오
‘송’(訟)은 불화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이다.
송사(訟事)는 시비를 가리는 것이지만
중도를 지켜서 적절히 해결해야지 끝까지 끌면 흉하다.
괘상은 건상감하(乾上坎下)이다.
건(乾)은 하늘, 말, 머리, 노부, 수레, 강함을 뜻하고
감(坎)은 위험, 도적, 법률, 근심, 귀, 중남, 험난함을 뜻한다.
안으로 험난하고 밖으로 강건하면 송사를 벌이기 좋아한다.
하늘은 위로 올라가지만 물은 아래로 흐르니 결국 서로 만나지 못해 어긋난다.
송(訟)은 서로 옳다고 믿지만 통함이 없이 가로막혀서 쉽게 시비를 가릴 수 없다.
게다가 송사에 이긴다는 보장도 없어서 두렵다.
중도를 지켜 분별하여 시비를 가리면 길하고 끝까지 송사를 고집하면 흉하다.
대인을 만나면 이로룸은 중정(中正)한 대인은 시비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시기에 요행을 바라고 대천을 건너는 것과 같은 큰일을 진행하면
이롭지 못하고 자칫 험난함에 빠지게 된다.
송(訟)에서 다툼의 주체는 九二와 九五 둘이다.
그러나 중(中)과 정(正)을 얻은 효사는 九五밖에 없어서
덕과 의리상 누구도 九五를 이길 수 없다.
송(訟)은 어떻게 하면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되도록 송사를 피하라고 말한다.
중도를 취해서 도중에라도 그치면 길하고 끝까지 고집하면 흉하다.
무릇 군자는 일의 시초부터 신중하게 도모함으로써 다툼의 씨앗을 만들지 않는다.
효사(爻辭)
[初六] 不永所事(불영소사) 小有言(소유언) 終吉(종길)
송사를 오래 끌지 않는다.
다소 말은 있지만 결국 길하다.
象曰 不永所事(불영소사) 訟不可長也(송불가장야)
雖小有言(수소유언) 其辯明也(기변명야)
불영소사는 송사를 오래 끌 수 없고 비록 다소 말은 있어도 그 분별은 밝은 것이다.
初六은 송사의 시작으로 음효이기 때문에 유약하고 제일 아래에 있어서
다툼을 이길 수 없어서 송사를 오래 끌지 않음이 현명하다.
비록 조금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송사를 고집하지 않고 도중에라도 그만두면
비록 다소 구설은 있겠지만 마침내 길하다.
初六이 효변하면 천택리(天澤履)가 된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 위태로운 것을 깨닫고 소박하게 밟아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九二] 不克訟(불극송) 歸而逋(귀이포) 基邑人三百戶(기읍인삼백호) 无眚(무생)
송사를 이길 수 없다.
돌아가서 숨는다.
300 호의 마을에 숨어야 재앙을 면한다.
하도(천도)(55)+낙서(지도)(45)=100 x 천지인 3才= 300
象曰 不克訟(불극송) 歸逋竄也(귀포찬야) 自下訟上(자하송상) 患至掇也(환지철야)
불극송 귀포찬야는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송사를 하니 마치 근심을 주워 담음이다.
九二와 九五는 서로 적응(敵應)이므로 송(訟)에서 서로 다투는 주체이다.
그러나 九五는 양강하고 중정(中正)한 군주이다.
九二는 험난한 감(坎 )의 중에 있고 음위(陰位)에 있어서
소송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되돌아가서 숨는다.
자신의 영지 중에서도 300 호 정도 되는 마을에 숨어야 화를 면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 군주와 송사를 벌이면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다.
九二가 효변하면 천지비(天地否)이다.
불통을 해소하기 위해 포용하여 윗사람을 받든다.
비록 소인에게는 길하겠지만 대인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군자는 도리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정도가 아닌 수단으로 이익을 탐하지 않고
소인들과 어지러이 섞이지 않는다.
[六三] 食舊德(식구덕) 貞厲(정려) 終吉(종길) 或從王事(혹왕종사) 无成(무성)
옛 덕을 먹을 때이다.
바름을 지켜서 위태롭게 여기면 결국 길하다.
혹 왕의 일을 맡아도 이룸은 없다.
象曰 食舊德(식구덕) 從上吉也(종상길야)
식구덕은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고 길하다.
옛 덕(舊德)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분수를 지켜서 정응이자 윗사람인 上九를 따르는 것이다.
六三은 음유가 하괘인 감(坎)의 극(極)에 있다.
六三은 송(訟)에서 다투는 주체인 九二와 九五,
둘 사이에 위치하는데 바로 아래에 양강한 九二를 올라타고 있기 때문에 위태롭다.
험난함이 지극한 가운데 유약한 六三은 다투지 않고 본분을 지켜서
상효에 호응하는 것을 옛 덕을 먹는 것이라고 했고 마침내 길하다.
아래의 음이 위의 양을 따르는 것이 곧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송사란 강건한 양이 할 수 있고, 음유한 六三은 송사의 공(功)을 이룰 수 없고
혹 왕의 일을 맡아도 이룰 수가 없다.
六三이 효변하면 천풍구(天風姤)가 된다.
이때에는 여자가 왕성하니 취하지 말라 했다.
날랜 야윈 암퇘지에게 마음이 있어서 가는 걸음이 머뭇거린다.
마치 엉덩이에 살이 없는 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머뭇거린다.
비록 위태롭기는 하겠지만 큰 허물은 없다.
[九四] 不克訟(불극송) 復卽命(복즉명) 逾安貞吉(유안정길)
송사를 이길 수가 없다.
돌아와서 명을 받든다.
바꾸어 안정하고 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象曰 復卽命逾安貞 (복즉명유안정)不失也(불실야)
복즉명유안정은 도를 잃지 않음이다.
九四는 음위에 있어서 과강하지 않고 아래의 初六은 정응으로 따르고
六三은 친비로 다투지 않고 위의 九五는 군주이기 때문에 의리상 다툴 수 없다.
따라서 九四는 송사를 진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돌아와서 명(命)을 받든다.
정도를 잃지 않고 안정하여 바르게 거하면 길하다.
九四가 효변하면 손(巽)이 되기 때문에 공손히 명을 받든다.
九四가 효변하면 풍수환(風水渙)이다.
무릇 사람이 이별하고 흩어짐은 마음에 달렸으니 그것을 막는 것도 마음에 달렸다.
六四는 손순(巽順)하고 부드러운 도로 무리를 크게 모으니 길하다.
범인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九五 ] 訟(송) 元吉(원길)
송사가 크게 길(吉)하다.
象曰 以中正也(이중정야)
중정한 도로 함이다.
九五는 송(訟)에서 다투는 주체이자 주효로서 양강하고 중정(中正)한 군주이다.
중정(中正)한 九五는 송사를 다스리는 자로서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않고 송사가 크게 길하다.
九五가 효변하면 건(乾)이 리(離)가 되니 또한 밝은 분별력도 있다.
九五가 효변하면 화수미제(火水未濟)이다.
아직 일이 완성되지 않아서 일을 이루도록 더욱 분발해야 한다.
미제의 중간을 지났으니 올바름을 굳게 지킨다면 길하고 후회가 없다.
군자의 덕이 빛나게 되고 믿음을 얻어서 반드시 길하다.
[上九] 或錫之鞶帶(혹석지반대) 終朝三褫之(종조삼치지)
송사에 이겨서 상을 받아도 조회가 끝나기 전에 세 번이나 빼앗긴다.
象曰 以訟受服(이송수복) 亦不足敬也(역부족경야)
송사에 이겨서 상을 받음 또한 공경할 것이 못된다.
上九는 송(訟)의 극(極)에 있어서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간 자다.
송사에 이겨서 관직과 상을 받더라도, 공정한 구오가 그것을 알고 금방 다시 빼앗는다.
이것은 공경할 도가 못되고 흉하다.
송사에 져서 빼앗긴 사람이 승복하지 않고 원망을 갖게 되니 그것도 흉하다.
上九가 효변하면 택수곤(澤水困)이다.
곤란함을 면하기 위해 정도를 벗어나서 말을 앞세워도 믿지 않는다.
칡넝굴과 위태함에 곤궁하다.
움직이면 후회가 있다고 말해서 뉘우치면 기뻐하는 덕이 있어 나아가도 길하다.
결국 이장곤은 배소를 탈출한 후, 신분을 숨긴 채 함흥 고리백정의 사위가 된다.
오랜 잠거(潛居, 남몰래 숨어 삶)에 들어간 것이다.
백정의 딸, 봉단이와 부부생활까지 한다.
그러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동부승지로 승진하게 된다.
또한 왕의 특지로 숙부인에 봉함을 받은 봉단을 정실로 맞아들인다.
세상일이란 이리 흘러간다.
끝까지 싸우는 것만이 좋은 일은 아니다.
싸움의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매번 살펴야 한다.
어쩌면 이렇게 살피고, 피하고, 도망가고, 순응하는 것까지도 싸움이다.
천수송은 바로 싸움의 보이지 않는 측면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천수송의 도주는 싸우지 않는 자의 싸움이다.
7. 지수사(地水師)
여러 사람을 부리는 일에는 장인(丈人)을 쓰더라도, 소인은 쓰지 말라
삶은 전쟁이다! 전쟁의 달인이 되는 법
서유기는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들이 서역에 가면서 겪는 구법의 여행기이다.
말이 여행기이지 요괴와 싸우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정과(正果)를 얻기 위해 81개의 어려움을 통과해야 하니
구도를 향한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손오공은 재주가 뛰어나다.
하여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무자비하게 죽이기 일쑤다.
이런 손오공에게 스승인 삼장법사는
출가자는 선을 행하고 자비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강조한다.
그에 반해 손오공은 악은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불굴의 투지를 불태운다.
모름지기 악은 송두리째 없애야 하는 법! 이것이 손오공의 논리다.
사실 손오공의 말이 훨씬 현실적으로 들린다.
요괴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니 감상에 젖었다간 한순간에 목숨이 날아간다.
자비와 투쟁.
자비를 가슴에 품고 잔악무도한 요괴와 싸워야 하는 험난한 전쟁.
어쩌면 이런 전쟁을 우리는 매 순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기심과 이타심과의 전쟁.
출가자뿐 아니라 우리도 내면의 이기심과 싸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함께 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역의‘지수사’괘는 전쟁에 대한 깨알 같은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괘사(卦辭)
‘사’(師)는 군대의 무리를 의미한다.
다섯 음효(陰爻)들이 구이를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는 것이니 전쟁의 괘이다.
괘상은 곤상감하(坤上坎下)이다.
곤(坤)은 땅, 소, 온순함, 노모, 배, 서남, 학문, 군중을 뜻하고
감(坎)은 물, 강, 돼지, 험난함, 빠짐, 중남, 귀, 북쪽을 뜻한다.
위에는 땅이고 아래는 물이니, 사(師)는 땅 아래의 물이다.
마치 지하수가 모이듯이 군중이 모이는 상(象)이다.
사(師)의 유일한 양효인 九二에 의해서 여러 음효들이 통솔된다.
반드시 높고 귀한 자리가 아니라도
역량과 덕(德)이 있는 장인(丈人)이면 무리가 화합하고 길하다.
군사를 부림(師)에는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필히 장인(丈人)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
내괘 감(坎)은 험난하나 외괘 곤(坤)은 순하므로
험난한 중에도 순리에 따라서 일을 해결하는 덕이 있다.
장수가 위엄을 잃으면 군중을 복종시킬 수 없게 되고
너무 과강하면 포악하여 군중을 품을 수 없다.
따라서 강함과 유함 즉, 위엄과 은혜가 함께 해야 공(功)을 이룰 수 있다.
효사(爻辭)
[ 初六 ] 師出以律(사출이율) 否臧凶(부장흉)
군사를 부릴 때에는 엄정한 군율로 해야 한다. 아니면 전쟁에서 이겨도 흉하다.
象曰 師出以律(사출이율) 失律凶也(실율흉야)
사출이율은 군율을 잃게 되면 흉하기 때문이다.
初六은 군사를 일으키는 시작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의리(義理)에 대해 말하고 군사를 부리는 도리를 설명했다.
출사(出師) 즉, 군사를 일으키려면 대의명분이 합당하고
적절한 절차와 규율에 따라 군사를 부려야 한다.
엄정한 군율을 좇아서 군사를 부려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군기가 문란해지고 마침내 전쟁에 패하게 된다.
비록 군율을 잃고도 요행으로 전쟁에 이겨도
군율을 잃게 되면 결국 흉한 일이 일어나기 쉽다.
初六은 위(位)가 바르지 못해서 뜻만 앞설 뿐이고
군율을 엄정히 굳게 바로 세우기가 쉽지 않다.
위에서 응으로 이끌어주는 이도 없어서 군율을 엄히 하라고 경계했다.
初六이 효변하면 지택림(地澤臨)이다.
감응함으로 임하더라도 위에서 부르기를 기다린 뒤에 나아가는 것이 올바르고 길하다.
[九二] 在師中吉无咎(재사중길무구) 王三錫命(왕삼석명)
군사를 부림에 중도로 다스려야 길하고 허물 없다.
왕이 3번이나 명을 내린다.
象曰 在師中吉(재사중길) 承天寵也(승천총야)
王三錫命(왕석삼명) 懷萬邦也(회만방야)
재사중길은 하늘을 받들어 총애를 입음이고 왕삼석명은 만방을 품는 것이다.
九二는 양강(陽剛)하지만 중(中)을 얻고 음위(陰位)에 있어
신중하면서 중용으로 군대를 다스리는 장수요 ‘장인’(丈人)이다.
장수가 군사를 부림에 중도를 좇아서 잘 다스리니 천자(天)의 총애를 받는다.
군주의 신임이 두터워서 3번이나 거듭 군사를 맡긴다.
여러 번 명(命)을 내림은 나라를 두루 보살피고 다스리는 것이다.
九二가 효변하면 곤위지(坤爲地)이다.
마음이 곧고 바르고 커서 배우고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곤(坤)의 도가 크게 빛나는 것이다.
[ 六三] 師或輿屍(사혹여시) 凶(흉)
군사를 부림에 혹 장수가 여럿이면 흉하다.
혹 패하고 시체만 싣고 온다.
象曰 師或輿屍(사혹여시) 大无功也(대무공야)
사혹여시는 크게 공이 없음이다.
전쟁의 때 六三은 감험의 극(極)에 처해서,
음유(陰柔)한 자가 아래에 강(剛)을 올라타고 있는데
위(位)도 바르지 못해서 위태하다.
六三 지위는 지방의 제후요 장수의 지위이고 九二의 윗자리에 있어서,
욕심에 군사를 부리는 일에 주장한다.
군사를 부림에 여러 명의 장수가 주장하면 전쟁에 패하기 쉽고 흉하다.
그러나 주자와 왕필은 ‘여시’(輿屍)를 전쟁에 패해서
혹 시체(屍)만 가득 수레(輿)에 싣고 오는 것이니 흉하다고 해설했다.
六三이 효변하면 지풍승(地風升)이 된다.
의심할 것이 없고 앞길에 저항이 없어서 마치 빈 고을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六四 ] 師左次 (사좌차)无咎(무구)
군대를 뒤로 물리기에, 화(禍)를 면한다.
象曰 師左次(사좌차) 未失常也(미실상야)
사좌차는 상도(常道)를 잃지 않음이다.
六四는 위(位)가 바르기 때문에,
무리해서 나아가거나 六三처럼 주장하지 않고
군사를 뒤로 물리기 때문에 허물은 면한다.
무리하게 나아가서 패배하고 군사를 잃는 것보다 일단 후퇴해서
안전한 곳에서 정비한 뒤에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하고 마땅한 도이다.
六四가 효변하면 뇌수해(雷水解)이다.
사적인 욕심이나 관계를 끊으면 벗들이 오게 되고 서로 화합하고 진심으로 믿게 된다.
[六五] 田有禽(전유금) 利執言(이집언) 无咎(무구)
長子帥師(장자솔사) 弟子輿尸(제자여시) 貞凶(정흉)
밭에 짐승이 있으면 그 명을 받들어 잡음이 이롭고 허물이 없다.
장자가 군사를 통솔해야만 한다.
그 형제들 여럿이 주장하게 되면 올바르게 하기에는 흉하다.
象曰 長子帥師(장자수사) 以中行也(이중행야) 弟子輿尸(제자여시) 使不當也(사부당야)
장자수사는 중도로 행함이고 제자여시는 군사를 부림에는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장자(長子)는 장인(丈人)이자 강중(剛中)한 九二를 말하고
다른 형제(弟子)들은 六三과 六四를 말한다.
적의 침범이 있는 것을 밭에 짐승이 있다고 했다.
집언(執言)은 죄인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
유약한 六五는 양강하고 중용(中庸)의 덕이 있는 정응 九二에게 군사를 맡긴다.
그러나 역량이 부족한 형제들을 장수로 위임하거나
여럿이 함께 주장하게 하면 군사를 부림이 힘들고 결국 패하여 흉하다.
제자여시(弟子輿屍)를 형제들이 군사를 부리면
전쟁에 패하고 시체만 수레에 가득 싣고 온다고도 한다.
六五가 효변하면 감위수(坎爲水)이다.
아직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아서 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계하고 기다려서 물이 가득 차서 평평하게 되면 허물이 없다.
[上六] 大君有命(대군유명) 開國承家(개국승가) 小人勿用(소인물용)
대군의 명이 있다.
공에 따라서 나라를 열고 가문을 잇더라도 소인은 쓰지 말라.
象曰 大君有命(대군유명) 以正功也(이정공야) 小人勿用(소인물용) 必亂邦也(필란방야)
대군유명은 공을 바르게 함이고 소인물용은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힌다.
개국승가는 천자가 명을 내려서 제후(諸侯)를 세워 나라를 열고
경대부(성씨)를 세워서 가문을 잇게 했다.
소인은 평소에도 쉽게 교만히 행하고 사욕을 채우는데 공(功)이 있어서
나라와 가문을 얻게 되면 필히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
上六이 효변하면 산수몽(山水蒙)이다.
몽매함을 적극적으로 쳐서 깨우치게 만들더라도
중도를 벗어나서 도적과 같이 폭력적으로 다스리면 이롭지 않다.
도적을 막으면 이롭다고 한 것은 어리석음이 지극하게 되면 도적이 되기 때문에
그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도적을 막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손오공은 81개의 고난을 겪으면서 구도를 향한 집중력을 키워갔다.
14년의 여정을 통해 자신이 넘어야 할 잔인함, 인내심, 자비심과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자신과의 전쟁이 끝이 났다.
전쟁이란 단순히 전투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바른 마음이 전제될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전쟁이 끝나도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손오공은 이제 손오공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었다.
투전승불(鬪戰勝佛 : 싸워서 이겨 부처가 되다.)이 되어
전쟁의 지혜를 나누는 고귀한 자가 된 것이다.
이렇듯 전쟁이란 지금과 다른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이기심을 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손오공이 81난의 전투를 통해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변화시켰듯이
그런 전쟁을 우리도 해야 하지 않을까.
8. 수지비(水地比)
친밀하고 싶거든 때를 놓쳐서 너무 늦지 않도록 주의하라
전쟁에서 평화로!
괘사(卦辭)
‘비’(比)는 친밀(親密)하다, 좋아하다, 서로 돕는다는 뜻이 있다.
괘상은 지수사(地水師)를 뒤집은 감상곤하(坎上坤下)이다.
감(坎)은 물, 귀, 법, 중남, 도적, 돼지, 북쪽, 험난함, 빠진다는 뜻이고,
곤(坤)은 땅, 배, 노모, 소, 중앙, 황색, 유순함, 서남, 따른다는 뜻이다.
땅 위의 물로, 땅을 적시면서 흐른다.
물이 땅에 스며들어 가까우니 간격이 없고 친밀하다.
사(師)는 九二가 하괘의 중(中)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비(比)는 九五가 상괘 중(中)에서 친밀하게 한다.
사(師)는 九二가 장수가 되고 비(比)는 九五가 군주가 된다.
친밀함은 서둘러서 와야지 그 때를 놓치면 흉하다.
편하지 못한 때가 되어서 친밀함을 구하면 비록 대장부라도 흉하다.
그러나 편안하지 못해서 도움을 구하는데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지 않고 친밀하다고 할 수 없다.
중정한 九五가 굳게 올바름을 지켜서
아래의 중정한 六二와 정응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비(比)는 전쟁 뒤에 친밀하게 돕는 것이고,
특히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순종하면서 친밀히 돕는 것이다.
왕이 백성을 친밀하게 보살피면 백성이 왕을 친부모처럼 따르는 것이
민본정치이며 王道이다.
효사(爻辭)
[初六] 有孚比之(유부비지) 无咎(무구)
有孚盈缶(유부영부) 終來有他吉(종래유타길)
성신으로 친밀하면 허물이 없다.
성신이 질그릇에 가득하면, 마침내 생각지도 못한 길함이 있다.
象曰 比之初六(비지초육) 有他吉也(유타길야)
初六의 친밀함은 다른 길함이 있음이다.
친밀함은 믿음과 신뢰가 그 바탕이다.
하지만 초육은 음효가 양위(陽位)에 있어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겉치레나 과하기 쉽다.
그래서 마치 투박한 질그릇을 가득 채우는 것 같은 소박하고 진실한 믿음을 강조했다.
성실하고 진실한 믿음이 소박한 질그릇에 가득하면 생각지 못한 좋은 행운이 온다.
初六이 성신을 다해서 六四를 섬기면
뜻하지 않게 군주인 九五로부터 신임(행운)을 받게 된다.
初六이 효변하면 수뢰둔(水雷屯)이 된다.
나아가지 못해서 머뭇거리니 올바름을 지키면 이롭다.
경험이 많은 일꾼인 제후(六四)를 세워서 도움을 받는 것이 이롭다.
[六二] 比之自內(비지자내) 貞吉(정길)
안으로부터 친밀하다. 굳게 올바름을 지켜야 길하다.
象曰 比之自內(비지자내) 不自失也(부자실야)
비지자내는 스스로 잃지 않는 것이다.
‘자내’(自內)를 안으로부터 혹은 스스로 친밀하다고 해설하지만
수신(修身)하며 기다린 뒤에 군주 九五가 六二에게 낮춰서 친밀함을 청해오면
응한다고도 본다.
상전에서도 안으로부터 친밀함은 스스로 친밀함의 정도를 잃지 않음이라고 했다.
중정한 九五는 정응 六二를 반드시 등용하겠지만
음유한 六二는 스스로 안정할 수가 없어서 조급히 친밀함을 구하기 쉽다.
그래서 굳게 올바름을 지켜서 九五의 부름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게다가 비(比)의 유일한 양효 九五는 다른 음효들도 모두 친밀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올바름을 지키지 않으면 사적으로 친밀함을 구한다는 오해와 시기를 받을 수 있다.
六二가 효변하면 감위수(坎爲水)가 된다.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어려움 속에서도 도를 잃지 않아서 조금은 얻음이 있다.
[六三] 比之匪人(비지비인)
마땅하지 못한 사람과 친밀하려고 한다.
象曰 比之匪人 (비지비인)不亦傷乎(불역상호)
비지비인은 또한 상하지 않겠는가?
특히 六三은 효사 간의 덕(德)인 정(正), 중(中), 승(承), 승(乘), 응(應) 중에서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다.
다른 효사들과 친밀하고 싶지만 上六은 정응이 아니고 상하 모두 음효이다.
六二는 정응 九五와 정응이고 六四는 친비 九五와 친하다.
六三은 양위(陽位)에 있어서 나아가고 싶지만,
상괘로 나아가면 감(坎)의 험난함 속에 빠지게 된다.
六三은 음유로 험난함을 구제할 재능도 없고 성품도 바르지 못한데
위태한 위치에 처해서 결국 망동하게 된다.
상괘 上六과 정응도 아닌데 친밀하고자 나아가서 험난함에 빠진다.
六三이 효변하면 수산건(水山蹇)이 된다.
나아가면 험난하고 안으로(아래로) 돌아오면 그나마 편안한 곳에 머무름이다.
[六四] 外比之(외비지) 貞吉(정길)
밖으로 친밀하다. 올바르게 해야 길하다.
象曰 外比於賢(외비어현) 以從上也(이종상야)
밖으로 현자와 친밀함은 위를 쫓음이다.
六四는 아래에 정응이 없고 성품이 바른 대신으로 九五와는 친비하다.
六四는 중정한 군주 九五와 친밀하여 기꺼이 따른다.
六四를 효변하면 기쁜 태(兌)가 되어 택지췌(澤地萃)가 되니 기쁨으로 따르는 것이다.
밖으로 친밀하다는 것은 정응이 아닌 아래의 初六을 버리고
위로 친비한 九五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하괘는 안이고 상괘가 밖이다.
상전에도 밖으로 친밀함은 현명한 자와 친밀하려고 위를 쫓음이라고 했다.
취(萃)의 때에 九四는 성품이 바르지 못해서 정도를 벗어나서
위아래의 신임을 구하기가 쉽기 때문에
정도를 지켜서 신임을 얻어서 크게 길해야만 허물을 면할 수 있다.
[九五] 顯比(현비) 王用三驅(왕용삼구) 失前禽(실전금) 邑人不誡(읍인불계) 吉(길)
친밀함을 드러냄이다. 왕이 사냥함에 삼구법을 쓴다.
앞으로 달아나는 짐승은 잃는다.
마을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고 길하다.
象曰 顯比之吉(현비지길) 位中正也(위중정야)
舍逆取順(사역취순) 失前禽也(실전금야)
邑人不誡(읍인불계) 上使中也(상사중야)
현비지길은 위(位)가 중정함이고
사역취순 실전금은 거스르는 자는 놓아주고 따르는 자는 취함이고
읍인불계는 윗사람이 중도로 부리기 때문이다.
군주가 천하와 함께 친밀하려고 먼저 자신의 중정(中正)한 덕을 밝게 드러낸다.
사냥을 함에 있어서도 군주를 등지고 달아나는 것은 놓아주고
앞으로 오는 것만 취하는 삼구법(三驅法)을 사용해서 친밀함을 드러낸다.
중용의 덕이 있는 九五는 거스르는 자는 놓아주고 따르는 자는 취한다.
친밀한 ‘비’(比)의 때에 이런 도를 밝혀 드러내면,
읍인들뿐만 아니라 천하의 백성들도 경계하지 않는다.
친밀함을 구하는 도가 너그럽기 때문에
군주의 다스림에 백성들이 경계하지 않고 길하다.
이와 같은 덕으로 행하면 백성들의 따름이 양선후음의 곤위지(坤爲地)와 같다.
치우침 없이 중도를 지켜서 겸손히 낮추면 길하니 황색치마는 크게 길하다.
[上六] 比之无首(비지무수) 凶(흉)
친밀함에 있어 시작조차 못하니 흉하다.
象曰 比之无首(비지무수) 无所終也(무소종야)
비지무수는 좋은 끝이 없음이다.
上六은 비(比)와 감(坎)의 극(極)에 있어서 친밀함의 끝마침이다.
이제 친밀함이 끝나고 조만간 흉한 때가 온다.
친밀함에 있어 시작을 하고도 마침이 없을 수는 있지만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면 마침이 있을 수 없다.
아래 친비(親比)인 九五를 믿고 서둘러 가서 친함을 구하지 못하고
시작도 못해보고 마치게 되어서 흉하다.
上六이 효변하면 풍지관(風地觀)이다.
그 생(生)을 살피지만 군자는 허물은 없다.
上九는 마침에 처하여 자라나고 쇠락하는 음양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이 편하지는 못하다.
주역은 건괘와 곤괘 다음에는
둔(屯)ㆍ몽(蒙)ㆍ수(需)ㆍ송(訟)ㆍ사(師)ㆍ비(比)괘로 이어진다.
둔괘~비괘에는 모두 감괘가 들어 있다.
우연한 공통분모일까.
감괘의 물은 지혜를 뜻하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어려움, 고난, 위험을 의미한다.
(본래 물을 건너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배도 다리도 귀했을 때이니 대개는 맨몸으로 건너야 했다.
고대의 텍스트는 이러한 시대상을 알아두면 매우 실감 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천지가 초매에 만물을 낳는 데 둔괘의 물이 산파 노릇을 한다.
어린 몽을 가르치는 데는 산수몽의 물,
어린 것을 먹이는 데는 수천수의 물,
송사를 일으키는 음식을 짓는 것도 물,
전쟁괘의 험함은 곧 물,
이렇게 고비고비를 넘기고 나자 물은 수지비에서 윤택한 쓰임을 만들어낸다.
고난은 어떤 국면에서건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게 인생살이다.
마치 저 여섯 괘가 품고 있는 감괘처럼 말이다.
우리는 둔괘에서 비괘로 이어지는 감괘의 역경 혹은 지혜를 배울 수 있다.
9. 풍천소축(風天小畜)
하나의 음이 다섯 양을 그쳐 쌓아서 밀운불우해도 오래 가지 못한다.
문왕의 아바타!
때는 전설적인 폭군인 은나라 주왕의 시대.
주왕의 폭거에 지친 민심은 서쪽 땅의 제후 서백 창(西伯 昌, 문왕)에게로 향한다.
그러자 주왕은 문왕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유리옥에 가둔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주왕에 대한 원망과 복수로 이를 갈고 있을 시간.
문왕은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감옥 안에서 초연하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64괘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풍천소축’ 괘는 문왕 자신의 일을 이야기한 것이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쌓여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데 내리지 않는다.
한시바삐 쏴~ 하고 내려서 불타는 대지를 식혀줬으면 좋겠는데...
문왕이 보기에는 지금 자신과 백성들의 처지가 딱 그랬다.
주왕의 폭정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듯 말 듯 혼란한 상황.
문왕은 시절이 이러한 탓을 자신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왕은 자신의 근거지인 서쪽을 떠나
주왕이 있는 동쪽을 쳐야 이 혼란을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학자들에 따르면 문왕의 영토는 이미 은나라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였기 때문에
힘으로는 충분히 주왕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왕은 아직 구름만 빽빽하게 뒤덮었을 뿐
비가 오는 때에 이르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섣불리 행동했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문왕은 가뭄에 단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갈고닦으면서
덕과 지혜를 조금씩 쌓아 나갔다.
문왕이 지은 64괘 중 9번째에 해당하는 괘가 풍천소축이다.
앞의 수지비(水地比)괘는 서로를 가까이하고 돕는 괘이다.
서로 도와 세상이 안정되면 조금씩 쌓인다는 의미로 비괘 다음에 소축괘가 왔다.
괘를 설명하는 괘사에서는 소축괘를 형통하다고 했다.
형통은 ‘모든 일이 잘되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소축은 그 이름처럼 조금씩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형통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확 지르거나 일을 도모하기에는
힘이 약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괘사에서는 ‘밀운불우(密雲不雨)'라는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괘사(卦辭)
유일한 음효요, 주효인 육사가 다섯 양효를 그쳐서 쌓게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괘상은 손상건하(巽上乾下)이다.
손(巽)은 바람, 나무, 장녀, 닭, 온화함, 시장, 줏대 없음, 들어감(入), 남동,
겸손함을 의미하고 건(乾)은 하늘, 노부, 말, 머리, 북서, 강건함을 의미한다.
상괘인 손(巽)의 주효로서 유순한 음효 六四가,
상하의 강건한 다섯 양효를 그치게 해서 쌓는다.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는 공손한 덕이 있다.
소축은 六四가 손(巽)의 주효로서
부드러운 음(陰)이 정위를 얻어서 공손한 도(道)로 쌓는다.
강건히 나아가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에는
유순한 도로써 감화시키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지만 공손하게 회유해서 잠시 머무르게 하는 것이지, 힘으로 저지할 수는 없다.
산천대축(山天大畜)은 上九와 六五, 六四가
함께 간(艮)을 이뤄서 건(乾)을 쌓기 때문에 대축이고,
풍천소축(風天小畜)은 상괘 손(巽)의 주효인 六四가
부드러운 道로 건(乾)을 그치게 해서 쌓기 때문에 소축이다.
소축은 짙은 구름에도 비가 오지 않아서 답답한데
그것은 서쪽 교외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서쪽은 음의 방향이면서 또한 문왕의 주(周)나라가 있던 방향이다.
아직 문왕의 처지와 힘이 미약해서
자신의 덕을 동북 방향의 은(殷)나라에 베풀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효사(爻辭)
[初九] 復自道(복자도) 何其咎(하기구) 吉(길)
도로 회복한다. 어찌 허물인가? 길하다.
象曰 復自道(복자도) 其義吉也(기의길야)
복자도는 그 의리가 길함이다.
하괘 건(乾)은 본래 성질상 위로 나아가는데
初九는 정응 六四 때문에 그 뜻을 잊고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그러나 위(位)가 올바른 初九는 사사로움에 매이지 않고 다시 자신의 뜻을 회복하여
정도를 좇아서 위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초구는 허물을 면하고 길하다.
상전에도 올바른 도로 회복함은 그 의리(義理)가 길한 것이라고 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손위풍(巽爲風)이다.
줏대가 없고 과단성이 없다. 나아갔다 물러난다.
의심이 많아서 굳은 의지가 없고 우유부단하니 무인의 올바름이 이롭다.
무인과 같은 결단성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
[九二] 牽復(견복) 吉(길)
이끌어 회복하니 길하다.
象曰 牽復在中(견복재중) 亦不自失也(역불자실야)
견복은 중(中)에 있는 것이고 또한 스스로 잃지 않는 것이다.
九二는 정응도 친비도 없지만 중(中)을 얻어서
바른 도를 회복한 초구를 이끌고 함께 양강한 건(乾)의 정도를 좇아서 위로 나아간다.
九二는 하괘 건(乾)의 다른 양효들을 이끌고
소축(小畜)의 그쳐서 머무르게 만드는 六四를 넘어서 도를 회복하기 때문에 길하다.
상전에도 이끌어 회복함은 중(中)에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 그 도를 잃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九二가 효변하면 풍화가인(風火家人)이다.
이루려 하는 바 없이 중(中)에 머물러서 음식을 하여 봉양하니, 올바르고 길하다.
[九三] 輿說輻(여탈복) 夫妻反目(부처반목)
수레바퀴가 빠진다. 부부가 반목한다.
象曰 夫妻反目(부처반목) 不能正室也(불능정실야)
부처반목은 집안을 바르게 하지 못함이다.
건(乾)에는 수레바퀴의 상이 있고,
六四에 의해 저지당한 것을 바퀴가 빠졌다고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九三은 중(中)을 얻지 못하고 과강(過剛)해서
정응도 아닌 六四에게 사사로운 정(情)으로 구한다.
욕심에 친비 六四에게 응(應)하여 그쳐서 나아갈 줄을 모르는 것이
수레바퀴가 빠진 것과 다름없다.
六四는 여러 양효들을 그쳐서 쌓을 만큼 외유내강한 여장부이고
게다가 九三의 윗자리에 있다.
부부가 반목한다는 것은,
九三에 의해서 육사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양이 위에서 음을 제지함이 상도이지만 거꾸로 음이 윗자리에서 양을 제지한다.
이는 집안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다.
九三이 처한 위치가 위태롭고 과강해서 상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九三이 효변하면 풍택중부(風澤中孚)이다.
신실한 믿음(中孚)이 없으면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기쁨과 슬픔이 계속 흔들리게 되고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퇴가 일정하지 못하다.
그 모양새가 적을 얻었다고 때로 북을 두드렸다가
때로 그쳤다가 때로 눈물을 흘리다가 때로 노래를 부른다.
위가 부당하면서 위태한 자리에 처했기 때문이다.
[六四] 有孚血去(유부혈거) 惕出无咎(척출무구)
믿음을 두면 험난함이 없어지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허물이 없다.
象曰 有孚惕出(유부척출) 上合志也(상합지야)
유부척출은 위와 뜻을 합하는 것이다.
六四는 아래로 강건한 양효들을 올라타고 있어서 힘으로써 그치게 하려고 하면
해(血)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성신(誠信)으로 감화시켜야 한다.
소축의 六四가 다섯 양효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상해(血)를 입는 험난함과 근심이 있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으로 감화시키면 九五와 上九가 도와주고
함께 손(巽)의 덕으로써 건(乾)을 그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험난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통 주역의 4번째 효사들은 대신의 지위로서
5번째 효사인 군주와 뜻을 합해야만 공(功)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허물이 없는 것은
위와 뜻을 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4번째 효사는 하괘에서 상괘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기 때문에
그 진퇴가 일정하지 못하다.
六四가 효변하면 건위천(乾爲天)이다.
혹 뛰어 봐도 미치지 못하거나 머무르고 싶어도 편히 있기가 힘들다.
위와 뜻을 합하지 못하면 위태로워서 연못으로 되돌아와야 허물이 없다.
[九五] 有孚(유부) 攣如(연여) 富以其隣(부이기린)
진심으로 이끈다. 부를 이웃과 함께 한다.
象曰 有孚攣如(유부연여) 不獨富也(부독부야)
유부 연여는 홀로 부유하지 않음이다.
소축(小畜)에서 위로 나아가는 양효들을 그치게 해서 축적하는 실제적인 주체는
六四가 아닌 오히려 군주 九五이다.
아래의 친비한 대신 六四와 함께 손(巽)의 공손한 덕으로써
양강(陽剛)한 양효들을 멈추게 해서 축적한다.
상괘의 손(巽)의 세 효사들은 모두 힘을 모아서 하괘 건(乾)을 저지하여 축적한다.
무릇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함께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상전에도 진심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홀로 부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九五가 효변하면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하나의 음효가 아닌 두 음효들이 네 양효들을 그쳐서 쌓게 하는 것이다.
흔들림이 없이 올바르게 쌓아서 세상에 나아가 크게 베풀어야 길하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저지해서 쌓으려고 하면 서로 상(傷)할 수 있다.
마치 수퇘지를 미리 거세해서 성질을 순하게 만드는 것처럼
미리 내다보고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두면 경사가 있게 된다.
[上九] 卽雨卽處(기우기처) 尙德載(상덕재) 婦貞厲(부정려)
月幾望(월기망) 君子征凶(군자정흉)
이미 비가 오고 그쳤다. 덕을 숭상하여 가득함이다. 지어미가 고집하면 위태롭다.
달이 거의 보름에 가깝다. 군자가 나아가면 흉하다.
月幾望은 보름에 가까운 14일, 月已望은 15일, 月旣望은 보름이 지난 16일이다.
象曰 卽雨卽處(기우기처) 德積載也(덕적재야)
君子征凶(군자정흉) 有所疑也(유소의야)
기우기처는 덕이 쌓여서 가득한 것이고 군자정흉은 의심하는 바가 있음이다.
上九는 소축의 마침이다.
지어미인 六四가 그쳐서 축적하길 고집하면 위태롭다.
달이 차서 보름이 되면, 해와 대적한다.
해와 달은 남녀를 뜻하니, 여자가 남자와 다투는 것을 상징한다.
음(月)이 양을 저지했던 것은 힘으로 그쳐서 쌓았던 것이 아니라
손(巽)의 공손한 덕으로 양을 축적했던 것인데,
종국에도 그칠 줄 모르고 음이 성대해졌다고 양과 대적하려 하면
결국 흉을 자초하는 것이다.
음이 자라면 양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에 군자가 해를 입을 수 있고
군자가 나아가면 흉하다.
상전에도 이미 비가 오고 이미 그쳤다 함은 덕이 쌓여서 가득한 것이고
군자가 나아가면 흉한 것은 의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축은 크게 쌓았기 때문에 종국에는 흩어지고
소축은 쌓은 것이 적기 때문에 종국에 이르면 이룸이 있다.
上九가 효변하면 수천수(水天需)이다.
구멍에 들어간다.
청하지 않은 손님 셋이 오리니 공경하면 결국 길하게 된다.
험난함과 기다림(需)의 끝에서 유순히 기다리면,
아래로부터 그 험난함이 다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乾)이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불쑥 찾아온다.
성품이 바르고 유순한 上六은 그들을 공경할 수 있고 마침내 길하다
10. 천택리(天澤履)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도 기쁨으로 따르면 화를 면할 수 있다
한걸음 한걸음 세상을 향해 발을 딛어라!
1. 괘사(卦辭)
‘리’(履)는 밟는다, 따르다, 실천하다, 이행하다는 뜻이다.
괘상은 풍천소축을 뒤집은 건상태하(乾上兌下)이다.
건(乾)은 하늘, 말, 강건함, 노부, 대인, 호랑이, 수레, 차가움, 얼음 등을 뜻하고
태(兌 )는 연못, 소녀, 첩, 수다, 양, 달, 은둔, 기쁨, 온화함을 뜻한다.
괘상은 하늘이 위에 있고 그 아래 연못에 하늘이 비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반드시 위아래의 구분과 질서가 있다.
위아래를 구분하고 존비(尊卑)를 구별함이 곧 예(禮)의 근본이다.
주역(周易)에서 리(履)는 일종의 예절괘이다.
리(履)는 밖으로 강건하고 안으로 기쁜 덕이 있다.
호랑이의 꼬리를 밟았는데도
아래의 기쁜 태(兌)가 위의 강건한 건(乾)을 기쁘게 따르니
호랑이가 사람을 물지 않고 형통하다.
무릇 인생사도 호랑이 꼬리를 밟음과 같다.
태(兌)의 온화함과 기쁨으로 하면 흉을 면한다.
비록 九五가 양강하고 중정(中正)한 덕이 있지만
과감하고 강경한 쾌리(夬履)를 행하지 않아야만 형통하다.
아래의 유(柔)한 태가 위의 강(剛)한 건에게 밟혀도
기쁘게 순종해서 해를 당하지 않음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따르는 이치와 같다.
호랑이는 모두가 양으로 막강한 하늘(건)괘다.
이 강한 하늘괘의 꼬리를 약한 못괘(택괘)가 밟고 있다.
사람이 사는데 자기 자신은 안에 있는 못괘처럼 약한데 세상은 하늘괘처럼 강하다.
그래서 괘사에서 범의 꼬리를 밟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범의 꼬리를 밟고 있으면 물리기 쉬운 것과 같이,
강하고 무서운 세상을 사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사람의 한평생을 생애(生涯)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서 '애(涯)'는 물가라는 뜻이 있다.
그만큼 삶은 언제나 아슬아슬 위태로운 것이다.
하지만 안으로 늘 기쁜 마음으로써(못괘의 괘덕이 기뻐하는 것이다.)
세상살이에 응하면 물리지 않으니 형통하다.
이것은 또한 천리를 기꺼이 순응한다는 의미도 된다.
효사(爻辭)
[初九] 素履往(소리왕) 无咎(무구)
소박하게 밟아나가면 허물이 없다.
象曰 素履之往(소리지왕) 獨行願也(독행원야)
소리지왕은 오직 원하는 바를 행한다.
初九는 예절괘의 시작으로 위에 응도 없음에도 처음부터 꾸미려 하면 곤란하다.
만약 자신의 낮은 지위의 소박함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나아가면,
그것은 탐욕으로 조급하게 망동하는 것이다.
올바름이나 널리 이롭기보다 자신의 낮은 지위를 벗어나는 것에 뜻을 두기 마련이다.
소박한 본분을 편안하게 여기면 구차하게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한 바를 소박하게 밟아 나간다.
그래서 상전에도 소박하게 밟아 나아감은 오직 그 원하는 바를 행함이라고 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천수송(天水訟)이 되므로 위험의 요소가 있다.
그래서 소박함을 잃어서 경솔하게 망동하지 않고
소박하게 밟아 나아가야만 허물이 없다고 했다.
송사를 끝까지 끌어서 이기려 하지 말고 도중에라도 그치거나 피하는 것이 좋다.
송사를 오래 끌지 않으면 비록 다소 구설은 있겠지만 마침내 길하다.
[九二] 履道坦坦(이도탄탄) 幽人貞吉(유인정길)
밟는 길이 탄탄하다. 유인의 바름은 길하다.
象曰 幽人貞吉(유인정길) 中不自亂也(중부자란야)
유인정길은 중심이 스스로 어지럽게 되지 않는 것이다.
九二는 태(兌)의 중(中)을 얻었고
음위(陰位)에 있으므로 과강(過剛)하지 않고 중용(中庸)의 덕이 있다.
그러나 군주인 九五와 정응이 아니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한다.
차라리 명리를 초월해서 은둔한 유인처럼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다.
혹 정응이 없다고 음사(陰邪)한 소인 六三에게 끌리지 않고
중도를 지켜 스스로 멀리해야만 한다.
九二가 효변하면 천뢰무망(天雷无妄)이 된다.
무망은 거짓되고 망령됨이 없이 올바르고 진실한 것이다.
비록 사심이 없는 행동도 바르지 않으면 망동(妄動)이니 머지않아 재앙으로 돌아온다.
욕심없이 자연스럽게 하늘의 도를 따르면 굳이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밭을 갈지 않고도 거두며 밭을 개간하지 않고도 기름진 밭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이
무망(无妄)으로 나아가면 이롭다.
[六三] 眇能視(묘능시) 跛能履(파능리)
履虎尾(이호미) 咥人(질인) 凶(흉) 武人爲于大君(무인위우대군)
애꾸눈이 보려고 하고 절름발이가 걸으려고 한다.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 사람을 무니 흉하다.
무인(武人)이 임금(大君)이 되도다.
象曰 眇能視(묘능시) 不足以有明也(부족이유명야)
跛能履(파능리) 不足以與行也(부족이여행야)
咥人之凶(질인지흉) 位不當也(위부당야)
武人爲于大君(무인위우대군) 志剛也(지강야)
묘능시는 밝게 보지 못함이요 파능리는 더불어 걷지 못함이요
질인지흉은 위가 부당함이요 무인위우대군은 뜻이 강함이다.
六三은 성품이 바르지 못해서 위태한 위치에 처해서
뜻만 앞서서 마치 소경이 보려하고 절름발이가 걸으려 하는 것과 같다.
재능도 없고 밝지도 못하며 중용의 덕도 없어 함께 하기 힘들다.
처한 위치가 위태로워 서두르다가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 물린다.
주역에서 六三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제후나 무인이다.
변방의 무인 六三이 자신의 뜻을 내세워 무력을 동원해 임금이 되었다.
게다가 六三은 리(履)의 유일한 음효로서 쾌락, 구설의 태(兌)의 극에 있어서 흉하다.
六三이 효변하면 건위천(乾爲天)이 된다.
하늘의 강건하고 공정함을 본받아 종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도
저녁에 다시 허물은 없는지 두려워해야만 화를 면한다.
[九四] 履虎尾(이호미) 朔朔終吉(삭삭종길)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조심조심하면 결국 길하다.
象曰 朔朔終吉(삭삭종길) 志行也(지행야)
삭삭종길은 뜻이 행해지는 것이다.
九四는 음위에 있어서 과강하지 않고
효변하면 건(乾)이 손(巽)이 되어 풍택중부(風澤中孚)가 되기 때문에,
공손하고도 진실한 믿음으로 군주를 따른다.
따라서 九四는 조심조심하면 마침내 길할 수 있다.
상전에도 조심 조심하면 결국 길한 것은 그 뜻이 행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진실한 믿음(中孚)이면 하늘도 감화시킬 수 있고 심지어 미물에게도 이롭다.
달이 보름에 가깝지만 보름이 되지 않음은,
신하가 군주에게 공손히 순종하기 때문에 군주와 대적하지 않는 것이다.
말의 짝을 잃으면 허물이 없다.
부정한 동류를 끊고 위와 함께 하면 길하다.
[九五] 夬履(쾌리) 貞厲(정려)
과감하고 단호하게 밟아나간다. 바르다 해도 위태하다.
象曰 夬履貞厲(쾌리정려) 位正當也(위정당야)
쾌리정려는 위(位)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九五는 아래에 정응도 없고 친비나 승(承), 승(乘)도 없기 때문에
신하도 없이 혼자 독단적으로 결단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리(履)의 도는 겸손함과 소박함을 숭상하고, 교만과 가득 찬 것을 경계한다.
게다가 九五는 중정(中正)하기 때문에 자신의 강명(剛明)한 덕과 힘만을 믿고서
과감하고 단호히 밟아 나아가면 비록 그것이 옳더라도 위태롭다.
상전에도 쾌리(夬履)하면 바르다 해도 위태한 것은
군주의 정당한 지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쾌리하면 어긋나게(火澤睽) 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에 힘쓰면 후회가 없어진다.
마치 종당이 살을 깊숙이 깨무는 것과 같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화합하게 되면 경사가 있고 길하다.
[上九] 視履(시리) 考祥(고상) 其旋(기선) 元吉(원길)
밟아온 것들을 살핀다.
두루 살펴서 선하면 좋은 결과로 돌아오니 크게 길하다.
象曰 元吉在上(원길재상) 大有慶也(대유경야)
크게 길함이 위에 있는 것은 경사가 크게 있음이다.
上九는 리(履)의 종극으로 그동안 자신이 밟아온 길을 회고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둔다.
결국 자신이 밟아왔던 것으로부터 화복(禍福)이 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행동의 결과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은 돌이키는 것이 이롭다.
上九가 효변하면 태위택(兌爲澤)이다.
마침에 이르고도 그칠 줄 모르고 쾌락에 연연하거나 기쁨을 구하면
그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흉하다.
11. 지천태(地天泰)
서로 만나서 소통하여 조화와 안정을 이루기에 힘쓰라
설국열차를 전복시키자 죽음이 아닌 평화가 왔다!
괘사 (卦辭)
‘태’(泰)는 크다(太), 통(通)하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이 사귀어 만물이 태어난다.
괘상은 곤상건하(坤上乾下)이다.
양(陽)인 하늘이 위에 음(陰)인 땅이 아래에 있어야 이치에 맞지만,
지천태(地天泰)는 하늘인 건(乾)이 아래에 있고 땅인 곤(坤)이 위에 있다.
상괘 곤(坤)은 땅의 성질이므로 아래로 내려오고,
하괘 건(乾)은 하늘의 성질이므로 올라가서 서로 만나게 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게 된다.
태(泰)는 봄이 시작되는 음력 정월이다.
이때는 모든 생명이 움트는 때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소통하고 안정을 이루게 된다.
마치 하늘과 땅이 사귀어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만물이 무성하게 되듯이,
막혔던 것이 통하게 되고 남녀가 사귀어 아이가 생기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소통하고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얻게 되는 길한 때이다.
태(泰)에는 작은 것(小/陰)은 가고 큰 것(大/陽)이 온다.
상괘인 곤(坤)은 음(陰)으로 유순한 소인이고,
하괘인 건(乾)은 양(陽)으로 강건한 대인이다.
따라서 속은 군자요 외면은 소인이다(外柔內剛).
군자의 도(道)는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물러난다.
효사(爻辭)
[初九] 拔茅茹(발모여) 以其彙(이기휘) 征吉(정길)
엉킨 띠 뿌리를 뽑음이다.
그 무리와 함께 나아가면 길하다.
象曰 拔茅征吉(발모정길) 志在外也(지재외야)
발모정길은 뜻이 밖에 있음이다.
하괘의 건(乾)의 세 효사들은 모두 상괘 곤(坤)의 음효들과 정응하기 때문에
위로 나아가려는 것에 뜻을 모아 함께 무리를 이루어 나아가므로 마침내 길하다.
그래서 상전에도 더불어 나아가면 길한 것은, 뜻이 밖(상괘, 위)에 있다고 했다.
소통과 안정을 이루는 태(泰)에서는 함께 나아가면 길하다고 말하지만,
불통과 정체되는 비(否)에서는 함께 올바름을 지키면 형통하다 하였다.
初九가 효변하면 지풍승(地風升)이 된다.
믿고 따라 올라가서 위와 뜻을 함께 하면 크게 길하다.
[九二] 包荒(포황) 用馮河(용빙하) 不遐遺(불하유) 朋亡(붕망) 得尙于中行(득상우중행)
거친 것을 포용하고 맨몸으로 강을 건널 만한 용기가 있고
멀리 있다고 버리지 않고 붕당을 없애면 중도로 행함에 숭상 받는다.
象曰 包荒得尙于中行(포황득상우중행) 以光大也(이광대야)
포황득상우중행은 빛나고 큼이다.
九二는 하괘의 동류인 初九와 九三을 이끌지만,
사적인 정에 치우쳐서 붕당을 짓지 않고 정응 군주 六五와 함께 중도로 행해야 한다.
상전에도 그와 같이 중도로 행하면 도(道)가 빛나고 크다고 했다.
九二는 소통과 안정을 다스리는 주체로
마땅히 거칠거나 못난 것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고,
강을 맨몸으로 건널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두루 잘 살펴 멀리 은둔한 인재나 변방에 있는 인재를 버림이 없도록
두루 등용하더라도, 사적인 치우침이 없도록 해야만 중도에 맞다.
九二가 효변하면 지화명이(地火明夷)이다.
폭군이 존위에 있어 밝음을 드러내면 상하게 된다.
비록 상하게 되더라도 심한 해를 입지는 않고 구원의 방법은 있다.
그래서 왼쪽 다리를 다친다고 했다.
하지만 구원해주는 말이 건장해야 길하다.
[九三] 无平不陂(무평불피) 无往不復(무왕불복)
艱貞无咎(간정무구) 勿恤其孚(물휼기부) 于食有福(우식유복)
평평한 것은 기울지 않음이 없고, 나아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하면 허물은 없다. 근심치 말고 미덥다. 먹는 것에 복이 있다.
象曰 无往不復(무왕불복) 天地際也(천지제야)
무왕불복은 하늘과 땅이 사귐이다.
본래 건(乾)이 위에, 곤(坤)이 아래에 있는 것이 바른 자리를 찾아 가는 것이고
음양이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고 굳게 믿으면 복이 있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하늘과 땅이 사귀는 것이라 했다.
만물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함이 상도(常道)이다.
순환하는 천리(天理)를 잘 살펴서
안일하게 여기지 않고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하면 미덥고 비록 위태해도 허물은 없다.
먹는 것에 복이 있음은 녹(祿)을 먹는 것을 말하고 하늘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九三이 효변하면 지택림(地澤臨)이 된다.
어렵게 여기지 않고 감언이설로 달콤하게 임해 보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다.
이미 근심하기 때문에 허물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六四] 翩翩(편편) 不富以其隣(불부이기린) 不戒以孚(불계이부)
서둘러 날아간다. 부유하지 않아도 이웃과 함께 한다. 경계하지 않고 믿는다.
象曰 翩翩不富(편편불부) 皆失實也(개실실야) 不戒以孚(불계이부) 中心願也(중심원야)
편편불부는 모두 실질을 잃음이요 불계이부는 중심으로 원함이다.
음효는 허(虛)해서 실질(實)을 잃은 것이기 때문에 부유하지 않다고 한 것이고,
六四가 혼자 아래 양(陽)을 구하지 않고
그 이웃인 동류(同類) 六五, 上六과 함께 무리지어 아래로 날아가려 한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서둘러서 날아가니
부유하지 않음에도 함께 날아가는 것은 모두 실질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곤(坤)의 세 음효들은 심중으로 본래 자리로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고 믿음을 얻을 수 있다.
六四가 효변하면 뇌천대장(雷天大壯)이다.
양의 세력이 왕성해지고 음의 세력이 쇠퇴한다.
그 왕성한 힘과 세력을 앞세우지 않고 굳게 바르게 하면 길하고 후회가 없다.
울타리가 터져서 걸리지 않고 큰 수레의 바퀴가 왕성하다.
[六五] 帝乙歸妹(제을귀매) 以祉(이지) 元吉(원길)
황제 제을(帝乙)이 공주를 제후에게 시집보낸다. 복을 받고 크게 길하다.
象曰 以祉元吉(이지원길) 中以行願也(중이행원야)
이지원길은 중도로써 원하는 바를 행함이다.
六五는 중용의 덕을 갖춘 유순한 군주이다.
제을귀매(帝乙歸妹)는 황제 제을이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누이동생을 변방의 제후에게 하가(下嫁)시켰던 고사이다.
비록 六五가 태(泰)의 군주 지위에 있지만
낮춰서 아래의 양강한 신하 九二에게 응하는 것을 말하며 복을 받고 크게 길하다.
六五가 효변하면 수천수(水天需)가 된다.
중정한 도를 굳게 지켜 술과 음식을 차려두고 여유롭게 기다린다. 길하다.
[上六] 城復于隍(성복우황) 勿用師(물용사) 自邑告命(자읍고명) 貞吝(정린)
성(城)이 무너져서 해자가 메워진다. 군대를 부리지 마라.
자기 영지로 돌아가 명을 내린다. 올바르게 하더라도 인색하다.
象曰 城復于隍(성복우황) 其命亂也(기명난야)
성복우황은 그 명령이 어지러워짐이다.
태(泰)의 극(極)에 이르면 불통의 비(否)가 된다.
불통은 상하의 신뢰를 잃어서 민심을 잃어서 명(命)이 서지 않기 때문에,
자칫 군대를 부리려고 하면 위험하다.
군대를 마땅히 부릴 수 없어서 자기 영지로 돌아가서 명(命)을 내리니 궁색하다.
군대를 일으키는 것도 위태롭고
때와 덕에 순응하지 못하고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도 인색하다.
이미 그 운이 다해서 불통하는 비(否)가 임박하면 군사를 부리지 않음이 이롭다.
비록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 해도 군대를 부리길 고집하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고
또 바르게 군사를 부려서 그 원하는 바를 얻어도 그런 도(道)는 인색한 것이다.
上六이 효변하면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대축의 끝에는 마침내 사방으로 흩어져서
마치 탁 트인 하늘의 대로와 같이 그 도가 널리 행해진다.
12. 천지비(天地否)
비굴한 방법으로 불통(不通)을 해소하려 하지 말고 올바름을 지켜라
불통한 세상에서 탄생한 수호지의 지혜!
『수호지』에는 신묘막측한 능력을 자랑하는 108호걸들이 등장한다.
말이 호걸이지 공식 신분은 도적이다.
그들이 애초에 도적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매우 공식적인 대우를 받길 원했다.
하지만 어디도 그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수호지』의 시대는 송나라이다.
송 이전의 시대는 당으로
당은 지방 세력의 무력 반란으로 망한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송은 건국 초부터 무인을 배제하는 문치주의를 표방한다.
세월이 갈수록 문인들의 전횡은 가속화되었고
무인은 ‘이렇게 살 수는 없어’를 외치게 된다.
주역을 읽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정한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자리가 있다.
『수호지』의 호한들이 그렇다.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문인과 무인이 대립하는 갈등, 서로는 섞일 수 없는 상황.
이것이 『수호지』가 탄생한 배경이며, 천지비괘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방이 꽉 막혀 불통인것 같은가. 그렇다면 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라!
이것이 천지비괘가 알려주는 지혜일 것이다.
괘사(卦辭)
비(否)는 ‘불통(不通)하다’, ‘아니다’라는 부정의 의미이다.
괘상은 지천태(地天泰)를 거꾸로 뒤집은 건상곤하(乾上坤下)로,
하늘인 건(乾)이 위에 땅인 곤(坤)이 밑에 있다.
양(陽)은 올라가려 하고 음(陰)은 내려가려고 한다.
태(泰)와 같이 음(陰)이 위에 양(陽)이 밑에 있으면 서로 만나서 통할 수 있지만,
음이 아래에 양이 위에 있는 비(否)는 서로 만나서 통할 수가 없다.
태(泰)는 음력 정월이고 비(否)는 음력 7월이다.
이때는 음기(陰氣)는 무성해지고 양기(陽氣)는 쇠락하게 되는 초가을이다.
비(否)는 안은 음이고 밖은 양이다.
내면은 유약한데 겉으로는 강한 척하기 때문에,
내면은 소인이고 겉으로 군자인 척한다.
소인의 도는 자라나고 군자의 도는 물러난다.
군자의 도가 막혀 시행될 수 없고 천지가 통하지 못하고
군주와 신하가 서로 통하지 못하면 소인이 득세하게 된다.
소인의 도가 자라나면 군자를 헐뜯고 질시하게 되고
군자는 해를 입게 되고 올바름을 지키기에 이롭지 못하다.
그래서 불통으로 어지러워지게 되면
군자는 자신의 덕을 드러내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서 은둔하게 된다.
효사(爻辭)
[初六] 拔茅茹(발모여) 以其彙(이기휘) 貞吉(정길) 亨(형)
엉킨 띠 뿌리를 뽑음이다.
그 무리와 함께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고 형통하다.
象曰 拔茅貞吉(발모정길) 志在君也(지재군야)
발모정길은 그 뜻이 군주에게 있음이다.
初六은 곤(坤)의 세 음효들 중에 맨 아래에 있어 악이 깊지는 않다.
불통의 때에 위의 정응 九四의 도움을 받아서
六二, 六三 동류 소인들과 함께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고 형통하다.
소통과 안정의 태(泰)에서는 함께 나아가면 길하다고 했지만,
불통과 정체의 비(否)에는 더불어 올바름을 지켜야 형통하다 했다.
태(泰)의 初九는 나아가서 소통하려 하여 뜻이 밖에 있고
비(否)의 初六은 정응 구사와 함께 군주를 보필하여 불통의 세상을 해소하려 하여
그 뜻이 군주에게 있다.
그러나 음효는 그 뜻을 굳게 지키기 어려워서 올바름을 지켜라 경계했다.
初六이 효변하면 천뢰무망(天雷无妄)이다.
무망은 올바르게 함이 이롭다.
바르지 않으면 비록 사심이 없는 행동이더라도 정도가 아니면 허망한 것이고
머지않아 재앙으로 돌아온다.
무망으로 나아가면 그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길하다.
[六二] 包承(포승) 小人吉(소인길) 大人否(대인비) 亨(형)
포용함으로 받든다.
소인은 길하고 대인은 그렇지 못해도 형통하다.
象曰 大人否亨(대인비형) 不亂群也(불란군야)
대인비형은 소인의 무리에 어지럽게 섞이지 않음이다.
‘포승’(包承)은 유순한 六二가 양강(陽剛)한 군주 九五를 포용함으로 섬김이다.
이것은 불통의 때 소인이 윗사람에게 비굴하게 아첨하며 비위를 맞춰서
자신의 불통을 해소하여 자신의 안위를 구함이다.
그러나 군자는 불통하더라도 올바름을 지켜서 소인의 무리에 어지럽게 섞이지 않는다.
이익을 구하여 나아가 포용해서 받들면 비록 원하는 바를 얻어서 길하지만
군자는 그렇지 못하다.
비록 궁색해도 그 도(道)는 형통한 것이다.
六二가 효변하면 천수송(天水訟)이다.
불통하면 서로 자신이 옳다고 믿고 시비를 가릴 수 없어서 송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중도를 지켜서 분별하여 시비를 가리면 길하지만
고집하여 송사를 끝까지 끌면 흉하다.
송사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달아나서 숨는다.
300 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에 숨어서 반성하고 겸손하게 처신해야만
재앙을 면할 수 있다.
[六三] 包羞(포수)
감싼 것이 부끄럽다.
象曰 包羞(포수) 位不當也(위부당야)
포수는 위(位)가 마땅치 못함이다.
보통 3번째 효사들은 하괘에서 상괘로 넘어가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六三은 음효로 스스로를 구제할 재능도 없고,
위(位)도 바르지 못해서 덕(德)도 부족하다.
게다가 위의 정응 上九도 비(否)의 극(極)에 있어서 불통의 마침이므로
六三을 이끌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六三은 그 행실과 덕(德)이 부끄럽고 흉하다.
바로 위의 건(乾)과 인접해 있어서
곧 소통의 때가 오기 때문에 자신의 행실이 부끄러운 것을 안다.
六三을 효변하면 천산돈(天山遯)이다.
이때는 군자가 기미를 살펴 자신의 도를 굽히지 않으려고 물러나서 은둔한다.
그러나 물러나는데 매여 있다.
질병이 있어서 위태하다.
이것은 신하와 첩을 기르는 일에나 길하다.
[九四] 有命无咎(유명무구) 疇離祉(주리지)
명이 있으면 허물이 없다. 내 짝도 복을 받는다.
象曰 有命无咎(유명무구) 志行也(지행야)
유명무구는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다.
九四는 불통의 중간을 지나서 이제 불통이 다스려지기 시작한다.
九四는 음위에 있어서 과강하지 않은 대신으로 아래 初六은 정응이다.
九四는 조급히 움직이지 않고 군주의 명(命)을 기다려서 그 뜻을 행하니
허물이 없고 짝인 정응 初六도 복을 받는다.
상전에도 初六은 그 뜻이 군주에게 있다 했고,
九四도 군주의 명이 있어 그 뜻을 행하면 허물이 없다 했다.
九四가 효변하면 풍지관(風地觀)이 된다.
군주의 명(命)을 행하게 되면 나라가 빛나는 것을 관(觀)하게 되고
다시 위아래가 소통하게 되고 왕의 손님(벼슬)이 되는 것이 이롭다.
[九五] 休否(휴비) 大人(대인) 吉(길)
其亡其亡(기망기망) 繫于苞桑(계우포상)
불통을 그치게 한다. 대인은 길하다.
망할까 거듭 염려한다. 뽕나무 등걸에 단단히 붙들어 맨다.
象曰 大人之吉(대인지길) 位正當也(위정당야)
대인지길은 위(位)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아직 불통의 시기가 끝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망할까 염려하여 거듭 두려워하니 뽕나무 등걸에 단단히 붙들어 맨다.
군자는 비록 불통이 다소 해소되어도
완전히 다스려질 때까지 방심하지 않고
신중히 거듭 살피면서 경계하기 때문에 길하다.
상전에서도 대인의 길함은 지위가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九五가 효변하면 화지진(火地晉)이 된다.
밝은 덕으로 세상을 밝히면 위아래가 붙따르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득실을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면 경사가 있고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上九] 傾否(경비) 先否(선비) 後喜(후희)
불통이 기울었다. 먼저는 불통하나 뒤에는 기쁘다.
象曰 否終則傾(비종즉경) 何可長也(하가장야)
불통이 끝나면 기운 것이니 어찌 오래가겠나?
비(否)를 뒤집으면, 태(泰)가 되듯이,
불통이 극(極)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다시 통하게 되는 기쁨이 있다.
상전에서도 이미 불통이 끝나서 기울어졌는데 어떻게 오래 가겠는가 되물었다.
그 이치를 알지 못하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무릇 소인은 그 때와 편안한 바를 알지 못해 올라서는 안 될 자리에 오르기 때문에
결국 인색하게 되고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上九가 효변하면 택지췌(澤地萃)이다.
모임과 기쁨이 극에 처하고도 홀로 쾌락에 젖어 있다.
비록 잘못을 뉘우치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누구의 탓을 하리오.
13. 천화동인(天火同人)
다름을 인정하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화합하면, 대천을 건너는 일도 이롭다
고대에서 배우는 네트워크의 윤리!
괘사(卦辭)
‘동인’(同人)이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화합을 의미한다.
괘상은 건상리하(乾上離下)이다.
건(乾)은 하늘, 머리, 노부, 말, 강건한 것을 의미하고
리(離)는 해, 밝음, 화려함, 중녀, 꿩, 학문, 감옥, 담장, 도끼, 무인, 붙따름을 뜻한다.
해가 하늘로 떠오르는 것이다.
하늘은 본래 위에 있는 것이고,
아래의 불이 위로 올라와서 하늘과 화합하는 것이 동인이다.
六二는 천화동인(天火同人)에서 유일한 음효이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 다섯 양효들이 六二를 구(求)하여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다.
동인은 겉으로 강건(乾)하지만 안으로는 밝은 덕(離)이 있다.
동인은 지혜롭고 강건하게 나아가기 때문에 대천을 건너도 이롭다.
소인은 사적인 의도로 가까운 사람들과 동인하나
군자는 사적인 감정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동인하니,
넓은 들(野)에서 동인함이 형통하다.
논어 자로편에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하나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한다.
군자는 서로 화합하나 같지 않고 소인은 서로 같아보여도 화합하지 못한다.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지만 화합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화합하지만
소인은 같아보여도 내심 같지 않기에 화합하지 못한다.
화합은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전제로 한다.
군자는 다름을 존중하여 하나로 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자신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는다.
효사(爻辭)
[初九] 同人于門(동인우문) 无咎(무구)
문에서 동인(同人)하니, 허물이 없다.
象曰 出門同人(출문동인) 又誰咎也(우수구야)
문을 나서 동인하니 또 누가 허물하리오?
문은 한 개인의 집과 사회의 경계이고, 가족이나 친족, 문파(門派)를 상징한다.
따라서 문을 나서서 동인하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떠나 공명정대하게 동인함을 뜻한다.
初九는 동인의 시작에 문을 나서서
사적인 치우침 없이 동인(同人)하게 되면 허물이 없다.
初九가 효변하면 천산돈(天山遯)으로 음의 세력이 자라난다.
물러나지만 너무 늦어서 꼬리가 밟힌다.
위태롭기 때문에 차라리 나아가지 말라.
[六二] 同人于宗(동인우종) 吝(린)
일가 종친끼리 동인한다. 인색하다.
象曰 同人于宗(동인우종) 吝道也(인도야)
동인우종은 인색한 도이다.
주역에서 중정(中正)으로 서로 응하면 최선이지만,
동인(同人)에는 공정하게 크게 동인해야 선(善)을 이루기 때문에 인색한 것이다.
六二는 동인(同人)에서 유일한 음효이기 때문에 모든 양효들과 동인해야 바르다.
六二가 정응 九五와만 친하길 바라고
사적으로 동인하는 것을 일가 종친끼리 동인(同人)한다고 했다.
비록 六二가 중정하지만 뜻을 굳게 지키지 못할까봐 경계했다.
하늘의 강건하고 공정함을 본받아(乾爲天)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밭에 잠룡이 출현했다. 자기를 이끌어줄 윗사람인 대인(구오)을 만나면 이롭다.
[九三] 伏戎于莽(복융우망) 升其高陵(승기고릉) 三歲不興(삼세불흥)
군사를 숲에 매복한다.
높은 언덕에 오른다.
3년이 되도록 일으키지 못한다.
象曰 伏戎于莽(복융우망) 敵剛也(적강야) 三歲不興(삼세불흥) 安行也(안행야)
복융우망은 적이 강함이고 삼세불흥은 어찌 일으킬 수 있겠는가?
九三은 정응이 없고 아래의 유일한 음효 六二와 친비하다.
허나 六二는 九五와 정응이다.
九三은 六二에게 욕심이 있지만 九五는 중정(中正)한 군주이다.
九三은 자신의 세(勢)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드러내어 정면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숲속에 군사를 매복시킨다.
높은 언덕에 올라서 때를 살피지만 3년이 되도록 일으키지 못한다.
상전에서도 군사를 숲속에 매복시킨 것은 적이 강하기 때문이고
3년이 지나도 일으키지 못함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九三이 효변하면 천뢰무망(天雷无妄)이다.
사심이 없는 행동이더라도 정도가 아니면
곧 허망한 망동(妄動)이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재앙으로 되돌아온다.
곧 무망(无妄)의 재앙이다.
마치 매어놓은 소를 행인이 얻는 것은 마을사람에게는 뜻밖의 재앙인 것과 같다.
[九四] 乘其墉(승기용) 弗克攻(불극공) 吉(길)
담을 넘었다. 능히 공격할 수가 없다. 길하다.
象曰 乘其墉(승기용) 義弗克也(의불극야) 其吉(기길) 則困而反則也(즉곤이반칙야)
승기용은 의리상 공격할 수 없음이고
그 길함은 곤해져서 법칙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九四도 六二에게 마음이 있어서 九五를 공격하려고 담을 넘었다.
九四는 九五와 이웃이기 때문에 담을 넘어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九四는 음위에 있어서 강유(剛柔)를 겸비했기에 과강하지 않아서
그 의리(義理)가 바르지 못함을 깨닫는다.
九三은 과강해서 공격하려는 뜻을 버리지 못했지만
九四는 의리를 살펴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니 길하다.
九四가 효변하면 풍화가인(風火家人)이다.
가인은 안의 가정의 도리가 밖으로 영향을 미치는 때다.
집안을 부유하게 해서 크게 길하다.
[九五] 同人(동인) 先號咷(선호도) 而後笑(이후소) 大師克(대사극) 相遇(상우)
동인함에 먼저는 부르짖어 울지만 뒤에는 웃게 된다.
큰 군사로 이겨야 서로 만난다.
象曰 同人之先(동인지선) 以中直也(이중직야) 大師相遇(대사상우) 言相克也(언상극야)
동인지선은 중도로 바르게만 하기 때문이고 대사상우는 결국 이기는 것이다.
九五는 六二와 정응(正應)이지만, 九三과 九四가 중간에 가로막고 있다.
九五는 본래 자신의 의리가 올바르고 중정해서
이치와 지위 모두 합당하고 우세하기에 억울해서 울부짖는다.
게다가 九五는 중정(中正)한 군주이기 때문에
의리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반드시 이기기 때문에 뒤에는 웃게 된다.
九四는 스스로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九三은 군사를 숲속에 숨겨두고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때문에 큰 군사로 이겨야만 서로 만날 수 있다.
상전에도 먼저는 너무 정도를 고집하여 주장하기 때문에 울부짖지만
결국 이겨서 만나게 된다고 했다.
九五가 효변하면 이위화(離爲火)이다.
타오르는 불이 연달아 있어서 유순한 덕이 필요하다.
흐르는 눈물이 비 오는 듯하다.
슬퍼서 탄식하니 길하다.
태연자약하지 않고 걱정하고 경계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이기 때문에 길하다.
[上九] 同人于郊(동인우교) 无悔(무회)
동인을 교외(郊)에서 한다. 뉘우침이 없다.
象曰 同人于郊(동인우교) 志未得也(지미득야)
동인우교는 뜻을 얻지 못함이다.
上九는 동인의 극(極)이자 마침에 처했다.
아래로 정응(正應)도 없고, 동인에서 유일한 음효인 六二와도 멀리 떨어져 있다.
六二를 두고 벌이는 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교외(郊)에서 동인함이다.
비록 후회는 없겠지만 어울리지 못하고 끝났다.
상전에서도 교외에서 동인함은 그 뜻을 얻지 못한 것이라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택화혁(澤火革)이다.
무릇 군자는 변혁하면 표범처럼 변하지만 소인은 우매해서 진정으로 바꾸지는 못하고
단순히 얼굴색만 바꾸고 마지못해서 따른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나아가면 흉하다.
그쳐서 머물러 안정하면 길하다.
새롭고 거대한 동인의 시대가 열린 지금,
네트워크의 윤리를 차근차근 짚어봐야 할 때다.
천화동인괘는 어울림의 지혜를 알려 준다.
그 지혜들을 요약하면,
첫번째는 모든 것을 오픈해서 투명하게 하라는 것,
두번째는 끼리끼리 동인하지 말라는 것,
세번째는 욕심을 내서 불란을 만들지 말라는 것,
네번째는 자기 위치, 자기 자리에서 원칙을 찾으라는 것,
다섯번째는 공감의 능력을 배양하라는 것,
마지막은 그 어떤 의도 없이 천지만물과 사귀라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 같은 말씀이다.
이 어울림의 지혜를 실천하다 보면
그 어떤 것과 동인해도 한 점 후회가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아, 들에 나가 바람을 맞으며 천지만물과 동인하고 싶다.
14. 화천대유(火天大有)
풍요롭고 형통한 순간에도 어렵게 여기고 조심해야 탈이 없다
내강외유의 힘을 보여주는 여군주의 괘!
괘사(卦辭)
‘대유’(大有)는 물질적으로 크게 소유하는 것이다.
六五가 다섯 양효들을 소유한 것 또한 대유이다.
괘상은 천화동인(天火同人)을 거꾸로 뒤집은 리상건하(離上乾下)이다.
리(離)는 태양, 밝음, 눈, 꿩, 학문, 지혜, 중녀, 병기, 화려함, 붙따름을 뜻하고,
건(乾)은 하늘, 노부, 머리, 말, 대인, 수레, 강건함을 뜻한다.
동인(同人)은 해가 밑에서 떠올라 위에 있던 하늘과 화합하는 것이고,
대유(大有)는 이미 태양이 중천에 떠있어 멀리까지 천하를 비춰서 풍족하다.
대유(大有)는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기 때문에 크게 형통하다.
유일한 음효 六五가 군주이고 나머지 다섯 양효들이 호응함으로 따르기 때문에
대유할 수 있고 때에 맞게 행하기 때문에 더욱 형통하다.
六五는 겉으로 보기에 유약해 보여도,
중(中)을 얻었고 밝은 덕이 있어 분별하여 잘 포용해서 다스린다.
상전에서 대유를 본받아서 악한 것은 막고 선한 일은 드날려서 천명에 따른다.
효사(爻辭)
[初九] 无交害(무교해) 匪咎(비구) 艱則无咎(간즉무구)
해악과 사귐이 없다. 허물은 아니다.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면 허물은 없다.
象曰 大有初九(대유초구) 无交害(무교해)
대유 初九는 해악과 사귐이 없다.
初九는 대유의 시작인데 정응(正應)도 친비(親比)도 없다.
사귐이 있어야 대유할 수 있지만 사귐이 없어서 해롭다.
‘무교해’(无交害)를 해로움과 사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귐이 없어서 허물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설할 수도 있다.
정응과 친비가 없어서 사귐이 없지만 初九는 정위에 있으니 허물은 아니다.
하지만 대유의 시작에서 과강해
뜻만 앞세워 해(害)를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허물을 면할 수 있다.
정이천은 初九의 지위가 낮고 아직 대유의 시초이고 응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성대하지 않으므로 교만하고 오만한 지경에 이르지 않아서
해로움과 사귐이 없다 했다.
본래 풍족한 소유가 허물인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 소유가 풍족해지면 교만해져서 스스로 허물을 자초하기 쉽다.
풍족한 소유를 가지고도 어렵게 여기면 허물을 면한다.
初九가 효변하면 화풍정(火風鼎)이 된다.
솥(鼎)은 물질을 삶아서 날것을 익은 것이 되게 하고
딱딱한 것을 부드러운 것이 되게 만들어 새로운 성질의 물질로 만든다.
솥은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새 것을 취하는 도(道)이다.
그러나 初六은 솥의 발이 엎어졌다.
다행히 전화위복으로 찌꺼기를 버리게 되어 이롭게 되었다.
첩을 얻으면 아들을 얻게 되므로 허물이 없어진다.
[九二] 大車以載(대거이재) 有攸往无咎(유유왕무구)
큰 수레에 짐을 싣는다. 나아감에 허물이 없다.
象曰 大車以載(대거이재) 積中不敗也(적중불패야)
대거이재는 가운데 실어서 무너지지 않는다.
九二는 위의 음유한 군주 六五와 정응으로 신임을 받는다.
九二는 강건하지만 음위(陰位)에 있어 과강하지 않고 중도로써 六五에게 순종한다.
따라서 풍성한 대유의 때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있고,
그것이 크고 튼튼한 수레에 짐을 가득 실은 것과 같다.
중용의 도로 가운데 잘 실어서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나아감에 허물이 없다.
九二가 효변하면 리(離)가 되기 때문에
밝은 덕(지혜)이 있지만 자칫 중도로 하지 않으면,
불이 연이어 있는 이위화(離爲火)처럼 위태롭게 된다.
그러나 황색에 걸려있기 때문에 즉, 중도로써 현명하게 행하므로 크게 길하다.
[九三] 公用亨于天子(공용형우천자) 小人弗克(소인불극)
공이 천자께서 형통하도록 한다.
소인은 능히 할 수 없다.
象曰 公用亨于天子 (공용형우천자)小人害也(소인해야)
공용형우천자는 소인들에게는 해롭기 때문이다.
九三은 하괘 건(乾)의 극(極)에 있다.
九四와 上九를 도성의 신하라면, 九三은 도성 밖의 변방의 제후(諸侯)이다.
공(公)은 제후를 말한다.
제후들은 천자에게 ‘향헌’(享獻) 즉, 일정한 공물을 바쳤다.
이것은 자신의 소유를 천자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인은 도리보다는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에
천자를 형통하게 하기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쉽다.
소인은 윗사람을 받드는 도리를 모르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기 때문에
대유해도 소인의 해악만 늘어날 뿐이다.
따라서 소인은 능히 천자를 형통하게 할 수 없고 해롭다.
九三이 효변하면 화택규(火澤睽)이다.
비록 서로 뜻이 어긋나고 헤어져서 흉하지만 작은 일에는 길하다.
이는 기쁨으로 밝음에 붙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六三은 마치 뒤에서는 수레를 잡아당기는데
앞에서는 소를 가로막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상해를 당함이 심해서 머리카락을 잘리고 코를 베인다.
비록 시작은 없으나 마침은 있음은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도리이기 때문이다.
[九四] 匪其彭(비기방) 无咎(무구)
과하게 성대하지만 않으면 허물은 없다.
象曰 匪其彭无咎(비기방무구) 明辨晢也(명변제야)
비기방무구는 밝게 분별하는 지혜이다.
九四는 아래에 정응은 없고 六五는 친비이다.
九四는 대유(大有)의 때에 대신의 지위에 있지만 위(位)가 바르지 못해서
군주와의 친분과 지위를 이용해서 과하게 성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왕의 대신이 지나치게 성대하게 되면 허물이 된다.
다행히 九四는 음위(陰位)에 있어서 과하지 않고
상괘 리(離)의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서 스스로 허물을 깨달을 수 있다.
九四가 효변하면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대축은 크게 쌓은 뒤에 세상에 나아가 크게 베풀어 세상의 어려움을 구제해야 길하다.
따라서 어렵게 여기고 불선이 자라기 이전에 미리 다스리면 기쁨이 있고 크게 길하다.
마치 송아지의 뿔에 미리 횡목을 덧대니 크게 길한 것과 같다.
[六五] 厥孚(궐부) 交如(교여) 威如(위여) 吉(길)
진심으로 서로 사귀어도 위엄이 있어야 길하다.
象曰 厥孚交如(궐부교여) 信以發志也(신이발지야)
威如之吉(위여지길) 易而无備也(이이무비야)
궐부교여는 신뢰로써 뜻을 발함이고 위여지길은 안이해서 대비하지 않음이다.
음유한 군주 六五는 밝은 덕과 유함으로만 다섯 양효(陽爻)들을 거느리면,
자칫 안이해져서 어렵게 여기고 대비해서 처신함이 부족해질 수 있다.
그래서 중도를 지키고 믿음을 두어 신하들을 가까이 해도
반드시 위엄(威嚴)을 갖춰야만 길하다 한 것이다.
믿음을 두어 진심으로 사귀는 것이 곧 신뢰로써 뜻을 발하는 것이다.
六五가 효변하면 건위천(乾爲天)이 된다.
비룡(飛龍)이 하늘로 승천해서 조화를 부린다.
아래의 덕 있고 재능 있는 인재들을 두루 등용하면 길하고 이롭다.
[上九] 自天祐之(자천우지) 吉无不利(길무불리)
하늘로부터 돕는다.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다.
象曰 大有上吉(대유상길) 自天祐也(자천우야)
대유상길은 하늘로부터 돕는 것이다.
上九는 대유(大有)와 리(離)의 극(極)에 있기 때문에 곧 변해서 지위가 없다.
上九는 밝은 리(離)와 풍성한 대유(大有)의 극(極)에 있지만 음위(陰位)에 있어서
겸손하게 천리를 따를 수가 있고 그래서 하늘도 돕는다.
上九를 제외하면 모두 양강(陽剛)을 올라탔지만
上九만 유일하게 음유(陰柔)를 올라탔으므로 상구는 거처하기가 편하다.
계사전에도 하늘이 돕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기 때문이고
사람이 돕는 것은 신의(信)를 지킴 때문이라 했다.
신의를 지키고 천리를 좇아서 아래 현인을 숭상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도두니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上九가 효변하면 뇌천대장(雷天大壯)이 된다.
그러나 上六은 숫양이 울타리를 받아서 그 뿔이 걸려서 진퇴양난이다.
이로움이 없으니 어렵게 여기고 분수를 지켜서 삼가면
그 허물이 오래 가지는 않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길하게 된다.
15. 지산겸(地山謙)
변함없이 겸손하게 행하면 어떤 흉이나 허물도 면할 수 있다
주역에서 배우는 다섯가지 겸손의 지혜!
괘사(卦辭)
‘겸’(謙)은 겸손함, 비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괘상은 곤상간하(坤上艮下)이다.
곤(坤)은 땅, 소, 암말, 노모, 온순함을 뜻하고
간(艮)은 산, 개, 귀신, 제사, 소남, 착실함, 그침을 뜻한다.
높은 산이 자신을 낮추어 땅 밑에 있는 것이 겸손이다.
괘상으로 보면, 유일한 양효인 九三이 다섯 음효들을 통솔하지만 하괘에 머물러 있다.
소임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공로(功)와 수고를 자랑하지 않는다.
겸손(謙)은 자신의 능력과 덕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소인은 욕심 때문에 공이 있게 되면 그 덕과 수고를 자랑하기 때문에
서로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
겸손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굳게 지킬 수 없어서 마침이 있기 힘들다.
그러나 군자는 덕과 공로가 있더라도 남의 인정과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다투지 않고 물러나서 항상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에 마침내 마침이 있는 것이고,
겸(謙)이 형통한 이유이다.
화천대유(火天大有)와 지산겸(地山謙)의 효사에는 흉하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겸손은 높아도 빛나고 낮아도 밟고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군자의 마침이다.
군자가 겸을 살펴서 많은 것에서 덜어서 적은 것에 더하여 주고,
재물을 저울질해서 공평하게 베푼다.
효사(爻辭)
[初六] 謙謙君子(겸겸군자) 用涉大川(용섭대천) 吉(길)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다.
대천을 건넘도 가능하고 길하다.
象曰 謙謙君子(겸겸군자) 卑以自牧也(비이자목야)
겸겸군자는 낮춤으로써 스스로를 기른다.
初六은 겸(謙)의 시작이다.
初六는 겸손한 군자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어서 겸손하고도 겸손하다.
이와 같이 자기를 낮춰서 수신(修身)함으로 자기를 기르면
비록 대천을 건너는 것 같은 위험한 일에도 해(害)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初六은 양효도 아니고 위로 정응도 없기 때문에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고 말하지 않고 용섭대천 길(用涉大川 吉)이라고 했다.
비록 대천을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에도 해(害)를 입지 않고 길하다.
初六이 효변하면 지화명이(地火明夷)가 된다.
폭군이 존위에 있어서 자신의 밝음을 드러내면 상하게 된다.
그 해(害)를 피해서 날개를 늘어뜨리고 달아난다.
3일을 먹지도 않고 피해서 날아가니 주인의 말이 있다.
[六二] 鳴謙(명겸) 貞吉(정길) 겸손을 떨친다.
굳게 바르게 하면 길하다.
象曰 鳴謙貞吉(명겸정길) 中心得也(중심득야)
명겸정길은 중심으로 얻었기 때문이다.
六二는 유순하고 성품이 바르고 중용의 덕이 있어 겸손(謙遜)이 두루 떨친다.
겸손은 쌓이고 쌓여서 심중에서 우러나서
저절로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르고 길하다.
하지만 六二가 음효이기 때문에 굳게 올바름을 지켜기 힘들어서
굳게 바르게 하면 길하다고 경계했다.
六二가 효변하면 지풍승(地風升)이 된다.
나무가 땅 밑에서 자라나서 시기에 알맞게 위로 올라가는 때이다.
진심을 다하면 간소한 제사라도 이롭고 허물이 없다.
소박하지만 진심을 다하면 기쁨이 있다.
[九三] 勞謙君子(노겸군자) 有終吉(유종길)
공로가 있어도 겸손한 군자이다. 마침은 있으니 길하다.
象曰 勞謙君子(노겸군자) 萬民服也(만민복야)
노겸군자는 만민이 승복한다.
九三은 겸(謙)에서의 유일한 양효이자 주효이다.
九三은 다섯 음효들을 위해서 헌신하지만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군자이기 때문에
모든 음효들이 승복한다.
九三은 다른 음효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음에도
위로 유약한 군주 六五를 받들면서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아서
더욱 더 음효들이 따른다.
시작은 없어도 마침은 있다고 함은 비록 그 공로(功)는 군주에게로 돌아가겠지만
겸손하게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어서 마침은 있다.
九三은 처한 자리가 위태롭고 하괘의 윗자리에 있고 정위에 있어서 과강하기 때문에
겸손히 노력해야만 한다.
구삼이 효변하면 곤위지(坤爲地)이다.
六三은 안으로 빛남을 머금고 있어 올바름을 지킬 수 있다.
혹여 왕의 일을 하더라도 이루는 바는 없겠지만 마침은 있다.
공을 탐하거나 첫머리가 되려 하지 않는 것은 그 지혜가 빛나고 크기 때문이다.
[六四] 无不利(무불리) 撝謙(휘겸)
겸손을 두루 베푸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
象曰 无不利撝謙(무불리휘겸) 不違則也(불위칙야)
무불리휘겸은 법칙에 어긋나지 않음이다.
六四는 이르는 곳마다 두루 겸손을 베푼다.
그것을 두고서 손을 휘젓는 ‘휘겸’(撝謙)이라고 했다.
六四는 양강한 九三을 올라타고
위로는 유순한 군주를 보필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
다행히 六四는 위(位)가 바르니 유순하고 겸손하다.
또한 九三은 공로가 있어도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 군자로,
친비하기 때문에 위아래 두루 겸손을 베풀 수가 있고 이롭지 않는 것이 없다.
노겸군자인 九三이 그 공로를 六四에게 돌리기 때문에
六四가 손을 휘저으면서 사양한다고도 본다.
六四가 효변하면 뇌산소과(雷山小過)이다.
음이 자라서 평소보다 지나친 것으로
가끔 다소 과하게 해서 바르게 해야 할 때가 있다.
과하지 않아서 허물이 없고 만나게 된다.
가면 위태하므로 반드시 경계하라.
오래 올바름을 고집하지 말라.
자 손을 쫙 펴서 다섯 손가락을 서로 마주쳐보자.
만약 다섯 손가락이 모두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고무인간이거나 외계인이다!
보통 아니 거의 모두는 오직 엄지손가락만이 다른 손가락을 마주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손가락은 뻣뻣해서 다른 손가락과 마주할 수가 없다.
이처럼 엄지손가락은 손의 기능의 40%를 차지할 만큼 주된 위치에서
나머지 네 손가락을 돕는다.
덕분에 우리는 자유자재로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육사의 휘겸이란 엄지손가락의 막중한 역할과 유연성을 착안해서 만든 것이다.
『주역』에서는 육사를 육오 임금을 모시는 신하의 자리로 보는데
엄지손가락을 닮은 출중한 능력과 겸손함을 겸비하고 있다.
즉, 육사는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는 현명한 신하다.
[六五] 不富以其隣(불부이기린) 利用侵伐(이용침벌) 无不利(무불리)
부유함으로 그 이웃과 함께 하지 않는다. 정벌함이 이롭다. 이롭지 않음이 없다.
象曰 利用侵伐(이용침벌) 征不服也(정불복야)
이용침벌은 불복하는 자를 다스림이다.
六五는 유순한 겸(謙)의 군주이다.
부유함으로 그 이웃과 함께 하지 아니함은 이해득실을 넘어선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六五는 군주의 지위에 있음에도 유순하고 겸손하므로
천하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귀의한다.
군주는 겸손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로는 불복하는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력도 필요하다.
위엄과 겸손함이 조화를 이루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
육오는 화천대유에서 곳간 가득 부를 채우자 그것을 백성들과 나누는 겸손을 행한다.
부드러운 음효 군주답게 주위 사람들과 연대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겸손하고 무조건 퍼주는 것은 아니다.
육오는 그것이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가짜겸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짜겸손이 자신은 물론 백성들까지 궁지로 몰아넣을 것도.
그래서 육오에는 ‘겸 시리즈’가 없다.
군주는 마냥 겸손하기만 해서는 안 될 자리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정치를 하는데 자신을 따르지 않는 그른 무리가 있다면
가차 없이 정벌하여 바로잡는다.
이것이 바로 군주의 자리에 위치한 음효.
강(剛)과 유(柔)를 동시에 겸비한 육오의 모습이다.
六五가 효변하면 주역의 4대 흉괘인 수산건(水山蹇)이 된다.
그러나 중정한 九五가 몹시도 험난하니 벗들이 와서 도와준다.
[上六] 鳴謙(명겸) 利用行師(이용행사) 征邑國(정읍국)
겸손을 떨친다. 군사를 부리면 이롭다. 읍국을 정벌한다.
象曰 鳴謙(명겸) 志未得也(지미득야) 可用行師(가용행사) 征邑國也(정읍국야)
명겸은 뜻을 얻지 못함이고 가용행사는 읍국을 치는 것이 가하다.
上六은 겸(謙)과 곤(坤)의 극(極)에 있어서 겸손함과 유순함이 지나치다.
정응인 九三에게 가고 싶지만 六四와 六五에게 가로막힌다.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부려서 읍국을 정벌한다.
上六의 鳴謙(명겸)은 남들이 자신의 겸손을 알아주지 않아서 원망하며 울고 있다.
六二는 중용의 덕이 있어서 겸손이 베어 나오기 때문에
굳이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지만 천지에 명성이 울려 퍼진다.
上六은 부중(不中)해 지나쳐서 그 뜻을 얻지 못하고 군사를 부리게 된다.
읍국(邑國)은 한 나라 안의 영지를 말하기에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는 의미도 있다.
사실 군사를 써서 읍국을 치라는 말은 고도의 비유다.
여기서 읍국이란 내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는 욕심과 인정욕망을 말한다.
즉 마음을 잘 수양해서 내 마음속에 삿된 망상을 쳐부수라는 말이다
上六이 효변하면 간위산(艮爲山)이 된다.
그쳐야 할 때 그치는 것은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거나 욕심 때문이다.
上九는 그 마침에 있음에도 돈독하게 그치니 길하다.
16. 뇌지예(雷地豫)
즐거움에 빠져서 탐욕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연스러우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뇌지예괘의 이전 괘들은 화천대유괘와 지산겸괘였다.
대유하면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고,
겸괘 다음에 예괘를 놓은 것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겸손하면 즐겁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대유하면서도 겸손하기 때문에 대유한 것이 계속 유지되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옛날에 성인이 음악을 짓는데
땅에서 우레가 나와 ‘우르릉’하고 소리 내는 것을 듣고 음악을 지었다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 즐거워하니 뇌지를 예괘라고 한 것이다.
장자는 자연스럽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에서 노닐 듯이
서로의 존재를 잊고 지낼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노자는 최상의 덕을 가진 왕은 아래 백성들이 왕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평소에는 왕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할 수 없듯이 좋은 정치란
백성들이 왕의 통치를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서도 이러할진대 예괘에서 즐겁다는 것을 지금 식으로 잘못 해석하여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기를 쓰면서 춤추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음악이나 춤도 순하게(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또한 예괘에서 음악을 짓고 덕을 숭상한다는 것은[作樂崇德]
문화를 창조한다는 뜻이 있다.
음악을 짓는 것이 왜 문화를 만드는 것과 연관되어 있을까?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던 음악을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수많은 악기들이 빚어내는 음률이 제례를 더욱 장엄하게 해준다.
이 종묘제례악의 작곡가는 놀랍게도 조선 최대의 성군 세종이다.
그는 이 종묘제례악을 단 하룻밤 만에 작곡했다고 한다.
세종 그는 왜 음악에 매료되었던 것이며, 그가 음악으로 추구한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세종은 음악을 통해 새나라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 하였다.
중국에서도 나라의 기틀을 세울 때 황종음을 새로이 잡는 것처럼
세종도 조선의 소리에 맞는 황종음을 다시 정했다.
황종음이란 현재 서양 음악의 도처럼 동양 음악에서 기준점을 의미한다.
사실 통치에서 음악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 이는 공자였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예악이 무너진 탓이라 여겼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절 같은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악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종 역시 공자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통해 조선을 유교적 이상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치세지음(治世之音).
즉 소리가 편안하고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음악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통치 이념을 수립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고
세종은 음악을 통해서 예의 경지까지 끌어 올리는 예치를 추구했다.
이와 같이 예괘에서 음악이 나온 것은
순동(順動:자연스러운) 정치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괘사(卦辭)
‘예’(豫)는 기쁘다, 즐긴다는 의미로, 편안히 놀며 즐기는 것이다.
괘상은 진상곤하(震上坤下)이다.
진(震)은 우레, 용, 도로, 장남, 나무, 계승함, 움직임, 격분하여 동(動)하는 것이고,
곤(坤)은 땅, 소, 암말, 노모, 황색, 중앙, 온순함, 유순(順)한 것이다.
땅속에 있던 양(陽)이 때가 되어서 지상으로 나올 때 우렁찬 소리를 내는 것이다.
마치 음양(陰陽)이 서로 통해서 기뻐하는 것 같아서 ‘예’(豫)이다.
우레가 지상으로 울려 퍼지고 천둥이 치고 땅이 흔들리는 것이다.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는 진동하는 덕이 있어서 유순하게 진동함으로 나아간다.
‘예’(豫)는 제후를 세우고 군사를 일으킴에 이롭다.
제후를 세우는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려 함이요,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따를 때에 군사를 일으켜야 이롭다.
민심과 천리에 순응해서 나아가면 더욱 이롭다.
예(豫)의 주효이면서 유일한 양효인 九四가 호응을 얻어 그 뜻을 행하되,
유순히 나아간다.
九四는 진동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상하의 음(陰)들이 더욱 응해서 쫓는다.
예(豫)의 의리(義理)는 그 이로움이 제후를 세우고 군사를 일으킴에 있지만
필히 순리를 좇아야 이롭다.
효사(爻辭)
[初六] 鳴豫凶(명예흉)
쾌락을 울려대니 흉하다.
象曰 初六鳴豫(초육명예) 志窮凶也(지궁흉야)
명예는 뜻이 궁하고 흉하다.
初六은 가장 아래 미천한 지위에 있지만
기쁨의 원천 九四와 정응이기 때문에 총애를 받는다.
위(位)가 바르지 못해서 천박한 소인이,
九四의 권세에 의지해서 기쁨에 넘쳐서 울려댄다.
그 경박함 때문에 타인의 질시를 받게 되므로 흉하다.
初六이 효변하면 진위뢰(震爲雷)이다.
우레가 울릴 때 놀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해서 수신하면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뒤에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六二] 介于石(개우석) 不終日(부종일) 貞吉(정길)
절개가 돌과 같다. 하루도 가지 않는다. 올바르고 길하다.
象曰 不終日貞吉(부종일정길) 以中正也(이중정야)
부종일정길은 중정하기 때문이다.
六二는 중정(中正)하지만 위로 六五는 정응(正應)이 아니고 친비(親比)도 없다.
六二는 일의 기미를 살펴서 올바름을 굳게 지킨다.
그쳐야 하면 하루가 마치기도 전에 그칠 줄 알고,
나아가야 하면 하루가 마치기도 전에 실천에 옮길 줄 안다.
중정(中正)한 도를 잘 지키는 것을 절개가 돌과 같다고 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행동이 지나쳐도 그치지 못하면,
윗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함이 지나쳐서 아첨이 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화함이 지나쳐서 업신여김을 당한다.
‘예’(豫)란 쾌락을 뜻한다.
쾌락은 자칫 사람을 그 속에 빠뜨려서 그칠 수 없도록 만들고
탐욕 속에 빠지게 해서 실도(失道)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豫)의 다른 효사에는 올바름을 얻지 못한 그 흉함을 경계하였다.
다른 음효들이 쾌락에 빠져 있을 때 六二 홀로 절개를 지켜서 쾌락에 빠지지 않는 것은
九四와 관계가 없고 중정을 얻었기 때문이다.
六二가 효변하면 뇌수해(雷水解)가 된다.
위로 유순한 군주의 신임을 받들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사 소인을 소탕하기 때문에,
밭에서 3마리 여우를 잡아서 황색 화살을 얻었다.
올바름을 굳게 지켜서 길하다.
[六三] 盱豫悔(우예회) 遲有悔(지유회)
우러러 보고 즐거워하니 후회가 있다. 우물쭈물하니 후회가 있다.
象曰 盱豫有悔(우예유회) 位不當也(위부당야)
우예회는 위가 부당함이다.
六三은 유순히 따르는 하괘 곤(坤)의 극에 처했고 양위에 있어서
바로 위의 九四를 따르고 싶다.
六三은 음유가 양위(陽位)에 있어서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음유해서
九四를 우러러 보고 기뻐한다.
허나 九四는 아래에 정응이 있고 六三의 성품이 바르지 못해서
六三이 구해도 九四가 취하지 않으니 후회가 있다.
그래도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우물쭈물하니 후회만 남는다.
六三이 효변하면 뇌산소과(雷山小過)이다.
소(小)가 무성해서 평소보다 지나치다.
바르게 하기 위해서 다소 과하게 해야 이로운 때와 이치가 있다.
그렇지만 다소 지나칠 정도로 방비하지 않으면
쫓아와서 혹 해를 입히기 때문에 흉하게 된다.
[九四] 由豫(유예) 大有得(대유득) 勿疑朋盍簪(물의붕합잠)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크게 얻음이 있다. 의심하지 않으면 벗들이 모인다.
象曰 由豫大有得(유예대유득) 志大行也(지대행야)
유예대유득은 뜻이 크게 행해짐이다.
九四는 상괘의 주효요 대신의 지위에 있다.
九四는 양강하지만 음위에 있어서 순종할 수 있다.
유일한 양효인 九四는 위(位)가 바르지 못한데 위로는 음유한 군주를 모시기 때문에,
자칫 의심과 질시를 받을 수 있다.
아래에 다른 재능있는 양효도 없이 홀로 음유한 군주의 신임을 받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한다.
믿음을 두어 의심치 않고 지성을 다해 공경하게 되면
의심과 우려를 불식시키고 벗들이 모이게 된다.
九四는 상괘에서 진동(震動)의 주체요, 예(豫)의 주체이다.
九四가 효변하면 곤위지(坤爲地)이다.
마치 주머니를 조여 매듯이 언행을 삼가고 매사를 조심해야 허물을 면할 수 있다.
상전에도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라 했다.
언행을 삼가고 매사를 신중히 해야 화를 면할 수 있지만 명예를 얻지는 못한다.
[六五] 貞疾(정질) 恒不死(항불사)
바르게 하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죽지는 않는다.
象曰 六五貞疾(육오정질) 乘剛也(승강야) 恒不死(항불사) 中未亡也(중미망야)
정질은 강을 올라탐이요 항불사는 중(中)은 망하지는 않음이다.
‘정질’(貞疾) 즉, 바르게 함에 질병이 있다고 함은,
유약한 六五가 아래에 강한 九四를 올라타고 있기 때문이다.
유약한 음효인 六五가 아래에 예(豫)의 주효인 九四를 올라타고 있다.
모든 민심과 권세가 九四에게 쏠려 있으니 군주의 소임을 다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군주로서 바르게 함에는 질병이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중용의 덕이 있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어서 망하지는 않는다 했다.
六五가 효변하면 택지췌(澤地萃)이다.
군위에 있어서 허물은 없다.
믿고 따르지 않으면 스스로 반성하고
덕을 쌓으면서 오래 바르게 하면 후회가 없어진다.
[上六] 冥豫(명예) 成有渝无咎(성유유무구)
즐거움에 빠져 눈이 어두워졌다.
변함이 있으면 허물은 없다.
象曰 冥豫在上(명예재상) 何可長也(하가장야)
어두운 채로 위에 있으니 어찌 오래 가겠는가?
上六은 진(震)과 예(豫)의 극(極)에 처했다.
음유가 높은 자리에 처해 있으면서 쾌락에 젖어 있지만
끝마침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한다.
서둘러서 개과천선하여 마음을 고쳐먹어야 허물을 면할 수 있다.
상전에도 어두운 채로 윗자리에 있으니 어찌 오래 갈 수가 있겠는가라고 경계했다.
上六이 효변하면 화지진(火地晉)이다.
나아감이 그 뿔과 같아서 조급하게 나아가면 위태롭게 된다.
자기 자신을 수신하여 개과천선하면 허물은 면하겠지만 올바름에는 인색하다.
17. 택뢰수(澤雷隨)
때에 알맞게 변통해서 나를 버리고 따르면, 남도 나를 따른다
서로를 믿고 따르라!
원래는 하늘괘와 땅괘가 평행선을 달리는 천지비괘였다.
그러나 이 괘에서는 하늘과 땅이 서로 사귀지 못해서 절대 만물이 나오지 못한다.
서로 통하지 못하니까 정치도 안 되고 불안하기만 한 상이다.
그래서 서로 움직인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묘하다.
서로 하나의 효가 상대에게로 날아간다.
천지비의 맨 위에 있는 양은 맨 밑으로 내려오고, 맨 밑에 있는 음은 맨 위로 올라간다.
바로 이것이 ‘강래이하유’이다.
하늘, 땅 같이 완전한 것들이 같이 있으면 더 멋진 일이 발생할 것 같은데,
결코 그러지 못하다.
오히려 서로 섞이질 못하니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뭔가 만들려면 서로 고개를 숙여 따라야 한다.
그럴 때에야 만물이 생긴다.
서로 섞여야 하는 것이다
괘사(卦辭)
수(隨)는 타인이나 올바른 도리나 때(時)를 따르는 것을 뜻한다.
괘상은 태상진하(兌上震下)이다.
태(兌)는 연못, 입, 혀, 기쁨, 양, 구설, 소녀, 구멍(穴), 서쪽을 뜻하고,
진(震)은 우레, 용, 장수, 제후, 동쪽, 장남, 계승, 발, 격분하여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수(隨)는 아래 장남이 위의 소녀를 뒤쫓음이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서 서쪽으로 지듯이, 震(동쪽)에서 兌(서쪽)로 나아간다.
수(隨)는 그 따름에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 크게 형통하다.
천하 만물이 그 때에 알맞게 변하듯이 수(隨)의 때에는 시의(時義)가 중요하다.
때와 그 상황에 맞게 변통하면 고정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때에 맞게 변통해서 따르지 않으면
그 때를 잃는 것과 다름없고 흉한 것이다.
천지비(天地否)에서 건(乾)의 上九와 곤(坤)의 初六이 자리를 바꾸게 되면
택뢰수(澤雷隨)가 된다.
건(乾)이 위에 곤(坤)이 아래에 있으면 음양이 서로 만날 수 없다.
위의 上九가 아래의 初六에게 겸손히 낮추면
서로 만나게 되고 음효가 반갑게 맞이한다.
귀한 강(陽)이 아래로 와서 천한 유(陰)에게 낮춰서 구함을
‘강래이하유’(剛來而下柔)라고 한다.
귀한 것이 천한 것을 따르듯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면 남도 자기를 따르게 된다.
효사(爻辭)
[初九] 官有渝(관유유) 貞吉(정길) 出門交有功(출문교유공)
주관하던 것에 변통이 있다. 바르면 길하다.
문을 나서서 사귀면 공이 있다.
象曰 官有?(관유유) 從正吉也(종정길야) 出門交有功(출문교유공) 不失也(불실야)
관유유는 올바름을 좇아서 길함이고
출문교유공은 실도하지 않음이다.
천지비에서 건(乾)의 上九가 곤(坤)의 初六과 서로 자리를 바꾸면
택뢰수(澤雷隨)의 初九가 되기 때문에, 주관하던 것에 변통이 있다고 했다.
初九는 위로 정응은 없지만 위의 六二는 친비이다.
初九는 시작하는 지위로 하괘 진(震)의 주효이다.
무언가를 따르는 것은
기존에 주관하던(따르고 있었던) 것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도를 좇아서 따르면 길하고 그렇지 않으면 흉하다.
문을 나서서 사귀면 공(功)이 있다고 한 것은,
사적인 정(情)에 매이지 않고 정도를 좇아서 바르게 하면 공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初九는 정응이 없어서 하괘의 六二와 六三에게 뜻이 있지만,
사적인 감정에 매이지 않고 문을 나서 동덕(同德)으로 九四와 함께 九五를 섬기면,
공을 이룬다.
初九가 효변하면 택지췌(澤地萃)이다.
비록 믿음을 두어도 끝까지 지키지 못하면 망령되게 모인다.
부르짖어 구하면 비웃음을 사겠지만 나아가도 허물이 없다. 근심하지 말라.
[六二] 係小子(계소자) 失丈夫(실장부)
소자에게 매이면, 장부를 잃는다.
象曰 係小子(계소자) 不兼與也(불겸여야)
계소자는 둘을 겸해서 함께 할 수 없음이다.
六二는 九五와 정응이고 아래 初九도 친비이다.
九五가 멀다고 바로 밑의 친비 初九(소자)에게 매이면, 정응 九五(장부)를 잃게 된다.
初九가 진(震)의 주효이긴 하지만, 군주인 九五를 따르는 것이 올바르다.
六二는 중정(中正)하므로 실수하지 않지만,
강(陽)을 올라탄 유(陰)는 위험의 요소가 있다.
六二가 효변하면 태위택(兌爲澤)이 된다.
비록 기쁨의 도는 형통하지만 반드시 정도를 따라야만 이롭다.
소인을 가까이 하지만 중용의 덕이 있어서 성실한 본심이 흔들리지 않고
미더움으로 기쁨을 구하기 때문에 길하고 후회할 일이 없어진다.
[六三] 係丈夫(계장부) 失小子(실소자) 隨(수) 有求得(유구득) 利居貞(이거정)
장부에게 매이면 소자를 잃는다.
따름에 구함이 있겠지만, 올바르게 머무르는 것이 이롭다.
象曰 係丈夫(계장부) 志舍下也(지사하야)
계장부는 뜻이 아래를 버리는 것이다.
六三은 위에 정응이 없고 九四는 친비이다.
六三은 진(震)의 극(極)에 처했다.
위의 장부(九四)를 따름이 곧 장부에게 매임이고 그러면 소자(初九)를 잃게 된다.
六三이 九四를 따르면 九四도 정응이 없고 六三이 윗사람을 따름이니
그 구하는 바가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나 六三은 위(位)가 바르지 못하고 위태로운 위치에 있어서
이익을 구하는 소인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그래서 굳게 올바름을 지켜서 머무르면 그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六三이 효변하면 택화혁(澤火革)이 된다.
변혁은 형통하나 시일이 지나야 비로소 믿는데 조급히 나아가면 흉하다.
바르게 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변혁의 뜻을 여러 번 밝힌 뒤에 겨우 신임을 얻게 된다.
[九四] 隨有獲(수유획) 貞凶(정흉) 有孚在道(유부재도) 以明何咎(이명하구)
따름에 얻음이 있으면, 바르다 해도 흉하다.
진심으로 정도 안에서 명철하게 하면 어찌 허물인가?
象曰 隨有獲(수유획) 其義凶也(기의흉야) 有孚在道(유부재도) 明功也(명공야)
수유획은 그 의리가 흉함이고 유부재도는 명철한 공이다.
九四는 정응이 없고 六三은 친비이다.
수(隨)의 때에는 윗사람을 따라야 하는데
아래에서 얻는 바를 추구함은 그 의리상 바르지 않다.
만약 무엇을 얻을 욕심에 남을 따르면 바르다 해도 의리상 흉하다.
九四는 대신의 지위에 있지만 성품이 바르지 못해서
진심으로 도리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그 얻는 바에 욕심내지 않고,
신하의 도리를 좇아서 군주에 대한 신의를 지켜야 공을 성취한다.
이것이 명철한 공을 이루는 것이다.
九四가 효변하면 수뢰둔(水雷屯)이다.
말을 탔다가 내린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혼인을 구하러 가면 현명한 처사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
[九五] 孚于嘉(부우가) 吉(길)
아름다움에 성실한 믿음이다. 길하다.
象曰 孚于嘉吉(부우가길) 位正中也(위정중야)
부우가길은 위가 정중하기 때문이다.
九五는 중정(中正)한 군주로 아래 중정한 六二와 정응이다.
九五는 정응 六二와 같은 중정한 덕으로써
서로 성실한 믿음으로 서로를 따르니 아름답다.
상전에도 아름다움에 성신으로 하니 길함은, 중정한 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오가 효변하면 진위뢰(震爲雷)이다.
우레가 가고 오기 때문에 위태롭다.
중용(中庸)의 덕을 잃지 않으면 위태로워도 크게 잃지 않지만
잘 헤아려서 망침이 없도록 해야 한다.
[上六] 拘係之(구계지) 乃從維之(내종유지) 王用亨于西山(왕용형우서산)
붙들어 맨다. 쫓고도 동여맨 것과 같다. 왕이 서산에서 형통하였다.
象曰 拘係之(구계지) 上窮也(상궁야)
구계지는 위에서 궁극에 이른 것이다.
上六은 수(隨)의 극이자 마침이지만 유순하고 성품이 바르다.
수(隨)의 따름이 지극한 것을 붙들어 매고도 동여맨 것 같다고 말했다.
고사에 선왕이 오랑캐를 피해서 기산(岐山) 즉 서산(西山)으로 달아나야만 했을 때,
모든 백성들이 그와 붙들어 매어 놓은 것처럼 쫓아서 따라왔었던 고사를 비유했다.
上六이 효변하면 천뢰무망(天雷无妄)이 된다.
무망이 지극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쳐야 하는데
천도가 다하여 변하는 때 나아가면 망동하는 것이고 재앙이 있어 이로움이 없다.
택뢰수는 공동체가 바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서로 섞이는 원리를 말한다.
세상이 바뀌면 때를 따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초구).
그러나 소란스러울 때 바르지 못한 사람을 따를 위험을 경계한다(육이, 육삼).
물론 내게 힘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힘이 있더라도
아래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서 옳은 방법을 따라야 한다(구사).
심지어 내가 최고결정권자가 되더라도 부하직원들을 따라야 한다(구오).
공동체는 따름으로 이루어지고 움직여진다
18. 산풍고(山風蠱)
너무 엄하거나, 너무 바른 것만 고집하거나, 너무 너그럽게 하지는 말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과보를 바라지 말라!
초록이 우거진 산에 바람을 타고 날아온 벌레들이
나뭇잎을 갉아먹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괘상과 괘의 의미가 쉽게 이해갈 것이다.
효의 위치도 산풍고괘를 설명하고 있는데
맨 위의 상구(양)가 아래의 초육(음)을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항상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핍박하지 않는가.
한자를 파자해서보면 고(蠱)자는 ‘좀 먹을 고’라는 뜻으로
벌레(虫) 세 마리가 피(血)을 빨아먹는 것을 상형화한 글자다.
즉, 벌레 세 마리가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악습에 물든 사람들이 세상을 ‘좀 먹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괘사에서는 산풍고괘가 크게 형통하다고 말한다.
솔직히 산풍고괘는 그 이름부터가 흉한데
도대체 뭐가 형통하다는 건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주역』이 변화하는 방향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산풍고괘가 처한 상황은 흉하다.
하지만 군자가 큰 내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롭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면 길한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무 때나 무작정 달려든다고 해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총 7일 동안 ‘변혁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주역』에서는 선갑삼일, 후갑삼일이라고 한다.
선갑삼일이란 첫 번째 천간인 갑목(甲)을 중심에 두고
앞에 있는 세 개의 천간(辛壬癸)을 말한 것이고,
후갑삼일은 갑목을 중심에 두고 뒤에 있는 세 개의 천간(乙丙丁)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선갑삼일은 새롭게 시작하는 기운을 후갑삼일은 마무리하는 기운을 뜻한다.
신임계갑을병정(辛壬癸甲乙丙丁)이 7일의 리듬에 맞춰
변혁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괘사(卦辭)
‘고’(蠱)는 일(事)이나 질서가 무너져서 어지러워진 것을 말한다.
괘상은 택뢰수를 거꾸로 뒤집은 간상손하(艮上巽下)이다.
간(艮)은 산, 개, 손, 귀신, 제사, 소남, 그침(止), 머무름을 의미하고
손(巽)은 바람, 나무, 닭, 장녀, 허벅지, 시장, 장사, 이익, 시기, 의심, 줏대 없음,
들어감(入), 공손함 등을 뜻한다.
산 밑에 바람이 있어서 바람이 불어서 산의 모든 사물이 흔들린다.
바람이 산에 가로막혀 통하지 못하면 나무에 벌레가 생기고 치울 일이 생긴다.
장녀(巽)가 소남(艮)에게 몸을 낮춰서 어지럽게 된다.
안으로 공손하지만 밖으로 그쳐서 머무르는 덕이 있다.
지천태의 상괘 곤(坤)의 上六과 하괘 건(乾)의 初九가 자리를 바꾸면 산풍고가 된다.
따라서 강(剛)이 위로 가고 유(柔)가 아래로 가서
공손히 그쳐서 머무르는 것이 고(蠱)이다.
고(蠱)의 의리는 부패되고 혼란한 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비록 대천을 건넘과 같이 위험하지만 잘 다스려지면 이롭다.
그러나 선갑(先甲) 3일하고 후갑(後甲) 3일해야 한다.
‘선갑삼일 후갑삼일’은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것이 천리이므로,
끝과 시작을 살펴서 신중해야 한다.
선갑삼일은 일의 시초(원인)를 살핌이고 후갑삼일은 일어날 일(결과)을 살핌이다.
효사(爻辭)
[初六] 幹父之蠱(간부지고) 有子(유자) 考无咎(고무구) 厲終吉(여종길)
아비 일을 주관한다. 자식이 있으면 죽은 아비가 허물없다.
위태롭게 여기면 결국 길하다.
象曰 幹父之蠱(간부지고) 意承考也(의승고야)
간부지고는 뜻이 고인을 계승함이다.
初六은 고(蠱)의 시작이지만,
위에 정응도 없고 위가 바르지 못하지만 하괘인 손(巽)의 주효이다.
初六은 양위(陽位)에 있어서 그 뜻은 강하지만,
유약하고 재능이 부족해서 뜻을 굳게 지키기 힘들다.
게다가 위에서 응하여 응원하는 이도 없기 때문에
아비의 고를 주관함에 어려움이 있고 위태롭다.
그러나 初六은 하괘 손(巽)의 주효이기 때문에 그 위태로움을 깨닫고
공손함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조심할 수 있어서
마침내 아비의 일을 잘 처리하고 길하다.
상전에서도 아비의 일을 주관함은 그 뜻이 고인의 일을 계승함이라 했다.
初六이 효변하면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위태하므로 그치면 이롭고 나아가길 고집하면 재앙을 자초한다.
[九二] 幹母之蠱(간모지고) 不可貞(불가정)
어미의 일을 주관한다. 바르게만 할 수는 없다.
象曰 幹母之蠱(간모지고) 得中道也(득중도야) 간모지고는 중도를 얻음이다.
九二는 양강한 신하로서 유약한 군주인 六五와 정응이다.
아래의 九二를 아들로 위의 六五를 어머니로 보았다.
너무 바른 것만 고집해서 엄하게 어미의 고(蠱)를 바로잡으려 하면,
모자의 정이 상하기 쉽다.
다행히 九二는 음위(陰位)에 있고 또 중(中)을 얻어서 중도로 행하므로 잘 처리할 수가 있다.
구이가 효변하면 간위산(艮爲山)이다.
그 장딴지에 그침이다.
윗사람이 나의 조언을 듣지 않아 구원하지 못하고 그저 따르기만 하므로
그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다.
[九三] 幹父之蠱(간부지고) 小有悔(소유회) 无大咎(무대구)
아비의 일을 주관한다.
다소 후회가 있지만 큰 허물은 없다.
象曰 幹父之蠱(간부지고) 終无咎也(종무구야)
간부지고는 마침내 허물이 없음이다.
九三은 과하게 양강하기 때문에 아비의 고(蠱)를 주관함에 있어 중도를 지키지 못한다.
주역(周易)에서 세 번째 효사는 항상 위태롭다.
그러나 九三은 위(位)가 바르고 순종하는 손(巽)의 극(極)에 있기 때문에
자식의 도리를 잃지는 않아서 큰 허물이 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후회하는 바가 있겠지만, 결국 잘 처리하게 되고 큰 허물은 없다.
상전에도 아비의 일을 주관함에 다소 후회는 있어도 결국 허물은 없다 했다.
九三이 효변하면 산수몽(山水蒙)이 된다.
여자를 취하지 말라.
그 행실이 불순(不順)해서 건장한 사내를 보고 마음이 동해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
이로울 것이 없다.
[六四] 裕父之蠱(유부지고) 往見吝(왕견린)
아비의 일을 너그럽게 주관한다. 나아가면 궁색하다.
象曰 裕父之蠱(유부지고) 往未得也(왕미득야)
유부지고는 나아가도 얻지 못함이다.
九三은 양효가 양위(陽位)에 있고 하괘의 극(極)에 있어
너무 과강하게 아비의 고를 주관했다면,
六四는 음효가 음위(陰位)에 있어 그저 우유부단하고 나태하게 처리한다.
六四는 아래에 정응도 없는데, 위의 군주도 친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아가더라도 현인의 도움이 없기 때문에 궁색하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나아가도 얻음이 없다고 했다.
六四가 효변하면 화풍정(火風鼎)이 된다.
솥(鼎)의 다리가 부러져서 군주에게 바칠 음식이 쏟아져서 무안하고 당황하여
그 얼굴이 땀으로 젖게 되므로 흉하다.
사정(私情)에 매여서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윗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六五] 幹父之蠱(간부지고) 用譽(용예)
아비의 일을 주관한다. 명예가 있다.
象曰 幹父之蠱(간부지고) 承以德也(승이덕야)
간부지고는 덕으로 계승함이다.
음유한 덕을 가진 군주 六五는 아래의 양강(陽剛)한 선비인 九二와 정응이다.
六五는 유약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일으키거나 큰일을 벌이지는 못하고
그저 옛일을 계승할 수 있다.
비록 군주가 유약하지만 강명(剛明)한 덕을 갖춘 신하를 등용하고
중용(中庸)의 덕을 펼치면 아비의 일을 계승했다는 명예를 얻게 된다.
六五가 효변하면 손위풍(巽爲風)이 된다.
바르게 하면 길하다. 후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롭지 않음이 없다.
비록 처음은 없지만 마침은 있다.
명을 내리기 전에 미리 3일간 살피고 명을 내린 뒤에도 3일간 살피면 길하다.
변혁을 할 때에는 단행하기 이전에 시작과 마침,
그 전후사정을 미리 잘 살펴서 정도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충분히 검토하고
명을 내린 뒤에도 다시 한 번 살피면 길하다.
[上九] 不事王侯(불사왕후) 高尙其事(고상기사)
왕과 후를 섬기지 않는다. 그것을 높이 숭상한다.
象曰 不事王侯(불사왕후) 志可則也(지가칙야)
불사왕후는 뜻이 숭상 받을 만하다.
上九는 고(蠱)와 간(艮)의 극(極)이면서 마침에 있다.
上九는 아래로 응도 없고 간(艮)과 고(蠱)가 지극하기에 세상사에 초연(超然)하다.
진퇴의 시기를 알아서 나아갈 때는 왕과 후(侯)를 섬기지만,
물러날 때는 초연히 물러난다.
천하에 도를 펼칠 때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절개를 지켜서
물러나 덕을 닦으니 숭상 받을 만하다.
마침에 이르고서도 초연히 물러나지 못함은
욕심에 지혜가 어두워져서 그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上九가 효변하면 지풍승(地風升)이다.
올라감에 어두움이다. 쉬지 않고 바르게 함이 이롭다.
지혜가 어두워 욕심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 모르면 흉하게 된다.
정도를 지키기 위해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이롭다.
그렇지 않으면 사그라져서 부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일을 맞닥뜨린다.
하지만 꼭 우리 자신이 벌인 일만은 아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공업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업장도 있지만
부모님, 형제, 친구, 사회가 만든 업장을 분담해야 하는 때도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산풍고괘에서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른 다양한 대처법들을 알려준다.
어떤 때는 너무 강하게 일을 밀어붙여서 말썽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 미적거리다 비판을 당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진두지휘한 일을 완수하였는데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때도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칭찬이나, 인정, 혹은 물질에 대한 과보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고 꾹 참고 뭔가를 한다.
하지만 『주역』에서는 과보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라고 한다.
즉, 지금 내게 주어진 현장을 잘 마무리 하고
새로운 장으로 진입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혼란하고 부패한 산풍고괘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매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을 외면하지 않고 때에 맞게 마무리하는 힘.
그러면서도 어떤 과보도 바라지 않는 마음.
그것이 결국 내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임을 산풍고괘는 가르쳐주고 있다.
19. 지택림(地澤臨)
성대할 때 쇠퇴할 것을 미리 대비하면, 풍성함을 오래 보전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고 임하라!
괘사(卦辭)
‘임’(臨)은 위에서 아래로 다가오는 것, 어떤 일에 직면하는 것,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하늘의 은택에 임함이다.
괘상은 곤상태하(坤上兌下)이다.
곤(坤)은 땅, 소, 암말, 노모, 서남, 황색, 배, 순종, 온순한 것을 의미하고
태(兌)는 기쁨, 연못, 강, 양, 소녀, 서쪽, 입, 혀, 구멍(穴), 깎임, 무당, 은둔을 의미한다.
하괘는 기쁘고, 상괘는 유순하니, 기쁨으로 유순히 따른다.
태(兌)는 기쁜 소녀로 유순한 노모 곤(坤)을 기쁨으로 따른다.
음력 12월인 지택림(地澤臨)은 아래의 두 양효가 점점 자라서 무성하게 되고,
음력 8월인 풍지관(風地觀)이 되면 상황이 역전되고 물러나게 된다.
임(臨)은 크게 형통하나 올바르게 해야 이롭고 8월에 이르면 흉하게 된다.
비록 지금은 양이 자라나지만
조만간 음이 자라나서 양이 물러나게 될 때가 오기 때문에 대비해야만 한다.
성대해질 때 장차 쇠퇴할 것을 미리 염려하여 대비하면
그 성대함을 오래 보존할 수 있다.
쇠퇴하는 때가 이미 이르고 나면 대처하기 어렵다.
아래에서 강(剛)이 점점 자라지만 기쁘게 따름은
위의 유순한 군주 六五가 강중(剛中)한 구이에게 호응하여 임(臨)하기 때문이다.
임(臨)은 연못 위에 땅이 있어서 땅이 연못을 감싸고 포용하여 임(臨)한 것이다.
효사(爻辭)
[初九] 咸臨(함림) 貞吉(정길)
감응하여 임한다. 바르게 해야 길하다.
象曰 咸臨貞吉(함림정길) 志行正也(지행정야)
함림정길은 뜻이 바르게 행함이다.
初九는 구이와 함께 자라나는 양(陽)이다.
위의 六四는 정응(正應)이다.
初九는 위(位)가 바르고 재능이 있으며 정응 六四와 서로 감응하여 임(臨)한다.
임(臨)은 비록 음이 물러나지만 아래 양이 음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물이 젖듯이 서로 호응하여 밀접하게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初九는 성품이 바르면서 유순한 대신
六四가 감응하여 초구를 부르기를 기다린 뒤에 나아가는 것이 바른 것이다.
初九와 六四 모두 위(位)가 바르고 양강한 인재를 등용함이 바른 것이기 때문에
初九는 六四에게 등용되어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고 그래서 길하다고 했다.
그러나 初九가 임(臨)의 시작이면서 과강할 소지가 있어서
성급히 나아가지 말고 六四가 부르길 기다렸다가 나아가야 올바르기 때문에
바르게 해야 길하다 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지수사(地水師)이다.
엄정한 군율로써 다스리지 않으면 군기가 문란해져서 전쟁에 패한다.
비록 요행으로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흉하게 된다.
[九二] 咸臨(함림) 吉(길) 无不利(무불리)
감응하여 임한다. 길해서 이롭지 않음이 없다.
象曰 咸臨吉无不利(함림길무불리) 未順命也(미순명야)
함림길무불리는 명에 순종만 하지는 않음을 뜻한다.
九二는 군주인 六五와 정응(正應)이다.
그러나 九二는 군주 六五의 명령에 그저 순종만 하는 신하는 아니다.
비록 六五의 명에 감응함으로 임(臨)하지만,
음유한 군주가 정도를 지키도록 간언할 수도 있는 현인(賢人)이다.
九二는 六三과 같이 교언영색으로 임하지 않고
강중(剛中)하면서 음위에 있어서 부드럽게 간언할 수 있기 때문에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
호원은 ‘미순명야’(未順命也)의 미(未)가 잘못 들어간 연문(衍文)이라 했다.
그러나 미순명(未順命)은 불순명(不順命)과 달리
음유한 군주의 잘못 된 命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구이가 효변하면 지뢰복(地雷復)이다.
자신을 아래의 어진 초구에게 낮춰서 아름답고 편안하게 회복하니 길하다.
[六三] 甘臨(감림) 无攸利(무불리) 旣憂之(기우지) 无咎(무구)
달콤하게 임한다. 이로움이 없다. 이미 근심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象曰 甘臨(감림) 位不當也(위부당야) 旣憂之(기우지) 咎不長也(구부장야)
감림은 위가 부당함이고 기우지는 허물이 오래 가지 않음이다.
六三은 하괘인 태(兌)의 극(極)에 처했다.
태(兌)에는 입, 혀, 쾌락, 구설이라는 의미가 있다.
六三은 음효로 재능도 없고 위(位)도 바르지 못해서 성품도 바르지 못하다.
게다가 아래로부터 양효들이 자라나지만 응도 없어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래의 친비(親比) 九二에게 달콤한 교언영색으로 임한다.
하지만 九二는 중(中)을 얻었고 위로는 六五와 정응이기 때문에
구해도 얻는 바가 없고 이로울 것이 없다.
아래의 양효들이 자라나는 것을 알고 이미 근심하기 때문에
허물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六三이 효변하면 지천태(地天泰)이다.
평평한 것은 기울지 않은 것이 없고 나아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
고로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행하면 허물은 없다.
근심하지 않더라도 미더우니 먹는 것에 복이 있다.
하늘과 땅이 교제하는 것이니 근심하지 말고 굳게 믿으면 복이 있다.
[六四] 至臨(지림) 无咎(무구)
지극하게 임하니 허물이 없다.
象曰 至臨无咎(지림무구) 位當也(위당야)
지림무구는 위가 마땅함이다.
六四는 군주 六五의 바로 아래의 대신이다.
六四는 위(位)가 바르고 初九와는 정응이다.
성품이 올바른 六四는 아래의 성품이 올바른 初九에게 자기를 낮춰서
지극하게 임(臨)하니 허물이 없다.
六四는 상괘인 곤(坤)의 땅과 하괘인 태(兌)의 연못이 서로 접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물과 땅이 간격 없이 서로 친한 것처럼 지극하게 임한다.
六四가 효변하면 뇌택귀매(雷澤歸妹)이다.
九四는 마땅한 짝을 기다리다가 혼기를 놓쳤다.
늦게 가는 것은 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지켜서 기다리면 비록 늦게라도 때가 오게 되고 마땅한 짝을 만날 수가 있다.
[六五] 知臨(지림) 大君之宜(대군지의) 吉(길)
지혜로 임한다. 대군의 마땅함이니, 길하다.
象曰 大君之宜(대군지의) 行中之謂也(행중지위야)
대군지의는 중도를 행함을 말한다.
六五는 아래 九二와 정응이다.
유순한 군주 六五는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지 않고
아래의 덕 있는 九二에게 맡겨서 처리한다.
이것은 지혜로운 대군(大君)의 마땅한 중용의 도(道)이자,
지혜롭게 아래에 임(臨)하는 것이니 길하다.
六五가 효변하면 수택절(水澤節)이다.
九五는 달가운 절제를 하므로 길하다.
천하 만민이 이것을 숭상하여 본받아 따르고자 하기 때문에
구오의 중정한 도가 숭상 받는다.
[上六] 敦臨(돈림) 吉无咎(길무구)
돈독하게 임하니 길하고 허물이 없다.
象曰 敦臨之吉(돈림지길) 志在內也(지재내야)
돈림지길은 뜻이 안에 있음이다.
上六은 상괘 곤(坤)의 극(極)이면서 임(臨)의 극(極)이다.
上六은 품성이 바르고 지극히 유순하고 후덕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돈독하게 임(臨)한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따르고 현인을 존중하는 것이
돈독하게 임(臨)하는 것이다.
뜻이 안에 있다는 것은, 뜻이 아래의 양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上六이 효변하면 산택손(山澤損)이 된다.
그러나 上九는 아래에서 덜지 않고 오히려 더해주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바르게 하면 길하고 나아가기에 이롭다.
신하를 얻게 되므로 그 뜻을 크게 얻어서 천하가 하나가 된다.
上六은 은퇴해야 하는 위치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을 새로 시작했다가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걱정도 많다.
그래서 上六은 初九와 九二를 중심으로
새롭게 일을 하는 것을 불안한 상태로 바라본다.
만약 소인이라면 이러한 감정에 갇혀 새로운 일을 저지할 것이나,
대인이라면 개인의 입장을 떠나 일을 추진할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노인같은 구석이 있는 젊은이를 좋아하듯이,
젊은이 같은 구석이 있는 노인을 좋아한다네.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육체는 노인이 되었어도 정신은 그렇게 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일세.'
─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그리스로마 에세이』
20. 풍지관(風地觀)
먼저 나의 행동과 삶을 살펴본 뒤에 진퇴를 결정하라
내 몸의 소리를 관통하라!
땅 위에 바람이 불고 있으니 바람소리를 들으라, 곧 민심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풍지는 ‘들을 청(聽)’이 아니라 ‘볼 관(觀)’자의 관괘다. 왜 풍지가 관일까?
땅 위에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움직인다.
움직이면 소리가 나는데, 움직임을 본다는 것은 그 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풍지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는 소리인지 아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는 관세음(觀世音)보살의 괘가 풍지관인 것이다.
괘사(卦辭)
‘관’(觀)은 무언가 자세히 살피는 것, 높은 곳에서 아래를 두루 살피는 것이다.
하늘의 섭리를 순종하며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것이다.
괘상은 지택림(地澤臨)을 거꾸로 뒤집은 손상곤하(巽上坤下)이다.
손(巽)은 나무, 바람, 장녀, 들어감(入), 3배의 이익, 시장, 온화함, 공손하다는 뜻이고
곤(坤)은 땅, 소, 노모, 황색, 중앙, 배, 치마, 무리, 온순하다는 뜻이다.
관(觀)은 바람이 위에, 땅이 아래에 있어서 바람이 땅위로 두루 접촉하는 것이다.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 공손하다.
위의 두 양효 上九와 九五가 아래 네 음효를 두루 살핀다.
음효들이 자라나면서 양효들은 물러나지만
다행히 군주 九五가 중정(中正)한 덕이 있어서 아래 음효들을 두루 살피기 때문에,
아래의 음효가 위의 양효들을 우러러본다.
관(觀)은 곧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살피는 정치이다.
관(觀)은 마치 종묘제사를 모시기 전에 정성을 다해 손을 씻을 때와 같이 살펴야
믿음을 얻고 아랫사람들이 우러러보게 된다.
효사(爻辭)
[初六] 童觀(동관) 小人无咎(소인무구) 君子吝(군자린)
아이의 관(觀)이다.
소인이면 허물이 없겠지만 군자라면 궁색한 일이다.
象曰 初六童觀(초육동관) 小人道也(소인도야)
初六의 동관은 소인의 도이다.
初六은 관(觀)의 시작으로 위로 정응도 없고 친비도 없다.
위(位)도 바르지 않고 재능도 없는 음유한 소인이기 때문에,
그 식견이 아이처럼 유치하고 얕다.
양강하고 중정(中正)한 군주 九五도 멀리 있어 우러러 보는 덕도 없다.
소인은 이익과 일신의 안위만을 구하기 때문에
의리나 공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서 허물이 없다고 말했지만
군자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初六이 효변하면 풍뢰익(風雷益)이 된다.
비록 재능과 응원이 있어서 큰일을 하기에 이롭지만,
아랫사람으로 지위가 없는 시초에 있기 때문에 크게 성공해야만 허물을 면할 수 있다
[六二] 闚觀(규관) 利女貞(이여정)
문틈으로 엿보듯이 관한다. 여자의 바름에는 이롭다.
象曰 闚觀女貞(규관여정) 亦可醜也(역가추야)
규관여정은 또한 부끄러운 것이다.
六二는 군주 九五와 정응이다.
그러나 六三과 六四가 가로막고 있어서 음효가 음(陰)의 자리에 있는 六二는
九五의 양강하고 중정(中正)한 덕을 쉽게 바라볼 수가 없어 살짝 엿본다.
문틈으로 엿보기 때문에 그 보는 바가 분명하지 못하다.
그 관(觀)하는 것이 대장부가 아닌 여자나 소인이면 이롭겠지만
군자라면 이롭지 못하고 부끄럽다.
六二가 효변하면 풍수환(風水渙)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몸을 기댈 안석(案席)에게로 달려가기 때문에 후회가 없어진다.
위아래가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면서 어려움을 이겨낸다.
[六三] 觀我生(관아생) 進退(진퇴)
나의 생을 관한 뒤에, 나아가던지 물러나던지 하라.
象曰 觀我生進退(관아생진퇴) 未失道也(미실도야)
관아생진퇴는 도를 잃지 않음이다.
六三은 위의 上九와 정응이다.
六三은 하괘 곤(坤)의 극(極)에 있어 상괘로 나아갈지 하괘에 머무를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六三은 음효가 양위(陽位)에 있어 위(位)가 바르지 못하고
나아가고 싶은 뜻은 있어도 굳게 지키기 어렵다.
게다가 아래에 머무르려고 해도 정응 上九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六三은 곤(坤)의 극(極)에 있어서 上九를 따르려는 마음이 간절하다.
따라서 나의 삶(生)을,
내가 행해 온 행동과 역량, 지위, 시운(時運)을 살펴서 그 진퇴(進退)를 결정함이 옳다.
내가 행한 모든 것들을 살펴서 마땅하면 나아가고 그렇지 못하면 머무르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후회나 허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상전에도 도(道)를 잃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나아감에 그 때와 질서에 어긋나지 않고 점진할 수만 있다면 곤궁할 것이 없다.
그래서 六三이 효변하면 풍산점(風山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 점점 흉한 곳으로 나아가서
아비는 나아가면 돌아오지 않게 되고
어미는 잉태하더라도 기르지 못하기 때문에 흉하다.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롭다.
[六四] 觀國之光(관국지광) 利用賓于王(이용빈우왕)
나라의 빛남을 관한다. 왕의 손님이 됨이 이롭다.
象曰 觀國之光(관국지광) 尙賓也(상빈야)
관국지광은 손님이 되길 숭상함이다.
六四는 성품이 올바른 대신으로, 군주인 九五와 친비(親比)이다.
六四는 성품이 바르고 상괘 손(巽)의 주효로 지극히 공손하다.
六四는 바르고 공손하게 군주를 가까이에서 섬기니 나라의 빛남을 보게 된다.
군주 九五가 중정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성군이면,
반드시 재능과 덕이 있는 군자들을 등용하여 벼슬을 내리고 녹(祿)을 하사하기 때문에
군주의 손님이 되는 것이 이롭다.
또한 자고로 현명한 군주가 왕위에 있으면
서로 벼슬길에 오르기를 앞 다투어 조정에 모여들게 된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왕의 손님(벼슬)이 되기를 숭상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통(天地否)의 때가 이르게 된다.
조급히 움직이지 말고 군주의 명(命)을 기다린 이후에 나의 짝과 더불어 명을 받들어서
그 뜻을 행하게 되면 허물이 없게 되고 나의 짝도 복을 받게 된다.
[九五] 觀我生(관아생) 君子无咎(군자무구)
나의 생을 관한다. 군자라면 허물이 없다.
象曰 觀我生(관아생) 觀民也(관민야)
관아생은 그 백성을 관하는 것이다.
九五는 중정(中正)한 덕이 있는 군주로, 六二는 정응(正應)이다.
九五는 관(觀)의 주효로서 널리 덕을 베푼다.
九五에게 나의 생(生)은 곧 군주의 치세를 살핌이다.
그 백성을 살피면 군주의 치세를 알 수 있다.
백성이 편안하면 군주도 편안하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면 군주도 편안하지 못하다.
고로 백성의 삶을 살피는 것이 바로 군주가 나의 생(生)을 관(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나의 생(生)을 관함이 그 백성을 관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가장 좋은 효사임에도 길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음이 자라나고 있는 시운이고
군위에서 그 해야 할 바를 하기 때문이다.
九五가 효변하면 산지박(山地剝)이 된다.
무리를 이루는 군음(群陰)의 수장으로 마치 물고기를 꿰듯이
또 궁인(宮人)처럼 총애를 구하면 마침내 허물이 없고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上九] 觀其生(관기생) 君子无咎(군자무구)
그 생을 관한다. 군자라면 허물이 없다.
象曰 觀其生(관기생) 志未平也(미지평야)
관기생은 뜻이 평안하지 못함이다.
上九는 관(觀)의 극(極)에 있어서 마침이므로 지위가 없다.
上九는 九五와 함께 백성들을 관(觀)하지만
아래에서 자라나는 네 음효들을 바라보는 상구의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못하다.
주역에서 자라고 쇠하는 음양의 조화를 막을 수는 없으니
九五와 上九는 허물이 없을 따름이다.
上九가 효변하면 수지비(水地比)가 된다.
친밀함에 있어서 처음 혹은 시작(首)이 없으면 흉하다.
시작을 하고 마침이 없을 수는 있겠지만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면 마침도 없다.
때를 놓치게 되면 흉하다.
21. 화뢰서합(火雷噬嗑)
화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소인)을 제거하라
꼭꼭 씹어라!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괘사(卦辭)
‘서’(噬)는 씹는 것이고, ‘합’(嗑)은 입을 다물어 합한다는 뜻이다.
‘서합’(噬嗑)은 위아래 턱을 합해서 입 안의 음식물을 씹어서 소화시키는 것이다.
初九와 上九가 단단한 위아래의 턱이고,
음효들은 부드러운 음식물, 중간에 끼인 九四는 딱딱한 이물이다.
진리 자각의 어려움을 입안의 음식물과 죄인의 형벌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괘상은 리상진하(離上震下)이다.
리(離)는 불, 태양, 번개, 꿩, 눈, 현명함, 중녀, 달라붙음, 화려함을 의미하고,
진(震)은 우레, 용, 장남, 제후, 다리, 움직임(動), 격분해서 나아감을 의미한다.
밖으로 밝음이 있고 안으로 움직임이 있으니 지혜롭게 움직인다.
먼저 번개가 치고 그 뒤를 우레가 따라서 울리듯이,
상괘의 번개(離)가 나아가고 하괘의 천둥(震)이 그 뒤를 따르며 조화를 이룬다.
서합(噬嗑)은 형벌과 옥사(獄)를 사용하는 것이 이롭다.
정이천은 옥(獄)을 옥사가 아닌 송사라고 해설했다.
마치 입속에 견고한 이물(九四)이 있으면 씹기가 힘들 듯이,
악인이 천하의 화합을 가로막고 있다.
그 악인을 다스리기 위해서 옥사와 형벌이 필요하고 다스려지면 형통하다.
비록 부드러운 음(柔)이 중(中)을 얻어서 군위에 있지만
밝게 분별할 수 있어서 형벌과 옥사(獄)를 사용하면 이로움이 있다.
서합(噬嗑)의 상괘는 밝은 분별을 의미하고
하괘는 격분함으로 진동하는 위엄을 상징하므로
옥사를 판결함에 명철(離)과 위엄(震)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괘상으로 보면 上九와 初九는 감옥의 벽이고 九四는 그 감옥에 갇힌 죄인이지만
다스리는 의미로 보면 오히려 九四는 형벌을 주관하는 사람이다.
효사(爻辭)
[初九] 屨校滅趾(구교멸지) 无咎(무구)
발에 형틀을 채워서 발을 상하게 한다. 허물이 없다.
象曰 屨校滅趾(구교멸지) 不行也(불행야)
구교멸지는 더 행하지 못하게 함이다.
初九는 형벌(噬嗑)의 때 지위가 없는 처음이라
아직 죄가 가벼워서 발에 족쇄를 채워서 악행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한다.
무릇 허물은 사사로운 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큰 허물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족쇄를 채워 발을 쓰지 못하게 함으로
죄가 경미할 때 행동을 금해서 더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계사전에도 소인은 어질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익을 없으면 권하는 법이 없고 위엄으로써 하지 않으면 징계되지 않기 때문에
적게 징계하여 크게 경계하는 것이 소인의 복이라 했다.
불선을 초기에 멈추게 되면 허물은 없다.
初九와 上九는 지위가 없어서 형벌을 받는 자이고, 나머지는 형벌을 다스리는 자이다.
初九는 하괘 진(震)의 주효로서 망동하기 쉽고
발의 상이 있어서 발에 형틀을 채운다고 하였다.
初九가 효변하면 화지진(火地晉)이 된다.
나아갔다 물러난다.
나아가는 시작에 있어서 윗사람에게 단번에 신임을 얻지는 못한다.
신임을 얻지 못해도 바름을 지키고 분수를 지켜서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 허물은 없다.
[六二] 噬膚滅鼻(서부멸비) 无咎(무구) 살을 씹어서 코를 상하게 한다. 허물이 없다.
象曰 噬膚滅鼻(서부멸비) 乘剛也(승강야) 서부멸비는 강을 올라탔기 때문이다.
六二는 중정(中正)한 형벌집행자이다.
중도에 어긋남이 없이 형벌을 사용하니 죄인이 쉽게 복종하기 때문에 살을 씹는 것 즉,
부드러운 고기를 씹는다고 했다.
코를 상(傷)하게 한다는 것은 코를 없앨 만큼 살갗을 깊게 씹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六二가 양강한 초구를 올라타고 있어서 위태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음유(陰柔)한 六二가 양강(陽剛)한 초구를 다스리려고 하지만
初九는 과강해서 반발하기 때문에 형벌을 줄 때 당사자(初九)가
절실히 통감할 만큼 엄한 형벌이 필요하다.
코를 멸할 정도로 깊숙이 깨물어서 코를 상하지만 이는 六二의 허물은 아니다.
六二가 효변하면 어긋나는 화택규(火澤睽)이다.
그러나 주인을 골목에서 만나면 허물이 없다.
올바른 도를 잃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만날 기회를 부단히 찾게 되면
우연히 길거리에서라도 만나는 기쁨이 있다.
[六三] 噬腊肉(서석육) 遇毒(우독) 小吝无咎(소린무구)
말린 고기를 씹음이다.
독을 만나서 다소 궁색하나 허물은 없다.
象曰 遇毒(우독) 位不當也(위부당야)
우독은 위가 부당함이다.
六三은 하괘 진(震)의 극(極)에 있다.
六三은 음유로서 위(位)도 바르지 못한데 처한 위치도 위태롭고 진동이 지극하다.
말린 고기라고 말한 것은 정응인 上九가 강폭하기 때문에
형벌을 내려도 쉬이 복종하지 않고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죄인이 강폭하여 복종시키기 어려워서 독(毒)을 만나는 것과 같지만
형벌을 집행하는 것이 부당(不當)한 것은 아니다.
비록 궁색해도 그것이 六三의 허물인 것은 아니다.
育三이 효변하면 이위화(離爲火)이다.
앞의 밝음이 다해서 기울어져 해가 걸려있으니 뜨고 지는 이치를 수용해야 한다.
마치 질그릇 술잔을 두드리며서 노래하듯이
마음 편히 남은 여생을 즐기지 않고 한탄하게 되면 흉하다.
[九四] 噬乾胏(서간치) 得金矢(득금시) 利艱貞(이간정) 吉(길)
뼈에 붙은 말린 고기를 씹는다. 쇠와 화살을 얻는다.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해야 이롭고 길하다.
象曰 利艱貞吉(이간정길) 未光也(미광야)
이간정길은 빛나지 못함이다.
九四는 군주 바로 아래의 대신이다.
九四는 형벌을 가하는 자들 중에서 유일한 양효로서 형벌(噬嗑)의 책임을 맡은 자이다.
九四는 훨씬 강폭한 죄인을 뜻하는 뼈에 붙어있는 말린 고기를 씹는다.
쇠(金)는 강함을, 화살(矢)은 곧음을 뜻한다.
이것은 九四가 강직(剛直)한 서합의 도를 얻은 것을 뜻한다.
비록 九四가 강직한 도를 갖추고 형벌로 다스리더라도,
항상 어렵게 여기고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만 이롭고 길하다.
너무 형벌이 과하면 지나쳐서 상해를 입히고 부족하면 다스려질 수가 없다.
다행하게도 九四는 양효가 음위(陰位)에 있어 강유(剛柔)를 겸비했다.
따라서 九四는 어렵게 여기고 올바름을 지킬 수 있고 이롭고 길하다.
상전에서도 어렵게 여기고 올바름을 지켜야 하는 것은
결국 크게 빛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九四가 효변하면 산뢰이(山雷頤)가 된다.
거꾸로 부양을 받지만 길하다.
호시탐탐 그 바라는 것을 끊임없이 구해야 허물이 없다.
재능도 없이 높은 자리에 처해서 끊임없이 구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칫 아랫사람들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으려면 위엄을 갖춰야만 한다.
[六五] 噬乾肉(서간육) 得黃金(득황금) 貞厲无咎(정려무구)
말린 고기를 씹다가 황금을 얻음이다.
올바름을 지키고 어렵게 여기면 허물이 없다.
象曰 貞厲无咎(정려무구) 得當也(득당야)
정려무구는 마땅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六五는 아래에 정응(正應)도 없는 음유한 군주이므로,
형벌(噬嗑)의 때 죄인을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六五는 군위에서 아랫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에
오히려 九四보다 거친 고기를 씹는 것은 아니다.
황색은 오행에서 흙(土)의 색깔이므로 중(中)을 상징하고, 금(金)은 강함을 상징한다.
六五가 중(中)을 얻어 중용의 덕이 있고
아래의 친비(親比)인 대신 九四를 얻은 것을 말한다.
음유한 음(陰)이 강한 양(陽)을 올라타고 있는데 위(位)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중을 얻었지만 올바름을 굳게 지키기 어려울까 하여 어렵게 여기고
올바름을 지키라고 말했다.
六五가 효변하면 천뢰무망(天雷无妄)이다.
이때는 욕심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무망의 도를 좇아야 형통하다.
비록 사심이 없는 행동이라도 정도가 아니면 곧 허망한 것이고 망동(妄動)이므로
머지않아 재앙으로 돌아온다.
무망의 질병이다.
비록 질병인 것처럼 보이지만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기쁨이 있다.
성급하게 약을 시험해보려고 하면 망령된 것이다.
[上九] 何校(하교) 滅耳(멸이) 凶(흉)
목에 형틀을 씌워 귀를 상한다. 흉하다.
象曰 何校滅耳(하교멸이) 聰不明也(총불명야)
하교멸이는 귀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上九는 서합(噬嗑)의 극에 있다.
계사전에 죄악이 쌓여 가릴 수 없고, 죄가 커서 용서받을 수 없는 자라고 하였다.
높은 자리에서 안하무인이라서 죄를 범하고도 뉘우침 없는 다루기 힘든 죄인이다.
그 형벌도 무거워서 목에 큰 형틀을 씌웠다.
이것은 총명하지 못해서
귀 기울여 듣지 않아서 그런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징계이다.
악덕이 쌓이고 쌓여 극(極)에 이르면,
그 쌓인 죄들이 귀를 멸(滅)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고로 상전에도 귀가 밝지 못함이라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진위뢰(震爲雷)가 된다.
우레가 거듭 울린다.
우레가 울렸을 때 그 두려움을 간직해서
혹 잘못은 없는지 수신하면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
우레가 흩어져서 두리번거린다.
진의 종극이므로 조만간 변하는 것이 이치인데
거기서 더 나아가면 반드시 흉을 초래하게 된다.
우레가 자기 몸에 미치지 않고 그 이웃에게 떨어질 때
그것을 살펴서 조심하면 비록 혼구에게 원망은 듣겠지만 허물은 없다.
화뢰서합괘에서 외괘는 불, 내괘는 우레로 조합된다.
음식을 소화하려면 입을 열심히 놀려야 한다.
턱을 아래위로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에서 선현들은 우레를 읽어낸다.
대단하지 않은가?
밥상에서도 자연의 이치를 찾아내는 선현들의 상상력과 관찰력에 감탄이 나온다.
그렇다. 우리가 음식을 씹는 행위는 우레를 만드는 것이다.
우레는 우레로 그치지 않고 결국 번쩍하며 빛을 만든다. 빛은 불이다.
그 불은 밝음을 뜻한다.
이것은 죄인에게 밝은 법이 적용돼야 함을 의미한다.
우레가 빛을 제대로 만들려면 소화를 잘 시켜야 한다.
꼭꼭 씹어야 내 안에 빛을 발할 수 있는 법.
그 빛으로 세상의 법과 죄를 다스릴 때 나 자신의 통찰 또한 가능해진다.
『주역』은 말한다.
밝은 법이란 음식을 꼭꼭 씹어서 소화를 잘 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그때 균형 잡힌 심신으로 세상을 만나게 될 거라고.
자~이제 씹는다는 것이 단지 음식을 소화시키는 문제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 안팎을 밝게 통찰하려면 꼭꼭 씹어야 한다.
제대로 씹어야 나와 세상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 산화비(山火賁)
너무 화려하게 꾸미지 말고 조금만 꾸미는 것이 좋다.
괘사(卦辭)
‘비’(賁)는 빛나다, 장식하다,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이다.
밝은 진리(火)에 머무는 것(山)이 賁이다.
천도를 자각하여 하늘의 법칙(觀天文)을 인간의 법칙(觀人文)으로 삼고
진실한 믿음(孚)이 합쳐져야(小利)
아름다운 세상(賁)을 만들 수 있다는 것(化成天下)이다.
괘상은 화뢰서합을 거꾸로 뒤집은 간상리하(艮上離下)이다.
간(艮)은 산, 손, 개, 소남, 귀신, 제사, 마침(終), 머무름(止)을 뜻하고,
리(離)는 불, 태양, 눈, 중녀, 지혜, 무인, 문명함, 달라붙음, 화려함을 뜻한다.
산 아래에 불이 있다.
산 밑에 태양이 있어서 저녁노을에 산천초목이 아름답게 장식된다.
비(賁)는 형통하나 나아가면 조금 이롭다.
아름다운 장식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예(禮)가 되어 사회질서를 이루지만 조금 이로운 것은,
장식은 겉치레요 형식일 뿐이지 실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꾸밈이 과하게 되면 반드시 흉하게 되므로 적당히 조금만 장식하는 것이 이롭다.
장식은 실질에 조화롭게 더해졌을 때에 빛나고 형통하게 된다.
지천태(地天泰)의 곤(坤)의 上六과 건(乾)의 九二가 자리를 바꾸게 되면,
산화비(山火賁)의 간(艮)과 리(離)가 된다.
이것이 곧 유(柔)가 내려 와서 강(剛)을 꾸미고
강(剛)이 올라가서 유(柔)를 꾸미는 것이다.
효사(爻辭)
[初九] 賁其趾(비기지) 舍車而徒(사거이도)
그 발을 꾸민다. 수레를 버리고 걸어서 간다.
象曰 舍車而徒(사거이도) 義弗乘也(의불승야)
사거이도는 의리 때문에 탈 수 없음이다.
初九는 비(賁)의 시작으로서, 六二는 친비이고 六四는 정응이다.
중정한 六二가 비록 화려한 수레와 같겠지만 初九의 정응은 아니다.
初九는 위(位)가 바르기에 성품이 바르고 리(離)의 아래에 있어 분별할 수 있다.
의리상 중정한 六二를 뒤로 하고 정응 六四에게 가기 위해서 그 발을 꾸민다.
상전에도 화려한 수레를 버리고 가는 것은 의리에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간위산(艮爲山)이다.
그 발꿈치에 멈춤이다.
오래토록 바르게 함이 이롭다.
일의 시초에 그치면 그치기 쉽고 바름을 잃지 않은 것이다.
양위에 있어서 굳게 지켜야 한다.
[六二] 賁其須(비기수) 그 수염을 꾸민다.
象曰 賁其須(비기수) 與上興也(여상흥야)
비기수는 위와 함께 일어남이다.
六二는 유순하고 중정(中正)한 덕이 있다.
비(賁)는 유(柔)가 와서 강(剛)을 꾸미는 것이기 때문에 六二가 주효다.
지천태(地天泰)의 귀한 上六이 九二와 위치를 바꿔서 꾸미면
산화비(山火賁)의 六二와 上九가 된다.
장식의 도에는 실질보다는 꾸밈이다.
실질은 크게 바꿀 수 없고, 실질을 꾸밀 수 있을 뿐이다.
상(象)으로는 九三에서 六四, 육오, 上九까지 턱이고,
六二를 그 턱에 붙어 있는 수염으로 볼 수 있다.
九三은 양효로 실질이므로 턱이고,
六二는 음효로 장식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 턱에 붙어 있는 수염이다.
유약한 수염이 단단한 턱에 붙어 같이 움직이듯이
六二는 九三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 바르다.
六二가 효변하면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수레의 바퀴가 빠졌다.
위의 군주가 저지시키기 때문에 도리 상 나아갈 수가 없어서
마치 수레바퀴가 빠진 것과 같이 머무른다.
[九三] 賁如濡如(비여유여) 永貞吉(영정길)
꾸밈이 윤택하다. 오래토록 바르면 길하다.
象曰 永貞吉(영정길) 終莫之陵也(종막지릉야)
영정길은 마침내 아무도 능멸하지 못함이다.
九三은 리(離)의 극(極)에 있다.
위에 정응은 없지만 상하로 친비한 두 음효들인 六二와 六四 중간에 빠져있다.
九三은 비록 과강하고 위태로운 위치에 있지만,
위(位)가 바르기 때문에 성품이 바르고 밝은 덕이 지극해서 바름을 굳게 지킬 수 있다.
비(賁)의 참 뜻은 장식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고 그 실질을 잃지 않음에 있다.
九三은 친비인 六二, 六四와 서로 꾸며주지만, 그것이 상도(常道)는 아니다.
혹여 두 음효들의 꾸밈에 빠져서 양의 바른 실질을 잃으면, 업신여김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상전에도 오래토록 올바르게 해야
길함은 누구도 능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 했다.
九三이 효변하면 산뢰이(山雷頤)이다.
기르는 이(頤)의 도에 어긋나서 흉하고 이로움이 없다.
십년이 지나도 절대로 쓰지 말라.
[六四] 賁如皤如(비여파여) 白馬翰如(백마한여) 匪寇婚媾(비구혼구)
꾸밈이 소박하다. 백마가 나는 듯하다. 도적이 아니면, 구혼하려 함이다.
象曰 六四(육사) 當位疑也(당위의야) 匪寇婚媾(비구혼구) 終无尤也(종무우야)
六四는 그 위치가 의심이 있고 비구혼구는 마침내 허물이 없음이다.
六二는 六五와 정응이 아니기 때문에 九三과 꾸미고,
六五도 마지못해서 가까운 上九와 꾸민다.
六四는 멀리 있는 初九와 정응(正應)이지만, 그 사이에는 九三이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初九를 장식할 수 없으니 그 꾸밈이 소박하다고 하였다.
올바른 정응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백마가 나는 듯하다.
그러나 九三이 도적질을 하려고 함이 아니라, 구혼하러 왔으니 허물은 아니다.
六四가 九三에게 의심을 갖는 것은 마땅하고
결국 初九를 만나게 되기 때문에 결국 허물은 없다.
六四가 효변하면 이위화(離爲火)이다.
아래의 불을 잘 계승하려면 반드시 중도를 지켜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여 돌연히 온다.
불사르는 듯 하고 죽은 듯 하고 버림받는다.
[六五] 賁于丘園(비우구원) 束帛孱孱(속백잔잔) 吝(린) 終吉(종길)
구원에게서 꾸밈 받는다.
작은 비단 묶음이기에 궁색하나 결국 길하다.
象曰 六五之吉(육오지길) 有喜也(유희야)
六五의 길함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六五는 六二와 정응이 아니다.
유순한 六五는 음유해서 스스로 정도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친비인 양강한 上九의 도움을 받아 꾸밈을 얻는다.
상괘 간(艮)은 산이기 때문에 구원(丘園)은 上九이다.
비단 묶음 예물이 작으면, 비록 궁색하다 말은 듣겠지만 결국 길하다.
장식이 과한 것보다 조금만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비록 검소한 예물이지만 마침내 上九의 도움(장식)으로 공을 이룬다.
상전에서도 六五의 길함은 기쁨 즉, 공을 이룸이 있기 때문이다.
六五가 효변하면 풍화가인(風火家人)이 된다.
왕이 제가(齊家)에 지극하게 힘쓴다.
근심하지 않아도 길하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함에 있어 사랑과 위엄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 아끼고 사랑하니 가정이 올바르게 서게 되고 그 공(功)을 이룬다.
[上九] 白賁(백비) 无咎(무구)
소박(素朴)하게 꾸민다. 허물이 없다.
象曰 白賁无咎(백비무구) 上得志也(상득지야)
백비무구는 위에서 뜻을 얻음이다.
上九는 비(賁)의 극(極)이다.
지천태에서 구이가 위로 올라가서 비(賁)의 上九가 되었다.
꾸미는 비(賁)의 종극이므로 소박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上九는 군주의 신임을 받지만 과하지 않고 소박하게 꾸밀 수 있고 허물이 없다.
上九는 장식의 마침인데도 아래 六五를 도리어 장식하므로
꾸미는 비(賁)의 뜻을 얻기 때문에, 허식을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소박하게 꾸며야 허물이 없다 했다.
상전에도 소박하게 꾸며야 허물이 없다고 함은
마침인 맨 위에 있지만 꾸밈의 뜻을 얻기 때문에 경계하였다.
上九가 효변하면 지화명이(地火明夷)이다.
上六은 암군으로서 밝지 못하여 어둡다.
비록 지금은 기세등등하겠지만 조만간 멸망해서 땅에 들어가게 된다.
밝음의 상함이 지극하면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 삶에서도 본바탕과 꾸밈간의 호응과 긴장은 중요하면서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질(質)보다 문(文,紋)쪽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기울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산화분괘가 알려주는 꾸밈의 지혜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온다.
23. 산지박(山地剝)
소인이 군자를 깎아 없애는 때이니, 군자는 물러나서 언행을 삼가라
아무리 각박한 세상에도 솟아날 씨앗은 있다!
주역』은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이치를 말한다.
열매가 모두 떨어지고 삭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과일을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미래의 싹을 도모하는 것이 『주역』이 이야기하는 미래의 정신이다.
이런 미래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괘가 바로 산지박(山地剝)이다.
박(剝)은 ‘깎을 박’이다. 부서지고 헤지고 깎인다는 뜻이다.
열매가 무르익은 것을 난숙(爛熟)하다고 말한다.
열매가 난숙하면 결국 땅에 떨어진다.
64괘 순서로 봐도, 꾸밈(장식)을 의미했던 산화비괘 다음에,
그걸 다 쓰고 생명이 다한다는 뜻으로 박괘가 등장한다.
그래서 다음 괘는 박으로 깎이고 허물어진 것이
다시 회복된다고 보고 지뢰복괘를 놓았다.
이처럼 “산화비-산지박-지뢰복”이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괘상은 중천건(重天乾)에서 음이 들어와 양을 깎아 먹고 올라가
맨 위에 양 하나만 달랑 남겨 놓은 형상이다.
이게 씨과실의 형상이다.
하늘의 양을 받아서 사람이 나온다.
즉 착하고 밝은 것이 천부지성(天賦之性: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품성)인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이 천부지성을 다 깎아 먹게 된다.
군자-소인 구도로 말하면,
원래 양인 군자를 타고났는데, 음인 소인들이 와서 군자들을 해치고 만다.
서늘한 음기운으로 모든 양이 꼭지가 떨어져 박락(剝落:깎여 떨어지다)이 되고,
결국 마지막 하나만 남은 산지박괘는 곧 소인이 군자를 깎아 먹고,
음이 양을 깎아 먹고, 불선한 악이 선을 깎아 먹고 마는 형국이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괘사(卦辭)
‘박’(剝)은 박탈하다, 침탈하다, 깎는다는 의미이다.
괘의 형상이 마치 상(床)과 같다.
괘상은 간상곤하(艮上坤下)이다.
간(艮)산, 손, 개, 소남, 귀신, 제사, 멈춤을 뜻하고,
곤(坤)은 땅, 소, 노모, 황색, 치마, 순함을 뜻한다.
위로 산은 멈추고 아래로 땅은 순응하는 덕이 있으니,
밖에 나가지 않고 순하게 머무른다.
음(陰)이 무성한 시기로,
양(陽)이 밖으로 나가면 이롭지 않음을 알고 그쳐서 머무름이다.
박(剝)은 아래의 다섯 음효들이 무성해져서 양효를 깎아 오기 때문에 소(消)라고 하고,
거꾸로 양이 음을 깎아 오면 식(息)이라 한다.
산지박은 늦가을인 음력 9월이다.
이때는 음이 무성해져서 낙엽이 지고 열매가 떨어진다.
이때에는 군자가 바른 말을 하거나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소인에게서 해를 당하게 된다.
고로 군자는 지위에 마땅한 곳에 머무르되
겉으로 소인들에게 험악하게 행하지 않고 유순히 대하고
그쳐서 행하지 않음이 마땅하다.
높은 산이 낮은 땅에 붙어 있는 박(剝)을 살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두텁게 해서 자신의 지위를 보존한다.
아래는 위의 근본이므로 아래가 견고하면 무너지지 않는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유순하고 너그럽게 대하면 그것이 곧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성인도 아래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길러서 그 근본을 두텁게 한다.
효사(爻辭)
[初六] 剝牀以足(박상이족) 蔑貞凶(멸정흉)
상다리를 깎는다. 올바른 것을 멸하니 흉하다.
象曰 剝牀以足(박상이족) 以滅下也(이멸하야)
박상이족은 아래를 멸함이다.
初六은 위로 응(應)도 비(比)도 없다.
‘상’(牀)은 와상(臥牀)이나 평상(平牀)으로 사람이 기대서 편하게 쉬는 곳이다.
상다리를 깎으면 반듯했던 상이 쓰러진다.
아래로부터 양을 깎으며 음이 자라나기 때문에 바른 것을 멸하기 때문에 흉하다.
음(陰)이 양(陽)을 멸하는 것이, 소인의 도가 군자의 도를 축출하는 것과 같다.
초육이 효변하면 산뢰이(山雷頤)이다.
욕심에 너의 신령한 거북을 버려두고 나를 보고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
자기가 기를 수 있음에도 타인을 기르려고 하지 않고
천박하게 남에게 부양을 구하면 흉하다.
[六二] 剝牀以辨(박상이변) 蔑貞凶(멸정흉)
상의 언저리를 깎는다. 올바른 것을 멸하니 흉하다.
象曰 剝牀以辨(박상이변) 未有與也(미유여야)
박상이변은 함께 하는 사람이 없음이다.
六二는 곤(坤)의 중정(中正)한 덕이 있음에도 위로 응도 없고 비도 없다.
初六은 상의 다리를 깎았지만, 六二는 그보다 더 위인 상의 언저리(辨)를 깎는다.
순하게 따르는 곤(坤)의 중정(中正)을 얻으면 보통 길하지만,
위에서 응원하고 도와주는 양이 없어서
동류 소인들과 함께 상의 언저리를 깎으니 흉하다.
그래서 상전에도 상의 언저리를 깎음은 함께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六二가 효변하면 산수몽(山水蒙)이다.
九二는 그 몽매함을 일깨우는 스승이다.
포용함으로써 몽을 일깨우면 길하다.
부인을 맞이하면 길하고 자식이 집안을 잘 다스리는 형국이다.
[六三] 剝之无咎(박지무구)
깎는 허물이 없다.
象曰 剝之无咎(박지무구) 失上下也(실상하야)
박지무구는 위아래의 동류 음(陰)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六三은 위로 上九와 정응이다.
보통 3번째의 효사들은 흉하지만
박(剝)에서는 다섯 음효들 중에 유일하게 정응이 있다.
정응 上九와 응하여 소인들과의 인연을 끊기 때문에
위아래 동류인 음효들을 잃게 되서 깎는 허물이 없어진다.
六三이 비록 하괘의 높은 지위에 있고 양위에 있고 上九와 정응하기 때문에
올바름을 지키고 싶겠지만
화를 면하기 어려워서 길하다 하지 않고 허물이 없다고만 했다.
六三이 효변하면 간위산(艮爲山)이다.
간(艮)의 주효 九三은 그 허리에 그침이다.
위아래로 네 음효들의 중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진퇴를 하지 못하고 그쳐 있다.
마치 그 등뼈를 벌려놓은 것과 같이 위태하기 때문에 마음이 타는 것만 같다.
[六四] 剝牀以膚(박상이부) 凶(흉)
상을 깎아서 피부에까지 이른다. 흉하다.
象曰 剝牀以膚(박상이부) 切近災也(절근재야)
박상이부는 재앙이 절박하게 가까움이다.
六四는 중간을 지나서 양(陽)을 깎음이 더 심해서 피부에 이르게 된다.
재난이 임박한 것이기 때문에 흉하다.
初효와 二효는 그저 상을 깎았을 뿐,
몸을 상하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六四에 이르러 드디어 몸을 상하게 되었기 때문에 흉하다.
상전에서도 상을 깎아서 피부에 이른 것은 재앙이 임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六四가 효변하면 화지진(火地晉)이다.
나아가는 것이 마치 석서와 같다.
고집하면 위태하다.
위가 바르지 못한 九四는 대신의 지위를 사용해서 탐하는 간신이다.
[ 六五 ] 貫魚以宮人寵(관어이궁인총) 无不利(무불리)
물고기를 꿰듯이 궁인과 같이 총애를 구하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
象曰 以宮人寵(이궁인총) 終无尤也(종무우야)
이궁인총은 결국 허물이 없다.
六五는 군주의 지위에 있지만 아래에 정응이 없어 위의 친비인 上九와 친하길 원한다.
六五는 무리를 이룬 군음(群陰)의 수장으로서 무리를 통솔하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물고기를 꿰듯이 또 왕후(王后) 아래의 후궁들처럼
아래의 네 음효들을 꿰어서 상구의 총애를 구하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
만약 그렇게 개과천선하면
밑의 음효들이 양을 깎아 오던 허물이 없어지게 되고 더욱 이롭다.
상전에도 그렇게 하면 마침내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다.
육오가 효변하면 풍지관(風地觀)이다.
나의 생(生)을 관한다.
군자는 허물이 없다.
九五는 군주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을 살피는 것이
곧 그의 치세(治世)를 살피는 것이다.
[上九] 碩果不食(석과불식) 君子得輿(군자득여) 小人剝廬(소인박려)
큰 열매는 먹지 않는다.
군자는 수레를 얻지만, 소인은 집을 깎는다.
象曰 君子得輿(군자득여) 民所載也(민소재야)
小人剝廬(소인박려) 終不可用也(종불가용야)
군자득여는 백성이 수레에 모시는 것이고 소인박려는 마침내 쓰지 못함이다.
上九는 박(剝)의 극(極)이기 때문에 그 마침에 있다.
上九는 박(剝)의 주효로서, 소인들 중에 우뚝 솟은 군자이다.
마치 큰 열매는 다음 해에 종자로 사용되기 때문에 먹지 않고 남겨둔다.
이를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했다.
음이 모두 자라나게 되면 양이 아래에서 다시 자라기에
사실 上九는 지뢰복(地雷復)의 종자(種子)이다.
어려움이 지극하게 되면 양강한 군자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고 수레로 모심을 받는다.
큰 열매는 다음 해에 종자로 필요해서 먹지 않아야 하는 이치를 모르는 소인들은
크고 실(實)한 양(陽)을 깎아 버린다.
그래서 집을 깎는다고 했다.
군자는 어려운 때에 백성을 먹여 살리고 편히 거처하는 집과 같고
소인이 집(군자)을 깎음과 같다.
상전에도 소인은 석과를 먹어서 마침내 종자로 쓸 수 없다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곤위지(坤爲地)이다.
上六은 음이 자라서 무성하면 결국 양과 대등해져 용이 들판에서 싸운다.
유순한 도를 잃음이고 마침내 서로 상처를 입으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
24. 지뢰복(地雷復)
나아가지 말고 안정을 취하며 양기(陽氣)를 키우라
예수의 부활!
초목에 비유하면 ‘산지박’은 열매만 남기고 시든 가을 나무와 같고,
사람에 비유하자면 노인에 해당한다.
‘지뢰복’은 새싹이 움트기 전 땅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봄의 씨앗이며, 아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효의 자리를 시간의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효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주역은 죽음은 새 생명의 부활임을 말하고 있다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다.
어떤 순수한 끝, 완전무결한 것은 없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시작되고,
음이 극에 달하면 다시 양이 시작되는 법칙만이 계속 돌아올 뿐이다.
이 법칙이 사계절의 순환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역사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뢰복은 이러한 ‘법칙의 시작’을 보여주는 괘이다.
괘사(卦辭)
‘복’(復)은 복귀(復歸), 순환(循環), 되돌아옴을 뜻한다.
지뢰복은 산지박(山地剝)을 거꾸로 뒤집은 곤상진하(坤上震下)이다.
곤(坤)은 땅, 소, 배, 노모, 황색, 학문, 순리, 온순함을 의미하고,
진(震)은 우레(雷), 진동, 용, 장남, 움직임(動), 격분해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지뢰복은 절기로는 동지(冬至)이다.
절망적인 음력 11月에 하나의 양(陽)이 움튼다.
하지만 아직은 한겨울이므로 대지가 얼어붙어 있기 때문에,
순리를 좇아 나아가야 한다.
지뢰복의 음(陰)과 양(陽)을 반전하여 변역하면 배합괘인 천풍구(天風姤)가 된다.
절기로 하지(夏至)인 음력 5월이다.
지뢰복과는 반대로 음이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상이다.
그러나 지뢰복은 지상에 울려 퍼질 우레 즉, 양기(陽氣)가 아직 미약하다.
상괘는 순하고 하괘는 격분하니 격분해서 나아가지만
순리를 따라서 나아가는 덕이 있다.
자라나고 쇠퇴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 어떤 방해도 있을 수 없다.
만물이 처음 생겨날 때는 기운이 미약하기 때문에 힘든 고초를 겪기가 쉽다.
그러나 미약해서 해(害)를 입더라도 회복하는 양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다.
저지하고 훼방을 놓을 수 있을 뿐이기에 출입에 질병이 없다고 했다.
점차 양이 자라서 양(陽)이 늘어나면 성대해지고 형통하게 되므로
친구들이 오면 허물이 없음이다.
주역괘는 6개의 효사로 되어 있어서 7번 변화하면 제자리로 회복된다.
하나의 음이 밑에서 생겨난 음력 5월 천풍구로부터
7번째 달인 음력 11월 지뢰복에 다시 양이 자라기 시작한다.
아래로부터 양이 점차 늘어서 왕성해지기를 기다린 이후에
동류 양효들과 더불어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상전에는 복(復)의 이치를 잘 살펴서 선왕이 동지(冬至)에 관문을 닫아서
그도 궁궐을 나가서 살피지 않고 상인과 나그네도 돌아다니지 않게 했다.
집집마다 뚜껑이나 문의 관리를 철저히 했는데,
이것은 땅속에 있던 양(陽)이 자라는 동지와 더불어 안정을 취하여
양기(陽氣)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효사(爻辭)
[初九] 不遠復(불원복) 无祗悔(무지회) 元吉(원길)
머지않아 회복한다. 후회가 없다. 크게 길하다.
象曰 不遠之復(불원지복) 以修身也(이수신야)
불원지복은 자신을 수신함이다.
初九는 복(復)의 시작으로서, 하괘 진(震)과 복(復)의 주효이다.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빨리 깨닫고
멀리 가지 않고 고쳐서 선(善)을 회복하면 후회가 없다.
복(復)은 물러났던 양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양(陽)은 곧 군자의 도(道)이기 때문에 복(復)은 곧 선(善)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初九는 위(位)가 바르기 때문에 성품이 바르고 수신(修身)의 덕(德)이 있어서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빨리 회복할 수 있고,
회복하면 과실이 허물이 되고 허물이 후회에 이르기 전에 회복하게 되므로
크게 길하다.
상전에서도 머지않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수신하기 때문이라 했다.
초구가 효변하면 곤위지(坤爲地)가 된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
만사가 사소한 일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처음에는 불선(不善)이 미약하지만
점점 자라나서 극성하게 되면 재앙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마치 서리를 밟아서 단단한 얼음이 되듯이
서리와 같은 사소한 일에서 곧 겨울이 온다는 큰일을 깨닫고 대비해야 한다.
[六二] 休復(휴복) 吉(길)
아름답게 회복한다. 길하다.
象曰 休復之吉(휴복지길) 以下仁也(이하인야) 휴
복지길은 어진 사람에게 낮춤이다.
六二는 중정(中正)한 덕이 있지만 위에는 정응이 없고 아래 初九는 친비이다.
六二는 바르고 유순한 중정(中正)한 덕으로
아래 初九에게 몸을 낮춰서 친함을 청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회복한다.
하괘 진(震)의 주효인 初九는 양강하면서 어질고 수신(修身)의 덕이 있다.
六二가 아래 初九에게 겸손히 낮춰서 친밀하게 따라서 회복하니
아름답게 회복함이고 길하다.
‘휴’(休)를 ‘아름답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동지에 문을 닫고 휴식(休息)을 취하며 양기를 기르듯이 휴복(休復) 즉,
쉬면서 편안하게 회복하는 것과도 같다.
상전에서도 아름답게 회복함은 아래 어진(仁) 初九에게 낮추기 때문이라 했다.
六二가 효변하면 지택림(地澤臨)이다.
九二는 중용의 덕이 있어서 감응함으로 임(臨)하니 길해서 이롭지 않음이 없다.
구이는 강직하여 단순히 군주 六五의 명에 따르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길하다.
[六三] 頻復(빈복) 厲无咎(려무구)
자주 회복한다. 위태롭지만 허물은 없다.
象曰 頻復之厲(빈복지려) 義无咎也(의무구야)
빈복지려는 그 의리가 허물은 없음이다.
六三은 위에 응(應)도 비(比)도 없다.
六三은 진(震)의 극(極)에 있기 때문에 불안정한 위치에 있다.
六三은 위(位)도 바르지 못하고 진동(震動)의 극에 처해 있어서 쉽게 경거망동한다.
하지만 하괘 진(震)의 初九와 六二가 도를 회복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도를 회복한다.
회복에는 안정된 마음과 굳은 의지가 중요하나
六三은 처한 위치가 불안정하고 음효가 양의 위(位)에 있어서
뜻은 있지만 굳게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실도(失道)와 회복을 계속 반복한다.
도(道)를 잃어버리는 것은 허물이지만 회복하는 것이 허물은 아니다.
그래서 상전에도 자주 회복하는 것이 위태롭지만
도로 회복하는 것은 의리로 보면 허물은 아니라고 했다.
六三이 효변하면 지화명이(地火明夷)가 된다.
암군의 때 九三은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그 우두머리를 잡는다.
하지만 급하게 바르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비록 九三이 밝은 덕으로 나아가서 해악을 제거하더라도
서둘러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기보다
충분히 때를 기다려서 점진적으로 바로잡는 것이 이롭다.
[六四] 中行獨復(중행독복)
더불어 가다가 홀로 회복한다.
象曰 中行獨復(중행독복) 以從道也(이종도야)
중행독복은 도를 따르는 것이다.
六四는 아래의 初九와 정응이다.
六四는 위(位)가 바르고 아래의 유일한 양효 初九와 정응이기 때문에
위아래 네 음효들과 무리지어 가다가 홀로 돌아와 도를 회복한다.
하지만 初九는 아직 미약하기 때문에 六四를 구제해 줄 수 없고
六四 또한 음효가 음위(陰位)에 있어서 심히 유약하다.
비록 初九의 뜻을 좇아서 홀로 도(道)를 회복하려고 하지만,
유약한 음효이기 때문에 세상을 구제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효사에 허물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상전에도 무리와 더불어 가다가 혼자서 회복함은 도를 따르기 위함이라 하였다.
六四가 효변하면 진위뢰(震爲雷)가 된다.
九四는 우레가 수렁에 빠진다.
九四는 위(位)가 바르지 못한데 위아래 네 음효들 중간에 빠져서
이중으로 어려움 속에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동함으로 나아가는 우레가 수렁 속에 빠졌다고 말한 것이다.
[六五] 敦復无悔(돈독무회)
돈독한 회복이다. 후회가 없다.
象曰 敦復无悔(돈독무회) 中以自考也(중이자고야)
돈독무회는 중도로 스스로 이룸이다.
六五는 곤(坤)의 중(中)을 얻어 중용의 덕을 가진 후덕한 군주이다.
비록 아래에 정응이나 친비도 없지만,
중도를 지켜서 스스로 돈독(敦篤)하게 회복하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상전에서도 돈독한 회복으로 후회가 없음은
중(中)으로써 스스로 이루기 때문이라 했다.
육오가 효변하면 수뢰둔(水雷屯)이 된다.
九五는 은혜를 널리 베풀기는 어렵기 때문에 작은 일에는 길하지만 큰일에는 흉하다.
수뢰둔은 지뢰복과 마찬가지로 初九의 영향력이 가장 커서
九五는 六二에게만 그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그 은혜를 널리 베풀기 힘든 것이다.
[上六] 迷復凶(미복흉) 有災眚(유재생) 用行師(용행사) 終有大敗(종유대패)
以其國君凶(이기국군흉) 至于十年不克征(지우십년불극정)
미혹된 회복이니 흉하다. 재앙이 있다. 군사를 부리면 결국 크게 패한다.
나라를 다스리면 군주가 흉해서 10 년이 되도록 나아가지 못한다.
象曰 迷復之凶(미복지흉) 反君道也(반군도야)
미복지흉은 군주의 도에 반한 것이다.
上六은 복(復)의 극(極)이자 마침이다.
그러나 응(應)도 비(比)도 없다.
上六은 음효로 재능도 없고 도와줄 만한 初九도 멀리 있다.
음유(陰柔)한 성품과 쉽게 따르는 곤(坤)의 극(極)에 있어서 미혹되기 쉽다.
미혹되어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비록 정벌을 나서도 크게 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10’은 실제 기간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10’은 수(數)의 종극이기 때문에 영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전에서도 미혹된 회복으로 흉한 것은 군주의 도에 반(反)하기 때문이라 했다.
上六이 효변하면 산뢰이(山雷?)가 된다.
上九는 자신에 의해서 부양된다.
위태롭게 여기면 길하고 대천을 건넘이 이롭다.
음유하고 재능이 부족한 군주의 신임을 받아서 천하의 어려움을 구하고 부양한다.
따라서 上九가 스스로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에 어렵게 여기고 두려워해야 길하다고
경계한 것이고 마침내 큰 경사와 복이 있다.
25. 천뢰무망(天雷无妄)
욕심 때문에 망동(妄動)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경거망동 하지말라!
괘사(卦辭)
석중온옥(石中蘊玉), 수구안상(守舊安常),
제갈묘책(諸葛妙策), 가절단계(可折丹桂),
천의순종(天意順從), 종성감우(終成甘雨),
돌(石) 속에서 옥(玉)을 만지려 하나 옛 것을 지키는 것이 평안하다
제갈 공명의 뛰어난 묘책이 말뿐이니 내가 그리워하는 월계수의 꿈을 꺽는다
만고에 변하지 않는 도리를 따른다면 끝내는 봉황의 단비를 만나리라
‘무망’(无妄)이란 망동(妄動) 즉, 거짓되지 않고 올바르고 진실한 것이다.
본성대로 자연스럽거나 혹은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일이나 어쩔 도리 없는 일을 뜻한다.
괘상은 건상진하(乾上震下)이다.
건(乾)은 하늘, 노부, 군자, 말, 머리, 둥근 것, 강건함을 뜻하고
진(震)은 우레, 장남, 용, 다리, 제후, 움직임, 봄, 광주리, 격분함을 뜻한다.
하늘 아래에 우레가 진동한다.
강건하게 움직여서 나아간다.
무망은 천명(天命)에 따라서 성명(性命)을 좇는 것이고,
지성(至誠)으로 쉬지 않고 만물을 낳고 기르는 천지의 올바른 도를 좇음이다.
무망은 크게 형통하지만 바르게 해야 이롭고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고 나아가도 이로움이 없다.
비록 사심 없는 행동이더라도 정도가 아니면,
허망한 망동(妄動)이기 때문에 조만간 재앙으로 돌아온다.
강건하게 움직이고 九五가 중(中)을 얻어서 六二와 응하여
중정(中正)한 덕으로 올바르게 하므로 크게 형통하다.
무망에서 벗어나면 곧 망동(妄動)이고
천리(天理)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재앙이 있다.
효사(爻辭)
[初九] 无妄(무망) 往吉(왕길)
망령되지 않음이다. 나아가면 길하다.
象曰 无妄之往(무망지왕) 得志也(득지야)
무망으로 나아가면 뜻하는 바를 이룸이다.
初九는 무망(无妄)의 시작이다.
하괘 진(震)과 무망(无妄)의 주효이다.
위로 정응은 없지만 중정한 六二와 친비하다.
初九는 친비 六二에게 사적으로 응하지 않고 무망으로 나아가면
비록 정응은 아니지만 같은 덕(德)의 九四가 도와준다.
다른 괘와는 다르게 무망과 대축에서는 음양이 서로 호응하면 이롭지 않다.
상전서에도 무망으로 나아가면 그 뜻하는 바를 이룬다고 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천지비(天地否)이다.
띠 뿌리를 뽑았는데 엉켜있다.
그 무리와 더불어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고 형통하다.
군자는 나아가지 않아야 올바른 시절이다.
[六二] 不耕穫(불경확) 不菑畬(불치여) 則利有攸往(즉이유유왕)
밭을 갈지 않고도 거두며, 개간하지 않아도 밭이 기름지다.
나아감이 이롭다.
象曰 不耕穫(불경확) 未富也(미부야)
불경확은 부유하려고 하지 않음이다.
六二는 중정하고 위의 중정한 九五와 정응이다.
밭을 갈지 않아도 거두고 땅을 묵히지 않고도 3년 묵은 기름진 밭을 얻는다는 것은,
부유하게 되려는 욕심이 없어서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저절로 이루는 것을 말한다.
六二는 유순하고 중정해서 욕심에 부유하게 되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무망의 도(道) 즉, 순리(順理)에 따른다.
순리에 맞는 것이 곧 무망이고, 욕심이 동해서 인위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망동이다.
상전에서도 밭을 갈지 않고도 거둠은 부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六二가 효변하면 천택리(天澤履)이다.
밟아나가는 길이 탄탄하다.
유인(幽人)과 같으면 바르고 길하다.
스스로 어지럽게 되지 않음이다.
[六三] 无妄之災(무망지재) 或繫之牛(혹계지우)
行人之得(행인지득) 邑人之災(읍인지재)
무망의 재앙이다. 묶어 놓은 소를 행인이 취한다. 마을사람의 재앙이다.
象曰 行人得牛(행인득우) 邑人災也(읍인재야)
행인이 소를 얻은 것은 읍인에게는 재앙이다.
六三은 진(震)의 극이다.
음효로 재능도 없는데 성품도 바르지 못하고,
거기에 불안정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앙이 있다.
자고로 사람이 망동하는 것은 욕심 때문으로,
비록 망동을 통해서 어떤 이익을 얻는다 해도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잃는 것이 있고 후회가 따른다.
망동으로 얻은 이익에는 항상 재앙이 뒤따르고
그에 상응하는 잃음이 있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망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상전에도 묶어 놓은 소를 지나가던 행인이 얻으면
그것은 마을사람에게는 재앙이라고 했다.
六三이 효변하면 천화동인(天火同人)이 된다.
九三은 유일한 음효 六二에게 욕심이 있어 중정한 군주인 九五와 싸우려 하지만
자신의 세(勢)가 부족하기 때문에 감히 드러내어 정면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숲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지만 3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한다.
[九四] 可貞无咎(가정무구)
올바름을 지킬 수 있으니 허물은 없다.
象曰 可貞无咎(가정무구) 固有之也(고유지야)
가정무구는 굳게 지키기 때문이다.
九四는 강건한 건(乾)의 시작으로 아래에는 정응이 없고 음위(陰位)에 있어서
과강(過剛)하지 않기 때문에 무망(无妄)할 수 있다.
九四는 강건하지만 사사로이 응(應)에게 욕심을 내지 않고 조급히 굴지 않는다.
고로 망동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킬 수 있고 허물은 없다.
상전에서도 올바름을 지킬 수 있으니 허물이 없음은 굳게 지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九四가 효변하면 풍뢰익(風雷益)이 된다.
六四는 중도를 지켜서 공(公)에게 고하면 공이 따라주기 때문에,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것과 같은 큰일도 이롭다.
六四는 성품이 바르고 유순하고 공손해서
위로 군주와 아래로 현인 초구를 의지하여 천하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九五] 无妄之疾(무망지질) 勿藥有喜(물약유희)
무망의 질병이다. 약을 쓰지 않으면 기쁨이 있다.
象曰 无妄之藥(무망지약) 不可試也(불가시야)
무망의 약은 시험하는 것도 불가하다.
九五는 중정(中正)의 덕이 있는 군주이다.
九五는 아래 중정한 六二와 정응이다.
걸릴만한 원인이 없음에도 생긴 무망의 질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다.
질병처럼 보이지만 사실 질병은 아니기 때문에, 약으로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약을 쓰지 말라 했다.
무망이 지극해서 발생한 것으로 약으로 다스릴 수 없는데
성급하게 약을 쓰면 망동이 되고 오히려 없던 병이 생길 수도 있다.
상전에서도 무망의 질병은 약을 시험하는 것조차 불가하다고 했다.
무망의 질병은 그것을 병이라 생각하고
과하게 근심하고 망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스스로 깨닫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면 병이 저절로 낫는 기쁨이 있다.
九五가 효변하면 화뢰서합(火雷噬嗑)이다.
六五는 말린 고기를 씹다가 황금을 얻었다.
위가 바르지 못한데 아래에 강을 타고 있어서 두려워하고 바름을 지켜야 허물이 없다.
[上九] 无妄(무망) 行有眚(행유생) 无攸利(무유리)
무망에 나아가면 재앙이 있다. 이로움이 없다.
象曰 无妄之行(무망지행) 窮之災也(궁지재야)
무망의 나아감은 궁색하여 재앙이라.
上九는 무망의 마침이자 극(極)에 처해서 무망이 지극하므로
그 자리에 그쳐야 하는데도 나아가려고 하면 망동하는 것이다.
망동하면 결국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고, 이로움이 없다.
무망(无妄)과 건(乾)의 극(極)에 있어 천도가 다해서 변하는 이치를 모르고 망동하면
재앙을 면하기 어렵다.
상전에도 무망인데 나아가면 궁극에 처해서 궁색하니 재앙에 이른다고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택뢰수(澤雷隨)이다.
上六은 그 따름이 지극해서 붙들어 매고도 동여맨 것 같다고 하였다.
26. 산천대축(山川大畜)
무망(无妄)해야만 크게 쌓을 수 있다
스스로 결핍 없는 삶을 사는 것.
스스로 자신의 삶에 답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크게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괘사(卦辭)
‘축’(畜)은 쌓아 모은는 것이고, ‘대축’(大畜)은 크게 쌓는 것이다.
괘상은 천뢰무망(天雷无妄)을 뒤집은 간상건하(艮上乾下)이다.
간(艮)은 산, 개, 소남, 귀신, 제사, 마침, 동북, 성실, 머무름을 뜻하고
건(乾)은 하늘, 머리, 노부, 대인, 수레, 둥근 것, 말, 서북, 강건함을 뜻한다.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 그치는 덕이 있다.
위의 산이 아래의 하늘을 그치게 해서 크게 쌓는다.
상승하는 성질의 양효를 두 음효가 저지함으로써 그치게 해서 쌓는다.
하괘인 하늘의 기(氣)를 산에 머물러 크게 쌓아서 상괘인 산의 산천초목을 길러낸다.
점사에 흉이 하나도 없을 만큼 크게 길하다.
두 음효가 네 양효를 저지해서 쌓으면 대축(大畜)이고,
하나의 음효가 다섯 양효를 저지해서 쌓으면 소축(小畜)이다.
소축은 六四가 공손하게 양들을 저지해서 쌓지만,
대축은 上九와 아래 두 음이 함께 간(艮)을 이루고 흔들림 없이 저지해서 크게 쌓는다.
대축(大畜)은 올바르게 쌓아야 이롭고,
크게 쌓았으면 세상에 나아가서 베풀어야 길하다.
능히 대천을 건넘과 같은 천하의 환란을 구제함이 이롭다.
이것이 대축(大畜)의 쓰임이기에 하늘의 호응을 받아서 도움을 받고
대천을 건넘과 같은 험한 일에 이롭다.
효사(爻辭)
[初九] 有厲(유려) 利已(이이)
위태함이 있으니, 그치는 것이 이롭다.
象曰 有?利已(유려이이) 不犯災也(불범재야)
유려이이는 재앙을 범하지 않음이다.
初九는 대축(大畜)의 시작이다.
대축은 아래의 건(乾)을 위의 간(艮)이 저지해 축적하는 것이다.
대축의 아래 세 효사들은 상승하는 성질이지만
오히려 저지당해서 그치는 것으로 뜻을 삼았고
위의 세 효사들은 저지하는 것을 뜻으로 삼았다.
또 대축에서는 호응관계가 곧 서로 저지하는 관계이다.
무망(无妄)과 대축(大畜)은 덕을 쌓는 시절로써, 음양이 서로 응하면 길하지 못하다.
初九는 양강하지만 아직 뜻만 앞설 뿐 지위나 덕이 부족하다.
위로 나아가고 싶은 뜻은 있지만
정응인 六四와 그쳐서 머무르는 간(艮)에 의해서 저지당한다.
잠시 때를 기다리며 그쳐서 덕을 쌓으면 이롭지만,
과강하게 나아가길 고집하면 위태롭다.
상전에서도 위태해서 그치면 이로움은 재앙을 범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초구가 효변하면 산풍고(山風蠱)가 된다.
초육은 아비의 일을 주관한다.
자식이 있으면 죽은 아비가 허물을 면한다.
위태롭게 여겨야 마침내 길하다.
[九二] 輿說輹(여탈복)
수레의 바퀴가 벗겨진다.
象曰 輿說輹(여탈복) 中(중) 无尤也(무우야)
여탈복은 중도로 하니 허물이 없다.
九二는 상괘의 군주 六五와 정응이다.
六五가 구이를 저지하기 때문에 도리 상 나아갈 수 없다.
마치 바퀴가 빠져서 나아가지 못함과 같다.
九二는 중용(中庸)의 덕이 있어 진퇴의 때를 알고
스스로 멈출 수 있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상전에도 수레의 바퀴가 빠짐은 중도로 하기 때문이고 허물이 없다 했다.
九二가 효변하면 산화비(山火賁)이다.
六二는 그 수염을 장식한다.
마치 수염이 턱에 붙어서 함께 움직이는 것과 같이
위의 양강한 九三과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 마땅하다.
[九三] 良馬逐(양마축) 利艱貞(이간정) 日閑輿衛(일한여위) 利有攸往(이유유왕)
좋은 말로 쫓는다.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함이 이롭다.
매일 수레몰기와 방비하는 법을 익히면 나아감이 이롭다.
象曰 利有攸往(이유유왕) 上合志也(상합지야)
이유유왕은 위와 뜻을 합침이다.
九三은 건(乾)의 극(極)에 차했고, 上九는 정응이 아니다.
上九는 대축의 극에 있어서 그쳐서 쌓는 것이 극에 이르러 변하니,
같은 양효로 위로 나아가는 동류 구삼을 이끌어준다.
마치 좋은 말을 타고 쫓는 것과 같이 빠르다.
그러나 九三이 과강하고 위태한 위치에 있어서,
자신의 힘과 上九만을 믿고 조급하게 망진하면 위험하다.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해야 이롭다.
날마다 수레몰기와 방비하는 법을 익히면 나아가도 이롭다.
상전에서도 나아감이 이로움은 윗사람과 뜻을 합했기 때문이라 했다.
九三이 효변하면 산택손(山澤損)이 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한 사람을 덜어내고 한 사람이 가면 벗을 얻게 된다.
[ 六四 ] 童牛之牿 (동우지곡)元吉(원길)
송아지의 뿔에 횡목을 덧대니, 크게 길하다.
象曰 六四元吉(육사원길) 有喜也(유희야)
육사가 크게 길함은 기쁨이 있음이다.
六四는 대신으로 初九와 정응이다.
위(位)가 바르기 때문에 성품이 올바르다.
위로는 군주의 사심을, 아래로는 백성들의 악을 저지한다.
뿔이 나기 시작하는 송아지는 철이 없어서 여기저기 마구 비비고 들이받기 때문에
미리 그것을 막기 위해서 뿔에 횡목(橫木)을 덧대서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과강한 초구를 비유한 것으로 망동을 경계시키고 미리 대비하면 크게 길하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악도 미약할 때 초기에 저지해야만 길하다.
이미 무성해진 뒤에는 다스리기가 어렵다.
六四가 효변하면 화천대유(火天大有)가 된다.
九四 대신은 위로 음유한 군주를 모시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성대한 부와 권세를 과시하지만 않으면 허물은 없다.
[六五] 豮豕之牙(분시지아) 吉(길)
거세한 돼지의 이빨이다. 길하다.
象曰 六五之吉(육오지길) 有慶也(유경야)
六五의 길함은 경사가 있음이라.
六五는 유순하고 중용(中庸)의 덕이 있는 군주다.
아래의 양강하고 중용의 덕이 있는 九二와 정응이다.
유순한 군주가 양강한 신하를 그쳐서 머물러 쌓는 것을,
미리 수퇘지를 거세해 순하게 길들여 다스리는 것이라 비유했다.
유약한 六五가 힘으로 양강한 九二를 저지할 수는 없다.
미리 적절한 시기에 마땅한 요령으로 다스려야 한다.
마치 돼지가 자라면 어금니가 나면 거칠어지기 때문에
미리 거세해서 성질을 순하게 만들듯이 세상의 악을 처리할 때도 미리 내다보고
적절한 시기에 그 근본을 손보면 준엄한 형벌을 쓰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상전에도 六五의 길함은 경사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六五가 효변하면 풍천소축(風天小畜)이다.
믿음을 두어 끌어당긴다. 그 이웃과 함께 부유하게 한다.
[上九] 何天之衢(하천지구) 亨(형)
사방으로 탁 트인 하늘의 대로(大路)이다. 형통하다.
象曰 何天之衢(하천지구) 道大行也(도대행야)
하천지구는 도가 크게 행해짐이다.
上九는 그치게 해서 크게 축적하는 대축(大畜)의 극(極)에 있다.
그침이 있으면 언젠가 나아감이 있다.
멈추어 쌓음이 지극하면,
이제 변해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으므로 그침의 끝에는 통하기 마련이다.
마치 아무런 방해도 없이 사방으로 탁 트인 대로(大路)와 같다.
하늘의 대로가 형통한 것은 그 형통함이 광활하기 때문에
앞에 막힘과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상전에서도 탁 트인 하늘의 대로인 것은 그 도가 크게 행해지는 것이라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지천태(地天泰)이다.
上六은 이제 불통(不通)이 된다.
민심을 잃으면 명(命)이 서지 않아서
이런 때에 군대를 부리면 반드시 패하고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바르다고 해도 인색하다.
27. 산뢰이(山雷頤)
병(病)은 입을 통해 들어오고, 화(禍)는 입으로부터 나온다
지혜와 생명의 출입구 입!
괘사(卦辭)
‘이’(頤)는 ‘악’(顎) 즉, 턱을 뜻하고 기르는 부양(扶養)을 뜻한다.
괘상은 간상진하(艮上震下)이다.
간(艮)은 산, 개, 손, 쥐, 마침(終), 머무름(居), 성실, 소남, 귀신, 제사를 의미하고
진(震)은 우레, 장남, 발, 제후, 광주리, 봄, 움직임(動), 격분해서 나아감을 의미한다.
괘의 상은 바깥은 즉, 初九와 上九는 양효로서 충실(實)하지만 안은 음효로 허(虛)하다.
턱을 상징하는 상하 두 양효가 이빨을 상징하는 네 음효를 머금고 있다.
위는 성실하게 그쳐서 머무르고 있지만 아래는 격분함으로 진동한다.
상악은 그쳐 있고 하악이 움직여 음식을 씹는다.
하괘 진(震)은 격분함으로 진동해서 욕심에 조급히 움직이니 세 효사들이 모두 흉하고
상괘 간(艮)은 성실히 머무르기 때문에 부동(不動)하고 모두 길하다.
입은 음식을 씹어서 사람의 몸을 기른다.
이(頤)는 입을 통해서 몸을 기르는 도로 바름을 지켜야 길하다.
무릇 언어는 입으로부터 나오지만, 음식은 입을 통해 들어간다.
이(頤)에는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함이 그 근본이다.
병은 입을 통해서 오지만 화는 입에서 나온다.
군자도 이(頤)의 상을 살펴서 언어를 신중히 하고 음식을 절제한다.
효사(爻辭)
[初九] 舍爾靈龜(사이영귀) 觀我朶頤(관아타이) 凶(흉)
너의 신령한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 턱을 벌리니 흉하다.
象曰 觀我朶頤(관아타이) 亦不足貴也(역부족귀야)
관아타이는 역시 귀하지 못하다.
初九는 六四와 정응이다.
初九는 씹는 주체인 아래턱의 주효이므로 스스로를 부양할 재능이 있지만
정응 六四에게 욕심이 생겨 입을 벌리니 흉하다.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어 바름을 잃고 六四를 탐해서 입을 벌리고 망동하면
강명(剛明)한 재능을 잃음과 같다.
무릇 군자는 위에 있으면 아랫사람들을 기를 수가 있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스스로 기를 수 있다.
이(頤)의 때 자기가 기를 수 있음에도 타인을 기르지 않고,
남에게 부양을 구하면 흉하다.
양이 음을 기뻐하여서 욕심 때문에 미혹되어
올바름을 잃고 본래의 강건한 재능을 잃기 때문에
상전에도 그런 행동이 귀하지 못하다고 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산지박(山地剝)이다.
初六은 상다리를 깎는다.
아래로부터 올바른 것(양)을 멸(滅)하기 때문에 흉하다.
[六二] 顚頤(전이) 拂經(불경) 于丘頤(우구이) 征凶(정흉)
거꾸로 부양받음은 상도가 아니다. 구(丘)에게 부양을 받으러 가도 흉하다.
象曰 六二征凶(육이정흉) 行失類也(행실류야)
六二정흉은 가면 동류를 잃기 때문이다.
六二는 위로 정응은 없고 初九는 친비이다.
음유한 六二는 스스로 기르지 못해 양효에게 부양을 구한다.
정응에게 부양을 구함이 상도인데 정응이 없어
거꾸로 아랫사람 初九에게 부양을 구하면 상도에 어긋난다.
윗사람 上九(丘)에게 부양을 구하러 가도 흉하다.
上九는 정응이 아니므로 나아가서 부양을 구하면 망동이다.
비록 六二가 나아가서 上九에게 구해도 응해주지 않는다.
나아가더라도 구함을 얻지 못하고 동류인 다른 음효들만 잃기 때문에
상전에도 나아가면 흉함은 동류(同類)를 잃기 때문이라 했다.
六二가 효변하면 산택손(山澤損)이 된다.
올바름을 지킴이 이롭고 나아가면 흉하다.
이것이 곧 덜지 않고 더해주는 것이다.
[ 六三 ] 拂頤貞(불이정) 凶(흉) 十年勿用(십년물용) 无攸利(무유리)
부양의 올바름에 어긋나서 흉하다. 십년이라도 절대 쓰지 말라. 이로울 것이 없다.
象曰 十年勿用(십년물용) 道大悖也
십년물용은 도가 크게 벗어난 것이다.
六三은 진(震)의 극(極)에 처했고 재능도 없고 성품이 바르지 못해서 조급히 망동한다.
위의 上九와 정응이다.
六三은 최악의 위(位)와 조건에 있어서 정도에 어긋난다.
십 년이 되도록 쓰이지 못한다.
상전에도 십 년이 되도록 쓰이지 못한 것은 도에서 크게 벗어났기 때문이라 했다.
六三이 효변하면 산화비(山火賁)이다.
그 꾸밈이 윤택하다. 오래토록 올바르면 길하다.
[六四] 顚頤(전이) 吉(길) 虎視耽耽(호시탐탐) 其欲逐逐(기욕축축) 无咎(무구)
거꾸로 부양을 받지만 길하다.
호시탐탐 그 바라는 것을 끊임없이 구해야만 허물이 없다.
象曰 顚頤之吉(전이지길) 上施光也(상시광야)
전이지길은 윗사람이 그 베푸는 것이 빛나기 때문이다.
六四는 상괘 간(艮)의 시작이다.
六四는 성품이 바른 대신으로서 아래의 현인 초구와 정응이기 때문에
初九로부터 거꾸로 부양받는다.
비록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양하는 것이 순리겠지만
지금은 거꾸로 아랫사람 初九의 부양으로 대신의 소임을 완수함으로써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게 되므로 길하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거꾸로 부양을 받지만
길함은 윗사람이 은혜를 베풀어서 빛나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호시탐탐 구해야 허물이 없다.
六四는 유약한 군주를 섬기는데 아랫사람의 부양을 받아서
대신의 소임을 다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업신여길 수가 있다.
호시탐탐 윗사람의 위엄을 갖춰야 업신여김 당하지 않는다.
六四가 효변하면 화뢰서합(火雷噬嗑)이다.
九四는 형벌을 다스리는 책임자로서 뼈에 붙은 마른 고기를 씹는다.
쇠와 화살을 얻는다.
어렵게 여기고 정도를 지켜야만 길하다.
[六五] 拂經(불경) 居貞(거정) 吉(길) 不可涉大川(불가섭대천)
상도가 아니다.
바르게 머무르면 길하다. 대천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象曰 居貞之吉(거정지길) 順以從上也(순이종상야)
거정지길은 순(順)하게 위를 따르기 때문이다.
六五는 음유한 군주로 재능이 없어서 친비 上九에게 부양받는다.
비록 상도에 어긋나지만 바르게 처신하면 길하다.
상전에도 바르게 머무르면 길한 것은 위의 上九에게 순하게 따르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군주가 거꾸로 부양받기 때문에
변고나 재난, 반란과 같은 큰일을 감당하기는 힘들다.
六五가 음유하므로 굳게 지키기 힘들기에 바르게 머무르라고 했다.
六五가 효변하면 풍뢰익(風雷益)이다.
九五는 성신을 다해 은혜를 베푼다.
물어볼 것도 없이 크게 길하다.
뜻을 크게 이루고 천하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쁨으로 따르므로 크게 빛난다.
[上九] 由頤(유이) 厲吉(여길) 利涉大川(이섭대천)
말미암아 부양한다.
두려워해야 길하다. 대천을 건너도 이롭다.
象曰 由頤厲吉(유이여길) 大有慶也(대유경야)
유이여길은 크게 경사가 있음이다.
上九는 이(頤)의 극(極)에 있다.
양강(陽剛)한 上九는 六五를 대신해서 천하를 부양한다.
上九는 재능이 부족한 군주를 대신해
천하의 환란을 구하고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게 여겨야 길하다.
上九가 교만하거나 군주를 업신여기지 않고 위태롭게 여기면
천하가 은혜를 입게 되고 대천을 건너는 큰일도 이롭게 된다.
상전에도 위태롭게 여기면 길함은 큰 경사가 있음이라고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지뢰복(地雷復)이다.
미혹된 회복이니 흉하고 재앙이 있다.
군사를 부리거나 전쟁을 하면 반드시 크게 패하고
나라를 다스리면 10년이 되도록 나아갈 수 없다.
28. 택풍대과(澤風大過)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
중독에 빠지지 말라!
괘사(卦辭)
‘대과’(大過)는 크게 지나치다 혹은 큰 허물이 있다는 의미이다.
소과(小過)는 위아래 음효들이 과하고, 대과(大過)는 중앙에 양효들이 과하다.
택풍대과의 네 양효들을 하나의 양효라고 간주하면 하나의 큰 감(坎)이다.
괘상은 태상손하(兌上巽下)이다.
태(兌)는 기쁨, 소녀, 연못, 양, 입, 수다, 무당동굴(穴), 가을, 은둔이라는 뜻이 있고,
손(巽)은 바람, 나무, 장녀, 시장, 장사, 3배의 이익, 닭, 허벅지, 들어감(入),
냄새, 의심, 공손함, 순종한다는 뜻이 있다.
위의 연못(兌)이 과해서 아래의 나무(巽)를 멸함이다.
나무가 성장하려면 물이 필요하지만,
적절함을 넘어서 나무가 물에 잠기면 뿌리가 썩게 된다.
아무리 필요한 것도 과하면 아니함만 못하다.
안으로 공손하고 밖으로는 기뻐함이다.
대과(大過)는 유약한 두 음효가 너무 과한 네 양효들을 지탱할 수 없어서
기둥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
대과(大過)의 시작과 마침이 약하고 강(剛)이 과하나 九二와 九五 모두 중(中)을 얻었고
공손하고 기쁘게 행하니, 나아가면 이롭고 형통하다.
효사(爻辭)
[初六] 藉用白茅(자용백모) 无咎(무구)
흰 띠풀로 자리를 깐다. 허물이 없다.
象曰 藉用白茅(자용백모) 柔在下也(유재하야)
자용백모는 유(柔)가 아래에 있음이다.
初六은 九二와 친비이고 九四는 정응이다.
初六은 비록 지위도 재능도 없지만, 손(巽)의 주효로서,
유순하고도 공손하고 친비와 정응이 돕는다.
고대에는 제사를 지낼 때 흰 띠풀로 만든 돗자리를 깔고 술을 뿌리면서 신을 청했다.
계사전에도 맨땅에 놓아도 좋은데 띠로써 깔았다면 지극히 신중한 것이라고 했다.
상전에도 흰 띠풀로 자리를 깐 것은 유(柔)가 아래에 있는 것이라 했다.
初六이 효변하면 택천쾌(澤天夬)이다.
앞 발꿈치가 왕성하다.
나아가서 이기지 못하면 허물이다.
[九二] 枯楊生稊(고양생제) 老夫得其女妻(노부득기여처) 无不利(무불리)
마른 버드나무에 새싹이 났다. 노부가 젊은 처를 얻었다. 이롭지 않음이 없다.
象曰 老夫女妻(노부여처) 過以相與也(과이상여야)
노부여처는 과(過)함으로써 서로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다.
九二는 정응은 없고 初六은 친비이다. 初六도 공손하게 따른다.
비록 九二가 중도를 얻었고 친비로서 서로를 구제하는 것이지만
다소 분수에는 과한 일이다.
상전에서도 노부가 젊은 처를 얻음은 다소 과하게 함께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상례도 아니고 조금 과하겠지만 자손을 볼 수도 있고 이롭지 않음이 없다.
대과(大過)에서 양이 음위에 있으면,
강유(剛柔)를 겸비해서 실도(失道)하여 크게 지나치게 되지 않는다.
마른 가지에 꽃이 피면 시들겠지만 싹이 나게 되면 크게 이롭다.
구이가 효변하면 택산함(澤山咸)이다.
장딴지에 감응한다.
흉하기 때문에 머무르면 길하다.
올바름을 지켜서 순리대로 응하면 해를 입지 않는다.
[九三] 棟橈(동요) 凶(흉)
기둥이 흔들리니 흉하다.
象曰 棟橈之凶(동요지흉) 不可以有輔也(불가이유보야)
동요지흉은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九三은 과강하지만 공손함(巽)의 극에 처했다.
위의 정응 上六은 九三을 도울 재능이 없고,
대과(大過)의 극(極)에 있어서 도우려는 뜻도 없다.
九三은 중도를 벗어나서 과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기 쉽고 타인과 어울리기 어렵다.
상전에도 기둥이 흔들려서 흉함은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九三은 과강하면서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데,
九五에게 정응까지 빼앗기는 최악의 상황이다.
도와주는 이가 없어 결국 흉하다.
마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기둥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
九三이 효변하면 택수곤(澤水困)이다.
진퇴가 어려워서 돌에 곤궁하다고 가시덤불에 앉음이다.
집에 들어가도 그 처를 보지 못하니 흉하다.
[九四] 棟隆 吉(동륭 길) 有它吝(유타린)
기둥이 높고 길하다. 다른 마음을 가지면 인색하다.
象曰 棟隆之吉(동륭지길) 不橈乎下也(불요호하야)
동륭지길은 아래가 흔들리지 않는다.
九四는 대신의 지위에 있고 아래의 初六은 정응이다.
九四는 음위(陰位)에 있어 유(柔)하여 과강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의 소임을 감당할 수 있다.
마치 기둥이 높아서 길한 것과 같다.
상전에도 기둥이 높아서 길함은 아래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군주를 보필해야 하는 九四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정응 初六을 사적인 마음에 구하면 인색하다.
九四는 이미 음위(陰位)에 있어 강유의 조화를 이루고도
다시 初六을 구하면 강(剛)을 해치는 과함이 된다.
이것을 다른 마음을 갖는 것으로 표현했고
큰 해로움에 이르지는 않는다 해도 인색한 일이다.
九二와 이미 부부가 된 젊은 처인 初六에게 두 마음을 가지지 말고,
대신으로서 위의 정응도 없는 군주 九五를 섬겨야 한다.
九四가 효변하면 수풍정(水風井)이된다.
六四는 우물을 고쳐서 수리하면 허물이 없다.
재능과 뜻이 부족하고 응도 없어서 만물을 구제하는 일에 쓰임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성품이 바르기 때문에 자신을 잘 살펴서 고치면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고 허물을 면하는 것이다.
[九五] 枯楊生華(고양생화) 老婦(노부) 得其士夫(득기사부) 无咎无譽(무구무예)
마른 버드나무에 꽃이 피었다.
나이든 지어미가 젊은 지아비를 얻으니 허물도 명예도 없다.
象曰 枯楊生華(고양생화) 何可久也(하가구야)
老婦士夫(노부사부) 亦可醜也(역가추야)
고양생화는 어찌 오래가겠는가? 노부사부는 또한 추한 것이다.
九五는 중정(中正)한 덕을 갖춘 군주이다.
그러나 아래에 정응이 없어서 공을 이룰 수 없다.
위의 친비한 上六은 과한 음효이므로 늙은 지어미라고 비유했다.
과한 음(陰)이 양(陽)을 얻어 서로 구제하는 것이 무익하지는 않다.
비록 허물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나 유익한 일이라 할 수도 없다.
마치 마른 버드나무 가지에 꽃이 핀 것과 같다.
비록 꽃이 피어도 생기(生氣)만 소모할 뿐 유익이 없다.
즉 아이를 갖지 못해서 후손을 잇지 못한다는 뜻이다.
상전에서도 마른 버드나무에 꽃이 핀 것이 어찌 오래갈 수 있고
늙은 지어미와 젊은 지아비 관계는 추한 것이라고 하였다.
九五가 효변하면 뇌풍항(雷風恒)이 된다.
六五는 그 덕을 항구하게 지키면 올바르다.
변함없이 오래토록 순종하는 것만 고수하는 것은 일부종사하는 부인에게나 길하고
사내대장부로서는 흉한 일이다.
[上六] 過涉滅頂 凶(과섭멸정 흉) 无咎(무구)
과하게 건너다가 이마까지 빠져 흉하다. 누구 탓을 할까?
象曰 過涉之凶(과섭지흉) 不可咎也(불가구야)
과섭지흉은 허물할 데가 없음이다.
上六은 음유(陰柔)한 소인이 대과(大過)의 종극에 처해서 정도를 어기고
자신의 역량도 무시하고 경솔히 나아가다 물에 빠져서
이마까지 빠지는 재난을 당한다.
하지만 스스로 과욕을 부려서 물을 건너려다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상전에서도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고 했다.
上六이 효변하면 천풍구(天風姤)이다.
그 뿔에서 만남이다.
궁색하지만 탓할 데가 없다.
上九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강함을 내세워서 만남을 구하기 때문에
스스로 궁색함을 자초하게 된다.
29. 감위수(坎爲水), 중수감(重水坎)
거듭된 어려움 속에도 한결 같은 믿음과 성실함을 가져라
험하고 어려운 때는 물 흐르듯 흘러라!
괘사(괘사)
감(坎)은 험난함이나 위험을 의미한다.
강물이 흐르면 구덩이가 생기기 때문에 위험한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
감(坎)은 물, 강물, 돼지, 중남, 귀, 법률, 도적, 위험, 근심, 달, 피(血),
겨울, 북쪽을 뜻한다.
하나의 양이 두 음 사이에 빠졌다.
빠지는 것이 험난한 것이다.
주역에서 수뢰둔(水雷屯), 감위수(坎爲水), 수산건(水山蹇), 택수곤(澤水困)을
4대 난괘라고 부르는데 모두 물과 관련된다.
감(坎)의 험난함이 거듭해 있어서 험난하지만
그 믿음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행해야 숭상함을 받는다.
험난함 속에서 행함이 없이 그쳐 있으면 험난함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행해야만 숭상함을 얻는다.
그 어려운 와중에도 형통할 수가 있는 것은
九二와 九五가 중(中)을 얻어 양실(陽實)하고 강중(剛中)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중실(中實)한 것은 진실하고 정성이 있는 믿음이다.
거듭해서 끊임없이 행함이 있게 되면
마침내 흐르게 되기 때문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공을 이루게 된다.
효사(爻辭)
[初六] 習坎(습감) 入于坎窞 凶(입우감담 흉)
험함이 거듭해 더 깊은 구덩이에 들어간다. 흉하다.
象曰 習坎入坎(습감입감) 失道凶也(실도흉야)
습감입감은 도를 잃음이고 흉하다.
初六은 험난한 감(坎)의 시작이다.
初六은 음효로 유약하고 재능도 없는데 위로 응도 없다.
위(位)가 바르지 못해서 성품도 바르지 못해서 험난함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거듭 험해서 더 깊은 구덩이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끊임없이 흐르는 도를 잃음이다.
상전에도 험난함이 거듭해 있어서 더 깊은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은
도(道)를 잃었기 때문이고 흉하다고 했다.
初六이 효변하면 수택절(水澤節)이다.
호정에도 나서지 않으니 허물이 없다.
절제의 시초로 언행을 삼가고 근신한다.
[九二] 坎有險(감유험) 求小得(구소득)
감(坎)의 때 험난함이 있다. 구함에 조금은 얻는다.
象曰 求小得(구소득) 未出中也(미출중야) 구
소득은 아직은 험난함 중에서 나오지 못함이다.
九二는 정응이 없고, 初六과 六三 두 음효들과 친비이다.
그래서 구하면 조금 얻음은 있다.
강중한 군자는 환란 중에도 스스로 보존할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얻음이 있다.
비록 두 음효 사이에 빠져서 험난해도 강중(剛中)한 덕이 있어서
初六과 같이 점점 더 깊은 위험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험난함에서 완전히 빠져 나온 것은 아니기에 조금 얻음이 있음이다.
상전에도 조금 얻음이 있음은 아직 험난함 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九二가 효변하면 수지비(水地比)이다.
안으로부터 친밀하다.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만 길하다.
[六三] 來之(래지) 坎坎(감감) 險且枕(험자침) 入于坎窞(입우감담) 勿用(물용)
오고 감에 험하다. 험함을 또 베개 삼는다.
더 깊은 구덩이에 들어간다. 쓰지 말라.
象曰 來之坎坎(래지감감) 終无功也(종무공야)
래지감감은 마침내 공(功)이 없는 것이다.
六三은 감(坎)의 극(極)에 있다.
주역에서 세 번째 효사는 항상 불안한 위치로,
하괘에 머무를지 상괘로 나아갈지 선택해야만 한다.
아래에 머물러도 험난하고 위로 나아가도 험난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인데 스스로 험지를 빠져나올 재능도 덕도 없다.
위로 의지할 정응도 없고, 감험의 극(極)에 처해서 환란이 지극하다.
분수를 지켜서 그쳐 있어야 하지만 바르지 못한 성품 탓에
감(坎)의 험난함에서 더 깊은 험난함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상전에도 오고 감에 험난하고 험난하니 마침내 공이 없다 하였다.
이런 처신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쓰지 말라고 했다.
六三이 효변하면 수풍정(水風井)이다.
우물을 깨끗이 해도 먹이지 못해서 마음이 슬프다.
길어서 쓸 수가 없다.
왕이 현명하면 더불어 그 복을 받을 것이다.
[六四] 樽酒(준주) 簋貳(궤이) 用缶(용부) 納約自牖(납약자유) 終无咎(종무구)
한 동이 술과 두 그릇 음식을 질그릇에 내어서
소박하게 바라지 창문으로 들이면 마침내 허물이 없다.
象曰 樽酒簋貳(준주궤이) 剛柔際也(강유제야)
준주궤이는 강유가 서로 사귀는 것이다.
六四는 험난한 때 정응도 없고 재능도 없는 유약한 음효이다.
다행히 위(位)가 바르고 위의 친비 九五도 중정한 덕이 있다.
성품이 바르지만 음유해 대신으로서 감(坎)의 때 천하의 험난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九五에게 꾸밈없는 소박한 도를 따라야 허물이 없다.
한 동이 술과 두 그릇 음식을 소박한 질그릇에 담아서
문도 아닌 바라지 창문을 통해서 섬기는 소박함과 친밀함으로 보필해야 허물이 없다.
상전에서도 한 동이 술과 두 그릇 음식은 강과 유가 사귀는 것이라 했다.
온화한 간언(諫言)과 소박(素朴)함, 성신(誠信)으로 섬겨야 마침내 허물을 면할 수 있다.
六四가 효변하면 택수곤(澤水困)이다.
오기를 천천히 하는 것은 쇠수레에 곤궁하기 때문이다.
정응 初六이 九二 때문에 천천히 와서 궁색하지만 마침은 있다.
[九五] 坎不盈(감불영) 祗旣平无咎(지기평무구)
아직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
이미 평평한 데에 이르게 되면 허물이 없다.
象曰 坎不盈(감불영) 中未大也(중미대야)
감불영은 중도가 크지 못한 것이다.
九五는 양강중정(陽剛中正)한 덕이 있는 군주이다.
그러나 아래에 응하여 돕는 이가 없다.
아직 구덩이가 차지 않아서 감(坎)의 험난함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 강중(剛中)한 도가 발휘될 수 없다.
그래서 상전에도 아직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 함은
중정한 도(道)가 크게 빛나지 못한다고 했다.
아래의 九二는 감(坎)의 험난함 속에 빠져 있어 도울 수도 없고, 정응도 아니다.
다른 음효들은 재능이 없어서 더욱 도와줄 수 없다.
비록 군주가 강중(剛中)한 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홀로 천하의 험난함을 구제할 수는 없다.
험난함을 구제하지 못하면 군주에게는 그것이 곧 허물이다.
그러나 구덩이가 다 차서 평평하게 되면,
감(坎)의 험난함을 극복할 수 있고 허물을 면할 수 있음이다.
九五가 효변하면 지수사(地水師)이다.
밭에 짐승이 있으면 명령을 받들어 잡음이 이롭고 허물이 없다.
장자가 군사를 통솔하게 하라.
그 형제들 여럿이 주장하게 하면 올바르더라도 흉하다.
[上六] 係用徽纏(계용휘묵) 寘于叢棘(치우총극) 三歲不得(삼세부득) 凶(흉)
끈으로 묶어서 가시 덩쿨에 둔다. 3년이 되도록 얻지 못한다. 흉하다.
象曰 上六失道(상육실도) 凶三歲也(흉삼세야)
상육이 도를 잃음(失道)은 그 흉함이 삼 년에 이름이다.
上六은 음유로 재능도 응도 없고 감험(坎險)의 극(極)에 처했다.
고대에는 감옥 주변에 가시나무를 심었다.
끈으로 묶어서 가시 덩굴에 둔다고 한 것은 포승에 묶어서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3년이 되도록 얻지 못함은 긴 시간동안 정도를 회복하지 못함을 뜻한다.
감(坎)의 흐르는 도를 잃음이고 또 극(極)에 이르러서 변하는 도(道)를 잃음이다.
상전에도 上六이 도(道)를 잃어서 그 흉함이 3년에 이른다고 했다.
上六이 효변하면 풍수환(風水渙)이 된다.
그 피(血)를 가게 한다.
두려움에서 나가면 허물이 없다.
해를 멀리하고 두려움을 떨쳐야 허물이 없다.
살다가 구멍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감정도 순식간에 구덩이로 빠진다.
무릇 서로의 감정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면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지기평(祗旣平)해야 할 것이다.
30. 이위화(離爲火), 중화리(重火離)
암소의 유순한 덕(德)을 길러서 올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유순하며 정도를 지키라!
괘사(卦辭)
‘리’(離)는 불, 눈, 꿩, 번개, 태양, 중녀, 무기, 무인, 남쪽,
화려함, 지혜로움, 달라붙음 등의 뜻이 있다.
불은 물질에 붙어야만 타고 뜨겁고 빛난다.
상하의 양(陽)이 중간의 음(陰)에게 달라붙는다.
불은 타오르고 또한 빛을 발하기 때문에 밝음과 화려함을 의미한다.
리(離)는 중앙이 허(虛)하고 밝게 빛난다.
또 리(離)에는 ‘이별’이라는 뜻도 있어서
달라붙는다는 뜻과 헤어진다는 상반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이위화(離爲火)는 리(離)가 거듭해 있다는 의미에서 중화리(重火離)로도 불린다.
붙따르는 리(離)는 올바르게 함이 이롭고 형통한데,
특히 암소를 기르면 길하다고 했다.
사람이 붙따름에 있어서 올바름을 좇아야 이롭고 형통할 수 있다.
암소는 유순한 동물로써 그 따름이 지극한 것을 상징한다.
올바름을 따르기를 지극히 유순하게 따르면 길하다는 뜻이다.
이위화(離爲火)는 타오르는 불이 연이어 있기 때문에
맹렬해지면 과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된 밝음으로 바르게 걸려 있도록 해서 천하를 교화시키고 완성한다.
사람도 친밀한 사람들과 달라붙어서 의지하지만 정도를 굳게 지켜야 이롭고 형통하다.
중화리(重火離)의 중(中)인 六二와 六五는 모두 유약한 음효이기 때문에,
더욱 굳게 올바름을 지켜야 형통하다.
상하의 양효들 사이의 음효가 곧 유순한 암소로서 그 유순한 덕을 기르면 길한 것이다.
효사(爻辭)
[初九] 履錯然(이착연) 敬之(경지) 无咎(무구)
발걸음이 어지러워 머뭇거린다. 공경하면 허물이 없다.
象曰 履錯之敬(이착지경) 以辟咎也(이피구야)
이착지경은 이로써 허물을 피하는 것이다.
初九는 위로 타올라서 달라붙는 리(離의 시작이다.
위로 정응은 없고 六二와는 친비이다.
불도 위로 타오르고, 양(陽)도 위로 나아가는 성질이다.
양강한 초구는 위에 응도 없지만 성질상 위로 밟아 나아가고 싶다.
다행히도 위(位)가 바르고 밝은 덕이 있는 初九는 밟아 나아가다가
여의치 않음을 알고 머뭇거린다.
初九는 자신의 낮은 지위와 이치를 살펴서 정응도 아닌 九四에게 나아가지 않고,
바로 위의 친비하고 중정한 덕이 있는 六二를 공경하면 허물이 없게 된다.
상전에도 발걸음이 어지러워서 머뭇거리다가 공경함은
허물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初九가 효변하면 화산려(火山旅)이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곳으로 여행하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올바름을 굳게 지켜서 겸손히 해야 화를 면할 수가 있다.
만사가 시의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겠지만 여행 중에는 일정한 거처가 없으므로
더욱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에 때가 중요하다.
그 때에 알맞게 유순하고 겸손하게 행동해야만 화를 면할 수가 있다.
그러나 初六은 여행을 하다가 곤궁한 처지에 처하게 되자
비루하고도 옹졸하게 굴다가 결국 화를 자초한다.
[六二] 黃離(황리) 元吉(원길)
황색(중도)에 걸려있다. 크게 길하다.
象曰 黃離元吉(황리원길) 得中道也(득중도야)
황리원길은 중도를 얻었음이다.
황색은 오행에서 중앙에 해당하는 흙(土)의 색으로, 곧 중도(中道)를 의미한다.
따라서 황색에 걸려있다는 것은 중도를 좇아서 행하는 것이다.
밝은 덕이 있는 리(離)의 중(中)을 얻어서
유순하고 중정(中正)하므로 분별하는 지혜가 있다.
상전에서도 황색에 걸려있어서 크게 길한 것은 중도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六二가 효변하면 화천대유(火天大有)이다.
九二는 큰 수레에 짐을 싣고 나아가도 허물이 없다.
九二는 강건하면서 중(中)을 얻어서 막중한 소임도 능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九三] 日昃之離(일측지리) 不鼓缶而歌(불고부이가) 則大耋之嗟(즉대질지차) 凶(흉)
해가 기울어져 걸려 있다.
질그릇 술잔을 두드리며 노래하지 않고 늙은이가 탄식하면 흉하다.
象曰 日昃之離(일측지리) 何可久也(하가구야)?
일측지리는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九三은 하괘 리(離)의 극(極)에 처했다.
앞의 밝음이 다하고 이제는 해가 저무는 때이기 때문에,
마치 기우는 해가 서산에 걸려있는 상이다.
하늘의 상도(常道)는 성대해지면 쇠락하고 또 시작하면 반드시 마침이 있다.
인생사도 마찬가지이다.
인생 말년에 하늘의 상도(常道)를 깨닫게 되면
천명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마음 편히 남은 여생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노옹이 천수를 다했다고 지나버린 때가 그리워서 한탄만 한다면 흉하다.
해가 서산에 걸려있으면, 그 밝음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상전에서도 날이 기울어 해가 걸려있으면 그것이 어찌 오래갈 수 있는가 물었다.
구삼이 효변하면 화뢰서합(火雷噬嗑)이다.
말린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난다.
조금 궁색하지만 허물은 없다.
六三이 강폭한 죄인인 상구를 형벌로 다스리지만 쉽사리 다스려지지 않는다.
비록 조금 궁색한 일이지만 六三의 허물은 아니다.
[九四] 突如其來如(돌여기래여) 焚如死如棄如(분여사여기여)
돌연히 그것이 온다.
불사르는 듯하고 죽는 듯하고 버림받는 듯하다.
象曰 突如其來如(돌여기래여) 无所容也(무소용야)
돌여기래여는 받아들여질 바가 없음이다.
九四는 하괘의 불이 상괘로 올라와서 그 밝음을 계승하는 위치에 처했다.
돌연 불이 세차게 타오른다.
九四는 양강(陽剛)하지만 위(位)가 바르지 않고 중(中)을 얻지 못해서
조심하지 못하고 조급하기 때문에, 계승하는 도리를 잃은 것이다.
그래서 상전에서도 돌연히 오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고 했다.
위아래의 믿음을 잃고 위급한 상황에 처해도 발붙일 곳이 없다.
마치 감위수에서 六三과 같은 처지다.
아래의 불을 계승하려면 반드시 중도를 지켜서 신중히 순리에 따라 이어받아야 한다.
위로 유순한 군주를 보필하기 때문에 조급하게 강성한 기세로 계승하려고 하면,
마치 성난 기세로 불길이 타올라서 군주를 능멸할 것만 같고
불살라 죽여 버리니 반드시 흉하다.
九四가 효변하면 산화비(山火賁)이다.
六四는 꾸밈이 소박하다.
백마가 나는 듯하다.
九三은 六四에게 도적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혼하려고 오는 것이다.
허물은 없다.
[六五] 出涕沱若(출체타약) 戚嗟若(척차약) 吉(길)
흐르는 눈물이 비 오듯 한다. 슬퍼서 탄식하니 길하다.
象曰 六五之吉(육오지길) 離王公也(이왕공야)
六五의 길함은 왕의 자리에 걸려있음이다.
六五는 유순중용(柔順中庸)한 군주이다.
六五는 중(中)을 얻어 밝은 덕이 있지만 음효이기 때문에 재능 있는 양효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괘에는 응(應)이 없어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조급하고 양강(陽剛)한 九四를 올라타고 있어서 위태롭기 때문에
눈물이 비가 오듯이 흐르고 탄식한다.
하지만 군주 六五는 밝은 지혜가 있어서 군위(君位)에 있다고 태연자약하지 않는다.
걱정하고 경계함으로 눈물을 흘릴 정도이니 길하다.
군위에 있어서 아무리 강폭한 자라도 명분 없이 함부로 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돕는 충신들이 있어서 길하다.
그래서 상전에도 六五의 길함은 왕의 자리에 걸려있기 때문이라 했다.
六五가 효변하면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九五는 처음에는 부르짖어 울겠지만 뒤에는 웃게 된다.
큰 군사로 이겨야 서로 만난다.
아래의 六二와 정응이지만 九三과 九四가 중간에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중정(中正)한 덕의 군주 九五는,
의리로나 세력으로 보나 반드시 이기기 때문에 마침내 웃게 된다.
그러나 큰 군사로 이겨야만 한다.
[上九] 王用出征有嘉(왕용출정유가) 折首(절수) 獲匪其醜(획비기추) 无咎(무구)
왕이 출정하면 아름다움이 있다.
머리(乾道)를 꺾고 그 추함을 얻는 것이 아니면 허물이 없다.
象曰 王用出征(왕용출정) 以正邦也(이정방야)
왕용출정은 나라를 바르게 함이다.
上九는 양강(陽剛)하고 아래 군주 六五와 친비이다.
上九는 군주 六五의 명을 받아서 무도(無道)한 자를 정벌한다.
이것은 上九가 밝은 지혜가 지극하고,
강명(剛明)하지만 음위에 있어서 유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명함이 너무 과하면 사소한 것까지 들추게 되고, 그것이 지나치면 관용이 부족하다.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도 중도를 지켜 허물이 없고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상전에도 왕이 출정함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上九가 효변하면 뇌화풍(雷火豊)이다.
上六은 교만해서 그 집을 풍성하게 만들어 놓고도
거적을 둘러서 가려서 스스로 단절함이다.
그 문으로 들여다보니 사람도 없고 고요하다.
3년이 되도록 사람을 볼 수 없으므로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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