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7년{AD479}을미,
9월, <삼근三斤>은 대두산성(大豆山城)을 버리고 두곡(斗谷)으로 도망갔다.
조정이 <연신燕信>을 시켜 <해구解仇>의 남은 무리들을 모아
<삼근三斤>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삼근三斤>은 열다섯으로 어린 나이로 <해구>의 처 <진>씨와 그 딸을 처로 삼고,
또 <곤지>의 처 <진선真鲜>을 첩으로 삼고 음란을 일상사로 하였다.
<곤지>의 아들 <모대>{동성왕}를 아들로 삼았는데 한 살이 적었다.
그러나 <모대>는 <삼근>을 아비로 잘 섬겼으며
또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았으며 태도가 매우 아름다웠다.
<삼근>이 그를 곁에 두고 정사를 맡기니,
<모대>의 어미 <진선真鲜>에 대한 총애가 최고였다.
<삼근>이 점점 일어나지 못하더니 병이 커져 죽었다.
혹 <진선真鲜>이 <모대>를 위하여 그를 독살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는 <해구>의 처가 퍼뜨린 것이다.
11월, <모대>가 즉위하여 <삼근>이 죽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해구>의 처와 딸 모두는 <삼근>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죽었는지를 몰랐다.
<모대>는 <해구> 처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삼근>을 섬겼던 <해구>의 딸을 처로 삼고,
자신의 외삼촌 <진로眞老>를 위사좌평으로 삼았다.
상이 황손과 <경鯨>후를 데리고 온천엘 갔다.
<풍馮>녀가 <조다助多>태자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리卑離>의 <첩실疊實>이 거란과 모반한 일이 발각되어
해산(海산)으로 유배 보내라 명하고 <대산帶山>을 시켜 다스리게 하였다.
<장수대제기>
四月 .............
加耶賛明 金官治水 扶余牟大 來會
<소지명왕기>
(479년) 4월, .............
가야의 <찬명賛明>, 금관의 <치수治水>, 부여의 <모대牟大>가 와서 만났다.
十一月 壬乞以疾卒
王遣阿飡阿珍宗 冊牟大爲扶余君
牟大者 文洲弟昆支子也
有膽力善射 與文洲妻宝留相通 媚事我國
至是 得立 仍賜首器爲妻
<소지명왕기>
11월, 임걸{삼근왕}이 병으로 죽었다.
왕이 아찬 <아진종阿珍宗>을 보내 <모대牟大>를 부여의 임금으로 책봉하였다.
<모대>는 <문주>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았으며,
<문주>의 처 <보류宝留>와 상통하고 우리나라를 순종하며 섬겼다.
이제 임금의 자리를 손에 넣으니 <수기首器>를 처로 하사하였다.
雄略天皇二三年(己未四七九)
廿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皇 以昆攴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일본서기>
웅략천황 23년 (기미 479)
23년 하 4월, 백제 문근왕{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 <말다>왕이 나이가 어려도 총명하기에,
조서로 궁전으로 불러 머리와 얼굴을 친히 쓰다듬으며 은밀히 천자의 명을 고하여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이에 병기를 주고 축자국 군사 5백 명을 같이 보내 그 나라로 호위하여 보내주었다.
이 사람이 동성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근왕은 재위 3년째인 서기 479년 11월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어,
그가 11월이 아니라 4월에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79년 11월에는 <삼근>의 발상, 즉 죽음을 공표한 것이지,
11월에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시해당하고 정정이 불안할 때는 그 발상을 늦추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구려 측의 기록은 그 죽음을 아무도 몰랐다고 기록하였으니,
삼근이 11월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기 475년 신라는 웅진을 백제에게 할애하여 백제의 부흥을 돕고,
친 신라계 <문주>를 통해 백제를 속국화 시켰다.
하지만 <문주>가 <해구>에게 제거된 후 신라의 영향력이 감쇠하자
신라가 다시 친 신라계 <모대>를 지원하여 왕으로 봉하게 된다.
<모대>는 잠시 신라에 볼모로 살면서 자비왕의 딸 <준삭>과 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역사에서는 <삼근>이 서기 479년 9월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이 사건을 <모대>의 어미 <진선>의 독살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대두산성을 버리고 두곡으로 피신하였을 때,
이를 기회로 삼아 <모대>의 무리들이 <삼근>왕을 시해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와 금관, 백제가 신라로 들어와 모종의 모임을 가졌다는 것은
신라가 이때 <모대>를 지원하기로 약속하며 가야와 금관으로 하여금
<모대>를 도우라고 지시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당시 웅진을 백제에 할애하고 <모대>를 백제왕으로 지원한 것은 신라이다.
신라사에서도 고구려사와 마찬가지로 삼근이 9월까지 생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0월을 건너뛰고 11월에 그의 사망소식을 기록하고 있으니,
고구려사와 견주어 볼 때 삼근이 9월에 사망하고 11월에 발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보류宝留>는 신라왕자 <보해寶海(390-441)>의 딸이다.
<모대>는 <보류宝留>와 친하게 지내며 신라에 그 우의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신라사의 역사를 그들 나름대로 가공하여 기록한 것이다.
<모대>의 무리들이 4월부터 <삼근>을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며,
9월에 두곡으로 피신한 <삼근>이 독살당하고,
11월에 <삼근>의 발상을 하며 <모대>가 즉위한 것이다.
곤지는 개로왕과 문주왕의 아우로서 개로왕 7년(461년)에 왜에 파견되어
왜의 청령천황으로 즉위하였고 문주왕 2년(476년)에 형 왕 문주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다.
내신좌평에 오른 그는 왕권과 조정을 지키기 위해 해구 세력과 대치하다가
해구에게 477년에 살해되었다.
살아 있을 당시 곤지는 진씨 세력과는 꽤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해구를 핵심으로 하는 해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력한 외척인 진씨 일가와의 결탁은 필연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변에 성공한 진씨 세력이 곤지의 아들을 택해 왕으로 삼고자 한 것은
그와 같은 배경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리하여 14세의 모대가 즉위하니 동성대왕이다.
『삼국사기』는 즉위 당시 동성대왕에 대해서 평하길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 이었다’고 쓰고 있다.
동성대왕 초기에는 진씨 세력에 의해 조정이 움직였는데,
해구에 대항하여 반군을 일으킨 <진남>이 병권을 쥐고 병관좌평에 올라 있었고,
해구의 목을 친 <진로>가 덕솔로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재위 4년(482년)에는 <진로>가 병관좌평에 올랐는데,
기록에 나오지는 않지만 <진남>은 상좌평으로 승격된 듯하다.
<진로>는 그로부터 동성대왕 재위 19년까지 약 15년 동안 병관좌평에 머무르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때까지는 진씨 정권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진씨 이외에도 조정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沙)씨, 백(苩)씨, 연(燕)씨 등이다.
이는 동성대왕 6년에 내법좌평 <사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고,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했으며,
19년에는 달솔로 있던 <연돌>을 병관좌평에 입명한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서』에 백제에는 '큰 성씨로 여덟 씨족이 있는데, 사(沙), 연(燕), 리씨, 해씨,
정씨, 국(國)씨, 목(木)씨, 백씨 등이다.’라고 했는데,
사씨와 백씨, 연씨 등은 동성왕 때를 전후하여 성장한 성씨이다.
해씨와 연씨는 온조 일행이 망명해올 때 함께 온 부여 출신인데,
해씨는 온조왕의 본가 쪽 성씨이고, 연씨는 외가 쪽 성씨이다.
리씨, 정씨, 백씨, 사씨 등은 마한 본토배기일 것이며,
목씨나 국씨 등은 왜에서 건너온 성씨인 듯하다.
그런데 이 여덟 성씨 중에 진씨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동성대왕 이후에 진씨 일족이 몰락했음을 의미한다.
동성대왕 19년에 <진로>가 죽은 뒤로『삼국사기』에
진씨 일족의 이름이 전혀 거명되지 않는 것도 그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재위 19년에 <진로>의 후임으로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통해
이 무렵부터 동성대왕이 진씨 일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대왕은 즉위 이후 줄곧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때문에 여러 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첫 전쟁은 일방적으로 당한 싸움이었다.
재위 4년 9월에 말갈이 한산성(남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당시 백제는 정치와 군사가 모두 불안한 상태였기에 말갈을 공격할 힘이 없던 때였다.
때문에 동성대왕은 이듬해 봄에 직접 한산성으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무르며
군사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동성대왕은 궁실을 중수하고 성곽을 보수함으로써
외침에 대비하였는데, 그 무렵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선비의 탁발 씨가 세운 북위와 마찰을 일으켜,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싸움의 원인은 백제가 대륙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백제와 북위가 싸운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사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분석해보면, 그 내막을 대충 알아낼 수 있다.
동성대왕은 즉위 후 줄곧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잃었던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백제의 땅 중에 가장 크게 잃은 곳은 역시 대방 지역의 대륙 영토였다.
한반도에서도 한강 북쪽 땅 일부를 고구려에 빼앗기긴 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하지만 백제의 대륙 영토는 발해와 황해의 해안선을 따라
요서 지역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었다.
고이왕이 대륙을 개척한 이래,
근초고왕 대를 거치면서 크게 확대된 백제의 땅은
아신왕 대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대폭 빼앗겼고,
다시 개로대왕 대에 장수대제에게 한성이 함락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영토마저도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동성대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잃었던 대륙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옛 영화를 되찾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모로 그것의 실현을 강구했을 법하다.
그런데 당시 대륙백제의 옛 영토는 거의 북위가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백제는 북위에게 그 영토의 일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을 공산이 크다.
백제가 옛 영토를 돌려달라고 하자,
북위는 당연히 어림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이에 백제는 486년 3월에 북위의 라이벌인 남제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백제가 남제와 결탁하여 대방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요서 지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자,
북위는 무력으로 백제를 응징하려 했다.
그래서 488년에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백제군의 강력한 방어진을 뚫지 못하고 패배하여 퇴각해야 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일을 동성대왕 10년(488년) 기사에
‘위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짧은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다.
중국 대륙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위나라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편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위나라가 백제를 침략했다면,
당연히 배를 타고 공격해 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2년 뒤의 사건을 기록한『남제서』의 다음 기록은
『삼국사기』의 편자들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수군도 아닌 기병이, 그것도 수십만이 백제를 쳐들어왔다면,
그것은 필시 대륙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에 백제의 땅이 있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편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삼국사기』편자들은 490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아예 삭제해버렸다.
백제의 땅이 대륙에,
그것도 요서 지역에서 양자강에 이를 만큼 광활한 영토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몰랐다.
『삼국사기』편자들의 한정된 시각은 고스란히 현대 사학계에도 이어져,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의 사학자들이 이 기록을 잘못된 사료라고 해석했으니,
통일신라 이후 형성된 한반도 사관의 깊은 골은
백제의 대륙 역사를 무려 1300년 동안 땅 속에 묻어버렸던 셈이다.
하지만『남세저』는 당시의 일을 동성대왕이 건무 2년(495년)에 올린
다음의 표문을 통해 잘 알려지고 있다.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하사하신 부절과 도끼를 받아들고
여러 제후들을 극복하여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 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 받는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490년)에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깊숙이 핍박하여 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같이 들이치니,
흉노의 선우가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머리를 베니
들녘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동성대왕의 표문은 이처럼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때 쳐들어온 위나라의 군대를 수십만 기병이라고 명시한 것은
『남제서』의 편자들이었고,
동성대왕의 표문은 그저 ‘험윤이 병사를 일으켜’라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동성대왕의 표문에서는 위나라 병력에 대해 부풀리지도 않았고,
상황을 과장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표문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 때의 위나라의 침입은 한 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표문에서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라는 부분과
‘지난번 <저근> 등이 관작을 제수 받은 은총을 입은 것으로’라는 부분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전자는 험윤이 이미 첫 침입해서 패배했는데도
반성하지 않고 또 침입을 감행했다는 뜻이며,
후자는 이 때 첫 침입을 막아낸 장수가 <저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삼국사기』동성왕 10년(488년)의
‘위나라가 우리를 침입했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남제서』490년 경오년의 기록과 중복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위나라의 백제에 대한 공격은 488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는 것이다
동성대왕이 표문을 올린 목적은 490년 전쟁에서 공을 올린 장수들에게
남제의 황제가 직접 관작을 제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나라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은 <사법명> 등의 책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기리고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임시하고,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으며,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 데다 또한 누선을 쳐 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천자의 은혜로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고
청을 들어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 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 태수겸 사마 신 <왕무> 및
겸참군행진 무장군 조선 태수 신 <장색>,
그리고 행양무장군 <진명>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로지 임무를 공변되게 하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이행함에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임명함에 거듭되는 험난을 무릅쓰고 다니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관작을 올려줘야 함에 각기 행(行)으로 임명하여 임시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조정에서 특별히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에서도 위나라의 침입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 데다’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즉, <목간나>도 <저근>과 함께 위나라의 1차 침입을 막아낸 장수라는 것이다.
또한 <목간나>가 위나라의 ‘누선을 쳐 빼앗았다’는 것은
위나라가 수군도 동원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동성대왕이 올린 관직에는 모두 ‘행(行)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본문에서도 나왔듯이 임시직책이라는 뜻이다.
즉, 관작은 남제의 황제가 내리는 것이므로 동성대왕이 관작을 확정할 수 없기에
’행‘을 붙여 임시직으로 삼고,
임시직으로 올린 그 관작을 정식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이다.
남제의 황제는 ’조서로써 허락하고 나란히 군호를 하사하였다‘고
『남제서』는 기록하고 있다.
동성대왕이 올린 관작은 중요한 사실을 또 하나 일깨우고 있는데,
그것은 관작에 포함된 지명들이 가지는 의미이다.
표문에서 동성대왕은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로 있던 <고달>을 행용양장군 대방 태수로,
행건위장군 조선 태수겸 사마에 있던 <양무>를 광릉 태수로,
<회매>는 청한 태수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 <모유>의 관작에 낙랑 태수, 왕무의 관작에 성양 태수 등의 호칭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보이는 광양, 광릉, 대방, 조선, 청하, 낙랑, 성양 등의 지명은
어디에 있는 땅인가?
낙랑은 하북성 북경서남 보정시에, 대방은 석가장시에 있으므로,
이 지명들은 모두 중국 대륙,
그것도 요서 지방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중국 해안 지역에 있었다.
즉, 이 일곱 개의 지명은 백제가 영유권을 행사하던 대륙백제의 땅이라는 뜻이다.
동성대왕이 제나라에 보낸『남제서』의 글을 보면
이 때 백제가 장악한 지역이 관직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표문에서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면중왕, 도하왕, 아착왕, 매라왕, 백중왕 등의 작호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백제의 신하에게 남제의 황제가 왕의 관작을 내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동성대왕에게는 백제 왕의 작호가 내려졌는데,
굳이 사법명과 찬수류, 저근, 여력, 여고(餘古) 등에게
왕의 칭호를 내린 까닭은 무엇인가?
동성대왕이 요구한 것으로 봐서, 그것은 백제에서 꼭 필요한 조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왕의 칭호를 쓰는 장수가 필요했을까?
동성대왕의 이런 요구는 대륙백제의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왕의 관작을 받은 이들은 대륙백제를 나눠 다스리는 총독 같은 역할을 하고,
해례곤과 목간나, 여고(餘古) 등은 불중후와 면중후, 불사후로서 그들을 보좌하고,
낙랑ㆍ조선ㆍ성양ㆍ광릉ㆍ대방ㆍ광양 태수들이 그들 아래에 있으면서
대륙백제의 각 지역 행정을 맡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제 황제가 내린 관작이 필요했던 것도
대륙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북위의 군대를 몰아내고 대륙백제의 고토를 회복한 장수들은
동성대왕 대의 대륙백제를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왕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백제는 두 차례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대륙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고, 국제 무대에서도 그 영유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백제의 힘은 막강해졌다.
그래서 재위 15년(493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할 왕녀를 요청했다.
이미 정비와 여러 후비를 거느리고 있던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왕녀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의 힘이 강성해졌다는 뜻인데,
신라도 그 점을 인정하여 이찬 비지의 딸을 동성대왕에게 시집보냈다.
494년에는 신라가 고구려의 살수까지 진격하여 한바탕 싸움을 벌였는데,
이 싸움에서 신라는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그리고 견아성에서 고구려 군에게 포위되어 일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때 동성대왕은 군사 3천을 파병하여 신라군을 구해냈다.
이 때문에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해왔다.
그러자 동성대왕은 신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 군을 막아냈다.
이렇듯 안팎으로 힘을 과시한 동성왕은 495년 또 한 차례 남제에 표를 올려
북위와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휘하 장수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사법명을 포함한 백제 장수들은 북위를 물리친 뒤에
대륙의 옛 땅을 상당 부분 회복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남제의 황제가 그들에게 벼슬을 내려
그 곳이 백제 땅임을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남제의 황제는 동성대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등에게 왕 또는 태수, 장군 등의 작호를 내렸다.
재위 20년에 탐라(제주도)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동성대왕은 자신이 직접 탐라를 다스리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광주)로 향했다.
동성대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탐라를 응징하려 한 것은
<진로>의 죽음으로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군왕의 위엄을 보이고자 한 행동이었다.
탐라에서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왕권을 확립했음을 확인한 백제의 중흥군주 동성대왕은
이 때부터 사치스런 면모를 드러내며 거만한 행동을 일삼았다.
499년 여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일어나고,
백성 2천 명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동성대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동반도 청도에 있는 대궐 동쪽에 8미터 높이의 임류각을 세우고,
그 주변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들을 기르는 등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가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지만, 동성대왕은 듣지 않고 대궐 문을 닫아버렸다.
또 우두성으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연회를 열며 밤새도록 실컷 즐기기도 했다.
동성대왕은 신라에 대해서도 거만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신라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신라에서는 백제 정벌론이 대두되었고,
그 때문에 동성대왕은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고,
가림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토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대왕의 사치스런 행각은 그치지 않았다.
정사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501년 겨울에는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 <백가>라는 인물이 칼로 찔러 죽임으로써,
동성대왕은 36세의 나이로 비명에 생을 마감했다.
백가는 동성대왕 8년에 위사좌평에 임명되었고,
23년 8월에 가림성 성주로 임명되어 그 곳으로 떠나야 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 백제가 가림성으로 가기 싫어
병을 핑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동성대왕은 억지로 그를 가림성으로 보냈고,
이 때문에 백가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사냥을 하다가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림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성대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일본서기』는
동성대왕이 ‘포학무도하여 국인(國人)이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단순한 원한에 의한 사실이 아니라
동성대왕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나라를 아끼는 마음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동성대왕이 정사를 제쳐놓고 사냥과 주색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일본서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즉, 백가가 군대를 동원하여 동성대왕을 죽인 개인적인 원한보다는
대왕의 학정에 대항하는 측면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
<490년경 대륙백제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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