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56년{AD488}무진,

 

<모대牟大>는 와 단교하고 의 악행을 南齊에 밝혔다.

 

그랬더니, 등주(登州)의 수장(守将) <이연李延>이 몰래 섬으로 들어가서

<모대牟大>가 사냥하러 왔음을 알아내고는 그를 사로잡고자 하였다.

 

<모대牟大>가 이를 알아채고 군병을 보내서 맞싸웠다.

 

<이연李延>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더니,

<모대牟大>는 점차로 땅을 되찾으며 북진하였다.

 

감국황제는 상이 노심할까를 걱정하여 불문에 부쳤다. 

 

<모대牟大>가 글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길;

 

“신의 조상 <온조溫祖>는 <동명東明>의 친아들이고 <유리琉璃>의 의붓아들이어,

한남(汗南) 구다국(勾茶國)에 봉함을 받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지더니, 두 분 황제의 뜻하신 바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뉘어져서 땅과 경계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패하(浿河) 참사는 실로 황구할 따름입니다.

 

이전의 신하 <개로盖鹵>는 머리를 바쳐 더러움을 씻었음인즉,

형제의 나라들이 오래도록 서로의 직분에 흠결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감국황제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널리 올바르시니,

위로는 조종님들이 베푸신 한 번의 은혜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큰 나라가 자식을 기르는 은택으로써 한남(汗南)의 땅을 돌려주시어서

이 골육이 {그 땅에서} 발붙이고 뿌리에 보답할 수 있게 하여주신다면,

신은 훨훨 날아서 <동명>의 큰 꿈을 좇아 서쪽의 중원으로 들어가

버릇없는 싹수들을 주살하고 참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 천손의 후예는 무지무지한 행운으로 여기겠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감국은 웃으며, 이르길;

 

“<비처毗處>가 삼모성(三牟城)을 고치고 월성(月城)으로 이사하였으니,

놈은 편안히 웅진(熊津)에 거주하지 아니하고 <비처毗處>를 살피다가 꼬여내어

머지않아 사로잡을 것이니, 잠시 <모대牟大>에게 그 일을 맡깁시다.”

라 하였다. 

<장수대제기>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동성왕 10년(488)
위가 군대를 보내 우리를 정벌하러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為百濟所敗

<자치통감>

 

위가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동이 백제국>

이 해에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서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무리를 이끌어 오랑케군을 습격하고 크게 부수었다.
 

 

 

남제서는 488년의 장황한 기록 중 제일 끝에

동성대왕이 북위를 물리친 것을 짤막하게 언급해놓았다.

 

기병 수십만을 동원한 전투는 꽤 큰 전투이다.

 

이겼으면 상당히 장황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북위는 해전에 약해 양자강도 두려워하였는데 기마병이 서해를 건널 수 없다.

 

또 백제를 공격하기위해 수십만을 이동시킬 배는 수천 척이 필요하고

이동을 하더라도 안전에 보장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제를 공격해서 얻어지는 실익이 없다.

 

백제가 대륙에 존재해서 그들의 턱밑을 치고올라오는 상황이라야

공격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자국의 찬란한 역사는 크게 기록하고

창피한 역사는 짧게 아니면 침묵으로 일관하는데

우리의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큰 승리의 역사를

자치통감의 기록 중 글자만 바꾼 듯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488년 490년의 북위와 백제의 전쟁>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