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490년에 백제왕 모대(牟大)는 남제에 표문(表文)을 올려
A.D 488-489년 전쟁의 공훈장령(功勳將令)들에 대하여
남제에서도 선례(先例)대로 백제왕이 임시로 임명한대로
관작(官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장사(長史) <고달高達>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관작을,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사마(司馬) <양무楊茂>는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관작을,
선위장군(宣威將軍) 참군(參軍) <회매會邁>는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관작을 남제로부터 각 제수받았다.
<모대牟大>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高達>,
건위장군 겸 조선태수 사마 신 <양무楊茂>,
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會邁>를 보내니,
이 3인은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태시(泰始 A.D465-471년) 중에도 宋朝에 사자로 갔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쓰고, 지극한 마음으로 찾아가니,
관작을 내리심이 마땅하니, 삼가 선례대로 임시로 직을 내렸습니다.
또 천자의 은혜는 신령하고 아름다워 온 세상이 바라는 바 입니다.
하물며 몸소 천자의 뜰을 밟고 있으면서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오니 하늘이 살피듯
우리를 특히 가엽게 여겨 정식으로 관직을 내려 주시옵소서.
<고달高達>은 일찍부터 본받을 만 함이 뚜렸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임시로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삼았고,
<양무楊茂>는 뜻과 행실이 맑고 공무에 그침이 없어
임시로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삼았고,
<회매會邁>는 뜻이 굳고 부지런하며 본 받을만하여
임시로 광무장군 청하태수로 삼았습니다.
조서를 내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군호를 내리고 태수를 제수하였다.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竭者) 복야(僕射) <손부孫副>를 시켜 책명을 내려
죽은 조부(祖父) <모도牟都>{문주왕}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았다.
말하기를
"아 아! 그대들은 대대로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이어받아
성실한 마음을 멀리까지 들어내었도다.
바닷길이 차갑지만 조공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규정에 따른 법을 잘 지키고 내리는 명령을 잘 받들지어다.
조서를 내려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牟大>는
이제 죽은 조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삼는다.
즉위 글과 인수 등과 옥,구리,범,대나무 4 부신(符信)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절하고 받아라.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했다.
<모도牟都>는 문주왕 <모도矛都(431-477)>를 말한다.
남제는 <모도矛都>를 <모대牟大(466-501)>의 조부라 하였으나
이것은 그들이 문주-삼근-동성으로 백제왕이 이어지니
백제왕의 족보를 몰라 잘못 알고 기록한 것이며
<모대牟大>동성왕은 <모도矛都>의 동생 <餘昆,昆支(440-484)>의 아들이다.
廣陵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北岸부근을 말한다.
廣陽군은 북경 서남부에 위치한 上谷지방이다.
淸河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중국내 백제영토의 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A.D 490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의 반격을 받아 다시 패배하였다.
490년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平城){대동}에서
백제의 대륙 식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긴다 (4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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