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奇子)의 성(姓)은 환(桓)이며 이름은 서여(西余)이다.

전단조(前檀朝) 19세 단제 종년(縱年)의 아우인 청아왕 종선(菁莪王 縱鮮)의

증손(曾孫)이다.

그 성품은 성철문무(聖哲文武)하시며 신지현명(神智賢明)하시고,

덕이 만방을 적시고 인(仁)이 금수에까지 미치고,

모든 백성과 친하며 백성을 사랑하시더니,

전단조 25세 39년(BC 1117)에 보위에 오르시어

평양 왕검성(平壤 王儉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기자(奇子)라는 뜻은 태양의 아들이며 황손(皇孫)이다.>

 

첫 해에 미서(微西)에게 명을 내려 정전법(井田法)을 만들어 공포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에 힘쓰도록 독려하였으며,

납세의 의무를 알게하여 소득의 9분의 1을 바치게 하였다.

 

맏아들 아락(阿洛)을 태자로 삼고 운양후(雲養侯)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그 다음 세 아들에게 각각 성을 내려(賜姓) 한(韓)․선우(鮮于)․기(奇)라 하였다.

 

 

 

대야발의 단기고사에는 전단조 25세 39년에 보위에 올랐다고 하였으나

25세 솔나(率那) 39년(BC 1117)은 영고탑으로 천도하여 後檀朝가 시작되는 해이며

箕子가 奇子조선의 .임나(任那) 18년(BC 1120)에 망명해와 수유국을 세운 해이다.

 

奇子朝鮮의 건국년도는 색불루 단제 21년(BC 1265)이며 도읍지는 保定市 인근이다.

 

단군조선은 색불루단제가 BC 1285년에 지금의 赤峰市 인근으로 천도하였다.

 

 

 

- 奇子朝鮮 略史 (BC 1285 - BC 194) (1세 奇子 - 42세 馬韓)

 

 

BC 1165 <商의 토벌을 上奏하다>

 

솔귀(率歸) 20년에 <소문라召文羅>가 아뢰기를

“중화(中華)의 상(商)나라 임금 수(受=紂王)가 무도(無道)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으니, 멀지 않아 망할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의사(義師)를 들어 토벌한다면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생각하고 있는지 오래되었다.”하시고,

더욱 병사를 훈련하여 각종 병기를 준비하였다.

 

 

 

BC 1122 <商의 멸망>

 

임나(任那) 16년에 서주(西周) 무왕(武王)이 <강자아姜子牙=姜太公>을 얻은 후에

상(商)의 수(受)를 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제후(諸侯)를 기산(岐山) 아래에 모으니, 기약없이 모인자가 800명이었다.

주(紂)를 치는 것이 옳다는 결의를 하고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백성들이 그 정세를 알고 피난하여 입국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더니 몇 해 만에 주 무왕(周 武王)에게 멸망하였다.

 

 

 

BC 1120 <箕子의 망명>

 

임나(任那) 18년에 은(殷) 나라 주(紂)의 친척인 기자(箕子=子胥餘)가

주(周) 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나오니,

강달(姜達)․궁흠(弓欽) 등 50명이 따라와 요수(遼水=西遼河)변에 이르러 머물렀다.

 

임금께서 그 사정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요서(遼西)의 한 모퉁이에 거주하게 하셨다.

은(殷) 백성들 중에는 기자(箕子)를 우러러 받드는 자들이 모여 살면서

기자정(箕子井)과 기자경(箕子畊)이라 하였다.

 

 

 

BC 1113 <선우명이 주역을 說하다>

 

임나(任那) 25년에 임금께서 <선우명鮮于明>에게 주역(周易)의 오묘한 의미를 묻기를

 

“주 나라 사람이 역서(易書)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생기고

태극에서 양의(兩儀)[주:兩儀-양(陽)과 음(陰)]가 생기고,

양의에서 사상(四象)[주:四象-음,양의 네가지 상태 곧 태양(太陽),소양(少陽),

태음(太陰),소음(小陰)]이 생기고

사상에서 오행(五行)[주:五行-금 ,목, 수 ,화,토(金,木,水,火,土)]이 생기고,

오행에서 팔괘(八卦)[주:八卦-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

곤(坤)]가 생기니,

만물이 다 음양(陰陽)의 정기(精氣)로 되어 있다 하며,

만물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괘를 맞추어

능히 과거․현재․미래의 일을 어김없이 알아 맞춘다하니 이것이 사실인가.”하셨다.

 

<선우명鮮于明>이 대답하기를

 

“소위 주(周)의 역서라는 것은 공간과 시간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개 음양이라는 것은 해와 달이 비췄다 가렸다 하는 현상에 이름을 붙인 것이니,

곧 밝고 어두운 두 현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밝고 어두운 두 가지 현상의 자체는 실질(實質)이 없는 것이니,

실질(實質)이 없는 것이 어찌 만물의 생생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천하만국의 위치가 동 혹은 서 그리고 남에도 북에도 있어,

그 위치가 같지 않기 때문에 해와 달이 비치는 각도 또한 같지 않으니,

항상 주야가 평균되는 곳도 있고,

춘하추동 네 계절의 차와 주야의 구별이 생기는 곳도 있습니다.

그 비치고 가리움의 시차는 있을지라도, (반년씩 밤과 낮이 되는 곳도 있음.)

비치고 가리움의 함수는 어떤 지방을 막론하고 다 같으며

춥고 더움의 소유시간 또한 같을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이것을 알고 역(易)을 만들 때에,

음과 양의 상대의 이치(理致)를 천도(天道)에 응하게 하여,

역(易)의 도(道)를 정하여서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을 이룰 뿐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을 만물의 부모(父母)라 할 수 없고

다만 생물의 기온을 조화(調和)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만물을 기른다(養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음양이 만물의 부모가 되지 못하는데

오행(五行)이 어찌 만물의 원기(元氣)가 되겠습니까.

대개 천지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토석금수(土石金水) 등은

다 우주 속에 있는 같은 물질이니,

이미 형성된 물질인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어찌 변하여 다른 물질을 이루겠습니까.

하늘이 허다한 원소로써 만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이미 몇 개의 원소가 합하여 물질을 형성한 오행 등이 어찌 또 변하여

다른 물질을 형성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화(理化)의 이치에 이르지 못한 것이며

운수작괘(運數作卦)라 하는 것은 현공설(懸空說)에 불과합니다.

다섯 수(五數)를 본위로 하고 이것을 대연수(大衍數)라 하여,

대연(大衍)중 가장 적은 50을 기본수로 합니다.

이것을 뽑아 괘를 만들 때에,

먼저 공간설(空間說)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배제여일법(倊除餘一法)을 응용하여

위치의 크고 작음을 알고,

시간설의 시간의 오래고 빠름을 알기 위하여 사사설(四四揲)로 하여

정반비례법(正反比例法)을 써서,

시간이 오래고 빠름을 간략히 아는 예술형식(藝術形式)을 취하여

길흉(吉凶)을 판단하게 되니,

길한 사람이 당하면 길하고, 한 사람이 당하면 흉할 것입니다.

전하, 홀로 이웃 은(殷) 주(周)의 전사(戰事)를 보시옵소서.

주(紂)는 갑자일(甲子日)에 망하고 발(發)은 갑자일(甲子日)에 흥하였으니,

이것이 곧 증거입니다.

죄를 하늘에 얻으면 빌 곳이 땅에도 없으며 피할 데도 없으니,

덕 있는 자의 일은 점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길(吉)하고

덕 없는 자의 일은 점을 항상 가까이 해도 흉합니다.

대개 역(易)은 옛날 성인이 군자(君子)와 소인배에게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징벌하기 위하여,

천지의 상(象)을 취하여 건곤(乾坤)을 주(主)로 하고 괘를 만든 것이나,

이 역획(易畫)이 있기 전에도 역(易)이 있었습니다.

아득한 하늘이 무한히 비어있는 것을 생각하여

그 오묘함을 헤아리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비어(虛)있는 것을 비어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이 가상(仮象)을 태초(太初)에서 되어진 것으로 알며,

획(畫)을 긋기 전에 명상(冥想)하여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무(無)로부터 유(有)에 이르러 태초의 조판(肇判)

[주:肇判-우주를 창조할 때 사물의 생성 운행질서까지 짜는 것]을 이룸으로써,

존비(尊卑)를 건곤(乾坤) 으로 정하고

육합(六合)[주:六合-상,하,동,서,남,북(上,下,東,西,南,北)]을 포함하여 깊은 뜻을 사고,

이의(二儀)를 열어 문을 삼아 가볍고 맑은 것은 위로 올라가 기(氣)가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아래로 가라앉아 질(質9이 되어

전에도 시작이 없고 후에도 끝이 없어,

육합(六合)이 비록 넓으나 그 안을 떠나지 못하고,

짐승의 털이 비록 작으나 도(道)를 받아들인 후에야 형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성인(聖人)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중화(中華)의 성인이 이것을 관찰하고 가상적(仮想的) 건곤(乾坤)으로 괘를 만들고,

효(爻)를 계산하여 법(法)을 말하나 거짓말을 꾸며내어 만물에 응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만 정성이 지극하여 점괘(占卦)에 통달하며,

사리(事理)와 체면을 지켜 천지로부터

그 덕(德)을 합하면 길흉(吉凶)을 가려 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성이 없고 다만 운수작괘(運籌作卦)에 의하여 길하고 흉한 것을 알고자 하며, 이것은 파도를 헤치고 달을 찾는 것과 같아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도리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기구가 되어,

후세 사람들을 미신(迷信)에 사로잡히게 하여 많은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BC 1084 <箕子 자서여의 아들이 入京하다>

 

마밀(馬密) 9년에 은(殷)에서 망명한 자서여(子胥餘)의 아들이 입경하니,

임금께서 불러 만나시고 마음속에 한없는 의분을 느끼셨다.

 

 

 

 

BC 974 <백이 숙제>

 

해수(亥壽) 10년에 고죽국(孤竹國)사람이 와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의리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먹고 살다가 죽은 일을 말하니,

임금께서 들으시고 이르기를

 

“참 세상에 다시없는 의절(義節)을 지닌 두 장부로다.”하셨다.

 

2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2세 물한(勿韓)기자시다.

 

 

참고 <고죽국(孤竹國)>

 

 

신의 본국은 비록 울루(鬱壘)의 반도(蟠桃)와 접경이오나

위력(威力)으로 대하는 것을 숭상하지 아니하고,

또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고죽국(孤竹國)과 이웃이 되어,

본래 청렴하고 겸양함을 바탕으로 하였으며....(중략)

<최치원(崔致遠) 양위표(讓位表)>

 

 

<대청광여도의 백이숙제묘>

 

위의 대청광여도에도 백이숙제묘가 표기되어 있다.

 

조선의 기록에도 황하 동쪽과 하북성 노룡에 두개의 고죽국이 있는데

어느것이 진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치원이 말한 고죽국과 이웃이되는 고죽국은 산서성의 고죽국이며

신라가 이곳 근처가 국경이었다는 것이다. 

 

 

<3개의 수양산과 통일신라의 영토>

 

 

고죽국은 商 湯왕 8년(BC 1759)에 건국하여

齊 혜왕 17년(BC 660)에 齊나라에 멸망한 천년의 역사를 지닌 商(殷)의 제후국으로

殷이 BC1122년에 周 武王에게 멸망되자 고죽국의 백이.숙제가 절의를 지켜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것이다.

BC 660년 齊나라에 멸망한 고죽국 백성은 중산국으로 이주하였다가

BC 296년 중산국이 조나라에게 멸망하자

지금의 노룡방면으로 이주하여 백이, 숙제의 사당을 세웠다.

BC 296년 이후 중국의 사서는 고죽국이 지금의 노룡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노룡방면으로 천도하자

중국인들은 '고구려는 옛 고죽국의 땅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BC 823 <석륵상의 上奏>

 

아륵(阿勒) 18년에 수상(首相) <석륵상石勒祥>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대개 일에 따라 알맞게 하는 것을 권(權)이라 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합의(合宜)한 것을 의(義)라 하고,

권(權)으로써 변(變)을 대응하며,

의(義)로써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은 다 나라를 위하는 도(道)이며,

도(道)에 같이 있지 못할 것은 시비(是非)이며,

일(事)과 함께 있어서는 안되는 것은 이해(利害)입니다.

 

다만 이해를 일삼고,

시비를 마음대로 일으키면 일(事)을 바르게 하는 의(義)를 상할 것입니다.

시비(是非)를 주(主)된 요지로 삼고,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으면 변(變)을 대응하는 권(權)을 어길 것이나,

권(權)은 규정이 없고 꼭 알맞는 것이 귀하고,

의(義)는 상제(常制)가 없고 합의(合宜)가 귀하니,

중(中)을 얻어 합의(合義)하면, 시(是)와 의(義)가 다 그 안(中)에 있습니다.

진실로 나라에 편(便)하고 백성에게 이롭다면 다 할만한 일입니다.

 

나라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그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이것은 다 행하여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 권(權)과 의(義)를 알고 처리하면 천하에 어찌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혹시 일을 처리할 때 잘잘못이 자세히 가리기 어렵고,

이해를 분별하기 어려워 취(取)하고 주는데 의아하면,

그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에 있을 따름이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대개 중하고 급하면 마땅히 얻을 것이며 가볍고 급하지 않으면 마땅히 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을 죽여 모든 백성을 평안하게 할 수 있으면 죽일 수도 있고,

한 푼을 써서 만금을 얻을 수 있다면 써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정세가 중하고 급한 것이 많은데 중하고 급한 것을 하지 않고,

중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힘쓰니,

마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다만 여우인줄 알고 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천하가 조용해진 듯하나 이웃 여러 나라들이 늘 전쟁을 하고 있으니,

그 혼난의 영향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대개 국가는 천하의 대기(大器)요, 법은 천하의 공물(公物)입니다.

한번 법을 가볍게 여기면 천하의 법을 운용하는 일이 가벼워지므로,

이같이 법이 바르지 못하면 백성이 법을 불신할 것입니다.

 

백성이 법을 불신하면 장래 무슨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나 법이 가혹하면 백성이 다 법에 눌리게 됩니다.

 

만일 임금이 그 백성을 아주 하찮게 보면 백성이 그 임금을 원수같이 보게될 것이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원수가 되면 한 조정 사람이 서로 적국(敵國)과 같이 될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형벌(刑罰)을 줄이시고, 덕정(德政)을 너그럽게 베푸시어,

백성들이 법이 가혹하다는 원성이 없고,

공평하고 정직하여 모든 일에 치우침이 없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마음을 모으면,

선대(先代) 임금의 치적(治積)을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받아들이셨다.

 

 

 

 

BC 798 <조명성의 上奏>

 

마휴(麻休) 15년에 <조명성趙明星>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땅이 기름지지 못하면 큰 나무를 볼 수 없고, 물이 얕으면 고기가 놀 수 없고,

나무가 없으면 큰 새가 깃들지 않으며, 수풀이 우거지지 않으면 짐승이 살지 않고,

산이 뽀족하면 무너지고, 못에 물이 차면 넘치고,

옥을 버리고 돌을 취하는 자는 장님의 눈이며, 땅을 보지 않고 달리는 자는 넘어지고, 기둥이 약하면 집이 무너지고, 보좌(輔佐)가 약하면 나라가 기울어지고,

발(足)이 차면 심장이 상하고, 사람들이 원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뿌리가 마르면 가지가 죽고, 백성이 고달프면 나라가 약해지고,

넘어지는 수레바퀴와 같이하는 자는 넘어지고,

망국(亡國)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는 자는 멸망하게 되니,

이것은 다 눈으로 똑똑히 봐온 실증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웃 상(商) 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들이 고달프고 나라가 약해졌기 때문이며,

주(周) 나라가 흥하는 것은 백성이 평안하고 나라가 부하기 때문입니다.

 

저 상수(商受=紂王)의 사람됨을 보면,

말을 많이 하여 그릇된 일을 꾸미며 힘이 좋아 쇠고랑이를 펼 수 있으니,

그 말재주와 주먹의 힘이 보통사람을 훨씬 넘었으나,

나라가 망하여 불에 타 죽는 화를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윗자리에 앉아 항상 지조가 없으며 아랫사람을 쓸 때에 의심이 많으며,

높은자에게는 의지하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친하고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믿어야 할 사람은 의심하며 믿어서는 안될 사람을 믿으며,

여색(女色)에 유혹되어 주견이 없고,

간신에게 권력이 농간되니 정치적 명령이 자유롭지 못하고,

제왕(帝王)의 몸으로 하찮은 필부(匹夫)의 대열에 스스로 서니,

몸이 필부가 되어 천자의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멸망하고야 맙니다.

 

앞 차가 넘어지는 것은 뒷 차의 경계가 되고,

이웃 나라가 망하는 것은 남은 나라들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위험을 두려워 할 줄 하는 자는 몸을 안전하게 하는 길이 있고,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몸을 보존할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도(道)가 있으면 길(吉)하고 도(道)가 없으면 흉하니,

길하면 모든 복이 모여들고 흉하면 만가지 화가 따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전에 있었던 일을 거울 삼아 잘 살피시며 시급한 일을 자세히 의논하시고, 도(道)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천하의 백성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난관(難關)이 있겠습니까.“하니,

 

임금께서 칭찬을 그치지 않으셨다.

 

 

 

 

BC 772 <장일병의 上奏>

 

다두(多斗) 14년에 <장일병張一炳>이 상서(上書)를 올리니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는 하늘의 형상을 본 받을 따름입니다.

 

하늘의 도(道)는 사시(四時)가 운행하여 만물이 생장하는데,

봄과 여름에는 나서 자라며 가을과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죽으니,

그 기(氣)를 열고 닫으며 조화(造化)를 베풉니다.

 

옛 성제명왕(聖帝明王)은 이 도를 본받아,

혜택(惠澤)과 어진 정치는 봄과 여름을 본받고

법령과 형별은 가을과 겨울을 본받아 법을 삼았습니다.

 

나고 죽는 것과 당기고 늦추는 것을 굳게 확신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이것으로 교화(敎化)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죽을 죄인도 살려주시는 제왕의 덕으로 인간을 어루만져 주시지 않고

살기 띤 징계로써 다스린다면,

이것은 하늘에 사시(四時)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어찌 조화(造化)가 이를 이루겠습니까.

 

한 나라를 몸에 비유하면, 임금은 머리이며 신하는 손과 발입니다.

 

평상시에 무사하여 마음과 정신이 한가로우면 손과 발의 운동이 게을러지나

갑자기 환란을 만나면 손과 발의 동작이 민첩해집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천하 만사에 더러운 일은 안일한데서 생기고,

맑고 깨끗한 것은 나쁜 폐단을 뜯어고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위로는 천시(天時)를 본받으며 아래로는 사람의 일을 살피고,

안일함을 조심하며 그 쇄신(刷新)을 생각하시어

앞 뒤와 급하고 급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급하고 급하지 않는 것을 모르면

충성스러운 말과 좋은 의견도 정치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앞과 뒤가 어긋나면 경론(經論)과 모략(謀略)도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되니,

조정에서 해야 할 급선무는 먼저 기강을 세워야 모든 일을 바르게 돌이킬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는 크고 작은 차이를 말하는 것인데,

왕도는 인(仁)으로써 근본을 삼기 때문에 능히 천하를 다스리고도 남음이 있고,

패도는 이익을 으뜸으로 삼으니 나라를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왕도는 일어나는 것이 더디기 때문에 오래 다스려 나갈 수 있으나

패도는 그 일어나는 것이 빨라 급하게 패합니다.

 

왕도의 마지막은 유약(柔弱)하고 패도의 마지막은 강폭(强暴)합니다.

 

대개 하늘의 운수(運數)가 옛날과 지금이 달라,

국가의 치안(治安)도 또한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습니다.

 

왕도는 경(經)과 법(法)으로 하고 패도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서 생겨났으나,

권무술수도 지나치지 않고 알맞으면 성인(聖人)의 도(道이니,

왕도와 패도를 함께 쓰는 것이 후세의 법이 될 것입니다.

 

문(文)과 무(武)를 아울러 쓰는 것은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이르러 살펴보면 세상 형편이 많이 달라진 것은 알지 못하고,

입으로는 패도를 물리치고 왕도를 행한다 하여,

성세(聖世)의 다스림과 가까운 듯 선전하나,

그 치적(治積)을 보면 실효는 하나도 없고 경거망동(輕擧妄動)에 불과합니다.

 

조정에서는 관리의 계급만 논하며 인재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 않으며,

녹봉(祿俸)이 많고 적음으로 득실을 계산하며,

문사(文士)들은 조정을 비웃으며,

먹을 것과 지위만 공론하다가

요행히 관직을 얻으며 공(公)을 빙자하여 사(私)를 행합니다.

 

과격한자는 무례(無禮)하고 무법(無法)하여

자포자기하고 스스로 잘난체하여 흉한 짓을 마음대로 하며,

풍속을 말하자면 윤리가 무너지고 부끄러움을 모르니,

풍습이 사치스럽고 주색잡기가 민간에 널리 성행하여 원대한 뜻이 없습니다.

 

무인(武人)은 군국주의로서 군비는 강화하나 만국의 협동과 화합은 말과 글뿐입니다.

 

경제는 창고에 저장된 쌀이 없고 백성들이 쌀을 살 돈이 없어 사리(私利)만 음모하니, 어찌 국운의 보전을 바라겠습니까.

 

아! 모든 백성의 즐겁고 괴로움이 다 전하께 달려 있는데

어찌 한가로이 느긋하게만 계시고 용단을 내리지 않습니까.

 

옛글에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강이니,

기율을 세우며 기강을 잡아야 법령이 먹혀 들며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강의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정은 국가의 기강이며 임금은 모든 백성의 기강입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시면 임금의 기강을 잊지 마시옵소서.

장군된 자는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적진에 나아가 적과 싸울때에

반드시 상과 벌을 베풀고 병권(兵權)의 주인이 되어 삼군(三軍)을 장악한 후에

크게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전하께서는 억만의 백성을 거느리시고

천하를 다스려 태평하게 하고자 하시는 이 때에,

살리고 죽이는 것과 주고 빼앗는 권세에 밝지 못하시면,

일의 중요한 기틀이 마음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며

경륜과 뜻은 더불어 설틀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강을 어떻게 바로 잡으며 풍속을 어떻게 선하게 만들며,

찌든 폐단을 어떻게 그치게 하며 많은 신하들을 어떻게 감독하겠습니까.

 

우리 대대로 이어 내려온 단제(檀帝)는 하늘에 순응하시며 사람을 유순하게 대하시어, 개국 이래로 왕위가 계승되어 전하에 이르도록 나라가 태평함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료들이 전례를 따르니 자연이 마음이 안일해지고

사상이 해이해진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이치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깊은 못에 계시는 것처럼 하시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 하시어 옛 성제의 넓은 은혜와 크신 덕을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받아들이시고 국정을 쇄신하시니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 강병(强兵)을 이루시어 중흥(中興)시대가 되었다.

 

 

 

 

BC 592 <生은 영혼의 빛>

 

 

아갑(阿甲) 12년에 임금께서 제사와 신이 내리는 이치를

<원한삼元漢三>에게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올라가고 넋(魄)은 내려오며,

정기(精氣)는 비록 흩어지나 곧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면 돌아가신 분을 오게 합니다.

 

옛 사람의 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는데,

제사 지내는 사람의 정성이 없으면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니,

만일 정성이 있으면 그 신(神)이 마음의 줄을 따라 내려오게 됩니다.

 

이미 흩어진 혼백(魂魄)은 진실로 듣고 보며 생각할 수 없으나,

제사하는 사람이 그의 있던 곳과 이야기와 음성과 그가 즐겨하던 것을 묵념하여

영(靈)과 영(靈)이 감응하여 친히 보이는 듯 할 때에

신령이 반드시 감동하여 내려오게 됩니다.”하였다.

 

임금께서

 

“경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도다.

대개 신(神)은 음양(陰陽)과 이기(理氣)를 초월한 한 신(神)이

자유로이 혼자 있는 것이니,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의뢰(依賴)한 후에야 나타나겠는가,

 

우주 안에 참 신(神)이 있고,

사람 몸에 영혼이 있으니 산다(生)는 것은 영혼의 빛이니라.

 

생명이 우주 안에 흘러 항상 물체를 따라

생리작용이 밀접한 곳에 드러나 보일 따름이니,

참 신이나 영혼은 영영 없어지지 않는 것인데 언제 흩어져 없어지겠는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은 사람의 신령스러운 마음으로써 신이 내리는 기(機)를 삼아, 신과 영이 밀접할 때에 정성으로 원하면 혹 감응하는 도리(道理)가 있으리라.“

하시었다.

 

 

BC 543 <조정국에게 도덕을 묻다>

 

천한(天韓) 3년에 임금께서 실천도덕(實踐道德)을 조정국(趙正國)에게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도덕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을 초월하여 순수한 이성(理性)에 존재하는 것이니,

사람으로는 전연 알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천도덕(實踐道德)에 이르러서는 확실한 실재(實在)로서 세계에 실재하여

도덕세계(道德世界)를 육성하기 때문에, 도덕의 률(律)은 가장 높은 명령이며,

실천윤리(實踐倫理)는 명령하는 법칙입니다.

 

때문에 도덕률(道德律)은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자연률(自然律)은 필연(必然)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도덕률은 당위(當爲)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도덕률이라는 것은 그 의지(意志)가

항상 자기의 자율법칙(自律法則)과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

 

이 자율법칙은 목적과 결과가 어떻든 당연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은 그 인과관념(因果觀念)을 초월하여 실체(實體)를 따라서 온 것이며, 선(善)이라는 것은 도덕률에 의하여 결정한 것이니, 자신(自身)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가장 높은 명령에 의하여 이기적(利己的)인 사욕(私慾)을 금지하여야 합니다.

 

미(美)라는 것은,

모든 욕구를 초얼하여 우리 인간의 무관심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진(眞)이라는 것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진(眞)과 선(善)과 미(美)를 구비하여야 덕(德)이 몸에 윤택하여지며,

능히 도덕을 행한다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BC 507 <인구조사>

 

도을(道乙) 14년에 인구(人口)를 조사하니 그 수가 4천 3백여만명이나 되었다.

 

 

 

 

BC 414 <북부여 사절이 입조하다>

 

인한(人韓) 25년에 북부여(北扶餘) 사절이 입경하여 정부기관의 개편을 보고

부러운 마음으로 우러러 사모하며 귀국하여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나도 정부기관을 개조하고자하여 깊이 생각한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돌아온 사신의 말을 들으니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하시고,

 

다시 기자조선에 사절을 보내어,

개조한 정부기관을 모범으로 삼고자 기록하여 가지고 귀국하였다.

 

 

 

 

BC 403 <周의 백성들이 이주해 오다>

 

인한(人韓) 26년에 주(周) 나라가 쇠약해져서

봉건제후(封建諸侯)가 된 자제(子弟)들이 서로 원수같이 전쟁을 하니,

모든 백성들이 병역(兵役)에 눌려서 피해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다.

 

 

 

 

BC 364 <한윤국이 도덕요람을 지어 바치다>

 

가색(可索) 12년에 <한윤국韓允國>이 도덕요람(道德要覽) 32권을 지어 임금께 바치며

 

아뢰기를

 

“복(福)은 맑고 검서한데서 생기고, 덕(德)은 검소하고 낮추는데서 생기고,

도(道)는 평안하고 고요함에서 생기고, 명(命)은 온화하고 맑은데서 생기고,

근심(憂)은 많은 욕심에서 생기고, 허물(過)은 경솔하고 교만한데서 생기고,

화(禍)는 몹시 가난한(多貧)데서 생기고, 죄(罪)는 어질지 못한(上仁)데에서 생기니,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실천도덕자(實踐道德者)가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BC 326 <노을문의 上奏>

 

수한(水韓)15년에 <노을문老乙文>이 상서를 올려 아뢰기를

 

“천하대세의 가장 크고 웅장하고 격렬한 것은

사리(事理)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혹 나라가 중화(中華)와 대립하여 수 천 년 동안 우호국으로 지내온 것은,

서로의 문화수준이 같기 때문입니다.

 

주(周) 나라가 통일한 후,

그 나라의 예악법도(禮樂法度)의 제도와 문물이 훌륭히 구비되어

점점 우리나라를 초월한 점이 있으므로,

천하백성들의 마음이 중화(中華)를 희망하여

중화의 전성시대가 우리나라에 두려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제후로 봉한 자제(子弟)들이 매우 많았는데,

대(代)를 이을 자가 탐탁치않아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제후가 왕호(王號)를 함부로 일컬으니,

그 가운데 패권을 잡은 자는

진(晋),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일곱 영웅들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전쟁만 일삼으니, 편할 날이 없어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주의(主義)와 사상(思想)이 극도로 팽창하여 학자마다 제각기 날뛰니,

그 중에 으뜸으로 꼽을 만한 자는 공학(孔學),노장학(老莊學),양묵학(楊墨學)등입니다.

 

그러나 그 작품에는 간략하고 정직하다가 끝에 가서는 번거럽고 어려워

궤변학(詭辯學), 명리학파(吊利學派)가 많이 생겨

이단종횡공리(異端縱橫功利)의 설(說)이 성행하여 백성은 진정한 애국심이 없어지고, 국가는 강하고 견고한 기초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왕풍(王風)이 땅을 다 쓸어버리고,

살기(殺氣)가 하늘을 찌를듯하여 배타사상(排他思想)이 열렬하여,

이것이 민족사상으로 바뀌어 다른 종족은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평안한 세상이 오래 계속되어 오니, 민심이 해이해져서,

자기 나라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맹목적으로 중화를 추아하는 습관이 심하니 안타깝습니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옛 것은 누르고 새것을 좋아하며,

근본은 버리고 끝을 취하는 일을 능사로 여겨 정신까지 하나가 되지 못하니,

신은 이것이 근심이 되고 두려울 뿐입니다.

 

국가의 큰 환란(大患)은 백성의 애국심이 죽은 것 이상 더 큰 것이 없으며,

애국심이 없는 민족은 죽어서 재된 나무와 같아서 활기가 없고

활기가 없는 민족은 국가를 보전할 수 없으니,

어찌 병력이 강한 다른 민족과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중화민족은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 올지라도

교육과 산업을 진흥하면 부강하게 될 것은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에게 민족사상을 일깨워 실행시키지 않으면

한족(漢族)이 피난(避亂)하여 울뿐 아니라, 동화(同化)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 백성들에게 민족사상을 갖게 하면

필연 민족전쟁이 일어날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으로서 한족(漢族)을 상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하겠으며,

한족과 대립한 후에야 우리 민족의 지위가 명랑해질 것이니,

지금은 민족사상을 환기(喚起)시켜야 할 때입니다.

 

지연되면 자연이 뒤떨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편안히 앉아 있겠습니까.

 

옛 단조(檀祖)께서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보위에 오르신 후

구족(九族)이 한 가족처럼 되어,

사람들은 오래살고 꽃냄새가 풍기는 속에서 태평가를 부르며 지내더니,

후손들이 탐탁치 않아 각기 나라의 분봉(分封)을 받아가지고 흩어져,

각각 다른 족속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통일하는 일에 깊고 세밀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중화(中華)는 이와 반대로 통일의 업적이 잘 되어,

민족사상이 통일되고 유교가 어김없이 지켜졌으니,

우리나라에 비하면 민족정신의 통일은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몽고 돌궐(蒙古 突厥)과 흉노(匈奴)와 서이(西夷)는 분산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동방의 부여족(扶餘族)은 사상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 민족만이라도 화합하여 한족(漢族)을 대항하게 하여도,

능히 우리나라의 독립자주정신(獨立自主精神)을

보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시고 민족사상을 백성에게 일으키게하니,

이 정신이 불멸(上滅)하여 우리 부여문명(扶餘文明)을 일으켰다.

 

 

 

BC 323 <기후 번조선 왕이되다>

 

무술 보을단제19년(BC 323)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병사들과 함께 입궁하여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관리를 보내어 이 사실을 윤허할 것을 청하여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그로 하여금 연나라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하였다.

 

B.C. 323년에 연의 역왕(易王)이 왕이라 칭하는데 번조선에서는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기후가 이를 계승하여 번조선왕(番潮鮮王)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를 한다.

 

 

奇子朝鮮은 箕子의 후손인 <기후箕詡>가 번조선왕으로 즉위한다.

 

 

 

BC 194 <奇子朝鮮의 멸망>

 

마한(馬韓) 25년 중화(中華)의 <진승陳勝>과 <항량項梁>이 병사를 일으켜

천하에 큰 난을 일으키니, 연, 제, 조(燕,齊,趙) 백성들이 피난하여 입국하였다.

 

임금께서 서쪽 모퉁이 한쪽을 주어 살게하니, 한(漢)이 노관(盧)을 왕으로 삼았으나,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凶奴)로 도망하였다.

 

연(燕)사람 위만(衛滿)도 망명객으로 호복(胡朊)을 입고 동쪽으로 건너와 조선에

입국하여, 태자(太子) 기준(奇準)에게 항복하고 임금께 절하며 있을 곳을 구하였다.

 

임금께서 허락하시어 박사(博士)로 삼고, 서족 변방 백리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위만은 기자조(奇子朝)가 허약한 것을 엿보고,

사람을 보내어 급하게 아뢰기를

 

“한(漢)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들어오니,

바라 옵기는 임금님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하고,

 

연나라 망명자 수 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습격하였다.

 

임금께서 불의의 변을 막을 수 없어서,

궁인(宮人)과 좌우 신하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피신하여

목지국(目支國) 금마군(金馬郡)에 머물러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단기고사는 水韓이 죽은 후 奇否와 馬韓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단군세기는  水韓이 죽은 후 후사가 없어 기후(箕詡)를 번조선왕으로 삼았다하므로

水韓이 죽은 후 奇子朝鮮은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보이며

箕子의 후손인 箕 - 箕 - 箕釋 - 箕潤 - 箕丕 - 箕準으로 이어오다  

箕準 때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목지국에 마한을 건국한 것으로 보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