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八年癸卯, 二月, 以<麻靖>為「[貊]部」使者. <尙>后, 密命護<伯固>,

又以<明臨答夫>爲<椽那宮>皂衣.  

 

 

차대제18년 {AD163}계묘,

 

2월, <마정麻靖>이 맥부(貊部)의 사자(使者)가 되었다.

 

<상尙>后는, <마정麻靖>에게 밀명으로 <백고伯固(121-179)>를 보호하라 하였으며,

또한 <명림답부明臨答夫(128-179)>를 연나궁(椽那宮)의 조의(皂衣)로 삼았다.

 

 

차대제20년 {AD165}을사,

 

정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상황이 병이 들어서 <상>후가 찾아가 위로하였더니,

 

상황이 이르길

 

“나는 모후가 남기신 명에 따라 형제간에 옥좌를 전위하고,

당신도 그에게 양보하였소.

 

그런데 당신은 <수성>에게 빠져서 내 아들을 죽이고, <백고>도 내쫓았소.”라 하였다.

 

후는 울면서 아뢰길

 

“그것은 제 뜻이 아니었었습니다.”라 하였고,

 

상황은 “나는 죽어서도 당신을 지켜 볼 것이오.”라 하였더니,

 

후가 아뢰길

 

“제가 곧 <수성>을 죽여서 당신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황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금 후와 정을 나누고 생을 마쳤다.

 

때는 3월 초하루 새벽이었고, 춘추 98세였다. <골천궁>에 빈소를 차렸다.

 

 

10월, 유언에 따라 <골천궁>을 릉으로 만들었다.

 

<상>후는, 상황을 죽인 공신이 된 이후, 패주의 총애를 회복하고는

茛實膘卵(간실표란)

{소의 갈비 살에 독초인 미나리아재비의 씨앗을 넣어 만든 경단}을 내었다.

 

패주는 독이 부족하여 죽지 않았으며, 갈래창을 집고 후를 해치려고 다가왔다.

 

<명림답부>가 이윽고 장막으로 들어와서 <수성>을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이를 숨기고 발상(發喪)하지 않은 채로 <어질>을 불러들여서,

<미유> 및 <양신>과 그 무리들 및 주의 심복 장사들 수십 명을 모조리 주살하였다.

 

열흘이나 걸려서 끝을 냈으며, 그런 연후에 <백고>를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였다.

 

<尙>후는, <어질>과 함께 패주의 죄악을 열거하고,

上皇(神明仙帝)이 남긴 조서에 따라 <수성遂成>을 폐위시키며,

 

“<신명선제>께서는 악행을 뒷바라지 하지 말라 하셨소.

그런 까닭에 <수성>을 폐위시킨다.”고 말하였다.

 

 

제의 휘는 <백고伯固>이고, 태조(太祖)의 別子이다.

 

모친은 <尙溫>의 딸(天花)인 <尙>태후이다.

 

의표는 영특하고 성품은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가 무도하자 백성과 신하들이 가까이 지내길 꺼려하였다.

 

화를 당할까 두려워 <백고伯固>도 맥부(貊部)에 사자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산곡에 피해 있었다.

 

이에 <차대>가 <백고>를 의심하며,

 

<상>후에게 “<백고>가 누구 자식이오?”라 물었고,

 

후가 <仙帝>의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더니,

 

<차대>가 화를 내며

 

“<백고>가 태어났을 때, 당신은 上皇(太祖)의 총애를 받던 후였었는데,

어찌 <백고>가 <仙帝>의 자식이란 말을 하시오?”라고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尙后와 멀리 떨어져 있는 <백고>는 상황이 위급하여졌다.

 

尙后는 <명림답부>에게는 연통하여 도움을 청하고,

<차대>에게는 독이 든 음식을 먹였으나, 독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이에 <답부>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차대>를 칼질하고 졸라서 죽이고는,

얘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였으며,

<차대>의 심복 장사들을 체포하기를 열흘이나 계속하여,

마침내 모두를 척살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제(帝)를 창수궁(淌水宮)으로 맞아들여서 즉위하게 되었다.

 

 

원년{AD165}을사,

 

11월, 우보 <어질>이 제에게 옥새를 바치며 아뢰길

 

“先君(차대제)께서는 불행하게 세상을 등지셨으며,

아들이 있으나 불초하여, 하늘과 사람들의 뜻이 폐하께 돌아왔습니다.

원하옵건대, 억조창생을 위하여 황제의 위에 오르십시오.”라 하였다.

 

이에 상은 부복하여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새보를 받고,

등단하여 백관과 만민의 만세를 받았다.

 

하늘의 해가 밝음을 되찾았다.

 

<목도루>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송기松奇>를 태보로, <어질箊疾>을 좌보로, <상경尙庚>을 우보로 삼았다.

 

<답부答夫>는 엄표(淹淲)패자로 삼고, 제의 딸을 처로 삼아주었다.

 

색두(索頭)의 <두산梪山>이 죽어, 아들 <두진梪眞>이 섰기에,

<비裶>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다.

 

태사 <미긍(米肯)>이 연호를 <광국光國>으로 바꾸자고 청을 하였더니,

 

상이 답하길

 

“덕이 제위를 칭할 만큼 되지 못하니,

오히려 하늘의 뜻을 등지고 백성의 뜻을 거스를까 걱정스럽소.

어찌 연호를 바꾸어 비웃음 사겠소!”라 하였다.

 

<두진梪眞>이 자기의 나라를 세 부로 나누었다.

 

부여(夫餘)에서 오손(烏孫)까지였다고 한다.

<고구려사초>

 

 

색두(索頭)의 <두진梪眞>이 선비족 <단석괴(131-181)>이다.

 

 

 

서기 163년 尙后(尙天花104-180)는 아들 <백고伯固>를 지키기 위해  

<명림답부明臨答夫128-179>를 연나궁 조의(皀衣)로 삼는다.

 

연나부 명림씨는 이를 계기로 고구려 권력층에 접근하게 되며

차대제 수성을 시해하고 태조 <궁宮 68-165>의 아들 신대제 백고를 세움으로서

일약 공신이 되고 연나부가 권력의 핵심에 들어서게 된다.

 

차대제 20년(165년) 3월에 별궁에 유폐되었던 태조황제는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는 태조왕이 119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태조왕이 유리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47년에 태어나

53년 7세에 즉위하여 92년간 재위에 있었다고 하였으나

태조황제 궁은 유리왕의 증손자이며 68년에 태어나 74년 7살때 동궁이 되었다가

112년 45세때 즉위하여 34간 재위에 있다가 146년에 포제(胞弟)인 차대제 수성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두 아들까지 잃고 별궁에 유폐되어 20년을 지낸 비극의 황제였다.

 

<궁宮>은 아버지 신명선제를 닮아 어진 군주였으며 

또한 어머니 호화(49-132) 태후를 닮아 몸집은 크고 효성이 지극한 그런 황제였다.

 

호화태후가 그가 사랑하는 상후(尙后)를 수성(遂成)에게 주라할 때도

그는 묵묵히 따랐으며 수성이 그를 핍박할 때

수성을 죽이라는 신하의 말도 도리가 아니라하며 거절하였다

 

3살 아래인 포제 차대제 수성은 어머니 호화태후를 닮아 몸집은 컸으나

모본제 해우의 포악한 성격을 이어 받았다.

 

폭군 모본제 해우는 두로에게 시해당하였고 차대제 수성은 명림답부에게 시해당한다.

 

황제라 할지라도 악행을 일삼으면 악행을 뒷바라지 하지 말라는 것이

고구려에서는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태조대왕이 죽은 지 7개월 후인 차대왕 재위 20년 10월에

상후(尙后)는 독이 든 음식 간실표란(茛實膘卵)으로 차대제 수성을 죽이려하였다.

 

하지만 독이 부족하여 실패하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안으로 들어와 수성의 옆구리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신대제 백고 45세, 명림답부 38세, 상후 62세, 목도루의 딸 수례 33세,

남무11세, 발기 8세, 궁인 주진아 11세였다.

 

삼국사기는 명림답부 99세, 신대제 백고가 77세에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명림답부가 백수의 나이로 혁명을 일으켜 113세까지 살았다고

별도의 열전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얼마나 비상식적이며 부실한 기록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차대제 수성을 시해한 명림답부는 상후(尙后), 어질(箊疾)과 함께

수성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미유(彌儒)와 양신(陽神) 등

반대파를 하나하나 불러 죽이게 되는데 그 시일이 10여일이나 되었다하니

얼마나 치밀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가히 짐작할만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조의 아들 백고태자(伯固太子)를 옹립하여 황제로 즉위시키는데

그가 신대제(新大帝)이다.

 

 

상후라 불리는 상천화는 신명선제, 태조황제, 차대제 모두를 모셨던 여인이었다.

 

말년에는 명림답부의 딸까지 낳았다.

 

그녀는 차대제의 편에 서서 미유와 어질 일당들과 합세하여

태조황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렸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태조의 유언에 따라 차대제를 죽여 복수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단지 그녀 자신을 위하여 차대제를 독살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재앙의 불씨는 차대제가 백고의 생부가

자신이 아니라 태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고

그로인해 상후를 멀리하게 되고 그 자리를 수례(守禮)라는 여인이 차지하였다.

 

상후는 백고를 보호하기위해 명림답부를 끌어들이게 되고

또한 미유와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어질과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자 기회를 노리던 명림답부가 합세하여

정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AD165년 고구려 8대 신대제의 세상이 시작되었고

명림답부는 반대파 없는 조정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게 된다.

 

이후 연나부가  왕후를 배출하게 되니 왕실의 계루부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신대제가 등극하자 명림답부는 엄표패자(淹淲沛者)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신대제의 딸을 처로 삼아 외척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 이듬해 상후의 신임을 받은 명림답부는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보외태대가(輔外太大加)라는 직위를 받게된다.

 

황제의 아래로 최고의 직위인 삼보(태보, 좌보, 우보)와 동등한 직위이며

후에 을파소가 차지한 국상(國相)이란 직위와 동등한 직위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좌보와 우보를 고쳐 국상으로 하였다하나

삼보는 국상이란 직위와는 별도로 존재하였다.

 

또한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패자로 삼았다고 하는데

국상은 최고의 직위이고 패자는 한참 아래의 직위이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다.

 

마치 국무총리에게 도지사나 시장의 직위를 주었다는 것과 같다.

 

명립답부는 7품 조의에서 4품 패자로 다시 1품 태대가로 고속 승진하였던 것이다.

 

명림답부는 또 양맥(梁貊)지역마저 장악하게끔 하였으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대제의 시절은 상후와 명림답부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는데

폭사(暴死)라는 표현으로 보아 피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十五年 己未 九月 梁貊公摂政 明臨答夫暴死 年五十二

葬 以梁貊大王 駙馬都尉之禮 于質山園

<고구려사초, 박창화 필사본> 

 

신대제15년(AD179)기미

 

9월, 양맥공이 섭정한다. 

 

명림답부(128~179)가 갑자기 죽었는데 나이 52세였다. 

 

양맥대왕 부마도위의 예를 갖추어서 질산원(質山園)에 장사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그가 99세 백수의 나이에에 정변을 일으켜

113세에 죽었다고 하였지만 실제 52살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삼국사기는 고국천제가 신대제의 둘째라고 기록하였으나

고국천제 남무는 목도루의 딸 守禮(穆后)(133-188)가

“황룡이 몸을 휘감는 꿈을 꾸고는 태어났다.” 하며

황룡은 <만륵萬勒(114~155)>이라 하였으니,

고국천제 남무는 차대제에게 죽임을 당한 태조의 장자 만륵의 유복자이다.

 

명림답부가 섭정을 하는 179년 9월에 섭정을 강행하다가

남무 일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황권에 도전한 명림답부를 제거하고 신대제 백고마저 제거한 남무가 즉위하니

이가 고국천제이다. 

 

尙后(104-180) 역시 이듬해 죽게 되니

尙后를 이어 于后(156-234)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