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156년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AD131-181)>가 시라무덴강 상류를 차지하고 있던

북흉노의 우문부를 공격하여 병합하니 북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외세를 끌어들인 무기력한 남흉노는, 

부패와 무능에 빠져있는 거덜 난 한나라에게 끌려 다니다가,

조조가 북중국을 통일하는 위세 속에서 사그라진다. 

 

AD216년 남흉노의 <호주천> 선우 이후에는 

선우가 제대로 승계되지도 않는 지리멸렬 상태로 빠진다.

 

초원의 늑대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됐고, 

남흉노가 동족상잔을 일으켜 외세를 끌어들여 북흉노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도 스러져갔다.

 

먼저 분열한 서흉노와 나중에 갈라선 북흉노의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서

동유럽까지 갔으니 이를 유럽에서 훈족이라고 한다.

 

단석괴는 동으로는 부여(夫餘)를 격파하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밀어내고,

북으로는 정령(丁零)을 공격하고 남으로는 후한을 유린하면서 강대한 제국이 된다.

 

이에 대해 후한의 환제는 단석괴에게 화친을 제의하여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겠다고 제의했으나 단석괴는 이를 거절해버린다.

 

환제의 화친 제의를 거절한 단석괴는, 광대한 영토를 구축하고는 

북방지역을 동부, 중부, 서부 셋으로 나눠 각각 대인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때 동부 선비의 대인 가운데 우문막괴(宇文莫槐)가 있었는데,

이 우문씨는 흉노에서 기원해서 나중에 선비족으로 합쳐진 혈통이란 설도 있다.

 

이 우문씨는 나중에 북위(北魏)가 서위(西魏), 동위(東魏)로 분열됐을 때,

서위(西魏)를 장악했던 실권자였고,

결국 서위의 황위를 찬탈해서 북주(北周)를 개창한 가문이다.

 

이 북주가 수와 당으로 이어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주인공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서부의 대인 가운데에는 탁발(拓發)씨도 있었다.

 

아직 단석괴의 휘하에 있는 수준이었지만,

이 시기의 탁발선비가, 위서(魏書)의 선비족 역사에 등장하는 탁발역미이다.

 

중부의 대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좀 익숙한 모용(慕容)씨도 있었다.

 

이 모용씨는 5호16국 시대에 지금의 북경 근처에서 세력을 형성했는데,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이란 세 개의 할거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단석괴>의 개인적 군사력이 뛰어나 이 같은 전공을 이루었으나,

<선비족 전체의 역량>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단석괴>가 사망하자

잠시 강대했던 선비족 부족연맹은 흐믈흐믈 스러져갔다. 

 

 

 

<단석괴 시대의 오환족(선비족) 강역>

 

 

 

※ 참고 <삼국지 권30 오환전>

 

[서경]에서 ‘만이가 중국을 어지럽힌다’ 했고

[시경]에서 ‘험윤이 매우 강성하다’ 했으니

그들이 오랫동안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진(秦), 한(漢) 이래 흉노가 오랫동안 변경에 해를 끼쳤다.

 

비록 효무제(한무제 유철)가 밖으로 사이(四夷)와 일을 벌여,

동쪽으로 양월(兩越),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이사(貳師), 대완(大宛)을 치고,

공(邛), 작(苲), 야랑(夜郎)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으나(서남이 정벌을 가리킴),

이들 모두는 황복(荒服)의 바깥이었으므로 중국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흉노는 중국가 가장 가까우니 흉노 기병이 남침하면

삼변(三邊)에서 적을 맞이하는 것이라,

이 때문에 위청, 곽거병 같은 장수들을

여러 차례 보내 북쪽으로 깊이 들어가 정벌하고,

선우를 끝까지 추격해 그들의 풍요로운 땅을 빼앗았다.

 

그 후 (흉노는) 마침내 새(塞)를 지키며 번(藩)이라 칭하고 대대로 쇠약해졌다.

 

건안 중, 호주천(呼廚泉) 남선우(南單于)가 입조해 (중국에) 머물며 궁중에서 시중들고

우현왕(右賢王)을 시켜 그 나라를 위무하게 하니,

흉노가 절개를 굽혀 스스로를 낮춘 것은

예전에 한(漢)이 흉노에게 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그러나 오환(烏丸), 선비(鮮卑)가 점차 강성해지고

또한 한나라 말의 혼란으로 인해 중국에 일이 많아 밖을 토벌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오환, 선비가) 사막 남쪽 땅에서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성읍(城邑)을 침략하고 인민들을 살략(殺略)하여 북쪽 변경은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때마침 원소(袁紹)가 하북을 차지하자 3군의 오환(三郡烏丸)을 위무하고

그 명왕(名王)들을 총애하여 그 정예기병을 거두어 들였다.

 

그 후 또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에게로 달아났다.

 

답돈은 또한 사납고 용맹하여 변경의 장로들은

모두 그를 (흉노의) 묵돌(冒頓)에 비교했는데,

(답돈은) 땅이 험조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을 믿고

망명을 받아들이고 백만(百蠻)들 위에 웅거했다.

 

태조(太祖-조조)는 은밀히 군사를 내어 북벌하고

출기불의(出其不意)하여 한번 싸움으로 평정하니,

이적(夷狄)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고 그 위엄을 북토에 떨쳤다.

 

그리고는 오환의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정벌 전에 따르게 하니

이에 변경의 백성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선비(鮮卑) 대인(大人) <가비능軻比能>이 다시 뭇 오랑캐들을 부리고

흉노의 옛 땅을 모두 거두어들여,

운중(雲中), 오원(五原)에서 동쪽으로 요수(遼水)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비정(鮮卑庭){선비족의 영역}으로 삼았다.

 

여러 차례 새(塞)를 침범하고 변경을 도적질하며 유주, 병주를 괴롭히니,

전예(田豫)는 마성(馬城)에서 포위당하고 필궤(畢軌)는 형북(陘北)에서 패했다.

 

청룡(靑龍: 위 명제 233-236) 중,

황제는 <왕웅王雄>의 주청에 따라 검객(劍客)을 보내 <가비능>을 찔러 죽였다.

 

그 뒤 종락(種落)들이 흩어지고 서로 침벌(侵伐)하니

강한 자는 멀리 달아나고 약한 자는 복종하기를 청했다.

 

이로 말미암아 변경이 거의 안정되고 사막 남쪽에 일이 적어졌고,

비록 때때로 침략하고 도적질하기도 했으나 다시 서로 선동(扇動)하지는 못했다.

 

오환, 선비는 즉 예전에 동호(東胡)로 일컬어지던 종족이다.

 

한나라 초, 흉노의 묵돌(冒頓)이 그 나라를 멸하자

남은 무리들이 오환산(烏丸山)에 의지했기에 이로 인해 오환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풍속은 기사(騎射)에 능하고 물과 풀을 따라 방목(放牧)하니 일정한 거처가 없고

궁려(穹廬, 게르)를 집으로 삼으며 (입구는) 모두 동쪽을 향한다.

 

낮에 금수(禽獸)를 사냥해 고기를 먹고 락(酪)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젊은이를 귀히 여기고 늙은이를 천시하며 그 성정이 사납고 거칠어

화가 나면 부친과 형을 죽이기도 하나 모친은 끝내 해치지 않는다.

 

모친에게는 그 족류(族類)가 있으나 부친이나 형은 자신의 종족이므로

(부형을 죽여도) 복수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용맹, 장건하며 다툼이나 쟁송, 서로 침범한 문제를 잘 처리해서

결정하는 자를 뽑아 대인으로 삼으며,

읍락(邑落)에는 각각 소수(小帥)가 있고 세습되지는 않는다.

 

수백 수천 락(落)이 한 부(部)가 되는데,

대인이 소환하거나 통지할 일이 있으면 나무를 새겨 신표로 삼아 읍락에 전했으며

문자(文字)는 없었으나 부중(部衆)들은 감히 이를 위배하지 못한다.

(부(대인)-읍락(소수)-락의 구조)

 

씨성(氏姓-성씨)은 일정하지 않고 대인으로 장건한 자의 이름자를 성(姓)으로 삼는다.

 

대인 이하로는 각자 스스로 목축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서로 부역하지는 않는다.

 

혼인할 때에는 모두 먼저 사통(私通)하고 여자를 약탈하는데,

반년 또는 백일 뒤 중매인을 통해 말과 소, 양을 보내니 이를 혼인의 예법으로 삼는다.

 

사위는 처를 따라 (처가로) 돌아가는데,

처가(妻家) 사람들에게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아침에 일어나 모두에게 절하나 그 부모에게는 절하지 않는다.

 

처가를 위해 2년간 복역하면 처가에서는 후하게 대우하며 딸을 보내니,

그 거처와 재물은 모두 처가로부터 나왔다.

 

이 때문에 부인의 계책에 따르는 풍속이 있지만, 전투할 때에는 스스로 결정한다.

(동호는 강력한 모계 중심 사회였다)

 

부자(父子)와 남녀(男女)가 서로 마주 대한 채 웅크리고 앉으며,

두발은 모두 가볍고 편하게 깎는다.

 

부인이 시집으로 갈 때는 머리를 기른 채 나누어 상투를 틀고,

머리치장을 쓰고 금과 옥으로 장식하니,

이는 중국의 관보요(冠步搖-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장식)와 같다.

 

부친이나 형이 죽으면 후모(後母-계모)를 처로 삼고 형수를 취한다.

 

만약 형수를 취할 동생이 없으면 그 아들로 볼 때 가까운 순서에 따라

백모나 숙모를 처로 삼으며, 죽으면 예전의 남편에게 되돌아간다.

 

그 풍속은 새와 짐승이 새끼를 배고 기르는 것을 식별하여 사계절에 때맞추고

밭 갈고 씨 뿌릴 때는 항상 포곡(布穀-뻐꾸기)의 울음소리를 살핀다.

 

토지는 푸른 기장, 동장(東牆)에 적합한데,

동장은 봉초(蓬草, 쑥)와 유사하고 과실은 규자(葵子, 아욱)와 같으며

10월에 열매가 익는다.

 

백주(白酒, 흰 술)를 만드나 누룩은 알지 못한다.

 

쌀(米)은 항상 중국에 의존한다.

 

대인은 궁시(弓矢)와 안장, 굴레를 만들 수 있으며 쇠를 두드려 병기를 만든다.

 

능히 가죽을 기워 무늬와 수를 넣고 모직물을 짠다.

 

병이 나면 쑥뜸을 쓸 줄 알고 때로는 돌을 데워 몸 위에 올려놓거나

데워진 땅 위에 눕기도 한다.

 

때로 통증이 있으면 결맥(決脈)을 칼로 찔러 피를 내기도 하며

천지(天地)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기원하기도 하는데 침이나 약은 없다.

 

싸우다 죽는 것을 귀히 여기며 시신을 염하고 관(棺)을 쓴다.

 

처음 죽었을 때 곡을 하는데 매장할 때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함께 (망자를) 전송한다.

 

개를 살찌도록 길러 채색한 끈으로 묶어 끌고 가서,

망자가 타던 말과 옷, 물건, 생시에 쓰던 복식(服飾)과 함께 모두 불태워 전송한다.

 

특히 개를 묶는 것은 죽은 자의 신령(神靈)을 호위해

적산(赤山)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적산은 요동 북서쪽 수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중국인들이 죽은 자의 혼신(魂神-영혼)이 태산(泰山)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과 같다.

 

매장하는 날 밤중에 친척과 친구들이 모여 앉아 개와 말을 끌고 와 세워 두는데,

때로 노래하고 곡하며 고기를 던지기도 한다.

 

두 명이 입으로 주문을 외우게 하는데, 죽은 자의 혼신(魂神)이 곧바로 가게하고

험조한 곳을 지나다 가로막히지 않고 적산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 뒤에 개와 말, 옷, 물건을 불태운다.

 

귀신을 공경하여 천지(天地) 일월(日月) 성신(星辰) 산천(山川)에 제사지낸다.

 

옛 대인 중에 위명이 있는 자를 또한 함께 소와 양으로 제사지내는데,

제사가 끝나면 이들을 모두 불태운다.

 

먹고 마실 때는 필히 먼저 제사를 지내 올린다.

 

그 대략적인 법으로는,

대인의 말을 거스른 자는 죽이고 도둑질한 자는 죽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서로 해치고 죽였을 때는 그 읍락이 스스로 보복하게 하는데

서로 간에 보복이 그치지 않으면 대인에게로 나아가 평결을 받는다.

 

죄가 있는 자가 소, 양을 내어 죽을죄를 속죄하면 (처벌을) 그만둔다.

 

자신의 부친이나 형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도망하거나 반란했다가 대인에게 붙잡힌 자는,

여러 읍락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모두 옹광(雍狂) 땅으로 내쫓는다.

 

이 땅(옹광)은 산이 없고 사막, 흐르는 물, 초목과 많은 뱀이 있는데,

정령(丁令)의 남서쪽, 오손(烏孫)의 북동쪽에 있어 구석지고 곤궁한 곳이다.

 

그들의 선조가 흉노에게 격파된 이래 무리들이 외롭고 미약해져

흉노에게 신복(臣服)하여 늘 해마다 소, 말과 양을 바쳤는데,

시일이 경과해도 (공납품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번번이 그들의 처자를 빼앗아 갔다.

 

흉노 <호연제壺衍鞮> 선우 때에 이르러 오환이 강성해지자

흉노 선우의 무덤을 파헤쳐 (예전) <묵돌>에게 격파된 수치를 설욕하려고 했다.

 

이에 <호연제> 선우가 대노하여 2만 기를 일으켜 오환을 공격했다.

 

대장군 <곽광霍光>이 이를 듣고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範明友>를 보내

3만 기를 이끌고 요동(遼東)을 나와 흉노를 추격하게 했다.

 

범명우 군이 이르자 흉노는 이미 군을 이끌고 떠난 뒤였다.

 

오환이 이제 막 흉노병에게 피해를 입었으므로 그들이 쇠약하고 피폐해진 것을 틈타

진군하여 오환을 공격하니 6천 여 급을 참수하고 세 왕을 노획하고 돌아왔다.

 

그 뒤 여러 차례 또 새(塞)를 침범했는데 <범명우>가 번번이 이를 쳐서 깨뜨렸다.

 

또 한나라에 투항한 흉노인이 있어 그가 말하길,

 

오환이 일찍이 선우의 무덤을 파헤친 일이 있어

흉노가 이를 원망하여 바야흐로 2만 기를 일으켜 오환을 공격할 것이라 했다.

 

대장군 곽광이 군사를 일으켜 이를 공격하고자 하며

호군도위 <조충국趙充國>에게 의견을 물었다.

 

<조충국>이 말했다,

 

“오환은 그간 여러 차례 새(塞)를 침범했는데

지금 흉노가 오환을 친다니 한나라에 좋은 일입니다.

 

또한 흉노는 침략하는 일이 드물어 다행히 북변에 별 일이 없었습니다.

 

만이(蠻夷)들이 서로 공격하는데 군을 일으켜 요격하는 것은

침범을 불러들이고 일을 만드는 격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곽광>이 다시 중랑장 <범명우>에게 묻자 범명우는 가히 공격할 만하다고 했다.

 

이에 <범명우>를 도요장군으로 삼고 2만 기를 이끌게 해 요동을 나오게 했다.

 

흉노는 한나라 군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당초 <곽광>이 <범명우>에게 말했었다,

 

“병(兵)에는 헛되이 출전하는 일이 없는 법이니,

흉노에 뒤쳐진다면(흉노가 떠난 뒤라면) 오환을 치시오.”

 

이때 오환은 이제 막 흉노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뒤였는데

<범명우>는 흉노를 따라잡지 못하자 오환이 피폐해진 틈을 타

오환을 공격해 6천여 급을 참수하고 세 왕의 수급을 노획해 돌아왔고

평릉후(平陵侯)에 봉해졌다.

<[한서] 권94上 흉노전 上 중에서>

 

 

<왕망(王莽: 서기 9-23년)> 말에 이르러, 흉노와 함께 (중국을) 침략했다.

 

광무제가 천하를 평정한 후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에게 3천 기를 이끌게 해

오원관(五原關)으로부터 새(塞)를 나가 정벌하게 했다.

 

싸움이 이롭지 못했으나 말 천여 필을 죽였다.

 

마침내 오환이 번성하게 되어 흉노를 노략질하고 공격하니

흉노가 천 리 밖으로 옮겨가 사막 남쪽 땅이 비게 되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오환 대인 <학단郝旦> 등과 9천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대궐로 와서 배알하자

그 거수(渠帥)들 80여 명을 모두 후왕(侯王)으로 봉하고 새(塞) 안에 거처하게 했다.

 

요동속국, 요서, 우북평, 어양, 광양, 상곡, 대군, 안문, 태원, 삭방군에 줄지어 두고

그 종인(種人)들을 불러 오게 하여 옷과 먹을 것을 대어주고

교위(校尉)를 두어 이들을 다스리고 보호하게 하니

마침내 한나라의 정탐꾼과 방비가 되어 흉노와 선비(鮮卑)를 공격했다.

 

이때의 요동은 산서성 요동으로 오환을 산서성에 거주하게 한 것이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년) 중,

어양(漁陽)의 오환 대인 <흠지분欽志賁>이 종인들을 이끌며 반란을 일으키고,

선비(鮮卑)가 돌아와 노략질하고 해를 끼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군사를 모아 <흠지분>을 죽이고 그 무리들을 격파했다.

 

안제(安帝: 106-125) 때에 이르러

어양, 우북평, 안문의 오환의 솔중왕(率衆王) <무하無何> 등이 선비, 흉노와 합쳐

대군, 상곡, 탁군, 오원을 약탈했다.

 

이때의 요동은 하북성 요동으로 하북성에 있던 오환이 선비, 흉노와 함께

산서성의 대군, 상곡, 탁군, 오원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대사농 하희(何熙)를 행 거기장군으로 삼아 좌우우림(左右羽林) 5영의 병사들과

변방 7군 여양영(黎陽營)의 군사를 일으켜 도합 2만 명으로 이를 공격하니,

흉노는 항복하고 선비, 오환은 각각 새 밖으로 돌아갔다.

 

그 후 오환이 다시 점차 귀부해오자 그 대인 <융말외戎末廆>를 도위(都尉)로 삼았다.

 

순제(順帝: 125-144) 때에 이르러,

<융말외>는 왕후(王侯) <돌귀咄歸>, <거연去延> 등을 거느리고

오환교위 <경엽耿曄>을 따라 새(塞)를 나가 선비를 공격해 공을 세우고 돌아오니,

모두 솔중왕(率衆王)으로 삼고 속백(束帛){비단 묶음}을 하사했다.

 

 

요서 오환대인 <구력거丘力居>는 5천여 락(落),

상곡 오환대인 <난루難樓>는 9천여 락(落)을 이끌며 각각 왕이라 칭하고,

요동속국 오환대인 <소복연蘇僕延>은 천여 락(落)을 이끌고 초왕(峭王)을 자칭하고,

우북평 오환대인 <오연烏延>은 8백여 락(落)을 이끌고 한로왕(汗魯王)을 자칭했는데,

이들 모두는 계책(計策)과 용건(勇健)을 갖추고 있었다.

 

중산태수 <장순張純>이 모반하여 <구력거>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을 자칭하며 3군오환(三郡烏丸)의 원수(元帥)가 되어

청주, 서주, 유주, 기주의 네 주를 침략하고 관원과 백성들을 살략(殺略)했다.

 

영제(靈帝: 168-189) 말,

 

<유우劉虞>가 주목이 되어 호(胡){흉노}를 모으고 <장순>을 참수하니

이에 북주(北州)가 안정되었다.

 

그 뒤 <구력거>가 죽자 아들 <루반樓班>은 어리고

조카 <답돈蹋頓>이 무략(武略)이 있어 그가 즉위해 3왕부(三王部)를 총괄하니

그 무리들이 모두 그의 교령(敎令)에 따랐다.

 

<원소>는 <공손찬>과 연달아 싸웠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답돈>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구하고는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해 깨뜨렸다.

 

<원소>는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답돈>, 초왕, 한로왕에게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들 모두를 선우로 삼았다.

 

후한말-삼국시대에 걸쳐 ‘삼군오환’(三郡烏丸)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답돈 이래 요서, 요동속국, 우북평 오환이 원소에게 협력하고 선우로 임명되었으니

이들을 가리켜 3군오환이라 한다.

 

<원소>가 사자를 보내 오환(烏丸)의 세 왕을 선우로 삼고

모두에게 안거(安車), 화개(華蓋-일산), 우모(羽旄-꿩, 야크 꼬리털로 장식된 깃발),

황옥(黃屋-노란 비단으로 된 수레덮개),

좌독(左纛-꿩이나 야크 꼬리털로 만든 수레장식)을 내렸다.

 

판문(版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절(持節) 대장군 독유청병(督幽靑幷-유주,청주,병주 도독)

영(領) 기주목 완향후(阮鄕侯) <원소>로 하여금

요동속국 솔중왕(率衆王) <반하頒下>, 오환 요서 솔중왕 <답돈>,

우북평 솔중왕 <한로汗盧>에 내린 조서를 받들도록 한다.

 

생각컨대, 조상들이 의를 흠모하여 나쁜 짓을 고쳐 착하게 하고

새(塞)안으로 들어와 귀부하니,

북쪽으로 험윤(玁狁, 흉노)을 방비하고 동쪽으로 예맥(濊貊, 부여와 고구려)을 막아,

대대로 북쪽 변경을 지키며 백성들의 보호막이 되었다.

 

비록 때때로 왕토를 침범했으나 그 허물을 다스리도록 장수에 명해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죄를 뉘우치고 허물을 고치니,

변방의 외이(外夷)들 중에 또한 가장 총명하도다.

 

처음에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이 있어 서로 통령(統領)하며

성심을 다해 능히 국가에 공훈을 세우고 힘쓰니 점차 왕후(王侯)의 명을 받게 되었다.

 

우리 왕실에 변고가 많아 공손찬(公孫瓚)이 난을 일으키고

그 땅의 군장을 해치며 하늘을 업신여기고 군주를 능멸하니

이 때문에 사해(四海) 안에서 아울러 무기를 집어 들고 사직을 보위하게 되었다.

 

세 왕이 변경 땅에서 기세를 떨쳐 간사함에 분노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활을 당겨 한병(漢兵)과 서로 안팎으로 힘을 합하니,

실로 그 충효가 깊어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호시(虎兕), 장사(長蛇 탐욕스럽고 난폭한 이를 비유)들이

서로 뒤따르며 길을 막아, 왕관(王官)의 작명(爵命)이 다다르지 못하고 들리지 않으니,

무릇 공훈을 세워도 상을 받지 못해 부지런한 자를 태만하게 만들었도다.

 

지금 행(行) 알자(謁者) <양림楊林>을 보내

선우의 새수(璽綬)와 거복(車服)을 지니고 가게 해 이로써 너희 노고에 보답하니,

각각 부락(部落)을 위무하여 편안히 하고 근신하도록 교화하여

흉악하고 사특한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대로 너희의 사위(祀位)를 복구하니 길이 백만(百蠻)의 장(長)으로 삼는다.

 

허물이 있거나 착하지 않은 자는 그 복록과 공적을 잃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으리오!

 

오환선우(烏桓單于)는 부중(部衆)들을 거느리며 통솔하고

좌우 선우(左右單于)는 그의 지휘통제를 받을 것이며, 나머지는 전례대로 하라.

 

그 뒤 <루반樓班>이 장성하자

초왕(峭王)은 그 부중을 이끌고 <루반>을 받들어 선우로 세우고,

<답돈>은 왕이 되었다.

 

<답돈>은 꾀가 많고 지모가 있었다.

 

광양(廣陽) 사람인 <염유閻柔>는

어려서 오환, 선비에게로 들어가 그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이에 <염유>는 선비 무리들의 힘을 빌어 오환교위 <형거邢擧>를 죽이고

그를 대신했는데, <원소>는 그를 총애하고 위로해 북변을 안정시켰다.

 

그 뒤 <원상>이 패하여 <답돈>에게로 달아나니

<답돈>의 세력에 의지해 다시 기주를 도모하려 했다.

 

때마침 태조(太祖-조조)가 하북을 평정하자

<염유>는 선비, 오환을 이끌고 태조에게 귀부했고,

이에 <염유>를 교위로 임명하고 한(漢)의 사절(使節)을 지닌 채

예전처럼 광녕(廣甯)을 다스리게 했다.

 

건안 11년(206년), 태조가 친히 유성(柳城)의 <답돈>을 정벌했다.

 

적을 속이고자 은밀히 군을 움직여 백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발각되었다.

 

<원상>은 <답돈>과 함께 무리들을 이끌고 범성(凡城)에서 태조군을 맞아 싸웠는데

그 병사와 군마가 매우 많았다.

 

태조는 고지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며 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억누르다,

적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관찰한 후에 적을 공격해 깨뜨리고

적진에 임해 <답돈>을 참수하니 죽은 자가 들판을 뒤덮었다.

 

<속부환速附丸>, <루반樓班>, <오연烏延> 등은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요동에서 그들을 모두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염유>가 통솔하던 유주, 병주의 오환 만여 락(落)을

모두 중국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고

그 후왕(侯王) 대인(大人)의 종중(種衆)을 정벌 전에 뒤따르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삼군 오환(三郡烏丸)은 천하의 이름난 기병이 되었다.

 

 

 

 

<삼군오환(三郡烏丸)과 모용부 전연(前燕)의 수도변천>

 

 

[위략]  경초 원년(237년) 가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중군(衆軍)을 이끌고 요동을 치게 했다.

 

우북평 오환선우 <구루돈寇婁敦>, 요서 오환도독 솔중왕 <호류섭護留葉>은

예전에 <원상>을 따라 요서로 달아났었는데,

<관구검> 군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5천여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구루돈>이 동생 <아라장阿羅獎> 또는 <아라반阿羅槃>등을 대궐로 보내 조공하니,

그 거수 30여 명을 왕으로 봉하고 수레와 말, 채색비단을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했다.

 

 

관구검 기공비를 보면 討寇將軍 巍烏丸單于□ 라는 대목이 있는데,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에 협력한 이 오환선우가 <구루돈> 등인 것으로 추정된다.

 

 

 

※ 참고 <삼국지 권30 선비전>

 

선비(鮮卑)는 (주1) <보도근步度根>이 즉위한 후 그 무리들이 점차 쇠약해져

중형(中兄) <부라한扶羅韓> 또한 수만 명 무리를 끼고 대인(大人)이 되었다.

 

건안(建安) 중, 태조가 유주(幽州)를 평정하자

<보도근>은 <가비능軻比能> 등과 함께 오환교위 <염유閻柔>를 통해 공물을 바쳤다.

 

그 뒤 대군(代郡) 오환 <능신저能臣氐> 등이 모반하여 <부라한>에 복속되기를 청했다.

 

<부라한>은 만여 기를 이끌고 그를 맞이했는데,

상건(桑乾){유주 대군 상건현}에 이르자 <능신저> 등이 의논하기를,

<부라한> 부(部)의 위금(威禁)이 느슨해 대업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 <가비능軻比能>을 불렀다.

 

이에 <가비능>이 만여 기를 이끌고 도착하자 함께 맹서(盟誓)했는데,

회맹하는 곳에서 <가비능>이 <부라한>을 죽이고

<부라한>의 아들 <설귀니泄歸泥>와 그 부중(部衆)들을 모두 복속했다.

 

<가비능>은 스스로 <설귀니>의 부친을 죽였으므로 <설귀니>를 특별히 잘 대우했다.

 

<보도근>은 이로 말미암아 <가비능>을 원망하게 되었다.

 

문제(文帝-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전예田豫>를 오환교위, 지절로 삼고

아울러 선비를 감호하며 창평(昌平)에 주둔케 했다.

 

<보도근>이 사자를 보내 말(馬)을 바치자 황제가 그를 왕으로 삼았다.

 

그 뒤 여러 차례 <가비능>과 서로 공격했는데

<보도근>의 부중이 점차 줄어들고 미약해지자

그 무리 만여 락(落)을 이끌고 태원, 안문군에 의지했다.

 

이에 <보도근>은 사람을 보내 <설귀니>를 부르며 말했다,

 

“그대 부친이 <가비능>에 살해당했으니 그 원수 갚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도리어 원수에게 속해있구려. 지금 비록 그대를 후하게 대우하지만

이는 그대를 죽이려는 계책이니 내게 오는 것만 못하오.

나는 그대와 서로 골육지친이니 어찌 원수와 견주겠소?”

 

이로 말미암아 <설귀니>는 그 부락(部落)을 이끌고 <보도근>에게 귀부했고,

<가비능>이 이를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황초 5년(224년), <보도근>이 대궐로 와서 공물을 바치자 후하게 상을 내렸다.

 

(보도근은) 이 이후로 한 마음으로 변경을 지키며 약탈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았으나,

<가비능>의 무리들은 마침내 강성해졌다.

 

명제(明帝-조예)가 즉위하자 융적(戎狄)을 달래는데 힘쓰고 정벌을 멈추었으며

양 부(兩部-보도근부와 가비능부)를 통제하고 회유할 뿐이었다.

 

청룡 원년(233년), <가비능>이 <보도근>을 꾀어 깊게 화친을 맺으니,

<보도근>은 <설귀니>와 그 부중들을 모두 이끌고 <가비능>에게 의지하고,

병주를 침략하고 관원과 백성들을 살략(殺略)했다.

 

황제가 효기장군(驍騎將軍) <진랑秦朗>을 보내 이를 정벌했는데,

<설귀니>가 <가비능>에 반기를 들고 그 부중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그를 귀의왕(歸義王)으로 삼고 당휘(幢麾){의장기의 일종},

곡개(曲蓋){수레를 받치는 대가 굽은 양산}, 고취(鼓吹)를 하사하고

예전처럼 병주에 거처하게 했다. <보도근>은 <가비능>에게 죽임을 당했다.

 

(주1) [위서]

선비(鮮卑) 또한 동호(東胡)의 남은 무리들로,

(오환과) 별도로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니 이로 인해 선비라 불리었다.

 

그 언어와 습속은 오환과 같고, 그 땅은 동쪽으로 요수(遼水)에 접하고

서쪽으로 서성(西城){천수군 서현의 성?}에 이른다.

 

항상 늦은 봄에 작락수(作樂水) 가에서

(※ [후한서] 오환선비열전에는 요락수饒樂水로 표기) 크게 모이고,

딸을 시집보내고 아내를 맞이할 때는 곤두(髡頭){깎은 머리}로 먹고 마신다.

 

그 짐승 중에 중국과 다른 것은

야마(野馬){야생마}, 완양(羱羊){야생 산양}, 단우(端牛)가 있다.

 

단우(端牛)의 뿔로 활을 만드는데 세간에서 이를 각단(角端)이라 일컫는다.

 

또한 초(貂){담비}, 놜(豽){원숭이 일종}, 혼자(鼲子){다람쥐}가 있는데

그 가죽과 털이 부드러우므로 온 천하가 이를 이름난 가죽옷으로 여긴다.

 

선비는 <묵돌>에게 격파된 후 멀리 요동 새(塞) 밖으로 달아나

다른 나라들과 다투지 않으니

그 이름이 한나라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환과는 서로 접촉했다.

 

광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의) 남북 선우가 다시 서로 공벌(攻伐)하여 흉노의 힘이 소모되자

이에 선비가 번성하게 되었다.

 

건무 30년(서기 54년),

선비 대인 <어구분於仇賁>이 그 종인(種人)들을 이끌고

대궐로 와서 조공하자 <어구분>을 왕으로 봉했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

<제융祭肜>이 요동태수가 되자 선비를 선물로 유인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환 <흠지분欽志賁> 등을 참수하게 했는데,

선비족들은 돈황(燉煌), 주천(酒泉) 동쪽의 읍락(邑落) 대인들까지

모두 요동(遼東)으로 와서 하사품을 받았다.

 

청주와 서주 두 주가 돈을 지급했는데 매년 2억 7천만 전을 항상 주었다.

 

화제(和帝: 88-105) 때,

선비 대도호 교위(大都護校尉) <외廆>가

그 부중들을 이끌고 오환교위 <임상任尙>을 따라

반란자들을 공격하자 교위 <외廆>를 솔중왕(率衆王)으로 삼았다.

 

상제(殤帝) 연평(延平) 중(106년),

선비가 동쪽으로 새 안으로 들어가 어양태수 <장현張顯>을 죽였다.

 

안제(安帝: 106-125) 때,

선비대인 <연려양燕荔陽>이 입조하자 한나라는 선비왕(鮮卑王)의 인수(印綬)와

적거(赤車){붉은 수레}, 참가(參駕){곁말이 딸린 수레}를 하사하고

오환교위가 다스리던 영(甯) {하남 상당(上黨) 부근} 땅에 머무르게 했다.

 

(이곳에) 호시(胡市)를 열고, 남북 양 부(兩部)의 질궁(質宮)을 쌓고,

이곳에 선비 120부(部)의 인질을 수용했다.

 

이 이후로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고 때로는 항복하고

또 때로는 흉노, 오환과 서로 공격하기도 했다.

 

안제 말, 변경의 보기(步騎) 2만여 명을 일으켜 요충지에 주둔시켰다.

 

그 뒤 선비 8-9천 기가 대군(代郡)을 관통해

마성(馬城) 새(塞) 안으로 들어와 장리(長吏)들을 해쳤다.

 

한나라는 도요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 중랑장 <마속馬續>을 보내

새(塞)를 나와 이를 추격케 해 격파했다.

 

선비 대인 <오륜烏倫>, <기지건其至鞬> 등 7천여 명이 <등준>에게로 와서 항복하자

<오륜>을 왕(王), <기지건>을 후(侯)로 삼고 채색비단을 하사했다.

 

<등준>이 떠난 후 <기지건>이 다시 모반하여 마성에서 오환교위를 포위하자

도요장군 <경기耿蘷>와 유주자사(幽州刺史)가 이를 구원해 포위를 풀었다.

 

<기지건>이 마침내 번성하여 공현(控弦) 수만 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길로 새(塞) 안으로 들어와 오원(五原)군에 이르고,

흉노 남선우를 공격해 좌오건일축왕(左奧鞬日逐王)을 죽였다.

 

순제(順帝:125-144) 때, 다시 새(塞) 안으로 들어와 대군(代郡)태수를 죽였다.

 

한나라에서는 여양영(黎陽營)의 군사를 보내 중산(中山)에 주둔하게 하고,

변방 군(郡)의 군사를 새(塞) 아래에 주둔시키고,

5영의 노수(弩帥)를 뽑아 활로 싸우는 것을 가르치게 했다.

 

(흉노) 남선우(南單于)는 보기 만여 명을 이끌고 한나라를 도와 선비를 격퇴했다.

 

그 뒤 오한교위 <경엽耿曄>은 솔중왕(率衆王)을 이끌고

새(塞)를 나가 선비를 공격해 많은 적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다.

 

이에 선비 3만여 락(落)이 요동으로 와서 항복했다.

 

흉노와 북선우(北單于)가 달아난 후,

남은 종(種) 10여 만 락(落)이 요동으로 와서 뒤섞여 지냈는데

모두 선비병(鮮卑兵)이라 자칭했다.

 

투록후(投鹿侯)는 흉노군을 따라 3년간 종군하고

그의 처는 집에 있었는데 아들을 낳았다.

 

투록후가 집으로 돌아온 후 괴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죽이려 했다.

 

처가 말했다,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 천둥 벼락소리가 들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번쩍이는 빛(電)이 입 안으로 들어와 이를 삼켰습니다.

그 후 임신하여 10달이 지나자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奇異)한 점이 있으며 또한 크게 될 것입니다.”

 

투록후가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자 처는 친정집에 말해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했다.

 

<단석괴檀石槐>라 이름지었는데,

장대(長大), 용건(勇健)하며 지략(智略)이 남보다 뛰어났다.

 

나이 14-15세 때에 다른 부(部)의 대인 <복분읍蔔賁邑>이

<단석괴> 외가의 소와 양을 약탈하자 <단석괴>가 말을 채찍질해 이를 추격했다.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고 잃어버렸던 것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부락(部落)이 외복(畏服)했고,

법금을 시행하면 시시비비를 공평하게 가려 감히 이를 어기는 자가 없으니

마침내 그를 대인으로 추대했다.

 

<단석괴>가 즉위한 후 고류(高柳-대군 고류현) 북쪽 3백여 리 되는 곳의

탄한산(彈汗山) 철구수(啜仇水) 가에 정(庭)을 두자

동부, 서부의 대인들이 모두 귀부했다.

 

병마(兵馬)가 매우 번성하여 남쪽으로 한나라 변경을 침략하고

북쪽으로 정령(丁令)에 맞서고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쪽으로 오손(烏孫)을 공격해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거했다.

 

동서로 12,000여 리, 남북으로 7,000여 리에 이르고

산천(山川)과 수택(水澤-강과 못), 염지(鹽池-소금 못)를 망라하여 매우 넓어,

한나라가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환제(桓帝: 146-167) 때,

흉노중랑장 <장환張奐>을 시켜 이를 정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사자를 보내 인수(印綬)를 지니고 가서 단석괴를 왕으로 봉하며 화친하려 했다.

 

단석괴는 이를 거절하며 받지 않고 더욱 심하게 침략했다.

 

이에 그 땅을 중부, 동부, 서부의 3부로 나누었다.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고

부여(夫餘), 예맥(濊貊)과 접하는 곳까지 동부(東部)가 되고 20여 읍(邑)이 있는데,

그 대인은 <미가彌加>, <궐기闕機>, <소리素利>, <괴두槐頭>가 있었다.

 

우북평에서 부터 서쪽으로 상곡(上谷)에 이르는 곳까지

중부(中部)가 되고 10여 읍이 있는데,

그 대인은 <가최柯最>, <궐거闕居>, <모용慕容> 등으로 이들이 대수(大帥)가 되었다.

 

상곡에서부터 서쪽으로 돈황(燉煌)에 이르고 오손(烏孫)과 서쪽으로 접하는 곳까지

서부(西部)가 되고 20여 읍이 있는데,

그 대인은 <치건낙라置鞬落羅>, <일률추연日律推演>, <연려유宴荔遊> 등으로

모두 대수(大帥)가 되었고 <단석괴>에 복속했다.

 

영제(靈帝: 168-189) 때에 이르러, 유주, 병주 2주를 크게 침략하여,

변경의 여러 군(郡)들이 그 해독을 입지 않은 해가 없었다.

 

희평(熹平) 6년(177년),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하육夏育>,

파선비중랑장(破鮮卑中郎將) <전안(田晏>, 흉노중랑장 <장민臧旻>을 보내자,

(흉노) 남선우와 함께 안문(鴈門)의 새(塞)를 나와

세 길로 아울러 진격하고 2천 여 리를 지나 이를 정벌했다.

 

<단석괴>가 부중(部衆)을 이끌고 이를 역격(逆擊)하자 <장민> 등이 패주했고,

병마(兵馬) 중에 돌아온 자가 10분의 1에 불과했다.

 

선비 무리가 날로 많아져 밭이나 가축, 사냥으로는 식량을 대기에 부족했다.

 

그 뒤 <단석괴>가 오후진수(烏侯秦水)를 둘러보니 넓이와 길이가 수백 리로

물이 멈추어 흐르지 않고 강에 물고기가 있었으나 이를 잡을 줄 몰랐다.

 

한인(汗人)들이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얘기를 듣자

<단석괴>는 동쪽으로 한국(汗國)을 공격해 수천 가(家)를 사로잡고,

이들을 오후진수 가에 옮겨 살며 물고기를 잡게 해 부족한 양식을 메꾸었다.

 

지금까지 오후진수 가에 한인(汗人) 수백 호가 살고 있다.

 

<단석괴>가 나이 45세에 죽자 아들 <화련和連>이 즉위했다.

 

<화련>은 그 재능과 용력이 부친에 미치지 못하고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재결이 불공평하니,

그 무리들 중에 반기를 든 자가 절반에 이르렀다.

 

영제 말년에 여러 차례 침략하고 북지(北地)를 공격했는데,

북지의 서인(庶人) 중에 노(弩)를 잘 쏘는 자가 <화련>을 쏘아 맞혀

<화련>이 곧 죽었다.

 

그 아들 <건만騫曼>이 아직 어려서 형의 아들인 <괴두魁頭>가 대신 즉위했다.

 

<괴두>가 즉위한 후,

<건만>이 장성하여 <괴두>와 서로 나라를 다투자 그 무리들이 마침내 흩어졌다.

 

<괴두>가 죽자 동생인 <보도근步度根>이 즉위했다.

 

<단석괴>가 죽은 뒤로부터 여러 대인들은 대를 이어 서로 세습되고 있다.

 

<가비능軻比能>은 본래 소종(小種) 선비로 용맹하고 굳세고,

재결이 공평하며 재물을 탐하지 않아, 무리들이 그를 추대하여 대인으로 삼았다.

 

부락(部落)이 새(塞)에 가까웠는데,

<원소>가 하북을 점거한 이후로 중국인들이 다수 달아나고 배반함해

그에게 귀부하여 병기와 갑옷, 방패 만드는 것을 가르치고,

문자(文字)도 꽤 배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가 부중을 통솔할 때 중국을 본뜨니,

출입하고 사냥할 때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진격, 퇴각했다.

 

 

건안(建安: 196-220) 중,

<염유>를 통해 공물을 바치고,

태조(太祖-조조)가 서쪽으로 관중(關中)을 정벌하자(211년)

<전은田銀>이 하간(河間)에서 모반했는데,

<가비능>은 3천여 기를 이끌고 <염유>를 따라 <전은>을 격파했다.

 

그 뒤 대군(代郡)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가비능>은 또 이를 도와 침략했다.

 

태조는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을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삼고

북쪽으로 정벌하게 하여 이를 대파했다.

 

<가비능>은 새(塞) 밖으로 달아났는데 그 뒤 다시 사자를 통해 공물을 바쳤다.

 

연강(延康-220년) 초, <가비능>이 사자를 보내 말을 바치자

문제(文帝-조비)는 또 <가비능>을 부의왕(附義王)으로 삼았다.

 

황초 2년(221년), <가비능>이 선비 중에 있던 위나라 사람 5백여 가(家)를 내보내어

대군(代郡)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했다.

 

다음 해,

<가비능>이 부락의 대인(大人), 소자(小子), 대군(代郡) 오환 <수무로修武盧> 등

3천여 기를 이끌고 소와 말 7만여 구를 몰고 와서 호시(互市)했는데,

위나라 사람 천여 가를 보내 주어 상곡(上谷)에 거주하게 했다.

 

그 뒤 동부 선비대인 <소리素利>, <보도근>과 더불어

3부(部)가 쟁투하여 다시 서로 공격했다.

 

<전예>가 이들을 화해시키고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황초 5년(224년), <가비능>이 다시 <소리>를 공격하자

<전예>가 경기병을 이끌고 곧바로 그 배후로 진격해 이를 견제했다.

 

<가비능>은 별도로 소수(小帥) <쇄노瑣奴>를 보내 <전예>를 막게 했으나

<전예>가 진격하여 패주시켰다.

 

(가비능은) 이로 말미암아 두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에 보국장군(輔國將軍) <선우보鮮于輔>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적(夷狄)들은 문자를 모르므로

이 때문에 교위 <염유>가 나를 대신해 천자에게 보고했소.

나는 <소리素利>와 서로 원수 사이인데,

지난해에 그를 공격할 때 전(田) 교위가 <소리>를 도왔소이다.

 

내가 싸움터에 임해 <쇄노>를 보냈는데

사군(使君)이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을 물려 퇴각했소.

<보도근>이 여러 차례 침략하고 또한 내 동생을 죽였는데

오히려 내가 침략했다고 무고했소.

 

나는 이적(夷狄)이라 비록 예의를 모르지만 형제 자손들이 천자의 인수를 받았고,

소, 말도 맛있는 물과 풀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내게 사람의 마음이 없겠소이까!

 

장군께서는 나를 위해 천자에게 분명히 보고해 주기 바라오.”

 

<선우보>가 이 서신을 받아보고 이를 고하자

황제는 다시 <전예>에게 <가비능>을 불러들여 안무하도록 했다.

 

이에 <가비능>의 무리가 강성해져 공현(控弦) 10여 만기에 이르렀다.

 

매번 약탈하여 재물을 얻을 때마다 고르게 나누어주고

눈앞에서 한결같이 결정하여 끝내 사사로이 하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 사력을 다하게 되었고

다른 부(部)의 대인들이 모두 그를 경애하며 꺼렸으나, <단석괴>에는 미치지 못했다.

 

태화 2년(228년),

<전예>는 역관 <하사夏舍>를 가비능의 사위인 <울축건婿鬱築>의 부(部)로 보냈는데,

<하사>는 <울축건>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해 가을, <전예>가 서부(西部) 선비 <포두蒲頭>, <설귀니泄歸泥>를 이끌고

새(塞)를 나와 <울축건>을 토벌해 대파했다.

 

돌아와 마성(馬城)에 이르렀는데,

<가비능>이 친히 3만 기를 이끌고 <전예>를 7일 간 포위했다.

 

상곡태수 <염지閻志>는 <염유>의 동생으로 평소 선비의 신임을 얻고 있었는데,

<염지>가 가서 타이르자 이내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 뒤 유주자사 <왕웅王雄>은 교위를 겸하며 은혜와 신의로 이들을 안무했다.

 

<가비능>이 여러 차례 새(塞) 문을 두드리고 유주로 와서 공물을 바쳤다.

 

 

청룡 원년(233년),

 

<가비>능이 <보도근>을 꾀어 병주(幷州)에 반역하게 하고 서로 화친을 맺고는,

스스로 1만 기를 이끌고 형북(陘北)에서 그의 누중(累重){가족}을 맞이했다.

 

병주자사 <필궤畢軌>는 장군 <소상蘇尙>, <동필董弼> 등을 보내 이를 공격했다.

 

<가비능>은 아들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가서 <소상> 등과

누번(樓煩){안문군 누번현}에서 어울려 싸우게 했는데,

싸움에 임해 <소상>, <동필>을 해쳤다.

 

 

청룡 3년(234년),

 

<왕웅>이 용사(勇士) <한룡韓龍>을 보내 <가비능>을 죽이자

다시 그 동생이 즉위했다.

 

<소리素利>, <미가彌加>, <궐기厥機>는 모두 대인으로

요서, 우북평, 어양의 새(塞) 밖에 있었으므로

길이 멀어 당초에는 변경의 우환이 되지 않았으나

그 종중(種衆)들이 <가비능>보다 더 많았다.

 

건안 중, <염유>를 통해 공물을 바치고 교역했고

태조는 이들 모두를 후대하고 왕으로 삼았다.

 

<궐기>가 죽자 또한 그 아들 <사말한沙末汗>을 친한왕(親漢王)으로 삼았다.

 

 

연강 초(220년),

 

또한 그들 각각이 사자를 보내 말을 바쳤다.

 

문제(文帝)는 <소리>, <미가>를 귀의왕(歸義王)으로 삼았다.

 

<소리>가 <가비능>과 다시 서로 공격했다.

 

 

태화 2년(228년),

 

<소리>가 죽었다.

 

그 아들이 어려 동생 <성률귀成律歸>를 왕으로 삼고,

그가 대신하여 무리들을 통솔하도록 했다.

 

 

삼국지 오환전과 선비전을 장황하게  기술한 것은

고구려사를 알기 위하여는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胡漢융합을 이룬 것이 바로 선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어느 분이 블로그에 흉노와 선비의 역사를 도표로 정리하여 그린것이다.

 

년대별로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도와준 분에게 감사드리며 여기에 옮긴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 요청이 있을 시 언제든 삭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흉노의 역사>

 

 

<선비의 역사>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