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년은 魏 明帝 <조예曺叡(204-239)>景初 2, 蜀 懷帝 <유선劉禪> 建熙 元,

吳 大帝 <손권孫權(182-252)> 赤鳥 元, <공손연公孫淵(190?-238)> 沼漢 2,

고구려 동천대제 <교체郊彘(209-247)> 12, 백제 <초고肖古(214-274)>13,

신라 <아달라阿達羅(180-243)>26년이다.

 

 

 

- <공손연公孫淵(190?-238)>의 반란과

   <사마의司馬懿(179-251)>의 북정(北征)

 

 

요동 <공손도公孫度(145?-204)>의 손자이자 <공손강公孫康(172-221)>의 아들인

<공손연公孫淵(190?-238)>숙부 <공손공公孫恭>이 뒤를 잇자

이에 불만을 품고 228년 반란을 일으켜 그 자리를 빼앗았고

위나라의 황제 <조예>에 의해 양렬장군 요동태수로 봉해졌다.

 

 

 

이후 대사마에 봉해지지만 이에 만족치 못하고

237년 반대하던 <가범><윤직>을 처형하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연호를 고쳐 소한(沼漢)이라 했으며 궁전을 세우고 대장군 <비연>을 원수로 삼고

<양>를 선봉으로 세워 15만 대군을 일으켜 중원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의><조예>에게 요청해 기병과 보병 4만을 이끌고

<호준>을 선봉으로 새워 요동에 영채를 세운다.

 

 

 

<사마의>의 본대가 요수 하류의 동남쪽 방향으로 수비망을 뚫으려 하는 것 같아

<양조>등은 거기에 신경을 쏟았는데 <사마의>는 북쪽으로 우회하여 강을 건너고

<하후패>등과 일부 병력만을 대치시킨 채 그대로 양평을 향해 내달렸다.

 

<양조>등은 애써 구축한 진지를 버리고 급히 사력을 다해 <사마의>를 공격했지만

수산(首山)도 뚫리고 양평이 포위 되었다.

 

 

<하후패>에 의해 <비연>이 죽고

<공손연>은 양평성으로 후퇴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가을비가 한 달 내내 내리고

좌도독 <배경><사마의>에게 영채를 앞산 위로 옮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우도독 <구련>이 같은 제안을 하지만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한다.

 

 

 

<사마의>는 조정에 사자를 보내 군량을 요청하고

<공손연>은 식량이 떨어지자 상국 <왕건>과 어사대부 <유보>를 보내

<사마의>에게 항복할 뜻을 전하나 처형당하고

<공손연>은 시중 <위연>을 보내나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온다.

 

 

 

그러자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군사1000명과 함께 성을 탈출하지만

<호준>, <장호>, <악침>, <하후패>, <하후위>에게 포위당해

<사마의>에게 잡혀와 처형당한다.

 

 

 

<호준>이 먼저 양평성에 입성해 <공손연>의 가족과

그와 공모한 관리들을 모조리 색출해 처형했는데 그 수가 70명에 달했고

<사마의>는 민심을 다스리고 그 지역 일대를 정비하게 된다.

 

 

 

당초 <공손연公孫淵>의 형 <공손황公孫晃>

<공손공公孫恭>의 아들 자격으로 낙양(洛陽)에 인질로 잡혀 와 있었다.

 

 

 

<공손연>이 아직 반기를 들기 전에 여러 차례 장차 반란이 있을 것을 알리면서

<공손연>을 토벌해 줄 것을 청했다.

 

 

 

<공손연>이 반기를 들자 황제가 <공손황>을 차마 기시하지는 못하고

사람을 보내 감옥에서 죽이고자 했다.

 

 

 

이에 정위(廷尉) <고유高柔>가 상소를 올려 간하여 말했다.

 

 

 

"신이 사적으로 듣건대 <공손황公孫晃>은 이전에 여러 차례 자진하여

<공손연>이 장차 반란할 것임을 진언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흉적 <공손연>의 친속이기는 하나

그의 본심을 헤아려 가히 용서할 만합니다.

 

 

 

무릇 <공자><사마우司馬牛>의 우려를 이해했고

<기해祁奚><숙향叔向>이 무죄임을 밝혀내

고대의 미의(美義)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신은 <공손황公孫晃>이 진실로 미리 보고했다면 응당 그의 죽을죄를 용서하고

만일 스스로 보고하지 않았다면 응당 기시(棄市)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관대히 하여 그를 용서하거나 엄히하여 그의 죄행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옥중에 가둬두어 자살케 하는 것은 주변국들에게 의심을 살 소지가 큽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결국 사자에게 금설(金屑)을 넣은 술을 가지고 가

<공손황公孫晃>과 그의 처자식에게 마시게 한 후

관과 수의를 보내 집에서 염하게 했다.

 

 

 

 

경초(景初) 2(238)

 

<우금牛金>, <호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 낙양)를 출발했다.

 

 

거가(車駕-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西明門)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司馬孚>,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해 전송하며

()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郡守), 전농(典農)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부로(父老)와 고구(故舊)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선제(宣帝, 사마의)는 탄식(嘆息)하고 창연(悵然)해하다 감흥이 일자 노래를 읊었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리를 깨끗이 하고 팔황(八荒-온 세상)을 총제(總齊, 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귀로(歸老)무양(舞陽)에서 대죄(待罪)하겠노라.”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지금의 보정시에 있는 고죽과 갈석산을 넘어 조백신하인 요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문의(文懿, 공손연)는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의지해

견벽(堅壁)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에게 맞섰다.

 

 

 

선제가 대군을 결집해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이 정예병을 다하여 이를 향해 나와 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 적()을 내버려두고 양평(襄平)으로 향했다.

 

 

양평은 지금의 하북성 계현(薊縣)이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선제가 말했다,

 

 

()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을 공격하면 그 계책에 곧바로 떨어지게 되니

이는 바로 <왕읍王邑>이 곤양(昆陽)에서 치욕을 당한 원인이었소.

 

 

옛 사람이 이르길,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불 성을 나와

싸우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소.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巢窟)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襄平)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은 선제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선제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逆擊)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襄平)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당초 문의(文懿, 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하고 문의(文懿)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공(司馬公)은 용병에 능하고 변화(變化)가 신()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 홍수가 나서 물이 평지에서도 수척에 이르자

삼군(三軍)이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선제가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都督令史)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司馬)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上庸)을 공격할 때는 8()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孟達>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사(將士,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한 달로 1년을 도모하는 셈이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소?

 

 

(병력은) 넷으로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설령 그 중 절반을 잃더라도 도리어 당적할 수 있었소.

 

 

그리하여 사상자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군량으로 더불어 경쟁한 것이오.

 

 

지금은 적의 군사가 우리보다 많아 적은 굶주리고 우리는 배부르며,

큰 비가 내리는 것이 이와 같아 공력(功力)을 펼칠 수 없으니,

비록 급히 서두른다 한들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경사(京師)를 출발한 이래 적이 공격하는 것을 우려하진 않았으나

다만 적이 달아나는 것을 걱정했소.

 

 

적의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우리의)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우마(牛馬)를 약탈하고 땔나무 캐는 것을 노략질한다면

이는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오.

 

무릇 병()은 궤도(詭道, 기만술)이고 일의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하오.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 오는 것을 믿고 이 때문에 비록 굶주리고 곤궁해도

속수(束手, 손을 묶고 항복함)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천자가 말했다,

 

 

사마공(司馬公)은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순(), (), (), ()을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이 무렵 색이 희고 망렵(芒鬣, 빛나는 꼬리?)이 있는 장성(長星, 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梁水)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文懿)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相國) <왕건王建>,

어사대부(御史大夫) <유보柳甫>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면박(面縛) 할 것이라 청했다.

 

 

(선제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王建>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文懿)에게 고했다.

 

 

옛날 초()나라와 정()나라는 대등한 나라였으나

<정백鄭伯>은 도리어 웃통을 벗고 양()을 끌며 초나라 군을 영접했다.

 

 

나는 왕의 신하(王人)로 지위가 상공(上公)인데

<왕건> 등은 나에게 포위를 풀고 물러나라고 요구하니

어찌 초나라, 정나라의 전례에 비기리!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文懿)가 다시 시중(侍中)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선제가 <위연衛演>에게 말했다.

 

 

군사(軍事)의 대요(大要)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 뿐이다.

 

너희는 면박(面縛)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낼 필요는 없다.”

 

 

문의(文懿)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돌출(突出)하자

선제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梁水) 가의 장성(長星)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신구(新舊)를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경관(京觀, 인골을 쌓은 것. 일종의 전승기념비)을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복주(伏誅, 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 30여 만 구()를 거두었다.

 

 

 

당초 문의(文懿)는 숙부인 <공손공公孫恭>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綸直>, <가범賈範>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고간(苦諫, 간절히 간언함)하니 문의(文懿)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선제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를 봉(, 흙더미를 쌓아 북돋음)하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

 

 

 

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경예(鯨鯢, 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文懿)에게 괘오(詿誤, 연루되어 그르쳐짐)된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中國人)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를 청했으나 선제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하길,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물(官物)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장리(將吏, 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곤양(昆陽)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무양, 곤양. 둘 다 예주 영천군 소속)

 

 

위 명제 조예가 사마의가 점령한 양평(今 薊縣)으로 사자를 보내

<사마의>의 전공을 치하하고

<사마의>에게 무양(舞陽) 외에 곤양(昆陽)을 봉읍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당초 선제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르길,

 

 

내 얼굴을 보시오라 하여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선제에게 조령을 내려 편도(便道, 지름길)로 가서 관중(關中)을 진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백옥(白屋)에 이르렀을 때 선제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수조(手詔, 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합(, 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선제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추봉거(追鋒車)를 타고 밤낮으로 겸행(兼行)하여

백옥(白屋)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嘉福殿) 와내(臥內, 침실 안)로 인도되어 어상(御床, 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선제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曺叡)가 선제의 손을 잡고 제왕(齊王, 曹芳)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曹爽>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이때 명제 <조예> 35, <조방> 8세이다.

 

 

 

제왕(齊王, 조방曹芳)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侍中), 지절(持節), 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올라

<조상曹爽>과 함께 각기 군사 3천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朝政)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曹爽>은 상서(尙書)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선제를 대사마(大司馬)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선제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太傅)로 삼았다.

 

 

입전불추(入殿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 검리상전(劍履上殿) 하도록 하니

한나라 때 <소하蕭何>의 고사(故事, 전례)와 같았다.

 

 

입전불추(入殿不趨) : 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음

 

찬배불명(贊拜不名) : 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음

 

검리상전(劍履上殿) : 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음

 

 

 

혼인과 장례비용은 관()에서 대어주었고,

세자(世子) <사마사司馬師>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자제(子弟) 세 명을 열후(列侯)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선제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子弟)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

 

 

 

 

238823,

 

양평(襄平)의 성벽이 무너지자 <공손연公孫淵>이 아들 <공손수公孫修>와 함께

1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를 돌파한 뒤 동남쪽으로 도망갔다.

 

이에 위나라 대군이 급히 그를 추격해 양수(梁水) 강가에서 <공손연> 부자를 죽였다.

 

<사마의司馬懿>가 양평성에 들어간 후 하령하여

성 안에 있던 공경(公卿) 이하의 대소 관원과 병사 등 모두 7천여 명을 죽였다.

 

이어 시체를 쌓아 봉토하고 경관(京觀)을 쌓았다.

 

이로써 요동과 대방, 낙랑, 현도4개 군이 모두 평정되었다.

 

요동은 지금의 천주시 계현(薊縣) 인근이고, 대방은 창주(滄州) 인근이고,

낙랑은 보정(保定) 인근이고, 현도는 역현 북쪽 야삼피(野三披)풍경구 인근으로

북부여 거수국 개마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그의 장군 <윤직綸直><가범賈範> 등이 온 힘을 다해 말렸으나

<공손연>은 오히려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사마의司馬懿)<윤직綸直> 등의 분묘에 흙을 2배나 더해 봉분을 높인 뒤

그들의 자손에게 관직을 주어 현양했다.

 

<공손연>의 숙부 <공손공公孫恭>을 석방하고

중국인 출신 중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자에게는 이를 허락했다.

 

이후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당초 <공손연公孫淵>의 형 <공손황公孫晃><공손공公孫恭>의 아들 자격으로

낙양(洛陽)에 인질로 잡혀 와 있었다.

 

<공손연>이 아직 반기를 들기 전에 여러 차례 장차 반란이 있을 것을 알리면서

<공손연>을 토벌해 줄 것을 청했다.

 

<공손연>이 반기를 들자 황제가 <공손황>을 차마 기시하지는 못하고 사람을 보내

감옥에서 죽이고자 했다.

 

이에 정위(廷尉) <고유高柔>가 상소를 올려 간하여 말했다.

 

" 신이 사적으로 듣건대 <공손황公孫晃>은 이전에 여러 차례 자진하여

<공손연>이 장차 반란할 것임을 진언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흉적 <공손연>의 친속이기는 하나

그의 본심을 헤아려 가히 용서할 만합니다.

 

무릇 공자는 <사마우司馬牛>의 우려를 이해했고

기해(祁奚)는 숙향(叔向)이 무죄임을 밝혀내 고대의 미의(美義)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신은 <공손황公孫晃>이 진실로 미리 보고했다면 응당 그의 죽을 죄를 용서하고

만일 스스로 보고하지 않았다면 응당 기시(棄市)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관대히 하여 그를 용서하거나 엄히하여 그의 죄행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옥중에 가둬두어 자살케 하는 것은 주변국들에게 의심을 살 소지가 큽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결국 사자에게 금설(金屑)을 넣은 술을 가지고 가

<공손황公孫晃>과 그의 처자식에게 마시게 한 후

관과 수의를 보내 집에서 염하게 했다.

<동천대제기>

 

 

 

동천대제12{AD238}무오,

 

춘정월,

 

<사마의>가 사신을 보내 함께 연()을 멸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주희>에게 명하여 주부대가가 되어서 5천병을 이끌고

남소(南蘇)로 출병하고 관망하여 성원하라 하였다.

 

 

남소는 현도성 인근이다.

 

 

8월에 <공손연>을 멸하였더니,

 

<사마의>가 약속을 저버리고 교만 방자하여졌다.

 

상이 노하여 <사마의>와 절교하였다.

<고구려 사초>

 

 

 

초고 13년 무오(AD 238)

 

8월 위()가 연()을 크게 깨뜨렸다.

 

연 왕 (공손)()과 태자 (공손)()가 살해를 당하였다.

 

왕의 동생 <소沼(218-282)>를 왕으로 세워 대방왕으로 삼고,

왕에게 구원을 청하여 군사 5천을 일으켜 나아가게 하였다.

<백제왕기>

 

<(218-282)>는 구지(155-226)왕과

<보고宝皐(201~257), 公孫康의 누이>사이에서 태어났다.

 

238년 공손연의 연나라가 멸망하니 백제 초고왕은 이복동생인 <소>에게

군사 5천명을 내어 주어 대방군(今 保定市)의 유민 3천명을 황해도로 이주시키고

대방군으로 하여 <소>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낙랑군의 유민은 경북 죽령 지역으로 이주해 온다.

 

신라사초에 아달라왕 이후에 등장하는 낙랑이다.

 

이 당시 낙랑과 대방은 胡人, 漢人, 濊貊人, 고구려인, 백제인, 三韓人. 말갈인 등

 

여러 민족이 혼거하는 국제적인 상업 성시였으나 공손연 멸망 후

뿔뿔이 흩어지고 그 공능은 석가장(石家庄)이 대신하게 된다.  

 

한반도에 등장하는 낙랑, 대방은 <공손연>의 연나라 멸망 후 한반도로 이주해 온 유민들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