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제8{AD338}무술,

 

정월, <모용황慕容皝(297-348)><석호石虎>와 함께 <>씨를 쳤더니,

<>씨는 <모용한慕容翰>에게 <모용황>과 대적하게 하였다.

 

<모용한>은 자기의 군사를 이끌어 <모용황>에게 투항하고 죄를 청하였다.

 

이에 <모용황>

형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라 말하고는,

<모용한>의 계책을 써서 <>씨를 깨고 <>씨의 땅도 많이 빼앗았더니,

<석호石虎>가 대노하여 <모용황>과 맞붙어 싸웠다.

 

<모용황>이 즉위하여 형수를 빼앗자 <모용한>이 단부로 망명한 사실과

<모용황>과 <석호>가 연합하여 빼앗은 요서지역을 <모용황>이 독차지 하자 

조연전쟁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이에 낙랑(楽浪)의 현들 중에서 많은 현들이 돌아섰고,

태수인 <국팽鞠彭>은 달아나서 극성(棘城)(今 覇州)으로 들어갔다.

 

<석호石虎><조복曹伏>를 우리에게 보내와서 싸움을 도와달라고 청하기에,

군량이 다하여 그럴 수 없다고 하였더니,

<조복曹伏>은 300척의 배를 동원하여

30만석의 군량을 <점제占蝉>로 날라 오고 사신을 <남소南蘇>로 보내왔다.

 

왕도 어쩔 수 없어 <뉴벽紐碧><조문祖文>에게 3만병을 끌고

안평(安平)을 나가서 관망하고 움직이지는 말라고 하였다.

 

<석호>가 진격하여 극성을 포위하고 공격함이 심히 급하여 지자,

<모용황><모용한>의 처를 돌려보내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모용한><여근輿根> 등이 열흘 여를 힘껏 싸우고,

현도(玄菟)태수 <유용劉佩>이 용감히 싸워서 군을 흩어지게 만드니,

<석호>는 우리의 군대가 오지 않음을 알고는 물러났다.

 

이에 <모용황>의 아들 <모용각慕容恪>이 추격하여 3만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모용한><여근輿根> 등은 군대를 나누어서

반란하였던 성들을 복구하고 땅을 넓히면서 범성(凢城)에 이르렀다.

 

<봉추封抽>·<송황宋晃>·<유홍游泓> 등은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때는 5월이었다.

 

 

 

 

 

후조(後趙)는 석씨가 세운 나라를 말한다.

 

같은 시대에 <유연劉淵>이 산서성 임분(臨汾)에 세운 나라가 있었기에

<유연>를 전조(前趙), <석륵>를 후조(後趙)라 부른다.

 

<석륵>後趙는 지금의 하북성 형태(邢台)시를 중심으로 존재한 나라였다.

 

고국원제 8년 서기338,

 

마침내 이 후조가 하북 중북부지역의 패권을 쥐고자

선비족인 모용씨와 다투게 된다.

 

그 싸움에 후조의 <석호石虎>가 고구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모용씨를 상당히 두려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봉상제 시절부터 <모용외>는 자주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미천대제와 고국원제 시절에도

항상 고구려 서부지역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모용씨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고구려로서는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후조를 돕기를 주저한다.

 

다급해진 <석호>는 황급히 3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군량미를 고구려의 점제(占蟬)로 보내고

또 사신을 남소(南蘇)로 보내어 통사정을 하게 된다.

 

난감해진 고구려는 어쩔 수없이

<뉴벽紐碧><조문祖文>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안평(安平)에서 나가게 하였지만 모용씨를 공격하지 말고 지켜보라고만 하게 된다.

 

<석호>는 고구려의 후원으로 모용씨의 극성을 공격하는 등

한때 승기를 잡는 듯하였으나

고구려가 관망하고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알고는 후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용황慕容皝(297-348)>은 이를 놓치지 않고

<석호>를 추격하여 대패시키게 된다.

 

모용씨가 하북 일대를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호랑이 새끼를 키워준 셈이 되었다.

 

그 대가로 고구려는 <모용황>에게 요동을 내어주게 되고

미천대제의 능이 파헤쳐지고 태후와 공주가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 7, 8년 기사가 통째로 없다.

 

고국원왕 12(342)에 모용황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한 전쟁은 상세히 기록하면서

후조의 <석호>가 고구려에게 다급히 원조를 요청한 사실은 통째 빼버렸다.

 

하지만 이 기사는 중국의 사서 <자치통감><고구려사초>에 실려 있다.

 

 

趙王虎遣渡遼將軍曹伏將青州之眾戍海島 運谷三百萬斛以給之

 

又以船三百艘運谷三十萬斛詣高句麗 使典農中郎將王典帥眾萬餘屯田海濱

 

又令青州造船千艘 以謀擊燕

 

<자치통감>

 

 

<석호石虎>가 도요장군 <조복曹伏>을 보내

청주(青州)의 무리들로 하여금 해도를 지키도록 하고자 하였다.

 

곡식 삼백만곡을 보내주었다.

 

또 배 삼백소로 곡식 삼십만 곡을 고구려로 보냈다.

 

전농중랑장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해빈을 둔전케 하였으며

또 청주(青州)에 명하여 선박 천소를 만들라 하며 을 공격할 모의를 하였다.

 

 

 

虎遣曹伏請我助戰 辭以粮盡 伏發船三百艘 運穀三十万斛于占蟬 使達南蘇

 

王不得已命紐碧祖文引兵三萬 出安平觀望不動

 

<고구려사초>

 

 

<석호石虎><조복曹伏>을 우리에게 보내 전쟁을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양식이 없다하여 거절하였더니 <조복曹伏>300척의 배를 보내

곡식 30만곡을 점제(占蟬)로 보내고, 사신이 남소(南蘇)로 왔다.

 

왕은 부득이 <뉴벽紐碧><조문祖文>에게 명하기를

3만을 이끌고 안평(安平)을 나가되 형세만 살피고 움직이지는 말라하였다.

 

<삼국사기>가 제대로 된 역사서인가?

 

 

後趙<석호石虎>가 곡식 30만곡을 300척의 배에 실어

낙랑의 점제(占蟬)로 보내 고구려의 지원을 청하였다고

자치통감과 고구려사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이런 중요한 기사가 삼국사기에는 통채로 누락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의 누락은 일제 어용사학자 <금서룡今西龍>으로 하여금

평남 용강군에 점제현 신사비를 세우고 평안남도 용강군이 낙랑군이라 하여,

한반도는 한 무제가 정복한 땅이 되고,

그 곳에 한사군(漢四郡)이 존재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금서룡今西龍>은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친 우리역사 왜곡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일제에 의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어용사학자이다.

 

근래에도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구석기 유물을 땅 속에 파묻어

일본의 고대사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져 일본 역사가 수정되고

고고학계에서 영원히 추방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역사에 저지른 만행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점제(占蟬)는 미천대제 <을불>이 창포왕으로 자리 잡은 최체(最彘)와 이웃한 곳으로

낙랑의 속현으로 과거 개마국과 이웃한 곳으로 <모용외>와 다투던 곳이다.

 

남소(南蘇)는 조연전쟁 시 후조의 사신이 달려간 고구려의 서부 국경지역이다.

 

남소(南蘇)는 과거 구다국(勾茶國)의 도읍이었다.

 

구다국(勾茶國)은 개마국과 이웃하였고 개마국은 황룡국과 이웃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좌우12군으로 공격할 때 좌12군의 침공경로에 남소(南蘇)가 있다.

 

이 땅은 그 옛날 <온조>가 다스렸던 한남(汗南)이었으며

현도가 이웃하였으며 요동이 이웃한 땅이었다.

 

그 땅이 일본이 구다라라 부르던 그 구다국(勾茶國)이었으며

백제고지(百濟故地)이자 대방(帶方)이라 불린 땅이었다.

 

 

낙랑과 대방과 요동은 공손씨와 모용씨가 일어나 중원을 위협한 지역인데

평안도와 황해도가 낙랑과 대방이라면

後趙<석호>前燕<모용황>이 싸운 곳이 한반도의 평안도 지역이란 말인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