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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5 추모대제기(6)

 

 

東明十六年 己亥,

春正月,<>夫人生上女<>公主.

沸流囯王 多勿侯 <松讓>,以其子<>為多勿侯

爵中兄而<><奧花>為公主賜翟服花魚,<>后出也.

築河陽南蘇豊城之外城及黃山平山馬山等城.

<>后使<皓彬>来献御衣而言

“<帶素>大行殺戮,其兄弟多被戮.<>王不能禁之,.”

,<觧朱>,<松義>如柵城,使察其動靜而来.

<><貫貝><>汝見<類利>太子,何如.”

<>英雄也.聖上諸子無如此人.”

<貫貝>汝何不深結此人乎.汝不聞<呂不韋>之奇貨可居之言乎.”

<>,乃然之,及至柵城,<類利>相通結為兄弟,太子之事,臣當担之.”

 

 

 

동명16년 기해{BC22},

춘정월, <>부인이 딸 <>공주를 낳았다.

 

비류국왕 다물후 <송양松讓>이 죽어서 그의 아들 <송의松義>를 다물후로 삼았다.

 

작위는 중형(中兄)이며, <송의松義>의 처 <오화奧花>를 공주로 삼아서

적복과 금화 및 금어를 하사하였다. <>후 소생이었다.

 

하양남소풍성에 외성(外城)을 쌓고 황산평산마산 등에도 성을 쌓았다.

 

하양, 남소, 풍성은 고구려의 최서방인 개마국 즉 현도군에 쌓은 성이고

황산, 평산, 마산은 고구려의 최서남방인 구다국에 쌓은 성이다.

 

<>후의 사신 <호빈皓彬>이 찾아와서 어의(御衣)를 바치면서

“<대소>가 살육을 크게 벌여서 그의 형제 여럿이 찢겨죽었으며,

<금와>왕도 그 일을 말리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해주> 등이 걱정되어 <송의>를 보내 책성으로 가서

그곳 동정을 살펴오게 하였다.

 

<송의>의 어미 <관패><송의>에게 말하여 이르길

너는 <유리>태자를 만나보았다. 어떠하더냐?”라 하였더니,

 

<송의>가 답하길

영웅이었습니다. 성상의 여러 아들들 중에 이 사람 같은 이는 없었습니다.”라고 하자,

 

<관패>너는 어찌 그 사람과 깊게 결연하지 않았더냐?

너는 <여불위呂不韋>가 진기한 물건을 사두었다가

큰 이득을 보았음을 듣지 못하였더냐?”라고 하였다.

 

<송의>는 그렇겠다고 여기고서 책성으로 가더니

<유리>와 상통하여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여 말하길

태자님의 일은 신이 맡아서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三月,,<踈勒>園観梅,仍幸南口聞<漢素>之言,遂决南下之策,大增水軍及戦艦.

<>皇后以疾崩,<>太子哀毁而亦薨.

廢朝三日,上哀痛失聲食不下咽,

<>后慰之曰南下之計未成而不宜自毁如此,<漢素>知之.”

<>,以上之至親為上之寵姬,<><>之為正后,出為<加菽>公妃.

上之南下,從而居中宮十九年,專房生子女七人.春秋五十,

性寬厚恕人,未嘗妬一後宮,而寵常居首,<>后次之.

常以事委於<>后曰我老不及<>,陛下宜從<>妹言方可無事.”

,猶重<>而輕<><>不如一<>.”

<>之沈疾以来,<>寵頗加,無復與之爭寵者.

 

 

3, 상께서 <소륵踈勒>의 정원으로 가서 매화를 둘러보고,

남구(南口)로 거둥하여 <한소>의 아룀을 듣더니 남쪽으로 쳐내려갈 계획을 결심하고

수군(水軍)과 전함(戰艦)을 크게 늘렸다.

 

<훤화>황후가 병으로 죽자 <>태자가 슬퍼하다가 몸이 야위어 역시 죽었다.

 

사흘간 조회를 폐하고

상께서도 애통해 하다가 목이 가라앉고 음식을 넘기지 못하였다.

 

이에 <>후가 위로하며 아뢰길

남하하실 계책을 아직 이루지도 못하였는데,

이처럼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심은 온당치 않습니다. <한소>가 알까 걱정입니다.”

라고 하였다.

 

<훤화>후는 상의 지친(至親)으로 상의 총희(寵姬)가 되었다가,

<>씨와 <>씨가 정후(正后)로 되기에 이르자,

<가숙加菽>공의 비()가 되어서 출가하였다.

 

상께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따라 나서서 중궁(中宮)에서 19년을 지냈고,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아들 딸 일곱을 낳았다.

 

춘추 50이었으며, 성품이 너그러워 사람들을 두터이 헤아려주어서

어느 한 후궁도 투기하지 않았더니, 총애가 항상 으뜸이었었고, <>후는 둘째였다.

 

항상, 정사(政事)<>후에게 맡겨놓고서 아뢰길

저는 늙어서 <>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폐하께서는 <>매의 말을 좇으시면 장차 탈이 없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도리어 <훤화>후를 중시하고 <>후를 경시하며 이르길

<><> 하나만 못하다.”고 하였다.

 

<>의 환후가 깊어진 이래로 <>후를 총애하심이 꽤나 늘었더니,

누구도 다시는 <>후와 총애를 다툴 수 없게 되었다.

 

 

 

四月,大閱水軍于河濱,

入河濱侯<漢素>之湖宮幸<漢素><大房>氏及<>.

<仇曼>,本上之寵姬,時年二十六.<大房暖>,<>之正妻,亦累經寵幸而生上子女,

而終始以老自処而不近于上.,雖爱其豊厚有德,知其有閨範而不奪其志者亦多矣.

至是,又被寵而娠.時年三十九,未嘗小耗而稱老故,上嘲以為此吾老妻君.”

移河濱軍於南口,分十二部,将攻安平.

<鄭共>副妻<桓曼(福妹)><漢素>為苐三妻,亦上之所累幸者也.

,每以寵姬賜寵臣,又好幸寵臣之妻如是矣.

,<鄭共>之妻妾皆賜<><道東>為妻妾,

而唯<><>氏入後宮.

至是,又以<>氏賜<漢素>.

<>,<><>為上陛,澤而事之如君,稱臣而侯之,

上益敬<漢素>.

 

 

4, 수군(水軍)을 하빈(河濱)에서 친히 사열하고,

하빈후(河濱侯) <한소>의 호궁(湖宮)으로 들러서

<한소>의 처들인 <대방>씨 및 <>씨에게 승은을 내렸다.

 

<구만仇曼(BC47- )>은 본시 상의 총희였으며, 이때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대방난大房暖(BC60- )>은 본시 <한소漢素(BC72- )>의 정처였으며,

역시 누차 승은을 입고 상의 자녀를 낳았는데,

시종 나이가 들었음을 자처하며 상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상께서는 비록 그녀가 얼굴이 통통하고 덕이 있음을 어여삐 여기면서도

그녀가 규방의 도리를 지킴을 아는지라 그녀의 의지를 꺾지 않으려 한 적이 많았으나,

이번에는 승은을 입고 아이가 생겼다.

 

이때 나이 서른아홉으로 흠이 생긴 곳이 없음에도 늙었다고 하였다.

 

때문에 상께서 이를 조롱하며 내 나이 드신 마누라님이라 하였다.

 

<대방난><추모>보다 2살 연상이다.

 

하빈의 군대를 남구로 옮겨서 12부로 나누었다.

 

곧 안평국(安平國)을 칠 참이었다.

 

안평국(安平國)은 낙랑군과 이웃한 나라이다.

 

<정공鄭共>의 둘째 처 <환만桓曼><한소>에게 처로 주어 셋째 처가 되게 하였는데,

역시 상의 승은을 여러 번 입은 이었다.

 

상께서는 매번 총희들을 총신들에게 하사하였고,

또한 총신의 처에게 승은을 내림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상께서는 <정공>의 처와 첩 모두를

<정공>의 아들 <정도동鄭道東>에게 처와 첩으로 하사하였으며,

오직 <>씨와 <>씨만은 후궁으로 들였다가

지금에 이르러 <>씨를 <한소>에게 하사하였더니,

<한소><>씨와 <>씨를 상전(上典)으로 여겨서 은덕을 베풀기는 하였으되

임금처럼 섬기면서 신하를 자칭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에 상께서는 <한소>를 한층 더 존경하였다.

 

 

 

七月,與安平王<鍾离>戦于﨎山,大破之.

<>,奔入安平,固守不出.粮盡而退,掠其生口七千人為奴婢,多美女才男.

<鍾离>遣使于<鄭宋>請和,上命<>遣其使于<漢素>,

約歲貢牛馬各千頭彩段二千疋黃金二千斤薬七十種豆粱三万石,稱臣

納女生口男三百人女七百人為式.

﨎山之戦右将軍<宝燕>身被十創而卒,囊尸而来.

,與其妻<>,撫尸而哭曰汝乃吾<曹叅>,當血食千秋.”

<>,<再思>女也.時年二十五,只有一子一女而幼未能授爵故,

<>氏于後宮為夫人.

<>,學釼于上,以釼術為當世之宗,大戦十余次,

身被数十槍,竟死於其術,可謂死於道者也.

善攀者墜善泳者沈之謂也.

<>公主生<觧晉><>.

,<羊花>,如公主宮撫慰賞賜甚多.

上姊<蘋花>宮崩,春秋四十四,葬以皇后禮.

以其子<宝臣><羊花>宮大夫,<宝得>子也.

<><羊花>所生<漱帝>之女也.

,入于<羊吉>之後宮生<宝臣>,時年二十二.

<>,皃美而善歌善畵.,左目眇,常着靑玉鏡,

以紅玉尺裁袈裟,甚妙繡花鳥為屛.

自乙酉歲,從上侍於瓊府.,愛重之,事之甚恭如太后禮.

<>,亦事上以至誠,生三子一女,不敢希天寵,唯願多生子.”

至是,難産而崩.上悲哀而歌曰

靑玉鏡紅玉尺何處更相見,翡翠鳥鴛鴦鳥無使我心傷,蘋花依旧發空洲寒雨滴.”

琉离明皇時,有鳳凰來儀於<>太后陵,

乃作鳳凰池而立二聖祠.

後人題詩曰

蘋花初發鳳凰池,回憶當年比翼時,一日三秋脊令愛如今猶在鳳凰池.”

 

 

 

7, 안평 왕 <종리鍾离>와 쌍산(﨎山)에서 싸워 대파하였다.

 

<종리鍾离>는 안평성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군량이 다하여서 물러났으며, 그곳의 생구 7천인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았는데,

미녀와 재주 많은 남자들이 많았다.

 

<종리>가 사신을 <정도송鄭道宋>에게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였기에,

상께서 <정도송>에게 명하여 그 사신을 <한소>에게로 보내게 하였다.

 

약속을 받아내길, 해마다 소와 말 각각 천 두, 채단 3천 필, 황금 2천 근,

약재 70, 콩과 기장 3만 석을 조공하고 칭신하며

딸과 남자생구 3백인 및 여자생구 7백인을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쌍산(雙山) 전쟁에서 우장군 <보연宝燕>이 몸에 열 군데의 부상을 입고 죽어서,

시신을 주머니에 넣어서 돌아왔다.

 

상께서 그의 처 <>씨와 함께 시신을 어루만지며 곡하고 이르길

그댄 나의 <조참曹參>이었으니,

마땅히 나라에서 천년이 되도록 제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오.”라 하였다.

 

<(BC46- )>씨는 <재사再思>의 딸로 이때 나이 스물다섯이었으며,

단지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으나 아직 어려서 능히 작위를 줄 수 없었다.

 

<>씨를 후궁으로 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보연宝燕>은 칼 쓰기를 상께 배웠으며, 검술로는 당대제일이었으나,

큰 전쟁 10여 차례에 몸에 수십의 상처가 생겨서, 끝내는 검술로 죽었으니,

()를 위해 죽었다 할 만하였다.

 

잘 오르는 이가 떨어지고 헤엄 잘 치는 이가 빠져죽는다 함이었다.

 

<>공주가 <해진觧晉>의 아들 <>을 낳았다.

 

상께서 <양화>궁과 더불어 공주의 궁으로 가서 위로하였으며

()으로 하사한 것들도 심히 많았다.

 

상의 누이 <빈화蘋花>궁이 춘추 마흔넷에 죽어서, 황후의 예법으로 장사하였으며,

그녀의 아들 <보신宝臣><양화>궁 대부로 삼았다.

<보득宝得>의 아들이다.

 

모수제(양화) - 빈화蘋花(BC65-BC22)

양길(양화) - 보득宝得(BC58-BC30)

양길(빈화) - 보신宝臣(BC43- )

 

<빈화>궁은 <양화>소생인 <수제漱帝>의 딸로,

애초에 <양길>의 후궁으로 들어가서 <보신>을 낳았으며, 그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빈화>는 미모인데다가 노래와 그림에 능하였으나,

왼쪽 눈이 사시(眇視)여서 항상 청옥(靑玉) 안경을 쓰고 있었고,

홍옥(紅玉)으로 된 자()로 가사(袈裟)를 지었으며,

심히 기기묘묘한 꽃과 새를 수놓아서 병풍을 삼았다.

 

을유년{BC36} 이래로 상을 따르면서 경부(瓊府)에서 모셨더니,

상께서는 애지중지하며 공경함이 태후를 모시는 예법과 같았으며,

<빈화> 또한 상을 지성으로 섬기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말하자면, 감히 천자의 총애를 바라지는 않았어도, 많은 아들 낳기는 원했다.

 

이때에 이르러 난산으로 죽으니,

상께서 슬퍼하시며 불쌍히 여기어 읊조리길

청옥 안경과 홍옥 자를 어디에서 다시 본단 말인가.

물총새 원앙새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건마는,

빈화(蘋花){개구리밥꽃}가 옛날처럼 휑한 모래섬에 피었더니,

차가운 빗줄기만 듣는구나.ˮ라고 하였다.

 

유리명황(琉璃明皇) 시절엔 봉황이 날아와서 <>태후 릉을 알아보니

봉황지(鳳凰池)를 만들어 이성사(二聖祠)를 세웠다.

 

후세 사람들은 시제(詩題)로 삼아서

빈화(蘋花)가 봉황지에 처음 피니,

비익하던 그 시절 돌이켜 생각하니 하루가 3년 같았던 아름다운 사랑은

지금은 오직 봉황지에만 남아 있구나!.”라고 노래하였다.

 

 

 

八月,<扶尉厭>伐九里城拔之置句麗縣

入紫蒙城(昆都),紫蒙王<西川>以其妻<婁洽>乞命.<尉厭>遂通<婁洽>而妾之.

<西川>,又以其<雀舌>来乞命,<尉厭>亦取之,

約歲貢牛馬二千匹薬草二十種虎皮七十張而退軍湖海,

献紫蒙豕大如牛者及<婁洽><雀舌>.

上問<婁洽>,欲敀<西川>,<尉厭>.”

<>,作陛下婢.”

上曰,<西川>作夫妻十七年,生子女多矣.何可薄情相棄乎.”

<>“<西川>多美妾,以妾為老朽而棄之.”

,遂笑而納之,<雀舌><尉厭>之妻.

召紫蒙豕翁,養豕于御園取其大牡大牝為種,獎于民間,歲餘牛豕遍滿國中.人稱尉厭豕.

,遣使烏桓,欲迎<>,公不来.

,公娶<西川>母以為紫蒙王,<西川>為嗣.

<西川>長不恭於公,公遂讓位而如烏桓.烏桓王妃,公之姨也,

以公為囯太王而與其政,.

 

 

8, <부위염>이 구리성(九里城)을 빼앗아 구리현(句麗縣)을 설치하고

자몽성(紫蒙城)으로 들어갔다.

 

자몽 왕 <서천西川>이 자기 처 <루흡婁洽>을 내어놓으며 목숨을 구걸하기에

<부위염><루흡>과 상통하여 첩을 삼았으며,

<서천>이 또다시 <작설雀舌>을 바치며 찾아와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부위염>이 또한 취하였다.

 

매년 소와 말 2천 필과 약초 20종 및 호피 70장을 조공하기로 약조를 받고

군대를 호해(胡海)로 물렸으며,

크기가 소만한 자몽 돼지와 <루흡><작설>을 상께 바쳤다.

 

상께서 <루흡>에게

그대는 <서천>에게 돌아가고 싶은가? <부위염>에게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루흡>바라건대 폐하의 비첩(婢妾)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상께서 그대는 <서천>과 더불어 17년을 내외로 살면서 낳은 자식들도 많은데,

어찌 그리 박정하게 서로를 저버릴 수 있는 가?”라고 하였다.

 

<루흡>이 아뢰길

“<서천>에겐 예쁜 첩들이 많은지라, 첩을 노후하였다면서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웃으면서 그녀를 거두고 <작설><부위염>에게 처로 주었다.

 

자몽 돼지를 기르던 노인을 불러 돼지를 어원(御園)에서 길러

큰 수퇘지와 큰 암퇘지를 종자로 삼게 하고, 민간에서도 기르도록 권장하니

한 해 남짓하여 소만한 돼지가 나라 안에 널리 가득하였다.

 

사람들이 위염시(尉厭豕)라고 불렀다.

 

상께서 사신을 오환(烏桓) 땅으로 보내어 <>공을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공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공은 <서천>의 어미와 혼인하여 자몽 왕이 되었고

<서천>을 후사로 삼았는데,

<서천>이 자라나더니만 <>공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공은 이에 보위를 넘겨주고 오환 땅으로 갔더니,

오환의 왕비가 <>공의 이모(姨母)인지라 <>공을 국태왕(國太王)으로 삼고

정사(政事)를 그에게 넘겼다는 말이 있었다.

 

 

 

九月,大豊,宴父老於西河行宮.

皇后,親酌勧酒,而觸寒入溫宮生子而夭,悲哀不豫,

上爱之抱后度夜.群臣請禱山川,許之.

 

9, 큰 풍년이 들어서 서하(西河) 행궁에서 부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황후가 친히 술을 따라서 마시길 권하다가 한기를 느끼고

온궁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낳았으나 죽었더니, 슬프고 서러움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상께서 후를 끌어안고 밤을 지새웠더니,

군신들이 산천에 빌기를 청하여, 그리하게 하였다.

 

 

 

十月,<鍾离>,遣使請減歲貢,許之.<><>氏為後宮,年才十三.,以其年幼,

幷求其母<>氏為安平宮夫人.

 

10, 안평왕 <종리鍾离>가 사신을 보내서 매년 바치기로 한 공물을 감해주길 청하니,

허락하고는 <종리>의 딸 <>씨를 거두어 후궁으로 삼았다.

 

나이가 겨우 열 셋이었더니,

그녀의 어미 <>씨를 보내오게 하여 안평궁(安平宮) 부인으로 삼았다.

 

 

 

十二月,紫蒙王<西川>與其子<忽赤>入朝.

白髮如雪,問其年,四十二也.

問其早白之由,“臣自幼好色多房而致如此.”

上笑曰朕亦好色而尙靑.卿之早白非有於好色也.”

<西川>臣好少艾而易衰,陛下好腆腴而補陽故也.<>勢旺,恐不利於陛下.”

上笑曰,<>,十七年比翼而棄如弊履乎.”

<西川>臣之髮皆為渠之所白也.雖然,深染之女,豈可忘哉.”

,然之,命率<婁洽>而去.<西川>感泣欲留<忽赤>為質,

上曰朕知卿忠厚,何必留子耶.<婁洽>,離鄕日久,娠吾子矣.生子卿子之,生女卿妻之.”

<西川>叩頭而去.

<>小后為苐三天后.

 

 

12, 자몽왕<서천西川(BC63- )>이 자신의 아들 <홀적忽赤>과 더불어 입조하였다.

 

흰 머리가 눈과 같아서, 나이를 물었더니 마흔 둘이었고,

일찍 하얗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신은 어릴 적부터 색()을 즐겨서 방사(房事)가 많았다가 이리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께서 웃으며 이르길

짐 또한 색을 즐기나 아직 청청하오.

경이 일찍 희게 된 것은 색을 즐겨서가 아닐 것이오.”라고 하였다.

 

<서천>이 아뢰길

신은 나이어린 털북숭이들을 즐겨서 쉬이 쇠한 것이고,

폐하께서는 예쁘고 통통한 여인을 즐기셔서 보양하신 때문이옵니다.

<루흡>은 힘이 왕성하니 폐하께 이롭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웃으며 이르길

경과 <루흡>17년을 비익으로 살고서도 헌 신짝처럼 버린 것이오?”라고 하였다.

 

<서천>

신의 머리칼 모두는 <루흡> 때문에 희게 된 것입니다.

설사 그랬다 하여도, 속속들이 몸을 섞었던 여인을 어찌 잊을 수야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상께서도 그리 여기어 <루흡>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명하였더니,

<서천>은 감읍하여 <홀적>을 인질로 남겨놓으려 하였다.

 

이에 상께서 이르길

짐이 경의 충정이 두터움을 알고 있는데, 하필 아들을 남겨놓겠단 말이오?

<루흡>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이어서 내 자식을 가졌소.

아들을 낳거든 경의 아들로 삼고, 딸을 낳거든 경의 처로 삼으시오.”라 하였다.

 

<서천>은 머리를 조아리고 돌아갔다.

 

<>소후를 제3천후로 삼았다.

 

 

 

 

 

 

東明十七年 庚子,

正月,上如<>后陵<奧犍>,觸寒不豫而還,

<陜父>憂之,上曰凡為人主者,東戦西鬪身被数十創,而猶屹然不屈,些少寒痛何足慮哉.”

遂强疾而起.

<類利>太子得神釼斷片於柱下,而與<屋智><勾鄒><都祖>等發柵城,<>氏亦隨之.

,<帶素><觧百>欲留<>氏母子,<>王命放去.

<帶素>累違<>王意,遂如其意者,

一以梪恩於<類利>,而二欲乱爭嗣之致也.

上如<羊花>.上夀后之旧晬也.上親嚼鹿脯而哺食之.

上慕先皇爱<羊花>之情,而綢繆之密至於此矣.

<>皇后錄公卿妻女及民間女,已經聖幸者九十七人,

作鵞結後改琳府,賜年穀歲衣時饌.

上知之益賢<>,賢哉.吾妻也.能至於此乎.”

 

 

 

동명17년 경자{BC21},

정월, 상께서 <>후 릉과 <오건奧犍>의 무덤에 갔다가

한기(寒氣)가 들고 위중하여 돌아왔다.

 

<협보>가 걱정하니, 상께서 이르길

무릇 사람들의 임금이 된 자는 동쪽에서 전쟁하고 서쪽에서 전투하다가

몸에 수십 곳의 상처를 입고도 오히려 꺾이지 않고 꿋꿋해야 하거늘

사소한 한통(寒痛)을 어찌 걱정한단 말이오?”라고 하면서 환후를 털고 일어났다.

 

<유리>태자가 부러진 신검(神劍) 조각을 기둥 아래에서 찾아서,

<옥지屋智><구추勾鄒><도조都祖> 등과 함께 책성(柵城)을 떠나니,

<>씨 또한 이들을 따라나섰다.

 

옥두진(도씨) - 옥지屋智(BC48- )

추모(도씨) - 도조都祖(BC44- )

추모(호예) - 유리類利(BC40-18)

해불(호예) - 구추勾鄒(BC35?-36)

 

이때, <대소帶素><해백觧百><>씨 모자(母子)를 눌러있게 하려고 하였으나,

<금와金蛙>왕이 명을 내려 풀어주어 떠나게 한 것이다.

 

금와(해영) - 대소帶素(BC60-14)

금와(유화) - 해백觧百(BC46- )

 

<대소帶素>는 여러 차례 <금와金蛙>왕의 뜻을 거역하였었으나,

마침내 <금와金蛙>왕의 뜻과 같았던 것은,

그 하나는 독두나무로 <유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고,

그 둘째로는 어지러운 후사(後嗣) 다툼에 휘말리게 하고자 함이었다.

 

상께서 <양화羊花>으로 가서 후의 예순 번째 생일에 술을 따르며 장수하길 빌었다.

 

상께서 친히 사슴포를 씹어서 먹여주었다.

 

상께서는 선황(先皇)께서 <양화羊花>를 사랑하던 정을 뒤따르며

세밀히 챙기는 그윽함이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황후가 공경들의 딸들과 민간의 딸들을 적어보았다.

 

이미 상께 승은을 입은 이들 97인으로 아결(鵞結)을 만들었고,

이후에 고쳐서 림부(林府)로 되었는데,

년곡과 해마다 입을 옷가지들 및 절기별 음식을 하사하였다.

 

상께서는 <>후가 더욱 현명해졌음을 알고는

현명한 내 처입니다. 이런 일을 하기까지 되다니!”라고 하였다.

 

 

三月,上與<>皇后<>公主如獸林溫宮.

,二后皆有娠故也.

上慰留七日,而進熊蹯駝峰鵞皮鼋卵,撫愛周密.

<桓柏><羊臣>,擊東安平拔之,

虜其世豪二十家移于西都.段匹無数,

置安平州刺使及太守. 太守以武将,刺使以宗戚功臣子弟中年高知事者為之.

先是,<鄭道東>,年十七為長岺州刺使,為土民所忽故,有是命.

<>公主為<>太子妃,賜宴宮中.<仲室><><>氏等親族加爵授職.

 

 

3, 상께서 <>황후 및 <삼화蔘花>공주와 함께 수림(獸林) 온궁으로 갔다.

 

이때, 두 후 모두가 임신한 때문이었다.

 

상께서 위로하면서 이레를 머물렀고,

곰발바닥, 낙타 혹, 거위껍질 및 자라 알을 먹이면서 위로하고 아낌에 빈틈이 없었다.

 

<환백桓柏><양신羊臣> 등이 동안평(東安平)을 쳐서 빼앗고,

대대로 호족이었던 스무 집안을 서도(西都)로 옮겼더니,

돼지기장 및 비단 필들이 무수하였다.

 

안평주(安平州)에 자사(刺使)와 태수(太守)를 두었다.

 

낙랑군의 동쪽을 정벌한 것이다.

 

태수(太守)는 무장(武將)이며,

자사(刺使)는 종척과 공신들의 자제로 나이가 많고 정사(政事)를 아는 이로 하였다.

 

이에 앞서,

<정도동鄭道東(BC39- )>을 나이 열일곱에 장령주(長岺州)의 자사로 삼았더니,

토착 백성들에게 홀대를 당하였었기에, 이렇게 명한 것이었다.

 

장령(長岺)은 개마국 즉 현도군에 있는 주()이다.

 

<>공주를 <>태자비로 삼고, 궁중에서 연회를 열고

<중실仲室>씨와 <>씨 및 <>씨 등의 친족들에게 작위를 주고 직무를 주었다.

 

추모(중실씨) - (BC35- )

추모(장씨) - (BC35- )

 

 

 

四月,上與皇后親臨鸞庭,閱州郡貢士三百七十人.

孝友廉德之士,儒秀才,医薬卜筮農工藝術之人,各授其職.

自今年為始,經三年,遞擧補用.

長岺州老人<鴌孫>自来請謁,上接見于私殿,

老人曰自古聖王之治,以養老為重.,年八十未,聞陛下敬老之宴故,自来求之.”

上大喜曰朕果失矣.叟之責我宜矣.”

乃行敬老之宴,年七十以上,各於其州,賜酒肉衣杖.

 

 

4, 상께서 황후들과 더불어 친히 란정(鸞庭)으로 왕림하여

주군(州郡)에서 뽑아 올린 선비 370인을 살폈다.

 

효성과 우애가 있고 검소한 덕을 갖춘 선비들과 선도(仙道) 및 유학의 수재들과

의약복서농공에 재주와 기술이 있는 이들 각각에게 직무를 주었다.

 

금년부터 시작하여 3년마다 번갈아 천거하여 보충등용키로 하였다.

 

장령주(長岺州)의 노인 <궉손鴌孫>이 스스로 찾아와 배알하길 청하기에,

상께서 사사로이 쓰는 전각에서 접견하였더니, 노인이 아뢰길

옛 부터 훌륭한 왕들의 치세엔 노인 부양을 중히 여겼습니다.

신의 나이 여든이나, 폐하의 경로연(敬老宴)을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기에,

스스로 찾아와서 열어 주길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크게 웃으면서 이르길

짐이 과연 놓쳤음이오. 노인께서 나를 책하심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고는 경로연을 열었다.

 

나이 70이상인 이들이 각자의 주()에서 술과 고기 및 옷과 지팡이를 하사받았다.

 

 

 

五月,玄菟太守南口大将軍<漢素>,年五十二.

上慟哀之曰折我右臂矣.”

以太輔禮葬之,<><大房暖>於後宮為夫人,賜翟服如后例.

<>辞曰妾已四十,皃亦醜劣不足以配聖人,請與兒輩送余年于亡夫墓側.”

上曰吾見卿如<>.豈徒為色哉.<>之子女則我之子女也.宜皆携入宮中,可也.”

<>,辞之不得,携其子女七人而入宮.,賜其子女姓<>.

<>,以貞潔自守未有外夫,治家有道,世稱賢妻之範.

累因其夫之命而薦枕於上,至於生子而未肯奔放.

至是,入宮乃知天命而事上以夫,而縱其情.上大惑之.

其母聞而喜,其父聞而怒曰列女不更二夫,雖万乘,何可屈乎.非吾女也.”

乃上書言天子不奪匹婦之節.”

,謂之謝,吾與<>約為一身,久矣.,何多言邪.”

仍謂<>如汝父者,真吾舅也.”

遂賜金銀帛段於<>之父母.其父不受,其母受之,

,幷皆賜其母.尋以<>為右輔御史大夫,追封<漢素><燕王>.

 

 

5, 현도태수남구(南口)대장군 <한소漢素(BC72-BC21)>가 나이 쉰둘에 죽었다.

 

상께서 애통해 하면서 내 오른 팔이 잘려나갔음이오.”라고 하였다.

 

태보의 예법으로 장사하고

<한소>의 처 <대방난大房暖>을 후궁으로 거두어 부인으로 삼고

후에 준하여 적복을 하사하였다.

 

<대방난>이 고사하면서 아뢰길

첩은 이미 나이가 마흔이고, 용모 또한 추하고 못생겨서 성인을 짝하기에 부족합니다.

청하옵건대 제 아이들과 더불어서

죽은 지아비의 무덤 곁에서 여생을 보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 이르길

나는 경을 <한소>처럼 여기고 있소. 어찌 색사(色事) 때문이겠소.

<한소>의 자녀들은 곧 내 자녀들이오.

의당 모두를 데리고 궁중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대방난>이 사양하다가 어쩌지 못하고 아들 딸 일곱을 데리고 입궁하였고,

상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씨 성을 하사하였다.

 

<대방난>은 정결하게 자신을 지켜서 정부(情夫)가 없었으며,

가내(家內)를 도리로써 다스렸더니, 세상 사람들이 현처의 모범이라 칭송하였다.

 

누차 지아비의 명으로 인하여 상의 잠자리를 모시어 아들을 낳고서도

분방(奔放)하지 않았으며 지금에 이르러 입궁하더니 천명(天命)임을 깨닫고

상을 지아비로 섬기면서 그간의 정을 풀어놓았더니, 상께서는 크게 혹하였다.

 

그녀 어미는 이를 듣고 기뻐하였으나,

그녀 아비는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길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만승천자(萬乘天子)라 할지라도, 어찌 꺾였단 말이냐? 내 딸이 아니다!”라 하고는,

글을 올려 진언하길

천자는 필부(匹婦)의 절개를 빼앗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 그에게 사과하며 이르길

나와 <한소>는 한 몸인지 오래였소. 장인께서는 어찌 말씀이 많으시오?”라고 하였다.

 

<대방난>에게 이르길

그대의 아비 같은 이가 진정한 내 장인이시오.”라고 하고는,

은과 비단을 <대방난>의 부모에게 하사하였더니,

그 아비는 받지 아니하고 그 어미는 받아서, 모두를 합쳐서 그 어미에게 하사하였다.

 

<대방량大房良>을 찾아내어 우보어사대부로 삼고

<한소>를 연왕(燕王)으로 추봉하였다.

 

개마국 즉 현도군이 燕國과 인접한 것이다.

 

 

 

八月,行聖母大祭于南岺.

<大房彦>為玄菟太守南口将軍,<大房暉>為河城将軍.

<大房>氏自此昌盛而為<>太后之先祖.

<類利>太子,自曷思至松江寄于<加菽>公邸,而観望情勢.

<貫貝>夫人迎入于其家而密謀立儲之事.

,<>皇后專寵已久,政事多决於其手,百官之任免黜陟亦多出於其意,

卒本人之居官者甚多.

黃龍沸流之人,多怨之,

與荇勾等新附之囯,皆擁<類利>太子而欲新其政.

<貫貝><>皇后爭寵被黜,而欲伸其寃亦引<類利>.

順奴之民多被<類利>之恩救,且以宗戚之鄕隐有背卒之勢亦敀於<類利>.

<>后未之覺<>后與<貫貝>同年同月之生結為姉妹,

<類利><松義>為兄弟,<奧春>為謀主.

<漢素><仇春(一作曼)><漢悉>,<桓曼><鄭道東>,<五卿>等皆為<>.

<>,<大房>之出,時年二十四,襲封河濱侯,為上之假子.

<道東>,<>妃出,時年十九,亦上之假子也,頗有寵而資勢.

上聞<婁洽>生子,遣使於紫蒙,<>翟衣黍酒及兒衣.

 

 

8, 성모 큰제사를 남령(南岺)에서 지냈다.

 

<대방언大房彦>을 현도태수남구(南口) 장군으로,

<대방휘大房暉>를 하성(河城) 장군으로 삼았다.

 

대방(大房)씨는 이로부터 창성하였고, <(156?-234)>태후의 선조(先祖)가 된다.

 

<(156?-234)>후는 고국천제 <남무男武(155-197)>의 왕후이다.

 

197년 고국천제가 붕어하자

<>후는 <남무>의 동생인 <발기發岐(158-197)>를 멀리하고

신대제 <백고伯固(121~179)>의 서자인 궁인 <주진아 朱眞兒(155-221)>의 아들인

<연우延優(173-227)>에게 황위를 넘겨주니 <발기>의 난이 일어난다.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는 <공손도>에게 고구려의 요람인 요동을 넘겨주게 되고

이후 광개토대왕의 요동 수복까지 200여년 동안 요동을 상실하게 된다.

 

 

<유리類利>태자가 갈사(曷思) 땅에서 송강(松江) 땅에 이르러

<가숙加菽>공 저택에 의탁하고 정세를 관망하였다.

 

<관패貫貝>부인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후사(後嗣)로 세우기를 밀모(密謀)하였다.

 

이때,

<>황후가 성총을 독차지하여 많은 정사(政事)가 그녀의 손안에서 결정되었고,

백관을 임면(任免)하거나 승차함 역시 그녀의 의중에서 나옴이 많았더니,

졸본국 사람들로 관직에 있는 이들이 심히 많았다.

 

황룡국과 비류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원망하였고

행인비류개마구다국 등 최근에 귀부한 나라들 모두는

<유리>태자를 옹위하며 정사(政事)를 새롭게 하고자하였다.

 

<관패><>후와 성총을 다투다가 쫓겨나더니,

원통함을 펼쳐보려고 <유리>를 끌어당겼고,

순노국의 백성들도 <유리>의 은혜로운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종척들의 고향이었더니 은근히 졸본 세력을 배척하는 기세가 있어서

<유리>에게로 돌아섰다.

 

허나 <>후는

 <(BC57- )>후가 <관패貫貝(BC57- )>와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기에

자매가 되기로 한 것과 <유리類利BC40-18)><송의松義(BC39?- )>와 형제를 맺고

<오춘奧春(BC72- )>을 모주(謀主)로 삼은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한소>의 처 <구만仇曼><한실漢悉>의 처로

<환만桓曼><정도동鄭道東>의 처로 하고,

<오경五卿> 등은 모두 <한실漢悉>의 첩으로 하였다.

 

<한실漢悉><대방난大房暖>소생으로 이때 나이 스물넷이었으며,

하빈후(河濱侯)로 세습하여 봉해지고 상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정도동鄭道東><>비 소생으로 이때 나이 열아홉이었으며,

역시 상의 양자로 꽤나 총애를 받았고 재력도 있었다.

 

상께서는 자몽(紫蒙)<루흡婁洽>이 아들을 낳았음을 듣고

사신을 자몽(紫蒙)으로 보내어 <루흡>에게 적의와 기장 술 및 아이 옷을 하사하였다.

 

 

 

九月,<>皇后生<>公主.

閏九月,,<蓼花>公主生<>太子.

<烏伊><>氏為<>太子妃,<><>氏宴.

烏孫王<烏就屠>,

<無离大>為其弟<日貮>所殺,<無离大>之子<安日>求救於漢,

漢逐<日貮>而立<安日>.<安日><日貮>於康居而刺殺之.

,聞之,召諸皇子而戒之,

兄弟相爭,亡國之道也.爾等戒之.序長而立賢,何爭之有.幼者宜屈於長,

而愚者宜尊賢而讓位而已.如烏孫者借漢之力而兄弟相殘,無道之甚也.”

太輔松江王<觧德>,年六十,葬以王禮.<漱帝>之苐三子也.

有儉閑之德,居位不矝好問於人,常以仙學不進為憂而逝.

<大房良>為太輔,<乙耕>左輔,<武骨>右輔,<奧命>淸河侯,賜奴婢莊園.

 

 

9, <>황후가 <>공주를 낳았다.

 

9, 초하루에 <삼화蔘花>공주가 <>태자를 낳았다.

 

<오이烏伊>의 딸 <>씨를 <>태자비로 삼고,

<>씨와 <>씨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추모(빈화) - (BC34- )

 

오손(烏孫) <오취도烏就屠>가 죽었다.

아들 <무리대無离大>가 그의 동생 <일이日貮>에게 죽임을 당하여,

<무리대無离大>의 아들 <안일安日>이 한()에 도움을 청하였더니,

()<일이日貮>를 쫓아내고 <안일安日>을 보위에 세웠으며,

<안일安日><일이日貮>를 추격하여 강거(康居)에서 척살하였다.

 

상께서 이를 듣고 여러 황자들을 불러 놓고 이르길

형제들이 서로 다투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순서대로 맏이를 세우거나 현명한 이를 세우면, 어찌 다툼이 생기겠느냐.

나이가 적은 이는 의당 나이 많은 이에게 굽히고,

미련한 이는 마땅히 현명한 이를 받들면서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다.

오손 임금과 같은 이는 한()의 힘을 빌려 형제들을 죽였으니,

무도함이 심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보송강왕(松江王) <해덕觧德>이 죽었다.

나이 육십이었고, 왕의 예법으로 장사하였다. <모수제>의 셋째 아들이다.

검소하고 부산하지 않은 덕이 있어서,

왕 자리에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묻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항상 선학(仙學)에 진전이 없음을 걱정하다가 서거하였다.

 

<대방량>을 태보로, <을경>을 좌보로, <무골>을 우보로,

<오명>을 청하후(靑河侯)로 삼고 노비와 장원을 하사하였다.

 

 

 

十月,上幸南口閱武而醉通<大房彦>之妻<>,<>皇后之妹也,

旣醒而自愧,問於<>,何如人邪.”

<>陛下,多情多淚之好色君子,無可無不可之大英雄大聖人也.”

上大笑曰果如汝言則可以自慰.其過,千世之後,豈無公論哉.朕所以惧也.”

<>臣之妾,陛下之妾也,誰敢論乎.”

上笑曰汝真吾婭,然似非汝父之子也.”

<>類其母而能媎嫵,無渠父强硬之風故,.

授三輔以下公卿大夫紅錦魚袋紫綬黃盖,列王加檀車香輿,改後宮秩次翟服佩勝.

置公服所金銀所螺匠所紡績所於<>皇后宮之右,以皇后宮使者掌其職事.

上如主農大加<桓福>之苐,<>公而會<羊蘋>,

仍謂<桓福>沙漠,地方,牧畜而已.我國地廣而土沃,力農可也.

農藝之士,選其優者,特授五品之職而列于大夫.

桑麻之士,尤為加賞,可也.”

<桓福><>公之子,肖其母<>后以美皃,上愛之如<陜父>.年未三十而致卿位.

<>后崩,益加爱護,委以農政,命鑄錢而平穀価.

其妻<羊蘋>,<羊吉>之女而<>主之出也.

自未嫁時受上之寵幸及長賜<桓福>為妻.其妹<桓英>,

<于仁>,亦被上寵.<于仁><>,<桓福>之初妻,亦被上寵 為<>太子乳母,

以故<>恃上寵,其勢炎大熾,車馬莊園窮奢極侈,出於宗戚大加.上不禁之,

初年之政漸潰,識者患之.

 

 

10, 상께서 남구(南口)로 거둥하여 무예를 사열하고는,

취하여 <대방언>의 처 <>씨와 상통하였다.

 

<>황후의 여동생이니, 술에서 깨어나자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대방언>에게

짐이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가?”라고 물었다.

 

<대방언>

폐하께서는 다정하고 눈물도 많은 호색군자(好色君子)이며,

그리 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리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큰 영웅이자 성인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상께서는 크게 웃으며 이르길

과연 그대의 말 같다면 자위하여도 되겠으나,

천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 잘못을 어찌 재론하지 않겠소! 짐이 한 짓이 부끄럽소이다.”

라고 하였다.

 

<대방언>이 아뢰길

신의 첩은 폐하의 첩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공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대는 진정한 나의 동서(同壻)이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비의 아들이 아닌 것 같소.”라고 하였다.

 

<대방언>은 그의 어미를 닮아서 능히 아부할 줄로 알았으며,

그 아비의 강경한 기풍은 없었더니, 그래서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3(三輔) 이하 공경대부들에게

홍색비단 어패주머니와 자색 인끈 및 누런 천막집을 나눠주고,

열왕(列王) 들에게는 단거향여(檀車香輿)를 주었으며,

후궁들의 질품(秩品)과 차서(次序)를 바꾸고 적복 및 패물과 머리장식도 그리 하였다.

 

공복소(公服所)}금은소(金銀所)라장소(螺匠所) 및 방적소(紡績所)

<>황후의 궁 우측에 두어서,

<>황후궁의 사자(使者)들이 그 직책들과 일들을 관장하게 하였다.

 

상께서 주농대가 <환복桓福(BC50- )>의 집으로 가서

<(BC76- )>공의 장수를 축하하였으며,

<양빈羊蘋>을 만나보고서 <환복>에게 말하여 이르길

사막은 땅이 탐탁지 않아서 목축이나 할 뿐이지만,

내 나라는 땅이 넓고 흙이 비옥하여서 부지런히 농경함이 좋으니

농경에 재주가 있는 선비들 중에서 우수한 이들을 골라내어

특별히 5품의 직무를 주어서 대부(大夫) 반열에 세우고,

뽕과 삼에 재주가 있는 선비들에겐 더 얹어서 상을 줌이 좋을 것이야.”라고 하였다.

 

<환복><>공의 아들로 그 어미 <>후를 빼어 닮아서 미모였기에,

상께서 <협보>처럼 아껴 나이 서른 이전에 경()의 지위에 이르렀다.

 

<>후가 죽었기에 더욱 아끼고 감싸주어서 농정(農政)을 그에게 맡긴 것이며,

명하여 엽전을 주조하고 곡물의 가격도 매기게 하였다.

 

그의 처 <양빈羊蘋><양길>의 딸로 <빈화蘋花>공주 소생인데,

출가 이전 시절부터 상의 총애와 승은을 입었으며,

장성하게 되자 하사되어 <환복>의 처가 되었다.

 

그의 여동생 <환영桓英><우인于仁>의 처로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으며,

<우인于仁>의 여동생 <>씨는 <환복>의 첫 처로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으며

<>태자의 유모가 되었다.

 

추모(계맹자) - (BC28- )

 

이런 까닭에 <환복>은 상의 총애를 믿어서 그 권세의 불꽃이 크게 일었고,

거마(車馬)와 장원(莊園)의 사치가 극에 달하여,

종척(宗戚)들과 대가(大加)들 중에서도 돌출하였었다.

 

상께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더니,

초년의 정사(政事)가 점차 무너져 내렸고, 식자(識者)들이 그러함을 걱정하였다.

 

 

 

 

 

 

東明十八年 辛丑,

正月五日,琳宮<>皇后崩,春秋三十六.

上哀痛之如失左右手,葬儀山陵一如<>皇后禮,葬于中川之原,名曰玉陵,以玉為欄故也.

后父<士傑>,漢人也,来自邯鄲居黃竜囯,三世以宝玉為商.

,中川人<棟白>之女也,

穠麗雅娟,揣人意且有媎術腆道,深入上肺.以功臣之妻,竟登臺極,

生皇子<><><><>.

其父<士傑>生后而卒,<士傑>之弟<>娶后母<>氏而育后,

<>以善歌為宮中樂大夫,以后故封中川侯食祿二千石.

<>氏亦被上寵而生<>公主.

后妹<大房彦><張紈>,<鄭福><張緋>,后弟<張索人>妻漢人<公孫>氏亦皆被上寵.

,人曰<><>為善舞大夫,盖笑陛澤也.

 

 

 

동명18년 신축{BC20},

정월 5, 림궁(琳宮) <(BC55-BC20)>황후가 춘추 서른여섯에 죽엇다.

 

상께서는 양 손을 잃으신 듯이 애통해 하였으며,

장의(葬儀)와 산릉(山陵)의 일을 <훤화>황후의 예법과 하나같게 하여

중천원(中川原)에 장사하고 옥릉(玉陵)이라 하셨다.

 

()으로 난간(欄干)을 둘렀기 때문이다.

 

후의 아비 <장사걸張士傑>은 한()인으로 한단(邯鄲)에서 와서 황룡국에서 살면서,

3대를 진귀한 옥() 행상(行商)을 하였다.

 

그 어미는 중천 땅 사람 <진백棟白>의 딸로,

활짝 핀 꽃같이 곱고 고상하고 아름다웠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을 뿐만 아니라 여인의 재주와 다양한 방법이 있어서,

상의 마음 깊은 곳에 들었었다.

 

공신(功臣)의 처가 되고 필경엔 루대(婁臺)의 끝까지 올랐으며,

황자 <><>을 낳고 황녀 <><>를 낳았다.

 

그의 아비 <장사걸張士傑>은 후가 태어나자 죽었더니,

<장사걸張士傑>의 동생 <장은張殷>이 후의 어미 <>씨를 취하고 후를 양육하였다.

 

<장은張殷>은 노래를 잘하여서 궁중악 대부(大夫)가 되었고,

로 인해 중천후(中川侯)와 식읍 2천석을 봉 받았으며,

<>씨 또한 상의 승은을 입어 <>공주를 낳았고,

후의 여동생들인 <대방언>의 처 <장환張紈> <정복鄭福>의 처 <장비張緋>

후의 남동생 <장삭인張索人>의 처 한()<공손公孫>씨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다.

 

이때, 사람들이 <>씨와 <장은張殷>을 춤 잘추는 대부(大夫)라 불렀던 것은,

대략 임금의 은덕을 비웃었음이었다.

 

 

 

二月,<禾英>后生<>公主.

,以其向衰之年,命加療養于溫泉.

 

2, <화영禾英>후가 <>공주를 낳았다.

 

상께서는 <화영>후가 노쇠해가는 나이라 온천에서 가료하며 요양하라 하였다.

 

 

 

三月,<大房>夫人生<孝房>太子.

去年生上女而又生太子.

上爱其善産,陞夫人為琳宮皇后,<大房良>夫妻衣酒美肉.

<>臣有何功當此御饌,請斬臣女以謝天下万民.”

上曰卿女貞潔自守,朕以强力奪其志也.渠何罪乎,乃朕好色之過也,請受椘韃於吾舅.”

<>古者,聖君亦有三后五妃九嬪之禮.,陛下後宮不多,

其於廣嗣之道,當择有德之貞女.年可二八者,封冊可也.何取功臣之未亡褪物乎.”

上曰一以報其餘功於其妻,而生吾子女則與<>子女同胞之親,世為瓜葛藩屛,不亦好乎.”

自是,<大房>皇后之寵漸高.,<>后不敢妬.

 

3, <대방大房>부인이 <효방孝房>태자를 낳았다.

 

지난해에 상의 딸을 낳았는데, 또 상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상께서는 아이를 잘 낳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부인을 림궁(琳宮) 황후로 승차시키시고

<대방량大房良> 내외에게는 옷과 술 및 맛있는 고기를 하사하였다.

 

이에 <대방량>

신이 무슨 공이 있어서 이 어찬(御饌)을 받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딸을 참하시어 천하의 만민들에게 사죄하십시오.”라고 아뢰었더니,

 

상께서는

경의 딸은 정결하여 자신을 지켰으나,

짐이 완력(腕力)으로 그녀의 뜻을 빼앗은 것인데, 그녀가 무슨 죄가 있겠소?

짐이 호색한 탓이오.

청하건대, 내 장인께서 회초리를 때리시면 맞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방량>이 아뢰길

옛날의 성군(聖君)들께서도 359빈의 예법을 따랐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후궁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광사지계(廣嗣之計)를 위함이라면, 응당 덕성이 있는 숫처녀들을 택하십시오.

16살이면 좋을 것이며 책봉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어찌 공신의 미망인인 퇴물이십니까?”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한 가지는 공신의 남은 공을 그의 처에게 보답하기 위함이며,

나의 아들과 딸을 낳으면 곧 <한소>의 자녀들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지친이어

세세토록 참외와 칡넝쿨이 되어서 울타리를 감싸줄 것이니,

그 또한 좋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대방>황후를 총애하심이 차츰 더하여졌어도

<>후는 감히 투기하지 않았다.

 

 

 

五月,神馬巨婁無故瘦死,上不楽久之,有無何之症且有頻夢.

定公卿三妻五妾,大夫二妻三妾,士一妻二妾,吏一妻一妾,

庻人一妻一夫,賤者一妻二夫之制.

大夫之妻為公卿之妾者,士妻為大夫之妾者,

吏妻為士妾者,不在定数之內,故不能受其年穀.

公卿之正妻願得上子者,自願當夕.大夫之正妻願得其上典之子,

亦如之.庶人亦皆如其例.

兄亡而妻嫂者,守其家産而傳于兄子.弟亡而妻娣者,守其家産而傳于弟子.

叔亡而妻嬸者,守其家産而傳于叔子.侄亡而妻姪者,守其家産而傳于其侄子.

如無子者,以其子為其前夫之子而傳之.

若有窃其産而逐其子者抵罪.父死而妻妾少者,長子娶之.母死而其夫少者,其女嫁之.

 

 

5, 신마(神馬) 거루(巨婁)가 까닭 없이 여위어서 죽었다.

 

상께서 오래도록 편안해하지 않더니만 까닭을 몰라서 고칠 수 없는 증세가 생겼고

게다가 꿈을 꾸는 일까지 빈번하여 졌다.

 

제도로서 정하길 공경(公卿)35, 대부(大夫)23,

선비는 12, 아전(衙前)11, 서인(庶人)11,

천민은 12부로 하였다.

 

대부의 처가 공경의 첩이 되고, 선비의 처가 대부의 첩이 되고,

아전의 처가 선비의 첩이 되어서, 정해진 수를 넘을 경우엔,

그로 인하여 그 넘는 수에 해당하는 년곡은 받을 수 없다.

 

공경의 정처가 상의 아들을 가지기를 원하면 자원하여 밤일을 감당하고,

대부의 정처가 자기보다 상전(上典)의 아들을 갖고 싶어도 역시 그리하고,

선비아전서인에 있어서도 역시 모두 그러하다.

 

형이 죽어서 형수를 처로 들인 이는

형의 가산(家産)을 지켜서 형의 아들에게 물려주며,

동생이 죽어서 제수를 처로 들인 이는

동생의 가산을 지켜서 동생의 아들에게 물려주며,

숙부가 죽어서 숙모를 처로 들인 이는

숙부의 가산을 지켜서 숙부의 아들에게 물려주며,

조카가 죽어서 조카며느리를 처로 들인 자는 조카의 가산을 지켜서

조카의 아들에게 물려준다.

 

아들이 없을 경우엔 자신의 아들을 먼저 번 지아비의 자식으로 삼아서 물려준다.

 

죽은 이의 가산을 절취하거나 죽은 이의 아들을 내쫓는 자는 죄를 주어 다스린다.

 

아비가 죽고 그 처첩들의 나이가 젊으면 장자가 처로 들이며,

어미가 죽고 그 지아비가 젊으면 딸이 출가한다.

 

 

 

六月,<>皇后崩,春秋三十三.上痛哀之,葬于中川之原,

以瓊后<禾英>夫人為苐三天后.

胡王<莫車>,<且糜胥>,遣使来献土物.

太輔御史大夫<大房良>請選公卿女年二八者,納後宮,

而退四十以上有夫女在後宮者還其本夫.

上難之,問於<>,<>公曰

不可.,周穆王 年三十娶<西王母>年八十餘,

盖老陰宜於少陽故,穆王居位六十年而無疾病.

陛下始陽以来,多涉老厚腆陰故所以益旺也.

如嗜少艾則損耗多矣.安能廣嗣乎.”

上然之,欲罷其議.

,<烏伊><摩離>等女,皆欲入後宮而爭之.

上不得已選功臣十八人納後宮.皆二八貞女也,

上勞於此群,精力大損,況染而不能自己,

時人目<大房>曰伐聖之良臣.

 

 

6, <(BC52-BC20)>황후가 춘추 서른셋에 죽었다.

 

화상(가달) - 화영禾英(BC74-BC20)

양길(양화) - 보득宝得(BC58-BC30)

                 소화(BC52-BC20)

 

상께서 애통해 하며 중천원(中川原)에 장사하고

경후(瓊后) <화영禾英>부인을 제3천후로 삼았다.

 

() <막거莫車>가 죽고, 동생 <저미서且糜胥>가 보위에 오르더니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쳐왔다.

 

태보 어사대부<대방량大房良>이 청하길

나이가 16살인 공경(公卿)들의 딸들을 선발하여 후궁(後宮)으로 들이고,

나이 40을 넘은 후궁에 있는 유부녀들은 물러나게 하여

본시의 지아비들에게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난감하여 <>공에게 물었더니, <>공이 아뢰길

불가합니다. 예전에 주() 목왕(穆王)은 나이 서른에

나이 여든을 넘은 <서왕모西王母>와 혼인하였습니다.

대략 노음(老陰)이 소양(少陽)에게 알맞은 까닭에,

목왕(穆王)은 보위에 60년을 있으면서 질병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교접을 시작하신 이래로

다수의 나이가 들고 통통한 여인들을 거치셨던 까닭에 더욱더 왕성하였습니다.

나이어린 풋내기들을 즐기실 것 같으면 몸이 많이 상하실 것이니,

어찌 능히 광사지계(廣嗣之計)를 이루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께서도 그렇겠다고 여기어 논의를 파하고자 하였으나,

이때 <오이><마리> 등의 딸들 모두가 후궁으로 들어가길 다투니,

상께서도 어쩔 수 없어 공신 열여덟을 선택하여 후궁들을 바치게 하였다.

 

모두 숫처녀들이었더니,

상께서는 이 무리들에게 힘을 들이다가 정기와 근력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하물며 병이 옮아서 스스로의 몸도 지탱하지 못하더니,

이 시절 사람들은 <대방량>을 지목하길

성인을 무너뜨리기에 좋은 신하라 하였다.

 

 

 

七月,<類利>太子與<>后移于<奧春>.

,<類利>太子與<貫貝>情好,有妬婢密告于<>,

<>后使人搜<類利>.<貫貝>聞之,密送于<奧春>.

 

7, <유리>태자가 <>후와 더불어 <오춘奧春>의 집으로 옮겼다.

 

오천() - 오춘奧春(BC72- )

 

이때, <유리>태자가 <관패>와 정분이 나서 좋아하였고,

투기하던 비첩이 <>후에게 고하였다.

 

<>후가 부리는 사람을 보내서 <유리>를 찾아오라 하니,

<관패>가 이를 알고 몰래 <오춘>의 집으로 보낸 것이다.

 

 

 

 

八月,上射鹿於矮山方石之原,

<類利><都祖>来謁献其神釼斷片.

其服色皆上旧時衣也,

上左右抱之喜不自勝使<摩离>将兵万人而衛之,

命居西都鸞坮迎<>后於<奧春>家亦同居之.上密行見之.

老人<鴌孫>等七十二人請<類利>太子為正胤,上賜酒嘉納,

<>后不悅曰立儲之事,吾夫妻家事.老人何預.”

上曰彼為囯盡忠而已.”

召后[]”早知如此.,<斗切>,遠遁山谷而讓之.事出不意適足以見笑而已.”

上曰汝勿深慮,<類利>豈敢與汝相爭哉.吾當善処之.”

<禾英>皇后崩,春秋五十五,葬于<>后陵側,

<漢素><大房>氏為苐三天后,

其父<>極諫之曰臣女無行.陛下,何為此事.請斬臣頭而詔後世.”

上曰卿乃忠直之臣也,何以斬之.卿女有德,吾皇后中苐一人也.卿何謙為.”

乃封<>為囯舅太公西川侯.

<>臣女之為<>,万人皆知也,奈何.”

上曰欲報<>功而配我也.”

<><>為王,<>亦分已足矣.穢女何功.”上不聽.

上以<>太子妃<阿爾>公主為<類利>太子妃,<>公主為其副妃,設宴三日.

上與<><><><大房>后受群臣慶賀于鳳鳴殿.

 

 

 

8, 상께서 왜산(矮山) 방석원(方石原)에서 사슴사냥을 하였다.

 

<유리><도조都祖>와 함께 찾아와서 알현하고 그 신검(神劍) 부러진 조각을 바쳤다.

 

그의 복색(服色) 모두가 상의 옛 옷이었다.

 

상께서 이들을 좌우로 껴안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더니,

<마리>로 하여금 군병 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호위하게 하였다.

 

서도(西都)의 란대(鸞臺)에 머물게 하고 <오춘>의 집에 있는 <>후를 맞아들여서

역시 함께 머물라고 하고 상께서도 몰래 찾아가서 그들을 만나보았다.

 

노인 <궉손鴌孫> 72인이 <유리>태자를 정윤(正胤)으로 삼으라고 청하자,

상께서 술을 하사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후가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길

후사(後嗣)를 세우는 일은 우리 내외의 집안일인데,

노인이 무슨 참견이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저이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후가

이럴 줄을 일찍 알았더라면,

첩은 <두절斗切>과 더불어 멀리 산골짜기로 가서 양보하였을 것입니다.

일이 불의에 닥쳤으니, 그저 웃으면서 보고 있기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대는 심려하지 마시오.

<유리>가 어찌 감히 그대와 서로 다툴 수 있겠소!

내가 의당 선처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화영禾英>황후가 춘추 쉰다섯에 죽었다.

 

<>릉 곁에 장사하고, <한소>의 처였던 <대방>씨를 제3황후로 삼았다.

 

그녀의 아비 <대방량>이 극간하여 아뢰길

신의 딸은 이룬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이런 일을 하였습니까?

청하옵건대, 신의 머리를 참하시어 후세에 알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경은 충직한 신하인데 어찌 참할 수 있을 것이며,

경의 딸은 덕망이 있기가 내 황후들 중에서 제일이오.

경은 어째서 겸양하기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대방량>을 국구(國舅) 태공(太公) 서천후(西川侯)로 봉하였다.

 

<대방량>

신의 딸이 <한소>의 처가 되었던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하실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한소>의 공에 보답하고자 내 짝으로 삼은 것이오.”라고 하였다.

 

<대방량>

“<한소>를 왕으로 봉하신 것도 <한소>의 분수로는 족합니다.

더럽혀진 딸이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상께선 들어주지 않았다.

 

상께서 <>태자비 <아이阿爾>공주를 <유리>태자비로

<>공주를 부비(副妃)로 삼고 사흘간 연회를 베풀었다.

 

구태(소서노) - 아이阿爾(BC39-7)

추모(소서노) - (BC36-BC17)

 

상께서는 <><><><대방>후와 더불어

군신들의 경사축하(慶事祝賀)를 봉명전(鳳鳴殿)에서 받았다.

 

 

 

十月,上與<><類利>謁神隧,會群臣議正胤.

<>后見勢不利大怒,<仇都><仇賁>等退去牛壤,

依太伯仲雍古事,欲讓囯於<類利>太子.”

上素以無何之症,又値此難,自然添病.群臣憂之.

<觧肫>公主為皇子<貝倫>太子妃.

<>太子爱民間女欲為妻,不愛<>公主,上怒欲斬之.

<大房良>諫曰

子之不行,父之責也.陛下宜自省而已,何乃作<劉徹>狂事乎.”

上改容謝之,<>太子為庶人.<>公主為<都祖>,賜一品公服.

上命群臣立旗於東西,從東者為<斗切>,從西者為<類利>,而試其多少.

<斗切>進曰序長立賢之敎,臣已聞之.,何此擧而誤此小子耶.”

乃自詣立西旗之下.群臣無敢立東者而盡敀于西旗.

,大贊<斗切>賢哉<斗切>.今雖讓于兄,後必自立矣.”

乃命<類利>善護<斗切>,使之制南而守成,然後徐徐制坤,可也.”

 

 

10, 상께서 <>후 및 <유리>와 함께 신수(神隧)를 알현하고

군신들을 모이게 하여 정윤(正胤) 문제를 상의하였다.

 

<>후는 세()가 불리함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구도仇都> <구분仇賁> 등과 더불어 우양(牛壤)으로 물러나 머물면서

태백중옹고사(太白仲雍古事)를 좇아 나라를 <유리>에게 양보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태백중옹고사(太白仲雍古事)

 

周 文王伯父仲父<태백太伯><중옹仲雍>이 멀리 도망하여

보위에 뜻이 없음을 보인 일을 말한다.

 

 

이에 상께서는 평소 까닭을 몰라서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었고

또 이런 난관에 부닥쳐 자연히 병세가 더 나빠지니 군신들이 그 일을 걱정하였다.

 

<해순觧肫>공주를 황자인 <패륜貝倫>태자의 비로 삼았다.

 

추모(양화) - 해순觧肫(BC33- )

추모(관패) - 패륜貝倫(BC34- )

 

<>태자가 민간의 딸을 어여삐 여기어 처로 삼고자 하면서

<>공주를 아끼지 않았다.

 

추모(장씨) - (BC35- )

추모(중실씨) - (BC35- )

 

상께서 노하여 그를 참하려 하였더니, <대방량>이 간언하길

아들의 행실이 바르지 않은 것은 아비의 책임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자성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유철劉徹>이의 미친 짓을 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얼굴빛을 고쳐서 용서를 빌고

<>태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고

<>공주를 <도조都祖>의 처로 삼아주고 1품 공복을 하사하였다.

 

상께서 군신들에게 명하여 동쪽과 서쪽에 깃발을 세워놓고,

동쪽으로 가는 자는 <두절>을 위하는 것으로

서쪽으로 가는 자는 <유리>를 위하는 것으로 하여서 많고 적음을 가리게 하였다.

 

<두절>이 앞으로 나와서 아뢰길

평온한 시절에는 장자(長子)를 세우고

혼란한 시절에는 현명한 이를 세운다는 가르치심을 신()은 이미 들었습니다.

지금, 어찌 이런 일을 하셔서 이 소자를 그릇되게 하시려 하십니까?”라고 아뢰고는

스스로 서쪽 깃발 밑으로 가서 섰더니,

군신들은 아무도 감히 동쪽에 서지를 못하고 모두들 서쪽 깃발로 모여들었다.

 

이에 상께서는 <두절>을 크게 칭찬하며,

현명하구나, <두절>! 지금 비록 형에게 양보하더라도,

이후 반드시 스스로 보위에 설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리>에게 명하길

“<두절>을 잘 감싸주어야 할 것이며,

<두절>이로 하여금 남방 땅을 제압하고 지키게 한 연후에

서서히 곤방(坤方)을 제압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明十九年 壬寅,

春正月,<類利>太子為正胤.

,<乙音>密詔曰吾疾不可須叟,欲以汝妹妻<類利>而傳囯,可速召来.”

<乙音>,乃與<>公主,如牛壤告其意.

<>后曰吾非<王嬙>,安肯與<莫車>相通邪.”

<乙音>天下事宜從大勢.,<類利>已定,名分而英勇不下於聖上.背之則敗,順之則成.

,,以奇症,朝不慮夕,欲以汝妻之而傳位,機不可失也.

,若不肯,必敀於<><大房>,<大房>執政則吾輩魚肉矣,何不思之.”

<>后乃悟而還都謁上.

上曰吾疾似非尋常,可如東宮好為之.吾已許汝于東宮矣.”

<>后抱帝而哭曰汝何言邪.死則同死,生則同生.”

,命召東宮来,使抱<>后而去.后謂東宮曰

妾非敢逆命也,奈聖候如此何.”

東宮曰謹當如命矣.”

自是,囯之大事,東宮與<>后决之.,務從東宮之意而不自執,

己唯以美服濃粧送眼挑情.東宮,徃徃有難時,抱后腰而埋頭.后撫之從容曰

妾不敢不知,時猶未至也,願東宮自重.”

乃命<>主扶東宮而去.東宮顧后而欲倒,后亦怳惚自倒亦数矣.

自是,后慕東宮之心頓加.,見后愛東宮之狀則喜,不然則怒.

一夜,東宮與后侍上而困,東宮頹臥而睡,后引東宮之首枕后股而侍,

上覺而見之喜而歌曰此股本我股,今為東宮股,東宮則我身,彼股亦我股.”

,乃低首,面上而又面東宮,東宮乃覺.

 

 

동명19년 임인{BC19},

춘정월, <유리類利>태자를 정윤(正胤)으로 삼았다.

 

상께서 <을음乙音>을 불러 은밀히 조칙(詔勅)을 내리길

내 병이 나이 먹기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 여동생{召西奴}<유리>에게 처로 주어

나라를 물려주고자하니 속히 불러오시게.”라고 하였다.

 

<을음>이 이에 <>공주와 함께 우양(牛壤)으로 찾아가서 그 뜻을 알렸다.

 

<>후가 이르길

내가 <왕장王嬙>이 아닌데, 어찌 <막거莫車>와 더불어 상통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을음>

천하의 일이란 마땅히 대세를 따라야 하는 것이야.

지금 <유리>로 이미 정해졌으며,

명분이 분명하고 용맹하기도 성상보다 못하지 않으니,

불복하고 배척하면 패할 것이며 순응하면 이룰 것이야.

상의 환후가 위급하여 아침에 밤일을 걱정할 수 없으니,

자네가 그의 처가 되어서 보위를 물려받으면 잃는 것이 없을 것이네.

자네가 응하지 않으면 필시 <>후나 <대방大房>후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고,

<대방>이 집정하면 우리 무리들은 어육(魚肉)이 될 것인데,

어찌 그 것은 생각지 아니하는가?‟라고 하였다.

 

<>후가 마침내 깨닫고서 도성으로 돌아와서 상을 배알하였다.

 

상께서

내 병이 심상치 않은 듯하니, 그대가 동궁에게로 가서 그와 잘 지냈으면 하오.

나는 이미 그대를 동궁에게 허락하였소.”라고 하였다.

 

<>후는 제를 껴안고 통곡하며 아뢰길

당신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명을 내려 동궁을 불러오게 하여 <>후를 안아 가게 하였다.

 

<>후가 동궁에게 말하길

첩은 감히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성상께옵서 안위(安危)가 이러하니 어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동궁도 삼가 하명하신 대로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의 큰 정사는 동궁과 <>후가 처결하였다.

 

<>후는 동궁의 의중을 따르고 자신이 집정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예쁜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여 눈길을 보내서 정감을 돋우었다.

 

동궁이 왕왕 참기 어려워서 <>후의 허리를 껴안고 머리를 파묻으면,

<>후는 그를 어루만지면서 나직이 말하길

첩이 감히 모르는 것이 아니고 때가 아직 아니옵니다.

원컨대 동궁께서는 자중하세요.”라 하고는

<>공주에게 명하여 동궁을 데려가게 하였다.

 

동궁이 <>후를 찾아가서 넘어지려하면

<>후 역시 황홀해하였으며 스스로 넘어진 것도 여러 번이었더니,

이로부터 <>후는 동궁을 그리는 마음에 넘어지는 일이 늘어났으며,

상께서는 <>후가 동궁과 친밀한 모습을 보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하였다.

 

하루 밤에는,

동궁이 <>후와 더불어 상의 곁을 지키다가 피곤하여서

동궁이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후가 동궁의 머리를 끌어다가 <>후의 허벅다리를 베게하고서 지켰더니,

상께서 깨어나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읊조리시길

이 허벅다리는 본시 내 허벅다리로 지금은 동궁의 허벅다리이니,

동궁이 내 몸이며 저 넓적다리 또한 내 넓적다리로고.”라고 하였다.

 

<>후가 이에 고개를 숙여 상을 바라보고 다시 동궁을 바라보았더니,

동궁도 마침내 깨어났다.

 

 

 

二月,<>夫人生<>太子,<陜父><柴花>乳之.

 

2, <>부인이 <>태자를 낳았고,

<협보陜父>의 처 <시화柴花>가 젖을 먹였다.

 

 

 

三月,<斗切>太子,<溫祚>太子,為桓那沛者.

上命以<斗切>太子為<類利>太子之故,改名<溫祚>者也.

 

3, <두절斗切>태자를 <온조溫祚>태자로 하여서 환나패자(桓那沛者)로 삼았다.

 

상께서 명을 내려 <두절>태자가 <유리>태자를 위하였던 까닭에,

<온조溫祚>로 개명한 것이었다.

 

 

 

 

四月,西河人<高星>等七十五人献猉獜,五彩具備丹角而碧蹄.

,<>,詣鸞庭観之曰“<巨娄>去而猉獜来.吾其上天者歟.”

<>后怒曰,年尙少,統業未盡,何為此言.”

上曰万事如浮雲而已.”

遂臥而不言一晝一夜,<>后傳神釼金璽于正胤,<>后乃抱釼璽而泣.

上曰善事新主,可也.何乃泣為.”

后乃如東宮傳宝.東宮不受曰父皇無恙,何作此事.”

后曰無何之症不可測矣.,受之,何如.”

東宮乃與后謁上.,已不能言,只抱后手加于東宮之手而崩.

上弦之月将落而光.后乃掩面而抱新上曰妾之一生,從此,在于陛下.”

新上曰母邪.妻邪.囯之宝欤.,無我,則何以為后.,無汝,何以為帝.”

遂登床而歓好.月色皝皝,<>后以臂蔽目曰,月之皝皝.”

新上曰“<女楇>之夕,白日昭昭.,卿之夕,紅月皝皝.皝皝昭昭,皆天之賜也.,羞之有.”

,乃歛容而起,陪上而出.

<烏伊>等俯伏山呼,遂卽位於新宮鸞坮.

<><大房><><>氏等欲殉,先帝以遺詔禁殉之.

新上,<烏伊>等議,

,以年少蔑識,專賴父皇之力而帝臨此位.

,囯家大事,多不知其所以成.,邊方多事.外國若聞大行之丧則必有變動矣.

秘不發丧,以行攝政之治,何如.”

<烏伊>等俯伏奏曰陛下聖明至此,臣等不勝欣賀.”

,以軍事委於<烏伊>,政事委於<>.

,以諒闇停後宮當夕,唯命<><><>二主侍側而已,

<大房良>諫曰天子之孝,以廣嗣為一,當立<>主為皇后而更選公卿女為妃嬪以廣嗣.”

上以其汚濶不用,<>又請三年之丧,

上曰此皆太平無事之事,秘不發丧者何以掛孝.”

上聞<>后之言每違<>,<>乃辞太輔而敀.

<大房>,亦以父故,請退.上不許曰

大行以卿等遺我,卿乃吾妻也.安敢以私親之故,請退乎.”

乃命<><大房>后五日一夕,又召<貫貝>妃入宮受幸,

<>后不敢妬.

 

 

 

4, 서하(西河) 사람 <고성高星> 75인이 기린(猉獜)을 바쳤더니,

5색을 모두 갖추고 붉은 뿔과 푸른 발굽을 지니고 있었다.

 

상께서 <>후와 더불어 란정(鸞庭)으로 가서 그 것을 보고는 이르길

거루(巨婁)가 가더니 기린(猉獜)이 왔구먼. 내가 아마도 죽으려나 보지?”라고 하였다.

 

<>후가 화를 내며 아뢰길

당신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천하 모두를 아우르는 일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상께서 이르길 만사가 뜬구름 같을 뿐이오.”라고 하고는,

자리에 누워 하루 낮과 하루 밤을 아무런 말이 없으다가,

<>후에게 명하여 정윤(正胤)에게 신검(神劍)과 황금옥새(黃金玉璽)를 전하게 하였다.

 

<>후가 신검과 옥새를 부여안고 울고만 있기에,

상께서 새 임금을 잘 섬겨야 할 것이거늘, 어찌 울고만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후는 마침내 동궁으로 가서 보물들을 전하였다.

 

동궁이 받지 않으면서

부황(父皇)께서는 몸에 병도 없으신데 어찌 이런 일을 하신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후는

까닭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병인지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니,

헤아여 받으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동궁이 <>후와 더불어 상을 찾아뵈었더니,

상께서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으신지라

다만 <>후의 손을 쥐어다가 동궁의 손에 포개놓고 숨을 거두었고,

상현달도 곧 떨어지려고 어른어른하고 있었다.

 

<>후가 이윽고 얼굴을 가려드리고 새 임금을 품에 안고서 아뢰길

첩의 일생이 이리하여 폐하의 손에 남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새 임금이

어머니인지? 처인지? 나라의 보배이시오.

그대는 나 없이 후가 될 수 없음이고, 나는 그대 없이 어찌 임금이 되었겠소?”

라고 말하고는 침상에 올라서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달빛이 황황(遑遑)하여 <>후가 팔로 눈을 가리고서

, 달이 황황하지요?”라고 하였다.

 

새 임금은 “<여왜女媧>의 밤일에는 흰 태양이 소소(昭昭)하였다지만,

지금 경의 밤일에는 붉은 달이 황황하오.

황황하건 소소하건 모두 하늘이 내린 것이니, 어찌 겁낼 일이겠소.”라고 하였다.

 

<>후가 이에 얼굴빛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상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오이烏伊> 등이 부복하여 임금의 만수무강하시길 외쳤으며,

이윽고 새로 지은 궁의 란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대방大房><><>씨 등이 순사(殉死)하려 하였으나,

선제{芻牟}께서 조칙을 남기시어 순사를 금하였다.

 

새 임금이 <오이烏伊> 등과 더불어 의론하고 이르길

짐은 나이가 어려서 아는 것이 없고,

부황(父皇)의 힘에 기대어 천제의 소임인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큰일들을 어찌 이루어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변방엔 일들이 많아서,

외국들이 대행께서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면 필시 달리 움직임이 있을 것이니,

()이 났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섭정을 두어서 다스렸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들 하시오?”라고 하였다.

 

<오이> 등이 부복하여 상주하길

폐하의 훌륭하심과 밝으심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은 기쁜 마음으로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군사는 <오이烏伊>에게 위임하고 정사(政事)<>후에게 위임하였다.

 

상은 상중(喪中)인지라 후궁들의 밤일 감당을 멈추게 하고

오직 <>후와 <아이阿爾><> 두 공주들만을 곁에 두었다.

 

<대방량大房良>

천자의 효도로는 많은 후사(後嗣)를 두는 것을 제일로 삼는 것이니,

마땅히 <>공주를 황후로 삼으시고,

다시금 공경들의 딸들을 골라서 비빈(妃嬪)들로 삼으시어 많은 후사를 두십시오.”

라고 간언하였다.

 

이에 상은 이를 욕스럽게 하는 것으로 보아 멀리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대방량>이 또 간언하여서 3년을 복상(服喪)하길 청하였더니,

상은 그것은 모두 태평무사한 시절의 일들이오.

()을 당하였음을 숨기고 있는 터에, 어찌 상복을 입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상이 <>후의 말에는 기를 기울이면서도

매번 <대방량>의 주청에는 어깃장을 놓았더니,

<대방량>은 태보 자리를 사직하고 돌아갔다.

 

<대방>후 또한 아비의 일로 물러나길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지 않으며 이르길

대행께서 경()을 내게 남기셨으니, 경은 내 처인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아비의 일로 물러나겠다고 청하는 것이오?”라 하고,

명을 내려서 <을전>후와 <대방>후는 닷새에 하루씩 밤일을 감당하게 하였고,

또한 <관패>비를 궁으로 불러서 성총을 내렸다.

 

<>후가 감히 투기하지 않았다.

 

 

 

五月,營大行陵于<龍山>.

<>公主生<>太子子,以為<都祖>,名以<都彦>.

,<>太子背囯,賜其年穀奴婢如故.

,<><鴌孫>有功於立儲,<>后叙爵,

<>后曰此等人優遊而不喜拘束,雖賜爵不為榮,只可敬而遠之.”

上曰不然,天子之政莫重於賞罰,有功不賞,何以獎人.

汝為吾妻,當以吾意為意,何以汝意為意乎.”

乃以<>公為太輔以代<大房良>,<鴌孫>為長岺侯主神大加,二人皆辞而不赴.

上以<>公主妻<>,<>公辞曰,本仙人,不妻.况諒闇乎.”

,不許,命婚於宮中.初夜,<>,不知去処,四索不得.

長岺侯<鴌孫>請得<>公主為妻,上以<鴌孫>年老疑之,<>

“<>公比臣尤老而猶生子.况臣比<>公則兒孫行耳.”

上乃使<>公主為<鴌孫>.,年十七,未幾生<鴌孫>之子.

是為<長岺><>氏之祖,.

 

 

5, 대행의 릉을 용산(龍山)에 지었다.

 

<>공주가 <>태자의 아들을 낳았더니 <도조都祖>의 아들로 삼아주고

이름을 <도언都彦>이라 하였다.

 

상이 <>태자가 나라를 등지고 있음을 걱정하며

그에게 년곡과 노비를 이전과 같게 하여주었다.

 

상이 <>공과 <궉손鴌孫>이 동궁을 세우는 일에 공이 있었다 하여

<>후에게 명하여 작위를 내리게 하였다.

 

<>후가 아뢰길

이 같은 이들은 일없이 편하고 한가로움을 좋아하며 구속되길 좋아하지 않습니다.

설사 작위를 하사하여도 영예롭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경의를 표하고 멀리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상은 그렇지 않소이다.

천자의 다스림에 있어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소이다.

공이 있음에도 상을 주지 않으면 어찌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있겠소이까.

그대는 내 처가 되었으니 응당 내 뜻을 그대의 뜻으로 하여야 할 것이거늘,

어찌 그대의 뜻을 짐의 뜻으로 삼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공을 태보로 삼아서 <대방량>을 대신하게 하고

<궉손>을 장령후(長岺侯) 주신대가(主神大加)로 삼았으나

두 사람 모두 고사하며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BC35- )>공주를 <>공에게 처로 주었더니,

<>공은 고사하며 아뢰길

신은 본시 선인(仙人)이어서 처를 두지 않습니다.

하물며 임금께서도 상중(喪中)에 계시잖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궁중에서 혼인하라고 명하였더니,

첫날밤에 <>공은 거처를 몰라서 사방을 헤매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이에 장령후 <궉손><>공주를 취하여 처를 삼겠다고 청하자,

상이 <궉손>이 나이가 많았음에 괴이하다 여겼다.

 

<궉손>이 아뢰길

“<>공은 신에 비하면 훨씬 늙었음에도 오히려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물며, 신은 <>공에 비하면 아들이나 손자쯤이어서 팔팔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에 <>공주를 처로 삼아주었더니, 이때 나이 열일곱이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궉손>의 아들을 낳았다.

 

이 이가 <장령長岺><>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九月,葬大行于竜山,春秋四十.葬巨婁猉獜之骨于陵下.

<><>氏欲自焚以殉,上大怒命幽於琳府之獄.

以上母<>皇后為天宮太皇后,<><><大房>后為三天后,

<阿爾><>主為左右小后,<羊花><蓼花>等為瓊宮太后,<>太后命择日當夕.

<阿爾>小后生上子<都切>. <>太后生大行女<再思>公主.

還安平宮夫人<>氏于安平王<鍾离>.

命停公卿妻當夕.

胡王<且麋胥>烏桓王<>鮮卑王<涉臣>,遣使来吊献賻.

安平王<鍾离>紫蒙王<西川>盖馬王<燕宜>入朝.

,賜其袞金印,妻以先帝後宮而還.

 

 

 

9, 대행을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춘추 40이었다.

 

거루(巨婁)와 기린(猉獜)의 유골은 릉 아래에다 장사하였다.

 

<>씨와 <>씨가 몸에 불을 질러서 순사(殉死)하려 하였더니,

상이 대노하여 림부(琳府)의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상의 모친 <>황후를 천궁태황후(天宮太皇后)로 삼고,

<><><대방大房>후를 세 천후(天后)로 삼았으며,

<아이阿爾><>공주를 좌우 소후(小后)로 삼았고

<양화羊花><삼화蔘花> 등을 경궁(瓊宮)태후로 삼아서

<>태후의 명에 따라 날을 잡아서 밤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아이>소후가 상의 아들 <도절都切>을 낳았다.

 

유리(아이) - 도절都切(BC19- )

 

<>태후가 대행의 딸 <재사再思>공주를 낳았다.

 

추모(호예) - 재사再思(BC19- )

 

안평궁(安平宮) 부인 <>씨를 안평왕(安平王) <종리鍾离>에게 돌려보냈다.

 

명을 내려서 공경들의 처들이 밤일을 감당하는 것을 멈추게 하였다.

 

() <저미서且麋胥>오환(烏桓) <>선비(鮮卑) <섭신涉臣> 등이

사신을 보내와서 조상(弔喪)하고 부의(賻儀)를 바쳤다.

 

안평왕 <종리>자몽왕 <서천>개마왕 <연의>가 입조하였더니,

상이 그들에게 곤룡포면류관금인(金印)을 하사하고,

선제의 후궁들을 처로 삼아주어서 돌려보냈다.

 

 

 

十月,上巡西河至南口,<>后入溫泉.

<祖天><>氏薨,年七十八,以大妃禮葬于龍山陵下,盖其所願也.

<扶芬奴>為鎭西大将軍南蘇州太守. <溫祚>為上子封汗南王命都牛壤,

<>后不悅欲敀牛壤,<溫祚>諫止之.

上如<蓼花宮><旃后宮><大房后宮>.

 

 

 

10, 상이 서하(西河)를 순시하고 남구(南口)에 이르러

<>후와 함께 온천에 들렀다.

 

<조천祖天>의 어미 <>씨가 나이 일흔여덟에 죽었다.

 

대비(大妃)의 예법으로 용산(龍山) 릉 아래에 장사하였다.

 

대략 그녀가 그리하여 주길 원하였음이었다.

 

<부분노扶芬奴>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남소주(南蘇州) 태수로 삼았다.

 

<온조溫祚>를 상의 아들로 삼아서 한남왕(汗南王)으로 봉하고

우양(牛壤)에 도읍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후가 기뻐하지 않으며 우양(牛壤)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더니,

<온조>가 간하여 말렸다.

 

상이 <삼화궁蔘花宮><旃后宮전후궁> <대방후궁大房后宮>으로 갔다.

 

 

 

 

十一月,,幸不而城,謁檀林宮天帝象.

<摩离>為鎭北大将軍卑离州太守,以卑离王<素奴>女妻<摩离>.

,<>后如牛壤謁<陀勃>,<溫祚>議南進之計.

<烏干><馬黎>為其左右輔.

 

 

 

11, 상이 불이성(不而城)으로 거둥하여

단림궁(檀林宮)의 천제상(天帝象)을 참배하고,

명을 내려서 <마리摩離>를 진북대장군(進北大將軍)비리주(卑离州) 태수로 삼고

비리왕(卑离王) <소노素奴>의 딸을 <마리摩離>에게 처로 주었다.

 

상이 <>후와 더불어 우양(牛壤)으로 가서 <연타발延佗勃>의 릉을 참배하고

<온조溫祚>와 더불어 남진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오간烏干><마려馬黎>를 좌보와 우보로 삼았다.

 

 

 

十二月,黃竜王<于仁>,年四十三.<烏伊>為黃竜王.

改元<光明>.

盖馬王<燕宜>,諒闇以来,累侵卑离界.

,<摩离>為卑离王,而使鎭荇人盖馬肅愼磧東之地.

行東明大祭于東都,尊大行為東明聖王.長夀帝十六年尊為芻牟大帝.

命先帝後宮次苐當夕,<于仁>妻為後宮.

封先帝諸子為列王,<漱帝>諸子為列公,德帝諸子為列侯,

孝帝諸子為大夫,法皇庻子亦為大夫.公主亦如之.

以瓊府為瓊天宮瓊叢宮.天乃諸主入侍之宮,而叢乃諸王入侍之宮也.

 

 

 

12, 황룡왕 <우인于仁>이 나이 마흔셋에 죽어, <오이>를 황룡왕으로 삼았다.

 

연호를 광명(光明)으로 바꿨다.

 

개마왕 <연의燕宜>가 상께서 상()을 당한 이래로 여러 번 비리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상이 <마리摩離>를 승차시켜 비리왕(卑离王)을 삼아서

행인개마숙신적동 땅들을 지키게 하였다.

 

동명대제(東明大祭)를 동도(東都)에서 치르고, 대행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높였다.

 

장수제(長壽帝) 16년에는 추모대제(芻牟大帝)로 높여졌다.

 

선제(先帝)의 후궁들에게 명하여 질품과 차서대로 밤일을 감당케 하였으며,

<우인>의 처를 거두어 후궁으로 삼았다.

 

선제의 여러 아들들을 열왕(列王)으로,

수제(漱帝)의 여러 아들들을 열공(列公)으로,

덕제(德帝)의 여러 아들들을 열후(列侯),

효제(孝帝)의 여러 아들들을 대부(大夫),

법황(法皇)의 여러 아들들 역시 대부(大夫)로 봉하였다. 공주들 또한 그리 하였다.

 

경부(瓊府)를 경천궁(瓊天宮)과 경총궁(瓊叢宮)으로 나누었다.

 

경천궁은 모든 공주들이 입시하는 궁이고,

경총궁은 모든 왕들이 입시하는 궁이다.

 

 

정축{BC44} <도조都祖>태자, <>황후, <>공주, 봉 한빈왕

 

기묘{BC42} <원찬原贊>태자, <재찬再贊>, <가숙加菽>공의 딸 <>,

봉 갈사왕

 

신사{BC40} <이공耳公>태자, <오이烏伊><>,<>황후 동생,

<란파蘭巴>의 딸 봉 탕동왕

 

임오{BC39} <>태자, <중실仲室>, <오춘奧春>공의 딸 <>, 봉 모둔왕

 

임오{BC39} <>태자, <호릉好陵>태후, <>공의 딸<>, 봉 청하왕

 

갑신{BC37} <>태자, <오춘奧春>공의 비<해신觧晨>, <환인桓茵>공주,

봉 하남왕

 

을유{BC36} <비류沸流>태자, <>황후, <원양元昜>공주, 봉 엄표왕

 

<비류>BC47년생이다.

 

을유{BC36} <>태자, <양화羊花>태후, <>공주, 봉 단산왕(檀山王),

아들 <>공은 <해덕觧德>공 후사(後嗣)이다.

 

병술{BC35} <고루高娄>태자, <계루桂婁>황후, <고양高昜>공주, 봉 계림왕

 

병술{BC35} <>태자, <>황후, <>, 봉 양맥후

 

정해{BC34} <패륜貝倫>태자, <관패貫貝>, <>공주, 봉 탕남왕

 

정해{BC34} <을두지乙豆智>태자, <화영禾英>황후, <>공주, 봉 기동왕

 

정해{BC34} <>태자, <빈화蘋花>태후, <>, 봉 서하왕

 

무자{BC33} <온조溫祚>태자, <>황후, <>, 봉 한남왕

 

<온조>BC44년생이다.

 

무자{BC33} <을두신乙豆信>태자, <을류乙旒>태후, <을경乙耕>의 딸<>,

봉 기서왕

 

무자{BC33} <>태자, <위화葦花>태후, <구도仇都>의 딸<>, 봉 한동왕

 

기축{BC32} <>태자, <대방大房>황후, 봉 하빈왕

 

기축{BC32} <>태자, <훤화萱花>황후, 봉 엄리후

 

기축{BC32} <>태자, <을전乙旃>황후, 봉 구여후

 

기축{BC32} <>태자, <중실仲室>, 봉 용산후

 

기축{BC32} <>태자, <>황후, 봉 계남후

 

기축{BC32} <>태자, <>, 봉 행동후

 

기축{BC32} <>태자, <호괄胡括>태후, 봉 적동후

 

경인{BC31} <>태자, <빈화蘋花>태후, 봉 동지후

 

경인{BC31} <달륜達倫>태자, <관패貫貝>, 봉 탕서후

 

경인{BC31} <>태자, <소괄小括>, 봉 자몽후

 

신묘{BC30} <>태자, <>황후, 봉 중천후

 

신묘{BC30} <을두용乙豆容>태자, <을류乙旒>태후, 봉 호로후

 

임진{BC29} <>태자, <훤화萱花>황후, 봉 보술후

 

임진{BC29} <>태자, <>황후, 봉 하상후

 

임진{BC29} <고리高离>태자, <계원桂媛>, 봉 질산후

 

임진{BC29} <>태자, <환영桓英>, 봉 황산후

 

계사{BC28} <>태자, <삼화蔘花>태후, 봉 중천후

 

갑오{BC27} <>태자, <>황후, 봉 수림후

 

을미{BC26} <>태자, <화영禾英>황후, 봉 풍성후

 

을미{BC26} <검상黔象>태자, <오곤奧坤>, 봉 마산후

 

병신{BC25} <>태자, <빈화蘋花>태후, 봉 평산후

 

을미{BC26} <가억嘉抑>태자, <삼화蔘花>태후, 미봉

 

정유{BC24} <>태자, <>황후, 미봉

 

정유{BC24} <>태자, <삼화蔘花>태후, 미봉

 

정유{BC24} <>태자, <>황후, 미봉

 

무술{BC23} <>태자, <화영禾英>황후, 미봉

 

무술{BC23} <>태자, <>황후, 미봉

 

무술{BC23} <검을黔乙>태자, <오곤奧坤>, 미봉

 

무술{BC23} <>태자, <>, 미봉

 

무술{BC23} <>태자, <을전乙旃>황후, 미봉

 

기해{BC22} <>태자, <장비張緋>, 미봉

 

경자{BC21} <>태자, <삼화蔘花>태후, 미봉

 

신축{BC20} <>태자, <장환張紈>, 미봉

 

신축{BC20} <>태자, <대방大房>황후, 미봉

 

임인{BC19} <>태자, <>부인, 미봉

 

<>태자, <훤화萱花>황후, <아이阿爾>,

<>,기해{BC22},20, 추봉 순노태왕, 경진{BC41}.

 

<>태자, <오방奧芳>, <원양元昜>,

<덕방德芳>,무술{BC23}, 17, 추봉 송강왕

 

그 나머지로 모차서 미상인 태자 17,

비 미상으로 이미 죽은 태자 역시 5인이 있다.

 

공주들은 <후비열전>에 함께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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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