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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6 양화(羊花)

 

 

<양화羊花(BC82- )>태후는 <양산羊山(BC120-BC62>의 딸이고

<(BC116-BC52?>후 소생이다.

 

노련하기는 <양방羊芳(BC90-BC59)>후에 미치지 못하나 아름답기로는 더하였다.

 

<양방羊芳><양화羊花>는 친자매이다.

 

을묘년(BC66) 3들인

<양방羊芳>후의 자애로움과 <양성羊聖(BC118-BC66)>후의 미모와

<가달賈達(BC100-BC61)>후의 모습이라고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20대 초반에 난리를 당하여

<타리佗利(BC85-BC61)><왕불旺弗(BC78- )>에게 욕을 당하고 황룡으로 돌아왔다.

 

<양방>후가 죽으니 후가 <양길羊吉(BC79-BC36)>의 정비가 되어

<보득宝得(BC58-BC30)>을 낳았다.

 

<양길><화뢰><>이 낳았으나 <>이 양산에게 재가하여

황룔국 왕 <양산羊山>의 아들이 되었다.

 

총애함이 갑자기 더하여져서 후를 사랑함이 <양방>후와 같았다.

 

후가 죽은 뒤에 시신을 지키기가 불가능할까 하여 총애하기를 소홀히 하더니,

<양직羊直(BC56- )>을 낳은 후에 총애가 갑자기 식더니만

그의 신하 <우현于玄>에게 주었다.

 

이에 머리를 자르고 똥을 싸 놓고 <>비의 품에 숨었더니,

<양길羊吉>이 억지로 어쩌지 못하였다.

 

이때에 <양길羊吉>이 제 어미 <(BC98- )>과 황음하여 밤낮으로 껴안고 누워서

말이란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후가 <>을 어미로 모시면서 비위를 맞추고

<>이 힘을 써서 도와주어 다시금 총애를 회복하였다.

 

<대화大禾(BC53- )><소화小禾(BC52- )>를 낳고 또다시 총애가 쇠하였다.

 

<소화小禾><>소비이다.

 

이때 <>비는 이미 죽고, <>비가 총애를 잃고 도성 밖에서 홀로 살면서

옛 음악을 익히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양길>의 총신 <화광禾光(BC67- )>이 후의 미모를 애모하여

<양길>의 허락을 얻어 후에게 장가를 들고자

흰 소 10필과 맑은 구슬 10과를 바쳐서 혼인을 청하여

후는 부득이 <화광禾光>의 처가 되었다.

 

<화광禾光><화상禾相>의 서자이고 그 어미는 <천강天姜>이다.

 

이때 나이 열여덟이었다.

 

후는 나이 세른 셋으로 음기가 왕성한 때이어서

<화광禾光>을 사랑하여 그 아들 <화덕禾德(BC50- )><화선禾善(BC48- )>을 낳았다.

 

쉽사리 7년을 지났더니,

<보득宝得(BC58-BC30)>이 이미 성장하여

그 아비를 책망하며 어미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양길>이 다시금 정처로 삼고 <화광>을 후의 궁대부로 하여서

지난날들처럼 상통하게 하였다.

 

<보득>이 노하여 <화광>을 내치고 후를 치붙어서 <보완宝玩(BC43- )>을 낳으니,

후는 부끄럽고 창피하여 <양길>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때 <보득> 16, <양화> 40, <양길> 37세이다.

 

<양길>이 애첩을 죽여서 살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씹어 먹는 미친병이 있음을 알고,

미녀들은 대개가 얼굴을 매만지지 않았고

노련한 여인들은 방사를 어울리지 않게 하여 화를 면하였다.

 

<양길>이 지난날의 수문태자(修文太子)라 하며

확실히 씻어서 흔적을 없애겠는 미명으로 황주난색(荒酒乱色)하였다.

 

정사는 후와 <보득>이 함께 보게 하여 국력을 만회하게 하였으며

<양길>은 나라를 맡은 20여년을 덧없이 호화롭게 사치하면서

음란하기를 점차로 가중하고 농사와 목축을 진작하지 아니하여,

큰 우환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나라를 구할 방도가 특별히 없었고 말갈이 대거 머물고 있음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추모>가 동쪽에서 와서 말갈을 내쫓고 순노를 일으키며 졸본과 환나를 병합하니

황룡국의 신하와 백성들이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추모>를 고대하고 있었다.

 

후가 대세를 순응하여 <추모>께 사자를 보내서 예물을 바치고 찾아뵙길 바라더니,

<추모>가 옛 인연을 중히 여기어 정중히 답례하고 중천에서 후와 더불어 만났다.

 

이때 후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옛 천후적복을 입고서 <추모>를 껴안으며 말하길

부황(夫皇)을 뵙는 것 같다고 하였다.

 

상께서 웃으며 이르길 내 용모가 부황(父皇)과 비슷하냐고 하였다.

 

후가 애교로 편안하게

 

첩은 비록 나이가 마흔 다섯이어도

아직 혈기가 있으니 아들 하나 낳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상께서 허락하였다.

 

<화영禾英(BC74-BC20)>과 침상에 나란히 하여서 성총을 받으니,

그 밤이 갑신년(BC37) 115일이었다. 혹자는 105일이라고도 한다.

 

상께서 잠자리 한 번에 후를 갑자기 아끼게 되더니

여러 날을 주야로 연달아 승은을 내리시고 경궁으로 거두어 후로 봉하였다.

 

후는 한창때를 넘긴 해에 비로소 하늘이 정한 부황(夫皇)을 만났고

진심으로 힘써서 충성과 애정을 바치니

마음과 정신이 절로 넉넉하고 상쾌하여 얼굴빛이 갑절로 예뻐졌다.

 

밤마다 그리고 무시로 승은을 입어서

<(BC36- )>태자를 낳고 <(BC33- )>공주와 <(BC29- )>태자를 낳으니

춘추 쉰셋이었다.

 

상께서 태후의 예로 찾아뵙고 신하를 칭하며

절하고 예를 올리고 진공하길 지극히 풍성하게 하며

<양직羊直>을 궁대부로 하여 후의 마음에 흡족한 생애가 되게 하여주었다.

후가 <>을 낳은 후로 다시금 임신하지 못함을 비탄하여 용모가 거칠어지니

상께서 위무하며 때때로 총애하길 멈추지 않았다.

 

기갑(환갑)이 지나니 더욱더 보살피더니,

상께서 죽음을 앞두고 후를 새 임금{유리}에게 특별히 부탁하니,

새 임금이 나이 든 것을 생각지 않고 특별한 총애를 더하여서 경궁의 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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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