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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13 추모대제기(3)

 

 

東明四年丁亥,

春正月,發河南湯東汗濱軍三萬,上親征湯東賊十部落,燒其窟而逐出黑水之外.

<荻得>餘衆,誘引北沃沮鞨衆稍稍南下窟於黑水南岸年年增加,

與敦河利勿之賊遙遙相應,将有大擧南下之兆故,

上豫為之伐自水口至梁山之間十部落五十餘屯,

殺賊一万五千,虜八千余口,餘皆遁入敦河.敦河賊之来援者,亦多殺傷.

是戦,亦以火攻得勝.,耐寒而不能耐火,爛者不能起,以上為火神畏之,不敢抗拒.

北沃沮諸賊,見皇軍之渡河,皆遠遁北塞依山而居,遣使約降請歲修朝貢者十二.

上凱旋河南,召樂浪王<柴吉>而獵于矮山.

<柴吉>歲修朝貢以誠故,上優待之,而以其為東扶余之屬國,使之安土.

,<柴吉>不能自安,願以女献.上命<陜父>妻之,是為<柴花>夫人.

 

 

동명4년 정해{BC34},

춘정월, 하남(河南)탕동(湯東)한빈(汗濱)의 군사 3만을 징발하여,

상께서 친히 탕동(湯東) 10부락을 정벌하고 그들의 소굴들을 불살라서

흑수(黑水)밖으로 몰아내었다.

 

<적득荻得>의 남은 무리들이 북옥저의 말갈 무리들을 꾀어내 이끌고서 점점 남하하여

흑수(黑水) 남안에다가 굴을 파는 일이 해마다 늘었으며

돈하(敦河) 이물림(利勿林) 땅 적도들과 함께 아주 멀리 상응하여

곧 대거 남하할 조짐이 있었다.

 

상께서 이를 예감하고 수구(水口)에서 양산(梁山)에 이르는 땅 사이

10부락 50여 둔()을 정벌하여 15천의 적들을 죽이고 8천여 구를 사로잡았다.

 

나머지 무리들은 돈하(敦河) 땅으로 도망하여 들어갔고,

돈하 땅 적도들로 쫒아와서 돕던 이들 또한 많이 죽고 상하였다.

 

이 전쟁 역시 화공(火攻)으로 승리하였다.

 

적들은 추위는 견뎠으나 불은 견딜 수 없었으며,

불에 데어서 문드러진 이들은 일어설 수도 없었더니,

상을 화신(火神)으로 여겨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에 북옥저 땅의 모든 적도들은 황군(皇軍)이 하()를 건너는 것을 보고서

모두 북쪽 요새들로 멀찌감치 달아나서 산을 의지하여 거처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서 항복을 약속하고 매년 조공하겠노라고 청한 이들이 열 두 무리였다.

 

상께서 하남(河南)으로 개선하여 낙랑왕 <시길柴吉>을 불러서

왜산(矮山)에서 사냥하였다.

 

<시길>이 정성껏 조공하였음에 상께서 그를 우대한 것이었고,

그가 동부여의 속국이었던지라 그로 하여금 고향땅에서 편히 살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길>은 능히 스스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딸을 바치길 원하여서

상께서 <협보>에게 명하여 그 딸을 처로 삼게 하였으니

이 이가 <시화柴花>부인이다.

 

 

 

三月,祭黃竜於鶻岺,相宅地.

上以西城宮室狹窄難容故,将移都於此.

而壯丁盡入於軍伍,婦女老弱驅於農牧故,難以始役,乃停營室伐木之役.

下弦,上與三后五妃如<>太后宮,献不老酒祝紀甲之慶.

上彈瑟<>后歌之,

<加菽>公與<葦花>對舞 麒麟醉火豕流赤兎冠靑龍蟠等而娛之,乃赤兎日也.

沸流宮天妃<貫貝>夫人生皇子<貝倫>於沸流.

上以<松讓>之疾由於<貫貝>,<貫貝><松讓>,<貝倫><松讓>.

<仲室><小室><>氏等,亦皆敀其夫.

<><禾英>,其夫皆以不近女色,仍留後宮.

 

 

3, 골령(鶻嶺)에서 황룡(黃龍)에게 제사하고 집을 지을 터를 살피었다.

 

상께서 서성(西城)의 궁실이 협소하여 견디기 어려워

장차 이 곳으로 도성을 옮기려고 하였다.

 

장정들이 모두 군대로 들어가서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이 농사와 목축에 내몰려있어

공역(工役)을 시작하기가 어려워 궁실 지을 벌목 공역을 멈추었다.

 

하현(下弦)에 상께서 35비 들과 함께 <호인好人>태후의 궁으로 가서

불로주를 따라 올려 환갑을 맞이하신 경사를 축하하였다.

 

상께서 거문고를 타고 <훤화萱花>후가 맞추어 노래하며

<가숙加淑>공이 <위화葦花>와 함께 마주보고

기린취(麒麟醉)화시류(火豕流)적토관(赤兎冠)청룡반(靑龍蟠) 등의 춤을 추어

<호인>태후를 기쁘게 하였다. 적토일(赤兎日)이었다.

 

비류궁 천비(天妃) <관패>부인이 황자 <패륜貝倫>을 비류 땅에서 낳았다.

 

상께서 <송양>의 질환이 <관패> 때문으로 여기고 <관패>에게 명하여

<송양>에게 돌아가도록 하였고 <패륜><송양>의 아들로 삼아주었다.

 

<중실><소실><>씨 등 모두도 역시 그들의 지아비에게로 돌아갔으며,

<을전>비와 <화영>은 그들의 지아비가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않아

후궁(後宮)에 남아있었다.

 

 

 

四月,戊寅,<>太后為上設三亥龍節如紀甲時,上献豹皮大鏡於太后,大宴七日.

宴罷,有黃霧四塞,不辨人物者亦七日,

有神兵運才於營室之地.

群臣奏曰去年七月,有慶雲靑赤,今又有黃霧.神助之瑞,莫非助營室之慶耶.

請先建三后六妃之宮,以為廣嗣之計.”

上曰皇天命之,安敢不作.”

於是,庶民子来莫不戮力.

 

 

 

45일에 <호인>태후가 상을 위하여

3해용절(三亥龍節){25세 임금생일}을 회갑연 때처럼 베풀었더니,

상께서 표범 피와 큰 거울을 태후께 올리고 이레간의 큰 연회를 가졌다.

 

<추모>는 계해(癸亥)45일생이다.

 

 

연회가 파하자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어서

역시 사람과 물건을 구별하지 못한 지 또한 이레가 되었다.

 

신병(神兵)들이 궁실을 지을 땅으로 자재들을 날라다 놓았다.

 

군신들이 주청하길

지난 해 7월엔 푸르고 붉은 경사스런 구름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누런 안개가 끼었습니다.

신께서 도우시는 길조이니 궁실을 짓는 것을 도우는 경사입니다.

청컨대, 3후와 6비의 궁을 먼저 지어 광사지계(廣嗣之計)로 삼으십시오.”라 하였다.

 

상께서 이르시길

황천(皇天)이 명하니, 어찌 감히 짓지 않을 수 있겠소.”라 하였더니,

많은 백성의 자식들이 찾아와서 죽을힘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五月,田于湯東梁山之陽山陰山之間,

以慰<松讓>夫妻,<貝倫>皇子府.<松讓>請還<貫貝>于後宮.

上曰五妃之例,四節入侍則足矣,何必常侍而多曠乎.”乃以四中為<>妃之節.

 

 

5, 탕동 땅 양산(梁山)의 양산(陽山)과 음산(陰山) 사이에 밭을 갈아

<송양>내외를 위로하여 <패륜>황자부(皇子府)를 세워주었더니,

<송양><관패>를 후궁으로 되돌리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5들은 사철마다 입시하면 족할 것을 하필 항상 입시하여

많은 지아비들을 홀로 있게 해야겠소?”라 이르고는

사철의 가운데 달을 <관패>비의 때로 삼았다.

 

 

 

六月,曷思囯奄利縣久為末曷所占,至是来附於松江.

 

6, 갈사국 엄리현(奄利縣)이 오랫동안 말갈에게 점유당하여 있다가

이때가 되어서야 송강(松江)에 래부되었다.

 

 

 

七月,東明神宮成.

茅茨不剪土階三等,慶雲復見宮南,其色靑赤,敀者如雲,二水之間人家櫛比,以成不夜之城.

 

7, 동명신궁(東明神宮)이 완성되었다.

 

띠 풀로 지붕을 잇고 끝을 다듬지도 않았으며 궁터는 흙으로 3단을 다졌더니

경사스런 구름이 다시 궁의 남쪽에 나타났는데 푸르고 붉었으며,

귀의하는 이들이 구름과 같았더니

두 물줄기 사이엔 인가들이 빽빽하여 불야성이 되었다.

 

동명신궁은 용산의 골령에 세운 것이다

 

 

 

八月,行月歌於神宮之南.

<>后為月仙,大酺三日以慰将士及漢人.

月歌,始于燕昭王室中,而盛行于黃竜囯,至是為我俗云.

上欲以<>小妃為月仙,而皇后妬而自為之.

 

 

8, 월가회(月歌會)를 동명신궁 남쪽에서 열었다.

 

<>후를 월선(月仙)으로 하고,

사흘간 큰 술잔치를 열어서 장수들과 병사들 및 한()인들을 위로하였다.

 

월가회는 연() 소왕(昭王){재위 BC585-BC573}집안에서 시작되었고

황룡국(黃龍國)에서 성행하였으며, 이때에 와선 우리 풍속으로 되었다고 한다.

 

상께서는 <>소비를 월선으로 삼고자하였으나,

<>황후가 투기하여 자신이 월선이 되었다.

 

 

 

九月,以大豊,宴父老於南郊.

瓊后<禾英>宮生皇子<乙豆智>,

命為<>小妃子.<乙耕><>氏為乳母故,<乙豆智>.

以黨乙氏者,上欲觧<>后之慍也.

 

9, 큰 풍년이 들어서 부로들에게 남쪽 교외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경후(瓊后) <화영禾英>궁이 황자 <을두지乙豆智>를 낳았다.

 

추모(화영) - 을두지乙豆智(BC34-40)

 

<을두지>BC15년에 자몽왕 <섭신>의 딸 <고두>를 처로 맞이하니

북위 탁발씨의 외가의 선조가 되고 또한 <을파소(139-203)>의 선조가 된다.

 

대무신제 4(31)에는 우보 <을두지>를 행군대주부로 삼아 동부여를 친정하였다.

 

 

명을 내리시어 <>소비의 아들로 삼으고,

<을경乙耕>의 처 <>씨를 유모로 삼아주었으며, 이름을 <을두지>로 하였다.

 

<>씨 무리로 삼으셨음은 상께서 <>후의 화를 풀어주고자 하심이었다.

 

 

 

十月,上與<>后畋于獸林溫宮.

鮮卑新王<涉臣>,遣使献虎皮象牙甘草.上問<豪全>死由,

使云<豪全>食馬肝而死.

,<豪全>愛其小妻<>氏疎其大閼,大閼怒與其子<涉臣><豪全><涉臣>.

<涉臣>乃以大閼為妻而自擬於<冒頓>.

,男女之制未備,以燕衛之風流入東土,兄弟母子相婚而不知其為禽獸之行.

或有良知而能恥者,以習俗安而犯之,其風流於後世,不容易去根.

以若東明之聖不能防其微於始者,盖急於創業,專以政略結婚故.

<>后而合卒本,<>后而倂桓那,<>妃而柔黃竜.

三后六妃之婚,皆有微妙之策於其中,不可以徒貪好內論之.

 

 

10, 상께서 <>후와 더불어 수림(獸林) 온궁(溫宮)에서 사냥을 하였다.

 

선비(鮮卑)의 새 임금 <섭신涉臣(BC50?- )>이 사신을 보내와

호피상아감초를 바치니,

상께서 <호전豪全(BC88-BC34)>이 죽은 까닭을 물었다.

 

<호전>은 모수제의 이종사촌이며 <호록고>의 숙부인 <송백>의 아들이다.

 

사신은 ‘<호전>은 말의 간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애초에 <호전豪全>이 자신의 작은 처 <>씨를 아끼고

대연지(大閼氏)를 소홀히 하니 대연지가 노하여

자신의 아들 <섭신涉臣>과 함께 <호전>을 죽이고서 <섭신>을 세웠다.

 

이 선비족 <섭신><호전>을 대신한 자몽왕이며 탁발씨의 선조이다.

 

<섭신>은 이에 대연지를 처로 삼고 스스로 <묵돌冒頓> 흉내를 냈다.

 

이때 남녀 간의 제도가 미비하였고,

()()()()땅들의 풍습이 동쪽 땅으로 흘러들어

자가 서로 혼인하면서 그것이 금수(禽獸)들의 행실임을 알지 못하였다.

 

혹간 잘 알아서 그런 일을 능히 부끄러워하는 이가 있더라도,

습속이라면서 안이하게 그것을 범하여서

그 풍속이 후세로 흘러가면서 그 뿌리를 없애기는 쉽지 않았다.

 

추모같은 성인(聖人)께서 능히 그 흠결을 시초부터 막지 않았던 것은,

개략 창업(創業)이 화급하여 정략결혼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후를 거두시어 졸본을 합치고, <>후를 얻으시고 환나를 합쳤으며,

<>비를 세우시어 황룡을 유화(柔化)하였던 것이니,

3후와 6비를 두는 혼인은 모두 미묘한 책략이 그 속에 있었던 것이고

단지 부녀자를 탐하며 밝혔었다고 논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東明五年 戊子,

春正月,頒東明曆于黃竜囯諸部,以五亥為主.

<>皇后生<斗切>太子,是為<溫祖>,<馬黎><>氏為乳母.

上以<漢素>功高忠極常以謙讓自處,其妻<大房>氏亦賢而有儀賜河濱之地為湯沐邑.

<漢素>知上好內,上臨其苐必以其妻薦枕.其妻必沐浴潔身而後受幸,

薦以禮法,未嘗笑納謔媎儼然有道,

上謂<大房>,汝與我旣為夫婦,何嚴如是.”

<大房>妾父<大房良>,國之高士也,敎妾以貞潔故,

妾自幼以来未嘗斜視犯夜.今以夫命雖侍陛下,何可曰夫婦而敢慢.

且聖人之陰敎如是,其荒乱不經,君子之所恥也.”

上大嘉之,欲納于後宮而不敢奪其志.

,累幸其苐而幸之,其起居甚簡布被織席,手執鋤鍬而種菜烹飪,掌硬而足露.

上曰天子之妻當如卿矣.吾妻無一人如卿者矣.”

賜金尺大綬章,加賜黃金一千両彩段百匹,

以其子<漢悉><>太子仙人,

又以<召后>宮女御<仇都><仇曼><漢素>,

<桂后>宮女御<桓曼><鄭共>,

<旒后>宮女御<乙耕><乙曼><馬黎>.皆上之寵姬也.

,<鄭共><><馬黎><>(共妹),亦被上寵故,有是命也.皆增祿米牛羊.

<馬黎>為大畜大加,畜馬以外兼掌牛.

大設漢館于河濱招漢人之有技者居之,

使河濱侯<漢素>指揮,以敎其技于民之俊秀有才者,

又以能通扶余字者,習用漢字.

 

 

 

 

 

동명5년 무자{BC33},

춘정월, 동명력(東明曆)을 황룡국의 모든 부()에 반포하였다.

5(五亥)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었다.

 

<>후가 <두절斗切>태자를 낳았다.

 

이 이가 <온조溫祖>이 된다.

 

<마려馬黎>의 처 <>씨를 유모로 삼아주었다.

 

구태(소서노) - 두절斗切(BC44-28)

 

추모경은 구태와 소서노의 아들 두절{온조}BC33년에 태어난 것으로 하였다.

 

소서노(BC66-BC6)의 생몰을 BC55-AD28

비류(BC47-1)의 생몰을 BC36-AD1

온조(BC44-28)의 생몰을 BC33-AD28로 하여 각각 나이를 11살 낮추어 기록하였다.

 

 

상께서 <한소>가 공이 이미 높은데도 극진하게 충성하며

항상 스스로 겸양하길 자처하고,

그의 처 <대방大房(BC60?- )>씨 역시 현명하고 예절을 지키기에,

하빈(河濱) 땅을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다.

 

<한소>는 상께서 그의 내자(內子)를 좋아하심을 알아서

상께서 그의 집에 왕림하실 적엔 필히 자신의 처로 하여금 잠자리를 모셨고,

그 처는 필히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한 연후에 승은을 입었다.

 

예의와 법도로써 모시면서 한 번도 웃으며 희롱하지 않고 염연히 도리를 지켰다.

 

이에 상께서 <대방>씨에게

그대와 나는 이미 부부인데, 무얼 그리 엄숙하시오?”라 하였더니,

 

<대방>씨는

첩의 아비 <대방량大房良(BC80-1)>이 나라의 고매한 선비로서,

첩에게 정결하라고 가르친 까닭에,

첩은 어릴 적 이래로 아직껏 곁눈 팔며 밤을 샌 적이 없습니다.

지금 지아비의 명을 받아서 비록 폐하를 모시기는 하지만

어찌 부부라 하면서 감히 오만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성인(聖人)께서의 음교(陰敎)가 이러하신데,

황당하고 어지러워서 다스리지 못하면 군자께서는 수치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매우 기뻐하셨고 후궁으로 들이고 싶으셨어도

감히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누차 그 집을 찾아 승은을 내렸어도 그 기거함이 심히 간소하여,

이부자리를 펴고 돗자리도 짜며 손수 호미와 가래를 잡고

푸성귀의 씨를 뿌리고 삶고 익혀서 손이 거칠고 발로 이슬을 밟았다.

 

상께서는

천자의 처들이 응당 경과 같아야 하거늘, 내 처들은 한 사람도 경과 같지 않구려.”

라 하면서,

금척(金尺)과 대수장(大綏章)을 하사하고

더하여 황금 1천량과 채단 100필을 하사하였으며,

그녀의 아들 <한실漢悉(BC44- )><>태자의 선인(仙人)으로 삼았다.

 

또한 <구도仇都>의 딸인 <소후召后>의 여어(女御) <구만仇曼>

<한소>에게 처로 주고,

<계후桂后>의 여어(女御) <환만桓曼><정공鄭共>에게 처로 주었으며,

<류후旒后>의 여어(女御)<을경乙耕>의 딸 <을만乙曼>

<마려馬黎>에게 처로 주었다.

 

모두 상의 총희(寵姬)들이었다.

 

이즈음, <정공><>씨와 <마려><>(鄭共의 여동생)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었기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에게 봉록(俸祿)인 정곡(精穀) 및 소와 양을 늘려 주고,

<마려>를 대축대가로 삼아서 말을 치는 것 이외에도

소와 양 및 돼지와 노루도 겸하여 관장케 하였다.

 

하빈(河濱)에 한관(漢館)을 크게 지어서

재능 있는 한()인들을 그곳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하빈후(河濱侯) <한소>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서

준수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고,

또한 부여 문자에 능통한 이들에게 한자(漢字)를 익혀서 쓰도록 하였다.

 

 

漢主<劉奭>以其妻<王嬙><呼韓邪>

稱以<昭君>寧胡閼氏,其色為當世之苐一

<>棄之以與<呼韓邪>,其敬胡之禮可謂至矣.

,卑离王<>,遣使告于<呼韓邪><>,

末弟<朱蒙>,自東海来,已定順奴沸流卒本黃竜等囯,父帝封域多已復矣.

弟與<朱蒙>欲遊於東池以慰父帝母后之靈,姊亦與侄偕来而參此佳筵,

則吾兄弟之喜,當何如哉.

侄若東携末弟西連羌戎而南下,則吾當率鮮卑烏桓而亦助一臂<冒頓>之業,庶可圖也.”

<>主謂<呼韓邪>

汝之外交皆如是,其英雄何忠而事<>.當養兵以南下,可也.”

<呼韓邪>然之而備伐漢之兵.

<>聞而大驚,請為兄弟之盟而世以公主納之.

,<劉季>困於平城使<呂雉>觧袴於冒頓 而奪已嫁之女為<冒頓>之妾以来,徒以女色求媎.

至是,漢廷又以此策送美人之画於<呼韓邪>,

<呼韓邪>選其一人,豐美而有小点者乃<王嬙>.

画工<毛延夀>曾画<>,手戦而誤落一彩滴于頷乃急淸拭而尙有小痕,

至是<>誤入其画於送画之中,迢後欲脫之則使已入胡矣.

<>以為<呼韓邪>,必以点棄之而取他女,豈意反愛此小點而選<>.

<>不得遂棄<王嬙>.<>,<>母之妹也.

<>見其美而喜,遂停伐漢之計,而反保上谷燉煌.

漢以大囯,賣妻求媎者,不一二矣.皆可謂大囯乎.未免巾幗之嘲也.

<>亦迷於女色而忘其祖宗,可謂沒骨漢也.

<><>敀其王廷,唯大砂小砂而以無花草,禽鳥之樂但立於牧馬胡笳之中.

以羶肉充腸容皃自退,而单于猶自眷愛如珠玉不離左右.此之謂益之而損愛之而苦者也.

雖然陰昜之理不可欺,遂娠<><伊屠智>,盖亦天也.

上謂<漢素>

人之生也唯食色而已,是故,能推食以與人者能得其力,能推色而與人者能擒其身.

<劉季>能以妻女讓于<冒頓>,<冒頓>不愛其妻而能爭空地.

,<>以其妻與<>,此漢與单于共隆而不滅者也.

夫父子兄弟,爭其食色者必亡,能讓而共之然後可以安矣.

,以其讓于单于者,不能讓于其至親者何也.”

<>

兄弟父子聚麀則相殘故,作此禮也.聖人不滅,大盜不息者,此之謂也.

鳥雀之生任其自然而不害,其作禮而相殘者反不如鳥雀之任其自然也.’

中国之王公不如其庶民之無恥,其庶民之無恥者又不如外人之自然者也.

,王者之治任其自然而已,不為数窖而反罹其中也.

凡事,正其大體則些少之差,終當自正矣.雖有內乱,不至外乱,則不可罪也.”

上曰

其令有司識之.<江都>淫其母妹而死,<細君>淫其祖孫而榮,法之不平如是其甚矣.

此所謂法不如無法也.”

<羊花><>公主.

 

 

 

 

()의 임금 <유석劉奭(BC75-BC33) 재위(BC49-BC33)>

자신의 처 <왕장王嬙>

<호한야呼韓邪(BC79-BC31) 재위(BC58-BC31)에게 처로 주었다.

 

<호한야>는 모수제 셋째 딸 <>의 아들로 <추모>의 조카이다.

 

<소군昭君> 영호(寧胡) 연지(閼氏)라 불렸으며, 그 미색이 당세의 제일이었다.

 

<유석>이 그녀를 <호한야>에게 주었으니

그가 호()를 받드는 예법이 지극하다 할 만하였다.

 

이때 비리(卑离)<(BC67- )>공이 사신을 보내서

<호한야><>공주에게 알리기를

막내 동생 <주몽朱蒙>이 동해(東海)에서 온 이래로

순노비류졸본황룡 등의 나라들을 평정하여

이미 부제(父帝)께서 봉하셨던 강역들을 많이 복구하였습니다.

동생이 <주몽>과 더불어 동지(東池)에서 놀이를 하여서

부제(父帝)와 모후{賈達}의 영령을 위로해 드리고자 하니,

누님 또한 조카{呼韓邪}와 만나서 함께 찾아오셔서 이 좋은 자리에 참석하신다면,

우리 형제들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만나 봄이 어떠한지요?

조카가 동쪽의 막내 동생과 손을 잡고 서쪽의 강()()과 연락하여서 남하하고,

나 또한 선비(鮮卑)오환(烏桓)을 이끌고서

역시 <묵돌冒頓>의 대업을 한 팔 거들면서,

여럿이 한()을 도모하였으면 좋겠소이다.”라 하였다.

 

<>공주가 <호한야>에게

너의 외교가 모두 이와 같으니, 영웅들이 어찌 한()을 충성으로 섬길 수 있겠느냐?

응당 병력을 키워 남하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호한야>가 그리 여기고 한()을 칠 군병을 준비하였다.

 

()<유석>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호한야>에게 ʻ형제의 맹세를 할 것이며 세세토록 공주를 바치겠다.ʼ고 청하였다.

 

애초에, <유계劉季>{劉邦}>가 평성(平城)에서 곤욕을 당하여

<여치呂雉>로 하여금 <묵돌冒頓>에게 치마를 벗게 하고

이미 출가한 여인을 빼앗아서 <묵돌>에게 첩으로 준 이래로

다만 여색으로 아부해오더니,

지금에 와서 한()조정은 또다시 이 계책으로써

미녀들의 그림을 <호한야>에게 보냈고,

<호한야>가 그 중에서 한 사람을 골랐더니, 풍성하고 예쁜데다 작은 점이 있었으니,

바로 <왕장王嬙>이었다.

 

화공 <모연수毛延壽>가 일찍이 <왕장>을 그릴 적에 손이 떨려서

잘못하여 채색물감 한 방울을 아래턱에 떨어뜨렸다가

급히 지워내긴 하였지만 여전히 작은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이즈음에 <유석>이 보내는 그림들 속에 잘못하여 끼워 넣어졌고,

잠시 후 그것을 빼내려하였지만 이미 사신은 호() 땅으로 들어갔었다.

 

<유석><호한야>가 필시 그 점 때문에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인을 택할 것이라 여겼으나 어찌 도리어 그 작은 점을 사랑스럽게 여겨서

<왕장>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하였으랴!

 

이에 <유석>은 할 수 없이 <왕장>을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고,

<왕장><유오劉驁(BC51-BC7) 재위 (BC33-7)> 어미의 여동생이었다.

 

<>{稽侯狦呼韓邪兒名}>은 그녀의 미모를 보더니만

기쁜 마음에 한() 정벌계획을 멈추기에 이르렀으며,

도리어 상곡(上谷)과 돈황(燉煌)을 지켰다.

 

()은 큰 나라라면서 처를 팔아 아양을 떤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찌 큰 나라이었다 할 수 있겠는가?

 

고구리(高勾麗) 여인의 조롱감이었으며,

<계후산{呼韓邪}> 또한 여색에 미혹되어 자신의 조종들을 잊었으니

그 몰골은 한()인이었다 할 만한 자이었다.

 

<왕장><계후산稽侯狦>과 함께 그의 왕정(王廷)으로 들어갔더니,

오직 크고 작은 사막에 화초(花草) 하나 없었으며 새들의 즐거움만이

단지 말 키우는 이들의 북녘 갈잎피리 소리 중에 섞여있을 뿐이었다.

 

누린내 나는 양고기로 배를 채웠기에 용모가 저절로 퇴락하는데도,

선우(單于)가 스스로 돌보면서 사랑하길 주옥같이 하여서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이를 일러서 더하면 더할수록 상()하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비록 그랬어도 음양의 이치는 속일 수 없어서

<>의 아들 <이도지伊屠智(BC33- )>를 가지게 되었으니, 개략 하늘의 뜻이었다.

 

상께서 <한소>에게 이르시길

저 사람들의 삶은 오직 식색(食色)뿐이니,

이로 인하여 능히 먹을 것을 실어다가 저들에게 주면 저들의 힘을 얻을 수 있고,

능히 미색을 양보하여 저들에게 주면 저들의 몸을 묶어놓을 수 있다.

 

<유계{유방}>가 처와 딸을 <묵돌>에게 주었는데,

<묵돌>은 자신의 처를 아끼지 않고서 능히 빈 땅을 다투었었소.

 

지금 <유석>이 자신의 처를 <>에게 준 것은,

이는 한()이 선우(單于)와 더불어 융성하여서 망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무릇 부자와 형제들이 식읍과 여인들을 다투면 필히 망하니,

능히 자기 지친들에게 양보하여 함께 가진 연후에나 안전할 것이오.

 

()은 선우(單于)에게는 양보하였으나 능히 자기 지친에게는 양보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일이오?”라 하였다.

 

<한소>가 아뢰길

형제와 부자가 여인들을 모아놓으면 서로를 해치는 까닭에 이런 예가 생겼고,

성인(聖人)은 불멸하고 큰 도적은 쉴 겨를이 없다 하는데,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새들의 삶도 자연의 이치를 따르면서 서로를 해치지 않는데,

예법을 만들어놓고서도 서로를 해치는 자들은

도리어 새들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중원 나라의 왕공들은 자기들의 부끄러움 없는 많은 백성들보다 못하고,

그들의 부끄러움 없는 많은 백성들은 자연을 따르는 중원 밖의 백성들보다 못합니다.

 

때문에 왕을 하는 이들의 다스림은 자연의 이치를 따르면서

움집들의 수를 세지 않고 도리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정사는 그 대체를 바로잡아야만 사소한 차질이 있더라도

종당에는 바로잡히게 되는 것이고,

설사 내란이 있더라도 외란에 이르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대는 관리들에게 령을 내려서 이를 알고 있게 하시오.

강도(江都){劉徹의 형인 劉非의 아들 劉建}

자신의 어미와 누이동생을 음행하였다 하여 죽었으나

<왕세군王細君>{劉建의 딸}>은 오손의 할아비와 손자를 음행하고도 영화로웠소.

 

법의 불공평하기가 이처럼 심하니,

법 있음이 법 없음만 못하다.'라고 일컫는 것이오.”라 하였다.

 

<양화羊花><>공주를 낳았다.

 

 

 

 

四月,<宝得>病小可而入朝,上使<禾英>伴敀.

上亦至黃竜與<宝得><禾英>畋于杜訥河而観魚於羅淵羊川.

,黃竜見于此淵,淵多黃鯉,大者十余尺,

黃竜以為神而不食.<宝得>始釣而食之,味甚美.

至是,<宝得>為上親自割烹,上與<禾英>抱臥幄舍.細雨下於舍外,忽有一人從舍下走,

上引鏑射其右脚,詰之乃荇人之細作也.此地乃黃荇之界也,

荇人欲犯駕而藏其獵騎于窪中.

上使<奧春>捕其獵騎而探其虗實.

<祖天>釋其母<>而欲收外議,<>敀滸原復事<祖天>,

然為其女<>氏所制,不能當夕而相爭.

矢多,為私掘抵罪,誅斬者数千,逃亡者亦数千.

 

 

 

4, <보득{黃龍王}>이 병이 좀 나아져서 입조하였더니,

상께서 <화영>으로 하여금 함께 돌아가게 하였으며,

상께서도 또한 황룡 땅으로 가서 <보득> <화영>과 더불어

두눌하(杜訥河)에서 사냥하고 라연(羅淵)과 양천(羊川)에서 물고기 잡이를 돌아보았다.

 

이때 황룡이 라연(羅淵)에 나타났고,

그 늪에는 누런 잉어가 많았었는데 큰 것은 10여척이나 되었다.

 

황룡국에서는 신이하게 여기고 먹지 않아 왔었으며,

<보득>이 처음으로 낚아서 먹었더니 맛이 매우 좋았다.

 

지금에 이르러, <보득>이 상을 위해 친히 잘라서 끓였더니,

상께서 <화영>과 더불어 포식하고서 막사에서 누웠다.

 

막사 밖에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별안간 한 사람이 막사 쪽으로 치달려 내려왔다.

 

상께서 명적(鳴鏑)을 당겨 그 자의 오른 다리를 쏘아 문초하셨더니

행인의 세작(細作)이었다.

 

이곳 땅이 황룡과 행인의 경계인지라,

행인이 어가(御駕)를 범하려고 렵기(獵騎)를 우묵한 곳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상께서 <오춘奧春>으로 하여금

그 렵기(獵騎)를 붙잡아서 행인국의 허실을 탐색하였더니,

<조천>은 자신의 어미 <>을 풀어주어서

나라 바깥에서 의논됨을 그치게 하고자하였고,

<>은 호원(滸原)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조천>을 섬겼으나

그녀의 딸 <>씨에게 짓눌려 밤일을 맡을 수 없어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소금과 화살촉을 만드는 돌이 많았는데,

사사로이 파냈다가 죄를 받아서 수천이 주살되었고 또한 수천이 도망하였다.

 

 

 

 

五月,<><>,年四十三.

<>,以徒善,優柔之質,能為儒者之所制,割其愛妻以與<>後寤寐思之,

而恐為儒者之所責,隐疾不眠而死,可謂癡而憐者也.

在位十六年,宦者外戚弄政,忠良死於無咎,好內不倦浸於帷房而死.庸之庸也,

而乃曰元帝元之義,抑取於玄牝之玄乎.

<>,時年十九,亦好色之徒也,與其養母相奸而忽其生母,養母之族日隆云.

加葉原以大雨沒於洪水,<>王移都于柵城.

<>太后生皇子<乙豆信>,命為<>后之子.

 

 

 

 

5, () 임금 <유석(BC75-BC33)>이 나이 마흔셋에 죽었다.

 

<유석>은 그저 선하긴 하였으나 바탕이 얌전하고 유약하여

쉽게 유학들에게 제압당하였더니,

자신의 애처를 <>에게 떼어주고 난 후 오매불망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유학들에게 질책을 받을까 두려워서 괴로움을 숨기고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죽었으니,

어리석고 가여운 자였다라고 할 만하였다.

 

재위 16년 동안 환관들과 외척들이 정사를 농락하여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들이 죄 없이 죽었으며,

아녀자들을 밝히면서 장막 친 방안에서 지내길 게을리 하지 않다가 죽었다.

 

바보 중에 바보였더니,

원제(元帝)라 하는 원()의 뜻은 현빈(玄牝)의 현을 억지로 따옴이었다.

 

아들 <(BC51-BC7)>가 뒤를 이었더니 나이 열아홉이었으며 역시 호색하는 자로,

양모(養母)와 서로 간음하며 생모(生母)를 홀대하였더니,

양모(養母)의 가족들이 날로 융성하였다 한다.

 

가섭원(加葉原)이 큰비로 물에 잠기자,

<금와金蛙(BC90-BC7)>왕이 도읍을 책성(柵城)으로 옮겼다.

 

<>태후가 황자 <을두신乙豆信>을 낳으니, 명을 내려 <>후의 아들로 삼았다.

 

추모(을류) - 을두신乙豆信(BC33- )

이때 <소서노>의 어머니 <을류> 55, <화영> 42, <소서노> 34,

<추모> 26세이다.

 

<화영><을류>가 낳은 <을두지><을두신>은 황자라 하고

<소서노>가 낳은 <두절>은 태자라 하였으니 <두절><추모>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秋八月,大閱水陸軍於滸口,使<扶芬奴><扶尉厭>選征荇軍一万以習之.

,行月歌于中川,<>后為月仙.

<>公薨,享年四十五.

公好神仙善連山,性淡如晒落不肯名利,封鯤淵王不受,起居於小菴之內,

常以一婢侍側而已.

庻子<吉士>亦不受鯤淵王.

其母,公之婢也,<>王之姑,

從公四十五而殉之,年五十七,生公七子五女,<吉士>其長也.

 

 

8, 호구(滸口)에서 수군과 육군을 친히 사열하고,

<부분노><부위염>으로 하여금 행인국을 정벌할 군사 1만을 선별하여 숙달시켰다.

 

귀로에 중천(中川)에서 월가회(月歌會)를 행하였으며, <>후를 월선으로 하였다.

 

<(BC77-BC33)>공이 향년 마흔다섯에 죽었다.

 

공은 신선을 즐기고 연산(連山)을 잘하였으며,

성품은 볕에 바랜 낙엽처럼 담백하고 명리(名利)를 멀리하여

곤연왕(鯤淵王)을 봉하여도 받지 않았고

조그만 암자 안에서 기거하면서 상시로 한 비첩만을 곁에 두었을 뿐이었다.

 

서자(庶子) <길사吉士(BC60?- )> 역시 곤연왕을 받지 않았다.

 

<길사>의 어미는 공의 비첩인데 <금와>왕의 고모이며,

공을 따르길 45년에 순사(殉死)하였데 나이 오십 일곱이었다.

 

공의 일곱 아들과 다섯 딸을 낳았으며, <길사吉士>가 맏이였다.

 

 

 

九月,<祖天><>復遣使来請問罪,

上責其使曰汝主悔過而釋母,又何不和乎.”

使曰昔以<>,而今以<>.”

上曰母女相妬,未有不亡之國也.<>當誅之矣.”

遂遣<吉士><祖天><><>入朝,

<>問計於其衆,左将<徐得><><>.

<吉士>遂與<>.上遂納<>于瓊府優待之.

,親訪隐士<元理><尙海>,濯其足,賜金帛.

 

 

9, <조천>의 어미 <>이 다시금 사신을 보내와서 죄를 물어주길 청하였다.

 

상께서 그 사신을 책망하여 이르길

너희 임금이 과오를 뉘우치고 어미를 풀어주었는데, 또 무슨 불화인가?”라 하였다.

 

사신이 아뢰길

지난번은 <조천>때문이었고 이번엔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모녀가 서로 투기하면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거늘,

<조천(BC80?- )>이 응당 <조아(BC68- )>를 주살해야 하겠구나라 하였다.

 

<길사>를 보내 <조천>을 책망하며 <(BC96-BC19)><>를 데리고

입조하라 하였다.

 

<조천>은 자신의 무리들에게 계책을 물었고,

좌장(左將) <서득徐得><조천>에게 <>을 보내라고 권하였다.

 

이에 <길사><>을 데리고 돌아왔더니,

상께서 <>을 경부(瓊府)로 거두어 우대하였다.

 

이때 <>64세이다.

 

상께서 몸소 은거하고 있는 선비 <원리元里><상해尙海> 등을 찾아보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十月,上與<>后復畋于杜訥原及質陽,

<蘭秀><祖鶩>等来奔,共議討荇之計而察其動靜.

<祖天>,悔遣其母,而請還之.

上曰“<><>不来,<>何以去.”

<呼韓邪>,遣使来献黃駝,而問會東池.

上曰吾與賢侄當會于上谷.何言東池乎.”

使云寧胡生子<伊屠智>.<>大喜曰‘<>之外孫,<>之珍宝,天王也.’

使其臣民遠致盆花孔雀獅子等而悅之.

寧胡猶思漢帝而痩衣帶緩,<>以為脮身而憙之,不嗜駝峯而却之,以為為已而懷之.

寧胡,亦無奈何,竟老於<>之懷中.”

<>,欲為寧胡而移居磧東林木之地,頻送使者以探上意,

上笑曰“<>誠癡人也,自居自处,吾何言之.

漢都若東則必有許多<王昭君>老於吾懷中矣.不若,早制坤方而有之.”

<漢素>制坤之業不難.陛下,恭儉養兵席卷而西.兵精粮足德化行焉,

沛然之敀,其孰能禦之.

数年以来,山無虎豹之患,野無末曷之侵,年年豐登牛羊繁殖,女口三倍于男口故,

無有曠夫而生兒漸多,或有一産五女者,生生不已人口日增.両河之間煙花相望,

不過幾年可得百万之軍矣.鍊此以西,遼山東西皆敀於我,何難制坤乎.”

上曰非朝夕之事也.朕當自修而待之.”

紫蒙王<>,遣使来献甘草酒,而請納女為妃.

上命<吉士><奧天>徃迎之曰萬古之聖君,一代之俗人.”

 

 

10, 상께서 <>후와 함께 다시금 두눌원(杜訥原)과 질양(質陽)에서 사냥하였다.

 

<란수蘭秀><조목祖鶩> 등이 도망하여 왔기에,

함께 행인을 토벌할 계책을 의론하고 행인의 동정을 살피었다.

 

<조천>이 자신의 어미를 보낸 것을 후회하며 돌려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상께서 이르시길

“<조천><조아>가 오지 않았는데, <>이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호한야>가 사신을 보내와서 누런 낙타를 바치면서

동지(東池)에서 모임을 가질 것이냐를 물었다.

 

상께서 이르시길

나는 현명한 조카와 더불어 상곡(上谷)에서 곧 모였으면 하네.

동지(東池)라니 무슨 말이신가?”라 하였다.

 

사자가 아뢰길

영호(寧胡)가 아들 <이도지伊屠智>를 낳았더니,

<>이 크게 기뻐하며 한()의 외손이고 호()의 진보이니

천왕(天王)이 될 것이야.’라고 말하였습니다.

 

신하와 백성이 멀리에서 화분(花盆)공작(孔雀)사자(獅子) 등을 가져다가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있습니다.

 

영호(寧胡)는 오로지 한()의 황제만을 그리워하다가 야위어서

의대가 느슨하여지기에,

<>이 몸이 썩는다고 하여도

그것을 기뻐하며 타봉(駝峰)을 즐기지 않고 물리쳤으며,

그러기만 하다가 이윽고 그를 품었습니다.

 

영호(寧胡) 역시 어쩔 수 없이 필경 <>의 품에서 늙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영호(寧胡)를 위해

적동(磧東)의 나무와 숲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살고 싶어서

자주 사신을 보내서 상의 의중을 탐색하였다.

 

상께서 웃으며 이르시길

“<>은 참 미련하구먼. 스스로 알아서 거처할 일이지, 내가 어찌 말해 줄 일인가?

()의 도성이 동쪽으로 있었더라면

필시 내 품에서 늙어 갈 <왕소군>들이 허다하였겠구먼!

그러지 않아도 일찌감치 곤방(坤方) 땅을 제압하여 가져야겠는데.”라고 하였다,

 

<한소>가 아뢰길

곤방(坤方)을 제압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폐하, 삼가 검약(儉約)하고 양병(養兵)하여 석권(席捲)하며 서진(西進)하시지요.

군병들이 날래고 군량이 풍족하며 덕화(德化)가 이루어지면,

쏟아지듯 귀속하여 오는 것을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수년전이래로 산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의 우환이 없어왔고

벌판에선 말갈의 침입도 없었으며, 해마다 풍년이고 소와 양이 쭉쭉 늘어나고,

여인들의 수효가 남자들의 세 배나 되어 홀아비가 없었더니

아이를 낳는 것이 점점 많아졌고,

혹간은 한 번에 다섯을 낳는 여인들이 있고, 낳고 또 낳으며 멈추질 않아서,

하루가 다르게 인구가 늘어나고 있으며, 양 하()간엔 굴뚝연기가 서로서로 마주하니

불과 몇 년 안으로 100만군을 얻으실 것이고,

이들을 훈련하셔서 서진하면

요산(遼山)의 동쪽과 서쪽 모두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어찌 곤방 땅을 제압함이 어렵겠습니까?”라 하였다.

 

상께서는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닐 것이니, 짐은 마땅히 스스로를 닦으면서 기다릴 것이오.”

라고 하였다.

 

자몽(紫蒙)<>공이 사신을 보내 찾아와서

감초주(甘草酒)를 바치고 딸을 거두어 비()로 삼아주시길 청하였다.

 

<><가달賈達>의 아들이다.

 

상께서 <길사><오천>에게 명하여 가서 맞아들이라 하면서

자몽왕 <>공은 만고의 성군(聖君)이고, 일대(一代)의 속인(俗人)이오.”라 하였다.

 

 

 

 

 

東明六年 己丑,

春正月,<>后生<>公主.

<柴吉>来報<>后已生<觧弗>二子,

上笑曰吾弟之子亦吾子也,何嫌之有.但恐<>不能敵<>,况又<>.”

漢以<五鹿充宗>為玄菟太守.

<五鹿><石顯>之徒,猖獗旣極,<><>而黜之.

<五鹿>亦被謫于幽州,而妄稱玄菟太守.玄菟之地非漢之有也久矣.

<五鹿>焉敢来乎,只是夢玄菟而已.

<鄭共><>氏生女<>.美如其母,

上以<>名之曰當如<呂雉>.”

<>“<呂雉>無行而不吉,何以此女擬之乎.”

上曰雖然,<>者亦能幾人乎.恐不及矣.”

<>公妻<胡括>率其女<素括>而来,上迎于杜訥而合巹為苐七妃.

<胡括><羊花>同年,上留之瓊府而不還.

 

 

 

 

동명6년 기축{BC32},

춘정월에 <>후가 <>공주를 낳았다.

 

<시길柴吉>이 찾아와서 <>후가 벌써 <해불>의 둘째 아들을 낳았다고 알렸더니

상께서는 웃으며 이르시길

내 동생의 아들 또한 내 아들이오. 어찌 싫어할 일이겠소.

허나, <해불><>후를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인데,

하물며 또 <>후를 어찌 감당할꼬?”라 하였다.

 

()<오록충종五鹿充宗>을 현도태수로 삼았다.

 

 

* 참고 <오록충종五鹿充宗>

 

전한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로, 자는 군맹(君孟)이며 대군 사람이다.

 

<천쯔陈直>1930년 발굴된 오록충묘(五鹿充墓)의 주인인 오록충(五鹿充)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양구림梁丘臨>의 밑에서 역경을 익혔다.

 

중서령(中書令) <석현石顯>과 친분이 있어 상서령이 되었는데,

<오록충종>과 중서복야(中書僕射) <뇌량牢梁>이 지위를 얻은 것을 두고

세간에서는

“<>, <>이여, <오록五鹿>의 손님이여.

도장은 왜 그리 많은가? 인끈은 왜 그리 긴가?”

라고 노래하였다.

 

역시 역경을 배운 <경방>이 원제에게 임용되려 하자,

<경방><석현> 등을 축출하려 한 것을 염두에 두었으며

<석현>과 함께 그를 쫓아냈다.

 

건소 5(기원전 38), 소부가 되었다.

 

원제는 <양구梁丘>을 좋아하여 역경을 배운 학자들로 하여금

소부 <오록충종>과 함께 토론케 하여 고찰하려 하였다.

 

<오록충종>의 권세와 교묘한 변설 때문에 학자들은 대항하려 하지 않았고,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주운>은 당당히 <오록충종>과 토론하여 이겼고,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오록>의 긴 뿔을 <주운>이 꺾었다"라고 하였다.

 

원제가 승하하고 BC33년 성제가 즉위하였다.

 

<석현>은 실각하였고, <오록충종> 또한 현도태수로 좌천되었다.

 

<석현>과 같은 파벌이었던 <이가伊嘉>는 안문도위(雁門都尉)가 되었고,

<뇌량><진순陳順>은 파면되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는 안문으로, <鹿>은 현도로. <><>은 쓸모가 없어 내쳐졌구나.”

라고 노래하였다.

 

제자로 <사손장>·<등팽조>·<형함>·<풍상>을 두었다.

 

<오록충종>은 또 <미성자彌成子>의 밑에서도 수학하였다.

 

<미성자>는 젊을 때 누군가에게서 문자를 새긴 돌을 받았는데,

크기가 달걀과도 같았다.

 

<미성자>는 돌을 삼켜 학문을 크게 깨쳤고, 천하에서 통유(通儒)라고 일컬어졌다.

 

훗날 <미성자>는 병이 들었고, 돌을 토해내어 <오록충종>에게 주었다.

 

돌을 받아 삼킨 <오록충종>은 학문을 깨쳤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오록><석현石顯>의 무리로 창궐함이 이미 극심하여

<유오劉驁><석현>을 미워하여 쫓아낸 것이고,

<오록> 또한 유주(幽州)로 유배되고서 현도태수를 제멋대로 칭한 것이었다.

 

현도(玄菟)땅이 저들 땅이 아닌지 오래인데, <오록>이 어찌 감히 올 수나 있었으랴.

다만 꿈에서나 그렸을 뿐이었다.

 

<정공>의 처 <>씨가 딸 <>를 낳았다. 미모가 어미와 같았다.

 

상께서 <>라고 이름을 지어주시며 이르시길

<여치呂雉>같아 보이는구나.”라고 하였다.

 

<>씨가

“<여치>는 이룬 일이 없어 좋지 않겠습니다.

어찌 이 딸이 <여치>와 비견하여 닮았다 하십니까?”라 아뢰었다.

 

상께선

비록 <여치>가 그랬더라도, <여치>와 같다하여서

역시 사람을 위태롭게 할 것이란 말이오? 그렇지 못할까 걱정이오.”라 하였다.

 

<>공의 처 <호괄胡括(BC81- )>이 딸 <소괄素括>을 데리고 입조하니,

상께서 두눌 땅에서 맞아들여 합근(合巹)하고 일곱째 비()로 삼았다.

 

<호괄><양화>와 동갑이었고,

상께서는 그녀를 경부에 머물게 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호괄胡括>무제 <유철>의 신하인 <이릉李陵>의 딸이다.

 

 

 

二月,鮮卑王<涉臣>遣使献甘草酒及漢曆.

烏桓王<鷄蔣>亦遣使献土菌狐白皮請婚姻,

上厚待之而命求能蚕者送之.

 

 

2, 선비 왕 <섭신>이 사신을 보내서 감초주와 한()의 책력을 바쳤다.

 

오환(烏桓)<계장鷄蔣> 또한 사신을 보내서 땅버섯과 흰 여우 가죽을 바치며

혼인하길 청하였다.

 

상께서는 그 사신을 후대하고 잠사(蠶事)에 능한 이를 구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三月,荇人王<祖天>遣方士<許斗><馬練>来言

“<漱帝>之見困也,吾與<羊福>救之.,足下不思當時之恩,

而但恃兵力欲襲我土.此鷹鸇之行也,

豈天帝子之所為乎.吾與卑离盖馬欲奉足下為单于,足下以為何如.”

上笑曰“<祖天>不恤其民徒事淫乱百姓離心,

兄弟不睦,梁貊不肯與,安能與卑离盖馬合力哉.”

乃留其方士不還.

<禾英>后生<>公主于獸林溫宮.

 

 

3, 행인 왕 <조천>이 방사(方士) <허두許斗><마련馬練>을 보내와서 말하길

“<모수제>께서 곤란하셨을 적에 저와 <양복羊福黃>이 도와드렸는데,

지금 족하(足下)는 그 시절의 은공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단지 군병의 힘만을 믿으며 내 땅을 습격하려하고 있소이다.

 

이는 조그맣고 사나운 새들의 행실이지, 어찌 천제의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이겠소?

 

내가 비리(卑离)개마(盖馬)와 함께 족하를 선우(單于)로 받들려하는데,

족하는 어찌 생각하시오?”라 하였다.

 

상께서는 웃으며 이르시길

“<조천>은 백성들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음란하기를 일삼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으며,

형제들과도 화목하지 아니하여 양맥(梁貊)이 함께하길 싫어하는데,

어찌 능히 비리개마와 더불어 힘을 합칠 수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그들을 가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화영>후가 <>공주를 <수림> 온궁(溫宮)에서 낳았다.

 

 

 

四月,以玄菟人<曹元理>為算数博士,黃竜人<秦章>為医薬博士,盖馬人<王忠>為連山博士.

其先皆自中囯来者也.上不擇其閥而用之,以啓聰明.

微行至<漢素>,<大房>氏泛舟於河上而留連数日.徵其父<大房良>,不至.

未幾,<大房>氏生<>太子,<>后生<>太子,<仲室>氏生<>太子,

<>天妃生<>太子.

 

 

4, 현도 사람 <조원리曹元理>를 산수박사(算數博士),

황룡 사람 <진장秦章>을 의약박사(醫藥博士),

개마 사람 <왕충王忠>을 연산박사(連山博士)로 삼았으다.

 

그들의 아비들은 모두 중원 땅 나라들에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상께서 문벌(門閥)들 중에서 택하지 아니하고

총명함을 계몽하기 위하여 등용한 것이었다.

 

미행하여 <한소>의 동산에 이르더니 <대방>씨와 더불어 하()상에 배를 띄우고

계속하여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그녀의 아비 <대방량>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방>씨가 <>태자를 낳았고,

<>후가 <>태자를 낳았으며,

<중실>씨가 <>태자를 낳고, <>천후가 <>태자를 낳았다.

 

추모(대방난) - (BC32- )

추모(옥훤화) - (BC32- )

추모(중실) - (BC32- )

추모(을전) - (BC32- )

 

<>은 하빈후, <>은 엄리후, <>은 용산후, <>은 구여후가 된다.

 

 

 

五月,上至質陽與<><>氏分排荇之軍,命舟師沿滸水作站以絶鹽路.

鹽侯等来拒各出兵守其鹽,

<>氏與<蘭秀><祖鶩>等或說或討輸其鹽於滸口.

<>年已六十五而娠皇子八月矣,上慮其難産而命安之,不聽而先入.

荇囯多鹽山鹽井,其鹽為黃句等之用.

鹽侯有大白之名,以鹽為豪者也.

各有鹽兵数百販鹽為利.至是,其鹽皆為我軍所留.

<祖天>憂惧不知所為,盡出王府兵七百與之大鹽侯曰事之成敗任卿自為而已.”

大鹽曰臣等之兵不過二千,皆是販鹽奴,不知弓釼,何能敵彼不若請救於北鞨.”

<>乃求救於北鞨王<舂臣>,遺以美女曰

“<朱蒙>来侵我囯将奪鹽山,此鹽敀彼,末曷亦無以得鹽矣.

<朱蒙>之意不徒鹽山而亦在,

山去則羯之去勢也.願與之共禦此寇.”

<舂臣>然之,與肅愼王<乾朕>大擧而来,與我兵會于子午谷大戦終日.

互有殺傷日晡不决,上與<>后親冒矢石當前驅呼,賊勢漸加,事甚危急.

,南風吹沙塵北去,賊依林而射.上大呼火攻,<>后乃引火手因風放火燒山.

火圍賊衆,賊衆始知陷在火中,遂潰大乱.我軍乘勝追擊,莫不以一當百,

賊遺尸万余而走,馬匹兵仗牛羊無数,皆為我獲.

<祖天>大惧與其妻子,出奔北棘城.上以士卒多傷,命停進擊<祖天>,

使<扶芬奴>将新二千與<蘭秀>巡定荇南諸郡,

荇人莫不来降,<尉厭>将質陽一千巡定荇東諸郡.

<祖鶩>為前導,以七月五日會於河上.

上以<>氏為荇人國天王.

,<>氏産期臨迫,臥於牛車之上,謂荇人之来降者曰

吾以為高句麗國皇后而當朔如此,汝等當尊<朱蒙>為天帝而討<>之罪.”

於是,沿路諸侯爭来投降.

上與<><>妃受其降而賜之以酒,

兵不血刃而進駐<><滸原>.

其夜,<>氏生皇子<>,

一軍鳴鼓而山呼,都民擧火而祝之,

上抱<>妃受民之大賀.<>氏依上懷而悅淚曰

妾之一生,無有如此之幸.”

先是,<祖天>將北走,<祖天>之兄子<旺發><>降之,

<>怒幽<>於囹圄而去.<>,自獄中出收捨民心,封其府庫宮室而迎王師故,城中晏然.

上喜其功,<>為沛者,以鎭撫乱民.

<>之母,<旺仁>之女也,其父<祖山>之前妻子也.

上命<芬奴><>之後宮八十余子女百三十人,分賜諸将為妾為奴,

又取府庫珍宝金人玉馬等賜<><>妃及<芬奴>兄弟.

大酺将士五日,賑其飢民,撫其宗戚.

<烏伊>将新民五千而至.

 

 

5, 상께서 질양(質陽)에 이르러

<>후 및 <>씨와 더불어 행인 정벌군을 나누어서 거느리고,

주사(舟師)들에게 명하여 호수(滸水)의 연변에 참호를 세워서 소금 길을 끊게 하였다.

 

이에 염후(鹽侯)들이 달려와서 항거하며 각기 출병하여 자신들의 소금을 지켰다.

 

<>씨가 <란수蘭秀><조목祖鶩> 등과 함께 설득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여서

그 소금들을 호구(滸口)로 날랐다.

 

<>이 나이 예순다섯에 황자(皇子)를 가진지 여덟 달이었더니,

상께서 난산을 걱정하시어 편안히 있으라고 명하였어도,

듣지 않고 앞서서 들어간 것이었다.

 

행인국에는 염산(鹽山)과 염정(鹽井)들이 많아서

그 소금이 황룡개마졸본구다에서 소용되었으며,

염후(鹽侯)들에게는 대()()()() 염후(鹽侯)라는 이름들이 있었고

소금으로 귀하게 된 자들이었으며,

각기 염병(鹽兵) 수백씩을 거느리고 소금을 팔아서 이득을 보았는데,

그 소금들이 모두 아군이 점유한 바가 되었다.

 

<조천>이 걱정스럽고 두려움에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왕부의 병사 칠백 명을 모조리 불러내서

대염후(大鹽侯)에게 건네주고서

일의 성패가 경에게 달렸으니 알아서 하시게나.”라고 하였다.

 

대염후(大鹽侯)가 아뢰길

신 등의 병졸은 2천을 넘지 못하며,

모두가 소금을 팔던 자들이어서 활과 칼 쓰기를 모르니,

북갈(北鞨)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서는 어찌 능히 저들을 대적하겠습니까?”

라 하였다.

 

<조천>이 이에 북갈 왕 <용신舂臣>에게 도움을 청하며 미녀들을 건네면서 말하길

“<주몽>이 내 나라에 쳐들어와서 곧 소금 산들을 빼앗으려하고 있소.

이 소금들이 저들에게 넘어가면, 말갈 역시 소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주몽>의 속셈이 염산들만이 아니고 또한 촉산에도 있음이니,

촉산이 떨어지면 북갈들도 세력을 잃게 될 것이오.

바라건대, 그대와 함께 이 적을 막고 싶소이다.”라 하였다.

 

<용신舂臣>도 그렇게 여기고 숙신 왕 <건짐乾朕>과 함께 대거 몰려와서

우리 군사들과 자오곡(子午谷)에서 맞붙어 종일토록 크게 싸웠다.

 

서로 간에 죽고 상하면서 해질녘에도 끝나질 않기에,

상께서 <>후와 더불어 친히 화살과 돌멩이를 무릅쓰고

앞을 맡아 나서서 말을 달리며 호령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점점 늘어나는지라 일이 심히 위급하였다.

 

때마침 남풍이 모래와 먼지를 날리며 북쪽으로 불어가고 있고

적들은 숲을 의지하여 활을 쏘아댔더니,

상께서 화공(火攻)이라고 크게 외치니

<>후가 화수(火手)들을 이끌고 바람을 힘입어서 불을 질러 산을 불태웠다.

 

불길이 적군 무리들을 둘러쌌더니,

적군 무리들은 비로소 불길 속에 갇힌 것을 깨닫고 무너져 내려서 크게 어지러웠고,

아군은 승승하며 추격하였더니 일당백(一當百) 아닌 이들이 없었다.

 

적들은 1만이 넘는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였으며,

남겨 둔 마필 및 병장기와 소와 양들이 셀 수 없이 많았더니,

모두가 아군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조천>은 대단히 두려우매 자신의 처자들과 함께 북극성(北棘城)으로 달아났고,

상께서는 병사와 병졸들이 많이 상하였음에

명을 내리어서 전진하면서 <조천>을 치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부분노>로 하여금 새로운 군병 2천을 이끌고

<란수>와 더불어서 행남(荇南)의 모든 군()들을 순수(巡狩)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행인 사람들로 찾아와서 항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

 

<부위염>으로 하여금 질양(質陽)1천병으로

행동(荇東)의 모든 군()들을 순수하여 평정하게 하고

<조목祖鶩>을 전도(前導)로 삼아서, 75일 하()>상으로 집결하였다.

 

상께서 <>씨를 행인국 천왕(天王)으로 삼았다.

 

이때, <>씨는 산기가 임박한지라

소가 끄는 수레 위에 누워서 항복하여 온 행인 사람들에게 이르길

내가 고구리국(高勾麗國)의 황후가 되어서 이렇게 만삭이 되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주몽>을 천제(天帝)로 받들고 <조천>의 죄를 꾸짖어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에 연로(沿路)의 제후(諸侯)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투항하였다.

 

상께서 <>후 및 <>비와 함께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술을 하사하였다.

 

병사들은 칼에 피도 묻히지 않고 <조천>의 도성 호원(滸原)으로 진주(進駐)하였다.

 

그날 밤, <>씨가 황자 <>공을 낳았다.

 

추모(란씨) - (BC32- )

 

<>공은 행동후가 된다.

 

모든 군병들이 나발을 불고 북을 두드리며 만세를 불렀고,

도읍 백성들은 불을 피워 올려서 축하하였다.

 

이에 상께서 <>비를 감싸 안고 성대한 축하를 받았다.

 

<>씨는 상의 가슴을 의지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길

첩의 일생에 이런 행복은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천>이 곧 북쪽으로 달아나려하니

<조천> 형의 아들인 <왕발旺發><조천>에게 항복하길 권유하자,

<조천><왕발>을 감옥에 가두어놓고 가버렸다.

 

<왕발>이 옥중에서 빠져나와서 민심을 수습하고 부고(府庫)와 궁실(宮室)을 잠가놓고

천왕(天王)의 군대를 맞아들였던 까닭에 성 중이 편안하였다.

 

상께서 그의 공을 기쁘게 여기고 <왕발>을 패자(沛者)로 삼아서

난민(亂民)들을 지키고 진무(鎭撫)케 하였다.

 

<왕발旺發>의 어미는 <왕인旺仁>의 딸이고,

그녀의 아비는 <조산祖山>의 전처 아들이었다.

 

상께서 <부분노>에게 명하시어 <조천>의 후궁 80여명과 자녀 130여명을 거둬들여서

모든 장수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여 첩으로 삼고 노비로 삼게 하였다.

 

또한 부고에 있던 진보(珍宝)금인(金人)옥마(玉馬) 등을 거두어

<><><부분노>형제에게 하사하고,

장수와 병사들에게는 닷새 동안 큰 술자리를 베풀고

굶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종척들을 위무하였다.

 

<오이>가 새로운 백성 5천을 데리고 도착하였다.

 

 

八月,<>皇后自京都馳至,告神雀集于宮庭.

上命<烏伊>進拔荇泉.

荇菜之最好者産于是淵,味小苦有渋雅之香味,以此煮鵞肉而祭天

故以為靈地而作別都,乃古都,人口之稠密,物貨之華麗,勝於滸原

,<>使其長子<祖雲>令死守而不降,且其民欲為囯殉死.

上令<烏伊>先拔其四面而絶其粮,然使<>氏勧<>.<>知其為天命而出降.

上問<>爾母善乎.爾父善.”

<>父母皆善.”

上曰豈有皆善之理.”

雲曰父為祖宗而守社稷,母為天子而討不服,皆有善否,為人子者安敢言其否乎.”

上嘉其言,抱置膝上曰爾母為吾妻而生子,爾亦吾子也.”

乃封<>為荇泉侯,<>太子號.<>,是年三十一,有五妻十二妾,子女七十余人.

<>氏之幽在荇泉時,<>極力護之,人皆知其孝.

上賜金花銅魚,爵太大兄以彰其孝,

命與<扶芬奴>巡荇西路而上.<扶尉厭>從荇東路而上,

上與<烏伊>引兵而前,不以殺戮為務,專以撫順為主.

荇人,聞荇泉之已拔,爭以鵞肉饋軍.

 

 

 

8, <>황후가 경도(京都)에서부터 말을 달려와서

신작(神雀)들이 궁정(宮庭)에 모여들었음을 알렸다.

 

상께서 <오이>에게 명하시어 진격하여 행천(荇泉)을 빼앗게 하였다.

 

행채(荇菜)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이 못에서 났는데,

맛은 약간 쌉쌀하며 떫고 향과 맛이 고상하였더니,

이것으로 거위고기를 삶아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그랬기에 신령(神靈)한 땅으로 여겨서 별도(別都)로 삼았고,

오래 된 도성이었던지라 인구가 조밀(稠密)하고

물화(物貨)의 화려함이 <호원>보다 더하였다.

 

그리하여 <조천>은 맏아들 <조운祖雲>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지키며 항복하지 말라고 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곳 백성들도 나라를 위하여 순사(殉死)하고자 하였다.

 

상께서는 <오이>에게 령을 내려 우선 그곳 사방을 빼앗아서 식량을 끊게 한 연후에

<>씨로 하여금 <조운>에게 항복하기를 권유하게 하였다.

 

<조운祖雲>은 천명으로 여기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상께서 <조운>에게 물으시길

너의 어미는 선()하였다! 네 아비도 선()하였더냐?”라 하였다.

 

<조운>이 아뢰길

아비와 어미 모두 선()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

어찌 모두가 선()하였을 리 있겠느냐?”라 하였다.

 

<조운祖雲>이 아뢰길

아비는 조종(祖宗)을 위해 사직(社稷)을 지켰고,

어미는 천자(天子)를 위하여 불복(不服)하는 이들을 토벌하였습니다.

어찌 어미는 선()하고 아비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어찌 감히 아비가 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그의 말을 기쁘게 여기고 끌어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 이르시길

너의 어미가 내 처가 되어서 아들을 낳았으니, 너 역시 나의 아들이다.”라 하였다.

 

<조운祖雲>을 행천후(荇泉侯)로 봉하고 <>태자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운祖雲(BC62- )>은 이때 나이 서른하나로

처 다섯과 첩 열둘이 있었고 자녀는 칠십여 명이었다.

 

<>씨가 행천에 갇혀있을 적에 <조운><>씨를 극진히 비호하였고,

사람들 모두가 그의 효성을 알고 있었다.

 

상께서 금화(金花)와 동어(銅魚)를 내리고 태대형(太大兄) 작위를 주어서

그의 효성을 표창하였다.

 

<부분노>에게 명하여 함께 행서(荇西)를 순행하면서 길을 잡아 올라가게 하고

<부위염>은 행동(荇東) 쪽으로 길을 잡아서 올라가게 하였다.

 

상께서는 <오이>와 더불어 군병을 이끌고 앞을 서셔 살육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진무(賑撫)하기를 위주로 하였더니,

행인 사람들은 행천을 이미 빼앗겼음을 들은지라

다투어서 거위고기로 군사들을 먹였다.

 

 

 

九月,進屯於北棘之南.<祖天>見勢甚危,遣使献金亀,而請割荇東荇南以献之,永為臣妾.

上命<祖天>自来降之.<>恐不能保,欲焚城而死,城中乃反欲擒<>而迎皇師.

<>聞单身走海山.

<>,而城中唯有<>之妻子近臣二百余人,議論不一.

<烏伊>屯河上観望不進,<扶芬奴>喧傳大軍進擊海山.’

<>之三子<祖駿>,出城来見<祖雲>而知皇軍之信義,遂决出降.

<烏伊>,引兵入城中撫慰城民,<>之妻子珍宝盡與於<>而少不干涉.

荇人大悅相賀曰官軍之大度,<>将軍之德也.”

 

 

 

9, 북극성(北棘城) 남쪽으로 전진하여 둔()을 쳤더니,

<조천>은 형세가 심히 위급함을 알아서 금 거북을 바치면서

행동행남 땅을 떼어 바치고 영원히 신첩{신하}이 되겠노라 청하였다.

 

이에 상께서 <조천>에게 스스로 찾아와서 항복하길 명하였더니,

<조천>은 목숨을 능히 보존할 수 없을까 두려워서 성을 불태우고 죽으려 하였으나,

성 중 사람들이 도리어 <조천>을 붙잡아서 황군(皇軍)을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이를 들은 <조천>은 홀몸으로 해산(海山)으로 도주하였다.

 

<조천>이 도주하였더니,

성 안에는 오직 <조천>의 처자식들과 근신 2백여 사람들만 남았으며

의론(議論)도 모아지지 않았다.

 

<오이>는 하()상에 둔을 치고 관망하며 진격하지 않았고,

<부분노>가 대군(大軍)이 해산(海山)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떠들썩하게 퍼뜨렸다.

 

<조천>의 셋째 아들 <조준祖駿>이 성을 나와 찾아와서 <조운祖雲>을 만나보더니

황군의 신의(信義)를 깨닫고 마침내 성을 나와 항복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오이>가 군병을 거느리고 성 중으로 들어가서 성민(城民)들을 위무(慰撫)하고

<조천>의 처자식들과 진보들을 모조리 <조운>에게 주고서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더니,

행인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서로를 축하하였고

관군(官軍)의 큰 도량이 <>장군의 덕택이다.”라 하였다.

 

 

 

 

十月,上與<><>妃至<北棘>.

<><大獹>,羯王<舂臣>妹也.

<>氏使<大獹><祖天>之璽綬.

,受而賜<>,以錦衣賜<大獹>

“<><><><>,何不来見渠父乎.”

<大獹>得罪於母主故,不敢来.”

上笑曰母女之間,何嘗大仇.”命皆進謁,抱之膝上.

<>年四十六,<>四十三,<>四十,<>三十七,皆有美色,皆賜錦衣而次苐當夕.

<>最有媎術,<>上下.

上遣<祖駿>徃諭<>勧降.

<>聞之益惧,作窟於南北海山而避居,各処使人不知其所故,<駿>不得見而還.

上乃率其妻子近臣四百余人,還都,

賞征荇将士而裂封於荇東荇西荇南諸郡為守,使之置戌,

<祖天>諸子為王子,諸女為公主,賜宅牛羊年穀.

<祖天>之妻妾九人入後宮,餘皆賜公卿之有功者為妻妾.

 

 

 

 

10, 상께서 <>후 및 <>비와 더불어 북극성(北棘城)에 당도하였다.

 

<조천>의 처 <대로大獹>는 북갈 왕 <용신舂臣>의 여동생이다.

 

<>씨가 <대로>를 시켜서 <조천>의 새수(璽綬)를 바쳤다.

 

상께서 받아서 <>비에게 하사하엿으며,

<대로>에게는 비단옷을 하사하시고 이르시길

“<><><><>는 어이하여 그 아비를 찾아와서 알현하지 않는가?”

라 하였다.

 

<대로>가 아뢰길

모주(母主)께 죄를 지었기에 감히 찾아오지 못합니다.”라 답하였다.

 

이에 상께서 웃으시면서

모녀간에 무슨 큰 원한이 있다던가?”라 이르고는,

모두들 나와서 알현하게 하더니 모두를 무릎 위로 끌어안았다.

 

<>46, <>43, <>40, <>37살로 모두들 미색이었다.

 

모두에게 비단옷을 하사하고, 이어서 차례로 밤을 감당하게 하였다.

 

<>가 여자로서의 재주가 가장 좋아서 <>과는 막상막하였다.

 

상께서 <조준>을 보내어 <조천>에게 찾아가 깨닫게 하고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조천>은 이를 알아채고 더욱 두려워하며 남북 해산들에 굴을 파고 숨었으며

각기의 장소를 다른 이들이 그곳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여 놓았기에,

<조준>은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상께서는 <조천>의 처자식 및 근신 4백여 인들을 데리고 환도하시어,

행인 정벌군 장병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행동행서행남 땅을 나누어 봉하여

태수(太守)와 목사(牧使)로 삼고 이들로 하여금 수자리를 두게 하였다.

<조천>의 모든 아들들을 왕자로 봉하고

모든 딸들을 공주로 봉하여 집과 소와 양 및 년곡(年穀)을 하사하엿다.

 

<조천>의 처첩들 아홉은 후궁으로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공을 세운 공경들에게 하사하여 처와 첩으로 삼게 하였다.

 

 

十二月,大祭戦死軍士,賜其父母妻子年穀衣酒.

以次,上與<>后如子午谷親吊骨山.

上謂<烏伊>當時,天不與風,吾今無矣.”

<烏伊>諫上不復親冒矢石,

上曰兵匈而仙淫,唯農最潔.吾其農乎.”

 

 

12, 전사한 군사들을 크게 제사하고,

그들의 부모와 처자들에게는 년곡 및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이어서, 상께서는 <>후와 더불어 자오곡(子午谷)으로 가서

골산(骨山)에 친히 조상하였다.

 

상께서 <오이>에게 이르시길

그때 당시 일기가 바람이 없었다면 우리들에겐 오늘이 없었을 것이오.”라 하였다.

 

이에 <오이>가 상께 간언하길 다시는 친히 화살과 돌멩이를 무릅쓰지 마시라 하였고,

상께서는 전쟁은 흉()하고 선()은 음란하며, 오직 농사(農事)만이 가장 깨끗하오.

나는 농사를 할 것이오.”라 하였다.

 

 

 

 

 

 

東明七年 庚寅,

春正月,鳳凰復来鳴于<>皇后之宮.<陜父><吉士>等請改年號曰

去年,神爵来集于<>皇后之宮庭,臣等請改元而以兵事未得.

今又有此大瑞,若不改元以示万囯詔後世,何以知陛下堯舜之治乎.”

上曰東明之號出於囯號,何可旋改乎.

輕妄如<>,汝等效之邪.

鳥之異者獸之奇者,何足為祥乎.

若果為祥,<>元善者歟,<病已>仁歟.此輩殺妻戮子積惡万年者也.

如是而有祥,祥何足貴乎,非祥而災也.

<姬發>以来,渠等皆取於我.近年以来,荇多取於渠者,因其技藝也.

彼所謂<安期生><赤松子>之類,於我車載而斗量矣,

無用於治.汝等不見黃荇之亡乎.欲以我為政<>之類乎.

自我征伐以来,多殺無咎.自知罪大無以為謝,豈敢以瑞自居而稱慶乎.

夫物之在世者,多則尋常,少則稱奇.鳳凰其粦之類,以少罕為貴,亦何足用乎.

自今以徃,其勿以祥瑞来言.”

<陜父>陛下雖自謙如此,奈臣民固請何上不聽.”

於是,順奴國相加<再思>卒本國相加<延鳳>

桓那囯相加<桓應>黃竜囯相加<于仁>

沸流囯相加<松讓>荇人國相加<旺發>等上大單于之號于上.

上曰单于卽芻牟也.同語而異字,彼以為天,此以為神,神卽天也.何必单于然後可乎.”

<烏伊>卑离盖馬等重单于而忽芻牟,不可不如是也.”

上曰在乎質而不在乎文乎.雖有其名不有其力則不可矣.

吾聞<冒頓>之方盛也,控弦七十万,猶以爲未足,

而常隱其精銳.見其老弱,<劉季>之侵平城也,

将三十万以欲泥之.豈意<冒頓>,已有百万之衆,選其精銳四十万以圍<>.

他皆攻滅漢兵如虎搏兎,<>膽寒遣其妻以請和遂遺觧袴之辱於千載.夫良賈深藏若虗,

况未有兵實而徒有其名者乎.”

乃却单于之號,而以襲芻牟之名如前,

賜酺相加公卿等七十余人.大閱水陸軍於汗濱,

分八旗六十四軍,各置軍正,使<烏伊>統之,<摩離><扶芬奴>副之.

<烏干><尉厭><馬黎><桓柏><仇賁><菸狗><都喜><松太>為八旗将軍.

 

 

동명7년 경인{BC31},

춘정월, 봉황이 다시 찾아와서 <>황후의 궁에서 울었더니,

<협보><길사> 등이 연호(年號)를 바꾸길 청하면서

지난해엔 신작(神雀)들이 <>황후궁의 뜰로 모여들어서

() 등이 연호를 바꾸길 청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이런 상서로움이 있으니, 연호를 바꾸어서 모든 나라들에게 보이고

후세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폐하의 요순지치(堯舜之治)를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상께서 이르시길

동명(東明)이란 연호는 국호(國號)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되돌려 바꿀 수 있겠소!

<유철劉徹{>이 같이 경망스러운 이를 그대들은 본받고자 함이오?

기이한 새나 기이한 짐승이 어찌 상서롭기에 족하단 말이오!

결말이 잘 되었더라면, <유철>이의 연호가 적절하였음이었고

<병이病已>가 어질었었단 말이오?

이 놈들은 처를 베어 죽이고 아들을 찢어 죽여서

만년 갈 악업을 쌓은 놈들이란 말이오.

이와 같았는데도, 상서로움이 있기만 하면 족히 귀단 말이오?

경사가 아니고 재앙일 뿐이었었소!

<희발姬發> 이래로 이름 난 이들은 모두 우리 쪽을 본받았었소.

근년 이래로 황룡과 행인이 저들을 많이 본 딴 것은 그들의 기예(技藝)였으며,

저들이 일컫는 <안기생安期生><적송자赤松子>같은 무리들은

우리에겐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말박으로 퍼낼 수 있는 것들이며,

다스림에는 쓸모없는 것들이오.

그대 등은 황룡과 행인이 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소?

나로 하여금 <유철>이를 닮은 정사를 하게 할 작정이오!

우리는 정벌하여 온 이래로 무구(無咎)한 이들을 많이도 죽였소.

스스로도 큰 죄를 지었음을 알면서도 사죄는 하지 않고,

어찌 감히 상서롭다 하면서 뻔뻔스럽게 경사를 칭하겠소?

대저, 세상에 있는 것들로서 많이 있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드문 것은 기이한 것으로 일컫고 있소이다.

봉황(鳳凰)과 기린(麒粦)은 보기가 드물어서 귀한 것이나,

그 또한 어찌 쓰임이 넉넉하겠소이까?

이제부터 앞으론 그대들은 상서롭다면서 달려와서 말하지 마시오.”라 하였다.

 

이에 <협보>

폐하께서야 비록 스스로 겸양(謙讓)하여서 이 같으시지만,

신하들과 백성들이 굳세게 청하여도 상께선 들어주질 않으니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라 하였다.

 

이즈음, 순노국 상가(相加) <재사再思>졸본국 상가<연봉延鳳>

환나국 상가<환응桓應>황룡국 상가<우인于仁>

비류국 상가<송양松讓>행인국 상가<왕발旺發>등이

대선우(大單于)라는 칭호를 상께 올렸다.

 

상께서 이르시길

선우(單于)가 곧 추모(芻牟), 같은 말이고 글자가 다른 것이오.

선우(單于)는 하늘로 여김이고 추모(芻牟)는 신()으로 여김이오.

어찌 선우(單于)라야만 된단 말이오?”라 하였다.

 

이에 <오이>가 아뢰길

비리와 개마가 선우를 중시하고 추모를 경시하니,

이리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라 하였디.

 

상께서는

살필 것은 근본이지, 살필 것이 글자는 아닌 것이오!

이름만 있고 그에 걸 맞는 힘이 없어도 아니 될 것이오.

내가 듣기엔, <묵돌冒頓(BC209-BC174)>은 그 기세가 한창일 때

강현(控弦)70만이나 되었어도

오히려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고서 그 정예함을 숨겼는데,

그들을 노약하다고 여긴 <유계劉季>는 평성(平城)을 침범하여

30만을 이끌고 그들을 묵사발 내려고 하였소.

어찌 <묵돌>이 이미 100만의 무리들이 있고

정예 40만을 추려서 <유계>를 포위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소.

<묵돌>의 무리들 모두가 한꺼번에 공격하여 한()병들을 짓이김이

호랑이가 토끼 잡듯 하였더니,

<유계>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제 처를 보내서 화의를 청하였고,

마침내 치마를 풀어서 천년의 치욕을 남겼소이다.

무릇 잘하는 좌상(坐商)들도 깊이 감추어서 창고가 빈 듯이 하는데,

하물며 아직 군병이 충분치 않은데도 헛되이 그 이름을 탐하겠소?”

라고 하면서 선우라는 칭호를 물리시고 추모라는 호칭을 이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상가(相加)들 및 공경(公卿) 70여 사람들에게 큰 술자리를 베풀었다.

 

수군과 육군을 한빈(汗濱)에서 친히 사열하고, 8(八旗) 64()으로 나누었으며,

각 군에는 군정(軍正)을 두었다.

 

<오이>가 총괄하고 <마리><부분노>가 돕도록 하였고,

<오간><부위염><마려><환백><구분><어구><도희><송태>

8기장군(八旗將軍)으로 삼았다.

 

 

 

 

二月,<松讓><貫貝>生皇子<達倫><>皇后宮.

<貫貝>自去年從上于滸口而更得娠,<>后欲強其勢而因留之,至是生子欲封之,上不許.

桓那汗南之地有地裂之變.出於寃死者,上以刑罰為生命之大事,不可不慎故,命置評府,

使明理善論者以為評者而觧其寃枉.

凡有罪當死者,必使評者審其寃而决其獄.

凡官守自盜賊盜官物殺人作盜作奸父子兄弟相害者,不待評者而誅.

<陜父>奏曰

去年八月有両月之變,十月有再華之乖,臘平有無氷之異,

今又有地裂之災.皆天地陰昜之變也.

願上,減饌自責餝躬儉素,勿為聲色嚴禁女謁,

三后五妃亦宜遠夕相戒,况瓊后嬪公卿妻女乎.

陛下如是,則公卿亦如是.上下淫乱,民俗壈敗,可不慎欤.公卿大夫之掠民妻財者,

以法処之而勿貸,且黃鵞大鹿大鼈之肉不宜常用,而使宗戚公卿大夫宜體上旨.”

上可其奏.國俗,以仲月之望,設犯夜以男女聚飮乱行為樂,

是遂停其俗,吏民之犯禁者抵罪,國內肅然.

上嘉之曰“<>乃吾之<子方>.”

,<扶芬奴>多取荇女畜之,日以宴飮縱色為事.

<陜父>素與<芬奴>相克而作此法,<芬奴>心衝之欲殺<陜父>,<陜父>聞之不能夜行,

上累令二人相和而反目尤甚,

上曰朕若不在,<陜父>危矣.”

<陜扶>,年少特寵,不能容物故,為人㪽憎如此.

 

 

 

2, <송양>의 처 <관패>가 황자 <달륜達倫><>황후궁에서 낳았다.

 

추모(관패) - 달륜達倫(BC31- )

<달륜>은 탕서후가 된다.

 

<관패>가 스스로 지난해 호구(滸口)에서 상을 모시고 다시금 임신하였더니,

<>후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그녀를 주저앉혔고

이때에 이르러 아들을 낳자 그녀를 로 봉하려 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았다.

 

환나와 한남(汗南)에서 땅이 갈라지는 이변이 일어나니

원통하게 죽은 이들로 인하여 생긴 것으로 여기고,

상께서는 형벌은 생명을 다스리는 큰일이니 신중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하고

명을 내려 평부(評府)를 두었다.

 

밝게 따지고 잘 헤아리는 이를 평자(評者)로 삼아서

원통하고 잘 못 되었던 것들을 풀어내도록 하였다.

 

무릇 죄를 받아서 죽게 된 모든 이들은 필히 평자(評者)로 하여금

원통함이 있는지를 자세히 밝혀서 그들을 송사(訟事)케 하였다.

 

무릇 스스로 도적질 한 관수(官守)들과 관물(官物)을 훔친 도적들과

사람을 죽이고서 물건을 훔치거나 간음한 이들과

부자형제(父子兄弟)를 서로를 해친 이들 모두는

평자(評者)의 심리를 기다리지 말고 주살하게 하였다.

 

<협보>가 주청하길

지난해엔 8월에는 두 개의 달이 뜨는 변고가 있었고,

10월에는 꽃이 다시 피는 괴이함이 있었으며,

랍평(臘平){섣달}에는 물이 얼지 않는 이변이 있었는데,

또 지금엔 땅이 갈라지는 재앙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천지(天地)와 음양(陰陽)의 재변(災變)들입니다.

 

원컨대 상께서는 음식을 줄이시고 자책하시며 치장을 검소히 하시고

성색을 가까이하지 않으시면서 여인들의 배알을 엄히 금하소서.

 

3후와 5비 들께서도 또한 응당 밤일을 멀리하시며 서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물며 경부(瓊府)의 후들과 빈들 및 공경들의 처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폐하께서 이리 하시니, 공경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하가 음란하면 민간의 풍속이 볼품없이 무너지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경들과 대부들이 민간의 처와 재물을 빼앗으면 법대로 다스리시어 용서치 마시고,

뿐만 아니라 누런 거위와 큰 사슴 및 큰 자라의 고기를 상시로 먹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이니 종척들과 공경들로 하여금 상의 뜻을 깨닫게 하소서.”

라 하였더니, 상께서 그의 상주를 받아들였다.

 

이에 나라의 풍속으로 4철 중 가운데 달 보름날에 밤새우기를 베풀어서

남녀들이 모여서 술 마시고 어지러이 보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왔었는데,

이로써 그 습속이 멎기에 이르렀고,

이를 어기는 벼슬아치와 백성들은 죄를 받게 되었더니, 나라 안이 숙연하여졌다.

 

이에 상께서 이를 기뻐하며

“<협보>는 내 <장자방張子方>이야.”라고 하였다.

 

이때 <부분노>는 행인의 여인들을 많이 취하여

날마다 연회를 열어 술 마시고 탐색(貪色)하길 일로 삼았다.

 

<협보>는 평소 <부분노>와는 상극이었고,

이것이 법으로 되었더니, <부분노>는 마음에 충격을 받아서 <협보>를 죽이려 들었다.

 

<협보>는 이를 듣고서 밤길을 능히 다닐 수 없었다.

 

상께서 누차 두 사람에게 령을 내려 서로 화해하게 하였어도

반목(反目)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상께선 짐이 만약 없기라도 하면 <협보>가 위험하겠구먼.”이라 하였다.

 

<협보>는 나이가 적은데다가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능히 만사를 담아내지 못하였더니, 다른 이들의 미움을 삼이 이러 하였다.

 

 

 

三月,設公服司,以給百官夫妻之公服,定百官公服以等次,使服府令主之

三輔,爵太大兄,紫袖袍紫羅巾金花飾冠佩金魚銀章

主兵主民主刑主宮主穀 五大加,紫衫紫羅巾金花飾冠佩銀魚銀章

主神主賓主薬主農主畜五大加,紫衫紫羅巾銀花飾冠佩銀魚銅章,

皆爵上大兄

三輔曰公,一品有三級

上五加曰大卿有五級,

下五加曰次卿亦有五級,皆二品

大注簿大将軍大使者大對盧,皆爵中大兄,紫杉緋羅巾銀花飾冠銅魚銅章,

稱三品 小卿有七級,

于台沛者将軍大仙人大評者,爵次大兄,緋杉緋羅巾銀花飾冠銅魚銅章,

稱四品 上大夫有七級,

都尉仙人使者評者注簿司馬,爵中兄,緋衫緋羅巾雉花飾冠銅魚銅章,

稱五品 中大夫有七級,

烏拙褥奢意侯校尉小平,爵小兄,緋衫緋羅巾雉花飾冠鐵魚銅章,

稱六品 下大夫有七級,

皀衣翳屬御人軍人,紅衫朱羅巾雉花飾冠鐵魚銅章,稱七品 上士有七級,

縣尉司畜小守小牧蠶師馬師,紅杉朱羅巾雉花飾冠鐵魚檀章,

稱八品 中士有九級,

村長司農工師技人渡丞關守,紅杉朱羅巾錦花飾冠檀魚檀章,

稱九品 下士有九級,

薬人馬人蠶人草人獵騎工人織人,朱杉靑羅巾錦花飾冠檀魚檀章,

稱十品 小士有九級,

圉人船人隊正邏正,朱杉靑羅巾綠皮飾冠檀魚角章,稱十一品 小人有九級,

倉正尺正市人驛人,朱杉靑羅巾綠皮飾冠檀魚牙章,稱十二品 下人有九級.

 

 

 

3, 공복사(公服司)를 두어서 백관 내외들에게 공복을 나눠주었다.

 

백관들의 공복은 차등이 있도록 정하였고, 복부령(服府令)이 주관하였다.

 

3보 작위는 태대형, 자수포자라건금화관식패금어은장

주병주민주형주궁주곡 5대가는 자삼자라건금화관식패은어은장

주신주빈주약주농주축 5대가는 자삼자라건은화관식패은어동장,

모든 대가의 작위는 상대형.

3보는 공으로, 13계급{태보,좌보,우보}

 

5대가는 대경으로, 5계급,

5대가는 차경으로, 5계급, 대가 모두 2

 

대주부대장군대사자대대로 모두 작위는 중대형,

자삼비라건은화관식동어동장, 3품 소경으로 7계급,

 

우태패자장군대선인대평자 작위는 차대형 비삼비라건은화관식동어동장,

4품 상대부로 7계급,

 

도위선인사자평자주부사마, 비삼비라건치화관식동어동장,

5품 중대부로 7계급,

 

오졸욕사의후교위소평, 작위소형, 비삼비라건치화관식철어동장,

6품 하대부로 7계급,

 

조의예속어인군인, 홍삼주라건치화관식철어동장, 7품 상사로 7계급,

 

현위사축소수소목잠사마사, 홍삼주라건치화관식철어단장, 8품 중사로 9계급,

 

촌장사농공사기인도승관수, 홍삼주라건금화관식단어단장, 9품 하사로 9계급,

 

약인마인잠인초인렵기공인직인, 주삼청라건금화관식단어단장,

10품 소사로 9계급,

 

어인선인대정순정, 주삼청라건록피관식단어각장, 11품 소인으로 9계급,

 

창정척정시인역인, 주삼청라건록피관식단어아장, 12품 하인으로 9계급.

 

 

봉록(俸祿)은 아래와 같다.

 

王公 三妻五妾九婢 正穀千石散穀同数 羊豕五百匹 彩絹千匹 奴婢九百口

 

一品 同 正妻祿依夫 千石 四百匹 九百匹 八百口 副妻減一等

 

二品 同 妾減三等 九百石 三百匹 八百匹 七百口 副妾減五等

 

三品 三妻四妾八婢 八百石 二百匹 七百匹 六百口

 

四品 同 七百石 二百匹 六百匹 五百口

 

五品 同 七百石 百匹 五百匹 四百口

 

六品 三妻三妾七婢 六百石 百匹 四百匹 三百口

 

七品 同 五百石 九十匹 三百匹 二百口

 

八品 同 五百石 八十匹 二百匹 百口

 

九品 二妻三妾六婢 四百石 七十匹 百匹 九十口

 

十品 二妻三妾六婢 三百石 六十匹 八十匹 七十口

 

十一品 二妻二妾五婢 二百石 五十匹 七十匹 五十口

 

十二品 同 百石 四十匹 六十匹 三十口

 

無品 二妻二妾四婢 五十石 三十匹 五十匹 二十口

 

 

 

皇后翟服,錦袴錦襦以紫綠為之,紫羅袍黃羅衫玉帶珠冠以七宝飾之,

七宝者翡翠紅玉黃金珊瑚真珠夜光琥珀也.

佩金魚玉馬金印玉章金釵金釧金環玉環

十二香囊黼黻真珠宝扇麝香蘭綏硨磲宝盒瑪琉盒.

七妃翟服,冠如皇后,

金魚金馬銀印玉章金釵金釧金環玉環

十香囊黼黻真珠宝扇麝香蕙綏硨磲宝盒靑玉盒帶用金銀象牙帶.

王公夫人承上寵者翟服,如妃制,八香囊紅紈宝扇麝香芝綏金製角帶.

皇后用玉床玉轎四馬宝車以金珠飾之.

妃用象牙轎床﨎馬宝車亦以金珠飾之.

夫人用檀床檀轎﨎馬車亦以金珠飾之.

公卿正妻依公例,副妻以下各減一等,

卿妻亦如之.

 

 

황후적복(皇后翟服)은 비단바지 비단속저고리를 자색과 록색으로 하여

자라포화라삼옥대7보주관을 착용한다.

7보는 비취홍옥황금산호진주야광호박이다.

금어옥마금인옥장금비녀금팔찌금반지옥반지

12향낭보불진주보선사향란수차거보합마유합을 패용한다.

 

7비적복(七妃翟服)은 바지속저고리관은 황후와 같으며,

금어금마금인옥장금비녀금팔찌금반지옥반지

10향낭보불진주보선사향혜수차거보합청옥합을 패용하고

상아허리띠를 맨다.

 

왕공부인(王公夫人)으로 상의 성총을 받든 이의 적복(翟服)의 제도와 같으며

8향낭홍환보선사향지수을 패용하며 금제각대를 맨다.

 

황후(皇后)는 옥침상옥교4마보거를 쓰며 금구슬로 치장하고,

는 상아교상아침상쌍마보거를 쓰며 역시 금구슬로 치장하고,

夫人은 단목침상단목교쌍마수레를 쓰며 역시 금구슬로 치장하고,

공경들의 정처(正妻)는 공()의 예를 따르며

부처(副妻) 이하는 각기 한 등급을 낮추고,

()들의 처() 또한 이와 같다.

 

 

四月,詔曰

朕以上帝之命征伐無道拯我赤子,未遑農桑田野不闢.

宜爾小民勤墾荒地,種以黍粟豆粱以免飢渴.

凡為官牧将者,勤儉自守無漁細民,如有犯禁,論以逆律.”

於是,上親耕籍田,<>皇后親行蚕事,<>皇后親行麻事,<>皇后親行毛事,

使蚕人蚕女麻人麻女毛人毛女等治桑麻葉皮毛等事.

北夫余黃龍之蚕業已久治江已有.漢人之蚕織,自去年以来,

上命有司種桑甚多,足為三夏之農.

<漢素>為選部令使採技藝,

<漢素>奏曰

用人之法,專以技藝,則雖得其才,不得其心者有之.用人以正,

則雖或才有不足,能得其心故,忠有餘矣.以是,孝廉用人雖拙必成,只取其才則雖能多敗.”

上曰.且孝者人之本也.”

可使擇民有孝行者以聞之,漢素之選擧必観其行而問才故,得人最賢人,以為河濱之擧.

<烏伊><摩离><陜父>為公,<扶芬奴><再思><武骨><黙居><仇都>為大卿,

<漢素><鄭共><馬黎><乙耕><尉厭>為亞卿,<仇賁><桓福><烏干>

<菸狗><于真>為小卿,

<桓柏><都喜><松太><逸苟><焚永><禾黍><吉士>為上大夫.

<武骨><仲室><松讓><貫貝><鄭共><>氏以夫人例賜翟服,

<黙居><小室>氏以公妻例賜公服,各賜年穀一千八百石羊豕三百匹

綾緞錦羅四時衣次八百匹奴婢七百口盆如侯例而去其妃號.

<奧犍><乙旃><宝得><禾英><禾英><>小妃

<>公女<素括><祖天><霓姬>為新五妃賜翟服宮殿.

 

 

4, 조칙으로 이르길

짐은 상제(上帝)의 명을 좇아 무도한 이들을 정벌하여

내 백성들을 건져내긴 하였지만,

아직껏 허둥거리기다가 농사짓고 누에 칠 밭과 들판을 마련하질 못하였소.

 

마땅히 그대 평민들은 부지런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을 파종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을 면해야 할 것이며,

관리가 되어서 목사태수장수를 하는 모든 이들도 근검 자수하며

힘없는 백성들에게서 이로움을 취하지 마시오.

 

해서는 안 될 짓을 범하는 이들은 반역죄로 논하겠소.”라 하였다.

 

상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일구고,

<>황후가 친히 누에를 치고 <>황후가 친히 삼베를 삼고

<>황후가 친히 양털을 고르면서,

잠인잠녀마인마녀모인모녀 등으로 하여금 뽕잎과 삼 껍질 및

가죽과 양털 다루는 일들을 하게 하였다.

 

북부여 황룡국의 잠업(蠶業)이 이미 오래되었고 강물을 다스림도 이미 있어 왔으며,

()인들의 잠직(蠶織)은 지난해부터 상께서 관리에게 명하여

뽕을 심은 것이 매우 많았더니 여름 석 달 농사일로 충분하였다.

 

<한소>를 선부령(選府令)으로 삼아서 기예(技藝)가 있는 이들을 채용하게 하였더니,

<한소>가 아뢰길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이 기예(技藝)만을 의지하면 비록 그런 인재는 얻을 수는 있으나

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기도 하며, 사람을 등용함이 바르게 갖추어지면

비록 혹간 재능이 부족한 이들이 있어도 능히 그들의 마음을 얻는 까닭에

충성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효성과 청렴함으로 사람을 등용하면

비록 재주는 서툴러도 반드시 이룰 수 있으며,

단지 재주만을 취한다면 비록 능란하여도 많은 실패가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그리 하시오. 더군다나 효는 사람의 근본이잖소.”라고 하였다.

 

민간에서 사람을 뽑음을 탐문하여 효행하는 이들로 할 수 있게 하였다.

 

<한소>가 사람을 택하여 천거함에 반드시 그들의 행실을 보고나서 재주를 물었더니,

가장 현명한 이들을 얻을 수 있었고,

하빈(河濱) 땅의 인재 천거방법이 되었다.

 

<오이><마리><협보>를 공()으로,

<부분노><재사><무골><묵거><구도>를 대경(大卿)으로,

<한소><정공><마려><을경><위염>을 아경(亞卿)으로,

<구분><환복><오간><어구><우진>을 소경(小卿)으로,

<환백><도희><송태><일구><분영><화서><길사>를 상대부(上大夫)로 삼았다.

 

<무골>의 처 <중실>씨와 <송양>의 처 <관패>씨 및 <정공>의 처 <>씨에게

부인(夫人)의 예()를 따라 적복(翟服)을 하사하고,

<묵거>의 처 <소실>씨에겐 공처(公妻)의 예를 따라 공복(公服)을 하사하고,

각각들에게는 년곡 18백석과 양과 돼지 3백 필과 릉단금라 및 사철옷감 8백 필과

노비 7백구 및 밭소금그릇을 후()의 예로 하사하고 의 호()는 거둬들였다.

 

<오건>의 처 <을전>씨와 <보득>의 처 <화영>씨 및 <화영>의 딸 <>소비와

<>공의 딸 <소괄>비 및 <조천>의 딸 <예희>를 새로이 5()로 삼고

적복과 궁전을 하사하였다.

 

 

 

五月,上如<鄭共>宅與<>氏賞牧丹櫻桃吹笛,

而如河濱侯宮與<漢素><大房>氏幸溫水徵<大房良>夫妻賜衣酒,

<大房良>為選部令,<>辞以老不就.

句茶國女主<閃尼>殺其夫而請為夫人.上素知其為毒女,不許.

<閃尼>遂反以盖馬王<燕宜>為夫,而共謀欲侵黃龍,招懷反側.

群臣請伐盖馬,上以荇人之創未愈,欲休兵而不許,

使<都喜><吉士>徃探盖句之虛實而敀.

 

 

5, 상께서 <정공>의 집으로 가서 <>씨와 함께

모란과 앵도를 감상하며 피리를 불었다.

 

하빈후(河濱侯)의 궁으로 가서는

<한소>의 처 <대방>씨와 더불어 온수(溫水)로 행차하여

<대방량> 부처(夫妻)를 부르고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명을 내려 <대방량>에게 선부령(選府令)을 하라 하였더니,

<대방량>은 늙었다면서 따르지 않았다.

 

구다국(勾茶國) 여임금 <섬니閃尼>

자신의 지아비를 죽이고 부인(夫人)이 되겠노라 청하였으나,

상께서는 평소에 그녀가 독()한 여인임을 알고 계신지라 하락하지 않았다.

 

<섬니>가 이에 반발하여 개마왕 <연의燕宜>를 지아비로 삼고 함께 모의하여

황룡을 치려고 반란할 마음을 품은 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많은 신하들이 개마를 토벌하길 청하였더니,

상께서는 행인으로 하여 생긴 창상(創傷)들이 아직 치유되지 않았음에

병사들을 쉬게 하고자 윤허하지 않고

<도희><길사>로 하여금 개마와 구다의 허실을 탐색하여 오게 하였다.

 

 

 

六月,徵荇南軍二千黃龍軍五千,<扶芬奴><于仁>鍊之于西川.

上親鍊沸流軍三千于汗濱,從汗水至汗東,南獵于桓那句茶之界.

<閃尼>躍馬追<>后大罵曰亡國之女敢閙天仙之囯.”

上怒欲伐之,命沸流軍結陣于界上而待詔.

<>皇后告蚕績,上親臨蚕室賜蚕師蚕人等衣酒.

 

 

6, 행남군 2천과 황룡군 5천을 징발하여 <부분노><우인>에게 명하여

서천(西川)에서 훈련하게 하였다.

 

상께서는 친히 비류군 3천을 한빈에서 훈련하고

한수(汗水)를 따라 한동(汗東)으로 가서

남방으로 몰이사냥을 하면서 환나와 구다의 경계로 갔다.

 

<섬니>가 말 위로 뛰어올라 <>후를 뒤쫓으며 큰소리로 모욕하기를

나라를 말아먹은 년이 감히 천선(天仙)의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구나!”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 노하시어 <섬니>를 토벌하고자

비류군에게 명을 내려 경계 상에서 결진(結陣)하고 조칙을 기다리게 하였다.

 

<>후가 잠사(蠶絲) 실적을 고하였더니, 상께서 친히 잠실(蠶室)로 왕림하여

잠사(蚕師) 및 잠인(蚕人)들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七月,上至瓠盧湖,<>公妃<桂孟子>泛舟湖上品瓜賞月酒,然有絶世氣象.

<閃尼>以馬韓人<水德>為其情夫,悉集囯中兵,與我軍相待.

其囯在黃龍桓那之南漢山之北,東至汗東之南,西至盖馬之東,南接馬韓辰韓,

常附庸於黃龍盖馬.至是,與馬韓通好,<燕宜>失和.

上以為戦機乃使人謂<閃尼>,

,吾所非不能也.傷人必多,不若和.”

<閃尼>

勝者傷人,敗者被傷,當然之事也.欲来降則降,欲被傷則傷而已.

引兵入界[]之以威,今忽言和,何也.”

上笑曰

無已則戦矣.其勿怨可也.”

乃使前騎散告於民曰

吾欲與和,<閃尼>請戦故,不得已戦也.殺傷破毁,吾豈嗜而為之哉.

北夫余之故土,不可不復而戦也.”

句茶之民,以此怨<閃尼>.

上又言

‟<閃尼>好淫而殺夫者三,不可不懲.詬我皇后辱及朕躬,不可不問,罪在<閃尼>一人.

宜爾百姓勿妄動而被誅.若有擒梟<閃尼><水德>而来者,當封句茶侯矣.“

両軍因雨相待於二水.

 

 

 

7, 상께서 호로호(瓠盧湖)로 가서 <>공 비()<계맹자桂孟子>와 더불어

호수 위에 배를 띄워 참외를 품별하고 달과 술을 음미하였더니, 과연 절세기상이었다.

 

모수제(환숙) - (BC76- )

계량(환숙) - 계맹자桂孟子(BC66-BC23)

 

<섬니>가 마한(馬韓) 사람 <수덕水德>을 정부(情夫)로 삼고

나라 안의 병사들을 쓸어 모아서 우리 군과 대치하였다.

 

그 나라는 황룡과 환나의 남쪽으로 한산(漢山)의 북쪽에 있으며,

동쪽은 한동(汗東)의 남쪽에 이르고 서쪽은 개마국의 동쪽에 다다랐으며,

남쪽은 마한(馬韓) 및 진한(辰韓)과 접하였고,

상시로 황룡과 개마에 부용(附庸)하여 오다가,

지금에 이르러 마한과 상통하며 좋아지내고 <연의>와는 화친하길 잃었더니,

상께서는 싸울 때가 되었다 여기었다.

 

이에 사람을 시켜서 <섬니>에게 이르길

전쟁이라면 내가 못할 것도 없지만, 화친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상할 것이오.”

라 하였다.

 

<섬니>가 말하길

이기는 자는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지는 자는 상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오.

찾아와서 항복하려거든 항복하고, 다치고 싶으면 다치면 될 것이오.

 

군사를 끌고 와서 위세를 떨며 겁을 주더니만,

이제 와서 갑자기 화친을 입에 담다니 무슨 일이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웃으며 이르시길

멈추지 않겠다면야 싸울 것이오.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라 하고는,

앞에 있던 기병(騎兵)들로 하여금 흩어져서 백성들에게 알리길

나는 화의하고자 하나 <섬니>가 싸우고자 하니, 부득이 싸우게 되었소.

살상하고 부수고 허무는 것을 어찌 내가 좋아할 것이며 또한 그러려고 하겠소만,

북부여 옛 땅은 되찾지 않을 수 없음이니, 싸움이 있을 것이요.”라 하였다.

 

구다 백성들은 이에 <섬니>를 원망하였다.

 

또한 이르시길

“<섬니>는 음사(淫事)를 즐겨서 지아비를 셋이나 죽였으니 응징하지 않을 수 없고,

내 황후를 모욕하여 욕됨이 짐에게까지 미쳤으니 문책하지 않을 수 없음이오.

죄는 <섬니> 한 사람에게 있으니,

의당 그대들 백성들은 망동하다가 죽음을 당하지 마시오.

만약 사나운 <섬니><수덕>을 사로잡아 오는 이가 있으면

응당 구다후(勾茶侯)로 봉할 것이오.”라 하였다.

 

양쪽의 군대는 비로 인하여 이수(二水)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七月二十日,先鋒突破敵陣直馳黃山大軍継之,敵集其軍於黃東.大戦三日互有勝負,

<水德>有勇我軍多傷,上親射殺之,敵潰保水上,追擊破之.

<閃尼>,<虎山>為将,决死戦於都下,大戦自晨至晡,

<>后護上被矢.,怒督軍迫之,射殺<虎山>以下九将,血流成渠,

賊臣<霞逢>等縛<閃尼>出降,命斬之.命諸将巡撫諸郡,不下者擊破之.

至八月十五日,乃定.行月歌于茶都.分句茶為馬山平山黃山泥河豊城,

<閃尼>女為<桓柏><松太>之婢,虜其親戚子女為奴婢.其不順者或誅或遷.

順受天命者或移或存,其為皇軍前導者依旧授位或進其級.

 

 

 

720일에, 선봉이 적진을 돌파하여 황산(黃山) 쪽으로 곧바로 내닫고

대군이 뒤를 따랐더니 적은 황산(黃山)> 동편으로 군사를 집결하였고,

3일을 크게 싸웠으나 서로 간에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수덕>이 용맹하여 아군이 많이 상하기에 상께서 친히 그를 사살하였더니,

적들은 무너져서 물줄기 위쪽에서 지키게 되었고, 이에 쫓아가 격파하였다.

 

<섬니><호산虎山>을 장수로 삼아 도성(都城) 아래에서 죽기로 싸웠고,

해 뜰 녘부터 해 질 녘까지 큰 싸움이 벌어졌다.

 

<>후가 상을 호위하다가 화살을 맞았더니,

상께서 노하여 군대를 독려하여

<호산> 이하 아홉 장수들을 사살하였더니 핏물이 도랑을 이루었다.

 

적의 신하 <하봉霞逢> 등이 <섬니>를 묶어가지고 나와서 항복하기에,

명을 내려서 그녀의 목을 베게 하였으며

제장(諸將)들에게 명하여 제군(諸郡)들을 순무(巡撫)하고

굴복하지 않는 곳은 격파하게 하였다.

 

815일에 이르러서 모조리 평정되었더니,

월가회를 구다국의 도성에서 거행하였다.

 

구다국을 분할하여

마산(馬山)평산(平山)황산(黃山)니하(泥河)풍성(豊城)으로 하였다.

 

<섬니>의 딸들은 <환백><송태>의 계집종으로 하였고,

그녀의 친척들과 자녀들은 붙잡아서 노비로 삼았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자들은 주살하거나 내쫓고,

천명(天命)을 따르는 자들은 옮겨서 살거나 눌러앉아 살게 하였고,

황군(皇軍)의 전도(前導)가 되었던 이들은

이전에 비추어 직위를 주거나 혹은 진급시켜 주었다.

 

 

十一月,<>皇后崩,春秋三十二,

以皇后葬於真珠河山名曰真珠陵,以真珠城為其看烟.

后以忠臣<桂亮>之女,出於天妃<桓淑>之腹,

天姿雅貞淸秀,且能騎射,從上於矢石之中而有征荇之大功,又從于黃山之戦有功,

于茶都中流矢而護聖,創未合而昇天.

臨終,無一言及私,唯禱聖上平定天下.君臣莫不流涕曰有此聖后,万民之福也.”

上撫其子女曰無母之子,将何以育乎.”

<>后妹<桂媛><高娄>太子 大夫, <桓福><桓秀><>公主 大夫,以庇護之.

上思念<>后之玉皃懿德而悲慟不已乃歌曰

吾妻,吾妻,今何去.忍能負我靑山去,靑山無語花自白,使我傷心流水去,

流水去去去不還,使我何日訪君去.”

至今傳之為吾妻曲.

上自失<>后以来不樂寢食.

<桓福><桂孟子>,德容方弗於后,言語簡而正重,時来慰上,

人生如朝露,徃者莫追,何乃自苦如是乎.”

上曰后妃雖多,無如<>妻者矣.”

乃留<孟子>於宮中.

<孟子>,<>公妃,十六生<桓福>,十九生<桓秀>,二十二生<桓英>,二十五生<桓竹>,

二十八生<桓萇>,三十始得上寵,三十一生上女<桓菌>,三十四生上子<>.

至是,<>,以上失<>后而悲慟,献妃于上而代<>.稱曰孟宮,上寵愛之.

后豐美有德不與人爭,上重之每有大事必問議之.

<涉臣>使<斗昆>来言

“<呼韓邪>食菌死,其長子<莫車>嗣之.

<><顓渠>大閼,<呼延>之女也.或云大閼,<呼延><禾穎>.

大閼先生<莫車>,<顓渠>後生<旦莫車>.

<顓渠>,<>,已與<莫車>相通而立之.<莫車>,旣立,

<王昭君><顓渠>以其生母為大閼,<顓渠>為苐三閼氏而不相妬.

<莫車>,勇而有智,能統其衆.”

上曰“<顓渠>,先通<莫車>而立之者乃因寵之計,反屈於不計之人.罪在於不正其倫也.

,其不妬以安國為心者,已知其自誤也.”

<孟子>盛衰成敗如風倫,<顓渠>秉權已久,雖讓于<昭君>,應無不滿矣.

<昭君>雖得<>眷而常瘏,至是,能習於胡侒以少.”

 

 

11, <>황후가 죽었다. 춘추 서른둘이었다.

 

황후의 예로 진주하산(眞珠河山)에 장사하고 진주릉(眞珠陵)이라 이름 하였다.

 

진주성(眞珠城)에서 무덤에 켜 놓은 등불을 살피게 하였다.

 

후는 충신 <계량桂亮>의 딸로 천비(天妃)<환숙桓淑>이 낳았는데

하늘같은 자태로 우아하였고 몸가짐이 깨끗하고 빼어났었다.

 

뿐만 아니라 기사(騎射)에도 능하여서 돌과 화살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상을 따라서 행인을 정벌함에 큰 공이 있었고,

황산(黃山) 싸움에도 따라나서서 또한 공이 있었다.

 

구다 도성에서 있었던 싸움에서도 화살을 맞고서도 성상을 호위하였다가

상처가 낫지 않아 승천한 것이었다.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한 마디도 사사로운 언급은 없었고

오로지 성상(聖上)의 천하평정만을 빌었더니,

군신들도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아뢰길

이렇게 훌륭하신 황후가 계셨음은 만백성의 복입니다.”라 하였다.

 

상께서도 그녀의 자녀를 위무하며 이르시길

어미 없는 자식들을 장차 누가 키울거나.”라 하시더니,

<>후의 여동생 <계원桂媛><고루>태자 대부로 삼고

<환복>의 동생 <환수桓秀><>공주 대부로 삼아서

이들을 맡아서 보호하도록 하였다.

 

상께서는 <>후의 옥 같은 모습과 훌륭한 덕행을 마음에 그리시며

비통함을 금지 못하시더니 읊조리시길

 

내 처여! 내 처여!

지금 어디로 간 것이오!

 

잔인하게도 그리 쉬이 내게 짐을 지워놓고 청산으로 가 버리더니,

청산엘 가보아도 아무런 말이 없고 꽃들만 하얗게 피어있네.

 

내 아픈 마음을 흐르는 물에 실어 보냈더니,

흐르는 물은 흘러만 갈뿐이고 흘러가더니만 돌아오지 않네.

 

어느 날에나 그대를 만나보게 할 것이오!”

 

지금 오처곡(吾妻曲)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상께서는 <>후를 잃으신 이래로 침식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환복>의 어미 <계맹자桂孟子>가 덕행과 몸가짐이 <>후를 닮아

말 수가 적고 방정하며 지긋하였는데,

이때 찾아와서 상을 위무하며 아뢰길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어서 앞서 간 이를 쫓아갈 수도 없습니다.

어이하여 몸소 괴로워하심이 이러하십니까?”라 하였다.

 

상께서 이르시길

후와 비가 많아도 <>처 만 한 이가 없소이다.”라 하시더니

<계맹자>를 궁중에 남아있게 하였다.

 

<계맹자><>공의 가 되어서

열여섯에 <환복>을 낳고 열아홉에 <환수>를 낳았으며

스물둘에 <환영>을 낳고 스물다섯에 <환죽>을 낳았으며

스물여덟에 <환장>을 낳고나서,

서른에 비로소 상의 승은을 입더니 서른하나에 상의 딸 <환균>을 낳고

서른넷에 상의 아들 <>공을 낳았다.

 

지금에 이르러, <>공이 상께서 <>후를 잃고 비통해 하시니

자신의 비를 상께 바쳐서 <>후를 대신하게 한 것이다.

 

맹궁(孟宮)이라 불렸으며, 상께서 그녀를 총애하였다.

 

후는 풍후하며 아름답고 덕이 있어서 다른 이들과 다투지 않았더니,

상께서는 그녀를 중히 여기시고 매번 큰 일이 있을 적마다 필히 묻고 의논하였다.

 

<섭신涉臣>의 사신 <두곤斗昆>이 찾아와서 아뢰길

“<호한야呼韓邪>가 버섯을 먹고 죽어서,

그의 장자 <막거莫車>가 뒤를 이었습니다.

 

<>의 처들인 <전거顓渠>와 대연지(大閼氏)는 모두 <호연제呼延鞮>의 딸입니다.

 

혹자는 대연지가 <호연제>의 처 <화영禾穎>이라고도 합니다만,

대연지가 먼저 <막거>를 낳았고 <전거>가 뒤에 <단막거旦莫車>를 낳았습니다.

 

<전거><>의 시절에 이미 <막거>와 상통하였기에 <막거>를 세운 것이었고,

<막거>는 보위에 서게 되자 <왕소군王昭君>이 전거의 생모(生母)임에 대연지로 삼고

<전거>를 제3연지로 삼았으나 서로 투기하지 않았습니다.

 

<막거>는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서 능란하게 그의 무리들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라 하였다.

 

상께서 이르시길

“<전거>가 먼저 <막거>와 상통하여 <막거>를 세운 것은

총애를 기화로 한 계책이었으나

도리어 계책을 쓰지 않은 이에게 굴복한 것이며,

죄는 그 윤리를 바르게 하지 않은 이에게 있는 것이오.

허나, 그들이 투기하지 않고 나라를 평안히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인 것이오.”라 하였다.

 

 

<계맹자>

흥하고 쇠함과 이루고 이루지 못함은 바람결과 같은 것입니다.

<전거>는 권력을 잡은 지가 이미 오래였으니

<왕소군>에게 양보한다한들 응당 불만이 없을 것이며,

<왕소군>은 비록 <>의 보살핌을 받고도 늘 두려워하였는데,

이제는 능히 호()의 습속에 익숙해져서 조금은 편안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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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