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王奈勿尼師今之第八子也
初光明太后配于味鄒生十一女 其十曰保反 卽天王之母也
奈勿以味鄒外孫 長于禁中
初娶光名太后第六女道留生一女二子 而因産而卒 繼娶第十 女保反
翌年光明始生子好童遂以神宝傳之于奈勿保反得正骨統
生三女而不擧子 乃禱于谷神 夢見黃龍從天降蟠于其腹
是日奈勿果幸保反于眞經堂有娠而生神異自知日出之方 人多奇之
及長形神爽雅有君子之風國人多歸之
初奈勿愛其從弟實聖以保反之妹內留妻之約以相傳骨統使居副君之位
及高麗來侵逼令副君質之實聖在麗十年怨心內生
及歸卽祚不愛奈勿之子皆質于外 保反及生靑淵實聖曰
靑淵爾我共生而訥祇非我生也宜傳于靑淵
時內留阿老黨于天王以諫之曰 訥祇乃奈勿之正骨也 廢之則必有神罰
實聖不聽使天王出視北路 密令麗人得之
天王在麗軍有神彩麗將沛世不敢窘之以其女獻之使出境上
比列城主好勿乃奉爲天王北路悉附之
沛世亦助之進攻實聖克之乃卽宝祚 曰
我朝宗傳國以來唯以禪讓未有相伐至寡人之世始征不義寡人之過也
乃以阿老爲后使其子得立以慰實聖之靈
大哉王謨 王孝友慈愛仙骨上下莫不洽然 通眞元天文聖躬鴻 壯有大力能彎大弓
一食五頭雉常早起跨白馬巡城中兒童皆知爲天王而爭趣之王持大體不偏愛
故妃嬪不相妬群臣自相睦子女數百人皆俊乂英雄能扶王業感矣至矣
천왕(天王)은 <내물奈勿>니사금(尼師今)의 여덟째 아들이다.
애초에 <광명光明>태후(太后)가 <미추味鄒>세신(味鄒世神)의 배필이 되어
11녀(女)를 낳았는데 그 열째 딸을 <보반保反>이라하니 곧 천왕(天王)의 어머니였다.
<내물奈勿>은 <미추味鄒>의 외손으로서 금중(禁中)에서 자랐다.
처음에 <광명>태후의 여섯째 딸 <도류道留>를 아내로 맞아 1녀 2남을 낳았는데
난산으로 졸(卒)하고, 이어서 열째 딸 <보반保反>을 계취(繼娶)로 맞이했다.
이듬해 <광명光明>이 비로소 아들 <호동好童>을 낳고
마침내 <내물奈勿>에게 신보(神寶)를 전함으로써
<보반保反>이 정골통(正骨統)을 얻었다.
<광명>이 <내물>의 아들을 낳음으로서
<광명>이 <내물>에게 신보(神寶)를 내려 <내물>이 즉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반>이 3딸을 낳고 아들을 내세우지 못하자 곡신(谷神)에게 기도하였는데,
꿈에 황룡(黃龍)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배를 휘감는 것을 보았다.
이 날 <내물奈勿>이 과연 진경당(眞經堂)에서 <보반保反>에게 거둥(幸)하였는데,
임신을 해서 낳으니 신이(神異)하여 스스로 해가 뜨는 방향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하기에 이르자 형신(形神)이 고상하고 우아(爽雅)하며
군자(君子)의 풍도가 있으매 국인(國人)들이 허다히 그에게 귀부하였다.
애초에 <내물奈勿>은 그 종제 <실성實聖>을 아껴서
<보반保反>의 동생 <내류內留>로 처를 삼고,
서로 골통(骨統)을 전할 것을 약속하여 부군(副君)의 자리에 있게 하였다.
고구려가 침공해 와서 핍박을 당하기에 이르자
부군(副君)으로 하여금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實聖>이 고구려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속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귀국하여 보조(寶祚)에 즉위하게 되자 <내물奈勿>의 자식들을 아끼지 않고
모두 바깥에 인질로 내보냈다.
<보반保反>이 <청연靑淵>을 낳게 되자 <실성實聖>이 말하기를
“<청연靑淵>은 너와 내가 함께 낳았지만 <눌자訥祇>는 내 소생이 아니다.
마땅히 <청연靑淵>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내류內留>와 <아로阿老>는 천왕(天王)의 편(黨)이 됨으로써 그를 간하였다.
“<눌지訥祇>는 <내물奈勿>의 정골(正骨)입니다.
그를 폐하면 반드시 신벌(神罰)이 있을 것입니다.”
<실성實聖>은 듣지 않고 천왕(天王)으로 하여금
나가서 북로(北路)를 순시케 하고는 몰래 고구려인을 시켜 그를 잡게 하였다.
천왕(天王)이 고구려의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신이한 광채(神彩)를 지녀 고구려 장수 <패세沛世>가 감히 그를 핍박하지 못하고,
그 딸을 바침으로써 국경(境上)으로 나가게끔 하였다.
비열성주(比列城主) <호물好勿>이 이에 <눌지>를 받들어 천왕(天王)으로 삼으니
북로(北路)가 모조리 그에게 귀부하였다.
<패세沛世> 역시 그를 도와서 진격하여 <실성實聖>을 공격해 꺾었다.
마침내 보조(寶祚)에 즉위하여 말했다.
“우리 조종(祖宗)이 나라를 전해온 이래로 오직 선양(禪讓)만하였을 뿐,
서로 공벌한 일은 없었다.
과인의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불의(不義)를 토벌한 것은 과인의 허물이다.”
이에 <아로阿老>를 후(后)로 삼고, 그 자식들로 하여금 존립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실성實聖>의 영혼(靈)을 위로하였다.
크도다, 왕의 계책이여!
왕은 효성스럽고 동기간에 우애(孝友)가 있으며 자애로왔으니
선골(仙骨)의 상하가 모두 흡족해 마지않았다.
진원(眞元)과 천문(天文)에 통(通)하였고, 신체(聖躬)가 대단히 컸으며
대력(大力)을 가져서 능히 큰 활(大弓)을 당길 수 있었고,
한 끼의 식사에 꿩 5마리를 먹었다.
늘 아침 일찍 일어나 백마를 타고 성안(城中)을 순시하니
아동들이 모두 그가 천왕(天王)임을 알고 다투어 그를 좇아 달렸다.
왕은 대체(大體)를 지녀서 편애(偏愛)하지 않는 까닭에
비빈(妃嬪)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았고, 군신(群臣)들은 저절로 서로 화목하였다.
자녀(子女) 수백 명이 모두 준예(俊乂)하고 영웅(英雄)이어서
능히 왕업(王業)을 떠받칠 수 있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눌지왕 원년(417) (赤蛇)정사
二月比列城主好勿奉王子訥祇爲神國大王 稱麻立干 北方盡應之
茜長乾沁茜謙進思等各以其徒內應之
2월, 비열성주(比列城主) <호물好勿>이 왕자 <눌지訥祇>를 받들어
신국(神國) 대왕(大王)으로 삼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하니
북방(北方)이 남김없이 그에 호응하였다.
<천장茜長> <건심乾沁> <천겸茜謙> <진사進思>)등이 각기 그 무리(徒)로써
그에 내응(內應)하였다.
三月遣使扶余通和 又命茁己往句麗會雀院大福會
3월, 부여(扶余)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통하고,
다시 <줄기茁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가서
작원(雀院) 대복회(大福會)에 참석(會)하도록 하였다.
四月王引阿瑟羅軍進伐尼師今大破之
4월, 왕은 아슬라(阿瑟羅)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니사금(尼師今)을 쳐서 그를 대파했다.
五月海干河期等開城門而納王尼師今走入狼山仙臺
王命垢音好原等進圍狼山尼師今出城上願見大王和解
王不許尼師今乃墮樓下而崩卽重五日也 於是衆心大歸于王
伊湌奈己等以是日奉王子大宮阿老宮上神宝骨臣俯伏山呼
河期爲匝判摠執國政以內應功故也 河期訖解王庶子也
母乃禮生故與實聖尼師今爲胞兄弟尼師今信之任爲護城將軍
先是河期私通于保反內留兩太宮生數子實聖疑欲罪之河期誓天白明
未幾實聖又奪河期愛姬尹勅 河期乃有叛心與
保反阿老密爲表裏遣垢音等于好勿以載王也
以保反爲太太宮內留爲小太宮阿老爲上宮
王與太太小太上宮謁聖母祠自告訥祇麻立干乃神國大日大王又天王之義也
以麗姬沛氏爲上宮宮人王在麗軍時所幸而有功故也
5월, 해간(海干) <하기河期>등이 성문을 열고서 왕을 맞아들이자,
니사금(尼師今)은 낭산(狼山)의 선대(仙臺)로 도망쳐 들어갔다.
왕이 <구음垢音> <호원好原>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낭산(狼山)을 포위하게 하자
니사금(尼師今)은 성(城) 위로 나와 대왕을 보기를 원하며 화해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지 않자 니사금(尼師今)이 마침내 성루(樓)의 아래로 떨어져서 붕(崩)하니,
곧 중오일(重五日,5월5일)이었다.
이에 대중(衆)들의 마음이 크게 왕에게로 돌아왔다.
이찬(伊湌) <내기奈己>등이 이날로써 대궁(大宮)에서 왕자를 받들어 모시니,
아로궁(阿老宮)이 신보(神寶)를 바쳐 올리고,
골문의 신하(骨臣)들은 부복하여 만세(山呼)를 외쳤다.
<하기河期>를 잡판(匝判)을 삼아 국정(國政)을 총집하도록 했는데
내응(內應)의 공이 높은 까닭이었다.
<하기河期>는 흘해왕(訖解王)의 서자이다.
어머니가 <예생禮生>인 까닭에 <실성實聖>니사금(尼師今)과는 포형제이므로
니사금이 그를 신임하고 호성장군(護城將軍)을 삼아 맡겼었다.
이에 앞서 <하기河期>는 <보반保反>및 <내류內留>의 양 태궁(太宮)과 사통하여
자식 몇 명을 낳았는데,
<실성實聖>이 의심하여 그를 죄(罪)주려 하자, <하기>는 하늘에 맹서하며 변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실성>이 또한 <하기>의 애희(愛姬)인 <윤칙尹勅>을 빼앗았다.
<하기>가 마침내 반심(叛心)을 품고서
<보반保反> <아로阿老>와 더불어 몰래 안팎이 되어서는,
<구음垢音>등을 <호물好勿>에게 보냄으로써 왕을 추대했던 것이다.
<보반保反>을 태태궁(太太宮)으로 삼고, <내류內留>를 소태궁(小太宮)으로 삼고,
<아로阿老>를 상궁(上宮)으로 삼았다.
왕은 태태궁, 소태궁, 상궁과 더불어 성모사(聖母祠)를 참배하고
스스로 <눌지訥祇> 마립간(麻立干)이라 고(告)하니
곧 신국(神國) 대일대왕(大日大王)이요, 또한 천왕(天王)의 뜻이었다.
고구려 희첩(麗姬) <패씨沛氏>를 상궁(上宮)의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왕이 고구려군에 있을 때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여 공로(功)가 있었던 까닭이다.
六月好勿至自比列爲角干賜第金城
以垢音爲比列城主以王庶兄進思爲阿湌視民政 庶弟仁思大思爲級湌
與西音實相好原寵德等同視兵官
6월, <호물好勿>이 비열(比列)로부터 도착하자 각간(角干)으로 삼고
금성(金城)에 저택을 내렸다.
<구음垢音>을 비열성주(比列城主)로 삼고,
왕의 서형(庶兄)인 <진사進思>를 아찬(阿湌)으로 삼아 민정(民政)을 맡아보게 하고, 서제(庶弟)인 <인사仁思>와 <대사大思>를 급찬(級湌)으로 삼아
<서음西音> <실상實相> <호원好原> <총덕寵德>등과 더불어 같이
병관(兵官)을 맡아보게 했다.
七月大修眞經堂王親講元元眞經
初保反太后與奈勿尼師今禱子于此而生王王自信于經累遭危禍
而晏然至是與太后同車幸之享內外神巫
太后欲見王弟宝海美海王乃命堤上使麗請還宝海康仇利使野請還美海
7월, 진경당(眞經堂)을 크게 중수하고 왕이 친히 원원진경(元元眞經)을 강독했다.
애초에 <보반保反>태후(太后)가 <내물奈勿>니사금(尼師今)과 함께
이곳에서 자식을 빌어 왕을 낳았고,
왕 스스로도 경(經)을 믿어 여러 차례 위기와 화를 만나고도 안전하였다.
이에 이르러 태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그곳에 행차하여,
내외(內外)의 신무(神巫)들에게 잔치를 베푼 것이다.
태후가 왕의 아우(王弟) <보해宝海>와 <미해美海>를 보고 싶어 하므로,
왕이 이에 명을 내려 <제상堤上>을 고구려(高句麗)에 사신으로 보내서
<보해宝海>의 귀환을 청하게 하고,
<강구리康仇利>를 야(野)에 사신으로 보내서 <미해美海>의 귀환을 청하게 했다.
八月神士二同可留等謀反欲立王兄霍伊長畏
長畏妻唐期懼禍告其謀于胞兄河期而請保其家 霍伊長畏保反之姊道留夫人生也
王問其反狀霍伊 曰我何敢反也
二同請以我爲 神士頭上則長畏以我皃似訖解不爲奈勿子而請自當之也
長畏曰可留說我曰若以實聖之子爲嗣則我其嫡也 奈勿之子當之則君其嫡也
我曰天子者神命也豈可私圖乎未嘗反也
盖二同可留挑霍長以欲害王于靈廟也乃遷同留於阿瑟羅使霍長屬兵官不刑一人
8월, 신사(神士) <이동二同>과 <가류可留>등이 모반하여
왕의 형 <곽이霍伊>와 <장외長畏>를 세우고자하였다.
<장외長畏>의 처 <당기唐期>가 화를 두려워하여
포형인 <하기河期>에게 그 모의를 고하고, 그 가족을 보호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곽이霍伊>와 <장외長畏>는
<보반保反>의 언니인 <도류道留>부인(夫人)의 소생이다.
왕이 그 모반의 정상을 묻자 <곽이霍伊>가 말했다.
“내가 어찌 감히 반(反)하겠는가?
<이동二同>이 나를 신사두상(神士頭上)으로 삼고자 청한즉
<장외長畏>가 내 얼굴은 <흘해訖解>를 닮았으므로 <내물奈勿>의 아들이 아니니
자신에게 청함이 마땅하다고 한 것이다.
<장외>가 말하기를
"<가류可留>가 나를 설득하면서 만약 <실성>의 아들로 계승한다면 내가 적통이고
<내물>의 아들로 계승한다면 그대가 적통이라고 하기에
내가 천자(天子)란 신명(神命)이다. 어찌 사사로이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일찌기 모반 같은 것은 없었노라.”
대개 <이동二同>과 <가류可留>가 <곽이霍伊>와 <장외長畏>를 도발함으로써
영묘(靈廟)에서 왕을 시해(害)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이동>과 <가류>를 아슬라(阿瑟羅)로 좌천시키고,
<곽이>와 <장외>로 하여금 병관(兵官)에 소속시켜 한 사람도 처형(刑)하지 않았다.
九月王與太后上宮祀奈勿世神
命葬實聖尼師今于狼山
命大思使金官好淵使加耶
9월, 왕이 태후와 상궁과 더불어 <내물奈勿>세신(世神)에게 제사하였다.
<실성實聖>니사금(尼師今)을 낭산(狼山)에 장사하도록 명했다.
명을 내려 <대사大思>를 금관(金官)에 사신으로 보내고,
<호연好淵>을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十月以王妹上淵妻好原下淵寵德娶之命吉于鮑祠皆河期女也 太后與河期躬行之
以成丹爲靈廟祭主乃光明太后季女也 太后春秋五十八而寵奈勿而生也
初實聖女舍留爲主與其弟可留及其情夫二同謀不軌而乃內留之長女故得免
至是神士等請免之故乃以舍留爲狼山主守實聖陵也
10월, 왕의 누이 <상연上淵>을 <호원好原>의 처로 삼고,
<하연下淵>을 <총덕寵德>이 취(娶)하게 하여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올렸다.
모두 <하기河期>의 딸이었다.
태후가 <하기>와 더불어 몸소 행사를 주관했다.
<성단成丹>을 영묘제주(靈廟祭主)로 삼으니
곧 <광명光明>태후(太后)의 막내딸이었다.
태후가 춘추 58세에 <내물奈勿>을 총애하여 낳았다.
처음에 <실성實聖>의 딸 <사류舍留>가 제주(祭主)가 되어서,
그 아우인 <가류可留>와 정부(情夫) <이동二同>과 더불어 불궤한 모의를 하였으나
곧 <내류內留>의 장녀인 까닭에 모면할 수 있었다.
이에 이르러 신사(神士)들이 사면을 청하므로,
이에 <사류舍留>를 낭산주(狼山主)로 삼아 실성릉(實聖陵)을 지키게 했다.
十一月王大宴骨女宗臣于南桃 是年穀大登 而漁大獲
民樂盈郊官喜滿朝歌舞之聲不絶于國中
賜第堤上妻鵄述康仇利妻色伊
11월, 왕이 남도(南桃)에서 골녀(骨女)와 종신(宗臣)들에게 크게 향연을 베풀었다.
이 해에 농작이 대풍이었고 고기잡이도 크게 풍어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즐거워하여 들판을 가득 채우고, 관원들은 기뻐하여 조정을 가득 채우니,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가 나라 안에 끊이지 않았다.
<제상堤上>의 아내 <치술鵄述>과
<강구리康仇利>의 아내 <색이色伊>에게 저택을 하사했다.
十二月以河期庶女丹媛爲宮人 使其母暖凰幷入宮中以掌歌政
丹媛年才十五而善歌詞名聞國中
12월, <하기河期>의 서녀(庶女) <단원丹媛>을 궁인(宮人)으로 삼고,
그 어미 <난황暖凰>으로 하여금 아울러 입궁(入宮)케 함으로써
가정(歌政)을 관장토록 했다.
<단원丹媛>은 나이 15세였는데 가사(歌詞)를 잘하여 나라 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 태후 <보반> 58세, <내류> 56세, <천성>{두양} 51세?, <호물> 59세,
<눌지>왕 31세, <보해> 28세, <미해> 25세, <청연> 14세, <아로> 27세, <자비> 4세.
<하기> 43세, <제상> 55세, <치술> 38세?, <청아> 19세, <자아> 16세?,
<녹아> 14세?, <보미> 14세, <거련> 24세이다.
눌지왕 2년(418) 황마(黃馬)무오
正月王與太后上宮受朝大宮
親謁靈廟. 杜氏女渾氏爲宮人
以加耶公主思氏爲豆乙宮主 思氏宣失太后女也 事奈勿生七子 有功于王故特授骨職者也
以實相王思好淵爲靈廟神士
정월, 왕은 태후(太后) 및 상궁(上宮)과 더불어 대궁(大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친히 영묘(靈廟)에 참배하였다.
<두씨杜氏>의 딸 <혼씨渾氏>를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가야공주(加耶公主) <사씨思氏>를 두을궁주(豆乙宮主)로 삼았다.
<사씨思氏>는 <선실宣失>태후(宣失太后)의 딸이다.
<내물奈勿>을 섬겨 일곱 아들을 낳았고
왕에게도 공(功)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골직(骨職)을 수여한 것이다.
<실상實相>과 <왕사王思>및 <호연好淵>을 영묘신사(靈廟神士)로 삼았다.
二月賜宮人于功臣以爲正妻乃實聖所幸骨女也 命吉于鮑祠以授骨品者三十余人
王弟宝海與堤上出麗境上 時巨連欲南下移都平壤勸我侵扶余
堤上乃以美女宝貨納于巨連曰 小國東有野人西接扶余願盡誠以事上國得保人民
巨連大喜曰 朕將討扶余以報爾國之怨
堤上乃使宝海說巨連曰 臣以上國宗女爲妻生子三人 無復二心
願歸說臣兄以侵扶余南地以獻上國巨連大喜許之
以王姑俊勿爲白陵祀主 白陵者祖母休禮夫人陵也 俊勿乃其女也
初末仇角干娶助賁女湯禮次娶味鄒女休禮
及卒奈勿尙幼湯禮子冬九郞等葬末仇于湯禮陵門
至是王尊末仇休禮爲世神骨母崇其陵門以置主
2월, 궁인(宮人)들을 공신(功臣)들에게 하사함으로써 정처(正妻)로 삼게 하니,
곧 <실성實聖>이 잠자리 시중을 들게한 골녀(骨女)들이었다.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올리도록 명함으로써
골품(骨品)을 수여받은 자가 30여명이었다.
왕제(王弟) <보해宝海>가 <제상堤上>과 더불어 고구려를 탈출하여
국경(境上)에 이르렀다.
때에 <거련巨連>은 남하(南下)하여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자하여
우리에게 부여(扶余)를 침탈하도록 권했다.
고구려는 10년 후인 428년에 평양{今 노룡}으로 천도한다
<제상堤上>이 이에 미녀와 보화를 <거련巨連>에게 바치며 말했다.
“소국(小國)은 동쪽에 야인(野人)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여(扶余)와 접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성심을 다해 상국(上國)을 섬김으로써 인민을 보전코자 합니다.”
<거련巨連>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장차 부여(扶余)를 토벌함으로써 네 나라의 원한을 갚아 주리라.”
<제상堤上>이 이에 <보해宝海>를 시켜 <거련巨連>을 설득하여 말하도록 했다.
“신(臣)은 상국의 종녀(宗女)를 처로 맞이함으로써 자식 3인을 낳았으니
다시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원컨대 돌아가서 신의 형을 설득함으로써
부여(扶余)를 침공하여 남쪽 땅을 상국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거련巨連>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허락하였다.
왕의 고모 <준물俊勿>을 백릉사주(白陵祀主)로 삼았다.
<준물>은 <내물>과 <내물>의 어머니 <휴례>사이에서 태어난 포녀다.
<눌지>의 할머니가 낳은 딸이니 고모인 동시에
<눌지>의 아버지가 낳은 이복 누나인 셈이다.
백릉(白陵)이란 조모(祖母) <휴례休禮>부인(夫人)의 능(陵)이다.
<준물俊勿>은 곧 그 딸이었다.
애초에 <말구末仇>각간(角干)이 <조분助賁>의 딸 <탕례湯禮>를 아내로 맞았고,
다음으로 <미추味鄒>의 딸 <휴례休禮>를 아내로 맞았었다.
졸(卒)하게 되자 <내물奈勿>은 오히려 어렸으므로
<탕례의 아들인 <동구冬九>郞 등이
<말구末仇>를 탕례릉문(湯禮陵門)에 장사하였다.
이에 이르러 왕이 <말구>와 <휴례>를 추존하여 세신(世神)과 골모(骨母)로 삼고,
그 능문(陵門)을 존숭함으로써 사주(祀主)를 둔 것이다.
三月以好原爲殿門頭上尹古爲城門頭上
賜紫衣玄酒于王兄王姊等. 杜氏生王子僧.
加耶獻鹿. 王以鬲仲妻都妹美而善舞納入宮人
3월, <호원好原>을 전문두상(殿門頭上)으로 삼고,
<윤고尹古>를 성문두상(城門頭上)으로 삼았다.
자의(紫衣)와 현주(玄酒)를 왕의 형과 누나들에게 내렸다.
<두씨杜氏>가 왕의 아들 <승僧>을 낳았다.
가야(加耶)가 사슴(鹿)을 바쳤다.
왕이 <격중鬲仲>의 처 <도매都妹>가 아름답고 춤을 잘 추므로
궁인(宮人)으로 맞아들였다.
四月以王侄明叔爲級湌使加耶
上宮生鳥生公主
命宗子骨女能通眞經者賜爵一級
4월, 왕의 조카 <명숙明叔>을 급찬(級湌)으로 삼아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상궁(上宮) <아로阿老>가 <조생鳥生>공주(公主)를 낳았다.
종실의 아들과 골문의 딸로서 능히 진경(眞經)에 통한 자에게는
작위 일급씩을 내리도록 명했다.
五月角干好勿卒 好勿者好臨伊湌之子 與奈勿同母 故奈勿愛之 委以軍國大事
與實聖不合 勸質之 及實聖卽位好勿出守比列不屈 于實聖及王出境奉之爲君遂成大事
至是卒王甚愛之以其子珍勿爲阿湌 芥勿級湌以述其業
奈己爲角干炭己海湌
聖明生王女湯明
5월, 각간(角干) <호물好勿>이 졸(卒)했다.
호물은 <호림好臨>이찬(伊湌)의 아들이다.
<내물奈勿>과 한 어머니인 까닭에 <내물>이 그를 아껴서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위임했었으나
<실성實聖>과 서로 뜻이 맞지 않아 그를 인질로 보내는 것을 권했었다.
<실성>이 즉위하자 <호물>은 나가서 비열성(比列城)을 지키게 됐으나
<실성>에게 굽히지 않았다.
왕이 국경을 나오자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 마침내는 대사를 이루었다.
이에 이르러 졸(卒)하자 왕은 심히 애통해하며
그 아들 <진물珍勿>을 아찬(阿湌)으로 삼고,
<개물芥勿>을 급찬(級湌)으로 삼아 그 업(業)을 잇도록 했다.
<내기奈己>를 각간(角干)으로 삼고 <탄기炭己>를 해찬(海湌)으로 삼았다.
<성명聖明>이 왕의 딸 <탕명湯明>을 낳았다.
六月試能射者百人劔戟各五十人
以丁期爲歃良州干五同爲沙伐城主
6월, 활쏘기에 능한 자 100인과 검극(劔戟)에 능한 자 각각 50인을 시험 보았다.
<정기丁期>를 삽량주칸(歃良州干)으로 삼고,
<오동五同>을 사벌성주(沙伐城主)로 삼았다.
七月宝海還 先是巨連旣許歸而聞讒言復追之 乃變服逃出 至達已忽水口
追者受堤上金以空矢射之不中 乃入阿瑟羅浮海而歸 王迎于郊外而入見太后大宴賞功
以寶海爲匝判頭上骨門
7월, 보해(宝海)가 돌아왔다.
이에 앞서 <거련巨連>은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나 참언을 듣고는
다시 그를 추격했다.
이에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와 달이홀(達已忽)의 수구(水口)에 이르렀는데
추격자는 <제상堤上>에게 금(金)을 받고 빈 화살로 그를 쏘았으므로 맞지 않았다.
마침내 아슬라(阿瑟羅)로 들어와 바다에 배를 띄워서 돌아왔다.
왕은 교외에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태후(太后)를 뵙고 나자,
크게 잔치를 열어 공로(功)를 포상하였다.
<보해宝海>를 잡판(匝判)으로 삼아 골문(骨門)의 두상(頭上)으로 하였다.
八月山花生王子山同
鵄述生王女皇我
8월, <산화山花>가 왕자 <산동山同>을 낳았다.
<치술鵄述(380?-422)>이 왕녀(王女) <황아皇我>를 낳았다.
九月堤上以美海未歸 不見其妻而發向野國
鵄述時産皇我于宮中及聞其發追至長沙呼之不顧而去
9월, <제상堤上>은 <미해美海>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 처를 보지도 않고
야국(野國)을 향해 출발했다.
<치술鵄述>은 그 때에 궁중에서 <황아皇我>를 낳았는데 그 출발소식을 듣자
뒤쫓아 가 장사(長沙)에 이르러서 그를 불렀으나 <제상>은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因名其沙曰長沙
親戚二人扶腋將還夫人舒脚坐不起 名其地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率三娘子上鵄述嶺望倭國痛哭而終仍爲鵄述神母今祠堂存焉
처음에 제상이 떠나갈 때 부인이 듣고는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문(望德寺門) 남쪽의 모래사장에 이르자 벌렁 누워 길게 울부짖었다,
그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곁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 부인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대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사당(祠堂)이 남아있다.
<삼국유사>
十月以順實郞爲歌仙乃堤上長女靑我之夫也 屬南桃典大舍
10월, <순실順實(396-448)>랑을 가선(歌仙)으로 삼으니
곧 <제상堤上>의 장녀인 <청아靑我(399-452)>의 남편이다.
남도전(南桃典) 대사(大舍)에 속하게 했다.
十一月行玉帽聖母祭
以聖明妻宝海行吉鮑祠
11월, 옥모성모제(玉帽聖母祭)를 행했다.
<성명聖明(397- )>을 <보해宝海(390-441)>의 처로 삼고,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十二月賜骨女品級布帛
置工作大監修宮室
宮人好甘生王女黔牛
12월, 골녀(骨女)들에게 품급(品級)과 포백(布帛)을 내렸다.
공작대감(工作大監)을 두어 궁실을 수리하였다.
궁인(宮人) <호감好甘>이 왕녀(王女) <검우黔牛>를 낳았다.
눌지왕 3년(419) 토양(土羊)기미
正月王受朝大宮. 茜謙色支稟主
賜爵星衛二十八人皆以骨女妻之
以實聖女山凰爲宮人
정월, 왕이 대궁(大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천겸茜謙>과 <색지色支>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성위(星衛) 28인에게 작위를 내리고 모두 골녀(骨女)로써 처를 삼게 했다.
<실성實聖>의 딸 <산황山凰>을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二月以訖解王子雍己爲海湌 雍己之母乃保反太后之姊也
以王姊都利爲妻而生都妹至是都妹生王子劬覓故特賜其爵也
2월, <흘해訖解>왕의 아들 <옹기雍己>를 해찬(海湌)으로 삼았다.
<옹기雍己>의 어머니는 곧 <보반保反>태후(太后)의 언니이다.
왕의 누나인 <도리都利>를 처로 삼아서 <도매都妹>를 낳았는데,
이에 이르러 <도매都妹>가 왕자(王子) <구멱劬覓>을 낳은 까닭에
특별히 그 작위를 내린 것이다.
미추(광명) - 옹판(358- )(흘해) - 옹기(380?- )
보반(360-428)
말구(휴례) - 내물(보반) - 도리(382- )(옹기) - 도매(400- )
눌지(387-458)(도매) - 구멱(419- )
三月以陰凰爲鮑石祠主
3월, <음황陰凰>으로 포석사주(鮑石祠主)를 삼았다.
四月大雨水牛谷水湧濫入玉陵 遣好原等防守賑問守戶
以沛氏爲宮主賜紫品骨位 沛氏曰杜氏乃妾之君 妾安敢與杜氏同品乎
王笑曰汝是我寵妾也 他不過老守宮也 杜氏聞之不食王謝以醉語失道
以實聖子靑淵爲級湌 時狼山數鳴王恐實聖陰禍不復貶其遺兒
4월, 수우곡(水牛谷)에 큰비가 내려서 물이 솟아 넘쳐 옥릉(玉陵)으로 들어왔다.
<호원好原>등을 보내어 물을 막고 수묘인들의 가호(守戶)를 구휼하고 위문했다.
<패씨沛氏>를 궁주(宮主)로 삼고 자품(紫品)의 골위(骨位)를 내렸다.
<패씨沛氏>가 말했다.
“<두씨杜氏>는 곧 첩의 임금(君)입니다.
어찌 감히 <두씨杜氏>와 더불어 동품(同品)이 되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곧 나의 총첩(寵妾)이다. 다른 사람들은 늙어가며 궁(宮)을 지킴에 불과하다.”
두씨가 이를 듣고 먹지를 않자 왕은 술에 취하여 말이 실도(失道)했노라며 사과했다.
<실성實聖>의 아들 <청연靑淵>을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때에 낭산(狼山)이 여러 차례 울었는데 왕은 <실성實聖>의 음화(陰禍)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 유아(遺兒)들을 폄척하지 않았다.
<두씨杜氏>는 <실성(359-417)>의 처로 고구려 해태후의 딸로서
두양(천성)(367?-435)을 말한다.
五月皓明生王女孝兒
王弟美海浮槎逃歸 王出迎郊外作憂息歌以娛之
鵄述率其六女謁美海于太太宮 請爲六女主美海許之
5월. <호명皓明>이 왕녀 <효아孝兒>를 낳았다.
왕제(王弟) <미해美海(393-433)>가 뗏목을 타고 도망쳐 돌아왔다.
왕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고 우식가(憂息歌)를 지음으로써 그를 즐겁게 하였다.
<치술鵄述>이 여섯 딸을 거느리고 태태궁(太太宮)에서 <미해美海>를 알현하였는데,
<미해美海>를 여섯 딸의 주군(主)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그를 허락했다.
六月鳥生有疾命中外仙巫禱疾
以堤上女紫我綠我妻美海王與鵄述行吉鮑祠
6월, <조생鳥生>이 병이 나자 나라 안팎의 선무(仙巫)들에게 명하여
병의 치유를 빌도록 했다.
<묵호자墨胡子>가 기도로써 병을 치료했다는 왕녀가 바로 이 <조생鳥生>이다.
이 <조생(418-487)>이 22대 지증왕 <지도로(437-514)>의 어머니이다.
<제상堤上>의 딸 <자아紫我>와 <녹아綠我>를 미해(美海)의 처로 삼았다.
왕이 <치술鵄述>과 더불어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했다.
七月宝美生女羅海 野王怒欲棄之 其后以黃金購駿風船二隻護送于我邊
美海不納置于牟梁舊宮
7월, <보미宝美>가 딸 <나해羅海>를 낳자
야왕(野王)이 노하여 그를 버리려고 하였다.
그 모후(母后)가 황금(黃金)으로 준풍선(駿風船) 2척을 사서
우리 변경으로 호송해 보냈다.
<미해美海>는 맞아들이지 않고 모량(牟梁)의 옛 궁(舊宮)에 두었다.
미해(보미) - 나해(419- )
419년은 왜 인덕왕 23년이다.
<보미宝美(404-485)>는 <수황水皇(355?-?>과 <인덕(355-427)>의 손녀로
404년생이며 신라 대원신통의 祖가 된다.
<보미宝美>기 <미해>의 딸 <나해羅海>를 낳자 <미해>는 이미 왜를 탈출하였으므로
<인덕>왕이 손녀 <보미>를 버리려하자 <보미>의 어미가 신라로 탈출시킨 것이다.
<제상>이 <미해>를 탈출시키는 데에는 <수황>의 공이 컷을 것이다.
<제상>의 어머니는 <志皇>으로 <水皇>은 <제상>의 이모이다.
<제상>의 처 <치술>은 <보미>를 양녀로 삼는다.
八月王命美海迎宝美于牟梁
8월. 왕이 <미해美海>에게 명하여 모량(牟梁)궁에서 <보미宝美>를 맞도록 했다.
九月王賞州干七人皆護民關野者也
宝美從美海入宮謁王王賜宴紫衣
聖母祠主雲花卒以其女宇花代之
9월. 왕이 주칸(州干) 7인에게 상을 내렸다.
모두가 백성들을 보호하고 들을 개척한 자들이었다.
<보미宝美>가 <미해美海>를 따라 입궁하여 왕을 알현하였다.
왕이 연회를 베풀고 자의(紫衣)를 내렸다.
성모사주(聖母祠主) <운화雲花>가 졸(卒)하자
그 딸 <우화宇花>로 그를 대신하게 했다.
내물(운화) - 우화(378-432)
十一月賜靑我宝美第 先是靑我勸美海納宝美紫綠妬之靑我善曉之得相容
王嘉之命以靑我宝美爲美海左右暖房賜甲第奴婢
11월. <청아靑我>와 <보미宝美>에게 저택을 내렸다.
앞서 <청아靑我>는 <미해美海>를 권하여 <보미宝美>를 맞아들였는데
<자아紫我>가 그를 질투하자 <청아>가 잘 타일러서 서로 용납할 수 있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겨 <청아>와 <보미>를
<미해美海>의 좌우 난방(暖房)으로 삼아 좋은 저택과 노비를 내렸다.
눌지왕 4년(420) 금원(金猿)경신
正月作大金猿于天柱寺
沛氏生王子大沛
정월, 천주사(天柱寺)에 커다란 금원숭이(大金猿)를 만들었다.
<패씨沛氏>가 왕자 <대패大沛>를 낳았다.
二月聖明生宝海子宝宝兒是爲習宝
王始幸宝美于鵄述宅 宝美嬋娟極美且有奇韻 王累欲幸之宝美不從 美海聞而責之
時鵄述置酒享王王將浴美海使宝美奉悅于湯中王遂幸之
2월, <성명聖明>이 <보해宝海>의 아들 <보보아宝宝兒>를 낳았다.
이가 바로 <습보習宝>이다.
내물(보반) - 보해(390-441)(성명) - 보보아=습보(420-485)
내물(내류) - 성명(397- )
이 <습보(420-485)>가 22대 지증왕 <지도로(437-514)>의 아버지이다.
왕이 <치술鵄述>宅에서 처음으로 <보미宝美>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보미>는 선연(嬋娟)하게 예쁘고 지극히 아름다웠는데, 또한 기이한 운치가 있었다.
왕이 누차 그녀를 잠자리 시중을 들게했으나 <보미>가 따르지 않았는데
<미해美海>가 듣고는 그를 꾸짖었다.
때에 <치술鵄述>이 주연을 차려 왕을 대접하였는데,
왕이 장차 목욕하려하자 <미해>가 <보미>로 하여금
탕안(湯中)에서 봉열(奉悅)케 하니, 왕이 마침내 그녀를 잠자리 시중 들게하였다.
三月旱甚王幸眞經堂問過于諸仙
有一仙對曰 無貪異色 皆謂沛氏宝美也 王黙然不悅
3월, 가뭄이 심하자 왕이 진경당(眞經堂)에 행차하여
제선(諸仙)들에게 과오를 물었다.
한 선인이 응대하여 말하기를
“이색(異色)을 탐함이 없었는가?”하였다.
대개 <패씨沛氏>와 <보미宝美>를 일컬음이었다.
왕은 묵연히 즐거워하지 않았다.
四月王幸鵄述宅 時鵄述靑我紫我皆以娠腹脹
王作三腹歌而唱之盖摩禮也
是夕欲幸宝第恐仙議而止作鸞鳳歌而送之
其歌不傳本而大意則 鸞與鳳雖曰異 骨皆是聖鳥宜其愛慕也
4월, 왕이 <치술鵄述>宅에 행차하였다.
때에 <치술鵄述>과 <청아靑我>와 <자아紫我>는 모두 임신하여 배가 불렀다.
왕이 삼복가(三腹歌)를 지어서 그를 노래하였는데, 대개 마례(摩禮)였다.
이날 저녁에 <보미宝美>의 집에 행차하고자 했으나
선의(仙議)를 두려워하여 중지하고 난봉가(鸞鳳歌)를 지어서 보냈다.
그 노래는 전하지 않으나 그 대의(大意)인즉
난새(鸞)와 봉황새(鳳)는 비록 다르다 말해도
뼈(骨)는 모두가 바로 성조(聖鳥)인 것이니
마땅히 애모(愛慕)할 것임이라는 뜻이었다.
六月九日生美海女巴胡者紫我也 十二日生王子富理者鵄述也賜米視兒
6월, 9일에 <미해美海>의 딸 <파호巴胡>를 낳았다는 것은 <자아紫我>를 말함이며,
12일에 왕자 <부리富理>를 낳았다는 것은 치술(鵄述)을 말함이다.
쌀을 하사하고 아기를 보았다.
미해(자아) - 파호(420-482)
눌지(치술) - 부리(420-483)
七月降霜民大飢賣子于道 命有司賑之放輕囚百人
7월, 서리가 내려 백성들이 크게 굶주려서 길에서 자식을 팔았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그를 구휼하도록 하고, 경범의 죄수 100명을 방면했다.
十月移管城穀于沙伐 金官穀于京都
10월, 관성(管城)의 곡식을 사벌(沙伐)로 옮기고,
금관(金官)의 곡식을 경도(京都)로 옮겼다.
十一月王有疾中外大禱
靑我生美海子白欣
11월. 왕이 병환이 있자 나라 안팎에서 크게 기도를 올렸다.
<청아靑我>가 <미해美海>의 아들 <백흔白欣>을 낳았다.
순실(청아) - 등흔(416-483)
미해(청아) - 백흔(420-482)(조리) - 염신(447-503)(벽아) - 위화(487- )
<백흔>은 <등흔>의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다.
이 <백흔>이 신라 최초의 화랑이며 1대 풍월주인 <위화>의 할아버지이다.
눌지왕 5년(421) 금계(金鷄)신유
二月王問元元于眞經堂
五月十二日金官坐知卒 福壽請以坐知弟卒知爲繼夫
流歌仙布兒于一牟 布兒布世之子 初爲暖凰宮舞奴多才學歌于宮而名大振
遂擢無品仙其歌神雅有彩 暖凰以爲歌子而護之內實相通無異夫妻
及宮入宮掌政不得朝夕相通宮 乃以布兒爲苑翁以視宮中花草禽獸與宮會于苑堂通之如
故布兒或踰入宮所同寢而去歲餘宮人丹媛亦通之生女 事覺命黜暖凰母女而流布兒
2월, 왕이 진경당(眞經堂)에서 원원(元元)을 물었다.
5월, 12일에 금관(金官)의 <좌지坐知(350?-421)>가 졸(卒)하였다.
<복수福壽(391-445)>가 <좌지坐知>의 아우 <졸지卒知>로
계부(繼夫)를 삼을 것을 청하였다.
가선(歌仙) <포아布兒>를 일모(一牟)에 유배시켰다.
<포아布兒>는 <포세布世>의 아들이다.
처음에 <난황暖凰>궁(宮)의 무노(舞奴)가 되었는데
재주가 많아서 <난황暖凰>에게 노래를 배우고 명성을 크게 떨쳤다.
흘해(접황) - 난황(365-422)
마침내 무품선(無品仙)으로 발탁되었는데
그 노래는 신비하고 우아하며 이채가 있었다.
<난황暖凰>은 가자(歌子)로 삼아서 그를 보호하였는데
안으로는 기실 서로 상통하여 부부나 다름없었다.
<난황>궁주가 입궁해서 가정(歌政)을 관장하기에 이르자
조석으로 상통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궁주는 <포아布兒>를 원옹(苑翁)으로 삼아
궁중의 화초와 금수를 맡아보게 함으로써 원당(苑堂)에서 궁주와 만나 통정하였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포아布兒>는 간혹 담을 넘어 궁에 들어와서 자고가곤 했는데,
한 해 남짓 되자 궁인(宮人) <단원丹媛> 역시 그와 사통하여 딸을 낳았다.
하기(난황) - 단원(403- )
일이 발각되자 명을 내려 <난황暖凰> 모녀를 내쫓고 <포아布兒>를 유배시켰다.
七月宝美生美海子宝信
以塞凰爲宮人代丹媛執歌政 歌仙塞金之女也 其母陰凰乃暖凰之女也
塞金以扶余降卒之子 皃美隸敏又善吹笛 陰凰以爲宮奴而私愛之生子女
實聖愛其徒而不禁 至是以女故賜爵大奈麻
7월, <보미宝美>가 <미해美海>의 아들 <보신宝信>을 낳았다.
<새황塞凰>을 궁인(宮人)으로 삼아
<단원丹媛>을 대신하여 가정(歌政)을 잡도록 하였다.
<새황塞凰>은 가선(歌仙) <새금塞金>의 딸이었다.
그 어머니 <음황陰凰>은 곧 <난황暖凰>의 딸이다.
내물(난황) - 음황(386-441)(새금) - 새황(408-458)
<새금塞金>은 투항한 부여(扶余) 군졸의 아들인데
용모가 아름답고 영민(潁敏)하였으며 또한 피리를 잘 불었다.
<음황陰凰>이 궁노(宮奴)로 삼아 사사로이 애호함으로써 자녀를 낳았는데
<실성實聖>은 그 무리(徒)들을 아껴서 금지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딸의 연고로써 <새금塞金>에게 대나마(大奈麻)의 작위를 내렸다.
八月革舊制始置五官 曰兵官大官神官骨官城官也
8월, 구제(舊制)를 개혁하여 처음으로 오관(五官)을 두니
병관(兵官) 대관(大官) 신관(神官) 골관(骨官) 성관(城官)이라 했다.
十月王始召宝美于宮中幸之 先是有仙議故王久不幸之
至是爲見宝信而召之引入月堂幸之
自是宝美悅王矯言王命私自入宮受幸者亦多故宮中爲之笑曰
始何剛剛革今何熟 鹿皮角性本非堅受酢變作柔
宝海兵官伊湌美海大官伊湌河期神官伊湌叔丹骨官伊湌大勿城官伊湌
王幸紫我于靑我第 靑我以堤上長女 豪濶如男子身長六尺五寸
面與玉脂 聲若淸樂 善媚御人出入宮中 竟與王通寵賜甚重豪奢擬於上宮欲盡王歡而
又誘其妹紫我以薦之
10월, 왕이 처음으로 <보미宝美>를 불러 궁중에서 그를 행(幸)하였다.
이에 앞서 선의(仙議)가 있었던 까닭에 왕은 오래도록 그를 행(幸)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보신寶信>을 보게되자 불러서
월당(月堂)으로 이끌고 들어가 잠자리 시중을 들게한 것이다.
이로부터 <보미宝美>가 왕을 희열하여 왕명을 빙자해서
스스로 입궁하여 사사로이 잠자리 시중을 받은 것도 또한 많았던 까닭에
궁중에서는 그것이 웃음거리가 되어 말했다.
“처음에는 뻣뻣하다가 어찌 지금은 뒤바뀌어서 물렁해졌나?
사슴가죽과 뿔은 성질이 본래 견고하지 않으니
초(酢)를 맞으면 변해서 부드럽게 된다네.”
<보해宝海>를 병관이찬(兵官伊湌)으로, <미해美海>를 대관이찬(大官伊湌)으로,
<하기河期>를 신관이찬(神官伊湌)으로, <숙단叔丹>을 골관이찬(骨官伊湌)으로,
<대물大勿>을 성관이찬(城官伊湌)으로 삼았다.
왕이 <청아靑我>의 저택에서 <자아紫我>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하였다.
<청아靑我>는 <제상堤上>의 장녀로서 호탕하고 활달하기가 남자와 같았는데,
신장이 6척 5촌이고, 얼굴은 옥기름 같았고, 목소리는 맑은 음악과도 같았으며
사람들을 교태롭게 영합하여 잘 거느렸다.
궁중을 출입하다가 필경에는 왕과 통하였는데
총애와 은사가 심중(甚重)하여 호사스러움이 상궁(上宮)에 비길 정도였다.
왕의 환심을 다하고자하여 다시 그 아우 <자아紫我>로써 유혹하여 천침케 한 것이다.
十一月命麗牡牛十二付扶余牝百頭
大祭玉陵. 角干奈己薨子炭己匝判元己大阿湌
11월, 고구려 숫소 12마리를 부여 암소 100마리에게 붙였다.
옥릉(玉陵)에 대제(大祭)를 지냈다.
각간(角干) <내기奈己>가 훙(薨)하자 아들 <탄기炭己>를 잡판(匝判)으로 삼고,
<원기元己>를 대아찬(大阿湌)으로 삼았다.
눌지왕 6년(422) 수구(水狗)임술
正月作雙水狗于鮑祠行裸祭拜衆萬餘
七日王受朝大宮宴宗臣 曰多以我用麗制非之
予豈不知吾祖法之神聖而空效實聖之初政乎 不强則辱欲强則可取者多也
雖然豈紊吾祖法骨政哉 大小公卿其悉予心而勿爲無用杞憂也
以王女菊思 妻阿湌貝昕
정월, 포사(鮑祠)에 한 쌍의 물개(水狗)를 만들어 나제(裸祭)를 행하니
절하는 무리가 만여 명이었다.
7일에 왕이 대궁(大宮)에서 조례를 받고 종신(宗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말했다.
“내가 고구려의 제도를 씀으로써 그를 비난함이 많다.
내 어찌 우리 조법(祖法)의 신성함을 모르고
헛되이 <실성實聖>의 초정(初政)을 본받겠는가?
강해지지 않으면 욕을 당하니 강해지고자 한다면 취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어찌 우리의 조법(祖法)과 골정(骨政)을 문란케 하랴!
대소공경들은 마땅히 내 마음을 상세히 알아 쓸데없이 기우하지 말라.”
왕녀 <국사菊思>를 아찬 <패흔貝昕>의 처로 하였다.
三月金官使來獻土物報堤上被燒于木島
初宝美救堤上而流木島 野人以美色金寶悅其心 堤上不變忠心
至被燒殺而口稱鷄林之臣 不稱臣於野王
野人投其骨於海上 骨皆西流而盡 王聞之大驚爲之發喪國中招魂于海上而立祠
加堤上爵大阿湌王與紫我親爲祭主
命兵官鍊武於堤上祠
眻尺大母薨年百十三歲立祠祀之
王常宿長沙宅以慰鵄述鵄述言笑自若而無憂也
3월, 금관(金官)의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제상堤上>이 목도(木島)에서 불에 타죽었음을 보고했다.
애초에 <보미宝美>가 <제상堤上>의 목숨을 구하여 목도(木島)에 유배되었었다.
야인(野人)들이 미색(美色)과 금은보화로써 그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나,
<제상堤上>은 충심(忠心)을 변치 않고,
불에 타죽음에 이르러서도 다만 입으로 계림(鷄林)의 신하라 칭할 뿐
야왕(野王)에게는 칭신(稱臣)하지 않았다.
야인(野人)들이 그 뼈를 바다위에 내던져서 뼈가 모두 서쪽으로 흘러가 없어졌다.
왕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서 그를 위하여 국중(國中)에 발상(發喪)하고
해상(海上)에서 초혼하여 사당을 세웠다.
<제상堤上>의 작위를 대아찬(大阿湌)으로 더하고
왕이 <자아紫我>와 함께 친히 제주(祭主)가 되었다.
병관(兵官)에게 명하여 제상사(堤上祠)에서 군사훈련(鍊武)을 하게했다.
<양척眻尺>대모(大母)가 훙(薨)하니 나이 113세였다.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왕이 늘 장사택(長沙宅)에 머물음으로써 <치술鵄述>을 위로하였다.
<치술鵄述>은 평소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웃으며 우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四月鵄述宮與靑紫綠三女登海發岺東向木島痛哭氣盡而薨
王哀傷之以上宮禮葬之立其祠于岺上曰鵄述神母祠
初基臨王女閏凰夢見鵄入而與實聖潛通而生
閏凰時爲靈廟 淨主不可通色而素與實聖相好潛生英述受笞于神前
又生鵄述恐罪重暗托于堤上母志皇
而育焉以此鵄述自幼好堤上約不二夫夢見七色虹生女不能生子
及堤上奉使于麗賜 第城中入侍夜宴內留醉引鵄述歌無夫王醉抱鵄述欲之
鵄述辭以約不二夫歸家夢見堤上則責之曰 臣妾拒居不忠也
鵄述卽起沐浴入宮受幸一房便娠皇我公主殆天也
自此寵 幸沈甚又生富理殿君事王如夫不以堤上之出爲憂
至是聞其被燒而傷甚而薨 宮色美情爛王之深痛優禮固亦宜乎
4월, 치술궁(鵄述宮)은 <청아靑我> <자아紫我> <녹아綠我>의 세 딸과 함께
해발령(海發岺)에 올라 동쪽의 목도(木島)를 향해 통곡하다가
기운이 다하여 훙(薨)하였다.
왕이 애통하고 상심하여 상궁(上宮)의 예(禮)로써 장사지내고,
봉우리 위에 사당을 세워 치술신모사(鵄述神母祠)라 하였다.
애초에 기림왕(基臨王)의 딸 <윤황閏凰>이 꿈에 솔개(鵄)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서
<실성實聖>과 몰래 잠통하여 낳았다.
거리(묘덕) - 흠실(215- )(?) - 아도(보태) - 물품(지황) - 제상(363-422)
미추(아황) - 소황(330?- )(급리) - 지황(348?- )
수황(355?- )
접황(332?-401?)(기림) - 윤황(361- )(실성) - 치술(380?-422)
왜 인덕왕(355-427)의 妃가 된 수황은 지황의 동생으로 제상의 이모이다.
<윤황>은 당시 영묘정주(靈廟淨主)가 되어서 색(色)을 통할 수 없었으나,
원래 <실성>과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여서 몰래 <영술英述(378- )>을 낳고
신전(神前)에서 태형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시 이에 이르러 <치술鵄述>을 낳게 되자 죄가 무거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암암리에 <제상堤上>의 어머니 <지황志皇>에게 맡겨서 길렀던 것이다.
이로써 <치술鵄述>은 어려서부터 <제상堤上>과 좋아하여
두 남편을 갖지 않을 것을 약속했는데,
꿈에 7색 무지개를 보고서 딸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낳을 수가 없었다.
<제상>이 고구려에 사절을 받들고 가게 됨에 이르자,
성안에 저택을 하사받고, 야연(夜宴)에 입시하였는데
<내류內留>가 술에 취하여 <치술鵄述>을 이끌며 남편이 없음을 노래하자
왕이 취하여 <치술鵄述>을 안고 그를 욕구하였다.
<치술>은 두 남편을 갖지않는다는 약속을 들어 사양하고 귀가했는데,
꿈에 <제상堤上>이 나타난즉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신첩(臣妾)이 임금(君)을 거절함은 불충(不忠)이다.”라고 하였다.
<치술鵄述>은 즉시 일어나 목욕하고 궁(宮)으로 들어가 잠자리 시중을 받았는데,
일방(一房)에 문득 <황아皇我>공주(公主)를 임신하였으니 거의 하늘의 뜻이었다.
이로부터 총행(寵幸)이 심히 깊어지고,
다시 <부리富理>전군(殿君)을 낳게 되자 왕을 섬김이 남편과도 같아서,
<제상堤上>의 출행을 근심으로 삼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그 불에 타죽음을 듣고는 상심이 심하여 훙(薨)한 것이다.
궁(宮)은 자색이 아름답고 정(情)이 난숙하여
왕이 그를 깊이 애통해 하였으니 두터히 예우함도 또한 진실로 옳도다.
五月進思妻訶得生子思德
宮人山凰好內事王命出宮 山凰實聖女也 其母曰陰凰乃王之異母姊也
以宇花子好原爲兵官神士寵愛之
5월, <진사進思>의 처 <가득訶得>이 아들 <사덕思德>을 낳았다.
궁인(宮人) <산황山凰>이 내사(內事)를 좋아하자 왕이 출궁(出宮)을 명하였다.
<산황山凰>은 <실성實聖>의 딸이다.
그 어머니를 <음황陰凰>이라하니 곧 왕의 배다른(異母) 누나였다.
내물(난황) - 음황(386-441)(실성) - 산황(405- )
내물(보반) - 눌지(387-458)
<우화宇花>의 아들 <호원好原>을 병관(兵官) 신사(神士)로 삼고 그를 총애하였다.
七月宮人龍明生女周氏
7월, 궁인(宮人) <용명龍明>이 딸 <주씨周氏>를 낳았다.
<주씨周氏>는 뒤에 13살의 나이로 백제 비유왕(毗有王)의 비(妃)로 간택되어
442년에 문주왕을 낳는다.
九月暖凰卒年五十八訖解王女也
事奈勿實聖兩世有寵 善鄕歌登于仙壇 陰凰卽其女也
王卽位命歌之則有曰 海自生風花自逢春爾安知吾王固白天上來之句
王大喜以其女丹媛爲宮人 命幷入宮掌歌政
至是其寵臣布兒得罪流一牟而死傷心作歌而歌不絶歌絶而仍絶息
及葬四方歌人會者千數 願分骨立祠許之
紫我生王子祐仁王賜米視兒
穀大登. 始品馬于聖母山置馬士五人
行大祭于奈勿實聖兩陵
冬以紫我爲暖宮夫人
9월, <난황暖凰>이 졸(卒)하였다. 나이 58세였는데 흘해왕(訖解王)의 딸이었다.
<내물奈勿>과 <실성實聖>을 섬겨 두 치세에 총애가 있었으며
향가(鄕歌)를 잘하여 선단(仙壇)에 올랐었다.
<음황陰凰>은 곧 그 딸이다.
왕이 즉위해서는 그를 노래하게 한즉 입을 열어
“바다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고, 꽃은 저절로 봄을 맞이하나니,
네가 어찌 나를 알겠느냐. 하늘 위로부터 왔노라”
라는 구(句)를 읊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딸 <단원丹媛>을 궁인(宮人)으로 삼고
아울러 입궁토록 명하여 가정(歌政)을 관장케 하였다.
이에 이르러 그 총신(寵臣) <포아布兒>가 득죄하여 일모(一牟)에 유배되서 죽자,
상심하여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노래 소리가 끊어지지 않다가
노래가 끊어지자 그대로 숨도 끊어졌다.
장사를 치름에 이르러서는
사방에서 가인(歌人)으로 모여든 자가 수천이었다.
뼈를 나누어 사당을 세우기를 원하매 그를 허락하였다.
<자아紫我>가 왕자 <우인祐仁>을 낳으니 왕이 쌀을 내리고 아이를 살펴보았다.
농작이 대풍이었다.
처음으로 성모산(聖母山)에서 말을 품평하고 마사(馬士) 5인을 두었다.
<내물奈勿> <실성實聖>의 두 왕릉에서 대제(大祭)를 지냈다.
겨울에 <자아紫我>를 난궁부인(暖宮夫人)으로 삼았다.
눌지왕 7년(423) 수시(水豕)계해
四月會七十以上男女于南桃大堂設養老宴
王親執食 阿老宮主親行酒賜穀及帛各有差
4월, 남도(南桃)의 대당(大堂)에서 70이상의 남녀들에게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왕이 친히 음식을 집었고 <아로阿老>궁주(宮主)가 친히 술을 따랐으며,
곡식과 비단을 내리되 각기 차등이 있게 하였다.
五月山凰生女心凰 實相公以爲己女 美解公亦爲己女 山凰不能決之王曰
兄弟同子何必爭乎 兩公乃相讓命爲美海女 以山凰妻好淵公
山凰自在宮時 每引三公和之 王不罪之
內宮匝判孝直爭之乃命出宮三公爭引如初 至是問其所最好者而妻之
5월, <산황山凰>이 딸 <심황心凰>을 낳았는데 <실상實相>공은 자기 딸이라 하고,
<미해美海>공 역시 자기 딸이라 하므로 <산황山凰>이 판결을 못하자 왕이 말했다.
“형제가 한 자식인데 어찌 다툴 필요가 있는가?”
이에 두 공(公)이 서로 양보하자 <미해美海>의 딸로 삼도록 명하고,
<산황山凰>을 <호연好淵>공의 처로 하였다.
<산황山凰>은 궁(宮)에 있을 때부터 매양 세 공(公)을 이끌어서 섞었는데
왕은 그를 죄주지 않았다.
내궁잡판(內宮匝判) <효직孝直>이 이를 쟁간하자 마침내 출궁(出宮)을 명했는데,
세 공(公)을 다투어 끌어들임이 여전했다.
이에 이르러서 그 가장 좋아하는 자를 물어 처(妻)가 되게 한 것이다.
실성(음황) - 산황(405- )
내물(보반) - 눌지(387-458)
보해(390-441)
미해(393-433)
실상(395-461)
심(보반) - 호연(397-466)
미해, 실상, 호연은 모두 보반(360-428) 태후의 아들이다.
七月靑我宮主生女助里乃其寵臣順實郞之女也
順實郞色美善歌 嘗與布兒爲友國人呼作日月精
兩人皆以身微不達 靑我見而悅之自奔爲妻生登欣 堤上公怒逐出之
及鵄述受王寵幸靑我亦入宮承幸
美海公還王命爲美海公妾生子白欣 而潛與順實續好至是生女美海不知之
以聖明宮主爲歌仙年二十七歌仙中年最少 聖明內留夫人女也 與王同父 故王寵愛之
以爲卜好公妃至是繼暖凰掌宮中歌政
初宮主爲實聖寵妾生二女曰遠明仙明亦皆聰慧實
聖酷愛宮主以爲暖宮若不利於王則宮主號泣保之不至大禍盖宮深愛王也
王引兵而歸先取宮主以置左右 至是復入宮王曰 唯汝不可離吾側也宮曰妾亦不可離王也王曰朕所 以不可離汝者聞汝歌以養吾眞見汝容以慰吾情也 汝則何取乎
宮曰女子之所貴以生王子也 卜好雖好難生王子不娠王子歌安得聖乎
王曰善以此寵愛驟加政事多出其手 阿老 妬之曰 姣妹欺我內留解之曰兄弟一君何妬之爲
7월, <청아靑我>궁주(宮主)가 딸 <조리助里>를 낳으니
곧 그 총신(寵臣)인 <순실順實(397-448)>랑의 딸이었다.
<순실順實>랑은 자색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 하였다.
일찌기 <포아布兒>와 더불어 벗이 되니 나라사람들이 지어 부르기를
“일월정(日月精)”이라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신분이 미천하므로 현달하지 못했다.
<청아靑我>가 보고는 그를 희열하여 스스로 사통해서 등흔(登欣)을 낳으니
<제상堤上>공이 노하여 <청아>를 내쫓았다.
그러다 <치술鵄述>이 왕의 총행을 받기에 이르자
<청아靑我> 역시 입궁하여 총행을 이었다.
<미해美海>공이 귀환하자 왕명으로 <미해>공의 첩이 되어서
아들 <백흔白欣>공을 낳았는데,
<순실順實>과 몰래 계속 좋아하다가 이에 이르러 딸을 낳았으나
<미해美海>는 이를 알지 못했다.
<성명聖明>궁주(宮主)를 가선(歌仙)으로 삼으니
나이 27세로 가선(歌仙)중에 가장 어렸다.
<성명聖明>은 <내류內留>부인(夫人)의 딸이다.
왕과 같은 아버지인 까닭에 왕이 그를 총애하여 <복호卜好>공의 비(妃)로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서 <난황(暖凰>의 뒤를 이어 궁중의 가정(歌政)을 관장하도록 했다.
처음에 궁주(宮主)는 <실성實聖>의 총첩이 되어
두 딸을 낳아 이름을 <원명遠明>과 <선명仙明>이라 했는데 또한 총혜로웠다.
<실성實聖>은 궁주를 몹시도 아껴서 난궁(暖宮)을 삼았는데
<실성>이 왕에게 불리(不利)하게 할 것 같으면
궁주가 목놓아 울면서 그를 보호하곤 하여 큰 화(禍)에 이르지 않았다.
대개 궁주가 왕을 깊이 사랑한 것이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는 먼저 궁주(宮主)를 취하여 좌우에 두었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입궁하자 왕이 말했다.
“오직 너만은 내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궁주가 말했다.
“첩 또한 왕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짐이 너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네 노래를 들음으로써 내 진원(眞)을 기르고,
네 얼굴을 봄으로써 내 정(情)이 위로되는 까닭이다. 너인즉 무엇을 취할꼬?”
궁주가 말했다.
“여자의 귀한 바는 왕자(王子)를 낳음으로써 입니다.
<복호卜好>가 비록 좋으나 왕자를 낳기는 어렵고,
왕자를 임신할 수 없으니 노래가 어찌 득성(得聖)을 하겠습니까?”
왕은 “옳다!”하고 말했다.
이로써 총애가 더욱 급속히 쏠리고 정사(政事)가 허다히 그 손에서 나오게 되니
<아로阿老>가 그를 질투하여 말했다.
“교활한 동생(姣妹)이 나를 속였다.”
내류(內留)가 그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형제가 한 임금인데 그를 질투하여 무엇하노?”
이때 <눌지> 37세, <성명> 27세, <아로> 34세, <내류> 62세이다.
十一月宝美生王女宝沈
以塞金爲日仙陰凰爲月仙
11월, <보미宝美>가 왕녀 <보심宝沈>을 낳았다.
<새금塞金>을 일선(日仙)으로 삼고, <음황陰凰>을 월선(月仙)으로 삼았다.
十二月王與聖明行大祭于光明廟
12월, 왕이 <성명聖明>과 더불어 <광명光明>묘(廟)에서 대제(大祭)를 지냈다.
눌지왕 8년(424) 수서(水鼠)갑자424)
上宮生王女草生于元日
상궁(上宮)이 왕녀 <초생草生>을 설날(元日)에 낳았다.
눌지(아로) - 초생(424- )
二月遣進思寵德于句麗獻 美女達開宝珉 兩女皆沙伐采女也
麗主巨連好色盡取永樂之姬妾驕傲求我宗女王卑辭以爲王妹
巨連大喜以良馬宝劔答之於是兩國復相和
2월, <진사進思>와 <총덕寵德>을 고구려에 보내어
미녀 <달개達開>와 <보민宝珉>을 바쳤다.
내물(사씨) - 진사(385-459)
내기(장총씨) - 총덕(398-464)
두 여자는 모두 사벌(沙伐)에서 뽑은 채녀(采女)였다.
고구려 왕 <거련巨連>이 호색하여 영락(永樂)의 희첩들을 남김없이 취하고는
교오(驕傲)하게도 우리에게 종녀(宗女)를 요구하므로
왕이 비사(卑辭)로써 왕의 누이(妹)라 한 것이다.
<거련巨連>은 크게 기뻐하며 좋은 말과 보검(宝劔)으로 그에 보답하였다.
이에 양국이 다시 서로 화친하였다.
三月以進思女仁德妻吹希
3월, <진사進思>의 딸 <인덕人德>을 <취희吹希>의 처로 삼았다.
<취희吹希(408-451)>는 금관가야 7대 왕이다.
六月聖明生王女順明
6월, <성명聖明>이 왕녀 <순명順明>을 낳았다.
八月命設倉于西路
以紅我爲美海右妻
8월, 서로(西路)에 창고를 설치하였다.
<홍아紅我>를 <미해美海>의 우처(右妻)로 삼았다.
九月立馬官于北川兼掌牛事馬士十五人牛士三人
詔曰年年穀登祖宗之陰護也中外皆行聖母玄牝祭于穀場可也國人皆喜歡聲四通
9월, 북천(北川)에 마관(馬官)을 두고 겸하여 우사(牛事)를 관장하게 했다.
마사(馬士)는 15인이고 우사(牛士)는 3인이었다.
조서를 내려 말했다.
“해마다 곡식이 풍작인 것은 조종(祖宗)의 음덕과 가호이다.
나라 안팎 모두는 곡장(穀場)에서 성모현빈제(聖母玄牝祭)를 행해야 될 것이다.”
국인들이 모두 기뻐하며 환호성(歡聲)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눌지왕 9년(425) 청우(靑牛)을축
正月分送牝牛于州郡. 以好原爲馬政大夫
兄山人以雌虎爲妻生三子其二畧似人 夜騎虎下山掠人畜晝隱于岩中
人畏之以爲虎公而祭之 一日虎公騎雌虎而至加良村命虎捉村主之畜
村主之女將如厠見之而逃入虎公 逐入奸其女村主不能禁
虎公乃命村主不問女戶每夜來奸 數月而娠不敢言于外
村主心憂之 其奴知之候虎公入女戶作虎公狀出騎雌虎
虎見而異之負而至山阪下之若有取言 奴乃交于虎 虎喜而受之 負而歸穴 三子欲噉之
虎乃負歸他穴置之 虎欲出去 奴止之 虎不得出
虎公見雌虎已歸復入女所宿之請爲女婿女亦願之 翌夜奴騎虎下山曰
吾已爲虎公 舊虎公可捕而殺之 村主女聞之與虎公逃上山去自此加良村無虎患
數年後村主得罪入山夜一家有火入之則 人子虎雛雜居之驚 而欲退有一女當前乃其女也
女言虎公同居三年 一日 自至雌虎所不見雌虎有三子居焉
其半似人者隨至其大者已知情逼女相合虎公不能禁
小者數年又如之生子人虎相半 虎公之子不類人者獨居舊穴
雌虎棄奴時來相交 奴亦與其子虎同居相距大山之東西
村主曰 我得罪逃來可使爾兩虎夫負吾家族而來同居何如
女喜之使其雛出吼之良久兩虎負虎公 而至女乃騎兩虎下山良久負
村主之妻及子女而來伐木起家村主騎兩虎而下山掠村中美女而去皆作妾生子女
兩虎亦犯之生虎兒所 掠女三十八人 村男亦有掠去行役者七人
山下人呼曰 虎村王聞之命羽林軍往伐之
寵德曰 虎怪自古有之不有大患則可養以觀其變如狗尾軍則反可爲用也
王善之命環虎村戒之不入
정월, 살찐 소의 새끼를 주(州) 군(郡)에 나누어 보냈다.
<호원好原>을 마정대부(馬政大夫)로 삼았다.
형산(兄山) 사람이 암 호랑이를 처로 삼아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둘은 대략 사람과 비슷하였다.
밤이면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낮이면 암굴 속에 몸을 숨겼는데,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공(虎公)이라하며 그에게 제사를 올렸다.
하루는 호공(虎公)이 암호랑이를 타고 가량촌(加良村)에 이르러서는
호랑이에게 명하여 촌주(村主)의 가축을 잡게 하였다.
촌주의 딸이 측간에 가려하다가 그것을 보고 도망쳐 들어갔는데
호공(虎公)이 뒤쫓아 들어가 그 딸을 간음하니 촌주는 막을 수가 없었다.
호공(虎公)이 이에 촌주(村主)에게 명하여 딸의 방문을 닫지 못하게 하고
매일 밤 와서 간음하였다.
몇 달이 지나서 임신을 했는데 감히 외부에 말하지 못했다.
촌주가 근심하며 마음을 쓰자 그 노(奴)가 알고는
호공(虎公)이 딸의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호공(虎公)의 모습으로 꾸미고 나가서 암호랑이를 탔다.
호랑이가 보고 그를 이상히 여기더니 등에 업고는 산 비탈아래에 이르자
마치 취(取)하자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다.
노(奴)가 마침내 호랑이와 교합하니 호랑이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애호했다.
등에 태우고서 굴(穴)에 돌아오자 세 아들이 그를 잡아먹으려 하므로,
호랑이가 곧 업고서 되돌아가 다른 굴에 그를 두었다.
호랑이가 떠나려고 하는데 노(奴)가 그를 만류하니 호랑이는 나갈 수가 없었다.
호공(虎公)은 암호랑이가 이미 돌아간 것을 보고는 다시 여자에게 들어가 묵고
사위(女婿)가 될 것을 청하였는데 딸도 역시 그를 원하였다.
이튿날 밤에 노(奴)가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와 말했다.
“내가 이미 호공(虎公)이 됐으니 옛(舊) 호공(虎公)은 잡아 죽여야 할 것이다.”
촌주의 딸이 이 말을 듣고는 호공(虎公)과 더불어 산 위로 도망쳐서 떠나버렸다.
이로부터 가량촌(加良村)에는 호랑이의 우환(虎患)이 없어졌다.
몇 년후에 촌주가 죄(罪)를 짓고는 산으로 들어갔는데
밤에 한 인가에 불빛이 있어 들어가 본즉
사람의 자식과 호랑이 새끼가 뒤섞여 그곳에 살고 있었다.
놀라서 물러나오려고 하자 한 여자가 앞을 막아서는데 곧 그 딸이었다.
딸이 말하기를 호공(虎公)과 동거한지 삼년에
하루는 암호랑이의 거처로부터 암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세 아들이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반쯤 사람 비슷한 것이 커감에 따라 이미 정(情)을 알고는
딸을 핍박하여 상합(相合)하였는데 호공(虎公)은 그를 금할 수 없었다.
작은 놈도 몇 년이 되자 또한 그와 같이하여 자식을 낳으니
사람과 호랑이가 서로 반반(半)이었다.
호공(虎公)의 아들로 사람과 닮지 않은 것은 옛 굴에서 홀로 살았다.
암호랑이가 때때로 노(奴)를 버리고 와서 서로 교합하자
노(奴) 역시 그 자식 호랑이들과 동거(同居)하며 살았는데
큰 산의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촌주가 말하였다.
“나는 죄를 짓고 도망쳐왔는데 네 두 호랑이 남편으로 하여금
내 가족을 업어올 수 있게 하여 같이 살면 어떤가?”
딸이 기뻐하며 그 새끼로 하여금 나가서 울부짖게 하자
좀 있다가 두 호랑이가 호공(虎公)을 업고 당도했다.
딸이 이에 두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가더니
한참 지나서 촌주의 처와 자녀들을 업고 왔다.
벌목을 하고 집을 세웠다.
촌주(村主)가 두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가 촌(村)안의 미녀들을 약취해 갔다.
모두 첩을 삼아 자녀를 낳으니 두 호랑이 역시 그를 범하여 호아(虎兒)들을 낳았다.
잡혀온 여자가 38명이었고,
촌(村)의 남자 또한 잡혀가서 노역을 행하는 자가 7명이 있었다.
산 아래 사람들이 호촌(虎村)이라 불렀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우림군(羽林軍)에 명을 내려 그를 토벌케 하자
<총덕寵德>이 말했다.
“호괴(虎怪)는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큰 우환이 안 된다면 가히 양생함으로써 그 개꼬리처럼 변함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
군사라면 오히려 쓸 수 있게 됩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호촌(虎村)을 둘러싸고 들어가지 않도록 경계시켰다.
三月末曷使大屈入等入朝請婚賜以采女
3월, 말갈(末曷)의 사자 <대굴인大屈人>등이 입조하여 혼인을 청하므로
채녀(采女)를 하사했다.
五月卒知卒 福壽以吹希庶兄湯倍請爲繼夫 湯倍者福壽枕婢湯兒之生也
先吹希一月而生年才十八而福壽年三十五也
王欲不許河期曰順其所欲可也乃許之
5월, <졸지卒知>가 졸(卒)하자 <복수福壽>가 <취희吹希>의 서형(庶兄)인
<탕배湯倍>를 계부(繼夫)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탕배湯倍>라는 자는 <복수福壽>의 침비(枕卑)인 <탕아湯兒>의 소생이었다.
<취희吹希>)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으니 나이가 18세였고 복수는 나이가 35세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으려하자 <하기河期>가 말하기를
“그 하고자하는 바에 따라줘야 될 것입니다.”하므로 마침내 그를 허락하였다.
좌지(복수391-445) - 취희(408-451) 금관가야 7대왕 재위 421-450
七月宝美生卜好公子章伊 聖明入宮卜好公無好偶欲得新宮宝美
上許之使之行吉于宮中 宝美夢見天馬自白雲中下來交于其腹氣爽然而覺之言于卜好公
公曰好夢也乃合而娠生時紫霧滿室而香
龍明宮生皇女珠氏
7월, <보미宝美>가 <복호卜好>공의 아들 <장이章伊>를 낳았다.
<성명聖明>이 입궁하자 <복호卜好>공은 좋은 짝이 없어
신궁(新宮)의 <보미宝美>를 얻고자 했다.
상(上)이 그를 허락하고 그로 하여금 궁중에서 길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보미宝美>가 꿈에 천마(天馬)가 흰 구름 속으로부터 내려와
그 배에서 교합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쾌해져서 깨어났다.
<복호卜好>공에게 말하자 공(公)은
“좋은 꿈이다!” 하며,
이에 합환하고서 임신했는데
태어날 때에 보랏빛 안개가 산실에 가득차고 향기가 났다.
보해(보미) - 장이(425-490)
<용명龍明>궁(宮)이 황녀(皇女) <주씨珠氏>를 낳았다.
十月以王女烏士只妻多甘
金官人好樹等欲立坐知從弟南而作亂 王遣寵德討平之
初南與卒知皆通福壽 於坐知生時生南子乭希 南自以爲可得爲夫而陰欲害坐知福壽止之
而以卒知爲溫恭而繼之 南不平使其徒獻毒于卒知福壽知之命却之
乃召南慰之曰 我欲立汝而卒知乃亡夫之胞弟也 奈何卒知弱不能久爾可代也
命與卒知互相受寵 南以此驕傲擅政 福壽乃引將軍山兒爲心腹執南而流之
先是好樹亦以內衛烝于福壽而無禮福壽怒流之兩人乃聚其衆以待變
至是唱言湯倍作亂而夜襲之時福壽與湯倍睡熟仁德力大負吹希至呼之不應
仁德直入 起之福壽 赤身負湯倍 而走湯倍母湯兒與私夫率騎入之福壽
乃取湯兒衣服之曰 吾雖赤身夫兒無恙好也 人皆笑之
山兒與南邀戰不利福壽等出至境上 寵德乃破好樹 而捕南來獻
命福壽等還其都福壽請留軍許之
10월, 왕녀 <오사지烏士只>를 <다감多甘>의 처로 하였다.
금관(金官)사람 <호수好樹>등이
<좌지坐知>의 종제 <남南>을 세우고자하여 난을 일으켰다.
왕이 <총덕寵德>을 파견하여 그를 토평(討平)하였다.
애초에 <남南>은 <졸지卒知>와 함께 모두 <복수福壽>와 통정하였다.
<좌지坐知>의 생시(生時)에 <복수>가 <남南>의 아들 <돌희乭希>를 낳았는데,
<남南>은 자신이 부군(夫)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음으로 <좌지坐知>를 해치려고 하자
<복수福壽>가 그를 제지하였다.
그리고는 <졸지卒知>가 온화하고 공손하므로 그를 계부로 삼았다.
<남南>이 불평을 품고 그 도당(徒)으로 하여금 <졸지>에게 독(毒)을 올리게 하자
<복수>가 알고는 그를 물리치도록 명했다.
이에 <남南>을 불러 그를 위로하며
“내가 너를 세우고자하나 <졸지卒知>는 곧 망부(亡夫)의 포제(胞弟)이니 어찌하랴.
<졸지>는 몸이 약하여 오래갈 수 없으니 네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하고는 명을 내려 <졸지卒知>와 함께 서로 번갈아 총애를 받도록 하였다.
<남南>이 이로써 교오(驕傲)해져서 정사를 제멋대로 하자
<복수>가 마침내 장군 <산아山兒>를 끌어들여 심복을 삼고는
<남南>을 사로잡아 유배를 시켰다.
이에 앞서 <호수好樹> 또한 내위(內衛)로써 <복수福壽>를 증(烝)하고는 무례하므로
<복수>가 노하여 그를 유배를 시켰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무리를 끌어 모아 변(變)을 기다리다가
이에 이르러 <탕배湯陪>가 난(亂)을 일으켰다고 소리 높여 선동하며
밤을 틈타 그를 습격했다.
당시 <복수福壽>는 <탕배湯陪>와 함께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인덕仁德>이 크게 힘을 내어 <취희吹希>를 업고 이르러서
그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인덕>이 곧장 들어가서 그를 깨워 일으키자
<복수福壽>가 알몸으로 <탕배湯陪>를 업고서 달아났다.
<탕배湯陪>의 어미인 <탕아湯兒>가 그 사부(私夫)와 함께
기병(騎)을 이끌고 들어오자 <복수>가 곧 <탕아>의 옷을 취하여 입으며 말하기를
“나는 비록 알몸이나 남편아이(夫兒)가 별 탈이 없으니 좋구나!”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웃었다.
<산아山兒>가 <남南>을 맞이해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복수福壽>등이 도성을 빠져나와 국경에 이르렀다.
<총덕寵德>이 이에 <호수好樹>를 쳐부수고 <남南>을 잡아와 헌상하자
왕이 <복수福壽>등에게 도성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복수가 군대의 주둔(留軍)을 청하자 그를 허락하였다.
十一月大雪. 紫我生王子易人
11월, 큰 눈이 내렸다.
<자아紫我>가 왕자(王子) <역인易人>을 낳았다.
눌지왕 10년(426) 적호(赤虎)병인
二月塞凰生卜好女攝凰. 遣方石于句麗求藥師
2월, <새황塞凰(408-458)>이 <복호卜好>의 딸 <섭황攝凰>을 낳았다.
<방석方石(402- )>을 고구려에 보내어 약사(藥師)를 구하게 했다.
三月加耶王子三光來朝.
命紫我復還美海宮
3월, 가야(加耶)의 왕자 <삼광三光>이 내조(來朝)하였다.
<자아紫我>에게 다시 <미해美海>궁(宮)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五月以順實郞爲奈麻
王復幸紫我宮
山凰生女趙凰
靑我生子靑市乃期宝所私而出也
5월, <순실順實>랑을 나마(奈麻)로 삼았다.
왕이 다시 <자아紫我>궁(宮)에 행차(幸)하였다.
<산황山凰>이 딸 <조황趙凰>을 낳았다.
<청아靑我>가 아들 <청시靑市>를 낳았다.
곧 <기보期宝>가 사통하여 낳은 것이다.
실성(보반) - 기보(407-479)(청아) - 청시
八月品京都采績置彩士十二人分監州郡
8월, 경도(京都)의 채색 직조(采績)를 품평했다.
채사(彩士) 12인을 두어 주군(州郡)을 나누어 감독했다.
十月日暖如春. 聖明生王子格明
10월, 날이 봄처럼 따듯했다.
<성명聖明>이 왕자 <격명格明>을 낳았다.
눌지왕 11년(427) 화토(火兎)정묘
二月福壽生寵德子久希 寵德破南留軍於金官 湯倍吹希事之如父
福壽潛通之 至是生子 王聞之召寵德還
2월, <복수福壽(391-445)>가 <총덕寵德(398-464)>의 아들 <구희久希>를 낳았다.
<총덕寵德>은 <남南>을 깨뜨리고 금관(金官)에 군대를 머물렀는데,
<탕배湯陪(408- )>와 <취희吹希(408-451)>가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복수福壽>가 몰래 그와 잠통(潛通)하고는 이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는 <총덕寵德>을 소환하였다.
五月召加耶博士五人入京 使骨門子弟習其文字
聖明宮生子習棠不類於王 王曰誰子也 聖明不悅曰 汝以我爲山凰乎 王笑而不問
時聖明有歌臣棠馬出入潛通故王疑之也
角干奈己卒基臨王子也 好神仙有大德王惜之
5월, 가야(加耶)의 박사(博士) 5인을 불러 입경(入京)시키고,
골문(骨門)의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그 문자(文字)를 익히게 하였다.
가야의 문자와 신라의 문자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성명聖明>궁(宮)이 아들 <습당習棠>을 낳았는데 왕(王)을 닮지 않았다.
왕이
“누구의 아들인가?”하고 묻자
<성명聖明>이 좋아하지 않으며
“네가 나를 <산황山凰>으로 삼는가?”라고 하였다.
왕은 웃으며 더이상 묻지 않았다.
당시 <성명聖明>은 가신(歌臣) <당마棠馬>가 있어
출입하며 몰래 잠통(潛通)하였던 까닭에 왕이 그를 의심한 것이다.
각간(角干) <내기奈己(362-427)>가 졸(卒)했다.
기림왕(基臨王)의 아들이었다.
신선(神仙)을 좋아하고 큰 덕(大德)을 지녔었다. 왕이 그를 애석히 여겼다.
七月紫我生王女宋兒
河期爲伊湌賜安康川地
阿老上宮生王子好生
一善女毛禮作窟於家中畜怪于家 毛禮初爲巫 州吏妾之 州干見而奪之
毛禮不悅州干 乃與吏逃居山中 能有口辯惑衆命有司捕毛禮及怪
7월, <자아紫我>가 왕의 딸 <송아宋兒>를 낳았다.
<하기河期(375-431)>를 이찬으로 삼고 안강천(安康川)의 땅(地)을 하사했다.
<아로阿老>상궁(上宮)이 왕자 <호생好生>을 낳았다.
일선(一善)의 여자 <모례毛禮>가 집안에 토굴(窟)을 만들고 집에 괴인(怪)을 길렀다.
<모례毛禮>는 처음에 무당(巫)이 되어서 주의 관리(州吏)가 그를 첩으로 삼았는데
주칸(州干)이 보고는 그를 빼앗았다.
<모례毛禮>가 주칸(州干)을 좋아하지 않아
마침내 관리와 더불어 산속으로 도망쳐 살았다.
구변(口辯)을 가져서 능히 대중(衆)을 미혹(惑)할 수 있었으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례毛禮> 및 괴인(怪)을 체포하도록 했다.
九月宝美生美海公女厚梁
穀大登 南郊民獻七莖禾 宴群臣于南桃
9월, <보미宝美>가 <미해美海>공의 딸 <후량厚梁>을 낳았다.
곡식이 대풍이었다.
남교(南郊)의 백성이 일곱 줄기의 벼(七莖禾)를 바치자,
남도(南桃)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十月大索毛禮及其徒
紅我生美海女策兒
雪雨三日慮囚問過
以庶子山近爲聖母神士
10월, <모례毛禮>와 그 무리(徒)들을 크게 수색하였다.
<홍아紅我>가 <미해美海>의 딸 <책아策兒>를 낳았다.
눈비(雪雨)가 삼일 동안 내리자 죄수를 심리하고 왕이 과오를 물었다.
서자 <산근山近(405-475)>을 성모신사(聖母神士)로 삼았다.
눌지왕 12년(428) 황룡(黃龍)무진
正月烏士只生子烏含
仁德生銍知
정월, <오사지烏士只>가 아들 <오함烏含>을 낳았다.
<인덕仁德>이 <질지銍知>를 낳았다.
취희(인덕) - 질지(428-492) 금관가야 9대왕 재위 451-491
질지는 금관가야 9대왕으로 즉위 후 452년에 왕후사를 창건하였다.
二月一善逃女毛禮及怪人墨胡爲捺已民所獲至京
2월, 일선(一善)의 도망녀 <모례毛禮> 및 괴인(怪人) <묵호墨胡>가
날이(捺已)의 백성에게 잡힌바 되어 경도(京)에 이르렀다.
三月扶余毗有迎野王女韋二娘至月奈
古自以南子秋爲婿 引好樹之餘衆 欲伐金官
王命實相伐古自大破之 乃立發車爲其君年才十四
3월, 부여(扶余)의 <비유毗有>가 야왕(野王)의 딸 <위이랑韋二娘>을 마중하기 위해
월내(月奈)에 이르렀다.
전지(해씨) - 비유(412-455) 백제 24대왕 재위 427-454
이때 왜는 <이중履中>왕 원년이다.
고자(古自)가 <남南>의 아들 <추秋>를 사위로 삼고
<호수好樹>의 잔당(餘衆)을 끌어들여 금관(金官)을 치려고 하였다.
왕이 <실상實相>에게 명하여 고자(古自)를 쳐서 그를 대파하고,
마침내 <발차發車(415- )>를 그 임금(君)으로 세웠는데, 나이 14세였다.
고자(古自)는 지금의 고성이다.
四月幽墨胡毛禮于城西 有司欲殺之
上宮曰虎村尙不可伐何不容一墨胡乎 乃命幽之
4월, <묵호墨胡>와 <모례毛禮>를 성(城) 서쪽에 가둬두게 하였다.
유사(有司)가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아로>상궁(上宮)이 말하기를
“호촌(虎村)도 오히려 토벌해선 안 된다고 하면서
어찌 일개 검은 오랑캐(墨胡)는 용납하지 못하는가?”하였다.
이에 그를 유폐하도록 명했다.
九月加耶舍訶病沒長女蟾神立以其從兄三光爲夫
9월, 가야(加耶)의 <사가舍訶>가 병으로 죽자
장녀 <섬신蟾神>이 즉위하여 그 종형 <삼광三光>을 남편으로 삼았다.
수극(선실) - 사가(369-428) 대가야 14대왕 재위 414-427
사가(후섬) - 섬신(413-463) 대가야 15대왕 재위 428-462
十月實相等大破野人于四勿秋等奔野國
太太保反崩春秋六十九
10월, <실상實相>등이 사물(四勿)에서 야인(野人)을 크게 쳐부수자
<추秋>등이 야국(野國)으로 달아났다.
태태궁 <보반保反(360-428)>이 붕(崩)하였다. 춘추 69세였다.
눌지왕 13년(429) 토사(土蛇)기사
二月築矢堤岸長二千百七十步
靑我生美海公女通里
以王女通只妻河期子方奴
2월, 시제(矢堤)를 쌓았는데 둑의 길이(岸長)가 2,170보였다.
<청아靑我>가 <미해美海>공의 딸 <통리通里>를 낳았다.
왕녀(王女) <통지通只>를 <하기河期>의 아들 <방노方奴>의 처로 삼았다.
三月以內留爲太太
塞凰生王女芊凰
以遠明爲宮人
3월, <내류內留>를 태태궁으로 삼았다.
<새황塞凰>이 왕녀 <간황芊凰>을 낳았다.
<원명遠明>을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四月山凰生好淵女畏凰或作實相女
以卜好爲舒弗邯美海爲兵官伊湌命執國政
4월, <산황山凰>이 <호연好淵>의 딸 <외황畏凰>을 낳았다.
<복호卜好>를 서불감(舒弗邯)으로 삼고,
<미해美海>를 병관이찬(兵官伊湌)으로 삼아서, 국정(國政)을 잡도록 명했다.
七月福壽生湯倍子倍希
紫我生美海子金海
7월, <복수福壽>가 <탕배湯陪>의 아들 <배희倍希>를 낳았다.
<자아紫我>가 <미해美海>의 아들 <금해金海>를 낳았다.
九月宝美生王女宝梁皃似美海
王曰可以爲美海女也宝美曰偶然相似何怒之爲 王曰非怒也興之也
9월, <보미宝美>가 왕녀(王女) <보량宝梁>을 낳았는데
모습이 <미해美海>와 흡사했다.
왕이 말하기를
“가히 <미해美海>의 딸로 삼아야겠다.”하니
<보미>가
“우연히 서로 닮은 것인데 노하면 어쩝니까?”하자
왕이 말하기를
“노한 것이 아니다. 흥겨운 것이다.”라고 했다.
十月行大祭于始祖廟
上紫金天衣于太太
10월, 시조묘(始祖廟)에서 대제(大祭)를 행하였다.
태태궁에게 자금천의(紫金天衣)를 진상하였다.
눌지왕 14년(430) 금마(金馬)庚午
正月龍明生山近子春山
紅我生美海子大古兒
鳥生公主有疾 毛禮請禱 召墨胡入宮禱之有效 乃命放歸一善
毛禮生子皆肖墨胡而自言非相交而神相接也
정월에 <용명龍明>이 <산근山近>의 아들 <춘산春山>을 낳았다.
<홍아紅我>가 <미해美海>의 아들 <대고아大古兒>를 낳았다.
<조생鳥生>공주(公主)가 병질이 있었다.
눌지(아로) - 조생(418-487)
조생은 신라 22대 지증왕 지도로(437-514) 재위 500-513의 어머니이다.
<모례毛禮>가 기도(禱)하기를 청하매
<묵호墨胡>를 불러 입궁시키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는데 효험이 있었다.
이에 석방을 명하여 일선(一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모례毛禮>가 자식을 낳았는데 모두 <묵호墨胡>와 닮았으나
스스로 말하기를 서로 상교(相交)한 것이 아니라 신(神)이 접(接)한 것이라 했다.
三月湯倍奔阿羅 湯倍驕傲自以爲位在吹希之上 强通于仁德有娠
福壽怒欲治之 乃與其徒出奔
3월, <탕배湯陪>가 아라(阿羅)로 달아났다.
<탕배湯陪>가 교오(驕傲)하게 스스로 <취희吹希>보다 지위가 높다하며,
강제로 <인덕仁德>을 사통하여 임신을 하자
<복수福壽>가 노하여 그를 치죄하려하였다.
이에 그 도당과 함께 도망쳐 나간 것이다.
五月始置海宮 先是神泉湧于海濱 仙巫以爲道場成邑 至是營宮以爲遊宅
以丁期子丁都爲殿門頭上
5월, 처음으로 해궁(海宮)을 두었다.
이에 앞서 바닷가에서 신천(神泉)이 솟구쳤는데
선무(仙巫)들이 도장(道場)으로 삼음으로써 읍락(邑)을 이루었다.
이에 이르러 궁실을 조영함으로써 유택(遊宅)으로 삼았다.
<정기丁期>의 아들 <정도丁都>를 전문두상(殿門頭上)으로 삼았다.
七月命好淵與山兒等伐阿羅 湯倍又奔月奈
以長子慈悲爲太子
7월, <호연好淵>에게 명하여 <산아山兒>등과 함께 아라(阿羅)를 토벌하게 했다.
<탕배湯陪>는 다시 월내(月奈)로 달아났다.
장자 <자비慈悲>로 태자를 삼았다.
눌지(아로) - 자비(414-479) 신라 20대왕 재위 458-478
十月修倉廩
眞經堂火
角干房期薨子房人大阿湌房發阿湌
大雪三日 日仙塞金上化 以順實爲日仙 行明于月宅
10월, 창름(倉廩)을 수리하였다.
진경당(眞經堂)에 불이 났다.
각간(角干) <방기房期>가 훙(薨)하였다.
아들 <방인房人>을 대아찬(大阿湌)으로 삼고, <방발房發>은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큰 눈이 사흘 동안 내렸다.
일선(日仙) <새금塞金>이 상화(上化)하자,
<순실順實(396-448)>을 일선(日仙)으로 삼고 월택(月宅)에서 행명(行明)하였다.
순실은 35살에 신라의 일선(日仙)이 된다.
눌지왕 15년(431) 백양(白羊)辛未
月奈阿羅野人等伐古自以湯倍爲發車夫
命實相代好淵守金官
월내(月奈) 아라(阿羅) 야인(野人)등이 고자(古自)를 침벌함으로써,
<탕배湯陪>를 <발차發車>의 남편으로 삼게 했다.
<실상實相>에게 명을 내려 <호연好淵>을 대신하여 금관(金官)을 지키게 했다.
三月毗有伐月奈取其西南地爲郡
月奈移都猿邑遣其弟吳人請和
3월, <비유毗有>가 월내(月奈)를 쳐서
그 서남부(西南)의 땅을 취(取)하여 군(郡)을 삼았다.
월내(月奈)가 도성을 원읍(猿邑)으로 옮기고,
그 아우 <오인吳人>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였다.
월내(月奈)는 지금의 전남 영암이다.
四月野人引兵三千襲東邊寵德兵敗入圍明活城掠我婦女
孝直引悉直軍斷其後好淵多甘引南路軍與京都軍合擊之
斬其酋晩頭良不次等降者千有人 退遁者皆溺于海
塞凰生實相子塞文
4월, 야인(野人)이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 변경(東邊)을 습격하여,
<총덕寵德>의 병력을 격파하고 들어와
명활성(明活城)을 포위하고 우리의 부녀자를 약탈하였다.
<효직孝直>이 실직(悉直)의 군사를 인솔하여 그 배후를 끊고,
<호연好淵>과 <다감多甘>이 남로군(南路軍)을 이끌고서
경도군(京都軍)과 합세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그 추장 <만두량晩頭良>과 <불차不次>등을 베어 죽이니,
항복한 자가 천여 명이었으며, 도망쳐 숨은 자들은 모두 바다에 빠졌다.
<새황塞凰>이 <실상實相>의 아들 <새문塞文>을 낳았다.
五月王幸晩頭良妻比斯只于宮 比斯只有絶色多甘獻之
王欲爲宮人群臣爭之不聽 命許軍士得野女者爲妾
晩頭良等爲其王所憎以伐我名之 而欲來留 故多引婦 而來其軍士掠我女而亂之多娠者
5월, 왕이 궁(宮)에서 <만두량晩頭良>의 처(妻) <비사지比斯只>에게 행차(幸)하였다.
<비사지比斯只>는 절색(絶色)을 지녀 <다감多甘>이 그를 헌상하였다.
왕이 궁인(宮人)으로 삼으려 하자 군신(群臣)들이 쟁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명을 내려 군사들이 야녀(野女)를 얻은 자는 첩(妾)으로 삼도록 허락했다.
<만두량晩頭良>등은 그 왕(王)의 미움을 사게 된 바로써
우리를 정벌한다고 일컫고는 와서 체류하려한 까닭에 부녀(婦)를 이끌고 온것이다.
그 군사들이 우리 여자들을 약취하여 난행하였기에 임신한 자가 많았다.
六月移野人降者西路分築各城
6월, 투항한 야인(野人)들을 서로(西路)로 옮겨 각기 나누어 성(城)을 쌓도록 했다.
七月霜雹殺穀
王幸湯明公主賜第蘿井 湯明乃聖明女也
蟾神生三光女阿利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왕이 <탕명湯明>공주(公主)에게 행차(幸)하고 나정(蘿井)에 저택을 하사했다.
<탕명湯明>은 곧 <성명聖明>의 딸이었다.
이때 <눌지> 45세, <성명> 35세이다.
<섬신蟾神>이 <삼광三光>의 딸 <아리阿利>를 낳았다.
九月王欲伐南海中野人以年荒止之
9월, 왕이 남해(南海) 안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이 해의 농작이 흉년이므로 그를 중지하였다.
十月月奈獻美女及白牛
王親祠聖母山 以山花爲祠主因宇花病也
賑京都飢民
伊湌河期卒年五十七以其子足期爲級湌
10월, 월내(月奈)가 미녀(美女)와 흰소(白牛)를 헌상하였다.
왕이 친히 성모산(聖母山)에 제사하였다.
<산화山花>를 사주(祠主)로 삼았는데 <우화宇花>가 병(病)에 걸림으로 인해서였다.
경도(京都)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이찬 <하기河期>가 졸(卒)하니 나이 57세였다.
그 아들 <족기足期>를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흘해(예생) - 하기(375-431)
눌지왕 16년(432) 수원(水猿)壬申432)
二月山凰生王女寵凰賜米
京外民多食松樹皮 王亦進松食而自責
2월, <산황山凰>이 왕녀 <총황寵凰>을 낳자 쌀을 하사했다.
경외(京外)의 백성들이 허다히 소나무 껍질을 먹자
왕 역시 소나무 음식을 들며 자책하였다.
四月發車生湯倍子發登
內留太太崩壽七十一分骨于奈勿實聖之兩陵以鳥生草生爲兩陵祭主
宇花卒雲花公主女也 善祭事神事王惜之
4월, <발차發車>가 <탕배湯陪>의 아들 <발등發登>을 낳았다.
<내류內留>태태궁이 붕(崩)하였다. 수(壽)가 71세였다.
미추(광명) - 보반(360-428)
내류(362-432)
* 보반의 자녀(7남6녀)
보반(내물) - 초리(379- )
도리(382- )
눌리(384- )
눌기(387-458) 신라 19대왕 재위 417-457
보해(390-441)
미해(393-433)
실상(395-461)
보반(심) - 호연(397-466)
보반(하기) - 상연(399- )
하연(401- )
성보(410- )
보반(실성) - 청연(404-467)
기보(407-479)
* 내류의 자녀(3남10녀)
내류(실성) - 사류(380- )
가류(382- )
초로(389?-405)
아로(391-455)
용명(403- )
신루(406- )
내류(내물) - 발유(385- )
수로(393- )
성명(397- )
호명(400- )
내류(하기) - 중노(409- )
방노(412- )
갈루(415- )
<내물奈勿>과 <실성實聖>의 두 릉에 뼈를 나누고,
<조생鳥生>과 <초생草生>을 두 릉(兩陵)의 제주(祭主)로 삼았다.
<조생鳥生>과 <초생草生>은 <아로>의 딸로 내류의 외손녀이다.
<우화宇花>가 졸(卒)하였다.
<운화雲花>공주(公主)의 딸이었는데, 제사(祭事)와 신사(神事)를 잘하였다.
왕이 그를 애석히 여겼다.
六月宝美生美海公女沙梁
6월, <보미宝美>가 <미해美海>공의 딸 <사량沙粱>을 낳았다.
八月穀大登中外洽然
紫我生五樹 翌日紅我生首里 皆美海公女也
産巫以爲不吉請棄其一 美海公曰 老者尙生何棄小兒乎 命笞産巫紫我諫之使巫逃之
8월, 곡식이 대풍이 들자 나라 안팎이 매우 흡족해 하였다.
<자아紫我>가 <오수五樹>를 낳고 다음날 <홍아紅我>가 <수리首里>를 낳았는데,
모두 <미해美海>공의 딸이었다.
산무(産巫)가 불길하다하며 그 하나를 버릴 것을 청하자
<미해>공이 말하기를
“늙은 것도 오히려 사는데 어찌 얼라를 버리는가?”
하고 산무(産巫)의 볼기를 치도록 명하자
<자아紫我>가 간언하여 산무로 하여금 도망치게 하였다.
十月寵德伐南海野人不克命好原代之
福壽生子畏 先是吹希烝福壽 逐湯倍 至是生子以爲神助行大祭于綾峴
福壽又命仁德通吹希弟乭希 吹希不敢妬曰 一根同枝水自上下
金官人歌之曰 綾峴之柳 何以裊裊 水自上下 不得不然
方石自麗還 以麗女獻之
10월, <총덕寵德>이 남해(南海)의 야인(野人)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자
<호원好原>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복수福壽>가 아들 <외畏>를 낳았다.
이에 앞서 <취희吹希>는 <복수福壽>를 증(烝)하고 <탕배湯陪>를 쫓아냈는데,
이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신(神)의 도움이라하며 능현(綾峴)에 대제(大祭)를 지냈다.
<복수福壽>가 다시 <인덕仁德>에게 명하여
<취희吹希>의 아우인 <돌희乭希>와 통하게 하니 <취희>는 감히 질투하지 못하고
“한 뿌리의 한 가지이니 물은 위로부터 아래로 흐른다.”라고 하였다.
금관(金官)사람들이 그를 노래하여
“능현(綾峴)의 버드나무는,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물이 위로부터 아래로, 어쩔 수 없이 그렇다네.”라고 하였다.
<방석方石>이 고구려로부터 돌아왔는데 고구려 여자를 데려 와 바쳤다.
十二月好原大破野人于買珍島
湯倍遣西巨知等來朝獻方物
靑淵使古自
12월, <호원好原>이 매진도(買珍島)에서 야인(野人)을 크게 쳐부수었다.
<탕배湯陪>가 <서거지西巨知>등을 보내어 내조(來朝)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청연靑淵>이 고자(古自)에 사신으로 갔다.
매진도(買珍島)는 지금의 거제도이다.
눌지왕 17년(433) 수계(水鷄)癸酉433)
二月蟾神爾光爲繼夫乃其庶弟也 道光之母首老者王之庶妹也內留太太之生也
蟾神之父舍訶娶之生道光至三光病沒故繼之
以王女黔牛妻翊宗 祠主茜宗
2월,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을 계부(繼夫)로 삼으니 곧 그 서제(庶弟)였다.
<도광道光>의 어머니인 <수로首老>는 왕의 서매(庶妹)였으니
<내류內留>태태궁의 소생이다.
<섬신蟾神>의 아버지 <사가舍訶>가 그를 아내로 맞아 <도광道光>을 낳았는데
<삼광三光>이 병으로 죽자 그가 뒤를 이은 것이다.
왕녀 <검우黔牛>를 <익종翊宗>의 처로 삼았다.
<천종茜宗>을 사주(祠主)로 삼았다.
三月蜃樓生王子末厚
3월, <신루蜃樓>가 왕자 <말후末厚>를 낳았다.
四月美海公卒年四十一 公典雅淸秀愛人下士 嘗以實聖之命使于野人十數年而始還
其王女宝美慕公生女羅海 而逃歸以爲堤上公養女使屬枕宮
公不敢自居獻于王及卜好 而 凡有喜憂同之
公深知野人舟楫之利 命繕我艦以敵之
野人多歸降皆屬公臣以爲用多有功績 至是病劇王執手下淚問其欲爲公曰
臣弟死爲國靈以保海上兄王勿悲
王乃以舒弗 邯贈之葬以太公禮 中外莫不哀惜
4월, <미해美海>공이 졸(卒)하니 나이 41세였다.
공(公)은 전아(典雅)하고 청수(淸秀)하였으며
사람들을 아끼고 선비(士)에게 몸을 굽힐 줄 알았다.
일찍이 <실성實聖>의 명으로 야인(野人)에게 사절로 가서는
십수년이 지나 비로소 돌아왔다.
그 왕녀 <보미宝美>가 공(公)을 사모하여 딸 <나해羅海>를 낳고서 도망쳐오자,
<제상堤上>공의 양녀로 삼아 침궁(枕宮)에 속하게 했는데,
공(公)은 감히 스스로 차지하지 않고 왕(王) 및 <복호卜好>에게 바쳤으니,
무릇 기쁨과 걱정이 있으면 그를 함께 하였다.
공(公)은 야인(野人)들의 배와 노(舟楫)의 이로움을 깊이 알아서
우리 함선(艦)을 보수함으로써 그를 대적케 하였다.
야인(野人)들이 허다히 투항해 왔는데
모두 공(公)의 신하에 소속시켜 쓸모 있게 함으로써 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니 왕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 하고 싶은 바를 묻자
공(公)이 가로되
“신제(臣弟)는 죽어서 나라를 위하는 영령으로 해상(海上)을 보호하리니
형왕(兄王)은 슬퍼하지 마소서.”하였다.
왕이 마침내 그를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하고 태공(太公)의 예로 장사하니
나라 안팎 사람들 모두가 애석(哀惜)해 마지않았다.
七月毗有遣其弟好嘉夫獻美女七人曰
小侄新立無以奉上國 謹以妹獻以備九宮則幸甚
願解宿感而互相持護以禦北虜如何
王欲伐野人故許其和
7월, <비유毗有>가 그 아우 <호가부好嘉夫>를 보내어 미녀 7인을 바치고 말하기를
“어린 조카(小侄)가 새로 서서 상국(上國)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삼가 누이를 바침으로써 구궁(九宮)을 채울 수 있다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원컨대 묵은 감정을 풀고 서로가 돕고 보호하여
북쪽 오랑캐를 막음이 어떠하신지요?”하였다.
왕은 야인(野人)을 정벌하고자 한 까닭에 그 화친을 허락하였다.
八月以宮人仙明妻孔嘉夫乃實聖女也
8월, 궁인(宮人) <선명仙明>을 <공가부孔嘉夫>의 처로 삼으니,
곧 <실성實聖>의 딸이었다.
九月穀大登
命扶余醫眞兒敎王子宝信
祭天地四岳
以巴胡爲太子妃行吉鮑祠
9월, 곡식이 대풍이었다.
부여(扶余)의 의사(醫) <진아眞兒>에게 명하여 왕자 <보신宝臣>을 가르치도록 했다.
천지(天地)와 사악(四岳)에 제사를 지냈다.
<파호巴胡>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때 <자비> 20세, <파호> 14세이다.
<파호>, <보보아>{습보}, <부리>, <백흔>은 420년생으로 동갑내기이다.
十月孔嘉夫與仙明歸
以登欣爲內宮舍人
命大造舟艦
以靑我妻山近王行吉鮑祠 盖從靑我求也
10월, <공가부孔嘉夫>가 <선명仙明>과 더불어 부여로 돌아갔다.
<등흔登欣>을 내궁사인(內宮舍人)으로 삼았다.
전함(舟艦)을 대거 제조하도록 명하였다.
<청아靑我(399-452)>를 <산근山近(405-475)>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대개 <청아靑我>의 요구를 따른 것이다.
눌지왕 18년(434) 목구(木狗)갑술
二月毗有又遣其叔伊辛來獻雪花馬二匹 請娶王女爲正妃
王以王女色不美憂之 少女周氏年十三而色美願自往 王大喜盛飾以送之
2월, <비유毗有>가 다시 그 숙부 <이신伊辛>을 보내어
설화마(雪花馬) 2마리를 바치고,
왕녀(王女)를 아내로 맞이하여 정비(正妃)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왕은 딸들의 안색이 아름답지 않으므로 그를 근심하였는데,
어린 딸 주씨(周氏)가 나이 13살이고 안색이 아름다우매 스스로 가기를 원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성대하게 장식하여 그를 보내었다.
눌지(용명) - 주씨(422- )
이 <주씨>가 백제 26대 문주왕 <모도(442-477)> 재위 475-476의 어머니이다.
紅我生王子馬宿 王親視洗兒
以羅海妻堤上公寵孫登欣行吉于豆乙宮 登欣者靑我之子也
其父曰順實郞乃許婁葛文王之後裔 其先從征召文爲其州干 世娶召文宗女妻之遂失骨品
順實郞慨然入京 初爲雲花公主家奴 與塞金布兒爲友 時稱三傑
雲花善歌 敎順實以秘旨 故骨女多就順實學歌得 通靑我生登欣
鵄述酷愛之請爲寵孫王許之 宝美亦愛登欣出入同車乃以其女妻之
<홍아紅我>가 왕자 <마숙馬宿>을 낳자 왕이 친히 와서 보고 아기를 씻겼다.
<나해羅海>를 <제상堤上>공의 총손(寵孫)인 <등흔登欣>의 처로 삼아
두을궁(豆乙宮)에서 길례를 올렸다.
순실(청아) - 등흔(416-483)
미해(보미) - 나해(419- )
<등흔登欣>은 <청아靑我>의 아들이다.
이 <등흔>이 23대 법흥왕 <모진(480-540)> 재위 514-539의 어머니인
<연제(463-525)>의 아버지이다.
그 아버지는 <순실順實>랑이고 <허루許婁>갈문왕(葛文王)의 후예이다.
허루(80-155)(달문 97-171) - 허을(131-176)(반화) - 산을(170-245)(족화) -
우을(묘연) - 연을(?) - 윤을(수단) - 수을(용단) - 용을(310?- )(분아) -
장대(330?- )(접황) - 배실(350?- )(난씨=백양선자) - 순실(396-448)
그 선조는 소문(召文)에 출정해서 그 주칸(州干)이 되어
대대로 소문(召文)의 종녀(宗女)를 취하여 처(妻)로 삼았는데
마침내는 골품(骨品)을 잃게 되었다.
<순실順實>랑이 우연히 경도에 들어와
처음에 <운화雲花>공주(公主)의 가노(家奴)가 되어
<새금塞金> <포아布兒>와 더불어 벗(友)이 되니 당시에 삼걸(三傑)이라 칭해졌다.
<운화雲花>공주는 노래를 잘하였는데 신묘한 멋으로 <순실順實>을 가르친 까닭에
골녀(骨女)들이 많이 <순실順實>에게서 노래를 배웠다.
<청아靑我>와 통할 수 있게 되어 <등흔登欣>을 낳았는데,
<치술鵄述>이 그를 몹시도 아껴 총손(寵孫)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왕이 그를 허락하였다.
<보미宝美> 또한 <등흔登欣>을 아껴서 한 수레를 타고 출입하였는데
마침내 그 딸로써 그의 처를 삼았다.
三月實相等進攻野人于西海大破之
以毗有妹蘇時昧爲宮人賜骨品以其受幸而娠故也
3월, <실상實相>등이 서해(西海)에서 야인(野人)들에게 나아가 공격(進攻)하여
그를 대파(大破)하였다.
<비유毗有>의 누이(妹) <소시매蘇時昧>를 궁인(宮人)으로 삼고 골품을 하사했다.
그 행(幸)을 받고서 임신한 까닭이었다.
五月月奈君石風浮海遇風而漂不知去處 實相請立吳人爲其君許之
先是吳人母吳女立國於西海石人征服之以爲妻生吳人
未幾石人之長子石風奪吳女而逐石人于扶余吳女又生石風子禹風
至是其臣方方通吳女而欲立禹風吳女欲立吳人 實相以吳人有功于我立之
5월, 월내군(月奈君) <석풍石風>이
바다에서 배를 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간곳을 몰랐다.
<실상實相>이 <오인吳人>을 그 임금(君)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그를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오인吳人>의 어머니 <오녀吳女>는 서해(西海)에서 입국(立國)하였는데,
<석인石人>이 그를 정복하고 처(妻)로 삼음으로써 <오인吳人>을 낳았다.
얼마 안 되어 장자 <석풍石風>이 <오녀吳女>를 빼앗고는
<석인石人>을 부여(扶余)로 내쫓았으며,
<오녀吳女>는 다시 <석풍石風>의 아들 <우풍禹風>을 낳았다.
이에 이르러 그 신하 <방방方方>이 <오녀吳女>와 상통하고는
<우풍禹風>을 세우고자 했는데, <오녀吳女>는 <오인吳人>을 세우려고 하였다.
<실상實相>은 <오인吳人>이 우리에게 공(功)이 있음으로 해서 그를 세웠다.
九月孔嘉夫與仙明來朝獻白鷹二頭 蘇時昧女生故也
兄山人多入虎村州干請伐之不許
9월, <공가부孔嘉夫>가 <선명仙明>과 더불어 내조(來朝)하여
흰매(白鷹) 두 마리를 바쳤다.
<소시매蘇時昧>의 딸이 태어난 까닭이었다.
형산(兄山)사람들이 많이 호촌(虎村)으로 들어가자
주칸(州干)이 그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十月孔嘉夫仙明歸扶余 賜良金明珠以褒毗有
10월, <공가부孔嘉夫>와 <선명仙明>이 부여(扶余)로 돌아갔다.
양금(良金)과 명주(明珠)로써 <비유毗有>를 포상(襃)하였다.
十一月宝美生王女牟梁
命立眞兒堂以備藥石
塞凰生太子子世德
以王子山同爲靑骨阿湌
冬暖如春
仁德生乭希子突知
11월, <보미宝美>가 왕녀 <모량牟粱>을 낳았다.
눌지(보미) - 모량(434-503)
이 <모량>이 23대 법흥왕 <모진(480-540)> 재위 514-539의 어머니인
<연제(463-525)>의 어머니이다.
진아당(眞兒堂)을 세우도록 명함으로써 약석(藥石)을 구비하도록 하였다.
<새황塞凰>이 태자의 아들 <세덕世德>을 낳았다.
왕자(王子) <산동山同>을 청골아찬(靑骨阿湌)으로 삼았다.
겨울에 따듯하기가 봄과 같았다.
<인덕仁德>이 <돌희乭希>의 아들 <돌지突知>를 낳았다.
눌지왕 19년(435) 목시(木豕)
正月大風拔木
以骨女妻眞兒
王與諸姬遊海宮
靑我生山近女山艾
比斯只生王女天生
정월, 대풍(大風)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골녀(骨女)를 <진아眞兒>의 처(妻)로 삼았다.
왕이 여러 희첩(姬)들과 더불어 해궁(海宮)에서 노닐었다.
<청아靑我>가 <산근山近>의 딸 <산애山艾>를 낳았다.
<비사지比斯只>가 왕녀 <천생天生>을 낳았다.
二月修祖宗陵門
以登欣爲級湌
湯倍以發登爲嗣 時發車生女唐氏故也
2월, 조종(祖宗)들의 능문(陵門)을 수리하였다.
<등흔登欣>을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탕배湯陪>가 <발등發登>을 후사(嗣)로 삼았다.
당시 <발차發車>가 딸 <당씨唐氏>를 낳은 까닭이다.
四月祀始祖廟
蟾神生道光子孝國
巴胡與太子入海宮
山凰生女燕凰
後宮杜氏難産而薨帝惜之厚葬之
福壽請以吹希爲繼夫 時福壽又生吹希女彘姬 色尙壯餘故吹希愛之如妻故也
4월,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의 아들 <효국孝國>을 낳았다.
<파호巴胡>가 태자와 더불어 해궁(海宮)에 들어갔다.
<산황山凰>이 딸 <연황燕凰>을 낳았다.
후궁(後宮) <두씨杜氏>가 난산(難産)으로 훙(薨)하였다.
왕이 그를 애석히 여겨 후하게 장사지냈다.
<복수福壽>가 <취희吹希>를 계부(繼夫)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때에 <복수福壽>는 다시 <취희吹希>의 딸 <체희彘姬>를 낳았는데
색(色)이 오히려 왕성하고 남으므로 <취희>가 그를 처(妻)처럼 사랑한 까닭이었다.
七月末曷請婚以采女送之
7월, 말갈(末曷)이 혼인을 청하자 채녀(采女)를 보냈다.
九月吹希以福壽爲正妻行吉于綾峴大宴群臣
9월, <취희吹希>가 <복수福壽>를 정처(正妻)로 삼아
능현(綾峴)에서 길례를 행하고, 군신(群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十月王親祭穀神
以王子僧爲城官阿湌
末曷獻弓手及大弓
10월, 왕(王)이 친히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자 <승僧>을 성관아찬(城官阿湌)으로 삼았다.
말갈(末曷)이 궁수(弓手)와 대궁(大弓)을 바쳤다.
눌지왕 20년(436) 화서(火鼠)병자
正月骨女覃氏生眞兒子通兒
정월, 골녀(骨女) <담씨覃氏>가 <진아眞兒>의 아들 <통아通兒>를 낳았다.
二月發車遣古厚等獻吳國宝貨
2월, <발차發車>가 <고후古厚>등을 보내어 오국(吳國)의 보화(宝貨)를 바쳤다.
三月紅我生宝宝兒子乃宿 時宝宝兒學歌于紅我至夜深不歸仍與之通而生
遣方石于扶余救藥毗有以女妻之
3월, <홍아紅我>가 <보보아宝宝兒>의 아들 <내숙乃宿>을 낳았다.
당시 <보보아>는 <홍아>에게 노래를 배우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져도 돌아가지 않자 그대로 그와 더불어 통하고서 낳은 것이다.
<방석方石>을 부여(扶余)에 보내어 약(藥)을 구하자
<비유毗有>가 딸을 그의 처(妻)로 삼았다.
四月雹命放寃囚禁 骨人仙徒奪民愛妻許民相好者合
4월에 우박이 내리자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토록 명했다.
골인(骨人)과 선도(仙徒)들이 백성의 애처(愛妻)를 뺏는 것을 금하고,
백성이 서로 좋아하는 자와 합(合)하는 것을 허락했다.
五日巴胡生太孫毗處賜米視兒
蜃樓生王女蜃海
5일 <파호(巴胡)가 태손(太孫) <비처毗處>를 낳자 쌀을 하사하고 아기를 보았다.
<신루蜃樓>가 왕녀 <신해蜃海>를 낳았다.
자비(파호) - 비처(436-500) 21대 소지왕 재위 479-499
五月王勸稼南郊
毗有妻周氏私通其臣事覺而歸
以鳥生妻宝宝兒行吉鮑祠
5월, 왕이 남교(南郊)에서 농사를 권장하였다.
<비유毗有>의 처(妻) <주씨周氏>가
그 신하와 사통(私通)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돌아왔다.
<조생鳥生>을 <보보아宝宝兒>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때 <조생>19세, <보보아> 17세이다.
六月好原破野人鎭島虜其骨女獻之
王大喜乃以皇我妻之行吉于鮑祠 是日分賜野女于諸將爲妾
山同紅骨大沛靑骨
6월, <호원好原>이 진도(鎭島)에서 야인(野人)을 쳐부수고
그 골녀(骨女)들을 사로잡아 헌상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이에 <황아皇我>를 그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날 야녀(野女)들을 제장(諸將)들에게 나눠주어 첩(妾)으로 삼게 했다.
<산동山同>을 홍골(紅骨)아찬으로 삼고, <대패大沛>를 청골(靑骨)아찬으로 삼았다.
十月宝美生女美梁乃登欣女也 宝美初以貞守欲拒上供 美海公怒乃上供于王及卜好公
而生子不復自貞 密引登欣通于帷車中 王亦知之不禁 至是遂生女
以宝宝兒爲級湌賜名習宝
王入海宮
以王子富理爲神官阿湌
10월, <보미宝美>가 딸 <미량美粱>을 낳으니 곧 <등흔登欣>의 딸이었다.
<보미>는 애초에 정절을 지킴으로써 색공을 바치기를 거부했었다.
<미해美海>공이 노하자 마침내 왕(王)및 <복호卜好>공에게 바쳐 자식을 낳고는,
다시는 스스로 정절을 지키지 않았으니,
몰래 <등흔登欣>을 이끌어 유거(帷車)안에서 밀통하였다.
왕 또한 그것을 알았으나 금(禁)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마침내 딸을 낳은 것이다.
<보보아宝宝兒>를 급찬(級湌)으로 삼고 이름을 내려 <습보習宝>라 했다.
왕이 해궁(海宮)으로 들어갔다.
왕자 <부리富理>를 신관아찬(神官阿湌)으로 삼았다.
눌지왕 21년(437) 적우(赤牛)丁丑
正月 末曷獻 白熊雌雄
福壽與吹希 入朝 謁王 于海宮
정월, 말갈이 백곰 암수 한쌍을 바쳤다.
<복수福壽>가 <취희吹希>와 함께 입조하여 해궁에서 왕을 알현하였다.
二月 吳人獻方物 請得骨女爲妻 以宮人遠明妻之
古自軍主靑淵通發車 發車遣使 請以靑淵爲夫 不許
2월, <오인吳人>이 방물을 바치고 골녀를 얻어 처로 삼기를 청하자
궁인 <원명遠明>을 그 처로 하였다.
고자군주 <청연靑淵>이 <발차發車>와 통정하였다.
<발차發車>는 사신을 보내어 <청연靑淵>을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불허하였다.
六月 湯倍出奔泗勿 泗女留之 曰 “弊國雖小 足以奉郎君 願與之配” 湯倍乃爲泗君
毗有請還周氏 不許
6월, <탕배湯倍>가 사물(泗勿)로 달아났다.
사물(泗勿)의 女主가 말하기를
"패국은 너무 작아 군(君)으로 받들기도 부족하니 함께 지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탕배湯倍>가 마침내 사물군(泗勿君)이 되었다.
<비유毗有>가 <周氏>를 돌아오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불허하였다.
八月 穀大登
塞凰生 實相女塞京
命末曷弓手三十人 以爲弓師 以敎軍士
福壽吹希 請祭聖母山 許之
以皇女珠氏妻毗有
8월, 곡식이 크게 여물었다.
<새황塞凰>이 <실상實相>의 딸 <새경塞京>을 낳았다.
말갈 궁수 30인을 궁사(弓師)로 삼고 군사(軍士)를 가르치도록 명하였다.
<복수福壽>와 <취희吹希>가 성모산(聖母山)을 둘러보기를 원해 하락 하였다.
황녀 <珠氏>를 <비유毗有>의 처로 하였다.
十月 鳥生生 習宝子智度路
王幸福壽 于海宮
黃我生 好原子伐智
10월. <조생鳥生>이 <습보習宝>의 아들 <지도로智度路>{지증왕}를 낳았다.
습보(조생) - 지도로(437-514) 22대 지증왕 재위 500-513
왕이 해궁에서 <복수福壽 >를 행(幸)하였다.
<황아黃我>가 <호원 好原>의 아들 <벌지伐智>를 낳았다.
눌지왕 22년(438) 황호(黃虎) 戊寅
正月 天柱寺成
靑我生 山近子山兼
정월, 천주사(天柱寺)가 완성되었다.
<청아靑我>가 <산근山近>의 아들 <산겸山兼>을 낳았다.
三月 福壽吹希 歸金官
以祐仁爲靑骨阿飡
3월, <복수福壽>와 <취희吹希>가 금관(金官)으로 돌아갔다.
<우인祐仁>을 청골(靑骨)아찬으로 하였다.
四月 牛頭群山 水暴至 漂流五十余家
京都大風雨雹 王祈于豆乙宮
命月奈人 敎牛車之法
發車生 靑淵女發成
山同爲紫骨 大沛爲紅骨
4월, 우두산(牛頭山)에 물이 넘쳐 50여家가 떠내려 갔다.
경도(京都)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려 왕이 두을궁에서 기도를 올렸다.
월내(月奈) 사람에게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라고 명하였다.
<발차發車>가 <청연靑淵>의 딸 <발성發成>을 낳았다.
<산동山同>을 자골(紫骨)로 <대패大沛>를 홍골(紅骨)로 하였다.
五月 古自以靑淵爲君
以登欣爲沙飡
5월, 고자(古自)가 <청연靑淵>을 군(君)으로 삼았다.
<등흔登欣>을 사찬(沙飡)으로 삼았다.
六月 好原伐阿羅 虜多鷄路 獻之
先是阿羅女君八屇 逐其夫草 迎野人多鷄路爲夫 不用我命 至是命复 以草爲其夫
6월, <호원好原>이 아라(阿羅)를 쳐서 <다계로多鷄路>를 잡아 바쳤다.
이에 앞서 아라(阿羅) 여군(女君) <팔전八屇>이 그 남편 <초草>를 쫓아내고
야인(野人) <다계로多鷄路>를 남편으로 맞아 들여 우리의 명을 듣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명을 받아들여 <초草>를 그 남편으로 하였다.
八月 宝美生 子叔叔兒 王賜米視兒 乃登欣子也
時登欣在宝美宮 得寵于王 其車馬 疑於王子 人多非之 叔叔兒者 乃叔欣也
以王女宝沈 妻大沛 命太子 主吉 鮑祠
8월, <보미宝美>가 아들 <숙숙아叔叔兒>를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아이를 보더나 <등흔登欣>의 아들이라 하였다.
<등흔登欣>이 <보미宝美>궁에 있을 때 왕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그 거마를 왕자의 것으로 의심하여
<숙숙아叔叔兒>는 <숙흔叔欣>의 아들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왕의 딸 <보심宝沈>을 <대패大沛>의 처로 하여
태자에게 명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九月 好原卒 于阿羅 好原者 光明太后私子好童之子也
勇而足智 自幼從王多功 至是卒 加爵匝判 年四十三
以皇我妻寵德 以皇女周氏 妻舍人廉興 盖私通也
月奈獻眞珠花貝
9월, <호원好原>이 아라(阿羅)에서 졸(卒)하였다.
<호원好原>은 <광명光明>태후의 사자(私子) <호동好童>의 아들이다.
용감하고 지헤가 많아 어릴때 부터 왕을 따라 많은 공을 남겼다.
이에 죽어 잡판(匝判)의 작위를 더하니 43세였다.
<황아皇我>를 <총덕寵德>의 처로 하고
황녀 <주씨周氏>를 사인 <염흥廉興>의 처로 하였다.
<주씨周氏>가 <염흥廉興>과 사통하였기 때문이다.
월내(月奈)가 진주와 화패(花貝)를 바쳤다.
十月 韓飡貝昕卒 菊思與同權相通
10월, 한찬(韓飡) <패흔貝昕>이 졸(卒)하였다.
<국사菊思>와 <동권同權>이 상통(相通)하였다.
눌지왕 23년(439) 황토(黃兎)己卯
正月 紅我生 子車宿
以貝昕妻菊思 妻海飡同權
大雪 五日
覃氏生 眞兒女團氏
정월, <홍아 紅我>가 아들 <거숙車宿>을 낳았다.
<패흔貝昕>의 처 <국사菊思>를 해찬(海飡)<동권同權>의 처로 하였다.
대설(大雪)이 5일동안 내렸다.
<담씨覃氏>가 <진아眞兒>의 딸<단씨團氏>를 낳았다.
三月 巴胡生 王女守己
以王女草生 妻祐仁 行吉 鮑祠
毗有送眞經博士五人 入朝
周氏生 子周興 賜米衣
大修海宮 聖母祠主山花薨 以靑我爲祠主
3월, <파호巴胡>가 왕의 딸 <수기守己>를 낳았다.
왕의 딸 <초생草生>을 <우인祐仁>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비유毗有>가 진경(眞經) 박사 5인을 보내 입조하였다.
<주씨周氏>가 아들 <주흥周興>을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해궁을 크게 고치고 성모사주(聖母祠主) <산화山花>가 죽어
<청아靑我>를 사주(祠主)로 하였다.
눌지왕 24년(440) 금용(金龍) 庚辰
四月 野人襲古自 靑淵敗歸
紫我生 期宝女思君
發車以野人蘇可同爲夫 阿羅亦以野人尾戊生爲夫
4월, 야인(野人)이 고자(古自)를 치자 <청연靑淵>이 패하여 돌아갔다.
<자아紫我>가 <기보期宝>의 딸 <사군思君>을 낳았다.
<발차發車>가 야인 <소가동蘇可同>을 남편으로 삼으니
아라(阿羅) 역시 야인<미무생尾戊生>을 남편으로 삼았다.
六月 野人大擧侵東邊 多甘等 擊破之
皇我生 寵德子德知
鳥生生 女齒君 期宝女也
6월, 야인이 대거 동변을 침략해 오니 <다감多甘>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황아皇我>가 <총덕寵德>의 아들 <덕지德知>를 낳았다.
<조생鳥生>이 <기보期宝>의 딸 <치군女齒君>을 낳았다.
宝美生 女好梁 妊欣爲一吉飡
阿羅反與野人 伐月奈 吳人降 于野人
9월, <보미宝美>가 딸 <호량好梁>을 낳고 <임흔妊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아라(阿羅)가 野人과 함께 반란하여 월내(月奈)를 치니
<오인吳人>이 야인에게 항복하였다.
눌지왕 25년(441) 백사(白蛇) 辛巳
二月 泗勿君湯倍 獻長尾白雉 王嘉其忠 賜米穀 而褒之
2월, 사물군(泗勿君) <탕배湯倍>가 꼬리긴 흰 꿩을 바치니
왕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포상하여 쌀을 하사 하였다.
三月 好淵等 大破野人 于古自 蘇可同請爲藩臣
心凰生 登欣女粲凰
扶余医眞兒卒 以兵兒代其職
王弟卜好公薨 年五十二 葬以王禮 公沈敦 有大志 在麗地 悉其善政 而來用 又容降麗
築城各地 連結末曷扶余 大有功績 以致中興 王哀痛不己 立宝海廟 而祀之
王弟實相公 摠執國政 以山同爲馬政大夫
3월, <호연好淵>등이 고자(古自)에서 야인을 대파하니
<소가동蘇可同>이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심황心凰>이 <등흔登欣>의 딸 <찬황粲凰>을 낳았다.
부여 의사 <진아>가 죽어 <병아>가 그 직을 대신하였다.
왕제 <복호弟卜>공이 죽으니 52세였다.
왕례(王禮)로서 장례를 하였다.
공은 마음이 깊고 정이 두터우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에 있을 때는 선정(善政)을 다하여 쓰임이 있었고 용모는 겸손하고 고왔다.
각지에 성을 축조하여 말갈과 백제를 연결하는데 공적이 컸으며 중흥을 이루었다.
왕이 그 공적을 알아주지 못함을 애통하게 여겨 보해묘(宝海廟)를 세워 제사 지냈다.
왕제 <실상實相>공이 국정을 맡아서 집정하였다.
<산동山同>을 마정대부(馬政大夫)로 삼았다.
五月 以湯倍复爲發車夫 時發車娠蘇可同子 請待産 而行吉 湯倍不許
送宝信思德 于扶余 修醫藥卜筮
5월, <탕배湯倍>를 또 <발차發車>의 남편으로 하였다.
이때 <발차發車>는 <소가동蘇可同>의 아들을 임신하여 출산을 대기하여
길례를 행하고자 하니 <탕배湯倍>가 허락하지 않았다.
<보신宝信>과 <사덕思德>을 백제에 보내어 의약(醫藥)과 복서(卜筮)를 받아 왔다.
七月 月奈逐野人
易人靑骨 祐仁紅骨 大沛紫骨
穀大登 命增倉 于江上
宝沈生 女宝沛
7월, 월내(月奈)가 야인을 쫓아내었다.
<역인易人>을 청골(靑骨)로 <우인祐仁>을 홍골(紅骨)로
<대패大沛>를 자골(紫骨)로 하였다.
곡식이 크게 여물었다.
강상(江上)에 창고를 늘이라고 명 하였다.
<보심宝沈>이 딸 <보패宝沛>를 낳았다.
八月 福壽大宴 綾峴
冬無雪
月仙陰凰卒 年五十六 以塞凰爲月仙 行明 日宅
8월, <복수福壽>가 릉현(綾峴)에서 쿤 잔차를 열었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다.
월선(月仙) <음황陰凰>이 56세에 졸하였다.
<새황塞凰>을 일택(日宅)에서 행명(行明)하고 월선(月仙)으로 삼았다.
눌지왕 26년(442) 수마(水馬) 壬午
寵德等 深入野地 虜其王后王子 而還
王親祭 聖母祠
宝信自扶余還 命立藥房 敎骨人
<총덕寵德> 등이 야인의 땅에 깊숙히 들어가 그 왕과 왕후, 왕자를 잡아 돌아 왔다.
왕이 친히 성모사(聖母祠)에 제사하였다.
<보신宝信>이 백제로부터 돌아오니 약방(藥房)을 세우고
골인(骨人)을 가르치라고 명 하였다.
二月 野人吉思登 請和 留之不送
蟾神生 道光子誠國
周氏生 毗有子文周 毗有獻明珠良馬
2월, <길사吉思> 등이 강화를 청하였으나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섬신 蟾神>이 <도광道光>의 아들 <성국誠國>을 낳았다.
<주씨周氏>가 <비유毗有>의 아들 <문주文周>를 낳았다.
<비유毗有>가 명주(明珠)와 양마(良馬)를 바쳤다.
四月 末曷使居靑等 獻良馬 來言 巨連無道
4월, 말갈이 <거청居靑> 등 사신을 보내어 양마를 바치며
<거련巨連>이 무도(無道)하다는 말을 전했다.
五月 尾戊生請爲藩臣 許之
5월 <미무생 尾戊生>이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하여 허락 하였다.
九月 大宴群臣 于南桃
宝美生 女成梁
十月 巴胡生 王女尹己
9월, 남도(南桃)에서 여러신하와 함께 큰 잔치를 열엇다.
<보미 宝美>가 딸 <성량成梁>을 낳았다.
10월, <파호 巴胡>가 왕의 딸 <윤기尹己>를 낳았다.
눌지왕 27년(443)흑양(黑羊)癸未,
毗有遣好嘉夫 入朝 告仙明生 毗有子肺 獻宝玉一雙
<비유毗有>가 <호가부好嘉夫>를 보내어 입조하여 <선명仙明>이
<비유毗有>의 아들 <패肺>를 낳았다고 고하여 보옥(宝玉) 한쌍을 보냈다.
三月 王問眞經 于中外
鳥生生 女田君
好生靑骨 易人紅骨 祐仁紫骨
命修宮室 以登欣爲匝阿飡
3월, 왕이 나라 안팎에 진경(眞經)을 물었다.
<조생鳥生>이 딸 <전군田君>을 낳았다.
<호생 好生>을 청골(靑骨) 로 <역인易人>을 홍골(紅骨)로
<우인祐仁>을 자골(紫骨)로 하였다.
궁실을 보수하라고 명하고 <등흔登欣>을 잡판 아찬으로 삼았다.
四月 皇我生 宝信子宝器
阿羅入貢
置藥房十五 于國中 置主
放吉思等 歸國
4월, <황아皇我>가 <보신宝信>의 아들 <보기宝器>를 낳았다.
아라 (阿羅)가 공물을 바쳤다.
나라안에 약방 15개소를 설치하고 주(主)를 두었다.
<길사吉思> 등을 방면하여 그 나라에 돌아가게 하였다.
七月 心凰生 子比智 比太子也
蘇相儀生 王女秋氏 蘇乃野后也 王別立其宮 而寵幸之 群臣爭之 不聽
福壽會湯倍 于境上 設宴 行和
7월, <심황心凰>이 아들 <비지比智>를 낳았는데 <비比>태자이다.
<소상의 蘇相儀>가 왕의 딸 <추씨秋氏>를 낳았는데 <소내蘇乃>야후(野后)이다.
왕이 별궁을 세워 그녀를 총행(寵幸)하니 군신들이 간쟁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복수福壽>가 <탕배湯倍>를 국경에서 만나 잔치를 열고 서로 화목하였다.
눌지왕 28년(444) 목원(木猿)甲申,
正月 蘇時昩生 子武公
정월, <소시매蘇時昩>가 아들 <무공武公>을 낳았다.
四月 野人大擧入寇 蘇可同等 內應之 寵德兵敗 野人入 圍金城 王命多甘等 敵之
烏士只生 子烏世 通世兵官出也
發車生 湯倍子發己
4월, 야인이 대거 들어와 노략질하니 <소가동蘇可同> 등이 이에 내응하였다.
<총덕寵德>의 군사가 패하여 야인이 금성 주위에 몰려오니
왕이 <다감多甘> 등에게 그를 물리치라고 명 하였다.
<오사지烏士只>가 아들 <오세烏世>를 낳았는데 <통세通世>병관의 아들이다.
<발차發車>가 <탕배湯倍>의 아들 <발기發己>를 낳았다.
六月 旱
以眞兒堂爲大藥房 以眞兒寡妻覃氏爲房主
6월, 가물었다.
진아당(眞兒堂)을 대약방(大藥房)으로 하고
<진아眞兒>의 작은 처 <담씨覃氏>를 약방의 주인으로 하였다.
十月 野人粮乏 而退 王追 及獨山之東 敵圍之數重 忽昏霧 不辨咫尺 敵畏而遁去
10월, 야인이 식량이 떨어져 퇴각하자 왕이 독산의 동쪽으로 추격하였다.
적이 왕을 수겹으로 포위하자 홀연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지척에 있는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눌지왕 29년(445) 목계(木鷄)乙酉
二月 宮人攝凰生 王女懶凰
2월, 궁인 <섭황攝凰>이 왕의 딸 <라황懶凰>을 낳았다.
三月 始置左右將軍
3월, 좌우장군을 처음으로 두었다.
五月 福壽卒 年五十五 福壽終始事我 能盡其誠 王命馬美王吊之
以王女芉凰 妻王子山同 王與攝凰 爲吉 鮑祠
吹希請娶王女 以順明妻之
5월, <복수福壽>가 55세에 죽었다.
<복수福壽>는 시종 왕을 섬김에 성의를 다하였으니
<마미馬美>에게 왕의 조의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왕의 딸 <간황芉凰>을 왕자 <산동山同>의 처로 하여
왕과 <섭황攝凰>이 포사에서 길례를 주관하엿다.
<취희吹希>가 왕의 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니 <순명順明>을 그의 처로 하였다.
이때 금관가야왕 <취희> 38세, <순명>공주 22세이다.
七月 遣期宝 于句麗 以采女三人 加耶女二人 月奈女一人 野女一人 遣之
巨連大喜 答以驢馬三百匹
命修舟楫
以登欣爲阿飡
巴胡生 王子毗己
7월, <기보期宝>를 채녀 3인, 가야녀 2인, 월내녀 1인, 야녀 1인을 데리고
고구려에 보내니 <거련巨連>이 크게 좋아하며 보답으로 당나귀 3백 마리을 보냈다.
배와 노를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등흔登欣>을 아찬으로 하였다.
<파호巴胡>가 왕의 아들 <비기毗己>를 낳았다.
八月 大造弓矢 于西庫
心凰生 登欣子智登
吳人卒 其嗣子元 乃遠明之生 而尙幼 庶子海 及其弟禹風 爭立
遠明以海溫良 而愛 元請爲繼父 許之 禹風不悅
8월, 서쪽 창고에서 활과 화살촉을 만들었다.
<심황心凰>이 <등흔登欣>의 아들 <지등智登>을 낳았다.
<오인吳人>이 죽었다.
그 후계자 <원元>은 <원명遠明>이 낳았는데
아직 어려서 서자 <해海>가 동생 <우풍禹風>을 세웠다.
<원명遠明>이 <해온海溫>랑에게 사랑을 받아
<원元>이 아버지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허락하였다,
<우풍禹風>은 기뻐하지 않았다.
十月 宝美生 子宝根
10월, <보미宝美>가 아들 <보근宝根>을 낳았다.
* 보미(404-485)의 자녀(5남8녀)
보미(미해) - 나해(419- )
보신(421-485)
보량(429-485)
사량(432-493)
호량(440- )
후량(442?- )
보근(445-522)
보미(보해) - 장이(425-490)
보미(눌지) - 보심(423- )
모량(434-503)
보미(등흔) - 숙흔(435?-502)
미량(436- )
숙숙아(438- )
눌지왕 30년(446) 화구(火狗)丙戌
正月 鳥生生 智弗路 太子子也
王親祀天地 于西郊
命馬官 殖驢馬牛交種
정월, <조생鳥生>이 <지불로智弗路>를 낳았는데 태자의 아들이다.
왕이 친히 서교(西郊)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마관(馬官)에게 당나귀와 소를 교종(交種)하여 번식시키라고 명 하였다.
三月 巡行北路諸州
末曷獻赤毛熊
銍知入朝
3월, 북로의 여러 주(州)를 순행(巡行)하였다.
말갈이 붉은 꼬리를 가진 곰을 바쳤다.
<질지銍知(428-492) 금관가야 8대왕 재위 451-491>가 입조하였다
五月 大魚亂北海 命備邊
毗有獻 花布玉毛席
以美海公女通里 妻吹希子銍知 行吉 于鮑祠
5월, 큰 물고기가 북해에서 날뛰어 변방을 방비하라고 명 하였다.
<비유毗有>가 화포(花布)와 옥모(玉毛)로 만든 방석을 보냈다.
<미해美海>공의 딸 <통리通里>를 <취희吹希>의 아들 <질지銍知>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길례를 치루었다.
이때 <질지> 19세, <통리> 18세이다.
七月 得神鹿 于靑杞 紫角而白身
命小民無妻者 許娶扶余末曷
7월, 청기(靑杞)에서 신록(神鹿)을 얻었는데 흰몸에 자색 뿔이 있었다.
백성 중에 처가 없는 자는 백제와 말갈에 장가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눌지왕 31년(447) 화시(火豕)丁亥
正月 蟾神獻 眞經及神床 請會王 于境上
정월, <섬신蟾神>이 진경(眞經)과 신상(神床)을 바치며
왕을 국경에서 만나기를 청하였다.
二月 遠明生 海子世萬
2월, <원명 遠明>이 <해海>의 아들 <세만世萬>을 낳았다.
三月 王品馬 于聖母山
以子可爲西高村主 子可者 野王子也 降我而忠 故命率諸降衆 以居其地
銍知通里告歸 賜靑騾朱鞍
3월, 왕이 성모산에서 말을 품평하였다.
<자가子可>를 서고(西高) 촌주로하였다.
<자가子可>는 야왕(野王)의 아들이다.
우리에게 항복하여 충성하므로 항복한 무리들을 통솔하여 그 땅에서 살게 하였다.
<질지 銍知>와 <통리通里>가 귀국을 고하므로 붉은 안장의 푸른 노새를 하사 하였다.
五月 神鹿生二子 于鹿苑
扶余流民 多入西路 取其婦女爲邊戍之婢 還其壯丁
王會蟾神 于境上 蟾神體鴻 面有黑微 呼王以大叔 王呼以妹公
王先往蟾神帷宮 同御加耶食 蟾神爲之進食
與王同車 還我帷宮 行盟酒約 世世相好
請歸 王留之 與王同宿五夜 而去 兩民爭就山呼
5월, 신록이 록원(鹿苑)에서 새끼 2마리를 낳았다.
백제의 많은 유민이 서로(西路)로 들어와 그 부녀를 변방 수비군의 노비로 취하니
그 장정에게 돌아가라고 하였다.
왕이 국경에서 <섬신蟾神>을 만났다.
<섬신蟾神>은 체구가 크고 얼굴은 검푸스럼한데
왕을 대숙(大叔)이라고 부르니 왕은 그녀를 매공(妹公)이라고 불렀다.
왕이 먼저 섬신의 유궁(帷宮){휘장을 친 가마}으로 나아가
가야의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고자하니 섬신이 음식을 가까이 하였다.
왕과 같이 가마를 타고 우리의 유궁(帷宮)으로 돌아와서
술을 마시며 세세토록 서로 좋게 지내기를 맹약 하였다.
돌아가기를 청하니 왕은 만류하며, 5일밤을 왕과 함께 동숙하고 돌아가니
양쪽 백성들이 서로 경쟁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때 눌지왕 61세, 대가야 섬신여왕 35세이다.
六月 皇我生 子宝德 賜米 乃王子也
助里生 白欣子 剡臣
6월, <황아皇我>가 왕의 아들 <보덕宝德>을 낳으니 쌀을 하사하였다.
<조리助里>가 <백흔 白欣>의 아들 <염신剡臣>을 낳았다.
<조리>와 <백흔>은 어머니가 <청아>로 동모이부 형제이다.
이 <염신>이 신라 최초의 화랑이며 1대 풍월주인 <위화>의 아버지이고
<위화>는 <조리>가 <순실>의 딸이므로 <순실>의 증손자이다.
八月 蟾神遣使 謝王高恩 獻其玉帶 王答以月奈宝明珠紫金眞帛袴子
思德 自扶余還 以爲御医
8월, <섬신蟾神>이 사신을 파견하여 왕의 높은 은혜에 감사하며 옥대(玉帶)를 보냈다.
왕이 월내의 보명주(宝明珠)와 적동과 비단바지로 보답하였다.
<사덕思德>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어의(御医)로 삼았다.
九月 祭穀神
9월, 곡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十二月 貸倉穀 七百石 于蟾神
心凰生 比太女 悅凰
12월, <섬신蟾神>에게 창고의 곡식 7백석을 빌려 주었다.
<심황心凰>이 <비태比太>의 딸 <열황悅凰>을 낳았다.
눌지왕 32년(448) 황서(黃鼠)戊子)
正月 巨連遣大兄述等 獻玉盃金榑宝馬 而請 王會獵 境上 王辭以病耗
伊飡丁期薨 王吊之 曰 “義柱折矣” 立其廟曰 義
정월, <거련巨連>이 대형(大兄) <술述> 등을 보내어 옥배(玉盃),
금으로 만든 전설상의 신목(神木), 보마(宝馬)를 바치고,
왕에게 국경에서 만나 사냥을 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병으로 몸이 쇠하였다하여 사양하였다.
이찬 <정기丁期>가 죽어 왕이 조의하며 말하기를
" 의(義)의 기둥이 무너졌구나" 라고 하며 묘를 세워 의묘(義廟)라 하였다.
二月 毗有獻 樂工及樂器
2월, <비유毗有>가 악공(樂工)과 악기(樂器)를 바쳤다.
三月 順明生 吹希子哲知 吹希通通里 通里畏順明 而告之
順明怒 幽吹希 于産宮 不與之食 吹希飢食 産神供米
順明打吹希 成病 順明求藥于王 王遣習宝 責順明
3월, <순명順明>이 <취희吹希>의 아들 <철지哲知>를 낳았다.
<취희吹希>가 <통리通里>와 통정하였다.
<통리通里>가 <순명順明>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고하자
<순명順明>이 노여워하며 <취휘吹希>를 산궁(産宮)에 유폐하여 음식을 끊었다.
<취휘吹希>가 굶주리자 산실에서 쌀을 보냈다.
<순명順明>이 <취희吹希>를 매질하여 병이 생기자
<순명順明>이 왕에게 약을 구하였다.
왕이 <습보習宝>를 보내 <순명順明>을 문책했다.
四月 攝凰生 女河皇
4월, <섭황攝凰>이 딸 <하황河皇>을 낳았다.
八月 召順明吹希與哲知 入朝 王問其病 吹希曰 “臣假病而非眞 願父皇勿責臣妾”
順明笑 曰 “此子誰小女如此 故不得安心也”
王亦笑 曰 “爾等 相愛如此 吾無憂矣 多生我孫 以固汝邦 爾等孝我之道也”
乃賜宴 于聖明宮
巴胡生 太子女毗惠
日仙順實上化 以好淵爲日仙 行明
8월, <순명順明>과 <취희吹希>를 <철지哲知>와 함께 입조하게 하여
왕이 그 병을 물었다.
<취희吹希>가 말하기를
" 신은 꾀병이지 정말로 아픈 것이 아닙니다.
원컨데 부황께서는 신의 첩에게 책임을 묻지마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순명順明>이 웃으며 말했다.
" 이 아들은 소녀같다고 하니 안심이 안됩니다"
왕이 역시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서로 이와같이 사랑하니 나는 근심이 없구나.
나의 자손을 많이 낳아 너희 나라를 공고히 하는 것이
너희들이 나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성명궁(聖明宮)에서 잔치를 열게 하였다.
<파호巴胡>가 태자의 딸 <비혜毗惠>를 낳았다.
일선(日仙) <순실順實(396-448)>이 죽었다.
<호연好淵>을 행명(行明)하고 일선(日仙)으로 삼았다.
이때 금관가야왕<취희> 41세, <순명> 25세, <통리> 20세, <철지> 1세이다.
눌지왕 33년(449) 토우(土牛) 己丑
正月 實相子 實竹生母曰 竹窒者好原庶女也 夢見白額虎 而言于其母聚姬
聚時爲實相公妾 故言于實相 實相乃召 而通之 至是生 果將種也
王聞之 賜竹窒錦衣
정월, <실상 實相>의 아들 <실죽實竹>의 생모가 말하기를
"<죽질竹窒>은 <호원好原>의 서녀다.
꿈에 흰 이마를 가진 호랑이를 보고 여자들을 모았다.
<실상 實相>이 <죽질竹窒>을 불러 첩으로 삼아 통정하여 <실죽>을 낳았다.
<실죽實竹>은 장수의 기질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죽질竹窒>에게 비단 옷을 하사하였다.
二月 命吹希順實 歸國 賞賜甚多
蟾神獻 龍紋靑錦袴子紫帶 于王
2월, <취희吹希>와 <순명順明>을 귀국하라고 명하여 많은 상을 내렸다.
<섬신蟾神>이 용 무늬의 푸른 비단 바지와 자색 옥대를 왕에게 바쳤다.
三月 鳥生生 女團君 妊欣爲大阿飡
3월, <조생鳥生>이 딸 <단군團君>을 낳았다.
<임흔妊欣>을 대아찬으로 하였다.
四月 月奈君吳海與遠明 出遊海上 得漂女高尾 以爲枕婢 高尾者以爲龍女 身有鱗文
4월, 월내군(月奈君) <오해吳海>와 <원명遠明>이 바다에 놀이를 갔다가
표류하던 여자 <고미高尾>를 구해 데려와 침비(枕婢)로 하였다,
<고미高尾>는 몸에 비늘 무늬가 있어 용녀(龍女)라 하였다
五月 毗有獻 白細布 花紋苧 三十匹
王以閒宮人 分賜群臣爲妻
冬暖如春
角干垢音卒 乞淑公子好臨之孫也
5월, <비유毗有>가 희고 가는 포와 꽂무늬 모시 30필을 바쳤다.
왕이 한가한 궁인을 나누어 여러 신하의 처로 하사 하였다.
겨울이 봄처럼 따뜻하였다.
각간 <구음垢音>이 죽었다.
<걸숙乞淑>공의 아들 <호림好臨>의 손자이다.
눌지왕 34년(450) 백호(白虎) 庚寅)
正月 遠明生 吳海子秀海 吳海乃幸高尾 有寵
정월, <원명遠明>이 <오해吳海>의 아들 <수해秀海>를 낳았다.
<오해吳海>가 <고미高尾>를 총애하여 행(幸)하였다.
三月 王久會蟾神 于境上
3월, 왕이 다시 국경에서 <섬신蟾神>을 만났다.
四月 湯倍獻其女唐氏 于王
心凰生 子比成 太臣高位出也
4월, <탕배湯倍>가 그의 딸 <당씨唐氏>를 왕에게 바쳤다.
<심황心凰>이 아들 <비성比成>을 낳았다.
<비태>는 높은 지위로 나아갔다.
七月 句麗羅致托 以獵事引兵出 悉直之原 阿瑟羅城主三直掩殺之
巨連怒 侵西鄙 王卑辭以退之
王命太子 摠執政事
方石妻卒 毗有以其次異氏妻之
7월, 고구려 군이 사냥하여 실직(悉直)으로 밀고 들어오니
아슬라(阿瑟羅)성주 <삼직三直>이 불시에 그들을 죽였다.
<거련巨連>이 노하여 서쪽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겸허이 사과하자 물러났다.
왕이 태자에게 모든 정사를 집정하라고 명하였다.
<방석方石>의 처가 죽었다.
<비유毗有>가 차녀 <이씨異氏>를 <방석方石>의 처로 하였다.
十月 王入海宮
月仙塞凰 生子仁陽
築虎牢 于海宮 畜雜戰
10월, 왕이 해궁으로 들어깄다.
월선(月仙) <새황塞凰>이 아들 <인양仁陽>을 낳았다.
해궁에 호랑이 우리를 지어 섞어 길렀다.
눌지왕 35년(451)금토(金兎) 辛卯)년
二月 吹希卒 順明請 以銍知爲繼夫 許之
吹希多淫 損神 臥而不能起者數月
有意 召銍知入 臥內代行順明 而樂觀之
至是順明已娠銍知子 吹希喜之
命以爲繼夫 至是吹喜卒 身生五色花 有異香 皆以爲登仙
順明乃謂銍知 曰 “爾子已在我腹 非爾誰复愛我乎”
銍知曰 “先君之命也”
乃相抱就座 受其臣賀 王聞之 大喜 曰 “銍知好兒也 可賜雙袍”
2월, <취희吹希>가 졸(卒)하였다.
<순명順明>이 <질지銍知>를 계부(繼夫)로 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취희吹希>는 매우 음탕하여 기가 손상되어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 지 수개월이었다.
뜻한바 있어 <질지銍知>를 불러 병석으로 들어오게 하여
<순명順明>을 대행(代行)하라하고 기쁘게 바라보았다.
<순명順明>이 이미 <질지銍知>의 아들을 임신한 것을 옳다고 하며 기뻐하였다.
<질지銍知>를 계부로 삼기를 명하고 <취희吹希>는 기뻐하며 죽었다.
몸에는 오색 꽃이피고 기이한 향기가 있었다.
모두가 신선이 돠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여겼다.
<순명順明>이 <질지銍知>에게 일러 말하기를
" 너의 아들이 이미 내 배속에 있다.
너가 아니면 또 누가 있어 나를 사랑하겠는가?
<질지銍知>가 말하기를
"선군(先君)의 명(命)이다"
마침내 서로 안고 왕좌로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왕이 그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질지銍知>는 좋은 아이로구나.쌍포(雙袍)를 하사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아때 금관가야왕 <질지> 24세, <순명> 28세이다.
三月 攝凰生 靑淵子河大
發車生 登女天河
3월, <섭황攝凰>이 <청연靑淵>의 아들 <하대河大>를 낳았다.
<발차發車>가 <발등發登>의 딸 <천하天河>를 낳았다.
五月 命比太往金官 葬吹希 贈以角干
5월, <비태比太>를 각간으로 추사(
금관(金官)으로 가서 <취희吹希>의 장례를 치러도록 명 하였다.
七月 順明生 銍知女長門
7월. <순명順明>이 <질지銍知>의 딸 <장문長門>을 낳았다.
九月 宝梁生 習宝子阿珍宗
王入海宮
巴胡生 太子子毗羅
9월, <보량宝梁>이 <습보習宝>의 아들 <아진종阿珍宗>을 낳았다.
왕이 해궁으로 들어갔다.
<파호巴胡>가 태자의 아들 <비라毗羅>를 낳았다.
눌지왕 36년(452) 흑룡(黑龍) 壬辰)
正月 王有疾 中外禱天
助里與其臣勿老私通 生女蟾京
정월, 왕이 질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조리助里>가 그 신하 <물로勿老>와 사통하여 딸 <섬경蟾京>을 낳았다.
二月 銍知與順明 行吉 于綾峴 因謁福壽祠 曰
此地自黃玉聖母后 歷代行吉之地 乃創大宮 曰王后寺
2월, <질지銍知>와 <순명順明>이 릉현(綾峴)에서 길례를 치루고
복수사(福壽祠)를 알현하고 말하기를
" 이 곳은 <황옥黃玉>성모后이래 역대로 길례를 행하던 곳이다.
대궁을 창건하여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라" 라고 하였다.
릉현(綾峴)은 신라의 포석사와 같이 길례를 행하는곳이다.
<황옥>이 혼례를 치룬 곳이며 이 능현에 왕후사라는 대궁을 지어
선교의 터전으로 삼은 것이다.
四月 蟾神生 道光女素衣
以王女天生 妻御医思德
4월,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의 딸 <소의素衣>를 낳았다.
왕의 딸 <천생天生>을 어의(御医) <사덕思德>의 처로 하였다.
六月 鳥生生 智世路
聖母祠主靑我薨 以助里代之
6월, <조생鳥生>이 <지세로智世路>를 낳았다.
성모사주 <청아靑我(39-452)>가 죽어 <조리助里(423-483)>가 대신하게 하였다.
七月 大山人 獻九莖嘉禾
7월 대산(大山) 사람이 9줄기의 낟알이 많이 달린 벼를 바쳤다.
눌지왕 37년(453) 수사(水蛇) 癸巳)
正月 銍知入朝 以白欣女河喜賜之 以新立命卽歸
禹風逐吳海 立吳人子元
先是吳海寵高尾 生女高海 遠明始有妬色 禹風知之
先以其女大姬 誘元相通 而使元 告遠明 曰 “立子則母可以主之”
遠明愛元 而有意 禹風引兵 入之
吳海出奔 乃立元 而自爲父君 强娶遠明爲妻 遠明悔之 作水波歌 而唱之
以登欣爲海飡 掌府庫
정월, <질지銍知>가 입조하여
<백흔白欣>의 딸 <하희河喜>를 <질지銍知>에게 하사하고
왕후사가 새로 서면 즉시 돌려보내게 하였다.
<우풍禹風>이 <오해吳海>를 쫓아내고 <오인吳人>의 아들 <원元>을 세웠다.
이에 앞서 <오해吳海>는 <고미高尾>를 총애하여 딸 <고해高海>를 낳았다.
<원명遠明>은 처음부터 질투하여 <우풍禹風>에게 그것을 알렸다.
처음에 그녀의 딸 <대희大姬>가 <원元>을 유혹하여 서로 통정하고
<원元>을 시켜 <원명遠明>에게 고하기를
" 아들을 세우는 것은 어미가 주(主)가 됨이 옳다"라고 하였다.
<원명遠明>이 <원元>을 사랑하여
뜻하 바가 있어 <우풍禹風>이 군사를 인솔하여 들어왔다.
<오해吳海>가 급히 달아나니 <원元>을 세웠다.
<우풍禹風>은 스스로 부군(父君)이돠어 강제로 <원명遠明>을 차지하여 처로 하였다.
<원명遠明>은 그것을 후회하며 수파가(水波歌)를 지어 노래하였다.
<등흔登欣>을 해찬으로 삼아 부고(府庫)를 관장케 하였다.
四月 大旱 放輕囚
以習宝爲護城將軍
4월, 크게 가물었다.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습보<習宝>를 호성장군(護城將軍)으로 하였다.
七月 狼羣入始林 以爲虎村襲來 驚動者甚多
7월, 이리떼가 시림(始林)에 들어와 호촌(虎村)을 엄습하니
놀라서 달아나는 자가 심히 많았다.
九月 阿羅入貢
9월, 아라(阿羅)가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十二月 遠明生 禹風子倢(徒?)
12월, <원명遠明>이 <우풍禹風>의 아들 <첩倢>을 낳았다.
눌지왕 38년(454) 목마(木馬) 甲午)
二月 寵凰生 太子女月凰
首里生 章伊子善牟
2월, <총황寵凰>이 태자의 딸 <월황月凰>을 낳았다.
<수리首里>가 <장이章伊>의 아들 <선모善牟>를 낳았다.
四月 牟梁生 子馬欣
加耶貢女惠密 入宮
4월, <모량牟梁>이 아들 <마흔馬欣>을 낳았다.
가야 공녀 <혜밀惠密>이 궁으로 들어왔다.
七月 霜雹 害穀
巴胡生 太子女俊朔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파호巴胡>가 태자의 딸 <준삭俊朔>을 낳았다.
八月 巨連侵北鄙
異公主生 方石子伊宗
8월, <거련>이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이異>공주가 <방석方石>의 아들 <이종伊宗>을낳았다.
十月 發車生 湯倍子發都
10월, <발차發車>가 <탕배湯倍>의 아들 <발도發都>를 낳았다.
눌지왕 39년(455) 목양(木羊) 乙未)년
二月 發車以發登爲君 登自烝以來 與倍爭車 車乃右登而立之
以馬美爲骨門匝判
上宮阿老夫人崩
2월, <발차發車>가 <발등發登>을 군(君)으로 하였다.
<발등發登>이 그 어미 <발차發車>를 증(烝)한 이래로
<탕배>와 <발차發車>를 경쟁하였다.
<발차發車>가 마침내 <발등發登>을 세웠다.
<마미馬美>를 골문잡판으로 삼았다.
상궁 <아로阿老(391-455)>부인이 붕(崩)하였다.
三月 毗有獵漢山
以攝凰爲上宮
3월, <비유毗有>가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섭황攝凰>을 상궁으로 삼았다.
五月 助里生 子白里
河喜生 銍知女野喜
燕凰生 興勿子興燕 于桃山
以塞京妻突知
5월, <조리助里>가 아들 <백리白里>를 낳았다.
<하희河喜>가 <질지銍知>의 딸 <야희野喜>를 낳았다.
<연황燕凰>이 <흥물興勿>의 아들 <흥연興燕>을 도산(桃山)에서 낳았다.
<새경塞京>을 <돌지突知>의 처로 하였다.
九月 毗有卒 子慶司繼立
9월, <비유毗有(412-455)>가 죽어
아들 <경사慶司(429-475) 백제 25대왕 재위 455-474>가 계승하여 섰다.
十月 巨連侵慶司 命靑淵多甘 往救之
10월, <거련巨連>이 <경사慶司>를 침공하였다.
<청연靑淵>과 <다감多甘>에게 가서 그를 구하라고 명하였다.
十二月 阿羅以八衣爲君
12월, 아라(阿羅)가 <팔의八衣>를 군(君)으로 삼았다.
눌지왕 40년(456) 화원(火猿) 丙申)
二月 阿利生 孝國子贊明
2월, <아리阿利>가 <효국孝國>의 아들 <찬명贊明>을 낳앗다.
四月 鳥生生 乃宿女阿兮
王久廢內事 始御蟾神所供惠密
慶司遣解夫等 獻方物 稱臣請婚
4월, <조생鳥生>이 <내숙乃宿>의 딸 <아혜阿兮>를 낳았다.
왕은 오래동안 내사(內事)를 폐하였으나
<섬신蟾神>이 바친 공녀 <혜밀惠密>로 인하여 다시 시작하였다.
<경사慶司>가 <해부解夫>등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칭신하며 혼인을 청하였다.
七月 巴胡生 女俊宜 廚人宜兒 所烝出也
7월, <파호巴胡>가 딸 <준의俊宜>를 낳았는데
요리사 <의아宜兒>가 증(烝)하여 낳았다.
九月 牟梁生 子曲欣
9월, <모량牟梁>이 아들 <곡흔曲欣>을 낳았다.
十月 首里生 子寸牟 舞兒寸衣 烝出也
10월, <수리首里>가 아들 <촌모寸牟>를 낳았는데
무아(舞兒) <촌의寸衣>가 증(烝)하여 낳았다.
十二月 以比太爲護城匝判
12월, <비태比太>를 호성잡판(護城匝判)으로 삼았다.
눌지왕 41년(457) 화계(火鷄)丁酉)
正月 美梁生 太子女眉闌
정월, <미량美梁>이 태자의 딸 <미란眉闌>을 낳았다.
二月 大風 南桃園神木 多折
惠密生 王女靑華
大藥頭上兵兒卒 以國信代之
以登欣爲匝判 掌神官
寵凰生 衛頭肥達子寵達
2월, 바람이 크게 불어 남도원(南桃園) 신목(神木)이 많이 넘어졌다.
<혜밀惠密>이 왕의 딸 <청화靑華>를 낳았다.
대약두상(大藥頭上) <병아兵兒>가 죽어 <국신國信>이 대신하였다.
<등흔登欣>을 잡판으로 하여 신관(神官)을 관장토록 하였다.
<총황寵凰>이 위두(衛頭) <비달肥達>의 아들 <총달寵達>을 낳았다.
四月 霜傷麥 太子問咎 于中外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상하였다.
태자가 나라 안팎에 허물을 물었다.
六月 順明生 銍知子順通 或曰 時通里生子
順明生女 通里欲媚善 而以子易女 順通實爲通里生也
王賜順通錦衣 順通又曰 善通方言 神靈之人也
6월, <순명順明>이 <질지銍知>의 아들 <순통順通>을 낳았다.
혹은 <통리通里>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순명順明>이 딸을 낳았는데 <통리通里>가 예쁘고 착하게 보이고자하여
<통리通里<의 아들을 <순명順明>의 딸과 바꾼 것이다.
<순통順通>은 사실 <통리通里>가 낳은 것이다.
왕이 <순통順通>에게 비단 옷을 하사하였다.
순통(順通)은 다시말해 신령스런 사람이라는 선통(善通)의 방언이다.
이때 금관가야 왕 <질지> 30세, <순명> 34세, <통리> 29세이다.
八月 祭蠶神
壬忠生 太子子出忠
8월, 잠신(蠶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임충壬忠>이 태자의 아들 <출충出忠>을 낳았다.
十月 月奈獻方物
10월, 월내(月奈)가 방물을 바쳤다.
十二月 以富里爲護城將軍
12월, <부리富里>를 호성장군으로 삼았다.
눌지왕 42년(458) 황구(黃狗) 戊戌)
二月 地震 金城南門毁
2월, 지진이 일어나 금성 남문이 무너졌다.
三月 行大祭 于聖母山
王召上宮 下密詔 曰 “吾衰不可親事 可從太子” 上宮乃 召太子入宮 共事
月仙塞凰卒 年五十一 以竿凰爲月仙 行明 日宅
3월, 성모산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왕이 상궁을 불러 밀조(密詔)로 말하기를
"나는 쇠하여 친히 정사를 봄이 불가하니, 태자를 따름이 옳을 것이다."하니
상궁이 태자를 불러 궁으로 들오오게 하여 같이 정사를 보았다.
월선(月仙) <새황塞凰(408-458)>이 죽었다. 51세이다.
<간황竿凰>을 월선(月仙)으로 삼고 일택(日宅)에서 행명(行明)하였다.
五月 命中外仙巫 禱王
太子與上宮 盟于靈廟
5월, 나라 안팎의 선무(仙巫)에게 왕의 장수를 기도하라고 명 하였다.
태자와 상궁이 영묘(靈廟)에서 맹서하였다.
六月 聖母山大神木 自火
太子與上宮 禱王 于陵門
6월, 성모산 대신목(大神木)이 스스로 불 탔다.
태자와 상궁이 릉문(陵門)에서 왕의 장수를 기도하였다.
七月 王常夢阿老內留昏昏 長眠
王命記內外王孫明 縣于臥內 召銍知順明
7월, 왕이 오랜 잠속에서 꿈에 혼미하여
<아로阿老>와 <내류內留>를 만나니 평상시와 같았다.
왕이 병석에서 내외 왕손을 명기하도록 명하고 <질지銍知>와 <순명順明>을 불렀다.
八月 王崩 于豆乙宮 春秋七十二
王愛人知士 奉神甚勤 東征野人 南伐諸藩 中興神國 多內寵 阿老妬之
別居及其崩 而悔之常夢 乃修實聖陵門 無疾而長眠 登仙
上宮乃 以密詔 下群臣 引太子 至宝座 授宝爲新王
新王以遺命 行吉上宮 而受大朝 葬王 于陵門 從殉者甚衆
新王惜之 曰 “何不從我 而殉之乎”
時登欣受王特寵與宝美 議殉 宝美曰
“汝年尙靑 王愛汝 而不喜殉矣 汝生而我不可殉 我生而汝不可殉也”
登欣乃 言于人 曰 “上宮亦事新王 吾何可殉乎”
以此憎登欣者 讒于王 曰 “登欣非上行吉”
上宮老 曰 “登欣一寵奴而已 焉敢言 吾夫妻事乎 王其罰之也”
新王笑 曰 “大慶之時 罪猶赦 焉一言之非 何足怒乎”
上宮不聽 竟罪登欣 擅政恣荒 時人歌之曰 “新王歟新宮歟 乃上宮之舊穹也”
8월, 왕이 두을궁에서 붕(崩)하였다. 춘추 72세이다.
왕은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알았으며 신을 섬김에 심히 근면하였고
동쪽으로 야인을 정벌하고 남족으로 여러 번국을 정벌하였으며
신국의 중흥을 이루었으나 많은 내실을 총애하여 <아로阿老>가 그것을 질투하였다.
별거하여 죽으니 평상시나 꿈에서도 후회하여 실성의 릉문을 수선케 하였다
질병없이 오랜 잠으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갔다.
상궁에게 밀조로 여러 신하들에게 하명하여 태자를 보좌(宝座)까지 인도하여
신보를 내림으로서 신왕이 되도록 하였다.
신왕(新王)이 유명을 받들어 상궁과 길례를 치루고 대조(大朝)를 받았다.
릉문(陵門)에 장례하니 따라 죽는 자가 심히 많았다.
신왕은 그것을 애석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나를 따르지 않고 따라 죽으니 어짜하란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때 <등흔登欣>은 왕의 특별한 총애가 있어 <보미>와 함께 순사(殉死)를 의논하니
<보미寶美>가 말하기를
"너는 아직 젊은데 왕이 너를 사랑하니 순사(殉死)는 기쁘하지 아니한다.
네가 살아 있으니 내가 순사(殉死)함은 옳지 않다.
내가 살아 있으니 네가 순사함(殉死)은 옳지 않다"
라고 하였다.
<등흔登欣>이 말하기를
"상궁 역시 신왕을 섬기니 내가 어찌 순사함이 옳겠는가?"
라고 하엿다.
이에 <등흔登欣>을 미워하는 자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등흔은 행길(行吉)의 상(上)이 아닙니다"라고 하엿다.
상궁이 말하기를
"<등흔登欣>은 하나의 총노로 감언(敢言)으로 우리 부처를 섬기니
그를 벌해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신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크게 경사스러울 때는 죄를 유예하고 사면하니
한마디 잘 못한 말로 어찌 노여워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상궁이 듣지아니하고 마침내 정사를 마음대로 자행하여 <등흔登欣>에게 죄를 주었다.
이때 사람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신왕 신궁은 상궁의 낡은 구멍이다"라고 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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