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昔鄒葛文王夢見脫解尼今 以宝刀與之曰 “可以祀嘉禾”
乃與只珍內禮 入壤井 禱于樹王而生帝
只后曰 “此兒之貴 應倍于他兒 樹王以此兒爲第一”
而夢常持節隨之 及長 豊美有德 人多服之
自幼事兄君 先今至誠 起臥共之
先今曰 “吾無汝一日不得安”
先今卽位 只后殉于老今曰 “使汝登祚 昔鄒之力也 可與爾弟共天下”
先今乃奉遺 詔以爲天嗣 以傳國
帝嘗師小光太子 小光從容指其女紫凰曰 “天命在汝及吾女 乃脫解帝復生之運也 ”
時帝已與紫凰 密約三生 而不敢言 乃請爲妻 許之 至是果驗
처음에 <석추昔鄒(155?-209)> 갈문왕(葛文王)의 꿈에
<탈해脫解(51-130)> 니금(尼今)이 보도(宝刀)를 주며 말하기를
“가화(嘉禾)로 제사를 지냄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진내례只珍內禮(155?-212)>와 함께 양정(壤井)에 들어가
수왕(樹王)에게 기도하고 왕을 낳았다.
지후(只后)가 말하기를
“이 아이의 귀함은 응당 다른 아이보다 갑절이고,
수왕(樹王)이 이 아이가 제일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항상 꿈을 지니고 절제하며 따랐다.
장성함에 이르자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덕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복종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형군(兄君){아달라} 선금(先今)을 지성(至誠)으로 섬겼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와 눕기를 함께하였다.
선금이 말하기를
“나는 너와 하루도 같이 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선금이 즉위하여 지후가 노금(老今){일성}을 따라 죽으며 말하기를
“너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석추의 공로이다.
너희 형제가 천하를 함께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선금이 이에 유조(遺詔)로 받들어 이로써 천자의 후계자로 삼고 나라를 전하였다.
왕은 일찍이 <소광小光>태자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소광>이 조용히 그의 딸 <자황紫凰>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너와 나의 딸에게 있으니, 탈해제(脫解帝)가 다시 태어난 운이다.”
라고 하였다.
지마(도생) - 소광(애황) - 자황(190-266)
당시 왕은 이미 <자황紫凰>과 더불어 비밀리 삼생(三生)을 언약하였기에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에 배필로 삼아주기를 청하여 <소광>이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영험한 결과가 있었다.
지진내례의 유언에 따라 석씨인 벌휴가 박씨인 아달라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七月 盤昔伊伐飡 穀乙稟主
7월 <반석盤昔>을 이벌찬, <곡을穀乙>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大赦天下 輕因日犯
8월 천하(天下)의 가벼운 죄를 지은 자와 일범(日犯)을 크게 사면하였다.
十月 內后有疾 中外行禱
10월 내후(內后)가 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서 기도를 하였다.
元年 正月 受朝月宮
盤昔請立太子 定國望
上曰 “先今以朕爲一體 而授宝 朕欲捀先今之子爲一體 今不得之 奈何”
內后曰 “先今常言 吾子奈解 汝何反之”
上曰 “人皆知 奈解爲吾孫 奈何”
群臣曰 “先今與陛下共后 而生盖一體也 何求他嗣乎” 上乃決之
벌휴왕 원년(AD.244)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반석盤昔>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여 나라의 미래를 정하고자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선금(先今)이 짐과 한 몸으로 하여 보위를 내려주었는데,
짐은 선금의 아들을 받들어 한 몸으로 하고자 하나,
지금 그럴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내후(內后)가 말하기를
“선금이 항상 말하기를 <내해奈解>는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찌 반대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내해>는 나의 손자로 알고 있으니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선금과 폐하는 왕후를 함께하여 자식을 낳았으므로 모두 한 몸입니다.
어찌하여 또 다른 후계자를 구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결심하였다.
<내해奈解>는 <내례內禮>의 유일한 아들이다.
벌휴의 아들인 <이매>와 <내례>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는 모계사회이므로 남왕보다 여왕의 권력이 더 높아
<내례(186-263)>생전에는 <냬례>의 아들이 정통태자가 된 것이다.
七月 連乙伊伐飡 淡元稟主
六軍頭上長昔卒 敦車代之
7월 <연을連乙>을 이벌찬, <담원淡元>을 품주로 하였다.
6군두상 <장석長昔>이 죽어, <돈차敦車>가 대신하였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胡祇月歌頭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호지胡祇>를 월가두(月歌頭)로 하였다.
十月 行大場
內后有疾 行禱
尊太大角干亥鄒爲太公 加奴婢田宅 賜其大妃彭仙小妃豆姬 白大神衣及馬
10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내후(內后)가 병이 있어 기도를 하였다.
태대각간(太大角干) <해추亥鄒>를 높이어 태공(太公)으로 삼고,
노비와 전택(田宅)을 더하였다.
<해추>의 대비(大妃) <팽선彭仙>과 소비(小妃) <두희豆姬>에게
백대신의(白大神衣)와 백대마(白大馬)와 신의(神衣)를 내렸다.
十一月 行昔鄒葛文王大祭 于壤井 以上女昔禮爲祭主 月盧爲法
上與二后親祀之
上幸豆芻宅 洗太孫碧正 賜碧豆牧丹衣
豆芻以上妹 有寵于上 其夫碧牛 亦有寵於上
其女碧豆 以納正太子妃 亦有寵於上 賞賜甚多
11월 <석추昔鄒> 갈문왕(葛文王)의 큰 제사를 양정(壤井)에서 지냈다.
왕의 딸 <석례昔禮>{벌휴와 내례의 딸}를 제주(祭主)로,
<월노月盧>를 법(法)으로 삼았다.
왕과 2후{내례와 자황}가 친히 제사지냈다.
왕이 <두추豆芻>댁에 행차하여, 태손 <벽정碧正>을 씻겨 주었다.
<벽두碧豆>에게는 목단의(牧丹衣)를 내렸다.
<두추豆芻>는 왕의 여동생으로 왕에게 총애가 있었고,
<두추豆芻>의 남편 <벽우碧牛> 또한 왕에게 총애가 있었다.
그의 딸 <벽두碧豆>는 <납정納正> 태자 비(妃)로
역시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 상을 내려줌이 심히 많았다.
十二月 封上子爲殿君 賜宅
上幸小南君宅 壽其母達亥 上姑也
上幼時 與達亥所生黑齒子南亥 遊於南君宅雙柿之皐 達亥愛之如己子
至時上奉之 以太后禮
封其柿爲王 是夜大雪 上與南解立于雪中而封之
仍滯宿 南亥以其女采薦之
行靑鼠祭 于北川
是年國大豊 酒食饒足 頌歌連夕
上與二后及諸公主 登雲梯送鼠
12월 왕의 아들을 전군(殿君)으로 봉하여, 집을 내렸다.
왕이 <소남군小南君>댁에 행차하여 그의 어머니 <달해達亥>의 장수를 축원하였다.
<달해達亥>는 왕의 고모다.
왕이 어렸을 때 <달해達亥>가 낳은 <흑치黑齒>의 아들 <남해南亥>와,
<남군南君>{소남군의 아버지}댁 두개의 감나무 언덕에서 놀았다.
<달해達亥>가 자신의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태후의 예로 모셨다.
그 감나무는 수왕(樹王)으로 봉(封)하여,
이날 밤 큰 눈이 내림에도 왕과 <남해南亥>가 눈 속에서 서 있었다.
수왕을 봉(封)하고 나니 이에 눈으로 막히어, <남해南亥>의 집에서 숙박하게 되자,
<남해南亥(186-261)>가 그의 딸 <남채南采>를 천거하였다.
청서제(靑鼠=甲子)를 북천(北川)에서 행하였다.
이해 나라에 대풍이 들어 술과 음식이 넉넉하고 족하였다.
송가(頌歌)가 밤마다 이어졌다.
왕과 2후와 여러 공주가 운제(雲梯)에 올라 청서(靑鼠)년을 떠나보냈다.
244년은 갑자년으로 청서(靑鼠)의 해이다.
이때 내후 <내례> 58세, 자후 <자황> 55세, 한비 <한개> 54세, 벌휴왕 55세,
<내례>와 <벌휴>의 딸 <석례> 30세, <공례> 24세,
<내례>와 <이매>의 아들 <내해> 15세,
<자황>과 <아달라>의 딸 <보황> 28세, 아들 <내음> 25세, <이음> 19세,
<자황>과 <벌휴>의 아들 <골정> 38세, <이매> 34세,
<한개>와 <벌휴>의 아들 <납정> 32세,
<구도> 27세, <운모> 37세?, <옥모> 7세, <해추> 85세이다.
벌휴왕 2년(AD.245)
正月 上與二后太子 受朝南桃 入壤井 行大祭 于脫解毛施 仇鄒味生
召文監國山乙卒 年七十六 召文人奉之如神 立乙公祠
行祖廟大祭
賜酺群臣 加爵一級
大赦內外重因
上與二后 入海宅
月盧伊伐飡 昔禮稟主
命所非太子 巡國中 賜賑于四窮
南亥與其女采 謁于海宅 曰
“臣以黑齒之子 爲南君子 今臣父立祠 而不許臣歸父
是削主也 陛下憐臣 舊好而許之 則母亦喜也”
上曰 “朕以父母之德 非品而得位 母唯仲母 安敢不奉喜也
但次父存 焉不敢獨行 汝可乞于太公”
乃問之 太公笑曰 “吾妹之子 卽吾子也 汝爲吾子足矣 何苦爲逆賊之子乎”
南亥泣曰 “先今已赦罪而立祠 仲父何言逆賊乎”
太公曰 “黑齒社稷之罪人也 祇逸兩聖不赦 唯敢赦之乎
汗昔欲爲鷄徒安心之計 而乞于先今 先今不得自專
乃議于功臣 多不許 而子實爲汝 而亦贊立祠 而實非國家之祠也
社稷之罪未洗 而汝爲其子 汝之子孫 必奴于官 吾可使汝爲此乎
汝爲南君子 乃祇今之孫也 汝子可尙公主 而入眞骨也 汝何不恩乎”
南亥乃拜謝而退 曰 “吾年將近六十 尙不知仲父之恩 安得爲子乎”
乃與其妻雙吉 扶持太公
정월 왕이 2후와 태자(太子){내해}와 더불어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양정(壤井)으로 가서
<탈해脫解>와 <모시毛施>, <구추仇鄒>와 <미생味生>의 큰 제사를 지냈다.
탈해(모시) - 구추(미생) - 석추(지진내례) - 벌휴(189-256)
<탈해脫解>와 <모시毛施>는 <벌휴>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이고,
<구추仇鄒>와 <미생味生>은 <벌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이다.
소문(召文) 감국(監國) <산을山乙(170-245)>이 76세로 죽었다.
소문 사람들이 신(神)처럼 모시며, 을공사(乙公祠)를 세웠다.
조상의 사당에 큰 제사를 지냈다.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작위를 1급씩 올려주었다.
나라 안팎의 중대한 범죄를 지은 자를 사면하였다.
왕과 2후가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월노月盧>를 이벌찬, <석례昔禮>를 품주로 하였다.
소비(所非){이음}태자에게 명하여 나라 안을 순찰하게 하고
4궁(四窮)을 구휼하게 하였다.
<남해南亥>와 그의 딸 <남채南采>가 해택(海宅)에서 알현하여 말하기를
“신은 <흑치黑齒>의 아들인데 <남군南君>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臣)의 부친의 사당을 세웠으나,
신의 부친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제주(祭主)가 약해졌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을 가엽이 여기고 옛정을 생각하여 허락하여 주시면
어머니께서도 또한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부모의 덕으로 비품(非品)임에도 왕위를 얻었다.
어머니가 비록 중모(仲母)이더라도 어찌 받들지 아니함이 기쁘겠느냐.
다만 차부(次父){숙부 해추}가 계시니 어찌 감히 홀로 결정하겠는가.
네가 태공(太公)에게 구걸하면 가능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태공에게 물으니 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여동생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이다. 너를 나의 아들로 하면 족하겠느냐.
어찌하여 괴롭게 역적(逆賊)의 아들이 되려하느냐.”라고 하였다.
흑치(달해) - 남해(186-261)
일성(미생) - 달해(164-245)
구추(미생) - 해추(160-245)
남해의 어머니 달해는 해추의 동복이부 여동생이다.
<남해>가 울면서 말하기를
“선금(先今){아달라}이 이미 사면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중부(仲父)는 어찌하여 역적이라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태공이 말하기를
“<흑치>는 사직(社稷)의 죄인이다.
<지마>와 <일성>, 두 분의 성인께서 사면하지 아니하였는데
오히려 감히 사면했다는 것이냐.
<한석汗昔>이 계도(鷄徒)를 안심시키려는 계책으로 선금에게 구걸하여,
선금이 스스로 오로지 하지 못하고, 이에 공신들과 의논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너는 친아들이어서, 또한 사당을 짓는 것을 도왔으나 실제는 나라의 사당이 아니다.
사직의 죄는 씻지 못하였다.
네가 <흑치>의 자식이 되면 너의 자손들은 반드시 관가의 노비가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이처럼 만들어야 옳은 것이로구나.
너는 <남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지마>이사금의 손자이다.
너의 자식은 공주(公主)로 숭상되어, 진골(眞骨)로 들어갈 수 있다.
너는 어찌 은혜를 모르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남해>가 이에 절하여 감사드리고, 물러나며 말하기를
“나의 나이 장차 60이 가까워지는데, 중부(仲父)의 은혜를 모르고 있었구나.
어찌하여 자식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처 <쌍길雙吉>과 더불어 태공을 곁에서 부축하였다.
二月 召文八世主 奉景德祠主龍雲
達文而反曰 “伐休非品竊位 非祖宗之法也 天下可共討之”
甘文阿瑟羅沙伐等 將應之
上憂之 右頭上興宣曰 “小寇可遣小兒擒之 不足憂也”
上曰 “朕所以憂者 非擒之也”
興宣曰 “何也”
上曰 “達文兄今之子也 子雖弄兵 父何可傷之乎
召文世主皆姻戚也 雖有迷途 可以導之 不可雪之 兩軍相對 無咎之民受禍 安得不憂乎”
興宣曰 “臣有二兵官 可當此任”
上曰 “誰也”
曰 “郁甫之子仇道 熟知召文得其人心 雖少寬仁 可任大事
彭仇之子仇須兮 善攻城 二人相得 一攻而一襲 則可保 無虞”
上大喜 乃以仇道仇須兮爲左右軍主 而伐之
仇道自龜山東北 仇首兮直指阿火屋大路 兩軍互相 緩急行計
仇道作女巫隊 襲其關守 直至其都 牛乙內應之亂
遂平 命其七世主 皆如牛乙 擇骨門丈夫爲夫 達文妻子 命宅京都
2월 소문(召文) 8세주가 경덕사주(景德祀主) <용운龍雲>을 받들었다.
<달문達文>{아달라와 文窘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벌휴伐休>는 비품(非品)으로 왕위를 훔쳤다.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니다.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옳다.”고 하였다.
이때 <달문> 32세이다.
감문(甘文), 아슬라(阿瑟羅), 사벌(沙伐) 등이 장차 응하려 하였다.
왕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우두상(右頭上) <흥선興宣>이 말하기를
“작은 도적은 어린아이를 보내어 사로잡을 수 있으니,
걱정하기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걱정하는 바는 사로잡을 수 없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달문>은 형금(兄今){아달라}의 아들이다.
아들이 비록 병사를 제 마음대로 할지라도, 아버지가 어찌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느냐.
소문의 세주(世主)는 모두 인척(姻戚)이다.
비록 미도(迷途)에 있더라도 가히 지도하여야 한다. 누명을 씌우는 것을 옳지 않다.
양군(兩軍)이 상대하면 잘못이 없는 백성들은 화를 입는다.
어찌하여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신에게는 두 명의 병관이 있으니, 가히 이 임무를 맡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누구냐?”라고 물었다.
<흥선>이 말하기를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218-301)>는
소문국을 익숙하게 잘 알고 소문국의 인심을 얻었으며,
비록 젊더라도 너그럽고 어질어서 가히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팽구彭仇>의 아들 <구수혜仇須兮>는 공성(攻城)전에 뛰어나므로
두 사람이 서로 한번 공격하고 한번 습격하면 곧 가히 지켜낼 수 있으니,
그르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구도>와 <구수혜>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치도록 하였다.
<구도>는 구산(龜山)에서 동북으로,
<구수혜>는 아화옥(阿火屋) 대로로 곧 바로 향하였다.
양군은 상호 완급(緩急)으로 계책을 행하였다.
<구도>가 여무대(女巫隊)로 하여금 관문을 지키는 자를 습격하고
그 도읍으로 직행하였다.
<우을牛乙>이 내응(內應)하여 난을 일으켜서 드디어 평정하였다.
7세주에게 모두 <우을牛乙>을 따르도록 명하고,
골문장부(骨門丈夫)를 택하여 남편으로 삼도록 하였다.
<달문>의 처자는 경도(京都)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벌휴왕 2년
정월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四月 亥鄒太公薨
4월 <해추亥鄒> 태공이 죽었다.
七月 賞召文征士 有差
以牛乙爲景德祠主
7월 소문(召文)을 정벌한 장수들에게 상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우을牛乙>을 경덕사주(景德祠主)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如老角干卒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여로如老> 각간이 죽었다.
十一月 達亥大母薨 春秋八十二 逸帝女也
行昔鄒王祭
11월 <달해達亥(164-245)>대모가 춘추 82세로 죽었는데, 일성이사금의 딸이다.
<석추昔鄒>왕의 제사를 지냈다.
벌휴왕 3년(AD.246)
正月 受朝 月宮
洪喜伊伐飡 元氏稟主
上巡行西路州郡 至一善 行靑牛白虎送迎祭 賜父老酒
命元氏南采歌舞 而娛之 入甘文 賜其骨老酒 命其子女 行古樂
仍還召文 亦觀其風俗 而歸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홍희洪喜>를 이벌찬, <원씨元氏>를 품주로 하였다.
왕이 서로(西路)의 주군(州郡)을 두루 돌아보며 일선(一善)에 이르러,
청우(靑牛){乙丑년}를 보내고, 백호(白虎){丙寅년}를 맞이하는 제사를 지내며,
부로(父老)에게 술을 내렸다.
<원씨元氏>와 <남채南采>에게 노래와 춤을 추도록 명하고 즐거워하였다.
감문(甘文)으로 들어가 그 골노(骨老)에게 술을 내리고,
그 자녀들에게 옛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거듭하여 소문(召文)을 돌아보고, 또한 소문국의 풍속(風俗)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三月 敦車卒 大解六軍頭上
3월 <돈차敦車>가 죽어, <대해大解>를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五月 幸太公宅 行太公祭 賜晋鄒彭芻等爵 彭仙豆姬豆芻等年穀 有差
5월 태공(太公){해추}댁을 행차하여 태공의 제사를 지냈다.
<진추晋鄒>, <팽추彭芻> 등에게는 작위를 내리고,
<팽선彭仙>, <두희豆姬>, <두추豆芻>에게는 해마다 곡식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七月 南新縣 獻嘉禾
彭芻伊伐飡 豆姬稟主
7월 남신현(南新縣)에서 가화(嘉禾)를 바쳤다.
<팽추彭芻>를 이벌찬, <두희豆姬>를 품주로 삼았다.
벌휴왕 3년
정월 왕이 주군을 순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5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7월 남신현에서 상서로운 벼를 진상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거행하였다.
十月 元氏生上子虎公 上洗之
10월 <원씨元氏>가 왕의 아들 <호공虎公>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었다.
十一月 南采生上女采氏
親祀黑齒 盡許其子女
11월 <남채南采>가 왕의 딸 <채씨采氏>를 낳았다.
왕이 친히 <흑치>의 제사를 지내고, 모두 그 자녀가 됨을 허락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벌휴왕 4년(AD.247)
正月 治公伊伐飡 碩虹稟主
정월 <치공治公>을 이벌찬, <석홍碩虹>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行赤兎祭
骨正太子巡行州郡 察民疾苦
2월 적토(赤兎=丁卯)제를 행하였다.
<골정骨正>태자가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살폈다.
三月 下令省 土木勿奪 農時
3월 영(令)을 내려 토목공사를 살피어 농사철에는 징수하지 않도록 하였다.
四月 行只后大祭 于壤井
上幸豆姬宅
4월 양정(壤井)에서 지후대제(只后大祭)를 행하였다.
왕이 <두희豆姬>댁에 행차하였다.
七月 昌豆伊伐飡 沙兒稟主 南吉左執 月老右執 謁休骨書 文光大書
7월 <창두昌豆>를 이벌찬, <사아沙兒>를 품주,
<남길南吉>을 좌집(左執), <월로月老>를 우집(右執),
<알휴謁休>를 골서(骨書), <문광文光>을 대서(大書)로 삼았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十月 牛徒行吉公祭 于阿瑟羅 雪深丈餘 無以通路 有大猪一群 自至 人以爲神致
10월 우도(牛徒)가 아슬라(阿瑟羅)에서 길공제(吉公祭)를 지냈다.
눈이 사람 키를 넘어 통로가 없었다.
한 무리의 돼지가 있어 스스로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신이 보내준 것이라 하였다.
벌휴왕 4년
3월 주군에 명령을 내려 농사철에 토목 공사를 하지 않도록 하였다.
10월 북부지방에 큰 눈이 내려 한 장 깊이로 쌓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十一月 頒征衣
置兵司 掌兵器及工
11월 군포(征衣)를 하사하였다.
병사(兵司)를 설치하여 병기(兵器)와 장인에 관한 일을 맡겼다.
十二月 入海宅 行花田祭
小南君薨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와 화전제(花田祭)를 지냈다.
<소남군小南君>이 죽었다.
벌휴왕 5년(AD.248)
正月 南吉伊伐飡 忽碧稟主
정월 <남길南吉>을 이벌찬, <홀벽忽碧>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夫余眞格等來攻母山城 命南路將軍仇道率精騎一千 往求之
盤花大母薨 春秋九十二 嘗記大母故事數千言曰 ‘大母經’
2월 부여(夫余) <진격眞格> 등이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남로(南路)장군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정기(精騎) 1천을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벌휴왕 5년
2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파진찬 구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반화盤花(157-248)>대모가 죽었는데, 춘추 92세였다.
일찍이 대모(大母)의 고사(故事) 수천가지 말씀을 기록하여,
대모경(大母經)이라 부른다.
三月 命猩公行黃龍祭 于閼英井 擇遊花三白 飾花車十二 而鎭四方 京都大繁
彭板爲大書 碧芻爲大畜 作奴爲園圃 大亥爲兵司 尙盧爲城司 元元爲蠶司
3월 <성공猩公>에게 명하여 황룡(黃龍=戊辰)제를 알영정(閼英井)에서 행하였다.
유화(遊花) 3백 명을 뽑아서 꽃마차 12대를 장식하고 사방을 채우게 하였다.
경도(京都)가 크게 북적거렸다.
<팽판彭板>을 대서(大書), <벽추碧芻>를 대축(大畜),
<작노作奴>를 원포(園圃), <대해大亥>를 병사(兵司),
<상노尙盧>를 성사(城司), <원원元元>을 잠사(蚕司)로 하였다.
五月 角干暖門卒
5월 각간 <난문暖門>이 죽었다.
七月 月老伊伐飡 馬里稟主
7월 <월노月老>를 이벌찬, <마리馬里>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一月 行壤井大祭
大解卒 晉鄒六軍頭上
11월 양정대제(壤井大祭)를 지냈다.
<대해大解>가 죽어, <진추晉鄒>를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벌휴왕 6년(AD.249)
正月 天猩伊伐飡 九禮稟主
以召文爲剛州 牛乙太守
上幸南亥宅滯雪
美時生上子美知
정월 <천성天猩>을 이벌찬, <구례九禮>를 품주로 하였다.
소문(召文)을 강주(剛州)로 하고, <우을牛乙>을 태수로 삼았다.
왕이 <남해南亥>의 집을 행차하여, 눈에 막히었다.
<미시美時>{가야 미리신의 여동생}가 왕의 아들 <미지美知>를 낳았다.
四月 置兵官理方 命彭芻爲頭上 月盧骨理頭上 曉然仙理頭上 乾方平理頭上
行金蛇祭 于南桃 賜酺百官 以福聖壽
4월 병관이방(兵官理方)을 설치하여, <팽추彭芻>를 두상(頭上)으로,
<월노月盧>를 골리두상(骨理頭上)으로, <효연曉然>을 선리두상(仙理頭上)으로
<건방乾方>을 평리두상(平理頭上)으로 명하였다.
금사제(金蛇祭)를 남도(南桃)에서 행하였다.
백관(百官)들에게 잔치를 내리고 성수(聖壽){임금의 장수}를 축복하였다.
249년은 기사(己巳, 白蛇)년이며, 벌휴의 환갑 잔치가 열린 해이다.
六月 行大流頭 骨正太子率骨女 散餠于百女泉 汗后爲群女 所推入深 吐水疾作
6월 <골정骨正>태자가 골녀(骨女)를 거느리고 대유두(大流頭)를 행하였다.
백녀천(百女泉)에서 산병(散餠){떡의 한 종류}을 주었는데,
한후(汗后){한개}가 무리 여자들에게 밀려서 깊은 곳으로 빠졌다.
물을 토하고 병이 일어났다.
七月 岳公伊伐飡 羊仁稟主
仇道大破夫余 于狗襄 獻獲五百余級 命加從征壯士爵秩 以差賜衣酒
7월 <악공岳公>을 이벌찬, <양인羊仁>을 품주로 하였다.
<구도仇道>가 구양(狗襄)에서 부여(夫余)를 크게 깨뜨리고
500여명의 목을 취하여 바쳤다.
싸우러 따라간 장사(壯士)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더하여 주었고,
옷과 술을 내려줌에 차등이 있었다.
벌휴왕 6년
7월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5백여 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거행하였다.
九月 命大農頭上淵角 行大場 于一善 會召文加耶農師百余人 賜衣酒
9월 대농두상(大農頭上) <연각淵角>에게 명하여
일선(一善)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소문(召文)과 가야(加耶)의 농사(農師) 백여 명이 모여, 옷과 술을 내렸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벌휴왕 7년(AD.250)
正月 足達伊伐飡 雲帽稟主
정월 <족달足達>을 이벌찬, <운모雲帽>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上幸汗后宅 賜宴 后病起而行壽 故特赦舊惡而春之 后感泣而作明月歌
2월 왕이 한후(汗后)댁에 행차하여 잔치를 열었다.
한후(汗后)가 병에서 일어나, 수(壽){회갑연}를 행하였다.
그런 연유로 옛 잘못{한개와 아달라와의 통정}을 특별히 사면하고 돌보도록 하였다.
한후(汗后)가 감격하여 울면서, 명월가(明月歌)를 지었다.
四月 行只后祭 加耶君夫河智殂 美理神請以孝修爲繼夫 許之
骨正太子巡北鄙
栽花樹 于京都街行
4월 지후(只后)의 제사를 지냈다.
가야군(加耶君){미리신}의 남편 <하지河智>가 죽었다.
<미리신美理神>이 <효수孝修>로 남편을 잇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골정骨正>태자가 북비(北鄙){북쪽의 변두리 땅}을 순찰하였다.
꽃나무(花樹)를 경도(京都) 길거리에 심었다.
五月 謁逃山 行白馬大祭
5월 도산(逃山)에서 백마대제(白馬=庚午)를 지냈다.
七月 常盧伊伐飡 亥氏稟主
大郞角干卒
7월 <상노常盧>를 이벌찬, <해씨亥氏>를 품주로 하였다.
<대랑大郞> 각간이 죽었다.
九月 行大嘉俳 于南桃
夫余襲破圓山 進圍缶?谷 仇道率勁騎擊之 夫余佯敗 誘至蛙山 伏兵四起 我軍困潰
9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부여(夫余)가 원산(圓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진격하여 부곡(缶谷)을 포위하였다. <구도仇道>가 경기(勁騎){강한 기병}를 거느리고 부딪쳤다.
부여가 거짓으로 패한체하며, 와산(蛙山)까지 꾀였다.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우리 군이 갇혀서 무너졌다.
벌휴왕 7년
8월 백제가 서쪽 국경 원산향을 습격하고, 다시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하였다.
구도가 와산까지 추격하다가 백제에게 패배하였다.
왕은 구도가 잘못했다고 하여 부곡성주로 강등시키고, 설지를 좌군주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고왕 25년(AD.250) 경오
8월 신라 원산(圓山)성을 공격하여,
와산(蛙山)에서 결곡(鈌谷) 대첩을 이루었다.
가야(加耶)가 사신을 보내어 명주(明珠)를 공물로 보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十月 命薛支代領 仇道軍 仇道軍貶 于缶谷城
10월 <설지薛支>를 구도군(仇道軍)의 우두머리로 대신하게 명하고,
<구도>의 지위를 낮추어 부곡성(缶谷城)주로 하였다.
十一月 領征衣
上入海宅
11월 군복을 하사하였다.
왕이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벌휴왕 8년(A.D.251)
正月 虹祇伊伐飡 牛豆稟主
汗后崩 葬于逸聖陵
정월 <홍지虹祇>를 이벌찬, <우두牛豆>를 품주로 하였다.
한후(汗后)가 죽어, 일성릉(逸聖陵)에 장사를 지냈다.
五月 內后有疾 行禱
大會牛羊馬虎鷄徒 于南桃 命骨正太子爲五仙頭上 賜各徒衣酒有差 命行白羊大祭
5월 내후(內后)가 병이 있어, 기도를 하였다.
남도(南桃)에서 우도(牛徒), 양도(羊徒), 마도(虎徒), 호도(虎徒), 계도(鷄徒)의
대회(大會)가 있었다.
<골정骨正>태자를 오선두상(五仙頭上)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각각의 무리(徒)에게 옷과 술을 차등 있게 내렸다.
명하여 백양(白羊=辛未)대제를 행하였다.
七月 淵角伊伐飡 仙于稟主
7월 <연각淵角>을 이벌찬, <선우仙于>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泒藥使 于州郡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고약(泒藥)을 주군으로 보냈다.
벌휴왕 9년(A.D.252)
正月 猩公薨 國良代之
文光伊伐 信禮稟主
國良阿飡 述明一吉 二人有仙術 負衆望 故特加以褒之 述明屬兵司
정월 <성공猩公>이 죽어, <국량國良>이 대신하였다.
<문광文光>을 이벌찬으로, <신례信禮>를 품주로 삼았다.
<국량國良>을 아찬,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하였다.
두 사람은 선술(仙術)이 있어 무리의 촉망을 업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작위를 특별히 올리어 기렸다.
<술명述明>은 병사(兵司)에 속하게 하였다.
二月 京都雪深三尺
興宣六軍頭上
2월 경도(京都)에 눈이 3자가 내렸다.
<흥선興宣>을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五月 大雨水 山崩十餘所 遣所非太子 恤民 行蘿畐祭 于南郊 以禱雨順
美時與舍人述明相通生子高知
5월 큰 비가 내려 무너진 산이 10여 군데였다.
소비(所非){이음}태자를 보내어 백성을 구휼하고,
남교(南郊)에서 라복제(蘿畐祭)를 행하여 비가 순하여 지기를 빌었다.
벌휴왕 9년
정월 국량을 아찬에 임명하고, 술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3월 서울에 눈이 내렸는데 깊이가 석 자였다.
5월 홍수가 나서 산이 10여 군데 무너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시美時>와 사인(舍人) <술명述明>이 상통(相通)하여, 아들 <고지高知>를 낳았다.
七月 彭板伊伐 食玄稟主
7월 <팽판彭板>을 이벌찬, <식현食玄>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祇摩大祭 別立陵垣 先是蛇陵玉垣甚廣累因水潰 至是各分陵垣
8월 <지마祇摩> 대제(大祭)를 지내고, 능원(陵垣)을 별도로 세웠다.
옛날 사릉(蛇陵)의 옥릉(玉垣)이 심히 넓어, 여러 번 물에 허물어졌다.
이때에 이르러 릉(陵)을 나누어 둘레석을 별도로 세웠다.
十一月 入海宅
11월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벌휴왕 10년(AD.253)
正月 大亥伊伐飡 冬介稟主
정월 <대해大亥>를 이벌찬으로, <동개冬介>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漢祇遊花生四男一女皆完 命賜米衣
3월 한지(漢祇)의 유화(遊花){仙徒의 부인}가 4남 1녀를 낳아
모두 완전하였기에 쌀과 옷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六月 倭大饑 男女千余口 乞食來泊 命居南鄙閑地 賜食就業 是爲倭圃 與作平齊名
6월 왜(倭)에 대기근이 있어 남녀 천여 명이 배를 타고 와서 식량을 구걸하였다.
남쪽 변두리 한가로운 땅에 살도록 명하고, 식량과 일자리를 주었다.
이것이 왜포(倭圃)이다.
작평(作平)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벌휴왕 10년
정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한지부 여인이 한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 왜인 천여 명이 큰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元元伊伐飡 肥豆稟主
7월 <원원元元>을 이벌찬, <비두肥豆>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를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玉帽以歌姬 得骨正寵有娠 上責骨正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여, <옥모玉帽>를 가희(歌姬)로 하였다.
<골정骨正>의 총애를 얻어 임신을 하였다.
왕이 <골정骨正>을 꾸짖었다.
이때 <옥모> 16세, <골정> 47세, <옥모>의 아버지 <구도>는 36세이다.
벌휴왕 11년(AD.254)
正月 欽室伊伐飡 白面稟主
정월 <흠실欽室>을 이벌찬, <백면白面>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以仇道女玉帽妻骨正 行吉 鮑祠
4월 <구도仇道>의 딸 <옥모玉帽>를 <골정骨正>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五月 方君太子薨
美理神生孝修子孝道
5월 <방군方君>태자가 죽었다.
<미리신美理神>이 <효수孝修>의 아들 <효도孝道>를 낳았다.
七月 可權伊伐飡 黃發稟主
7월 <가권可權>을 이벌찬, <황발黃發>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玉帽生骨正子 是爲助賁帝 有瑞雲異香
上奇之 曰 “此兒必興吾家” 其娠産皆以月明 故曰助賁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옥모玉帽>가 <골정骨正>의 아들을 낳았다.
이분이 <조분助賁(254-329) 11대왕 재위 292-309>제(帝)이다.
상서로운 구름과 기이한 향(香)이 있었다.
왕이 특별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우리집안을 필히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임신하고 태어난 날이 모두 달이 밝았기에 <조분助賁>이라 이름 지었다.
벌휴왕12년(AD.255)
正月 仇須兮伊伐飡 彭達稟主
정월 <구수혜仇須兮>를 이벌찬, <팽달彭達>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碧芻伊伐飡 墨昌稟主
美理生河道女大理 美時兄也
7월 <벽추碧芻>를 이벌찬, <묵창墨昌>을 품주로 하였다.
가야 <미리美理>가 <하도河道>의 딸 <대리大理>를 낳았다.
<미리美理>는 <미시美時>의 언니이다.
벌휴왕 13년(AD.256)
正月 仇道伊伐飡 好買稟主
公禮生所非女述禮 賜米 或云 奈音相通而生
정월 <구도仇道>를 이벌찬, <호매好買>{벌휴와 자황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구도>의 딸 <옥모玉帽>가 <골정骨正>에게 시집을 간 후광으로
<구도>는 이벌찬의 작위를 받게 된다.
<공례公禮>{벌휴와 내례의 딸}가 <소비所非>{아달라와 자황의 아들}의 딸
<술례述禮(256-338)>{미추의 어머니}를 낳아 쌀을 내렸다.
혹은 <내음奈音>{아달라와 자황의 아들}과 상통(相通)하여 낳았다고 한다.
二月 大修宮室
2월 궁실(宮室)을 크게 수선하였다.
三月 旱久 行禱
加耶王子河道來朝 妻以美羅 河道美時姪也
3월 가뭄이 오래 지속되어 기도하였다.
가야(加耶)왕자 <하도河道>{미리신의 아들}가 내조(來朝)하여
<미라美羅>{아달라와 미시의 딸}를 시집보냈다.
<하도(河道>는 <미시美時>의 조카이다.
벌휴왕 13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4월 대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四月 月宮南樹王震之 上憂之曰 “兆其朕矣” 乃入桃山待罪
翌日 又震金城東門 上命設席于神堂 而潔身仰臥 從容而崩
上自幼神明 能占風雲 預水旱豊歉 知人邪正
至是又知 仙期 不病而崩 人皆稱聖
內后乃與奈解太子行祥登祚 下詔曰
“新今年才未高 當此大任 爾大小臣僚 克體朕意 輔我新今”
仇都乃請 內道攝行 許之
六軍頭上興宣卒 碧牛代之
興宣多奇才 累建功爲國柱石
至是上崩 於桃山未發 興宣夢見 阿達羅帝與上幷騎白大馬 將朝于天命 公爲前衛
公將具甲冑 倉黃索之 忽聞上崩 曰 “吾其逝矣”
亦無疾而卒 人以公爲二帝之身僕 阿帝身長七尺 伐帝六尺五寸 興宣六尺
阿帝豊準龍顔 伐帝玉顔美目 興宣能作 二帝之狀 遠而望之 不能辨
阿帝太子時 與伐帝同爲兵官 情若兄弟 及卽位 任以大事 大政多出其手 夷狄不能侮之
國人傷其卒 莫不掩淚 乃立其祠 以祀之曰 ‘大祠’
4월 월궁(月宮)의 남수왕(南樹王)이 벼락을 맞았다.
왕이 걱정하며 말하기를
“짐(朕)에게 그 조짐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도산(桃山)으로 가서 처벌을 기다렸다.
다음 날 금성(金城) 동문에 또 벼락이 쳤다.
왕이 신당(神堂)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명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반드시 누워 조용히 죽었다.
왕이 어렸을 때 신명(神明)이 있었으며,
바람과 구름을 보고 능히 점을 쳐서 홍수와 가뭄,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았으며,
사람들이 정직한지 사악한지를 알았다.
이때에 이르러 또 신선이 될 시기를 알아 병이 없었으나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성인이라 칭송하였다.
내후(內后)가 이에 <내해奈解>태자와 더불어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내후가 아래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신금(新今)의 나이 아직 많지 않으나, 대임(大任)을 당해내야 하니,
너희 대소 신료(臣僚)들은 짐의 뜻을 능히 깨달아서, 우리 신금을 돕도록 하라.”
고 하였다.
<구도仇都>가 이에 내도(內道)로 섭행하기를 청하여, 내후가 허락하였다.
6군두상(六軍頭上) <흥선興宣>이 죽어, <벽우碧牛>가 대신하였다.
<흥선>은 뛰어난 많은 재주로 여러 번 공을 세워 나라의 주춧돌이 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왕이 도산(桃山)에서 죽자, 상(喪)이 난 것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흥선>의 꿈에 아달라제(阿達羅帝)가 왕과 함께 백대마(白大馬)를 타고 나타나,
장차 천명(天命)으로 하늘에 문안드리러 공(公)을 전위(前衛)로 삼으려 한다고 하였다.
공이 장수의 갑주(甲冑)를 당황하며 찾았다.
갑자기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죽어야 할 때로구나.”라고 하였다.
역시 병이 없었으나 죽었다.
사람들이 두 왕의 신복(身僕)이라 하였다.
<아달라>제는 키는 7척(尺)이고, <벌휴>제는 6척5촌이며, 흥선은 6척이었다.
<아달라>제는 풍성하기가 평균이며 용의 수염이며,
<벌휴>제는 옥안(玉顔)이며, 아름다운 눈을 가졌으며,
<흥선>은 능히 두 분 왕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왕과 형상을 구별할 수 없었다.
<아달라>제가 태자일 때 <벌휴>제와 같이 병관의 직에 있었는데,
인정상으로는 <벌휴>와 <흥선>은 형제와 같았다.
<벌휴>제가 즉위함에 이르자, 대사(大事)를 맡겼다.
대정(大政)이 그 손에서 나왔으며, 오랑캐(夷狄)들이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아파하며, 눈물을 쏟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사당의 이름을 대사(大祠)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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