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支所禮王妃毛利神母 寡居以其財宝歸先今 未幾其女只珍內禮 亦受先今寵

一日夢見大盧神君騎黃赤虎來 授寶月珠 只珍內禮受 而呑之

固言于先今 今吉之 乃合而生帝 頗異有精彩 乃承嫡統

只珍內禮 始以二骨爲聖母 登天宮位 先今崩 自以爲恩重而殉之

遺命分骨 于私夫昔鄒陵 上至孝 依其命 分骨 因尊昔鄒爲葛文王

以胞弟伐休爲其太子 上自幼友愛 凡有所好 必傾與之

伐休亦至誠事帝 未嘗離側 不以己心 爲心唯從 上好

上太子時 恐違先今 密近于汗介 及先今 不預以八生相約 密以璽宝居之

伐休諫之曰 父今尙嚴 兄何自急

汗介密囑于上 曰 小兒窺爾位無爲洪介所欺

上曰 吾弟無他意 汝何妬之

乃命伐休入井居之 媚事汗介 及登大位 以休妻黃氏紫凰皆爵權妻 入井居之

時稱二君

 

처음 <지소례支所禮>왕비 <모리毛利>신모가 과부로 지낼 때

재화와 보물을 선금(先今){일성}에게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딸 <지진내례只珍內禮>가 또한 선금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꿈에 <대노大盧>신군(神君)이

황적(黃赤)색 호랑이를 타고 보월주(寶月珠)를 주어 <지진내례>가 받아 삼키었다.

 

그런 연유로 선금에게 말하니, 지금이 길한 때라 하여 이에 합방하고 왕(帝)을 낳았다.

 

빼어나고 기이한 정채(精彩)가 있었다. 이에 적통(嫡統)을 이었다.

 

<지진내례>는 두개 성씨(二骨)의 성모(聖母)가 된 시초다.

 

<지진내례>는 박씨{아달라}와 석씨{벌휴}의 어머니다. 

 

천궁(天宮)의 자리에 올랐다.

 

선금이 죽자 스스로 성은을 중히 여겨 선금을 따라 죽었다.

 

사부(私夫) <석추昔鄒>의 무덤에 분골(分骨)하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다.

 

왕이 효성이 지극하여 그 명에 의하여 분골하였다.

 

그로 인하여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높이었다.

 

이로써 같은 어머니의 동생 <벌휴伐休>를 태자로 삼았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있고,

무릇 좋아하는 바가 있어 반드시 다투더라도 함께 하였다.

 

<벌휴> 역시 지성(至誠)으로 왕을 섬겼다.

 

아닌게 아니라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을 형의 마음으로 삼았다.

 

오로지 왕을 따르며 좋아하였다.

 

왕이 태자일 때 선금에게 어긋날까 두려워하면서도 은밀히 <한개汗介>와 가까워졌다.

 

선금이 관계를 가지지 못함에 이르자 서로 팔생(八生)을 약속하였다.

 

은밀히 새보(璽宝)를 가지고 살았다.

 

<벌휴>가 간하여 말하기를

 

“부금(父今, 아바마마)은 아직 엄한데, 형은 어찌 스스로 급한가?”라고 하였다.

 

<한개>가 은밀히 왕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어린 아이{벌휴}가 너의 자리를 엿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홍개洪介>{벌휴의 장모}를 속였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동생은 다른 뜻이 없다. 너는 어찌 시새움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이에 <벌휴>를 정(井){궁궐}에 들어와 살게 하고,

<한개>를 아첨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대위(大位){제위}에 오르기에 이르자,

벌휴의 처 <황씨黃氏>와 <자황紫凰> 모두 권처의 직위를 내려,

정(井)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시에 2군(二君){두 명의 군주}이라 칭하였다.


 

二月 先今崩 上與只后登祚 受朝

只后 以板檍爲伊伐飡 馬元稟主

 

2월 선금이 죽었다. 왕과 지후(只后)가 즉위하여 조회를 받았다.


 

 

구지왕 25년(AD.212) 임진

2월 신라왕 일성(逸聖)이 죽었다.

왕이 동생 고시(古尸)를 보내어 조문하고, 선례에 따라 부의를 보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지후(只后)가 <판억板檍>을 이벌찬으로 <마원馬元>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內禮汗介爲左右后

以只后命 追尊昔鄒爲葛文王 伐休爲太子

 

3월 <내례內禮>와 <한개汗介>를 좌우후(左右后)로 삼았다.


지후(只后)의 명으로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고,

<벌휴伐休>를 태자로 삼았다.


 

 

四月 只后與上及內后 謁桃山 謂上曰 內后聖骨正統 可以傳吾位乃以服加之

托自禱于神 而斷髮爲尼 上恨之無 及葬先今 遂殉 而從之 以遺命分骨壤井

 

4월 지후(只后)가 왕과 내후(內后){내례}와 도산(桃山)으로 가서 조상을 알현하고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후는 성골정통(聖骨正統)이니, 가히 나의 자리를 전달할 수 있다.”라고 하며,

 

이에 적복(翟服)을 더하였다.

 

스스로 신에게 의탁하기를 기도하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구니가 되었다.

 

하늘에 원통함은 없다고 하며,

선금을 장사지냄에 이르자 끝내 따라 죽었다.

 

유명(遺命)을 쫓아 양정(壤井)에 분골(分骨)하였다.


 

五月 仙徒可馬成治等欲立 班君之子忽郞 起仙軍 鷄徒虎徒馬徒多從之 牛徒羊徒反之

上命長昔討平之 忽郞君走入太伯神山 命勿追 命置郞君奴 屬于神山

 

5월 선도(仙徒) <가마성치可馬成治>등이

<반군班君(156-181)>{지마와 애후의 아들}의 아들 <홀랑忽郞>(179-236)>군을

세우기 위해 선군(仙軍)을 일으켰다.

 

계도(鷄徒), 호도(虎徒), 마도(馬徒)는 따르는 자들이 많았고,

우도(牛徒), 양도(羊徒)는 반대하였다.

 

왕이 <장석長昔>에게 쳐서 토평하도록 명하였다.

 

<홀랑>군은 태백신산(太伯神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왕이 추격하지 말라 명하고,

<홀랑>군의 노비를 석방하여 태백신산에 속하도록 명하였다.



六月 太子汗昔自阿瑟羅入朝 曰 聖人當國 老臣願以壽憲獻

而來上 賜日知宅居之 復妻文介 昔以汗介之父 被召遇 以太公禮

 

6월 태자 <한석汗昔>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입조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라를 맡았으니 노신은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여 왔나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일지日知>의 집을 내려 살도록 하고, 다시 <문개文介>를 처로 주었다.

 

<한석>은 <한개汗介>의 아버지로, 부름을 받아 태공(太公)의 예(禮)로 대우하였다.


 

七月 太太文其薨 葬以神母禮 加洪完及其妻章氏玄方爵 以洪介爲太聖

 

7월 태태(太太) <문기文其>가 죽었다. 신모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홍완洪完>과 <홍완>의 처 <장씨章氏>와 <현방玄方>에게 작위를 더하였다.

 

이로써 <홍개洪介>를 태성(太聖)으로 삼았다.


 

八月 大享四徒 于南桃

上幸洪介井 禱文其太太神 仍幸洪介

洪曰 妾年尙少 太聖之位 雖貴不如三母上可之 復以洪介爲聖母

 

8월 남도(南桃)에서 4도(四徒)에게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왕이 <홍개洪介>정(井)에 행차하여 <문기文其> 태태(太太)의 신령에게 기도하였다.

 

이에 <홍개>에게 행차하였다.

 

<홍개>가 말하기를

 

“첩의 나이 아직 젊으니 태성의 지위가 비록 귀하나, 삼모(三母)와 같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하여 <홍개>를 다시 성모로 삼았다.


 

十月 以王理聖母爲太聖 納理爲左井 洪介爲右井 內禮爲眞骨 汗介爲大元

左爲日宮 右爲月宮 眞骨爲天宮 大元爲地宮 太聖爲神宮

黃氏爲春宮 紫凰爲夏宮 辣后爲秋宮 葛后爲冬宮

命宅師一新宮室 九宮之制 乃立

 

10월 이로써 <왕리王理>{지마와 애후의 딸}성모를 태성(太聖)으로 삼고,

<납리納理>를 좌정(左井), <홍개洪介>를 우정(右井), <내례內禮>를 진골(眞骨),

<한개汗介>를 대원(大元)으로 삼았다.

 

좌정(左井))을 일궁(日宮)으로, 우정(右井)을 월궁(月宮)으로,

진골을 천궁(天宮)으로, 대원을 지궁(地宮)으로, 태성을 신궁(神宮)으로 하였다.

 

<황씨黃氏>를 춘궁(春宮)으로, <자황紫凰>을 하궁(夏宮)으로,

랄후(辣后)를 추궁(秋宮)으로, 갈후(葛后)를 동궁(冬宮)으로 삼았다.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궁실을 일신하도록 하였다.

 

9궁(九宮)의 제도가 이에 세워졌다.



十一月 行先今愛后只后大祭 于蛇陵門 以內后爲祭主

召文夫余加耶諸國來弔

 

11월 선금(行先){일성}과 애후(愛后)와 지후(只后)의 큰 제사를

사릉문(蛇陵門)에서 행하였다.

 

내후(內后){지마와 애례의 딸}를 제주(祭主)로 삼았다.

 

소문(召文), 부여(夫余), 가야(加耶) 여러 나라에서 와서 조문하였다.


 

十二月 汗昔太公請立黑齒祠 許之

 

12월 <한석汗昔>태공이 흑치사(黑齒祠)를 세우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이때 <지마>와 애후의 자녀 <우옥>과 <좌옥> 39세, <금녀> 36세,

<반군>의 아들 <홀랑> 35세, <납리> 34세, <내례> 28세

<일성>과 애후의 자녀 <호례> 31세, <삼공> 25세, <오공> 22세,

<일성>과 <자리>의 아들 <자정> 15세

아달라왕 34세, 벌휴 25세, <자황> 24세, <골정> 7세, <이매> 3세

<홍개> 46세, <문개> 43세, <한개> 24세이다.

 

 

 

 

아달라왕 원년(AD.213)

 

元年 正月 上與五后 受朝大井

 

정월 왕과 5后가 대정(大井)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大宴骨門 汗后生女達介

上曰 朕多女 而未生子 汝以都都 亦生女乎

汗曰 妾始生汝身 所生爲貴 汝何言南女乎 所以 都者 攝于神也 今與汝接 安得爲都乎

 

2월 골문(骨門)에게 큰 잔치를 벌였다.


한후(汗后){한개}가 딸 <달개達介>를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딸이 많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너는 도도(都都)인데 역시 딸을 낳느냐?” 라고 하였다.

 

<한개>가 말하기를

 

“첩은 바야흐로 당신의 자식을 낳음으로 귀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찌 남녀를 말하십니까?

도(都)라는 까닭은 신에 접응하기 때문이니,

지금 당신과 함께 신을 접한다면 어찌 도(都)를 얻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三月 繼元伊伐飡 淡色稟主 康禮兵飡 洪完左部執書 如老右部執書

大日大師小光太子薨 汗昔太公代之 以古治爲大道師

 

3월 <계원繼元>을 이벌찬, <담색淡色>{마공의 딸}을 품주로 삼았다.

 

<강례康禮>를 병찬, <홍완洪完>을 좌부집서, <여로如老>를 우부집서로 삼았다.


 

 

아달라왕 원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대일대사(大日大師) <소광小光>태자가 죽었다.

 

<한석汗昔> 태공에게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고치古治>를 대도사(大道師)로 하였다.


 

四月 亥鄒爲角干 圓孝沃沮軍事

 

4월 <해추亥鄒>를 각간(角干)으로, <원효圓孝>를 옥저군사(沃沮軍事)로 삼았다.


 

六月 汗后率骨女百人 大行流頭 于蚊川 上服骨女衣密從 汗后使骨女不能知

流罷 上出舞岩上 諸女大驚 名其岩曰 尼今岩百女奉帝 至泉曰 百女泉

 

6월 한후(汗后)가 골녀(骨女) 100인을 거느리고

문천(蚊川)에서 유두(流頭)를 크게 행하였다.

 

왕이 골녀의 옷을 입고 은밀히 한후(汗后)를 따라가며,

골녀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유두(流頭)가 끝나자 왕이 바위 위에 올라와 춤을 추었다.

 

모든 여자들이 크게 놀랐다.

 

그 바위를 이름하여 니금암(尼今岩)이라 하고,

100명의 여자들이 왕을 모시고 이른 샘을 백녀천(百女泉)이라 부른다.


 

七月 行大月歌

阿瑟羅太守虹彘 無嫡而薨 上命內公爲虹彘妻陽地繼夫 內公乃上之叔父也

陽地入京 謝恩曰 不意今日中興祖業

 

7월 월가(月歌)를 크게 행하였다.


아슬라(阿瑟羅)태수 <홍체虹彘>가 적자가 없이 죽었다.

 

왕이 <내공內公>을 <홍체虹彘>의 처 <양지陽地>의 계부(繼夫)로 하였다.

 

<내공>은 왕의 숙부(叔父)다.

 

<양지陽地>가 입경하여 감사하며 말하기를

 

“오늘 뜻하지 않게 조상의 기업을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九月 以牛徒主古治爲大道師

洪后生伐休子納正 而詐稱上子 上大喜 洗之曰 今始生子 汝吾妻也洪后百媚 而欺之

洪后自先今時 密納其婿伐休 休自懼 乃引上通之 而復爲寵后

上使伐休 同處聖井 混合四宮 欲得子門 故洪后以納正爲上子 而上不疑也

上幸敦父茅 辛其妻文拜敦父爲通路將軍 文上之異母妹也

上幼時相洽 故至時復幸 乃請入井故也

 

9월 우도(牛徒)의 주(主)인 <고치古治>를 대도사(大道師)로 삼았다.


213년 3월 기사와 중복된다. 228년 10월 징연 기사에 자세하다.


홍후(洪后){홍개}가 <벌휴伐休>의 아들 <납정納正>을 낳고

왕의 자식이라고 사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아기를 씻겨주며 말하기를

 

“지금 처음으로 나의 아들을 낳으니, 너야 말로 나의 처다.”라고 하였다.

 

홍후가 갖가지 아첨하며, 그 사실을 속였다.

 

홍후는 선금때부터, 사위인 <벌휴>를 은밀히 거두었다.

 

<벌휴>가 스스로 두려워하자, 이에 왕을 끌어들여 통하게 하였다.

 

다시 총애를 받는 후가 되었다.

 

왕이 <벌휴>로 하여금 같은 곳에 살도록 하였으나,

성정(聖井)을 뒤섞어 4궁(四宮)으로 하여 아들을 얻는 비결(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런 연유로 홍후가 <납정>을 왕의 아들이라 하였지만, 왕이 의심하지 않았다.


왕이 <돈부敦父>의 집에 거둥하여, 그의 처 <문군文窘>에게 행차하였다.

 

<돈부敦父>에게 통로장군(通路將軍)의 벼슬을 내렸다.

 

<문군文窘>은 왕의 다른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왕이 어렸을 때 서로 흡족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이때에 이르러 다시 <문군>에게 행차하여,

이에 정(井)으로 들어오길 청하였던 까닭이다.


 

十月 夫余美姬天乙地乙來 夫余歎媚二君 揀?其骨女之美者 獻于上及伐休也

 

10월 부여의 아름다운 계집 <천을天乙>과 <지을地乙>이 왔다.

 

부여는 2군(二君){아달라와 벌휴}을 칭찬하며 아첨하고,

부여의 골녀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받들어, 왕과 벌휴에게 바쳤다.



十一月 大宣角干薨 以其子大郞爲京都兵官 興宣爲護城兵官

皆先今之外孫 有渠父之風

 

11월 <대선大宣> 각간이 죽어, 그의 아들 <대랑大郞>을 경도병관(京都兵官)으로,

<흥선興宣>을 호성병관(護城兵官)으로 삼았다.

 

모두 선금의 외손인데 우두머리의 기질이 있었다.



十二月 上幸黑齒祠拜像

文介生汗昔子文昔 上幸其茅 賜米衣

 

12월 왕이 <흑치黑齒>의 사당에 행차하여 상(像)에 절하였다.


<문개文介>가 <한석汗昔>의 아들 <문석文昔>을 낳았다.

 

왕이 그 집에 행차하여, 쌀과 옷을 내렸다.

 

 

 

 

아달라왕 2년(AD.214)

 

二年 正月 上與內后祀祖廟 大赦天下

康禮伊伐飡 金女稟主 興宣一吉飡 賜興宣母解生大白馬

 

정월 왕과 내후(內后)가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에 대사면을 하였다.


<강례康禮>를 이벌찬, <금녀金女>를 품주로,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흥선>의 어머니 <해생解生>에게 대백마(大白馬)를 주었다.


 

 

아달라왕 2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二月 上與辣后謁壤井 祀吐解大神 命伐休爲法

 

2월 왕과 랄후(辣后)가 양정(壤井)을 알현하고,

<토해吐解>대신(大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벌휴>를 양정(壤井))의 법(法)으로 삼으라 명하였다.


 

三月 試射士 于北川

藥師白知爲兵官調理

3월 북천(北川)에서 사사(射士){궁수}를 시험하였다.


약사(藥師) <백지白知>를 병관(兵官) 조리(調理)로 삼았다.


 

四月 大求人才 于州郡 勿拘骨地而擧

4월 주군(州郡)에서 인재를 크게 모았다.

 

골품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천거하였다.


 

五月 文窘生上子達文 上洗之

 

5월 <문군文窘>이 왕이 아들 <달문達文>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九月 大行月歌 于閼川

 

9월 알천(閼川)에서 월가(月歌)를 크게 행하였다.


 

十一月 以羽林年功者 分屬州郡

禁民私自遷移 投入雜徒

11월 우림(羽林)군에 여러 해 동안 공로가 있는 자는 주군에 나누어 벼슬을 주었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옮겨 다니거나, 잡도(雜徒)를 투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아달라왕 3년(AD.215)

 

三年 正月 洪完伊伐飡 章氏稟主

 

정월 <홍완洪完>을 이벌찬, <장씨章氏>를 품주로 삼았다.


 

 

三月 汗后生 上子達子 賜酺三日

 

3월 한후(汗后)가 왕의 아들 <달자達子>를 낳았다.

 

3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四月 隕霜 內后生伐休女昔禮

妙德公主生居利子欽室 賜米衣

 

4월 서리가 내렸다.


내후(內后)가 <벌휴伐休>의 딸 <석례昔禮>를 낳았다.


<묘덕妙德>공주가 <거리居利>의 아들 <흠실欽室>{박제상의 증조부}을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五月 通路敦父開鷄立岺 功成召還 以大解代之

 

5월 통로(通路) <돈부敦父>가 계립령(鷄立岺)을 열어,

공을 이루자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해大解>가 통로(通路)의 직을 대신하였다.


 

아달라왕 3년

4월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에 길이 개통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계립령(鷄立岺)은 경북 문경에서 괴산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계립령(鷄立岺)의 개통으로 대가야는 위협을 느끼게 된다.


        

七月 加耶世主阿修獻方物 好禮生上女七禮

 

7월 가야(加耶)의 세주(世主) <아수阿修>가 방물(方物)을 바쳤다.


<호례好禮>가 왕의 딸 <칠례七禮>를 낳았다.


 

 

八月 以 敦父文侰爲京路

 

8월 <돈부敦父>와 <문군文窘>을 경로(京路)로 하였다.


 

十月 甘文大亂 命暖門討平之

 

10월 감문(甘文)에서 큰 난이 있어, <난문暖門>에게 명하여 토평하였다.



十二月 命骨女修女藝 于南桃

以蛙山鎭爲郡

大道師古治爲大師 賜名澄然

 

12월 골녀(骨女)들에게 명하여 남도(南桃)에서 여자들의 기예를 닦도록 하였다.


와산(蛙山)진(鎭)을 군(郡)으로 삼았다.


대도사(大道師) <고치古治)를 대사(大師)로 하고 <징연澄然>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아달라왕 4년(AD.216)

 

四年 正月 吉玄伊伐飡 完解稟主

 

정월 <길현吉玄>을 이벌찬, <완해完解>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置甘勿馬山二縣

 

2월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2현을 설치하였다.



三月 巡至長岺鎭 賜將士征袍

 

3월 백성을 어루만지며 장령(長岺)진(鎭)에 이르러, 장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아달라왕 4년

2월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四月 多婆那以迎烏(또는 )郞爲君

 

4월 다파나(多婆那)가 <영오랑迎烏郞>을 임금(君)으로 삼았다.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지 4년 정유(丁酉, AD.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문득 바위 하나〈또는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있어,

연오랑을 업고 일본(日本)으로 돌아갔다.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고 세워 왕을 삼았다.

〈일본제기(日本帝紀)를 살펴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작은 나라의 왕이지, 일본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괴이하게 여겨 돌아오는 곳을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이 있었다.

역시 그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바위가 또한 세오를 업고 전(前)과 같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아뢰어 (세오를) 바쳤다.

부부가 서로 만나, 세워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빛이 없었다.

일자(日者,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나라에 내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서 두 사람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 그리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였더라도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림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비단을 주니, 그 말에 의지하여 제사를 지냈다.

연후에 해와 달이 예전과 같았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 임금의 창고)에 감추어 두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그 창고를 이름 하여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삼국유사 연오랑과 세오녀> 


삼국유사에는 연오랑(延烏郞)으로

영일읍지에는 영오랑(迎烏郞)으로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영오> 세오녀가 왜로 간 해는 216년이다.


         

五月 西路瓜盧彡達入朝 上與四后會食 達乃上之胞妹也 上思之而召也

骨花大母薨 嘗與骨夂作骨花經 進之 年七十五

 

5월 서로(西路) <과노瓜盧>와 <삼달彡達>{삼달라}가 입조하였다.

 

왕과 4후가 모여 식사를 함께 했다.

 

<삼달라>는 왕의 같은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왕이 그리워하여 부른 것이다.


<골화骨花>대모가 죽었다.

 

일찍이 <골치骨夂>{골화의 모}와 함께 골화경(骨花經)을 지어 진상하였다.

나이 75세였다.

 

<골화>는 185년에 난산으로 죽었다.

216년은 <골치>가 지은 골화경(骨花經)을 진상한 해이다. 


 

七月 以邊倍爲紇古祠主 命新其宇 而享牛徒

 

7월 <변배邊倍>를 흘고사(紇古祠)의 주(主)로 삼았다.

 

그 지붕을 새로 하도록 명하였고, 수고를 한 우도(牛徒)를 대접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를 행하였다.


 

九月 伊飡索斗卒 斗善文章能吏治 時稱能斗

其子女亦皆美 而善文辭鄕歌 扶余姬天乙生紫井女紫乙 賜米

 

9월 이찬 <색두索斗>가 죽었다.

 

<색두>는 뛰어난 문장가로, 능숙하게 벼슬아치를 다스렸다.

 

당시에 <능두能斗>라고 칭송하였다.

 

그 자녀들 역시 모두 아름답고, 문사(文辭)와 향가(鄕歌)에 뛰어났다.


부여의 계집(姬) <천을天乙>이 <자정紫井>의 딸 <자을紫乙>을 낳아 쌀을 내렸다.


 

十二月 如老伊伐飡 粉生稟主

 

12월 <여로如老>를 이벌찬, <분생粉生>을 품주로 하였다.



 

 

 

아달라왕 5년(AD.217)

 

五年 正月 上巡行六部察民 飢寒者恤之

 

정월 왕이 6부를 순행(巡行)하여 백성들을 살피고,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구휼하였다.


 

二月 阿瑟羅太守臼臣卒 子寬公代之

 

2월 아슬라(阿瑟羅)태수 <구신臼臣>이 죽어 아들 <관공寬公>이 계승하였다.


 

三月 命將軍大解開大嶺

妙德公主生上女妙亥 上洗之

野人來獻土物 請文師二人 藥師二人

 

3월 장군 <대해大解>에게 명하여 대령(大嶺)을 개통하였다.


<묘덕妙德>공주가 왕의 딸 <묘해妙亥>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야인(野人)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문사(文師) 2인과 약사(藥師) 2인을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아달라왕 5년

3월 죽령이 개통되었다. 왜인이 예방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五月 甘文太子旭方 爵阿飡 尙福福河公主

 

5월 감문(甘文)태자 <욱방旭方>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복복하福福河>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七月 凉雨來旬

 

7월 차가운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十月 伐休妻紫凰生上女宝凰 上洗之

 

長昔伊伐飡 倉歇稟主 邊旱右部執書

 

10월 <벌휴伐休>의 처 <자황紫凰>이 왕의 딸 <보황宝凰>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장석長昔>을 이벌찬으로, <창헐倉歇>을 품주로 삼았다.

 

<변한邊旱>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일성(지진내례) - 아달라(180-243, 8대왕 재위 213-243)

석추(지진내례) - 벌휴(189-256, 9대왕 재위 244-256)

소광(애황) - 자황(190-266) 

아달라(자황) - 보황(217-326)

 

 

 

 

 

아달라왕 6년(AD.218)

 

六年 正月 上與內后 行黃狗祭 于閼川

 

정월 왕과 내후가 알천(閼川)에서 황구(黃狗=戊戌)제를 지냈다.


 

 

三月 伊飡邊于卒 善文章 音律 美風采 仙門惜之

 

3월 이찬 <변우邊于>가 죽었다.

 

문장(文章)과 음률(音律)이 뛰어나고, 풍채(風采)가 아름다웠다.

 

선문(仙門)이 애석해하였다.


 

四月 好禮生郁甫子仇道 上幸其茅 賜米衣

 

4월 <호례好禮(183- )>가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218-301)>를 낳았다.

 

왕이 그 집에 행차하여, 쌀과 옷을 내렸다.

 

일성(애례) - 호례(183- )

수류(사리) - 욱보(183?- )

욱보(호례) - 구도(218-301)

 


 

五月 波珍飡淵公卒 年三十九 善擊毬 好神畵 上寵愛之

以其妻板岳 妻暖門 舍人松良與上女國氏私通 命流松良 尋妻之

 

5월 파진찬 <연공淵公(180-218)>이 39세로 죽었다.

 

격구(擊毬)를 잘하고, 신화(神畵)를 좋아했다.

 

왕이 그것을 총애하였다.

 

<연공의 처 <판악板岳>을 <난문暖門>에게 시집보냈다.


사인(舍人) <송량松良>이 왕의 딸 <국씨國氏>와 사통(私通)하였다.

 

<송량>을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국씨>가 <송량>을 찾아서 그에게 시집보냈다.

 

포공(연씨) - 연공(180-218)


 

 

六月 阿瑟羅寬公卒 弟田公代之 寬公寬仁善歌舞好遊

連其妻文君與田公 相通情好 寬公知之 出遊 自陷深淵云 或云羽化不返

 

6월 아슬라(阿瑟羅) 태수 <관공寬公>이 죽어 동생 <전공田公>이 계승하였다.

 

<관공寬公>은 너그럽고 어질며, 가무(歌舞)에 능하고, 모여 놀기를 좋아하였다.

 

<관공寬公>의 처 <문군文君>이 <전공田公>과 상통(相通)하여 정분이 좋자,

<관공寬公>이 그것을 알고 밖으로 놀러가 스스로 깊은 연못에 빠져죽었다고 한다.

 

혹은 신선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九月 瓜盧伊伐飡 彡達稟主 邊旱左部執書 文完右部執書 皆邊于子也 時人榮之

 

9월 <과노瓜盧>를 이벌찬, <삼달彡達>{삼달라}를 품주로 삼았다.

 

<변한邊旱>을 좌부집서, <문완文完>을 우부집서로 삼았는데

모두 <변우邊于>의 아들이다.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아달라왕 7년(AD.219)

 

七年 正月 上幸郁甫宅 幸好禮 加郁甫爵

 

정월 왕이 <욱보郁甫>의 집에 거둥하여, <호례好禮>에게 행차하였다.

 

<욱보郁甫>의 작위를 더하였다.


 

三月 福福河主生旭方子福方 賜米衣

 

3월 (감문) <복복하福福河>주(主)가 <욱방旭方>의 아들 <복방福方>을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四月 暴風雨七日 閼川大漲 人戶多流 命羽林防水

穀公祠奴忠今怒 濤中負像而出 特賜大鳥

金城北門自毁 上問責 于仙老

 

4월 폭풍우가 7일 동안 계속되어, 알천(閼川)이 넘치고,

백성들의 집이 많이 떠내려갔다.

 

우림(羽林)(軍)에게 제방을 막도록 명하였다.


곡공사(穀公祠)의 노비 <충금忠今>이,

성난 물결속으로 들어가 <곡공>의 상(像)을 업고 밖으로 나왔다.

 

특별히 큰 새를 하사하였다.


금성(金城) 북문이 저절로 무너져, 왕이 선로(仙老)를 문책(問責)하였다.


 

아달라왕 7년

4월 폭우로 알천이 넘쳐서 집이 떠내려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謁賢伊伐飡 瓜仁稟主 文完左部執書 敦車右部執書

賜邊汗母昭于年穀 加耶阿修殂 其妻毗可自立 以庶子宇理爲繼夫

 

7월 <알현謁賢>을 이벌찬, <과인瓜仁>을 품주로 삼았다.

 

<문완文完>을 좌부집서로, <돈차敦車>를 우부집서로 삼았다.

 

<변한邊旱>의 어머니 <소우昭于>에게 해마다 곡식을 주었다.


가야(加耶) <아수阿修>가 죽어, 그의 처 <비가毗可>가 스스로 섰다.

 

서자(庶子) <우리宇理>가 남편을 이었다.


 

八月 伊飡長昔卒 以其妻倉歇 妻邊旱

 

8월 이찬 <장석長昔>이 죽었다.

 

이로써 <장석長昔>의 처 <창헐倉歇>을 <변한邊旱>에게 시집보냈다.


 

九月 上幸京安公主 于日宗宅 命入權井

 

9월 왕이 <일종日宗>宅으로 가서 <경안京安>공주에게 행차하였다.

 

권정(權井)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十月 吐己長岺太守

伐休妻黃氏 妻邊長

 

10월 <토기吐己>를 장령(長岺)태수로 삼았다.


<벌휴伐休>의 처 <황씨黃氏>를 <변장邊長>에게 시집보냈다.


 

十一月 太公汗昔薨 加文介穀五十石 猩公大日大師

 

11월 태공 <한석汗昔>이 죽었다.

 

<문개文介>에게 곡식 50석을 더하였다.

 

<성공猩公>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十二月 送征袍 于西北路

 

12월 서북로(西北路)에 갑옷(征袍)을 보냈다.

 

 

 

 

 

아달라왕 8년(AD.220)

 

八年 正月 洪夫骨門大書 可氏書主 潛宣小書

 

정월 <홍부洪夫>를 골문대서(骨門大書), <가씨可氏>를 서주(書主),

<잠선潛宣>을 소서(小書)로 삼았다.


 

二月 郁甫諫上多寵 上怒以爲妬好禮 命流長岺

 

2월 <욱보郁甫>가 왕에게 총애가 많음을 간(諫)하였다.

 

왕이 노하여 <호례好禮>를 시새움하는 것으로 여겼다.

 

장령(長岺)에 유배를 보내도록 명하였다.


 

 

三月 妙德生上女妙君 上洗之

 

 

3월 <묘덕妙德>공주가 왕의 딸 <묘군妙君>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四月 阿瑟羅南太守內公薨 子松君繼之

 

4월 아슬라(阿瑟羅) 남태수 <내공內公>{아달라의 숙부}이 죽었다.

 

아들 <송군松君>이 계승하였다.


 

五月 好禮生上女九禮 上洗之

 

5월 <호례好禮>가 왕의 딸 <구례九禮>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六月 邊旱伊伐飡 倉歇稟主

 

6월 <변한邊旱>을 이벌찬으로, <창헐倉歇>을 품주로 삼았다.


 

七月 南路大蝗 海魚出 死者甚多

 

7월 남로에 메뚜기 떼가 들었다. 바다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죽은 것이 심히 많았다.


 

아달라왕 8년

7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고, 바다 고기가 육지로 올라와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紫凰生上子奈音 上洗之

 

8월 <자황紫凰(190-266>이 왕의 아들 <내음奈音>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十月 文完妻仙珍生上女仙于 上洗之 加文完爵

 

10월 <문완文完>의 처 <선진仙珍>이 왕의 딸 <선우仙于>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문완文完>의 작위를 더하였다.


 

十二月 行蛇陵大祭

 

12월 사릉대제(蛇陵大祭)를 행하였다.

 

 

 

 

 

아달라왕 9년(AD.221)

 

九年 正月 文完伊伐飡 仙珍稟主

 

정월 <문완文完>을 이벌찬, <선진仙珍>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上與稟主 巡幸沙道城 勞戍卒 從海而還

 

3월 왕과 품주가 사도성(沙道城)에 행차하여 수졸(戍卒)을 격려하고,

바다를 따라서 돌아왔다.


 

아달라왕 9년

왕이 사도성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를 위로하였다.

<삼국사시 신라본기> 



五月 內后生伐休女公禮 上洗之

 

5월 내후(內后)가 <벌휴伐休>의 딸 <공례公禮>(미추이사금의 외할머니}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七月 扶余入貢 藥材玉石 請奉骨女 上命吉宣往其國 議通兩情 答以土物 弔勿氏喪

 

7월 부여(扶余)가 들어와 약의 재료와 옥석(玉石)을 바쳤다.

 

골녀(骨女)를 모시는 일을 물어,

왕이 <길선吉宣>에게 부여로 가서 양국의 정(情)이 통하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물씨勿氏>의 장례에 토산물로 조문하도록 답하였다.


 

十月 召文王妙德以其女雲帽獻之 命入權井

 

帽有身香而美 有殊寵 上幸松良茅 濡其妻國氏 加爵松良 自是累幸國氏

 

10월 소문(召文)왕 <묘덕妙德>이 그의 딸 <운모雲帽(208?- )>를 바쳤다.

 

권정(權井)에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운모雲帽>는 몸에서 향기가 나고 아름다워서 특별한 총애가 있었다.


 

왕이 <송량松良>의 댁으로 거둥하여, 그의 처 <국씨國氏>를 적시었다.

 

 

<송량>에게 작위를 더하였다. 이때부터 <국씨>를 누차 행(幸)하였다.


 

十二月 蚊川祠林中 有大笋聲 于雪中 主採而獻之 上以爲祥 命祀阿世大母

 

12월 문천사(蚊川祠)의 숲속 눈 속에 죽순이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문천사(蚊川祠) 주(主)가 캐어서 바쳤다.

 

왕이 상서롭다하여, <아세阿世>대모(大母)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아달라왕 10년(AD.222)

 

十年 正月 敦車伊伐飡 羅亥稟主 加爵亥母瓜姬與?其弟作平及平子作奴

羅亥善天饍 作平善治園 時人稱 作平園’ ‘羅亥羞

 

정월 <돈거敦車>를 이벌찬, <나해羅亥>를 품주로 삼았다.

 

<나해羅亥>의 어머니 <과희瓜姬>와 <과희>의 동생 <작평作平>과

<작평>의 아들 <작노作奴>의 작위를 더하였다.

 

<나해羅亥>는 임금의 반찬을 잘하고, <작평作平>은 과수원을 관리에 능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작평의 과수원, 나해의 수라’라고 하였다.


 

 

二月 文介生上孿子 痛聲聞外 上爲之獻髮 于産神 男曰 髮公女曰 髮姬

上洗畢 而汗流沾杉 文介猶不捨上 介年已五十有二 而狐媚于上 竟生孿子自苦 人皆笑之

 

2월 <문개文介>가 왕의 쌍둥이 자식을 낳았다.

 

산고의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왕이 이를 위하여 머리카락을 잘라 산신(産神, 삼신할미)에게 바쳤다.

 

남자아이는 <발공髮公>, 여자아이는 <발희髮姬>라고 이름 지었다.

 

왕이 아기를 씻긴 후에 땀이 흘러 삼베옷을 적셨다.

 

<문개>가 오히려 왕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개>는 이미 나이가 52살인데 여우같이 왕에게 아첨하여,

결국엔 왕의 쌍둥이 자식을 낳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四月 命牛羊狗馬虎徒 各守其地 無相侵凌 禁其無品之刀 私藏弓矢

 

4월 우도(牛徒), 양도(羊徒), 구도(狗徒), 마도(馬徒), 호도(虎徒)에게 명하여

각자 자신의 땅을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골품이 없는 자는 칼을 휴대해서는 안 되고,

사사로이 활과 화살을 감추는 것을 금하였다.


 

六月 召郁甫歸京 甫相于長岺得士卒心 一軍仰之如父母 聞其歸 而失聲號哭

 

上與文介幸紇古祠 賜牛徒酒食 命選其通德者十二人 屬于各典給仕

 

 

6월 <욱보郁甫>를 불러 귀경하도록 하였다.

 

<욱보>는 장령(長岺)을 다스려서, 사졸(士卒)의 마음을 얻었다.

 

일군(一軍)이 부모와 같이 우러렀다.

 

<욱보>가 돌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목이 쉴 정도로 울며 불렀다.


왕과 <문개文介>가 흘고사(紇古祠)에 행차하였다.

 

우도(牛徒)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왕의 덕이 통하는 자 12명을 골라 각 전(典)의 급사(給仕)로 발탁하였다.


 

九月 行大場 于南郊

 

9월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行白羊祭 于明活山

 

10월 명활산(明活山)에서 백양제(白羊祭)를 행하였다.


 

十一月 大道大師澄然卒 葬以伊飡禮 澄然以天地日月陰陽爲大道之六經

 

順此者興 逆此者替 講法三十年 仙徒推之 爲牛徒之宗匠

澄然以文其母弟 潛心力學 得通大道 其父文父 嬖臣乾治也

 

11월 대도대사 <징연澄然>이 죽어 이찬의 예로 장사지냈다.

 

<징연>은 천지일월음양(天地日月陰陽)을 대도의 6가지 경전으로 삼았다.

 

따르는 자는 흥하였고, 반하는 자는 쇠퇴하였다.

 

30년 동안 강법(講法)을 하고, 선도들이 받들어 우도(牛徒)의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징연>은 <문기文其>의 동모제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학문에 힘써 대도(大道)에 통하는 힘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는 <문부文父>의 귀여움을 받던 신하 <건치乾治>다.



十二月 爵多牟臣阿飡

上滯雪 于桃山

 

12월 <다모신多牟臣>에게 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왕이 눈에 막히어 도산(桃山)에서 머물렀다.

 

 

 

 

 

아달라왕 11년(AD.223)

 

十一年 正月 暖門伊伐飡 板岳稟主

 

정월 <난문暖門>을 이벌찬, <판악板岳>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雲帽爲七品權妻 松良妻國氏生 上女國元公主 上洗之

 

3월 <운모雲帽>를 7품 권처로 삼았다.


<송량松良>의 처 <국씨國氏>가 왕의 딸 <국원國元>공주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四月 行汗兒大祭 于閼川 毗可生宇理女美理

紫凰生伐休女好買 賜米衣

 

4월 알천(閼川)에서 <한아汗兒>대제(大祭)를 행하였다.


가야의 <비가毗可>{금관출신}가 <우리宇理>의 딸 <미리美理>를 낳았다.


<자황紫凰>이 <벌휴伐休>의 딸 <호매好買>를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五月 命築凉臺 于狼山

 

5월 낭산(狼山)에 량대(凉臺)를 짓도록 명하였다.


 

七月 邊長伊伐飡 黃氏稟主

 

禁小兒捕苑林之蟬蜩 上夢見 蟬王羽衣來訴故也

 

7월 <변장邊長>을 이벌찬, <황씨黃氏>를 품주로 하였다.


어린아이들에게 나라의 동산의 숲에서 매미(蟬蜩)를 잡는 것을 금(禁)하였다.

 

왕이 꿈에서 매미의 왕을 보았는데, 날개옷을 입고 와서 하소연하였기 때문이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一月 禁民奉異國人雜神 上夢見 歡樹王興 異國神爭祠 乃有是令

 

11월 백성들에게 다른 나라의 잡신(雜神)을 모시는 것을 금하였다.

 

왕이 꿈속에서 수왕(樹王)이 흥(興)하자 기뻐하였는데,

다른 나라의 신과 사당을 다투었다.

 

이에 이와 같은 령(令)을 내렸다.

 

 

 

 

 

아달라왕 12년(AD.224)

 

 

正月 上與內后 行靑龍祭 于月池中 命六部仙女 破氷行舟擧火

 

정월 왕과 내후(內后)가 월지(月池)에서 청룡(靑龍=甲辰)제를 행하였다.

 

6부(六部)의 선녀(仙女)들에게 명하여

얼음을 깨뜨리고 배를 저어 횃불을 들도록 하였다.


 

二月 大解伊伐飡 淵活稟主

骨門大書洪夫薨 上痛哀之 厚葬之 洪夫以洪介之出 善文章美風采

 

其妻可氏文其出 魚水而無子 洪夫使其寵臣貝權 命通可氏 觀而樂之

遂生權子女 洪夫取爲己子 權母貝喜 以洪夫奉每 得洪夫寵生 洪夫子洪權

上命爵洪權 許可氏爲貝權妻

太史文格奏 曰 昨夜龍見京都 必有 非常之變 宜令有司備之

上曰 朕聞國君有道 災蘗自消 無道無往不敗 朕若不自修 雖備何益

 

乃令 角干以下奈麻以上言 君之過無隱

群臣皆言 陛下聖德如天 災難自消

 

奈麻骨正獨曰 堯舜之君 亦不得盡善 父今何得盡善 母今常言

父今好色濫財 恐爲民憂 臣亦憂之

骨正伐休之子 年十八 能直言 上嘉之 召而抱之曰

此眞吾子也 汝等若如此子 無隱則庶無失

乃進骨正爵級飡 賜其母紫凰神衣

時上寵愛紫凰子 其子骨正等 特寵無嚴 與上狎遊苑池 故能盡其言也

 

2월 <대해大解>를 이벌찬, <연활淵活>을 품주로 삼았다.


골문대서(骨門大書) <홍부洪夫>(192-224){일성의 아들}가 죽었다.

 

왕이 애통해하며 후하게 장사를 지냈다.

 

<홍부洪夫>는 <홍개洪介>가 낳은 자식이다.

 

문장에 능하고 아름다운 풍채를 가졌다.

 

그의 처 <가씨可氏>는 <문기門其>의 자식이다.

 

물고기와 물과 같았는데 자식이 없었다.

 

<홍부洪夫>는 그가 총애하는 신하 <패권貝權>에게 시키어

<가씨可氏>와 통하도록 명하고, 보면서 즐거워하였다.

 

드디어 <패권>의 자녀가 태어났다.

 

<홍부洪夫>는 자신의 자식으로 취하였다.

 

<패권貝權>의 어머니 <패희貝喜>는 <홍부洪夫>를 매번 모셨는데,

<홍부洪夫>의 총애를 받는 <홍부洪夫>의 아들 <홍권洪權>을 얻게 되었다.

 

왕명으로 <홍권洪權>에게 작위를 내리고,

<가씨可氏>를 <패권貝權>의 처로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사(太史) <문격文格>이 여쭈어 아뢰기를

 

“어젯밤에 용이 경도(京都)에서 보였습니다.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령을 내려 벼슬아치에게 준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나라의 왕이 도(道)가 있으면 재난의 그루터기는 스스로 없어진다고 들었다.

무도(無道)함이 없으면 예로부터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짐이 만약 스스로 도덕과 품행을 기르지 않는다면

비록 준비한다하더라도 무엇이 나아지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각간(角干)이하 내마(奈麻)이상의 신하로 하여금

임금의 잘못을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폐하의 성덕이 하늘과 같으니 재난은 스스로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마(奈麻) <골정骨正(207-285)>이 홀로 말하기를

 

“요순(堯舜)임금도 역시 선(善)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아바마마께서는 어찌 진선(盡善)에 이름이 있겠습니까.

어마마마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아바마마는 호색하고 재물을 낭비하니,

백성의 근심함을 두려워하셔야 하며 신 또한 그것을 근심합니다.”라고 하였다.

 

<골정>은 <벌휴伐休>의 아들이고, 나이 18세이지만 능히 직언(直言)을 할 수 있었다.

 

왕이 훌륭하다하여 <골정>을 불러 안으며 말하기를

 

“너야 말로 진실한 나의 아들이다.

너희들은 만약 이 아이와 같이 숨김이 없다면 곧 여러 잘못이 없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골정>의 작위가 급찬(級飡)에 나아갔다.

 

<골정>의 어머니 <자황紫凰>에게는 신의(神衣)를 내렸다.

 

당시 왕이 <자황>의 아들을 총애하여,

<자황>의 아들 <골정> 등에게는 특별히 엄함이 없었다.

 

왕과 더불어 동산과 연못에 놀러 다녔다.

 

그런 연유로 능히 그런 말을 다할 수 있었다.



五月 行紇古大母祭 于吉公祠 上臨其祭 賓于祭主 板岳板失賜其族 衣酒有次

 

5월 <흘고紇古>대모의 제사를 길공사(吉公祠)에서 지냈다.

 

왕이 그 제사에 참석하였다.

 

<빈우賓于>를 제주(祭主)로 하였다.

 

<판악板岳>과 <판실板失> 그 친족에게 옷과 술을 내림에 차례가 있었다.


 

十月 吉宣謀反事覺 走入夫余 上命夫余獻之 夫余不聽 上大怒 命大解將西路軍伐夫余

吉宣以吉門之孫 密華之子 嫁其女於夫余 而仍爲夫余左平 娶夫余骨女 生子女十余人

置廣宅于其都 上疑其有異謀 不以兵事委之 至是果反兩國失和

 

10월 <길선吉宣(172-225)>이 모반한 일이 드러나, 부여(夫余)로 도망갔다.

 

왕이 부여에게 <길선>을 바치라고 명하였으나 부여가 듣지 아니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대해大解>를 장수로 하여

서로군(西路軍)으로 부여를 치도록 명하였다.

 

<길선吉宣(172-226)>은 <길문吉門>의 손자로, <밀화密華>의 아들이다.

 

그의 딸을 부여로 시집보내어, 이에 부여의 좌평(左平)이 되었다.

 

부여의 골녀(骨女)에게 장가를 가서 자녀 10여인을 낳고,

부여의 도읍에 넓은 저택을 두었다.

 

왕이 괴이한 계책을 의심하여, 병사에 관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결과적으로 반역하여 양국이 화친을 잃게 되었다.


 

아달라왕 12년(AD.165)

겨울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되자

죽임을 두려워하여 백제로 도망갔다.

왕이 글을 보내 그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응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성을 닫고 수비하며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식량이 떨어져 돌아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개루왕 28년(AD.155)

봄 정월 그믐 병신(丙申)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하다 드러나자 우리에게로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돌려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으나

모든 성이 성벽을 단단히 하고, 방어하며 나가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지왕 38년(AD.225) 을사

10월 길선(吉宣)의 일이 실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왕이 길선을 불러들이려 하였다.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지 아니함은 틀림없이 죄를 줄만합니다.

그의 딸이 소국(小國, 백제)의 내군(內君, 왕후)이니

한명의 목숨을 빌려주시면 소국으로서는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라왕이 화가 나서 듣지 아니하고,

장수 대해(大解)를 보내어 침략하였는데 불리하여 돌아갔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10년의 기년차이가 있고,

남당유고 백제왕기와 신라사초도 1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十二月 內后生上女發萱 賜酺群臣

文完奏曰 國有大慶 而出征之士凍餒 于異域 聖人勿爲匹夫之怒

願陛下罷 夫余之役 以洽軍情

上許之 而猶以大解久圍無功 罷其相 仍以貝權作假相 貝權年小 而上愛其妻可氏爲稟主

命貝權代大解之政 至是專之 群臣爭其非

上曰 吾妹之夫 不能出納 吾命則孰爲之

仍超授權 波珍之位 稱曰 假相乃稟主始也

 

12월 내후(內后)가 왕의 딸 <발훤發萱>을 낳아,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문완文完>이 아뢰기를

 

“나라의 큰 경사가 있으니 출정을 한 병사들이 이역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성인(聖人)은 필부(匹夫)처럼 성내지 아니하니,

원컨대 폐하께서 부여와의 싸움을 그만 두시고,

이로써 군대의 상황(軍情)을 흡족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으나,

다만 <대해大解>가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었으나 공이 없었으므로

재상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에 <패권貝權>을 가상(假相, 임시직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패권貝權>은 나이가 어리지만,

왕이 그의 처 <가씨可氏>를 사랑하여 품주(稟主)로 삼았다.

 

<패권>에게 대해의 정사를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오로지하게 되었다. 군신들이 그 잘못을 따졌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여동생의 남편이지만 출납을 할 수 없다.

나의 명이 있으면 누구든지 출납을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파진찬의 지위를 초월하는 권력을 주고, 가상(假相)이라 불렀다.

 

이것이 곧 품주(稟主)의 시초다.


남자가 품주(稟主)를 한 시초이다.

 

 

 


 

아달라왕 13년(AD.225)

 

十三年 正月 上與內后 受朝南桃 宴群臣皆醉舞於前 獨興宣不飮酒戱女

 

上問之 奏曰 我國神造 內無反臣 外無侮國 今凶賊吉宣不滅 在外夫余 有狼心

此豈飮酒之時乎

上嘉之 欲進其爵 興宣曰 無功而爵 則失群臣之心 願試臣于西路 待功而爵之 未晩也

上然之 乃以興宣板失爲西路軍事 以整戎旅

 

정월 왕과 내후(內后)가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잔치를 벌려 군신들이 모두 취하여 왕의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흥선興宣>이 홀로 술을 마시지 않고 여자와 놀지도 않았다.

 

왕이 연유를 물으니, 흥선이 아뢰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神)이 나라를 세우고,

안으로는 반신(反臣)이 없었으며, 밖에서도 나라를 업신여김이 없었는데,

지금 흉적(凶賊) <길선吉宣>이 없어지지 않고 나라 밖 부여에서 살면서

낭심(狼心)이 있으니, 어찌 이처럼 술을 마시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 작위를 올려주려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공이 없는데 작위를 올려주면, 곧 군신의 마음을 잃게 됩니다.

원하건대 신을 시험하시어 서로(西路)로 보내주시고,

공을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작위를 올려주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리하여, <흥선>과 <판실板失>을 서로군사로 삼았다.

 

이로써 군사를 벌이어 정비하였다.


 

三月 可氏有疾 羊元伊伐飡 元弓稟主

 

3월 <가씨可氏>가 병이 있어, <양원羊元>을 이벌찬, <원궁元弓>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吉宣死 于夫余 其君仇知 葬以太公禮

吉宣女田氏爲仇知妻 有寵乃以其女苩氏妻吉宣

吉宣死其子彭宣仍娶苩氏爲妻

先是苩氏與其母兄私通 不肯與彭宣好

仇知乃命 母兄監軍於外 兄不平 欲作亂

仇知弟古尸亦與田氏潛通生子 田氏子素古 時仇知太子 其骨多不平

古尸獨保之 田氏 乃言古尸之忠 委以軍國大事

田氏與古尸彭宣幽仇知 而專政

未幾仇知殂 乃立素古爲君 而田氏古尸專政 苩氏母兄 遂奔末曷

 

5월 <길선吉宣>이 부여(夫余)에서 죽었다.

 

부여의 임금 <구지仇知>가 태공(太公)례로 장사를 지냈다.

 

길선의 딸 <전씨田氏(197-268)>는 <구지>의 처로 총애가 있어,

<구지>의 딸 <백씨苩氏>를 길선에게 시집보냈다.

 

<길선>이 죽자 그의 아들 <팽선彭宣>이 이에 백씨(苩氏)에게 장가들어 처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백씨와 그의 모형(母兄)과 사통(私通)하여

<백화>가 <팽선彭宣>과 좋게 지내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구지>가 이에 모형(母兄){백인}에게 바깥의 군대를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형(兄){백인}이 불평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구지>의 동생 <고시古尸> 또한 <전씨>와 잠통(潛通)하여 아들을 얻었다.

 

<전씨>의 아들 <소고素古>{초고왕}가 당시 <구지>의 태자여서,

그 자식들이 불평함이 많았다.

 

<고시>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전씨>가 <고시>의 충성을 맹세 받고,

나라 안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고시>에게 맡겼다.

 

<전씨>와 <고시>와 <팽선>이 <구지>를 가두고,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지>가 죽어, <소고>를 왕으로 세웠다.

 

<전씨>와 <고시>가 정사를 오로지 하고,

백씨의 모형(母兄){백인}은 드디어 말갈(末曷)로 도망가게 되었다.


 

구지왕 39년(AD.226) 병오

5월 상좌평(上佐平) 길선(吉宣)이 죽었는데 나이 55세였다.

왕이 애통해하며 태공례(太公禮)로 장사를 지냈다.

길선의 아들 팽선(彭宣)은 전씨의 오빠다.

왕이 백화(苩花)를 팽선에게 시집보냈다.

팽선이 백화와 그의 오빠 백인(苩仁)이 밀통하여 신을 박대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왕이 백인에게 밖으로 나가 북한군(北漢軍)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백인이 말하기를

“아바마마가 전씨(田氏)에게 미혹되어, 아들과 동생들을 가벼이 여긴다.”라고 하였다.

왕의 동생 고시(古尸)가 그 말을 듣고, 전씨에게 은밀히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왕자들이 백인과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전씨가 말하기를 “또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고시>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다. 거짓조서로 군사를 일으켜 먼저 제압함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전씨>가 이내 밀부(密符)를 내어

<고시>와 더불어 행내외군사(行內外軍事)로 한다고 영(令)을 내렸다.

<고시>가 이에 왕을 핍박하여 궁궐 깊숙이 가두어 놓고,

소고(素古, 초고왕)를 새로운 왕으로 세워 이로써 천하에 호령하게 하였다.

<고시>는 왕의 서제(庶弟)이다.

그 어머니는 일찍이 왕과 잠통하여 은밀히 궁중비사(宮中秘事)를 고하였다.

자못 왕에게 공이 있었다.

왕 역시 <고시>를 사랑하여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

<고시>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워 전씨와 은밀히 상통하여 아들 소대(素大)를 낳았다.

왕이 알까 항상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인> 등이 그 일을 발설하려 하였다.

그런 연유로 <고시>가 먼저 사로잡으려 한 것이다.

<백인>이 계략이 어긋났음을 알고 말갈(末曷)로 도망쳤다.

<고시>가 이에 전씨와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왕이 근심하고 분노하여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왕은 성군(聖君)으로써 일찍이 치평(治平)으로 이름이 있었다,

다만 여자를 좋아하여, 규문(閨門)의 일을 점검하지 않았으니,

끝내는 사랑하는 동생과 총애하는 처에게 제거됨을 당하니, 애석하도다.

달솔(達率) <연다燕多>와 <격섬鬲閃> 등이 고시를 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여 신라로 귀의하였다.

두 번의 거사가 모의되어 고시가 감히 자립(自立)하지 못하고,

<소고>를 세웠는데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六月 夫余達率燕多來降 賜爵 燕多來報 古尸弑君逐嫡 而祕不發喪 請得精兵報仇

上命議重臣 皆言不知虛實 不可動止之

 

6월 부여(夫余)의 달솔(達率) <연다燕多>가 와서 항복하여 작위를 내렸다.

 

<연다>가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고시古尸>가 왕을 시해하고,

적자를 쫓아내고 숨기어 발상(發喪)을 하지 않으니

정병(精兵)을 얻기를 청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다하였다.

 

왕이 중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으나,

모두 허실을 알지 못하니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여 그치도록 하였다.


 

七月 上與內后汗后入凉臺 召板岳仙珍入供

 

始置海宅 于花田舊地 乃阿惠后與昔公所遊處也 有小鹿亭大鹿亭 奉其像

 

7월 왕과 내후(內后)와 한후(汗后)가 양대(凉臺)에 들어갔다.

 

<판악板岳>과 <선진仙珍>을 불러 모시도록 하였다.


처음으로 해택(海宅)을 화전(花田)의 옛 땅에 세웠다.

 

화전(花田)은 <아혜阿惠>후와 석공(昔公)이 놀던 곳이 있다.

 

소록정(小鹿亭)과 대록정(大鹿亭)이 있고 그 형상을 모셨다.


 

九月 上行松良宅 賜國氏子國良衣 乃上之外孫也

上愛國氏 久置權井 有殊寵而無子 乃降于松良 始生子也

上幸現郞公主宅 賜公主衣酒 公主召文翡貝王胞姉也

年八十七 玉皃如畵 早起掃地 望先今廟拜 次拜上所 如一日

上聞之曰 現郞二十從先今 五十余年又事朕如此 可知其忠也

乃幸其宅 召完郞舍利等 大宴其族

 

9월 왕이 <송량松良>의 집을 행차하여,

<국씨國氏>의 아들 <국량國良>에게 옷을 내렸는데, 곧 왕의 외손이다.

 

왕이 <국씨>를 사랑하여, 오랫동안 권정(權井)에 두었는데,

특별한 총애가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이에 <송량>에게 내렸는데, 처음으로 생긴 아들이다.


왕이 <현랑現郞(139-230)>공주 댁을 행차하여 공주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공주는 소문(召文) <비패翡貝(142- ), 재위 160-162>왕의 같은 어머니 누나이다.

 

나이 87세였는데 옥모(玉貌)가 그림 같았다.

 

일찍 일어나 땅을 쓸고, 선금(先今){일성}의 사당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다음으로 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기를 하루와 같이 변함이 없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현랑>은 20년을 선금(先今)을 따랐고,

또 50여년을 짐을 이와 같으니 섬기니 가히 그 충심을 알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댁을 행차하여,

<완랑完郞>과 <사리舍利> 등을 불러 그 친족들에게 크게 잔치를 열었다.

 

지마(현랑) - 완랑(162- )

일성(현량) - 사리(165?- )

 


 

十月 上與加耶女主毗可 盟于黃山

 

10월 왕이 가야(加耶) 여주 <비가毗可>와 황산(黃山)에서 맹약을 하였다.


 

十二月 上與內后 入海宅

行盤山大師大祭 于日池 上與后 親祀之 命爵盤山大師子孫 隨才擇用

盤山以不世出之神才 早通仙學 化洽百世 德被萬方 眞聖人之聖人也

吉公足公乙公黑齒等 皆師事之

故牛徒虎徒羊徒鷄徒 皆奉之爭 娶盤氏女爲宗主

澄然妻盤花亦師之女也

長澄然八世 能通諸法 澄然事之如母 曰 吾妻乃吾師也

澄然之學 盖出於盤花也 澄然卒 盤花欲殉之 牛徒惜其才 而不許

遂爲澄然子碩然妻 至是爲祭主 年六十九 而氣力尙富 身體肥豊 子夜浴于神井

上曰 汝年已衰 恐傷寒風 雖非神井可也

盤花曰 妾有養精之術 雖隆冬可以入水 當此大祭 安可不浴乎

上壯其言 遂幸盤花于井舍 賜權妻 號後人 以其井爲盤花井

 

12월 왕과 내후(內后)가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일지(日池)에서 <반산盤山(105?- )>대사의 대제(大祭)를 왕과 후가 친히 지냈다.

 

 

<반산盤山>대사의 자손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재주가 따르는 자는 골라 쓰도록 명하였다.

 

<반산>은 불세출의 신재(神才)로, 일찍이 선학(仙學)에 통달하여

교화가 두루 미침이 백세(百世)에 이르고, 만방(萬方)이 덕을 입었다.

 

참으로 성인중의 성인이었다.

 

<길공吉公(110-170)>, <족공足公(120?-180>, <을공乙公(131-176)>,

<흑치黑齒(135?-186)>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한 연유로 우도(牛徒), 호도(虎徒), 양도(羊徒), 계도(鷄徒)가

모두 받들기를 다투며, 반씨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종주(宗主)가 되었다.

 

<징연澄然(160?-222)>의 처 <반화盤花(157-248)> 역시 대사의 딸이다.

 

<징연>이 자라나 8세가 되자 모든 법(法)에 능통하고,

<징연>이 <반화>를 섬김이 어머니와 같았다.

 

말하기를

 

“나의 처는 곧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징연>의 학문은 대개 <반화>에게서 나온 것이다.

 

<징연>이 죽자 <반화>가 따라죽으려 하였다.

 

우도(牛徒)가 그 재주를 아까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징연>의 아들 <석연碩然>의 처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반산>대사의 제주(祭主)가 되었는데 나이 69세였다.

 

기력이 오히려 성하고, 신체가 살찌고 풍성하였다.

 

밤 자시에 신정(神井)에서 목욕을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의 나이는 이미 쇠하여, 찬바람으로 몸이 상할 것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비록 신정(神井)이라도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반화>가 말하기를

 

“첩은 양정(養精)의 재주가 있어, 비록 차가운 겨울이라도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큰 제사를 맡는다면 어찌 목욕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씩씩하다 여기고 드디어 <반화>에게 행차하여 정사(井舍)로 갔다.

 

권처의 직위를 내렸다.

 

후인(後人)들이 그 정(井)을 반화정(盤花井)이라 하였다.




 

 

아달라왕 14년(AD.226)

 

 

正月 仙門大書文完卒 年四十七

文完邊于之子也 有渠父之風 善文章能歌舞

 

上寵愛之 超授爵位 賞賜甚重

上嘗夜宴宮中 完醉誤入后側

時辣后方在厠 完抱而戱之

后慕其風而不怒 遂相通 完恐得罪 不敢復近辣后

辣慕完益篤 悲歌之 帝聞之 而采之曰

汝與朕同胞 而同穴有何隱乎 夫男女大慾也 莫非有所男乎

辣乃以完告之 上乃召文完責之 完叩首請死

上命囚完 于辣后寢殿 完知上意 乃復與后相通生子

后求爲完妻 上不許曰 龍女可有私臣 安可爲臣子之妻

乃命 文完爲冬宮私臣 后常召完入侍

完妻仙珍獨宿 完臣連弓通之 完不知之

一夜上行冬宮 命完歸 完歸家走入妻房 見連弓抱其妻而臥

遂得心疾 月餘而卒 于冬宮

辣后泣曰 汝死則朕無可枕之臣 雖欲從汝而死 奈有上何

完曰 臣之臣連弓 美而善歌 可以代臣

后乃奏于上 乃召連弓入冬宮 與后行吉 命文完妻仙珍爲連弓妻

 

정월 선문대서 <문완文完(180-226)>이 죽었는데 나이 47세였다.

 

<문완>은 <변우邊于>의 아들인데 대들보의 풍채가 있었다.

 

문장(文章)을 잘하고, 가무(歌舞)에 능하였다.

 

왕이 총애하여 초월하는 작위를 주고, 상을 내려줌이 심히 많았다.

 

왕이 일찍이 밤중에 궁중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문완>이 취하고 잘못하여 후의 옆으로 들어갔다.

 

당시 랄후(辣后)의 방향에 화장실이 있었다.

 

<문완>이 랄후를 안으며 희롱하였다.

 

랄후(辣后)가 그 풍모를 사모하여 화를 내지 않고, 마침내 상통하게 되었다.

 

<문완>이 죄를 지은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감히 랄후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랄후(辣后)가 <문완>을 사모함이 점점 도타워져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왕이 그 노래를 듣고 캐어물으며 말하기를

 

“너와 짐은 같은 어머니의 자식이고,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무엇을 숨기려 하느냐.

남녀들은 큰 욕심이 있는데, 아닌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있는 것이로구나.”

라고 하였다.

 

랄후(辣后)가 이에 <문완>을 고하였다.

 

왕이 이에 <문완>을 불러 꾸지람을 하였다.

 

<문완>은 머리를 조아리며 죽기를 청하였다.

 

왕이 <문완>을 랄후(辣后)의 침전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문완>은 왕의 뜻을 알고 이에 다시 랄후(辣后)와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

 

랄후(辣后)가 <문완>의 처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용녀(龍女)는 사신(私臣)을 두는 것이 가능한 일이다.

어찌하여 신하의 처가 됨이 옳겠느냐?”라고 말하며

 

이에 문완을 동궁(冬宮) 사신(私臣)으로 명하였다.

 

랄후(辣后)는 항상 <문완>을 불러 모시도록 하였다.

 

<문완>의 처 <선진仙珍>은 혼자서 잠을 잤는데,

<문완>의 신하 <연궁連弓>과 통하였으나, 문완이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왕이 동궁(冬宮)에 행차하여 <문완>을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문완>이 귀가하여 처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니,

<연궁>이 그의 처를 안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끝내 마음의 병을 얻고 한 달여를 앓다가 동궁(冬宮)에서 죽었다.

 

랄후(辣后)가 울면서 말하기를

 

“네가 죽으면 곧 누가 있어 짐과 잠자리 신하로 하겠느냐.

비록 너를 따라 죽기를 바라지만 왕에게 어찌해야 하느냐?”라고 하였다.

 

<문완>이 말하기를

 

“신의 아랫사람인 <연궁連弓>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니 신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랄후(辣后)가 이에 왕에게 여쭈었다.

 

왕이 이에 <연궁連弓>을 불러 동궁(冬宮)으로 들어오게 하고

랄후(辣后)와 결혼식을 행하였다.

 

<문완>의 처 <선진仙珍>을 <연궁>의 처로 삼았다.


변우(문기) - 문완(180-226)

랄후(辣后)는 지진내례(155?-212)의 딸로 아달라의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다.

연원(궁선) - 연궁(184- )

 

 

 

二月 連弓伊伐飡 仙珍稟主 郁甫左執書 貝權右執書

賜盤花白大馬奴婢 花有神術悅上心 累召宮中幸之

 

花以紫衣綠袴 跨白大馬 而白髮垂馬 後人以爲白髮仙母 舞則曳地 從者爲之持隨

 

2월 <연궁連弓>을 이벌찬, <선진仙珍>을 품주로 하였다.

 

<욱보郁甫>를 좌집서, <패권貝權>을 우집서로 하였다.


<반화盤花>에게 백대마(白大馬)와 노비를 주었다.

 

<반화>는 불가사의한 재주가 있어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누차 궁중으로 불러 행(幸)하였다.

 

<반화>는 자주색 옷과 녹색의 바지를 입고,

백대마에 걸터앉아 백발(白髮)이 말에 드리워졌다.

 

후인들이 백발선모(白髮仙母)라 하였다.

 

춤을 추면 머리카락이 땅에 끌리고, 종자(從者)들이 머리카락을 잡고 따랐다.

 

<반화盤花(157-248)>는 <반산盤山>의 딸이다. 


 

五月 上大閱 于一善

 

5월 왕이 일선(一善)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七月 夫余聞我將伐 欲挫我軍氣 而先以精騎襲 我助比川二城 城主死之

恐我進攻 虜婦女小兒一千口而去 上聞之大怒 命興宣急擊夫余

興宣曰 兵行不可 苟且按兵不動 夫余連日不寐 以爲我兵將至 上下疲困

 

7월 부여(夫余)가 우리가 장차 치러간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군의 사기를 꺾고자 하여,

먼저 정기(精騎)로 우리의 조비천(助比川) 2개성을 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

 

우리의 진공(進攻)을 두려워하여 부녀자와 어린아이 1000명을 사로잡아 갔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흥선興宣>에게 급히 부여를 치도록 명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병사를 움직이는 것을 불가합니다.

구차(苟且)하더라도 병사를 움직이지 않도록 누르고 있으면,

부여는 연일(連日)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우리의 병사가 장차 이른다고 할 것이므로, 상하가 피곤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달라왕 14년

7월 백제가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 갔다.

8월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또한 왕은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 곳에 도착하였다.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를 돌려주고 화친을 요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고왕 2년

7월 몰래 군사를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에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興宣)을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나라 동쪽의 여러 성들을 쳐들어 왔다.

신라왕도 또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이어 한수(漢水)까지 엄습하여 왔다.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려서

곧 앞서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고왕 2년(AD.227) 정미

8월 신라의 조비천성을 깨뜨리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가 또 병사를 이끌고 우리 땅 한수(漢水)를 핍박하였다.

그런 연유로 포로들을 돌려주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대선(해생) - 흥선(192?-256)


 

八月 興宣領 兵二萬分爲四軍 聲西擊 東而北上

上聞連獲大捷 親率精騎八千 直至漢水 將陷其京

田氏大懼 環其所掠一千口 而乞和曰

妾父吉宣得罪 已死 妾當更修貢職 世世爲臣妾

上始知 仇知吉宣已死 乃許 古尸爲田氏繼夫

古尸乃與田氏渡江 而來降 上命行酒欲携歸

興宣曰 田氏非自過 不若他人 不如立之

而見信 上然之 夫余群臣感恩 爭以酒食犒我軍

行盤山大師大祭于軍中 諸軍見盤山大師

 

以玉鞭指路 我軍向之 則必勝 請奉爲軍神 許之

 

8월 <흥선興宣>을 우두머리로 하고 병사 2만을 나누어 4군으로 하였다.

 

서쪽으로 쳐들어간다고 소리 내고 동쪽에서 북으로 올라갔다.

 

왕이 연속으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는 소리를 듣고

왕이 친히 정기(精騎) 8천을 이끌고 곧바로 한수(漢水)에 이르렀다.

 

장차 부여의 도읍을 함락하려 하였다.

 

<전씨田氏>가 크게 두려워하여 노략질한 1000명을 되돌려 주며

화친을 구걸하여 말하기를

 

“첩의 부친 <길선吉宣>이 죄를 지었으나 이미 죽었으며,

첩은 응당 공물을 바치는 직을 바꾸고 세세(世世)로 신첩으로 삼아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왕이 비로소 <구지仇知>와 <길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고시古尸>를 <전씨>의 계부(繼夫)로 삼음을 허락하였다.

 

<고시>가 이에 <전씨>와 더불어 강을 건너와 항복을 하였다.

 

왕이 술자리를 열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전씨> 스스로의 잘못이 아닙니다.

만약 타인이 아니라면 <전씨>를 세워 믿음을 보임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리하므로 부여의 군신(群臣)들은 은혜에 감사하며,

술과 음식으로 우리의 군사를 먹이기를 다투었다.


군중(軍中)에서 <반산盤山>대사(大師)에게 큰 제사를 지냈다.

 

모든 군대가 <반산>대사를 만나,

<반산>대사의 옥편(玉鞭)이 가리키는 길로 우리의 군이 향하면 곧 반드시 승리하였다.

 

군신(軍神)으로 삼아 모시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十月 上還京都 獻俘于祖廟 仍幸松良宅 賜國良衣 國良上之外孫也

仙史作九月五日生 至是上始洗之 他作十三年九月 故兩示之也

 

10월 왕이 경도(京都)로 돌아와 조상의 사당에 되돌려 받은 포로를 바쳤다.

 

곧 <송량松良>의 집을 행차하여 <국량國良>에게 옷을 내렸다.

 

<국량>은 왕의 외손이다.

 

선사(仙史)에는 9월 5일생이라 하고 이때에 이르러 왕이 <국량>을 씻겨주었다고 한다.

 

다른 사서에는 13년 9월생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양쪽에서 보인다.


 

十二月 夫余入貢

上入海宅 命貝權爲稟主 號可氏爲祖主

 

12월 부여가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왕이 해택(海宅)으로 들어왔다.

 

명으로 <패권貝權>을 품주(稟主)로, <가씨可氏>를 조주(祖主)라고 불렀다.


 

 

 

 

아달라왕 15년(AD.227)

 

 

 

四月 伊飡繼元卒 年五十三 元以君啓之子 有大樹之風 甚重有大度

上卽位之初 委以大政

其妻淡色馬公之女也 亦有寵於上 生上子淡君

賜宅宮井外輒 以微服幸之 夜深而歸 以此淡色多用

繼元之臣 大政多決於其手 至是病卒 會葬者萬人 上命爵其子 賜淡色年穀

超授興宣爲伊伐飡 彡亥稟主 板失祖主

 

4월 이찬(伊飡) <계원繼元(175-227)>이 53세로 죽었다.

 

<계원>은 <군계君啓>의 아들로 <대수大樹>의 풍모가 있어

침중(沈重)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왕이 즉위 초에 나라의 큰일을 맡겼다.

 

그의 처 <담색淡色>은 <마공馬公>의 딸인데 역시 왕의 총애가 있었고,

왕의 아들 <담군淡君>을 낳았다.

 

궁정(宮井)의 바깥에 집을 내려주었는데,

번번이 미복(微服)으로 행차하였다가 밤이 깊어 돌아왔다.

 

이 때문에 <담색淡色>을 등용함이 많았다.

 

<계원繼元>의 신하들의 대정(大政)은 <계원>의 손에서 결정 받음이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들어 죽었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왕명으로 그 아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담색淡色>에게는 해년마다 곡식을 내렸다.


 

나이와 골품을 초월하여 <흥선興宣>을 이벌찬으로 삼고,

<삼해彡亥>를 품주로, <판실板失>을 조주로 하였다.


 

아달라왕 15년

4월 이찬 계원이 사망하자 흥선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上幸猩公宅 享仙徒 問眞於公

公曰 陛下自有眞 臣何敢言

上曰 朕多欲好色 寧有眞乎

公曰 普天之下 莫非聖有多慾好色 何妨之有

上笑曰 汝以朕爲天地間棄物乎

公曰 非徒陛下而已聖賢 亦一棄物而已天地一棄庫 而已大元歸眞天地何用

上曰 天地無用爲何而苦 朕其行樂矣

公曰 臣聞飽於樂則悲 飽於苦則樂 苦樂本不離 願陛下與斯民同甘苦

上曰 仍加公年穀 命淡色爲公妻 淡色托福得娠 乃請于上故也

 

8월 왕이 <성공猩公>댁을 방문하여 선도(仙徒)들을 대접하였다.

 

<성공>에게 진(眞)을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폐하 스스로 참됨이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호색(好色)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데, 틀림없이 참됨이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공(公)이 말하기를

 

“보통 하늘아래에는 아닌 게 아니라 성(聖)스러움에도 호색(好色)함이 있으니,

어찌 거리낌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짐을 천지(天地)간에 버려야 할 물건으로 생각하느냐?”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선도가 아닌 무리들이 폐하에게 그럴 뿐입니다.

성현(聖賢) 또한 버려야 할 물건일 뿐이고, 천지는 하나의 버리는 창고 일뿐이며,

대원(大元)은 진천지(眞天地)로 돌아가야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천지가 쓸모없으니 어찌하여 고통을 행하겠느냐.

짐은 그 즐거움을 행하겠다.”라고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臣)이 듣기에, 즐거움에 배부른 것이 슬픔이요.

괴로움에 배부른 것이 즐거움이라 하였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본래 분리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백성들과 잠깐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시길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공에게 해마다 곡식을 더하여 주고, <담색淡色>을 공의 처로 삼았다.

 

<담색>은 복(福)에 의지하여 임신하기를 원하여, 이에 왕에게 청한 까닭이다.

 

지마(달해) - 성공(184-252) 


 

十二月 上與內后入海宅 貝權稟主 可氏祖主 命伐休監國政 于京都

內后生女阿禮 于海宮 上洗之 后好淫多 引美少爲嬖臣 上不禁

 

夫余之役 上親征 后入吉公祠 托言祈禱 日與嬖臣四五人 縱淫爲樂

昌豆洪權天猩伊買繼忠等 最有寵 阿禮昌豆所烝 而生也

皃甚美 上愛之曰 勝於吾出

后怒曰 此女眞汝出 汝以我謂借外種乎

上爲之 謝罪二日 乃釋 或云 上洗阿禮

謂伐休曰 此女不肖于朕 無乃 汝女乎

伐休恐后怒 而不敢奏昌豆之事 而奏曰 世多不肖之女 其孫則肖之 陛下何其急乎

后恐孫不肖 强言肖之 問於諸臣 不敢違 乃責 伐休及上 二日不食

上亦不得食 抱后而慰之 約不復疑 而誓于神云

 

12월 왕과 내후(內后)가 해택(海宅)으로 들어갔다.

 

<패권貝權>을 품주, <가씨可氏>를 조주로 하였다.

 

<벌휴伐休>에게 경도(京都)에서 국정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내후(內后)가 해궁(海宮)에서 딸 <아례阿禮>{아소례의 어머니}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내후(內后)는 음란함을 좋아하여 많은 미소년을 데리고 다니며

폐신(嬖臣)으로 삼았다.

 

왕이 금하지 않았다.

 

부여와의 전쟁 시 왕이 친정하자,

내후(內后)가 길공사(吉公祠)에 들어가 기도한다고 핑계를 대고,

하루는 폐신(嬖臣) 4~5인과 늘어지게 음란함을 즐겼다.

 

<창두昌豆>, <홍권洪權>, <천성天猩>, <이매伊買>, <계충繼忠> 등이

가장 총애가 있었다.

 

<아례阿禮>는 <창두昌豆>가 증(烝)하여 태어났다.

 

얼굴이 심히 아름다웠다.

 

왕이 사랑하며 말하기를

 

“나의 자식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내후(內后)가 화내어 말하기를

 

“이 여자 아이는 진짜 너의 자식이다.

너는 내가 바깥의 씨앗을 빌려왔다고 말하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왕이 이 때문에 이틀 동안 사과하여 풀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왕이 <아례>를 씻겼다고도 한다.

 

왕이 <벌휴>에게 이르기를

 

“이 여자아이는 짐을 닮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벌휴>가 아무 말이 없자 “너의 딸인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벌휴>는 내후(內后)가 화를 낼까 두려워하여 감히 <창두>의 일을 아뢰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뢰어 말하기를

 

“세상의 많은 딸들은 아비를 닮지 않습니다. 그 손자가 닮는 것입니다.

폐하는 무엇이 그리 급합니까.”라고 하였다.

 

내후는 손자가 닮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억지로 닮았다고 말하며,

제신(諸臣)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제신들이 감히 거스르지 못하자,

<벌휴>와 왕을 책망하며 이틀 동안 식사를 먹지 않았다.

 

왕 역시 식사를 하지 못하고 내후(內后)를 안으며 위로하였다.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하였다고 한다.

 

지마(애례) - 내례(186-263)

 

 

 

아달라왕 16년(AD.228)

 

十六年 正月 召文妙德王殂

紅鳳碧海黃雲暖玉宝雲牧丹妙雲好蛙 八世主爭立 國中大亂

女主楚雲請救 乃命山乙率仙徒二千人 與盤述入召文

靖其亂立 楚雲子妙楚爲王 以山乙爲召文監國

山乙善占風雲 知人邪正 皓鬚過膝 召文人奉之 爲廟王 世稱乙公者是也

 

정월 소문(召文) 묘덕(妙德)왕이 죽었다.

 

<홍봉紅鳳>, <벽해碧海>, <황운黃雲>, <난옥暖玉>, <보운宝雲>, <목단牧丹>,

<묘운妙雲>, <호와好蛙> 8세주(世主)가 왕위를 다투었다.

 

나라 안에 대란이 있어났다.

 

여주(女主) <초운楚雲>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산을山乙>에게 명하여

선도(仙徒) 2000명을 이끌도록 하여 <반술盤述>과 함께 소문으로 들어갔다.

 

그 난리를 평정하고, <초운妙雲>의 아들 <묘초妙楚>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산을>을 소문감국(監國)으로 하였다.

 

<산을>은 바람과 구름의 점을 잘 쳤고,

사람들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았으며, 흰 수염이 무릎을 넘었다.

 

소문 사람들이 받들어 묘왕(廟王)으로 삼았다.

 

세칭(世稱) 을공(乙公)이라는 사람은 이분이다.


 

 

二月 捀骨女八人 妻召文世主公子 以八世妻 妻骨門仙子

 

2월 골녀(骨女) 8인을 봉하여

소문(召文) 세주(世主)와 공자(公子)에게 시집보냈다.

 

이 때문에 8세(八世)의 아내들을 골문선자(骨門仙子)들에게 시집보냈다.


 

四月 郁甫伊伐飡 好禮稟主

 

4월 <욱보郁甫>를 이벌찬, <호례好禮>를 품주로 삼았다.


 

七月 召文王妙楚入朝 請以國獻 以帝女多禮妻之

按召文 以穢王之後 初有 龍王六年 虎王二年 紫聖女主二十年 紫聖之臣鳳王七年

子月王十一年 子碧王十九年 子紫帝五十二年 征伐四方威振東西

子翠帝十七年 子召文在位八年而廢 紫帝庶子山雲枕婢脫脫生山雲子景德

 

山雲獻脫脫于翠帝 翠帝寵愛之 立爲后 翠帝殂 脫脫自稱神后 

迎召文爲繼夫 召文愉弱 脫脫不悅

召文與其母召氏欲出脫脫 事覺廢之 脫脫乃立其子景德 在位六十五年 文物大興

子文武王或稱暖帝二十年 子文丹立二月而廢 文丹弟牧丹立十五年 子宝文立二十五年

子景文立三十年 子翡貝立 委政於叔父崇德 三年而廢 崇德自立七年

傳位于子允明 行仙政十二年而殂 合十八年 允明三年而廢 其妻好妙自稱帝十三年

而立其子妙德 好妙通允明之庶弟雙德而生也 妙德仁而無威 八世主分據其地

不聽朝令 在位三十三年 國力大衰 妙德知國將亡 數遣使入貢稱臣

朝廷以其爲舊國優待之 至是遂爲我藩甥 賜宅于京 山乙以功進 爵角干 好妙素仰山乙

乞爲其妻 而帝爲妙德不許 至是亦許之

 

7월 소문왕(召文王) <묘초妙楚>가 입조하여 나라를 바치기를 청하였다.

 

왕(帝)의 딸 <다례多禮>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소문국을 살펴보면

예왕(穢王)의 뒤로 처음에 용왕(龍王)이 6년, 호왕(虎王)이 2년,

자성여주(紫聖女主)가 20년, 자성의 신하 봉왕(鳳王)이 7년,

아들 월왕(月王)이 11년, 아들 벽왕(碧王)이 19년, 아들 자제(紫帝)가 52년이며,

사방을 정벌하여 위엄이 동서(東西)를 떨쳤다.

 

아들 취제(翠帝)가 17년, 아들 소문(召文)이 8년을 재위하였다가 폐위되었다.

 

자제(紫帝)의 서자(庶子) 산운(山雲)의 침비(枕婢) 탈탈(脫脫)이

산운의 아들 경덕(景德)을 낳았다.

 

산운이 탈탈을 취제에게 바쳤는데, 취제가 탈탈을 총애하여 후(后)로 세웠다.

 

취제가 죽자 탈탈은 스스로 신후(神后)라고 칭하였다.

 

소문을 맞이하여 새남편(繼夫)으로 삼았는데,

소문이 나약(懦弱)하여 탈탈이 기뻐하지 않았다.

 

소문과 그 어머니 소씨(召氏)가 탈탈을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탈탈이 이에 그녀의 아들 경덕을 세워 65년을 재위하였다.

 

문물(文物)이 크게 흥하였다.

 

아들 문무왕(文武王) 혹은 난제(暖帝)라고 칭하였는데 재위 20년,

아들 문단(文丹)이 서서 2달 만에 폐위되고, 문단의 동생 목단(牧丹)이 서서 15년,

아들 보문(宝文)이 서서 25년, 아들 경문(景文)이 서서 30년,

아들 비패(翡貝)가 즉위하였다.

 

숙부 숭덕(崇德)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는데 3년 만에 폐위되었고,

숭덕이 스스로 서서 7년,

아들 윤명(允明)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선정(仙政)을 행한지 12년 만에 죽었는데

합이 18년이다.

 

윤명이 3년 만에 폐위되고,

윤명의 처 호묘(好妙)가 스스로 왕(帝)이라 칭한 것이 13년,

그녀의 아들 묘덕(妙德)을 세웠다.

 

호묘가 윤명의 서제(庶弟) 쌍덕(雙德)과 상통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묘덕은 인자하였으나 위엄이 없었다.

 

8세주(八世主)가 그 땅을 나누어 점거하고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재위가 33년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묘덕은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수차례 사신을 보내 입공을 하면서 신하라고 칭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소문국을 구국(舊國)이라고 하여 우대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드디어 우리의 번국으로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므로,

경(京)에 집을 하사하였다.

 

산을(山乙)은 이 공으로 작위가 각간(角干)에 나아갔다.

 

호묘{묘초의 할머니}는 평소 <산을>을 흠모하여 그의 처가 되기를 구걸하였으나,

왕(帝)은 <묘덕>을 위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역시 허락하였다.


 

八月 行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十月 板公太子薨 公好神仙 遊於足公小光之門 與汗昔太子齊名 而恬淡不取功名

少愛澄然如夫婦 盡以其財與之澄然 以是畜徒 得牛徒之宗

小光太子薨 澄然欲立 公以代之 公曰 大道在汝 何必立我

帝以汗后之故立 汗昔而尊公 以大道大師 於是仙門二分

公曰 臣才不如古治 請以臣品與之

帝以古治父 徵不許 公乃私封 古治爲大道師委之 以政 帝不得已奉古治爲大道師

古治者澄然也 其父乾治文父洗足婢 通于乾海而生也

奴文父家 澄然恥之 公憐之 以其姉回兒 許于乾治蒙弟 歆而命澄然爲歆子

 

文父爲之放其奴 公乃以乾治爲宮翁 待之甚厚 彭息繼元等 皆從公學之

與公弟板檍 兄事澄然 澄然自以身徵不敢自兄 常以臣妻 公責彭息等 不能尊之

以公妃祭姬妻之 生子碩然 於是骨文 不敢侮澄然 黑齒之亂

 

公母板久爲齒后 公弟板齒爲齒嗣 公性事母 至孝心

實非齒 而不敢違母 事齒如父 齒愛公 以珍宝歸之 公盡散于牛徒 命澄然密募死士

而欲伐齒 澄然妻祭姬乃黑齒胞妹 多見之女也 慕齒而反之

澄然曰 大義絶情 汝以公妃爲吾妻 吾之從公義也 從汝情也

祭姬恐 其子碩然見害不敢 以其謀告于齒 而泣諫之 公佯責澄然 出之使圖于外時

 

澄然姉文其主軍 公素善之 告以利害 文其素慕公 遂內附于公 與澄然奉足公

以討齒有功 公不肯自居 盡以其功歸于澄然及彭息板久 亦以公故得免亂鋒

公色美而淨潔如玉 小光愛之甚 小光妃盤花亦慕公 小光薨 盤花欲以公爲繼夫

公曰 若欲愛我 則願納吾古治

盤花乃以澄然爲繼夫 傳盤山之統 公養鶴于水閣而自娛朝遲?待 以上仙之禮奉

以年穀奴婢甚豊 公辭其多 性不好色 彭息妻曰羅公主帝姉也

 

嘗侍公生公子板羅 息女唇亦爲公小妃 而已至是公年六十九而薨

帝親幸弔之 問其遺言 曰羅泣曰

妾命薄 兩夫皆棄 不以財遺 雖有好言 何以爲家

帝乃賜彭仇板羅等奴婢田宅甚厚 公臨薨 曰羅以其無産憂之

 

公曰 王子無謨産曰羅不奏是 而求宅 損公之德 人多惜之

 

10월 <판공板公(160-228)>{지마의 아들}태자가 죽었다.

 

공(公)은 신선을 좋아하여

<족공足公>과 <소광小光>태자의 문하에서 함께 유람하였다.

 

<한석汗昔>태자와 이름을 나란히 하고, 편안하고 담박하여 공명을 취하지 아니하였다.

 

젊은 시절에 <징연澄然(160-222)>을 좋아하여 부부와 같았다.

 

그 재산을 다하여 <징연>과 함께 무리를 모았다.

 

우도(牛徒)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소광>태자가 죽자 <징연>이 공을 세워 대신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대도(大道)는 너에게 있는데 하필이면 나를 세우려하느냐?”라고 하였다.

 

왕이 한후(汗后)와의 연고로,

<한석>을 세워 공적(公的)으로 높이고 대도대사(大道大師)로 삼았다.

 

여기서부터 선문(仙門)이 둘로 나뉘었다.

 

공이 말하기를

 

“신의 재주는 <고치古治>와 같지 않으므로

신의 품계를 <고치>와 같게 하여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치>의 아버지가 미미하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이에 사적으로 <고치>를 대도사(大道師)로 봉(封)하여

선문을 다스리는 일을 위임하였다.

 

왕은 부득이 <고치>를 대도사(大道師)로 삼았다.

 

<고치>라는 사람은 <징연>이다.

 

그의 아버지 <건치乾治>는

<문부文父>의 발을 씻겨주던 노비가 <건해乾海>와 통하여 태어났다.

 

<문부>의 집안에서 노비로 일한 일을 <징연>이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불쌍히 여겨 공의 누나 <회아回兒>에게

<건치>를 동생으로 대접하게 하고 <징연>은 아들로 대접하게 하였다.

 

<문부>는 그리하여 집안의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공은 이에 <건치>를 관옹(宮翁)으로 삼아 심히 후하게 대하여 주었다.

 

<팽식彭息>과 <계원繼元> 등이 모두 공의 학문을 따랐으며,

공의 동생 <판억板檍>과 더불어 형으로 <징연>을 섬기도록 하였다.

 

<징연>은 스스로 신분이 미미하므로 감히 스스로 형이라 하지 못하였다.

 

항상 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공이 <팽식> 등에게 존중되지 아니함을 꾸지람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비(妃) <제희祭姬>를 시집보내어, 아들 <석연碩然>을 낳게 하였다.

 

이때부터 골문에서 감히 <징연>을 업신여기지 못하였다.

 

<흑치黑齒>의 난 때 공의 어머니 <판구板久>가 <흑치>의 후(后)가 되었다.

 

공의 동생 <판치板齒>가 <흑치>의 후사가 되었다.

 

공의 성품이 어머니를 섬김에 효심을 다함이 있어,

실상은 <흑치>의 무리가 아니었으나 어머니에게 감히 어긋나지 않았고,

<흑치>를 섬김에 아버지와 같았다.

 

<흑치>가 공을 사랑하여 진귀한 보물이 공에게 돌아갔다.

 

공이 우도에게 재산을 뿌리며,

<징연>에게 명하여 은밀히 자객을 모아 <흑치>를 치려고 하였다.

 

<징연>의 처 제희는 곧 <흑치>의 같은 어머니 여동생으로

<흑치>와 안면이 많은 여자였다.

 

<흑치>를 흠모하여 반대하였다.

 

<징연>이 말하기를

 

“대의(大義)는 정(情)을 끊는 것이다.

당신은 공의 비(妃)로 나의 처가 되었다.

내가 공을 따르는 것은 의로움이고, 너를 따르는 것은 정(情)이다.”라고 하였다.

 

<제희>는 그의 아들 <석연>이 해(害)로운 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 때문에 <흑치>에 대한 음모를 공에게 고(告)하고, 울면서 간(諫)하였다.

 

공은 <징연>이 밖으로 드러냄을 꾸짖는 체하고,

외부의 때를 기다려 도모하도록 하였다.

 

<징연>의 누나 <문기門其>{문부의 딸}는 군(軍)의 우두머리인데

공이 본시 좋게 생각하여, 이로움과 해로움을 깨우쳐 주었다.

 

<문기>가 본시 공을 사모하여 드디어 공에게 내부(內附)하였다.

 

<징연>과 더불어 <족공>을 받들어 <흑치>를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공은 공(功)을 독차지함을 옳게 여기지 않고

그 공을 <징연>과 <팽식>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판구> 역시 공과의 연고 때문에 난의 칼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공은 얼굴빛이 아름답고 정결하여 옥(玉)과 같았다.

 

<소광>태자가 심히 사랑하였다.

 

<소광>의 비(妃) <반화盤花> 역시 공을 사모하였다.

 

<소광>이 죽자 <반화>가 공을 남편으로 삼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곧 나의 <고치>를 거두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반화>는 이에 <징연>을 남편으로 삼아 <반산盤山>의 큰 줄기를 전하였다.

 

공은 학(鶴)을 수각(水閣)에서 기르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조정에서는 상선(上仙)의 예로 대우하였으며,

해마다 곡식과 노비를 심히 풍성히 내리며 받들었으나 공이 그 대부분을 사양하였다.

 

공의 성품은 호색하지 않았으며,

<팽식>의 처 <왈라曰羅>공주는 왕의 누나인데,

일찍이 공을 모시어 공의 딸 <판라板羅>를 낳았다.

 

<팽식>의 딸 <진唇> 역시 공의 소비(小妃)일 따름이다.

 

이때 공의 나이 69세로 죽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조문하고, 유언을 물었다.

 

<왈라>가 울면서 말하기를

 

“첩의 운명이 박복하여 두 명의 남편이 모두 버려서 남겨진 재산이 없고

오로지 좋은 말만 남기어 어찌하여 집안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팽구彭仇>와 <판라> 등에게 노비와 밭과 집을 내려줌이 심히 후하였다.

 

공이 죽음에 임하여 <왈라>가 그 재산이 없음을 걱정하자

 

공이 말하기를

 

“왕자(王子)란 재산을 꾀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왈라>가 유언을 아뢰지 않아 댁(宅)을 구했음이 옳다.

 

공의 덕이 덜어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애석해 하였다.


 

十二月 上與內后入海宅

敦父伊伐飡 文京稟主

 

12월 왕과 내후(內后)가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돈부敦父>를 이벌찬, <문경文京>을 품주로 삼았다.

 

 

 


 

 

 

 

아달라왕 17년(A.D.229)

 

十七年 二月 命大道大師盤玄 重修祖廟 新其神像及樹王 賜骨門大宴

 

2월 대도대사(大道大師) <반현盤玄>에게 조상의 사당을 중수(重修)하고,

그 신상(神像)과 수왕(樹王)을 새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골문(骨門)에 큰 잔치를 내렸다.


 

四月 始置大畜典 掌六畜及蜜蜂鹿兎虎猫鳩鴨池魚等 一切生物 禁濫漁淫獵

 

4월 처음으로 대축전(大畜典)을 설치하여, 6축(六畜)을 기르는 일을 맡기고,

꿀벌(蜜蜂), 사슴(鹿), 토끼(兎), 호랑이(虎), 고양이(猫), 비둘기(鳩), 오리(鴨),

연못의 물고기(池魚) 등 일절 생물을 넘치게 잡거나 지나치게 사냥하는 것을 금하였다.


六月 晋鄒伊伐飡 萱氏稟主

 

6월 <진추晋鄒>를 이벌찬으로 <훤씨萱氏>를 품주로 하였다.

 

 

七月 京師大震 人家毁敗 南郊霜雹 害穀甚多 敦父免 晋鄒代之 萱氏稟主

瓠門大母薨 壽百二歲 能記骨仙舊事 故國家倚重之

板失生興宣女板宣 賜米

 

7월 경사(京師)에 대지진이 있었다.

 

백성들이 집이 헐어지고 무너졌다.

 

남교(南郊)에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침이 심히 많았다.

 

<돈부敦父>를 면직하여 <진추晋鄒>로 대신하게 하고, <훤씨萱氏>를 품주로 하였다.


<호문瓠門(128-229)>대모가 죽었는데 춘추 102세였다.

 

골선(骨仙)의 옛이야기를 능히 기록하였고,

그런 까닭으로 나라에서는 맡기어 중하게 여겼다.


<판실板失>이 <흥선興宣>의 딸 <판선板宣>을 낳아 쌀을 내렸다.


 

八月 內后行月歌 于貞介宅 后與伊買相通欲行嘉俳 帝以災害止之 乃私行月歌 而歡之

 

8월 내후(內后)가 월가(月歌)를 <정개貞介>의 집에서 행하였다.

 

내후(內后)가 <이매伊買(211-235)>와 상통(相通)하여 가배(嘉俳)를 행하고자 하였다.

 

왕이 재해(災害)가 있음으로 인하여 가배를 그치게 하였다.

 

이에 사적으로 월가를 행하고 기뻐하였다.

 

벌휴(자황) - 이매(211-235)


 

十月 扶余眞奇等入寇 一牟城主乾回等擊退之 獻其虜獲 上嘉回 先機破賊 加爵褒之

 

10월 부여의 <진기眞奇> 등이 들어와 약탈하였는데,

일모(一牟)성주 <건회乾回> 등이 격퇴하고 그 사로잡은 포로를 바쳤다.

 

왕이 <건회乾回>를 훌륭하다 하여,

먼저 적을 깨뜨린 것과 더하여 작위를 올리고 공을 기렸다.


 

아달라왕 17년

2월 시조묘를 중수하였다.

7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10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18년(AD.230)

 

十八年 正月 大郞伊伐飡 亥仙稟主 萱氏父母也

 

정월 <대랑大郞>을 이벌찬, <해선亥仙>을 품주로 삼았다. <훤씨萱氏>의 부모다.


 

三月 穀貴民飢 開倉而恤之不能周

上爲之撤食曰 朕之世民飢 敵寇何以報責於是 公卿以下皆 以其食補恤

民皆感泣而歌之曰 天固仁矣 民何斯爲

 

3월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으나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왕이 그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짐의 치세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적들이 도적질해 오니,

무엇으로 보답하고 나무랄 수 있겠느냐.

지금부터 공경(公卿)이하 모두는 먹을거리를 보태어 구휼하여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여 노래하여 말하기를

 

“하늘(天, 임금)은 진실로 인자하구나.

백성들은 어찌하여 천박스럽게 행동하는가?”라고 하였다.


 

아달라왕 18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四月 內后生子 上洗之 是爲伊買子奈解也

上知其爲非己子 而欲不洗 后怒不食 上乃洗而慰之

 

4월 내후(內后)가 아들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이 아이가 <이매伊買>{벌휴와 자황의 아들}의 아들 <내해奈解(230-291)>다.

 

왕이 그 아들이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고, 아기를 씻겨 주려 하지 않았다.

 

내후(內后)가 노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 왕이 이에 아기를 씻겨 주고 위로하였다.

 

이매(내례) - 내해(230-291 10대왕 재위 257-291)


 

五月 現郞公主薨

 

5월 <현랑現郞(139-230)>공주가 죽었다.

 

<현랑現郞(139-230)>공주는 소문국 경문왕의 딸이다.


 

七月 墨公伊伐飡 豆昌稟主 豆昌豆兒女也 美而善媚 上寵愛之 召入宮中 月餘爲稟主

 

7월 <묵공墨公>을 이벌찬, <두창豆昌>을 품주로 하였다.

 

<두창豆昌>은 <두아豆兒>의 딸로, 아름답고 아첨함이 뛰어났다.

 

왕이 총애하여 궁중으로 불러 들어와, 한 달여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아달라왕 19년(AD.231)

 

十九年 正月 上幸好禮宅 爵其子仇道 又幸花理宅 爵其子仇須兮 皆特寵也

 

정월 왕이 <호례好禮> 댁에 행차하여, 그 아들 <구도仇道>에게 작위를 내렸다.

 

또 <화리花理>댁에 행차하여 그 아들 <구수혜仇須兮>에게 작위를 내렸다.

 

모두 특별한 총애가 있었다.

 

<호례好禮>와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는

14살에 4관등인 파진찬의 작위를 받았다.


 

二月 行神宮大祭 時京都大疫 人心洶洶

故命大日大師猩公及其妻天仁 大道大師盤玄及其妻貞介 行大祭

祈禱安康退疫 凡七日而罷

加耶君毗可殂 女美理神立 以宇理爲夫

 

2월 신궁대제(神宮大祭)를 행하였다.

 

당시 경도(京都)에 전염병이 돌아 인심이 흉흉하였다.

 

대일대사(大日大師) <성공猩公>과 그 처 <천인天仁>,

대도대사(大道大師) <반현盤玄>과 그 처 <정개貞介>에게

큰 제사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평안하고 건강하며, 질병이 물러나도록 기도하기가 무릇 7일이었는데,

이에 전염병이 물러났다.


 

아달라왕 19년

정월 구도를 파진찬에 임명하고 구수혜를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야(加耶)의 (여)군(君) <비가毗可>가 죽었다.

딸 <미리美理>신(神)이 섰다. <우리宇理>를 남편으로 삼았다.


 

七月 文石伊伐飡 份索稟主

 

7월 <문석文石>을 이벌찬, <빈색份索>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上幸白亥祠 閱鷄徒

冬介生大亥女大介 賜米

9월 왕이 백해사(白亥祠)를 행차하여, 계도(鷄徒)를 검열하였다.


<동개冬介>{한개의 딸}가 <대해大亥>의 딸 <대개大介>를 낳아 쌀을 내렸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아달라왕 20년(AD.232)

 

二十年 正月 申公伊伐飡 板羅稟主

 

정월 <신공申公>을 이벌찬, <판라板羅>를 품주로 삼았다.


 

五月 倭女王遣其弟狛比古等 獻其土物 請交易物貨 乃立倭典 與之通聘

以妙楚妹龍雲妻達文爲景德祠主

 

5월 왜 여왕이 동생 <박비고狛比古>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물품과 재화를 교역하기를 청하여 이에 왜전(倭典)을 세우고,

왜와 더불어 교제하기로 하였다.


 

아달라왕 20년(AD.173)

5월 왜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초 2년(AD.238) 6월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등을 보내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朝獻)하기를 구(求)하자... (중략)

<삼국지 위서동이전>

 

아달라왕 20년은 232년이다.

왜 여왕 비미호(卑彌乎)는 227년에 야마대국(耶馬臺國)을 세워

232년에 동생 <박비고狛比古>를 신라에 보내고

238년에 대부 난승미(難升米)를 曺魏에 보낸 것이다. 

 

 

소문국 <묘초妙楚>의 여동생 <용운龍雲>을

<달문達文>{아달라와 문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어, 경덕사(景德祠)主로 삼았다.


소문국은 <달문達文>의 반란을 도와 <벌휴>에게 패망을 당한다.


 

七月 好穀伊伐飡 天乙稟主

 

7월 <호곡好穀>을 이벌찬, <천을天乙>{백제녀 천을과 동명이인}을 품주로 삼았다.


 

八月 賜興宣新宅奴婢

多禮生妙楚女妙禮 賜米衣

 

8월 <흥선興宣>에게 새집과 노비를 내렸다.


<다례多禮>{아달라의 딸}가 소문국 <묘초妙楚>의 딸 <묘례妙禮>를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아달라왕 21년(AD.233)

 

正月 捺孝伊伐飡 索光稟主 大亥 冬介爲內衛頭 月盧昔禮爲外衛頭

土雨三日 命仙巫行禱

 

정월 <날효捺孝>를 이벌찬, <색광索光>을 품주,

<대해大亥>와 <동개冬介>를 내위두(內衛頭)로,

<월노月盧>와 <석례昔禮>{벌휴와 내례의 딸}를 외위두(外衛頭)로 삼았다.


흙비가 3일 동안 내렸다. 선무(仙巫)에게 기도하도록 명하였다.


 

二月 自冬無雨水 明活山神池枯渴 京都民家井泉亦多竭水 汲閼川沙水 上禱雨 于月池

 

2월 겨울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다.

 

명활산(明活山) 신지(神池)가 고갈(枯渴)되고,

경도(京都)의 백성들의 우물과 샘이 역시 물이 말라서,

알천(閼川)의 사수(沙水)에서 물을 긷도록 하였다.

 

왕이 월지(月池)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아달라왕 21년

정월 흙비가 내렸다.

2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물이 말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三月 內后生上女禹禮 于桃山 上洗之 賜酺骨門 命福山川 以慰后心 盖以老産也

 

3월 내후(內后)가 왕의 딸 <우례禹禮>를 도산(桃山)에서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고, 골문(骨門)에 잔치를 열고,

산천에 복(福)을 빌어 내후의 마음을 위로 했는데,

아마도 내후가 노산(老産)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후(內后) <내례內禮>는 48세이다.


 

七月 松良伊伐飡 國氏稟主

幸洪介井 宴骨門

 

7월 <송량松良>을 이벌찬, <국씨國氏>를 품주로 하였다.


<홍개洪介>정(井)에 행차하여, 골문(骨門)에 잔치를 열었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아달라왕 22년(AD.234)

 

正月 足烏伊伐飡 回笏稟 塔公左部執書 潛宣右部執書 玄老骨門大書

以伐休太子爲副君

 

정월 <족오足烏>를 이벌찬, <회흘回笏>을 품주,

<탑공塔公>을 좌부집서, <잠선潛宣>을 우부집서, <현노玄老>를 골문대서로 삼았다.


<벌휴伐休>태자를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三月 司農卿捺孝卒 公淸廉好古愛民 以公通於農事善種稼

人多惜其才 以公子花孝嗣其業

 

3월 사농경(司農卿) <날효捺孝>가 죽었다.

 

공(公)은 청렴하고 돕는 것을 좋아하며 백성을 사랑하였다.

 

공은 농사의 일에 환히 알고, 곡식의 종자를 고를 줄 알았다.

 

사람들이 그 재주를 아까워하였다.

 

공의 아들 <화효花孝>가 그 업(業)을 이었다.


 

五月 以仙于妻福方

 

5월 <선우仙于>{아달라와 선진의 딸}를 감문국 <복방福方>에게 시집보냈다.


 

七月 塔公伊伐飡 豆吉稟主

 

7월 <탑공塔公>을 이벌찬, <두길豆吉>을 품주로 하였다.

 

 

 

 

 

아달라왕 23년(AD.235)

 

正月 潛宣伊伐飡 斗氏稟主

田氏生肖古子古尒

 

정월 <잠선潛宣>을 이벌찬, <두씨斗氏>를 품주로 삼았다.


<전씨田氏>가 <초고肖古>의 아들 <고이古尒>를 낳았다.


 

고이(古尒)왕은 개루(蓋婁)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仇首)왕이 재위 21년에 죽자,

맏아들 사반(沙伴)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초고(肖古)왕의 동복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고왕 10년(AD.235) 을유

1월 상궁(上宮){전씨}가 아들 고이(古爾)를 낳아,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고이왕은 235년에 태어나 264년 30살에 제위에 올라 52살에 죽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은 167년 이전에 출생하여,

286년 11월까지 120년 이상살은 것이된다.


 

四月 兵官伊買卒 公美風采好神仙 食客千人 內后寵愛之 約與共國 至是疾卒 莫不惜之

 

4월 병관 <이매伊買>가 죽었다.

 

공은 아름다운 풍채(風采)와 신선을 좋아하여 식객(食客)이 천명이었다.

 

내후(內后)가 총애하여, 나라를 함께 하기를 약속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병이 들어 죽었다.

 

아까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벌휴>와 <자황>의 아들인 <이매伊買>가 25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은 것이다.  


 

七月 邊世伊伐飡 羊喜稟主

 

7월 <변세邊世>를 이벌찬, <양희羊喜>를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加耶君夫宇理殂 河智爲繼夫

護城頭上潛宣通其兵官日文妻順亥 宣妻斗氏妬之 亦與日文通 相爭幷罷之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가야군(加耶君) <미리>의 남편 <우리宇理>가 죽었다.

 

<하지河智>가 남편을 이었다.


호성두상(護城頭上) <잠선潛宣>이

그의 병관 <일문日文>의 처 <순해順亥>와 통하였다.

 

<잠선>의 처 <두씨斗氏>가 시새움하여 역시 <일문>과 통하였다.

 

서로 다투어 모두 파직하였다.

 

 

 

 

 

아달라왕 24년(AD.236)

 

正月 馬古伊伐飡 沙里稟主 汗己左部執書 成權右部執書

 

정월 <마고馬古>를 이벌찬, <사리沙里>를 품주,

<한기汗己>를 좌부집서, <성권成權>을 우부집서로 하였다.


 

三月 忽郞君薨 于神山 英君請葬 于班君陵 許之

君爲鷄徒所推 流太伯 益究鷄仙之學 分署其徒於天下 而欲再擧黑齒之業未果 而薨

其徒惜之

 

3월 <홀랑忽郞>군{반군과 소송의 아들, 지마의 손자}

태백 신산(神山)에서 죽었다.

 

영군(英君){남군과 소송의 아들}이 반군릉(班君陵)에 장사를 지내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군(君)은 계도(鷄徒)에게 왕으로 추대되어, 태백(太伯)으로 유배를 갔다.

 

계선(鷄仙)의 학문을 더욱 연구하고,

천하에 그 무리의 서(署)를 나누어, <흑치黑齒>의 업(業)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었다.

 

그 무리들이 애석해 하였다.



五月 猩仁生駿公女駿仁 賜米

 

5월 <성인猩仁>이 <준공駿公>의 딸 <준인駿仁>을 낳아, 쌀을 내렸다.


 

七月 汗己伊伐飡 達介稟主

 

7월 <한기汗己>를 이벌찬, <달개達介>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아달라왕 25년(AD.237)

 

正月 京宗伊伐飡 忽禮稟主

 

정월 <경종京宗>을 이벌찬, <홀례忽禮>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上與汗后 巡西路

美理神生河智子河道

 

2월 왕과 한후(汗后)가 서로(西路)를 살펴보았다.


가야 <미리美理>신(神)이 <하지河智>의 아들 <하도河道>를 낳았다.


 

五月 鷄徒奉方君爲仙君 許之

 

5월 계도(鷄徒)가 <방군方君>{홀랑군의 동복동생}을 선군(仙君)으로 받들었다.

왕이 허락하였다.


 

七月 仁公伊伐飡 汗吐稟主

 

7월 <인공仁公>을 이벌찬, <한토汗吐>를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아달라왕 26년(AD.238)

 

正月 玄甲伊伐飡 貝祥稟主

 

정월 <현갑玄甲>을 이벌찬, <패상貝祥>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納理太后崩 以金女公主爲桃山主

 

4월 <납리納理>{지마와 애례의 딸}태후가 죽었다

<금녀金女>{지마와 애례의 딸} 공주를 도산(桃山)주(主)로 삼았다.


 

六月 復置沃沮軍事

 

6월 다시 옥저(沃沮)군사를 설치하였다.


 

동천대제 12년(AD.238) 기미

신라의 사신이 와서 옥석(玉石)을 바치며 죽령(竹嶺)의 땅을 얻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七月 成權伊伐飡 連仙稟主

 

7월 <성권成權>을 이벌찬, <연선連仙>을 품주로 삼았다.


 

八月 行嘉俳

以錢公爲大道大師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전공錢公>을 대도대사로 삼았다.


 

十月 行月歌 于南桃

 

10월 남도(南桃)에서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아달라왕 27년(AD.239)

 

正月 好瓜伊伐飡 江氏稟主

 

정월 <호과好瓜>를 이벌찬, <강씨江氏>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行逸聖大祭

 

2월 일성대제(逸聖大祭)를 행하였다.


 

四月 行只后大祭

 

4월 지후대제(只后大祭)를 행하였다.


 

七月 玄老伊伐飡 七禮稟主

加紫井太子年穀 奴婢廣其田宅 賜太子妃天乙牧丹衣白大神馬 嗣子達子紫乙紫神衣白馬

 

7월 <현노玄老>를 이벌찬, <칠례七禮>{아달라와 호례의 딸}를 품주로 삼았다.


<자정紫井>태자에게 해마다 곡식을 더하고 노비와 넓은 땅의 밭과 집을 내렸다.

 

태자의 비(妃) <천을天乙>에게는 목단의(牧丹衣)와 백대신마(白大神馬)를,

후계자인 <달자達子>와 <자을紫乙>에게는 자신의(紫神衣)와 백마(白馬)를 내렸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毛可太后崩 葛后主神廟

 

10월 <모가毛可>{일성과 모리의 딸, 아달라의 누나}태후가 죽었다.

 

갈후(葛后)를 신묘(神廟)의 주(主)로 삼았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아달라왕 28년(AD.240)

 

正月 行金神祭

龍乙伊伐飡 納生稟主

 

정월 금신제(金神=庚申)를 행하였다.


<용을龍乙>을 이벌찬, <납생納生>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右玉太子薨 于花田 命錢公返葬 于蛇陵門

初吉宣等與鷄徒 通謀于扶余 欲立左玉太子

左玉曰 吾爲鷄主足矣 何必苟苟爲天子乎

宣乃請于右玉 許之 事敗 右玉抵罪 左玉毛可與內后力救之 乃放于花田

以美女娛之 至是聞毛可崩 而疾作而薨 左玉太子迎於北川 作雙鳥歌 而哀之

 

2월 <우옥右玉>태자가 화전(花田)에서 죽었다.

 

<전공錢公>{우옥과 모가의 아들}에게

장사(葬事)를 사릉문(蛇陵門)으로 돌리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길선吉宣> 등이 계도(鷄徒)와 더불어 부여(扶余)에서 비밀리에 공모하여,

<좌옥左玉>태자를 세우고자 하였다.

 

<좌옥>이 말하기를

 

“나는 계도의 주(主)로 족하다.

하필이면 구구하게 천자로 삼으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길선>이 이에 <우옥>에게 청하여 <우옥>이 허락하였다.

 

일이 실패로 끝나자 <우옥>을 저죄(抵罪)하게 되었다.

 

<좌옥>과 <모가毛可>{우옥의 처}가 내후(內后){우옥의 여동생}와 더불어

힘써 구하였다.

 

이에 화전(花田)으로 방면하였다.

 

미녀로써 즐거움을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병이 일어나 죽었다.

 

<좌옥>태자가 북천(北川)에서 맞이하여 쌍조가(雙鳥歌)를 짓고

<우옥>태자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五月 置尾典 掌尾當

加耶公主美時生上女美羅

 

5월 와전(瓦典)을 설치하여 와당(瓦當)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야(加耶) 공주 <미시美時>{미리신의 여동생}가 왕의 딸 <미라美羅>를 낳았다.


 

六月 上有疾 中外行禱

 

6월 왕에게 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 기도를 행하였다.


 

七月 大雨 閼川汎濫

汗成伊伐飡 納元稟主

 

7월 큰비가 내려 알천(閼川)이 범람(汎濫)하였다.


<한성汗成>을 이벌찬, <납원納元>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閱兵 于北川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북천(北川)에서 병사를 사열하였다.


 

十月 行婆娑大祭

沃沮軍事汗哲卒 哲汗門之子也 母曰捺生大母 惑信黑齒爲女根祠主 生黑齒子女

捺生命 哲呼齒爲父 而不從 齒敗 而捺生以爲非己信齒 而汗門之嗾也

乃棄汗門 而奔于兵官亥鄒 生晋鄒

亥鄒以捕官 陷于捺之奸媚也 時議欲流亥捺 尼今以亥功赦之

哲乃呼亥以父 人皆稱 其智從亥鄒昔鄒 累建奇功 善於北邊 再治沃沮 至是卒 人皆惜之

 

10월 파사대제(婆娑大祭)를 행하였다.


옥저(沃沮)군사 <한철汗哲>이 죽었다.

 

<한철汗哲>은 <한문汗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날생捺生>{일성의 딸}대모라고 하는데,

<흑치黑齒>를 혹신(惑信)하였기 때문에 여근사(女根祠)주(主)가 되었다.

 

<흑치>의 자녀를 낳고,

<날생>이 <한철>에게 <흑치>를 아버지라 삼으로 명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흑치>가 패하자, <날생>은 자신은 <흑치>를 신봉하지 않았다고 하고,

<한문>이 위협했다고 하였다.

 

이에 <한문>을 버리고, 병관 <해추亥鄒>에게 도망가 <진추晋鄒>를 낳았다.

 

<해추>는 관직을 잡게 되자, <날생>의 간사한 아첨에 빠졌다.

 

당시 <해추>와 <날생>을 유배 보내고자 하는 의논이 있었다.

 

니금{일성}이 <해추>의 공으로 인하여 사면하였다.

 

<한철>이 이에 <해추>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모두 그 지혜를 칭송하였고,

<해추>와 <석추昔鄒>를 따라서, 누차로 뛰어난 공(功)을 세웠다.

 

북쪽 변경에서 뛰어난 공적이 있어, 다시 옥저(沃沮)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아달라왕 29년(AD.241)

 

正月 玉齒伊伐飡 汗彭稟主

 

정월 <옥치玉齒>를 이벌찬, <한팽汗彭>을 품주로 삼았다.


 

三月 金女公主薨 巴役河桃山主

 

3월 <금녀金女>공주가 죽어, <파몰하巴沒河>를 도산(桃山)주(主)로 삼았다.


 

五月 左玉太子薨 葬以太公禮 太子以祇摩尼今適嗣 見廢爲白鷄祠主

力保鷄徒 與汗昔太子 建黑齒祠 尊崇黑齒爲黑帝大神

以福生所生黑齒女福齒爲妻 亦奉白鷄神母 終身不怠 至是殉于夫君

鷄徒如喪考仳 玉齒相國 乃其子也 上爲之 親臨弔之 黑齒後 始有之戚會也

 

5월 <좌옥左玉>태자가 죽어 태공(太公)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태자는 <지마祇摩>니금(尼今)의 적사(適嗣)로,

폐위됨을 당하여 백계사(白鷄祠)의 주(主)가 되었고,

힘써 계도(鷄徒)를 보호하였으며, <한석汗昔>태자와 더불어 흑치사(黑齒祠)를 세웠다.

 

<흑치黑齒>를 존경하고 숭배하여 흑제대신(黑帝大神)으로 삼았다.

 

<복생福生>이 낳은 흑치의 딸 <복치福齒>를 처로 삼았으며,

역시 백계신모(白鷄神母)를 받들었다.

 

평생토록 게으르지 않았으며 이때에 이르러 남편(夫君)을 따라 죽었다.

 

계도는 고비(考妣){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이 초상을 치렀다.

 

<옥치玉齒>가 상국(相國)인데,

곧 그의 아들이어서 왕이 이를 위하여 친히 임하여 조문하였다.

 

흑치의 사후에 처음으로 친족들이 모였다.


 

七月 謁通伊伐飡 盤介稟主

 

7월 <알통謁通>을 이벌찬, <반개盤介>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12월 해택(海宅)에 들어갔다.

 

 

 

 

 

아달라왕 30년(AD.242)

 

正月 元檍伊伐飡 暖板稟主

時上厭政 副君用事 暖板有寵於副君 娠之 故得相 人以娠主目之

以五軍頭上爲六軍豆上 置左右軍主衛主兵官頭上之職 以阿飡以上授之

 

정월 <원억元檍>을 이벌찬, <난판暖板>을 품주로 하였다.

 

당시 왕이 나라의 일에 염증을 느껴, 부군이 권세를 부리었다.

 

<난판暖板>이 부군(副君){벌휴}에게 총애가 있어 임신을 하였고,

그러한 연유로 재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임신한 품주를 지켜보았다.


5군두상(五軍頭上)을 6군두상(六軍頭上)으로 하였다.

 

좌우군주(左右軍主)와 위주(衛主), 병관(兵官), 두상(頭上)의 직을 두어

아찬(阿飡)이상에게 주었다.



四月 命副君摠執國政

 

4월 부군(副君)에게 국정을 총괄하여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七月 乾方伊伐飡 玄臣稟主 玄臣亦副君寵妾也 時生副君女玄水 才二月 人以爲産主

 

7월 <건방乾方>을 이벌찬, <현신玄臣>을 품주로 하였다.

 

<현신玄臣> 역시 부군의 총애를 받은 첩이다.

 

당시 부군의 딸 <현수玄水>를 낳았는데 겨우 2개월이었다.

 

사람들이 산주(産主)라 하였다.


 

八月 暖板生副君子暖休 賜米

 

8월 <난판暖板>이 부군의 아들 <난휴暖休>를 낳아 쌀을 내렸다.


 

十月 上有疾 中外行禱

 

10월 왕에게 병이 있어, 나라 안팎에서 기도를 행하였다.


 

 

 

 

아달라왕 31년(AD.243)

 

正月 乃完伊伐飡 猩禮稟主

 

정월 <내완乃完>을 이벌찬, <성례猩禮>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上崩 副君與內后 行祥登祚 以內后爲正宮皇后 紫凰爲副后 盡廢先今后妃

 

3월 왕이 죽어 부군과 내후가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내후(內后)를 정궁황후로, 자황(紫凰)을 부후로,

선금(先今){아달라}의 후비(后妃)를 모두 폐하였다.

 

아달라기 죽으니 내후 <내례>의 부군이며, 아달라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벌휴가 아달라를 이어 즉위하니 박씨에서 석씨로 자연스럽게 왕위가 계승 된 것이다.


 

아달라왕 31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五月 葬先今 于狼山 立廟曰 阿達羅 以發萱爲祭主 眞忠爲法 行大祭

 

5월 선금(先今)을 낭산(狼山)에서 장례를 지냈다.

 

사당을 세워 아달라(阿達羅)라고 하였다.

 

이로써 <발훤發萱>{아달라와 내례의 딸}을 제주(祭主)로,

<진충眞忠>을 법(法)으로 하여 큰 제사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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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