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왕 원년(AD126)

 

元年 二月 上與惠后 親祀祖廟 大享骨門 以市老爲伊伐飡 阿休爲稟主

許婁爲中外軍事 阿明爲軍母

 

2월,상은 혜후(惠后)와 함께 친히 조상묘에 제사를지내고,

골문(骨門)에게 크게 잔치를 벌였다.

 

<시로市老>를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았고,<아휴阿休>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허루許婁>를 중외군사(中外軍事)로 삼았고,<아명阿明>을 군모(軍母)로삼았다.

 

다파나군(성제) - 탈해(46-130)

천신(월지) - 운제(26?-108)

차웅(운제) - 아리(65?-133)

탈해(운제) - 아혜(83-136) 惠后

유리(아리) - 파사(90-158 재위 126-158)

대로(구을) - 허루(80-155)

 

 

三月 上與惠后 巡撫京外州郡 發倉賑貧 曰 “三皇之世 民無盜賊 而皆自富裕

太君以來 四方多事 民多抵罪 朕深憐之 其除死罪 而原之”

 

3월,상은 혜후(惠后)와 함께 서울 외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며 위문하였다.

 

창고를 열어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며 말하길,

 

"삼황(三皇)의 시절에는 백성들은 도적이 없어서 모두 다 부유하였다.


 

삼황(三皇)은 혁거세, 남해,유리를 말한다.

 

 

태군(太君){탈해}이래 사방에 일이 많이생겨,

백성들이 벌을 많이 받았으니,짐은 이를 심히 가엾게 여긴다.

 

죽을 죄를 제외하고는 용서할 것이다"라고하였다.

 

 

四月 以支所禮爲兵官 使屬中外

 

4월<지소례支所禮>를 병관(兵官)으로 삼고 중외(中外)에 속하게 하였다.

 

대로(구을) - 칠공(82?- )

화신(알영) - 한나(63?-132)

칠공(한나) - 지소례(100?-174)

 

 

六月 稟主阿休奏曰 “妾兄阿世 乃眞骨之精也 神道多艱 被奸受汚 今在自淨 情甚可矜

願召宮中 以補權妻 何如” 上曰 “阿世女豪也 非許婁則不可” 命爲中外上軍母 使吉 鮑祠

 

6월 품주(稟主) <아휴阿休>가 아뢰길

 

"첩의 언니는 <아세阿世>인데 곧 진골의 정(精)입니다.

 

신도(神道)는 많이 어렵습니다.

 

간음을 당하여 더럽힘을 받았으나

지금은 자정하고 있으나 처지가 심히 가엾습니다.

 

원컨데 궁안으로 불러들여 권처(權妻)로 삼음이 어떠하신지요?"

 

 

상이 말하길

 

"<아세阿世>는 여걸이다.

<허루許婁>가 아니면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명하여 중외상군모(中外上軍母)로 삼고, 포사(鮑祠)에서 결혼을 시켰다.

 

차웅(운제) - 아세(79?- )

                  아휴(81?- )

 

 

九月 沙伐副君成公與伏亥 入朝 行大場 于一善州

 

9월 사벌(沙伐) 부군(副君) <성공成公>이 <복해伏亥>와 함께 입조(入朝)하였다.

 

일선주(一善州)에서 대장(大場)을 거행하였다.

 

<복해伏亥>는 <성공成公>의 처이다. 

 

대장(大場)은 그 해 농사를 잘 지은 자에게 상을 내리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이다.

 

 

十一月 上與惠后史省 入奈歷 護山梯病

 

11월 상은 혜후(惠后)와 <사성史省>과 함께 내력(奈歷)으로 들어거서

<산제山梯(55?-131)>{혁거세의 딸}의 병을 간호하였다.

 

허루(?) - 사성(100?-173) 史后

일광(알영) - 산제(55?-131)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일(第一) 제사(祭祀)편에 의하면 내력(奈歷)은

진한(辰韓) 6부 가운데 하나인 습비부(習比部:명활산 고야촌)에 있다고 하였다.

 

 

<파사婆娑(90-158)> 원년은 126년이다.

 

<파사婆娑>는 <유리(51-112)>와 <阿利(73?-133)>사이에서 태어났다. 

 

혜후(惠后)<아혜阿惠(83-136)>는 탈해(51-130)이사금의 딸이고,

사후( )<사성史省(100?-173)>은 <허루許婁(80?-155)>의 딸로

<지마祇摩(131-191)>이사금의 어머니가된다.

 

두 사람은 <파사婆娑> 이사금의 후계자에 대한 경쟁관계에 있다.

 

 

十二月 遣支所禮 問西路將士 韓那生 許婁子穀公 賜米

 

12월 <지소례支所禮>를 보내 서로장사(西路將士)들을 위문하였다.

 

<한나韓那>가 <허루許婁>의 아들 <곡공穀公>을 낳아 쌀을 내렸다.

 

 

허루(한나) - 곡공(126- )

 

<한나韓那>는 <지소례支所禮>의 어머니다.

 

사후에 <일지日知>신군(神君)의 옆으로 이장된다.

 

대로(아리) - 일지(85?-129)

 

<파사婆娑>와 <일지日知>는 어머니가 <阿利>인 同腹형제이다.

 

<허루許婁>와 <일지日知>는 아버지가 <대로>인 異腹형제이다.

 

 

이때 <탈해>81세, 태후 <아리>62세, <허루>47세. 혜후<아혜>44세,

<파사>왕 37세, 사후<사성>27세, <달문>30세, 태자<덕공>7세이다.

 

 

 

 

 

파사왕 2년(AD127)

 

二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奈歷

 

1월, 상은 혜후(惠后)와 함께 내력(奈歷)에서 조하{신년 하례}를 받았다.

 

 

三月 置南北桃 以爲骨仙集場 以許婁爲伊伐飡 阿世爲稟主 以月瓠爲西路軍事 妻以達門 謁長爲朶山城主 妻以彡月

 

3월, 남도(南桃)와 북도(北桃)를 설치하여, 골선(骨仙)들이 모이는 장소로 하였다.

 

<허루許娄>를 이벌찬(伊伐飡)으로, <아세阿世>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월호月瓠>를 서로군사(西路軍事)로 삼았고, <달문達門>을 처로 삼았다.

 

<알장謁長>을 타산성주(朶山城主)로 삼았고, <삼월彡月>을 처로 삼았다.

 

호공(월씨) - 월호(90? -149)

탈해(장씨) - 달문(97-171)

 

 

五月 月福太子薨 葬以太公禮 太子先神之摩腹子也 好神仙 遊四方神山

北至勾利 南至海上 得道以歸 以育兩門 有子女八十二 孫不知數

上與惠后爲之 幸其宅 仙徒會集者萬衆 上臨問曰 “大父上昇 誰可繼統乎”

太子曰 “吾子皆劣不足 以傳唯齊居 可以統仙” 於是仙統 遂歸齊居

 

5월 <월복月福>太子가 죽으니, 태공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복공(월고) - 월복(?-127) 

 

<월복月福> 태자(太子)는 선신(先神){탈해}의 마복자(摩腹子)였다.

 

신선을 좋아하여 사방의 신산을 유람하였고,

북쪽으로 구리(勾利){고구려}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해상(海上)에 이르렀다.

 

득도를 하고 돌아와 양문(兩門)을 가르치니, 자녀가 82명이요, 자손은 셀수가 없었다.

 

왕은 혜후(惠后)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행차를 하였다.

 

선도(仙徒)의 모인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상은 위로를 하며 말하길

 

"대부(大父)께서 돌아가시니 누가 그 계통을 이을 수가 있으리오?"

 

태자가 말하길

 

"저희 아들들은 모두 미숙하여 부족합니다.

 

오로지 <제거齊居>에게 맡김으로써 선(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통(仙統)은 마침내 <제거齊居>에게 돌아갔다.

 

고허(돌산) - 제거

 

 

九月 月瓠與河石等 大破蛙山 燕支出降 坑扶余守卒二百人

扶余卒 皆取河石軍之妻女 致怒於軍 故被禍慘矣

 

9월, <월호月瓠>와 <하석河石>등이 백제의 와산(蛙山)을 대파하였다.

 

<연지燕支>가 나와서 항복하였다.

 

부여(扶余)의 수비병 200명을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부여(扶余)의 병사들은 모두 <하석河石>의 병사들의 처와 딸을 취했기 때문에,

<하석河石>의 군대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화를 당함이 참혹하였다.

 

 

十一月 上與惠后 入奈歷 禱天 惠后生女翁君 上洗而名之

 

11월, 상은 혜후(惠后)와 함께 내력(奈歷)으로 들어가 하늘에 기도를 하였다.

 

혜후(惠后)가 딸 <옹군翁君>을 낳았다. 상은 씻어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파사(아혜) - 옹군(127- )

 

 

 

 

 

파사왕 3년(AD.128)

 

三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高井

 

정월 왕과 혜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하를 받았다.


 

三月 許婁請免 不許 以赤旨爲卞韓兵官 君己爲京都兵官 歸公爲中外兵官

阿世生許婁子倉公 賜米視兒

 

3월 <허루>가 면직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적지赤旨>를 변한(卞韓)병관으로, <군기君己>를 경도(京都)병관으로,

<귀공歸公>을 중외(中外)병관으로 하였다.


<아세阿世>가 허루의 아들 <창공倉公>을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보았다.


 

五月 上與惠后史省 幸一善州 犒軍 州干克市 進樂浪玉器 于后及史省

史省不受曰 “金玉非寶也 良臣爲寶 汝若愛民忠君 何用玉乎”

克市汗出 惠后聞之 曰 “朕爲天子 而德不如史省” 亦却其器

 

5월 왕과 혜후와 <사성>이 일선주(一善州)에 행차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어 먹였다.

 

주간(州干) <극시克市>가 낙랑(樂浪)의 옥그릇을 혜후와 <사성>에게 바쳤다.

 

<사성>이 받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금과 옥은 보배가 아니라 좋은 신하가 보배다.

 

네가 만약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한다면

옥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라고 하였다.

 

<극시>가 땀을 흘리며 나갔다.

 

혜후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짐은 천자(天子)이나 덕이 <사성>만 못하다 .”라고 하며 역시 그 그릇을 물리쳤다.

 

낙랑이라는 명칭은 기림기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기림기에 우두주에서 낙랑과 대방에게 공물을 바쳤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갖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하였다

(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의 직접적인 전쟁원인이다).

추모경에 의하면 남옥저의 땅이라고 하며, 아슬라·장령이라는 명칭과 같이 등장한다.

낙랑에 철기병(鐵騎兵)이 등장하기도 하며,

대방이 등장하는 것은 기림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八月 推火草八等合 加耶兵 欲納良刀 于卞山

吉門迎戰于黃山津口 大破之 虜獲千餘 乃進其爵爲波珍飡

 

8월 추화(推火)와 초팔(草八) 등을 합한 가야(加耶)의 병사가

<양도良刀>를 잡으려고 변산(卞山)에 왔다.

 

<길문吉門>이 황산(黃山)의 나루터 입구에서 맞이하여 싸워 크게 깨뜨려,

사로잡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이에 작위가 파진찬이 되었다.

 

하루(장씨) - 길문(93?-152)

 

≪비교≫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1년 기사


21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

 

 


≪견해≫

 

1. 추화(推火)국은 129년 2월 기사에 신라영토로 등장하므로, 이 때에 병합된 듯 하다.

 

155년 8월 기사에 초팔(草八)국은 가야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등장하고,

다시 내해이사금 포상8국의 란(亂)중에 8국 중 1국으로 등장한다.

 

이후로 초팔국의 이름이 사라진다.

 

포상8국의 난(亂)은 백제와 공모하여, (대)가야를 치려하였고

(대)가야가 구원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전쟁이다.
        

2. 195년의 기사에서 대도(大刀)와 대수(大樹)가 일지(日知)를 견제하였다고 하였다.

 

대도와 양도(良刀)는 형제관계인데, 일지가 양도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9월의 기사와 연결된다.


 

<양도良刀>는 <대도大刀>의 동생이다.

 

 

<양도良刀>는 변산에서 <일지(日知)>를 견제하고 있었다.

 

<일지(日知)>가 가야를 부추겨 <양도良刀>를 잡으려고 하니

<양도良刀>는 아라(阿那)가야로 도망간다.


 

九月 上與阿利大母日知神君 會于境上

 

9월 왕과 <아리阿利>대모가 일지(日知)신군을 국경에서 만났다.


<아리>와 <일지>는 모자(母子)관계고, <파사>와 <일지>는 동복(同腹)형제다.

이전에 왕위 다툼이 있었던 듯 하다.

 

 

十一月 良刀南奔阿那 加耶奉使請罪

 

11월 <양도良刀>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아나(阿那)가야가 사신을 보내어 죄를 줄 것을 청하였다.


 

十二月 一直太守 大長神君薨 以白公爲之代 賜其妻宿其 紫花衣 白大馬

 

12월 일직(一直)태수 <대장大長>신군이 죽었다.

 

<백공白公>이 대신(승계)하였다.

 

<백공>의 처 <숙기宿其>에게 자화의(紫花衣)와 백대마(白大馬)를 내렸다.

 

 

 

 

 

파사왕 4년(AD.129)

 

四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南桃 宴太君彡君 於高井

 

정월 왕과 혜후가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고정(高井)에서 <태군太君>과 <삼군彡君>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다파신군(성제) - 탈해(46-130)

                        삼군 


二月 駒令君珍花入朝 修貢 以許婁子加良爲護城大師 以發良爲京都軍事 甘生爲軍母

乾水爲一善州太守 克市爲推火太守 

 

2월 구령군(駒令君) <진화珍花>가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허루許婁>의 아들 <가량加良>을 호성대사(護城大師)로,

<발량發良>을 경도(京都)군사로, <감생甘生>을 경도군모로,

<건수乾水>를 일선주(一善州)태수로, <극시克市>를 추화(推火)태수로 하였다.


 

三月 許婁爲角干 掌中外兵馬事 阿世爲祖主 阿名爲大軍母 齊居爲伊伐飡 遐利爲稟主

 

3월 <허루許婁>를 각간(角干)으로 하여 중외병마사(中外兵馬事)에 관한 일을 맡기고,

<아세阿世>를 조주(祖主)로, <아명阿名>을 대군모(大軍母)로 하였다.


<제거齊居>를 이벌찬으로, <하리遐利>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日知神君薨 于卞山 阿利大母 請歸葬 上問於許婁 許之

神君失志 以來沈爵 得疾不起 上痛哀之 葬以尼今禮 入蛇陵門 殉之者甚衆 加良禁之不得

復以阿利爲太聖 居大井 許婁爲太聖私臣 呼以聖父  

 

4월 <일지日知>신군이 변산(卞山)에서 죽었다.

 

<아리阿利>대모가 왕자 신분으로 되돌려서 장례를 치러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루許婁>에게 물어 허락하였다.

 

신군(神君)은 뜻을 잃은 이후로 술에 빠져들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왕이 애통해하며 니금(今)의 예로 장례를 치루었다.

 

사릉문(蛇陵門)에 들어가 따라죽으려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가량加良>이 따라 죽는 것을 막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지>신군이 묻힌 곳은 사릉(蛇陵)이나, 사당은 변산(卞山)에 세웠다.

 


다시 <아리阿利>를 태성(太聖)으로 되돌리고, 대정(大井)에서 살게 하였다.

 

<허루>를 태성(太聖) 사신(私臣)으로 하여 성부(聖父)라고 불렀다.


 

태성(太聖)은 왕의 어머니를 부르는 존호다.

 

후에 허루의 성부(聖父, 왕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길문>과 <마제>의 반란의 명분이 된다.


 

 

五月 置五路軍事 九州太守 命五路 皆娶聖父女爲軍母

以生里妻西路月瓠 干時妻南路吉文 夂多妻水路歸公 河馬妻北路摩帝

水酒漢鳥 樂浪那嘉 悉直猪治 爲第一藩

覆岩弩乙知 召羅方我 爲第二藩

一直白公 一善乾水 爲第三藩

卞山晉公 推火克市 爲第四蕃

 

5월 5로 군사와 9주 태수를 두었다.

 

5로는 모두 성부의 딸에게 장가들도록 명하여 성부의 딸을 군모로 삼았다.

 

<생리生里>는 서로 <월호月瓠>의 처로,

<간시干時>는 남로 <길문吉門>의 처로,

<치다夂多>는 수로 <귀공公>의 처로,

<하마河馬>는 북로 <마제摩帝>의 처로 하였다.

 

수주(水酒) <한오漢烏>, 낙랑(樂浪) <나가那嘉>, 실직(悉直) <저치猪治>는

제1번(藩)으로,

복암(覆岩) <노을지弩乙知>, 소라(召羅) <방아方我>는 제2번,

일직(一直) <백공白公>, 일선(一善) <건수乾水>는 제3번,

변산(卞山) <진공晉公>, 추화(推火) <극시克市>는 제4번으로 하였다.


5로 군사라고 하면서 4로밖에 안 보이는 것은 경로(京路)군사가 빠졌기 때문이며

수로는 동로이다. 


 

六月 太聖與聖父阿世 享上及惠后 于夏宅

以聖父宗妻加其 爲五品大母 私妻達元月門 爲三品大母

授紫花大衣 以聖父子加也 爲殿中郞

 

6월 태성(太聖)과 성부(聖父)와 <아세阿世>가 하택(夏宅)에서 왕과 혜후를 위하여

잔치를 열었다.

 

성부의 종처(宗妻) <가기加其>는 5품 대모로,

사처(私妻) <달원達元>과 <월문月門>은 3품 대모로 삼아

자화대의(紫花大衣)를 주었다.

 

성부의 아들 <가야加也>는 전중랑(殿中郞)으로 삼았다.


 

七月 吉門與發良妻甘生 逃歸卞山 初甘生與吉門 有私願 歸于吉門 聖父不許 而妻發良 甘生乃誘干時 曰 “我夫骨好 而性柔 汝夫骨賤 而性急 我當爲汝易之”

干時年幼 而順良 以其言 告于吉門 吉門大喜 遂與發良 會飮 因其醉 使干時薦之

發良酒醒 而悔之 謝罪于吉門 吉門笑曰

“入枕之花不貪 非丈夫也 旣貪之花 反之非豪傑也 兄妻雖老 與我有私 可以易之”

發良曰 “我旣犯罪 敢不如命 但恐聖父不許”

吉門乃與甘生 不告而去 聖父大怒 欲伐吉門 時達門 有寵於聖父 而泣救之 史聖亦止之 乃以干時爲京路軍母 行吉 鮑祠 而命吉門 反甘生 甘生托病不歸 自爲吉門妻

聖父奏曰 “臣之子女 恃臣之功而荒 亂者願 上治之 無赦”

上曰 “朕之兄弟也 雖亂何妨”  

 

7월 <길문吉門>과 <발량發良>의 처 <감생甘生>이 변산(卞山)으로 도망쳤다.

 

처음에 <감생>과 <길문>은 사사로이 좋아하여 <길문>에게 시집가기를 원하였다.

 

성부가 허락하지 않고 <발량>에게 시집보냈다.

 

<감생>이 <간시干時>를 유혹하여 말하기를

 

“나의 남편{발량}은 혈통이 좋고(발량의 부모 모두 혁거세와 알영의 자식임)

성품이 부드러운데 너의 남편{길문}은 핏줄이 천하고 성품이 급하니

내가 마땅히 너의 남편을 바꾸어 주겠다.”라고 하였다.

 

<간시>는 나이가 어려 거스르지 않고 좋게 여겨, 그 말을 <길문>에게 고하였다.

 

<길문>이 크게 기뻐하며, <발량>과 만나서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취기로 인하여 <간시>를 <발량>에게 추천하였다.

 

<발량>이 술이 깨자 후회하며 <길문>에게 사죄하였다.

 

<길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여자와 동침하는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은 장부가 아니다.

 

이미 여자와 동침하였으므로 되돌리려 하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형의 처가 비록 나이가 많으나

나와 더불어 사사로운 감정이 있으니 바꾸는 게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발량>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죄를 저질렀다. 감히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

다만 성부(聖父)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 두렵다.”라고 하였다.

 

이에 <길문>이 <감생>과 더불어 성부에게 알리지 않고 가버렸다.

 

성부가 크게 화를 내며 <길문>을 베려하였다.

 

당시 <달문達門>은 성부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여자의 울음으로 <길문>을 구하였다.

 

<사성史省> 또한 그치게 하였다.

 

탈해(장씨) - 달문(97-171)

하루(장씨) - 길문(93?-152)

간시는 허루의 딸이고 길문은 달문의 아버지가 다른 오빠이다.

 

 

이에 <간시>를 경로군모(발량의 처로 삼았다는 뜻)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고, <길문>에게는 <감생>을 되돌리도록 하였다.

 

<감생>은 병을 핑계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 <길문>의 처가 되었다.


성부(聖父)가 아뢰기를

 

“신의 자식들이 신의 공로를 믿고 바람을 피웠으니,

어지럽힘을 일으킨 자를 왕께서 다스리고 사면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의 형제다. 비록 난(亂)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어찌 거리낌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觜山 以史省爲雌神 行吉 奈乙

 

8월 자산(觜山)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자산(觜山)은 <길문>의 할머니 이름이기도 하다.


이로써 <사성史省>을 자신(雌神)으로 삼고,

내을(奈乙)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十月 樂浪太守那嘉與其妻阿曼 入朝 獻宝弓神器革囊 賜爵大阿飡 以授紫衣

 

10월 낙랑태수 <나가那嘉>와 처 <아만阿曼>이 입조하여

보궁(宝弓)과 신묘한 그릇과 가죽 주머니를 바쳤다.

 

대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자의(紫衣)를 수여하였다.

 

 

 

 

 

파사왕 5년(AD.130)

 

五年 正月 上與惠后史省 受朝南桃

 

정월 왕과 혜후(惠后)와 <사성史省>이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大光星出自東北 凡二十日 或曰聖人出 上與惠后史省 禱天 于閼川

 

2월 대광성(大光星)이 동북쪽에 나타나더니 무릇 20일이었다.

혹은 성인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탈해 23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대광성(大光星) 출현은 131년 3월 지마의 탄생기사와 관련이 있다.


왕과 혜후(惠后)와 <사성史省>이 알천(閼川)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三月 八鏡 多出死魚 命戽扈其水 以發良爲伊伐飡 干時爲稟主

弩門爲京都軍事 以聖父女烏羅爲軍母 以屈公子古乙爲護城兵官

 

3월 팔경(八鏡)에서 많은 죽은 물고기가 나타나, 그 물을 퍼내도록 명하였다.


<발량發良>을 이벌찬으로, <간시干時>를 품주로,

<노문弩門>을 경도군사로, 성부의 딸 <오라烏羅>를 경도군모로,

<굴공屈公>의 아들 <고을古乙>을 호성병관으로 하였다.



四月 大風 大井東門頹壞 上爲之責己不食 惠后沐浴禱天 曰

“責在妾身 願解夫 今須臾風止”  遣支所禮 問民頹戶

 

4월 큰 바람이 불어 대정(大井)의 동문이 기울어져 무너졌다.

 

왕이 자책하며 식사를 하지 않았다.

 

혜후가 목욕을 하고 하늘에 기도하며 말하기를

 

“책임은 첩에게 있으니 원하건대 남편을 풀어주시고,

비록 지금 잠깐이라도 바람을 그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지소례支禮>를 보내어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는지 묻게 하였다.


 

五月 惠后生女 難之曰 “妾己衰矣 願以吾女毛多爲聖母 以報上恩”

上曰 “施優在多 何爲母 汝尙豊儁 史省在焉 勿爲遠慮也”

 

5월 혜후가 딸을 낳으며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첩은 이미 쇠하였으니, 나의 딸 <모다毛多>를 성모로 삼아 주기를 원합니다.

이로써 왕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모시毛施>와 <모우毛優>가 있는데 <모다毛多>를 어찌 성모로 합니까?

당신의 숭상됨은 <사성>보다 풍성하고 뛰어나니, 앞일은 걱정하지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모시毛施>와 <모우毛優>는 <유리>와 혜후 <아혜>의 딸로,

<모시毛施>는 <탈해>와의 사이에 <구추仇鄒>를 낳았다.

 

 


八月 太君以暑疾崩 于日知宅 上與惠后臨泣曰 “父今棄我 何去”

太君曰 “歸侍先今 此願畢矣 骨門無相殘 努來無相欺 知之乎”

上曰 “諾” 太君乃崩 天地晦冥 上痛哀之 以父今禮葬 于壤井陵門 阿孝今堂皆殉之 不能禁 太君足智多謀有 大功于社稷 又喜女色所 畜嬪妾 千有余人 生子女七百人 不能盡知

自神以來 初有之事也.

 

8월 태군(太君){탈해}이 더위로 병을 얻어 <일지日知>宅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과 혜후가 대면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부금(父今)은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하였다.

 

태군이 말하기를

 

“선금(先今){유리}을 모시러 가고자 한다. 이 소원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

골문(骨門)간에 상잔(相殘)하지 말고,

오고자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속이지 마라. 알겠느냐”고 하였다.

 

왕이 승낙하자, 태군이 이에 죽었다.

 

하늘과 땅이 깊은 어둠속에 빠져들었다.

 

왕이 애통해 하며, 부금(父今)의 예로 양정릉(壤井陵)에 장사를 지냈다.

 

<아효阿孝>와 <금당今堂>이 모두 따라 죽었으나 막지 못하였다.

 

태군은 지혜가 넉넉하고 많은 꾀가 있어서 사직(社稷)에 큰 공이 있었다.

 

또 여색을 좋아하는 바가 있어 데리고 있는 빈첩(嬪妾)이 천여 명이었고,

자녀가 700명이어서, 모두를 알 수 없었다.

 

신이 내려온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탈해24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九月 以史省毛施訥彗爲聖母 行吉 于奈乙

覆岩太守 弩乙知薨 干州革古 請拾骨而葬 許之 吉門請與發良易妻 許之

以明宣爲覆岩州太守 妻以都氏

 

9월 <사성史省>과 <모시毛施>와 <눌혜訥慧>를 성모(聖母)로 삼았다.

 

내을(奈乙){혁거세의 탄생지}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복암(覆岩)태수 <노을지弩乙知>가 죽었다.

 

간주(干州) <혁고革古>가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가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길문吉門>이 (발량과) 처를 바꾸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명선明宣>을 복암주(覆岩州)태수로 하고, 도씨(都氏)를 처로 하였다.


 

 

十月 聖父角干與太聖 巡至一善 慰賜軍士 夂理唐卒 命以海飡禮葬之

 

10월 성부 각간과 태성(太聖)이 돌아다니며 일선(一善)에 이르러 군사를 위문하였다.

 

<치리夂理>가 갑자기 죽어 해찬(海飡)의 예로 장사를 치루었다.


 

十二月 扶余乘雪 欲取一牟城 不克而退

 

12월 부여(扶余)가 눈을 타고 침입해 일모성(一牟城)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파사왕 6년(AD.131)

 

六年 正月 上與惠后及三母 受朝南挑 賜骨門長老 宴于其宅 分遣勅使勸酒

達門生許婁子許乙 上賜米見兒

 

정월 왕과 혜후(惠后)와 삼모(三母)가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삼모(三母)는 <사성> <모시> <눌혜> 세 성모((聖母)를 말한다. 


골문장로에게 잔치를 내려, 칙사(勅使)를 그 댁으로 나누어 보내어 술을 권하였다.


<달문達門(97-171)>이 <허루許婁>의 아들 <허을許乙(131-178)>을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보았다.

 

 

허루(달문) - 허을(131-178)  을공(乙公)이다.

 


 

二月 行月歌會 于春宅 賞歌仙七人

以聖雪仙童宮公爲奈麻 宮公有寵于善孝大母 以爲首功 而賜爵

2월 춘택(春宅)에서 월가회(月歌會)를 열어, 가선(歌仙) 7인에게 상을 내렸다.


 

월가회는 고구려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성설선동(聖雪仙童) <궁공宮公>을 내마(奈麻)로 삼았다.

 

<궁공>이 <선효善孝>대모에게 총애가 있어 으뜸 공로로 삼아 작위를 내렸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發良爲南路軍事 干詩爲軍母 以車門爲理方大師

史省聖母生太子 是爲祇摩 上喜不自勝 與惠后 洗兒終日不離 曰

 “此子有龍狀 必興太國家也” 惠后不悅 曰 “吾子德公 何如”

上乃慰惠后 曰 “弟固兄之臣 雖貴 在下吾妻之子 可以奉神 何可同論”

惠后大喜 以酒勸上 不止

 

3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감생甘生>을 품주로,

<발량發良>을 남로군사로, <간시干時>를 남로군모로,

<거문車門>을 이방대사(理方大師)로 삼았다.


<사성史省>성모가 태자를 낳았는데 이 분이 <지마祇摩(131-191)>다.

 

왕이 기뻐하며 사사로운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혜후(惠后)와 함께 아이를 씻기며 하루 종일 떼어놓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아기에게 용상(龍狀)이 있다. 반드시 나라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혜후가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아들 <덕공德公(120- )>은 어찌 하구요.”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혜후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동생은 오로지 형의 신하일 뿐입니다.

 

비록 귀하다고는 하나 나의 처의 아들{덕공} 아래에 있을 뿐입니다.

 

가히 신(神)을 섬김이 마땅합니다. 어찌하여 같음을 논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혜후가 크게 기뻐하며 왕에게 술을 권함이 그치지 않았다.

 

130년 2월의 기사에

대광성이 나타나면 성인이 나타난다는 믿음이 당시 신라인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성의 아들 지마가 대광성을 타고나서 형인 덕공을 누르고 왕이 됨을 시사한다.



四月 以君己爲大城大師 妻以聖父女加西 行吉于鮑祠 許婁與阿世主之

以屈公爲仙老 齊居爲上仙 行法于南桃 會子萬衆

 

4월 <군기君己>를 대성대사(大城大師)로 삼았다.

 

성부의 딸 <가서加西>를 <군기>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고, <허루許婁>와 <아세阿世>가 주재하였다.


<굴공屈公>을 선노(仙老)로, <제거齊居>를 상선(上仙)으로 삼아

남도(南桃)에서 법(法)을 행하였는데 모인 백성이 많았다.

 

심공(구을) - 굴공(66-141) 



六月 以聖父爲太上老仙 督中外仙巫事

 

6월 성부를 태상노선(太上老仙)으로 삼고

나라 안팎의 신선과 무속에 관한 일을 살피게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高井 惠后自績 而示衆

聖父正妻山梯大母薨 上親幸弔慰 葬以后禮 聖父痛之曰

“吾妻賢 而訓我 今日富貴 而相棄 何可忍乎” 乃作思妻廟 是爲山宮也

以權妻毛優 妻康造太子 行吉鮑祠 

 

8월 고정(高井)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혜후가 몸소 길쌈을 하며 백성들에게 보였다.


성부의 정처(正妻) <산제山梯(55?-131)>{혁거세와 알영의 딸}대모가 죽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조문하고 위로했다.

 

후(后)의 예로 장사지냈다.

 

성부가 아파하며 말하기를

 

“나의 처는 현명하여 나를 가르쳐 현재의 부귀를 이루었는데

함께하기를 버리고 떠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사처묘(思妻廟)를 지었는데, 이것이 산궁(山宮)이다.


권처(權妻) <모우毛優>{유리와 아혜의 딸, 구추의 어머니}를 <강조康造>태자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강조康造>는 탈해의 아들이다. 


 

十月 以阿世爲聖父正妻 名曰宅主 初太聖自願之 上欲從之 齊居諫之不行

10월 <아세阿世>를 성부의 정처로 삼고, 택주(宅主)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성이 스스로 성부의 정처가 되기를 원하여 왕이 따르고자 하였으나,

<제거齊居>가 간언하여 행하지 않았다.


 

十二月 以康造太子 爲壤井大師 月公爲副師 星門爲都頭

12월 <강조康造>태자를 양정(壤井)대사로,

<월공月公>을 양정부사, <성문星門>을 양정도두로 삼았다.

 

양정은 탈해가 묻힌 곳으로 이 분들은 모두 탈해와 혈족관계라는 뜻이다.

 

그러나 상장돈장에는 석씨와 관련된 계보가 특히 부실하여

정확한 관계를 알기는 어렵다.

 

 

 

파사왕 7년(AD.132)

 

七年 正月 上與惠后 拜玄神 于井中 受朝 南桃

上巡行六部 至漢祇 見飢民于途 下車泣之 命改倉廩令 而責其部君

 

정월 왕과 혜후가 정중(井中)에서 현신(玄神)에게 절하였다.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왕이 6부를 순행(巡行) 한지(漢祇)에 이르러

길가에서 굶주린 백성을 보고 어가에서 내려 눈물을 흘렸다.

 

창름령(倉廩令)을 고치도록 명하고, 한지부 군장을 꾸짖었다.



二月 以加良爲京路軍事 君己爲護城大師 允良爲大城大師

以阿世女道失 妻加良 爲軍母 以聖父女果老 爲君己妻 使吉 鮑祠

 

2월 <가량加良>을 경로군사로,

<군기君己>를 호성대사로, <윤량允良>을 대성대사로 삼았다.

 

<아세阿世>의 딸 <도실道失>을 <가량加良>에게 시집보내어 군모로 삼았다.

 

성부의 딸 <과노果老>를 <군기>의 처로 삼았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三月 以月瓠爲伊伐飡 生里爲稟主

以吉門爲北路軍事 摩帝爲西路軍事 弩門爲按軍使 巡五路 以備戎器

惠后有疾 上爲之不食 命中外仙巫 行禱 以厚理爲聖父密妻 行吉 鮑祠

 

3월 <월호月瓠>를 이벌찬으로, <생리生里>를 품주로 삼았다.

 

<길문吉門>을 북로군사로, <마제摩帝>를 서로군사로,

<노문弩門>을 안군사(按軍使)로 삼아 5로를 살피며 융기(戎器)를 갖추도록 하였다.


혜후(惠后)가 병이 들어, 왕이 혜후를 위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다.

 

나라 안밖 선무(仙巫)에게 명하여 기도를 하였다.


<후리厚理>를 성부의 밀처(密妻)로 삼고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四月 覆岩君都氏與其子孟百 入朝

置助比川主 以大盖爲之 古陀耶主 以叔公爲之 加西妻叔公 加亥妻大盖

 

4월 복암군(覆岩君)과 도씨(都氏)가

그들의 아들 <맹백孟百>과 함께 입조(入朝)하였다.


조비천(助比川)주(主)를 두어 <대개大盖>로 삼고,

고타야(古陀耶)주(主)는 <숙공叔公>으로 삼았다.

 

<가서加西>를 <숙공>에게 시집보내고, <가해加亥>는 <대개大盖>에게 시집보냈다.


조비천(助比川)은 백제와의 경계지역이다.


 

五月 聖父與太聖 遊卞山 加耶遣使獻神鹿 于太聖及聖父 孟百爵大舍 使屬京路

 

5월 성부와 태성이 변산(卞山)으로 놀러갔다.


가야(加耶)가 사신을 보내어 신록(神鹿)을 태성과 성부에게 바쳤다.


변산(卞山)은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역이다.


<맹백孟百>에게 대사(大舍)의 작위를 주고, 경로(京路)에 속하여 부리도록 하였다.


 

七月 善孝大母生宮公女流宮公 于沙伐 都氏願 以其弟召氏爲明宣妻 許之

 

7월 <선효善孝>대모가 사벌(沙伐)에서 <궁공宮公>의 딸 <유궁流宮>공을 낳았다.

 

궁공(선효) - 유궁(132- ) 


도씨(都氏)가 그 여동생 <소씨召氏>를 <명선明宣>의 처로 삼아줄 것을 원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八月 行嘉排 于南桃 悉直太守猪治卒 以其子奉治代之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실직태수(悉直太守) <저치猪治>가 죽어 그의 아들 <봉치奉治>가 계승하였다.


 

九月 太聖聖父歸 自卞山 以勢漢爲倉廩令 以備內外之穀

9월 태성과 성부가 변산(卞山)에서 돌아왔다.


<세한勢漢>을 창름령(倉廩令)으로 하여, 나라안팎의 곡식을 갖추도록 하였다

 

호공(월지) - 알지(94-155)

 

<세한勢漢>이 <알지>이다.



十一月 聖父密妻韓那代母薨 上爲之發哀 葬以太公禮 卞人立其祀 曰大國神

以出于爲奈靈郡主 赤旨爲一牟城主

 

11월 성부의 밀처(密妻) <한나韓那>대모가 죽었다.

 

화신(알영) - 한나(63?-132) 

 

왕이 <한나>대모의 죽음에 슬픔을 드러내며, 태공(太公)의 예로 장사지냈다.

 

변인(卞人)이 사당을 지어 대국신(大國神)이라고 불렀다.


<출우出于>를 내령군주(奈靈郡主)로 삼고, <적지赤旨>를 일모(一牟)성주로 삼았다.


 

十二月 上宴太聖聖父 于高井 命支所禮 巡問窮民

 

12월 왕이 고정(高井)에서 태성과 성부를 위하여 잔치를 열었다.


<지소례支所禮>에게 돌아다니며 굶주리는 백성을 살펴보라고 명하였다.

 

 

 


 

 

파사왕 8년(AD.133)

 

八年 正月 太聖有疾 上與惠后三母 禱天 廢朝 雪雨不止

聖父命齊居 會集中外仙巫 于京都 未行大禱 而崩

上痛哀之 以太后禮葬 于蛇陵門 分骨于壤井及卞山 聖父請殉之 不許

 

정월 태성(太聖)에게 병이 있어 왕과 혜후(惠后)와 삼모(三母)가 하늘에 기도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눈비가 그치지 않았다.

 

성부(聖父)가 <제거齊居>에게 나라 안밖 선무(仙巫)를 경도(京都)에 모이게 하였다.

 

큰 기도를 행하기 이전에 태성이 죽었다.

 

왕이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태후(太后)의 예로 사릉문(蛇陵門)에 장사지냈다.

 

분골(分骨)하여 양정(壤井)과 변산(卞山)에도 장사지냈다.

 

성부가 따라 죽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허루>는 당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다.

 

태성(太聖) <아리阿利>가 죽자 <허루>는 따라 죽기를 청하였다.

 

<아리阿利>는 <남해>와 <운제>의 딸이고, <허루>는 <대로>와 <구을>의 아들이다.

 

<허루>는 <아리>의 사신(私臣)으로 <아리>보다 골품이 낮았다.

 

신라는 골품을 중시한 모계 사회임을 알 수 있다.

 


二月 召宮公于沙伐 許爲善孝私臣

聖父率中外仙巫 行大祭 于阿利神廟 上與惠后及德公太子 率三母八妻 行拜于庭

 

2월 <궁공宮公>을 사벌(沙伐)로 불러,

<선효善孝>)의 사신(私臣)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성부가 중외선무를 거느리고 <아리阿利>신묘(神廟)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왕과 혜후와 <덕공德公> 태자가

3모(三母), 8처(八妻)를 거느리고 제사 장소에 찾아뵈었다.


 

三月 以晉公爲伊伐飡 早乙爲稟主 月瓠爲西路軍事 摩帝爲按軍使

弩門爲水路軍事 歸公爲卞山太守 以晉公前妻奈好爲祖主

以聖父女骨夂爲德公太子妃 行吉 于奈乙 上與惠后 召聖父紇古 于神井 主其吉

骨夂乃紇古之生也

 

3월 <진공晉公>을 이벌찬으로, <조을早乙>을 품주로,

<월호月瓠>를 서로군사로, <마제摩帝>를 안군사(按軍使)로,

<노문弩門>을 수로군사로, <귀공公>을 변산태수(卞山太守)로 삼았다.


<진공晉公>의 전처(前妻) <내호奈好>를 조주(祖主)로 삼았다.


성부의 딸 <골치骨夂(121-208)>를 <덕공德公>태자비(太子妃)로 삼아

내을(奈乙)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태자 <덕공德公(120- )>은 14세, 태자비 <골치骨夂(121-208)>는 13세이다.

 

 

왕과 혜후가 성부와 <흘고紇古>{탈해와 금당의 딸)를 신정(神井)으로 불러

결혼식을 주재하게 하였다.

 

<골치骨夂(121-208)>는 <허루>와 <흘고>의 딸이다.

 

신정(神井, 뒷날의 神宮)은 내을(奈乙)에 있다.

 

 

四月 上與德公太子骨夂妃 奉惠后 謁仙桃山 大宴骨門

以聖父女婁麽爲晉公正妻 行吉 鮑祠 聖父以婁麽年穉 命早乙仍爲稟主

 

4월 왕과 <덕공德公>태자와 <골치骨夂>비(妃)가 혜후를 모시고,

선도산(仙桃山)을 찾아뵈었다.

 

골문(骨門)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성부의 밀처(密妻) <흘고紇古>를 대모(大母)로 삼아,

태자의 도덕과 품행을 닦도록 하였다.


성부의 딸 <루마麽>를 <진공晉公>의 정처(正妻)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성부는 <루마>가 나이가 어리다하여, <조을早乙>을 거듭 품주로 삼았다.


 

五月 作日知神廟 于卞山 合大國神 于其中 號曰雙神

以沙乙那爲主 是日又 以馬知那爲釰師大頭 永公爲殿中郞

 

5월 <일지>신군의 사당을 변산(卞山)에 지어 대국신{한나의 사당}과 합하였다.

 

그 이름을 부르기를 쌍신(雙神)이라고 하였다.

 

<사을나沙乙那>를 주(主)로 삼고,

이날 다시 <마지나馬知那>를 인사(師)대두로, <영공永公>을 전중랑으로 삼았다.


<사을나>와 <마지나>는 <일지>와 <한나>의 딸과 아들이다.


 

六月 沙伐君旨亥卒 副君成公代之

 

6월 사벌군(沙伐君) <지해亥>가 죽어, 부군(副君) <성공成公>이 계승하였다.


 

九月 以婁麽爲稟主 早乙娠滿 而免 賜爵七品大母

 

9월 <루마麽>를 품주로 삼았다.

<조을早乙>은 임신으로 배가 불러 면직하고, 7품 대모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十一月 上與惠后 入冬宅 宴骨老上仙 以支所禮爲護城大師 君己爲聖父私臣

大風 頹仙桃山神木 上親幸 禱祓 以善孝改爲山主

 

11월 왕과 혜후가 동택(冬宅)으로 와서 골노(骨老)와 상선(上仙)에게 잔치를 열었다.


<지소례支禮>를 호성대사로, <군기君己>를 성부(聖父) 사신(私臣)으로 삼았다.


큰 바람이 불어 선도산(仙桃山) 신목(神木)이 넘어졌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푸닥거리를 하며 기도하였다.

 

<선효善孝>를 다시 선도산의 주(主)로 삼았다.

 

 

 

 

 

파사왕 9년(AD.134)

 

九年 正月 上與惠后德公骨夂 修朝 南桃

 

정월 왕과 혜후, <덕공德公>, <골치骨夂>가 남도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以明宣爲伊伐飡 閑帝爲稟主 乾水爲覆岩太守 妻以召氏

弩門爲一善州太守 允良爲水路軍事 活祇爲大城大師

以君己妻果老 妻允良 以聖父密妻召于那 妻君己

 

2월 <명선明宣>을 이벌찬, <한제閑帝>를 품주로,

<건수乾水>를 복암(覆岩)태수, 소씨(召氏)를 처로 하였다.

 

<노문弩門>을 일선주태수로, <윤량允良>을 수로군사로,

<활지活祇>를 대성대사로 삼았다.

 

<군기君己>의 처 <과노果老>를 윤량에게 시집보내고,

성부의 밀처(密妻) <소우나召于那>를 <군기>에게 시집보냈다.


 

三月 召文使玉上人等 入朝 獻仙酒五十囊 樂器七事 上與惠后 引見勞之

古陀耶君加西生一子二女 上命其弟加也 往慰賜米

 

3월 소문(召文)이 <옥상인玉上人>등을 보내어 입조하여,

선주(仙酒) 50자루와 악기7벌을 바쳤다.

 

왕과 혜후가 이끌어 만나보고 위로하였다.


고타야군(古陀耶君) <가서加西>가 1남 2녀를 낳았다.

 

왕이 그 남동생 <가야加也>에게 명하여 위로하고 쌀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四月 權妻玄兒生 上女多可 上洗之

刀良干 羊公 出獵爲獸所傷 而卒 其妻不怠 請以其子艾公代之 許之

 

4월 권처 <현아玄兒>가 왕의 딸 <다가多可>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겼다.

 

파사(현아) - 다가(134- ) 


도량간(刀良干) <양공羊公>이 사냥을 나갔다가 짐승에게 상처를 입어 죽었다.

 

<양공>의 처 <불태不怠>가 그의 아들 <애공艾公>이 계승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五月 加西與夫叔公 引其孿子 入朝 獻靑牛三牝一牡 上與惠后 視其兒 賜叔公衣酒

命農師大頭 置靑牛典 畜之

北路軍母甘生 遣使獻方物 奏曰

“妾夫吉門 多年戍外 身家未好 子女思京 妾亦願見陛下 許妾夫妻 賜暇一年”

上問於聖父 聖父曰 “武臣思安 非其道 可罪之”

史省曰 “身恙 而不許 非骨肉之情也” 乃勸聖父 許之

以晉公爲北路軍事 婁麽爲軍母 召吉門歸京都 上命宅師 起吉門宅 于日知宅東

甘生與其子逃門 謁聖父 逃門者 甘生逃于吉門 而生也

時方五歲 而俊美有巧智 能令聖父笑 聖父愛之曰 “以汝之功 可赦汝母罪”

吉門大喜 其名曰功門

麥大豊 南路新縣 多連歧者 上命農師 集其穗 薦于祖廟

 

5월 <가서加西>와 남편 <숙공叔公>이 더불어 그 쌍둥이 자식들을 데리고 입조하여

푸른소 암컷 3마리와 수소 1마리를 바쳤다.

 

왕과 혜후가 그 아이들을 보았다.

 

<숙공叔公>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농사대두(農師大頭)에게 청우전(靑牛典)을 설치하여 기르도록 명하였다.


 

북로군모 <감생甘生>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며 아뢰기를

 

“첩의 남편 <길문吉門>이 수년간 국경을 수비하러 나가 있어

몸과 가정이 좋지 않습니다.

자식들 또한 경도(京都)만을 생각하고 있으며,

첩 또한 폐하를 뵙기를 원하므로 첩의 부부에게 일년 동안 휴가를 청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성부에게 물으니 성부가 말하기를

 

“무신(武臣)이 편안함을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므로 죄를 줄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사성史省>이 말하기를

 

“몸의 근심이 있는데 허락하지 않는 것은 혈육간의 정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이내 성부에게 권하여,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진공晉公>을 북로군사로, <루마麽>를 북로군모로,

<길문吉門>을 불러 경도(京都)로 돌아오게 하였다.

 

왕이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일지日知>의 집 동쪽에 <길문吉門>의 집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감생甘生>과 그의 아들 <도문逃門>이 성부를 찾아뵈었다.

 

<도문>은 <감생>이 <길문吉門>에게 도망하여 왔을 때 태어난 자식이다.

 

이때 바야흐로 5세였는데, 예쁘고 재주와 지혜가 있어서,

능히 성부로 하여금 웃게 하였다.

 

성부가 <도문>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너의 공으로 너의 어머니의 죄를 사면하겠다.”라고 하였다.

 

<길문>이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공문功門>이라 하였다.


보리가 풍년이 들었다.

 

남로(南路) 신현(新縣)에서는 이삭에서 연결된 것이 많았다.

 

왕이 농사(農師)에게 명하여 그 이삭을 모으게 하여

조상의 사당에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파사왕 5년

2월 명선을 이찬으로, 윤량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5월 고타 군주가 푸른색의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하나의 보리 이삭에 여러 가닥이 생겨나 크게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六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以明宣爲骨門伊飡 閑帝爲骨母

 

6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감생甘生>을 품주로,

<명선明宣>을 골문이찬(骨門伊飡)으로, <한제閑帝>를 골모(骨母)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大豊大師尹公角干 與其妻伊利生大母 行大場 于南郊

上與惠后幸之 賜酒父老 頌聲遍野

是夜伊利生 夢見儒理尼今 以大穗授之 曰 “可以爲神穗”

乃告于尹公 尹公曰 “大兆也 不可語人 可以驗之”

遂沐浴 行禱 而合宮 果得神胎

公夫妻 自喜于心 曰 “吾夫妻 夂淪不明 今有大慶 無以報神 只可垂憐民草 無失慈愛也”

 

9월 풍년이 들었다. 

 

대풍대사(大豊大師) <윤공尹公>각간이 그의 처 <이리생伊利生>대모와 더불어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왕과 혜후가 행차하여 부로(父老)에게 술을 내렸다.

 

들판에서 두루 칭송하는 노래를 들렸다.

 

이날 밤 <이리생>이 꿈속에서 <유리儒理>니금을 만났는데

큰 이삭을 내려주며 말하기를

 

“가히 신(神)의 이삭이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윤공>에게 고하니 <윤공>이 말하기를

 

“좋은 조짐이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가히 시험해야겠다.”고 하고

 

목욕 후 기도하고 합궁(合宮)하여 그 결과로 신의 태기를 얻었다.

 

<윤공>의 부부가 스스로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뒤늦은 물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 큰 경사를 맞이하여 신에게 보답함이 없으므로,

오직 민초(民草)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애로움을 잃지 않음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차웅(화원) - 윤공(80?- )

대수(운제) - 이리생(90?- )

 

<윤공>은 80년생으로 55세 <이리생>은 90년생으로 45세 정도일 것이다. 


 

十二月 行大祭 閼川 加耶樂浪召文之民 亦許入列 家給人足 行不賚粮 狗不食糟

以白公子啓其爲京都兵官 乃加其之兄子也 娶加其女加大 爲妻 亦聖父婿也

 

12월 알천(閼川)에서 큰제사를 지냈다.

 

가야(加耶), 낙랑(樂浪), 소문(召文)의 백성들 역시 줄을 서는 것을 허락하였다.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식량을 내려주지 않음이 없었다.

 

개조차 술지게미를 먹지 않았다.


<백공白公>의 아들 <계기啓其>를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계기>는 <가기加其>의 형의 아들이다.

 

숙부 <가기>의 딸 <가대加大>에게 장가들어 처로 하였는데, 또한 성부의 사위이다.

 

 

 

 

 

 

파사왕 10년(AD.135)

 

十年 正月 上與惠后德公骨夂 受朝 高井

扶余 侵一牟城 不克而退

 

정월 왕과 혜후가 <덕공德公>, <골치骨夂>와 고정(高井)에서 조하를 받았다.


부여가 일모성(一牟城)을 침입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二月 以吉門長子吉元爲兵官阿飡 賜其母庚元紫衣 長婁子長世爲南路兵官

以摩帝爲伊伐飡 河馬爲稟主 吉門爲按軍使 蝦盧爲理方大師

 

2월 <길문吉門>의 큰아들 <길원吉元>을 병관아찬으로 삼고,

그 어머니 <경원庚元>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였다.

 

길문(경원) - 길원(110?-178)

 

<장루長婁>의 아들 <장세長世>를 남로병관으로 삼았다.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하마河馬>를 품주로,

<길문吉門>을 안군사로, <하로蝦盧>를 이방(理方)대사로 삼았다.


 

三月 上享聖父 于春宅 置大畜典 命勢漢理之

 

3월 왕이 춘택(春宅)에서 성부에게 잔치를 내렸다.


대축전(大畜典)을 설치하여 <세한勢漢>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六月 以虹盧爲護城兵官 君乙爲京都兵官

 

6월 <홍노虹盧>를 호성병관으로, <군을君乙>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八月 五日 大豊大母伊利生生子 于南山私宅 瑞光照耀

尹公希其夙成 名曰逸聖 大樹角干見而喜之 曰 “我有孫矣”

 

8월 5일 대풍(大豊)대모 <이리생伊利生>이 남산(南山) 사택(私宅)에서 아들을 낳았다.

 

상서로운 빛이 밝게 비추어 빛났다.

 

<윤공>이 숙성(夙成)함을 희망하여, <일성逸聖(135-212)>이라고 이름 지었다.

 

<대수大樹> 각간이 아기를 살펴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에게 손자가 생겼다.”라고 말하였다.

 

 

<윤공尹公>은 <차웅>의 아들이고,<이리생伊利生>은 <대수大樹>의 딸이다.

 

일광(알영) - 차웅(28?-84)

 

천신(월지) - 운제(26?-108)

 

적공(무산) - 대수(70?-139)

 

차웅(화원) - 윤공(80?- )

 

대수(운제) - 이리생(90?- ).

 

윤공(이리생) - 일성(135-212) (7대왕 재위 192-212)  


 

九月 不怠生艾公子作公 不怠弗喜之女也

穀大登 京都所畜陳穀 十五萬石 州郡倉廩皆實 乃增其庫

多波那君薨而無嗣 其妃請奉彡尼今爲夫 惠后許之 命水路大師 裝船百艘 而送之

 

9월 <불태不怠>가 <애공艾公>의 아들 <작공作公>을 낳았다.

 

<불태>는 <비희弗喜>의 딸이다.

 

풍년이 들었다.

 

경도(京都)에서 모아 말린 곡식이 15만석이었다.

 

주군(州郡)의 창고가 모두 차서 이에 창고를 늘리도록 하였다.


<다파나多波那>군(君)이 죽었는데 후계자가 없었다.

 

그 비(妃)가 <삼니금彡尼今>을 받들어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혜후(惠后)가 <삼니금>을 남편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수로대사(水路大師)에게 백 척의 배를 치장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간지(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하여

금은으로 능라(綾羅)와 겸견(縑絹)을 채색하여,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으로 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신라왕이 항상 80척의 배로 일본국에 조공을 바치는데, 그것은 이런 연유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원년 기사 발췌>

 

일본서기는 백제와 신라 사서를 참고하여

가공의 인물 신공황후를 만들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다파나(多波那)국은 탈해가 태어난 곳으로,

탈해의 아버지가 그 곳의 임금이며, 다파나국이 왜의 동북쪽 천리에 있다고 하였다.

 

상장돈장에서도 탈해의 아버지를 다파나군이라 한다.

 

신라사초에는 왜에 볼모로 갔던 눌지의 동생 미해(미사흔)

박제상의 도움으로 탈출한 이후에 왜왕녀 <보미>가 도망을 왔는데,

보미의 사망(485년 1월)기사에 다파나 왕녀라고 명시하고 있다.

 

다파나(多波那)국은 협보가 고구려를 탈출하여 간 곳이며 협보의 후손이 탈해이다.

 

협보와 탈해는 흰 피부에 노랑머리로 아라사계로 추정된다.

 

168년 4월의 기사에 야인(野人)이 <후복厚福>태자의 명이라 하며

신라의 선박을 탈취하려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장돈장을 살펴보면 <후복厚福>은 <유리>와 <아혜>의 소생이라 하고,

<삼니금>을 다파나 여군의 남편으로 보낸 것을 허락하는 이가 <아혜>이다.

 

<후복厚福>이 <삼니금彡尼今>으로 추정된다.


 

十二月 以摩帝長子樊五爲兵官阿飡 賜其母月分紫衣 君乙母君門亦賜紫衣

 

12월 <마제摩帝>의 큰아들 <번오五>를 병관아찬으로,

그의 어머니 <월분月分>에게 자의(紫衣)을 내렸다.

 

<군을君乙>의 어머니 <군문君門>에게도 역시 자의(紫衣)를 내렸다.

 

월복(홍제) - 마제(90?-159)(월분) - 번오(110?-172)

대수(군문) - 군을(90?-165)

 

 

 

 

 

 

 

파사왕 11년(AD.136)

 

十一年 正月 上有疾 聖父侍德公太子骨夂妃君 受朝 南桃

 

정월 왕이 병이 있어, 성부가 <덕공德公>태자와 <골치骨夂>비군(妃君)를 모시고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復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摩帝爲按軍使 蝦盧爲大乘大師 啓其爲理方大師

 

2월 다시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하였다.

 

<마제>를 안군사로, <하로蝦盧>를 대승(大乘)대사로,

<계기啓其>를 이방(理方)대사로 하였다.


 

五月 惠后難産而崩 春秋五十四 上痛哀之 三日不食 郡臣力救護之 葬后於蛇陵門

以雌神史省爲皇后 以權妻阿良爲聖母

 

5월 혜후가 난산으로 죽었는데 춘추 54세였다.

 

왕이 혜후의 죽음을 슬퍼하여 삼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힘써 왕을 간호하였다.

 

후(后)를 사릉문(蛇陵門)에 장사지냈다.


이로써 자신(雌神) <사성史省>을 황후로, 권처 <아량阿良>을 성모(聖母)로 삼았다.

 

탈해(운제) - 아혜(83-136)

아혜는 유리와 파사사이에서 4남7녀를 낳은 여왕이다. 


 

六月 上與史后 受朝 南桃 大宴骨門

 

6월 왕과 사후(史后)가 남도에서 조회를 받고 골문에 큰 잔치를 벌였다.


 

九月 以白馬爲以伐飡 細婁爲稟主 吉門爲五軍都護使 屬于聖父

 

9월 <백마白馬>를 이벌찬으로, <세루細婁>를 품주로 하였다.

 

<길문>을 5군도호사(五軍都護使)로 하여, 성부(聖父)에 속하게 하였다.

 

 

 

 

 

 

파사왕 12년(AD.137)

 

十二年 上與史后 受朝 高井

 

정월, 왕과 사후(史后)가 고정(高井)에서 조하를 받았다.


 

二月 以摩帝爲伊伐飡 河馬爲稟主 白馬爲按軍使 賜船公穀五千石

 

2월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하마河馬>를 품주로, <백마白馬>를 안군사로 삼았다.


<선공船公>에게 5천석의 곡식을 하사하였다.


 

五月 金官加耶與月奈等 七國作亂 命吉門爲征虜大將軍 討平之

 

5월 금관가야(金官加耶)와 월내(月奈) 등 7국이 난을 일으켜,

<길문吉門>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쳐서 평정하였다.

 

靑裔(首露)(142-199)가 금관가야(金官加耶)국을 세운 해는 156년이다.

 


七月 命發良白馬 築加召馬頭

上謂摩帝 曰 “朕以寡德臨國無威 扶余加耶 去益猖獗如之 何則好乎”

摩帝曰 “臣之愚計 莫如通色 相親 以機制之” 上善之

 

7월 <발량發良>과 <백마白馬>에게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쌓도록 하였다.


143년 2월에 가야가 마두성(馬頭城)을 공격한 기록이 있고,

145년 9월에는 가소성(加召城)주(主) <장세長世>가 거타(居陀)를 구하려다

사망한 기사가 있으므로 가소성과 마두성 모두 가야를 대비하여

지금의 경남 양산에 축성한 성이다.


 

왕이 <마제摩帝>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의 부덕함에도 나라를 맡아 위엄이 없으니,

부여(扶余)와 가야의 창궐(猖獗)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마제>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계략으로는 색(色)을 통하여 서로 친하여,

이를 계기로 통제함이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파사왕 8년

7월 왕이 “내가 부덕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맡았다.

우리나라는 서쪽으로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에 접하였으나,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였으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달에 두 곳, 즉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백제왕기에는 이 해가 기루왕의 원년(137년)이라 하였다.


 

十二月 以白子爲馬頭城主 車門爲加召城主 加爵一級

稟主河馬生三子 而危篤 命以權妻美禮爲摩帝密妻 代行稟主事

 

12월 <백자白子>를 마두성주로, <거문車門>을 가소성주로 삼았다.

 

1계급의 작위를 더하였다.


품주 <하마河馬>가 세쌍둥이를 낳아 위독하게 되어,

권처 <미례美禮>를 <마제>의 밀처로 삼아 품주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파사왕 13년(AD.138)

 

十三年 正月 上與史后三母 受朝 南桃

稟主河馬卒 聖父痛哀之 葬以大母禮 以河馬母月門爲蛇陵門主 加大紫衣

摩帝請免 君己爲伊伐飡 召于那爲稟主 摩帝爲聖父私臣

五厚爲阿瑟羅君 年十六

 

정월 왕과 사후(史后)와 3모(三母)가 남도에서 조하를 받았다.


품주 <하마河馬>가 죽어 성부가 애통해 하였다.

 

대모(大母)의 예로 장사를 치루었다.

 

<하마>의 어머니 <월문月門>을 사릉문주(蛇陵門主)으로 삼고

대자의(大紫衣)를 더하였다.


<마제>가 사직하기를 청하여 <군기君己>를 이벌찬으로,

<소우나召于那>를 품주로 삼았다.

 

<마제>를 성부(聖父) 사신(私臣)으로 삼았다.


<오후五厚>를 아슬라군(阿瑟羅君)으로 삼았는데 나이 16세였다.


 

二月 聖父密妻沙乙那 生孿子 上親幸視兒 名男曰又日女曰又韓

賜米加布 聖父感泣拜恩

上曰 “沙乙那 亡兄寵女 我所以深愛也 今得聖父寵 生此佳兒 安得不喜乎”

 

2월 성부의 밀처 <사을나沙乙那>가 쌍둥이 자식을 낳았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아기를 살펴보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남자아이는 <우일又日>,

여자아이는 <우한又韓>이라고 이름 지었다.

 

신라사초와 상장돈장을 살펴보면 우일이 여자이고 우한이 남자이다. 

 

쌀을 내려주고 베를 더하였다.

 

성부가 감동하여 울면서 은혜에 엎드려 절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을나>는 죽은 형{日知}의 총녀(寵女)다.

 

내가 마음 깊이 사랑하는 바가 있었는데 지금 성부의 총애를 얻어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들을 얻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五月 辛公角干薨 于仙桃山 葬以太公禮 辛公失志以來 潛心祀事 不以世俗事關心

唯與童男童女 朝夕奉神 十年如一日

上嘉其節 累幸慰賜 自以罪居 不敢恣情所御 婢妾之子 一切不聞 骨官遺言 不許從殉

阿世聞其疾篤 請往訣 聖父乃偕臨 而流涕

辛公曰 “善與新人好 何苟苟流涕乎”

聖父大其言 許當分骨 而訣之

阿世謂聖父 曰 “汝妬辛夫 而不子我子 今己故汝 不子之 孰可爲父”

聖父許之 乃加阿世子皆 爵一級

 

5월 <신공辛公> 각간이 선도산(仙桃山)에서 죽어 태공(太公)의 예례로 장사지냈다.

 

<신공辛公>은 <알영>의 아들이다.

 

<신공辛公>은 뜻을 잃은 이래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사 일에 전념하며,

세속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동남동녀(童男童女)와 더불어,

아침과 저녁으로 신을 모시기를 10년을 하루처럼 수행하여 왔다.

 

왕이 그 절개를 아름답다하여 누차로 행차하여 위로하고 하사하였는데,

스스로 죄인으로 살았다.

 

왕이 감히 뜻하는 바대로 하지 못하였다.

 

비첩(婢妾) 아들들도 일절 듣지 못하고,

골관(骨官)에게 유언을 전하여 따라죽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세阿世>가 병으로 위중하다는 그 말을 듣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성부가 이에 함께 대면하며 눈물을 흘렸다.

 

<신공>이 말하기를

 

“새로운 남편과 사이가 좋음이 온당하도다.

어찌하여 구차하게 눈물을 흘리느냐.”고 하였다.

 

성부가 그 말이 훌륭하다 하여 분골함이 마땅하다 허락하고 사별하였다.


<아세阿世>가 성부에게 힘써 말하기를

 

“너는 신부(辛夫){신공}를 시새움하는 것이냐.

 

나의 자식들을 <신공>의 자식이라 하지 못하고,

지금 내가 너에게 있는 까닭으로 자식이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아버지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성부가 <아세>의 자식들이 <신공>의 자식으로 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아세>의 자식들 모두에게 일급의 작위를 더하였다.


 

九月 穀又大登 行大場 于一直

以大樹角干爲六部頭上 君門仙母爲仙母頭上 賜大紫衣

 

9월 또 풍년이 들었다. 일직(一直)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대수大樹>각간을 6부두상(六部頭上)으로,

<군문君門>선모를 선모두상(仙母頭上)으로 삼았다.

 

대자의(大紫衣)를 내렸다.


적공(무산) - 대수(70?-139)

 

<대수大樹>와 <군문君門>은 부부사이다.

 

 

 

 

 

 

파사왕 14년(AD.139)

 

十四年 正月 上與史后 受朝 高井

骨夂生 德公子共公 上爲之洗兒 賜米

以加良爲伊伐飡 道失爲稟主 君己爲京路軍事 以湣公爲理方大師 洛公爲大乘大師

洛公妻斗里爲旗母

 

정월 왕과 사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하를 받았다.


<골치骨夂>가 <덕공德公>의 아들 <공공共公>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고 쌀을 내려주었다.


<가량加良>을 이벌찬으로, <도실道失>을 품주로, <군기君己>를 경로군사로 삼았다.

<민공湣公>을 이방대사로, <낙공洛公>을 대승대사(大乘大師)로,

<낙공>의 처 <두리斗里>를 기모(旗母)로 삼았다.


 

四月 上與史后 宴聖父 于高井

以權妻道生爲聖父正妻 阿世爲太母 聖父感泣

上曰 “惟 父再造 朕命 可以共天下也”

推火太守克市卒 以市老代之

 

4월 왕과 사후가 고정(高井)에서 성부에게 연회를 열었다.

 

권처 <도생道生>{파사의 딸}을 성부의 정처로 삼고,

<아세阿世>를 태모(太母)로 삼았다.

 

성부가 감동하여 울었다.

 

왕이 말하기를

 

“생각해 보건데, 아버지(성부)를 다시 받들어 짐의 명령이 천하를 함께 함이 옳다.”

고 하였다.


추화(推火)태수 <극시克市>가 죽어, <시노市老>가 대신하였다.


 

六月 上幸骨夂 于夏宅 史后妬怒不食 命齊居上仙講道 于井中

以卞山神君爲殿中郞 昌永爲太子兵官

召文王景文請娶骨女 命嫁權妻巨好

 

6월 왕이 <골치骨夂>에게 행차하여 하택(夏宅)으로 갔다.

 

사후가 시새움으로 노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다.

 

<제거齊居> 상선(上仙)에게 정중(井中)에서 설교하도록 명하였다.


변산(卞山) 신군(神君)을 전중랑(殿中郞)으로,

<창영昌永>을 태자병관(太子兵官)으로 삼았다.


소문왕(召文王) <경문景文>이 골녀(骨女)에게 장가가기를 청하여,

권처 <거호巨好>를 시집가도록 명하였다.

 

<경문景文(100?-160, 재위 131-159)>은 소문국 제 6대 왕이다.


 

七月 上謂加良 曰 “汝以妙年 因骨登相 汝妻亦然 朕之赤子 治歟不治歟”

可良曰 “請使王子十人 于州郡 而察之”

上曰善 乃以玉君方侔毛知康造昔公壤君大車西公茂山月公等

率其文師私臣 巡行 南北廉察

公事不勤 田野荒廢 以報 甚者黜之 輕者貶之

 

7월 왕이 <가량加良>에게 말하기를

 

“너는 20살 안팎에 너의 핏줄로 인하여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너의 처 <도실道失> 역시 그러하다.

 

짐이 갓난아기(赤子)처럼 여겨 사랑하지만 다스림을 아느냐 모르느냐.”라고 하였다.

 

<가량加良>이 말하기를

 

“왕자(王子) 10명을 부리어 주군(州郡)을 살피기를 청하옵니다.”

 

왕이 옳다고 말하고,

 

이에 <옥군玉君>, <방모方侔>, <모지毛知>, <강조康造>, <석공昔公>,

<양군壤君>, <대거大車>, <서공西公>, <무산茂山>, <월공月公> 등

그 문사(文師)와 사신(私臣)을 거느리고 순행하게 하여,

남북을 청렴하게 순찰하도록 하였다.

 

공사(公事)에 열심히 일하지 않고 밭과 들이 황폐화 되어, 이를 보고하였다.

 

심한 자는 내쫓고, 가벼운 자는 강등하였다.


 

 

파사왕 11년 7월 10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않거나 농토를 많이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면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토록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以大惠爲天公妻 行吉 鮑祠 上與阿世 主其吉

行大嘉俳 于大井 行白龍祭

 

8월 <대혜大惠>를 <천공天公>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왕과 <아세阿世>가 그 혼사를 주재하였다.


대가배(大嘉俳)를 대정(大井)에서 열고, 백룡제(白龍祭)를 지냈다.



九月 草童雪童分戰 于雲橋 仙桃山童女亦多助之 上命湣公治之

以倉廩令勢漢爲大倉大師 加爵匝判

 

9월 초동(草童)과 설동(雪童)이 나뉘어 운교(雲橋)에서 싸움을 하였다.

 

선도산(仙山) 동녀(童女) 역시 싸움을 도운 이가 많았다.

 

왕이 <민공湣公>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창름령(倉廩令) <세한勢漢>을 대창대사(大倉大師)로 삼고

잡판(匝判)의 작위를 더하였다.


 

十月 上與史后 巡六部

大樹角干薨 以太公禮 葬于伊山 以奈老角干爲六部頭上 珍祇爲仙母頭上

 

10월 왕과 사후가 6부를 순행하였다.


<대수大樹> 각간이 죽어 태공의 예로 이산(伊山)에서 장례를 지냈다.

 

이 때문에 <내노奈老>각간을 6부두상으로, <진지珍祇>를 선모두상으로 삼았다.


 

十一月 分理方三部 左治骨仙 右治兵官 藩族平治隸民

 

11월 리방(理方)을 3부(三部)씩으로 나누어 왼쪽은 골선(骨仙)들이 다스리고,

오른쪽은 병관(兵官)들이 다스리게 하였다.

 

번족(藩族)들이 예민(隸民)들을 평화롭게 다스리게 하였다.

 

 

 

 

 

 

파사왕 15년(AD.140)

 

十五年 正月 上與史后 受朝 高井

仙桃山法奈老上骨 有疾 上親幸禱疾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加良爲聖父私臣 克公爲護城兵官

 

정월 왕과 사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하를 받았다.


선도산(仙桃山) 법(法) <내노奈老>{파사의 숙부} 상골(上骨)이 질병이 있어

왕이 친히 행차하여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다.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미례美禮>를 품주로,

<가량加良>을 성부(聖父) 사신으로, <극공克公>을 호성병관으로 삼았다.


 

三月 稟主美禮生 摩帝女愛禮 于高井 上爲之視兒賜米

先是 美禮爲聖父所寵 生子 摩帝不悅 自道生之後 美禮失寵 得生摩帝女 摩帝乃喜 曰

“今得吾女” 美禮曰 “汝欲希 我生爾子 不自植力乎 我非愛聖父 而薦身也 奈老物有力何” 摩帝曰 “此兒長 則可制老物也” 摩帝之背聖父 自此益著

 

3월 품주 <미례美禮>가 <마제>의 딸 <애례愛禮>를 고정(高井)에서 낳았다.

 

마제(미례) - 애례(140-199)

 

왕이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이에 앞서 <미례美禮>가 성부의 총애를 받은 바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마제摩帝>가 기뻐하지 않았다.

 

<도생道生>이 성부의 정처가 된 이후로 <미례美禮>가 <허루>의 총애를 잃었는데,

 

<마제摩帝>가 딸을 얻으니 <마摩帝제>가 이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제야 나의 딸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미례美禮>가 말하기를

 

“너는 내가 너의 자식을 낳기를 바라는구나.

 

스스로 아기를 심을 능력이 없지 않느냐.

 

나는 성부를 사랑하지 않지만 천거된 몸이다.

 

늙은이{허루}에게 힘이 있으니 어찌하란 말이냐?” 고 말하였다.

 

<마제>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자라면 곧 늙은이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제>가 성부를 배신함이 이때부터 드러나게 커져갔다.


 

六月 以君乙爲護城大師 支所禮爲京路軍事 君己爲聖父私臣 加良爲按軍使

白馬爲北路軍事 晉公爲西路軍事 月瓠爲五軍頭上 使屬聖父

以樊五爲馬政大師 季老爲軍粮大師 虹盧爲馬頭城主 白子爲祥文大師

加樹爲護城兵官 以支所禮妻加亥爲軍母 樊五妻曷名爲馬母 皆聖父女也

 

6월 <군을君乙>을 호성대사로, <지소례支所禮>를 경로군사로,

<군기君己>를 성부(聖父) 사신(私臣)으로, <가량加良>을 안군사로,

<백마白馬>를 북로군사로, <진공晉公>을 서로군사로,

<월호月瓠>를 오군두상으로 하여 성부에게 속하여 부리게 하였다.

 

<번오樊五>를 마정(馬政)대사로, <계노季老>를 군량(軍粮)대사로,

<홍노虹盧>를 마두성주로(馬頭城主), <백자白子>를 상문(祥文)대사로,

<가수加樹>를 호성(護城)병관으로, <지소례>의 처 <가해加亥>를 군모(軍母)로,

<번오>의 처 <갈명曷名>을 마모(馬母)로 삼았는데 모두 성부의 딸이다.


 

七月 權妻毛多生 上女毛利 上洗之

上幸稟主美禮 于摩帝宅 摩帝餉其軍臣 而榮之

 

7월 권처 <모다毛多>가 왕의 딸 <모리毛利>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왕이 품주 <미례美禮>에게 행차하여 <마제>댁으로 왔다.

 

<마제>가 자신의 장수들에게 군량을 보내며, 영예롭게 여겼다.


 

八月 道生生 聖父子多婁 上臨其洗 見聖父大臂肉脹脅力益壯 而佳之 曰

“不下於新軍頭可知 道生之福也”

 聖父曰 “臣一食盡兩彘肩 一房行五色 使戟百斤 跨馬若飛 何比新軍頭乎”

上壯其言 賜酒 醉歡 道生亦喜 抱兒而歌之

 

8월 <도생道生>이 성부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기는 것을 대면하고, 성부가 팔뚝 힘이 넘치고, 근육에 살이 찌고,

옆구리 힘이 점점 더해져 씩씩해짐을 보고,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신군부의 우두머리 장수보다 아래가 아님을 가히 알겠다. <도생>의 복이다.”

라고 말하였다.

 

성부가 말하기를

 

“신은 한번의 식사에 돼지의 양어깨를 먹으며, 한 침실에서 다섯 번을 행할 수 있고,

백 근의 창을 사용할 수 있고, 말을 나는 것처럼 뛰어넘을 수 있는데

어찌 신군부의 장수들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장하다고 여겨 술을 내리니 취하여 기뻐하였다.

 

<도생>이 역시 기뻐하며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렀다.

 

대로(구을) - 허루(80-155)

파사(사성) - 도생(122-174)

허루(도생) - 다루(140- )

 

이때 <허루> 61살, 파사왕의 딸 <도생> 19살이다.


 

九月 穀大登 行大場 于南郊

 

9월 풍년이 들었다.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召文獻 美女八人 宝馬三雙

摩帝享 上及史后聖父阿世道生

 

10월 소문(召文)이 미녀 8명과 보마 3쌍을 바쳤다.


<마제>가 왕과 사후, 성부, <아세>, <도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十一月 崔好爲一牟城主 离己爲所利城主 赤旨爲牛頭城主 皆以骨女妻之

 

11월 <최호崔好>를 일모성주(一牟城主), <이기离己>를 소리성주(所利城主)로,

<적지赤旨>를 우두성주(牛頭城主)로 삼았는데 모두 골녀(骨女)를 처로 삼았다.


 

 

 

 

 

파사왕 16년(AD.141)

 

十六年 正月 史后生 上女婁生 上爲之延朝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摩帝爲五軍都護使

 

정월 사후가 왕의 딸 <루생婁生>을 낳았다.

 

파사(사성) - 루생(141-190)

 

왕이 조하를 미루었다.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감생甘生>을 품주로, <마제摩帝>를 5군도호사로 삼았다.


 

二月 艾好生 聖父子艾老 賜米

 

2월 <애호艾好>가 성부의 아들 <애노艾老>를 낳아 쌀을 내렸다.


 

三月 上與史后 受新朝 于南桃

以車門爲護城大師 啓其爲京路軍事 加大爲軍母

以耆盧聶公爲理方大師 支所禮爲別軍使 君乙爲加召城主 長世爲大城大師

仙老屈公薨 以角干禮葬之 屈公者心公之子也 性淸閑 好神仙

壽至七十六 及其仙化 身體如玉 人多奇之

 

3월 왕과 사후가 남도(南桃)에서 신년의 조회를 받았다.


<거문車門>을 호성대사로, <계기啓其>를 경로군사로, <가대加大>를 군모로,

<기노耆盧>와 <섭공聶公>을 이방대사로, <지소례支禮>를 별군사로,

<군을君乙>을 가소성주로, <장세長世>를 대성대사로 삼았다.

 

선노(仙老) <굴공屈公(66-141)>이 죽어 각간례로 장사를 지냈다.

 

<굴공>이라는 사람은 <심공心公>의 아들인데,

성품이 청명하고 여유로우며 신선을 좋아하였다.

 

수(壽) 76세에 이르러 선화(仙花)됨에 이르니

신체가 마치 옥(玉)과 같아서 기이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파사왕 17년(AD.142)

 

十七年 正月 以允良爲伊伐飡 果老爲稟主 啓其爲水路軍事 加大爲水母 吉門爲京路軍事

 

정월 <윤량允良>을 이벌찬으로, <과노果老>를 품주로,

<계기啓其>를 수로군사로, <가대加大>를 수모(水母)로,

<길문吉門>을 경로군사로 삼았다.


二月 上與史后 宴宗老閼智神君及阿婁大母

聞古所夫里有二百歲老翁 親幸問年 賜之年穀及肉 骨夂生 上女骨花 命德公洗之

 

2월 왕과 사후과 종노(宗老) <알지(閼智(94-155>神君과 <아루阿婁>大母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

 

고소부리(古所夫里)에 200세의 노옹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이 친히 행차하여 나이를 묻고 나이만큼 곡식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파사왕 14년 정월 윤량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고소부리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직접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당유고 미추이사금기에는 <아루阿婁>를 <세한>의 어머니라 하고,

내물이사금기에서는 <아호阿好>를 <세한>의 어머니라 한다.

 

<아루阿婁>는 <알영>의 딸이고, <아호阿好>는 <남해>의 딸인 <아효阿孝>의 딸이다.

 

일광(알영) - 아루(57?- )

차웅(아효) - 아호(80?- )

호공(아호) - 알지(94-155) 세한, 성한 

 

<세한>이 <성한星漢>이고 <알지(閼智(94-155>神君이다.

<세한>은 <아호阿好>의 아들로 내물이사금 기록이 맞는 것이다.


       

<골치骨夂>가 왕의 딸 <골화骨花>를 낳았다.

 

왕이 <덕공德公>에게 아기를 씻기도록 명하였다.

 

<골치骨夂>는 <파사>의 며느리이다.


 

七月 稟主果老復通 前夫君己 事發 允良請免 上不許

允良請改稟主 聖父怒勸上 以君己爲伊伐飡 復妻果老 流允良于卞山

 

7월 품주 <과노果老>가 전 남편 <군기君己>와 다시 통하였다.

 

일이 드러나자 <윤량允良>이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량>이 품주를 바꾸어 주기를 청하자

성부가 노하여 왕에게 사직을 받아주기를 권하였다.

 

이 때문에 <군기>를 이벌찬으로, <과노>를 다시 처로 하였다.

 

<윤량>을 변산(卞山)으로 귀양을 보냈다.


 

十月 京都大震 家頹山壞 人言允良之寃 上乃請于聖父 召允良歸京

 

10월 경도(京都)에 대지진이 있어 집이 넘어지고 산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윤량允良>이 원통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에 성부에게 청하여 <윤량>을 불러 경도(京都)로 돌아오게 하였다.

 

 

 

 

 

 

파사왕 18년(AD.143)

 

十八年 正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君己爲聖父私臣 車門爲京路軍事 妻以果老

勢漢爲護城大師 古乙爲大倉大師

 

정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군기君己>를 성부사신으로,

<거문車門>을 경로군사로, <과노果老>를  <거문>의 처로,

<세한勢漢>을 호성대사로, <고을古乙>을 대창대사로 삼았다.


 

二月 加耶反賊圍馬頭城 以吉元爲征虜將軍 率京騎一千 與南路 來攻大破之

上嘉吉元功 拔爲南路軍事 妻以沙乙那

初吉元臨發 聖父使 沙乙那洗足 而送之 曰 “汝若得勝而歸 當以此女賞之”

至是 沙乙那 請歸吉元 聖父曰 “㫰所言者 戱言也 吾安可一日無汝乎”

沙乙那曰 “聖人無戱言 況國家大事乎”

聖父笑 曰 “吾已老矣 汝之欲就少者 無怪矣”

聖父乃與庚元 主其吉 于鮑祠

長世爲加召城主 君乙爲井頭

以發良爲別軍事 大公爲神官阿飡 妻以史后女那生 行吉 鮑祠

昔公爲大城大師

 

2월 가야(加耶) 반적(反賊)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였다.

 

<길원吉元>을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아 경기(京騎) 1천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남로군사가 오자 함께 공격하여 크게 쳐부쉈다.

 

왕이 <길원>의 빼어난 공을 기뻐하며 남로군사로 뽑고,

<사을나沙乙那>를 시집보냈다.

 

처음 <길원>이 출발함에 임하여,

성부가 <사을나>에게 <길원>의 발을 씻기도록 하였다.

 

<길원>을 보내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승리를 얻고 돌아온다면, 마땅히 이 여자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에 <사을나>가 <길원>에게 시집가기를 청하자,

 

성부가 말하기를

 

“햇볕이 있는 곳에서 한 약속은 우스갯소리다.

 내가 어찌 네가 없이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사을나>가 말하기를

 

“성인은 거짓약속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국가의 대사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성부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었으니,

네가 젊은 사람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

 

성부가 이에 경원(庚元){<길원>의 母}과 포사(鮑祠)에서 결혼을 주재하였다.


 

 

파사왕 15년

2월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 길원을 보냈다.

길원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8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장세長世>를 가소성주로, <군을君乙>을 정두(井頭)로 삼았다.


<발량發良>을 별군사(別軍事)로, <대공大公>을 신관아찬(神官阿飡)으로,

사후의 딸 <나생那生>을 <대공>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석공昔公>을 대성대사(大城大師)로 삼았다.


 

六月 漢烏入朝 請免 上不許

 

6월 <한오漢烏>{수주태수}가 입조하여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八月 大閱 于閼川

德公宅新成 上親幸 賜骨夂紫衣宝佣 以五色車載骨花 上親曳之 骨夂後扶之

出視諸女 曰 “汝等幼時 皆如此愛”

諸女乃輿上 稱壽 曰

“父今貴爲天子 力能絶倫 性不喜色 吾等無以舞報 願以剪髮爲 報以獻骨夂”

上許之 命宅師令 新諸女宅

穀公私行召文 命送扶持

 

8월 알천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덕공德公>의 집을 새로 지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골치骨夂>에게 자의(紫衣)와 보용(宝佣)을 내리고,

오색의 수레에 <골화骨花>{파사와 골치의 소생}를 실었다.

 

왕이 친히 이끌고, <골치>가 뒤에서 떠받쳤다.

 

나오는 것을 딸들에서 보이며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렸을 때 모두 이처럼 사랑하였다.”고 하였다.

 

딸들이 이에 수레에 오르며 장수를 기리며 말하기를

 

“부왕의 존귀함은 천자로 삼을 만하고, 능력이 절륜(絶倫)하나,

성품이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우리들이 춤으로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보답하기를 소망하니,

<골치>에게 머리카락을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택사령(宅師令)에게 명하여 딸들의 집을 새로 지어주도록 명하였다.


<곡공穀公>{<허루>와 <한나>의 아들}이 사사로이 소문(召文)으로 가니

 

고생이나 어려움을 견디어 내라며 보내게 하였다.


 

 

 

 

 

파사왕 19년(AD.144)

 

十九年 正月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吉門爲都護使 支所禮爲南路軍事

樊五爲京路軍事 加亥曷名爲軍母 吉元爲馬政大師 沙乙那爲馬母 車門允良爲別軍使

上幸美禮 于政堂 上自昨冬 累幸摩帝宅 寵愛美禮 復其稟主 至是命入常侍

賜權妻毛多 于摩帝 以爲密妻

 

정월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미례美禮>를 품주로,

<길문吉門>을 도호사(都護使)로, <지소례支禮>를 남로군사로,

<번오樊五>를 경로군사로, <가해加亥>와 <갈명曷名>을 군모로,

<길원吉元>을 마정(馬政)대사로, <사을나沙乙那>를 마모(馬母)로,

<거문車門>과 <윤량允良>을 별군사로 삼았다.


왕이 정당(政堂)에서 <미례>에게 행차하였다.

 

왕이 작년 겨울부터 <마제>의 집으로 누차 행차하였다.

 

<미례>를 총애하는 바가 있어 품주의 직위를 번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들어와 왕을 항상 모시도록 명하였다.

 

권처(權妻) <모다毛多>를 <마제>에게 주어 밀처(密妻)로 삼게 하였다.


 

五月 以君乙爲水路軍事 以權妻多利妻之 多利爲君乙之侄 情皃相似

潛通于井 而有娠 上許 與之吉

上召伊利生 主之 是日以允良爲井頭 啓其爲別軍使

 

5월 <군을君乙>을 수로군사로, 권처 <다리多利>를 처로 하였다.

 

<다리>는 <군을>의 조카인데, 형편과 모습이 서로 닮았다.

 

정(井)에서 잠통(潛通)하여 임신이 되었다.

 

왕이 결혼을 승낙하였다.

 

왕이 <이리생伊利生>을 불러 결혼을 주재하도록 하였다.

 

이날 <윤량允良>을 정두(井頭)로, <계기啓其>를 별군사(別軍使)로 삼았다.

 

<군을>은 <대수>의 아들이고 <이리생>은 <대수>의 딸이다.

<이리생>의 딸 <다리>가 외숙부 <군을>의 처가 된것이다.



七月 居陀君斯牟遣使 稱臣曰

“臣父節公臨崩 命臣 朝我祖國 今遣河波等上貢 請以骨女妻 臣以爲南藩”

上嘉其節 命以半阿妻之 賜爵阿飡 賜其母胡母大紫衣

 

7월 거타군(居陀君) <사모斯牟>가 사신을 보내 칭신(稱臣)하며 말하기를

 

“신의 부친 <절공節公>이 죽음에 임하여

신에게 우리 조상의 나라{신라}를 알현하도록 명하여,

지금 <하파河波> 등을 보내어 공물을 올리니,

골녀(骨女)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옵고,

신을 남번(南藩)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절개를 아름답다 여기고, <반아半阿>를 시집보내도록 명하고,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그 어머니 <호모胡母>에게 대자의(大紫衣)를 내렸다.


이 기사는 145년 9월 가야와의 전쟁 원인이 되고,

487년 10월에는 거타(居陀)와 아라(阿羅)가야의 국경분쟁 기사가 있다.


 

九月 以順貞角干爲六部頭上 彡善仙母頭上

 

9월 <순정順貞>각간을 6부두상으로, <삼선彡善>을 선모두상으로 하였다.


 

 

 

 

 

파사왕 20년(AD.145)

 

二十年 正月 發良爲伊伐飡 干時爲稟主

 

정월 <발량發良>을 이벌찬으로, <간시干時>를 품주로 삼았다.


 

七月 大風三日 大井南神樹 自倒 命巫祓之

 

7월 큰바람이 3일 동안 불었다.

 

대정(大井)의 남쪽 신령스러운 나무가 스스로 넘어져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도록 명하였다.


九月 加耶女與半阿 爭位 加耶襲居陀

長世聞 急救之戰沒

上怒 命吉門率京騎一千 引南水勇士五千 三路掩殺 大獲勝利

 

9월 가야녀와 <반아半阿>가 자리를 다투었다.

 

가야가 거타(居陀)를 습격하였다.

 

장세(長世){가소성주}가 소식을 듣고 급히 구하러 갔으나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

 

왕이 노하여 <길문>에게 경기(京騎) 1천을 거느리고 가게 하여

<길문>이 남로, 수로의 병사 5천을 끌어들여

3로(경로, 남로, 수로)의 병사가 별안간 엄습하여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아 승리하였다.


 

 

파사왕 17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十月 上與美禮 入冬宅 愛有公稟主

干時妬之 曰 “妾以承寵稟主 反屈於前稟乎”

上曰 “汝亦生子 如此 則當如此”

干時曰 “人言 夫今不好色 我謂大好色”

上怒 復以美禮爲稟主 摩帝伊伐飡 流發良干時 于推火

 

10월 왕과 <미례美禮>가 동택(冬宅)으로 들어왔다.

 

사랑함이 있어 공적으로 품주의 예로 대하였다.

 

<간시干時>가 시새움하며 말하기를

 

“첩이 총애를 계승하여 품주가 되었는데,

반대로 전(前) 품주에게 굽힐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도 또한 이와 같이 아들을 낳으면, 지금 당장 이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시>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금(夫今)은 색을 좋아하지 않으나,

나에겐 크게 호색(好色)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다시 <미례>를 품주로, <마제>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발량發良>과 <간시>는 추화(推火)로 유배를 보냈다.


 

 

 

 

 

파사왕 21년(AD.146)

 

二十一年 正月 吉門將伐加耶 其世主正見 遣其次子朱日 謝罪

願世世爲藩 上命朱日留都 召吉門歸

美禮生 上子馬公 上洗之

 

정월 <길문>이 장차 가야를 치려하자,

가야의 세주(世主) <정견正見>이 둘째아들 주일(朱日)을 보내어 사죄하고,

세세대로 번국이 되기를 원하였다.

 

왕이 <주일朱日>에게 경도에 머물도록 명하고, <길문>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파사왕 18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正見>모주(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

 

<정견正見>이 대가야국을 세운 것은 AD 120년이고,

<정견正見>의 아들 <청예靑裔>가 금관가야국을 세운 것은 156년이다.  


<미례美禮>가 왕의 아들 <마공馬公>을 낳아 왕이 그 아기를 씻겨주었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召發良干時歸京

先是 吉門出 在推火 復通干時 歸 告于上 曰

“干時流涕言 過大悔前非” 云 故放之也

 

3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감생甘生>을 품주로 하였다.

 

<발량發良>과 <간시干時>를 불러 귀경토록 하였다.

 

앞서 <길문>이 나가서 추화(推火)에 있을 때 다시 <간시>와 통하고 돌아왔는데,

 

왕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간시>가 눈물을 흘리며 돌이켜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후회한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유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五月 以吉元爲京路軍事 沙乙那爲軍母 樊五爲馬政大師 曷名爲馬母

 

5월 <길원吉元>을 경로군사로, <사을나沙乙那>를 군모로,

<번오樊五>를 마정대사로, <갈명曷名>을 마모로 삼았다.


 

 

 

 

 

파사왕 22년(AD.147)

 

二十二年 三月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樊五爲京軍事 吉元爲南軍事

支所禮軍(爲)西軍事 晉公爲骨門伊飡 吉門爲中外大軍事

 

3월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미례美禮>를 품주로,

<번오樊五>를 경군사로, <길원吉元>을 남군사로, <지소례支禮>를 서군사로,

<진공晉公>을 골문이찬으로, <길문吉門>을 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五月 摩帝吉門奏 曰 “太聖上天已久 許婁爾生爲妻 尙尊聖父僣矣

臣等皆 以陛下赤子 安敢以陛下爲子乎”

上不許 齊居勢漢等亦 贊其奏

許婁見機請罪 上乃以聖父爲太公

以齊居勢漢左右上輔 摩帝吉門爲左右大相

先時吉元妻沙乙那 若許婁召幸 求出南路

許婁乃奪沙乙那 而不許同赴

吉門亦與沙乙那 相通有娠 吉門請 使同赴

則許婁怒 曰 “爾父子 以吾之恩得貴 而奪我寵姬 聚麀交娠 可以流汝”

吉門乃與摩帝結託 曰 “今天下之權 有在我等二人 互相依託 何事不成”

摩帝素有異志 故許之 許婁乃解軍 神之權

時大旱月餘 祈而無雨 聖父去號 天大雨 人皆曰大刀雨

 

5월 <마제>와 <길문>이 아뢰어 말하기를

 

“태성(太聖){아리阿利}이 하늘로 올라감이 이미 오래입니다.

 

<허루>는 <도생道生>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오히려 성부(聖父)로써 숭상됨에 참람함이 있습니다.

 

신들은 모두 폐하의 적자(赤子)인대,

어찌 감히 폐하를 자식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제거齊居>와 <세한勢漢> 등 역시 그 상소를 도왔다.

 

<허루>가 기회를 엿보다 죄를 빌었다.

 

왕이 이에 성부를 태공(太公)으로 삼았다.

 

<제거>와 <세한>을 좌우상보(左右上輔)로,

<마제>와 <길문>을 좌우대상(左右大相)으로 삼았다.

 

앞서 <길원吉元>의 처 <사을나沙乙那>가 <허루>가 불러 행차함을 약속하여,

<사을나>가 남로를 나옴을 구하였다.

 

<허루>가 이에 <사을나>를 빼앗아,

<길문>이 <사을나>와 함께 관직에 나아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길문> 또한 <사을나>와 상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길문>이 <사을라>로 하여금 함께 나아가기를 청하였다.

 

성부가 곧 화내며 말하기를

 

“너희 부자는 나의 은혜를 입어 귀하게 되었으나

나의 총애를 받는 계집과 암사슴(麀)을 모아 사귀어 임신을 시켰다.

너는 유배를 가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길문>이 이에 <마제>와 결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권력은 우리 두 사람에게 있으니,

서로 의탁하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제>가 본디 다른 뜻이 있었던 까닭으로 승낙하였다.

 

<허루>는 이에 군사적 충돌을 풀고,

신의 권능으로 당시 한 달여 동안 크게 가물어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지 않았다.

 

성부가 떠나기를 부르짖자, 하늘에서 큰비가 왔다.

 

사람들이 모두 대도우(大刀雨)라 하였다.

 

파사왕 15년(140년) 3월 기사에 <마제>의 처 <미례美禮>가 <허루>의 딸을 낳으니

<허루>와 <마제>의 사이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파사왕 23년(AD.148)

 

二十三年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沙乙那爲稟主

以摩帝女茶耶 妻吉元 以甘生干時爲吉門密妻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3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사을나沙乙那>를 품주로,

<마제>의 딸 <다야茶耶>를 <길원吉元>에게 시집보내고,

<감생甘生>과 <간시干時>를 <길문>의 밀처로 삼았다.

 

<마제摩帝>를 중외대군사로, <미례美禮>를 대군모로 삼았다.


 

七月 以吉元爲京軍事 樊五爲南軍事 沙乙那思吉元 欲歸南軍 故召之地

 

7월 <길원吉元>을 경군사로, <번오樊五>를 남군사로 삼았다.

 

<사을나沙乙那>가 <길원>을 사모하여, 남군(南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경로로 불렀다.


 

 

 

 

 

파사왕 24년(AD.149)

 

二十四年 三月 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吉門爲中外大軍事 沙乙那爲大軍母

 

3월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미례美禮>를 품주로,

<길문吉門>을 중외대군사로, <사을나沙乙那>를 대군모로 삼았다.


 

五月 月瓠卒 以角干禮葬之 瓠性精敏勤厚 不爭功名

只帶頭上虛位 而不介于意 惟以國家爲念開 導少壯 人皆惜其卒

以五軍頭上爲左右頭上

以白馬爲左 車門爲右 以允良爲北軍事 妻吉門女成門 發良爲水酒太守 漢烏爲別軍事

 

5월 <월호月瓠>가 죽어 각간례로 장사 지냈다.

 

호공(월씨) - 월호(90?-149)

 

<월호>는 성품은 정민(精敏)하고 근후(勤厚)하여, 공명(功名)을 다투지 않았다.

 

다만 두상(頭上)이라는 형식적인 직위를 두르고 있어,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를 위한 생각만은 열어두어, 젊은 장수들을 이끌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아까워하였다.


이로써 5군두상(五軍頭上)을 좌우두상(左右頭上)으로 하였다.

 

<백마白馬>를 좌두상으로, <거문車門>을 우두상으로,

<윤량允良>을 북군사로 하여 <길문>의 딸 <성문成門>을 시집보내고,

<발량發良>을 수주태수로, <한오漢烏>를 별군사로 삼았다.


 

七月 大雹 殺鳥群 于推火 命還朱日 于加耶 其妻靑氏正子 同歸

 

7월 추화(推火)에서 우박이 내려 새떼가 죽었다.

 

주일(朱日)을 가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처 <청씨靑氏>와 아들이 함께 돌아갔다.


 

十月 大震 破屋傷命 上躬訪宗老太公 責己

 

10월 대지진이 발생하여,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왕이 몸소 종노(宗老){김알지}와 태공(太公){허루}을 방문하고, 자신을 책망하였다.


 

 

파사왕 21년

7월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죽었다.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25년(AD.150)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 遣其三子靑裔 入朝

 

정월 가야세주(加耶世主){정견}가 그 셋째아들 <청예靑裔>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茶耶爲稟主

沙乙那愛吉元 而不肯爲稟主

上許其志 遂以茶耶代之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3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다야茶耶>를 품주로 삼았다.

 

<사을나沙乙那>가 <길원吉元>을 사모하여 품주로 삼은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왕이 그 뜻을 허락하고, <다야>로 대신하게 하였다.

 

<마제摩帝>를 중외대군사로, <미례美禮>를 대군모로 삼았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

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12월 음즙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이 그 땅의 노인들로 하여금 (경계를) 변별하도록 하였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가야왕자 청예(靑裔)가 지혜가 많으니 그의 의견으로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파사왕 23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지부만이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지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10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한문汗門>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한아汗兒>의 아들이다.



 

 

 

 

파사왕 26년(AD.151)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氓以其神智聚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厚饗 漢祇主保齊 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耽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

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 皆以其地納之

 

2월 <청예靑裔>가 6부를 순찰하며 유람하였다.

 

부맹들이 그의 신지(神智)를 살펴보러 모여들었다.

 

부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이간(伊干)으로 후하게 잔치를 열어 맞이하였는데,

한지(漢祇)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만이

홀로 가노(家奴)로 접대하여 심히 박하게 대하였다.

 

<청예>의 신하인 <탐하리耽下里>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노비를 살해하였다.

 

<탐하리>가 음즙벌주(音汁伐主)에게 도망하여 의지하였는데,

왕명으로 <탐하리>를 찾았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

 

<길원>에게 명하여 음즙벌을 벌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이때 청예(靑裔) 10살이다.


실직군(悉直君) <봉치奉治>와 압독군(押督君) <왕을王乙>이 모두 그 땅을 바쳤다.


 

三月 摩帝爲伊伐飡 吉門爲中外大軍事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加樹爲馬頭城主

 

9월 풍년이 들었다.


<가수加樹>를 마두성주로 삼았다.


 

十月 桃李皆華 誦歌連野

 

10월 복숭아와 오얏(자두)꽃이 호화로웠다.

 

들판에서 노래를 읊는 소리가 이어졌다.


 

 

 

 

 

파사왕 27년(AD.152)

 

二十七年 正月 大軍事吉門爲賊所弑 上痛哀之 葬以角干禮

以摩帝爲中外大軍事 吉元爲伊伐飡 沙乙那爲稟主 茶耶爲祖主

君乙爲京軍事 啓其爲水路軍事 虹盧爲南軍事

 

정월 대군사 <길문吉門>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길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각간(角干)의 예로 장사지냈다.

 

이 때문에 <마제摩帝>를 중외대군사로, <길원吉元>을 이벌찬으로,

<사을나沙乙那>를 품주로, <다야茶耶>를 조주(祖主)로,

<군을君乙>을 경군사로, <계기啓其>를 수로군사로, <홍노虹盧>를 남군사로 삼았다.


 

三月 以支所禮爲伊伐飡 吉元爲西軍事 沙乙那爲摩帝密妻 茶耶爲西軍母

 

3월 <지소례支所禮>를 이벌찬으로, <길원吉元>을 서군사로,

<사을나沙乙那>를 <마제摩帝>의 밀처로, <다야茶耶>를 서군모로 삼았다.


 

四月 以摩帝女愛禮爲祇摩太子妃 上與美禮主吉 于神井 太子兵官玉權爲韓飡

 

4월 <마제>의 딸 <애례愛禮>를 <지마祇摩>태자비(太子妃)로 삼았다.

 

왕과 <미례美禮>가 신정(神井)에서 그 혼사를 주재하였다.

 

태자병관 <옥권玉權>을 한찬(韓飡)으로 삼았다.


 

十月 以吉元爲左頭上 樊五爲右頭上 白馬爲西軍事 車門爲別軍事

 

10월 <길원吉元>을 좌두상으로, <번오樊五>를 우두상으로,

<백마白馬>를 서군사로, <거문車門>을 별군사로 삼았다.


 

 

 

 

 

파사왕 28년(AD.153)

 

二十八年 正月 星隕如雨 不至于地 史后有疾 上減膳自責

吉元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左頭上 太子太師昌永加爵匝判

 

정월 별들이 비처럼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사후가 병이 들어 왕이 반찬을 줄이며 자책하였다.


<길원吉元>을 이벌찬으로, <다야茶耶>를 품주로, <지소례支所禮>를 좌두상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 <창영昌永>에게 잡판의 직위를 더하였다.


 

三月 崔好請娶扶余芍平女 許之

 

3월 <최호崔好>{일모성주}가 부여 <작평芍平>의 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七月 奉治卒 其臣牟斗等作亂 支所禮討平之 徙其衆 于南鄙各地

 

7월 <봉치奉治>{悉直太守}가 죽어 그의 신하 <모두牟斗>등이 난을 일으켜

<지소례支所禮>가 쳐서 평정하였다.

 

남은 그 무리들을 남쪽 시골 각지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


 

파사왕 25년

정월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十月 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右頭上

10월 <번오樊五>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길원吉元>을 우두상으로 삼았다.


 

 

 

 

 

파사왕 29년(AD.154)

 

二十九年 正月 扶余獻其骨女二人 請和 許之

 

정월 부여(扶余)가 골녀(骨女) 2명을 바치며 화해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二月 雪深三尺 兩山不通 加童三十人

 

2월 눈이 3자 깊이로 내려, 양산(兩山)이 불통되었다. 어린아이 30명을 더하였다.


 

파사왕 26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월 서울에 석 자 깊이의 눈이 내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六月 支所禮伊伐飡 加亥稟主 樊五左頭上

 

6월 <지소례>를 이벌찬으로, <가해加亥>를 품주로, <번오>를 좌두상으로 삼았다.

 

勾利與遼 大戰 取其地爲郡


구리(勾利)와 요(遼)가 크게 싸웠다. 그 땅을 취하여 군(郡)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고구려사초에도 없는 알 수 없는 기사다.

 

차대제 8년(153년) 좌보 <어질>이 <고복장>을 참소하여 <고복장>을 주살하니

고복장의 가노가 <어질>을 베려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

 

 

 

 

 

 

파사왕 30년(AD.155)

 

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 命爲稟主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정월 품주 <가해加亥>가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

 

왕이 사랑하는 딸 <모리毛利>를 품주로 삼기를 명하였다.


<지소례支所禮>와 <모리毛利>는 <지진내례(155?-212)>의 부모이다.


왕과 사후가 압독(押督)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三月 上還都 以吉元爲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右頭上

3월 왕이 환도하였다.

 

<길원吉元>을 이벌찬, <다야茶耶>를 품주, <지소례支禮>를 우두상으로 하였다.


 

七月 大蝗 王遍祭 神山大川而禳之 曰

“朕德衰歟 臣下奸歟 昨夏大水 十道民饑 今此大蝗 奈蒼生 何果蝗減 而有年”

時閼智神君薨 上臨之則 曰

“臣以宗老 無有上報 昇天 則可以除蝗”

果以薨日之夜 臭雨大降 虫自除 而穀大醒 故人曰 閼智穀 立其廟 于南郊

 

7월 메뚜기 떼가 창궐 하였다.

 

왕이 두루 신산(神山)과 대천(大川)에서 제사를 지내어,

 

푸닥거리를 하며 말하기를

 

“짐의 덕이 쇠하였는지, 신하 중에 간사한자가 있는지,

작년 여름에는 큰물이 져서 10도의 백성들이 굶주리더니,

지금은 이처럼 메뚜기 떼가 창궐할 수가 있는가.

어떠한 결과로 메뚜기 떼가 감소한 해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때 <알지閼智>신군(神君)이 죽었다.

 

왕이 <알지>신군의 임종에 대면하자,

 

<알지>가 말하기를

 

“신(臣)은 종노(宗老)로써 하늘에 나아감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오르면 곧 메뚜기를 소멸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결과로 <알지>신군이 죽은 밤에 몹시 큰 비가 내렸다.

 

메뚜기들이 스스로 없어지고 곡식들이 깨어났다.

 

그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지곡(閼智穀)이라 하였다.

 

<알지>신군의 사당을 남교(南郊)에 세웠다.


 

파사왕 29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파사왕 30년

7월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

메뚜기 떼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比只與多伐草八 作亂 命虹盧加樹 討平之

比只太子宝日 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 主和 其弟靑裔 奔于金官

 

8월 비지(比只)가 다벌(多伐), 초팔(草八)과 함께 난을 일으켜

<홍노虹盧>{남로군사}와 <가수加樹>{마두성주}에게 명하여 평정하였다.

 

비지의 태자 <보일宝日>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둘째 <주일朱日>은 소문(召文)으로부터 돌아가 화친을 주장하고,

동생 <청예靑裔>는 금관(金官)으로 도망쳤다.



十二月 太公許婁薨 上與史后痛哀之 以尼今禮葬之 追尊爲葛文王

其妃道生 欲赴殉地 摩帝扶之 曰

“何不爲新太公生子”

上知摩帝意 乃以摩帝爲太公

吉道生 于神井 爲妃 是日 以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左頭上

 

12월 태공 <허루>가 죽어, 왕과 사후가 애통해 하였다.

 

니금례(今禮)로 장사지내고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였다.

 

<허루>의 비(妃) <도생道生>이 따라 죽는 장소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마제>가 말리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태공(新太公)의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마제>의 뜻을 알아듣고 이에 <마제>를 태공으로 삼았다.

 

<도생>이 결혼식을 신정(神井)에서 행하고 <마제>의 비로 하였다.

 

이날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길원>을 좌두상으로 삼았다.


 

 

 

 

 

파사왕 31년(AD.156)

 

三十一年 正月 上與史后 祭火神 于井中

以摩帝次子莫兮爲京軍事 君乙爲北軍事 以支所禮女加車爲莫兮妻 行京軍母

以玉君之子玉權爲護城大師 尹公之子逸聖爲太子兵官 使屬祇摩

日知之子馬日爲殿中郞 昌永爲大井大師神籬將軍 母三軍 乃京路護城太子之軍也

狗壤主河己卒 子屯己立

 

정월 왕과 사후가 정중(井中)에서 화신(火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제摩帝>의 둘째아들 <막혜莫兮>를 경군사로, <군을君乙>을 북군사로,

<지소례支禮>의 딸 <가거加車>를 <막혜>의 처로 하여

경군모(京軍母)직을 행하게 하였다.

 

<옥군玉君>의 아들 <옥권玉權>을 호성대사로,

<윤공尹公>의 아들 <일성逸聖>을 태자병관으로 하여

<지마祇摩>에게 속하여 부리게 하였다.

 

이때 <일성> 22세이다.

 

<일지日知>의 아들 <마일馬日>을 전중랑으로,

<창영昌永>을 대정대사(大井大師) 신리장군(神籬將軍)으로 삼아

삼군(三軍)을 살펴보게 하였다.

 

삼군은 곧 경로(京路), 호성(護城), 태자의 군대를 말한다.


 

구양(狗壤)의 주(主) <하기河己>가 죽어, 아들 <둔기屯己>가 섰다.


 

二月 上命祇摩太子與妃愛禮 聽政 摩帝率百僚 朝于大井

 

2월 왕이 <지마祇摩>태자와 태자비 <애례愛禮>에게 나랏일을 듣도록 명하였다.

 

<마제摩帝>가 백료(百僚)를 거느리고,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하였다.

 

이때 태자 <지마> 26세, 태자비 <애례> 17세이다.


 

三月 祇摩太子 宴摩帝美禮 于大井

太子謂美禮 曰 “爾女已娠我子 可以繼天 但我無威難 制天下何”

美禮大喜 曰 “汝乃吾女之愛夫 與吾一體也 可以大符委之也”

摩帝亦醉 而許之

太子 以吉公爲伊伐飡 馬知那爲京軍事 馬知那妻兪生爲京軍母

乃太子之胞妹也 吉公妻暖生爲稟主 莫兮爲太公私臣

 

3월 <지마祇摩>태자가 대정(大井)에서

<마제摩帝>와 <미례美禮>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자가 <미례>에게 일러 말하기를

 

“당신의 딸은 이미 나의 자식을 임신하였으니, 가히 하늘을 계승할 수 있다.

다만 나에게 위엄이 없는 어려움이 있으니,

천하를 무엇으로 제어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례>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 딸이 사랑하는 남편이다. 너와 우리는 한 몸이다.

대부(大符)를 맡길 만 하다.”라고 하였다.

 

<마제> 역시 취하여, 허락하였다.


태자가 <길공吉公>을 이벌찬으로, <마지나馬知那>를 경군사로,

마지나의 처 <유생兪生>을 경군모로 삼았다.

 

<유생兪生>은 태자의 같은 어머니 동생이다.

 

길공의 처 <난생暖生>을 품주로, <막혜莫兮>를 태공사신으로 삼았다.


 

七月 上與史后 遊卞山 親祀雙神

 

7월 왕과 사후가 변산(卞山)으로 놀러가서,

친히 쌍신(雙神){일지와 한나}에게 제사지냈다.


 

十月 愛禮妃君 生子班君 太子洗之 上聞之 自卞山歸 見 賜妃玉寶金紫大衣

 

10월 <애례愛禮>비군(妃君)이 아들 <반군班君>을 낳아 태자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변산에서 돌아와 아기를 살펴보았다.

 

<애례>비(妃)에게 옥보(玉寶)와 금자대의(金紫大衣)를 내려주었다.


 

 

 

 

 

파사왕 32년(AD.157)

 

三十二年 正月 上與史后祇摩愛禮班君 受朝 于大井 讌嚮兩門 是日 上幸愛禮妃君

정월 왕과 사후, <지마祇摩(131-191)>, <애례愛禮(140-199)>

<반군班君(156-181>이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양문(兩門)의 잔치가 있었다.

 

이날 왕이 <애례愛禮>비군(妃君)에게 행차하였다.


 

三月 復以支所禮爲伊伐飡 毛利稟主 吉公爲骨門角干 樊五爲右頭上

 

3월 다시 <지소례支禮>를 이벌찬으로, <모리毛利>를 품주로,

<길공吉公>을 골문각간으로, <번오樊五>를 우두상으로 삼았다.


 

四月 暖生(生) 太子女暖花 太子洗之

大井城門自毁 上謁廟 問過

 

4월 <난생暖生>{일성의 누이}이 태자의 딸 <난화暖花>를 낳았다.

 

태자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대정(大井)의 성문이 스스로 무너져, 왕이 사당을 알현하여 잘못을 물었다.


 

 

七月 命中外仙巫祈雨 太子與妃君 露處三日 乃雨

時旱魃橫行三月 民心洶洶 至是始得種播 人以爲太子雨

 

7월 나라안팎 선무(仙巫)에게 비를 내리도록 기도록 명하였다.

 

태자와 <애례>비군이 노처(露)에서 3일을 지냈다. 이에 비가 왔다.

 

당시 3달 동안 가뭄 귀신이 횡행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씨앗을 파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태자우(太子雨)라고 하였다.


 

파사왕 32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九月 太子幸稟主毛利 于政堂 兵官逸聖諫之 曰

“政堂非吉所 恐爲人譏”

太子曰 “善 吾旣被譏 汝獨無譏 可乎”

乃强使逸聖 繼濡之 人非之 曰

“誰謂諫之 不似甚於贊之 不似邪

 

9월 태자가 품주 <모리毛利>에게 행차하러 정당(政堂)에 갔다.

 

병관 <일성逸聖>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정당은 길한(결혼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됨을 비웃음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옳도다. 나는 이미 비웃음을 입은바 있는데,

너만 홀로 비웃지 않았는데 옳은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강제로 <일성>으로 하여금 이어 적시게 하였다.

 

사람들이 그릇되었다며 말하기를

 

“누가 있어 설명하고 간언하리오.

심히 그것을 도운 것과 같지 않고, 간사함이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十月 太子閱三軍車騎 于北川

 

10월 태자가 북천(北川)에서 삼군(三軍)의 수레와 기병을 검열하였다.


 

 

 

 

 

파사왕 33년(AD.158)

 

三十三年 正月 以樊五爲伊伐飡 曷名稟主 支所禮右頭上 扶余骨女加利 生上子居利

 

정월 <번오樊五>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지소례支禮>를 우두상으로 삼았다.


부여의 골녀 <가리加利>가 왕의 아들 <거리居利>{박제상의 4대조}를 낳았다.


 

二月 以玉權爲京軍事 馬知那爲南軍事 虹盧爲北軍事 允良爲神籬將軍

翌宗爲護城大師 逸聖爲京都大頭太子私臣

 

2월 <옥권玉權>을 경군사로, <마지나馬知那>를 남군사로, <홍노虹盧>를 북군사로,

<윤량允良>을 신리장군으로, <익종翌宗>을 호성대사로,

<일성逸聖>을 경도대두(京都大頭) 태자사신(私臣)으로 삼았다.


 

五月 上有疾 妃君禱天不寐 上下稱之

 

5월 왕이 병이 들어 <애례>비와 <지마>군이 잠을 자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하(上下)가 그것을 칭찬하였다.

 

 

七月 上復疾 召太公及左右頭上 大井大師 太子大師 入寢殿

傳位于祇摩太子 太子號泣 受之 大赦 天下 呼太子小今

 

7월 왕이 다시 병이 들어 태공(太公){마제}과 좌우두상(左右頭上){길원과 지소례},

대정대사(大井大師){창영}, 태자대사(太子大師)를 침전으로 불렀다.

 

<지마>태자에게 전위(傳位)를 하였다.

 

태자가 소리 내어 울며 전위를 받았다.

 

천하의 죄인들을 사면했다.

 

태자를 소금(小今)이라고 불렀다.


 

十月 上夢見惠后 喉渴而崩 史后引小今 于仙寢 而行祥 葬上 于蛇陵門

以允良爲伊伐飡 吉元爲神籬將軍 昌永爲左頭上 君乙爲水酒太守

 

10월 왕이 꿈에 혜후(惠后){아혜}를 만나고, 목구멍이 말라 죽었다.

 

사후가 소금(小今){지마}를 선침(仙寢)으로 이끌어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왕을 사릉문(蛇陵門)에 장사를 지냈다.


 

 

파사왕 33년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심국사기 신라본기> 


 

<윤량允良>을 이벌찬으로, <길원吉元>을 신리장군으로,

<창영昌永>을 좌두상으로, <군을君乙>을 수주태수로 삼았다.


 

十一月 上與史后愛禮 受大朝 于南桃 以愛禮爲雌神聖母 史后爲太聖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11월 왕과 사후가 <애례>와 남도(南桃)에서 큰 조회를 받았다.

 

<애례愛禮>를 자신성모(雌神聖母)로, 사후를 태성(太聖)으로 하였다.


가야세주 <정견正見>이 죽어 아들 <주일朱日>이 섰다.

 

스스로 아시금(阿豉今)이라 칭하였다.


 

十二月 上立先今廟 于高井 命王女十二人分 朔遞祭之

擇六部仙女三十六人 妻雪草兩童 命十部王子 主其吉 于鮑祠

行先今大祭 于新廟 炬火連十里 先今性溫慈好仁節儉 省用 愛民如己

御下爾 勞來諸候 疆土益加 亦中興之聖祖也.

 

12월 왕이 선왕의 사당을 고정(高井)에 세웠다.

 

왕녀 12명을 나누어 (매월) 초하루에 교대하여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6부 선녀(仙女) 36명을 골라서 설동(雪童)과 초동(草童)에게 시집가게 하였다.

 

10부의 왕자들에게 명하여 포사(鮑祠)에서 혼사를 주재토록 하였다.

 

선금(先今){파사}의 제사가 신묘(新廟)에서 행하여졌다.

 

횃불이 10리에 연이어졌다.

 

선금의 성품은 온자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절약하여 검소하며,

사람을 살펴 쓰고, 백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

 

아랫사람을 다룸에 도리가 있으며,

오고자 하는 제후(諸候)와, 강토(疆土)가 더하여 늘어났다.

 

역시 중흥(中興)의 성조(聖祖)다.


 

파사이사금 당시 병합된 주변 영토는

추화(推火, 129년 2월), 거타(居陀, 144년 9월),

압독(押督, 151년 2월), 실직(悉直, 151년 2월)이 있다.



 

 

※ 혁거세(日光)의 가계도

 

 

日光(BC5?-66?) = 月光 = 閼英(2?-65?)                                        = ■神

재위 8-65          |        |                                                            |

                     月知    南海(28?-84?) 재위 66-83 = 雲梯(36?-108)  韓那(53?-132)

                               大盧                                |

                               山梯(55?-131)               儒理(51?-112?) 재위 84-106

                               阿婁(57?- )

 

 

 

 

※ 脫解의 가계도

 

多波那君 = 星帝

             |

           脫解(51-130) 재위 107-125 = 阿孝 = 今堂

                                                             |

                                                          

 

 

多波那君은 고구려 추모의 신하인 협보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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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