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대제20년{AD319}을묘,
춘정월, <담하談河>가 요동에서 돌아와 상주하길;
"단(段)은 내란 중이며, 우문(宇文>이 가장 강성하고,
모용(慕容)은 새로이 번성하여 그 위세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이 둘의 동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변방은 조용히 수습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라 하니 상이 흡족히 여겼다.
2월, <석륵石勒>이 좌장사 <왕수王脩>를 한(漢)에 보내 승첩을 바쳤다.
한(漢)主 <유요劉曜>가 사도(司徒)직을 겸하는 <곽사郭汜>를 보내
<석륵石勒>에게 태재령(太宰領)· 태장군(太将軍)을 제수하고,
조왕(趙王)으로 작위를 올리고 수례(殊禮)도 얹어주어서,
한(漢)이 옛적에 조공(曹公)에게 한 것처럼
나갈 때는 길거리 행인을 없애고 들어올 때는 길을 깨끗이 치우게 하였다.
<왕수王脩>와 <왕수王脩>의 차석인 <유무劉茂> 모두를 장군으로 삼고,
열후(列侯)의 작위를 주었다.
<왕수王脩>의 사인(舍人) <조평락曹平樂>이 <왕수王脩>를 좇아
속읍(粟邑)으로 갔는데, 눌러앉아 한(漢)의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유요劉曜>에게 언질하기를
“대사마{석륵}가 <왕수王脩> 등을 보내와서,
겉으로는 지성을 다하고 속으로는 큰 가마의 호위상황을 살피면서,
복명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가마를 타고 있을 때를 틈타 엄습하려 한다."
고 하였다.
한(漢)은 병력의 실상이 피폐하였었으며, <유요劉曜>는 이 말을 믿어,
<곽사郭汜>가 돌아온 후에 <왕수王脩>를 저잣거리에서 참하였다.
<석륵>은 양국(襄國){今 邢台}으로 돌아가 있었다.
<유무(劉茂>가 도망하여 들어가 <왕수王脩>가 죽은 상황을 보고하였더니,
<석륵>이 대노하여;
"내가 <유劉>씨를 섬겼더니, 인신의 직책에 수례(殊禮)를 얹어주었다.
<유요劉曜)가 나라의 터를 다진 것은 모두 내가 도운 때문이었다.
지금 이미 뜻을 돌렸으니 서로를 도모할 것이다.
趙의 왕 자리이든 황제 자리이든 나 스스로 차지할 것이다.
어찌 그놈의 간사함을 기다리랴."라 하고는,
<조평락曹平樂>의 3족을 주살하였다.
3월, 상이 순수하여 신성(新城)과 안평(安平)에 이르러서,
<부협芙莢>과 <고경高卿> 등이 각자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국경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漢(前趙)과 後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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