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年, <司馬睿>以<廆>爲<昌黎公>不受. <廆>, 遣<王濟>浮海詣<建康>, 勧進

 

미천대제18년{AD317}정축

 

이 해에 <사마예司馬睿>가 <외廆>를 창려공(昌黎公)을 삼고자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외廆>가 <왕제王濟>를 배 태워서 건강(建康)으로 보내

낭야왕이 帝位에 오르도록 권하였다.

 

(동진 원제元帝) 건무(建武 317년) 초,

 

원제(元帝)(東晉을 세운 낭야왕 사마예司馬睿)가 승제(承制)하여

(모용)외를 가절(假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요좌잡이유인제군사(都督遼左雜夷流人諸軍事)

(遼左雜夷流人은 요동의 여러 夷와 유망인들을 관할하는 도독),

용양장군(龍驤將軍), 대선우(大單于), 창려공(昌黎公)으로 임명하였으나

(모용)외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정로장군(征虜將軍) <노창魯昌>이 (모용)외를 설득하며 말했다,

 

“이제 두 경도(낙양과 장안)가 무너지고 천자가 몽진하여

낭야(琅邪)(낭야왕 사마예)가 강동(江東)에서 승제(承制)하니

실로 뭇 사람들의 목숨이 그에게 매어 있소.

 

명공(明公)은 해삭(海朔)에 웅거하여 한쪽 방면을 차지하여 총괄하고 있소.

 

그런데 여러 부(部)가 여전히 무릿수를 믿고 칭병(稱兵,거병)하며

도화(道化)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대의) 관직이 (정식) 왕명(王命)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그들) 스스로 강성하다 여기기 때문일 것이오.

 

이제 의당 낭야(琅邪)에게 사자를 보내

대통(大統)을 잇도록(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해야 하오.

 

그 연후에 황제의 명을 선포하고 이로써 죄 있는 자들을 친다면

어느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소!”

 

(모용)외가 이를 옳게 여기고는 그의 장사(長史,속관명) <왕제王濟>를 보내

바다를 건너가게 하여 (낭야왕이 제위에) 오르도록 권했다.

 

그러다 원제가 존위에 오르게 되자

알자(謁者,관직명) <도요陶遼>를 보내 다시 예전의 명을 전하고

(모용)외에게 장군, 선우의 직을 주었으나

(모용)외는 공(公)으로 봉해지는 것은 고사(固辭)했다.

 

당시 두 경도(낙양과 장안)가 무너지고 유주,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정(刑政)을 밝게 닦고 마음을 (겸허히) 비우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맞으니

유망(流亡)하던 많은 사서(士庶,사족과 서민)들이

포대기로 업고 등으로 지고 와서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郡)을 세워 유인(流人,유망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冀州人)들은 기양군(冀陽郡), 예주인(豫州人)들은 성주군(成周郡),

청주인(靑州人)들은 영구군(營丘郡),

병주인(幷州人)들은 당국군(唐國郡)에 속하게 했다.

 

그리고는 현재(賢才)를 추거(推擧)해 서정(庶政,제반 정무)을 맡기니,

하동(河東)의 <배억裴嶷>, 대군(代郡)의 <노창魯昌>,

북평(北平)의 <양탐陽耽>을 모주(謀主,주요 참모)로 삼고,

북해(北海)의 <봉선逢羨>, 광평(廣平)의 <유수游邃>, 북평(北平)의 <서방건西方虔>

발해(渤海)의 <봉추封抽>, 서하(西河)의 <송석宋奭>, 하동(河東)의 <배개裴開>를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重臣)으로 삼고,

발해(渤海)의 <봉혁封弈>, 평원(平原)의 <송해宋該>, 안정(安定)의 <황보급皇甫岌>,

난릉(蘭陵)의 <무개繆愷>는 문장(文章)의 재주가 있다 하여

추요(樞要,중요)한 직책에 임명하고,

회계(會稽)의 <주좌거朱左車>, 태산(太山)의 <호무익胡毋翼>,

노국(魯國)의 <공찬孔纂>은 구덕청중(舊德淸重)하다 하여 불러서 빈우(賓友)로 삼고,

평원(平原)의 <유찬劉讚>은 유학(儒學)에 능통하다 하여

불러서 동상좨주(東庠祭酒)로 삼았다.

 

그의 세자(世子) (모용)황(皝)이 국주(國胄,제왕이나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속수(束脩)하여 수업(受業)하고

(모용)외가 정무를 보다 틈이 있으면 친히 임하여 이를 들었다.

 

이리하여 도로 위에 송성(頌聲,공덕을 기리는 말)이 있게 되고

예양(禮讓,예의를 지키고 사양함)(의 기풍)이 흥했다.

 

당시 평주자사(平州刺史)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는

스스로 남주(南州) 선비들 사이에서 신망이 있다 여기고

(유민들을) 품어서 모을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유망(流亡)하는 자들 중에 그에게로 오는 자가 없었다.

 

(최)비는 (모용)외가 (그들을) 구류(拘留)한 탓이라 생각하고는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우문(宇文), 단국(段國) 등과 은밀히 연결해

(모용)외를 (쳐서) 멸하고 그의 땅을 나누어가지려 꾀했다.

 

<모용황>은 (동진 원제) 건무(建武: 317-318) 초에

관군장군(冠軍將軍), 좌현왕(左賢王)으로 임명되고

망평후(望平侯)(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요동군 망평현)에 봉하여졌고,

무리를 이끌고 정토(征討)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명제) 태녕(太寧: 323-325) 말에는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임명되고

조선공(朝鮮公)(낙랑군 조선현의 현공縣公)으로 올려 봉해졌다.

 

 

※ 참고

 

구덕청중(舊德淸重) : 오랜 덕이 있고 청렴하고 진중함

속수(束脩) : 스승에게 바치는 예물, 유찬을 스승으로 모신 것을 말함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