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고구려'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16.08.16 계황후(桂皇后), 계맹자(桂孟子)

 

동명 <계桂(BC62-BC31)>황후는 환나후 <량桂亮>의 딸이며,

그 어미 <환숙桓淑>이 <수제>의 천비이다.

 

타고난 자태에 꽃같이 곱고 호걸처럼 활달하여

급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호걸 같은 기풍을 드러내었다. 

 

나이 열아홉에 환나의 여왕이 되었으며,

구다・졸본・섭라와 경계를 마주하여 전쟁 없는 해가 없었기에,

지혜 있고 용맹한 이를 얻어서 나라를 보존하고 지아비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 사람이 없어서 범상한 친척으로 짝을 짓지 않으니,

친척들 많은 이가 원망하게 되었다.

 

<추모>를 보기에 이르더니만 드디어 큰 어미의 정을 발동하여

그윽한 여인의 도리로 그 나라 땅 경계를 모두 졸본에게 떼어주니

그 신하들의 불평이 많았다.

 

후가 이르길

 

“천하 모두가 <추모>의 것이 될 것인데, 한 자 한 치의 땅을 다툴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이해 10월에 기구의 동쪽에서 제와 함께 만났고,

영양을 사향노루와 바꾸고는 들판의 민가에서 서로 합환하고

부부가 되기를 서약하였다.

 

나라 안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아서 후가 나라를 버리고 <추모>에게 귀의하였던 까닭에

나라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갑신년{BC37} 겨울에

<추모>가 있던 중천으로 찾아가서 함께 나라를 바칠 계책을 정하고는,

<오간>에게 명하여 정예기병 1천기를 끌고 환나성으로 들어가서

<자柘>공 등과 더불어서 반대하는 측인 <■> 등을 토벌하여서

<계원桂媛(BC58?- )>의 무리들을 지켜주고 <추모>를 환나국의 천제로 삼았다.

 

모수제(환숙) - 자柘(BC76- )

<자柘>공은 <계맹자桂孟子(BC66-BC23)>의 남편이다.

 

을유년{BC36} 춘정월에 이어서 환나국을 폐하고서 후가 성상의 짝이 되었더니,

환나국 사람들이 기꺼이 성상을 맞이하였기에,

2월에 이윽고 후와 함께 그 나라로 들어가서 그들의 종묘에 제사하였다.

 

그곳 종친들을 위무하며 이르길

 

“<환숙>이 나의 어미인데, 감히 내 백성들을 홀대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이어서 천후(天后)로 삼는 예절을 그 궁에서 거행하여 3일간을 합근하고,

그곳 백성들을 크게 사면하고 반대하는 측으로 옥에 갇힌 이들 역시 풀어주니,

그곳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이에 후의 언니 <계맹자>에게 명하여 국정을 대신하여 집정하게 하고,

{계맹자}의 아들 <환복桓福(BC50- )>을 패자로 삼았다.

 

<복>의 아비는 곧 <자柘>공이다.

 

 

<계맹자> 역시 <추모>의 비가 되사 여러 번 승은을 입더니,

환나 백성들이 <추모>를 아비로 여기는 까닭에,

구다와 섭라가 감히 다시 엿보지 못하였고, 나라가 이윽고 부강하여지니,

즐거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7월에 <호인好人(BC94-BC24)>태후가 갈사에서부터 도착하여 황태후로 높여지고,

이에 부여의 왕・후의 제도에 의거하여

<훤>・<소>・<계> 세 천후(天后)로 되어서 날이 되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계>후는 성품이 우아하며 정숙하고 욕심이 없기로 빼어나서

비록 상을 종일토록 곁에서 모시면서도 아양 떠는 태도가 없었던지라,

합방하기도 가장 적었더니 자식도 역시 달랑 아들 하나에 딸 하나이었던 까닭에,

종묘에 들일 때에도 종부가 <전>후를 <계>후의 위로 하였더니,

금일에 이르러서도 그 당시의 예법이 틀렸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후는 훌륭한 공적이 크지 않았음은 아니지만,

창업함에 있어 어찌 능히 <계>후의 만분의 하나에나 당하겠는가!

 

<광명>의 시절에 <계>후가 낮게 추대되어서

<고루高婁(BC35-32)>가 근심하고 조심하면서 변방의 외진 땅에 있었던 것은,

<맹孟>후{계맹자}와 <환복桓福>이 경부를 등에 업지 못한 때문이었다..

 

자오곡대전이 있었을 적에 불의의 일이 벌어져서

적들이 계곡 속에서 포위하고 숨어서 내려다보면서 화살을 집중하여 쏘아대서

죽은 황군의 수를 세기 어려웠음을 비방한 것이었다.

 

상 역시 화살 두 대를 맞으시어,

후가 끌어안고 입으로 독을 빨아내고서 등에 업고 빠져나가다가,

후 역시 화살 한 대를 맞았으나 괘념치 않으면서 바람이 센 것을 보더니

화공을 독려하여 이윽고 크게 이긴 연후에 그 부상을 치료하였으니,

그 진의 무리들이 자신을 중히 여기는 태도가 이러하였음이었다.

 

천자가 후를 세울 적엔 필히 북을 두드리고 나발을 불고서야 침상에 올랐더니,

이름 하길 취례(吹禮)라 하는 것으로 <계>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계>후가 상께서 과로하여 괴로워하실 것을 걱정하였음에

이 예법을 만든 것이었다.

 

<소>후가 2세후가 될 적에 이를 나라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나발을 불어서 예를 행하고 침상에 올랐던 까닭에,

이에 후세에 후를 세우는 예식으로 되었다.

 

후가 모든 장수의 처들에게 명하여

진중에서 지아비를 따르는 이들은 필히 말을 타게 하여서

수레를 타는 풍조를 허락지 않음 역시 후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기처(騎妻)라 불렀다.

 

후는 얼굴단장과 머리정리하길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타고난 맵시가 저절로 고왔던 까닭에,

후궁들 여럿이 모방하여 그 타고난 맵시로 다듬었으니,

때에 계후장(桂后粧)이라 불렀다.

 

또한 금과 옥 등으로 치장하는 것도 즐기지 않아서,

비록 적복으로 상을 기다릴 적에도 금과 옥으로 된 많은 것을 없이하였고

오로지 진주 인끈만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더니,

그 어미 <환숙>이 패용하였던 까닭으로

자신의 어미를 생각하여 사용하였던 것이었으며,

사람들이 <계>후를 진주후(真珠后)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후의 아비 <계량桂亮>공이 <섬니閃尼>의 어미에게 속아서 경계 상에서 사냥하다가

단산(丹山)에서 복병을 지나쳐서 곤욕을 치르고 돌아왔다.

 

<섬니閃尼>는 구다국 여군주이다.

 

상께서 재위 7년 6월에 친히 비류 땅의 군대 3천을 이끌고

한수(汗水) 상류로 나가서 단산(丹山)을 선취하여 환나 속령으로 하였다.

 

<섬니閃尼>가 노하여 후에게 욕을 퍼 다가 패하여 돌아가더니 되돌려 나오기에,

쌍하(雙河)의 황산 동쪽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모두 후의 계책을 써서 승리하였고 <섬니>의 도성에까지 다다라서

적장 <호산虎山>과 붙어서 그들의 도성 아래에서 크게 싸웠다.

 

상께서 몸소 북을 두드려 독전하니 <호산虎山>의 화살이 날아왔다.

 

후가 상의 앞을 가로막아서 연이어 두 발을 맞았으며

독이 지독하여 고통을 참느라 말을 하지 못하였다.

 

상께서 친히 <호산虎山>을 쏘아서 죽이고

그 아래인 아홉 장수들 모두를 군진 앞에서 상하게 하였더니,

적들은 감히 당할 수 없음을 알아서 항복하였다.

 

이에 <섬니閃尼>를 참하고 그 나라를 멸하여 군(郡)으로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리에 운 지 열하루 만에 죽으니 춘추 서른둘이었다.

 

아들은 <고루高婁(BC35-32)>태자이고 딸은 <만曼(BC32- )>공주다.

 

황후의 예법으로 진주 하산에 장사하였으니, 이름 하길 진주릉이었으며,

상께서는 오처곡을 만들어 슬퍼하였다.

 

<이문진李文真>이 이를 번역하여 그 가사를 황려사(皇麗詞) 림명호(林鳴呼)에 실었다.

 

<동명>의 천후들은 모두 합하여 여덟이었으나,

오로지 후와 <화>후만이 정식으로 혼인하였던 것이다.

 

후의 공적과 업적이 후세에 오래도록 책으로 되어 있어서,

역대에 자오지사(子午之史)를 읽지 않음이 없었고

그 계곡을 지나친 이들은 미상불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


 

'남당유고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명대제기  (4) 2016.08.16
소황후(召皇后) 화황후(禾皇后)  (0) 2016.08.16
을전(乙旃)  (0) 2016.08.16
예태후(禮太后)  (0) 2016.08.16
훤화(萱花)  (0) 2016.08.16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