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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24 구지왕(仇知王)

 

 

휘(諱)는 <백고伯古>이고,

기루왕(己婁王)의 7째 아들이고, 개루왕(盖婁王)의 다른 어머니 동생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성스러운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공경하고 추모하여

 

말하기를

 

“구대왕(仇臺王)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당시 개루왕의 같은 어머니 동생들이 모두 임금의 특별한 총애가 있었으나,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개루왕이 병이 깊어지자 죽음에 임하여 왕비 사씨(沙氏)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동생들이 비록 많다고 하나 오로지 <백고>가 가장 현명하고,

내가 죽으면 너의 자식들은 모두 어리니 만약 여러 동생들이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너의 자식들에게 불리해질 것이므로,

<백고>를 너의 계부(繼夫)로 삼음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씨가 이에 한 밤중에 은밀히 궁중으로 거두었다.

 

이날 밤에 눈이 사람의 키를 넘었는데 모든 왕의 동생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구지왕 원년 (AD.188)무진

 

12월 사씨(沙氏)를 후로 세우고, 어머니 흘씨(屹氏)를 태후로 삼았다.

 

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인(舍人) <가기賈杞>의 아내 백씨(苩氏)를 거두어

아들 백인(苩仁)과 딸 백화(苩花)를 낳았는데, 왕의 깊은 총애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씨를 <가기>에게 되돌아가도록 명하고,

백씨가 데려온 자식들을 <가기>의 자식이라 명하였다.

 

 

이때 태후 흘씨(屹氏) 54세, 왕후 사씨(沙氏) 44세, 구지왕 34세, 공손도 44세?

백씨(苩氏) 25세,  백인(苩仁) 4세, 백화(苩花) 2세, 공손도의 딸 <宝婁> 16세,

신라 <지마>의 딸 <밀화>의 아들 <길선> 17세, <밀화>의 딸 물씨(勿氏) 11세이다.

 

 

 

 

구지왕 2년 (AD189)기사

 

2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145?-204)>왕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왕 또한 같은 어머니 동생 <대지大知>를 보내어 방물(方物, 특산품)을 바쳤다.

 

 

 

 

구지왕 3년 (AD190)경오

 

3월 <공손도公孫度>왕이 딸 <보루宝婁(173-222)>를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왕을 듣자하니 실가(室家)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감히 천식(賤息)을 보내오니 건즐(巾櫛)로 삼고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백마(白馬) 3쌍을 폐물로 삼고 장가들었다.

10월 왕이 요산(遼山)부산(富山)의 군대를 도와 많은 전리품을 얻고 승리하였다.

 

대륙백제의 기사이다.

 

부여(夫餘)는 본래 현토(玄菟)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서 웅거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外夷)들을 위엄으로 복속시키니,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소속을) 바꾸어 요동(遼東)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와 선비(鮮卑)가 강성해지자,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어서 종녀(宗女)를 시집보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 

 

 

백제(百濟)는 그 선대가 아마도 마한(馬韓)의 속국이며,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주서 이역열전>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는데,
대방(帶方)에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북사 열전>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시집보냈고,
(나라가) 점점 창성(昌盛)하여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수서 동이열전> 

 

 

 

 

구지왕 4년 (AD191)신미

 

4월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구지왕 5년 (AD192)임신

 

2월 북한산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에 대비하였다.

 

8월 신라왕 일성(逸聖)이 섰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구지왕 7년 (AD194)갑술

 

2월 왕후 사씨(沙氏)가 죽었다.

 

왕이 신라에 청혼하였다.

 

7월 신라가 <근종近宗>의 딸 <물씨勿氏(178-249)>를 우리에게 시집보냈다.

물씨(勿氏)의 어머니는 신라의 선왕(先王) <지마>의 딸 <밀화密華(155- )부인이다.

 

<밀화> 부인은 그 용모와 안색(顔色)이 나라{신라}안에서 뛰어났고,
물씨(勿氏) 또한 얼굴색이 더욱 뛰어났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 사신 <소광小光>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구지왕 10년 (AD197)정축

 

5월 고구려의 <연우延優>가 그 형{발기}을 내쫓고 그 형수{우씨}를 얻었다.

 

<공손도>왕이 죄를 묻고자 우리에게 군대를 출병하도록 명하였으나,

왕이 같은 조상의 나라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출병하지 않음을 사죄하였다.

 

<공손도>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10월 물씨(勿氏)가 왕의 아들 <여물餘勿>을 낳았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경사를 알렸다.

 

신라는 물씨의 같은 어머니의 오빠

<길선吉宣(172-226)>을 보내어 축하하고 선물을 바쳤다.

 

왕이 사녀(私女) <백화苩花>를 길선의 처로 주었다.

 

<백화>는 이제 나이 겨우 11세로 아직 밤일을 할 수 없었다.

 

왕이 그 어머니 백씨(苩氏)를 시켜서 밤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길선>이 이에 그 모녀를 거느리고 신라로 돌아갔다.

 

백씨의 남편 <가기賈杞>가 마음에 병이 생겨 죽었다.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생각하였다.

 

 

 

 

 

구지왕 17년 (AD.204)갑신

 

9월 <공손도>왕이 죽어, 태자 <공손강公孫康(172-221)>이 섰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위로했다.

 

 

 

 

 

구지왕 22년 (AD209)을축

 

10월 고구려왕 <연우延優>가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기면서

겸손하게 글을 올려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공손강>왕을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어 대접하지 못하고,

태자 <백인苩仁>으로 하여금 그 사신을 은밀히 국경에서 대접하도록 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는 196년 <발기>의 난으로 요동을 공손씨에게 넘겨주고

환도(丸都){今 朝陽}로 천도한다.  

 

 

 

 

 

구지왕 24년 (AD211)신묘

 

7월 길선(吉宣)이 그 여동생 물씨(勿氏)가 나이 30살을 넘고

자녀를 많이 낳아 색(色)이 점점 뿌리를 소모하게 하니,
길선의 딸 <전씨田氏(197-269)>를 잉첩으로 보내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전씨(田氏) 거두었다.

전씨(田氏)의 어머니 <팽전彭田>이 거느리고 와서 구궁(龜宮)에서 묵었다.

 

왕이 구궁에 은밀히 이르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전씨>와 먼저 통정을 하였다.

얼굴은 <물씨>와 비슷하나 더욱 아름다워 왕이 깊이 매혹되었다.

 

이에 <길선>에게 좌평(佐平)의 벼슬을 내리고, <팽전>을 국부인(國夫人)으로 삼았다.

장원(莊園)과 노비를 내림에, 왕자의 예우와 같았다.

 

<팽전> 역시 색기가 있고 아첨을 잘하여, 왕이 겸하여 통정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 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왕은 여자를 밝힌다. 어찌하여 난(卵)을 바꾸고
어머니를 주고받는가!”라고 하였다.

아마도 <백화苩花> 모녀와 <전씨> 모녀를 바꾼 까닭이다.

 

<전씨>의 나이 겨우 15세이나 자못 정사(情事)에 밝았다.

 

 

 

 

 

구지왕 25년 (AD212)임진

 

2월 신라왕 <일성逸聖>이 죽었다.

 

왕이 동생 <고시古尸>를 보내어 조문하였는데, 과거의 예와 같이 부의를 보냈다.

 

 

 

 

 

구지왕 27년 (AD214)갑오

 

4월 전씨(田氏)가 왕의 아들 <소고素古>를 낳았다.

 

왕이 <소고素古>를 매우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고자 하여,
구궁(龜宮)의 무리를 중용하였다.

 

 

 

 

 

구지왕 30년(AD217)정유

 

3월 공손강(公孫康)이 대방왕(帶方王)이라 바꾸어 칭하기 시작하였다.

 

그 여동생 <보고宝皐(201-257)>를 왕에게 잉첩으로 보냈다.

 

당시 조정에는 한인(漢人)을 등용함이 자못 많았으며 요동왕에게 의지하였다.

이 때문에 <보루宝婁>와 <보고宝皐>를 중히 여겼는데 <보루>는 아들이 없었다.

 

 

 

 

구지왕 34년(AD221)신축

 

7월 대방왕 <공손강公孫康>이 죽어 동생 <공손공公孫恭>이 섰다.

 

<공손강>의 아들 <공손황公孫晃>을 한왕(漢王){헌제}에게 인질로 보냈다.

사신을 보내어 조문을 했다.

 

 

 

 

구지왕 35년(AD222) 임인

 

2월 정비(正妃) 보루(宝婁)부인이 죽었는데 춘추 50세였다.

후의 성품은 청아(淸雅)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여러 사람을 부림에 어질었으며, 빈첩(嬪妾)을 도리(道)로 대하여,
일찍이 색(色)을 시샘함이 없었으며 항상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임종에 이르러 <보고>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너를 위하여 착한 아들(佳子)을 구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고 슬퍼하였다.

오판(烏坂)에서 장사지냈다. 

 

 

 

 

구지왕 36년 (AD223)계묘

 

2월 <길선吉宣>을 상좌평으로 삼고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겼다.

 

<길선>의 여동생과 딸이 우리에게 시집와서

대택(大宅)과 처첩(妻妾)을 양국을 두고 일정하지 않는 시기에 왕래하였다.

 

신라의 새로운 왕{아달라}이 <길선>을 의심하여 중용하지 아니하였다.

 

<길선>은 스스로 <지마>의 손자{외손자}라 하여,

당시의 왕에게 자못 불궤(不軌)한 마음이 있었다.

 

왕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망동(妄動)하지 않음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씨>가 힘써 권하는 바대로 하기를 허락하여, 동로군사를 위임하였다.

 

<길선>이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구지왕 38년 (AD225)을사

 

10월 <길선吉宣>의 일이 실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신라왕이 <길선>을 불러들이려 하였다.

 

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지 아니함은 틀림없이 죄를 줄만합니다.

 

그의 딸이 소국(小國)의 내군(內君)이니
한명의 목숨을 용서해주시면 소국으로서는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라왕이 화가 나서 듣지 아니하고,

장수 <대해大解>를 보내어 침략하였는데 불리하여 돌아갔다.

 

 

 

 

 

구지왕 39년 (AD226)병오

 

5월 상좌평(上佐平) <길선吉宣>이 죽었는데 나이 55세였다.

 

왕이 애통해하며 태공례(太公禮)로 장사를 지냈다.

 

<길선>의 아들 <팽선(彭宣>은 <전씨>의 오빠다.

 

왕이 <백화苩花>를 <팽선>에게 시집보냈다.

 

<팽선>이 <백화>와 그의 오빠 <백인苩仁>이 밀통하여

신을 박대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왕이 <백인>에게 밖으로 나가 북한군(北漢軍)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백인>이 말하기를

 

“아바마마가 전씨(田氏)에게 미혹되어, 아들과 동생들을 가벼이 여긴다.”라고 하였다.

 

왕의 동생 <고시古尸>가 그 말을 듣고,

 

<전씨>에게 은밀히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왕자들이 <백인>과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전씨가 말하기를

 

“또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고시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다. 거짓조서로 군사를 일으켜 먼저 제압함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전씨가 이내 밀부(密符)를 내어 <고시>와 더불어

행내외군사(行內外軍事)로 한다고 영(令)을 내렸다.

 

<고시>가 이에 왕을 핍박하여 궁궐 깊숙이 가두어 놓고,

<소고素古>{초고왕}를 새로운 왕으로 세워 이로써 천하에 호령하게 하였다.

 

<고시>는 왕의 서제(庶弟)이다.

 

그 어머니는 일찍이 왕과 잠통하여 은밀히 궁중비사(宮中秘事)를 고하였다.

 

자못 왕에게 공이 있었다.

 

왕 역시 <고시>를 사랑하여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

 

<고시>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워 <전씨>와 은밀히 상통하여

아들 <소대素大>를 낳았다.

 

왕이 알까 항상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인> 등이 그 일을 발설하려 하였다.

 

그런 연유로 <고시>가 먼저 사로잡으려 한 것이다.

 

<백인>이 계략이 어긋났음을 알고 말갈(末曷)로 도망쳤다.

 

<고시>가 이에 <전씨>와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왕이 근심하고 분노하여 죽었는데 춘추 72세였다.

 

왕은 성군(聖君)으로써 일찍이 치평(治平)으로 이름이 있었다,

 

다만 여자를 좋아하여, 규문(閨門)의 일을 점검하지 않았으니,

끝내는 사랑하는 동생과 총애하는 처에게 제거됨을 당하니, 애석하도다.

 

달솔(達率) <연다燕多>와 <격섬鬲閃> 등이 <고시>를 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여 신라로 귀의하였다.

 

두 번의 거사가 모의되어 <고시>가 감히 자립(自立)하지 못하고,

<소고>를 세웠는데 나이 겨우 13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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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