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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優台)

남당유고/백제 2016. 8. 15. 20:59

 

 

북부여 <해부루解夫婁>왕의 서손(庶孫)이다.

 

<해부루>왕이 일신(日神)이 강령(降靈)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였다.

 

왕자를 열국(列國)으로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이 질병과 고통을 살펴보게 하였다.


당시 졸본태수 <연타발延陀勃>에게는 <소서노召西奴>라 불리는 딸이 있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優台>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우태>가 몰래 졸본 여산(與山)에 이르러 <소서노>와 상통(相通)하였다.

 

<연타발>은 (해부루)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하여 금(禁)하려 하니,

이에 태백산(太伯山) 골짜기 비류천(沸流川) 상류로 도피하였다.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고 <비류沸流>라 이름 지었다.

 

<연타발>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게 하여 맞이하였다.

 

드디어 졸본의 땅이 <우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때는 한(漢) 효원제(孝元帝) 초원(初元) 2년(BC47) 갑술(甲戌)년의 해다.


당시 해부루왕 태자 <금와金蛙>가 섰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를 졸본의 왕으로 명하였다.


 

원년(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세워 비(妃)로 하였다.


동명묘(東明廟, 해부루의 사당)를 비류천(沸流川)에 세웠다.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溫祚>가 태어났다.


7월 나라를 동, 서, 남의 3부(部)로 나누었다.

 

을(乙)씨, 흘(吃)씨, 해(解)씨로 하여금 나누어 그 고을의 우두머리(長)로 하였다.



7년(BC41) 경진 정월 왕의 어머니 을씨(乙氏)가 부여에서 죽었다.

 

왕이 모친상을 맞이하여 (부여로) 갔다가 돌아왔으나 병을 얻어 죽었다.


4월 왕의 유복녀(遺腹女) <아이阿爾>가 태어났다.


5월 비(妃) 소서노를 여군(女君)으로 하였다.

 


 

8년(BC40) 신사 7월 <모수慕漱>왕 태자 <주몽朱蒙>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나이 19세로 견줄만한 것이 없는 뛰어난 영웅이었다.

 

<소서노>는 주몽를 맞이하여 빈당(賓堂)에 모셔두고 대접함이 심히 후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목욕을 하였다.

 

주몽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말하기를

 

“여군(女君)의 나이 이제 스물일곱인데

선왕(先王)의 정조를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어찌 감히 정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히 남편으로 삼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소서노>의 뜻을 알고

마침내 어깨에 메어들고 <소서노>와 통(通)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한 사실을 숨겼다.


10월 주몽이 <소서노>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곳의 하늘은 장차 우리 부부에게 제위를 내리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지금 당신과 나는 몰래 정을 통하였으나,

나라 안에 알리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주몽>이 말하기를

 

“나는 활쏘기에 능하니,

당신은 마땅히 선사자(善射者)를 남편으로 선택함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승낙하여, 이에 나라 안에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나의 나이 젊으나 과부가 되었으니 여자 혼자 사는 것은 옳지 않다.

 

활쏘기에 능한 자를 남편으로 삼음이 옳으니,

각자 그 기예를 나의 앞에서 시험하러 와라.”고 하였다.

 

영(令)에 응모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소서노>가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주몽>과 더불어 사당(廟)에서 혼인을 하였다.

 

(시험에) 미치지 못한 자들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주몽>이 그의 신하 <협부陜夫>{협보} 등에게 사로잡아 다스리도록 하였다.

 

 

 

9년(BC39) 임오 4월

 

<주몽>이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되었는데 나라사람들 중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내가 나라에 공(功)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병(精兵)을 양성하여

이웃의 오만무례한 자들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처가 되었으니 명령에 따름이 마땅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주몽이 민간의 장정(壯丁)을 선발하여 활쏘기와 승마를 배우도록 하고,

부곡(部曲)에 관청을 나누어 세우고, 그 심복들로 통솔하게 하였다.


10년(BC38) 계미 2월 <소서노>가 <주몽>의 딸 <감아甘兒>를 낳았다.


이해에 <주몽>이 졸본의 모든 부락을 평정하여 일국(一國)의 위엄을 떨쳤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여자인 까닭에 (임금으로써) 그 때 그 때 할일을 알지 못한다.

 

다만 (궁)안에서 자식을 기르고 (나라의) 안 살림을 책임짐이 옳다.

 

천하의 일은 낭군(郞君)이 주재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신은 나의 진실한 아내다.

(그러나) 당신의 옛 신하가 복종하지 아니하니 어찌할까?”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낭군이 나를 처로 삼고, 나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다면

곧 나의 신하들이 어찌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치에 맞다 하였다.


≪견해≫ 백제는 <주몽>에게 국정을 위임한 사실을,

고구려는 <주몽>이 주변의 국가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힌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백제왕기는 백제인이, 고구려사초(략)은 고구려인이 쓴

古記를 저본(底本)으로 쓴 사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1년(BC37) 갑신 1월 <소서노召西奴>가 <주몽朱蒙>을 세워 왕으로,

<비류沸流>를 태자로, <온조溫祚>를 왕자로 하였다.

 

<우대憂臺>의 구신,

졸본의 제신(諸臣)이 주몽의 신하와 혼인하여 친척이 되도록 하였다.


나라이름을 고쳐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12년(BC36) 을유 6월 비류(沸流)국을 평정하였다.

 

그 나라의 주(主)인 <송양松讓>을 다물후(多勿)로 삼았다.

 

비류는 본래 졸본에 속하였는데, 지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온 까닭이다.

 

 

14년(BC34) 정해 7월 성곽과 궁실이 바야흐로 이루어졌다.

 

왕과 후가 술을 마시며 크게 기뻐하며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외종척(內外宗戚)과 모든 신하에게 상을 내렸다.


 

16년(BC32) 을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烏伊>와 <부분노芙芬奴>가

양쪽 길로 나누어 태백산(太伯山) 남동쪽 행인국(荇人國)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19년(BC29) 임진 5월 행인국 왕녀 <벽라碧蘿>를 태자 비류의 비(妃)로 하였다.

 

군신에게 포(脯)를 내렸다.


 

21년(BC27) 갑오 11월 장군 <부위염扶尉厭>에게 위임하여

북옥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땅 치구루(置溝婁)를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24년(BC24) 정유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부여에서 죽었다.

 

왕과 후가 압궁(鴨宮)의 상류에서 발상(發喪)하였다.

 

부여에 사신을 보내어 부의를 하였다.


이해에 왕의 적자(嫡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와서 사냥 가는 길에서 왕을 만났다.

 

왕은 후(后)가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 두려워하여 곧바로 데리고 돌아오지 않고,

다물후 <송양松讓>의 집안에 부탁하여 맡겼다.

 

나라 안의 이곳저곳을 돌며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

 

사람들이 그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소서노가 듣고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까닭을 물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요. 낭군의 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데,

어찌 오게 하여 만나지 아니 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 아이가 비록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왔으나,

내가 비류와 온조를 아들로 삼았는데 어찌 아들을 연연(戀戀)함이 가당하겠소.

이미 버린 자식이로다.”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천륜(天倫)의 친함이 있는데, 어찌 버림이 가당하리오.

 

또 첩과 대왕이 서로 결혼한 지 20여년이 되었지만

단지 <감아> 한명이 있을 뿐입니다.

 

낭군의 자식은 첩의 자식이기도 하니,

어찌 불러 오게 하여 궁중에 두려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아내의 말이 합당하도다.

 

만약 <아이阿爾>를 시집보내어 공동의 자식으로 한다면,

이 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도다.”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길

 

“부부사이라면 어찌 아까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은 첩의 마음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에 유리를 불러 아이궁(阿爾宮) 안에 두고

<아이阿爾>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유리>가 이에 <아이阿爾>와 더불어 안으로는 부왕과 모후에게 애교를 부리고,

밖으로는 집정대신과 결탁하여 암중으로 적자의 자리를 빼앗을 뜻을 모았다.


 

29년(BC19) 임인 4월

 

우보(右輔) <오이烏伊>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대왕은 매우 고생을 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신(臣) 등은 천추만세의 후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비류>를 세운다면

마땅히 비류의 부친인 <우태優台>를 우리의 왕후와 짝지을 것이므로,

대왕이 어찌 이 나라에서 혈식(血食, 나라의 제사)을 받겠습니까?

 

만약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고 <아이阿爾>를 태자비로 삼는다면,

<아이阿爾>는 지금 임신 중이므로 다른 날 대왕과 성후(聖后)의 손(孫)으로

영구히 이 땅의 임금의 지위가 이어질 것입니다.

 

대왕과 성후가 두려워하는 바는

서로의 배우자가 이 땅에서 나라의 제사를 받는 일에 시비가 있는 것이니,

함께 아름다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현명한 아들을 세우는 것이 종묘사직에 중요하다.

 

지금의 비류는 어질고 덕이 있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이 소생(所生)을 세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비류>가 비록 인자하나 제왕의 그릇이 아닙니다.

 

단지 수성(守成)의 그릇입니다.

 

<유리>는 재주와 덕을 쌍으로 온전히 갖추었습니다.

 

만백성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왕의 아들에게 보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세우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늦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유리> 또한 스스로 사양하며,

군신들의 뜻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금(禁)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왕이 (소서노와) 더불어 동침하며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걱정하였다.

 

후(后)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 비류가 비록 인자하나, 당신의 아들 유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만약 <아이阿爾>가 좋은 손자를 낳으면 이 나라를 능히 이어 나갈 것이고,

나는 전남편과 현재의 남편 모두에게 부인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어찌 고집하여 근심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건국의 도리(이념)는 어진 이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다.

 

나는 사실 내 자식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신의 말과 같은지 내일 시험하여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궁의 좌우에 깃발을 세우고,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비류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오른쪽, 유리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왼쪽으로 가라.”

고 하였다.

 

좌에 있는 자가 오른쪽에 있는 자보다 3배가 많았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길

 

“내가 비류의 사내(夫)를 세우고자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면 좋을까.”

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를 태자로 세우고 3부로 나누도록 하였다.

 

비류의 차례는 동남을, 온조의 차례는 서남을, 북부는 유리가 다스리게 하여,

후(后, 소서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이때부터 국정(國政)의 많은 부분이 유리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점점 불평의 뜻을 품게 되었다.


9월 왕이 돌아가셨다. 후(后)가 애통하며 따라 죽으려하였다.

 

군신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은 홀연히 버리고 (떠났는데), 성후(聖后, 소서노) 역시 (대왕을) 따른다면,

신들은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후(后)가 말하기를

 

“태자가 있으니, 너희들이 받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유리>가 왕으로 즉위하여,

후를 태후로, <아이>는 후로, <비류>와 <온조>를 좌우형왕(左右兄王)으로 삼았다.


10월 <아이阿爾>후가 태자 <도절都切>을 낳았다. 대사면을 하였다


 

유리가 처음 <송양松讓>에게 있을 때, <송양>의 딸 <송화松花>와 잠통(潛通)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아이阿爾>가 출산하여 누워있었는데 후궁(後宮)이 없었다.

 

<송화>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이후로 옛날과 같이 (정을) 통하였다.

 

태후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나의 딸은 임금의 아들을 낳고 누워있으니,

남편의 사람됨이란 마땅히 아침과 저녁으로 그 옆에 있으면서 수고를 나누어야 한다.

 

어찌 아름답지 못한 여자를 거두어 이어가기를 바라느냐.”라고 하였다.

 

유리가 말하기를

 

“임금(人君)은 마땅히 대를 이을 자손(嗣孫)를 넓혀야 하니

한두 명의 후궁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물며 <송화>는 나의 조당병모(糟糖餠母, 조강지처)로 맹세하였으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노하여 말하기를

 

“너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을 때, 우리 부부를 속여, 어질고 현명하게 보이려 하였다.

 

지금 너의 아버지가 죽고 없으니, 갑자기 감히 이처럼 대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비류>와 <온조>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유리에게 속임을 받았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책을 서둘러서, 각자가 봉하여진 땅으로 가야한다.”라고 하였다.

 

<비류>가 말하기를

 

“대왕이 살아있을 때 우리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는데,

지금은 곧 혹같은 존재를 면할 수 없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새 나라를 열어 창업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가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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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