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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11 실성(實聖)이사금기

 

 

 

실성왕 원년(402)수호(水虎) 임인

 

二月七日奈勿帝崩 保反后以遺命立實聖爲繼君

先是三元公主有女曰禮生夢見白大馬而奇之 大西公適至聞夢而私之生實聖

初呼馬兒皃美而柔人以爲柔馬兒

末仇 公沒大西知公娶其妻休禮以是馬兒與奈勿同居一宅情好岳及

奈勿得志引而用之及麗南侵奉使于麗十年未歸

麗主談德以其妹杜氏妻之生三子 杜乃爲之說談德曰

賢主尙信 而不若質今妾之夫歸彼則金枝玉葉留此則九牛一毛也

妾願同歸其國以爲大王計 談德許之

時奈勿以疾不能理事願見馬兒及歸喜而問其故馬兒曰

吾聞兄疾而欲歸不食而禱 天一夜之間鳥頭盡白麗人大驚許我歸之也

奈勿神之乃名實聖而居副君之位至是卽祚春秋四十四

以保反爲上宮內留爲下宮杜氏爲暖宮 是爲三宮

以王弟大勿吉莫爲左右匝判尊父公大西知爲世神母主禮生爲聖母

以訥祇爲太子初老爲太子妃盖奈勿之遺囑也

 

2월 7일 내물제(奈勿帝)가 붕(崩)하였다.

 

보반후(保反后)가 유명(遺命)으로써 <실성實聖>을 세워 계군(繼君)을 삼았다.

 

 

이에 앞서 <삼원三元>공주(公主)에게 딸이 있어 <예생禮生>이라했는데

꿈에서 백대마(白大馬)를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때마침 <대서大西>공(公)이 이르러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사통하여 <실성實聖>을 낳았다.

 

처음에는 <마아馬兒>라 불렀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므로

사람들이 유마아(柔馬兒)라고 했다.

 

<말구末仇>공(公)이 몰(沒)하고

<대서지大西知>공(公)이 그 처 <휴례休禮>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이로써 <마아馬兒>는 <내물奈勿>과 한집에 동거하게 되었는데

정호(情好)가 심히 도타웠다.

 

<내물奈勿>이 뜻을 얻기에 이르자 그를 이끌어서 등용하였는데

고구려가 남침(南侵)하게 되자

사절을 받들고 고구려에 가서는 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여주(麗主) <담덕談德>이 그 누이(妹) <두씨杜氏>로 처를 삼게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두씨>가 마침내 그를 위해 <담덕談德>을 설득해 말했다.

 

“현주(賢主)는 신의(信)를 숭상하니 볼모를 잡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 첩의 남편은 저쪽으로 돌아가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지만

여기에 머무르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따름입니다.

첩은 원컨대 그 나라에 함께 돌아감으로써 대왕을 위한 계책이 되고 싶습니다.”

 

<담덕談德>이 그를 허락하였다.

 

때에 <내물奈勿>은 병질로 정사를 볼 수 없어 <마아馬兒>를 보기 원했는데

돌아오게 되자 기뻐서 그 연고를 물으니 <마아馬兒>가 말했다.

 

“제가 형의 병환을 듣고서 돌아가고자 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에 까마귀의 머리가 남김없이 하얗게 되므로

고구려인들이 크게 놀라서 내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내물(奈勿)은 그를 신(神)이라 여겨 이에 실성(實聖)이라 이름하고

부군(副君)의 지위에 있게 했는데 이에 이르러 보위에 오르니 춘추 44세였다.

 

<보반保反>을 상궁(上宮)으로 삼고, <내류內留>는 하궁(下宮)으로 삼고,

<두씨杜氏>는 난궁(暖宮)으로 삼아 이를 삼궁(三宮)으로 하였다.

 

왕제(王弟) <대물大勿>과 <길막吉莫>을 좌우잡판(左右匝判)으로 삼고,

부공(父公) <대서지大西知>를 추존하여 세신(世神)으로 삼으며,

모주(母主) <예생禮生>을 성모(聖母)로 삼았다.

 

<눌지訥祇>를 태자로 삼고 <초로初老>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니

대개 <내물奈勿>이 남긴 유촉(遺囑)이었다.

 

 

 

三月葬奈勿于玉陵以雍判爲陵門祀主

保反后謂新帝曰

吾所以君爲繼夫者非君之美也先帝愛君之故也願保先帝遺兒以洽我心

帝曰諾於是 保反乃與新帝朝于聖母祠受賀南桃

 

3월에 <내물奈勿>을 옥릉(玉陵)에 장사하고

<옹판雍判>으로 능문사주(陵門祀主)를 삼았다.

 

<보반保反>후(后)가 신제(新帝)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계부(繼夫)로 삼은 까닭은 그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선제(先帝)가 그대를 아낀 까닭이오.

원컨대 선제(先帝)가 남긴 아이들을 보호하여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오.”

하니

 

제(帝)는

 

“네”하고 대답했다.

 

이에 <보반保反>이 마침내 신제(新帝)와 더불어 성모사(聖母祠)에 참배하고

남도(南桃)에서 하례를 받았다.

 

 

五月帝謂保反曰 句麗之富强無他也政在于男子也 我國貴骨母政多出婦人之手不能强也

我爲爾夫爾與我一體也自今使我爲政當似如句麗之强也

保反曰汝若在我何事不從乎自今任汝爲之也於是帝大更舊制多設新官宗臣多不便之

聖山主方丹生奈勿子方石

 

5월, 제(帝)가 <보반保反>에게 말했다.

 

“고구려의 부강함은 다른 것이 없고 정치가 남자에게 있음이다.

우리나라는 골모(骨母)를 귀하게 여겨

정사가 부인(婦人)의 손에서 많이 나오니 강해질 수가 없다.

내가 네 남편이 되었으니 너는 나와 한 몸이다.

이제부터 나로 하여금 정사를 맡게 하여 마땅히 고구려와 같은 강성함을 닮게 하라.”

 

<보반>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있을 것 같으면 무슨 일인들 따르지 않으랴.

이제부터는 네게 맡겨 그리하리라.”

 

이에 제(帝)가 옛 제도를 크게 개편하여 새로운 관제(新官)를 많이 설치하니

종신(宗臣)들이 그를 많이 불편해 하였다.

 

성산주(聖山主) <방단方丹>이 <내물奈勿>의 아들 <방석方石>을 낳았다.

 

 

七月命麗人土五稅敎牧牛馬

馬三伊伐湌芥臣稟主

 

7월, 고구려 사람 <토오세土五稅>에게 명하여 우마(牛馬)의 목축을 가르치게 했다.

 

<마삼馬三>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芥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九月以一同爲西路軍主

 

9월, <일동一同>을 서로군주(西路軍主)로 삼았다.

 

 

이때 성모 <예생> 64세?, <실성>왕 44세, <보반>후 43세, <내류>후 41세,

<천성>후 36세?, <옹판> 45세, 태자 <눌지> 16세, <보해> 13세, <미해> 10세,

<호동> 27세, <숙단> 25세, <제상> 40세, ,<미사품> 56세,

<윤황> 42세, <阿老> 12세, <호물> 44세.

<천강> 48세, <담덕> 29세, ,<福壽> 12세,

<아신> 31세, <전지> 12세, <八須> 12세?, <인덕>48세?이다.

 


 

 

 

 

실성왕 2년(403) 흑토(黑兎)계묘

 

正月以未斯品爲舒弗邯委以軍國事

興石伊伐湌桂達稟主

 

정월, <미사품未斯品(347-411)>을 서불감(舒弗邯)으로 삼아

군국(軍國)의 정사를 맡겼다.

 

<흥석興石>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계달桂達>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三月野人自扶余至請交質爲和

內留生帝女龍明

 

3월에 야인(野人)이 부여(扶余)로부터 당도했는데

볼모를 교환하여 화친할 것을 청하였다.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용명龍明>을 낳았다.

 

 

五月聖母禮生夫人崩以太后禮葬于大西知陵

思氏生訥祇女喜思

加耶君慕訶卒女厚蟾立

 

5월, 성모(聖母) <예생保反>부인(夫人)이 붕(崩)하였다.

 

태후(太后)의 예(禮)로써 대서지릉(大西知陵)에 장사하였다.

 

<사씨思氏>가 <눌지訥祇>의 딸 <희사喜思>를 낳았다.

 

가야군(加耶君) <모가慕訶>가 졸(卒)하고 딸 <후섬厚蟾>이 섰다.

 

 

七月阿莘遣兵侵一牟城城主西今擊退之

皇夫伊伐湌桂臣稟主

 

7월, <아신阿莘>이 군사를 파견해 일모성(一牟城)을 침공하자

성주(城主) <서금西今>이 그를 격퇴하였다.

 

<황부皇夫>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계신桂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十月帝幸阿湌叔丹家與其妻英述宿

先是帝幸而有娠故帝數幸之 英述帝庶女也其母潤凰薦之也

 

10월에 제(帝)가 아찬(阿湌) <숙단叔丹>의 집에 행차하여

그 처 <영술英述>과 밤을 지냈다.

 

이에 앞서 제(帝)가 행(幸)하여 임신한 까닭에 제(帝)가 자주 행차하였다.

 

<영술英述>은 제(帝)의 서녀(庶女)였으니

그 어머니 <윤황潤凰>이 그를 천침(薦枕)시켰던 것이다.

 

<영술>은 <실성>과 <윤황>의 딸이다.

이때 <영술> 26세, <실성> 45세, <윤황> 43세이다.

 

 

 

 

 

실성왕 3년(404)청룡(靑龍)갑진

 

二月保反后生帝子靑淵帝親洗之

后引帝手使摩其尾頭曰 吾生子雖多未有如汝子之難也

帝曰殆汝老乎 后怒曰汝身鴻壯故此兒亦類汝而大故也

我何嘗老而然乎帝乃叩頭謝之

都利與丁期潛通生子丁都遂命爲丁期妻

帝與保反淸淵謁始祖靈廟履壽命

翬斗伊伐湌長閏稟主

 

2월, <보반保反>후(后)가 제(帝)의 아들 <청연靑淵>을 낳으니 제가 친히 그를 씻겼다.

 

후(后)가 제(帝)의 손을 이끌어 그 미두(尾頭)를 만지게 하며 말했다.

 

“내가 아이를 낳은 적이 비록 많으나 네 아들처럼 어려웠던 적은 아직 없었다.

 

제(帝)가 말했다.

 

“네가 거의 늙었음이련가?”

 

후(后)가 노하여 말했다.

 

“네 몸이 홍장(鴻壯)하므로 이 아이 역시 너를 닮아서 큰 까닭이다.

내가 어찌 일찍이 늙어서 그러한가?”

 

제(帝)가 이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도리都利>가 <정기丁期>와 몰래 사통하여 아들 <정도丁都>를 낳자

마침내 <정기丁期>의 처가 되도록 명했다.

 

제(帝)가 <보반保反> <청연靑淵>과 더불어

시조영묘(始祖靈廟)를 참배하고 수명을 빌었다.

 

<휘두翬斗>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장윤長閏>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四月英述生帝女能氏

 

4월에 <영술英述>이 제(帝)의 딸 <능씨能氏>를 낳았다.

 

 

五月初利生河期子足期

 

5월에 <초리初利>가 <하기河期>의 아들 <족기足期>를 낳았다.

 

 

七月 帝與三宮幸捺已訪神仙于洞中

兌茁伊伐湌初勿稟主

 

7월에 제(帝)가 삼궁(三宮)과 더불어 날이(捺已)에 행차하여

동굴안에서 신선(神仙)을 찾았다.

 

<태줄兌茁>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초물初勿>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以霍伊爲南桃法

宇花生好童女竹姬

 

8월에 <곽이霍伊>를 남도(南桃)의 법(法)으로 삼았다.

 

<우화宇花>가 <호동好童>의 딸 <죽희竹姬>를 낳았다.

 

 

十月行大場宴于南郊

 

10월에 남교(南郊)에서 대장연(大場宴)을 행했다.

 

 

 

 

 

실성왕 4년(405) 목사(木蛇)을사

 

 

正月進思娶慕訶王女訶德

奈己伊伐湌東炭稟主

 

정월, <진사進思>가 <모가慕訶>왕(王)의 딸 <가덕訶德>을 아내로 맞이했다.

 

<내기奈己>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동탄東炭>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四月野賊來功明活城不克而退帝率騎兵要擊獨山之南大破之殺獲三百餘級

 

4월, 야적(野賊)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제(帝)가 기병(騎兵)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에서 요격하여 그를 대파하니

3백 여급의 목을 베었다.

 

 

六月初老因産而薨帝以次女爲太子妃行吉鮑祠

 

6월에 <초로初老>가 산고(産苦)로 인해 훙(薨)하였다.

 

제(帝)가 차녀(次女) <아로阿老>로 태자비(太子妃)를 삼아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했다.

 

 

七月甘文須仲作亂命大勿討平之

㓒弗伊伐湌 世引稟主

 

7월에 감문(甘文)의 <수중須仲>이 난(亂)을 일으키자

<대물大勿>에게 명하여 그를 토평(討平)케 하였다.

 

<대물>은 <실성>의 이복 동생이다

 

<칠불㓒弗>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세인世引>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九月山花生訥祇子山近

大阿湌好童卒光明太后私奈勿而生驕傲荒色奈勿不能禁至是卒葬以海干禮

宮人陰凰生帝女山凰

 

9월에 <산화山花>가 <눌지訥祇>의 아들 <산근山近>을 낳았다.

 

대아찬(大阿湌) <호동好童>이 졸(卒)하였다.

 

<광명光明>태후(光明太后)가 <내물奈勿>을 사(私)하여 낳았는데

교만방자하고 황음호색하였으나 <내물奈勿>이 금제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르러 졸(卒)하자 해간(海干)의 예로 장사하였다.

 

궁인(宮人) <음황陰凰>이 제(帝)의 딸 <산황山凰>을 낳았다.

 

 

 

 

 

실성왕 5년(406)화마(火馬)병오

 

三月內留生帝女蜃樓

己公伊伐湌狒狒稟主

 

3월, <내류內留>가 제(帝)의 딸 <신루蜃樓>를 낳았다.

 

<기공己公>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비비狒狒>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七月國西蝗害穀

西今伊伐湌棠花稟主

 

7월에 나라의 서쪽지방에서 메뚜기 떼(蝗)가 곡식을 해쳤다.

 

<서금西今>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당화棠花>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十月京都地震上仙公兌薨七十三帝臨吊角干禮葬之

 

10월에 경도(京都)에 지진이 있었다.

 

상선(上仙) <공태公兌>가 훙(薨)하니 나이 73세였다.

 

제(帝)가 친림하여 조문하고 각간(角干)의 예로 장사 지냈다.

 

 

十一月無氷

以久味女沙沙爲宮人帝妹桑期生也

思氏生訥祇女菊思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구미久味>의 딸 <사사沙沙>를 궁인(宮人)으로 삼았다.

 

제(帝)의 여동생인 <상기桑期>가 낳았다.

 

<사씨思氏>가 <눌지訥祇>의 딸 <국사菊思>를 낳았다.

 

 

 

 

실성왕 6년(407) 적양(赤羊)정미

 

 

二月祭世神大西知陵

吉莫伊伐湌棠白稟主

 

2월 세신(世神) <대서지大西知>의 능(陵)에 제사를 지냈다.

 

 

<길막吉莫>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당백棠白>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野人侵骨火

 

3월, 야인(野人)이 골화(骨火)를 침략했다.

 

 

四月十日金官伊品卒子坐知立爾寧女福壽妻之

時福壽爲奈勿子長己妻生子纔

五月帝以其夙成能子命送之長己悲歌曰恨不作黃山江流入弁王宮中去

福壽曰我已悅汝三歲今爲金官后汝可賀而反淚我袖耶人多鄙其言

 

4월 10일에 금관(金官)의 <이품伊品>이 졸(卒)하고

 

아들 <좌지坐知>가 서자 <도녕道寧>의 딸 <복수福壽>로 그 처를 삼았다.

 

 

당시 <복수福壽>는 <내물奈勿>의 아들 <장기長己>의 처가 되어

 

아들 <재纔>를 낳았었다.

 

 

 

5월에 제(帝)가 그 숙성함과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보낼 것을 명하자

 

<장기長己>가 슬프게 노래(悲歌)하였다.

 

“황산강이 변왕의 궁중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

 

 

<복수福壽>가 말했다.

 

“내가 이미 너를 즐거워한지 삼년이다.

이제 금관후(金官后)가 되었으니 너는 축하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내 소매에 눈물을 흘리는가?”

 

사람들이 대부분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겼다.

 

 

<복수福壽>는 391년생으로 이때 17세이고 <장기>는 24세이다. 

 

 

 

五月 金官獻大布以謝婚

好童妻宇花生太子女庚惠阿老妬之奪其賜米

 

5월, 금관(金官)이 대포(大布)를 헌상함으로써 혼인을 사례하였다.

 

 

<호동好童>의 처 <우화宇花>가 태자(太子)의 딸 <경혜庚惠>를 낳으니

 

<아로阿老>가 질투하여 그 하사한 쌀을 빼앗았다.

 

 

六月野人非古等掠骨火民百人去

 

6월에 야인(野人) <비고非古>등이 골화(骨火)의 백성 100인을 겁략하여 끌고갔다.

 

 

 

七月保反生子帝洗之曰恐汝老傷勿復生也

保反曰愛汝而生子吾所最樂也觀此兒肖汝非凡可期以大宝也乃名期宝

雖然后數通河期或謂其子也

房期伊伐湌發有稟主

以暖凰女馬氏妻長己

 

7월에 <보반保反>이 아들을 낳으니 제(帝)가 아기를 씻기며

 

“네가 늙어서 상할까 두려우니 다시는 낳지마라.”하니

 

 

<보반保反>이 말하였다.

 

“너를 사랑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 가장 즐거운 바이다.

이 아이를 보니 너를 닮아 범상치 않으니 가히 대보(大寶)를 기대할 수 있겠다.”

 

 

이에 이름을 <기보期寶>라 지었다.

 

 

비록 그러하나 후(后)는 자주 <하기河期>와 통정하였기에

 

혹은 <하기河期>의 아들이라고도 이른다.

 

 

<방기房期>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발유發有>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난봉暖鳳>의 딸 <마씨馬氏>를 <장기長己>의 처로 하였다.

 

 

八月帝巡畿內問民艱苦

英述生子連叔時英述多私長己宝海垢音而自云帝子請米帛于骨官人多譏之

 

8월에 제(帝)가 기내(畿內)를 순수하며 백성들의 어려움과 괴로움(艱苦)을 물었다.

 

 

<영술英述>이 아들 <연숙連叔>을 낳았다.

 

 

때에 <영술英述>은 <장기長己>, <보해宝海>, <구음垢音>과 많이 사통했는데

 

스스로 제(帝)의 아들이라 말하며 골관(骨官)에 쌀과 비단을 청하니

사람들이 많이 그것을 나무랐다.

 

 

 

 

실성왕 7년(408)황원(黃猿)무신

 

 

二月帝欲伐野人于對馬島未斯品諫止之

 

2월에 제(帝)가 대마도(對馬島)에서 야인(野人)을 치고자하니

<미사품未斯品>이 간언하여 그를 만류했다.

 

 

四月福壽生子吹希奉獻謝帛

 

4월에 <복수福壽>가 아들 <취희吹希>를 낳자 감사의 비단을 봉헌하였다.

 

 

五月宮人陰凰通奴塞金生女塞凰美花通進思生子馬美王不知命各賜米

 

5월에 궁인(宮人) <음황陰凰>이 노(奴) <새금塞金>과 사통하여

딸 <새황塞凰>을 낳았다.

 

<미화美花>가 <진사進思>와 사통하여 아들 <마미馬美>를 낳았다.

 

왕은 알지 못하고 각각 쌀을 내리도록 명했다.

 

 

七月汗杞伊伐湌達介稟主

 

7월에 <한기汗杞>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달개達介>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八月大修天柱寺

宣秋大母薨年九十二丑徒立其祠

 

8월에 천주사(天柱寺)를 크게 중수하였다.

 

<선추宣秋>대모(大母)가 훙(薨)하니 나이가 92세였다.

 

축도(丑徒)가 그 사당을 세웠다.

 

 

 

 

실성왕 8년(409)토계(土鷄)기유

 

正月加耶婿君舍訶爲厚蟾求藥于阿瑟羅

 

정월, 가야(加耶)의 서군(婿君) <사가舍訶>가 <후섬厚蟾>을 위하여

아슬라(阿瑟羅)에 약을 구하였다.

 

 

三月送美人黃拿于句麗

 

3월에 미인(美人) <황나黃拿>를 고구려에 보냈다.

 

 

七月勿色伊伐湌桑期稟主

 

7월에 <물색勿色>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상기桑期>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八月大行嘉俳于南桃

內留生子中奴

坐知納野人傭女恤支沈蠱與福壽爭妬

帝命屈戶將伐之其臣元道諫以大義貶恤支黨于荷山島

 

8월에 남도(南桃)에서 크게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내류內留>가 아들 <중노中奴>를 낳았다.

 

<좌지坐知>가 야인(野人)의 용녀(傭女) <휼지恤支>와 <침고沈蠱>를 맞아들였는데

<복수福壽>와 서로 질투하며 싸웠다.

 

제(帝)가 <굴호屈戶>에게 명하여 장차 그를 치려하였는데,

그 신하인 <원도元道>가 대의(大義)로써 간하여

<휼지恤支>의 무리를 하산도(荷山島)로 내쫓았다.

 

 

十月以好勿爲比列城主

 

10월, <호물好勿>을 비열성주(比列城主)로 삼았다.

 

 

 

 

 

실성왕 9년(410)금구(金狗)경술

 

三月帝以訥祇弟美海爲阿湌使于野命內臣沙覽輔之 野王見而美之築臺以留之使其女侍之

 

3월, 제(帝)가 <눌지訥祇>의 아우 <미해美海>를 아찬(阿湌)으로 삼고

야(野)에 사신으로 보내며

내신(內臣) <사람沙覽>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도록 명했다.

 

이때 <미해> 18세, <사람沙覽> 29세, <인덕> 56세이다. 

 

야왕(野王)이 접견하고는 그를 아름답게 여겨서

 

대(臺)를 쌓아 그를 머물게 하고 그 딸로 하여금 시중들게 했다.

 

 

五月保反后生女成宝乃河期女也后使帝洗之曰

此兒鼻酷肖于汝雖幼可知爲汝女也 盖河期與帝同鼻故也

帝謂初利曰 五十之女生女使此老帝洗之恐人笑也

初利后之長女而 河期妻也 帝疑河期而言也

初利知之而恐不利于河期而佯若不知曰

雖母有血帝若不合安能生乎洗之宜也帝乃釋其猜曰 果則汝言可也

 

5월에 <보반保反>후(后)가 딸 <성보成宝>를 낳으니 곧 <하기河期>의 딸이었다.

 

후(后)가 제(帝)로 하여금 아기를 씻게 하며 말했다.

 

“이 아이의 코가 너를 빼닮았다. 비록 어리지만 가히 네 딸이라는 것을 알겠다.”

 

 

대개 <하기河期>가 제(帝)와 코가 똑같이 생긴 까닭이었다.

 

 

제(帝)가 <초리初利>에게 말했다.

 

“쉰 살의 여자가 딸을 낳아서

이 늙은 제(帝)로 하여금 씻기게 하니 남들이 웃을까 두렵다.”

 

 

<초리初利>는 후(后)의 장녀이고 <하기河期>의 처(妻)였는데

 

제(帝)가 <하기河期>를 의심해서 말한 것이다.

 

 

<초리初利>는 그것을 알고 <하기河期>에게 이롭지 않을까 두려워

짐짓 모르는체하며 말했다.

 

 

“비록 어머니가 핏덩이를 가졌으나 제(帝)가 만약 교합하지 않았다면

어찌 낳을 수 있겠습니까? 씻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帝)가 이에 그 의심을 풀고 말했다.

 

“과연 네 말이 맞다.”

 

 

이때 <실성> 52세, <보반> 51세, <초리> 32세, <하기> 36새이다.

 

 

七月阿老始生太子女烏士只帝與兩后至命太子洗兒賜酺骨門同年

三興伊伐湌芥臣稟主

 

7월에 <아로阿老>가 처음으로 태자의 딸 <오사지烏士只>를 낳았다.

 

제(帝)가 양 후(兩后)와 함께 이르러서 태자에게 아기를 씻도록 명하고

골문(骨門)의 동년(同年)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삼흥三興>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芥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九月進思訶德自加耶還

 

9월에 <진사進思>와 <가덕訶德>이 가야(加耶)로부터 돌아왔다.

 

 

十一月加耶王弟三光來朝以思氏女方思妻之

大雪賑穴居民百戶

 

11월 가야왕(加耶王)의 아우 <삼광三光>이 내조(來朝)하자

<사씨思氏>의 딸 <방사方思>를 그 처로 하였다.

 

큰 눈이 내렸다.

 

혈거민(穴居民) 100호(戶)를 구휼하였다.

 

 

 

 

 

 

 

실성왕 10년(411) 백시(白豕)신해

 

 

正月禁骨女私奔

霍伊伊伐湌初茁稟主

 

정월, 골문의 여자(骨女)들의 사분(私奔)을 금하였다.

 

<곽이霍伊>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초줄初茁>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二月帝巡西路問民疾苦

 

2월에 제(帝)가 서로(西路)를 순수하며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위문하였다.

 

 

 

四月以首老嫁舍訶

芥仁生訥祇子芥國

 

4월, <수로首老>를 <사가舍訶>에게 시집보냈다.

 

 

<개인芥仁>이 <눌지訥祇>의 아들 <개국芥國>을 낳았다.

 

 

 

六月福壽生女月希

 

6월, <복수福壽>가 딸 <월희月希>를 낳았다.

 

 

 

七月冶孝伊伐湌成勿稟主

 

7월, <야효冶孝>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성물成勿>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八月兵官大舍布世卒世西海人也從衛頭入秦有功久屬兵官以地微不能大用其才人皆惜之

 

8월, 병관대사(兵官大舍) <포세布世>가 졸(卒)하였다. 서해(西海) 사람이다.

 

위두(衛頭)를 따라 진(秦)에 들어가서 공(功)을 세웠으며,

오래도록 병관(兵官)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지체가 미천하여

그 재주를 크게 쓸 수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애석히 여겼다.

 

 

 

十月 舒弗邯未斯品卒乃儒禮尼師今之子也

恭儉好德不喜軍事爲相十年國家安定皆其力也以三生代之

 

10월, 서불감(舒弗邯) <미사품未斯品>이 졸(卒)하였다.

 

 

곧 <유례儒禮> 이사금(尼師今)의 아들이다.

 

 

공손검소하고 덕(德)을 좋아하며 군사(軍事)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相)이 된지 10년에 국가(國家)가 안정된 것은 모두 그 힘이었다.

 

 

<삼생三生>으로 그를 대신하였다.

 

 

 

 

 

실성왕 11년(412) 흑서(黑鼠)임자412)

 

 

二月以宝解質于句麗內臣武謁爲其輔而去

 

2월, <보해宝海>를 고구려에 인질로 하였는데,

내신(內臣) <무알武謁>을 그 보좌로 삼아서 떠나보냈다.

 

 

三月三光方思歸加耶

忽明卒仙檍大日大師

 

3월에 <삼광三光>과 <방사方思>가 가야(加耶)로 돌아갔다.

 

<홀명忽明>이 졸(卒)하고, <선억仙檍>이 대일대사(大日大師)가 되었다.

 

 

五月放骨女三十人爲宗臣妻賜宴鮑祠

以沙沙爲暖宮杜氏爲豆乙宮

 

5월, 골녀(骨女) 30인을 내보내 종신(宗臣)들의 처로 삼고

포사(鮑祠)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사사沙沙>로 난궁(暖宮)을 삼고, <두씨杜氏>로 두을궁(豆乙宮)을 삼았다.

 

 

七月三年城主宋己獻扶余器及其廚女

乳勝伊伐湌蘭月稟主

 

7월, 삼년성주(三年城主) <송기宋己>가 부여(扶余)의 그릇및 그 주녀(廚女)를 바쳤다.

 

<유승乳勝>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난월蘭月>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九月大閱于京都

內留生子方奴同日阿老生女通只

 

9월, 경도(京都)에서 크게 사열을 하였다.

 

<내류內留>가 아들 <방노方奴>를 낳았고

같은 날 <아로阿老>가 딸 <통지通只>를 낳았다.

 

 

 

 

실성왕 12년(413)수우(水牛)계축

 

 

三月流叔丹于阿瑟羅神山

舒弗邯三生卒帝母禮生之胞弟也以久味代之

 

3월에 <숙단叔丹>을 아슬라(阿瑟羅)의 신산(神山)에 유배시켰다.

 

서불감(舒弗邯) <삼생三生>이 졸(卒)하였다.

 

제(帝)의 어머니인 <예생禮生>의 포제(胞弟)였다.

 

<구미久味>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五月厚蟾生舍訶女蟾神

 

5월, <후섬厚蟾>이 <사가舍訶>의 딸 <섬신蟾臣>을 낳았다.

 

 

七月碧村伊伐湌况氏稟主

 

7월, <벽촌碧村>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황씨况氏>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八月瑞雲起狼山上望之如樓閣香風郁然久而不歇

神士二同等奏曰天仙降遊也抑帝德之致欵

帝以爲然禁伐狼山林曰福地可以幽遠神邃也

平壤州大橋新成

 

8월에 낭산(狼山) 꼭대기에 상서로운 구름(瑞雲)이 일어났는데

그를 바라보면 마치 누각과 같았고

향기로운 바람(香風)이 자욱이 퍼져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신사(神士) <이동二同>등이 상주하여 말했다.

 

“천선(天仙)이 내려와 노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덕(帝德)의 소치인가 합니다.”

 

제(帝)는 그럴듯이 여기고 낭산(狼山) 숲의 벌채를 금하며 말했다.

 

“복지(福地)이니 가히 그윽한 신수(神邃)로 삼을 것이다.”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가 새로 완성되었다.

 

 

九月帝幸南郊觀稼

 

9월에 제(帝)가 남교(南郊)에 행차하여 농작을 살폈다.

 

 

十一月叔丹反據阿瑟羅命好勿伐之好勿不從

 

11월에 <숙단叔丹>이 아슬라(阿瑟羅)를 거점(據)으로 반기(反)를 들었다.

 

<호물好勿>에게 그를 토벌하도록 명했으나 <호물好勿>은 따르지 않았다.

 

 

 

 

 

실성왕 13년(414)목호(木虎)갑인

 

 

三月阿老生子小美是爲慈悲聖王也

加耶女君厚蟾以其夫舍訶爲王

命房期伐叔丹不克

 

3월, <아로阿老>가 아들 <소미小美>를 낳았다.

 

이가 바로 <자비慈悲>성왕(聖王)이 된다.

 

가야(加耶)의 여군(女君) <후섬厚蟾>이 그 남편 <사가舍訶>를 왕(王)으로 삼았다.

 

<방기房期>에게 명하여 <숙단叔丹>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五月狼山仙臺成命築小城于其外

福壽通其宗臣南生子厚希

 

5월, 낭산(狼山)에 선대(仙臺)가 낙성되었다.

 

그 바깥쪽에 작은 성(小城)을 쌓았다.

 

<복수福壽>가 그 종신(宗臣) <남南>과 사통하여 아들 <후희厚希>를 낳았다.

 

 

七月帝與沙沙幸阿瑟羅遇風而還

玄忍伊伐湌韋氏稟主

 

7월에 제(帝)가 <사사沙沙>와 더불어 아슬라(阿瑟羅)에 행차하였는데

풍랑(風)을 만나 되돌아왔다.

 

<현인玄忍>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위씨韋氏>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실성왕 14년(415)청토(靑兎)을묘

 

 

二月帝命太子訥祇出視北路

 

2월, 제(帝)가 태자 <눌지訥祇>에게 명하여 나가서 북로(北路)를 시찰토록 하였다.

 

 

 

三月帝幸阿老于仙宮 先是帝累欲幸之 命阿老爲枕主

阿老不肯之乃逐太子于外而使守仙宮 帝日至浴于仙池湯殿命阿老洗之

阿老知不免請還太子而受幸 自是寵隆出入同座人指之曰仙上宮

 

3월에 제(帝)가 선궁(仙宮)에서 <아로阿老>에게 행(幸)하였다.

 

이에 앞서 제(帝)는 누차 그를 행(幸)하려 했었다.

 

 

<아로阿老>에게 명하여 침주(枕主)가 될 것을 명했으나

 

<아로阿老>가 그를 따르려하지 않자 마침내 태자를 바깥으로 내쫓고서

선궁(仙宮)을 지키도록 하였다.

 

 

제(帝)가 하루는 선궁에 와서 선지(仙池)의 탕전(湯殿)에서 목욕하며

 

<아로阿老>에게 씻도록 명했다.

 

 

<아로阿老>는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태자의 귀환을 청하고서 행(幸)을 받았다.

 

이로부터 총애가 융성하여 동좌(同座)하여 출입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상궁(仙上宮)이라 하였다.

 

 

<아로阿老>는 <실성>과 <내류>의 딸이다.

이때 <실성> 57세, <내류> 53세, <아로> 25세, <눌지> 29세이다.

 

 

四月下宮生曷奴河期女也 河期以帝異父弟執骨政通于上下宮

將士廷吏多出其門威名漸盛 神士二同 諫削之帝優柔而不能斷

帝以房期無功召還房期懼罪遂降於叔丹

 

4월에 하궁(下宮)이 <갈노曷奴>를 낳으니 <하기河期>의 딸이었다.

 

<하기河期>는 제(帝)의 이부제(異父弟)로써 골정(骨政)을 휘어잡고

상하궁(上下宮)과 통하였다.

 

대서지(예생) - 실성(359-417)

흘해(예생) - 하기(375 -?) 

 

장사(將士)와 정리(廷吏)가 그 문중에서 많이 배출되어

위명(威名)이 점차 성(盛)해졌다.

 

신사(神士) <이동二同>이 그를 삭탈할 것을 간하였으나

제(弟)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제(帝)는 <방기房期>가 공적이 없자 소환했는데

<방기房期>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숙단叔丹>에게 투항했다.

 

 

<숙단(378- )>은 <호동(376-405)>의 동생이다.

<숙단>과 <호동>은 <내물>과 <광명>의 아들이다.

<호동>이 405년에 감물에서 <실성>에게 반기를 들자 <호동>은 처형당한다.

<호동>의 동생 <숙단>이 <호동>을 이어 계속하여 반란을 도모하자

<실성>은 415년에 <숙단>을 아슬라로 유배를 보낸다.

 

 

 

五月帝與阿老幸狼山召見塞金之徒賞之

 

5월, 제(帝)가 <아로阿老>와 함께 낭산(狼山)에 행차하여

<새금塞金>의 무리를 불러 보고는 그에게 상을 내렸다.

 

 

七月大閱於穴城原

方思生三光女思忠

三達伊伐湌公厥稟主

試射士三百人于金城南門 帝與阿老設帳于門樓上而觀之

選其魁者二十八人號曰星衛引見于帝前阿老請于帝曰此輩少壯可爲我臣

帝許之阿老皆親酌賜酒曰 爾等皆我臣也我當食爾等乃以匕箸與之曰

此吾口澤所存也每食思我可也

星衛感泣而退皆以爲我當作仙上宮私臣

 

7월에 혈성원(穴城原)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방사方思>가 <삼광三光>의 딸 <사충思忠>을 낳았다.

 

<삼달三達>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공궐公厥>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금성(金城) 남문(南門)에서 사사(射士) 300인을 시험하였다.

 

제(帝)는 <아로阿老>와 더불어 문루(門樓) 위에 장막을 설치하고 그를 구경하였다.

 

그 장원이 된 자  28인을 뽑아 성위(星衛)라 호칭(號)하고 제(帝) 앞에 인견시키자

 

<아로阿老>가 제에게 청하여 말했다.

 

“이 무리들은 젊고 장하니 내 신하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제(帝)가 그를 허락하자

 

<아로阿老>는 모두에게 친히 잔을 부어 술을 하사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내 신하이니 내 마땅히 너희들을 먹일 것이다.”

 

이에 그들에게 수저와 저(匕箸)를 주며 말했다.

 

“이는 내 입이 닿아 광택이 남아있는 것들이다.

먹을 때마다 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위(星衛)들은 감격하여 목메어 울면서 물러갔는데 모두들

 

‘나는 마땅히 선상궁(仙上宮)의 사신(私臣)이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八月野人寇風島級湌進思擊破之

珥利女都妹妻王子鬲仲

 

8월에 야인(野人)이 풍도(風島)를 노략질하자

급찬(級湌) <진사進思>가 그를 격파하였다.

 

<도리都利>의 딸 <도매都妹>를 왕자 <격중鬲中>의 처로 삼았다.

 

 

九月以布兒爲歌仙乃暖皇舞奴也

其徒順實美而善吹笛居明活山時以塞金之徒爲馬徒順實之徒爲羊徒

首老生舍訶子道光

以世彦爲宝海輔臣召武謁歸

 

9월, <포아布兒>를 가선(歌仙)으로 삼았는데 곧 <난황暖皇>의 무노(舞奴)였다.

 

그 무리(徒)인 <순실順實(396-448)>은 아름답고 피리를 잘 불었는데

명활산(明活山)에서 살았다.

 

때에 <새금塞金>의 무리(徒)는 마도(馬徒)가 되고,

<순실順實>의 무리(徒)는 양도(羊徒)가 되었다.

 

<수로首老>가 <사가舍訶>의 딸 <도광道光>을 낳았다.

 

<세언世彦>을 <보해宝海>의 보신(輔臣)으로 삼고

<무알武謁>을 소환하여 돌아오게 했다.

 

 

十月太子訥祇會見麗將沛夏于母山夏留之不送

 

10월에 태자 <눌지訥祇>가 모산(母山)에서 고구려 장수 <패하沛夏>와 회견하였다.

 

<패하沛夏>는 그를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十一月帝與阿老謁聖母祠

內留生女曷婁

 

11월에 제(帝)가 <아로阿老>와 함께 성모사(聖母祠)를 참배하였다.

 

<내류內留>가 딸 <갈루曷婁>를 낳았다.

 

 

 

 

 

실성왕 15년(416) 화룡(火龍)병진

 

 

正月 會州干 于京都

連弗伊伐湌枕臣稟主

 

정월, 경도(京都)에 주간(州干)들을 모이게 했다.

 

<연불連弗>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침신枕臣>을 품주(稟主)로 삼았다.

 

 

三月以阿老爲暖宮 沙沙爲下宮 內留爲上宮 保反爲天宮 斗氏爲別神宮

是爲五宮各置宮人八人

東海人得大魚有雙角載以大車二輛獻于帝群臣以爲祥大饗于南桃 識者以爲不祥而避之

 

3월에 <아로阿老>로 난궁(暖宮)을 삼고, <사사沙沙>로 하궁(下宮)을 삼고,

<내류內留>로 상궁(上宮)을 삼으며, <보반保反>으로 천궁(天宮)을 삼고,

<두씨杜氏>로 별신궁(別神宮)을 삼아서 5궁(五宮)에 각각 궁인(宮人) 8인을 두었다.

 

동해(東海) 사람이 큰 물고기(大魚)를 잡았는데 쌍으로 난 뿔이 있었다.

 

두 대의 큰 수레로 실어서 제(帝)에게 헌상했다.

 

군신(群臣)들이 상서라 하며 남도(南道)에서 크게 향연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은 상서롭지 않다고 하면서 그를 피하였다.

 

 

四月阿老生帝子比太瑞氣滿室帝洗兒賜酺

 

4월에 <아로阿老>가 제(帝)의 아들 <비태比太>를 낳으니

서기(瑞氣)가 산실에 가득 찼다.

 

제(帝)가 아기를 씻기고 회식(酺)을 내렸다.

 

 

五月大雨水吐含山崩 泉水湧出三丈大西知陵所也 帝禱于靈廟聖祠

堤上女靑我奔順實生子登欣

訥祇與沛夏女沛氏歸比烈城城主好勿奉之爲君

納尹勅爲宮人乃河期嬖姬也

 

5월, 큰 빗물에 토함산(吐含山)이 무너지고

<대서지大西知>의 능소(陵所)에서 샘물이 세길(三丈)이나 솟구쳤다.

 

제(帝)가 영묘(靈廟)와 성사(聖祠)에 기도하였다.

 

<제상堤上>의 딸 <청아靑我>가 <순실順實>에게 달아나서

아들 <등흔登欣(416-483)>을 낳았다.

 

<눌지訥祇>가 <패하沛夏>의 딸 <패씨(沛氏>와 더불어 비열성(比烈城)으로 돌아오자

성주(城主)인 <호물好勿>이 그를 받들어서 임금(君)으로 삼았다.

 

<윤칙尹勅>을 맞아들여 궁인(宮人)으로 삼으니 곧 <하기河期>의 폐희(嬖姬)였다.

 

 

七月阿瑟羅諸州皆附好勿

屈戶伊伐湌達留稟主

帝問誰可伐好勿者乎河期薦以垢音

沛夏遣其弟沛世將兵一千助好勿南侵

 

7월, 아슬라(阿瑟羅)의 여러 주(州)가 모두 <호물好勿>에게 붙었다.

 

<호물>은 <기림>의 동생인 <호임>과 <휴례>의 아들이다.

<호물>은 <내물>의 포제이고 <숙단>은 <내물>의 아들이다.

<호물>과 <숙단>이 <내물>이 사촌동생인 <실성>에게 내어준 왕위를

<내물>의 아들인 <눌지>에게 되돌려 주려고 반기를 든 것이다.

 

<굴호屈戶>를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달류達留>를 품주(稟主)로 하였다.

 

제(帝)가

 

“<호물好勿>을 가히 토벌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묻자

 

<하기河期>가 <구음垢音>을 천거하였다.

 

<패하沛夏>가 그 아우 <패세沛世>를 보내 군사 1천을 거느리고서

<호물好勿>의 남침(南侵)을 돕게했다.

 

 

九月垢音降于好勿西路亦多附之

 

9월에 <구음垢音>이 <호물好勿>에게 항복했다.

 

서로(西路) 역시 많이 그에게 붙었다.

 

 

十月以屈戶爲正義軍主命伐好勿

二同伊伐湌福戶稟主

 

10월, <굴호屈戶>를 정의군주(正義軍主)로 삼아 <호물好勿>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이동二同>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복호福戶>를 품주(稟主)로 삼았다.

 

 

十一月囚雍己河期等二十七人于北川

 

11월, <옹기雍己>, <하기河期>등 27인을 북천(北川)에 가두었다.

 

 

十二月大雪屈戶軍多凍傷不能前

 

12월, 큰 눈이 내려 <굴호屈戶>의 군사들이 허다히 동상에 걸려 전진할 수가 없었다.


 

 

 

 

실성왕 16년(417) 적사(赤蛇)정사

 

正月京都大亂訛設相傳逃亡者多

釋河期等以爲京師軍主所頭上

武謁伊伐湌熊達稟主

 

정월, 경도(京都)가 크게 혼란해져서 서로 와설(訛說)을 전하며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하기河期>등을 석방하여 경사군주(京師軍主)로 삼으니 두상(頭上)인 바였다. 

 

<무알武謁>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웅달熊達>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三月屈戶戰敗死帝大懼請和

 

3월에 <굴호屈戶>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자

제(帝)는 크게 두려워하며 화해를 청하였다.

 

 

四月垢音叔丹等進圍京師命河期禦之

西路軍主一同戰敗死

 

4월에 <구음垢音> <숙단叔丹>등이 진격하여 경사(京師)를 포위하자

<하기河期>에게 명하여 그를 막게했다.

 

서로군주(西路軍主) <일동一同>이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五月伊湌奈己奉保反后密詔與河期進思等開門納太子于城中

帝知天命已去與沙沙寵花等出奔狼山

太子入御大宮出榜安民曰 殺伐非吾祖宗遺法也

今帝背恩先德不遵聖母黜我質弟爲天所厭乃復其初凡我臣民勿驚勿駭各安其業

帝使享叔請和曰 可得南路以終天年

太子曰神器不可私議有天命者守之

而已帝乃脫圍欲逃而左右無可爲者侍妾多越城 而走至重五日糧盡 帝謂沙沙等曰

汝等年少可事新主 朕當自處以贖之 乃登門樓墮之左右號哭

好原等乃入城中盡搜帝寶及沙沙等獻于太子

保反后乃命太子卽祚大宮天大雨暴風群臣以爲先帝之崇乃使阿老聖命祭先帝于豆乙

宮命好原收帝魄于狼山七日流久味等十五人于阿瑟羅神山以河期爲摠行匝判大赦國中

 

5월에 이찬(伊湌) <내기奈己>가 <보반保反>후(后)의 밀조(密詔)를 받들어

<하기河期> <진사進思>등과 더불어 성문을 열고 태자를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제(帝)는 천명(天命)이 이미 떠났음을 알고 <사사沙沙> <총화寵花>등과 함께

낭산(狼山)으로 달아났다.

 

태자가 대궁(大宮)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방(榜)을 내걸어 백성을 안심시켜 말했다.

 

“살벌(殺伐)은 우리 조종(祖宗)의 유법이 아니다.

금제(今帝)가 선제의 은덕을 배반하고 성모(聖母)에게 준명치 않으며,

나를 쫓아내고 아우를 인질로 하여 하늘이 싫어한 바이니,

곧 그 처음대로 복귀하리라.

무릇 우리 신민(臣民)들은 놀라지 말고 동요하지 말며,

각자 그 생업(生業)에 편안히 종사하라.”

 

제(帝)가 <향숙享叔>을 사신으로 보내 화해를 청하며 말했다.

 

“남로(南路)를 얻을 수 있다면 가히 천수(天年)를 마치리라.”

 

태자가 말했다.

 

“신기대보(神器)는 사사로이 논의할 수 없으니

천명(天命)을 가진 자가 그것을 지킬 따름이다.”

 

제(帝)는 이에 포위를 벗어나 달아나고자 했으나 좌우에 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시첩들은 허다히 성을 넘어서 달아났다.

 

5월 5일(重五日)에 이르러 양식이 다하자 제(帝)는 <사사沙沙>등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이가 젊으니 가히 신주(神主)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마땅히 자처(自處)함으로써 그를 속죄하리라.”

 

마침내 문루에 올라가서 아래로 떨어지니 좌우가 목놓아 호곡(號哭)하였다.

 

<호원好原>등이 이에 성안으로 들어가서

제(帝)의 보물및 <사사沙沙>등을 남김없이 찾아내어 태자에게 바쳤다.

 

<보반保反>후(后)가 이에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대궁(大宮)에서 즉위하도록 했다.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지고 폭풍이 불자 군신들은 선제(先帝)의 빌미(祟)라고 했다.

 

이에 <아로阿老>와 <성명聖明>으로 하여금

두을궁(豆乙宮)에서 선제(先帝)를 제사하게 했다.

 

<호원好原>에게 명하여 낭산(狼山)에서 제(帝)의 시신(魄)을 수습하게 했다.

 

7일에 <구미久味>등 15인을 아슬라(阿瑟羅)의 신산(神山)으로 유배시켰다.

 

<하기河期>를 총행잡판(摠行匝判)으로 삼고 나라 안에 대사령을 내렸다.

 

 

九月葬帝于狼山 先是河期怨帝曝帝魄于仙臺之庭以爲亂軍偸去

時聖明得寵有娠夢見帝在仙臺木奴花下而泣

聖明乃泣訴于王曰 吾母亦以實聖之妃受幸于聖父而生我 兄何 怨姊而不葬叔乎

恐有不祥于吾腹兒 盖阿老不能自訴故使之言也

王乃搜木奴花下得帝魄玉體不變如初 乃具棺槨備禮而葬之賞收魄老嫗母子以布穀

帝身長七尺五寸腰圍甚 大一夜能御五宮

少時明達有遠識能攬衆心及爲尼昑好色多寵猜忌近臣王子背恩聖母以至不能令終惜哉

 

9월에 제(帝)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이에 앞서 <하기河期>는 제(帝)를 원망하여 제(帝)의 백체(魄)를

선대(仙臺)의 뜰에 내버려두었는데 난군(亂軍)들이 훔쳐갔다고 했다.

 

당시에 <성명聖明>이 총애를 얻어 임신을 했었는데

꿈에 제(帝)가 선대(仙臺)의 목노화(木奴花) 아래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성명聖明>이 이에 울면서 왕에게 호소하여 말했다.

 

“우리 어머니 역시 <실성實聖>의 비(妃)로서 성부(聖父)에게 행(幸)을 받아서

나를 낳았습니다.

형(兄)은 어찌 어머니를 원망하여 숙부(叔)를 장사지내지 않습니까?

내 뱃속의 아이에게 상서롭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대개 <아로阿老>가 스스로 호소할 수 없는 까닭에 그를 시켜 한 말이었다.

 

왕이 이에 목노화(木奴花) 아래를 찾게 하여 제(帝)의 백체(魄)를 얻을 수 있었는데

옥체(玉體)는 처음과 똑같이 변함이 없었다.

 

이에 관곽을 갖추고 예(禮)를 차려서 그를 장사지내고

백체를 거둔 노파 모자(母子)에게 포곡(布穀)으로 상을 내렸다.

 

제(帝)는 신장(身長)이 7척 5촌이고 허리 둘레가 심히 커서

하루 밤에 능히 5궁(五宮)을 거느릴 수 있었다.

 

어려서는 사리명철하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遠識)이 있어서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으나,

닛금(尼昑)이 되기에 이르자 호색다총(好色多寵)하며

근신(近臣)과 왕자(王子)들을 시기하고

성모(聖母)에게 배은망덕(背恩)함으로써

명대로 살다가 마칠(令終)수 없기에 이르렀다.

 

애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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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