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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3 첨해(沾解)이사금기

 

 

 

첨해왕 원년(A.D.310)

 

正月 行白馬祭 于桃山

阿爾兮后生先今女光元公主 上洗之

元昌伊伐飡 螺仁稟主

 

정월 도산(桃山)에서 백마제(白馬=庚午)를 행하였다.


<아이혜阿爾兮>후가 선금(先今){조분}의 딸 <광원光元>공주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원창元昌>을 이벌찬, <나인螺仁>을 품주로 하였다.

 

 

구도(운모) - 옥모(238-311)

골정(옥모) - 조분(254-329 11대왕 재위 292-309)

                  홍모(261- )

내해(옥모) - 첨해(274-324. 12대왕 재위310-324)

내해(홍모) - 아이혜(286-362)

조분(아이혜) - 광원(310-392)


 

三月 行奈解大祭

 

3월 내해대제(奈解大祭)를 행하였다.


 

五月 行先今大祭

 

5월 선금대제(先今大祭)를 행하였다.


<조분>이 사망하지 않았음에도 제사를 지냈다.


 

七月 謁祖廟

封骨正太子爲世神葛文王

白尺伊伐飡 學氏稟主

 

7월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골정骨正>태자를 세신(世神)갈문왕으로 봉(奉)하였다.

 


 

첨해왕 원년 7월 왕이 시조묘를 참배하였다.

그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골정骨正(207-285)>은 <벌휴>의 아들로 <조분(254-329)>의 아버지다.

 


<백척白尺>을 이벌찬, <학씨學氏>{내해의 딸}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玉帽太后有疾 中外行禱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옥모玉帽>태후가 병이 있어, 나라안팎에서 기도하였다.


 

十月 行月歌 于桃山 以慰太后

 

10월 도산(桃山)에서 월가(月歌)를 행하여 태후를 위로하였다.


 

十一月 仲解太子奉太后 入海宅

 

11월 <중해仲解>태자가 태후를 모시고, 해택으로 들어갔다.

 

 

이때 <옥모>태후 73세, <조분> 57세, <홍모> 55세, <술례> 55세,

첨해왕 37세, <아이혜> 25세, <명원> 4세, <광원> 1세, <중해> 태자 31세,

<우로> 34세, <미추> 19세이다.

 

<홍모>는 <옥모>의 딸이고 <아이혜>는 <홍모>의딸이다.

<술례>는 <미추>의 어머니다.


 

 

 

첨해왕 2년(A.D.311)

 

二年 正月 行白羊祭

阿道伊伐飡 宝太稟主

伊伐飡長萱 命參國政

 

정월 백양제(白羊=辛未)를 행하였다.


<아도阿道>{제상의 祖父}를 이벌찬으로, <보태宝太>를 품주로 삼았다.


이벌찬 <장훤長萱>에게 국정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三月 玉帽太后崩 于海宅 返葬于奈解陵 分骨于骨正陵

初足達妻雲帽 私通于仇道 而生后 異香滿室 夢見 玉耶生金花 故名玉帽

及長 美而善歌舞 十六列 于歌仙 行月歌

衆仙慕之 骨正太子引歸于宅 而幸之有娠

玉帽請爲妻 而骨微不得 欲自焚而死

伐帝乃命 骨正行吉 生助賁帝

又事 奈帝生尼今 尊爲太后 力扶召文遺臣 時人以后爲馬精 春秋七十四

命連檍等使 句麗結和

 

3월 <옥모玉帽>태후가 해택(海宅)에서 죽어 내해릉(奈解陵)에 장례를 치르고,

되돌려 골정릉(骨正陵)에 분골(分骨)하였다.

 

처음에 <족달足達>의 처 <운모雲帽>는 <구도仇道>와 사통하여 후(后)를 낳았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에서 옥야(玉耶)가 금화(金花)를 낳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연유로 <옥모玉帽>라 이름 지었다.

 

성장하면서 아름답고 가무(歌舞)에 능하여

나이 열여섯에 가선(歌仙)으로 나아가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선(仙)의 무리들이 <옥모>를 흠모하였는데,

<골정>태자가 집으로 데리고 가서 행(幸)하여 임신을 하였다.

 

<옥모>가 처로 삼아주기를 청하였으나, 신분이 미미하여 이루지 못하여,

스스로 불에 타서 죽으려 하였다.

 

벌제(伐帝){벌휴}가 이에 골정에게 결혼을 명하였고 조분제(助賁帝)를 낳았다.

 

또 내해제(奈解帝)를 섬겨 니금(尼今){첨해}을 낳았다.

 

태후(太后)로 존중되어 소문(召文)의 유신(遺臣)들을 힘써 도왔다.

 

당시 사람들이 후를 마정(馬精)이라 하였다.

 

춘추 74세였다.


 

<연억連檍>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화친을 맺도록 명하였다.


 

첨해왕 2년

정월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五月 修壤井

 

5월 양정(壤井)을 수리하였다.


 

七月 羘公伊伐飡 尺仁稟主

 

7월 <장공羘公>을 이벌찬, <척인尺仁>을 품주로 하였다.


 

 

 

 

첨해왕 3년(A.D.312)

 

正月 馬侅伊伐飡 冬潛稟主

 

정월 <마해馬侅>를 이벌찬, <동잠冬潛>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作南堂

連白伊伐飡 良夫大書 黃音稟主

 

7월 남당(南堂)을 지었다.


<연백連白>을 이벌찬, <양부良夫>를 대서, <황음黃音>을 품주로 하였다.


 

첨해왕 3년

7월 남당〈남당을 혹은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양부를 이찬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왕 4년(A.D.313)

 

四年 正月 謁白伊伐飡 秀皇稟主

行玄鳥祭

加耶君孝道禪于其女河理智 迎宣威爲婿

 

정월 <알백謁白>을 이벌찬, <수황秀皇>을 품주로 하였다.


현조제(玄鳥=癸酉)를 행하였다.


가야(加耶)의 왕 <효도孝道>가 그의 딸 <하리지河理智>에게 선위하고,

<선위宣威>를 맞이하여 사위로 삼았다.



四月 倭獻土物 其太子求婚

于老戱之 虜汝王爲鹽奴矣 何可婚乎使怒歸和絶

 

4월 왜가 토산물을 바치고, 그 태자를 위하여 구혼을 하였다.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너의 왕을 사로잡아 염전의 노예로 만들겠다.

어찌하여 혼사가 가당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화친이 끊어졌다.


 

첨해왕 3년(A.D.249)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이 섰다.(AD 310) 

그는 내해왕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우로각간이다.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왕 7년 계유년(A.D.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관(館)에 와 있었다.

<우로于老>가 주재하여 손님과 농담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의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너의 왕비는 취사부로 만들겠다.”

라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쳤다.

대왕이 유촌(柚村)에 나가 있었는데,

<우로>가 말하기를

올해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맡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로>가 마침내 왜군(倭軍)을 만나 설명하여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군사를 일으켜 일이 여기에 이르렀나 봅니다."라고 하였다.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붙잡아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올려 놓고 불을 질러 죽이고 가버렸다.

<삼국사기 우로(于老)열전>


<우로>는 <내해>의 아들로 <첨해>보다 3살 어린  배다른 동생이고

<아이혜>왕후의 오빠로 <흘해>의 아버지다.

미추왕 7년(AD331)에 죽었다.

 

골정(옥모) - 조분(254-329)

골정(옥모) - 홍모(256?- )

내해(옥모) - 첨해(274-324)

내해(홍모) - 우로(277-331)

내해(홍모) - 아이혜(286-362)

 


 

七月 碧隆伊伐飡 環氏稟主

阿爾兮后生帝女旱元 帝洗之

乙弗立子釗爲嗣 南侵帶方

 

7월 <벽융碧隆>을 이벌찬, <환씨環氏>{吳나라 여자}를 품주로 하였다.


<아이혜阿爾兮>후가 왕의 딸 <한원旱元>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을불乙弗>{미천왕}이 아들 <쇠釗>{고국원왕}를 후계자로 하고,

남쪽 대방(帶方)을 공격하였다.


 

미천왕 15년(A.D.314)

정월 왕자(王子) 사유(王子)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9월 남쪽 대방(帶方)을 침공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대제 15년{AD314}갑술,

태자 <사유斯由>를 황자로 봉하고 옥책과 금인을 주었다.

<선방>이 <조문> 등을 보내 대방을 쳐서 잠성(岑城)・제해(提奚) 두 성을 빼앗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바쳤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1년의 기년차이가 있다.


 

 

 

첨해왕 5년(A.D.314)

 

正月 受朝南堂

尙尺伊伐飡 檍氏稟主

 

정월 남당(南堂)에서 조회를 받았다.


<상척尙尺>을 이벌찬, <억씨檍氏>를 품주로 하였다.


 

五月 以夫道爲物藏庫阿干 夫道漢祇人也 工書算而貧不諂 人薛忠奏 其可用 而徵之

 

5월 <부도夫道>를 물장고(物藏庫) 아간(阿干)으로 삼았다.

 

부도는 한지(漢祇)인이다.

 

서(書), 산(算)에 뛰어났으며, 가난하였으나 아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설충薛忠>에게 쓸만한 인재임을 아뢰어, 그를 불러들였다.


 

七月 薛忠伊伐飡 宣骨稟主

 

7월 <설충薛忠>을 이벌찬, <선골宣骨>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첨해왕 5년

정월 처음으로 남당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한지부 사람 부도란 자는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첨하는 일이 없고 글씨와 산수에 능하여 당시에 명성이 높았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으로 임명하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업무를 맡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왕 6년(A.D.315)

 

正月 江盧伊伐飡 尙氏稟主

 

정월 <강노江盧>를 이벌찬, <상씨尙氏>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乙弗大破 末曷玄菟城

 

2월 <을불乙弗>{미천왕}이 말갈(末曷) 현토(玄菟)성을 크게 깨뜨렸다.


 

미천왕 16년(A.D.315)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대제 16년{AD315}을해,

춘2월, <방부>・<송거>・<고식> 등이 현도성을 쳐서 빼앗고,

수장인 <왕애王皚> 등 30인의 목을 베고, 보화도 모조리 빼앗았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壤井祭)를 행하였다.


 

七月 連檍伊伐飡 康氏稟主

 

7월 <연억連檍>을 이벌찬, <강씨康氏>를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첨해왕 7년(A.D.316)

 

正月 船孝伊伐飡 貝姬稟主

 

정월 <선효船孝>를 이벌찬, <패희貝姬>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東神池有龍出 與宮女相合

金城南壇査(본문은 의 아래 )王 久臥忽起 命中外行禱

阿后生女三元 帝洗之 沾帝嬖臣裙白烝而生也

 

4월 동신지(東神池)에서 용이 나타나 궁녀와 상합(相合)하였다.

 

금성의 남쪽 제단의 독두나무가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나라안팎에서 빌도록 명하였다.


용은 <구도>의 아들인 <미추>를, 궁녀는 <구도>의 딸 <옥모>의 손녀인 <아이혜>를,

금성(金城) 남단(南壇) 두왕(梪王)은 김씨의 수왕(樹王)을 말하는 것으로

김씨 부흥의 징조를 말하는 것이다.


 

아후(阿后){아이혜}가 딸 <삼원三元>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첨제(沾帝){첨해}의 폐신(嬖臣) <군백裙白>이 증(烝)하여 낳았다.


 

七月 祈雨於祖廟及五岳 自五月不雨無穀 民心洶洶

大農師味鄒暴露呼天 旬日而雨

納長伊伐飡 紺姬稟主

 

7월 조상의 사당과 오악(五岳)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5월부터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이 여물지 않아 민심이 흉흉하였다.

 

대농사(大農師) <미추味鄒>가 비바람이 드러나도록 하늘을 부르니,

열흘 후에 비가 왔다.


 

첨해왕 7년

4월 대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 남쪽에서는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조묘와 명산에 제사지내고 기원하였다.

곧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이 생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味鄒>가 민심을 수습하여 가는 과정을 말한다.


<납장納長>을 이벌찬, <감희紺姬>를 품주로 하였다.


 

九月 年饑多盜 行旅多被掠 命仲解太子 巡視恤民

 

9월 이해에 굶주려 도둑이 많았다.

 

여행을 하는 자 대부분이 약탈을 당하였다.

 

<중해仲解> 태자에게 명하여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였다.


 

 

 

 

첨해왕 8년(A.D.317)

 

正月 白忠伊伐飡

 

정월 <백충白忠>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七月 碩烏伊伐飡 添狗稟主

奈仁生乞况子奈宗

 

7월 <석오碩烏>를 이벌찬, <칠구柒狗>를 품주로 하였다.


<내인奈仁>이 <걸황乞况>의 아들 <내종奈宗>을 낳았다.


 

 

 

첨해왕 9년(A.D.318)

 

正月 邊骨伊伐 康安稟主

 

정월 <변골邊骨>을 이벌찬, <강안康安>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末昕伊伐飡 乳帽稟主

 

7월 <말흔末昕>을 이벌찬으로, <유모乳帽>를 품주로 삼았다.


 

九月 夫余來侵 級伐飡翊宗逆戰于槐谷西 死之 命厚葬 而錄其子女宗尹仁

加耶老君孝道殂 命車理往

 

9월 부여(夫余)가 침범하자 급벌찬(級伐飡) <익종翊宗>이

귀곡(槐谷)의 서쪽에서 역전(逆戰)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명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익종翊宗>의 자녀 <석종石宗>, <석윤石尹>, <석인石仁>을 기록하였다.


가야(加耶)의 노군(老君) <효도孝道>가 죽었다.

 

<차리車理>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十月 夫余又侵烽山城 不克而退

 

10월 부여가 또 봉산성(烽山城)을 침입하여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첨해왕 9년

9월 백제가 침범하자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0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이왕 22년

9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쳤다.

신라의 군사와 괴곡(槐谷) 서쪽에서 싸워 이기고 그 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10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318년은 백제 비류왕 15년이다.


 

 

 

첨해왕 10년(A.D.319)

 

正月 老伊伐飡 淡乙稟主

 

정월 <휭노遤老>를 이벌찬, <담을淡乙>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東海出大魚三頭 長各三丈 高十二尺

命祭日月池及戒邊等諸神

阿后生女道明

碧弘生味鄒女碧芝

 

3월 동해(東海)에서 큰 물고기 3마리가 나타났는데,

길이가 각각 3장(丈)이고 높이가 12척(尺)이었다.

 

일월지(日月池)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여,

주변의 제신(諸神)등 에게 미침을 경계하였다.


 

첨해왕 10년

3월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다.

그 길이는 세 발, 폭은 한 길 두 자였다.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후(阿后)가 딸 <도명道明>을 낳았다.


<벽홍碧弘>이 <미추味鄒>의 딸 <벽지碧芝>를 낳았다.


 

七月 玄光伊伐飡 吉雲稟主

 

7월 <현광玄光>을 이벌찬, <길운吉雲>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燕伐乙弗 乙弗稱臣于燕 崔毖之故也

 

12월 연(燕){모용외}이 <을불乙弗>{미천왕}을 쳤다.

<을불>이 연에게 신하임을 칭하였는데, <최비崔毖> 때문이다.


 

미천왕 20년(A.D.319)

12월 진(晉)나라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비는 비밀리에 우리와 단(段)씨, 우문(宇文)씨와 음모하여,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棘城)으로 진공(進攻)하였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나라가 우문씨와 모용외 사이에 모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宇文)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기를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우리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차지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이 장수가 되어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燾)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외가 병사를 거느리고, 도(燾)를 접견하였다.

도(燾)는 겁이 나서 머리를 굽혔다.

모용외는 도(燾)를 보내며 설명하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하였다.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燾)의 뒤를 따랐다.

최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도성(家, 나라)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인으로 하여금 요

동(遼東) 관부(官府)를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河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엄습하여,

주민 1천여 호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 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보내어 우리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왕이 동맹을 요구하니, 이에 한(翰)과 인(仁)이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대제 20년(AD 319)기묘

10월, <선옥仙玉>에게 명하여 <휴도休都>와 <우경于京>의 군대를 끌고나가

<모용외>를 쳤더니 <모용외>는 딸을 바칠 것이니 화친하자고 하였다.

 

이에 상이 <담하>에게 물으니,

 

<담하>는

 

“<모용외>는 <단>씨의 집에 장가를 들고 그 도하(徒河) 땅을 취하였으며,

겉은 어질지만 속은 험합니다. 화친은 아니 됩니다.”라 하였다.

 

이리하여, 우문국 및 단국과 함께 진공하였더니,

<모용외>는 크게 두려운 나머지 나오지는 못하고,

몰래 술과 음식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선옥>은 이를 거절하였고, <우문>만이 이를 수락하였다.

 

이때, 날씨는 춥고 군사들은 지쳐 있었더니 <선옥>도 걱정스런 낯빛이었다.

 

사마 <현슬玄膝>이 <선옥>을 설득하길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깊숙이 들어는 왔지만, 싸우지 마시오.

지금 <우문>은 갑자기 변심하였고, <단>국은 본래 <모용외>와 한 족속이오.

물러나서 변화를 살피는 것만 못할 것 같소.

서서히 도모하여 만전을 기합시다.”라 하였다.

 

<선옥>도 그것이 좋겠다고 여겨 물러났다. <단>국 또한 물러났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한慕容翰>과 함께,

<우문>을 습파하고는 요동으로 진공하니,

<최비崔毖>{晉 平州>刺史}가 홀몸으로 아군으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선옥>이 나가서 싸우다 <모용외>에게 패하여 죽었다.

 

왕이 이를 애통히 여기고는, <휴도>에게 <선옥>의 군사를 이끌게 하였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慕容仁>을 요동 태수를 삼아놓고<휴도>를 쳤다.

 

우리는 연패하여 평곽(平郭)을 잃었다.

 

이에 <소우>가 안평 태수가 되어 2만군을 이끌고 가서 <휴도>의 군대를 구하였다.

 

<청견>을 남부 대사자로 삼아서,< 선옥>을 우보의 예로 장사하여 주었고,

<선옥>의 처 <불弗>씨에게는 매년 곡식을 주게 하였다.

 

<선옥>은 <선방>의 동생으로 상대를 겁주는 힘이 있었고 활을 잘 쏘았다.

 

형인 <선방>을 도와 후산(候山)의 공을 세웠고, <상보尙宝>의 처 <불>씨를 빼앗았다.

 

<선옥>은 용감하여 싸움은 잘하였으나 적을 얕잡는 기질이 있었고,

평소에 번번이 휘하를 욕하였기에,

혼자만이 말을 몰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끝내는 패하여 죽은 것이었다.

 

그의 휘하들은 힘들여 싸워서 그를 구하려 하지는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첨해왕 11년(A.D.320)

 

正月 康登伊伐飡(亥骨)

 

정월 <강등康登>을 이벌찬,<해골亥骨>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孫光卒 味鄒大日大師

 

5월 <손광孫光>이 죽어, <미추味鄒>를 대일대사로 하였다.


 

七月 舟宣伊伐飡 虎羊稟主

 

7월 <주선舟宣>을 이벌찬으로, <호양虎羊>을 품주로 하였다.


 

十二月 乙弗侵遼東 慕容仁拒戰破之

 

12월 <을불乙弗>이 요동(遼東)을 공격하였다.

 

모용인(慕容仁)이 막아서 싸우고 깨뜨렸다.


 

 

 

첨해왕 12년(A.D.321)

 

正月 孫宣伊伐飡 長述稟主

 

정월 <손선孫宣>을 이벌찬, <장술長述>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達禮生于老女茁禮

 

5월 <달례達禮>가 <우로于老>의 딸 <줄례茁禮>를 낳았다.


 

七月 夫良伊伐飡 千羊稟主

 

7월 <부량夫良>을 이벌찬, <천양千羊>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帝與阿后迎味鄒於海宅 設眞齋 七日四方仙徒會者五千人 署其部屬

12월 왕과 아후(阿后)가 <미추味鄒>를 해택(海宅)에서 맞이하여

진재(眞齋)를 베풀자 7일 동안 사방에서 모인 선도(仙徒)가 5천명이어서,

부속(部屬)되는 관청(署)을 만들었다.


 

 

 

 

첨해왕 13년(A.D.322)

 

正月 公羊伊伐飡 船禮稟主

 

정월 <공양公羊>을 이벌찬, <선례船禮>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設眞齋 于桃山

阿后生女昭明 味鄒烝而生也

 

3월 도산(桃山)에서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아후(阿后)가 딸 <소명昭明>을 낳았다.

 

<미추味鄒>가 증(烝)하여 낳았다.

 

<미추>는 <아이혜> 외할머니 <옥모>의 배다른 동생으로 <아이혜>보다 6살 연하이다.


 

四月 行壤井祭

權妻聖元爲暖宮

 

4월 양정제(壤井祭)를 행하였다.


권처 <성원聖元>을 난궁(暖宮)으로 하였다.


 

七月 乾亥伊伐飡 福羊稟主

天旱而蝗 年荒民飢 盜賊四起 帝嘆曰 “當朕之世 災難如此 無以爲君

 阿后曰 味鄒聖人也 何不委以大政乎

 帝嘉其言 乃召味鄒讓政 味鄒固辭不受

 

7월 <건해乾亥>를 이벌찬, <복양福羊>을 품주로 하였다.


하늘의 운행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가 생기고,

한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왕이 한탄하여 말하기를

 

“짐이 맡아 다스리는 시기에는 재난(災難)이 이와 같으니,

임금(君)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아후(阿后)가 말하기를

 

“<미추味鄒>는 성인(聖人)입니다.

어찌하여 대정(大政)을 맡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기뻐하며 이에 <미추>를 불러 정사를 넘겨주려 하였으나,

<미추>가 고사(固辭)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첨해왕 13년

7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생겼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왕 14년(A.D.323)

 

正月 汗黃伊伐飡 昌聖稟主

 

정월 <한황汗黃>을 이벌찬, <창성昌聖>을 품주로 하였다.


 

五月 大雨 山崩四十余所 帝廢膳 自責 欲迎味鄒監國 使盖相望而不出

后自至味鄒曰 國君安則 其國危 唯神君長安 何自至乃出

 

5월 큰 비가 내려 무너진 산이 40여 개소였다.

 

왕이 자책(自責)하며 반찬을 먹지 아니하고,

<미추味鄒>를 맞이하여 감국(監國)하는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모든 재상들이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아이혜>후가 몸소 <미추>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즐거움에 빠지면 그 나라가 위태롭다하였으니,

오로지 신군(神君)만이 나라를 오랫동안 편안하게 할 수 있으니

어찌하여 스스로 오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이에 거소에서 나왔다.


 

七月 彗星出東方 二十五日不滅 帝憂之 群臣皆以爲味鄒能消灾生民

乃以味鄒爲副君 出南堂 星卽滅藏 乃賜酺中外 又以帝女光元妻味鄒 行吉

 

7월 혜성(彗星)이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25일 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근심하였다.

 

군신(群臣)들이 모두 <미추味鄒>가 능히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백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미추>를 부군(副君)으로 삼고 <첨해>가 남당(南堂)을 나왔다.

 

혜성이 곧 사라져서 감추었다.

 

이에 나라 안팎에 연회를 베풀고 또 왕의 딸 <광원光元>{조분과 아이혜의 딸}

<미추>에게 시집보내어 결혼식을 행하였다.

 

이때 <미추> 32세, <광원> 14세, <아이혜> 38세이다.


 

 

첨해왕 14년

여름에 큰 비가 내려 40여 군데의 산이 무너졌다.

7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혜성은 25일 만에 사라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왕 15년(A.D.324)

 

 

正月 淡添伊伐飡 足色稟主

 

정월 <담칠淡柒>을 이벌찬, <족색足色>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克宗能築城 有將才 故副君特拔 而任之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내마(奈麻)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

 

<극종>은 축성에 능하고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부군(副君)이 특별히 뽑아 임명하였다.


 

三月 夫余請和 不許

 

3월 부여(夫余)가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七月 萱述伊伐飡 宣禮稟主

 

7월 <훤술萱述>{장훤과 술례의 아들}을 이벌찬으로, <선례宣禮>를 품주로 하였다.

 

<훤술萱述>은 <미추>와 같은 어머니 형제이다. 


 

八月 行嘉俳

閱馬 于北川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북천(北川)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九月 阿后生女光明

行大場

 

9월 아후(阿后)가 <조분>의 딸 광명(光明)을 낳았다.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十一月 帝與阿后 入海宅

 

11월 왕과 아후(阿后)가 해택으로 들어갔다.


 

十二月 副君朝于海宅 設眞齋

帝與阿后副君登雲梯山堂 行大日祭 而還海宅 疾作暴崩 乃二十八日之夕也

遺命副君卽位 而副君固辭 避匿 阿后冒雪 而至副君之隱居野人家 幷騎而歸 行祥登祚

則靑鷄元旦也

仙徒山呼 于海宅 瑞氣彌滿 于海 而金日乃上

孫光大師常言 金氏當王 至是果驗

初所非王女述禮在壤井廟 乃夢見 金色大鳥 自花林出 入懷

心奇之 而待兆 仇道王適之 行禱 仍與之私合 于廟中 曰

吾夢見 白鵲化爲金鷄 花林當威之運也

述禮亦以夢告 以爲必生貴子 至期入仇道宅誕之 隆準龍顔 四乳猿臂 寬厚有長者風

三歲而自知神仙 仇道命孫光大師 敎以眞經妙法 早通造化 仙徒皆歸心 曰 吾君也

祖廟中古有玉器 先今始謁而見其底有文 曰 鷄尊當世 乃至大運而禪讓天下 非偶然也

 

12월 부군(副君)이 해택(海宅)에서 조회를 받고,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왕이 아후(阿后)와 부군(副君)과 함께 운제산당(雲梯山堂)에 가서

대일제(大日祭)를 행하고 해택(海宅)으로 돌아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는데 28일의 저녁이었다.

 

부군(副君)에게 즉위하도록 유명(遺命)을 남겼다.

 

부군이 고사(固辭)하여 피하여 숨었다.

 

아후(阿后)가 눈을 무릅쓰고 부군이 숨어 지내는 야인(野人)의 집에 이르러,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와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이 때가 청계(靑鷄=乙酉, 325년) 원단(元旦, 1월1일)이다.

 

선도(仙徒)들이 해택(海宅)에서 산호(山呼)를 하였다.

 

상서로운 기운이 바다에 두루미치어 가득 찼고, 누런 태양이 이에 떠올랐다.

 

<손광孫光> 대사가 항상 말하기를 김(金)씨가 왕(王)을 맡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결과적으로 효험이 있었다.

 

처음에 소비(所非){이음}왕의 딸 <술례述禮>가 양정(壤井)의 사당에 있었는데,

꿈속에서 황금색의 큰 새가 화림(花林)으로부터 나와 품으로 안겼다.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 조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구도仇道>왕을 맞이함에 이르자,

기도하고 거듭하여 구도와 사당 안에서 사합(私合)하였다.

 

<구도>가 말하기를

 

“나의 꿈에 하얀 까마귀(白鵲){석씨의 상징}

황금색 닭(金鷄){김씨의 상징}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화림(花林){김씨}이 마땅히 성하게 될 운이다.”라고 하였다.

 

<술례> 역시 꿈을 고(告)하니, 반드시 귀한 아들이 생길 것이라 하였다.

 

미추를 낳을 시기에 도달하자 <구도>의 집으로 들어가 미추를 낳았다.

 

우뚝한 코에 임금의 얼굴로, 4개의 젖(四乳)과 원숭이 팔(猿臂)로,

너그럽고 후하고 장자(長者)의 풍채가 있었다.

 

3세에 스스로 신선을 알았고,

<구도>가 <손광>대사에게 명하여 진경묘법(眞經妙法)을 가르쳤고,

일찍이 조화(造化)에 통하여, 선도의 마음이 모두 귀의하여

 

선도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임금이다.”라고 하였다.

 

조묘(祖廟) 안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옥그릇이 있었는데,

선금(先今){첨해}이 처음으로 알현할 때 그 밑바닥에 있는 글을 보았는데,

“계존(鷄尊){김씨}의 세상에는 이에 대운(大運)이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첨해 15년

2월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8일 갑자기 병이 나서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는 화백회의에서 박, 석, 김씨 중 왕재를 뽑아 왕으로 옹립한 것이 아니라

모계사회이므로 박씨의 사위가 된 석씨와 석씨의 사위가 된 김씨가

모계를 중심으로 왕위를 이어간 것이다.

<첨해>가 죽은 후 <내해>의 아들 <석우로>와 <석중해>가 있었지만

<김구도>의 딸 <김옥모>의 아들인 <석조분>과 <석첨해>를 이어

석씨의 사위가 된 <김미추>가 즉위하니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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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