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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8.30 내해(奈解)이사금기

 

 

 

帝卽位之日大雨 是年自正月至四月不雨 故民皆歡慶

 

의 즉위(卽位)일에 큰 비가 내렸다.

 

이해에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백성들이 경사를 기뻐하였다.



 

 

내해왕 원년(A.D.257)

 

正月 受朝 月宮

奈音伊伐飡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내음奈音>을 이벌찬으로 하였다.

 

이때 <내례> 72세, <자황> 68세, <보황> 41세, 내해왕 28세, <옥모> 20세,

<구도> 40세, <골정> 51세, <조분> 4세, <홍모> 2세

<내음> 38세, <이음> 32세, <석례>43세, <공례> 37세, <술례> 2세이다. 


 

 

 

내해왕 2년(A.D.258)

 

正月 謁始祖廟

岳門伊伐飡 發仁稟主

 

정월 시조묘(始祖廟)를 참배하였다.


<악문岳門)>을 이벌찬, <발인發仁>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3년(A.D.259)

 

正月 受朝 南桃

黃長伊伐飡 柿姬稟主

 

정월 남도(南桃)에서 조하를 받았다.


<황장黃長>을 이벌찬, <시희柿姬>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壤井 楊柳樹王 老臥多年 忽自起 皆稱其慶 乃行昔鄒 只珍大祭

 

4월 양정(壤井)의 버드나무 수왕(樹王)이 늙어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저절로 일어났다.

 

모두 그 경사스러움을 칭송하여,

이에 <석추昔鄒>와 <지진只珍>의 대제(大祭)를 지냈다.


 

五月 西路大水 免其一年租調

 

5월 서로(西路)에 큰 비가 내려, 그 곳의 일년 동안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七月 遣謁休 巡視撫恤

吉完伊伐飡

 

7월 <알휴謁休>를 보내어, 살펴보고 어루만지며 구휼하도록 하였다.


<길완吉完>을 이벌찬으로 하였다.


 

내해왕 3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수재를 당한 주와 현에 1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7월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4년(A.D.260)

 

七月 夫余侵境

美羅生河道女河羅

 

7월 부여(夫余)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미라美羅>가 <하도河道>의 딸 <하라河羅>를 낳았다.


 

 

 

내해왕 5년(A.D.261)

 

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大師國良陳王道十二條 上嘉納之 賜衣酒

角干 南亥卒

 

7월 태백(太白){금성}이 낮에 보이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대사 <국량國良>이 왕도12조(王道十二條)를 말하니,

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국량國良>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내해왕 5년

7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각간 <남해南亥>가 죽었다.


九月 大閱於閼川

美理神生河道女河理

 

9월 알천(閼川)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가야 <미리美理>神이 <하도河道>의 딸 <하리河理>를 낳았다.


 

 

 

내해왕 6년(A.D.262)

 

二月 加耶請和 先是 與夫余內應謀反 故將以大兵拔之 其君臣懼而腹之

 

2월 가야(加耶)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이에 앞서 부여(夫余)와 내응(內應)하여 모반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대병(大兵)을 일으켜 치려고 하였다.

 

그 임금과 신하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내해왕 6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3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자,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고왕 28년 계유(A.D.253)

3월 구원(狗原) 행궁(行宮)을 설치하였다.

가야(加耶) 여군 <미리신美理神>이 사신을 보내어 명주와 용주(龍舟)를 바치고

왕자로 남편을 삼고, 활과 화살, 창과 칼을 얻기를 청하여

왕이 큰 칼 7자루와 창 50개를 주어 보냈다.

<남당유고 백제왕기> 



三月 大旱 錄內外囚 放其輕罪 淡王太子薨

 

3월 크게 가물었다.

 

나라 안팎의 죄인을 조사하여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풀어주었다.


<담왕淡王>{아달라의 아들} 태자가 죽었다.


 

 

 

내해왕 7년(A.D.263)

 

正月 玄公伊伐飡 世羊稟主

 

정월 <현공玄公>을 이벌찬, <세양世羊>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內禮太后崩 春秋七十八

 

2월 <내례內禮>태후가 춘추 78세로 죽었다.


 

七月 板興伊伐飡 國元稟主

 

7월 <판흥板興>을 이벌찬, <국원國元>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8년(A.D.264)

 

正月 行靑神祭 

 

정월 청신(靑神=甲申)제를 행하였다.


 

七月 夫余入寇 利音擊破之

 

7월 부여(夫余)가 노략질하여, <이음利音>이 격파(擊破)하였다.


 

十月 末曷入寇 萱堅擊退之

桃李再華 忽宗伊伐飡 晉氏稟主

國中行疫 禱于桃山

 

10월 말갈(末曷)이 노략질하여, <훤견萱堅>이 쳐서 물러나게 하였다.


복숭아와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홀종忽宗>을 이벌찬, <진씨晉氏>를 품주로 하였다.


나라 안에 전염병이 돌아, 도산(桃山)에서 기도하였다.


 

내해왕 8년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9년(A.D.265)

 

二月 眞忠伊伐飡 發萱稟主

 

2월 <진충眞忠>을 이벌찬, <발훤發萱>{아달라와 내례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10년

2월 진충을 일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九月 穀大登 行大場

 

9월 풍녕이 들었다.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내해왕 10년(A.D.266)

 

三月 國良伊伐飡 雲童稟主

紫凰太后崩

 

3월 <국량國良>을 이벌찬, <운동雲童>을 품주로 하였다.


<자황紫凰(190-266)>태후가 죽었다.


 

七月 霜雹交 下南郊 公穀多被傷 尼今憂之 遣添公祀郊 査?及畯職而歸

太史斗宣奏 太白犯月

 

7월 남교(南郊)에서 서리와 우박이 번갈아 가며 내렸다.

 

나라 또는 관청에서 소유한 많은 곡식들이 상처를 입었다.

 

왕이 걱정하여 <칠공柒公>을 보내어 교외 독두나무에서

준직(畯職){농사를 담당하는 관리}과 함께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태사(太史) <두선斗宣>이 아뢰어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고 하였다.


 

내해왕 10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八月 弧鳴于金城査?壇 翌日又鳴于壤井廟庭

尼今歎曰 寡人否德 奈何

是日 紫井太子薨 黃雲覆天 人皆以爲昇天 仙術甚高故也

利音請加戍西路 許之

 

8월 여우가 금성(金城)의 독두나무 제단(壇)에서 울었다.

 

다음날 양정(壤井)의 사당의 뜰에서 또 울었다.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덕이 없음이로다.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날 <자정紫井(199-266)>{일성과 자리의 아들}태자가 죽었다.

 

누런 구름이 하늘에 퍼졌다.

 

사람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며, 선술(仙術)이 심히 높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내해왕 10년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음利音>이 서로(西路)의 병사를 늘려주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내해왕 11년(A.D.267)

 

三月 巡視西路

 

3월 서로(西路)를 순시하였다.

 

 

五月 夫余與浦上通謀

5월 부여(夫余)와 포상(浦上)이 통모(通謀)하였다.


 

10월 <길두吉斗>를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내해왕 12년(A.D.268)

 

正月 利音伊伐飡兼視軍政

 

정월 <이음利音>을 이벌찬 겸 군정(軍政)을 살피는 일을 겸하도록 하였다.


 

내해왕 12년

정월 왕자 이음(利音)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五月 述明使加耶

 

5월 <술명述明>을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내해왕 13년(A.D.269)

 

二月 西巡一善沙伐至管城 撫慰將士 歷捺己召文 而還 凡十有七日 立五太子祠

小光 板公 汗昔 左玉 紫井 五仙也

 

2월 서쪽으로 일선(一善)과 사벌(沙伐)을 돌아 관성(管城)에 이르러

장군과 병졸을 위무하고,

날기(捺己)와 소문(召文)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다. 무릇 17일이었다.

 

다섯 태자의 사당을 세웠다.

 

<소광小光>, <판공板公>, <한석汗昔>, <좌옥左玉>, <자정紫井> 다섯 신선이다.


 

四月 倭人犯境 利音率輕騎 擊退之

 

4월 왜인(倭人)이 국경을 침범하여

이음(利音)이 경기(輕騎)를 이끌고 가 격퇴하였다.


 

내해13년

2월 왕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九月 加耶入朝 報河道新立 命美知往弔孝修

 

9월 가야(加耶)가 입조하여 <하도河道>가 새로 왕이 되었음을 알렸다.

<미지美知>에게 가서 <효수孝修>를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내해왕 14년(A.D.270)

 

正月 行白虎祭

 

정월 백호제(白虎=庚寅)를 행하였다.


 

七月 加耶于考太子入 告浦上八國入侵 請求 乃命于考與利音將 六部兵往求之

 

7월 가야(加耶왕자 <우고于考>태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포상8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입하였으니 구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우고于考>와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내해왕 14년

7월 포상의 8국(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우로于老(277-331)>는 <내해(230-291)>와 <홍모(256?- )>의 아들이다.

이때 <우로>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포상팔국의 난 때 가야를 구원한 것은

<이음>이 가야왕자 <우고于考>와 함께 출병한 것이다.


 

八月 利音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群臣賀之 乃獻俘獲 于祖廟

河道以其女大理妻美知

 

8월 <이음利音>이 8국의 장군을 쳐서 죽이고,

가야의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군신(群臣)들이 치하하며, 빼앗은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가야의 <하도河道>가 그의 딸 <대리大理>를 <미지美知>에게 시집보냈다.


 

 

 

 

내해왕 15년(A.D.271)

 

四月 旱久 發使 綠囚 除二死餘皆放之

 

 

4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다.

 

사신을 보내어,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죽을죄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는 풀어주었다.


 

내해왕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述明伊伐飡 淵蓬稟主

 

7월 <술명述明>을 이벌찬, <연봉淵蓬>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16년(A.D.272)

 

正月 連同伊飡 骨忠稟主

萱堅伊飡 允宗一吉飡 白凰稟主

 

정월 <연동連同>을 이찬, <골충骨忠>을 품주로 하였다.

 

<훤견萱堅>을 이찬, <윤종允宗>을 일길찬, <백황白凰>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16년

정월 훤견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17년(A.D.273)

 

三月 加耶王子來 質

 

3월 가야(加耶)왕자가 와서 인질로 삼았다.


 

五月 大雨 漂毁民屋

大理生美知子車理

 

5월 큰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내해왕 17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삼국사기 신아본기>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아들 <차리車理>를 낳았다.


 

 

 

 

내해왕 18년(A.D.274)

 

正月 牛芻伊伐飡(南忠) 骨正妻玉帽生帝子沾解 帝洗之

 

정월 <우추牛芻>를 이벌찬, 〈남충南忠>을 품주로 하였다.


 

<골정骨正>의 처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첨해沾解>를 낳았다.

 

帝가 아기를 씻었다.

 

내해(옥모) - 첨해(274-324, 11대왕 재위 310-324) 


 

七月 以骨正女紅帽爲后 沙飡孫光隧吳人米會入吳

 

7월 <골정骨正>의 딸 <홍모洪帽>를 후(后)로 삼았다.

 

사찬 <손광孫光>이 오나라 사람 <미회米會>를 따라서 오(吳)나라로 갔다.

 

 

오(吳)는 <손권>이 222년에 건업에서 나라를 세워 279년에 멸망하였다. 

 


 

 

 

내해왕 19년(A.D.275)

 

三月 大風 折木

實理生高知子宣知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실리實理>가 <고지高知>의 아들 <선지宣知>를 낳았다.


 

七月 仙權伊伐飡 忽仁稟主

扶余來功腰車城 殺城主薛夫 命利音率精兵六千 伐夫余 破沙峴城

河道獻其女河羅

 

7월 <선권仙權>을 이벌찬, <홀인忽仁>을 품주로 하였다.


부여(扶余)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6천을 거느리고 가

부여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내해왕 19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7월 백제가 나라의 서쪽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대가야 <하도河道>가 그의 딸 <하라河羅>를 바쳤다.


 

十二月 雷震 行禱

 

12월 천둥번개가 쳐서 기도하였다.


 

 

 

 

내해왕 20년(A.D.276)

 

正月 行火神祭

乾臣伊伐飡 陽元稟主

 

정월 화신제(火神=丙申)를 행하였다.

 

<건신乾臣>을 이벌찬, <양원陽元>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加耶于考太子歸

大理生美知女索理

 

7월 가야(加耶)의 <우고于考>태자가 돌아갔다.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딸 <색리索理>를 낳았다.


 

 

 

 

내해왕 21년(A.D.277)

 

正月 暖檍伊伐飡 連色稟主

 

정월 <난억暖檍>을 이벌찬, <연색連色>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行射馬選科 于北川

玉帽生帝女乳帽 于宅 命骨正洗之

紅后生于老太子

 

3월 북천(北川)에서 궁병과 기병의 시험을 실시하였다.

 

<옥모玉帽>가 왕의 딸 <유모乳帽>를 집에서 낳았다.

 

<골정骨正>에게 아기를 씻기도록 명하였다.

 

<홍후紅后>가 <우로于老>태자를 낳았다.

 

내해(홍모) - 우로(277-331)


 

四月 行先今祭

 

4월 선금(先今){벌휴}의 제사를 지냈다.


 

 

 

 

내해왕 22년(A.D.278)

 

正月 索孝伊伐飡 駿仁稟主

 

정월 <색효索孝>를 이벌찬, <준인駿仁>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南桃

綠帽生仇道子末昕

 

8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녹모綠帽>가 <구도仇道>의 자 <말흔末昕>을 낳았다.

 

욱보(후례) - 구도(218-301)

구도(녹모) - 말흔(278-350)

 

이때 구도 61세, 녹모 19세?이다. 


 

 

 

 

내해왕 23년(A.D.279)

 

正月 汗忠伊伐飡 柿月稟主

 

정월 <한충汗忠>을 이벌찬, <시월柿月>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武庫兵物自出 孫光還自吳

夫余來圍獐山城 上親擊破之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나왔다.

 

<손광孫光>이 오(吳)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부여(夫余)가 쳐들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니, 왕이 친히 부딪쳐 깨뜨렸다.

 

 

오(吳)나라가 멸망하자 <손광孫光(250?-320)>은 신라로 돌아왔다.


 

내해왕 23년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하였다.

<산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24년(A.D.280)

 

正月 布喜伊伐飡(板忠) 玉帽生帝子仲解 帝洗之

 

정월 <포희布喜>를 이벌찬, 〈판충板忠>을 품주로 하였다.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중해仲解>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七月 興失伊伐飡 亥文稟主

河羅生帝女守羅

 

7월 <흥실興失>을 이벌찬, <해문亥文>을 품주로 하였다.

 

<하라河羅>가 왕의 딸 <수라守羅>를 낳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내해왕 25년(A.D.281)

 

正月 行白牛祭

 

정월 백우제(白牛=辛丑)를 행하였다.


 

三月 旱

發門伊伐飡 病免

六軍頭上利音薨

忠萱伊伐飡兼執軍政 成氏稟主

 

3월 가물었다.

 

<발문發門>이벌찬이 병으로 그만두었다.

 

6군두상(六軍頭上) <이음利音>이 죽었다.

 

<충훤忠萱>을 이벌찬 겸 군정(軍政)으로 처리하도록 하고,

<성씨成氏>를 품주로 하였다.

 


 

七月 大閱 陽山西

加耶女君美理神殂 命述命往吊之

 

7월 양산(陽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내해왕 25년

3월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7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야여군(加耶女君) <미리美理>神이 죽었다.

 

<술명述明>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내해왕 26년(A.D.282)

 

七月 凉宮城

虹公伊伐飡 臼燕稟主

 

7월 양궁(凉宮)이 완공되었다.

 

<홍공虹公>을 이벌찬으로, <구연臼燕>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加耶河道殂 女河理立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가야(加耶)의 <하도河道>가 죽어 딸 <하리河理>가 섰다.


 

 

 

 

내해왕 27년(A.D.283)

 

四月 雹傷麥

南新懸豪民諸馬武身死 體溫微歷月

其妻不忍葬之 抱而摩之 乃醒言夢見陰司治獄之事

其設多符合 衆信奇之 稱諸先生 以車馬迎之 聽法

 

4월 우박이 내려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南新懸) 호민(豪民) <제마무신諸馬武身>이 죽었다.

 

몸이 체온이 미약하게 1달을 보냈다.

 

그의 처가 참지 못하고 장사를 지내려고 끌어안아 남편을 어루만졌는데,

이에 깨어나며 말하기를 꿈에 음사(陰司)와 치옥(治獄)의 일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설명 중에 부합(符合)하는 부분이 많아서 대중들이 그 기이함을 믿었다.

 

제선생(諸先生)이라 칭송하였다.

 

거마(車馬)를 보내어 맞이하고 법(法)을 청취하였다.


 

七月 添公伊伐飡 休介稟主

 

7월 <칠공柒公>을 이벌찬, <휴개休介>를 품주로 하였다.


 

十月 夫余入寇 牛頭州 忠萱與賊戰 于熊谷 失利 命連珍代之 貶萱爲牛頭鎭主

連珍大破夫余兵 獻俘

 

10월 부여(夫余)가 우두주(牛頭州)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충훤忠萱>이 웅곡(熊谷)에서 적과 싸웠는데 손해를 보았다.

 

<연진連珍>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고,

<충훤>을 낮추어 우두진주(牛頭鎭主)로 삼았다.

 

<연진連珍>이 부여(夫余)의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포로를 바쳤다.


 

내해왕 27년

4월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달에 다시 살아났다.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 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하였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28년(A.D.284)

 

正月 連珍伊伐飡兼知軍事 淡眞稟主

 

정월 <연진連珍>을 이벌찬 겸 지군사(知軍事)로 삼고, <담진淡眞>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行壤井祭

加耶入朝

 

4월 양정제(行壤井)를 행하였다.

 

가야(加耶)가 입조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내해왕 29년(A.D.285)

 

正月 昔盧伊伐飡 江氏稟主

 

정월 <석노昔盧>를 이벌찬, <강씨江氏>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骨正太子薨

 

3월 <골정骨井>태자가 죽었다.


 

七月 連珍大破夫余 於烽山下 殺獲一千餘級

請築城而防之 命康萱築烽山城 螺碧伊伐飡 采氏稟主

 

7월 <연진連珍>이 봉산(烽山) 아래에서 부여를 크게 깨뜨려

1천여 명을 죽여 수급을 얻었다.

 

성을 쌓아 방어하기를 청하여, <강훤康萱>에게 봉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나벽螺碧>을 이벌찬, <채씨采氏>를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30년(A.D.286)

 

正月 淵于伊伐飡 馬淡稟主

 

정월 <연우淵于>를 이벌찬, <마담馬淡>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閱馬 于桃山

 

4월 도산(桃山)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八月 行嘉俳

紅后生帝女阿爾兮 有五色雲覆之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홍후(紅后)가 왕의 딸 <아이혜阿爾兮>를 낳았는데 오색구름이 감싸고 있었다.

 

 

내해(홍모) - 아이혜(286-362) 

 

 

九月 行一善大場

扶余君古尒殂 子責稽立

 

9월 일선(一善)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부여(扶余)의 왕 <고이古尒>가 죽어, 아들 <책계責稽>가 섰다.


초고(전씨) - 고이(235-286)

 

 

 

내해왕 31년(A.D.287)

 

正月 國興伊伐飡 白兮稟主

 

정월 <국흥國興>을 이벌찬, <백혜白兮>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國良卒 孫光大日大師

 

2월 <국량國良>이 죽어, <손광孫光>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三月 旱不雨 行禱

加耶女君河理 禪于其夫孝道

 

3월 가물었으나 비가 오지 않아, 기도를 행하였다.

 

가야(加耶) 여군(女君) <하리河理>가 남편 <효도孝道>에게 선위하였다.


 

六月 中外祈雨 行赤羊祭

 

6월 나라 안팎에서 비가 오기를 빌고, 적양제(赤羊=丁未)를 행하였다.


 

七月 汗達伊伐飡 黃珍稟主

孫光祈雨 於陰山七日 乃大雨

發倉廩 賑飢民

 

7월 <한달汗達>을 이벌찬으로, <황진黃珍>을 품주로 삼았다.

 

<손광孫光>이 음산(陰山)에서 7일 동안 기우제를 하였는데, 이에 큰 비가 왔다.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十月 放輕命助賁太子 巡視州郡

 

10월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조분助賁>태자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펴보게 하였다.

 

골정(옥모) - 조분(254-329, 11대왕 재위 292-309)


 

내해왕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0월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32년(A.D.288)

 

正月 碧正伊伐飡 隆主稟主

 

정월 <벽정碧正>을 이벌찬, <융주隆主>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巡狩西南郡邑 弘后助賁從之

 

2월 왕이 나라의 서남(西南)의 군읍(郡邑)을 살폈다.

 

홍후(紅后)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


 

三月 還都

 

3월 도읍으로 돌아왔다.


 

七月 康萱伊伐飡 同忠稟主

 

7월 <강훤康萱>을 이벌찬, <동충同忠>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32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내해왕 33년(A.D.289)

 

正月 行土鷄祭

 

정월 토계제(土鷄=己酉)를 행하였다.


 

七月 允宗伊伐飡 邊月稟主

 

7월 <윤종允宗>을 이벌찬, <변월邊月>을 품주로 하였다.


 

 

 

 

내해왕 34년(A.D.290)

 

正月 元豆伊伐飡 昌兒稟主

命助賁太子 監國

 

정월 <원두元豆>를 이벌찬, <창아昌兒>를 품주로 하였다.

 

<조분助賁>태자에게 나라를 살피도록(監國) 명하였다.


 

四月 蛇鳴南庫三日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九月 地震

 

9월 지진이 있었다.


 

十月 大雪深五尺

 

10월 큰 눈이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내해왕 34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9월 지진이 있었다.

10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왕 35년(A.D.291)

 

正月 薛白伊伐飡 牛忠稟主

 

정월 <설백薛白>을 이벌찬, <우충牛忠>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帝崩 紅后立母兄助賁太子爲尼今 行祥登祚

 

3월  帝가 붕(崩)하였다.

 

홍후(紅后)가 오빠(母兄) <조분助賁>태자를 세워 니금(尼今)으로 하였다.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내해왕 35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석(昔)씨 왕들은 고구려와 화친하고 백제와 가야는 견제한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석(昔)씨는 협보의 후손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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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