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신라'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16.09.06 유례(儒禮)이사금기

 

 

유례왕 원년(A.D.350)

 

正月 勝萱伊伐飡 蘭皇稟主 追尊阿召禮爲太后 以叔母冬禮爲國夫人

冬禮者孫光角干女也 阿召禮奈音王女 而皆母阿禮 故爲異父姉妹也

冬禮時年七十九 蘭皇者冬禮女冬皇之女也

帝幼時長於冬禮及冬皇 故蘭皇有寵于帝 勝萱者勝華之胞兄也

其母長禮述禮太后之女 故與味鄒仙帝爲異父兄弟也

 

정월 <승훤勝萱>을 이벌찬으로 <난황蘭皇(365-422)>을 품주로 삼았다.

 

<아소례阿召禮(262-327)>를 추존하여 태후로,

숙모 <동례冬禮(272-354)>를 국부인(國夫人)으로 삼았다.

 

<동례冬禮>는 <손광孫光>각간의 딸이고, <아소례>는 <내음奈音>王의 딸이다.

 

모두 어머니가 <아례阿禮>이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가 다른 자매다.

 

<동례>의 나이는 당시 79세였다.

 

<난황蘭皇>은 <동례冬禮>의 딸인 <동황冬皇>의 딸이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동례冬禮>와 <동황冬皇(300?- )>의 집에서 자랐다.

 

그런 연유로 <난황蘭皇>은 왕에게 총애가 있었다.

 

<승훤勝萱>은 <승화勝華>와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그의 어머니 <장례長禮>는 <술례述禮>태후의 딸인 연유로,

<미추味鄒> 선제(仙帝)와는 다른 아버지의 형제다.

 

벌휴(자황) - 골정(207-285)(옥모) - 조분(254-329)(아소례) - 유례(306-367)

                                                   조분(가황) - 걸숙(아이혜) - 기림(330-372)

                                                   녹모(256?- )

                                                   홍모(261- )

                                                   

                 이매(211-235)(내례) - 내해(230-291)(옥모) - 첨해(274-324)

                                                   내해(홍모) - 우로(명원) - 흘해(329-392)

                                                                     아이혜(조분) - 광명(324-392) 


 

三月 休禮宮主生末仇子奈勿 仙帝與達禮宮主幸末仇宅 賜衣米 命加奴婢

 

3월 <휴례休禮>궁주가 <말구末仇>의 아들 <내물奈勿>을 낳았다.

 

선제(仙帝){미추}와 <달례達禮>{휴례의 어머니}궁주가 <말구>의 댁을 행차하여

옷과 쌀을 내리고, 명(命)으로 노비를 더하게 하였다.

 

 

구도(녹모) - 말흔(278-350)(술례) - 말구(297-358)(휴례 331-399) -

물(350-402)

구도(술례) -  미추(292-362)


 

四月 倭襲一禮 縱火燒之 虜男女一千而去

 

4월 왜가 일례(一禮)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남녀 일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유례왕 4년

4월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六月 末仇與休禮抱奈勿 謁仇道世神廟 及仙帝而謁于帝 請宴骨門 命內庫給氷人及大饍

 

6월 <말구末仇>와 <휴례休禮>가 <내물奈勿>을 안고

구도세신(仇道世神)의 사당을 찾아가 아뢰고, 선제(仙帝)와 왕을 찾아뵈었다.

 

골문(骨門)에 잔치를 베풀기를 청하여,

내고(內庫)에 명하여 빙인(氷人)과 대선(大饍)으로 시중들게 하였다.


<내물>의 백일잔치를 연 것이다.


 

七月 添色伊伐飡 宝黃稟主 宝黃者帝姊宝太女也 添色者帝乳母足色之子也

 

7월 <칠색柒色>을 이벌찬, <보황宝黃>을 품주로 삼았다.

 

<보황宝黃>은 왕의 누나 <보태宝太>의 딸이고,

<칠색柒色>은 왕의 유모 <족색足色>의 아들이다.


 

九月 行金狗祭 于蚊川 末仇主之 以奈勿入狗徒故也 末昕公以狗徒之君 傳瑄于奈勿

以年老不親行 命末仇代行之 帝幸末昕宅 享公及公妃乳帽宮主

賜達禮宮主軟凰宮主衣馬 左右狗主也

是歲大豊 公庄有嘉禾瑞穗 田民稱賀 曰 聖子穀也

獻之 公乃使末仇 獻于仙帝 曰 天生嘉孫 而地生嘉禾 皆汝福也

仙帝曰 可祀世神 而分之乃命達禮休禮齋沐 而薦于花林 仍命末仇 行大場 于公庄

 

9월 금구제(金狗祭, 金狗=庚戌)를 문천(蚊川)에서 행하여,

<말구末仇>가 주재하게 하였는데, <내물奈勿>이 구도(狗徒)로 들어온 때문이다.

 

<말흔末昕>공이 구도(狗徒)의 군(君)이었는데 내물에게 선(瑄)을 전하였다.

 

<말흔末昕>이 늙어 친히 행하지 아니하고 <말구末仇>로 대행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말흔>댁에 행차하여 <말흔>공과 공의 비 <유모乳帽>궁주에게 연회를 베풀고,

<달례達禮>궁주와 <연황軟凰>궁주에게는 옷과 말을 내렸는데

좌우구주(左右狗主)인 까닭이다.

 

이해에 대풍(大豊)이 들어 공의 장원(庄)에는

경사스러운 징조의 상서로운 이삭이 있었다.

 

농민(田民)들이 경사를 축하하며 말하기를

 

“성자의 곡식입니다.”라고 하며 이삭을 바쳤다.

 

<말흔>공은 이에 <말구>로 하여금 선제(仙帝)에게 바치게 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훌륭한 자손을 낳아주시고, 땅에서는 가화(嘉禾)를 낳아주시니,

모두 너의 복이다.”라고 하였다.

 

선제가 말하기를

 

“가화를 나누어 세신(世神){구도}에게 제사지냄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으로 <달례>와 <휴례休禮>에게 재목(齋沐)하게 하고,

화림(花林)에 천거하였다.

 

이에 <말구>에게 명하여 공의 장원에서 대장(大場)을 행하게 하였다.


 

十月 流山公 于推火 與帝妃宣秋宮主相通而生子中己故也

帝累責山公而不悔改 故遠之

山公與訖解交好 娶仙帝女茜因 故仙帝難之 帝不悅 乃許流之 茜因遂爲訖解所私

 

10월 <산공山公>을 추화(推火)에 유배 보냈다.

 

<산공>이 왕의 비 <선추宣秋>궁주와 상통하여 아들 <중기中己>를 낳은 때문이다.

 

왕이 여러 차례 <산공>을 꾸짖었으나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으니,

그런 연고로 멀리 보낸 것이다.

 

<산공>과 <흘해訖解>가 사이좋게 사귀면서도

선제(仙帝)의 딸 <천인茜因>에게 장가들고자 하여 그런 연유로

선제가 그것을 어려워하고 왕은 기뻐하지 않았다.

 

이에 <산공>을 유배 보냄을 허락하였다.

 

<천인>은 드디어 <흘해訖解>에게 홀로됨이 있었다.



十二月 太公末昕角干薨 年七十三

公繼仇道 掌幄與于老太子互相守兵 殆四十餘年 功甚大

帝欲以王禮葬之 以報仙帝之意 仙帝曰

吾兄恭謙 不喜非分 常戒我 以儉約 且愛民而不使役 可如其意 無以此冬發民乃止之

 

12월 태공 <말흔末昕> 각간이 죽었는데 나이 73세였다.

 

공은 <구도仇道>를 이어 <우로于老>태자와 더불어 

서로 병권을 손에 넣은 것이 거의 40여년이었으니 공적(功績)이 심히 컸다.

 

이 왕례(王禮)로 장사지내고자 하였는데,

선제(仙帝)를 헤아림에 보답하고자 함이다.

 

선제가 말하기를

 

“나의 형은 공경하고 겸손하여 제 분수가 아닌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타이르며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또 백성들을 사랑하여 사역(使役)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따름이 옳은 일이고,

이 겨울에 백성의 사역을 일으킴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례로 장사지내는 것을 그쳤다.

 

이때 <말흔> 73세, <미추> 59세. <말구> 54세, <아이혜> 65세, <걸숙> 61세?

<달례> 48세. <명원> 44세, <유례>왕 45세, <광명> 27세, <선추> 34세,

<삼원> 35세, <휴례> 20세, <예생> 12세?, <대서지> 37세, 

<아이혜>와 <걸숙>의 아들 <기림> 21세,

<우로>와 <명원>의 아들 <흘해> 22세,

<말구>와 <휴례>의 아들 <내물> 1세,

<유례>와 <선추>의 아들 <세기> 16세이다. 

 

<휴례>는 <미추>의 딸이므로 <내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촌으로 모두 김씨이다.

구도(녹모) - 말흔(술례) - 말구(휴례) - 내물

구도(술례) - 미추(달례) - 휴례(말구) - 내물


 

 

 

유례왕 2년(A.D.351)

 

 

正月 興皇伊伐飡 蘭皇稟主

 

정월 <흥황興皇>을 이벌찬, <난황蘭皇>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休禮與奈勿 巡謁所非月白紫凰述禮末昕諸陵門 命賜羽林軍二十人

 

2월 <휴례休禮>와 <내물奈勿>이 소비(所非){이음}, 월백(月白){조분},

<자황紫凰>, <술례述禮>, <말흔末昕>의 릉문(陵門)을 돌면서 알현하였다.

 

명(命)으로 우림군(羽林軍) 20명을 내려주었다.

 

일성(지진내례) - 아달라(180-243)

소광(애황) - 자황(190-266)

욱보(호례) - 구도(218-301)

아달라(자황) - 이음=소비(226-281)(공례) - 술례(구도) - 미추(달례) - 휴례

                                                             녹모(구도) - 말흔(술례) - 말구

골정(옥모) - 조분=월백(254-329)

                  녹모(256? - )

                  홍모(261- )

이음(공례) - 술례(256-338)

구도(녹모) - 말흔(278-350)

말구(휴례) - 내물(350-402)

 


 

七月 貝孝伊伐飡 乾通稟主 貝孝者船孝之子 母微而美 故爲帝嬖臣登相

乾通亦善烹飪 而能媚得寵於良夫者也

時夫余內君阿尒生謹須子枕流入貢報喜

良夫命乾通烝秀魚而待之 其味甚好 請受其方而去

良夫曰 可得西海醢十甕而授之 盖夫余善醢

而良夫好食珍味 聞人善烹 不遠千里 而往嘗之 故時人稱 食良夫色公兌

仙帝與阿后良夫乾通等 入捺己神山 巡訪諸祠 行獵 至九月 而還都

 

7월 <패효貝孝>를 이벌찬, <건통乾通>을 품주로 삼았다.

 

<패효貝孝>는 <선효船孝>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신분은 미미하지만 아름다워서,

그런 연유로 왕의 폐신(嬖臣)이 되어 재상에 올랐다.

 

<건통乾通> 또한 팽임(烹飪){음식을 삶거나 지짐}한 음식을 잘 만들어

능히 사랑을 받았고, <양부良夫(294-356)>의 총애를 얻었다.

 

당시 부여(夫余)의 내군(內君) <아이阿尒(331- )>가

<근수謹須(330?-384)>{근구수왕}의 아들 <침류枕流(350?- 385)>를 낳았고,

공물을 바치며 기쁜 소식을 알렸다.

 

<양부>가 <건통>에게 명하여 수어(秀魚){숭어}를 쪄서 사신을 대접하게 하였는데,

그 맛이 심히 좋으니 그 방법을 얻어가기를 청하였다.

 

<양부>가 말하기를

 

“서해(西海) 젓갈 열 동이를 얻어줄 수 있겠다.”라고 하며,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대개 부여가 젓갈에 뛰어난 때문이다.

 

<양부>는 진미(珍味)를 좋아하여,

사람들에게 삶는 음식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가서 맛보았다.

 

그런 연유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식가 <양부>

호색가 <공태公兌(334-406)>라고 하였다.


선제(仙帝){미추}가 아후(阿后){아이혜}, <양부良夫>, <건통乾通>등과 더불어

날기신산(捺己神山)에 들어가서 여러 사당을 순방(巡訪)하고, 사냥하였다.

 

9월에 이르러 도읍으로 돌아왔다.


 

十月 邊活生帝子忍公 賜奴婢

 

10월 <변활邊活>이 왕의 아들 <인공忍公>을 낳아, 노비를 내렸다.


 

 

 

유례왕 3년(A.D.352)

 

正月 馬興伊伐飡 紫元稟主

 

정월 <마흥馬興>을 이벌찬으로 <자원紫元>을 품주로 삼았다.


 

五月 水路傳言倭至 理舟楫繕 甲兵而待 竟不至

時北有句麗末曷 南有倭寇 夫余亦數反復 國家憂之 而仙門骨門 多習安逸 不肯武事

故世己命羊徒作伍隊精鍊尙氣 以備國用 人皆歎其有夙兒

加耶宣失禪位于守克

 

5월 수로(水路)가 전언(傳言)으로 왜병이 이른다 하여,

주즙(舟楫)을 손질하고 갑병(甲兵)을 대기하게 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당시 북에는 구려(句麗)와 말갈(末曷)이, 남에는 왜구(倭寇)가 있고,

부여(夫余) 역시 수차례 배반하였다가 되돌아오니 나라에서 걱정하였다.

 

선문(仙門)과 골문(骨門)은 안일(安逸)함에 젖어있어,

무사(武事)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세기世己(335-391)>가 양도(羊徒)에게 명하여 대오를 갖추고

정련(精鍊)하여 기상을 드높여, 나라의 필요에 준비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어린아이에게 어른스러움이 있음을 널리 칭찬하였다.


 

유례왕 6년

5월 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가야(加耶)의 <선실宣失(327-389)>이 <수극守克(304-377)>에게 선위하였다.

 

수극은 대가야 11대왕으로 352-376년까지 재위하였다.   


 

七月 小捺公伊伐飡 三元稟主 三元以裙白之女 不肯自戒 恃母后之寵而姿 行貪財

以小捺長宣登保弘權等爲夫 散生子女 而帝嬖愛之 與紫元同受寵幸 宮中 嘲以雙魚

紫元者乃白之布女也

 

7월 <소날小捺(310?- )>공(公)을 이벌찬으로 <삼원三元(316- )>을 품주로 하였다.

 

<삼원>은 <군백裙白>의 딸인데, 자계(自戒)함을 기꺼워하지 않고,

모후(母后){아이혜}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재물을 탐하였다.

 

<소날小捺>, <장선長宣(310?- )>, <등보登保(317-380)>, <홍권弘權> 등을

남편으로 삼아 낳은 자녀들이 흩어졌다.

 

왕이 <삼원>을 몹시 사랑하였고, <자원紫元>과 함께 총행(寵幸)을 받았다.

 

궁중에서는 조롱하여 쌍어(雙魚)라고 불렀다.

 

<자원紫元>은 <내백乃白>의 포녀(布女)다.


 

八月 命世己 行嘉俳 世己性淸 峻有才藝 帝愛之 命良夫公兌 敎以師道

聞一知十 人莫能及 良夫謂帝 曰 孫光復生矣 臣等遠不及矣

 

8월 <세기世己>에게 명하여 가배(嘉俳)를 행하도록 하였다.

 

<세기>는 탐욕이 없는 성품이고 뛰어난 재예(才藝)가 있었다.

 

왕이 <세기>를 사랑하여

<양부良夫>와 <공태公兌>에게 사도(師道)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이해하여 보통사람은 미치지 못하였다.

 

<양부>가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손광孫光(250?-320)>이 다시 살아왔으니,

신(臣) 등은 심오함이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유례왕 4년(A.D.353) 수오(水牛=癸丑)

 

正月 佟宗伊伐飡 勝華稟主 佟宗冬皇子也 勝華以石宗佟宗爲夫

而再主 帝亦寵愛之 衣服之政皆委之 勝華善女工故也

 

정월 <동종佟宗>을 이벌찬, <승화勝華>를 품주로 삼았다.

 

<동종佟宗>은 <동황冬皇>의 아들이다.

 

<승화勝華>는 <석종石宗>과 <동종佟宗>을 남편으로 삼아 다시 품주가 되었다.

 

왕 또한 총애하여, 의복에 관한 정사는 모두 위임하였다.

 

<승화勝華>는 여공(女工)에 능하였기 때문이다.


 

二月 休禮生末仇女冶勿 命乾通乳之

 

2월 <휴례休禮>가 <말구末仇>의 딸 <야물冶勿>을 낳았다.

 

명으로 <건통乾通>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다.


 

五月 大水 月城頹毁

 

5월 홍수가 나서 월성(月城)이 무너졌다.


 

유례왕 7년

5월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洪達伊伐飡 勿聖稟主 勿聖亦宝太女也 以帝枕妃 得寵者也

洪達以宝太嬖人 與勿聖相通而生子 故帝許爲夫妻 至是任政

 

7월 <홍달洪達>을 이벌찬으로 <물성勿聖>을 품주로 삼았다.

 

<물성勿聖> 또한 <보태宝太>의 딸이다.

 

왕의 침비(枕妃)로 총애를 얻은 자이다.

 

<홍달洪達>은 <보태>의 귀여움을 받던 사람인데,

<물성勿聖>과 상통(相通)하여 자식을 얻었다.

 

그런 연유로 왕이 부부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 때에 이르러 정사를 맡겼다.


 

十二月 行玄牝祭 良夫冬皇主之

 

12월 현빈(玄牝=癸丑)제를 행하여, <양부良夫>와 <동황冬皇>을 주(主)로 삼았다.


 

 

 

 

유례왕 5년(A.D.354) 목호(木虎=甲寅)

 

正月 乾福伊伐飡 氏稟主 乾福乾通之兄也 氏蘭石所生裙白女也

裙白美而善烹飪 犯天后而生三元 法當斬 而后不忍之 而諱而出之

出入各宮家 多通骨女生子女 理方欲治之 而后命宥之

良夫又愛其善手護之 其女三元牟氏皆稟主 呼裙白以乳父

月賜米衣甚豊 置舍宅于城東 無品巷率婢妾數人 出入乘御

賜白馬紫衣 小民指之 曰 稟主父公

羊馬小徒依而生者亦多

蘭石以翊宗妻 改嫁連音 而受翊宗年穀 密通裙白 其年穀多入裙白

人以爲翊宗將軍 爲何戰亡 乃爲裙白肥肉 輕裘陣上

連音相國爲何忙? 乃爲裙白廚下忙? 自翊宗生時 裙白與蘭石相通

故連音不能禁 連音與裙白同馬 後一月 故蘭石使連音

呼裙白以兄 私處不敍貴賤如家人 故其勢甚張

以末仇爲六軍頭上 乃末昕遺命也 仇道後末昕于老分掌軍政 而軍心皆歸末仇故也

仙帝命休禮亦具戎服騎馬 而受將士朝禮 休禮乃抱奈勿上馬馳騁

于軍士之間 光明后與仙帝登樓望見 而危之 及謁見 奈勿少無懼色

休禮指刀戟將士 曰 彼不畏乎

奈勿曰 皆吾臣下 何懼之有哉光明壯其言謂仙帝 曰

此龍孫也 吾女道留 可以妻之乎

仙帝笑 而許之 道留者后所生仙帝女也

 

정월 <건복乾福>을 이벌찬으로 <소씨㸴氏>를 품주로 삼았다.

 

<건복乾福>은 <건통乾通>의 형이다.

 

<소씨㸴氏>는 <난석蘭石>의 소생, <군백裙白>의 딸이다.

 

<군백裙白>은 잘 생기고 삶고 지지는 음식을 잘하였다.

 

천후(天后){아이혜}를 범하여 <삼원三元>을 낳으니,

법으로는 당연히 목을 베어야 하지만

后가 잔인하지 못하여 숨기어 궁 밖으로 내보냈다.

 

여러 궁가(宮家)를 출입하여 많은 골녀(骨女)들과 통하여 자녀를 낳았다.

 

리방(理方)이 군백을 다스리려 하였으나 后의 명으로 용서하였다.

 

<양부良夫>가 또 그의 선수(善手)를 좋아하여 보호하였다.

 

그의 딸 <삼원>과 <소씨>는 모두 품주가 되었는데, <군백>을 유부(乳父)라 불렀다.

 

달(月)마다 내려받는 쌀과 옷이 심히 풍성하였다.

 

사택(舍宅)을 성의 동쪽에 두었는데,

골품이 없으나 거리에 비첩(婢妾) 몇 명을 거느리고 출입하였다.

 

어심(御)을 얻어 백마와 자의(紫衣)를 하사받았는데,

소민(小民)들이 그를 가리켜 품주 아버지 공(公)이라 하였다.

 

양도(羊徒)와 마도(馬徒)가 따르니 낳은 자식이 역시 많았다.

 

<난석>은 <익종翊宗>의 처인데, <연음連音>에게 개가하였고

<익종>의 유족에게 년곡(年穀)을 받았다.

 

<난석>이 <군백>과 은밀히 통하여 년곡의 많은 부분이 <군백>에게 들어갔다.

 

사람들이 <익종>장군을 위하는 것은

어찌 전망(戰亡)하였는지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군백>은 가장하여 살찐 몸에 경구(輕裘)를 입고 진상(陣上)할 뿐이었다.

 

<연음>이 상국(相國)이 어찌 급한가 하며

이에 <군백>을 주하(廚下)로 만들어 애타게 하였다.

 

<익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군백>과 <난석>이 상통하였고,

그런 연유로 <연음>은 <군백>이 <난석>과 상통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연음>과 <군백>이 같은 마도(馬徒)가 되었는데

한 달 후 그런 연유로 <난석>이 <연음>에게 <군백>을 형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사사로운 장소에서는 가인(家人)과 같이 귀천의 차례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 세력이 심히 창성하였다.


<말구末仇>를 6군두상으로 삼았는데, <말흔末昕>의 유명(遺命)이다.

 

<구도仇道>의 이후에 <말흔>과 <우로于老>가 군정(軍政)을 나누어 맡았고,

군심(軍心)이 모두 <말구>에게 돌아온 까닭이다.

 

선제(仙帝){미추}가 <휴례休禮>에게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말을 타고

장사(將士)의 조례(朝禮)를 받도록 명하였다.

 

<휴례>가 이에 <내물>을 안고 말에 올라 군사들의 사이를 달렸다.

 

광명후(光明后)와 선제가 망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위태로워 보였다.

 

알현(謁見)함에 이르자, <내물奈勿>은 어리나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휴례>가 도극(釰戟)과 장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것들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묻자

 

<내물奈勿>이

 

“모두 나의 신하인데 어찌 두려움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광명>이 그 말을 장하다 여기어 선제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저 아이가 용손(龍孫)이니, 나의 딸 <도류道留>를 시집보낼 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제가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도류道留>는 광명후의 소생, 선제의 딸이다.

 

이때 <내물> 5세, <도류道留> 3세로 둘 다 김씨이다. 


 

유례왕 8년

정월 말구를 이벌찬에 임명하였다.

말구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았다. 왕은 자주 그를 찾아가서 정사의 요령을 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三月 奈勿始謁祖廟 仍謁仙帝及帝光明后 乃召于道留宮中 賜以綠緋衣

 

3월 <내물奈勿>이 처음으로 조상의 사당을 찾아뵈었다.

 

거듭하여 선제(仙帝){미추}와 왕(帝){유례}과 광명후(光明后)를 뵈었다.

 

이에 도류궁(道留宮)으로 불러 녹색 인끈(綠綬)과 붉은색 비단옷(緋衣)을 내렸다.


 

五月 冬禮宮主薨 上哀之 以后禮葬之 冬禮善歌 故掌仙門歌仙

有徒數千 而性好淫 多嬖臣私子 上皆庇護之 命立廟

 

5월 <동례冬禮>궁주가 죽어 왕이 애통해하며 후(后)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동례冬禮>는 노래를 잘 불러 그런 연유로 선문(仙門)의 가선(歌仙)을 맡았다.

 

수천의 무리가 있었는데,

음란함을 즐기는 성품이라 폐신(嬖臣)과 사자(私子)가 많았다.

 

왕(上)이 모두 비호하였다. 명으로 사당을 세웠다.

 

손광(아례) - 동례(272-354) 


 

七月 豊色伊伐飡 宝黃稟主 豊色添色之異父弟也 宝黃本爲豊色妻 添色愛之 亦欲爲妻

二人友愛遂共妻之 移宅于一墻之內 奉其母足色 帝嘗乳之

故累幸其宅 或夜深而歸 足色宝黃皆有帝寵 云

良夫以骨皇爲妻 先是良夫妻茁禮與公兌潛通 良夫知而許之

公兌妹骨皇學舞於良夫 茁禮每以其時出公兌而不歸

良夫知之仍留骨皇 骨皇言 其兄之不可

良夫曰 吾所許也 縱其好何妨哉 但汝以三姬爲何人乎

時三姬以弘權爲舞夫 而相通爲夫妻故也

骨皇知 良夫意 慙不能對 良夫遂通之而悔之 曰 吾年已老 恐人譏也 汝勿言之

時骨皇已與欽宣相慕而私通之 故欽宣每伺其歸而引之

時夜骨皇不出 而天雨 欽宣冒雨待之 良夫睡而骨皇出言之 欽宣曰

汝福在此 吾不敢復私之

遂絶而歸 後連受身而娠 良夫聞欽宣之事 益感之 遂以骨皇爲妻 生女良丹

 

7월 <풍색豊色>을 이벌찬으로 <보황宝黃>을 품주로 삼았다.

 

<풍색豊色>은 <칠색柒色>의 다른 아버지의 동생이다.

 

<보황宝黃>은 본래 <풍색>의 처인데 <칠색>이 <보황>을 사랑하여,

또한 처로 삼기를 원하였다.

 

두 사람의 우애가 심히 도타워서 결국엔 같이 처로 삼고,

같은 담 안의 집으로 이사하여, 그의 어머니 <족색足色>을 모셨다.

 

왕이 과거에 <족색>의 젖을 먹었는데, 그런 연고로 여러 번 그 댁에 행차하였다.

 

혹은 늦은 밤에 돌아왔다.

 

<족색足色>과 <보황宝黃> 모두 왕에게 총애가 있었다고 한다.


 

<양부良夫>가 <골황骨皇>을 처로 삼았다.

 

이전에 <양부良夫>의 처 <줄례茁禮>와 <공태公兌>가 잠통하였는데

<양부良夫>가 잠통함을 알고 허락하였다.

 

<공태公兌>의 여동생 <골황骨皇>이 <양부良夫>에게 춤을 배웠는데,

<줄례茁禮>는 매번 그 시간에 <공태公兌>와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우로(달례) - 줄례(321-387) 

 

<양부良夫(294-356)>가 그것을 알고 이에 <골황骨皇>을 머무르게 하였다.

 

<골황骨皇>이 오빠 <공태公兌>의 행동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일골(연황) - 공태(334-406)

                  골황(336?- ) 

 

<양부良夫>가 말하기를

 

“내가 허락한 바다. 자유로이 좋아함을 어찌 방해하려느냐.

그러나 너는 <삼희三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소날(삼원) - 삼희(335- )

 

당시 <삼희三姬>는 <홍권弘權>을 춤선생(舞父)으로 삼았는데,

상통하여 부부가 된 까닭이다.

 

<골황骨皇>이 <양부良夫>의 뜻을 알고 부끄러워 얼굴을 마주대할 수 없었다.

 

<양부良夫>가 결국엔 <골황骨皇>과 상통한 후에 후회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는데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렵다.

너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당시 <골황骨皇>은 이미 <흠선欽宣>과 서로 좋아하여 사통(私通)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흠선>이 매일 돌아가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데려갔다.

 

이날 밤에 <골황骨皇>이 나오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또 비가 왔는데,

<흠선欽宣>이 비를 무릅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양부良夫>가 자고 있을 때 <골황骨皇>이 나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말하였다.

 

<흠선欽宣>이 말하기를

 

“너의 복이 이와 같으니, 내가 감히 다시 사통할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드디어 절교하고 돌아갔다.

 

뒤에 연달아 몸을 받아들여 임신을 하였다.

 

<양부良夫>가 <흠선欽宣>의 일을 듣고 더욱 감동하였다.

 

드디어 <골황骨皇>을 처로 삼고 딸 <양단良丹>을 낳았다.

 

 

 

 

 

유례왕 6년(A.D.355)

 

正月 登保伊伐飡 翊皇稟主 亦冬皇女也

茜因生末仇女茜發 仙帝以休禮娠時 命茜因往配 末仇而欲得子 至是生女 仙帝洗之

 

정월 <등보登保>를 이벌찬, <익황翊皇>품주로 삼았다.

 

<익황翊皇> 역시 <동황冬皇>의 딸이다.


<천인茜因>이 <말구末仇>의 딸 <천발茜發>을 낳았다.

 

선제(仙帝){미추}가 <휴례休禮>의 임신기간 중에

<천인茜因>에게 <말구末仇>의 배우자로 가 있도록 하였는데,

<말구末仇>가 아들을 얻고자 하여 이 때에 이르러 딸을 낳았다.

 

선제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六月 倭襲沙道城陷之 因勢侵燒海宅 將及綃宮

綃妃沙火郞得仙道 在山作疑兵于山腹 而使不能進 疑懼

廚著之時 一吉飡 大谷領 京路軍來救 擊其首大破之 斬獲甚多

乃爵沙火而奈麻 命入兵官 而沙火不受 帝又遣公台問政 沙火謝讓不肯言 命地方優禮

 

6월 왜가 사도성(沙道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인하여 그 기세로 해택(海宅)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다.

 

장차 초궁(綃宮)에 미치려 하자, 초비(綃妃) <사화沙火>랑이 선도(仙道)를 얻어,

산복(山腹)에서 산속에 의병(疑兵)을 일으켜

왜로 하여금 의구(疑懼)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부엌으로 드러 닥칠 때

일길찬 <대곡大谷>을 우두머리로 한 경로군(京路軍)이 와서 구하였다.

 

그 우두머리를 쳐서 크게 깨뜨리고, 죽이고 사로잡은 이가 심히 많았다.

 

이에 <사화沙火>의 작위를 내마로 하여 병관으로 들어오게 명하였다.

 

<사화沙火>가 관직을 받지 아니하자,

왕이 다시 <공태公兌>를 보내어 관직을 받지 않은 것에 관하여 물었다.

 

<사화沙火>는 사양하고 운수 좋음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명으로 지방의 우수한 규범으로 하게 하였다.


 

七月 旱蝗 命巫禳之 碧解伊伐飡 命元稟主

命元以于老妻 改嫁碧解 年已五十 而爲碧解蒨薦 訖解諫之不聽 人多非之

 

7월 가물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명으로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게하였다.


<벽해碧解(307?-377)>를 이벌찬으로 <명원命元>을 품주로 삼았다.

 

<명원命元(307-374)>은 <우로于老(277-331)>의 처로

<벽해碧解>에게 재혼하였는데,

나이 이미 50세이나, <벽해碧解>를 위하여 품주로 천거하였다.

 

이때 <명원>의 나이는 49세이다.

 

<흘해訖解>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이라 하였다.


 

유례왕 9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7월 날씨가 가물었다.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왕 7년(A.D.356)

 

正月 乃登伊伐飡 登芥稟主

 

정월 <내등乃登>을 이벌찬으로, <등개登芥>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改築沙道城 移沙伐州豪民八十余家

 

2월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 호민(豪民) 80여가를 옮겼다.

 

사도성은 지금의 경북 영덕군에 있는 성이고 사벌주는 지금의 경북 상주이다.


 

유례왕 10년

2월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의 호민 80여 호를 옮겨 살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光謙伊伐飡 螺玉稟主

大日良夫卒 公兌繼爲大日大師 良夫者奈解之子西解之子也 母良其大日國良之女也

性寬弘愛物博學多識 孫光十二高弟中 以博識爲第一 述孫光所修經傳大成之

時仙徒好自飾 良夫亦疎脫不肯 畵眉粉面 又善知味 能訥烹飪

故不知者以美食而肥 己然每忌肥胖 而滅食缺 不得疲

凡人來附 不擇淸濁正邪 皆庇護之

故人多歸之 色道則大泛 妻女姿淫 不責之

竟以茁禮妻公兌 骨皇妻欽宣而怡 然喜其相得 至是卒 年六十三 人多惜之

 

7월 <광겸光謙>을 이벌찬, <라옥螺玉(330- )>을 품주로 삼았다.


대일대사 <양부良夫(294-356)>가 죽고,

<공태公兌(334-406)>가 계승하여 대일대사로 되었다.

 

<양부良夫>는 <내해奈解(230-291)>의 아들인 <서해西解>의 아들이다.

 

어머니 <양기良其>는 대일대사 <국량國良>의 딸이다.

 

<양부良夫>는 성품이 너그럽고 널리 만물을 사랑하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였다.

 

<손광孫光(250?-320)>의 12고제(高弟){高足弟子} 중에 제일 박식(博識)하였다.

 

<손광孫光>의 저술을 고쳐서 경전(經傳)으로 대성(大成)하였다.

 

당시 선도(仙徒)들은 스스로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양부良夫>는 또한 소탈하여 눈썹을 그리거나

얼굴에 분을 바르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또 지미(知味)에 뛰어나서 팽임(烹飪)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모르는 사람들은 싫어하였다.

 

미식(美食)으로 살이 찌는 까닭에 매번 기름진 갈비(胖)를 기피하였으나,

감식(減食)함이 부족하여 살이 빠지지 않았다.

 

범인(凡人)들이 내부(來附)하면

청탁(淸濁)과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모두 비호(庇護)하였다.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였다.

 

여자에 관한 문제에 대범하여, 부인과 딸이 마음대로 음란하여도 꾸짖지 아니하였다.

 

결국엔 <줄례茁禮(321-387)>가 <공태>에게,

<골황骨皇(336?- )>은 <흠선欽宣>에게 시집을 갔으나 이연(怡然)하였다.

 

<줄례>와 <골황>은 <내해>의 손자인 <양부>의 처이다.

양부(줄례) - 홀명(341-412)

양부(골황) - 양단(354- ) 

 

서로 뜻이 맞음을 즐거워하면서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춘추 63세로 많은 사람들이 아까워하였다.


 

 

 

 

유례왕 8년(A.D.357)

 

正月 宣檍伊伐飡 登翬稟主 翬沾解帝女也

 

정월 <선억宣檍>을 이벌찬, <등휘登翬>를 품주로 삼았다.

 

<등휘登翬>는 첨해제(沾解帝)의 딸이다.


 

三月 賑四窮而爵異行者

 

3월 사궁(四窮)을 구휼하고 이행(異行)자에게 작(爵)을 내렸다.


 

五月 倭又來侵長峰城 擊退之

 

5월 왜(倭)가 또 장봉성(長峰城)을 침입하였으나, 격퇴(擊退)하였다.


 

七月 多沙郡進嘉禾 棠盧伊伐飡 登介稟主 介登翬異父妹也 皆冬禮女登世生也

 

7월 다사군(多沙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다사군은 지금의 하동이다.


<당노棠盧>를 이벌찬, <등개登介>를 품주로 삼았다.

 

<등개登介>는 <등휘登翬>의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다.

 

모두 <동례冬禮>의 딸 <등세登世>가 낳았다.


 

유례왕 11년

여름에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였다.

7월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왕 9년(A.D.358)

 

正月 奈宗伊伐飡 道明稟主

 

정월 <내종奈宗(317- )>을 이벌찬, <도명道明(319- )>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帝以倭寇如鼠竊 欲滅其國而除根 弘權諫曰

彼地遠 莫預度 吾人不習於水 不可遠征 况夫余多詐乎乃止

仙帝與休禮奈勿祀花林 見奈勿進退得其節奠 薦合其儀而贊之 曰 朕有孫也

乃賜龍天命學于末仇 末仇曰 聖人用光 良將用威 常夫用刃 吾兒欲學其何

奈勿曰 願聞其由

末仇曰 用光則可以祀上帝理萬民 用威則可以鎭三軍制勝敗 用刃則可以蔽身敵人也

奈勿曰 害人而圖 已非吾願也 願學活人之道末仇大悅 敎以用光之學

 

2월 왕이 왜구(倭寇)가 쥐새끼와 같이 도둑질하니,

그 나라를 멸망시키어 뿌리 뽑기를 원하였다.

 

<홍권弘權>이 간하여 말하기를

 

“저 나라의 땅은 멀고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으니

원정(遠征)을 하는 것을 불가합니다.

더군다나 부여(夫余)는 속임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쳤다.

 

<홍권>은 미추왕 20년(344)에 병관이찬이 되었다.


 

유례왕 12년

봄에 왕이 신하에게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서불한 홍권이

“우리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모험삼아 원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 밖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백제는 사술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병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옳다”고 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제(仙帝){미추}가 <휴례休禮>, <내물奈勿>과 더불어 화림(花林)의 제사를 지냈다.

 

<내물奈勿>이 나아갔다가 물러남을 보고 제사예절을 알고 있음을 알았는데,

 

제사의식을 통합하기를 천거하자 <미추>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짐에게 손자가 있음이로다.”라고 하고

 

이에 용천도(龍天釰)를 내리며

<말구末仇(297-358)>에게 쓰는 법을 배우라고 명하였다.

 

<말구末仇>가 말하기를

 

“성인은 빛으로 사용하고, 좋은 장수는 위엄으로 사용하며,

평범한 사내는 병기(刃)로 쓴다.

내 아들이 배우려하니 너는 장차 어찌 사용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물奈勿>이 말하기를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말구末仇>가 말하기를

 

“빛으로 쓴다는 것은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고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요,

위엄으로 쓴다는 것은 삼군(三軍)을 따르게 하여 승패를 만들어내는 것이요,

병기(刃)로 쓴다는 것은 몸을 가리고 다른 사람과 겨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물奈勿>이 말하기를

 

“사람을 해치게 하는 것이라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배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말구末仇>가 크게 기뻐하며 빛을 쓰는 학문을 가르쳤다

 

때 미추 67세, 말구 62세, 휴례 28세, 내물 9세이다.


 

五月 行黃馬祭

 

5월 황마(黃馬=戊午)제를 행하였다.


 

六月 末仇角干以暑痢疾篤 密召大西知傳其秘藏 曰

吾疾而父帝已老 可信者唯汝 吾死汝其妻吾妻 而子吾子 以紹花林大統

命休禮與大西知同枕而誓 先是休禮愛末仇兵官好臨 密與相通 故欲以好臨爲繼夫而托

以月事而沮之 後數日末仇竟不起 休禮悲歎與奈勿禱于靈廟

末仇長子冬九郞常慕休禮之美 自以爲當爲休禮繼夫 不謹禱事 而反戱于休禮 曰

父死吾當爲汝夫 何歎之

爲休禮鄙其人 而不與之 酬應及末仇薨 與其弟城九郞 假稱末仇遺命 逼休禮强淫之

休禮泣訴于好臨 好臨奏於仙帝 而流冬仇於管城 城九於阿瑟羅

休禮乃請于仙帝 欲以好臨爲夫 仙帝以其父微歎之 休禮不能

自己私引好臨爲夫婦而同處 大西知不悅 曰 嫂當爲吾妻 何愛艾少 而負兄遺命乎

休禮曰 吾心欲從汝 而好臨乃阿后之寵子也 安得負之乎

大西知發歎 而出 奈勿謂休禮 曰

父嘗言 妻吾妻 子吾子 叔父固當爲母夫 而兵官則不可爲也

休禮曰 母之所夫 卽汝父也 汝何以不呼曰父 而稱兵官乎

時與休禮新夫好臨 情好甚密 故奈勿妬之 不稱父而呼 以兵官而侮之

休禮乃請於光明后 曰 臣子慕聖女 可留宮中

先是黃馬祭日 后召奈勿於道留宮中 同處一夜時 奈勿九歲 道留七歲

而情意相得 不欲相離 故仍留之 及末仇疾篤而出故也

后知休禮與好臨相愛 而遠其子 笑許之 曰 汝愛吾弟 忌吾婿乎

休禮慙而退 后召奈勿與道留 置左右而撫之雛鳳凰甚可愛

休禮不知此樂 及雍判生 后以其乳幷授奈勿

 

6월 <말구末仇> 각간이 더위와 이질(痢疾)로 위독해지자,

은밀히 <대서지大西知(314-382)>를 불러 그 비장(秘藏)을 전하여 말하기를,

 

말흔(술례) - 말구(297-358)

말흔(유모) - 대서지(314-382)

대서지는 말구의 이복동생이다.

 

“내가 병들었지만 부제(父帝){미추}는 이미 늙었으니

가히 믿을만한 자는 오직 너 뿐이구나.

내가 죽거든 너는 장차 나의 처를 아내로 삼고,

나의 아들을 아들로 삼아 화림(花林)의 대통을 잇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화림은 알지(세한=성한)의 탄생지이다.

 

그로 말미암아 <휴례休禮>에게 <대서지大西知>와 동침하여 맹세하도록 하였다.

 

이전에 <휴례>가 <말구>의 병관 <호임好臨(333-367)>을 사랑하여

은밀히 더불어 상통(相通)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호임을 계부(繼夫)로 삼아 의지하려고,

월사(月事){월경}를 핑계로 동침을 막았다.

 

며칠 후에 <말구>가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자,

<휴례>가 비탄(悲歎)에 빠져 <내물>과 함께 영묘(靈廟)에서 빌었다.

 

<말구>의 장자(長子) <동구冬九(330?-390)>郞은

항상 <휴례>의 아름다음을 사모하다가,

스스로 당연히 <휴례>의 계부(繼夫)가 될 것으로 여겼다.

 

말구(탕례) - 동구(330?-390)

                  성구(332?- )

미추(달례) - 휴례(331-399)

 

삼가하여 기도하지 않고, 반대로 <휴례>를 희롱하며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당연히 너의 남편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한숨을 짓는 것처럼 가장하느냐?”라고 하였다.

 

<휴례>가 그 사람됨을 더럽게 여겨 함께 함을 수응(酬應)하지 않았는데,

<말구>가 죽자 그의 동생 <성구城九>郞과 더불어

<말구>의 유명(遺命)이라 가칭(假稱)하여 <휴례>를 핍박하여 강음(强淫)하였다.

 

<휴례>가 <호임好臨>에게 읍소(泣訴)하니 <호임>이 선제(仙帝)에게 아뢰어,

<동구冬九>는 관성(管城)에, <성구城九>는 아슬라(阿瑟羅)에 유배 보냈다.

 

<휴례>가 이에 선제에게 청하여 <호임>을 남편 삼고자 원하니,

선제가 그 아비의 신분이 미미함을 탄식하였다.

 

<호임>은 <휴례>보다 2살 연하로 <아이혜>가 <호산>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휴례>는 자신의 능력 밖이어서

사사로이 <호임>을 데려와서 부부가 되어 같이 살았다.

 

<대서지>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형수는 마땅히 나의 처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 나이 어린 어린애를 사랑하여 형의 유명(遺命)을 저버리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휴례>가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당신을 따르고 싶으나,

<호임>은 아후(阿后){아이혜}의 총자(寵子)이니 어찌 저버릴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대서지>가 한탄하며 나가버리니,

 

<내물>이 어머니 <휴례>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버지가 일찍이 <대서지>에게 말하기를 나의 처를 아내로 삼고,

나의 아들을 아들로 삼으라 하였으니,

숙부만이 오로지 어머니의 남편이 될 수 있으며, 병관은 불가합니다.”

라고 하였다.

 

<휴례>가 말하기를

 

“어미의 남편이 곧 너의 아버지이다.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라 하지 않고, 병관이라 부르느냐?”라고 하였다.

 

당시 <휴례>와 새 남편 <호임>이 서로의 뜻이 맞고 아주 사이가 좋아서

그런 연유로 <내물>이 시새움하여 아버지라 칭하지 않고, 병관이라 모욕한 것이었다.

 

이때 <휴례> 28세, <호임> 26세, <내물> 9세, <광명> 35세이다. 

 

<휴례>가 이에 <광명>후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신의 아들이 성녀(聖女)를 사모하니 궁중에 머무르게 할만합니다.”하였다.

 

지난 달 황마제(黃馬祭)의 날에

후(后)가 <내물>을 도류궁(道留宮)에 불러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당시 <내물>은 9살이요, <도류>는 7살이었으나

정의(情意)가 상득(情意)하여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니

그런 연유로 머무르게 하였는데, <말구>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내보내었던 까닭이다.

 

<도류>는 <미추>와 <광명>의 딸이다.

 

후(后){광명}가 <휴례>와 <호임>이 서로 사랑하여

그 아들을 멀리함을 알고는 웃으며 허락하여 말하기를

 

“네가 내 아우{호임}를 사랑하여 내 사위{내물}를 꺼리는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휴례>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후(后)가 <내물>을 불러 <도류>와 좌우에 두어 어루만졌다.

 

새끼 봉황(鳳凰)이 심히 사랑스러울 만 하였는데,

<휴례>는 이러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였다.

 

<옹판雍判>{미추와 광명의 딸,도류의 동생}을 낳음에 이르자,

<광명>후가 그 젖을 <내물>에게도 함께 주었다.



 

七月 螺門伊伐飡 旱元稟主 螺門冬禮子冬門之子也 旱元沾解女也

或曰 阿后通嬖臣而生也

 

7월 <라문螺門>을 이벌찬으로 <한원旱元(313- )>을 품주로 삼았다.

 

<라문螺門>은 <동례冬禮>의 아들 <동문冬門>의 아들이다.

 

<한원旱元>은 <첨해沾解>의 딸이다.

 

혹은 아후(阿后)가 폐신(嬖臣)과 통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유례왕 10년(A.D.359)

 

正月 連石伊伐飡 棠月稟主 連石蘭石所生連音子也 棠月仙帝寵妾也

 

1월 <연석連石>을 이벌찬, <당월棠月>을 품주로 삼았다.

 

<연석連石>은 <난석蘭石>이 낳은 <연음連音>의 아들이다.

 

<당월棠月>은 선제(仙帝) 총첩(寵妾)이다.


 

四月 造太陰神鏡十二面 奉于四山

仙帝命 光明后總執政事 帝出居挑山 仙帝入居花林宮 命大西知行六軍頭上

 

4월 태음신경(太陰神鏡) 12면을 만들어 4산(四山)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선제(帝命)의 명으로 광명후(光明后)가 나라 안의 정사를 총괄 집행하였다.

 

왕은 도산(挑山)으로 나가 살고, 선제는 화림궁(花林宮)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대서지大西知(314-382)>에게 명하여 6군두상의 집무를 행하게 하였다.

 

 

※ 아이혜(286-362)의 자녀

 

벌휴(자황) - 골정(207-285)(옥모) - 홍모(261- )

                  이매(211-235)(내례) - 내해(230-291)

                 

내해(홍모) - 아이혜(286-362)

 

조분(아이혜) - 성원(304- )

                     명원(307- )

                     광원(310-392)

                     광명(324-392)


첨해(아이혜) - 한원(313- )

                     도명(319- )

 

미추(아이혜) - 소명(322- )

                     백명(327- )

 

군백(아이혜) - 삼원(316- )

 

걸숙(아이혜) - 기림(330-372, 15대왕 재위 364-369)

 

호산(아이혜) - 호림(333-367)

 

아이혜는 내해와 홍모의 딸로서 조분, 첨해, 미추 세명의 왕과 군백으로 부터 

딸 9명을 낳고 조분의 아들인 걸숙에게서 아들 기림을 낳고

호산에게서 아들 호림을 낳았다. 

 

五月 休禮生好臨子好勿 賜米衣

 

5월 <휴례休禮>가 <호림好臨>의 아들 <호물好勿>을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미추(달례) - 후례(331-399)(호림) - 호물(359-418) 

 

 

※ 휴례(331-399)의 자녀

 

미추(달례) - 휴례(331-399)

 

말구(휴례) - 내물(350-402 17대왕 재위 377-401)

                  야물(353- )

                  소물(356- )

 

호림(휴례) - 호물(359- )

 

대서지(휴례) - 대물(363- )

                     초물(365- )

                     성물(377- ) 

 

심(휴례) - 용물(368- )

 

내물(휴례) - 준물(380- )

 

장흔(휴례) - 물흔(383- )

 

휴레는 미추와 달례의 딸로서 자녀는 6남 4녀이다.


 

六月 禮生生大西知子馬兒 仙帝視兒 賜米

 

6월 <예생禮生>이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마아(馬兒){실성}를 낳았다.

 

선제(仙帝)가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구도(녹모) - 말흔(술례) - 말구(휴례) - 내물(350-402)

                  말흔(유모) - 대서지(314-382)

 

중해(등세) - 등보(삼원) - 예생(339?-403)

                 

대서지(예생) - 마아=보금=실성(359-417,18대왕 재위 402-416)

 

대서지는 말구의 이복동생이고 내물의 삼촌이다. 


 

七月 登非伊伐飡 千骨稟主 登非登保弟也 皆登世生也

其父仲解玉帽太后所生奈解子也 沾解帝兄也 千骨日骨女也助賁女千氏生也

 

7월 <등비登非>를 이벌찬, <천골千骨>을 품주로 삼았다.

 

<등비登非>는 <등보登保>의 동생으로, 모두 <등세登世>가 낳았다.

 

<등비登非>의 아버지 <중해仲解>는 <옥모玉帽>태후가 낳은 <내해奈解>의 아들이며,

첨해제(沾解帝)의 형이다.

 

<천골千骨>은 <일골日骨>의 딸이고, <조분助賁>의 딸 <천씨千氏>가 낳았다.


<중해>는 <첨해>보다 6살 어린 동생으로 280년생이다.


 

十月 以基臨爲副君 攝行光明后事 時阿后老昏政事 皆委於仙帝及光明 仙帝知光明之意 在基臨及訖解 訖解以于老之子 欲執軍權 仙帝乃與基臨 約以花林軍權 而立之 以制訖解 初基臨與訖解爲光明后左右私臣 情意甚密 至是遂相疎疑 互相有黨

 

10월 <기림基臨>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광명光明>후의 일을 섭행(攝行) 하였다.

 

당시 아후(阿后)가 늙어 정신이 흐리니,

정사는 모두 선제(仙帝)와 <광명光明>에게 위임하였다.

 

선제는 <광명光明>의 뜻이 <기림基臨>과 <흘해訖解>에게 있음을 알고,

<흘해訖解>는 <우로于老>의 아들로 군권을 잡기를 바라므로,

선제가 이에 <기림基臨>과 화림(花林)을 약속하고 군권(軍權)을 세운 것으로,

<흘해訖解>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처음에 <기림基臨>과 <흘해訖解>는 <광명光明>후의 좌우사신(左右私臣)으로,

정의(情意)가 매우 친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로 멀리하고 의심하여 상호간에 당(黨)이 있었다.

 

<기림>은 <광명>의 포제이고, <흘해>는 <광명>의 언니 <명원>의 아들이다.

 

산라의 왕권이 <아이혜>후에서 <아이혜>의 딸 <광명>으로 이어져

<광명>의 명으로 석씨인 <기림>과 <흘해>에게 계승된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신국(神國)의 나라이고, 이성(二聖)의 나라이고, 여왕의 나라이다.

 

 

※ 광명(324-392)의 자녀

 

조분(아이혜) - 광명(324-392)

 

미추(광명) - 막희(342?- )

                  인송(344?- )

                  족송(346?- )

                  졸류(348?- )

                  솔류(348?- )

                  고류(350?- )

                  도류(352-376)

                  담판(354?- )

                  잡판(356?- )

                  옹판(358- )

                  보반(360-428)

                  내류(362-432)

 

유례(광명) - 기탄(364- )

 

기림(광명) - 속탄(366- )

                  동탄(366?- )

                  근단(369- )

                  석단(371- )

 

흘해(광명) - 방단(374- )

 

내물(광명) - 호동(376-405)

                  숙단(378- )

                  성단(381- )

 

조분과 아이혜의 딸인 광명은 미추, 유례, 기림, 흘해. 내물,

다섯 왕으로 부터 2남 19녀를 낳았다.

 

내물에게서 낳은 두 아들이 호동과 숙단이다.

                 

                  


 

 

 

 

유례왕 11년(A.D.360) 백원(白猿=庚申)

 

正月 大西知伊伐飡 禮生稟主 禮生三元所生登保女也 美而善舞 大西知以三元情夫

愛禮生過情 竟相通而生子 至是稟主

 

정월 <대서지大西知(314-382)>를 이벌찬, <예생禮生(339?-403)>을 품주로 삼았다.

 

<예생禮生>은 <삼원三元(316- )>이 낳은 <등보登保(317-380)>의 딸이다.

 

아름답고 춤에 능하였다.

 

<대서지大西知>는 <삼원三元>의 정부(情夫)인데 <예생>을 사랑함이 지나쳐서

결국엔 상통(相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때에 이르러 품주가 되었다.

 

대서지(예생) - 실성(359-417)


八月 光明后生仙帝女保反 仙帝洗之 命帝與副君更執政

禮生遂蒨薦于帝 帝酷愛禮生 使不出宮 大西知失妻 欲復得休禮

休禮生好勿 而思見奈勿迎歸 奈勿累言 負其父命 休禮與好臨 情愛少衰頗有意焉

光明后亦因奈勿之請 命好臨歸之 曰

休禮當爲大西知妻 而汝恃母后之寵而母后崩則 汝必受人譏也 可歸之

好臨曰 母后已昏 臣以姉后爲母 兄君爲父 安敢不奉乎

遂歸之 而不忍情慕 竟爲心疾

云 一說 休禮憐 大西知慕己 而不近私女 禮生入宮 家臣議納代房

大西知曰 吾嫂在 何可別娶

休禮聞之 益憐之 密詣大西宅 私通之 好臨知之怒 訴于光明及其兄基臨

光明愛奈勿而責好臨 帝亦禮生右於大西知 獨基臨愛其弟 責大西知

大西知曰 嫂爲弟妻 自古之例也 誰敢言非乎

基臨怒 欲治之 帝曰 大西之言 是也 汝何愛蘗弟 而責重臣乎

基臨乃泣 命好臨絶之 好臨不能絶之 休禮亦兩處 而不忍棄好臨

時奈勿與道留學歌于帝 帝爲之歌曰 有龜住海 其穴在山

奈勿問其意 禮生在傍 笑曰 背負三神山 而足蹴八海浪故也

帝曰 又有別意

禮生止之 曰 休禮以我之故兩難 汝何嘲之奈勿乃解其意 請以母 歸大西知

 

8월에 광명후(光明后)가 선제의 딸 <보반保反(360-428)>을 낳으니,

선제(仙帝)가 <보반>을 씻겨주었다.

 

이때 선제 미추 69세, 광명 37세이다.

 

명(命)으로 왕에게 부군과 함께 다시 집정(執政)하게 하여,

<예생禮生>이 왕에게 천거되어 품주가 되었다.

 

왕이 <예생>을 몹시 사랑하여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대서지大西知>가 아내를 잃자, 다시 <휴례休禮>를 얻기를 원하였다.

 

<휴례>는 <호물好勿>을 낳고 <내물奈勿>을 그리워함을 드러내며

맞이하여 만나보고 싶어 돌아가려하였다.

 

<내물>이 누차로 말하길 아버지의 유명을 저버리고는

<휴례>와 <호림>의 정애(情愛)는 조금은 쇠하여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자못 그말에 뜻이 있었다.

 

<광명>후가 또한 <내물>의 청으로 인하여

 

<호림>에게 <휴례>를 <대서지>에게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휴례>는 마땅히 <대서지>의 처가 되어야 할 것이나,

네가 모후(母后){아이혜}의 총애를 믿고 빼앗았다.

 

모후가 돌아가시면 너는 반드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돌려주어야 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호림>은 <광명>의 포제이다.

 

<호림>이 말하기를

 

“모후(母后){아이혜}가 이미 정신이 혼미하니,

신은 자후(姊后){광명}를 어머니로 삼고, 형군(兄君){기림}을 아버지로 삼으려 하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광명>과 <기림> <호림>은 모두 아버지가 다른 <아이혜>의 자식이다.

이때 <광명> 37세, <기림> 31세, <호림>28세, <대서지> 47새, <휴례> 30세이다.

 

조분(아이혜) - 광명 

걸숙(아이혜) - 기림

호산(아이혜) - 호림

 

마침내 <휴례>를 돌려보냈으나,

사랑과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마음의 병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휴례>는 <대서지>가 자신을 사모하여

사녀(私女)와 가까이 하지 않음을 좋게 여겼고,

<예생禮生>이 입궁하자,

가신(家臣)들이 안주인을 대신할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을 의논하였다.

 

<대서지>가 말하기를

 

“나의 형수가 있는데 어찌 다른 아내를 맞이함이 가당하겠느냐?”라고 하였다.

 

<휴례>가 그 말을 듣고 <대서지>를 더욱 좋게 여겨,

은밀히 <대서지>의 집에 와서 사통(私通)하였다.

 

<호림>이 이를 알고 노하여 <광명>과 그의 형 <기림基臨>에게 하소연하니,

<광명>은 <내물>을 사랑하여 <호림>을 꾸짖었고,

왕 역시 <예생>을 빼앗고 <대서지>를 도우니,

오직 <기림基臨>만이 그 아우를 사랑하여 <대서지>를 꾸짖었다.

 

<대서지>가 말하기를

 

“형수가 아우의 처가 됨은 옛날부터의 예(例)입니다.

누가 감히 그르다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기림>이 노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대서지>의 말이 옳다.

너는 어찌 얼제(蘗弟)를 사랑하여 중신을 꾸짖으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기림>이 이에 울면서 <호림>에게 <휴례>와 절교하도록 명하였다.

 

<호림>은 <휴례>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휴례> 또한 양쪽에 거처하면서 <호림>을 차마 버리지 못하였다.

 

당시 <내물(350-402)>은 <도류道留(352-376)>와 함께 왕에게서 노래를 배웠는데,

 

왕이 그것을 노래삼아 말하기를

 

“바다에 사는 거북이는, 그 굴은 산에 있다네.”라고 하였다.

 

<내물>이 그 의미를 묻자 <예생>이 곁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삼신산(三神山){대서지를 말함}을 등에 지고,

족히 팔해(八海)의 파도를 차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또 다른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예생>이 말을 그치게 하며 말하기를

 

“<휴례>는 나로 인하여 양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당신은 어찌 조롱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내물>이 이에 그 뜻을 알아차리고, 어머니를 <대서지>에게 시집가도록 청하였다.


 

 

 

 

유례왕 12년(A.D.361)

 

正月 軟老伊伐飡 登勿稟主 軟老公兌兄也 登勿登非妹也

休禮與大西知 行吉于鮑祠 帝與禮生主之 休禮復受六軍朝禮 壯士多悅之

 

정월 <연노軟老>를 이벌찬, <등물登勿>을 품주로 삼았다.

 

<연노軟老>는 <공태公兌>의 형이다. <등물登勿>은 <등비登非>의 여동생이다.


<휴례休禮>와 <대서지大西知>가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왕과 <예생禮生>이 주재하였다.

 

<휴례>가 다시 6군(六軍) 조례(朝禮)를 받았는데, 많은 장사들이 기뻐하였다.


 

三月 帝幸大西宅 宴飮 休禮奉歌受幸

時帝與副君不合 帝右於大西知 而累幸于宅 封休禮爲權妻 加奴婢田宅

 

3월 왕이 <대서지>의 집에 행차하여 술잔치를 벌였다.

 

<휴례休禮>가 노래를 바치며 왕의 행차를 받았다.

 

당시 왕과 부군이 마음이 맞지 않아서, <대서지>가 왕을 보좌하여,

누차로 <대서지>의 집에 행차하였다.

 

<휴례休禮>를 봉(封)하여 권처(權妻)로 삼고 노비와 논밭과 집을 더하여주었다.


 

七月 行白鷄大祭 以乳帽爲大監 德帽爲主 長禮螺月副之 遂虹伊伐飡 秦葉稟主

 

7월 백계(白鷄=辛酉) 대제(大祭)를 행하였다.

 

<유모乳帽(277-366)>를 대감(大監)으로, <덕모德帽>를 주(主)로,

<장례長禮(288?- )>와 <라월螺月>을 부(副)로 하였다.


<수홍遂虹>을 이벌찬, <진엽秦葉>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權妻白海生帝子道寧 休禮入賀于帝 白解者訖解女兄也

訖解亦爲帝黨 而欲引大西知爲援 與基臨違和故也 大西知命入賀

 

10월 권처(權妻) <백해白海(325- )>가 왕의 아들 <도녕道寧>을 낳았다.

 

첨해(명원) - 백해(325- )

우로(명원) - 흘해(329-392) 

 

<휴례休禮>가 와서 왕에게 축하하였다.

 

<백해>는 <흘해訖解>의 누나이고,

<흘해> 또한 왕의 무리로 <대서지大西知>를 끌어들여 돕게 하고자 하였다.

 

대개 <기림基臨>과 위화(違和)한 때문인데,

<대서지>의 명(命)으로 축하하러 온 것이다.


 

 

 

 

유례왕 13년(A.D.362) 수구(水狗=壬戌)

 

正月 長昕伊伐飡 白明稟主 長昕大西知胞弟也 白明仙帝女也 光后胞妹也

 

정월 <장흔長昕>을 이벌찬, <백명白明>을 품주로 삼았다.

 

<장흔長昕>은 <대서지大西知>의 포제(胞弟)이다.

 

<백명白明>은 선제(仙帝)의 딸이고 광명후의 포매(胞妹)이다.

 

말흔(유모) - 대서지(314-382)

                  장흔(316?-392)

 

조분(아이혜) - 광명(324-392)

미추(아이혜) - 백명(327- ) 

 


 

四月 道留宮成 奈勿自休禮宮率其奴婢 移其西宮 道留自宮中 亦率奴婢移其東宮

修齋三七日 至五月午日 行吉于桃山仙宮 仙帝與光后主之

 

4월 도류궁(道留宮)이 완성되어, <내물奈勿>은

휴례궁(休禮宮)에서 노비를 이끌고 도류 서궁(西宮)으로 이사하고,

<도류道留>는 궁중에서 역시 노비를 이끌고 도류 동궁(東宮)으로 이사하였다.

 

삼칠(三七, 21)일 동안 수재(修齋)하고,

5월 5일에 이르러 도산 선궁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선제(仙帝)와 광후(光后){광명}가 주재하였다.

 

말구(휴례) - 내물(350-402 17대왕 재위 377-401)

미추(광명) - 도류(352-376)

이때 내물 13세, 도류 11세이다.

도류는 내물이 즉위하기 1년전에 25세의 나이로 산고로 죽었다.

내물과 도류 사이에 2명의 아들 <곽이>와 <장외>가 있다. 


 

六月 光后與道留奈勿 謁花林世神 浴于新林神池

奈勿年才十三 而骨已成 能抱后洗之 后大悅 曰

不久可 以行祥受禪 隆準龍顔 如汝者 未有不帝盖花林神感之 使奈勿烝后 云

 

6월 광후(光后)가 <도류道留>와 <내물奈勿>과 더불어

화림(花林) 세신(世神)을 찾아뵙고 신림(新林) 신지(神池)에서 목욕하였다.

 

<내물>의 나이 겨우 13이나 기골(氣骨) 이미 장성하여

후(后)를 안고 씻겨줄 수 있었다.

 

후(后)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겠구나.

너와 같이 융준용안(隆準龍顔)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라고 하였다.

 

대개 화림의 신이 감응하여 <내물>로 하여금 후를 증(烝)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화림은 김알지(세한=성한)의 탄생지로 화림세신은 <구도>세신을 말하며

화림의 신은 김알지를 말한다.

이때 <내물> 13세, <광명>후 39세이다. 

내물은 광명후에 의하여 석씨인 흘해를 이어 17대왕으로 즉위한다.


 

七月 于茁伊伐飡 昭明稟主 于茁者訖解兄也 達禮生也

昭明者光后胞姉也 亦花鼻?烝於阿后而生也

 

7월 <우줄于茁>을 이벌찬, <소명昭明>을 품주로 삼았다.

 

<우줄于茁>은 <흘해訖解>의 형이고, <달례達禮>의 소생이다.

 

<소명昭明>은 광후(光后)의 어머니가 같은 언니다.

 

또한 <화비花鼻>가 아후(阿后)를 증(烝)하여 낳았다.

 

우로(달례) - 우줄(320?- ) 

우로(명원) - 흘해(329-392)

 

미추(아이혜) - 소명(322- )

조분(아이혜) - 광명(324-392)


 

九月 光明生女內留 或云仙帝女也 或云帝女 或云副君女 或云嬖臣紅兒烝而生也

仙帝洗之

阿爾兮神后崩 春秋七十七 后奈解女也 母紅帽后骨正女也

初爲助賁后 聰明善決政事 助賁沈惑神仙 盡以政事委之

后乃樹權內外 歷事沾解味鄒及帝 而皆以己意立之

骨門有不平者則流之 及專國政 多畜私嬖 人多非之 而能執大體 終始信任仙帝不使

私嬖得志 至是嬖臣好山君白花鼻等從殉者甚多 盖亦見聖德矣

 

9월 <광명光明>이 딸 <내류內留>를 낳았다.

 

혹은 선제(仙帝){미추}의 딸이라고 하고,

혹은 왕(帝){유례}의 딸이라고도 하고,

혹은 부군(副君){기림}의 딸이라고 하고,

혹은 폐신(嬖臣) <홍아紅兒>가 증(烝)하여 낳았다고 한다.

 

선제가 아기를 씻겼다.


<아이혜阿爾兮>신후(神后)가 춘추 77세로 죽었다.

 

후는 <내해奈解>의 딸이고 어머니 <홍모紅帽>후는 <골정骨正>의 딸이다.

 

처음에 <조분助賁>의 후가 되었는데 총명하고 정사를 결단함에 능하니,

<조분>이 신선에 침혹(沈惑)되어 정사를 모두 후에게 위임하니,

후가 이에 내외(內外)에 권세를 심고,

<첨해沾解> <미추味鄒>, 그리고 왕(帝){유례}까지 두루 섬기었는데,

모두 자신의 뜻대로 세웠다.

 

골문(骨門)에서 불평하는 이가 있으면 유배를 보내고,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함에 이르자 많은 사사로운 폐신을 기르니

많은 사람들이 잘못이라 하였다.

 

능히 대체(大體)를 처리할 줄 알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선제{미추}를 신임하였다.

 

사사로운 폐신들이 득지(得志)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폐신(嬖臣) 호산(好山){호림의 父}, <군백裙白>{삼원의 父},

<화비花鼻>{소명의 父} 등 따라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그래서 역시 성덕(聖德)을 보인 것이다.


 

十月 仙帝亦崩 仙帝勤于阿后疾染其疾

藥師等欲治之 而不許 曰 后已崩 朕獨何心 生存乎 當從于天上矣

竟殉于后 云 遂葬于大陵 十一月 帝與光后行祥

 

10월 선제(仙帝) 역시 죽었다.

 

선제는 아후(阿后)의 질병을 부지런히 간호하였는데, 마침내 그 질병에 전염되었다.

 

약사(藥師) 등이 고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후가 이미 죽었는데 짐이 혼자 무슨 마음으로 살겠느냐.

마땅히 하늘로 따라서 올라가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후를 따라 죽었다고 한다.

 

드디어 대릉(大陵)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11월 왕과 광후(光后)가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아이혜를 이어 아이혜의 딸인 광명이 여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유례왕 14년(A.D.363)

 

正月 智良伊伐飡 軟松稟主 智良者帝之從兄夫良之子也

夫良之母阿夫禮 帝母阿召禮之胞姉也

夫良與良夫爲叔侄 力扶帝有功 智良亦終始右帝

至是登相 軟松軟老胞妹也 其父奈松述禮太后長女奈述之子也

以長圻一吉飡 順宣執書郞 來益執事郞 方夫執理郞 皆光后寵臣也

 

以達禮爲桃山主

 

1월 <지량智良>을 이벌찬, <연송軟松>을 품주로 삼았다.

 

<지량智良>은 왕의 종형(從兄) <부량夫良>의 아들이다.

 

<부량夫良>의 어머니 <아부례阿夫禮>는

왕의 어머니 <아소례阿召禮>의 같은 어머니의 언니이다.

 

<부량夫良>은 <양부良夫>와 숙질(叔侄)로 삼아, 왕을 힘써 도운 공이 있었는데,

<지량智良>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왕을 도우니, 이 때에 이르러 재상이 되었다.

 

<연송軟松>은 <연노軟老>의 어머니가 같은 여동생이고,

그의 아버지 <내송奈松>은 <술례述禮(256-338)>태후의 장녀

<내술奈述(274?- )>의 아들이다.


<장기長圻>를 일길찬으로, <순선順宣>을 집서랑(執書郞)으로,

<내익來益>을 집사랑(執事郞)으로, <방부方夫>를 집리랑(執理郞)으로 삼았다.

 

모두 광후(光后)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다.


<달례達禮(303-371)>를 도산주(桃山主)로 삼았다.

 

조분(아소례) - 달례(303-371)


 

二月 帝與光明后 祀祖廟

休禮生大西知子大勿

 

2월 왕과 광명후(光明后)가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휴례休禮>가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대물大勿>을 낳았다.


 

三月 葬阿后分骨大陵 乞淑角干從殉之

光后亦副君而不許赴殉 乞淑竟自裁 而從之 命特以太公禮葬于后壙

禮生生帝女吉莫

命奈勿入兵官 習弓馬

 

3월 아후(阿后)를 분골(分骨)하여 대릉(大陵)에 장사를 지냈다.

 

<걸숙乞淑>각간이 따라 죽었다.

 

광후(光后)가 부군(副君)을 위하여 따라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걸숙>이 끝내 자재(自裁)하자, 특별히 태공(太公)의 예로

아후의 구덩이에 장사지내도록 명하였다.


<예생禮生>이 왕의 딸 <길막吉莫>을 낳았다.


명으로 <내물奈勿>을 병관으로 들어오게 하여, 궁마(弓馬)를 배우게 하였다.

 

아이혜가 죽자 미추, 걸숙, 호산, 군백, 화비등이 순사하였다.

신라가 여왕의 나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四月 群臣尊光后爲神后

達隼生好臨子西今

 

4월 군신(群臣)들이 광후(光后)를 높이어 신후(神后)로 하였다.


<달준達隼>이 <호림好臨>의 아들 <서금西今>을 낳았다.


 

五月 伊西國來侵 長昕率三軍擊之

有神兵 皆珥竹葉 而來助戰 大破之 皆歸大陵 乃行陵祭

 

5월 이서국(伊西國)이 쳐들어와서 <장흔長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싸웠다.

 

신병(神兵)이 있어 모두 댓잎을 귀에 꽂았는데 와서 전쟁을 도우니

적을 크게 깨뜨렸다.

 

모두 대릉(大陵)으로 돌아가니, 이에 대릉에 제사를 지냈다.

 

이서국은 지금의 경북 청도이다.


 

유례왕 14년

정월 지량을 이찬에, 장흔을 일길찬에, 순선을 사찬에 임명하였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우리나라가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이를 방어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았는데

우리 군사와 함께 적군을 쳐부수고 난 후에는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수만 개의 댓잎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우셨다.”고 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七月 勿品伊伐飡 淡仁稟主 勿品帝姉宝太子也 宝黃之弟也 淡仁足色子于色女也

勿品與長昕共伐 伊西賊平之 以攻進之也

 

7월 <물품勿品>{박제상의 父}을 이벌찬, <담인淡仁>을 품주로 삼았다.

 

<물품勿品>은 왕의 누나 <보태宝太>의 아들이고, <보황宝黃>의 남동생이다.

 

<담인淡仁>은 <족색足色>의 아들 <우색于色>의 딸이다.

 

<물품勿品>은 <장흔長昕>과 함께 이서(伊西)의 적을 평정하였는데,

이로써 진격하여 나아가게 하였다.

 


 

八月 長昕等進平 伊西國爲大城郡

阿爾兮后時 不平之臣多流於伊西 遂與其君作亂 引兵來侵

勿品以奇計邀之 先挫其威 長昕大軍繼之破其軍 進圍其城降之

悉捕其黨 或誅 或流 仍廢其國

 

8월 <장흔長昕> 등이 이서국(伊西國)을 평정하여 대성군(大城郡)으로 삼았다.

 

<아이혜阿爾兮>후 때에 불평하는 많은 신하들은 이서에 유배 보냄이 많았는데,

마침내 이서국의 왕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병사를 이끌고 침략해왔다.

 

<물품勿品>이 기계(奇計)로 불러내어, 먼저 그 위세를 꺾고

<장흔長昕>의 대군이 이어져 그 군(軍)을 깨뜨렸다.

 

나아가 그 성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그 무리를 모두 잡아 혹은 죽이고, 혹은 유배 보내고, 이에 그 나라를 폐한 것이다.


 

 

 

 

유례왕 15년(A.D.364) 청서(靑鼠=甲子)

 

正月 汗聖伊伐飡 玄宝稟主 汗聖亦與長昕 平伊西功也

 

정월 <한성汗聖>을 이벌찬, <현보玄宝>를 품주로 삼았다.

 

<한성汗聖> 또한 <장흔長昕>과 더불어 이서(伊西)를 평장한 공이다.


 

二月 大霧五日 不辨咫尺 都中多流言 命禁之

 

2월 안개가 닷새 동안 심하게 끼어 지척(咫尺)을 구분할 수 없었다.

경도에 많은 유언비어가 퍼져 명으로 금하게 하였다.


 

유레왕 15년

2월 서울에 안개가 심하여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안개는 닷새 만에 개었다.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는 유례왕 15년에 <광명>후의 명으로 <기림>에게 선위하고

3년후인 기림왕 4년인 367년 2월에 62세로 죽었다.


 

七月 謁淡伊伐飡 良民稟主 年十九 良夫女也

 

7월 <알담謁淡>을 이벌찬, <양민良民>을 품주로 삼았다.

 

<양민良民>은 나이 19세로 <양부良夫>의 딸이다.


 

十月 神后生帝女其炭 命副君洗之 時后怒帝多專政 命大西知逼帝 禪位於副君

大西知不敢言 帝知之 至十二月 禪之

初阿后夢 登太白山 謁王仙童抱后 食以美果 而交好 及醒 乞淑進山果如夢

乃抱而烝之生 副君至是果登大位

 

10월 신후(神后)가 왕의 딸 <기탄其炭>을 낳고,

부군에게 아기를 씻기도록 명하였다.

 

당시 후(后)가 왕이 정사를 오로지함이 많아서 화가 나서,

<대서지大西知>에게 왕을 핍박하여 부군(副君)에게 선위하도록 명하였다.

 

<대서지>가 감히 말하지 않았으나, 왕이 그것을 알고 12월에 이르러 선위하였다.

 

처음 아후(阿后)가 꿈에 태백산(太白山)에 올라 두왕(梪王)을 찾아뵈었는데,

선동(仙童)이 후를 안고 미과(美果)를 먹는 꿈을 꾸며 서로 좋아하였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걸숙乞淑>이 산에서 딴 과일을 올리는 것이 꿈과 같았다.

 

이에 <걸숙>을 안고 증(烝)하여 부군(副君){기림}을 낳았다.

 

이 때에 이르러 그 결과로 대위(大位)에 올랐다.

 

광명여왕의 명으로 유례가 아이혜의 아들인 기림에게 양위한 것이다.


'남당유고 > 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흘해(訖解)이사금기  (0) 2016.09.08
기림(基臨)이사금기  (0) 2016.09.07
미추(味鄒)이사금기  (0) 2016.09.03
첨해(沾解)이사금기  (0) 2016.09.03
조분(助賁)이사금기  (0) 2016.08.31
Posted by 띨빡